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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9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 우타노 쇼고 / 이연승 : 별점 2점

D의 살인사건, 실로 무서운 것은 - 4점
우타노 쇼고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우타노 쇼고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결과물. 이런 류의 기획물은 그리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도가와 란포의 원작을 이야기와 별 관계없이 무리하게 집어넣는 등 억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에도가와 란포와 상관없는 독립된 작품으로 발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의자? 인간!>>
인기작가 스즈카는 창작 동반자였던 아키히로를 차버리고 부유한 간부급 공무원 하라구치와 결혼했다. 아키히로에게서 사람을 써서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5년 뒤, 아키히로가 문자를 보내왔다. 지난 5년간 그가 어떻게 복수를 계획하여 실행해 왔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는 스즈카의 소파 속에 들어가 있다고 말했고, 스즈카가 문자를 보내자 정말로 소파 안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인간 의자>>에서 따 온 이야기. 의자 안에 남자가 들어간다는 설정을 따왔고, 비현실적인 인간 의자 제작과 안에 들어가는 과정, 방법에 대한 디테일은 유사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원작에서 인간 의자가 변태의 집요함을 그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여기서는 복수를 위한 장치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즈카가 궁지에 몰리는 심리 묘사도 범인의 서간문으로만 이루어진 원작과의 차이점인데, 나쁘지 않았습니다. 결말로 이르는 빌드업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충분했고요.

다만 진상, 그리고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아키히로는 의자에 여벌 휴대폰을 넣어놓고 전화를 걸면 진동이 오게 했을 뿐으로 실제로 안에 들어가 있던건 스즈카의 남편 하라구치였다, 그래서 아키히로가 의자 안에 있다고 굳게 믿은 가즈키가 의자를 난도질해서 하라구치는 죽고 말았다는건데 억지스럽고 뻔했기 때문입니다. 아키히로가 "나를 죽이세요"라는 메시지를 이렇게나 장황하게 보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스마트 폰 속 여자와 여행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괴담물 (?). 현대 문명의 이기로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스마트폰'을 일종의 다른 세계(사후 세계?)와의 연결고리로 활용하고 있는건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자신이 너무 사랑해서 죽여버린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인공지능을 만들고, 인공지능을 학습시킨다는 설정도 꽤 참신했습니다.

하지만 설정을 빼면 <<어느날 갑자기>> 등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는 단순한 괴담에 불과합니다. 기승전결도 애매하고, 이야기에서 합리적인 설명도 이루어지지 않는 탓입니다. 남자마저도 사후 세계에 속한 인물이라는 결말도 어정쩡했고요. 보다 독특한 반전 정도는 나와주는게 좋았을거에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원작에 현대적인 설정을 덧붙였을 뿐, 새로움을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D의 살인 사건>>
프리랜서 포토그래퍼 (이지만 주로 흥신소 의뢰로 먹고 사는)인 '나'는 도쿄 뒷골목 거리에서 살인 사건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거리에서 친해진 초등학생 세이야와 함께였다. 피해자 노조미는 SM 플레이를 즐기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는데, 밀실에 가까왔고 접근 가능했던 인물들도 제한적이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하지만 '나'는 세이야가 범인일 것이라 추리했다. 목격자 두명의 증언 - 범인이 입은 옷을 각각 주황색과 검은색이라고 다르게 말한 - 이 근거였다. 사건 당시 세이야가 입고있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티셔츠는 주황색과 검은색 양쪽 모두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원작에서 다소 변태적인 성행위 도중 살해당한 피해자, 밀실에 가까운 현장, 범인의 옷을 서로 다르게 말하는 목격자라는 소재를 따 와서 현대적으로 재 구성한 작품.
'나'의 추리는 좋았습니다. 옆 건물과 좁게 붙어있던 창문으로 초등학생은 충분히 침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었고, 목격자의 증언이 달랐던 이유라며 제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티셔츠도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 세이야를 범인이라고 지목하는건 솔직히 무리였습니다. 동기가 설명되지 못하니까요. '나'가 제시한, 성범죄를 저지르려다가 살인까지 저질렀다는건 너무 억지스러웠습니다.
진상은 더 억지에요. HR 기기 등 가상 현실을 활용하여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다가 사망했다는건데, 가상으로 채찍질 같은 자극을 주는 기기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있다손 쳐도 사람이 죽을 정도의 충격을 줄 수는 없습니다. 안전 기준이라는게 있을테니까요. '비가시 광선' 때문에 옷이 두 가지 색깔로 보였다는 것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티셔츠만큼이나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았고요.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장비를 해체하고 숨겼다는 마사코의 행동도 말이 안됩니다. 그래봤자 SM플레이를 즐긴 흔적을 숨길 수는 없었거든요. 변태적인 성행위를 즐기다 '실수로' 죽었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살해당했다'는게 낫다고 여겼을 수는 있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 단순 변사가 살인 사건으로 확대되어 버린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혹시라도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게되면 어쩔 셈이었을까요?
게다가 세이야가 '나'에게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나'에게 아동 성 추행범이라는 누명을 씌운다는 마지막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배신감을 느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뒤의 설득력없는 추리와 결말을 덧붙이지 말고, '나'의 추리로 이야기를 끝내는게 바람직했습니다. 동기만 좀 합리적으로 만들어서요. 이 인물 구도에서 합리적인 동기를 만드는건 불가능해보입니다만.

<<오세이 등장을 읽은 남자>>
스무살 가까이 차이나는 어린 여성과 결혼 후 실직해 기둥서방처럼 얹혀사는 타로는 그 탓에 치매에 걸린 장인어른 고스케를 떠맡아 돌보게 되었다. 그게 끔찍하게 싫었던 타로는 란포의 소설 오세이 등장을 읽은 뒤, 고스케를 사고로 가장하여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소설처럼 고스케를 의류함에 넣고 질식사시킬 속셈이었다. 치매 탓에 유아 퇴행 현상을 일으키던 고스케가 했음직한 행동으로 의심을 살 이유는 없었다.
아내의 파리 출장에 맞춰 범행을 결의한 타로는 사전 조사차 직접 의류함 안에 들어갔다가 갇히고 말았다. 고스케가 별 생각없이 다른 물건들을 함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타로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서 아내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아내는 직접 구조를 요청하겠으니 기다리라고 말했다....


타로가 나이가 많은 탓에 평소에 스마트폰에 대해 무지했고, 잘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는 설정이 핵심입니다. 아내 유코가 원래 자기 것이었던 타로의 폰을 원격잠금하고, 회선도 정지시켜 통화를 못 하게 막아서 죽게 만든다는 트릭이 사용되었거든요.
이렇게 원작에 굉장히 충실한데다가, 나름의 트릭까지 사용된 점 만큼은 좋았습니다.

문제는 유코가 타로에게 품었던 살의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코가 진작부터 불륜을 저질러 왔다는 설명은 있는데, 이를 살의로 이어지게 만드는 설명은 좀 부족했어요.
치매 노인 탓에 의류함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늙은 치매 노인이 의류함 뚜껑 위에 무언가 덮어놓았다고 뚜껑을 열지 못한다? 저는 잘 와 닿지 않더라고요. 뭔가 다른 이유 - 자물쇠를 잠갔다던가 - 가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치매 노인이 평소에 무언가를 잠그는 (?) 행동을 많이 했다는 식의 설명이 덧붙여졌다면 더욱 좋았을테고요.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해서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도 원작과도 유사하고, 현대적인 설정과 트릭을 효과적으로 사용한건 분명합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치매 노인 관련된 복수극은 오가와라 히로시의 <<냉혹한 간병인>>이 아직까지는 최고네요.

<<붉은 방은 얼마나 바뀌었는가?>>
붉은 방에 모여 일탈을 즐기는 일곱 명의 남자들.
에도가와 란포의 붉은 방을 원작으로 한 연극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실제로 사건이 일어났다. '죄를 물을 수 없는 살인'을 저질러온 T역의 배우가 공포탄이 아닌 실탄에 맞은 사건이었다. 관객 중에 경찰이 있어서 곧바로 수사가 시작되었고, 관객들은 모두 중요 참고인이 되었는데....


사건도 연극의 일부로 마지막 공연에서 선보인 특별 부록이었다는 이야기.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관 투입과 수사가 지나칠 정도로 빨랐고, 이후의 과정이 모두 작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포일러를 막을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 스포일러를 이용하여 관객들에게 더 충격을 주려고 했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흥분했던 관객이 무대로 난입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결말은 영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연극으로 여긴 관객의 반응 등 볼만한 점이 없는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없는게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깔끔했을거에요. 이 결말 탓에 감점하여 별점은 2점입니다.

<<음울한 짐승의 환희>>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자의 육체만 생각하는 변태였지만, 스스로를 철저하게 통제하여 교육자로 잘 살아오고 있었다. 어느날 산책 중 이상형인 여자 유키를 알게되어, 그녀가 운영하는 북유럽풍 잡화점 락카우스의 단골이 되었다.
그리고 두달 쯤 뒤, 내가 란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걸 알게 된 유키가 도움을 청해왔다. 오에 슌데이라는 발신자가 트위터 DM으로 그녀에게 버림받았었는데, 그녀를 다시 발견하여 복수한다는 글과 에도가와 란포의 귀한 초판본, 그리고 그녀를 스토킹하는 글을 연달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짐작가는 사람이 없냐는 질문에 유키는 20년 전 사귀었던 여자 후배 가야코 이야기를 꺼냈다....


'그'라는 3인칭에서 '나'로, 다시 '그' 전환되는 시점이 급작스럽고 미묘한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작가 의도인지, 번역 오류인지 헛갈리네요.
여튼 변태인 '그'가 카메라를 설치해 유키를 협박하는 한편, 착한 단골로 위장하여 조력자 위치에 올라가지만 유키에게 정체가 드러나버리는 일련의 과정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키의 펜던트가 카메라였고, 그 때문에 '그'의 범행이 발각되는 결말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카메라를 몸에 달고다닐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키가 알고보니 트랜스젠더라서 살해했다는 일종의 반전도 신선하다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영화 <<크라잉 게임>>이 발표되었을 때 정도의 시기였다면 모르지만요. 지금은 그렇게 대단한 트릭이라고 보기는 힘들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비인간적인 사랑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마니와 가즈키를 유혹하다가 가즈키는 '시짱'이라는 피규어를 사랑한다는걸 알게 되었다. 분노가 폭발한 나는 가즈키를 속여 집에 침입한 뒤 시짱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가즈키가 자살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시신의 옷 주머니에 부서진 인형 머리가 들어 있었다고 했다.....
라는 증강현실 게임 엔딩을 접한 나는 다시 가즈키를 골라 게임을 시도했다. 그런 나를 방해한건 남편 가즈키였다. 게임에 빠진 나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가즈키와 다툼을 벌이다가 그를 살해하고 말았다.
출소 후 70세 노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조용히 살게 된 나는우연찮게 노인 스나무라 다케오에게 교도소 주문에 대해 털어놓았다. 노인은 혼자서 주문에 대해 조사한 뒤,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주문에 등장하는 단어는 모두 1990년에 방영된 TV 프로그램이었고, 주문은 방송 채널 번호를 이용하는 암호문이었다. 암호문은 특정 지역을 의미했고, 노인은 그 곳에 무언가를 숨겼으며 그건 1990년에 일어났던 흉악한 강도사건의 절도품이라고 추리했다.
하지만 방문한 장소는 이미 신축 빌라가 들어서 있었다....


기괴한 사이버 애정극에서 시작해서 암호 해독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은 짤막한 쇼트쇼트 블랙 코미디로 이어지는 독특한 작품. 수록작 중 유일하게 원작을 접하지 않은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호 해독은 재미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구전되는 '행운을 불러오는 주문'이 90년대 당시 TV 프로그램의 명칭이었다는 아이디어도 좋고, 이걸 어떻게 글자로 치환하는지?에 대한 연구와 노력이 잘 그려지고 있거든요. 노인은 시간이 남아돌기 때문에 끈기있게 도전하여 풀어낼 수 있었다는 설정도 좋고요. 암호문을 풀어낸 뒤, 암호문이 가리키는 장소에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추리역시 합리적이었습니다. 당시 신문 기사를 조사해서 밝혀내는데 아주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야기가 따로 논다는 겁니다. 특히 화자인 유리나가 겪은 게임 속 사건이 그러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암호 해독 이야기와 별로 관계는 없어요. 유리나가 감옥에 간 이유인 남편 살해 동기에 불과하거든요. 이렇게까지 펼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란포의 원작을 너무 의식한 것 같아요. '비인간적인 사랑'을 이렇게 무리하게 삽입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차라리 두 개로 분리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그만큼 두 이야기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보물이라 생각했던 증권이 버블 지나면서 파산한 회사라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는 결말도 뜬금없었을 뿐더러,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결말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다른 설정은 다 없애고, 나이 많은 노인과 함께 사는 손녀딸이 교도소 자원 봉사를 갔다가 주문을 들었다는 정도로 풀어나가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상한 설정과 앞과 뒤의 곁가지 이야기는 불필요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남편을 살해해서 복역 후 출소한 유리나가 오갈데 없어서 나이 많은 노인과 결혼했다는 설정은 의아했습니다. 아무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라도, 남편 살인범과 함께 살고 싶을까요? 젊은 여자가 필요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일본에서는 흔히 있는 상황인지 궁금해집니다.

2017/11/19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 엘러리 퀸 / 박진세 : 별점 1.5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박진세 옮김/북스피어

북스피어의 박람강기 프로젝트 일곱 번째 책입니다. 박람강기(博覽强記)는 국어사전 풀이로는 "여러 가지의 책을 널리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함." 이라는 뜻으로, 북스피어에서는 장르 소설이 아니라 소설 외의 다른 책들을 이러한 이름으로 펴내고 있지요. 저도 이 중에서 작가의 수입, 지출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인 "작가의 수지", 서간문집인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기행문인 "미야베 미유키 에도 산책"을 읽고 리뷰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이 책 역시 박람강기 레이블로 출간된 책답게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엘러리 퀸이 추리 소설을 연대별로 구분하여 각 연대별로 걸작을 꼽은, 추리 소설의 큰 역사와 대표작을 소개하는 일종의 가이드 북이자 서지 정보 책입니다.

그러나 제목만 다를 뿐, 추리 소설 애호가들에게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 "퀸의 정원"의 단순 번역본에 불과해서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제가 이전에 관련해서 글을 남긴 적이 있을 정도로 이미 이런 저런 곳에서 공개되어 있는 내용이거든요.

물론 저는 일본어 사이트로 접했고, 영어나 일본어를 못하는 독자분들께는 유용한 정보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의미가 있으려면 제가 링크한 일본 사이트처럼 국내에 번역되었는지, 어떤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지, 간략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대충 훝어보니 약 30권 정도만 국내 소개된 듯 한데 간단한 수고 만으로도 이 정도 정보는 제공해 줄 수 있었을 거에요.
한 마디로 돈 받고 파는 책이 공짜 일본 사이트보다 담고 있는 정보가 부실합니다. 이 정도 수고도 하지 않고 그냥 책을 출간한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지금 이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희귀한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엘러리 퀸의 책 자랑 정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나마 내용이라도 재미있다면 괜찮겠지만 선정된 125 편의 책 소개 대부분은 작가와 탐정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제일 궁금한 내용은 정작 알려주지 않으니 뭘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스포일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완벽하게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이래서야 이게 책 가이드로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이 책이 발표된 해는 1969년 증보판 기준으로 보아도 이미 50년 전이며, 선정 기준에 "역사적인 중요성"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게다가 "단편" 이어야 한다는 기묘한 기준도 있기 때문에(아마도 잡지 EQMM의 홍보를 겸한 듯 싶어요) 국내에 소개되었다 하더라도 재미나 완성도 측면에서는 부족한게 많습니다. 제가 읽었던 잘레스키(자레스키) 왕자 시리즈 중 한편인 "오번 가문의 비극"이 대표적이지요. 도저히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었거든요. "아마추어 괴도"(래플스 시리즈)도 마찬가지고요. "뜀뛰는 개구리" 처럼 그 어떤 기준을 들이 대어도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운 작품도 선정되어 있는 것도 문제고요. 그래도 이 작품은 재미라도 있으니 좀 낫긴 하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로서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 번역되었다는 점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유들에 더해 번역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고요. 추리 소설 명작 리스트가 궁금하시다면 이런 것 같은, 인터넷에 여러가지 공개된 자료를 참고하시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2017/06/10

일곱 가지 이야기 - 가노 도모코 / 박정임 : 별점 2.5점

일곱 가지 이야기 - 6점 가노 도모코 지음, 박정임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열아홉살 대학생 이리에 고마코는 "일곱 가지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흠뻑 빠져들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작가 사에키 아야노에게 팬레터를 써서 보냈는데, 마침 자신 주변에서 일어났던 기묘한 사건을 함께 곁들였다. 사에키 아야노는 직접 추리한 결과를 고마코에게 답장으로 보내주는데...

일상계 미스터리로 유명한 가노 도모코단편집입니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은 그동안 몇 권 읽어보았는데 평균적으로 별로였습니다. 이야기도 재미없고 추리적으로도 그닥이었던 탓입니다. 그래서 이 책도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었지요.

하지만 생각보다는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구성이 독특해요. 제목 그대로 "일곱 가지 이야기"라는 가공의 책에 수록된 이야기 한 개와 주인공 고마코가 만나는 일상계 사건 하나가 조합되는 식인데, 이렇게 엮이는 작품은 거의 처음 본 것 같거든요. 물론 가공의 이야기와 본편이 엮이는 작품이야 제법 있지만, "일곱 가지 이야기" 수록작에 대해 고마코가 어떤 식으로든 설명을 한 후 실제 일상 속에서 그 이야기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다는 전개 방식은 독특합니다. 가공의 소설 "일곱 가지 이야기"도 일상계 추리물이고, 고마코가 접하는 사건 역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는, 그야말로 더블 일상계라는 점도 인상적이고요.
고마코가 탐정역인 사에키 아야노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의 추리를 답장으로 받는다는 일종의 '서간문 추리소설' 이라는 점도 역시 독특한 점입니다.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일단 지나치게 작위적인 이야기들이 제법 많습니다. 게다가 이게 과연 추리물인가 싶을 정도로 추리적으로는 많이 부족해요. 아무리 일상계라 하더라도 요네자와 호노부 등 다른 일상계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민망하다 싶은 수준의 이야기가 많은 탓입니다. 7편의 단편 속 수수께끼가 2개씩이니 모두 14개의 일상계 추리물이 담겨있는데, 추리적으로 깔끔하고 괜찮다 싶은건 한 네 편, 그러니까 30%도 안될 정도입니다.
이럴 바에야 억지로 두 작품을 연결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평범한 대학생 고마코와 동네 오빠 (?) 세오 컴비의 일상계 추리물, 그리고 하야테와 아야메 아가씨의 전원풍 일상계 추리물 두 편으로 나누어 발표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있고 독특한 일상계 작품이지만 추리적으로는 많이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각 단편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수박 주스의 눈물"

"일곱 가지 이야기"속 단편은 "수박 귀신"으로, 하야테 소년이 밤새 수박밭을 지키지만 결국 수박이 도난당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수박 귀신"은 이야기 시작으로 나쁘지 않지만, 본편에서 '수박 주스'라는 소재로 "수박 귀신"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여러모로 무리였습니다. 고마코의 친구 미아이네 집에서 키우는 개와 혈흔을 연결시키는 과정도 너무 작위적으로 짜여진 티가 나고요. 좀 긴 이야기였다면 복선처럼 잘 숨길 수도 있었겠지만 단편이다보니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서가 드러나더라고요. 아이가 푸딩을 달라는 말로 어머니가 집에 없다고 추리하는 것 역시 비약이 심한 등, 이래저래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모야이의 쥐" 

"일곱 가지 이야기"속 단편은 "모야이의 쥐"인데 별로였습니다. 금으로 만든 쥐가 가짜였다는 것은 그다지 신선한 내용은 아니었거든요. 독자가 추리할만한 정보도 부족하고요. 

그러나 본편 이야기는 빼어납니다. 독특한 문양 중심의 추상화가 위, 아래가 뒤집혀 전시된다는 진상이 아주 그럴듯했기 때문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한 장의 사진"

"일곱 가지 이야기"속 단편은 "파란 하늘"로 하야테와 친구들의 파란색 그림물감이 없어진 사건에 대한 진상을, 본편 이야기에서는 고마코의 어린 시절 사진을 훔쳐간 친구가 그것을 돌려준 이유가 무엇인지를 추리합니다. 

두 편 모두 일상계다운 아주 좋은 이야기였어요. 무엇보다도 가족간의 사랑과 추억을 다루고 있는 따뜻한 이야기라 더욱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친구가 사진에 찍혔다는 작위적인 우연은 옥의 티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수록작 중 최고로 별점은 3점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일곱 가지 이야기"속 단편은 "하늘색 나비"로 하야테와 친구들의 열광을 불러왔던 한 친구의 대형 파란색 나비 표본이 사실은 가짜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본편은 기묘한 노부인의 행동을 다루고 있고요.

그런데 두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는 않으며, 노부인이 꽃을 심으려 한다는 것은 쉽게 추리할 수 있는 등 그다지 건질 건 없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1만 2천년 전의 직녀성" 

더위를 피해 천체 투영관을 찾아간 고마코가 전편에서 만났던 남자 세오를 다시 만나는 이야기가 "일곱 가지 이야기" 속 "대숲이 불탄다"라는 이야기와 함께 전개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 간 오갔던 연애 편지를 찾는 "대숲이 불탄다"는 솔직히 추리물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 근처를 찾아보는게 당연하니까요.
본편도 추리적으로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장난감 공룡 애드벌룬이 한밤중에 백화점 옥상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유치원으로 이동한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인데 당연히 공중에 뜨게 만들어서 날려보낸 것이지요. 의외성이 부족하며 추리의 여지도 없어요. 얼음으로 눌러 놓았다는 등의 디테일은 있지만 대단치는 않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민들레"

친구 후미의 부탁으로 초등학교 여름 캠프에 자원 봉사자로 참여하게 된 고마코가 특이한 아이 마유키를 전담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마유키는 모든 꽃, 심지어 민들레까지 하얀 색으로 칠해버리는 특이한 아이라는 설정이지요. "일곱 가지 이야기"에서는 하야테 아버지 어린 시절 친구가 빌려간 보물 상자와 푸른 수국이 등장하는 내용의 "내일 피는 꽃"이 함께 엮이고요. 

그러나 알루미늄에 반응하여 수국이 파랗게 변하는 것은 "푸른 제라늄" 등에서 익히 많이 사용되었던 소재라서 시시합니다. 추리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수준이고요. 본편의 핵심 수수께끼는 '하얀 민들레'의 정체에 대한 것으로,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실제로 있다는 것이 진상이므로 이 역시 추리라고 할 게 없네요. 가면 갈 수록 점점 추리물에서 멀어져 가는 듯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일곱 가지 이야기"

"일곱 가지 이야기"에서는 고양이 절에서 얻어온 새끼 고양이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으로 모성애를 강조한 이야기지만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본편은 마유키를 매개로 사에키 아야노, 일러스트레이터 아소씨 등 관계자 모두가 만나는 대단원이고요. 

마지막 이야기로는 괜찮습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한 번 정리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유키가 어머니의 양육권 포기를 단념하게 만들기 위한 깜찍한 실종 자작극이 핵심으로 추리의 요소는 거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6/12/18

해가 저문 이후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해가 저문 이후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최신 단편집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이후 6년만이라고 하네요. 모두 13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 작품 수 부터가 남다른데, 내용도 확실히 최신 작품답습니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실히 궤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작품은 거의 없고, 심리나 특정 상황에 대한 묘사에 기대는 작품이 대부분이거든요. 심지어 특정 몇몇 작품은 아예 공포라는 감정보다는 그냥 인간에 대한 묘사, 환상에 대한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기묘한 '강박'을 다루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 해요. '강박'을 주제로 한 앤솔로지 수록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전부터도 느낀 것이지만 음악을 전면에 드러내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작품이 많다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N"에서 환자 N이 괴물을 보고 달아나면서 차에서 라디오를 켰을 때 록 음악이 터져나오는 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더 후의 노래가 끝나고 흘러나온건 도어스의 "세상의 이면으로 건너오라"였는데 참으로 절묘했어요. 오싹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직접적인 공포가 드러난 작품을 좋아하는 탓에, 이런 변화가 좋게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작가의 연륜이 쌓이고, 내면의 성찰이 깊어졌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이런 류의 작품을 스티븐 킹이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탓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사후세계를 환상적으로 묘사한 "윌라", 홀로 헬스 자전거 운동을 하다가 강박적인 상황에 빠져든다는 "헬스 자전거", 9.11 테러 때 회사를 땡땡이 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스콧에게 죽은 동료들을 상징하는 물건이 갑자기 찾아온다는 "그들이 남긴 것들" 입니다. 사후세계초자연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단지 소재일 뿐, 내용과 전개는 인간 관계나 강박적인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 관계가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고, 딱히 반전도 존재하지 않으며, 기묘한 현상에 대한 설명도 없고, 심지어 무섭지도 않아서 지루하기만 했다는 겁니다. 스티븐 킹만의 문체와 묘사로 환상 세계를 그린 묘사는 나쁘지 않지만 이 역시 새롭다기보다는 변주에 불과해 보이기도 하고요.

이는 남편이 꾼 꿈을 통해 공포가 실체화 된다는 "하비의 꿈"과 비행기 사고로 죽은 남편의 전화를 받는다는 "뉴욕 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핵폭탄이 투하된 순간을 그린 초단편 "졸업식 오후" 역시나 지극히 익숙한 소재임에는 분명하고요.

다행히 과연 스티븐 킹이구나! 싶은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2.5점. 아래 소개해드릴 4편이 바로 그것입니다. 짤막하게 소개해 드리며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진저브래드 걸"

에이미는 아이가 죽은 후 강박적인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웃에 사는 연쇄 살인마 피커링의 살인 현장을 목격했고, 그에게 쫓기게 되는데...

피커링에게 사로잡힌 에이미가 살아남기 위해 탈출하는 과정의 서스펜스가 어마무시한 작품입니다. 묘사가 장난이 아닌 덕분입니다. 아이가 죽은 후 슬픔을 잊기 위해 에이미가 달리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함으로써, 이후 탈출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최후의 순간에 피커링이 수영을 못 한다는 설정을 갑자기 드러낸 것은 약간 반칙 같고, 어떻게보면 조금 뻔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강박증과 추격전이라는 두 개의 테마 만큼은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N"

저명한 정신과 의사 조니 본세인트가 자살하고, 그가 남긴 원고는 여동생에 의해 오랜 친구 찰리 킨에게 보내졌다.
원고는 1년 전, 조니에게 N.이라는 강박증 환자가 찾아온 날부터 시작되었다. N.은 충동에 의해 찾아간 한 장소에서 태고의 무시무시한 존재의 봉인이 풀리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막기 위한 사명을 갖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엄청난 강박증에 시달렸던 환자였다...

대부분 1인칭으로 쓰여진 의사의 원고와 서간문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고대로부터 유래된 절대자, 봉인, 심연, 심지어 크쑨이라는 이름까지는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케하지만, 환자 N.이 이야기하는 그의 과거, 즉 그가 애커먼 들판에서 '크쑨'이 처음 나오려는 것을 발견한 후 그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의 설득력이 실로 대단하며, 이 과정을 모든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배열하려고 하는 강박증과 잘 연결시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또 유일한 증거는 N.의 증언밖에 없지만 그것을 단계별로 정신과 의사가 기록했다는 식으로 설득력을 보장함은 물론, 일종의 주간 드라마 같은 방식(환자가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므로) 독자의 흥미를 지속시키는 전개 방식도 아주 빼어났어요.
이에 설득당한 조니 본세인트, 그리고 그의 여동생 셰리아가 자살하고 이 사명을 찰리 킨이 받게 된다는 "링" 스타일의 저주의 연쇄 역시 볼만했고요.

그러나 N.이 이야기한대로 이 사명을 가진 자가 그냥 죽어버리면 '크쑨'의 봉인이 풀릴리 없다는 법칙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던가, 여러명이 크쑨을 바라보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는 등 디테일은 조금 아쉽습니다. 혼자서 그렇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누군가와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리고 "링" 수준 만큼은 아니더라도 뭔가 연결고리, 법칙을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예를 들면 N.이 조니 본세인트를 찾아온 이유와 조니의 동생으로 이어지는 관계에 이름의 이니셜이 이어진다던가 하는 식으로 법칙을 넣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래도 러브크래프트의 진전을 이어받기도 했고,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하는 재미와 공포에 있어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벙어리"

영업사원 모네트는 성당에서의 고해 성사에서, 영업 출장 중 태웠던 벙어리 히치하이커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모네트는 히치하이커에게 아내 바브가 직장에서 거액을 횡령한 뒤, '카우보이 밥'이라고 부르는 애인과 흥청망청 쓴 후 도망가 버렸다고 했는데...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 벙어리 스탠리 두세트

그게 누구건 선의를 베풀면 보답을 받는다는 전래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고해성사를 하면서 아내 바브와 그에 얽힌 범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모네트의 입담도 볼거리고요. 보답이 불륜과 범죄를 저지른 아내와 정부를 때려 죽이는 거라는건 스티븐 킹 다왔습니다. 실제 뉴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창작 비화 역시 인상적이었고요.

결말이 좀 뻔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주 비좁은 것"

이웃 그룬왈드와 땅, 그리고 애견의 죽음에 얽힌 송사에 휘말린 주식 거래인 커티스는 어느 날 그룬왈드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모든 요구를 수용할테니 이 모든 것을 끝내자는 제안이었다. 이후 커티스는 홀로 그룬왈드를 만나러 폐허처럼 버려진 공사 현장으로 찾아갔다가 권총으로 협박당한 후, 공사 현장 화장실에 갖히고 말았다...

묘사력으로는 수록작 중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거장의 글 솜씨가 제대로 발휘되어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별도 없는 한밤에"의 첫번째 작품 "1922"<1922>가 떠오를 정도로 읽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든요. "1922"<1922>가 생지옥, 그리고 쥐에 대한 묘사로 독자를 미치게 만든다면, 이 작품은 화장실과 오물에 대한 묘사가읽는게 힘들 정도로 생생합니다.

또 화장실에서 커티스가 죽게되더라도 일종의 사고사로 보이게 된다는 정황 묘사도 그럴싸 하며, 그룬왈드가 사업에 실패한 뒤 아내가 도망갔고, 심지어 암까지 걸린걸 커티스 탓으로 돌리는 범행 동기 역시 설득력이 높습니다. 특히나 범행 방법은 완전 범죄를 그린 범죄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잘 짜여져 있습니다.
아울러 화장실을 탈출하기 위한 커티스의 노력도 흥미진진합니다. 커티스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 애견 벳시의 인식표 덕분이라는 소소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딱 한가지, 커티스가 탈출 이후 보여준 행동과 그룬왈드의 자살은 석연치 않습니다. 특히 그룬왈드가 어차피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면 커티스를 다시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닐텐데, 왜 포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 같으면 자살하기 전에 커티스에게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별점은 3.5점입니다. 두번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악취미이긴 한데 재미만큼은 명불허전입니다.

2014/12/01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 레이먼드 챈들러 / 안현주 : 별점 3점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 6점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북스피어

레이먼드 챈들러의 다양한 편지들을 주제별로 모아놓은 서간문집입니다. 창작관과 인생관은 물론 헐리우드에서의 생활, 고양이, 아내와의 사별과 그녀에 대한 사랑 같은 일상사와 농담들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다양한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창작론, 창작관에 대해 쓴 편지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저도 작가 지망생이기 때문인데,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입니다.

  • 챈들러 스타일로 글을 쓰는 방법. 쓸 수 있을 때는 쓰고, 쓸 수 없을 때는 쓰지 않는다. 전업 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꼭 글을 써야 할 필요는 없고, 내키지 않으면 굳이 애쓰지도 말아야 한다. 다만 다른 어떤 일도 하면 안 된다. 글을 쓰거나 아니면 아무 일도 하지 말 것. 아주 간단한 두 가지 규칙. 첫째, 글을 안 써도 된다. 둘째, 대신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
  • 작가란 몹시 고된 직업이다.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다. 글로 먹고살 가능성은 아주 낮다.
  • 창작 교육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미 출간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알아낼 수 없는 건 하나도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도움이 된다는 건 인정하고 때로는 필수적이기도 하나, 그걸 위해 돈을 내야 한다면 대체로 수상쩍은 것이다.
  • 나도 그저 그런 추리소설이 너무 많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엄밀히 보면 모든 종류의 책들이 다 그저 그렇다.
  • 내가 만난 어떤 추리소설가도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좀 더 잘 쓰고 싶어할 뿐.

다른 작가와 작품을 평가한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임스 케인에 대해 '문학계의 쓰레기', '매춘부의 집 같다'라고까지 엄청나게 비하하는게 눈에 띕니다. 선정적이고 날것의 문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게까지 비판할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중배상"의 각본을 쓴 것이 몹쓸 경험이었던 걸까요? 또 편집자에게 쓴 이러한 돌직구 평가 편지 뒤에, 제임스 케인에게 직접 쓴 편지가 이어지는 책의 구성도 재미있었습니다. 뒷담화하다가 본인과 대면한 술자리 느낌이에요. 편지의 내용은 평범했습니다만.

로스 맥도널드의 '녹이 여드름처럼 돋아있다' 같은 문체에 거부감을 느끼고, 허세라고 여기는 시각도 특이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서정적 문체가 맥도널드의 작품을 다른 하드보일드와 구분짓는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요. 아무래도 챈들러는 정직한 직구 승부로 일관해서 그랬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임스 해들리 체이스에 대해서도 싸구려 소설이라고 매도하는데, 이는 자신과 대실 해밋의 문장을 표절한 것에 대한 정당한 비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반대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건 서머싯 몸과 오스틴 프리먼, 피츠제럴드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호평을 아끼지 않더군요. 피츠제럴드는 그럴 줄 알았습니다만 펄프 픽션의 제왕 얼 스탠리 가드너와 페리 메이슨 시리즈를 엄청나게 높이 평가하고 있는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문학적으로나 내용적으로 그다지 높이 평가할 만한 작품들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말이지요.

그 외에도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이 몇 가지 있습니다. 제가 아주 재미있게 본 히치콕의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시나리오 초고를 챈들러가 썼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챈들러의 막말 때문에 히치콕이 그를 해고했고, 초고도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고 하네요. 초고 그대로 영화가 만들어졌더라면, 범죄소설과 범죄영화의 거장이 손잡은 진정한 콜라보를 볼 수 있었을텐데 아쉽습니다. 말조심 좀 하지... 면전에서 대놓고 욕을 한 뒤, 편지로 구구절절 자기 해명을 늘어놓는 모습은 썩 보기 좋지 않았고요.

"빅슬립" 시나리오 작업 중 언급된 최고의 멋진 장면에 대한 소개도 기억에 남습니다. 보가트와 카멘이 가이거의 집에 갇힌 뒤의 이야기인데, 덕분에 "빅슬립" 영화를 다시 봐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습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편지에 언급된 대로라면 정말 멋진 장면이었을 것 같거든요.

하여튼,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인물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고, 당대 헐리우드 및 추리문학계에 대한 여러 가지 지식과 재미도 얻을 수 있는 독특한 서간문집입니다. 가격 대비 분량이 짧다는 점에서 감점하지만, 하드보일드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임은 분명합니다. 그나저나... 국내에서는 하드보일드의 거장이라서가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팔린다니 괜히 서글퍼지네요.

2012/06/10

혼진 살인사건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2점

혼진 살인사건 - 4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혼진 살인사건"은 이미 예전에 동서 추리문고로 읽었지만, 이번에 시공사에서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어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세 편의 중,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된 작품은 중편인 "혼진 살인사건"과 단편인 "왜 도르레 우물은 삐걱거리나", 중단편 길이의 "흑묘정 사건"입니다.

수록작의 전체 평균 별점은 2점. 표제작 외 다른 두 작품이 점수를 좀 깎아먹은 탓입니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보다는 예전 동서 추리문고의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더 좋았습니다. 이쪽은 별점 3점은 충분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나만의 요코미조 세이시 순위"에 추가한다면, "혼진 살인사건"은 공동 2위이고 이 책 전체적으로 따지면 7위입니다. 긴다이치 시리즈 팬분들께는 추천드리지만 그냥 추리 애호가분들께는 호불호가 많이 갈릴 수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수록작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혼진 살인사건"

이 작품은 기념할 만한 긴다이치 시리즈 첫 작품으로 시리즈의 전형적 특징 - 시골 마을 지역 유지 가문에 얽힌 원한 관계와 오싹한 살인사건, 그것을 해결하는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밀실 살인사건이 펼쳐지며, 공들인 트릭이 등장하는 본격 추리소설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정함에 있어 큰 문제가 있긴 합니다. 작품 속 공개된 정보만 가지고 트릭을 독자가 풀어내기는 거의 불가능한 탓입니다.

그래도 기념비적인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역사적 의미도 확실하며, 지금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전해줍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왜 도르레 우물은 삐걱거리나"

전형적인 긴다이치 시리즈다운 소품. 긴다이치는 아주 잠깐 언급될 뿐 화자는 혼이덴 가문의 병약한 막내딸 쓰루요로, 그녀의 1인칭 시점 서간문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러나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스기 죽음의 진상과 에마를 숨긴 이유를 쓰루요에게 숨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은 탓입니다. 게다가 오노 가문의 쇼지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수했다는 결말부는 어이가 없더군요. 강도, 퍽치기 전과가 있는 인간이 약간의 호의 때문에 살인죄까지 뒤집어써 준다는 게 말이 되나요? 협박을 하면 했지...
편지로 진행되는 전개 역시도 몇몇 단락을 제외하면 그냥 소설이라 해도 될 정도로 편지 특성을 살리지 못했고요.

한마디로 쓰루요의 쓸데없는 오해가 내용의 대부분인 작품으로, 일종의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은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이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흑묘정 사건"

추리소설가 Y가 긴다이치 코스케와 함께 밀실 살인, 1인 2역, 얼굴 없는 시체라는 전통적 추리소설 트릭에 대한 견해를 나눈 뒤, 얼굴 없는 시체에 관련된 사건을 실제로 긴다이치가 해결하고 알려준다는 내용입니다.

얼굴 없는 시체 트릭은 전형적인 피해자·가해자 바꿔치기 트릭에서 한 발자국 정도 더 나아간, 나름 고심한 트릭이 펼쳐집니다. 특히 장지문과 다다미에 묻은 혈흔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라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뜬금없이 오노 지요코라는 여인이 등장해서 딱 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사라진다던가, 그냥 봐도 수상한 변장과 뒤이은 밀회 쇼를 그냥 성격 문제였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는 부분은 심하게 거슬렸습니다. 트릭 자체도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았고요. 아유코와 시게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너무 뻔했어요. 그 외에도 닛초가 공범이 되는 동기와 이유가 밝혀지지 않는 것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도 긴다이치 코스케의 개그스러운 만담과 과거사가 잠깐이나마 펼쳐져 팬으로서는 즐길 거리가 있고, 본격 추리 소설로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았다는게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11/08/15

탐정 피트 모란 - 퍼시벌 와일드 / 정태원 : 별점 1.5점

탐정 피트 모란 - 4점
퍼시벌 와일드 지음, 정태원 옮김/해문출판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직업은 운전수지만 통신으로 탐정 교육을 받으며 나름대로 좌충우돌 활약을 펼치는 피트 모란을 주인공으로 한 유머 단편집입니다. 통신 교육을 받는 과정을 제목으로 하는 7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도 선정된, 초창기 황금기 시절 단편의 강자 퍼시벌 와일드의 작품이라 기대가 컸습니다. 이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클로버의 악당들"도 그렇고, 여러 커뮤니티에서의 평도 좋았으니까요.

그러나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좋은 유머 소설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유머도 철자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멍청한 주인공의 의도하지 않은 행동에서 벌어지는 극적인 결과라는 패턴이 대부분이라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아 보였습니다. "핑크 팬더"나 "겟 스마트", "형사 가제트", "미스터 빈" 같은 작품과도 비슷한 설정이라 차별화된 요소를 찾기 어려웠고요. 오히려 억지스러운 부분도 많았습니다.

책 뒷부분의 소개처럼 후반부로 갈수록 추리소설 형식을 띠긴 하지만, 오히려 이야기가 더 이상해집니다. 초반에는 멍청하지만 운이 좋은 피트 모란이 사건을 해결하는 구조인데, 후반부로 가면 피트 모란은 그저 멍청하기만 하고 사건은 다른 사람들이 해결합니다. 이 변화로 인해 단편집의 성격이 모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추리소설을 표방했더라도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요. 차라리 "훈련을 쌓은 탐정이라면 99명은 그대로 지나치게 하더라도 100명째의 남자에게 수갑을 채우는 일쯤은 문제없지" 같은 피트 모란의 대사를 강조하며 초지일관 웃겨주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통신으로 탐정 교육을 받는다는 독특한 설정과 멍청한 탐정이라는 콘셉트는 흥미롭지만,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태원 선생님의 유작이라는 점은 안타깝지만, 이 작가의 작품을 읽고 싶다면 똑같이 단편집이면서 유머러스하면서도 추리소설 형식을 보다 제대로 갖춘 "클로버의 악당들"을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미행"

통신 교육 강좌로 미행을 학습한 뒤, 마을에서 실습하다가 우연히 마리화나 밀매 조직을 검거하는 데 일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인 피트 모란의 캐릭터와 서간문 형식의 전개, 그리고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뜻밖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내용이 모두 잘 표현된 대표 단편입니다. 유머러스한 전개가 적절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추리법"

사람의 특징을 보고 직업을 간파하는 전통적인 추리법이 주요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패러디적인 요소가 있지만, 오히려 추리법 자체는 정확했다는 결말이 다소 애매했습니다. 유머는 좋지만, 억지스러운 전개가 아쉬웠습니다.

"방화범"

피트 모란의 통신 강좌 선생인 주임 경감의 비교적 정확한 조언이 인상적이긴 했지만, 역시나 억지스러운 전개가 거슬렸습니다. 당구가 문제였다면 당구대를 치우는 게 더 싸고, 빠르고 쉬웠을 텐데요...

"호텔 탐정"

피트 모란이 호텔 탐정으로 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헐리우드 코믹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딱히 인상적이지도, 그렇다고 빠지는 부분도 없는 소품이었습니다.

"협박장"

협박장 사건을 의뢰받은 피트 모란이 마을 목사의 사악한 계획(?)에 걸려든다는 이야기로, 이 작품부터 피트 모란이 실패하기 시작합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 헌터"

파티에서 분실된 다이아몬드를 찾으려는 피트 모란의 활약이 눈부신 단편으로, 수많은 고전 단편물을 패러디하여 인용한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용된 작가는 코난 도일, 에드거 윌리스, 길버트 체스터튼,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즈 등으로, 피트 모란의 활약과 맞물려 상당한 웃음을 선사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깔끔한, 이 단편집의 베스트라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추리의 주역이 피트 모란이 아니라 하녀 마릴린이라는 점이 문제겠죠.

"지문 전문가"

'주임 경감'이 일선에서 활약하며 단편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다소 어이없습니다. 지문 채취로 범죄 용의자를 잡아 한몫 보려는 피트 모란의 계획부터가 말이 안 됩니다. 지문을 채취한다고 해도 그것을 검증할 방법 자체가 없으니까요.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이제는 힘이 많이 딸리는 느낌이랄까? 이 시리즈도 여기까지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게 만듭니다.

2010/03/17

도시전설 세피아 - 슈카와 미나토 / 이규원 : 별점 2.5점

도시전설 세피아 - 6점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노블마인

제가 일본 추리 - 호러 단편집을 워낙 좋아라하기 때문에 진작부터 관심이 있던 단편집입니다. 일본에서는 TV용으로 영상화되기도 했었고요. 하지만 별다른 입소문도 없고, 커뮤니티나 추리, 호러 애호가들 사이에서 언급조차 되지않은 탓에 구입해 읽을 생각까지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온 뒤 찾아간 집근처 산본 중앙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기에 바로 대여하여 읽어보게 되었네요.

총 5편의 호러 취향 단편이 실려있는데, 기이한 변태들의 이야기가 많은 전형적인 일본식 호러, 스릴러 단편들입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을 받았다는 것이 허명은 아닐 정도로 설정이 참신한 작품도 있고, 재미와 반전도 잘 갖추고 있는 편입니다. 독자를 몰입시키는 맛도 괜찮고요. 

그러나 이러한 재미와 설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야기 전개에서 작위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건 크게 거슬립니다. 앞부분 수록작들은 상대적으로 괜찮은데, 뒤로 갈수록 이러한 단점이 두드러지는데, 적절한 수위를 조절이 필요했습니다. 

전체적으로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앞부분 수록작들만 놓고 본다면 3점은 충분한데, 뒤로 갈수록 힘이 딸리기에 감점했습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올빼미 사내"를 꼽습니다.

"올빼미 사내"

도시전설에 매료되어 스스로 전설이 되고싶어한 주인공이 자칭 올빼미사내로 변장하고 나타나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를 1인칭 서간문 형태로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변태적인 상상력이 실제 범죄로 발전한다는 이야기는 작중에서 주인공이 언급하는 그의 멘토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과 유사해서 참신한 맛은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전형적인 설정이니까요. 그러나 괴담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인터넷을 활용하는 등의 요소가 곁들여져 설득력을 확보하는 점,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전설의 구체화를 위해 변장을 하고 벌이는 마지막 범죄가 예상하지 못한 반전으로 이어지는 결말이 아주 괜찮았습니다. 작위적인 내용은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어제의 공원"

절친 마치의 사고사를 알게된 초등학생 엔도가 우연히 자신이 사건 직전의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뒤 마치를 구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는 타임슬립SF입니다만... SF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일상적이고 타임슬립의 원인이나 이유가 해명되지 않기에 판타지로 보이기도 합니다. 

소소한 이야기인데 사건을 막으려 노력할 때마다 더 큰 사건이 벌어진다는 설정이 그간의 타임슬립과 타임 패러독스물을 재치있게 피해가는 참신함이 돋보여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작위적인 반전이 등장한다는 것이 옥의 티이긴 한데 역시나 별점 3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영상화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덧붙이자면 이러한 작위적 반전보다는 차라리 성인이 된 엔도가 다시 타임슬립하게 되어 마치의 사고의 원인이 된다는 결말이 어떨까 싶긴 한데, 이것도 작위적이었을까요?

"아이스맨"

25년전 요양차 내려간 외할아버지 댁에서 냉동된 갓파 흥행사와 함께 알 수 없는 사건에 흽쓸렸던 가츠키의 이야기인데, 25년전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합니다. 흥행사가 선보이는 얼음속의 정체불명 갓파 시신, 갓파 흥행사의 어리지만 영악하고 속을 알 수없는 딸 논코, 어마어마한 체구의 갓파 흥행사 등 등장인물도 개성이 넘칠 뿐 아니라 사건의 전개과정이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25년 뒤의 현재 시점에서의 결말이 너무 시시합니다. 뻔할뿐더러 밝혀지는 것도 없고 주인공의 기묘한 심리상태 역시 설득력이 전무한 탓입니다. 계속 언급하는 이 단편집 전체의 문제이지만 작위적인 결말이 특히나 별로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과거 시점의 분위기로 계속 달려주었더라면 걸작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쉽습니다.

"사자연" 

제목 그대로 죽은 사람과의 인연을 다루는 심리 스릴러물입니다. 여류화가 가나에 린코가 인터뷰하는 형식의 일인칭 소설로 그녀가 푹 빠졌던 기미히코라는 자살한 청년과 그녀와 똑같이 기미히코에게 매료된 시노부라는 두명의 여성의 이야기로 광기어린 집착과 그에 따르는 파멸을 차분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고 분위기 있었던 기미히코 이야기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막판에 길을 잘못들어도 유분수지 난데없는 지박령 이야기로 끝맺어서 도저히 높은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작품 역시 기미히코 이야기로만 잘 마무리했더라면 4점은 충분했습니다.

"월석"

자신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 마네킹을 다룬 소품으로 호러라기보다는 심리 썰렁 드라마입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야기의 전개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하고 좀 두서가 없어 보이며 속시원히 해결되는 것이 없다는 차이점이 있는데, 작위적이지 않아서 이야기가 담백하고 깔끔합니다. 일종의 정신적 성장과 강함을 보여주는 마무리도 괜찮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09/11/01

고백 - 미나토 가나에 / 김선영 : 별점 3점

고백 - 6점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비채

자신이 근무하던 학교에서 사고로 딸을 잃은 교사가 봄방학을 맞아 마지막 조회에서 학생들 앞에서 충격적 사실을 밝히기 시작한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반에 있습니다"....

* 스포일러가 약간 있습니다. 읽으실 분들은 미리 염두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출간소식을 알았을때에는 그닥 구입생각이 없었는데 인터넷을 통해 너무나 많은 호평을 접해서 구입하게 된 책입니다. 워낙 많은 상을 탔기 때문에 혹한것도 있죠.

그런데 제게는 그냥 평균작 수준이었어요. 대단한 작품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기에는 좀 부족했거든요.
물론 1인칭 시점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성직자"라는 단편은 대단했고, 이 첫번째 단편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등장인물을 바꾸어가며 극단적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형식도 독특해서 - 두번째 단편 "순교자"는 서간문 형태, 세번째 단편 "자애자"는 일기, 네번째 단편 "구도자"는 1인칭 추억담, 다섯번째 단편 "신봉자"는 유서, 마지막 단편 "전도자"는 전화통화라는 형태 - 이러한 형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작가의 고민과 노력이 눈에 선할 정도에요. 또 그만큼 충분한 재미는 가져다 주고 말이죠.

그러나 기본 설정과 캐릭터가 너무 현실적이지 못해서 끝까지 몰입하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특히나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비현실적인것은 큰 문제로 생각됩니다. 주인공의 한명인 슈야가 대표적이죠. 유년기의 애정결핍으로 삐뚤어진 양심을 지니게 된 천재라는 설정도 뻔하지만 묘사된 캐릭터가 너무 극단적이라 감정이입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작품 후기 등에서 소개되기를 등장인물 이력서가 있고 그 이력서에 기반하여 작품이 정교하게 짜여져 있는 것처럼 홍보되고 있는데 사실 슈야 캐릭터는 그동안 만화에서 흔히 보아왔던 인물 설정이기도 하죠. 읽자마자 저는 "암즈"의 건방진 천재 쌍둥이 알과 제프가 연상되었거든요. 그나마 요새는 만화에서도 쓰이지 않는 케케묵은 설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요. 슈야에 비하면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작중에 등장하는 AIDS에 걸린 세상을 바꾸는 철부지 선생이나 다양한 약품을 손에 넣는 중학교 여반장같은 캐릭터는 그나마 약과겠죠...

게다가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건물을 날려버릴만한 폭탄을 현실세계의 중학생이 제조한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모리구치 유코가 그 폭탄을 옮겨 놓는다는 것은 황당의 극치더군요. 결국 모리구치 유코 역시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 수준으로 자기합리화에만 골몰하는 뻔뻔한 인물이라는 것을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모리구치 유코의 경우 하나뿐인 혈육이 죽었으므로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긴 하지만 이렇듯 이후의 전개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당위성이 서서히 희박해져 가는것이 뒤로 갈 수록 너무 막가는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거야 캐릭터들의 설정이 설득력이 없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단죄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천사의 나이프"처럼 법적인 저촉을 받지 않는 "촉법소년" 범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고, 첫 단편 이외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복수극으로 보기도 힘들며 추리물로 보기에도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분명히 재미있고 독특한 작품이긴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현실성이 떨어지는 등 단점이 확연하기에 그냥 첫번째 단편으로 끝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09/08/17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 - 에도가와 란포 / 김은희 : 별점 3.5점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 - 6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두드림

제목 그대로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이자 변격물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선집입니다. 1권 다음에 3권이 먼저 나온 뒤 나온 2권입니다. 순서조차 엽기적이군요.... 1권과 3권을 이미 읽고 소장하고 있기에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런 추리 단편을 워낙 좋아라하기도 하고 말이죠.
그러나 아쉽게도 이미 접한 작품도 많고 "본격물" 로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들도 제법 많아서 1 - 3 권을 읽고 느꼈던 것보다는 조금 못합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겠죠. 전체적인 평점은 3점입니다.

최고 베스트는 "음울한 짐승" 이긴 한데, 너무 잘 알려진 작품이라 조금 식상하다면 "그는 누구인가"를 꼽고 싶네요. "악귀"도 괜찮았고요.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호반정 사건 :
거울장치로 남을 엿보는 취미가 있는 주인공인 나는 묵고있던 여관 목욕탕에 몰래 숨겨놓은 장치를 통해 한 여인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관에서 친구가 된 코우노와 함께 사건의 조사에 착수한 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 여관 잔치에 불려나왔던 기생 쵸키치가 실종되고 정체불명의 손님들이 커다란 트렁크를 든 채 서둘러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경찰까지 수사에 나서지만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작가의 변격적인 취향이 잘 반영된 "거울장치"라는 설정은 인상적이지만 본격물에는 미치지 못한 조금은 애매한 작품입니다. 본격물로 기능하기 위한 트릭은 그런대로 합격점이긴 하며 쵸키치의 실종이라던가 군불지기 산조우의 존재 등을 통해 이야기도 나름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는 있지만 "거울장치"라는 소도구 자체가 우연을 토대로 한다는 점과 정체불명의 손님들과 거액의 돈이라는 설정 역시 지나칠정도로 작위적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야기는 중편 길이에 가까우나 알맹이가 없는 작품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악귀 :
추리소설가 토노무라 쇼우이치는 고향에서 우연히 친구인 오야 코우기치가 연루된 사건에 휘말린다. 오야의 정혼자 츠루코가 참혹하게 훼손된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 마침 오야는 파혼을 주장하며 유키꼬라는 아가씨와 사귀고 있었기에 완벽하게 범인으로 몰린다. 결국 토노무라는 친구의 누명을 벗어주기 위해 나서는데...
작가 스스로도 책 뒤의 해설에서 이야기하듯 결정적 트릭을 홈즈 단편 중 하나인 "브루스파팅턴 잠수함 설계도의 모험"에서 차용한 작품으로 정통 본격물입니다. 비록 중요 트릭이 모방이라 하더라도 다른 트릭들, 즉 1인 2역 트릭 같은 것들이 중요 트릭과 함께 작품과 잘 결합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결말이 조금은 쌩뚱맞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한 작품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지붕 속 산책자 :
백수 코우다는 명탐정 아케치 코고로와 친분을 맺은 뒤 "범죄"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새로 이사한 하숙집 천장으로 통하는 통로를 우연히 발견한 그는 다른 하숙생들을 염탐하는 취미에 빠져들다가 싫어하는 하숙생 엔도우를 완벽하게 살해할 수 있는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대표작 중 하나로 과거 동서 추리문고의 "음울한 짐승"을 통해 먼저 접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변격물적인 성향에 더해 범행이 먼저 이루어지는 약간은 도서추리적인 전개, 그리고 사건을 밝혀내는 아케치 코고로의 추리쇼가 돋보이며, 특히나 범행을 행하는 과정까지의 서스펜스가 정말 장난이 아니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죠.
코우다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과 범행의 유력한 증거가 결국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격물로 보기는 힘들겠지만 에도가와 란포라는 작가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점.

그는 누구인가 :
유우키 소장의 아들 히로카즈가 도둑에게 저격당해 불구가 된다. 그러나 범인이 남긴 불가사의한 발자국 등 알 수 없는 여러 정황증거 때문에 사건이 미궁에 빠진다. 결국 추리광인 히로카즈 스스로 탐정역을 소화하려 하고, 유우키 가문의 손님인 아카이씨 역시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범인이 하늘로 꺼지는 발자국이라는 불가능 범죄의 설정을 가진 본격물입니다. 지도까지 도입한 치밀한 구성, 잘 짜여진 캐릭터 구도와 완벽한 동기 등 본격물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죠. 덕분에 상당한 길이의 중편이지만 작품 내내 계속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아 지루하지 않게 읽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케치 코고로가 등장한다는 것 역시 팬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고요.
저자 스스로는 자신의 냄새가 많이 나지 않아 별로 화제가 되지 못했다고 이야기하지만 후대의 팬으로서는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보석을 발견한 듯한 기쁨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달과 장갑 :
카츠히코는 고리대금업자 마타노를 우발적으로 살해한 뒤 자신의 애인이기도 한 마타노의 아내 아케미와 공모하여 사건을 은폐할 결심을 한다...
장치를 이용한 일종의 알리바이 트릭이 등장하는 도서 추리물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황제의 코담배갑" 같은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멀리서 바라본다"라는 알리바이 트릭을 언급하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니죠. 완전 오버에요... 이 작품은 트릭 자체는 별게 없고 오히려 이를 밝혀내기 위한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서스펜스가 더욱 돋보이는 스릴러적인 성향이 강한 작품입니다.
아케치 코고로의 이름이 잠깐 언급되는 것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리코시 수사1과장 귀하 :
도쿄 경시청의 호리코시 수사1과장은 5년전 관내에서 벌어진 미궁의 천만엔 도난사건에 대한 편지를 받는다...
서간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1인 2역 트릭을 다루고 있습니다. 트릭과 설정은 뻔해서 역시나 본격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전개과정이 뻔한 아이디어를 덮을 수 있을 만큼 흡입력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모처럼 결말까지 깔끔할 뿐 아니라 훔친 돈의 은닉에 대한 몇가지 아이디어 등도 재미있었기에 별점은 3점. 무난하고 평이했습니다.

음울한 짐승 :
추리작가인 나는 실업가 오야마다 로쿠로의 부인인 오야마다 시즈코라는 여성과 우연히 친분을 쌓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나에게 오에 슌데이라는 정체를 알기 어려운 추리작가에 대해 문의하고, 나는 오에 슌데이가 과거의 연인이었다가 스토커로 돌변한 히라타 이치로라는 그녀의 고백을 듣게 된다. 히라타 이치로의 스토킹과 편지의 강도가 세지던 와중에 결국 오야마다 로쿠로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나왔다! 이 작품도 동서추리문고를 통해 소개된 대표작이기도 한 변격물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스스로 작중의 오에 슌데이, 즉 히라타 이치로라는 인물에 자기 자신을 투사하여 작품을 써 나갔기 때문에, 란포의 여러 작품들이 오에 슌데이의 작품으로 인용되는 등 작가와 왠지 일체화된 느낌이 강한 작품이기도 해서 대표작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비록 읽어본 작품이기는 하지만 번역이 다른 탓에 굉장히 신선한 기분을 느끼면서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스토킹이나 가학증 등 변격물적인 성향도 잘 드러나 있지만 본격물로 보아도 손색없을 정도로 여러가지의 트릭 - 특히 오야마다 로쿠로 살인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볼거리입니다 - 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약간 여운을 남기는 애매한 결말까지도 인상적이라 에도가와 란포 작품 중에서도 탑 클래스에 들만한 좋은 작품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2009/03/10

식도락 여행 - 한스 페터 폰 페슈케, 베르너 펠트만 / 이기숙 : 별점 2점

식도락여행 - 4점
한스 페터 폰 페슈케.베르너 펠트만 지음, 이기숙 옮김/이마고

세계사의 주요 장면장면을 토막으로 구성하여 해당 장면마다 등장한 요리를 양념처럼 구성한 일종의 역사책이자 요리책인 독특한 책입니다. 역사와 요리 모두 좋아하기에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기원전 솔로몬과 시바여왕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서 21세기 식량위기에 대한 내용까지 다루고 있으니 다루고 있는 범위는 정말 넓을 뿐 아니라, 다루고 있는 범위 만큼이나 다양한 문학적 형식 - 일반적인 3인칭 시점에서부터 1인칭 시점, 서간문 형식, 토론 발표 형식 등 - 으로 각 주제를 구성하여 식상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는 주요 장면 중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주로 앞부분 고대 시대로 
  1. 오디세우스가 친구들과 식사를 하며 트로이의 목마 작전을 생각해 내는 "오디세우스의 군막에서 - 트로이 영웅의 야전 만찬 │ 고대 그리스의 소박한 식탁"
  2. 한니발의 마지막 식사를 다루고 있는 "로마 대신 죽음을 택한 한니발  - 한니발의 마지막 식사 │ 페나키아와 카르타고의 음식 유산"
  3. 갈리아의 돼지고기 상인 오벨릭스가 로마 제국 요리의 진수를 맛보는 "세계의 배꼽을 가다 - 갈리아의 오벨릭스를 위한 요리 │ 로마 제국의 요리 전성기"
요 세가지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흥미롭기도 했고 말이죠. 돼지고기 상인 오벨릭스는 아스테릭스 친구 오벨릭스가 오버랩되기도 하고요.

그러나 중세 이후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실망스럽더군요. 앞부분에는 나름 역사속 사건과 요리가 맞아떨어지는 맛이 어느정도 있었는데 뒷부분으로 가면 갈수록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시시콜콜한 역사속 장면 한토막에 당대의 요리를 억지로 끼워넣은듯한 항목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당대의 요리를 그 시대의 주요한 사건과 배치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리라 예상은 되지만 너무 억지스럽다는 것은 확실히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죠. 중세 이후의 시대가 굉장히 촘촘하게 구성되어 시대와 요리의 차이점이 후반부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역시 감점 요소고요.

또한 지금 당장이라도 재현할 수 있도록 과거 역사속 요리를 그럴듯 하게 구현하여 레시피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아이디이어긴 했는데 대한민국 일반인 주방에서 구현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요리가 대부분이라는 점 역시 실망스러웠습니다. 뭐 제가 요리를 잘하거나 즐기는건 아니지만 대충 봐도 구하기 어려운 재료와 실천하기 어려운 조리법이 난무하니까요. 덕분에 맛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 역시 이런류의 책에서는 굉장히 치명적인 단점이라 생각됩니다. 이 점은 최소한 요리 관련 도판이라도 충실하게 실어서 비쥬얼로 상상할 수 있도록은 해 줬어야 하지 않을까요?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요리를 좋아하고 세계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필할 수 있도록 구성된 "기획도서" 로서 역사보다는 요리쪽에 훨~씬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요리책에 가까운 책입니다. 제 기대와는 큰 차이가 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007/09/15

빨간 고양이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 단편집) - 정태원 편역 : 별점 4점

빨간 고양이 - 8점
니키 에쓰코 외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이 책은 1회, 1948년 부터의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단편들을 정태원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나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구입 의욕에 불타던 단편집이었지요. 출간 즉시 구입, 완독하였습니다. 그만큼 저같은 일본 추리 소설, 그리고 단편소설 매니아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가도 많고, 유명하지만 소개되지 않았던 걸작도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손님"이라던가 니키 에쓰코의 표제작이기도 한 "빨간 고양이", 구사카 게이스케의 "휘파람새를 부르는 소년"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접한 작품도 있지만, 제 기준으로는 열 여섯 편의 수록작 중 세 편에 불과해서 납득할 만 했습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선정된 작품들은 괴이한 분위기의 "해만장 기담"이라거나 대하 역사물 같은 "매국노" 등 작품의 스펙트럼이 무지하게 넓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들이니 만큼 전부 추리소설들이기는 합니다.
또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풍취가 넘치는 작품이 많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상이라는 걸 타려면 문학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테니 당연하겠지만요. 이런 부분은 저같은 고전 트릭물 애호가에게는 추리적으로 약간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보다 폭넓은 층에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널리 알려져서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뒷부분 해설을 보니 2부도 기획중이던데 2부 출간을 위해서라도 꼭이요!

하여튼 전체 별점은 4점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만족했던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명한 걸작 "돌아오는 강의 정사 (회귀천 정사)" 였습니다. 일본 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이야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비록 일본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며 그 풍취를 많이 잃었다 하더라도 걸작은 역시 걸작이구나 싶었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좋은데 좀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들은 몇개 있긴 했습니다.

아울러 책의 내용말고 다른 점을 좀 짚어보자면 오탈자가 가끔 있는 편이라 초판 이후에는 수정되었으면 하고, 책의 두께도 엄청난 편인데 양장으로 출간되어 무게를 가중시키는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폰트를 좀 줄여 두께를 줄이고 양장대신 평범하게 제작하여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과거 다른 태동 출판사의 책들 수준의 크기와 가격이었더라면 만족도가 훨~씬 높았을텐데 좀 아쉽습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초승달 - 기기 다카타로

부유한 호소다 에이스케와 아야코 부부는 3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야코 집안에서 살해 의혹을 들먹이며 변호사를 통해 위자료를 요구해 왔다. 사건의 진상은?

1948년의 첫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상 수상작입니다. 정태원 선생님 해설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서의 문학적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 역시 순문학적인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사실 트릭이라는 것이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라 본격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무척 높다는 느낌을 전해 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단편이 본편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 환상특급 같은 느낌을 주었거든요.

2. 해만장기담 - 가야마 시게루

대 부호인 쓰가모토 박사는 지상에 지옥을 구현하였다는 해만장이라는 저택으로 유명했다. 박사의 외아들 고비오의 생일파티가 해만장에서 있던 밤, 박사의 딸인 마야와 고비오가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고지라의 원작자인 가야마 시게루의 작품으로 1948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가야마 시게루는 전에 "넹고넹고"라는 환상문학적인 작품을 이미 접해보긴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설정 자체가 약간은 허구에 근거하고 있어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환상 추리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구현된 세계관은 압권입니다. 변격물과 정통파의 중간지점쯤에 위치했다고나 할까요? 과학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제 생물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트릭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가의 지나치게 장황한 묘사는 부담스럽습니다.

3. 눈속의 악마 - 야마다 후타로

다마에라는 아름다운 무용수에게 반한 의대생 다치바나는 자신의 친구였던 부자 가타쿠라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타구라가 의처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뒤, 다치바나는 우연히 알게된 다마에의 비밀을 통해 의학적 지식을 활용한 음모를 꾸미는데... 

유명한 고전 일본 추리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지만 작품 자체도 명불허전! 특히 예전 읽었던 "마지막 인사"에 비교해 본다면 추리적 요소가 많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순전히 다치바나의 1인칭. 그것도 서간문 형식으로만 구성된 전개 방식도 독특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왔을 의학적 트릭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심리를 잘 이용한 교묘한 트릭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4. 허상음락 - 야마다 후타로

음독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유미코는 시동생 우스케에게 치아키 의사가 있는, 자신이 과거에 근무했던 병원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치아키 의사는 진료 중 유미코의 몸에 드러난 수많은 상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데... 

위의 "눈속의 악마" 보다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은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탐미주의적 문학관이 짙게 옅보이는 심리극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추리적 알맹이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애증 관계의 색다른 해석과 덧없는 결말이 펼쳐지는 인물과 심리 묘사가 워낙 탁월하여 작품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는 듯 합니다. 솔직히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건  의외이지만요.

5. 린치 - 오쓰보 쓰나오

10년만에 출옥한 전 야쿠자 세이기치. 그는 도난당한 금불상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탓에 야쿠자 조직의 표적이 되었다. 

과거의 금불상 도난 사건과 현재. 그리고 야쿠자 조직의 흥망성쇠가 얽힌 이야기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후반부에 가서 모두 밝혀지는 하드보일드적 작풍이 독특합니다. 사건이 트릭보다는 일종의 "해설"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 역시 비슷했고요. 하지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동양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죠.

걸작까지는 아니지만,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6. 어떤 결투 - 미즈타니 쥰

야스코를 놓고 경쟁하던 두 젊은이 시라사키와 구보타는 결국 권총 결투를 벌이는데 시라사키가 죽고 말았다. 친구 그룹은 사건 은폐를 위한 조작을 시도하는데... 

이 단편집에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정통 추리물입니다. 짤막하지만 권총 결투라는 소재를 도입한 이국적인 설정이 돋보입니다. 단지 이국적인 느낌만 전해주려고 등장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중요한 요소로 쓰이는, 트릭의 근간이 되는 설정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여러 조작과 그것을 밝혀나가는 경찰과의 두뇌싸움도 볼만 합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추리물로 즐기기에는 부족함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7. 매국노 - 나가세 산고

전쟁 (2차 세계 대전) 말기 중국 베이징에서 사토미야 료스케는 친일신문 사장 2명의 진상 조사를 체리라는 아가씨에게서 의뢰 받았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그는 이 사건이 일본의 신기인 곡옥과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실제 중국 거주민이었던 작가의 아주아주 디테일한 당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건의 트릭 자체는 너무 보잘 것이 없습니다. 대하 역사극에 일부로 추리적 요소가 삽입되었다고 보여질 정도로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요.

8. 여우의 닭 - 히가게 죠기치

신지는 나무를 하던 중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직후, 형수 모치의 시체를 발견했다.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 생각한 신지는 사건 은폐를 위해 시체를 숨겼지만,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의 표적이 되는데...

전쟁 직후 귀환병의 비참한 생활을 잘 묘사한 문학적 흥취도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건, 동기, 트릭의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작입니다. 날짜별로 구분된 챕터는 조금 거슬렸지만 워낙 묘사와 전개가 뛰어나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여운을 남기는 결말 역시 인상적이에요.

9. 피리를 불면 사람이 죽는다 - 쓰노다 기쿠오

경찰청 담당 기자 료스케는 자신이 썼던 완전범죄 기사에 대한 반박글을 보냈던 에나라는 아가씨가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관계된 완전범죄를 실제로 목격하는데...

경찰과 관계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완전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일반적인 범죄물로 그려지다가 한번의 반전을 통해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전해줍니다. 전후 일본의 혼란과 인간의 잔인합도 약간 그리는 사회파적인 특성도 조금 있고요.

10. 그린차의 아이 - 도이타 야스지

노배우 나카무라 가라쿠는 7년만에 무대 복귀를 결심하지만 복귀 무대의 아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다가 지인과 함께 신칸센 그린차를 타고 도쿄로 떠났다. 그리고 그린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소녀의 정체를 놓고 추리가 시작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라는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가라쿠가 등장하는 소품으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소박한 내용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상 생활 속에서의 추리" 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취향 저격이었어요. 아울러 가부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지식이 특히나 돋보였고요. 

그런데 설정과 캐릭터에 비한다면 추리적인 요소는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11. 시선 - 이시자와 에이타로

가지하라 형사는 자신의 조카와 결혼을 앞둔 후배 시바타 형사와 탐문수사에서 돌아오던 중, 한 결혼식을 바라보다가 신부가 지난 은행강도 사건 피해자와 관련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선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전개되는 짤막한 작품입니다. 단편에 최적화된 듯한 내용과 전개는 흡입력이 상당하더군요. 길이에 비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드라마틱 하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전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12. 손님 - 아토다 다카시

이전에 읽었던 "Y의 거리"에 포함되었던 작품으로 아토다 다카시 특유의 반전이 인상적인, 서늘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아토다 다카시의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은 "나폴레옹광"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만만치 않은 전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이죠.

13. 빨간 고양이 - 니키 에쓰코

역시 이전에 읽었었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포함되었던 작품입니다. "빨간 고양이"라는 인형에 함축된 중의적 의미를 풀어내는 트릭과 범인을 집어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통 안락의자형 추리물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처량하고 너무 착하게 끝나는 결말은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작가 니키 에쓰코의 작품군이 대체로 해피엔딩에 기반한 만큼, 작풍이라 보는 것이 맞겠죠. 어쨌건 정통 추리물 애호가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14. 돌아오는 강의 정사 - 렌조 미키히코

근대의 천재시인 소노다 가쿠요는 2번의 정사 미수 끝에 자살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리고 그의 전기를 쓰다가 중단한 "나"는 그의 2편의 정사 미수 후 발표된 "정가"와 "소생"이라는 시를 분석하여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챈다.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에 9위로 선정된 "회귀천 정사". 바로 그 작품입니다. 천재 시인의 연작시를 토대로 과거를 밝혀내는 전개의 작품으로 시를 통해 발현되는 문학적 가치도 빼어나지만 사건 앞뒤에 포진한 단서와 복선을 가지고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하며 정교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여러배 높아지는, 그만큼 뛰어나면서도 항상 읽고 싶었던 작품이기에 무척 만족스럽네요. 

단 일본어 였을 때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느껴졌을 싯구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맛을 좀 잃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점이 있고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추리의 과정이 심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걸작은 걸작입니다.

15. 나무에 오르는 개 - 구사카 게이스케

"나"는 동생 겐지가 유일한 친구 히데오와 개가 나무에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중재하다가 과거 헤어진 연인 마치코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개가 우물에 빠지고  겐지마저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자 "나"는 모든 사고의 원인이 된 나무에 올라가 모든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다. 

제가 그간 읽었던 구사카 게이스케의 작품은 항상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소품 느낌을 주면서도 정교함과 더불어 독자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정교하게 현재 시점의 사건을 다루는 솜씨가 역시나 탁월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16. 휘파람 새를 부르는 소년

역시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수록되어 접해보았던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꾀꼬리"라고 되어 있지만 같은 작품이죠. 위에 쓴 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듭니다. 추리나 결말이 더 제 취향이었다고나 할까요?

2007/06/18

암보스 문도스 - 기리노 나쓰오 / 김수현 : 별점 2.5점

암보스 문도스
기리노 나쓰오 지음, 김수현 옮김/황금가지

신혼여행 출발하기 직전 공항 서점에서 구입하여 읽은 기리노 나쓰오의 단편집입니다.

읽고난 첫 느낌은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르께스의 단편들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평범하지만 뭔가 어긋난 인간을 다루면서도, 인간 심리를 묘하게 건드리는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의 단편 7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앞서 말한 인간 내면 심리를 고찰하면서도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들입니다. 또한 인간의 이중성이라던가 내면 심리를 적나라하게 그리는 공통적인 특징 아래에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와 상상의 허를 찌르는 기발함이 가미된 이야기가 공존하는 식으로 작품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편이에요.

간략하게 작품을 소개하자면,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주눅들고 사는 여성의 심리와 소박한 복수를 디테일한 묘사로 그려나간 "식림", 그리고 여성들의 성에 대한 수다에서 비롯되는 기이한 이야기인 "사랑의 섬", 노숙자들에게 흘러들어온 여성을 묘사한 "루비", 가족의 붕괴와 불륜을 다룬 "괴물들의 야회"와 "부도의 숲", "식림"과 유사한 설정이지만 좀 더 환상적 설정이 가미된 "독동", 마지막으로 표제작인 1인칭 서간문 시점의 독특한 발상의 범죄물 "암보스 문도스" 순서로 실려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랑의 섬"과 "루비", "암보스 문도스"가 좋더군요. 외모 컴플렉스 등을 다룬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다 생각되고 불륜 역시 식상한데 이 작품들은 그래도 조금 색다른 설정이 깔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암보스 문도스"는 가장 추리적 요소가 강하다는 점에 더해서 이전 작품들과의 연관성도 많이 느껴지기 때문에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하지만 추리적인 부분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절대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힘든 작품들이기 때문에 이전에 읽었던 두 작품들 ("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얼굴에 흩날리는 비")에 비하면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심리 묘사능력이 탁월한, 그야말로 "글 잘 쓰는" 작가의 단편집이기도 하고 추리적 요소가 적은만큼 대중에게 어필할 요소가 많다고 생각되니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읽어 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단 취향을 좀 타긴 할 것 같습니다

2007/04/10

세계추리명작단편선 - 하서출판사 : 별점 4점

하서출판사에서 70년대에 간행된 세계 추리 명작 전집 중 한권으로 여러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집입니다. 추리소설 초창기 작품들의 비중이 높은 것이 특징으로 재미와 수준이 아주 뛰어난 작품들로 엄선되어 있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어요. 지금은 좀 구하기 힘들어진 작가들의 비중이 높은 것 역시 마음에 든 점이었고요.

다른 곳에서도 많이 소개된 초유명 작품들 몇편도 실려있는 것은 약간 아쉽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걸작들이니 납득할만 합니다. 오래된 낡은 책이기에 수반되는 편집, 장정, 번역 문제를 제외하고 수록작품들의 퀄리티만 따진다면 별점 5점은 충분하겠죠. 어쨌건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어요.

개인적인 베스트를 꼽자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우나 순수한 희소성 측면에서 최고 작품은 로버트 바의 "건망증 있는 사람들"과 윌키 콜린즈의 "사람이 오만하면", 그리고 로드 던세이니의 "두병의 소오스"를 꼽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희귀 고전 걸작을 새로 간행하면 어떨까 싶어서 저만의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혹 출판사 관계자가 보신다면 한번 고려해 보셨으면 합니다. FTA 체결로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사후 50년 이상이면 저작권이 풀리는 당장의 국내 현실에 맞춰본 것이죠. 이 단편집 위주이긴 하지만 몇몇 작품은 다른 작품에서 뽑아와도 좋을 것 같아요. 물론 번역은 다시 해야겠지만요.
-추리소설의 여명기 걸작선-
토마스 버크 (1886~1945) "오터모울씨의 손"
로버트 바 (1850~1912) "건망증 있는 사람들"
윌키 콜린즈 (1824~1889) "사람이 오만하면"

-기묘한 맛, 추리소설의 색다른 재미-
로드 던세이니 (1878~1956) "두병의 소스"
도로시 L 세이어스 (1893~1957) "의혹"

-셜록홈즈의 라이벌들-
스미스 어네스트 브래머 (1869~1942) "연립주택의 참극" (장님탐정 맥스 캐러더스) 또는 그외 (브룩밴드 장의 비극)
멜빈 데이비드 포스트 (1871~1930) "둠도프 사건" "나보테의 포도원" (서부개척시대 탐정 엉클 애브너) 또는 그외
로널드 A. 녹스(1888~1957) "밀실의 수행자" (비밀탐정 마일즈 브랜든)
체스터튼 (1874~1936) "날개달린 단검" (브라운 신부 시리즈) 또는 그외
오르치 백작부인 (1865~1945) 더블린 사건 (구석의 노인 시리즈) 또는 그외
잭 푸트렐 (1875~1912) "정보누설" (사고기계 반 두젠 시리즈) 또는 그외 (13호 독방의 문제)
아더 모리슨 (1863~1945) "렌턴관 도난 사건" (사립탐정 마틴 휴이트 시리즈)

크리스티 여사의 "야앵장"
한 여성의 의혹과 생존을 위한 속임수를 다룬 소품. 심리묘사가 정말로 흥미진진한 걸작입니다.
 
토마스 버크 "오터모울씨의 손"
추리소설 초창기 최고 걸작 중 하나. 이유는 아주 획기적인 트릭이 등장하기 때문이에요. 이후 여러 후대 작품들에 인용된 걸작 트릭이죠.

로버트 바아 "건망증 있는 사람들"
유머 미스테리. 은화 위조단 추적으로 비롯된 사건이 기발한 사기 사건으로 연결되는 구조도 신선하고 트릭과 전개 역시 유쾌하고 재미난 작품이었습니다.

스미스 어네스트 브래너 "브룩밴드 장의 비극"
장님탐정 맥스 캐러더스 시리즈. 시리즈 최고 작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과학적이고도 신선한 트릭이 등장한다는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단, 맥스 캐러더스가 장님일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설정상 감점요소가 좀 있고 결말이 좀 개운하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하여간 이 작가는 전개능력이 없는 것 같아요.

로드 던세이니 "두병의 소오스"
로얄드 달이나 스텐리 엘린류의 "기묘한 맛" 류의 작품. 지금 읽어도 굉장히 충격적이고 기발한 결말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화자를 통해 전개하는 작품의 스토리텔링이 무척이나 빼어난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멜빈 데이비슨 포스트 "둠도프 사건"
서부개척 탐정 엉클 애브너 시리즈입니다. 이 작품은 동서 문고 시리즈로도 접할 수 있죠. 하나님 어쩌구 하는 내용으로 가득찬 전개는 짜증나지만 기발한 트릭만큼은 일품이었습니다.

G.K 체스터튼 "기묘한 발소리"
브라운 신부 시리즈. 지금은 정식 간행되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시리즈 최고작이라 말하기는 좀 어렵지만 좋은 작품이죠.

로널드 K 녹스 "밀실의 신비주의자"
밀실 트릭의 새로운 지평을 열은 단편. "김전일" 시리즈 중 한편인 <이진간촌 살인사건>의 서브트릭으로 사용될 정도로 추리 소설계에 유명한 트릭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작품이죠. 지금 읽는다면 트릭이 좀 뻔해보이기도 합니다만...

휴 월폴 "은가면"
착한 부인이 자신의 선행에 의해 파멸해 나가는 과정을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그린 독특한 작품. 이색적이고 좀 서늘한 유머가 있는 작품입니다.

윌키 콜린즈 "사람이 오만하면"
전체가 서간문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진행에 추리소설로 나무랄데 없는 전개를 가진 걸작입니다. 유머러스한 문체까지 곁들여진 초기 영국 추리 문학계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죠.

E.B 오르치 "더블린 사건"
구석의 노인 시리즈. 역시 동서문고로 간행되어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최고 걸작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발상의 역전이 기발한 작품으로 당대의 명탐정의 반열에 오른 구석의 노인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A.모리슨 "렌턴관 도난사건"
탐정 마틴 휴이트 시리즈. 역시나 추리소설 역사에 남을만한 멋진 트릭이 등장합니다. 또한 이 트릭을 풀어내기 위한 단서도 굉장히 합리적이라 단편 추리소설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죠. 덧붙이자면 아주 오래전 <세계의 명탐정 50인>에 등장했던 바로 그 트릭입니다. 전개가 조금 밋밋한 것이 약간 아쉽네요.

도로시 L 세이어즈 "의혹"
굉장히 유명한 작품이니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