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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1

발레리나 (2025) - 렌 와이즈먼 : 별점 1.5점

"존 윅" 시리즈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스핀 오프 액션 영화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을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컨티넨탈 호텔이나 루스카 로마 같은 익숙한 설정들이 등장하지만, 이미 알려진 장치를 배경처럼 끌어다 쓰는 데 그칠 뿐입니다. 시리즈의 개성을 만들어 주던 설정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길러진 여성이 복수에 나선다는 흔한 설정을 포장하는 장식에 불과해요. 사실 "존 윅" 세계관도 서양 관객들에게는 새로왔을지 모르지만, 일본 만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설정들일 뿐이기도 하고요.

이야기도 뻔합니다. 강한 조직의 후계자로 죽음에 맞닿아 있는 운명의 소녀가 아버지와 함께 도망치지만 결국 아버지를 잃은 뒤, 다른 조직에 들어가서 실력을 키운 뒤 복수한다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무협지 서사인 탓입니다. 마지막 복수의 대상이 할아버지라는 설정조차도요.
이에 대한 이야기 전개도 엉망입니다. 어린 시절 헤어졌던 언니가 갑자기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세력 간 협상을 위해 등장한 존 윅이 어느 순간 그녀의 편에서 싸운다는건 지나치게 편의적인 장치였으니까요.

액션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원래 "존 윅" 시리즈 역시 액션이 완벽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각 작품마다 적어도 하나쯤은 관객에게 강하게 남는 시퀀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레리나"는 그런 인상적인 장면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은 여성의 액션이라서 타격감도 부족하고, 대체로 밀리는 액션이 많아서 시원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목의 "발레리나"에 걸맞게, 발레 동작을 액션에 녹여내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후반부 화염 방사기를 이용한 대결은 눈꼴 사나운 수준입니다. 화면은 요란하지만, 열린 공간에서 총도 충분히 있는 상황에 굳이 화염 방사기를 사용해야 할 이유는 설명이 안되지요. 현실감이나 개연성 보다는,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선사하기 위한 욕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이렇게 "존 윅"의 명성에 기댄 졸작이지만 장점이 아주 없지만은 않습니다.무엇보다 아나 데 아르마스는 이 역할에 잘 어울립니다. 다소 가련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소녀 역할을 잘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팬이라면 '존 윅'의 등장과 활약은 이야기의 개연성과는 별개로 즐길만한 부분이었고요.
전직 킬러들이 모여 산다는 마을 '할슈타트'의 설정 만큼은 아주 괜찮게 구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장점은 너무 사소합니다. 평균 이하의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불과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5/03/07

비잔티움의 역사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 최하늘 : 별점 3점

비잔티움의 역사 - 6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급격히 비잔티움 제국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역사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로 정의합니다.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방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리스와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제국만 남게 된 4세기 이후를 비잔티움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고요.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9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각각 탄생, 영토 확장, 이슬람의 공세, 부활, 최대 전성기, 십자군 원정과 지방 분권화, 분열, 몰락, 멸망 등의 흐름을 따라가며, 각 시기별 황제들이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년 왕국’이라는 위상을 지녔던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건 황제들이 동시에도 여러 명이 존재했고, 배신과 찬탈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천 년이나 존속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고,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보다는 용병과 외교에 의존했던 덕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족 가문과 대립을 벌이면서도 정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권한이 강력했던 점(특히 전성기)도 주요 요인이었고요.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는 수십 년 전 기근 이후 판매된 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며, 거대 귀족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강력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서방 제국에서 흔히 있었던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투쟁도 비잔티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테고요. 

게다가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가끔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천재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끌어들여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체적인 강력한 군사력없이, 주변보다 앞선 우수한 문화와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용병 고용과 동맹, 외교로 버티는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처럼요. 그러고보면 중국 송나라와 비슷하게 많네요. 비단이 유명했다던가, 강력한 무기가 - 송나라는 화포,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 - 있었다던가 등등등.

하여튼,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는 ‘분열’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후계국 세 개(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트 제국)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다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강력했던 황권도 약화되었고, 귀족층에게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도시국가로 전락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문제에서 교훈을 얻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쇠퇴도 초래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얻은 무역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격히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제노바는 15세기 이후 사실상 무역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의 중심이 프랑스와 영국 등 보다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흥미로운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외에도, 불가르 제국처럼 낯설고 새로운 역사적 명칭과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이 실제로 대활약해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서로 보니까 굉장히 새로왔습니다. 슬라브권에서 널리 쓰이는 키릴 문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 콘스탄디노스(성직명 키릴로스)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슬라브어 선교를 위해 제작된 이 알파벳이 훗날 키릴 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생겼던건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총리대신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운명 이야기였습니다.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남자들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두 딸과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생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은행에 상당한 재산을 맡겨 두었었고, 딸 엘레니가 고생 끝에 결국 동생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냈다는군요. 이 정도면 대하 소설로 만들 법한 극적인 이야기아닐까요? '몰락 미녀 귀족 영애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갖은 노력 끝에 집안 재산을 되찾아 가족을 구해낸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주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때문이더군요. 기번은 이 책에서 비잔티움 문화를 ‘이민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는데,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훨씬 빠르게 그리스와 발칸 반도, 혹은 그 이상까지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폄하는 부당하지요. 서구 유럽이 중심이 된 근대사의 또다른 폐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황당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각 시기별 제국의 판도를 쉽게 이해하고, 주요 전장 및 도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도가 필수적인데, 기본적인 지도조차 부실하여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역사”에서도 지도가 부족했는데, 앞으로 이러한 역사서에서 지도 부실 문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전투나 영웅적인 활약, 스캔들 같은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건조하고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전달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누가 즉위했고, 어떤 일을 했다라는 서술이 이어질 뿐이거든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과 전투는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2/08

오랑캐의 역사 - 김기협 : 별점 3점

오랑캐의 역사 - 6점
김기협 지음/돌베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주변부의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역사서입니다. 농경 사회와 유목 사회를 대립적인 관계로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 유목 사회가 농경 사회와 공생하며 '그림자 제국'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농경 사회는 생산성이 높아 경제력을 확보하기 용이했고, 덕분에 대규모 정치 조직인 ‘국가’ 형태를 갖추기 쉬웠습니다. 반면, 유목 사회는 느슨한 연합체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으로 성장하게 되면 농경 사회의 잉여 생산물을 수탈하거나 교역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여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즉, 농경 사회의 제국이 있어야만 성립할 수 있는 구조였으며, 저자는 이를 ‘그림자 제국’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개념을 통해 한반도가 독립 국가로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설명됩니다. 농사에 유리한 한반도 남부에 국가가 형성되었고, 북부와 만주는 유목 세력의 땅이라 중국과 단절되었지요. 하지만 이 지역에 강력한 유목 세력이 융성했을 때, 한반도 남부 국가는 지속적인 압박과 수탈을 받아야 했습니다. 고구려, 원나라, 청나라 시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재미있지요? 최근 이세계 전생 후 영지, 국가를 성장시키는 내용의 소설과 만화가 많은데, 이런 시각으로 접근해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목민 켄타우로스 부족에게 전생한 주인공이 기술과 병법, 종교 도입으로 오랑캐 정복 왕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로요.

중국이 대항해 시대의 유럽과 달리 해양 진출이 적었던 이유도 설명됩니다. 중국은 이미 내륙에서 필요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럽처럼 바다를 통해 식민지를 개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네요. 이는 대외 관계와 교역 방식에서도 차이를 만들었으며, 유럽이 적극적으로 신대륙을 탐험한 것과 달리, 중국은 상대적으로 대외 진출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지요. 결국 청나라 이후 유럽에 비해 문명이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고요.

유럽 중심 사관을 비판하는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부르며 로마 제국과 구분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은 인상적입니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유지한 채 수백 년간 존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분리된 측면이 있습니다. 이슬람 문명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평가도 눈길을 끌며, 특히 ‘중세 암흑 시대’라는 개념이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와 닿았습니다. 문명의 발전은 중세 시대에도 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이슬람 문명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단지 ‘유럽’만이 그 발전 과정에서 소외되었을 뿐이라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저자의 주장들은 풍부한 사료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시되어 설득력도 높은데, 문제는 주장이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오랑캐와 유목민, 그림자 제국 등의 개념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유럽 중심주의 비판으로 넘어가고, 다시 이슬람 문명의 성취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인 구성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글도 어려운 편이고요.

더 큰 문제는 도판의 부족입니다. 시대별, 지역별로 각 세력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면서도 당시의 지도가 거의 수록되지 않았습니다. 유목 세력의 이동 경로, 교역로, 세력권 등을 시각적으로 제시하지 않다 보니 독자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읽으면서 지도를 수시로 참고할 수 밖에 없었는데, 2만원을 훌쩍 넘는 책 가격을 생각해보면 주요 지도는 도판으로 반드시 추가되었어야 했습니다. 

저자의 독창적인 역사 해석과 다양한 시각은 흥미롭지만, 이러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구글 맵에서 연도를 입력하면 해당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서비스를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류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이트를 찾아보았는데, 광고가 많거나 느리거나 조작이 불편한 등 문제가 많았거든요...

2024/07/13

눈의 황홀 - 마쓰다 유키마사 / 송태욱 : 별점 4점

눈의 황홀 - 6점
마쓰다 유키마사 지음, 송태욱 옮김/바다출판사

'많은 발상가들이 생각의 도구로 사용한 ‘개념’이나 ‘형태’, ‘방법’ 등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탐색한 책이다. 다양한 ‘개념’, ‘형태’, ‘방법’ 중에서도 쌍[對]이라는 관념, 속도, 원근법, 나선, 추상 표현, 스트라이프, 콜라주, 레디메이드, 데포르메, 오브제 등 인간의 눈을 현혹해 온 18가지 테마의 기원과 변천을 묻는다. 이 과정에서 마쓰다 유키마사는 비주얼 문화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인류 가치관의 변천이 갖고 있는 놀라운 반전들을 보여 준다.'는 책 소갯글에 혹해서 구입했습니다. 

이러한 개념, 형태, 방법의 기원에 대해서는 저자의 개인적인 주장이 강하기는 하지만, 뒷받침되는 근거들이 방대하고 역사적인 깊이도 느껴졌습니다. 자기 주장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데 굉장히 능하기도 하고요.
 
그동안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궁금했었던 부분에 대해 설명해주는 주장들이 특히 흥미로왔습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가 동서 종교관의 차이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서양의 일신교는 수직 지향이며, 이를 통해 수직선 끝에 한 사람의 신이 있는 소실점이 등장했다고 하는데, 요약만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와 도판, 사료가 많아서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추상 표현을 기차의 도입과 연결시킨 발상도 기발했습니다. 늘 보던 풍경이 기차의 속도로 왜곡되어 보였고, 이를 차창이라는 사각의 프레임으로 잘라낸게 추상파의 뿌리일 수 있다는건 생각도 못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마크 로스코가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디자인 전공자라 '폰트'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편인데(이런 책을 읽었었지요), 폰트와 타이포크라피의 역사를 색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자의 주장으로는 구텐베르크의 좁고 날카로우며 새까만 블랙 레터체(고딕체)는 성서에 위엄과 무게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중심지 이탈리아에서는 이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해 경멸했던 고트인의 문자(고딕체)라서 거부했고, 고대 로마 서체야말로 로마인에게 어울린다며 '로마체'를 부활시켜 사용했습니다. 이를 계승하여 프랑스에서 사용된게 올드 로마체를 대표하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가라몽체' 였고요. 그리고 서체, 타이포그라피 요소만으로 아름다운 지면을 만들어내려 했던 영국의 존 바스커빌이 18세기 모던 로마체를 도입했고, 뒤이어 이탈리아의 보도니가 완성하여 산업 혁명에 적합한, 공업 제품으로서의 활자를 만들어 냈다는군요. 이러한 주장과 함께 문자 레이아웃 디자인의 발전사도 설명해주는데, 지금 보아도 기발한 시도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외에도, 청각을 시각화한 것의 대표는 '악보'이다, 토기로 끓이는 요리 때문에 주기성-시간 관념-과 재분배에 의한 문명이 생겨났다는 등 한 번 읽어볼만한 주장이 가득하며, 주장을 설명하기 위한 도판도 많아서 시각적 재미와 함께 자료적 가치도 크다고 생각됩니다. 일본 최초의 자동판매기 설명과 도판은 이런 책이 아니면 어디서든 찾아보기 힘든 자료일테니까요.

대부분 일본 중심으로 동양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지만 이는 저자가 일본인이기에 당연한 일입니다.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지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류의 주장을 펼 수 있는 전문가가 나와주면 좋겠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6/30

재난의 세계사 - 루시 존스 / 권예리 : 별점 2.5점

재난의 세계사 - 6점
루시 존스 지음, 권예리 옮김, 홍태경 감수/눌와

폼페이 베수비오산 분화에서 시작하여 비교적 최근인 2011년의 일본 도호쿠 지진까지 총 11개의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자연 재해에 대해 소개하며 설명해 주는 책. 

몰랐던걸 새롭게 알게되는 재미가 컸습니다. 몇 가지 설명드리자면, 폭발만 하지 않는다면 화산은 무척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하네요. 화산토는 투과성이 높아 물이 잘 빠지고 새로운 영양소가 많아서 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경작지가 되며, 화산 주변의 변형된 암석은 훌륭한 천연 요새가 되어 주고 방어에 유리한 골짜기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베수비오산 일대는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습니다. 유명한 '대 플리니우스'가 베수비오산 분화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구조차 향했던 도시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그래도 질식사가 차라리 나았습니다. 두 번째 분화로 사망한 폼페이 희생자들은 화산설쇄류로 타죽었거든요. 섭씨 260도에 달하는 고온의 증기가 무려 시속 480Km로 이동하여 사람을 덮쳐 닿자마자 사망했습니다. 정말 끔찍합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최소 8.5에서 9에 이르는 대지진으로 철학과 과학에 뚜렷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모든 신자가 교회에 가는 성스러운 날, 교회가 가득찬 아침 미사 시간에 지진이 일어난 것은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해 보였으니까요. 교회에 간 독실한 신자들은 목숨을 잃고, 근처 홍등가 창녀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은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한 인식을 야기하여 기독교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교회는 돌로 지었고 홍등가의 집들은 나무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무는 돌보다도 유연하고 흔들림을 잘 견뎌 사망자가 적었던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네덜란드 정부가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은 것처럼 아직까지는 종교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미증유의 재난 앞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은 칼뱅주의 사상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우상을 숭배한 포르투갈을 신이 벌하였다면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1783~18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산 분화는 인류역사상 임명피해가 가장 컸던 자연재해로 총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이었고 전 세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순히 분화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후 일어난 기후 변화 탓입니다. 극심한 겨울 추위가 찾아왔고, 몬순이 사라져 가뭄과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화산은 자연재해 중 유일하게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층권의 기체 조성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기권 하층부는 극지방에서 밀도가 낮아서 아이슬란드 화산은 성층권으로 물질을 보내기도 쉬운 탓에 피해가 더 컸지요. 다행히 화산 폭발의 영향은 곧 사라지기는 했지만, 인간의 온실가스는 현재 진행형이라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중국의 탕산 대지진은 당시 폐쇄적이었던 중국 환경 탓에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오저뚱 사후 4인방이 숙청당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중국 고전에서 지진은 황제가 죽어가는 상황 외에 두 가지 주요 원인으로 음기가 강해져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하들이 황제의 권력을 빼앗는 경우, 또다른 하나는 여자가 정치에 나서는 경우로요. 4인방, 그리고 중심인물이 마오의 아내 장칭이라는게 이 경우에 해당되어, 인민들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데 꽤 그럴싸 했어요.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의 죄수의 딜레마도 기억에 남습니다. 불어난 강물이 제방에 막대한 압력을 가할 때, 위험에서 마을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맞은편 제방을 부수는 겁니다. 건너편 이웃들을 익사시킴으로써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 '딜레마'라는 말이 걸맞는 상황입니다. 놀라운건 뉴올리언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건너편 제방을 부쉈다 - 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런 재난 상황 발생 시 일어났던 참극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소개된건 참 고마왔어요. 이 책에서는 학살 이유를 전통적인 세계관을 대체할만한 과학 이론이 부족하여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작위성에 대한 거부감이 폭력적으로 발현된 주장은 말은 되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인종 차별과 범죄는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1927년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에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제방을 보강하게 시켰다가, 제방이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서 수백 명의 흑인들이 죽도록 만든 범죄처럼요. 제방이 무너진 뒤 재방 붕괴지점 근처에 구조를 위해 동원된 배에도 백인과 흑인 모두 동등하게 타지 못했습니다. 간토 대지진 이후 불과 4년 뒤라 세계관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본과 미국의 당시 사회 특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수십년의 차이는 있었을터라, 단지 세계관에 따른 탓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참극과 학살은 인종 차별과 인종 혐오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는걸 분명히 해 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이외의 토막 상식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 미시시피강 홍수 때 구호활동을 지휘했던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건, 당시 흑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선 후 배신하여 흑인 표를 잃고 루스벨트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지원금이었던 10억 달러의 연방정부 자금 중 7억 달러가 불분명하게 사용되었다는 것도 새로왔습니다. 그냥 없다고 처리하기에는 너무 큰 돈인데, '잭 리처'가 나서야 하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요.
지진 자체에 대한 설명도 많은데, 지금도 지진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규모 5의 지진이 일어난다고 예측했지만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났다면 성공한 예측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도 새로왔어요.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규모 5의 두 배이기 때문이라지요. 어차피 지진 관련해서는 확률에 대한 논의를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하니까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세계사'라는 제목에 걸맞는 미시사적 관점으로 볼 부분이 많지 않은건 아쉽습니다. 주로 과학과 재해 전, 후의 대책에 대한 주장이 보다 많은 편입니다. 마지막 장은 아예 지진에 대비해야 하는 내용이고요. 앞서 리스본 대지진에서처럼 자연재해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역사적 관점으로 설명해주었으면 더 좋았을겁니다.
설명도 쉽고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도판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3/17

돈까스를 쫓는 모험 - 이건우 : 별점 2.5점

돈까스를 쫓는 모험 - 6점
이건우 지음/푸른숲

돈까스에 진심인 저자가 우리나라의 유명 돈까스집의 돈까스를 먹고 평가하는 식도락 먹부림 에세이. 개인의 기호와 철학에 따라 주제를 정해 맛집들을 깊숙하게 탐구했다는 점에서는 조영권 씨의 "중국집"과 "경양식집에서"가 연상됩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돈까스라는 주제에 더 깊숙이 집착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돈까스 자체는 물론 관련된 요리와 음식에 대한 정보와 특징들이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아래와 같이요.

  • "샐러드 하면 자연스레 이탈리아가 떠오르고 거기에 시저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로마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황제 샐러드 혹은 시저가 먹었던 샐러드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시저 샐러드는 탄생한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음식이다. 20세기 초, 미국과 가까운 멕시코 국경 도시 티후아나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이탈리아계 미국인 시저 카르디니(Ceasar Cardini)가 어느 날 가게에 몰려든 손님에게 낼 음식이 떨어지자 기지를 발휘해 남은 식재료로 샐러드를 만들어냈는데, 이게 바로 시저 샐러드의 기원이라고 한다."
  • "일본 돈까스의 시초 '렌가테이(煉瓦亭)'에서는 뭉텅뭉텅 썬 양배추를 육수에 데쳐서 돈까스와 함께 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남성 직원이 징용되어 일손이 부족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데치지 않은 양배추를 그대로 내기로 했다."
  • "히레는 안심을 뜻하는 필레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단어다."
  • "멘치는 무엇인가? 갈아놓은 고기를 뜻하는 영어 단어 민스(mince)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실제로 멘치까스는 고기와 양파를 갈아 뭉친 반죽을 튀겨서 만든다. 이런 음식,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맞다, 크로켓. 흔히 '고로케'라고 부르는 음식이 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멘치까스는 멘치고로케라고 부르기도 한다."
  • "코르동 블뢰는 음식 이름이기도 하다. 치즈를 햄으로 감싸 튀긴 음식으로, 스위스에서 처음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일본으로 전해졌고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오며 흔히 아는 치즈돈까스와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 "일본 나고야의 대표 요리인 히쓰마부시(장어덮밥) 전문점에 가면 먹는 방법을 상세히 설명해준다. 먼저 밥주걱으로 4등분하여 처음에는 밥과 장어 본연의 맛을 즐긴 다음 파와 김, 와사비 등을 곁들여 먹는다. 그 후에 찻물을 부어 말아 먹고, 마지막에는 가장 맛있었던 방법으로 마무리하는게 정석이다. 꼭 시키는 대로 먹을 필요는 없지만, 아무래도 가게에서 하는 제안이니 따라 해 보는게 좋다."
  • "후쿠진즈케는 무, 순무, 오이, 우엉, 작두콩, 연근, 차조기 등 일곱 가지 채소로 만든 장아찌로 일본에서는 카레 가게에서 단골 반찬으로 볼 수 있는 반면, 그 외에는 반찬으로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음식이다. 카레와 후쿠진즈케를 함께 내는 전통은 의외로 역사가 깊어 1900년대 초반, 일본 최대 해운 회사인 NYK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会社)의 유럽 항로에서 1등석 식사로 카레와 함께 낸 것이 시초라고 한다.
  • 한편 우리나라에도 후쿠진즈케와 아주 비슷한 반찬이 있는데 오복채라고 부른다. 후쿠진즈케가 일곱 가지 채소로 만들기에 칠복신을 뜻하는 시치후쿠진(七福神)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는 점을 떠올리면, 오복채 역시 이름이나 형태로 봤을 때 같은 뿌리를 갖는 음식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오복채는 무, 연근, 오이, 다시마, 우엉, 이렇게 다섯 가지 채소로 만든다(재료는 만드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 "조금 생소할 수 있지만 일본에서는 가게 이름 끝에 붙은 ‘안(庵)’은 대개 소바 전문점을 의미한다. 안이라는 한자는 우리식으로는 암자(庵子)를 뜻하는 암으로 읽는다. 그런데 하필 안이라는 글자가 소바집을 뜻하게 되었을까? 언급했듯, 안이라는 글자 자체가 암자, 즉 사찰 내에 승려가 머무는 작은 집을 뜻하는데, 이는 결국 절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절과 소바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는 점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 기본적으로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따라 사찰음식은 철저히 채식일 수밖에 없다. 메밀가루로 만드는 소바는 이런 식단에 꼭 들어맞는다. 또한 면이라는 음식은 일단 만들어두기만 하면 끓는 물에 데쳐 빠르게 대량 조리하여 낼 수 있어서 신도를 비롯해 많은 손님이 찾아오는 절에서 간편하게 대접하기 좋은 음식이다. 마지막으로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는 종종 피난처로 쓰이기도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보존성이 우수하다는 장점도 있다. 실용적인 장점 외에도 메밀은 승려들이 수행 중에 자유롭게 섭취할 수 있는 곡물이기도 하다. 일본 천태종에는 승려가 수행 중에 쌀, 보리, 조, 기장, 콩 이렇게 다섯 가지 곡물을 먹지 않는 특정한 기간이 있는데, 메밀은 금식해야 할 곡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더없이 소중한 식재료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바라는 음식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사찰 및 승려와 함께 발전해왔다."
  • "소바집을 뜻하는 ‘안’ 자의 유래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에도 시대 아사쿠사에 도코안(道光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다. 여기에 기거하던 주인이 이른바 소바 명인이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소바가 오죽 맛있었으면 사찰 내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손님이 몰려들어 결국 주지스님이 소바 금지령을 내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에도의 소바집들이 하나둘씩 이름 뒤에 안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소바집에 안을 붙이는 유래라고도 전해진다."
  • "타레는 우리가 익히 아는 소스와 거의 흡사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소스는 주로 양식풍 요리에 쓰며 조리 중에 넣거나 혹은 완성된 요리 위에 뿌리는 액체를 말한다. 타레는 양식 외의 요리에 쓰며 조리 중에 넣거나 혹은 완성된 요리를 찍어 먹는 액체를 말한다."
  • "썰’로 나도는 싸만코의 진정한 유래, 서머(summer)를 일본어식으로 발음한 사마(サマー)와 팥을 뜻하는 앙코(あんこ)가 합쳐져 싸만코가 탄생했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

개인적인 돈까스를 먹는 방법에 대한 설명도 아래와 같이 상세합니다.

"내가 일본식 등심 돈까스를 먹는 방식을 설명해보자면, 일단 가운데에서 한 조각을 있는 그대로 먹어본다. 밑간이 훌륭하다면 양끝 조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레몬 즙만 뿌려서 먹는다. 밑간이 약하다면 먼저 소금을 찍어 먹고 양끝에 가서야 비로소 소스를 곁들여 먹는다. ‘순정’보다는 소금, 소금보다는 소스 맛이 강하기 때문에, 마치 회나 초밥을 먹을 때 담백한 부위에서 점점 기름진 부위로 옮겨가듯 맛의 농담(濃淡)에 신경 써서 먹는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음식의 군사"가 떠올라 재미있었어요. 방법은 다르지만 발상은 비슷하지 않습니까?

저자의 글 솜씨도 좋습니다. 유쾌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록된 거의 모든 가게가 서울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 생활권이 아닌 강북(마포 등)에 위치한 가게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나 지방보다는 접근성이 뛰어나니 언젠가는 한 번 가 볼 기회가 있겠지요.

그런데 무시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은 그건 바로 디자인입니다. 구입 의욕을 사라지게 만드는 표지에서 시작해서, 소개하는 가게 및 돈까스의 사진이 너무 볼품이 없어요. 돈까스가 핵심이면 돈까스 사진이라도 다양하게 올려줬어야 했습니다. 솔직히 수록된 사진은 그렇게 맛있어 보이지도 않더라고요.
사진과 도판이 풍성했더라면 별 4점도 아깝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지금 결과물은 별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제 기억에 남아있든 돈까스 가게는 '허수아비 돈까스' 본점입니다. 두툼한 고기에 바삭한 튀김옷이 어우러진 일본식 돈까스였는데 당시(약 30년 전)에는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음식이었지요. 처음 먹었을 때 정말이지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체인점 사업으로 이어진 것까지는 아는데, 십 수년간 가 본 적이 없네요. 마침 생각난 김에 찾아봤더니 아직은 건재한 듯 하니, 근처에 가 볼일이 있다면 추억삼아 한 번 방문해봐야겠습니다.

2023/07/28

숫자 갖고 놀고 있네 - 폴 록하트 / 김정은 : 별점 2.5점

숫자 갖고 놀고 있네 - 6점
폴 록하트 지음, 김정은 옮김/생각의서재

수, 숫자가 본질적으로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찰하는 책. 숫자 체계가 생겨나서, 기호화되는 과정과 가상의 부족인 바나나 부족 등의 예를 거쳐 이집트 상형문자, 로마, 중국과 일본의 한자 표기까지 소개가 상세합니다. 본질적인 의미를 되짚기 위함이지요.
이집트의 계산용 동전, 로마의 타불라, 일본의 주판 등 계산 방법 소개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는데, 타불라 계산법이 주판과 유사하다는건 흥미로왔습니다. 주판으로 어떻게 계산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인상적이었고요. 인도 숫자 설명에서 0이 그리 대단한게 아니라는 말도 신선했습니다.

사칙연산에 대해서는 특별히 공들여서 설명하고 있으며, 내용도 방대한데 여러가지 팁들이 재미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453과 866을 더한 뒤 395를 빼야 한다면, 덧셈 과정에서 받아올림을 아예 하지 않고 답을 12 11 9 (즉, 십이백 십일십 구)로 적은 뒤에 바로 395를 빼는 식입니다. 그러면 받아내림을 전혀 하지 않고도 924라는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게 숫자를 가지고 노는것이겠지요. 사칙연산에서 분수 항목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요.
계산기가 있는데 왜 산수를 공부해야 하느냐는 평상시 궁금증에 대한 답도 실려있습니다.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산수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에서 나오는 지적이고 창의적인 시각을 갖추는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래서 저자가 단순한 사칙연산을 새롭고 재미나게 바라보았나봅니다.

그런데 사칙연산 분량은 지나치게 많았습니다. 숫자에 대해 잘 알려주고자하는 책의 취지는 알겠지만 쉬운 이야기를 너무 길고 장황하게 썼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힘들었어요. 이 책을 읽고 이해할 정도의 독자라면 사칙연산은 당연히 알고 있을텐데 말이죠.
또 처음에는 아이들이 읽기 딱 좋다고 생각했지만 뒤로 가면 많이 어려워지는 편입니다. 숫자를 가지고 놀기는 버거울 정도로요.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이런 걸 보면 어떤 독자가 읽어야 적합할지 감이 잘 오지는 않네요. 최소한 저는 적합한 독자는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4/21

이집트 상형문자 배우기 - 강주현 : 별점 2점

이집트 상형문자 배우기 - 4점
강주현 지음/정인출판사

제목에 혹해서 구입한 책. 제가 고대 이집트로 전생할지도 모르니 이런건 배워두면 좋을까 싶어서 구입해 보았습니다.
상형문자의 배경에 대해 설명하는 앞부분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간략한 이집트 역사와 피라미드 변천사 등 고대 이집트 역사의 개요를 깔끔한 도판과 함께 잘 설명해주고 있거든요. 상형문자에 대한 책 답게 문자의 역사도 소개해주고 있는데,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집트 언어와 문자 사용을 금지했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상형문자를 읽고 쓰는건 고위층만 가능했고, 서기들은 700개가 넘는 문자 기호를 배워야 했다고도 하고요.
뒤이어 로제타 스톤의 발견과 상폴리옹의 문자 해독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상형문자가 각 기호 안에 음가값을 가진 알파벳형 문자였고, 여기서 찾아낸 음가가 뜻을 가진 표의 문자와 결합하여 문장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라는걸 알려줍니다.

이런 배경 설명이 50여 페이지 가량 진행된 후, 본격적인 상형문자 학습이 시작됩니다. 동물들이 바라보는 방향 순서, 그룹지어진 글자는 위에서 아래 방향이라는 등의 '읽는 방법'과 같은 기본 정보에서부터 시작해서 실제 무덤 벽화를 통한 예제들, 음가를 갖춘 상형문자 목록과 뜻을 지닌 표의 상형문자의 대표적인 것들이 소개되는 식으로 조금씩 상세하게 학습이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교과서를 보는 듯한 구성으로 전개됩니다. 심지어 중요 항목 설명 뒤에는 연습문제까지 실려있으니 말 다했죠.
사람이 앉아있는 상형문자가 손을 어떻게 들고 있는지, 다리 모양은 어떤지 등에 따라 다양한 뜻을 가졌다는게 신기했습니다. 게다가 뒤에 오는 문자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도 있고 표의문자로 만드는 기호가 별도로 있는 등 복잡도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같은 발음이지만 다른 단어는 결정사라는 기호로 해결하고요. 배우는건 정말 만만치 않아 보이네요. 
여러가지 기호, 대표적인 읽는 방법도 소개됩니다. 모음없이 자음만 있었다네요. 형용사가 명사 뒤에, 동사 + 주어 + 목적어 순서를 가지며 지시 형용사는 명사 뒤에 오는 등 간단한 문법 소개도 빠지지 않고요. 마지막은 투탕카문 무덤 벽화를 통한 실전 학습입니다. 

그런데 교과서같이 구성만 했을 뿐, 실제 교과서같은 책으로 볼 수 있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 단락의 수준이 일정치 않고, 하나의 단락에서 모든 정보를 주지 않고 개요만 대충 설명하고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불만인건 상형문자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구입했는데, 정작 책의 대부분은 상형문자를 읽고 쓰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발음대로 읽고 쓰기만 하는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한글 자모로 자국 언어를 표시하는 사업이 진행되었던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 일화가 떠오르네요. 한글 자모를 잘 이해하고, 한국 문화에 친숙해지기야 했겠지만 그렇다고 한글로 언어 소통이 되는건 아니잖아요? 차라리 아주 작더라도 '언어'로 쓸 수 있는 수준으로 책이 집필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게다가 단락별 설명이 부실한 탓에, 뒤로 가면 갈 수록 외우고 배우는건 거의 포기하게 됩니다. 앞 부분을 잘 이해했다고 해서 뒷 부분 내용을 알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교과서식 구성을 채택한 이유를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간략한 개요 정도를 접하는데는 괜찮지만 기대만큼 재미있지 않았고, 상형문자를 배우는데 성공하기도 힘든 책이라 여러모로 애매했습니다. 분량에 비하면 가격도 비싼 편이고요. 이대로는 고대 이집트로 전생해봤자 출세하기는 어렵겠습니다.

2023/04/16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6. 비스크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6. 비스크 인형
어두운 마을에서 마와리 가의 한 귀퉁이만 희미한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담벼락에 세워진 몇 개의 화환이 희미한 흰 그림자처럼 보였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몇 대의 차들.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일행이 역으로 향하는 길로 사라졌다. 토시오는 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손에는 마사오의 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고, 양쪽에 하얀 연등이 노란 빛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정면에 흰 나무 제단이 놓여 있고, 검은색 액자 속에는 토모히로의 얼굴이 있었다. 어제 마이코가 보여줬던 사진과는 느낌이 달랐다. 웃지 않는 토모히로는 흑백이라서 그런지 훨씬 더 우울해 보였다.
흰 천이 걸린 관 앞에서 스님이 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은 야위었지만, 목소리는 힘찼다.
"안녕하세요, 또 뵙게 되었군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마이코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옅은 색의 안경을 쓴 소우지였다. 마이코는 깜짝 놀란 듯이 소우지를 바라보았다.
"....당신, 누구죠?"
마이코는 생각하는 척했다.
"싫은데요. 벌써 잊어버리셨나요. 어제 만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요."
소우지는 마이코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보세요, 샹보르관 앞에서 나를 지나쳤잖아요."
마이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소우지는 토시오를 살짝 쳐다보았다,
"당신은 젊은 남자와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한 번 본다면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과 꼬 닮았으니까."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
어제 마이코를 본 소우지가 같은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실례지만, 당신의 얼굴은 내가 좋아하는 인형과 꼭 닮았어요.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나요?"
"아니요, 하지만 주모우라는 이름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인형이라고 하니까 기억이 났어요. 프랑스의 인형 제조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거 참 반갑네요. 내가 만난 여성 중 주모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런데 비스크 인형이 뭐지요?"
"19세기에는 고급 패션 인형이 활발하게 만들어졌어요. 비스크 인형은 주모우 사가 1840년대에 개발한 인형이에요. 인형의 목이 아름다운 도자기로 만들어졌지요. 라틴어로 비스는 두 번이라는 뜻이고, 큐이는 구운다는 뜻입니다. 즉, 두 번 구웠다는 뜻이죠. 고온으로 구운 초벌구이 목에 색을 입히고 다시 저온으로 구우면 지금까지 없던 아름다운 피부색이 만들어져요. 피에르 주모우의 인형은 모두 당신과 같은 매력적인 얼굴로 만들어졌어요."
"고마워요. 비스크 인형이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피에르의 아들인 에밀 주모우는 인형의 기능적인 면에서도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용수철 장치로 인형이 움직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마술을 부리기도 하죠. 오르골이 달린 것도 있고, 소리 내어 말하는 인형도 만들어졌어요. 저도 몇 점 가지고 있는데,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군요."
"꼭 보고 싶네요."
"당시는 고체, 슈미트, 스테넬 등 인형 제작자들의 군웅할거 시대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왜인지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에 가장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자의 마음도 빼앗으려는 거겠지요."
소우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토모히로와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요."
마이코는 토시오가 들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저거 마사오 씨의 가방 아닌가요?"
"네, 어제 마사오 씨를 차에 태워 드렸어요. 그 때 가방을 잊어버리셔서 가져다 드리러 왔어요."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당신들이 마사오 씨의 생명의 은인이었군요."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토모히로는 안타깝만, 마사오 씨가 경미한 부상으로 끝난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독경도 끝났을 테니 나중에 옆방으로 오세요."
"하지만 마사오 씨와는 어제 만났을 뿐입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방금 전에 회사 사람들이 방문했던 탓에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라, 마사오 씨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소우지는 토시오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 방으로 올라가 두 사람을 초대했다.
국화 생화 한 가운데에 마사오가 앉아 있었다. 원래의 하얀 얼굴은 상복의 검은색에 싸여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가느다란 어깨는 그대로 슬픔의 선이었다.
마사오 옆에 작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은 마사오의 어머니로 생각되었다. 눈빛이 마사오를 닮았다. 어제 대문 앞에 서서 마사오와 토모히로를 배웅하던 노파였다. 작은 무릎 위에는 낯익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도망치려 하는 아이를 노파는 계속 달래고 있었다.
마사오 앞에는 대머리 노인이 앉아 있었다. 토모히로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었다. 토시오는 마와리 데츠바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독수리 같은 눈빛과 한 줄로 굳게 다문 입이 굳은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데츠바는 쪼그리고 앉아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다. 뚱뚱한 몸을 구겨 앉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데츠바 옆에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토시오는 이 여성의 존재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마이코의 입에서 단 한 번도 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는 스물다섯, 여섯 살, 빨간 머리, 입술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밝은 느낌의 미인이지만 검은색 옷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마사오의 목소리는 토시오의 귀에 닿기도 전에 경을 읽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마이코는 두 손을 모아 염주를 쥐고 있었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옆에서 바라보며 향에 불을 붙였다.
소우지가 나와서 두 사람을 옆방으로 안내했다. 해바라기 공예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두 사람에게 차를 끓여주었다.
잠시 후 경을 읽는 소리가 끊겼다. 스님이 다른 방으로 간 것 같았다.
"잠깐만요, 마사오 씨"
소우지가 불렀다. 마사오가 방으로 들어오자 소우지는 가방을 내밀었다.
"이분들이 전해주셨어요. 고맙다는 말을 해야지."
마사오는 깜짝 놀라며 가방을 쳐다보았다.
"없어진 줄로만 알았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토시오는 마사오의 눈빛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팔에서 떨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제가 떼어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마사오는 가방을 소중히 받았다.
"내용물을 확인해보는게 좋겠어."
소우지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런 무례한 짓을..."
마사오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토시오는 무거운 공기로부터 벗어난 것 같았다.
"상처는? 아프지 않습니까?"
마사오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 뺨을 바라보았다. 뺨에는 검붉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토시오는 상처의 흔적보다 구부러진 하얀 목덜미에 시선이 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리는?"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걱정 끼쳐 드렸네요."
데츠바가 와서 앉자 소우지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데츠바는 말없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 주모우.......실례지만,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군요."
마이코는 명함을 꺼냈다. 소우지는 마이코의 명함을 보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넣었다.
데츠바 옆에 앉아있던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은 소우지의 여동생이었다. 소지는 마사오를 구해줬을 때의 토시오의 행동을 보고 온 듯이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오리(香尾里)였다.
"카오리, 너도 그렇게 영웅에게 구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쥰키치가 알게 된다면 화내지 않을까?"
소우지가 말했다.
"오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카오리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카오리는 쥰키치와 내년에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시마키 쥰키치 군은 해바라기 공예의 유능한 개발부원이랍니다."
카오리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우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는 카오리의 손을 뿌리치고 테이블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토우이치군, 엄마한테 혼날 거야. 또 이빨이 상할지도 몰라."
카오리가 말했다.
"정말 단 것을 좋아한다니까."
마사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소우지는 두 사람을 비교하며 말했다,
"아빠가 너무 엄격했던 것 같아. 본인이 단 것을 싫어했으니까. 아이는 금지하면 더 많이 먹고 싶어하는 법인데 말이지."
소우지의 비판적인 말투에 카오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빠는 토우이치를 정말 귀여워 해 주었어요. 치과에 데리고 간 적도 있었죠."
마사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니 양손 사이에는 하얀 손수건이 비벼져 있었다. 토우이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머니의 슬픔을 감지한 듯 마사오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봉제 곰 인형을 들고 왔다.
"자, 토우짱, 이제 자러 가자. 곰 인형을 들고 ......"
"엄마, 부탁해요"
마사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토우이치를 맡기려 했다. 토우이치는 봉제 곰 인형을 내던졌다.
"오, 오랜만인데."
소우지는 곰을 집어 들었다.
"토우이치는 곰 인형을 가지고 자나요?"
"그게 없으면 잠을 잘 못 자요."
마사오가 말했다.
소우지가 계속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이상하네. 안 움직여."
곰의 목에 달린 스위치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움직이는 장난감이에요?"
마사오가 들여다보았다.
"마사오 씨는 장난감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봐요. 배터리가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배터리가 있다면 제대로 걸을 수 있을 텐데........"
소우지는 곰 인형의 등을 열어 보았다.
"야, 배터리가 없구나. 다음에 건전지를 사서 아저씨가 움직여 주도록 하지. 이 장난감은 누가 사 준거죠?"
"토모히로요."
소우지는 나쁜 말을 들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토우이치는 소우지의 손에서 곰 인형을 빼앗았다. 마사오의 어머니는 그제서야 토우이치를 안고 방을 나갔다.
"항상 혼자 자요?" 
소우지가 물었다.
"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마사오는 토우이치의 흐트러진 옷깃을 고쳐주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좋은 습관이네."
"토모히로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소우지는 입을 다물었다. 마사오는 일부러 계속 토모히로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같았다.
마침 옷을 갈아입은 스님이 검은색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남색 도포 차림의 스님은 바쁜 정치인 느낌으로, 말도 많았다. 어느새 자신이 젊은 시절 유학했던 유럽의 풍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형이 일찍 죽어서 가업을 잇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서양미술로 가문을 일으켰을 텐데 말이죠."
그는 물 한 잔을 마시며 말했다.
마사오가 부드럽게 토시오와 마이코의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모히로가 부탁한 것이 있었군요."
마이코 일행이 토모히로의 차를 뒤쫓고 있는 것을 택시 기사가 눈치챘던 모양이다.
"그래, 하지만 이제 끝났습니다."
마이코도 주변을 피하듯 말했다.
"비밀이었나요?"
"글쎄요......"
"저는 토모히로의 아내입니다. 그 조사 내용을 알려주시겠어요?"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 거래할 회사의 신용조사였어요. 해바라기 공예에는 비밀로 해달라는 조건으로요."
"새로운 거래 ....... 그 조사는 끝났나요?"
"이제 보고서 작성만 남았어요."
"그 보고서를 저한테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에게? 읽고 어떻게 하실 건가요?"
"......토모히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남편이 당신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라도 있나요?"
"어제 러더퍼드 데이비스 씨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토모히로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요."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격렬한 명령을 떠올렸다. 토모히로가 왜 있지도 않은 약속을 위해 마사오를 이용하려 했던 것일까?
"나는 최근 들어 토모히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어요. 나는 토모히로의…."
마사오는 말끝을 흐렸다. 스님이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소우지가 부탁한 택시가 아직 오지 않았다. 소우지는 택시 회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이코는 자신의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소우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녀에게 호송을 받다니, 고마운 일이군."
스님이 말했다.
"그 대신에, 승차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고 현장에 있었던게 당신들이었나요?"
마이코와 스님이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절이 있는 곳은 데츠바의 집과 같은 오노와였다. 토시오는 처음 가는 오노와라는 곳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맞습니다. 순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게 설마 운석일 줄은 몰랐네요."
"구약성경에 있잖아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돌을 내려 원수를 죽였다는 말이요. 이 큰 돌이라는 것은 운석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운석비였다고 볼 수도 있을테고."
"운석비? 비처럼 운석이 떨어지는 게 있나요?"
"거대하고 부서지기 쉬운 성질의 운석은 지구 대기에 뛰어들면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운석비죠."
"거의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아니, 얼마 전에도 보도된 적이 있었어요. 1976년 중국 동북부 길림성 지역에 떨어진 운석비는 그 범위가 무려 오백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수집된 운석은 백 개 이상, 최대 1,770Km의 운석이 떨어진 자리에는 직경 2m의 분화구가 생겼다고 합니다."
"도시에라도 떨어지면 대재앙을 피할 수 없었겠군요"
"떨어진 곳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죠. 하여튼, 토모히로 씨도 불운한 일을 당했어요."
"데츠바 씨도 낙담했을 것 같네요."
"글쎄요, 고집센 녀석답게 별로 티는 내지 않더군요. 물론 마음속으로는 그렇지야 않았겠지만….."
"그렇게 고집많은 분으로 보이지는 않던데요."
"당신은 처음 봤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데츠바를 압니다. 꽤나 대단한 녀석이에요. 첫째, 그 나이가 되어도 의사에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건강해서 그런게 아닐까요."
"그럴리가, 나야 건강하지만 데츠바는 얼마 전에 가벼운 뇌출혈로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런데도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고요?"
"아니, 그때는 갔죠.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이번에는 혈압이 너무 내려가서 2주일 동안 머리가 아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온 의사를 돌려보내고 말았죠. 그런데 데츠바의 의사 혐오증은 이 때 시작된 것이 아니에요. 그의 아내가 죽은 이유가 의사의 오진 때문이었거든요. 장폐색을 잘못 진단했었지요. 데츠바의 동생 류키치, 그는 토모히로의 아버지인데, 류키치의 죽음도 의사 탓으로 믿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사오 씨에게 혈압을 재도록 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가?"
“그녀는 원래 큰 종합병원의 간호사였어요. 혈압 강하제도 마사오 씨가 구해 온 것만 마십니다. 매일 아침 한 알씩, 캡슐에 든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사가 그런 식이에요. 그 고집스러움은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데츠바의 아버지는 어른스러운 분이셨지만…..."
"데츠바의 할아버지라고 하면 해바라기 공예를 만들었던 호도라는 분인가요?"
"맞아요. 호도씨는 내가 어렸을 때 두세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데츠바를 꼭 닮았어요. 다만 스케일은 더 컸지요. 메이지의 낭만도 가지고 있었고요. 어쨌든 저 이상한 나사 저택을 지은 사람이었으니까."
"나사 저택... 이름만 들어봤어요."
"마침 절로 가는 길에 나사 저택 앞을 지날 거예요. 한밤중의 나사 저택은 또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죠."
"오싹한 건물인가요?"
"지금은 낡아서 그래요. 새 건물이었을 때는 묘하게 활기차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데츠바 씨는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네, 아들 소우지, 딸 카오리와 함께요. 살기 불편할 것 같지만, 소우지는 일종의 호사가고, 카오리는 화가 지망생이니 그 집에 잘 어울립니다."
"언제쯤 지었습니까?"
"다이쇼 초기, 아직 서양 건축이 드물었던 시대. 정석적인 건축법에 맞지 않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슈발의 궁전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겁니다."
"슈발의 궁전?"
"프랑스 남부 드롬주 오트리브 마을에 세상에 보기 드문 건축물이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 프랑스에 갔을 때 관람료를 내고 구경해 본 적이 있지요. 돌과 시멘트로 마구잡이로 만든 궁전입니다. 궁전이라고는 해도 인도 사원을 연상시키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옆은 페르시아풍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벽면에는 여기저기 기괴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요. 마치 아이가 종이 한 장에 생각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유자재로 성을 그려나간 것처럼 슈바르의 궁전에도 온갖 상상력이 쏟아 부어졌습니다. 단 한 사람의 손길 하나로요."
"단 한 사람의?"
"네, 우편배달부 페르디난트 슈발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돌을 주워와서 짓기 시작했고, 완성될 때까지 무려 34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조개껍데기를 주워다가 집을 지은 사람, 빈 병으로 건축을 한 사람 등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가하면 이상한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 동물입니다. 돈이 없어도 그러한데, 돈과 권력이 있으면 오죽하겠습니까. 엄청난 건물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다이묘들은 더욱더 큰 성을 짓고 싶어했지만, 절반은 도락이라고 할까, 취미라고 할까, 장난 같은 부분이 있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천수각과 같은 아름다움은 만들 수 없죠"
"아름다움 못지않게 기묘한 동물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장난감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신전이나 궁전에는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크로커다로폴리스의 미궁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아니요."
"고대 이집트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미궁인데 열두 개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삼천 개의 방이 있었다고 해요. 그 기술과 규모는 피라미드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로였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궁전 안에는 여러 가지 큰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문을 열면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방.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강렬한 빛이 쏟아져 눈부시게 빛나는 방. 바닥이 파도처럼 움직이는 방……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이 미궁의 수수께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 미궁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미궁에는 왕과 신성한 악어가 조용히 묻혀 있었습니다. 미궁이라고 하면 테세우스가 잠입했다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미궁도 유명하죠. 테세우스는 아름다운 아리아드네가 준 비단실을 풀면서 미궁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시심을 자극하지요. 아무래도, 미녀가 등장하니까요. 미녀는 어디에 곁들여도 좋지요"
"그건 그렇겠죠."
마이코는 여유롭게 웃었다.
"로마 시대에는 시빌의 신전이 유명한데요. 이 신전에 있는 제단에 불을 붙이면 저절로 안쪽의 성소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이 속임수는 잘 먹혔던 모양이에요. 후대에 이르러서는 여기저기서 같은 장치를 갖춘 신전이 만들어졌다니까요. 속임수를 모르는 신도들은 상당히 놀라고 두려워했다죠. 옛날에는 신기한 작용을 하는 사술이 곧 종교와 연결되곤 했습니다. 사실 이 장치는 이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에 달궈진 공기의 팽창하는 힘이 신전 문에 전달되는 것 뿐이니까요. 옛날 사람들은,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예컨데 자동문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라도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님이 장난을 치면 속아넘어가 버릴 겁니다."
"스님도 그런 수법을 사용한 적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그래서 가난합니다. 종교나 돈과 무관하게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사실 대단한 문화에요. 서양에는 취미로 하는 카라쿠리 집들이 즐비하게 있어요. 실제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 카라쿠리 저택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집이란 살 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사무실에는 책상과 전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되면 스님 같은 건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스님은 큰 소리로 웃었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하면, 마와리의 나사 저택 정원에는 정교한 라비린토스가 만들어져 있답니다."
"미궁이라고요?"
"미로입니다."
토시오는 스님의 기상천외한, 초현실적인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호랑가시 나무 울타리로 만들어진 미로죠. 호랑가시 나무가 너무 빽빽하게 자라 있어서 건너편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길은 한 사람이 편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인데, 여러 가지 막다른 골목이 만들어져 있어 쉽게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미로의 중심에는 뭐가 있는 건가요?"
"아무것도 없어요. 중앙은 다다미 10쪽 정도 넓이인데, 그냥 돌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에요. 이 미로를 만든 호도는 자주 미로 중앙에 앉아 명상에 잠기곤 했다고 합니다. 미로 안에서는 어떤 방해물도 들어오지 않으니 아주 좋았겠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미로 속을 돌아다니는 호도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답니다. 일종의 루드비히 2세 같은 느낌인데 뭐, 서양식 미로는 지금도 드물겠죠."
"서양에서는 정원 안에 미로를 자주 만들지 않나요?"
"미로가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바로크 시대였을 거예요. 미술사에서 말하는 매너리즘의 전성기였어요. 이상향 '유토피아'로서의 우주를 세련된 모습으로 창조하는 것을 중시했던 시대입니다. 정원에는 반드시 미로와 분수, 카라쿠리와 시계인형이 놓여졌어요. 지하에는 동굴을 파고 물장난으로 움직이는 동물 등을 모아 놓았고요. 17세기 프라하 궁정에는 전 세계의 기괴한 물건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 '스펙타클라 파라독스렘(Spectacula Paradoxa)'이 있었습니다. 황제 루돌프 2세는 알킨볼트라는 예술가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에게 기괴한 그림 '트롱프뢰유'를 그리게 하고, 여러 가지 기괴한 물건을 만들게 했습니다. 황제의 취미의 영향일까요? 17세기 프라하에는 연금술사, 수정술사, 예언가, 마술사, 점성술사, 주술사 등이 우글거렸다고 하네요. 코펠리우스의 모델이 된 기계공 코펠키, 골렘을 만든 레웨 베자렐도 이 시대 사람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카라쿠리와 금발의 마녀와 같은 움직이는 인형을 제작한 트로이의 오르간 연주자 레잔도 이 시대 사람이었고요. 금발의 마녀는 훗날 존 팬리 경 살해 사건에서 신비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길은 좁아지고 오르막길이었다. 오노는 언덕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 도시의 불빛은 멀리 눈 아래로 사라졌다.
"그 시대는 예술과 과학, 주술과 마법, 속임수, 사술이 혼돈의 미분화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헝가리의 켐페른 남작이 만들고 레겐스부르크의 기계학자 레오나르드 멜첼의 손에 의해 유명해진 자동 체스 기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계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인형을 움직이는 물건이었죠. 실제로는 속임수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당시 카라쿠리의 대부분은 이런 속임수를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이는 에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훈몽감초(訓蒙鑑草)”라는 마술의 수수께끼를 풀이한 책이 1730년에 간행되었는데, 기적적으로 현존하고 있어 당시의 마술을 알 수 있는데, 그 안에 천신기 승려의 차술이라는 속임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 살 정도의 어린이를 차대 위에 올려놓고 입과 팔다리로 인형을 다양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죠. 중국인 인형 휘파람 불기 장치 속임수도 비슷한 속임수에요. 인형의 휘파람 관이 지하를 통해 대기실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이 이 관에 숨을 불어넣거나 목소리를 보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66년이 지나 1796년에 출판된 “기교도휘(技巧図彙)”를 보면 그런 속임수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오직 기계적인 장치만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유명한 차 운반 인형을 비롯한 모든 카라쿠리는 지금도 복원이 가능합니다. 하여튼, 이 시기에 기술과 사술은 깨끗하게 분리된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멜첼의 자동 체스기사와 같은 다소 마술적이지만 매력 넘치는 아이디어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동 인형이 진지하게 '진지'해졌다는 것이군요."
"네. 옛날에는 연금술사들도 금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다른 물질을 어떻게 금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열중했던 것 같아요. 1780년대에 카리오스트로라는 이름의 연금술사의 실험은 많은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도가니 안에 구리와 마테리야프리마라는 비약을 넣고 봉인합니다. 무게는 정확하게 측정되고, 도가니는 교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가니가 뜨거워진 뒤 봉인을 풀면 용해물 속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금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모든 무게를 재는데, 실험하기 전의 무게와 실험 후의 무게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고요."
"정말인가요?"
"지금 이대로 실험을 해도 학자라면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지요. 학자는 마술사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속임수가 있는 거군요."
"그렇져. 카리오스트로는 처음에는 도가니를 갈아 끼우는 유치한 방법을 썼는데, 그것이 들통난 뒤, 이 방법을 고안해냈다고 합니다. 자랑할 만한 트릭이에요. 도가니의 바닥에 금을 깔았던 겁니다. 금 위에 아말감으로 만든 얇은 바닥을 만들어 덮었고요. 열을 가하면 저온에서도 녹는 성질이 있는 아말감이 녹으면서 밑에 숨겨져 있던 금이 ......"
그때 갑자기 좌회전하는 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토시오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토시오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자 스님이 다시 말했다.
"어이쿠, 어디까지 말했더라?"
"나사 저택의 미로 이야기였어요."
마이코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탈선할 것이 뻔했다.
"그랬지. 그 미로는 좀 특이한 형태입니다. 이건 말씀드렸나요?"
"모양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미로는 정오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중앙에 놓여 있는 돌 테이블도 오각형인 거죠. 울타리로 만드는 형식은 햄튼코트의 미로에서 따온 것이겠지만, 역시 호도답게 똑같이 흉내내지 않았더라고요. 호도는 미로를 만들어내는 재미도 알고 있었던 거지요."
"햄튼코트의 미로라고 하면?"
"윌리엄 3세의 햄튼코트 궁전에 만들어진 미로를 말합니다. 이 미로는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요. 나도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파란 눈을 가진 여자와 함께요."
"로맨틱하네요"
"그런데 관광객이 가득 차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죠. 관광객이 가득 차서 빙빙 돌고 있었거든요. 둘만 남게 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간 거지요.. 미로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미로에 들어가면 왼쪽으로 가고, 다음 두 갈림길은 모두 오른쪽으로, 그 다음에는 모두 왼쪽으로 꺾으면 미로의 중앙에 도착할 수 있는게 순서거든요. 미국에서는 1941년 미국 인디애나주의 하모니 미로가 복원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미로는 종교적인 교회 미로죠."
"재미로 만든게 아니라요?"
"애초에 인간의 참된 길과 죄악으로의 길이 뒤섞인 미로는 올바른 참된 길을 걷는 것의 어려움을 상징합니다. 아까 말한 크레타 섬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스 왕의 미궁 안에는 소머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서식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전설 역시 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종교적 동굴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산 하나를 깎아 만든 오부네의 대동굴도 지금까지 종교적 수행의 도장이 되고 있고요. 또한 로자몬드 궁전의 미로는 헨리 2세가 애첩 로자몬드를 왕비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에 따라 미로를 만든 동기도 다양하죠."
"마와리 호도의 경우는 어떨까요. 어떤 사람의 말에 따르면, 호도는 본질적으로 장난감 같은 것을 싫어했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그 사람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지요. 벼락부자 시대에는 10엔짜리 지폐의 10을 1로 바꿔서 요정에서 1엔으로 썼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으니...... 자, 나사 저택이 저기 보이네요."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길 왼쪽은 다소 가파른 경사면에 관목인 관목이 이어져 있다. 오른편 안쪽, 나무들 사이로 달빛에 비춰진 검푸른 덩어리가 보였다. 그  덩어리는 불규칙하게 늘어선 바위처럼 보였다. 토시오는 속도를 줄였다.
나사 저택은 생각보다 큰 건물이 아니었다. 보통으로 지었다면 평범한 2층짜리 양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설계자는 강렬하게 대칭을 기피한 것 같았다. 아메바를 닮은 비대칭 형태가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저 첨탑은 프랑스의 포 성을 모방한 것 같은데, 나사 저택의 탑은 오각형으로 되어 있네요."
탑이라기보다는 건물을 관통하는 창끝처럼 보였다. 건물 중앙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저택의 맞은편은 저지대여서 작지만 연못이 있어요. 바위 사이를 뚫고 물이 솟아나고 있다고 하는데, 크기에 비해 물의 양이 많습니다. 연못 건너편에 예의 오각형 미로가 만들어져 있어요."
물론 차 안에서는 연못도 미로도 볼 수 없었다. 저택 안에는 불빛 하나도 없다. 낡은 대문 기둥에 약한 불빛이 켜져 있을 뿐이다.
차는 곧 나사 저택을 지나쳤다.
5분 정도 더 가니 나사 저택 옆으로 오래된 절이 보였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어요."
스님이 마이코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로, 프라하의 궁정, 햄튼코트의 궁전, 나사 저택 ......
토시오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좁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복서로서의 추억이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편함에 엽서가 들어 있었다. 에도 시게오(江藤重雄)가 보낸 것이었다. 토시오와 동일본 신인왕전에 출전하기 직전, 에도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에도는 이 소식을 듣고 슈젠지(修善寺)로 돌아간 뒤 체육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생선가게의 가업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도는 토시오의 패배를 알고 있었다. 놀러 오세요. 엽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을 읽은 토시오는 차가운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 같은 시각, 마사오의 아들 토우이치(透一)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토시오는 이 사실을 다음 날이 될 때까지 알지 못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2023/01/23

사키 - 사키 / 김석희 : 별점 2.5점

사키 - 6점 사키 지음, 김석희 옮김/현대문학

국내 첫 출간된 영국의 쇼트쇼트 대가 사키 단편선. 무려 7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발표작 중 절반에 가까울 정도에요. 몇몇 작품은 이런저런 경로로 읽었었는데, 꽤 인상적이었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를 앞서는 빛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들도 많고, 기묘한 맛 스타일로 서늘한 느낌을 담뿍 전해주는 반전물, 피식거리게 만드는 웃음 가득한 작품들도 다수 수록되어 있거든요. 몇몇 작품은 걸작이라 부를 수 있고, 번역도 좋습니다. '께느른하다' 같은 단어까지 사용한건 놀라왔어요. 열심히 사는 농부가 화가인 이복형을 보고 느끼는 감정인데, 몸을 잘 안 음직이고 게을러 보이는 상태를 잘 표현한 말이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아주 좋았다! 라고 말하기도 애매합니다. 대부분의 작품들 등장인물과 소재가 비슷하고 자가복제한 작품이 많은 탓입니다. 적당한 신분의 어떤 인물이 속물이거나 허영심 가득해서, 혹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탓에 낭패를 겪는다던가, 부르주아적인 습성으로 타인을 대하다가 예기치못한 상황에 처한다던가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한 거짓말로 문제가 발생한다던가, '소악마' 캐릭터의 원조격인 악동들이 어른들을 골탕먹이는 내용도 많아서 읽다보면 지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나칠 정도로 짜증나는 인물들 묘사, 지나친걸 넘어서는 과한 장난들은 거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키우던 고양이가 아무리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해도, 고양이를 죽인 이웃집 아이를 돼지 먹이로 주려고 한다는 <<참회>>가 대표적입니다. 지나치다 못해 끔찍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말 엄선된 몇몇 작품만 읽는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몇몇 기억에 남는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깜빡 잊은 지명>>
길에 버려진 시체로 자신을 위장하려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뒤 털어 놓은 고백.
기상천외한 발상과 온갖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는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주인공이 당장 체포되지 않는 이유가 그레이하운드들이 그를 쫓고 있고, 누가 먼저 잡는지에 대해 큰 내기가 걸려있었다는 묘사가 등장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화자가 자기가 사실은 죽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결론은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지명을 잊어버린 것은 사소한 문제일 뿐, 생김새 등 모든 면에서 이미 가짜라고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사냥 자루>>
사냥 클럽을 이끄는 펠러비 소령은 후핑텅 부인의 숲에서 오랫만에 사냥을 이끌 계획이다. 그러나 후핑턴 부인의 조카딸 엘리자베스가 데려온 러시아 청년 블라디미르가 여우를 먼저 사냥해 버리고 마는데...
블라디미르의 사냥 자루가 눈 앞에 대롱대롱 매달러 있는 상황을 통해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가져 오는 전형적인 작품. 굉장히 영국 부르주아스럽고 전형적이지만 긴장감만큼은 최고였습니다.
아쉬운 건 블라디미르가 잡은 건 사실 여우가 아니었다는 반전인데... 마지막에 슬며시 드러내는 것 보다는 조금 드라마틱하게 가져가는게 어땠을까 싶네요. 발표 당시에는 먹혔음직 하나 지금은 좀 낡은 방식이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생쥐>>
몸 속에 들어간 생쥐 때문에 시어도릭은 모르는 여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위기에 처하는데....
지금 보아도 괜찮은 반전이 돋보였던 작품. 앞에 앉은 여자가 장님이었다는 암시, 복선을 제공해 주었더라면, 그리고 긴장감을 조금만 더 높여주었다면 쇼트쇼트 역사에 길이 남는 희대의 걸작 중 한 편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토버모리>>
한 시골마을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서, 참석자 중 한 명인 코넬리우스 에핀은 저택에서 키우는 고양이 토버모리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는 곧바로 사실로 밝혀지지만, 토버모리가 그동안 보고 들은 사람들의 말을 폭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당황해했고, 결국 코넬리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토버모리를 죽이는데 동의한다.
영국 부르주아들의 가식을 비웃는 풍자물. 뒷담화, 불륜 등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면서 서로 만났을 때에는 고상한 척을 하는 가증스러운 상태를 말하는 고양이라는 소재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입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유머러스한 전개도 돋보이고요. 코넬리우스가 코끼리에게 말을 가르치려다가 밟혀 죽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토버모리의 폭로가 기대만큼 화끈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인데, 발표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이 정도가 한계였겠지요. 별점은 4.5점. 풍자 블랙 코미디계의 H.O.F (Hall of Fame)에 입성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브로그>>
마을 최악의 말 브로그를 소유한 멀렛 가족은 수년간의 노력으로 새로 이사온 펜리카드 씨에게 드디어 말을 팔아치웠다. 그러나 펜리카드 씨는 멀렛 가족의 딸 제시에게 호감을 드러냈고, 가족은 브로그가 사고를 쳐서 그 호감을 없애버릴까 노심초사하게 되는데....
내용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가족의 이야기로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내용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할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아래의 딱 한마디만큼은 기억에 남기에 소개해드립니다.
“펜리카드가 그 말을 타고 밖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건 분명합니다.” 클로비스가 말했다. “적어도 제시가 그 사람과 결혼해서 남편한테 싫증이 날 때까지는 안 돼요. "

<<허황된 이야기꾼들>>
잔돈푼을 구걸하려는 사람을 거창하면서 허황된 이야기로 단념시킨다는 이야기. 이야기는 뻔했지만 신사답게 구걸하는게 어떤 것인지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샤르츠 메테르클루메 교수법>>
기차를 놓친 귀부인 칼로타가 자기를 가정교사로 착각한 부인을 따라가 그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이야기.
끔찍할 정도로 지나친 장난을 그리고 있는 소품으로 개그 콘서트에 어울릴법한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리치는 방법이라며 허풍을 떤 제목의 교수법 아이디어만큼은 괜찮았어요. 로마 고대사의 사비니족 여인 납치를 실제로 실연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가리지거든요. 다른 방식으로 녹여내었더라면 더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맹점>>
에그버트는 삼촌 롤워스 경에게 대고모 할머니가 요리사 세바스티앙에게 살해당했다는 증거를 입수했다. 하지만 롤워스 경은 증거인 편지를 벽난로에 태워버렸다. “요리사로는 아주 비범하기 때문." 이라며...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범죄물로 흥미롭게 전개되다가 마지막 한 마디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지는 초단편 (쇼트쇼트)의 교과서 같은 작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참고로, 롤워스 경의 심정은 어느정도 이해가 됩니다. 대고모가 살해당한건 먼저 세바스티앙을 자극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될 수야 없겠지만 컵에 든 커피를 얼굴에 끼얹은건 솔직히 심했습니다.

<<평화 장난감>>
전쟁 놀이에만 열중하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의회와 역사적 인물들 인형을 선물했지만, 아이들은 그 장난감을 가지고 또다른 전쟁놀이를 시작한다는 이야기. 다른건 모르겠지만, '평화 장난감'이라는 발상이 기발했습니다. 전쟁이나 파괴에 대한 장난감이 대세인 지금에도 먹힐만한 아이디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크리스피나 엄벌리 부인의 실종>>
집안의 독재자였던 엄벌리 부인이 사라진 뒤, 남편은 매년 2천 파운드의 돈을 은밀하게 요구받았다. 부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조건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붉은 추장의 몸값>>과 비슷한, 기발한 발상의 유괴극.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부인이 사라졌는데 경찰이 나서지 않은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건 조금 아쉽네요. 이런 상황이라면 엄벌리씨가 부인을 죽여서 마당 어딘가에 묻어버렸어도 무방했을 거에요. 차라리 그런 인상을 주면서 마무리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엉뚱한 침입자들>>
평생을 원수로 지낸 울리히와 게오르그는 함께 나무에 깔린 뒤, 해묵은 원한을 청산하고 친구가 되기로 하는데...
숲을 둘러싼 오래된 원한이 살의에까지 이르른 원수 두 명이 산중에 고립된 뒤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 그러나 둘은 구조대가 아니라 배고픈 늑대 떼들에게 둘러싸이고 만다는 반전이 인상적인 걸작 쇼트쇼트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메추라기 먹이>>
인기없는 상점에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주인은 연극을 펼치는데...
인기없는 마을 상점에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상점에 정체불명의 손님이 방문한 뒤 무언가 드라마가 벌어지는 것처럼 꾸민다는 이야기. 전략은 성공해서 마을 주부들의 호기심을 가게에 집중시키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SNS 를 활용한 페이크 다큐성 타겟 광고라고나 할까요?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임시 정원>>
정원 자랑하기 좋아하는 밉살스러운 이웃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 임시로 멋진 정원을 꾸며주는 서비스 업체가 등장하는 이야기.
결말은 다소 답답했지만, 역시나 독특한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브루주아들의 허영심 비판에 딱 맞는 아이디어이기도 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달력>>
클로비스는 예언을 적은 달력을 18펜스에 팔 생각을 했다. 예언은 모두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애매한 것들이었지만, 조슬린이 사냥터에서 화를 당할거라는 예언은 성공하기 힘들어졌다. 조슬린이 절대로 말을 타지 않고 사냥터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상품 아이디어가 등장합니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실하게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점쟁이의 뻔한 수법을 특정 시기와 결합된 달력이라는 제품에 도입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거든요. 실제로 만들어 팔았어도 괜찮았겠다 싶을 정도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불가피한 희생>>
천 파운드가 넘는 돈을 잃은 딸이 그 댓가로 홀어머니를 채권자 도박꾼과 결혼시킨다는 이야기.
다른 무엇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부르주아 풍자를 잘 그려낸 소품으로 대단히 신선하거나 재밌다기 보다는, 주인공 딸이 이 책에 등장하는 속물 부르주아 중에서도 뻔뻔하기로는 첫 손가락에 꼽을만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별점은 2.5점.

<<네모난 달걀>>
1차대전 참호에서의 참혹한 전투를 겪는 병사들의 위안은 술집가 카페가 합쳐진 공간 '에스타미네'에서의 한 때였다. 그곳에서 나는 자칭 양계업자를 만났다. 그는 품종 계랑을 통해 자기 양계장 닭이 네모난 달걀을 낳게 하는데 성공해서 거액을 벌었지만, 전쟁에 끌려온 뒤 양계장을 운영하는 고모가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송 비용으로 수십 프랑을 요구하는데....
'나'의 마지막 말이 깨는 반전의 맛을 가져다 주는 작품. 그는 휴가를 얻으면 '양계업자'의 고향에 가서 네모난 달걀 산업 현황을 확인하고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양계업자'는 자기 말이 사실이라면 어쩔 셈이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답하죠. "당신 고모님과 결혼하겠소" 별점은 3.5점입니다.
아울러 시키는 1차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데, 그런 경력답게 굉장히 탁월한 참호 묘사도 눈여겨 볼 만 했습니다.

2022/11/27

로그 메일 - 제프리 하우스홀드 / 이나경 : 별점 2.5점

로그 메일 - 6점 제프리 하우스홀드 지음, 이나경 옮김/arte(아르테)

<<아래 리뷰에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고위층 명사가 유럽 어딘가의 독재자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되었다. 진짜로 죽이려고 했던건 아니고, 심심풀이로 벌인 게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은 모진 고문 뒤 사고로 위장해 죽이려 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천신만고 끝에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독재자의 부하들이 여전히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불명예를 걱정한 그는 국가의 도움을 받지않고 홀로 도주하여, 과거 추억이 어려있던 도싯 지방에 은신처를 마련하는데...
.

2차 대전 직전인 1939년 출간된 전설적인 서스펜스 스릴러.
사실 저는 제목만 보고 최첨단 IT 소재물이라고 착각해 왔었습니다. Log mail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알고보니 Rogue Male 이더라고요! 외톨이 수컷, 일본식 표현으로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와 비슷하겠지요? 일종의 사냥감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가끔은 흉폭함과 야성을 드러내는 주인공에게 딱 들어 맞는 제목입니다.

하여튼, 여러 미스터리 랭킹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던 작품으로, 국내에는 상당히 늦은 2019년에 출간되었는데 명성답게 서스펜스, 긴장감은 발군입니다.
외국에서 망신창이 상태로 이름모를 낚시꾼, 그리고 영국 배의 일등 항해사 베이너의 도움을 얻어 귀국한 뒤, 도싯 지방의 아무도 모르는 오솔길에 위치한 은신처로 이동하기 위해 여행하는 부부로부터 사이드카가 달린 자전거를 구입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하고, 은신처 위치가 좁혀질 위기에 처하자 경찰 시선을 돌리기 위해 다른 곳을 은신처처럼 만들어 위장하고, 결국 외국 비밀 요원 퀴브-스미스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좁은 공간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과정 모두 읽는내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여러가지 잘 안배된 설정들도 긴장감을 더해줍니다. 대표적인게 주인공이 고문을 받아 '눈에 상처'를 입었다는 설정입니다. 사람들 눈에 너무 띄는 탓에 원래 계획이었던 시골 마을에 몰래 숨어드는게 불가능해져버리니까요. 선글라스로 가려도 누구나 눈에 이상이 있다는걸 눈치채버리고 말거든요.
비교적 초반에 비밀요원 중 한 명을 죽이는 바람에 영국 경찰들에게도 쫓기게 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주인공의 눈 이상이 전국에 알려졌을 뿐더러, 외국 정보요원들 뿐만 아니라 영국 경찰들도 주인공을 체포하려 해서 이중고를 겪게 됩니다.

주인공의 실력과 의지, 인내력만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것도 마음에 듭니다. 조력자 - 특히 미녀 - 를 만나 도움을 얻는 헐리우드 스릴러스러운 전개는 전무합니다. 처음 탈출할 때 외국인 낚시꾼과 일등 항해사 베이너가 선선히 도와주는 장면같이 운에 의지하는 부분이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허용 범위 안쪽입니다. 낚시꾼은 독재 반대파일 수 있으며, 베이너의 경우는 주인공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라는 설정 덕에 도와주었을 거라는 암시를 주는 식으로 합리적인 설명도 덧붙여져 있고요.

쫓고 쫓기는 대결 구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치밀하고 끈기있는 추적으로 주인공의 은신처를 알아낸 퀴브-스미스 대령은 라이벌로 손색이 없습니다.
더 놀라왔던건 만만치 않았던 영국 경찰의 수사력 묘사였습니다. 도싯 시골 숲 속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숨어 있던 주인공에게 거의 한끝발 차이로 육박해 올 정도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심지어 맞부닥치는 바람에 정면에서 도주극을 벌이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지요.
이런 상대방들의 추적을 통해 원래 사냥꾼이었던 주인공이 사냥감이 되었다는 상황을 잘 알려주는 묘사들도 몰입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몇가지 앞, 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독재자 암살 시도가 그러한데요, 주인공은 일관되게 단지 자기의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퀴브 -스미스에 의해 은신처에 산채로 감금당한 뒤에 갑자기 약혼했던 연인의 복수를 위해서라는 동기가 튀어나옵니다. 이럴거라면 처음부터 당당히 죽일 의도가 있었다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인이 남의 나라 지도자를 쏘려고 했다가 잡혔는데, 이게 왜 외교 문제가 되지 않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게임에 불과했다는 말을 외국 정보부에서 선선히 받아들여서 사고사로 죽이려 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주인공은 상당한 고위층으로 보이기에, 당연히 좋은 협박거리(?)로 사용될 수 있었으니까요.

전체적으로 흥미로운건 사실이지만, 경찰 추적이 근처에 이른 탓에 가짜 은신처를 만든 뒤 그 곳에 숨어있다가 도주한 것처럼 꾸미는 장면은 과했습니다. 도주 경로와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경찰 바로 옆에 숨는 묘기를 부릴 것 까지는 없었어요. 은신처를 감추려다가 본인이 위기에 처하는건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잖아요. 또 그렇게 잘 숨을 수 있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은신처에서 숨어 있는게 더 나았을테고요.
게다가 이 시도는 퀴브 -스미스에 의해 숨겨두었던 사이드카가 드러나, 은신처 바로 근처까지 퀴브 -스미스가 찾아왔을 때의 행동과는 반대라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퀴브 -스미스가 근처 농장을 다 뒤져서 오솔길이 은신처라는걸 알아냈다고 추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앞서 경찰이 나타났을 때 처럼 다른 곳으로 도주했다고 위장하거나, 아니면 실제로 도주했어야 했습니다. 시간도 충분했었고요. 하지만 은신처에 틀어박혀 숨어있는 방법을 택했다가 산채로 감금당하고 말지요.

주인공을 은신처에 가둔 퀴브 - 스미스가 바로 그를 죽이지 않고 회유하는 척 연기를 하는 장면도 이상했습니다. 바로 죽이지 않는 이유를 영 모르겠더라고요. 영국을 떠나지 않겠다는 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한 목적은 전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별로 대단한 서류가 아니라는건 주인공과 퀴브 -스미스의 대화로 이미 드러날 정도이고, 주인공 서명 정도를 위조하는게 그리 어려울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이 영국 정부와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도 21세기의 한국 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불명예가 예상된다는데, 도대체 무슨 불명예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주인공이 "사실 내가 아는 영국인 중에 그가 가져온 망할 문서에 서명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거부하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고집 때문에 거부할 것이다."며 서명을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도 퀴브-스미스와의 마지막 대결이 아쉬웠습니다. 총이 없어서 고대 로마의 노포와 비슷한 무기를 직접 만들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퀴브 스미스가 환기구를 막았던 자루를 빼다가 주인공이 쏜 화살에 맞고 죽는건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주인공에게 총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환기구로 고개를 내민다는건 영 석연치 않았습니다. 물론 직전에 주인공이 서명을 하겠다며 퀴브-스미스를 구워 삶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총이 없다는걸 퀴브-스미스가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내용을 보강하던가, 아니면 퀴브-스미스가 예상하지 못한 무기를 사용하는 식으로 끌고가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최소한 주인공과 자웅을 겨룬 라이벌에게 어울리는 결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명성의 이유는 잘 알 수 있지만, 지금 시점의 한국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낡은 느낌도 없지 않아서 감점합니다.
이런 작품은 아무래도 영화로 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과거 2번이나 - 그 중 한 편은 흑백 고전 영화 시대의 거장 프리츠 랑 감독이고, 또 다른 한편은 명배우 피터 오툴 주연 - 영화화 되었더군요. 곧 베네딕트 컴버비치 주연으로 다시 영상화된다는 소문이 있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 기대되네요.

2022/08/27

수정마개 - 모리스 르블랑 / 심지원 : 별점 1점

아르센 뤼팽 전집 6 - 2점
모리스 르블랑 지음, 심지원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뤼뺑이 부하 보슈레의 권유로 하원의원 도브렉의 별장을 털던 중 도브렉의 하인 레오나르가 살해당했다. 부하 보슈레와 질베르가 체포되어 단두대에 오를 운명에 놓이자 둘을 구하기 위해 뤼뺑은 도브렉에 대해 조사하던 중, 자기도 감시당하고 있다는걸 눈치챘다. 감시자는 질베르의 친모인 회색 머리의 미녀 클라리스였다. 클라리스가 도브렉 대신 남편을 택한 뒤 도브렉의 복수로 그녀의 남편은 자살했고 질베르도 범죄와 방탕에 빠지고 말았다. 27명의 고위 관료를 협박할 수 있는 서류가 도브렉 힘의 원천이었다. 뤼뺑은 클라리스와 힘을 합쳐 질베르를 사면시키고, 도브렉을 몰락시키기 위해 이 서류가 감춰져 있다는 '수정 마개'를 맹렬하게 찾아 나서는데....

뤼뺑 시리즈 장편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813의 비밀"과 함께 아동용으로 접해본 뒤 기억에서 지웠던 작품입니다. 최근 읽을게 없나 찾아보다가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읽다보니 왜 어린 마음에도 기억에서 지워버렸는지 알겠더라고요. 아무런 개연성도, 설득력도 찾을 수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나간 듯한 엉망인 전개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뤼뺑 캐릭터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 작품에서 뤼뺑은 실패만 반복합니다. 도브렉 별장 털이 실패에서 시작해서, 은신처에서 수정 마개를 곧바로 도난 당하고, 도브렉 저택에 침입했을 때에는 도브렉에게 숨어있던걸 들켜 망신을 당하고, 겨우 다시 훔쳐낸 수정 마개는 또다시 도난당하고, 도브렉과 담판을 짓기 위해 나섰을 때에는 정체를 바로 간파 당하며, 납치된 도브렉을 구해주다가 칼에 맞고, 심지어 도브렉을 추적할 때는 허둥지둥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여줍니다. 기존의 전지전능한 뤼뺑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어요. 한마디로 그냥 어설픈 실패자로만 등장합니다. 실패만 거듭하면서 클라리스에게 아들을 구해줄테니 나서지 말라며 큰손리를 치다가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절망에 빠져 다 잊고 잠이나 자겠다며 수면제를 들이켜는 장면에서는 제가 뭘 읽고 있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이런 실패의 연속은 극적인 긴장감을 찾아보기도 어렵게 만듭니다. 뤼뺑 시리즈에서 '이번에는 어떻게 뤼뺑이 실패할까?' 라는걸 기대한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전개도 엉망입니다. 모든 사건이 우연히, 급작스럽게 일어나거든요. 뤼뺑과 클라리스가 도브렉을 감시하는게 교차되는 과정이라던가, 전개의 특정 시점에 맞춰 딱 맞게 벌어진 도브렉 납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마지막에 도브렉이 진짜로 숨어있는 장소를 뤼뺑이 알아냈던 것도 마찬가지에요. 도브렉의 부하를 산레모 역에서 마주친 덕분이었는데, 이는 작위적인 전개의 극치라 할 수 있겠지요.

설정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도브렉이 중요한 서류 - 27명의 명단이 담긴 - 를 감추기 위해 만들었다는 수정 마개의 존재가 대표적입니다. 서류를 수정 마개 안에 숨긴 뒤, 그 수정 마개를 어딘가에 숨긴다는 설정인데, 이럴거면 그냥 어딘가에 서류를 숨기면 되잖아요? 구태여 수정 마개를 사용하는 까닭을 모르겠어요.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서류를 숨기기 위한 용도로 모자를 사용했다는 억지 설정과 별로 다를게 없습니다. 오히려 눈에 띈다는 점에서는 모자보다도 못한 셈이고요.

27명의 명단도 가지고 있는 힘에 비하면 설명이 부족하고 비합리적입니다. 도브렉이 그들을 협박하려면, 명단의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자기 정체가 드러나지 않으려고 협박범에게 굴복하는게 보통이니까요. 하지만 명단 속 인물들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진 걸로 묘사됩니다. 도브렉이 납치되었을 때, 뤼뺑이 약간의 단서를 토대로 "나폴레옹 덕에 귀족이 되었다가 왕정복고로 망해버린 코르시카 혈통의 후예인 명단 속 인물"이 납치범일 것이라고 추리하자, 경찰은 곧바로 그건 알뷔패스 후작이라고 말할 정도로요. 그렇다면 당연히 도브렉의 협박은 먹힐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서류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했다면, 더 설득력있는 근거를 댔어야 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습니다. 뤼뺑이 하는 것이라고는 변장과 잠입, 그리고 납치가 전부인 탓입니다. 가장 중요한 수수께끼인 '수정 마개'의 위치는 도브렉이 납치당해 고문당했을 때 했던 "메리"라는 단어와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말, 도브렉이 짧은 시간 동안 물건을 가져갔다는걸 종합하여 위치를 알아내는데, 도브렉이 가져간 다음에 알아냈으니 제대로 된 추리라고 보기 힘듭니다. 없어진게 담배갑 뿐이었으니 더더욱 그러하지요. 수정 마개는 담뱃갑 안에 들어있던게 당연합니다. '메리'는 도브렉이 메릴랜드 산 담배만 피워서 한 말이라는데 이 상황에서는 그 담뱃갑이 메릴랜드 산이건, 한국 담배 인삼 공사 제품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게다가 이 담뱃갑은 종이 띠로 포장되어 있어 최초 뤼뺑의 조사에서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킹은 죽었다"처럼 부실한 조사 탓으로 생겨난 수수께끼에 불과한 셈이라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수정 마개는 일종의 미끼였고, 안에 들어있던 서류는 가짜였다는 반전은 괜찮았어요. 도브렉의 의안이 진짜 서류가 담긴 수정 마개였다는 진상, 그리고 이를 숨기기 위해 도브렉은 항상 두꺼운 색안경을 끼곤 했다는 설정도 괜찮았고요.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구멍을 통해 침입했던건 클라리스의 아직 어린 아들이었다는 트릭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장점은 미약합니다. 단점 투성이의 졸작이자 망작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2022/02/26

세계를 매혹한 돌 - 윤성원 : 별점 3점

세계를 매혹한 돌 - 6점
윤성원 지음/모요사

보석과 주얼리가 주제인 책인데, 이전에 읽었었던 "보석 천 개의 유혹"과는 많이 다릅니다. 이 책은 19세기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석과 주얼리의 유행과 디자인 변천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행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건, 얼마전에 읽었던 "감히 넘볼 수 없게 하라"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었지만, 이 책은 보석과 주얼리를 통해 그러한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또 보석과 주얼리는 가격 때문에 사회 지도층이 관련될 수 밖에 없어서, 실제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로왔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단순한 보석, 주얼리 유행 통사가 아닌, 약간 미시사적인 측면도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국가별로 달랐던 유행의 이유는 그 국가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했으니까요. 

예를 들어, 베를린 아이언은 철로 만들어진 주얼리로 프로이센의 대 나폴레옹 해방전쟁 당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기념품이었습니다. 귀부인들이 군자금에 보태기 위해 금 주얼리를 기부하고, 철로 만든 베를린 아이언 주얼리를 대신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독일 민족의식 발현이라는 속 뜻과 무관하게, 적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1 제정 몰락 후 왕정복고기에 문학, 건축 등 전 분야에서 중세 고딕 문화가 유행했던 탓에 베를린 아이언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왕정복고기에는 고가의 큰 보석을 사용할 수 없었던 현실도 한 몫 했었고요. 

반면 영국에서는 19세기에 16세기 르네상스를 베낀 주얼리가 유행했습니다. 상류층이 19세기의 놀라왔던 예술, 문학, 과학 기술의 진보를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와 동일시했던 덕분이었습니다. 영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갈 때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유행이었겠지요. 아울러 이 때 로마, 이집트, 헬레니즘 및 에트루리아 유적 발굴로 고고학적 복고 양식도 함께 유행했다고 합니다.

특정 아이템의 변천사도 흥미로왔습니다. 여성의 목을 감싸는 초커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단두대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로 유행이 시작되었었습니다. 색깔도 빨간색이었고요. 허나 19세기에 접어들며 검은색 초커는 매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네의 "올랭피아" 등으로 잘 알 수 있고요. 이후 영국 알렉산드라 왕세자비가 갑상선 수술 흉터를 감추기 위해 다이아몬드와 진주가 여러 줄 세팅된 폭넓은 초커를 착용하기 시작한 뒤, 19세기 말 ~ 20세기 초 유럽 상류층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네요. 지금의 문신 (타투) 유행과도 조금 비슷하지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문신은 범죄 등 안 좋은 이미지의 대명사였는데 요새는 인스타그램 셀러브리티 등을 통해 일종의 패션 아이템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초커의 유행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으로도 잘 알 수 있는데, 클림트의 그림 속 초커 실물은 나치의 압류 이후 사라졌다니 이 역시 하나의 흥미로운 역사 속 일화로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입니다.

이러한 흥미로운 역사 일화는 그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인류 역사상 안정과 번영을 가장 길게 누렸고, 그 어느 때 보다 탐미적이었던 '벨에포크' 시대에서 유행을 선도했던 사교계의 중심지 막심 레스토랑을 무대로 화려함을 뽐냈던 3대 고급 매춘부인 라 벨 오테로, 리안 드 푸지, 에밀리엔 달랴숑의 승부 이야기처럼요. 이 일화와 함께 소개되었던 당시 쥬얼리는 도판만 보아도 그 화려함이 남다른 수준이라 과연 '벨에포크'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 사교계를 주도했던 에스터 가문의 안주인 캐럴라인과 신흥 부호 밴더빌트 가문의 안주인 알바 밴더빌트의 승부와 거래 역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 외에도 벨에포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던 오스트리아 엘리자베트 황후와 그녀의 쥬얼리, 영국 메리 왕비가 혼란기에 수집했던 당대 유럽 왕실의 명품 쥬얼리들 이야기도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와 함께 소개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상징과도 같은 '블라디미르 티아라'가 어떻게 영국 왕실까지 흘러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독일 공주로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셋째 아들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던 마리아 파블로브나 '미첸' 블라디미르 대공작 부인이 러시아 혁명 당시 몸을 피하면서 진짜 값비싼 보물을 블라디미르 궁전 비밀 장소에 숨겨두었었는데, 그녀의 친구였던 영국인 예술품 딜러 앨버트 스토퍼드가 노동자로 변장해서 궁에 잠입한 뒤 보물을 꺼내어 런던으로 빼돌렸다는, 혁명과 모험이 모두 들어가있는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이를 메리 여왕이 구입하여 지금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공식 석상에 착용하고 나오게 되었다는건 참 많은걸 느끼게 해 주고요. Winners takes it at all 인 거겠지요? 

1차대전 후, 아르누보와 벨에포크 복고풍 로코코는 모두 옛 것이 되었고, 미래지향적이고 기하학적인 모티브의 디자인의 유행은 야수파, 입체파 등의 미술사조, 디자인의 바우하우스의 등장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네요. 부족해진 남성들 대신 여성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쥬얼리 디자인이 많아졌다는 것도 눈에 뜨이고요. 인도 마하라자들의 어마무시한 쥬얼리 컬렉션들, 1922년 투탕카멘 발굴을 통한 동서양이 융합된 디자인의 유행과 2차 대전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주얼리 유행 테마들 소개도 볼만했습니다.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다이아몬드 제국 드비어스의 탄생과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로 기억되는 성공 공식에 대한 설명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 광고를 누가 어떻게 집행했는지를 다루는 글은 처음 읽어보기도 했고요.

전문적으로 쓰여진 글로 보기에는 저자의 개인 경험과 개인 생각에 대한 비중이 높으며, 미시사 서적으로 보기에는 쓰여진 내용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다는 약점은 있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재미도 있으면서 여러가지 자료적인 가치도 높은 책인 덕분입니다. 도판만 보아도 값어치는 충분히 합니다. 보석, 주얼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1/11/21

카레로 보는 인도 문화 - 가라시마 노보루 / 김진희 : 별점 3점

카레로 보는 인도 문화 - 6점
가라시마 노보루 지음, 김진희 옮김, 오무라 쓰구사토 사진, 최광수 감수/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맛의 달인 걸작 에피소드 중 하나인 '카레 전쟁' (24권) 편에서 카레 전문가 교수님으로 출연했었던, 인도 역사 교수가 쓴 식문화사 책입니다. 한방약을 카레에 섞어 먹곤 한다던 그 교수님이지요. 전공 분야라는 인도 역사에 대한 지식, 그리고 다년간의 인도 유학 경험과 학자다운 방대한 참고 문헌을 바탕으로 인도 요리가 무엇이며, 왜 지역별, 문화별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책은 왜 '카레'라는 요리가 생겨났으며, 그 어원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도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인도 식문화가 영국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는건 다른 책들에서도 소개되었던 내용인데, 카레 가루가 생겨난건 영국에 생 스파이스가 없어서였다, 밀가루를 버터로 볶아 만든 루는 볶은 양파, 토마토 페이스트, 코코넛 크림 등으로 조리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걸쭉함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는 디테일은 좋았습니다. 

교수님이 등장하셨던 "맛의 달인" 에서도 소개되었던 '커리'의 어원에 대한 추론은 다시 읽어도 흥미로왔어요. 영어 '커리'는 16~17세기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이 기록한 '카릴'에서 유래되었을 거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칸나다어와 타밀어 커리는 야채와 고기라는 뜻인데, 왜 당시 사람들은 수프를 부어먹는 식사를 인도인들이 '카릴 이라고 부른다고 썼을까요? 저자는 당시 포르투갈, 네덜란드 인은 수프를 부은 밥 요리 이름을 물었는데, 인도인들은 수프에 들어있는 건더기, 즉 야채와 생선과 고기에 대해 묻는다고 생각해 대답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럴듯하지요? '캥거루' 어원 가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저는 저자의 추론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인도 요리와 그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고찰이 이어집니다. 특징이라면 앞서 '커리'의 어원 추론처럼 어원, 요리 유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입니다. 북인도의 긴 후추를 피랄리라고 하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원정 당시 그리스로 가져간게 현재 영어 페퍼의 어원이 되었다는 식으로요. 저자가 역사 학자인 덕분이겠지요. 

각 지방 및 요리하는 사람의 특성에 따라 요리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도 확실히 연구자가 썼구나 싶은 부분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인도 식문화는 남인도에서 성립된 스파이스를 혼합하여 맛을 내는 '카레 문화'와 우유를 기름, 버터, 요거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요리에 활용하는 북인도의 '우유 문화'가 오랜 역사 과정에서 적절하게 융합되어 구축되었다고 합니다. 근거는 7-8세기 남인도 힌두교 사원에 남아있는 신에게 올리는 식사 관련 글귀에 등장하는 재료 - 밀라구 (후추), 만질 (강황), 지라가 (커민), 시르 카두구 (겨자), 코타말리 (코리엔더) - 목록이고요. 이건 현대 카레에 가장 중요한 스파이스로 꼽는 '터메릭, 커민, 코리앤더, 후추, 겨자'와 동일합니다. 즉, 당시 남인도에는 커리의 원형이 이미 존재했다는 뜻이지요. 반면 북인도에서는 불교에서 석가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던 고사에서 보듯, 우유 식문화가 탄생했고요. 이런 지역에 따른 대립은 카레, 우유 뿐 아니라 밀과 쌀 중 무엇이 주식인지, 재료가 고기인지 생선인지, 논베지테리언인지 베지테리언인지 등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됩니다. 북인도는 밀 생산 지역으로 쌀이 아니라 로티라고 부르는 밀가루 빵이 주식이라는게 대표적인 예이고요. 

이런 역사와 지역, 문화를 통한 요리 구분이 굉장히 상세한게 큰 장점으로, 심지어 '자이나교 요리'까지도 별도로 다루고 있을 정도입니다. 자이나교는 철저한 불살생으로 베지테리언 요리로 유명한데, 우리도 인도 요리점 요리로 친숙한 '파니르'가 대표 요리더군요. 파니르는 끓인 우유에 식초를 넣어 굳힌 코티지 치즈이고, 이걸 카레 소스로 끓여낸 요리이지요. 여기에 시금치를 넣은게 '팔락 파니르'고요. 

무굴 제국의 궁정 요리도 별도 항목을 할애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정복 세력이 인도로 침입한 것이라, 그 역사적 배경이 다른 인도 요리와는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우선 무굴 요리의 시작은 유목민의 캐러밴 요리로 케밥이 그 원점이라네요. 무굴 제국의 이름도 몽골에서 유래했고, 그들은 원래 아프가니스탄 유목민 출신이니 중앙 아시아 유목민 문화가 그들의 바탕인 건 당연합니다. 여기에 2대 황제가 이란에 망명했던걸 계기로 페르시아의 맛과 정취가 더해졌고요.

특정 지역에 독특한 식문화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인 이유 설명도 그 깊이가 남다릅니다. 남인도 케랄라 식문화 소개가 좋은 에에요. 이 곳은 원래부터 후추와 카다몬이 자생하였던 향신료의 천국이었는데, 이후 남서 해상 무역 중계 기지라 남동아시아에서 클로브, 넛맥이, 스리랑카에서 시나몬이 운반되어 향신료의 폭이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 및 서방 지역과도 관계가 깊어서 이미 1세기에 그리스도 포교가 이루어졌고, 유대교 성당인 시나고그도 있었으며, 무슬림도 거주하면서 커피 재배 등에 종사했을 정도로 국제 도시이기도 했고요. 중국배 역시 12세기 경부터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15세기 초에는 정화의 선단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런 지역이라면 향신료를 풍부하게 사용하면서, 외부 식문화도 많이 유입된 요리가 생겨날 수 밖에 없겠지요. 

또 스리랑카 신할족은 북인도 왕자의 후예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언어와 전통은 북인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식문화는 가까운 남인도 카레와 밀착되어 있으며 특징은 매운 맛, 그리고 몰디브 피쉬의 사용, 코코넛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스리랑카의 식문화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맛의 달인의 '카레 전쟁'의 스리랑카 요리 소개 부분과 똑같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몰디브 피쉬를 절구로 빻는 장면은 사진까지 똑같더라고요!

소개되는 요리들에 대한 소개도 재미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요리는 빈달루입니다. 어원은 포르투갈 요리 카르니 드 비나달로스의 비냐달로스라네요. 이게 인도식 발음으로 변형되었던 거지요. 16세기 초에 포르투갈이 고아를 점령했을 때 전래되었던 요리라고 합니다. 처트니도 영국식 잼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힌디어로 '다'라는 뜻의 '차트나'가 어원인 인도 요리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외 정 요리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몇몇 요리는 레시피도 함께 소개해주고 있어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칠리, 터메릭, 커민, 코리앤더와 후추가 듬뿍 들어간다는 라삼 파우더로 만든 라삼은 우리 입맛에도 잘 맞을 듯 싶더군요. 타밀어로 '후추 주스'라는 뜻이라니, 매콤한게 딱일거 같아요.

이런 내용들 소개에 이어, 책은 현대 인도 요리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마무리됩니다. 인도 요리란 어디까지나 스파이스와 우유를 주요소로 하는 요리의 총칭이며, 원래 다양한 지방에서 자기들끼리만 먹었었지만, 지방 요리가 인도 전체로 퍼져 현대 인도 요리가 된 것이라고요. 이를 '다양성 속의 통일성' 이라고 말합니다.

카레, 커리 뿐 아니라 '인도 요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해 준 좋은 책입니다. 단순히 흥밋거리가 아니라, 근거가 확실한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썼다는 점이 돋보였고요. 목차가 조금 두서가 없다는건 아쉽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하지요. 좋은 책이었습니다. 커리와 인도 요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글도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고요.

그나저나 일본에 좋은 카레 책이 많이 나오는걸 보면, 확실히 카레에 진심인 나라가 맞긴 맞나보네요.

2021/10/22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카토우 모토히로 / 학산문화사 : 별점 2.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43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43권입니다. 이번 권에는 네 편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으며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투명어"와 "치과"는 평균 이상은 되는 괜찮은 작품이지만 그닥이었던 두 편이 점수를 깎아먹은 탓입니다. 다음 권은 C.M.B 반지와 관련된 긴 호흡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은데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앙숙"

신라는 다힐 교수의 부탁으로 이라크 쿠르드 자치구의 아시리아 유적 발굴 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만난건 예전부터 신라에게 경쟁의식을 불태우던 앙숙 무라트였다. 그런데 발굴 현장 텐트에 숨어든 사람이 있었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고자 노력 중인 사루마였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체면이 손상될거라 생각했던 친척들이 그녀를 살해할 수도 있었다. 사루마는 프랑스 국적이 있었고, 신라 일행은 그녀의 프랑스로의 탈출을 도와주는데...

그닥이었던 첫 번째 이야기. 전개가 너무 뻔했습니다. 신라의 앙숙 무라트가 사루마 가족에게 그녀의 도주 계획을 털어 놓지만, 알고보니 거짓말로 사실은 사루마의 무사 탈출을 도왔다는건 누가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거든요. 눈에 잘 띄는 캐리어를 택시에 잘 보이게 싣고, 그 택시를 뒤쫓는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명예 살인이라고 해 봤자 동네 아저씨 한 명이 단도를 들고 설치는 정도라서 위기감이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실제로 타츠키 혼자 간단히 제압하지요. 

앙숙이라는 무라트도 일방적으로 신라에 대한 질투심을 품는 동네 꼬마일 뿐입니다. 신라가 지닌 지식과는 상대도 될 수 없기에 대단한 대결을 펼치지도 못하지요. 앙숙이라는 설정은 애초에 필요하지도 않았어요. 

CMB 특유의 현학적인 정보를 얻을 내용도 거의 없었습니다. 쿠르드 자치구, 아시리아 유적 발굴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명예 살인'이 핵심 소재였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적으로나, 재미면으로나, 얻을 수 있는 지식 측면으로나 뭐 하나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투명어" 

뉴욕 미술관에서 지구 온난화 경고 미술전이 열렸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를 거짓이라 생각한 사람의 협박이 이어지다가, 결국 미술관 학예원 토마스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고 말았다. 범인이 어떻게 침입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미술관 오너 에리는 친구 토마에게 소개받은 신라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범인이 외부에서 정문까지 딱 하나 있는 길을 환한 조명과 감시 카메라에 들키지 않고 통과한 뒤, 2개의 전시실을 3명의 경비원들에게 들키지 않고 돌파하여 사무실까지 침입했던 방법은 '거울을 이용'했던 겁니다. 조명 아래 길에서는 거울 뒤에 숨어 이동했고, 전시실에 들어가서는 거울 뒷면의 검은 판을 이용하여 일종의 사각을 만들었던 거지요. 마술에 쓰임직한 트릭인데, 1회성으로는 쓸 수 있었을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술관과도 잘 어울렸고요. 실제로 이런 거울을 옮기는 사람이 목격되더라도, 작품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었을거라고 설명되고 있으니까요. 

전시되고 있는 '투명어'를 이용한 작품을 통해, 물고기의 특징으로 트릭을 설명하는 장면도 좋았습니다. 투명어보다는 일반 물고기가 더 잘 숨는 셈이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짙은 바다색과 비슷한 짙푸른 빛의 등을, 바다 밑에서 바라보는 적들에게서 숨기 위해 눈부신 태양과 같은 은빛 배를 가지고 있는 덕분이다는건데, 트릭에 정말 딱 맞아 떨어지는 설명이었습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심도깊은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이며, 왜 중요하고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쉽게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표현의 자유에는 적절한 프로토콜이 필요하며, 이런 역할을 미술관, 박물관 등이 수행한다는 이야기가 와 닿더군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기도 했고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널리 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Q.E.D의 토마의 친구 '재난의 사나이' 알렌의 아내 에리가 등장하는건 오랜 팬으로서 반가웠던 부분이고요.

그러나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여, 그의 족적을 확보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면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거울을 현장에서 깼다'는 걸로 피해자 몸에 묻었을 거울 조각과 현장의 거울 조각, 그리고 용의자 신발에서 그 거울 조각을 채취하면 그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날 거라고 신라는 말하는데, 이건 트릭을 파헤치지 않아도 경찰 수사로 밝혀낼 수 있는 부분이잖아요? 수사를 통해 현장에 있었던 거울 조각을 알아낸 뒤, 여기서 트릭을 유추하는게 더 말이 되지요. 또 사람이 한 명 숨을 큰 거울을 현장에서 쉽게,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을까요? 작품 하나를 태운 정도로? 어림도 없어요. 이 부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스럽네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얻을 수 있었던 지식의 가치가 높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치과" 

코즈에는 치과 진료를 받은 후, 병원을 나서다가 안개에 휩싸인 뒤, 진료받기 전 치과에 앉아있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타임 리프에 빠진걸 알아챈 그는 루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다른 대기 손님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다가 경찰에 체포되고, 안개에 휩싸이는걸 반복한 끝에 마지막 손님 신라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주변 환경에 단서가 있다는 신라의 말을 들은 뒤 코즈에는 차분히 주위를 관찰하여, 손님 중 한명인 여고생의 전화 착신음, 또 다른 손님인 꼬마 여자 아이 얼굴의 점, 치과 접수원의 이름, 치과에 놓인 곰 인형 등 모든게 전 여자친구와 관련이 있다는걸 깨닫는다.

전 여자 친구와 가슴 아프게 헤어졌던걸 뉘우치고, 다시 만나는게 루프에서 빠져나오는 열쇠였고, 방법은 예약 날짜를 바꾸는 것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예약 날짜는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이런 저런 사소한 단서를 전 여자 친구와 관련이 있다며 드러내는 장면은 일상계 추리물 느낌이라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낼 수도 있다는데 감탄했어요. '일상계 SF 로맨스'인 셈입니다. 점이 있던 꼬마 아이가 미래에서 온 코즈에와 여자 친구의 딸이었다는 에필로그도 사족 느낌이 들지 않게 잘 처리했고요.

그런데 이게 C.M.B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신라가 힌트를 주기는 하지만, 결국 코즈에가 혼자서 깊이 생각해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들이었으니까요. 신라가 곰팡이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정보를 주는 건 재미는 있었습니다만, 딱히 이야기와는 관계가 있어보이지는 않더군요. 오히려 C.M.B 시리즈에 억지로 집어 넣은 부분이 감점 요소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독특함과 재미, 신선함 모두 기대 이상이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번 권의 베스트 에피소드로 꼽겠습니다.

"카메오 글라스" 

마우가 고대 로마 유물인 카메오 글라스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는데, 이를 도와주는 이야기로 카메오 글라스 케이스를 이용한 바꿔치기 트릭이 등장하는데, 현실성 높은 나쁘지 않은 트릭이에요. 뒤집힌 카메오 글라스 형태에서 착안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높고요.

하지만 마우 등장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그 외의 설정에서는 현실성을 찾기 어려서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C.M.B 반지를 회수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신라에게 전해 주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에피소드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4/23

튀김의 발견 - 임두원 : 별점 2점

튀김의 발견 - 4점
임두원 지음/부키

국내 과학자가 쓴 튀김에 대한 인문학, 과학, 교양 서적입니다. 박찬일 셰프 등의 호평이 인상적이라 눈여겨보던 차에,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튀김의 역사와 대표적인 튀김 요리에 대한 소개로 시작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튀김 요리가 처음 등장한 문헌은 로마 요리서 "요리에 대하여"입니다. 유명했던 전설의 미식가 아피시우스가 썼다고 알려진, 1세기 경 편찬되었을 걸로 추정되는 책이죠. 여기에 '알리테르 둘키아(또 다른 달콤한 요리)'라는 튀김 요리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밀가루와 우유로 만든 도우를 올리브유에 튀겨낸 뒤 꿀을 듬뿍 바르는 요리로, 지금의 프렌치 토스트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튀김의 핵심 재료였던 기름이 비쌌던 탓에 튀김이 대중화되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3세기 이후부터 많은 튀김 요리가 등장한다고 하니, 거의 천 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셈이죠. 그 뒤에는 대표적인 튀김 요리로 덴푸라, 돈카츠, 라면, 프라이드 치킨, 프렌치프라이, 피시앤칩스, 탕수육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다 재미있지만 특히 피시앤칩스에 대한 소개가 괜찮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스페인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했는데, 이 때 스페인 전통 튀김 요리 '페스카도 프리토'가 전파된게 그 유래라고 하네요. 식초를 뿌리는게 중요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2부 격인 튀김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습니다. 튀김의 핵심인 '겉바속촉'의 원리에 대한 설명을 예로 들자면, 이는 '수분 배출이 유리한 구조' 와 '육즙의 유출을 막는' 두가지 기법이 동시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기름에 튀길 때 수분들이 기화하면서 수분이 빠져나간 자리가 팽창하여 부풀어 오르고, 무수히 많은 작은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튀김옷의 글루텐과 전분은 재료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수행하고요. 그래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요리가 탄생하는 겁니다!
돈카츠가 맛있는 이유는 겉바속촉을 강화했기 때문이에요. 돈카츠는 보호막용 밀가루옷, 튀김옷에 고소한 맛을 더하고 빵가루를 붙여주는 달걀옷, 마지막으로 바삭거리는 식감을 강화하는 빵가루 옷을 입혀 튀겨내니까요. 책에서 설명한대로 '묻고 더블로 가는' 조리법입니다.
튀김이 왜 맛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실려 있습니다. 고온에 의한 마이야르 반응, 그리고 캐러멜화 반응 때문이라네요. 겉바속촉에 마이야르와 캐러멜화 반응이라니, 이건 정말 반칙입니다. 이래서야 맛이 없을 수가 없겠죠. 

마지막 3부로 기름, 튀김옷, 튀김기의 종류가 설명되며 책은 마무리 됩니다. 항목별 분류와 차이점에 대한 소개가 아주 상세합니다. 튀김업 입문자라면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내용이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모두 3부에 걸쳐 튀김에 대해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터치하고 있기는 한데, 광고에 낚인 기분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책에서 접할 수 있었던 내용이 많았던 탓입니다. 대표적인 튀김 요리 소개가 그러합니다. 대부분 다른 요리 관련 서적에서 한 번 이상 접했던 요리들이거든요. 총 7종의 요리 중 3종이 일본 요리라는 것도 잘못된 배분이 아닌가 싶고요. 우리나라에서 즐겨 먹는 튀김 요리를 소개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분식집 튀김의 유래에 대해서 파헤쳐주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튀김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설명은 "맛있는 요리에는 과학이 있다"에서, 글루텐 때문에 튀김옷을 많이 반죽하면 안되고, 차게 놔 두어야 한다는 건 "맛의 달인"에서, 프렌치 프라이는 "오무라이스 잼잼"에서, 그 외의 다른 소재들도 다양한 많은 작품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목차와 설명에서 정리가 잘 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쉽게 쓰여진 듯 하지만 읽다보면 뭔가 두서가 없다고나 할까요? 반대로 전문적인 부분은 너무 전문적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이 책만 읽는다면 나름의 가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요리 관련 전문 서적을 많이 읽은 분이시라면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2021/04/16

최후의 일격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5점

최후의 일격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9년 겨울, 작가로 갓 데뷔한 엘러리는 크리스마스부터 공현절까지 12일간 열리는 파티에 초대되어 인쇄업자 아서 크레이그의 저택으로 향한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젊고 매력적인 시인이자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이기도 한 존과 그의 약혼녀, 허영 가득한 여배우, 출판업자인 댄 프리먼 등을 비롯해 모두 12명.

모두가 파티 분위기로 들떠 있는 사이 저택은 폭설로 고립되고,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 초대 손님들에게 열두 별자리를 상징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넨다. 그리고 얼마 후, 초대받지 못한 13번째 손님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엘러리 퀸의 마지막 장편입니다. 말년의 엘러리 퀸이 고전 본격물의 향취를 되살리고자 의욕적으로 도전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부터가 엘러리 퀸 데뷰작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 직후니까요. 작품도 고전 본격물에 굉장히 충실합니다. 클로즈드 서클에 가까운 무대 설정과 부유한 주요 등장인물들, 기묘한 범행과 단서들 모두가요. 모든 단서는 공정히 제공되며, 심지어 '독자에의 도전'도 삽입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인용했다는 형태로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망작입니다. 고전 본격물의 단점만 집대성해 놓은 결과물이에요.

고전 본격물의 존재 가치가 멋진 트릭과 기발한 설정에 있다는건 분명합니다. 어떤 작품은 트릭과 설정만으로도 모든 단점이 덮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런 설정들은 '비현실성;을 강화한다는 문제가 큽니다. 기상천외할 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고요. 그나마 이런 설정들이 최소한의 현실성을 가지려면, 사용되거나 그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라도 명확해야 합니다. 작위적인 상황 연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의 예를 들자면, 범인이 피해자의 목을 잘라 T자 형으로 매단 이유는 피해자인척 하기 위해서 벌인 행동이었죠. 작위적이기는 하나, 말은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트릭도 변변치 않고, 설정들도 억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표적인건 범인이 12일에 걸쳐 20가지 선물을 예정된 피해자에게 보낸다는 설정입니다. 선물들은 폐니키아 알파벳이 유래한 사물들을 의미했습니다. 첫번째 '황소'는 알레프, A, 두번째 집은 베스, B 라는 식으로요. 이 경우 마지막 Z는 단검인 자인을 뜻하죠. 하지만 범인은 스무번째 선물이 전달되는 마지막 날, 단검으로 존을 살해한다는걸 미리 알리기 위해 선물을 보낸게 아닙니다! 범인 아서 크레이그는 존을 꼭 죽였어야 했어요. 파산을 막기 위해서요. 누군가 존의 죽음을 막거나, 자기 범행을 멈추어 주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선물을 보냈을까요?
이유랍시고 나오는건, 명탐정 엘러리 퀸이 선물은 페니키아 알파벳이고, 선물 카드 뒤에 그려진 그림은 교정용 기호를 쓴 거라 편지를 보낸건 이쪽 분야에 정통한 인쇄업 종사자 아서 크레이그라고 추리해내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너무 뻔한? 단서라서 명탐정은 아서 크레이그는 진범이 아니고 누명을 쓴 거라고 주장해 줄 걸 기대했다면서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어요. 이러니 명탐정들이 현대의 비웃음거리가 된 겁니다...
차라리 피해자만 아는 일종의 기호로 피해자의 두려움을 가중시키려고 했다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트릭을 알아채서, 자신의 범행을 멈추어 줄 것을 기대했다던가, 범인이 페니키아 알파벳에 집착하는 미치광이였다는 이야기가 조금 더 나았을 겁니다. 딱히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작품 속 설정보다는 말이 됩니다.

애초에 아서 크레이그가 선물을 보내면서, 열 두명이나 되는 손님이 모인 저택에서 12일 동안 파티를 즐기면서 시간을 끌 이유도 없습니다. 언제든 존을 죽이면 되요. 사고로 위장해서요. 실제로 작 중에서도 존은 2번의 큰 사고 - 승마 중 낙마, 과음 후 계단에서 추락 - 을 겪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범죄를 저지를 경우, 유산이라는 동기 때문에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 부분은 선물을 보낸 뒤 살해해도 어차피 똑같습니다. 구태여 복잡하고 번거롭게 단서만 늘린 셈이에요. 게다가 아무리 자기 저택이라지만, 경찰마저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려 12일 동안 몰래 선물을 놓아둘 수 있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선물을 놓아두다가 잡혔다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전개와 설정도 엉망입니다. 존3가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협박하는 장면은 볼썽사나울 지경입니다. 뭐 프리먼의 인쇄소를 손에 넣고자 했던건, 돈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허나 롤랜드 페인을 협박해서 존1이 쓴 시집에 대한 호평을 얻고자 한 건 설명이 안됩니다. 스스로가 존1이 될 생각이었을까요? 협박했다는 사실을 존1에게 숨긴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건 마찬가지고요. 물론 협박을 한게 존 1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협박대로 인쇄소와 시집에 대한 호평을 손에 넣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마디로 존을 죽이고 싶은 용의자를 만들기 위한 억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협박을 한 건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고 선물이 보내지고 난 이후이니, 이 둘을 용의자로 보기도 힘들어요.

아울러 작품 속 경찰들은 정말로 무능했습니다. 사건 이후 아서 크레이그의 재산 흐름만 확인했어도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건 별로 어렵지 않았을거에요. 이 정도 수사도 하지 않고 미해결 사건으로 덮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아예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존의 쌍둥이 형제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사실 존은 '세쌍동이'여서 존 2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나름의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 살아있는게 존 1이냐 존 3이냐는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 평가를 끌어올리기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제 정말 엘러리 퀸은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21/01/29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빵의 지구사 - 6점
윌리엄 루벨 지음, 이인선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얼마 전 "향신료의 지구사"를 읽고 탄력받아 한권 더 집어든 '지구사'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도 이제 여덟 번째 리뷰군요. 시리즈 완독까지는 두 권 남았네요.

그 동안 읽었던 '지구사'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커리의 지구사" 였습니다. '커리'가 무엇인지에서 시작해서, 커리의 역사와 세계화된 과정, 대표적인 커리 요리까지 화려한 도판과 함께 짤막하면서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리즈 다른 책들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고요.

물론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특히 이 언제, 어디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마음에 듭니다. 어떤 빵을 어떻게 만들었을지에 대해 관련 사료를 통해 잘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특히 농경 생활을 택한 뒤 빵을 먹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수렵과 채집 생활에 비해 부정적이었다는 시각이 독특했습니다. 예를 들어, 장 자크 루소는 농경 도입으로 노예 제도가 생겨났다고 주장했고, 창세기를 다룬 구약 성경과 유대 신화에서도 농업은 부정적이었다고 하네요. 최초의 농부였던 카인은 가장 처음 살인을 저지르고, 하느님에게 거짓말을 하며, 비자발적 노역으로 도시를 세운 인물로 그려졌기 때문이랍니다. 유대 신화에서는 불신의 상징인 저울과 자를 끌어들였고요. 그럴듯하죠? 

하지만 농경 생활은 필연적이었고, 결국 이 덕분에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이를 '빵'과 연결하여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게 우르크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한 설명입니다. 기원전 3200년경,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농경지에 효과적으로 물을 대는 중앙관개농법이 발달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쌓이게 되었고, 그 덕분에 전 인구가 농사에 매달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분업과 전문화가 진행되어 인구가 3만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진화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고대 빵 역사에 대한 자세한 서술에도 불구하고,밀의 종류, 배합, 이스트의 종류 등을 모두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어서 현재 어떤 빵인지 재현하는건 어렵다고 하는 주장도 신기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로마 시대 등 빵에 대해 많은 자료가 남아 있는 시대 모두 마찬가지라고 하니까요. 저자의 말에 따르면 재현이 가능한 빵은 근세시대 (1500년 이후)에 처음 등장한다는군요.

이러한 빵의 탄생 이후는 부자와 빈자가 빵으로도 구분되는 시기에 대한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버스 마컴의 "영국 주부" (1615) 속 하류층 농장 노동자를 위한 갈색 빵 레시피가 아주 충격적이기 때문이에요. 특징은 완두콩 가루를 섞은 것인데, 놀랍게도 저자 마컴이 경주마에게 먹이는 빵보다도 못한 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 재료, 맛 모두가 별로였던 하위 계층의 빵은 당연히 상위 계층은 거부해 왔는데. 이 현상이 빵의 역사를 이끌었다고 보는 저자의 주장은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16세기 ~ 18세기 흰 빵은 부의 상징이며 갈색 빵은 가난의 상징으로, 이런 상징은 저도 당시를 다룬 소설 등에서 많이 접해보았었습니다. "하이디"에서도 '하얀 롤빵'이 선망의 대상이었죠?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호밀빵을 멀리하는건 현대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이건 모든 식품, 사치품, 기호품에 해당되는 내용이 아닌가 싶어요. 구태여 '빵'에 한정지을 이유는 없습니다.

또 맛있는 빵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도 별로에요. 밀가루의 종류, 발효 방법, 설탕을 넣는지 소금을 넣는지 등 다양한 빵 제조법을 소개하는 내용이 대부분인데, 설명은 깔끔하지만 기대했던 지구사적인 설명은 아니었거든요. 좀 더 빵의 역사에 대해 파고들줄 알았는데 말이죠.

이어지는 세계의 빵 소개는 더욱 실망스럽습니다. 그냥 국가별 빵 몇 가지가 등장할 뿐이며, 미래의 빵도 자가 제조 기계가 발전하고 공장제 빵도 진화할거라는 일반적인 이야기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제 특성상 유럽 중심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약점이에요.

다행히 부록처럼 수록된 주영하의 한국 빵 역사가 실망을 조금은 만회해 줍니다.조선 시대 이기지가 청나라 연행길에 먹었던 카스테라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일제 시대 널리 퍼졌던 빵 문화가 해방과 6.25 후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잘 요약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제과제빵의 거목인 삼립 식품과 크라운 제과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주 나쁘지는 않고, 얻을게 없지도 않지만 제목처럼 빵의 범지구적 역사를 다룬 책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