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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31

2016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2015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13차, 열 세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6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53 (53)권, 기타 장르문학 8 (10)권, 역사서 18 (12)권, 디자인 및 스터디 도서 4 (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9 (7)권, 기타 도서 15 (21)권으로 모두 107 (107)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작년과 거의 비슷하군요.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6년 베스트 추리소설 :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단평 : 세상은 넓고, 모르는 작가도 많고, 재미있는 작품도 아직 이렇게나 많다! 

올해 추리, 호러 장르물 중 별점 4점 이상 작품은 단 한편도 없습니다. 그런데 별점 3점짜리는 "별도 없는 한밤에", "천사들의 탐정", "미스테리아 8호", "사냥개 탐정", "검은 수도사", "가면 무도회 1,2",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엠브리오 기담"의 여덟 편이나 됩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한편을 꼽기 위해서 우선 잡지인 "미스테리아 8호"를 뺐습니다. 호러 성향이 강한 "별도 없는 한밤에", "엠브리오 기담"과 역사 모험물 성격이 강한 "검은 수도사"도 빼면 네 편이 남네요. 다 좋은 작품들이지만 이 중 추리적으로도 괜찮고 재미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발견의 기쁨을 선사한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를 올해의 베스트로 꼽습니다.

2016년 워스트 추리소설 :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단평 : '미스터리'가 아니었다... 

2016년에는 별점 2점 이하의 작품이 무려 16편이라고 한탄했는데 올해는 26편입니다! 읽은 작품 중 반 가까이가 수준 이하였다는 이야기지요. 참으로 너무합니다. 최악인 별점 1.5점 이하도 무려 열 편이나 되고요.

하지만 최악 중의 최악인 별점 1점을 획득한 작품은 이 작품 뿐입니다. 최악인 이유는 책의 완성도를 떠나 '미스터리'가 아닌 탓이에요. 그냥 청춘 연애물일 뿐이거든요. 작품의 수준을 떠나 구태여 추리물이라고 소개하여 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괘씸한 마케팅 때문에 올해의 워스트로 꼽습니다.

2016년 베스트 기타 장르문학 : 

"제라르 준장의 회상" 

단평 : 시대를 뛰어넘다. 

올해의 기타 장르문학에서는 별점 3.5점의 이 작품이 베스트입니다. 모두 10권도 읽지 않아 한권의 베스트를 꼽기는 좀 애매하지만요. 여튼 코난 도일 경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고전 명작 모험물입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양심의 문제" 

단평 : 바탕에 깔린 사상 문제. 

도서출판 불새의 용기있는 행보에는 항상 박수를 보내는 바이지만... 이 작품만큼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역겨운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은연 중에 포장하여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2016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신들의 연기, 담배" 

단평 : 교양과 재미의 절묘한 결합. 

이 책은 올해의 유이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교양과 재미,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놀라운 결과물이죠. 제가 꼭 흡연자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2016년 워스트 역사 도서 : 

"조선의 武와 전쟁" 

단평 :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역사 도서는 좀 가려읽는 편이라 워스트가 대체로 없는 편인데 올해는 이 책이 뽑혔습니다. 단평대로 기대한 내용에 전혀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었어요.

2016년 베스트 디자인 / 스터디 도서 : 

올해 이 분야는 달랑 4권만 읽었기에 별도로 평하지는 않겠습니다. 내년에는 이 쪽 분야도 좀 더 열심히 읽겠습니다.

2016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백미진수" 

단평 : 실력자가 애정을 담아 쓴 미식 에세이의 진수.

이 책은 올해 유이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읽는 내내 즐거우면서도 유용한 좋은 에세이였어요.

2016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레시피" 

단평 : 발췌에 이은 레시피 소개에 그친, 날로 먹은 책 

제목 그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한 음식, 요리를 발췌한 후 해당 레시피 소개가 전부인 책. 저자의 아이디어는 눈꼽만치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서프라이즈 : 인물편" 

단평 : 이 책이 존재할 이유를 모르겠다. 

올해 기타 도서는 전부 고만고만해서 베스트를 꼽기는 쉽지 않네요. 별점 3점짜리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장서의 괴로움") 독보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거든요. 하지만 워스트는 확실합니다. 총 4편의 별점 1.5점짜리 망작들 중에서도 이 책이 선명하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왜 책이 나왔는지 이유 자체를 모를 무의미한 결과물입니다.

2016년 베스트 기타 Comic :

"피너츠 완전판" 

단평 : 발간만으로도 감사한 완전판! 

올해 별점 3점을 넘는 만화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으로 점수가 좋은 작품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총 4권을 읽었고, 대체로 별점이 우수했던 "피너츠 완전판"을 올해의 작품으로 꼽아봅니다. 단평 그대로 발간된 것 만으로도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2016년 워스트 기타 Comic : 

"역시 빵이 좋아!" 

단평 : 만화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했다. 

올해 별점 1점짜리 망작은 본 작 외에 "스파이 vs 스파이", "산적 다이어리 2"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은 최소한 '만화' 이기는 한데 이 작품은 아무리 봐도 만화가 아닙니다. 빵 소개서를 만화처럼 만든 것에 불과하니까요. 최소한의 이야기와 재미도 없기에 올해의 워스트로 꼽습니다.

그외 영화, 만화 등은 대체로 부분별로 5편 이상 감상한 것이 없기에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결산평 : 

총 독서 권수가 작년과 똑같다는게 놀라운데 여튼 올해도 100권을 넘겼습니다. 이 정도면 취미인으로 할만큼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제가 나이가 든 탓인지, 아니면 출간작들의 수준이 갈 수록 떨어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평균 이하의 작품들 수가 급증했다는 겁니다. "장서의 괴로움"에 나온 유명한 장서가 다니자와의 명서 감정술처럼 - "명저라는 홍보에 넘어가 샀던 책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류 이하 책을 이것저것 찾아 읽지 않았다면 초일류를 초일류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일 수는 있겠지만, 몇몇 망작들은 그야말로 읽는 시간조차 아깝기 그지 없었습니다. 뭐 좋게 생각하면 이런 작품들을 소개하는게 제 미미한 블로그의 존재 의미겠죠. 찾아주시는 분들의 시간이라도 아껴야 할 테니까요.

하여튼,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여러분들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고 성취하시는 한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16/12/27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 루스 웨어 / 유혜인 : 별점 1.5점

인 어 다크, 다크 우드 - 4점
루스 웨어 지음, 유혜인 옮김/예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범죄소설가 노라는 오랜 친구 클레어의 결혼 전 싱글 파티 초대 메일을 받았다. 여러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난 후 10년간 연락조차 없었기에 딱히 갈 생각은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같이 초대받은 당시부터의 친구인 의사 니나와 함께 파티 장소로 향했다. 싱글 파티 장소는 클레어의 대학 시절부터의 친구라는 플로의 할머니 별장으로, 으슥하고 외진 장소였다...

"이 동네 사람들은 체호프의 총(1막에서 총을 복선으로 등장시켰다면 3막에서는 반드시 쏴야 한다) 이야기 들어본 적 없대요?" - 톰. 별장에 장식된 총을 보고.

작가는 근본적으로 썩은 고기를 노리는 새가 아닌가. 죽어버린 연애사와 땅에 묻힌 말싸움을 쪼아 먹고 작품에 재활용한다. 그들의 과거는 우리가 고안한 방법으로 새롭게 변신해 좀비처럼 부활한다. - 톰이 연인과 싸운 이야기를 들으며 노라가 하는 생각. 

사람은 변하지 않아. 전보다 치밀하게 자기의 본모습을 숨길 뿐이지. - 니나. 10년만에 만난 클레어가 착해졌다는 노라의 말을 반박하며. 

"충격이긴 한데 놀랍지는 않다. 그 여자는 생활이 연기였잖아." - 톰의 연인 브루스가 클레어를 평한 말.

주인공 노라 시점에서 2박 3일간의 외딴 곳 파티와, 파티에서 벌어진 사고 이후 병원에 입원한 노라에게 닥친 상황에 대한 묘사가 교차되어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미스테리아 8호"에 수록되었던 멋드러진 리뷰에 혹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뷰만큼 흥미롭거나 재미있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설정과 전개 너무 뻔한 탓이 큽니다. 모든 일에 있어 여왕처럼 행동하던, 세상의 중심이 자기라 생각하는 클레어를 축으로 그녀와 관련된 여러 사람이 모인다는 설정과 클레어가 현재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다는 동기 모두 진부해요. 사건의 핵심 인물 노라가 사고로 일종의 단기기억 상실에 빠진다는 설정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테고요.
또 390여 페이지 분량에서 무려 330페이지까지가 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길며, 길이를 늘이려는 불필요한 시도들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반인을 대표하는 멜라니 캐릭터처럼요. 사건 내 전개를 보면 등장할 필요가 없는 분량 낭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진부하고 뻔한 설정, 길고 장황하며 지루한 서술을 극복하려면 최소한 범행이라도 정교했어야 했는데, 이 역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사고가 아니라 살인 사건으로 밝혀진 후의 과정이 엉망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범인이 될 만한 사람이 극단적으로 적다는게 가장 큰 문제에요. 싱글 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달랑 5명 뿐이니까요. 게다가 이 중 그녀를 숭배하는 플로, 파트너를 통해 알게된 연극계 지인인 톰, 아기 때문에 이틀째 아침에 귀가해버린 멜라니는 아무리 보아도 범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동성애자라는게 클레어에 의해 폭로되었던 니나와 옛 연인이 이번 클레어의 결혼 상대라는걸 알게 된 노라만 남습니다. 이 중 현재 동성 파트너와 알콩달콩 지내는 안정적 지위의 의사인 니나가 10년도 전에 일어난 일로 범행을 저지를리는 없습니다. 설령 니나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제임스가 아닌 클레어가 타겟이었어야 했고요. 구태여 노라의 폰을 이용하면서까지 제임스를 끌어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작품에서 몰아가는 것 처럼 노라가 범인일까? 이 역시 전개에 의해 부정됩니다. 정말로 클레어의 입을 통해 그녀의 남편될 사람이 제임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묘사가 좋은 예입니다. 그녀가 메시지를 보냈다는 상황에서 아무런 묘사를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전개에 따르면 동기도 모호합니다. 10여년 전 헤어진 연인이 친구와 결혼한다고 살의를 품는다? 말도 안되지요.

범행 자체도 허술하기 그지없습니다. 애초에 누군가 침입했다는걸 미리 파티 참가자들에게 노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총을 쏘기 위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도 너무 과한 설정이었어요. 게다가 참가자 중 '남자'가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와 닿지 않습니다. 또 작품 내에서는 총을 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주지는 않는데(노라 시점에서는 플로일 것으로 묘사되지만요), 그게 누가 되었건 실패했다면? 즉 제임스에게 명중하지 못해 그가 살아 남았다면?에 대한 대책이 없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명사수라고 해도 한 방에 사람이 죽기는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총격 이후 제임스를 차에 태운 후의 묘사 역시 석연치 않습니다. 노라가 운전대를 잡은 것은 우연에 불과하며,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모두 사고입니다. 치밀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어요. 게다가 결정적 증인인 플로가 건재하다는 점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빠져나가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플로가 클레어를 숭배해서 입을 열지 않을거라고 확신했을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결국 사건을 담당한 라마 경장이 플로가 증언했다고 밝힙니다. 그것도 결정적 순간에요. 즉, 범행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는 뜻입니다. 노라가 병원을 탈출한 후 클레어와 벌인 생명을 건 추격전 역시 쓸모없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노라가 진상을 눈치채게 되는 제임스가 보낸 메시지를 10년 만에 깨닫는다는 클라이막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늦게 깨달은 것도 문제지만 이름을 이용한 조잡한 트릭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이렇게 허술하게 조작하느니, 마지막 톰의 병문안 때의 이야기처럼 노라가 오지 않는게 클레어에게 더 유리했을거에요. 플로에게 범행을 뒤집어 씌우는게 더 말이 되니까요. 플로가 총을 쏜 것도 사실이고, 탄알을 바꿔치는 것도 손쉬울 뿐 아니라 여신처럼 숭배하는 친구의 결혼을 참기 어려웠으리라는 동기도 그럴듯 하잖아요.

계속 사건이 터지게 만들어 흥미를 잡아끄는 전개, 어딘가 불편한 여자들만의 심리를 제대로 그려낸 묘사는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저와 같은 평범한 남자에게는 좀 지루하고 짜증스러운 묘사라는 점입니다. 영국 출신 여성 작가 - 예를 들자면 미네트 월터스 -스타일이라 할 수 있는 삐딱한 여성 심리 묘사는 아직까지도 영 와 닿지 않네요. 노라를 비롯한 등장 캐릭터들 대부분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읽는 내내 불편함을 가중시켰고요.

한마디로 단점에 비하면 장점은 미미합니다. 여성 시점의 범죄 스릴러 유행에 편승한 그냥저냥한 결과물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덧붙이자면,  한국과 똑같이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먹는 문화라는건 조금 신기하긴 했습니다만, 솔직히 친구가 곧 결혼한다고 해서 독신 생활 마지막 파티를 벌이는데 뭐 이리 복잡하고 귀찮은 일들이 많은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2016/12/25

하나씨의 간단요리 1,2 - 쿠스미 마사유키 / 미즈사와 에츠코 : 별점 2.5점

하나씨의 간단요리 1 - 6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미즈사와 에츠코 그림/미우(대원씨아이)
하나씨의 간단요리 2 - 6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미즈사와 에츠코 그림/미우(대원씨아이)

"고독한 미식가"로 잘 알려진 쿠스미 마사유키가 원작을, 미즈사와 에츠코가 만화를 맡은 일상계 구루메 만화입니다.

쿠스미 마사유키의 작품들을 보면, 대체로 일상계와 평범한 먹거리 들을 조합하여 친숙함으로 어필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독신자가 이런저런 상점가 가게에서 다양한 음식들을 사 먹는 "고독한 미식가", 은퇴한 직장인이 혼자서 이런저런 음식을 사먹거나 집에서 간단한 요리를 해먹는 "방랑의 미식가", 샐러리맨이 주로 혼자 이자카야를 돌아다니며 술을 먹는 "황야의 미식가" 모두 그렇지요. 이 작품 역시 남편의 단신 부임 탓에, 가정 주부 혼자 생활하고 식사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주로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 남성이 주인공인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주인공이 30세의 젊은 여성이며, 말버릇이나 호들갑스러운 행동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덕분에 주로 아저씨 대상의 일상계스러운 소소한 매력으로 승부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주인공 하나코씨의 귀여운 매력과 적절한 개그, 유머가 더해져 있지요. 특정 장면만 보면 '개그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요.
하나씨 주변 인물들이 비교적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차이점도 큽니다. 친구 미즈키를 비롯해서 하나씨의 친정 부모님,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서점 사장님, 이웃집 동거인 죤 & 요코 등등 모든 주변 인물들이 나름의 존재감을 가지고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든요. 덕분에 이야기도 풍성해질 뿐 아니라 보다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또 다른 주역인 음식들 역시 밖에서 먹는 한 끼 식사나 술안주 가 주로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정말 혼자 사는 여성이 먹음직한 음식들이 소개된다는 차이를 보입니다.
집에서 해 먹는 과정이 대충이라는 현실적 감성도 잘 살립니다. 단팥죽에 떡을 구태여 넣어 먹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들은 명란 덮밥 레시피에 가다랑어포를 추가는 약간의 어레인지는 확실히 주부스러웠고요. "포만감과 만족감이 죄책감과 패배감으로 돌변해 가는 오후..."라는 대사와 같이 다이어트에 신경쓰는 장면과 같은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어요. 몇몇 밖에서 사 먹는 음식들도 주부, 30대 젊은 여성 분위기가 물씬 묻어납니다.

그러나 작화 면에서는 좀 아쉽습니다. 그림으로는 세계 챔피언급인 다니구치 지로, 음식 만화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츠지야마 시게루에 비교하면 확실히 묘사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동글동글 귀여운 그림체는 하나씨 표현에 어울리지만, 또 다른 주인공인 '음식'에는 적합하지 않았고요. 대체로 사먹거나 정말 간단한 인스턴트 음식 중심이기는 하지만, 딱히 먹고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음식이 없던 건 작화 문제가 컸습니다. 맛있는걸 먹고 행복해하는 하나씨 표정만으로는 많이 부족하지요. 이게 얼굴만 잡히는 포르노도 아니고...
또 어쩔 수는 없었겠지만 하나씨의 수다에 대한 번역이 부실해 보이는 것도 눈에 거슬렸어요. 뭔가 라임을 활용한 아재개그 스타일 말장난이 중심인데, 적절히 번역하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조금 더 맛을 살려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요리, 음식만화지만 캐릭터의 매력과 스토리적인 재미가 결합되어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확실히 많아요. 나름의 매력이 있기도 하고요. 요리 만화를 좋아하신다면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동글동글 귀여운 그림체에 이런저런 사람들과 함께하는 드라마, 거기에 더해진 여러가지 음식 이야기.라는 주요 키워드만 놓고 보면 "아빠는 요리사"와 똑같습니다. 본인의 히트작 "고독한 미식가"를 벤치마킹한 "방랑의 미식가"나 "황야의 미식가" - 이쪽은 "술한잔 인생한입"도 많이 참조한 것 같습니다만 - 도 그러한데, 인기 히트작을 참조하여 새로운 파생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도 결과물만 좋다면야 뭐 나쁘지야 않죠.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니까요. 허나 "아빠는 요리사"가 수십년간 이어온 장기 연재작으로 가족 구성과 분위기가 전통적인데 반해, 이 작품은 남편의 단신 부임으로 강제 독신 신세가 된 하나씨를 비롯, 옆집에서 동거하는 존과 요코, 결혼도 하지 않고 애인과 아기부터 가지게 된 친구 미스즈 등 정상적인 가족 관계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히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초콜릿의 비밀 : 자크 제냉의 아틀리에로 떠나는 미식 여행 - 프랭키 알라르콩 / 강현정 : 별점 3점

초콜릿의 비밀 - 6점
프랭키 알라르콩 지음, 강현정 옮김/시트롱마카롱

만화가 프랭키 알라르콩이 초콜릿에 대한 만화를 그리기 위해 프랑스의 유명 셰프 자크 제냉의 아틀리에를 찾아간 후 여러가지를 배우고 경험한다는 내용으로, 부제처럼 자크 제냉의 비중이 굉장히 큽니다. 원래 셰프 출신이지만 딸 아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생을 맞게 해 주기 위해 초콜릿의 세계로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장인이지만 겸손하다는게 독특하게 다가왔습니다. 초콜릿에 대해서는 장인급의 충분한 솜씨와 자부심을 갖춘건 확실합니다. "딱 보면 즉각적으로 느낌이 와야 한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단순함에서 최고를 추구한다는 사고방식부터 범상치 않으니까요. 하지만 스스로를 우월하다 내세우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습니다. 대화와 사교 면에서 여러모로 겸손해서 매력적이었어요. 이러한 점은 스스로를 쇼콜라티에라고 부르지 않고 초콜릿 가공사로 부르는 첫 장면부터 대표적으로 드러나는데, 일본 요리 만화에 흔히 나오는 스스로의 실력만을 믿는 괴짜 장인들 - 우미하라 (가이바라), 세리자와 등등등 - 과는 정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만화와 현실의 차이인지, 일본과 프랑스의 문화 차이인지도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포인트였습니다.

등장하는 수많은 레시피와 초콜릿, 케이크들도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집에서 해봄직한 레시피 중의 하나는 핫 초콜릿입니다. 잘게 자른 초콜릿 300g (카카오 64%?)에 우유 1리터. 우유를 끓이고 잘게 자른 초콜릿을 넣은 후 거품기로 계속 저어 녹인 후,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불에서 내려 뜨거운 상태로 서빙한다는데, 이건 꼭 딸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번 주말에 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시피, 인터뷰 뿐 아니라 초콜릿을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한 과정도 자세히 소개해 줍니다. 카카오 열매의 경우에는 자크 제냉의 친구인 쇼콜라티에 스테판 보나와 함께 페루까지 날아가 어떻게 재배하고 어떻게 수확하며, 어떻게 제조, 유통하는지 알려줄 정도로요. 몇몇 초콜릿은 프랭키가 직접 실습생으로 만들어 본 경험도 소개되고요.

이렇게 좋은 내용이 많은데, 문제는 120여페이지라는 분량으로는 이 모든걸 다루기에는 분량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14,000원이라는 가격도 과한 편이고요. 또 자크 제냉 아틀리에의 1년 시즌을 바탕으로 그려진 만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일반적인 초콜릿보다는 특정 아이템(발렌타인 초콜릿 등)에 소재가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좀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풀 컬러에 작화도 빼어난,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도 나쁘지 않은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아니, 실제로 먹을 수 없으니 최악이려나요?

2016/12/23

화가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2.5점

화가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호러영화 같은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 레나. 코타로가 곧바로 이사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하자. 

곧 중학생이 되는 코타로는 할머니와 함께 치바에서 머나먼, 도쿄 근방의 무사시 나고이케라는 낯선 지역으로 이사왔다. 코타로의 부모님이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사망한 탓이었다. 코타로는 새 집에서 왠지모를 기시감을 느꼈고, 집 안에서 온갖 이형의 존재와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코타로는 새 친구 레나와 함께 이유를 밝혀내기 위한 조사에 착수했고, 오래전 신문을 통해 이사 온 집은 10년 전 일가족이 이웃집 정신병자에게 살해당했던 장소이며, 유일한 생존자는 바로 코타로였다는걸 알게 되었다...

미쓰다 신조의 '집'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화가 (禍家)'는 한국말로 하자면 '재앙의 집' 이겠지요? '집' 시리즈 답게 '집'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수단이자 장치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새롭지는 않습니다. 설정부터가 진부한 탓입니다. 몰락한 막장 명문가(수많은 작품들...), 잔인하게 일가족이 살해당했던 과거(수많은 작품들...), 이형의 존재가 지나가는 길이나 궤도에 있으면 죽거나 해를 입는다("귀담백경"의 "방울소리" 라던가 "백귀야행" 등등등), 죽음의 연쇄는 막을 수 없고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데스티네이션" 등등등) 등 모두 어디선가 보아왔던 설정들이지요.
뻔한 설정이라도 미쓰다 신조라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작가의 장기인 일본적인 요괴나 주술, 심령 묘사가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역인 시미에의 작전도 허술합니다. 코타로의 양부모를 죽인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레나와 친해진 후 코타로와도 격의없이 지내는 과정은 그렇게 설득력이 높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애초에 코타로와 할머니가 이 곳으로 이사오리라 생각한 것 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 가족이 살해당한 집에 손자를 데리고 다시 이사를 간답니까?

다행히 장점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뻔하지만, 뻔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쓰였다는 뜻이고 많이 쓰였다면 그건 그만큼 효과, 즉 재미가 있다는 의미도 되지요. 이에 더해 극단적으로 말하면 초등학생의 모험물이라 할 수 있는 작품 특징 덕분에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이기도 하고요. 특히 코타로에 대한 묘사가 괜찮습니다. 급작스럽게 닥치는 여러 사건과 사고 속에서 의지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며, 자신의 힘으로 어려움을 돌파해나가려는 전형적인 '점프식' 주인공인데 작품과 잘 어울린 덕분입니다. 아울러 주인공이 어리고 모험물적인 전개를 갖추어서 작가 특유의 장황하면서 복잡한 묘사가 덜하다는 점도 장점이라 할 수 있을 테고요.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시미에가 사실 가미츠케 가의 딸인 시메이로, 오빠의 유지를 받들어 범행을 끝내기 위함이었다는걸 몇몇 디테일로 드러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예를 들면 코로가 화요일, 목요일 낮에 짖은 이유를 가정교사로 레나 오빠의 공부를 봐 주기 위해 오는 시미에의 동선과 일치시키는 식으로요. 물론 개가 짖는다고 지나가는 사람이 다 살인범은 아닐테니, 그렇게 합리적인 설정은 아니기는 하지만요.
마지막 순간에 이러한 디테일들을 통해 시미에의 존재를 눈치챈 두 번의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개 코로까지야 그렇다 쳐도, 레나에게서 받은 부적이 휴대전화였다는 반전은 정말이지 멋졌어요. 

또 정신병자 살인마 카미츠케 군지의 범행은 사당에서 뛰쳐나온 이형 존재의 동선에 위치한 자신의 집 대신, 맞은편 무나카타가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는 진상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신병자나 할 법한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라도 이에 이르는 과정을 나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충분한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더라도 영적인 무언가에 대한 묘사는 충분히 섬찟합니다. 형태를 그리지 않고 분위기와 소리만으로 공포심을 자아내는 묘사력은 여전히 발군이에요. 이들은 살인범 카미츠케 군지를 제외하면 모두 살해당한 코우타의 가족으로 무언가를 코우타에게 전하기 위해 딱 한번만 나타난 것이라는 반전도 나쁘지 않고요. 
물론 반전이 아주 새롭지는 않고, 이 반전 탓에 이후 이들에 대한 공포가 사라져버린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사당에 관련된 그럴싸한 설정과 묘사 - 여기에 있는 건 구제할 수 없는 절망, 불합리할 정도의 우월감, 끝을 모를 악의, 압도적인 광기, 소름돋는 증오, 너무나도 제멋대로의 살의... -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굉장히 무서운 무언가처럼 묘사하다가, 별다른 설명없이 흐지부지 마무리되어 버리는 탓입니다.
군지가 사당을 박살낸 후 무언가 탈출(?) 했다면 사당은 그냥 빈 껍데기가 되었을텐데 이런 부분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마지막으로 레나와 코타로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는 결말이(초중반부에 등장했던 정체모를 꼬마 아이로 보이는) 가미츠케 가문의 단 하나남은 소년의 등장으로 마무리 되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소설대로라면 결국 코타로는 죽게 될 것 같은데, 레나와 곧 태어날 아이까지 그렇게 될지... 좀 많이 걱정이 되는군요.

하여튼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과 단점을 모두 적절히 갖춘 평작입니다. 미쓰다 신조 입문으로는 괜찮습니다.

2016/12/18

해가 저문 이후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해가 저문 이후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최신 단편집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이후 6년만이라고 하네요. 모두 13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 작품 수 부터가 남다른데, 내용도 확실히 최신 작품답습니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실히 궤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작품은 거의 없고, 심리나 특정 상황에 대한 묘사에 기대는 작품이 대부분이거든요. 심지어 특정 몇몇 작품은 아예 공포라는 감정보다는 그냥 인간에 대한 묘사, 환상에 대한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기묘한 '강박'을 다루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 해요. '강박'을 주제로 한 앤솔로지 수록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전부터도 느낀 것이지만 음악을 전면에 드러내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작품이 많다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N"에서 환자 N이 괴물을 보고 달아나면서 차에서 라디오를 켰을 때 록 음악이 터져나오는 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더 후의 노래가 끝나고 흘러나온건 도어스의 "세상의 이면으로 건너오라"였는데 참으로 절묘했어요. 오싹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직접적인 공포가 드러난 작품을 좋아하는 탓에, 이런 변화가 좋게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작가의 연륜이 쌓이고, 내면의 성찰이 깊어졌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이런 류의 작품을 스티븐 킹이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탓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사후세계를 환상적으로 묘사한 "윌라", 홀로 헬스 자전거 운동을 하다가 강박적인 상황에 빠져든다는 "헬스 자전거", 9.11 테러 때 회사를 땡땡이 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스콧에게 죽은 동료들을 상징하는 물건이 갑자기 찾아온다는 "그들이 남긴 것들" 입니다. 사후세계초자연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단지 소재일 뿐, 내용과 전개는 인간 관계나 강박적인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 관계가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고, 딱히 반전도 존재하지 않으며, 기묘한 현상에 대한 설명도 없고, 심지어 무섭지도 않아서 지루하기만 했다는 겁니다. 스티븐 킹만의 문체와 묘사로 환상 세계를 그린 묘사는 나쁘지 않지만 이 역시 새롭다기보다는 변주에 불과해 보이기도 하고요.

이는 남편이 꾼 꿈을 통해 공포가 실체화 된다는 "하비의 꿈"과 비행기 사고로 죽은 남편의 전화를 받는다는 "뉴욕 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핵폭탄이 투하된 순간을 그린 초단편 "졸업식 오후" 역시나 지극히 익숙한 소재임에는 분명하고요.

다행히 과연 스티븐 킹이구나! 싶은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2.5점. 아래 소개해드릴 4편이 바로 그것입니다. 짤막하게 소개해 드리며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진저브래드 걸"

에이미는 아이가 죽은 후 강박적인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웃에 사는 연쇄 살인마 피커링의 살인 현장을 목격했고, 그에게 쫓기게 되는데...

피커링에게 사로잡힌 에이미가 살아남기 위해 탈출하는 과정의 서스펜스가 어마무시한 작품입니다. 묘사가 장난이 아닌 덕분입니다. 아이가 죽은 후 슬픔을 잊기 위해 에이미가 달리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함으로써, 이후 탈출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최후의 순간에 피커링이 수영을 못 한다는 설정을 갑자기 드러낸 것은 약간 반칙 같고, 어떻게보면 조금 뻔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강박증과 추격전이라는 두 개의 테마 만큼은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N"

저명한 정신과 의사 조니 본세인트가 자살하고, 그가 남긴 원고는 여동생에 의해 오랜 친구 찰리 킨에게 보내졌다.
원고는 1년 전, 조니에게 N.이라는 강박증 환자가 찾아온 날부터 시작되었다. N.은 충동에 의해 찾아간 한 장소에서 태고의 무시무시한 존재의 봉인이 풀리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막기 위한 사명을 갖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엄청난 강박증에 시달렸던 환자였다...

대부분 1인칭으로 쓰여진 의사의 원고와 서간문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고대로부터 유래된 절대자, 봉인, 심연, 심지어 크쑨이라는 이름까지는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케하지만, 환자 N.이 이야기하는 그의 과거, 즉 그가 애커먼 들판에서 '크쑨'이 처음 나오려는 것을 발견한 후 그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의 설득력이 실로 대단하며, 이 과정을 모든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배열하려고 하는 강박증과 잘 연결시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또 유일한 증거는 N.의 증언밖에 없지만 그것을 단계별로 정신과 의사가 기록했다는 식으로 설득력을 보장함은 물론, 일종의 주간 드라마 같은 방식(환자가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므로) 독자의 흥미를 지속시키는 전개 방식도 아주 빼어났어요.
이에 설득당한 조니 본세인트, 그리고 그의 여동생 셰리아가 자살하고 이 사명을 찰리 킨이 받게 된다는 "링" 스타일의 저주의 연쇄 역시 볼만했고요.

그러나 N.이 이야기한대로 이 사명을 가진 자가 그냥 죽어버리면 '크쑨'의 봉인이 풀릴리 없다는 법칙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던가, 여러명이 크쑨을 바라보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는 등 디테일은 조금 아쉽습니다. 혼자서 그렇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누군가와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리고 "링" 수준 만큼은 아니더라도 뭔가 연결고리, 법칙을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예를 들면 N.이 조니 본세인트를 찾아온 이유와 조니의 동생으로 이어지는 관계에 이름의 이니셜이 이어진다던가 하는 식으로 법칙을 넣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래도 러브크래프트의 진전을 이어받기도 했고,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하는 재미와 공포에 있어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벙어리"

영업사원 모네트는 성당에서의 고해 성사에서, 영업 출장 중 태웠던 벙어리 히치하이커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모네트는 히치하이커에게 아내 바브가 직장에서 거액을 횡령한 뒤, '카우보이 밥'이라고 부르는 애인과 흥청망청 쓴 후 도망가 버렸다고 했는데...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 벙어리 스탠리 두세트

그게 누구건 선의를 베풀면 보답을 받는다는 전래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고해성사를 하면서 아내 바브와 그에 얽힌 범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모네트의 입담도 볼거리고요. 보답이 불륜과 범죄를 저지른 아내와 정부를 때려 죽이는 거라는건 스티븐 킹 다왔습니다. 실제 뉴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창작 비화 역시 인상적이었고요.

결말이 좀 뻔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주 비좁은 것"

이웃 그룬왈드와 땅, 그리고 애견의 죽음에 얽힌 송사에 휘말린 주식 거래인 커티스는 어느 날 그룬왈드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모든 요구를 수용할테니 이 모든 것을 끝내자는 제안이었다. 이후 커티스는 홀로 그룬왈드를 만나러 폐허처럼 버려진 공사 현장으로 찾아갔다가 권총으로 협박당한 후, 공사 현장 화장실에 갖히고 말았다...

묘사력으로는 수록작 중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거장의 글 솜씨가 제대로 발휘되어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별도 없는 한밤에"의 첫번째 작품 "1922"<1922>가 떠오를 정도로 읽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든요. "1922"<1922>가 생지옥, 그리고 쥐에 대한 묘사로 독자를 미치게 만든다면, 이 작품은 화장실과 오물에 대한 묘사가읽는게 힘들 정도로 생생합니다.

또 화장실에서 커티스가 죽게되더라도 일종의 사고사로 보이게 된다는 정황 묘사도 그럴싸 하며, 그룬왈드가 사업에 실패한 뒤 아내가 도망갔고, 심지어 암까지 걸린걸 커티스 탓으로 돌리는 범행 동기 역시 설득력이 높습니다. 특히나 범행 방법은 완전 범죄를 그린 범죄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잘 짜여져 있습니다.
아울러 화장실을 탈출하기 위한 커티스의 노력도 흥미진진합니다. 커티스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 애견 벳시의 인식표 덕분이라는 소소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딱 한가지, 커티스가 탈출 이후 보여준 행동과 그룬왈드의 자살은 석연치 않습니다. 특히 그룬왈드가 어차피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면 커티스를 다시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닐텐데, 왜 포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 같으면 자살하기 전에 커티스에게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별점은 3.5점입니다. 두번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악취미이긴 한데 재미만큼은 명불허전입니다.

2016/12/17

피너츠 완전판 4 : 1957~1958 - 찰스 M. 슐츠 / 신소희 : 별점 3점

피너츠 완전판 4 : 1957~1958 - 6점
찰스 M. 슐츠 지음, 신소희 옮김/북스토리

최근 출간되고 있는 피너츠 완전판 4번째 권으로, 찰리 브라운과 친구들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틀이 잡혔네요. 특히 부각되는건 불쌍한 우리 친구 찰리 브라운입니다. 연날리기에 항상 실패하는 찰리 브라운, 루시가 놓은 공을 차는 것을 항상 실패하는 찰리 브라운, 중요한 야구 게임에서 결정적 실수를 하는 찰리 브라운 등등 익숙한 설정이 대거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것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내가 가장 괴로운게 뭔지 알아? 날 감독으로서 믿어준 너희 선수들을 실망시켰다고 느껴져서..."
"이런, 찰리 브라운, 그래서 괴로운 거였다면 신경 쓰지 마, 잊어버려. 우린 한 번도 널 믿었던 적이 없으니까!"
"저 많은 별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하찮게 느껴지지 않아, 찰리 브라운?"
"아니, 난 원래 하찮은 사람이니까 상관없어!"

가끔 "사람들이 왜 날 안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완벽한 사람을 안 좋아할 수 있는 거지?" 라는 뜬금 대사도 하고, 슈뢰더와 라이너스에게 조언을 해 주거나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의외의 모습도 눈에 띄이긴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를 해칠(?) 정도는 아닙니다.

다른 캐릭터의 모습도 익숙한건 마찬가지입니다. 라이너스는 천재성이 부각되는 일부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주로 담요 관련 개그, 루시는 찰리 브라운을 냉혹하게 지적질하거나 떠벌이는 개그, 슈뢰더는 베토벤 관련 개그를 선보이는 식이니까요. 

하지만 캐릭터와 설정들이 뻔하고 익숙한데도, 그리고 발표 시점에서 반세기 이상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미나다는건 정말 대단합니다. 라이너스가 2주 동안 담요를 못 가지게 되었을 때의 상황이 좋은 예입니다. 라이너스의 신경 불안 증세와 마지막 발작(?)은 정말이지 기가 막혔어요.

그 외에도 완성 단계에 이르른 작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 연재가 된 성실함도 눈여겨 볼만 합니다. 진보 대 보수의 싸움같은 시사적인 요소가 가끔 보이는 것도 신기했던 점이고요.

여튼 별점은 3점. 팬이라면 당연히 소장해야 하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5권이 얼마전에 나왔던데 바로 구입해봐야 겠네요.

2016/12/16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구이 료코 (쿠이 료코) / 김완 : 별점 3점

용의 귀여운 일곱 아이 : 쿠이 료코 작품집 - 8점
구이 료코 지음, 김완 옮김/㈜소미미디어

"용의 학교는 산 위에"만큼의 긴 제목을 지닌 쿠이 료코의 단편집으로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용의 학교는 산 위에"는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팬심으로 구입했는데 다행히도 아주 괜찮았습니다. 발상도 기발하며, 모두 길이에 걸맞는 완결성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랍 속 테라리움"과 비교하자면, 의외성은 덜하지만 완성도가 더 높은 편이에요. 쇼트쇼트와 일반 단편의 차이점처럼요.

작품별 편차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가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쿠이 료코 팬들께는 적극 추천드립니다.


"용의 소탑"

바다 나라와 산 나라의 전쟁을 가로막는 국경 지대 용의 새끼가 부화하여 둥지를 떠날 때까지,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교류가 끊긴 양국은 기본적인 물자 보급에도 문제가 생겼고, 마침 산 나라에 포로로 잡혔던 청년 '사난'은 소금을 가져다 준다는 약조 후 풀려나는데...

전형적인 중세풍 세계관에 ''이 등장하는 식으로 약간의 판타지가 결합된 시대물로, 막강하면서도 기묘한 존재 탓으로 적대하던 사람들이 하나가 된다는(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치듯이), 왕도스러운 내용입니다.
그러나 쿠이 료코스러운 변주가 딱 하나 들어간 덕분에 독특한 매력을 전해 줍니다. 바로 '교역'입니다. 전형적인 이야기에 딱 한 가지의 설정 추가로 독특함을 만들어 낸다는 점은 "던전밥"과 똑같네요. 결국 사난과 유르카가 하나가 된다는 해피엔딩도 마음에 들었고요.

등장하는 크리쳐는 '용'이라기보다는 그리폰 같았다는건 조금 이해가 안되지만,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인어금렵구"

누가 봐도 인어인 기묘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무대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는 않아요. 인어가 멀리 떨어진 학교로 가고 싶어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그것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라는, 한여름날 짧은 만남 이후 추억과 여운을 남기고 각자의 길을 간다는 전개는 전형적인 "보이 미트 어 걸" 그대로고요. 이 와중에 약간의 성장기 느낌을 전해주는 것 역시 동일합니다.

그러나 "용의 소탑"이나 "던전밥"처럼 '인어'라는 설정이 추가되어 독특한 매력을 풍깁니다. 이 설정에 더해 비교적 짧은 분량 안에서 '서로 다르기에 마음을 전하기 힘들다'는 주제를 설득력 넘치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실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깔끔하면서도 흑백톤 위주의 작화 역시 이야기에 꼭 맞아 떨어져서 마음에 들었고요.

한마디로 익숙한 주제에 약간의 변주를 더해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가의 능력이 최고치로 발휘된 작품.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의 신"

중학교 입시를 앞둔 소녀가 갈 곳을 잃은 물고기 신을 어항에서 키운다는 이야기로 신은 별다른 능력이 없고, 소녀는 입시에서 떨어진다는 현실적이면서 일상적인 결말이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야기만 놓고 보면 딱히 대단할 것은 없는 소품이에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늑대인간이 주인공인 드라마로 남녀 관계가 아니라 모자 관계 설정이 신선했습니다. 늑대인간이 실제 인간 세계에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상세한 설정들도 인상적이고요.

단, 지나치게 일상계스러운 내용으로 주인공 케이타의 약간은 철없는 행동이 사건, 드라마의 전부라는 것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은 높았지만, 이만큼의 상세한 설정을 만들었다면 더 극적인 이야기를 전개해도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무일푼 뱌쿠로쿠"

천재 화가 타카가와 뱌쿠로쿠가 무일푼이 된 후, 자신이 그렸던 사자, 호랑이, 용 등을 실체화시켜 큰돈을 벌고자 한다는 시대극 판타지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일본화를 모티브로 한 작화입니다. 붓을 주로 사용한 듯한데 정말로 빼어나고 시원시원한 구도도 돋보인 덕분입니다. 뱌쿠로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위작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그린 그림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진한 여운을 남기는 것도 인상적이고요.

한마디로 쿠이 료코라는 작가의 넓은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제 자식이 어여쁘다고 용은 운다"

왕자 준이 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용의 비늘을 얻으려 나섰다. 길 안내를 맡은건 마을 이방인 준이었다.
용을 잡으러 가는 험한 길에서 병사들은 계속 낙오되었고, 결국 부상당한 왕자만 남았을 때 준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왕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기에 그것을 복수하려 한다는 것...

뻔한 복수극으로 의외성도 없고, 이야기도 좀 막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용의 알과 자식을 동일시하는 전개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수록작 중에서는 제일 처집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누타니 일족"

초능력 가문 이누타니 일족의 집에 소년 탐정 도다이치 코우스케가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실수로 일족의 초능력이 들통날 위기에 처해 그것을 숨기려 하나, 오히려 도다이치 코우스케는 연쇄 살인극으로 의심하며 겉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제목(원전은 "이누가미 일족"이지요)과 설정부터 여러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는 작품으로 다양한 초능력을 지닌 가족들의 행동을 ‘살해당했다’고 오해해 진상을 추리하려는 탐정의 행동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기발하면서도 재미있었습니다. "오렌지로드"에서 초능력을 감추려는 카스가 패밀리의 노력이 겹쳐져 왠지 모를 향수가 느껴진 건 덤이고요.
강대한 힘을 과신하다가 화를 부른 상황에서, 가장 쓸모없을 줄 알았던 아리사의 ‘입고 있는 옷을 파자마로 바꾸는 능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반전도 돋보였습니다.

또 보통 소년 탐정이 사건에 뛰어드는 이유 — 자기와 관계도 없고 부탁한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애를 쓰지? — 에 대해 ‘자기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힘을 써야 할 때 쓴다’라는 슈퍼 히어로스러운 마인드로 알려주는 점도 괜찮았어요. 하기사 명탐정이 슈퍼 히어로와 다를 건 별로 없지요.
‘힘을 써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해서 쓴다, 그러나 힘을 과신하지 말라’는 주제 역시 여러모로 생각해볼 거리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다양한 장르물에 대한 깊은 이해에 더해 유쾌한 분위기, 적절한 반전, 심오한 주제까지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명작입니다. 단점이라면 너무 짧다는 것과 결말이 약간 시시했다는 것 정도? 그래도 별점 4점은 충분합니다. 장르소설 애호가라면 이 작품만큼은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16/12/13

나 홀로 여행 1,2 - 타카기 나오코 / 윤지은 : 별점 2점

나홀로 여행 1.2 세트 - 전2권 - 4점
다카기 나오코 글.그림, 윤지은 옮김/살림

연말이라 모임이 많아서 책 읽을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요즈음입니다. 덕분에 만화책을 많이 읽게 되네요.

이 책은 "배빵빵 일본 식탐여행"의 저자 다카기 나오코의 여행 에세이 만화입니다. 북으로는 삿뽀로와 하코다테, 남으로는 오키나와와 하카다까지를, 지하철에서 장거리 버스와 배, 비행기, 심지어 침대특급 열차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소와 방법으로 홀로 여행을 다닌 내용이지요.

그야말로 평범하고 소박한 여행기인데, 친구나 가족이 여행 다녀왔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 같은 편안함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유명한 관광지라도 명승지 순례보다는, 먹부림이나 온천 목욕 등 자신만의 경험담 소개에 주력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소개된 이야기 중 개인적으로는 일본 최장거리를 달린다는 심야버스 "하카타호" 이야기가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신주쿠에서 하카타까지 무려 14시간 20분을 달리는 버스로 비용은 편도 15,000엔! 시간과 비용의 스케일이 심히 남다른데, 심지어 중간에 교통 사고 등으로 무려 19시간이나 걸려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내용에서 황당함의 정점을 찍습니다. 그런데 별다른 군말없이 승객들이 해산했다는 부분에서 확실히 국민성도 느껴졌습니다. 우리나라였다면 아마 폭동같은 거센 항의가 있었을테니까요. 저 역시 예전에 도쿄 디즈니랜드에 갔었을 때, 비슷한 문화 충격을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놀이기구를 타려고 거의 1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급작스러운 문제가 생겨 못 타게 되어 버렸었지요. 그런데 줄을 한 시간 넘게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아무 말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데에서 놀랐습니다. 우리나라였다면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또 목적지였던 하카타도 매력적으로 소개됩니다. 규슈 국립 박물관은 정말이지 꼭 한번 가고 싶네요. 유명한 라면을 비롯한 다른 먹거리들도 관심이 많이 가고요. 물론 도쿄에서 14시간이나 버스를 탈 생각은 없지만요.

하지만 침대특급열차 북두성 (호쿠토세이) 호는 이야기가 다르죠. "에키벤"에도 등장했던 기차인데 정말 한번 타보고 싶더라고요. 홋카이도, 하코다테 역시 평상시 가보고 싶었던 장소이기도 하고요. 맛있는 해산물은 물론 "백성귀족"의 화려한 농산물까지 모두 다 먹어보고 싶네요.
단, 비용은 문제입니다. 종점 삿포로까지 27,170엔이나 된다고 소개되는데 확실히 부담이에요. 식사도 별도 비용이니 적어도 3만 엔은 넘겠죠? 서울(인천)에서 삿포로까지 직항 왕복으로 국내 항공사 편으로도 50만 원이 안 되는 만큼, 제 평생 북두성 호를 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누가 선물이라도 해 주면 모를까.

이렇게 재미 요소는 많지만 "배빵빵 일본 식탐여행"보다는 재미가 덜했습니다. 독신 여성이 혼자하는 여행인 탓입니다. 다카기 나오코는 혼자서는 밥집도 잘 못 들어갈 정도로 소심한 독신 여성으로, 저자와 코드가 맞는다면 즐길 거리가 많았겠지만 저에게는 무리였습니다. 제가 공감할 부분은 적었어요. 

또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에게 와 닿는 주제가 많지 않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한국인이 구태여 일본까지 가서 템플 스테이를 하거나 단식 체험을 할 이유는 없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직항편이나 다른 교통 수단이 있는데 구태여 도쿄에서 장거리 버스나 침대 열차를 탈 일도 없을 테고요. 차라리 먹부림 쪽을 더 강조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배빵빵 일본 식탐여행"과 주제가 겹치니 여러모로 애매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꽤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으나 40대 남자 감성으로 소화하기에는 애매해서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일본을 또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가더라도 외진 곳을 갈 리야 없겠지만 그나마 가마쿠라가 여러모로 저에게 현실적인 여행지인 듯합니다. 가마쿠라의 계란말이 가게 ‘오자와’는 가게 되면 꼭 들러봐야겠네요.

2016/12/11

인류사를 가로지른 스마트한 발명들 50 - 알프리트 슈미츠 / 송소민 : 별점 2점

인류사를 가로지른 스마트한 발명들 50 - 4점
알프리트 슈미츠 지음, 송소민 옮김/서해문집

제목 그대로 저자가 선별한, 인류사에서 중요한 50개의 발명이 소개되고 있는 과학사 - 미시사 책입니다. 

이런 류의 특정 발명이나 아이템들을 소개하는 책은 그동안 몇 번 읽어보았는데, 비교해 볼 때 그렇게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몇몇 부분은 나쁘지 않았어요. 

첫 번째는 현재의 시점으로 앞으로의 방향을 언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백열등이 LED로 바뀌고 있고, 자동차가 전기 자동차로 바뀌는 식입니다. 대체 에너지를 중요 발명으로 언급하는 등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내용과 항목도 눈에 뜨이고요.
또 새롭거나 독특한 시각, 내용의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그 중 첫번째는 기계 베틀 항목에서 기계베틀, 즉 직조기가 발명된 후 기계 보조원으로 전락한 직조공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름 전문직이었으나 하루 아침에 쓸모없는 단순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자 1844년 폭동을 일으켰고, 결국 11명이 총살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는데 현재의 AI의 발전 방향을 보면 이런 일이 조만간 여러 산업분야에서 벌어질 것으로 보여서 남일 같지가 않더군요. 제가 봐도 앞으로 10년 내 필요없어질 기술이 한두개가 아니니까요. 대표적인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우선은 운전일테고, 이후 여러 분야로 확산될텐데 저부터도 걱정이네요.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두 번째는 섭씨와 화씨의 어원입니다. 섭씨는 온도 측정 눈금을 고안한 '셀시우스'의 이름을 딴 것이고 화씨는 '파렌하이트'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데 저는 처음 알았네요. '셀시우시'가 중국 발음으로 '섭이사'가 되었고 그래서 '섭씨'가 되었다는데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지만 '불란서', '화란'과 비슷한 방식이죠? 외래어의 유입과 적용은 참으로 재미난게 많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컨베이어 벨트 기술 항목에서 소개된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라는 인물 소개입니다. 이력을 보니 인간 공학의 시조와 같은 사람으로 이른바 '테일러리즘'을 만든 장본인인데 아직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죄송스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제가 UX를 업으로 한지 10년이 훨씬 넘어가는데 공부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반성이 되네요. '예전에는 인간이 첫 번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는 시스템이 첫 번째 위치에 있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을 보면 정말로 이 바닥의 선구자적인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전공 분야 공부도 빼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좋았던 부분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전체적인 단점을 상쇄하기에는 아쉬움이 더욱 많아요. 가장 큰 단점은 앞서 말씀드렸듯 뻔하다는 것에 더해 깊이 역시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류의 책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몇 페이지 안에서 해당 발명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량에 비해 잘 요약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해당 주제에 대한 시작점 정도에 불과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소개되는 주제별로 레벨이 너무 다르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입니다. 어떤 것은 특정 발명품 한 가지만을 다루는데 - '안경', '나침반', '지퍼', '백열등', '자동차' 등등 - 어떤 것은 그 분야 전체를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 '도구', '무기', '약', '악기' 등 - 이는 앞서 말씀드린 깊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발명품으로 주제를 좁히는게 그나마 적은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도구'는 그 자체가 발명이기에 언급되는게 이상할 뿐더러 무기, 약, 악기 등과 마찬가지로 몇 페이지로 요약될 이야기는 아닌 탓입니다. 무기 관련 책은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만 시대별, 분야별로 10권 가까이 될 정도니까요. 마찬가지로 '컴퓨터' 항목 안에 반도체와 인터넷 이야기까지 우겨 넣은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인터넷은 분리했어야죠.

마지막으로 단점으로 꼽기는 좀 어렵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인류사를 가로질렀다 하기 어려운 발명도 몇 개 속해있다는건 불만스럽습니다. 진공청소기가 우리 인류사에 그렇게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을까요? 또 지퍼가 없었다면 세상이 굉장히 살기 불편해졌을까요? 이 발명으로 우리들 삶이 조금은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인류사'라는 표제 하에 소개되기에는 너무 미미한 발명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사한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때 이 책만 특별히 좋아보이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모로 추천드리기는 좀 어렵네요.

마지막으로 이 책에 소개된 50개의 항목을 레벨을 맞추어 상세하게 분류하고 재정의하여 저만의 인류사 대표 발명을 꼽아봅니다.

불, 바퀴, 말과 글, 수학과 수체계, 배와 보트, 유리, 돈, 렌즈, 나침반, 인쇄술, 천문학, 달력, 전기, 증기기관, 항공, 철도, 화약, 전신과 전화, 백열등, 자동차, 사진, 냉장기술, 합성수지, 컨베이어벨트 기술, 라디오와 텔레비전, 페니실린, 핵에너지, 컴퓨터와 반도체, 인터넷, 피임, 인공지능, 로켓.

빠진 것은 도구, 화장실, 도자기, 기계 베틀, 온도계, 통조림, 자전거, 진공청소기, 음반과 CD, 취사 조리기, 영화와 영화관, X-레이, 지퍼, 악기, 세탁기, 레이저, 대체에너지, 위성 네비게이션입니다. 무기는 화약으로, 약은 페니실린으로, 컴퓨터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분리하였으며 로봇은 인공지능으로 바꾸었고요. 화장실과 도자기, 온도계, 취사조리기는 추가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2016/12/10

스파이 vs 스파이 : 블랙(& 화이트) 작전 - 안토니오 프로히아스 / 최연석 : 별점 1.5점

스파이 vs 스파이 : 블랙(& 화이트) 작전 - 4점
안토니오 프로히아스 지음, 최연석 옮김/시공사(만화)

흰색과 검은색, 똑같이 생기고 색깔만 다른 멸치처럼 생긴 스파이 두 명이 복잡한 장치와 계획을 가지고(주로 부비 트랩이죠) 승부를 벌인다는 내용인 "스파이 대 스파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수십 년 전 모 잡지(아마도 "학생과 컴퓨터"?)에서 처음 접했었지요. 슈퍼 히어로나 유명 캐릭터물만 있는 줄 알았던 미국 만화에서 처음 접했던 파괴적인 슬랩스틱 개그물이라는 문화 충격과 함께 정교한 그림, 쉽고 재미난 이야기로 즐겁게 감상했었습니다.

허나 이후 게임까지 등장한 인기에 비하면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아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정식 소개된다는 것을 알고 출간과 동시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피천득의 "인연" 같은 느낌입니다. 예전의 좋았던 추억은 추억대로 남겨 놓는게 좋았습니다. 괜히 구입해 읽었네요.
일단 책 소개를 보면 24건을 가려 뽑았다는데, 대체 무슨 기준으로 뽑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느꼈던 정교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은 탓입니다. 특히나 "스파이 대 스파이"의 핵심은 일종의 '골드버그 장치'스러운 장치들을 활용한 개그인데, 그런 이야기의 비중이 너무 낮습니다. "유도탄 장난"이나 "잠수함 대결", "출구에서 출구로" 등 전체에서 반 정도 밖에는 되지 않아요.
또 생각외로 잔인한 발상들도 눈에 거슬립니다. 원숭이와 뇌를 바꾸어 골탕먹인다는 이야기, 피라냐를 먹인다는 식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재미있지도 않고 기분만 불쾌해질 뿐이었어요.

게다가 어렸을 때에 보았던 버전은 잡지 판형으로 한 페이지에 한 에피소드가 들어가는 식이라 화면이 축소된 덕에 작은 컷 안에 정교함이 잘 살아 있어서 좋았는데, 복간본은 한 페이지가 거의 1~2컷입니다! 원래 미국에서도 이렇게 발표된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페이지를 몇 컷으로 소화할 정도로 컷의 밀도가 높지는 않습니다. 컷 분할에 따른 흐름과 호흡도 잘 느껴지지 않았고요. 특히 작품의 페이지를 넘기는 방식으로 보다 보니 스파이들의 대결이 잘 살아나지 않습니다. 이 책만큼은 판형을 키워서 1~2페이지에 한 편 정도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출간되었어야 합니다. 페이지는 얇아지더라도 훨씬 가치가 높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잊혀진 클래식의 재발굴 복간은 분명 환영할 일입니다. 지금 읽기에 낡아보인다는건 충분히 감안할 수 있고요. 그러나 이를 뛰어넘을 정도로 재미도 없고 책의 완성도도 낮아서 도저히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혹 저와 같이 옛 추억 때문에 구입을 고려하신다면, 부디 참아주시길 바랍니다.

2016/12/05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 미카미 엔 / 최고은 : 별점 2점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 4점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arte(아르테)

니시우라 사진관의 비밀: 사진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로 홈런을 날린 작가 미카미 엔의 또다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유명 휴양지 에노시마에 위치한, 돌아가신 할머니의 "니시우라 사진관"을 정리하기 위해 찾아온 손녀 마유가 이런저런 일상 속 수수께끼를 해결해 나가는 내용입니다. 모두 네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제목에서처럼 '사진'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이야기에 녹여내었다는 점입니다.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가 책에 대한 정보를 활용하는 것 처럼요. 별다르지는 않지만 호기심을 자아내는 수수께끼들이 등장한다는 일상계 느낌의 전개와 소소하면서도 훈훈한 분위기도 "비블리아 고서당"스럽고요.

그러나 설정과 분위기만 비슷할 뿐 "비블리아 고서당" 수준에는 여러모로 미치지는 못합니다. 우선 추리적으로 내세울게 없는 탓입니다. 2장과 3장은 범인(?)이 너무 뻔하며, 4장은 설정이 극히 작위적이라 전혀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입부인 1장이 그나마 괜찮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 이하입니다.

탐정역이자 주인공이기도 한 가쓰라기 마유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시오리코씨의 안 좋은 부분인 소심하고 나약한 성격을 극대화한 것에 더해, 대학 시절의 민폐 행각을 부각시킨 탓에 영 호감이 가지 않더라고요. 사진에 있어서도 대학 시절 전공했던 정도라 딱히 대단한 전문가라고 하기 어렵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추리 소설에 입문하시는 분들께는 적합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면 딱히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루이가 아직 사진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마유가 깨닫고, 이후 루이와 다시 만나는 마무리는 후속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만 다음 권을 읽을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마지막으로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1장

가쓰라기 마유는 에노시마에 위치한 니시우라 사진관을 찾았다. 폐암으로 사망한, 100년 동안 영업했던 사진관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외할머니 니시우라 후지코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정리를 시작한 마유는 '미수령 사진' 이라고 적힌 양철 상자를 발견했고, 그 속에서 '마도리 마사카즈 님'이라고 적힌 봉투를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100여년전 사진과 70여년 전, 20여년 전, 그리고 지금 현재의 에노시마를 무대로 거의 25년 단위로 찍은 한 남자의 사진 4장과 필름 3개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 인물은 모두 동일 인물로 보이는데 합성은 아니었다.

마침 사진을 맡긴 마도리 마사카즈가 방문했고, 그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소중한 사진에 얽힌 수수께끼를 밝혀달라고 마유에게 부탁하는데...

'동일한 장소에서 찍은, 거의 25년 단위로 찍은 한 남자의 사진 4장'에 얽힌 수수께끼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첫 작품. 수수께끼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100여년전 사진과 70여년 전, 20여년 전, 그리고 지금 현재의 에노시마를 무대로 한 사진 속 인물이 모두 동일 인물로 보이는데 합성은 아니다! 라는 것으로 괴담 등에서 많이 변주되었었죠.

그러나 이 작품은 괴담이 아닌지라 나름 합리적인 트릭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첫번째 사진은 에어브러시를 이용한 가필, 두번째는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의 할아버지, 세번째는 아버지가 약간 분장한 것이고 네번째 사진 속 모델 마도리 마사카즈는 할아버지와 꼭 닮은 사람이었다'라는 겁니다. 특히 '에어브러시'라는 아이디어가 좋습니다. 합성보다는 한 발자욱 더 나아간, 사진이라는 설정을 활용한 아이디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로 모든 것이 바뀐 현재의 상황에서는 잘 모를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 높기도 하고요.

물론 에어브러시로 그렇게까지 똑같게 사람을 그릴 수 있었을까?라는 문제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이야기의 시작으로 아주 괜찮았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장

마유가 4년전 사진을 그만둔 계기는 소꼽친구로 인기 아이돌이었던 "루이"의 개인적 비밀(특정 사이비 종교를 믿는다는)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었다가, 그 사진이 유출되어 루이의 인생을 망쳐버린 과거 탓이었다.

그런데 마도리 마사카즈와 사진관을 정리하던 마유는 당시 사건에 연류된 선배 고사카가 비교적 최근에 찍은 루이의 사진을 발견했다. 사진을 전해주기 위해 고사카를 다시 만난 마유는 고사카와의 대화를 통해 마유는 사진 유출의 진상과 이후 루이의 삶에 대해 알게 되는데...

루이의 사진을 누가 유출시켰는지? 에 대한 것이 핵심 수수께끼인데 사실 별 내용은 없습니다. 아날로그로 사진을 찍은 것을 전문 카메라맨이 된 아키호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즉 사진을 잘 모르는 다른 서클 사람들이 한통속이 되어 유출했다는 진상을 몇 년 간이나 알지 못하고 끙끙대었다는 것 부터가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합숙을 하느라 통신이 불가했다는건 알리바이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내용을 읽어보면 당시 마유가 서클 사람들에게 잘못한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해서 딱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정 이입도 하기 어려웠어요. 아무리 비공개 SNS라도 사진을 올린건 마유의 실수라는게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또 루이에 대한 설정도 딱히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소꼽친구, 엄청난 미남, 성공한 아이돌이라는 설정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루이가 추락하게 된, 사이비 종교의 신자로 교주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설정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울러 해당 종교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더라도 루이는 분명 피해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때문에 면죄부를 주기는 어렵더라도, 세간의 비난을 받고 은퇴할만한 일로는 보이지 않았어요. 작중에서 본인이 계속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마침 사진은 좋은 계기가 된 것에 불과해 보이는데 만약 그렇다면 마유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갈 필요가 없지요.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뭔가 있어보이는 마유의 과거사를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할 뿐더러, 과거사가 만화와 같은 설정으로 가득차 있어 전혀 와 닿지 않은 작품입니다. 점수를 줄 부분이 별로 없네요.

3장

기념품 가게 주인 겐지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있다. 그는 지금의 아내 요코에게 청혼할 때 필요한 자금이 없어서 삼촌 오사무와 함께 니시우라 사진관에서 은덩이를 훔쳤었다. 잠깐 빌려간다는 의미로 차용증을 써서 남겼었는데, 겐지는 마유에게 들키기 전 차용증을 빼돌릴 결심을 한다...

은은 과거 니시우라 사진관에서 일했던 오사무 삼촌이 현상 과정에서 나오는 폐약에서 추출한 것, 캐비닛이 일종의 미니 암실?이어서 그것이 열렸다면 증거가 남는다는 설정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사진관이라는 무대에 잘 맞는 소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후 이야기 전개는 영 별로입니다. 캐비닛과 함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겐지인데 뭐 이렇게 복잡한 설명이 필요했을지 잘 모르겠어요. 상세한 설명 없이 그냥 경찰을 부르는 게 빠른 방법이잖아요? 겐지가 은덩이를 훔친 것으로도 모자라 차용증까지 훔치려 한 것은 엄연한 범죄라 정상참작의 여지도 전혀 없고요.

그리고 캐비닛 속의 필름이 감광되었다 하더라도 열은 것이 겐지라는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단지 캐비닛이 열렸다는 증거 정도밖에는 안되죠. 시간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마디로 괜찮았던 소재를 억지스러운 전개로 망친 느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4장

마유는 정리 중 발견한 마도리 부자의 사진을 전해주기 위해 마도리 가문의 별장을 찾았다. 그 곳에서 마유는 아키타카의 아버지 료헤이가 아들을 대하는 매몰찬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발견한 여러 가지 이상한 점 — 겐지가 전해준 아키타카는 이전의 모습이 아니다, 별장과 본가를 아키타카의 사진이 온통 장식하고 있다, 부자의 사진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있다 등 — 을 토대로 아키타카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깨닫는데...

역시나 핵심 트릭은 사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료헤이와 아키타카가 찍은 사진은 아주 오래전 료헤이가 찍은 사진에 현재의 아키타카의 모습을 합성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합성'은 사진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뻔한 조작이라 트릭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어려우며, 이렇게 복잡한 공작을 할 필요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구태여 조작까지 해서 사진을 전시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냥 현재의 아키타카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시해 놓는 것으로 충분했을 테니까요.

게다가 아버지가 얼굴을 바꾼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도 단점입니다. 너무나 미워했던 전처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탓이 컸다던가... 하는 식의 배경 설명이 반드시 필요했어요. 물론 그랬다면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 블랙잭이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의 후처 얼굴을 어머니 얼굴로 바꾸어 놓는 에피소드와 똑같은 내용이기는 했겠지만요.

아키타카가 아버지에게 강하게, 논리적으로 반항하는 결말 정도만 깔끔할 뿐, 여러모로 부족함과 억지가 많이 느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6/12/04

돌아온 영건!

영건 1~8 세트 - 전8권 - 6점
임정덕 지음, 황현명 옮김/PENABi

20년도 더 전에 국내에 소개되어 짧지만 굵었던 인기를 누렸던 대만 만화, 임정덕의 "영건"이 복간됩니다! 원건평과 친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한데 이제서야 그 답을 알 수 있게 되었네요. 

e-book으로도 꼭 출간되었으면 합니다.

2016/12/03

협반, 남자의 밥 (2016) : 별점 2점

3류 대학에 다니던 졸업반 취업준비생 료타는 집 앞에서 우연찮게 야쿠자들의 총격전에 휘말렸다. 도망가던 료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야나기바 구미의 두목 야나기바와 부하 히노는 어쩔 수 없이 료타의 집에 숨어들었고, 이후 이들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

일본 드라마 한 시즌을 전부 챙겨본 건 오랜만이네요. 제목이 마음에 들어 보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재미있어서 끝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요리를 다룬 일본 드라마는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주로 '먹으러' 다니던 최근 트렌드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요리사 역할이 등장하며, 그 역할을 수행하는 야나기바가 야쿠자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단순히 독특함을 위한 설정은 아닙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한 끼를 최선을 다해서 잘 먹자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요리를 잘 한다는 설정이거든요. 그래서 요리 실력에 대해 나름대로 설득력을 부여해 주고 있습니다. 료타의 집에 숨어지낸다는 설정 덕분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집밥"이 중심이라는 점도 좋았고요.

또 이러한 설정과 내용, 요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예를 들면 야나기바를 빚 받으러 온 건달로 오해한 료타의 친구 요스케가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심부름을 보냈을 때, 일부러 음식 재료를 묘하게 잘못 사 오지만(그래서 요리를 실패하면 요리사가 아닌 것으로 들통나도록), 오히려 그걸로 맛있는 요리를 만든다는 식입니다.

요리 드라마답게 방송을 통해 등장하는 요리의 레시피라던가 비결도 확실하게 알려주는 점도 좋았어요. * 혹 요리가 궁금하신 분들은 TV Tokyo 홈페이지에 공개된 레시피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좋았던 것은 초중반부까지뿐, 뒤로 갈수록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수습이 안 될 정도로요. 야나기바에게 협력하던 야쿠자 똘마니가 죽는 등 흥겨웠던 분위기가 무겁게 흘러가고, 마지막 편은 야나기바가 사실은 경찰이었다! 는 어처구니없는 결말로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야쿠자보다야 경찰이 낫기는 합니다. 야나기바 두목이 아무리 요리를 잘 하고, 의리도 있고, 료타와 친구들의 고민을 허투루 듣지 않고 어떻게든 필요한 조언을 해 주는 등 그야말로 멋진 '어른'처럼 그려지고는 있지만, 개인적으로 야쿠자를 미화하는 작품은 쓰레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깡패에 불과한 인간들로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할 존재들이니까요. 협객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초, 중반부에서 아무런 복선도 보여주지 않다가(유일한 복선이라면 료타의 집 창문 밖을 항상 바라본다는 것 정도? 하지만 이 정도로 야나기바가 경찰이라는 것을 짐작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마지막 회 10분 정도를 남기고 '경찰이다!'라니 이건 너무 상식 밖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급작스럽게 끝날 정도로 인기가 없었나 싶은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료타와 료타 친구들의 성장기로도 문제가 많습니다. 볼만한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에피소드 한두 편에서 다루어지고 끝나는 정도라 부족하며, 료타의 취업도 그 동안의 고군분투가 무색하다 싶을 정도로 급작스럽게 마무리되는 탓입니다. 갑자기 끝난다는 점에서는 같은 문제인 셈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중반부까지의 재미와 10화로 완결되는 짤막한 구성은 좋지만 료타의 취업 분투기, 야나기바의 야쿠자 조직 사냥, 요리, 이 세 가지가 어우러지는데에는 실패한 작품입니다. 권해드리기는 어렵네요.

2016/12/01

장서의 괴로움 - 오카자키 다케시 / 정수윤 : 별점 3점

장서의 괴로움 - 6점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정은문고

유명한 장서가로 수 만권(2~3만 권 정도?)의 책을 보유한 저자가 장서 보유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입니다. 개인 경험담과 이런저런 생각을 펼쳐보이는 에세이지만, 장서 구입과 관리 등 다양한 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실용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책의 성격만 보면 얼마 전 읽은 "책장의 정석"과 비교됩니다. 차이점이라면 "책장의 정석"은 가지고 있는 책을 '관리'하는 팁을 제공한다면(심지어 관리할 수 있는 분량만 보유하도록 적절한 처분법마저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이 책은 '관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장서가를 위한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관리'를 위해 책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저자 스스로 '책이 너무 많이 쌓이면 지적 생산의 유통이 정체된다. 사람 몸으로 치면 혈액순환이 나빠진다. 피가 막힘없이 흐르도록 하려면 현재 자신에게 있어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일단 손에서 놓는 편이 낫다'고 하는데, 이는 "책장의 정석"과 일치합니다.

다양한 일화가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개인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들은 당연히 아주 실감나고요. 헌책방, 고서를 찾거나 구입하는 것에 얽힌 본인의 경험담, 그리고 책을 정리하는 방법과 팁 등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 합니다.

다른 장서가들과의 인터뷰라던가 그들만의 책 보관 방법, 장서가가 등장하는 여러 가지 영화와 콘텐츠 등 장서에 얽힌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들도 가득합니다.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책이 사는 집"을 지은 장서가 네기시 씨의 인터뷰였습니다. 이유는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죠.

책을 줄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소개하면서도,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책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서관을 잘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에 관련된 원고를 쓰다가 어쩌다 보니 도서관에 대한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는데, 정말이지 저자는 어쩔 수 없는 장서가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자가 소개하는 이 분야의 베스트는 오다 미쓰오의 "도서관 산책"입니다.

그리고 책을 줄이는데 제일 효과적일 수 있는 전자 서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눈에 띕니다. 책은 단순히 내용물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동의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앞으로 전자 서적의 발전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아울러 장서가답게 이런저런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이 역시 눈여겨볼 만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책 정리법(책이 너무 많으면 안 된다)을 송나라 학자 구양수의 시필에 나온 '명창정궤'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햇빛 잘 드는 창 아래 깨끗한 책상, 그 위에 책 한 권이면 충분하지 않냐는건데, 이를 12세기 일본의 가인 가모노 조메이의 움막과 연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걸 보면 학식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어요. 책을 많이 읽으면 저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인용과 연결이 가능할지 궁금해지네요.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인용이 많습니다. 몇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문필가 요시다 겐이치의 말인 "책장에 책이 5백 권쯤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루에 세 권씩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참으로 와 닿습니다.
유명한 장서가 다니자와의 명서 감정술도 비슷합니다. "명저라는 홍보에 넘어가 샀던 책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류 이하 책을 이것저것 찾아 읽지 않았다면 초일류를 초일류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인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당연하지만 이런저런 책들도 제법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영화 속 서점과 도서관이라는, 영화 속에 책이나 책장이 나오는 영화를 엮어놓은 책이 가장 끌립니다. 영화 언젠가 책 읽는 날의 후일담을 엮은 동명의 책에서 영화 속 주인공인 독서가 미나코가 좋아한 10권의 책 목록도 마찬가지예요. 아는 책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과 앤 모로우 린드버그의 "바다로부터의 선물"밖에는 없는데, 저자 역시 극찬하고 있는 "티보 가의 사람들"은 굉장히 방대한 분량이지만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책은 실물 크기 일러스트에 의한 "낙엽도감"이지만요. 수집가로서의 장서가를 다룬 '남자는 수집하는 동물' 챕터에서 소개된 "소년소녀 쇼와 미스터리미술관"이라는 책도 꼭 읽어보고 싶고요.

이렇게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일본' 기준이라는 점입니다. 앞서 이런저런 유용한 팁이 많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한국의 거주 문화와 책에 대한 일반적인 경우를 놓고 보면 그렇게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정말로 책을 좋아한다면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보장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본인이 장서가시라면 한 번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 역시 500권도 안 되는, 장서라고 하기는 초라한 수준의 책만 갖추고 있지만 책을 좋아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더 늘리면 안 될 것 같긴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미나코가 좋아한 10권의 책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티보 가의 사람들 - 마르탱 뒤 가르 (국내 출간)

안녕, 콜럼버스 - 필립 로스 (국내 출간, 굿바이 콜럼버스)

아름다운 여름 - 체사레 파베세 (국내 출간)

바다로부터의 선물 - 앤 모로우 린드버그 (국내 출간)

실물 크기 일러스트에 의한 낙엽도감 - 요시야마 히로시 / 이시카와 미에코

여자 - 카터 브라운

미국의 송어낚시 - 리처드 브라우티건 (국내 출간)

열두 달 반찬 - 고지마 신페이

하늘을 나는 교실 - 에리히 케스트너 (국내 출간)

사이좋은 부부 - 오다 사쿠노스케

2016/11/28

왕과 서커스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점

왕과 서커스 - 4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간 심층의 기자 다치아라이 마치는 사전 취재 겸 해서 대단한 목적 없이 네팔에 도착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네팔 왕실 가족 피살 사건을 알게 되어 취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숙소 도쿄 로지의 여주인 차메리를 통해, 왕궁 경비대 소속인 라제스와르 준위를 만나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준위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거부했다.

다음날 다치아라이는 '밀고자'라는 단어가 몸에 새겨진 살해된 준위의 시체를 발견했고, 이를 기사의 핵심으로 쓰려고 했으나, 이후 여러 가지 단서들을 모아 사건의 진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데...

어쩌다 보니 국내 출간작은 거의 빼놓지 않고 읽고 있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 장편입니다. "안녕 요정"의 등장인물이었던 다치아라이 마치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작품 소개를 보니 이런저런 상도 많이 수상했더군요.

먼저 일종의 사회파 추리물이라는 점에 놀랐습니다. 네팔을 무대로 보도라는 행위가 무엇인지 그 의미를 묻고 있는, 작가의 전작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류의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2001년 네팔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왕실 가족 살해 사건을 주제로 보도, 기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의미의 작품을 썼다는 점에서, 그 노력과 열정에는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고요.

사회파라지만 추리적으로도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 명성에 어울립니다. 대표적인게 라제스와르 준위 시체 등에 새겨진 'INFORMER'라는 단어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자주 쓰지 않는 말, 네팔의 문자가 아닌 영문자로 새겨진 점에 주목하여 글자의 내용보다 글자를 새긴 이유와 행위에 집중하여 추리해 냅니다. 옷을 벗긴 이유를 숨기기 위해서라는 진상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밝혀진 진상, 즉 범인과 시체를 옮긴 사람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것 역시 꽤 기발했고요.

숙소 도쿄 로지와 다르마길, 인드라 초크, 타멜 지구 등 카트만두의 여러 거리들, 셀 로티와 달디단 치야와 모모,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하는 네팔 사람들의 식습관 등 네팔의 디테일한 풍광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덕분에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작가의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추리보다 사회파적인 부분에 중심축이 놓여져 있는 탓입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물음을 던지기 위한 내용이 너무 길고 장황해요. 다치아라이가 네팔에 관광 관련 기사를 쓸까 하고 도착한 시점에서 왕실 가족이 살해당하고, 다치아라이가 비공개 인터뷰한 라제스와르 준위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 과정까지가 무려 300여 페이지에 달할 정도니까요. 등장인물 및 이런저런 소개할 것들이나 세세한 설정이 많긴 하지만 좀 지나쳤습니다. 300여 페이지에 달한 서두에서 정작 추리에 필요한 복선은 이웃방 미국 젊은이 롭의 말버릇이었던 '치프가 있다', 그리고 야쓰다에 대한 몇몇 세세한 설정들 뿐이라는 것도 지루함을 더하고요. 아울러 정작 롭의 말버릇과 총이 연결되는 과정은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일 뿐이며, 야쓰다와 대마초 밀매를 연결시키는 과정도 마찬가지라 이렇게 길게 풀어낼 필요가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총이 없어졌을 때의 도쿄 로지 내 사람들 위치 역시 표로 만들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 쓴 것에 불과합니다.

핵심 사건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전혀 다른 동기, 전혀 다른 관계자가 우연히 한 장소에서 조우하여 각기 다른 의도를 펼칠 기회를 갖게 된다는건데 설득력이 낮아요. 일단, 앞서 이야기한 다치아라이의 추리, 즉 '글자를 새긴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라제스와르 준위 살인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준위가 살해당한 이유는 야쓰다와 대마초 밀매 관련 트러블이 벌어진 탓이지요. 이를 위해서는 문구가 새겨지거나 시체가 옮겨질 필요가 없습니다. 준위의 시체를 옮겨 글자를 새기고 위장한 것은 다치아라이가 오보를 낼 것을 의도한 사가르의 부수적인 행동입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일들이 연쇄적으로 딱 맞게 일어날 확률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차라리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주제라도 공감이 갔더라면 그나마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전혀 공감할 수 없었습니다. '기레기'라고 불리우는 기자의 행태들, 제대로 된 취재도 없이 자신의 기사가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할지 생각도 하지 않고 기사를 뿌려버리는 막장 행태는 저도 심하게 불만이기는 하지만, 다치아라이가 '라제스와르 준위는 기자와의 인터뷰 후 '밀고자'라는 글자가 새겨진 채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라는 사실을 시체 사진과 함께 기사화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기까지는 사실이라 문제될 게 전혀 없습니다. 독자들이 추측으로 '아마 왕실 내부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감추기 위한 누군가에게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생각하든 말든 그건 그 이후의 일이에요.
또 기사 발표 후 후속 기사를 준비하다가 사가르가 사실은 자기가 꾸민 짓이었다고 폭로한다? 솔직히 일본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겁니다. 다치아라이 역시 '사건은 미궁에 빠졌으며, 한 소년이 자작극이라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정도로 마무리하고 네팔을 뜨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요. 사가르의 말대로 기자들이 멍청한 쓰레기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아무리 생각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치아라이가 기사를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먹고살기 위해서라고 작중에서 설명됩니다. 사실 먹고살기를 제외하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 내가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밝혀내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같은 내용을 취재하고 보도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기 위한 무언가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라는 말은 전부 이상에 가깝습니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라제스와르 준위의 생각이 더 새겨들을만 합니다. 사람들이 기자를 믿을 하등의 이유는 없으며, 또한 진실만큼 왜곡되는 것도 없다는 것인데 100% 동의합니다. 어차피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라는 점에서 말이지요.
다치아라이가 자신의 일에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항변하지만 "도둑에게는 도둑의 신념이, 사기꾼에게는 사기꾼의 신념이 있다. 신념을 갖는 것과 그것이 옳고 그름은 별개야."라는 답에 할 말을 잃고 마는 것 역시 당연합니다. 맞는 말이니까요.
신념 운운하기 전에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의 독자들에게는 네팔 왕궁 사건 기사는 서커스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보다 솔직한 태도였을 것입니다. '앎'을 위해서, 무언가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위해서라는 말은 솔직히 얼토당토않지요. 제가 이렇게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이가 든 탓도 크기야 하겠지만 이상과 현실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이런 주제로 글을 쓰고 싶었다면 일본 국내의 현실을 반영하여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네팔을 무대로 구태여 쓸 필요는 없어 보였어요. 작가 스스로 네팔 왕실 사건을 일본 독자들에게 호기심거리로 던져 서커스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기자는 안 되고 작가는 써도 되는 건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전작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딱히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16/11/27

역시 빵이 좋아! - 야마모토 아리 / 박정임 : 별점 1점

역시 빵이 좋아! - 2점
야마모토 아리 지음, 박정임 옮김/이봄

조리사 면허를 취득한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 야마모토 아리의 빵에 대한 에세이 만화... 인 줄 알고 읽게 되었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르네요. 130여 종의 일본 빵집의 빵을 한 개 당 1~2페이지 분량으로 빵 그림, 재료와 맛에 대한 설명, 잘 어울리는 술이나 음료를 소개하는게 전부거든요.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에요.

1. 빵 소개 : 눈이 번쩍하는 매운맛, 캐슈너트와 블랙 페퍼.
2. 특징 소개 : 블랙 페퍼의 매운 맛이 찌릿찌릿! 수제 효모 베이스의 산미도 서서히 올라와! 이 맛 엄청 자극적!
3. 부가 정보 : 이건 틀림없이 육류와 어울리는 맛이야. 비엔나 소시지와 정말 잘 맞아! 화이트와인이랑 드세요.

이외에 중간중간 아주 약간의 개그나 아이디어가 들어간 정도입니다. 만화라고 부르려면 최소한의 이야기는 필요한데 이래서야 빵 소개 책자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딱히 작화가 빼어난 것도 아니고요.

빵집 순례를 위해서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주로 도쿄에 있는 빵집들이 소개되지만 빵집 이름 뿐, 상세 주소나 지도가 소개되지 않는 탓입니다. 최소한 레시피라도 실렸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빵의 특성상 집에서 만드는 것은 거의 무리이니 이 역시 기대할 게 못됩니다. 약간의 어레인지 정도(오븐 토스트에서 구워 먹는 게 좋다던가)만 실려 있는 수준이에요.

편의점에서 파는 빵인(세븐 일레븐) '버터 스카치', '휩크림 듬뿍 데니시' 소개 정도는 괜찮았는데 차라리 이런 소재로 끌고 가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빵이 아니라 '편의점이 좋아' 식으로 말이죠. 우리나라 기준으로는 편의점 여왕 다인님이 한번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빵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기대가 컸는데 아쉽습니다. 차라리 우리나라에서도 구할 수 있는 빵 소개였다면 점수가 조금은 높지 않았을까 싶은데 정말이지 건질 게 없어요. 일본 맛집 소개 블로그를 보는 게 더 낫겠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6/11/26

검색, 사전을 삼키다 - 정철 : 별점 2.5점

검색, 사전을 삼키다 - 6점
정철 지음/사계절

네이버, 다음 카카오에서 웹 사전을 만들고 있는 정철씨가 쓴 사전과 검색에 대한 책입니다. 사전에 대한 개괄 및 간략한 사전의 역사, 사전 역사에 있어 활약했던 유명 편집인과 저자들이 소개된 후 사전과 검색의 차이와 검색을 어떻게 구현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이론과 저자의 경험, 그리고 검색의 문제와 미래에 대한 고찰로 이어지는 구성입니다.

사전의 역사는 분량상 큰 변곡점만 짚어주지만, 개요를 이해하기에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무엇보다도 검색 전문가로서 사전을 만드는 방법을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장점은 큽니다. 실체를 감잡기 어려웠던 '말뭉치(코퍼스)'를 활용하여 어떻게 사전을 만드는데 응용하는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말뭉치는 빈도와 분포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예문을 뽑기도 좋고, 저빈도 사용례를 찾아 사전에서 제시하는게 가능해졌다는군요. 그러면서 서울대학교의 꼬꼬마 세종 말뭉치 활용 시스템과 같은 사이트도 알려주는 식으로 제공되는 정보도 풍성해서 마음에 듭니다.

과거 '백과전서'와 현대의 '위키 백과' 모두 마찬가지로 토론과 논쟁이 사전 편찬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는 것도 새겨 봄직 합니다. 실시간성, 정보의 진위 여부, 언론 통제 등을 극복하기 위해 당연한 방법이고, 앞으로의 사전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게 당연해 보이네요.

검색 엔진의 검색 방법론인 '색인'에 대한 설명은 이런 저런 컨텐츠에서 많이 접해보기는 했지만 '넘나드며 읽기' 방식을 극대화했다는 이론은 독특했습니다. 책은 원래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고, 무의미한 부분은 그냥 넘어가도 되는 매체이다. 검색 역시 지식을 효과적으로 소비할 수 있도록 지식과 지식 사이를 점프하며 둘러볼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라는 발상이 신선했던 덕분입니다. 이게 정답이다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겠지만요.

이후 검색이 진화하면서 랭킹 시스템이 도입되고, 야후에서 다단계 트리를 만들어 수작업 랭킹 시스템을 만든 후, 구글이 페이지랭크로 천하 통일을 이루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습니다. 많이 인용된 논문이 좋은 논문이듯이 많이 링크된 페이지가 좋은 페이지라는 아이디어였다는데 참 그럴듯해요. 물론 지금은 단순 링크는 많이 사라졌고 다른 복잡한 방법론이 도입되었으나, 누구나 알 수 있고 그럴듯하며 아날로그 시대로부터 증명된 것이야말로 진실 그 자체라는건 변함없는 사실인 듯 합니다.

아울러 검색과 큐레이션 서비스의 비교는 제 현업에서의 고민거리와 조금 유사한 부분이라서 더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큐레이션은 검색보다는 우연, 세렌디피티와 인스퍼레이션을 위한 것이라는 의견은 공감이 갑니다. 실제 개발을 위한 알고리즘, 서비스 방식에 있어 단순히 이렇게만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리고 네이버, 다음카카오 모두에서 검색 서비스를 기획 개발한 개발자로서의 경험담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주로 네이버 사전을 쓰지만 다음에는 다음 사전도 한번 써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전의 미래와 좋은 검색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고요.

이렇듯 재미있는 부분도 많고, 또 개인적으로 '백과사전'과 같은 형태의 책을 좋아하며(사전, 시대를 엮다와 같은 책을 찾아 읽을 정도로), 예전에 전자사전 제조사에서 근무한 적도 있어서 더 좋았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한 권의 책으로서의 완성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저자의 개인 블로그, 개인 글을 두서없이 편집한 느낌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자 스스로 아카이브를 만들고 DB화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차, 순서는 그닥 정리되어 있지 못합니다. 사전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검색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유명 사전 편집자를 소개하는 식입니다.

수록된 내용도 검색 방법론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비전문가가 쓴 티가 난다는 것도 역력합니다. 특히 사전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 심한 편이에요. 전문 사학자가 아닌 만큼 한계는 명확했겠지만, 이럴 바에야 잘 아는 분야에 집중해서 책을 쓰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덧붙이자면 저자가 제기한 문제점, 국내에서 종이 사전이 사라지고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만 제기할 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쉽습니다. 개인으로서 한계야 있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 책을 출간할 만한 위치와 경력의 소유자가 현실적인 문제만 이야기하는 것은 좀 부족했다 생각되네요. 특히 이 문제는 제가 전자사전 업체에서 근무했던 거의 10여 년 전부터 불거진 문제인데 해결책이 전혀 없이 현재까지 흘러왔다는 점에서는 심각해 보이는데 말이지요.

결론내리자면 재미도 있고 건질 거리도 있지만, 아무래도 보다 심도 깊은 지식을 얻기 위한 시작점, 진입점 역할에 가까운 책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6/11/20

별도 없는 한밤에 - 스티븐 킹 / 장성주 : 별점 3점

별도 없는 한밤에 - 6점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의 중단편집입니다. "사계"처럼 4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 모두 어디선가 봤던 설정들이 대부분인 탓에 아이디어는 대단치 않습니다. 대단한 복선이나 극적인 반전이 있지도 않고요. 그러나 독자를 몰입시키는 능력은 정말이지 극에 달해 있습니다. 읽으면서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600쪽 가까운 분량을 하루에 읽을 정도로 말이죠.

한마디로 왜 제왕이 제왕인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하는 단편집입니다. 스티븐 킹과 장르 소설 애호가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1922

1922년, 네브래스카 주 헤밍퍼드홈에 사는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아들 행크와 함께 아내 알렛을 살해했다. 이유는 그녀가 땅을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뒤, 그의 삶은 지옥으로 변해갔다. 시체를 은닉하던 중, 쥐떼에 뜯어먹히던 처참한 아내의 시체를 목격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서서히 정신적으로 붕괴되어 가던 아들 행크는 이웃집 딸 섀넌을 임신시켰지만, 섀넌의 아버지가 둘을 갈라놓자 가출했다. 그리고 섀넌을 되찾기 위해 강도가 되고 말았다. 결국 섀넌을 만나 도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연인 강도단'으로 연이어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둘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쥐에 물린 상처로 사경을 헤매이던 중, 아내의 유령과 함께 행크의 최후를 실시간으로 바라본 제임스는 이후 팔 하나와 그렇게까지 지키려 했던 땅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가기 싫어했던 오마하로 가 홀로 8년을 버티다가 자살했다....

"자살한 사람과 살인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길을 못 찾아서 헤멜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 8년간 나는 그곳에서 살았으니까."

아들과 함께 아내를 죽인 뒤, 파멸해 가는 남자를 1인칭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아내를 죽인 뒤 죄책감과 공포로 인해 서서히 붕괴해가는 주인공, 마찬가지로 비정상이 되어가는 아들 행크, 그리고 그 둘의 삶에 휩쓸려 무너져가는 이웃들을 그려내는 적나라한 묘사가 전부입니다. 이렇게 범죄, 살인 이후 무너져가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야 "죄와 벌"을 비롯해서 차고 넘칠 정도로 많지요.

그러나 이런 뻔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제왕의 필력이 너무나 압도적인 덕분에 읽는 내내 손에서 떼기 힘듭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 펼쳐지거든요. 2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중편인데 거의 모든 페이지에 공포와 혐오, 증오가 가득차 있습니다.

단순히 죄책감에서 비롯된 심리 묘사뿐 아니라 제왕다운 고어한 묘사도 대단합니다. 그 중에서도 누구나 혐오스러워하는 '쥐'를 매개체로 한 일련의 묘사는 정말 최고에요. 아내의 시체는 물론 자살한 아들 시체까지 쥐에게 파먹히고, 본인 스스로는 환각을 보고 자기 자신을 씹어먹어 죽는다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까지의 묘사는 흡사 크리쳐물을 읽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생지옥에 대한 고어스러운 묘사만 반복적으로 펼쳐졌다면 조금은 둔감해질 수도 있었을텐데, 순수했던 아들 행크가 변해가는 과정과 천사와 다름없었던 희생자 섀넌과 같은 피해자들에 대한 묘사로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러니라면 알렛이 한 말대로 했더라면, 이 가족은 최소한 지옥을 겪지 않았으리라는 점입니다. 특히나 만취한 알렛의 주정을 통해 행크가 어머니 살해를 결심하게 만든 "임신은 시키지 마. 원 없이 훑어도 좋아, 네 물건이 만족해서 토할 때까지. 하지만 안에다 토하면 절대 안 돼. 그랬다간 엄마랑 아빠처럼 평생 한 집에 갇혀 살게 될 테니까"라는 말은 정말로 진실이었어요. 최소한 행크가 임신만이라도 시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역시 어른들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네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상황부터가 문제이긴 해요. 아무리 아내를 'bitch'로 묘사했더라도 아내를 살해하는데 아들을 끌어들인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인지라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누가 보아도 인간 이하의 범죄니까요.

또 흔한 설정만큼 캐릭터들도 진부합니다. 책을 좋아하며 소들에게 여신들 이름을 붙여주는 주인공 제임스도 기시감이 많이 들지만, 행크와 섀넌이 강도가 되어 극으로 달리는 부분은 '보니 앤 클라이드'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보니와 클라이드는 범죄에 중독된 것이라 하더라도, 행크가 섀넌을 만난 이후 강도행각을 계속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건 문제에요. 아울러 장점이라고는 했지만 행크와 섀넌을 다룬 부분은 약간 신파 멜로물같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성적이라 호불호가 조금은 갈리지 않을까 생각되고요. 주인공이 결국 땅을 잃는 과정도 뻔하고 작위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류의 작품 초심자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섬찟한 작품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께는 당연히 칭찬이겠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장점, 단점이 명확한데 읽는 내내 눈길을 떼기 힘든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빅 드라이버

'뜨개질 클럽 시리즈'라는 코지 미스터리 시리즈를 쓰는 추리작가 테스는 강연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를 만나 강간당해 버려졌다. 시체가 쌓여있던 현장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후, 그녀는 스스로 복수할 것을 결심하고 단서를 찾아 나서는데...

전작과 마찬가지로 설정은 뻔합니다. 성폭행 피해자가 스스로 범인을 단죄한다는 복수극은 널리고 널렸죠. 영화 쪽으로는 "네 무덤에 피를 뱉어라"라던가, 본 작에서도 언급된 "왼편 마지막 집" 등등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은 전편 못지 않습니다. 특히 한편의 범죄 스릴러로 손색 없는 디테일이 아주 좋아요. 테스가 강간범의 모습을 떠올리고, 범행의 강연회를 주선한 라모나 노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그녀의 주변을 캐고 범인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확인하여 복수를 위해 벌이는 과정이 생생하며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복수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돌발상황, 예를 들어 라모나 노빌이 진짜 사건에 연루된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 라모나에게 총을 빼앗기는 상황, 그리고 처음 죽인 남자가 범인인 동생이 아니라 큰 형 빅 드라이버였다 등의 상황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것도 읽는 내내 흥미를 더해 주고요.

아울러 코지 미스터리 작가인 주인공 테스도 마음에 듭니다. 성격적으로 아주 개성이 넘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코지 미스터리 작가가 하드보일드스러운 응징을 계획하고 수행한다는 이질적인 매력에 더해 애완동물이나 네비게이션 등과 대화하면서 디테일을 잡아나간다는 묘사, 작품을 위해 권총을 사고 사격 연습을 받았다는 식으로 그녀의 작가적 능력 몇 가지가 이야기에 도움을 준다는 아이디어가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 자신에게 닥칠 상황을 상상하고 신고 대신 복수를 선택하는 장면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피해자가 또다른 피해를 우려하여 신고를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참 여러모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하지만 "1922"에 비해서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범죄물로서 괜찮은 연결고리를 갖추었다고는 했지만, 라모나 노빌 - 레스터 스트렐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너무 뚜렷해서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는 탓이 큽니다. 대놓고 '내가 범인입니다' 라는 식인데 그런 것 치고는 연쇄 강간-살인이 너무 오래 지속된 거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테스가 실종되었다면 마지막 강연 의뢰인인 라모나에게 경찰 수사가 미쳤으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데, 테스의 귀걸이를 라모나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팔기도 뭐하고, 잘못 들통나기라도 하면 명백한 증거가 될 텐데 너무 부자연스러워요.

마지막으로 빅 드라이버를 죽인 후 자살을 기도하던 테스의 죄책감이 사라질 만큼 빅 드라이버 역시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과정, 유일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벳시 닐이 마찬가지로 성폭행 피해자로 범행을 눈감아 준다는 결말은 지나칠 정도로 작위적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딸자식 가진 부모로서 분노를 가지고 몰입해서 읽기는 했지만 명확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2014년 TV용 영화로 영상화가 되었더군요. 그런데 예고편을 보니 작중 애완동물, 네비게이션과 1:1로 나누는 대화 부분을 테스의 인기 시리즈 '뜨개질 클럽' 주인공 할머니가 가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살짝 각색이 된 듯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 중 하난데 이렇게 각색을 하다니... 여러모로 딱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공정한 거래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스트리터는 우연히 만난 노점상 엘비드와 거래했다. 그의 수명을 늘리려면 누군가에게 그것을 옮겨야 했고, 스트리터는 불알친구 톰을 미워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씨발놈이 내 여자를 뺏어 갔다고요!"

악마와 거래한다는 내용의 작품 역시 쎄고 쎘죠. 굳이 예를 들자면 졸문 "계약은 충실하게"가 있고요.

그래도 노점상이 악마라는 것에서 시작하여, 시한부 인생 대신 15년 이상의 수명을 약속하고 이후 받게 될 수익의 15%를 요구한다는 등의 디테일은 독특했습니다.
또 거래 후 톰에게 닥치는 불행의 연쇄반응 역시 스티븐 킹답더군요. 과정이 정말 끔찍하기 그지 없거든요. 1인칭으로 그리면 1922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아울러 스트리터와 톰의 행복 - 불행의 지수가 한쪽에 쏠리는 일종의 '행복 질량 보존 법칙' 같은, 흡사 동양의 윤회 사상 비스무레한 전개도 볼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지긴 합니다. 악마와의 거래 후에는 일방적인 행복 - 불행의 과정만 나열될 뿐 딱히 반전도 없고 결말도 애매한 탓입니다. 스트리터가 톰이 가졌던 행운까지 차지하고 만다는 결말은 영 와 닿지 않았어요. 악마와의 거래가 이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날 리가 없는데 말이지요.

하긴, 애초에 스트리터가 톰을 팔아넘긴 것도 딱히 설득력이 없습니다. 여자를 빼앗긴 남자는 그게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복수한다는 교훈을 주려고 했던 걸까요? 저는 솔직히 스트리터가 가공할 정도로 찌질하고 속이 좁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다른 악마와의 거래 소재 작품에 비하면 딱히 쳐줄 부분이 없는 소품입니다. 딱히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

다아시는 1982년에 만난 회계사 밥 앤더슨과 결혼하여 27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던 중, 우연히 밥이 유명한 연쇄살인마 '비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이 출장간 어느 날 리모컨 건전지를 찾기 위해 차고를 뒤지다가 밥의 비밀 창고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뭐 이 역시 소재는 뻔합니다. 아내, 혹은 남편에게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한 배우자, 혹은 다른 가족을 다룬 작품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수많은 슈퍼 히어로물이 대체로 그러하고, "트루 라이즈" 같은 작품 역시 마찬가지겠죠. 이 작품처럼 배우자가 범죄자라는 설정 역시 많고요.

이런 류의 작품은 보통 배우자의 정체를 눈치챈 순간부터 극적 긴장감이 생기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말 두 가지, 즉 '배우자의 은밀한 생활에 동참하거나', '그만두게 하거나' 중 '그만두게 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역시 예상대로에요. 보통의 드라마가 부부 동반으로 비밀 정보원이 되거나 슈퍼 히어로가 된다면, 살인마 이야기는 함께 하는 쪽보다는 그만두게 하는게 정상이니 당연하지요. 결국 다아시가 밥을 죽인다는 결말도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하지만 거장의 솜씨가 작품을 살립니다. 우선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묘사가 대박입니다. 다아시가 밥의 비밀 창고를 발견하는 과정과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의 묘사, 이후 자신의 정체를 아내가 알았다는 것을 눈치챈 밥이 다아시에게 찾아가 이야기하는 장면 묘사 등에서 서늘함과 긴장감이 잘 살아 있는 덕분입니다. 아들과 딸을 생각하여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다아시의 딜레마 역시 설득력 있어서 뻔한 전개에 충분한 긴장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결말도 뻔하지만 노형사 홀트가 등장하여 깔끔하게 마무리하는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밥의 잔인한 범행을 경찰 입으로 밝혀주면서 응징의 정당성을 높여주면서, 결국 다아시가 밥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체포되었을 것이라는 말로 다아시의 죄책감을 줄이는 좋은 선택이었다 생각되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뻔한 소재로도 볼만한 이야기를 뽑아내는 거장의 솜씨를 볼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래저래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과연 비슷한 소재로 쓸 때 저라면 어떻게 쓸지, 한번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2016/11/19

백미진수 - 단 카즈오 / 심정명 : 별점 4점

백미진수 - 8점
단 카즈오 지음, 심정명 옮김/한빛비즈

나오키상 수상작가이자 일본 현대 문단의 원로로 다자이 오사무와 친구이기도 했던, 단 카즈오의 4계절 음식을 다룬 에세이집입니다. 저자가 음식을 정말로 좋아하고, 술을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소재에 깊은 애정이 담겨있는 글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단의 실력자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에 대해 글을 썼으니 애초에 재미가 없기는 힘들겠죠? 짙은 애정이 묻어나는 재미있고 좋은 글들이 가득합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묘사 역시 빼어납니다.

"바깥 껍질을 벗긴 멍게를 알맞은 크기로 썰어 오이와 함께 식초로 무쳐 먹으면 후두부를 콕 찌르는 것처럼 형언하기 어려운 냄새와 맛이 난다. 잊고 있던 여름. 잊고 있던 유카타를 입은 여인. 잊고 있던 여인의 색정. 문득 입에서 후두부 언저리에 걸쳐 이런 것들을 까닭도 없이 상기시키는 듯한 희한한 느낌이다.", 예레반이라는 도시의 코냑을 설명하며 "내게 천상의 여인이 아니라 지그시 다가오는 지상의 여인 같은 맛이었다."처럼 공감각적이면서도 소재를 넘나드는 상상력을 그려낸 묘사가 특히 좋았습니다.

요리를 즐겼다는 말에 어울릴만큼 인상적인 레시피도 몇가지 수록되어 있습니다. 몇가지 참고삼아 정리해 봅니다.

"금병매"에 적혀있는 족발 삶는 방법.

'돼지 발의 털을 깨끗이 밉니다. 그리고 긴 땔나무를 하나만 아궁이에 넣고, 기름과 간장을 큰 그릇에 가득 채운 뒤 향신료인 회향과 팔각을 더해 잘 섞은 다음 뚜껑을 꼭 닫습니다. 두 시간이 지나기 전에 좋은 냄새가 솔솔 올라오면서 다섯 가지 맛이 고루 갖춰지는데, 그러면 이것을 깨끗한 큰 접시에 담아 생강과 마늘을 넣은 작은 접시와 함께 찬합에 넣어...'

본인 스스로 본고장의 맛 (클램차우더?)과 비슷하다는 바지락 차우더.

우선 냄비에 물을 두세 컵 정도 넣어 끓인 뒤 바지락을 집어 넣고 뚜껑을 덮는다. 바지락이 입을 벌리면 바로 불을 끄고 그대로 식힌다. 베이컨은 가능하면 뜨거운 물에 데쳐 작게 조각내고 양파는 잘게 썬 다음 프라이팬에 버터를 넣고 약한 불로 살살 볶는다. 이 때 마늘을 조금 넣고 볶는 편이 더 맛있다.

양파가 반투명한 색이 되면 밀가루를 적당량 넣고 볶다가 밀가루, 베이컨, 양파가 흐물흐물 이겨지면 바지락 맛국물을 붓고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정성껏 섞는다. 다 풀렸다면 약한 불에서 잘 저으면서 우유를 두 통쯤 부으시라. 적당히 걸쭉하다 싶을 때까지 우유나 바지락 맛국물을 보태면서 끓인 다음 소금 간을 하면 수프는 완성이다.

이제 건더기 차례다. 바지락을 껍데기에서 분리해 조금 남은 맛굴물 속에다 헹궈 모래를 제거한다. 바지락은 기호에 따라 잘게 써는 편이 좋을 수 있다. 셀러리도 잘게 썬다. 그 외에 감자를 작게 깍둑썰기 해서 오 분 정도 소금물에 삶아 꺼내놓는다. 그다음 미리 만들어둔 걸쭉한 수프를 불에 올리고 셀러리와 감자를 넣어 한소끔 끓기 시작할 즈음 바지락을 더해주면 끝이다. 싱겁다 싶으면 소금을 치고 너무 되다 싶으면 우유로 묽히고 부드러움이 부족하다 싶으면 버터를 더 녹인다.

중국의 동남참게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

우선 동남참게를 잘 씻은 뒤 움직이지 못하도록 다리를 실로 묶는다. 따로 자잘한 톱밥을 준비해 이 톱밥 속에 다진 생강, 다진 파, 후추 등을 섞어둔다. 여기에 고급술과 식초를 따라 흠뻑 스며들게 한다. 이제 동남참게의 표면을 톱밥으로 빈틈없이 감싸고, 그 위에다 잘 반죽한 점토를 동그랗게 둘러싸서 굽는다. 점토에 전체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하면 재빨리 점토와 톱밥을 치우고 아직 뜨거운 게살을 입맛에 맞는 간장에 찍어 먹는다.

맛의 달인에서 완벽한 찜요리 대결에 나옴직한 독특한 조리법이네요. 뭔가 걸식계도 떠오르고요. 

단순히 음식 이야기 이외의 다른 소재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두터운 작가의 인맥을 활용한 이야기들, 또 전쟁 당시에는 중국에서 보도반원 생활을 했고, 그 외 해외 여행 경험 등 워낙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기에 담고 있는 소재의 폭도 넓어요. 여기에 본인의 유쾌하면서 대책없고 화끈한 성격이 더해져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꼽는 베스트 에피소드는 중국 신징 근처 러시아인 부락에서 러시아인 바우스 부부와 1년 정도 함께 살 때의 잼 만들기 에피소드입니다. 보드카를 마시면서 잼 만들기를 하는데 부부가 다른 곳으로 가게되어 단 가즈오가 잼 젓기를 맡았는데, 그들이 돌아올 때 까지 젓기만 해서 결과물이 잼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되었다는 결말입니다. 러시아인과 보드카, 그리고 단 가즈오가 만나서 제대로 시너지를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즐겁고 재미있으며 때로는 유용한 좋은 에세이집입니다. 최근 읽은 음식, 요리 관련 에세이 중에서도 최고로 꼽고 싶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음식과 요리를 사랑하시는 분들이라면 모두 즐겁게 읽으실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덧붙이자면 "술안주라는 놈만큼 반가운 게 없다. 정말 술꾼에게만 주어진 하늘의 은혜 같다. 마시는 사람이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 신의 가호를 많이 받는다니, 술꾼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지 않은가."라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대단한 애주가라는게 눈에 띄는데, 이러한 점과 대책없고 유쾌한 성격을 미루어 볼 때 로산진이 우미하라(가이바라)라면, 단 가즈오는 이와마 소다츠같은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간만에 준 4점이라는 높은 점수는 제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광팬인 탓도 클 듯 합니다.

2016/11/18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3점

천사들의 탐정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2016/11/13

오무라이스 잼잼 7 - 조경규 : 별점 2점

오무라이스 잼잼 7 - 4점
조경규 글.그림/씨네21북스

한 때 국내 음식 만화 중 최고봉이었던 "오무라이스 잼잼"의 최신간입니다. '한 때'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이 만화를 아직도 음식 만화라고 해야 할 지 아리송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전과 같이 일상과 음식에 대한 정보가 잘 조화를 이루는 에피소드가 없는건 아닙니다. 누텔라(와 베지마이트)를 다룬 "누텔라 마이트"라던가 양장피(와 짜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양장피는 어떤 모양인가요?", "156 대전 두부 두루치기 블루스", "핫덕 말고 핫도그" 에피소드는 예전 수준의 밀도를 보여줍니다. 작화 역시 음식을 맛있게 보이는 데에는 최고고요. 조경규 작가의 창작 비법을 소개한 후기는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이고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음식에 대한 비중이 이전에 비하면 훨씬 못합니다. 작가 가족을 다룬 일상툰에 음식 관련 정보가 들어간 만화로 보는게 나을 정도에요. 딸 은영이가 시력이 나빠져 블루베리 베이글을 먹인다는 "베이글과 안경", 가족끼리 망원 시장 나들이를 나간다는 "150차 닭강정 워크숍", 여행 중 냉장고가 고장나 음식을 전부 버려야 하지만 김치만큼은 푹 잘 쉬어 맛난 김치 찌개를 먹는다는 "151 김치 찌개 고장 사건", "인스턴트 분유" 등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이 그렇거든요. 전체 비중으로 따지면 일상 이야기 80에 음식 이야기 20 정도 비중이에요.
저도 일상툰이라는 장르를 무척 좋아합니다. 이러한 변화를 단점이라고만 하기도 어렵고요. 그런데 "생활의 참견" 등과 같은 빵빵 터지는 일상툰에 비교하면 평이한 이야기들이고, 작가 아이들을 소재로 한 비슷한 이야기들이 반복되는건 지루했어요. 그나마 이번 권에서만 그랬다면 괜찮겠지만 이러한 분위기로 흘러간건 이미 제법 오래된 터라 걱정이 됩니다.

연재분에 더하여진, 책을 구입한 독자를 위한 서비스가 미흡하다는 단점은 이전과 같습니다. 별도의 아이디어가 들어간 새로운 내용보다는 사진 중심의 정보 제공 페이지가 많은 탓입니다. 특히나 '성심당' 탐방 기사와 같이 인터넷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컨텐츠가 포함된건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여러모로 제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고 15,000원이라는 가격에 어울리는 내용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구입할 지는 추후 연재분을 보고 고민을 해 보겠습니다.

2016/11/12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1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고화질] Q.E.D. iff 증명종료 (큐이디 이프) 01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

자주 찾아가는 LionHeart님 블로그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여 읽게된 "Q.E.D" 시리즈 신작입니다. 시즌 2지만, 바뀐거라고는 한학년 올라간거와 토마가 이사한 것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이래서야 구태여 시즌을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데, LionHeart님 블로그 댓글을 보니 연재 잡지가 바뀐 탓으로 보입니다.

시즌 1과 같이 두 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두 편 모두 나름 강력 범죄가 등장합니다. 제가 시리즈에서 좋아하는 일상계 이야기들은 아니에요. 허나 두 편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주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작가 스스로 매너리즘을 털어내고 새롭게 접근하기 위한 시도 자체는 나름 성공적이라 생각되네요. 시즌 2의 첫 출발은 아주 좋아보이는데, 다음 권도 기대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참고 부탁드립니다.


"iff"

season 2의 부제이기도 한 iff가 제목인 시즌 2의 첫 작품으로 조각가 미사고가 밀실인 아틀리에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 사건을 그립니다. 제목의 의미는 범인이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이 무엇이냐... 이고요.

추리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습니다. 네 명의 용의자들 모두가 일단 범인이라고 가정하고, 어떻게 범행했을지를 들려준 뒤 "하지만 그럴리는 없다"고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솜씨가 아주 일품인 덕분입니다.
핵심 트릭인 조각상으로 분장한 모델이 이미 죽은 조각가를 움직여 알리바이를 조작했다는 것 역시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만화라는 매체에 딱 맞는' 트릭이라서 꽤 볼만했습니다. 빈 상자의 수수께끼도 해명되며, 작업 중이던 조각상의 얼굴을 부순 이유 (작업이 진행되지 않았음을 숨기기 위해) 와 같은 몇 가지 단서들도 모두 해결되고요. 

아울러 조각가 미사고가 그녀를 보고 영감을 얻어 조각을 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것(딸이니까 당연하겠죠), 미사고가 사람 내면을 드러내는 작품을 만드는데 마지막 작품의 완성이 늦어진 것은 두 손이 "안는 것"이냐 "목을 조르는 것"이냐의 갈등이었다는 결말에서의 여운도 마음에 듭니다.

물론 범인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범인의 말실수 - 조각상의 얼굴이 부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 뿐이라는건 많이 부족합니다. 용의자 모두의 과거를 조사하면 드러날 수 있는 동기였다는 점에서 무모한 범행에 대한 설득력도 낮고요.

그래도 이 정도면 최근 삼진, 병살을 반복하던 시리즈에 숨통이 트이는, 오랫만에 터진 깨끗한 안타와 같은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양자역학의 해에"

1920년대의 신흥종교 교주가 산속 은거지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 옆에 놓여있던 당시 과학잡지를 구입한 인연으로 토마와 가나 일행은 사건 현장을 방문한 뒤, 과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데...

거의 100년 전, 원수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궁극의 종교 공동체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과 조직 붕괴, 뒤이은 교주의 자살에 얽힌 진상을 파헤치는 작품입니다. 단서라고는 당시 신문기사와 과학잡지 속에서 발견된 과학잡지 기자의 노트가 전부라 안락의자 탐정물같은 느낌도 줍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100여년 전 종교집단을 이끌던 교주 카이지로입니다. 똑똑하고 나름 카리스마가 있는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주사위를 예로 들며 마이너스 확률을 설명하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였습니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신흥종교 집단을 그린 묘사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카이지로의 능력 - 거울과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것 - 이 아산화질소를 사용한 일종의 사기 행각이었다는 진상은 많이 실망스럽습니다. 게다가 아내와 아이까지, 일가족을 살해당한 피해자에게 원수를 용서하라니 가당치도 않지요. 그것도 수상쩍은 내세 세계관을 내세워 가족을 다시 만날 것이라 약속한다? 솔직히 천벌을 받아도 싼 놈이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아부미가 논리의 모순을 깨닫는 과정 역시 전형적인 Q.E.D 스타일이지만 너무 복잡했고, 상황을 고려한다면 와 닿지도 않았습니다. 어차피 어설픈 사기였으니만큼 이렇게 복잡한 과정 없이도 결국 들통이 났을 테니까요. 양자역학이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감점 요소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부분 부분 재미있지만 추리적으로는 부족했고, 전체적으로는 아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