무수히 많은 밤이 뛰어올라 -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흐름출판 |
어느 날 고급스러운 고층 맨션에서 작업하던 중에 상자만 가득 쌓여 있는 3706호에 사는 노부인과 눈이 마주치고, 쇼타는 그녀로부터 이상한 초대를 받는다. 호기심에 낯선 노부인의 집을 찾아간 쇼타에게 노부인은 위험하지만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하는데, 바로 쇼타가 일하는 고층 빌딩 안쪽의 사진을 찍어와 달라는 것! 위험천만한 제안을 수락해버린 쇼타가 들여다본 높은 곳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고층 건물 유리창 닦는 우울한 청춘이 한 노부인의 요청으로 건물 내부 도촬 사진을 공유하면서 성장해 나간다는 청춘 성장기.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기 힘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끼리 무언가 공감가는 일을 하다가 이별을 겪고 성장해 나간다는건 일본 소설에서는 굉장히 뻔한 소재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작품들에서 숱하게 보아왔었지요. 이런 소재가 아직도 발표되고, 심지어 아쿠타카와 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먹힌다는 것에 놀랐어요. 유통기한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이런거야말로 일본식 감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재미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이런 감성은 익숙할 뿐더러, 과거에는 찾아 읽을 정도로 푹 빠지기도 했었으니까요.
기발한 상황과 설정이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노부인이 집 안에 빈 상자를 쌓아두는 행동이 대표적입니다. 그녀는 창 밖의 재미없는 풍경이 싫어서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기 위해 상자를 쌓아올렸습니다. 여기에 도촬한 사진을 창문처럼 붙여 실감나는 경치로 바꾸게 됩니다. 즉, 도촬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의외로 추리적인 요소가 담겨있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등장인물들이 서로에 대해, 그리고 사진 속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추리를 계속 내어 놓거든요. 노부인이 한 사진 속 여성이 독신이라고 추리하는 식으로요. '사진의 벽지가 검정 베이스의 다마스크 무늬인걸로 볼 때 그녀는 주장이 강하다. 놓여있는 가구도 제대로 된 걸로 보아 경제력이 있다. 남자들은 기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추리인데, 꼰대스럽기는 하지만 재미있지요? 교실 칠판에 적힌 '선생님, 잊지 않을테니까요. 히나코'라는 글을 경고라고 생각하는 발상도 기발했고요. 일상계 추리물로 승화시켜도 될 법한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또 이런 류의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한 디테일도 좋은 편입니다. 초반, 딸기의 가격과 맛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노부인의 경제력, 그리고 돈이 많더라도 우리는 별로 다르지 않다(?)는걸 드러내는 묘사처럼요. 고프로를 활용한 도촬에 대한 디테일도 마찬가지로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부인이 급작스럽게 떠나고, 주인공은 사진의 매력에 눈을 뜬다는 결말은 지나치게 평면적이었습니다. 여러 관계와 설정에 대한 설명도 전부 이루어지지 못해 깔끔한 느낌도 들지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마무리지었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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