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권을 읽었으니 하권을 안 읽을 수는 없죠. 반쯤은 의무감으로 읽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논픽션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상권과 마찬가지로 반세기가 지난 현 시점에서 이국의 독자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제국은행 사건"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은 재미있었으며, 무엇보다도 6.25에 대해 다룬 "그들의 이상한 전쟁"은 우리에게도 확 와닿는 주제며 내용이기에 상권보다는 더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어요.
결론내리자면 전체 별점은 3점. "그들의 이상한 전쟁" 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수록된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7장 열여섯 잔의 독배 - 제국은행 사건의 수수께끼
괴한이 은행 직원들에게 전염병 예방약이라고 속이고 독약을 먹인 뒤 현금을 가지고 사라진, 익히 알려진 유명한 사건이지요. 저자는 범인으로 발표된 화가는 단지 희생양일 뿐, 진범은 세균부대 출신으로 GHQ에 속한 인물일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근거도 탄탄하여 설득력이 높고요. 전체적인 전개가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가 느껴져 역시나 거장다웠습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추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사건이 제대로 수사되지 않은 것에 불과했다는건 좀 맥이 빠집니다. 이 논픽션의 가장 큰 테마인 미군정의 모략으로 인한 사건에 불과할 뿐이거든요.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능가하는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좀 아쉬웠습니다.
8장 소설가인가 스파이인가 - 가지 와타루 사건
소설가 가지 와타루가 미군정에 납치되어 1년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건을 다룹니다. 결국 누군가의 모함이 원인이었고, 목숨을 건진 것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내용인데 현실적이기는 하나, 재미는 없었습니다. 수십 년간의 독재정권을 거친 우리가 보기에는 별다를 것 없는, 오히려 평범해 보이는 내용일 뿐이었으니까요.
허나 반세기 전 일본에서조차 이런 일이 큰 사건이 되었는데, 지금 우리 현실은 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지네요.
10장 다이아몬드를 사랑한 사람들 - 정복자와 다이아몬드
전쟁 당시 일본이 모았던 막대한 양의 다이아몬드가 사라진 경위를 파헤치는 내용.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서 약 62만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확보했지만 전쟁 후 남은 것은 16만 캐럿에 불과했다는 사건의 진상을 추적합니다. 점령군인 미군과 일본의 정치 권력 쪽으로 은닉되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결말로 이어지고요.
사실 일본의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딱히 관심이 가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구전 설화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고종의 독립운동을 위한 황금"도 이와 비슷하게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중간에 언급되는 인도의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슈가 독립운동 자금을 가지고 소련으로 향하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을 때,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보슈의 트렁크 사건도 흥미로웠고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논픽션을 써도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이쯤 되면 완벽한 본말전도네요...
12장 그들의 이상한 전쟁 - 모략 한국전쟁
6.25에 대한 이야기. 일단 서두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하여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부의 도발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부터 신선했습니다. 이렇게 대놓고 돌직구를 날리는 책은 처음 본 것 같아요.
그리고 전쟁의 진행 과정을 묘사하면서, 북한군의 뛰어난 유격 전투 능력과 실제 남한 주민의 협조를 언급하며 "이 전쟁은 미군이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방조한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합니다. "한국은 하나의 축복이었다. 이 땅 혹은 세계의 어딘가에 한국이 없으면 안 되었다"라고 말한 미군 사령관 밴 플리트의 말이 진실의 모든 것이겠지요.
전쟁이 확대된 것은 남한군의 무능과 북한군의 실력 탓이었다는 점, 그리고 정말로 놀라운 북한군의 전과 등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내용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일본을 중심으로 한 극동 아시아의 세력 관계라든가, 맥아더의 중국 진출론 등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고요.
한마디로 추천작. 이 책이 아니라 논픽션 전체를 놓고 보아도 손에 꼽을 만한, 그야말로 논픽션의 명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