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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6

집에서 차 한잔 할까? - 미야케 타카오 / 최우영 : 별점 2.5점

집에서 차 한잔 할까? - 6점
미야케 타카오, 최우영/스트로베리

일본의 중국 정부 공인 전문가인 저자가 일본차, 중국차, 홍차, 허브차, 커피의 5가지 종류 차에 대해 한 페이지에 한 가지씩, 모두 100가지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입니다.

100 가지나 되는 이야기가 수록된 만큼 볼거리가 많습니다. 특히 일본차와 중국차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한 책은 처음 접해봅니다. 물론 제 공부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이 책으로 많은 걸 알게 되었네요. 그 중 제 기억에 남은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자면, 먼저 중국의 차 중 "황차" 는 다른 차와 마찬가지로 채취하고, 볶고, 비비고, 건조시키는 과정은 동일하지만 종이로 싸서 가볍게 찌는 '민황' 이라는 작업이 추가되어 깊이가 있는 독특한 향이 생긴다고 합니다. 종이 위에 찻 잎을 얹어놓고 불 위에서 가볍게 굽는 작업이 등장했던 "맛의 달인"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는데, 우미하라 (가이바라) 는 중국차 애호가였던 걸까요? 왠지 안 어울립니다. 

여러 명차도 잔뜩 소개하는데 그 중에서도 우롱차 중 최고라는 '봉황단총' 은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꿀 향기가 나는 우롱차인 '동방미인' 도 마찬가지로 땡기고요. 이 차는 꿀을 첨가한 게 아니라 어린 잎을 해충에게 먹힌 차나무가 해충의 천적을 부르기 위해 천적이 좋아하는 물질을 분비해서 꿀 향기가 난다는데, 자연의 신비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 외에도 맛있는 차가 어떤 것이며 어디서 구입하면 되는지, 차를 맛있게 우려내려면 어떻게 하는지, 여러 도구들은 어떻게 쓰며 간단한 다도에서의 매너는 무엇인지 등 실제 차를 마시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냥 뜨거운 우유를 넣는 밀크티가 아니라 우유로 끓여 만드는 "차이"에 대한 소개가 개중 백미였어요. 나중에 한 번 꼭 만들어 마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러한 정보들과 함께 매 이야기마다 수록되어 있는 일러스트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림도 잘 그렸지만 내용을 재미있게 압축해서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제목 그대로 "집에서 차를 먹는" 방법에 더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 가장 크게 실망했어요. 차에 대한 역사와 그 유래 등에 대한 정보도 많이 전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최소한 항목을 일본차, 중국차, 홍차와 같은 식으로 나누려면 "왜 일본은 차를 쪄서 만들고, 왜 중국은 덖어서 만들고, 왜 영국과 유럽은 홍차를 더 좋아하는지?" 는 알려줬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 100개의 이야기를 한 페이지 정도로 요약, 소개하기 때문에 재미보다는 참고서를 읽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일러스트로 보강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한 내용이 많았어요. 홍차나 커피의 경우, 다른 전문 서적이나 자료가 굉장히 많아서 이렇게 소개할 필요가 있을지도 의문이고요. 차라리 중국차와 일본차에 집중해서 이야기마다 보다 상세하게 소개하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Ceylon을 실론이 아니라 세이롱이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고, "본 차이나"를 백색 점토 대신 소의 뼈를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소개는 오해의 여지가 커 보이는 등 번역 문제도 조금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차를 즐겨 마신다면 도움이 될 내용이 수록되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도구를 하나씩 장만해서 집에서 제대로 차를 우려내는게 개인적인 꿈 중 하나인데, 그날이 올 때까지는 두고두고 소장할 생각입니다.

2021/03/06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제임스 노우드 프랫 / 문기영 : 별점 3점

홍차 애호가의 보물상자 - 6점
제임스 노우드 프랫 지음, 문기영 옮김/글항아리

서양의 많은 애호가에게 바이블처럼 읽힌다는 차에 대한 전문서이자 문화사 서적입니다.

1부에서는 차의 기원에서 시작하여 차가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역사, 그리고 홍차 인기가 주춤했던 뒤 다시 인기를 끌게 된 현재 시점까지를 상세하게 서술하여 알려줍니다. 특징이라면 '기원' 부터 상세하게 통사적으로 서술해서 알려준다는 점이고요. 특히 미국인 저자에게는 불리했을 중국차 역사가 비교적 정확하다는 데에서 공부의 깊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중국 신농 황제가 차에 관심을 보였고, 기원전 1066년 윈난 성에서 생산된 차가 황제에게 공물로 바쳐졌다는 등 중국 고대사에서 시작하여 당나라 육우의 "다경"이후 송나라 채양의 "다록", 명나라에서 이전과 다른 녹차 가공법이 등장했다는 역사 소개가 상세하며, 심지어 "고문진보" 속 차에 대한 명시 '칠완다가'까지 번역하여 소개할 정도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차 전래가 불교 전파와 관련이 있다는 여러가지 설들과 그에 대한 해석도 재미있었습니다. 첫번째 설은 승려 감로가 1세기 경 인도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차를 들여왔다는 설로, 그가 심었다는 전설의 차나무 일곱 그루는 아직도 쓰촨성 멍딘 산에 남아 있다네요. 두번째 설은 달마 선사 눈꺼풀에서 차나무가 자라났다는 설인데, 달마 선사가 인도 출신이니 이 역시 차나무 인도 기원설을 의미하지요. 야생 차나무의 고향은 윈난성과, 인간이 차나무를 처음 재배한 곳으로 알려진 쓰촨 성 모두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 불교에서 명상과 술을 대신하기 위한 이유로 차를 이용했고, 그래서 승려들이 차나무 재배와 차 가공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꽤나 타당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당나라에서 육우 선사가 "다경"을 쓴 배경 역시 마찬가지 이유일테고요. 

'차 茶'라는 문자가 등장한 시기와 그 발음 및 일본 다도 문화의 역사, 그리고 일본 다도를 대표하는 센노 리큐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주로 오카쿠라 가쿠조의 "차에 관한 책"에서 인용한 내용이 많은데, 놀랍게도 국내에 e-book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어 있네요. 이 책에 일본이 가루차를 거품내는 송나라 방식을 쓰는건, 자기들이 몽골 침략을 물리쳐서 차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던 거라는 해석이 나오는 모양인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센노 리큐 이후 센차 방식을 발전시킨 바이사오에 대한 설명도 빼 놓지 않고 있고요.

다음은 중국차가 유럽에 전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1610년 네덜란드가 최초로 차를 들여오면서 유럽에서 차가 확산되게 됩니다. 이후 17세기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이 전쟁을 벌일 때 프랑스와 네덜란드 교역 단절로 프랑스는 차 공급이 끊어졌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커피 수입이 단절된게 국가적 선호가 갈리게 된 이유라고 하네요. 그리고 영국에서 찰스 2세와 왕비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차 유행과 이 때문에 벌어진 영국 동인도 회사, 존 컴퍼니와 중국 무역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원래 중국차를 성공적으로 수입해서 유럽에 유통시킨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였는데, 네덜란드는 중국 차의 미래를 과소평가해서 인도네시아 자와섬을 통한 중계 무역만 하다가 수요 폭증 때 중국과 직거래하던 영국 동인도 회사에게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고요. 그리고 보스턴 티 파티,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던 동인도 회사의 추악한 행위들과 아편 전쟁, 영국이 패권을 쥔 뒤 민싱 레인에서의 차 거래와 차 운반선들이 레이스를 펼치던 영광의 시대, 인도 아삼 지방에서의 차 재배 성공, 토머스 립턴과 실론 티의 성공 등이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기존 제국주의 사고방식과 다른 전통들이 모두 파괴된 뒤 그 자리를 값싼 '티백'이 차지하였고, 회사마다 가격 경쟁이 시작되어 고급 차들이 모두 시장에서 사라져버린 시대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 시대는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요. 다행히 지금 고급 차 시장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고 언급하며 차 역사 설명은 마무리됩니다. 그 외에는 차와 관련된 여러 유명인들, 그리고 '본차이나'로 대표되는 다기 제조에 대한 역사 등을 함께 소개해주고 있는데, 모두 재미있었어요.

반면 2부의 나라별 주요 차 소개는 특별히 와 닿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고, 인터넷 등에서 확인 가능한 정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강희제가 '벽라춘'이라고 이름붙인 차 이름의 유래는 찻잎이 우러나는 동안 나선 모양으로 회전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저자 개인적인 견해는 괜찮았지만요. 그 밖에는 프랑스가 1825년 베트남에 최초의 차나무를 심었다고 자랑하지만, 옛날부터 차나무는 베트남에 야생으로 자라고 있었으며, 차는 이미 1,000년 전 부터 인도차이나 문화 일부였다며 일침을 가하는 것처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정도만이 눈에 뜨였습니다. 프랑스가 뭘 새롭게 한 건 없고, 오히려 창피해 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로, 비교적 공정한 견해라 할 수 있겠죠. 

그래도 2부 마지막에 실린 블렌딩과 차 브랜드 설명은 그런대로 유용했습니다 . 브랜드별 대표 차 명칭, 어떻게 블렌드되어 있고 어떤 맛인지를 대략적이나마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 그레이의 기원과 레시피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인상적이었고요. 

하지만 3부는 50페이지도 안되는 짤막한 분량인데다가 차를 어떻게 마시는게 좋은지 차 마시는 방법이 전부입니다. 도판과 함께 상세하게 소개해주는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나은 점을 찾기는 어렵더군요. 도판이 없다면 최소한 유튜브 동영상 링크라도 포함해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2부와 3부는 그닥이었지만, 1부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차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최소한 1부만이라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4/10/29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 이소부치 다케시 / 강승희 : 별점 3점 -> 미정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 - 6점
이소부치 다케시 지음, 강승희 옮김/글항아리

"차"보다는 "홍차" 중심으로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소개해 주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입니다. 도판과 자료가 화려해서 즐겁습니다. 차를 마실 때 사용했던 눈이 휘둥그레지는 각종 도구, 다기들, 차와 관련된 그림과 사진, 지도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거든요.

책은 유럽에 최초로 소개된 차는 녹차였는데 이것이 왜 홍차로 바뀌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영국물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되어 경도가 높은 탓에 녹차를 우리면 차의 떫은맛 성분인 탄닌이 제대로 우러나지 않는데, 녹차 대비 탄닌 함유량이 높은 발효차는 중국에서는 떫지만 런던의 경수에서는 순하게 우려져 좋은 맛이 되었기 때문이라네요.

원래 홍차가 실패한 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흥미롭습니다. 어쩔 수 없는 환경적 요인으로 반발효차를 만들지 못해 완전 발효차가 되었고, 차를 만드는 공장에서 찻잎을 건조시키는 땔감으로 쓴 소나무의 연기가 찻잎에 착향된 것이 미묘한 향이 난다는 보히차, 정산소종이 되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원산지인 우이산의 보히차가 영국의 소비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격동기의 중국에서 차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가짜 보히차가 범람하고, 더욱 강한 맛과 향을 착향시키기 위해 강제로 훈연한 랍상소종이 지금은 영국의 전통적인 차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니 세상 일은 정말 모를 일입니다.

또 차의 기원을 찾아 이런저런 곳을 돌아다니며 찾은 여러 가지 차에 대해 소개해 주는데, 홍차 관련된 장소에 대한 기행문이라는 점에서는 "커피견문록"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는 지노족이라는 소수민족의 량반차가 인상적이었어요. 왜냐하면 반찬처럼 먹는 차이기 때문이에요. 차의 생엽을 유념하여 생강, 마늘, 고추, 소금과 함께 섞어 뜨거운 물을 부은 뒤 먹는다고 합니다. 꽤 맛있을 것 같죠? 비슷하게 반찬처럼 먹는 차가 미얀마에도 있는데, 이곳에서는 약간 발효한 절인 음식처럼 먹는다고 하네요.

이외에 여러 가지 차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의 흐름도 짤막하게 알려줍니다. 물론 "보스턴 티 파티"가 빠질 수 없죠. 아편전쟁도 어떻게 보면 차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하는 관점도 새로웠고요.
홍차 관련 주요 인물들 어떤 활약(?)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얼 그레이 홍차를 만든 그레이 백작을 비롯해 중국에서 차 수입이 어려워지자 인도의 아삼이나 스리랑카의 실론 등의 식민지를 차 생산지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지금도 그 이름을 강하게 남기고 있는 홍차의 왕 "립턴"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다른 사람들은 정말 홍차를 재배하고 널리 퍼트리는 데 노력한 사람들이라면, 립턴은 순수한 사업가로 생산과 판매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거대 기업을 세운 것이니까요. 참고로 얼 그레이는 유명한 홍차 상회 트와이닝에서 정산소종의 훈연향이 랍상소종만큼 강하지 않자, 다른 향기에 주목하여 베르가못의 향을 첨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차가 전래되면서 미국인의 실용적인 관점으로 새롭게 등장한 티백, 아이스티, 레몬티 등이 소개되고, 마지막은 맛있는 홍차를 만드는 방법으로 끝맺습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통해 읽었던 조지 오웰의 수필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어서 더 반갑더군요. 내용의 핵심은 "우유를 먼저 붓느냐, 차를 먼저 붓느냐"였는데 조지 오웰의 주장은 우유의 양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우유를 나중에 부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MIF, MIA 논란은 계속 이어졌는데, 왕립화학학회까지 나서서 내린 결론은 "우유가 먼저(MIF)"입니다. 우유를 나중에 넣으면 우유 속의 단백질이 고온의 차에 의해 변성되어 차의 맛과 향이 나빠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과학이 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아주 좋은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재미는 물론 자료적 가치도 충분한 만큼, 차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책의 장정, 디자인도 아주 예쁘고 실려 있는 도판들도 컬러로 제대로 수록되어 있는 등 책의 완성도도 높은 편입니다.

2014.10.30 수정) 댓글을 읽어보니 책 내용에 오류가 제법 있는 것 같습니다. 참고하세요.

2014.11.06 수정) 댓글을 읽어보니 오류 정도가 아닌 것 같기에 별점은 미정으로 최종 수정합니다.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만 리뷰를 남길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 "독서"가 자신의 교양을 쌓고 부족한 것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기도 하니까요. 잘못된 정보를 주는 책을 잘 모르는 독자가 읽었을 때의 폐해의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하겠습니다.

2021/02/28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 윤덕노 : 별점 3점

음식으로 읽는 중국사 - 6점
윤덕노 지음/더난출판사

음식 관련 식문화사, 미시사 서적. 관련 서적을 많이 저술해 왔던 윤덕노 씨의 근간입니다. 주로 우리나라 역사나 일화 속 음식과 요리들을 다루었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제목처럼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의 중국 역사에서 요리 관련된 이야기들을 뽑아내어 소개해 줍니다.

요리에 대한 단순한 소개보다는 그럴듯한, 그리고 평소에 생각해보지 않았었던 역사적 사실을 뽑아내는 글들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조개가 높은 가치를 가졌었다는걸 "삼국지"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사료를 통해 우선 소개한 뒤, 그 이유로 옛날 중국의 주요 도시들이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이었다고 설명하는 식입니다. 물론 단지 거리 문제만은 아닐 수 있겠지만, 뭐든 구하기 힘들면 가치가 높아지는건 당연하니 그럴듯한 발상입니다.

당나라 이전 가 유행하지 못한 이유도 비슷합니다. 저자는 우선, 당나라 이전은 북방이 남방에 비해 문화적으로 월등하게 발전했던 시기였다고 해석합니다. 당시 북방 민족은 차보다 낙농 제품을 더 선호했습니다. 차나무는 따뜻한 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라 접하기도 쉽지 않았고요. 그러다가 당나라 때 강남의 발전,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호방한 북방 호족 문화가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정신을 맑게 하는 차가 대접받는 남방 문인 귀족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지요. 차의 대 유행은 이런 역사적 흐름이 맞물린 덕분이라는군요.

남북조 시대, 남제 출신으로 북위에 투항 후 대장군을 지낸 왕숙이 양고기와 물고기를 비교했던 일화도 마찬가지에요. 북위의 수도 낙양은 허난성에 위치한 중원의 중심인데, 이 곳까지 북방 유목민 음식이 널리 퍼졌다는 뜻으로 남북조 시대부터가 호한 胡漢 융합이 시작된 시기로 보는 좋은 증거라고 하거든요. 충분히 설득력있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항상 궁금했던, 왜 중국에서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많이 먹고 대접받는지?에 대한 설명도 실제 역사와 잘 맞아 떨어져서 재미있었습니다. 돼지고기가 황제 수랏상에 오른건 명 태조 주원장 때가 처음인데, 그 이유는 주원장이 탁발승 노릇까지 했던 밑바닥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송, 원나라 때 귀족, 부자들은 주로 양고기를 먹었습니다. 돼지고기는 주로 가난한 서민이나 하층민이 먹었고요. 그런데 주원장이 황제가 된 뒤, 자기 입맛에 맞는 돼지고기를 수랏상에 올리게 했고 이후 돼지고기를 제일 좋아하던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여 중국 육식 문화에서 돼지고기의 자리는 확고 부동해졌다고 하네요.

그 외 중추절 토란이나 오리고기를 먹는 풍습이 원나라 때, 몽골인을 죽이는 심정에서 비롯되었다던가, 도삭면은 몽골족이 한족으로부터 식칼을 압수해서 어쩔 수 없이 쇳조각으로 만들었던 상황에서 유래되었다는 고사도 역사와 음식을 잘 배치하여 설명한 사례라 생각됩니다. 몽골족은 한족으로부터 주방용 식칼을 압수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팩트 체크도 확실해서 마음에 들고요.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여러 일화나 명언 등에 관련되어 있는 요리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강남 귤이 강북 가면 탱자 된다'는 고사를 예로 들며, 이 강은 화이허강이며, 귤과 탱자는 아예 다른 종류이고 강북에서 귤 재배가 되지 않는건 북방 한계선이 화이허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주는 것 처럼요. 

국수가 장수를 의미하는 음식이 된 유래도 기억에 남네요. 이는 그만큼 밀이 비싸고 고급 음식이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보통 생일날에는 평소와 달리 맛있고 좋은 음식을 먹기 마련이니까요. 송나라 이후는 밀이 흔해졌지만, 숲이 많은 북방에서 평야 지대인 남방으로 밀려난 탓에 찌는 요리법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그럴듯했습니다. 화덕에 구울 때는 화력이 센 장작이 필요한데, 숲이 없는 남방에서는 볏짚이나 밀짚과 같은 농업 부산물 혹은 낙엽을 연료로 쓴 탓에 연료 소비가 적은 수증기를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유지요. 

복날과 보신탕의 유래도 가치있는 정보였습니다. "사기"에 근원을 둔 역사적인 행사와 음식이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호떡은 군것질거리나 값싼 길거리 음식이 아니라 황제가 먹기에 손색없는 고급 음식이었다는 이야기도요.
조조, 수양제, 장한, 소동파 등 수많은 권력자와 문인들을 사로잡았던 송강 농어의 정체가 정약용을 포함한 조선 학자에 따르면 '꺽정이'라고 하는데 한 번 먹어보고 싶어지네요. 지금은 보호종이라고 하니 먹을 기회는 그다지 얺겠지만요. 그런데 고려, 조선인들은 그다지 즐겨 먹지 않았는데 중국에서는 왜 이렇게 요란을 떨었는지 아주아주 궁금해집니다. 

그 외에도 동짓날 팥죽을 먹는 이유 등 여러모로 쓸만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내용에서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저자가 만주족이 돼지고기를 선호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제사를 지낼 때 돼지고기를 썼다는 이유 뿐입니다. 그런데 이 책 다른 부분에서 송나라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건, 주변 강대국인 요와 금으로부터 받은 문화적 영향 탓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목민은 일반적으로 돼지고기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예 먹지도 않았다는 이유로요. 만주족도 말갈, 여진의 후예로 유목민에 가까운데 왜 돼지고기를 선호했을까요?

또 남송에서 찌는 요리가 발달한건 연료가 부족했던 탓이라는 이유는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찌거나 볶거나, 연료 차이가 크게 날 것 같지는 않거든요. '직화'인 경우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중국 요리에 직화 요리가 많지도 않으니까요. 이렇게 저자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모호한 부분은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리고 크게 3개 단락으로 구분해서 시대별로 목차를 구성해 놓았는데, 어수선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통사적으로 목차를 구성하여 해당 시기에 대해 여러가지 요리들을 일람하도록 하는 구성이 훨씬 보기 좋았을것 같네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중국 요리와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20/09/30

중화미각 - 김민호, 이미숙, 송진영 외 : 별점 3점

중화미각 - 6점
김민호.이민숙.송진영 외 지음/문학동네

다양한 중국 음식에 대해 써 내려간 음식사, 문화사 서적이자 넓게 보자면 일종의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책입니다. 바로 얼마 전 읽었던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와 비슷해요. 전문 연구자들이 각종 음식에 대해 사료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개인의 느낌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 책이 훨씬 가볍고 쉽게 쓰여졌다는 차이점은 있지만요.

목차는 크게 전채, 주요리, 식사류, 탕, 후식, 음료, 간식으로 구분되며 각 항목별로 많게는 5종, 적게는 1종의 요리와 음료가 소개되면서 마지막 '연회 차림표'까지 모두 열 아홉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해당 음식에 대한 전문적인 글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오향장육"을 소개하는 첫 번째 글에서 잘 알 수 있어요. 오향장육의 현재 생김새와 구성, 주요 재료 소개, 오향장육 본고장인 산동 소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오향장육에 대한 깊이있는 이야기는 주요 재료 소개에 그치는 탓입니다. 산동성 소개도 재미는 있었지만, 무송이 호랑이 때려잡는 이야기 비중이 높아서 이게 오향장육과 무슨 관계가 있나 싶고요.

그래도 건질게 없는건 아닙니다. "량반황과"에서 식초에 대한 깊이있는 고찰은 좋았습니다. 음식 재료로서의 식초보다는 '초'라는 한자어는 깨끗하고 가난한 선비를 가리킨다던가, 동양화 소재로 자주 쓰이는 "삼산도"에 대한 이야기가 좋았습니다. 유가 소동파, 도가 황정견, 불가 스님 불인이 각각 식초를 맛보고 짓는 표정이 다르다는 고사를 통해 유가, 도가, 불가의 인생관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솔직히 와 닿지는 않았지만, 이런 생각도 있었구나 싶었거든요.
"농어회"에서는 중국 회의 역사와 회의 조리에 대한 여러가지 고사, 시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진나라 관리 장한이 초가을 농어회와 순채탕이 그리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향한 뒤, 그가 모시던 왕과 측근이 모두 반란군에 의해 죽었다는 고사를 통해 '순갱노회 (순로지사)'라는 4자성어가 남아 있을 정도라는데, 중국에서도 진나라 때 부터 회를 먹었다니 놀랍네요. "쑹수구이위"를 통해 소개해주는 중국 물고기 요리, 그 중에서도 잉어 요리에 대한 정보도 좋습니다.

특히 마음에 든 건 "호떡"입니다. 당나라 백거이가 쓴 호떡이 등장하는 시에서 시작하여, 곡물가루로 반죽해 발효시키지 않고 화덕에 구운 '병'의 역사와 그 발전 과정,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다양한 분류 - 기름에 지진 젠병, 쪄는 증병, 튀겨낸 유병, 화덕에 구워낸 소병, 뜨거운 국물과 같이 끓여 낸 탕병 등 -, 당 이후 송, 청의 사료를 통한 '병'의 여러가지 조리법들, 마지막으로 어떻게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래었는지까지, 그야말로 '호떡' 이라는 길거리 음식에 대한 한 편의 깊이있는 미시사로 손색없는 글인 덕분입니다. '병'이 어떻게 발효를 거쳐 푹신하고 달콤하며 기름진 한국식 호떡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없는건 조금 아쉬웠지만 "중화미각" 이라는 책에서 한국식 호떡 이야기를 깊이있게 다루기는 어려웠겠지요. 이 부분만 보강된다면, "호떡의 역사"라는 별도의 책으로 팔아도 충분할, 좋은 글이었습니다. 

호떡과 비슷한, 과자 이야기들도 괜찮은게 많습니다. 후식에서 소개되는 "장원병" 이야기도 역사와 깊이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장원병의 시초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데 그 중 하나가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소년이 무려 49일이나 표류하게 되었는데, 어느 요리사가 준 과자만 전혀 상하지 않아서 그걸 먹고 목숨을 부지한 뒤 장원급제를 하였던 일화'에서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바삭한 껍질에 마른 견과류와 달콤한 소가 필수인 장원병이 오랜 기간 상하지 않는건 이해가 됩니다만, 정말로 상온에서 49일을 버틸지는 잘 모르겠네요. 여튼 이 후 장원병은 널리 퍼져서, 지금은 행운과 부귀영화를 상징하게 되었다니 중국에 가면 한 번 맛 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맛보다는 의미와 상징적인 측면에서 말이지요.

"반도 복숭아"에서 중국에서의 복숭아의 의미와 우리나라에서 그 의미가 달라진 것에 대한 고찰은 개인적으로 아주 관심있게 읽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복숭아가 에로틱한 느낌을 줄까? 에 대해 개인적으로 조사했던 적이 있는데, 이 글에서 '보수적인 유교적 가치관' 때문일 거라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조선 시대에서 복숭아가 여성의 욕망과 에너지를 상징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건 조금 아쉽더군요. 중국에서 복숭아가 여신 서왕모의 이미지이기 때문일까요? 그런 설명을 조금 더 보강해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산양뤄우"와 "훠궈"라는 탕 요리 소개도 다른 곳에서 흔하게 보았던건 아니라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익히 알고 있었던 요리들이 많이 등장하는건 단점이기는 합니다. "북경오리구이", "동파육" 이 대표적입니다. 요리법과 역사가 상세하게 소개되는 편이지만, 거의 모든 중국 요리 소개서 (이런거) 에서 소개될 정도로 다른 곳에서 이미 많이 접했던 이야기라 신선함이 떨어집니다. 물론 "동파육"에서 실제 해당 요리와 상관없는 동파 소식의 인생과 그의 시를 소개하는 식으로 차별화 요소를 가져가고 있기는 한데, 나쁘지는 않았지만 책 취지에는 많이 어긋난 내용이었다 생각되네요.
"만두"에서의 만두의 여러가지 종류에 대한 소개도 단순한 형태와 만두소에 따른 분류가 전부라 깊이가 부족했고요. "짜장면"도 차별화된 컨텐츠로 보기에는 어려웠습니다. "백주와 약주", "용정차" 역시 중국술과 차에 대한 방대한 책들에 비하면 딱히 내세울 내용은 없어요. "용정차"에서 "삼국지" 속 유비가 구하려고 했던 차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 정도만이 기억에 남을 뿐입니다.
"훠궈"도 앞서 좋다고 설명드리기는 했지만 말미에 중국에서 훠궈 먹는 방법을 소개한건 어색했어요. 솔직히 필요없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나마 "마파두부"는 굉장히 널리 소개된 소재임에도 다행히 '두부'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두부의 역사에서부터 시작되거든요. 마파 두부도 흔한 진 마파의 조리법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사천 요리의 핵심인 '두반장' 소개로 다른 마파두부 컨텐츠들과는 조금은 다른 내용을 선보이고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다른 유명 요리들도 이렇게 다른 디테일을 파고 들었다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래도 재미와 자료적 가치도 적당하며, 책의 빼어난 만듦새도 좋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중국 요리를 좋아하시는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5/02/14

중화 요리에 담긴 중국 - 고광석 : 별점 3점

중화요리에 담긴 중국 고광석 지음/매일경제신문사(매경출판주식회사)

중국 사람들은 개고기의 질을 평함에 있어서 개의 겉모습, 즉 털의 색깔로 등급을 달리한다. 즉 일황, 이흑, 삼화, 사백이 그것이다. 첫째는 누렁이, 둘째는 검둥이며 셋째는 얼룩이, 넷째는 흰둥이다. 필자는 인류에게도 그와 같은 평가가 근거가 있다(?)고 믿는 사람의 하나이다. 독일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빌헬름 2세가 당시 중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애완용 개 한마리를 선물했다. 얼마 후 위안스카이로부터 답장이 왔다. "맛있게 잘 먹었소이다"

홍콩과 중국에서의 10여년의 생활 경험이 있는 저자가 중국 음식을 4개의 요리 (광동 / 사천 / 상해 / 북경)으로 구분하여 각 요리의 특징은 물론 대표적인 요리와 그 요리에 얽힌 여러가지 이야기, 또 그 지방의 여러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쓴 일종의 요리 문화서입니다. 그리고 "궁중요리"와 "요리의 아웃사이더"라는 항목을 뒷부분에 추가하여 4대 요리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잘 알려져 있거나 언급할 만한 요리들을 소개하고 있고요.
개인적으로 "요리"라는 것에 관심이 많고 이런 좀 잡학스러운 책을 좋아해서 구입해서 읽어 보게 되었습니다.

위에 언급한 개고기 이야기를 비롯해서 저자거리의 돼지고기 장수가 장원급제를 하는 "급제죽"이야기나 뱀고기 이야기, 거지 닭구이 이야기 같은 에피소드나 손씻는 물, 동파육의 유래 등 실제 역사와 관련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비롯하여 실제로 유명한 요리들의 유래, 그 맛에 대한 평가 및 분석, 유명한 가게에 대한 소개 등 실질적 정보까지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제목 그대로 저자가 중국을 크게 4개 지역으로 구분하여 요리와 더불어 각 지방을 분석하고 소개하는 것이 상당히 재미있고 독특한 발상인데 꽤 그럴 듯해서 즐기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간접적이고 재미있게 우회하며 접근하는 것이 중국이라는 국가의 지방과 문화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네요.

각 요리에 대한 자세한 도판과 조리법이 빠져있는 것은 아쉽지만 (조리법은 아무래도 비밀스러운게 많겠죠?) "맛의 달인"과 같은 작품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상당히 유용하면서도 재미난, 값어치는 충분한 책이라 할 수 있겠네요. 무엇보다 저는 헌책방에서 구입했으니 만족 두배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4/06/02

절벽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점

절벽의 밤 - 4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각 단편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편의 사건과 등장인물이 연결고리를 가지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구조이지요. 마지막 단편은 총 정리하는 결론에 가깝습니다.
단편별로 여러가지 트릭이 사용되며 추리도 많이 펼쳐집니다. 의외의 반전도 있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아이디어가 너무 많습니다. 전개가 억지스러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전개에 포함되었어야 할 내용을 마지막 사진으로 퉁친건 '실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편의에 따른 '반칙'에 가까왔습니다. 그나마 사진이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마지막 단편 뿐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미나게 절벽을 보아서는 안 된다"
구니오는 자살 명소 유미나게 절벽 옆 터널에서 사고를 당했다. 불법 유턴을 하던 차 탓이었다. 사고를 유발한 차 운전자 나오는 구니오를 구해주기는 커녕 현금을 빼앗은 뒤 살해했다.
구니오의 아내 유미코의 옛 연인인 형사 구마지마는 전력으로 사건 수사에 나섰지만, 나오가 살해당했고 동승자였던 히로도 실종되고 말았다. 구마지마는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냈지만, 유미코를 또다른 동승자 마사가 노린다는걸 알고 황급히 유미코의 맨션으로 항했다....


구니오가 사고 당시 죽지 않고 실명했으며, 죽은건 조수석에 있던 네 살배기 아들 나오야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일당이 사건 당시 현금을 훔치려고 지갑을 확인했기 때문에 구니오의 집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추리, 그리고 구니오가 집에 찾아온 히로를 손쉽게 살해한 방법 - 궁도부였던 아내 유미코의 화살을 이용 - 과 범행을 은폐하는 과정도 깔끔하게 진행됩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사이비 종교 '십왕환명회'도 작품 내에서 단순히 들러리가 아닌 제 역할 - 히로 사건 은폐를 위한 즉흥적인 거짓말, 마지막의 사고 등 - 을 충실히 해 주고 있고요.

하지만 구니오가 살아있다는걸 숨기는 방식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리 잘 만들어진 서술 트릭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구니오가 복수를 위해 나오의 차 깜빡이 커버와 동일한 걸 구해 사건 현장 근처에 놓아두고 잠복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어두운 터널에서, 최소 몇십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밖의 깜빡이 커버를 알아챈다? 대단히 큰 덩어리도 아니고 부서진 조각인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설령 나오가 알아채고 차를 세운 뒤 커버를 회수했다 한들, 때마침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는 등 범행에 딱 맞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이 정도 억지가 필요하다면 실명한 구니오가 나오를 명확하게 인지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것 정도는 별 문제도 아니겠지요. 하늘이 나오보고 살해당하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런 설득력없는 내용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중국에서 건너온 초등학생 커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부모님의 방치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환영을 볼 정도였다. 환영 퇴치를 위해 문방구를 찾은 커는 기묘한걸 목격했다. 젊은 남자의 묘한 모습, 안쪽 방 고타쓰 앞에 쓰러지듯 놓여진 발, 뒤섞인 문구류, 얼핏 보인 바닥 얼룩.... 커는 남자가 주인 할머니를 살해했다고 추리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간 문방구의 주인 할머니는 멀쩡했고, 추리를 털어놓은 친구 야마우치도 실망한 듯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서 문방구 할머니의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이 손이 닿는 곳에 어른 문구가,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어린이 문구가 놓여진 상황에서 출발하는 커의 추리는 깔끔합니다. 뉴스를 통해 진짜 피해자가 밝혀지고 범인인 조카와 할머니가 커를 납치하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하지만 야마우치가 자동차 안에 숨어 있다가 커를 구해준다는 결말에 대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야마우치가 왜 이렇게까지 해서 -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 커를 구해주는지도 설명이 없는건 마찬가지고요. 차 안에 숨었다는 것도 마지막에 삽입된 사진으로 살짝 알려주기는 하는데, 본 편에 녹여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반칙으로 보일 뿐이에요. 커가 보아왔던 환영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도 설명되지 않는데, 커가 환영을 본다는 설정보다는 커와 야마우치와의 관계를 더 상세하게 그려내는게 나았을 겁니다. 커 주변을 야마우치가 항상 멤돌았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서는 안 된다"
십왕환명회의 간부 미야시타 시호가 자택에서 목을 멘 사체로 발견되었다. 신참 형사 미즈모토는 또다른 간부 모리야 다쿠미가 그녀를 살해했고, 이를 알아챈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마저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시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는지를 알아내지 못해 고민했다. 그러나 미즈모토는 파트너이자 선배 다케나시와 술을 먹다가 트릭을 간파해내는데...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작품. 미야시타 시호의 방은 제대로 잠겨진 밀실이 아니라 자석으로 '스마트록'을 붙여 임시로 만들어진 밀실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부동산 회사 사장 앞에서 잠겼다는걸 보여준 뒤, 열쇠로 문을 열 때 록을 해제하고, 들어가면서 회수했던 것이지요. 방법 자체는 현실적이에요. 문제는 눈에 뜨이지 않고 록을 회수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실제로 현장에 함께 있던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에게 곧바로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야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또 모리야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않아서 좋은 후더닛, 와이더닛 물이라기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나카가와 도루의 수첩을 조작해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렸고, 진상을 알아챈 미즈모토마저 살해했다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였다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는 합니다만.... 너무 막 나가는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수첩 조작도 마지막에 사진으로 설명해줄 뿐, 앞선 본문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고 자살하려던 구니오는 옛 제자를 만난 뒤 다시 삶의 의지를 찾는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작품. 짤막한 에필로그에 가까우며, 이 작품만 단독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앞서 단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에필로그. 결말답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경찰 내 협조자가 누구인지? 사고를 당한건 누구인지? 히로의 사체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진상은?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사건을 조작한건 누구인지? 미즈모토를 누가 살해했는지? 등 모든 떡밥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라서 첫 사건에서 구마지마의 사고사를 거짓 증언했고, 세 번째 작품 사건에서의 은폐와 미즈모토 살해를 저질렀다는 고백을 선보이는게 핵심이지요.
에필로그라 추리적으로는 별게 없지만, 시력을 상실해서 아내 유미코에게 사건 진상 고백문을 쓰게 했지만, 알고보니 백지였다는걸 마지막 사진 한 장으로 밝히는 반전은 강렬했어요.
 
그러나 다케나시,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의 진범 모리야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마무리되는건 문제에요. 깔끔하게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이 한 편 만으로는 온전한 작품이 아니라서 별점을 주기도 어렵네요. 구태여 준다면 2.5점? 반전만 좋았습니다.

2023/04/01

돌원숭이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1.5점

돌원숭이(THE STONE MONKEY)(개정합본판) - 4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미국으로 불법 밀항을 주선하는 스네이크헤드 중 고스트는 가장 악랄한 인물로 수많은 사건을 저질러 왔었다. 그를 잡기 위해 인터폴 적색 수배령이 내려졌고, 이민귀화국 INS와 연방 FBI, 뉴욕주 수사관 합동 작전이 시작되었다. 자문역으로 참여한 링컨 라임 덕분에 미국 해양 경비대는 밀항선을 발견했으나, 고스트는 배를 밀항선 승객, 선원들과 함께 폭파시키고 탈출했다. 
링컨은 자기가 배의 위치를 알아낸 탓에 승객과 선원들이 희생되었다고 자책하며 고스트 체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신출귀몰한 고스트는 운 좋게 탈출한 승객들까지 죽이려 암약했고, 그 와중에 링컨과 친구가 된 유능한 중국인 공안 경찰 소니 리마저 희생되고 말았다. 하지만 소니는 죽기 직전, 자신만의 방법으로 링컨에게 결정적인 증거를 남겼는데.... 

링컨 라임 시리즈 네번째 작품. 설정은 다른 시리즈들과 동일합니다. 악질이지만 유능한 범죄자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거든요. 이번에는 중국인 불법 밀항 브로커 고스트가 링컨 라임과 대결합니다. 제목의 '돌 원숭이' 부터가 손오공을 뜻할 정도로 중국 관련한 소재와 설정이 듬뿍 담겨있는게 특징이에요. 링컨 라임과 중국 공안 소니 리가 바이주를 마시며 바둑 대결을 벌이는 장면처럼요. 차이나타운에서의 중국인 범죄자 이야기의 클리셰들과는 다르게 중국 문화 혁명, 반체제 인사 등 사회적인 이야기가 가미되어 있는건 나름 진보한 측면이라 생각되고요.

하지만 이런 이국적인 설정 외에는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특히 전개가 굉장히 억지스러웠습니다. 불법 밀항 브로커 정도가 링컨 라임의 상대가 될 수 없기에, 무리하게 스케일을 키운 탓이지요. 예를들어 미국이 아무리 치안이 허술하다 하더라도, 대놓고 살인을 저지르고 - 푸저우통의 회장 지미 마 살해, 고스트를 배신하고 달아났던 제리 탕 살해, 백주대낮에 우씨 일가를 습격하려던 사건, 고스트의 거처였던 고급 아파트에서 창지예치와의 총격전 - 버젓이 도망갈 수 있다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차이나타운 내에서야 그랬다쳐도, 백주대낮의 거리나 고급 아파트에서 손쉽게 탈출한다는건 말도 안돼죠. 
고스트의 정체가 존 성 박사였다는 반전도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렇다면 고스트는 처음에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존 성 박사를 살해한 뒤, 혼다 차를 훔쳐 트렁크에 시체를 넣고 차를 숨기고 난 다음, 의도적으로 죽을 뻔 한 척 하다가 경찰에게 구조된 후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말인데..... 고스트는 뉴욕 한복판에 은신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차로 숨어드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을거라고 수사팀도 이야기하고요. 몰래 뉴욕으로 숨어들어 은신처로 향하면 됐을걸 왜 경찰과 엮여서 정체가 드러날 위험을 감수한단 말입니까? 죽을 뻔 하면서까지 말이지요. 망명이 허용될 정도로 유명한 반체제 인사였다면 누군가 알아채는건 시간 문제였을테고요. 경찰 보호를 받고 난 뒤로도 다른 밀항 승객들과 혹시라도 만나게 되었다면 바로 정체가 탄로났을겁니다. 
고스트가 마지막에 창씨 가족 거처로 향하는 색스와 동행하며 창씨 가족과 경찰을 죽이고 섹스를 납치할 계획을 짜는 것도 어이가 없었어요.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고스트가 가짜 존 성 박사였다는게 바로 드러났을테니까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 체포 시 마지막 결말에서처럼 '콴시'에 따른 석방도 기대하기 어려웠을겁니다. 미국인 경찰을 죽인 외국인 범죄자를 풀어준다는건 가당치도 않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뜬금없었습니다. 고스트가 푸젠성 정치부와 결탁하여 반체제 인사를 밀항을 위장하여 살해해 왔다는 진상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설득력도 있고요. 하지만 미국 해안까지는 온 다음에 살해해서 없애려고 했다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어차피 죽일거였다면 그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어요. 식량과 연료를 소비할 필요도 없고요. 그냥 항구에서 승객들을 모두 살해하고 시체만 처리했다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드래곤 호'의 양심적인 선장과 승무원들을 속이려고? 미국 해안에서 죽였다 하더라도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을까요? 배를 폭발시킨 뒤, 곧바로 승객들을 죽이려 나선 것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혼자 탈출한 뒤, 조용히 죽이면 됐을텐데 미국 경찰이 쫙 깔린 해안가에서부터 총질을 한다는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죠. 실제로 제리 탕의 배신으로 위험에 처했었으니까요. 여러모로 무리수였습니다.

추리적인 부분도 아멜리아 색스의 조사에 따른 링컨 라임의 추리라는 기본 뼈대는 지키고 있기는 합니다. 몇 안되는 단서를 가지고 고스트의 위치를 좁혀나가기는건 볼만하고요. 그러나 결정적 상황은 모두 운과 우연에 의해 발생합니다. 링컨 라임이 활약한건 밀항선의 위치를 추리해 낸 것과, 우씨 일가 부인이 패혈증을 앓고 있을거라고 추리하고 그 행적을 밝혀낸 것 두 가지 정도 뿐입니다. 고스트의 은신처만 해도 어떤 아파트인지까지는 좁혔지만 결국 은신처가 드러난건 창지예치와의 총격전 덕분이었죠. 고스트가 존 성 박사였다는걸 알게된 것도 소니 리가 죽어가면서 돌원숭이 목걸이 흔적을 부여잡았던 덕분이었고요. 소니 리가 이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면, 링컨 라임이 창씨 가족의 거처를 알아냈다 한들 아멜리아 색스의 납치와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캐릭터들도 별로 매력적이지 못합니다. 별로 강력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메인 빌런 고스트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중국인 캐릭터들 모두가 뻔하고 평면적이에요. 소니 리는 외국 독자가 보기에는 독특하다 여길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전형적인 홍콩 영화 속 마초 형사를 따온 캐릭터로 느껴졌습니다. 이른바 '킬링 포인트'를 쌓아가며 죽음으로 이르는 전개도 뻔했고요. 거기에 더해 중국의 격언을 들먹이는 모습은 '찰리 챈'을 연상케 했습니다. 
나름 풍수에 주목하는 등의 활약은 있지만, 이 역시 억지로 끝나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풍수 전문가를 찾다가 고스트와 마주치는건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과했거든요. 애초에 이 시점에 고스트가 풍수 전문가를 찾아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 문화 혁명에서부터 비롯된 고스트의 악행, 창씨 가족의 갈등이라던가, 우씨 일가의 이야기 등은 이야기 전개에도 불필요했을 뿐더러, 불법 이민과 가족에 대한 흔해빠진 담론을 반복할 뿐이라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뭔가 사회파스러운 느낌을 주고자 했던 것 같은데 작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여러모로 점수를 주기 어려운, 평균 이하의 헐리우드 양산형 범죄 스릴러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렇게 하면 깜짝 놀라겠지?" 라는 생각으로 의외의 범인을 드러내는데 촛점을 맞춘 나머지, 다른 부분의 설득력이 헐거워진게 아닌가 싶네요. 앞으로 이 시리즈도 그만 읽어야겠습니다.

2024/09/18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5 - 토마토수프 / 문기업 : 별점 2점

댐피어의 맛있는 모험 5 - 4점
토마토수프 지음, 문기업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전권에서 민다나오 섬을 떠난 시그넛 호는 새로운 동료인 에라스모를 만나 프리타스 섬으로 보물을 찾는 항해를 떠난다. 그러나 폭풍우로 보물 탐사를 포기했고, 해적질과 여행에 질린 댐피어와 일부 동료들은 동인도에 남게 되는데...

이번 권에서는 풀로 콘도르 섬에서 광둥성 남해안을 거쳐, 대만과 루손 사이의 바탄 제도 , 보루네오 섬 남단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다시 수마트라까지의 장대한 항해가 펼쳐집니다. 조금만 더 올라왔다면 '조선'도 볼 수 있었을텐데 약간 아쉽네요.

그런데 요리에 관련된 내용이 거의 없어서 실망했습니다. 이래서야 '맛있는 모험'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중국 차, 황주 등이 등장하기지만 '차'나 '술'을 요리라고 부르기는 힘들지요. 이미 완성된 제품이기도 하고요. 대왕 조개살 요리는 전권에서 등장했었던 해산물 요리들과 다르지 않아 식상했고, 바탄 제도 원주민들이 만든 염소가 씹어 삼킨 위장 안의 풀을 삶은 것과 다진 물고기 살을 섞은건 요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두 가지 정도만 인상적이었는데, 첫 번째는 매너티 고기입니다. 맛있다는게 신기했거든요. 하지만 그냥 삶은 고기 말고 좀 더 요리같은 요리를 보여주는게 좋았을 듯 합니다.
두 번째는 '메로리'입니다. 판다누스 나무열매를 익힌 뒤, 과육을 깎아내 반죽하여 굳힌 것입니다. 맛은 잘 모르겠지만, '건망고'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 외에도 '다마르'라는 나무 수액을 이용한 역청 만들기같이 재미있는 정보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 원주민들 - 바탄 제도 원주민의 생활과 식습관, 오스트레일리아 어보리진의 무소유(?) 삶 등 - 도 잘 묘사되고 있고요.
댐피어가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배를 버린 뒤, 함께 낙오한(?) 동료들과 일종의 요트로 먼 수마트라로 향하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폭풍이 다가오고 있는건 분명한데, 과연 어떻게 될지? 다음 권을 읽을 수 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맛있는 모험' 부분이 부실하니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무리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2/18

책과 열쇠의 계절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책과 열쇠의 계절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요네자와 호노부청춘 학원 추리 단편집. '고전부'나 '소시민' 시리즈와 비슷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탐정의 역할입니다. 이 시리즈는 두 주인공인 호리카와와 마쓰쿠라가 각자 추리를 펼치며 서로를 보완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약간 버디물스러운 느낌도 들어요. 뛰어난 관찰력과 독특한 발상의 추리력을 갖춘 호리카와는 뻔한 고등학생 탐정 캐릭터인 반면, 모든걸 의심하면서 추리를 시작하는 마쓰쿠라의 독특함은 나쁘지 않았고요.

또 두 주인공이 도서위원이라서 대부분의 이야기에 주제가 되는 책이 등장한다는 것도 차이점인데, 저 역시 독서 애호가(?)인지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일상계로 한 획을 그은 작가답게 평범한 일상계로는 우수한 시리즈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913><913>>
도서위원 호리카와 지로와 마쓰쿠라 시몬은 선배 우라가미로부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금고를 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과거 둘이 에도가와 란포의 <<흑수조>> 속 암호를 풀었던 모습을 눈여겨 보았던 탓이었다.
일요일, 우라가미 선배 집에 방문한 둘은 할아버지 서재 방에 놓여져 있었던, 어울리지 않았던 책들이 단서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마쓰쿠라는 정보를 바로 공개하지 않고 따로 조사가 필요하다며 호리카와와 밖으로 나온 후, 그가 생각했던 의심을 털어놓는데...


등장하는 책은 많지만, 중요한건 할아버지가 남긴 단서가 되는 책들

마쓰쿠라의 의심은 우라가미 선배가 후배 둘에게 금고를 열어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무엇인지에서 시작됩니다. 가족이 정당한 유산 상속인이라면 금고를 여는 전문가를 부르면 됐으니까요. 그래서 마쓰쿠라는 우라가미 선배와 선배의 가족은 금고를 그렇게 쉽게 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추리합니다. 선배 집에서 대접받았던 차는 시판차와 똑같은 맛이었는데 그걸 끓여서 따로 찻주전자에 내 놓은 이유, 화장실을 간다고 했을 때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 이유 등 기묘했던 행동은 그 집이 선배 가족의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찻잎이 어디있는지는 모르지만 살고 있는 척을 해야 해서 차를 끓여 내 놓았고,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렸던건 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까봐 걱정했던 것이었지요.
할아버지의 단서는 이상한 책의 분류 번호에 대한 것으로, 그것을 통해 금고를 열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를 이용하여 선배 가족의 정체를 밝히는 작전을 펼친 것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책 4권의 3자리 분류 번호를 50음도로 변환하면 모두 6자, "타스케테쿠레 (살려줘)"라는 말이 된다고 조작하는 방식으로요. 이 작전으로 선배와 선배 가족의 눈을 돌린 틈에, 마쓰쿠라가 집 안을 조사하여 노인을 발견하고 구해내게 됩니다.
금고 안 내용물은 할아버지 그림과 가족 앨범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눈에 뜨이기는 합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던건 서재방에 단서가 있고 그건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허나 서재방의 책 중 다른 책들과 사뭇 다른 책이 있다는건 어른이 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금고 번호가 도서 분류 기호라는건 어른이 된다고 알 수 있는건 아니고요. 즉 할아버지가 말했던 단서는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선배 가족이 금고를 열기 위해 후배를 부른 것도 이상했어요. 저 같으면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는 정도로 끝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은 아쉬웠습니다.

<<록 온 로커>>
도서위원 컴비 둘은 함께 미용실을 찾았다. 함께 가야 40% 할인이 되기 때문이었다.

점장이 "귀중품은 '반드시' 지참하실 것"을 말했고, 이걸 이발 중 이야기하는걸 저지했다, 그리고 곧 종료 시간이라고 말하고 난 뒤 염색이 필요해 보이는 손님을 받았다는 등의 단서를 조합하여 마쓰쿠라는 미용실에 최근 도난 사건이 있었고, 범인을 잡기 위해 점장이 함정을 팠다는 추리를 펼칩니다. 호리카와는 마쓰쿠라의 도움으로 둘의 예약을 받았던 곤도가 범인이라는걸 알게 되고요. 이 작전을 모르는 사람을 점장이 의심하고 있으니, 그걸 모르고 예약을 받은 곤도가 범인이라는 추리로요. 이는 결국 사실로 밝혀집니다.
마쓰쿠라의 추리에 이어 호리카와의 추리가 이어지는 티키타카가 볼만했고, 마지막에 범인 곤도가 도주하는걸 저지할 수도 있었지만 나서지 않았던건 소시민 시리즈와 비슷한 감성을 느끼게 해 주어서 좋았습니다. 평범한 일상계로는 적절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일본의 미용실 모습은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는데 비해 남자 둘이 미용실을 가는게 굉장한 금기인 것처럼 묘사되는게 신기했습니다.

<<금요일에 그는 무엇을 했나>>
기말고사가 진행되고 있는 중에 후배 도서위원 우에다 노보루가 호리카와와 마쓰쿠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주 금요일, 학교에 누군가 침입하여 교무실 앞 창문이 깨졌는데 그걸 보고 학생지도부 요코세 선생이 노보루의 형인 불량 학생 우에다 쇼가 시험 문제를 훔치려 했다고 의심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요코세 선생은 이른바 '명탐정' 같은 사람으로, 무슨 사건이 터지면 무조건 학생 누군가를 아무런 근거없이 범인으로 지목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에다 쇼가 그 날, 밤 늦게 돌아왔는데 무슨 일을 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는 점이었다...
둘은 우에노 쇼가 결백하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형제가 같이 쓰는 방을 수색하는데...


등장하는 책은 <<파랑새>>. 유리창을 깬 원인이기도 한 새와 연결되는 장치. 헌책방에서 산 이름을 알 수 없는 애장판 만화도 중요한 단서 중 하나. 그 외에도 노보루가 관심있어하는 책으로 나니아 연대기를 비롯한 판타지 시리즈가 언급됨.

추리를 통해 밝혀낸 우에다 쇼의 알리바이는 가족과 별거 중인 아버지 병문안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있어서 그 사실을 숨겼던 것이지요.
우에다 쇼의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라이켄'이라는 라면집 쿠폰을 찾아낸 뒤, 이상할 정도로 좁았던 집 등의 단서를 통해 아버지가 별거 중이라는 노보루의 답변을 끌어내어 우에다 쇼의 그날 행적을 추리해내는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완벽한 일상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 사건을 맡아서 끌어가는 과정과 결말이 다소 석연치 않습니다. 우에다 노보루의 부탁부터 억지스럽습니다. 왜 호리카와에게 부탁했는지 모르겠어요. 작중에서도 우에다 혼자서는 도저히 알리바이를 찾을 수 없어서 그랬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호리카와에게 부탁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호리카와가 딱히 알리바이 찾기로 이름을 떨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친한것도 아니니까요.
호리카와가 부탁을 선뜻 받아들인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에초에 우에다 쇼는 증거가 집에 있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설령 부탁을 받아들인다 해도 집을 뒤지느니 우에다 쇼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게 더 나은 해결책이었어요.

이에 대해 마쓰쿠라의 추리 - 우에다 노보루가 형의 퇴학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도 좁고 어차피 형은 아버지랑 살 터였기에. 그래서 알리바이 증거를 찾아내서 없애려고(형을 퇴학시키기 위해) 호리카와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호리카와는 인간 관계가 깨져도 무방한 사람이었으니까 - 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형의 퇴학을 바란다면 알리바이를 증명하지 못하는 현재 상황이 이상적입니다. 구태여 알리바이를 찾아내고, 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늘린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애초에 학교에서 퇴학당할 정도의 위기에 처한다면, 증거 유무와 관견없이 병문안 당사자였던 아버지가 가만히 있지도 않았을테고요. 모든 상황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마쓰카와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한 주장으로 보이지만, 이전에 보여줬던 추리력과 상반될 정도의 비합리적인 주장이라서 오히려 캐릭터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리창을 깬건 마쓰카와였다는 결말도 별로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없는 책>>
3학년 선배 고다가 자살한 뒤, 자살한 선배의 친구 하세가와가 도서실에 나타났다. 그는 고다가 책 사이에 유서를 넣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라며, 빌렸던 책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둘은 하세가와의 빌린 책에 대한 언급을 통해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걸 알아채는데....


등장하는 책은 이와나미 문고에서 나온 쇼펜하우어의 <<자살론>>.

극히 적은 정보만 가지고 원하는 책을 찾아준다는 이야기는 서점이나 도서관이 무대인 작품에서는 굉장히 많습니다. 아예 이런 내용이 핵심인 <<서점원 하야미>>라는 만화가 떠오르네요. 이번 이야기는 이런 류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반전과 함께 여운도 남기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하세가와가 찾아달라고 하며 알려준 핵심 정보는 고다가 책을 읽다가 덮었는데 책 등이 보였고, 밑에 바코드 스티커가 있었다는 겁니다. 고다가 좋아했던건 소설책이고요. 그런데 현장 조사를 통해 하세가와는 고다의 오른쪽에 있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일본의 소설책은 대부분 세로쓰기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므로, 책을 읽다가 덮으면 하세가와의 위치에서 책 등과 스티커를 함께 보는건 불가능합니다. 즉, 하세가와의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이지요.
마쓰카와는 고다 선배의 유서를 날조하려는 속셈이었다고 하세가와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호리카와는 고다 선배의 유서는 육필이라 위조할 수 없고, 오히려 유서를 받은 뒤 친구가 자살한 탓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은밀하게 유서를 드러내려고 했던 거라고 추리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묵직한 내용에 추리적으로도 좋았으며, 두 주인공의 차이를 강하게 드러내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람의 선의를 믿지 않고, 무조건 나쁜 의도일 것이라 짐작한 마쓰카와의 잘못과 이를 반박하는 호리카와의 말이 대미를 장식하거든요.
선배 교실에 가서 불필요한 연극을 할 필요는 없었지만 문제는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옛날 이야기를 해줘>>
마쓰카와는 호리카와에게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숨겨두었던 현금을 함께 찾아보자고 부탁했다. 그간 호리카와의 추리력을 눈여겨 보았던 탓이었다.
호리카와는 마쓰카와가 내 놓았던 과거의 단서들를 함께 검토하다가 과거 마쓰카와 가족에게 차가 한 대 더 있었다는걸 추리해내었고, 둘은 결국 그 밴을 찾아내는데...


여러 책이 등장하지만 핵심은 아버지 밴 안에 있었던 마쓰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초점".

보물찾기 이야기인데 마쓰카와가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호리카와가 잡아낸 마쓰카와의 이야기 속 단서 - 동생이 멀미를 했다는 것 - 라는 착안점은 좋았습니다. 그때까지 마쓰카와는 당시 탔던 차가 렌트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의 멀미는 담배 냄새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담배 냄새가 나는 차를 렌트할리가 없었다는걸 깨닫게 되거든요. 결국 그 차는 빌린 차가 아닌 아버지 차였다는 추론에 이르게 됩니다. 또 이 추리는 자동차로 여행을 가다가 동생이 심하게 멀미를 했었다는 별게 아닌 추억담이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는 점과 호리카와는 마쓰카와가 잊고있던 기억을 떠오르게끔 도와주는 정도의 도움을 줄 뿐이라는 점에서 완벽한 일상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뒤 차를 찾아내는 과정, 그리고 차 속에서 발견한 열쇠의 '501호'가 어디인지를 추리하는 과정도 그럴듯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책'이 중요 단서로 사용된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차 안에 굴러다니던 헌 책이 도서관 '제적본' 책이라는걸 알아낸 뒤, 도서관이 위치한 도시의 5층 건물을 검색한다는 것으로 도서위원인 아이들의 특기가 발휘된 것은 물론이고, 그 도시는 차로만 갈 수 있다는 등의 설정이 덧붙여져 있어서 여러모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일상계 보물 찾기로는 더할나위 없긴한데 딱 한가지 억지가 있습니다. 주차장에 주차해 둔 차라면 당연히 주차비를 냈을테니, 주차비를 내는 누군가는 차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누군가가 그렇게 했던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 그 누군가가 몇 년 동안 차를 뒤져 그 안의 보물을 가져가지 않았을리도 없겠지요. 즉, 자동차가 주차장에 장기 주차되어 있었다는게 밝혀진 순간 보물찾기는 끝났어야 마땅합니다. 이걸 바로 떠올리지 못한건 이상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친구여, 알려 하지 마오>>
호리카와는 도서관 검색을 통해 마쓰카와의 아버지가 돈을 도둑맞은 피해자가 아니라 돈을 훔쳤던 가해자였다는걸 알아낸다. 단서는 마쓰카와 시몬, 레이몬 형제 이름과 이에 대해서 마쓰카와가 '3/5이다'라고 했던 말이었다. 시와 예 (레이)는 중국 고전 5경에서 따왔으니 아버지 이름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리하여 아버지 이름을 검색했던 것이다.

호리카와도 전편에서 독자가 가졌던 의문을 그대로 가지고, 자신의 추리 결과로 도서관에서 기사를 검색하게 됩니다. 자동차가 월 정액 주차장에 남겨져 있었던건 누군가 돈을 계속 냈다는 의미라는 추리는 저와 같은데요, 호리카와는 왜 돈을 계속 냈을까?에서 또 다른 추론을 얻어냅니다. 주차장에 놓여진 차를 처분할 수 없었던건 그 안의 열쇠 때문이었고, 열쇠를 지금 당장은 회수할 수 없었다는 처지였다고요.
그리고 줄거리 요약처럼 '오경'의 한자를 통해 마쓰카와 아버지 이름을 추측하여 검색한 결과, 마쓰카와의 아버지가 절도범이었다는걸 알게됩니다. 즉, 마쓰카와의 아버지는 지금 구속 수감 중이라 열쇠를 회수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여기까지의 추리는 기가 막힌데 그 뒤는 특별히 추리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뒷부분은 마쓰카와가 돈이 필요한 이유, 그리고 그에 대해 반론하는 호리카와 사이의 자기 주장 대결이 대부분이에요.
마쓰카와가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평소에 돈을 아끼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 이유 등 약간 사회파스러운 분위기가 눈에 뜨이기는 하지만, - 약점이란 건 그런 거야. 약점 하나로 세상은 변해….. - 어차피 고등학교 2학년 생이 하는 이야기니 그렇게 깊이있는 이야기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호리카와 역시 이상론만 이야기해 줄 수 있을 뿐이고요.
이야기는 마쓰카와가 그 돈을 찾으러 후미쿠라 정에 가서 건물들을 뒤졌는지, 그래서 돈을 찾았는지 밝혀지지 않고, 평범한 도서위원으로 마쓰카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호리카와 시점에서 마무리됩니다. 아무래도 마쓰카와가 돈을 찾으면 더 이상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을텐데, 어떻게든 마쓰카와가 평범한 도서위원으로 돌아와 이야기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추리도 괜찮았고, 대단원의 막을 장식하기에는 나무랄데 없는 깔끔한 전개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09/04/21

宮崎駿の雜想ノ-ト (미야자키 하야오의 잡상노트) / 강철의 대지 : 별점 4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미야자키 하야오가 1984년부터 1992년까지 "모델 그래픽스(Model Graphix)" 에 연재했던 일러스트-컬럼을 모은 작품집. 일반 팬들에게는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의 원작이 되는 짤막한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책이죠. 개인적으로 어떻게 입수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수년전에 구입했지만 최근 다시 뒤적이고 필받아 몇자 적어봅니다.

전부 13개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모든 이야기가 전쟁 관련 이야기이고, 다루고 있는 소재도 광범위해서 2차대전 소사 (小史)는 물론 스페인 내전이나 1차대전 직후에 대한 이야기, 중국 항공전에 대한 이야기 등 디테일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는 등 모든 부분에서 밀리터리 매니아로서의 미야자키 하야오씨의 취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차대전 직후 독립했다가 오스트리아에 병합되어 사라진 보스토니아라는 나라의 국왕이 꿈꾸었던 무적 공군, 그리고 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를 다룬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외의 이야기들도 모두 좋은 이야기였어요^^ 

미야자키 하야오씨의 수채화 일러스트와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정감있고 따뜻한 일러스트와 글이 가득한 어른을 위한 동화책 같은 작품으로, 잔인한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미야자키씨의 일러스트와 손으로 쓴 소박하고 담담한 글들이 어우러져 쾌활하고 행복한 분위기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 책을 뒤적일 때 마다 놀라게 되는 대단한 점이죠. 제가 워낙 좋아라 하는 작품이기도 해서 별점은 4점입니다.

모델 그래픽스 판형이라 어렵겠지만 어떻게든 디자인과 내용을 잘 편집해서 이전에 읽었던 "슈나의 여행" 처럼 디자인을 일신한 문고본으로 다시 출간되면 좋겠는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


강철의 대지 - 6점
문효섭 지음/이미지프레임(길찾기)

덧붙이자면, 국내 만화작가 문효섭의 "강철의 대지" 는 이 "잡상노트"의 영향을 굉장히 짙게 받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메카닉에 있어서 참신한 해석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2차대전을 중심으로 한 밀리터리 색채가 짙은 세계관에 수채화로 이루어진 만화 방식과 동물들로 이루어진 군인들 등 설정의 대부분이 미야자키 하야오씨의 판박이로 보이거든요. "강철의 대지" 역시 좋은 작품이고, 작가의 굉장한 노력이 느껴지는 수작임에는 분명하나 솔직히 이러한 점 때문에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들죠. 별점은 3점입니다.

책의 디자인과 장정은 모두 아주아주 훌륭한 수준으로, 이러한 퀄리티로 "잡상노트"의 번역본이 출간되어 두 작품의 정당한 비교가 이루어진다면 좋겠네요.

2015/06/22

13.67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점

13.67 - 6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100여페이지 정도 분량의 중단편 6편이 수록된 연작 중단편집. 제목의 13.67은 2013년에서 시작하여 1967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적 배경을 의미하고 있죠. 탐정역의 관전둬가 전편에 등장할 뿐더러, 뤄 샤오밍이나 탕 아저씨, 범죄자 스씨 형제 등 등장인물들이 여러개의 작품에 등장하는 등 연작, 시리즈 느낌이 강합니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에서 보기 힘든 중국 추리소설이라는 점인데, 단지 이색적이기만 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것에 놀랐습니다. 중국 추리소설 수준도 정말 높구나 싶어 감탄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탐정역인 '천리안' 관전둬의 뛰어난 추리력과 사소해보이던 단서들의 조합으로 진상이 밝혀지는 정교하게 짜여진 이야기 구성도 좋지만, 진상이 놀랍기 때문에 흡사 반전 스릴러를 읽는 듯한 짜릿함을 선사해준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중국 작가가 쓴 중국 추리소설이기에 선보이는 중국 - 홍콩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에요. 특이한 계급명과 CIB를 비롯한 중안조, 반흑조, 특별 직무대, 비호대와 같은 다양한 부서명에 1호 (경찰 최고위인 경무청장의 속칭), 장작 (제복 문양)같은 중국 - 홍콩 경찰 관련 용어 및 은어들, 탁가, 고혹자, 파파라치, 다취안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범죄자), 도사 (마약중독자), 일루일봉 (홍콩 특유의 매춘업소) 과 같은 범죄 관련 은어, 호루라기를 분다 (동원 가능한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한다)나 책에 들어간다 (감옥에 간다), 저수지를 경비한다 (한직으로 밀려난다)와 같은 홍콩 속어, 은어로 탄산수를 "네덜란드 음료수"라고 부른다거나 광둥어로 농땡이부리는 사람을 사왕이라고 한다는 등의 묘사가 그러합니다.

실존하는 맥퍼슨 스타디움, 퀸 메리 병원, 프린스 에드워드 서로, 퉁초이가 (여인가) 등 몽콕의 거리, 그레이엄가 시장, 카오룽 거리와 같은 이국적 풍광 역시 가득하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 있습니다. 일단 탐정인 관전둬의 캐릭터가 큰 매력이 없다는 점이 그러해요. "천리안" 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능한 경찰로 한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고, 발자국만 봐도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다는 천재이지만 사생활에서는 구두쇠 수준으로 알뜰하고 정리정돈을 잘 못한다 라는 식으로 캐릭터를 부여하기 위한 묘사는 제법 되기는 하나 특별히 와 닿지도 않고, 내용과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았거든요. 또 몇몇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으로 짜여져 있기도 합니다. "죄수의 도의" 편이 대표적이죠.

허나 단점은 사소할 뿐, 부담되는 분량임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여러모로 자극도 많이 되었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새로운 추리 소설을 읽기 원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저와같이 80~90년대 홍콩영화 최 전성기 팬이시라면 더 즐겁게 감상하실 수 있을 것 같네요.

책 소갯글을 보니 영화가 나온다고 하는데 꼭 보고 싶어집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흑과 백 사이의 진실"

펑하이 그룹의 총수 위안원빈 살인사건 해결을 위해 담당인 뤄 독찰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사부 관전뒤의 병실로 사건 관계자들을 소집하는 것. 이유는 관전둬가 사건해결 100%를 자랑하는 명탐정이지만 간암말기로 혼수상태에 빠졌기 때문으로 병원에서 뇌파를 읽는 특수한 장비를 이용하여 관계자들에게 사건에 대해 듣고 그 자리에서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관전둬의 추리를 통해 단순 강도사건인줄 알았던 사건이 위씨 가문 내부인의 소행이라는 것, 그리고 사건 현장에 남겨진 증거들 - 테이프, 다이잉 메시지가 없는 이유, 흉기인 작살에 대한 이상한 사실 등 - 을 통해 아들 위용렌이 범인임이 밝혀진다.

그러나 뤄 독찰은 위용렌 뒤에 고용인 탕 아저씨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체포한다. 탕은 경찰서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에서 가설임을 전제로 사건의 진짜 동기와 위용렌을 조종한 방법 등을 낱낱이 밝힌다. 그를 옭아맬 증거는 전혀 없는 상태. 그러나 뤄 독찰은 탕이 관전둬를 살해하는 현장을 촬영하여 그를 관전둬 살해범으로 체포하게 된다.

2013년을 무대로 한 첫 이야기. 그동안은 링컨 라임이 안락의자 탐정의 최고봉이라 생각했는데 그를 뛰어넘는 존재가 나왔습니다! 이제는 아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탐정이거든요.

이런 설정은 좀 작위적이고 웃기지만 추리의 흐름은 괜찮습니다. 바닥이 어질러져있지만 침입한 흔적은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 용의자를 특정하는 초반부, 위씨 가문의 무남독녀 위첸러우에 관련된 어두운 과거가 드러나는 중반부, 테이프와 작살총, 다이잉메시지가 없는 상황 등을 통해 범인을 확정하는 후반부까지 모두 합리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안락의자 탐정물이기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도 공정한 편이고요.

무엇보다도 탕 아저씨가 진정한 흑막이며 사건의 핵심 동기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이 인상적이었어요. 위용롄의 설득력없는 동기에 비해, 설득력은 물론 드라마까지 갖춘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위용롄을 조종할 수 있었던 이유도 충분히 설명되고요. 아울러 뤄독찰이 모든 것을 꾸민 것이었다는 것도 앞서 말한 작위적인 설정을 잘 포장하고 있어서 꽤 괜찮았어요.

그러나 탕이 관전둬를 살해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이 영 별로네요. 그가 직접 나서서 관전둬를 살해할 이유가 없거든요. 본인 스스로 말했듯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인데 뭐하러 추가 범행, 그것도 경찰을 살해하는 범행을 저질러 가며 뒷처리를 해야 했을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 죽이지 않아도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고 그의 추리도 결국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가설이자 추론에 불과할텐데 말이죠.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 사족만 없었어도 별점 3점이상은 충분했을텐데 아쉽습니다.

"죄수의 도의"

잘 나가는 엔터회사 사장이지만 실상은 흑사회 보스인 줘한창을 검거하려는 뤄샤오밍은 실패만 거듭한다. 그러던 중 줘한창 회사에 소속된 신인가수 탕린이 괴한에게 습격당하고 살해당하는 동영상이 배포되는데....

줘한창을 잡아넣기 위해 암흑가 도의를 굳게 지키는 경쟁 조직 보스 런더러의 입을 열게 만든다는 작전이 그려지는 작품.

솔직히 여러모로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특히 죄수의 딜레마가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영 모르겠어요. 죄수의 딜레마가 소용이 없는 암흑가 도의가 관련된 특수 상황에 대한 것은 알겠지만 런더러가 입을 여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데 말이죠. 또 탕린이 사실 줘한창에게 복수를 다짐한 전 정보원의 딸이라는 설정도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과거 가쉽으로 접해보았던, 암흑가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홍콩 연예계의 이면을 그린 점은 괜찮았지만 평작 이상의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가장 긴 하루"

최고의 지능범인 스번톈의 탈옥 사건과 시장 대상의 무차별 산성액 투척사건이 한꺼번에 벌어진 날, 모든 사건을 꿰뚫어 본 관전둬는 한번에 사건을 해결한다.

스번톈이 저우샹관과 바꿔치기 되어 있다는 진상도 기발하지만, 이를 밝혀내는 추리도 합리적입니다. 스번톈 탈옥에 징교원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리는 쉽지만, 작중 등장하는 번호표가 뜯겨진 죄수복, 도로에서 발생한 사고, 산성액 투척 사건이 벌어진 시간과 저우샹관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상황, 응급처치에 대한 증언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모두가 중요한 추리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스번톈과 대면한 관전둬가 그를 옭아매는 장면도 아주 통쾌했고요.

무엇보다도 '인구밀집형 도시가 무대인 탓에 설득력이 생기는' 작품의 대표적인 예라 더 주목할만 합니다. 탈옥 해 봤자 더 큰 감옥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누군가 죽었을 때 누구라도 조그만 의심을 품으면 법망을 벗어나기 쉽지 않다는 홍콩만의 상황을 기본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홍콩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잘 표현한 작품이지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4점. 홍콩 추리문학계의 높은 수준을 짐작케 하는 좋은 작품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으로 꼽겠습니다.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스케일이 큰 만큼 영화화에도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영화로도 보고 싶네요.

"테미스의 천칭"

흉악범 스씨 헝제를 체포하기 위해 경찰은 스번성이 머무는 은신처 주위에 잠복한다. 그러나 일당이 도주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잠복 중이던 TT가 이끄는 경찰들이 그들을 체포하려 나서고, 총격전 끝에 범인은 모두 사살하지만 인질이 된 시민이 모두 죽는 참사가 발생한다.

이후 경찰내 내통자가 있을 것이라는 단서가 발견되고 사건을 지휘하던 가오랑산이 TT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퍼지는데...

홍콩 영화에서 봤던 악당과의 총격전이 유감없이 펼쳐지는 작품. 봉쇄된 주상복합(?) 건물에서의 활극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추리적으로도 인상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TT가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이라는 진상도 놀랍지만 동기가 합리적으로 그것을 끌어내는 추론 역시 타당하거든요. 몇몇 사소해보이는 대사에서 단서를 끌어내는 관전둬의 활약이 빛을 발하거든요. 아울러 전작의 스번톈과 필적하는 강적 TT와의 두뇌 싸움도 돋보였습니다. 무선 발신 시간과 총격전 시간을 조종하는 트릭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그러나 문제도 명확합니다. 관전둬의 추리에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죠. 때문에 증거를 조작하면서까지 벌이는 관전둬의 협박(?)이 그리 와닿지 않기도 합니다. TT가 총탄이 바꿔치기 당했다고 우겼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잘 모르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공간"

염정공서에 근무하는 영국인 그레이엄 아들 유괴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염정공서가 홍콩 경찰의 부정부패를 캐고 있었기에 경찰 조직과의 마찰이 있다는 당시 홍콩의 시대적 배경을 작품 전편에 깔고 있습니다.

유괴물로 높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지금 보아도 흥미진진한 몸값 전달 방법이 그 백미입니다. 지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금괴로 바꾸라는 지시를 하는 것, 혹시 모를 탐지기를 무효화하기 위해 수영장 잠수를 지시하는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시대에 적합했던 수사 현실을 반영한 완전 범죄 계획이라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범인이 몸값 회수에 실패하는 결정적 이유인 주머니의 지퍼 고장 역시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고요. 홍콩에 실존하는 여러가지 공간을 활용하여 현장감이 높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 생각됩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아서, 관전둬가 사간의 진상을 깨우치는 모든 단서가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될 뿐더러 반전도 괜찮습니다. 유괴는 조작된 것이었고 실제로는 집 금고를 열고 서류를 훔쳐내는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는 것인데, 당시 시대 상황과 맞물린 좋은 동기였습니다.

허나 경찰이 연류되어 있었다면 더 현실적이고 쉬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 운과 우연에 많이 기댄 계획이니까요. 특히 리즈는 상근 유모이기에 열쇠를 복제할 기회는 찾다보면 분명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사건을 키운건 쉽사리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시대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을 수도 있지만 우리와 같은 이국(異國) 독자들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드니까요.

아울러 관전둬가 직접 서류를 훔쳐낸 뒤 벌이는 공작 역시도 이해는 잘 되지 않더군요. 차라리 유괴 사건이 조작된 것임을 밝히고 주모자를 체포해 나가는게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유괴 자체는 굉장히 잘 그린 작품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빌려온 시간"

1967년, 영국 정부와 홍콩인의 충돌 및 좌익 인사들의 테러 등이 벌어지던 시대.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사는 화자인 "나"는 "아칠"이라는 순경과 함께 좌익 테러리스트들의 폭탄 테러를 막기 위한 모험에 뛰어드는데...

1편의 악당 탕 아저씨가 화자로, 관전둬가 아칠이라는 순경으로 등장하는 작품. 화자인 "나"의 추리력과 활약이 비상해서 이 친구가 관전둬인지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여튼, "1번"이라는 말 자체에 주목하여 '페리선에서 영국인이 타지 않았다'는 답변을 통해 1번 차만 페리로 옮기며 운전사는 중국인이었다는 상황 설정이 돋보입니다. 당시 홍콩 거리를 차와 오토바이를 활용하여 질주하는 묘사 등에서 스케일 큰 모험 활극 느낌이 들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크게 눈여겨 볼 부분이 없고, 시대 상황에 따른 정치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딱히 감흥은 없었던 평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7/09/15

빨간 고양이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 단편집) - 정태원 편역 : 별점 4점

빨간 고양이 - 8점
니키 에쓰코 외 지음, 정태원 옮김/태동출판사

이 책은 1회, 1948년 부터의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한 단편들을 정태원 선생님이 번역하신 책입니다. 나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구입 의욕에 불타던 단편집이었지요. 출간 즉시 구입, 완독하였습니다. 그만큼 저같은 일본 추리 소설, 그리고 단편소설 매니아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책입니다. 국내에 첫 소개되는 작가도 많고, 유명하지만 소개되지 않았던 걸작도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물론 아토다 다카시의 "손님"이라던가 니키 에쓰코의 표제작이기도 한 "빨간 고양이", 구사카 게이스케의 "휘파람새를 부르는 소년"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이미 접한 작품도 있지만, 제 기준으로는 열 여섯 편의 수록작 중 세 편에 불과해서 납득할 만 했습니다. 다 좋은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선정된 작품들은 괴이한 분위기의 "해만장 기담"이라거나 대하 역사물 같은 "매국노" 등 작품의 스펙트럼이 무지하게 넓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추리작가 협회상 수상작들이니 만큼 전부 추리소설들이기는 합니다.
또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풍취가 넘치는 작품이 많다는 특징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슨 상이라는 걸 타려면 문학적으로도 어느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테니 당연하겠지만요. 이런 부분은 저같은 고전 트릭물 애호가에게는 추리적으로 약간 부족해 보여서 조금 아쉽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덕분에 보다 폭넓은 층에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부디 널리 알려져서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뒷부분 해설을 보니 2부도 기획중이던데 2부 출간을 위해서라도 꼭이요!

하여튼 전체 별점은 4점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지만 가장 만족했던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유명한 걸작 "돌아오는 강의 정사 (회귀천 정사)" 였습니다. 일본 시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독특한 이야기는 역시 명불허전이더군요. 비록 일본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며 그 풍취를 많이 잃었다 하더라도 걸작은 역시 걸작이구나 싶었습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 좋은데 좀 취향을 탈 것 같은 작품들은 몇개 있긴 했습니다.

아울러 책의 내용말고 다른 점을 좀 짚어보자면 오탈자가 가끔 있는 편이라 초판 이후에는 수정되었으면 하고, 책의 두께도 엄청난 편인데 양장으로 출간되어 무게를 가중시키는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폰트를 좀 줄여 두께를 줄이고 양장대신 평범하게 제작하여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말이죠. 과거 다른 태동 출판사의 책들 수준의 크기와 가격이었더라면 만족도가 훨~씬 높았을텐데 좀 아쉽습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초승달 - 기기 다카타로

부유한 호소다 에이스케와 아야코 부부는 30살이 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야코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아야코 집안에서 살해 의혹을 들먹이며 변호사를 통해 위자료를 요구해 왔다. 사건의 진상은?

1948년의 첫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단편상 수상작입니다. 정태원 선생님 해설을 통해 작가가 작품에서의 문학적인 부분을 굉장히 강조했던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작품 역시 순문학적인 정취가 물씬 풍깁니다. 사실 트릭이라는 것이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라 본격물로 보기에는 힘들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무척 높다는 느낌을 전해 주네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짤막한 단편이 본편보다도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뭔가 환상특급 같은 느낌을 주었거든요.

2. 해만장기담 - 가야마 시게루

대 부호인 쓰가모토 박사는 지상에 지옥을 구현하였다는 해만장이라는 저택으로 유명했다. 박사의 외아들 고비오의 생일파티가 해만장에서 있던 밤, 박사의 딸인 마야와 고비오가 엽기적인 방식으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고지라의 원작자인 가야마 시게루의 작품으로 1948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가야마 시게루는 전에 "넹고넹고"라는 환상문학적인 작품을 이미 접해보긴 했는데, 이 작품 역시 설정 자체가 약간은 허구에 근거하고 있어서 정통 추리물보다는 환상 추리 문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토대로 구현된 세계관은 압권입니다. 변격물과 정통파의 중간지점쯤에 위치했다고나 할까요? 과학적으로 뭔가 있어보이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실제 생물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트릭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가의 지나치게 장황한 묘사는 부담스럽습니다.

3. 눈속의 악마 - 야마다 후타로

다마에라는 아름다운 무용수에게 반한 의대생 다치바나는 자신의 친구였던 부자 가타쿠라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타구라가 의처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뒤, 다치바나는 우연히 알게된 다마에의 비밀을 통해 의학적 지식을 활용한 음모를 꾸미는데... 

유명한 고전 일본 추리작가 야마다 후타로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지만 작품 자체도 명불허전! 특히 예전 읽었던 "마지막 인사"에 비교해 본다면 추리적 요소가 많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순전히 다치바나의 1인칭. 그것도 서간문 형식으로만 구성된 전개 방식도 독특하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새로왔을 의학적 트릭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심리를 잘 이용한 교묘한 트릭이라서 마음에 드네요. 

4. 허상음락 - 야마다 후타로

음독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유미코는 시동생 우스케에게 치아키 의사가 있는, 자신이 과거에 근무했던 병원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다. 치아키 의사는 진료 중 유미코의 몸에 드러난 수많은 상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데... 

위의 "눈속의 악마" 보다도 작가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작품은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탐미주의적 문학관이 짙게 옅보이는 심리극으로 보는게 맞습니다. 추리적 알맹이는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그러나 애증 관계의 색다른 해석과 덧없는 결말이 펼쳐지는 인물과 심리 묘사가 워낙 탁월하여 작품 자체로서 높이 평가받는 듯 합니다. 솔직히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아서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는건  의외이지만요.

5. 린치 - 오쓰보 쓰나오

10년만에 출옥한 전 야쿠자 세이기치. 그는 도난당한 금불상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진 탓에 야쿠자 조직의 표적이 되었다. 

과거의 금불상 도난 사건과 현재. 그리고 야쿠자 조직의 흥망성쇠가 얽힌 이야기로 복잡한 인간관계가 후반부에 가서 모두 밝혀지는 하드보일드적 작풍이 독특합니다. 사건이 트릭보다는 일종의 "해설"에 의해 설명된다는 것 역시 비슷했고요. 하지만 모든 사건과 인물들이 동양적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 하드보일드 작품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죠.

걸작까지는 아니지만,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입니다.

6. 어떤 결투 - 미즈타니 쥰

야스코를 놓고 경쟁하던 두 젊은이 시라사키와 구보타는 결국 권총 결투를 벌이는데 시라사키가 죽고 말았다. 친구 그룹은 사건 은폐를 위한 조작을 시도하는데... 

이 단편집에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정통 추리물입니다. 짤막하지만 권총 결투라는 소재를 도입한 이국적인 설정이 돋보입니다. 단지 이국적인 느낌만 전해주려고 등장한 설정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중요한 요소로 쓰이는, 트릭의 근간이 되는 설정이라는 것도 아주 마음에 들고요.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여러 조작과 그것을 밝혀나가는 경찰과의 두뇌싸움도 볼만 합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문학성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추리물로 즐기기에는 부족함 없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7. 매국노 - 나가세 산고

전쟁 (2차 세계 대전) 말기 중국 베이징에서 사토미야 료스케는 친일신문 사장 2명의 진상 조사를 체리라는 아가씨에게서 의뢰 받았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그는 이 사건이 일본의 신기인 곡옥과 얽혀있는 것을 알게 되는데... 

실제 중국 거주민이었던 작가의 아주아주 디테일한 당시 묘사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건의 트릭 자체는 너무 보잘 것이 없습니다. 대하 역사극에 일부로 추리적 요소가 삽입되었다고 보여질 정도로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요.

8. 여우의 닭 - 히가게 죠기치

신지는 나무를 하던 중 낮잠을 자다가 악몽을 꾼 직후, 형수 모치의 시체를 발견했다.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 생각한 신지는 사건 은폐를 위해 시체를 숨겼지만,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의 표적이 되는데...

전쟁 직후 귀환병의 비참한 생활을 잘 묘사한 문학적 흥취도 뛰어나지만 실제로 사건, 동기, 트릭의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걸작입니다. 날짜별로 구분된 챕터는 조금 거슬렸지만 워낙 묘사와 전개가 뛰어나 보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여운을 남기는 결말 역시 인상적이에요.

9. 피리를 불면 사람이 죽는다 - 쓰노다 기쿠오

경찰청 담당 기자 료스케는 자신이 썼던 완전범죄 기사에 대한 반박글을 보냈던 에나라는 아가씨가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관계된 완전범죄를 실제로 목격하는데...

경찰과 관계자가 보는 앞에서 벌어지는 완전 범죄를 그린 단편입니다. 일반적인 범죄물로 그려지다가 한번의 반전을 통해 트릭물로서의 가치도 전해줍니다. 전후 일본의 혼란과 인간의 잔인합도 약간 그리는 사회파적인 특성도 조금 있고요.

10. 그린차의 아이 - 도이타 야스지

노배우 나카무라 가라쿠는 7년만에 무대 복귀를 결심하지만 복귀 무대의 아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다가 지인과 함께 신칸센 그린차를 타고 도쿄로 떠났다. 그리고 그린차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게 된 소녀의 정체를 놓고 추리가 시작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라는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가라쿠가 등장하는 소품으로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소박한 내용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일상 생활 속에서의 추리" 라는 점에서 정말이지 취향 저격이었어요. 아울러 가부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와 지식이 특히나 돋보였고요. 

그런데 설정과 캐릭터에 비한다면 추리적인 요소는 약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11. 시선 - 이시자와 에이타로

가지하라 형사는 자신의 조카와 결혼을 앞둔 후배 시바타 형사와 탐문수사에서 돌아오던 중, 한 결혼식을 바라보다가 신부가 지난 은행강도 사건 피해자와 관련이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선으로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가지고 전개되는 짤막한 작품입니다. 단편에 최적화된 듯한 내용과 전개는 흡입력이 상당하더군요. 길이에 비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으로 드라마틱 하지는 않지만 묵직하게 전해주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12. 손님 - 아토다 다카시

이전에 읽었던 "Y의 거리"에 포함되었던 작품으로 아토다 다카시 특유의 반전이 인상적인, 서늘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아토다 다카시의 대표작이자 최고 걸작은 "나폴레옹광"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작품 역시 만만치 않은 전율을 가져다 주는 좋은 작품이죠.

13. 빨간 고양이 - 니키 에쓰코

역시 이전에 읽었었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포함되었던 작품입니다. "빨간 고양이"라는 인형에 함축된 중의적 의미를 풀어내는 트릭과 범인을 집어내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정통 안락의자형 추리물로 추리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처량하고 너무 착하게 끝나는 결말은 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작가 니키 에쓰코의 작품군이 대체로 해피엔딩에 기반한 만큼, 작풍이라 보는 것이 맞겠죠. 어쨌건 정통 추리물 애호가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14. 돌아오는 강의 정사 - 렌조 미키히코

근대의 천재시인 소노다 가쿠요는 2번의 정사 미수 끝에 자살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그리고 그의 전기를 쓰다가 중단한 "나"는 그의 2편의 정사 미수 후 발표된 "정가"와 "소생"이라는 시를 분석하여 그 사건의 진상을 알아챈다.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테리 100선"에 9위로 선정된 "회귀천 정사". 바로 그 작품입니다. 천재 시인의 연작시를 토대로 과거를 밝혀내는 전개의 작품으로 시를 통해 발현되는 문학적 가치도 빼어나지만 사건 앞뒤에 포진한 단서와 복선을 가지고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하며 정교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 한편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가 여러배 높아지는, 그만큼 뛰어나면서도 항상 읽고 싶었던 작품이기에 무척 만족스럽네요. 

단 일본어 였을 때 너무나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느껴졌을 싯구들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그 맛을 좀 잃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점이 있고 정통 추리물이라고 하기에는 추리의 과정이 심심한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걸작은 걸작입니다.

15. 나무에 오르는 개 - 구사카 게이스케

"나"는 동생 겐지가 유일한 친구 히데오와 개가 나무에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로 격렬하게 싸우는 것을 중재하다가 과거 헤어진 연인 마치코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개가 우물에 빠지고  겐지마저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자 "나"는 모든 사고의 원인이 된 나무에 올라가 모든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찾아낸다. 

제가 그간 읽었던 구사카 게이스케의 작품은 항상 등장인물이 많지 않아서 소품 느낌을 주면서도 정교함과 더불어 독자의 뒷통수를 치는 반전이 인상적인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형 사건은 벌어지지 않지만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어 정교하게 현재 시점의 사건을 다루는 솜씨가 역시나 탁월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반전도 인상적이고요.

16. 휘파람 새를 부르는 소년

역시나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에 수록되어 접해보았던 작품입니다. 거기서는 "꾀꼬리"라고 되어 있지만 같은 작품이죠. 위에 쓴 평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듭니다. 추리나 결말이 더 제 취향이었다고나 할까요?

2024/06/30

재난의 세계사 - 루시 존스 / 권예리 : 별점 2.5점

재난의 세계사 - 6점
루시 존스 지음, 권예리 옮김, 홍태경 감수/눌와

폼페이 베수비오산 분화에서 시작하여 비교적 최근인 2011년의 일본 도호쿠 지진까지 총 11개의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자연 재해에 대해 소개하며 설명해 주는 책. 

몰랐던걸 새롭게 알게되는 재미가 컸습니다. 몇 가지 설명드리자면, 폭발만 하지 않는다면 화산은 무척 살기 좋은 환경이라고 하네요. 화산토는 투과성이 높아 물이 잘 빠지고 새로운 영양소가 많아서 작물이 잘 자라는 기름진 경작지가 되며, 화산 주변의 변형된 암석은 훌륭한 천연 요새가 되어 주고 방어에 유리한 골짜기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베수비오산 일대는 로마에서도 손꼽히는 곡창지대였습니다. 유명한 '대 플리니우스'가 베수비오산 분화로 사망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구조차 향했던 도시에서 질식사했습니다. 그래도 질식사가 차라리 나았습니다. 두 번째 분화로 사망한 폼페이 희생자들은 화산설쇄류로 타죽었거든요. 섭씨 260도에 달하는 고온의 증기가 무려 시속 480Km로 이동하여 사람을 덮쳐 닿자마자 사망했습니다. 정말 끔찍합니다.

1755년 리스본 대지진은 최소 8.5에서 9에 이르는 대지진으로 철학과 과학에 뚜렷한 영향을 남겼습니다. 모든 신자가 교회에 가는 성스러운 날, 교회가 가득찬 아침 미사 시간에 지진이 일어난 것은 단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해 보였으니까요. 교회에 간 독실한 신자들은 목숨을 잃고, 근처 홍등가 창녀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은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세상의 불공정함에 대한 인식을 야기하여 기독교 사상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구태여 설명하자면, 교회는 돌로 지었고 홍등가의 집들은 나무로 지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나무는 돌보다도 유연하고 흔들림을 잘 견뎌 사망자가 적었던 것이겠지만요.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네덜란드 정부가 포르투갈을 도와주지 않은 것처럼 아직까지는 종교의 영향이 강했습니다. 미증유의 재난 앞에서도 네덜란드인들은 칼뱅주의 사상에 따라, 로마 가톨릭의 우상을 숭배한 포르투갈을 신이 벌하였다면 거기에 끼어들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1783~1884년 아이슬란드의 라키 산 분화는 인류역사상 임명피해가 가장 컸던 자연재해로 총 사망자 수는 수백만 명이었고 전 세계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단순히 분화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후 일어난 기후 변화 탓입니다. 극심한 겨울 추위가 찾아왔고, 몬순이 사라져 가뭄과 기근이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화산은 자연재해 중 유일하게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성층권의 기체 조성을 바꾸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대기권 하층부는 극지방에서 밀도가 낮아서 아이슬란드 화산은 성층권으로 물질을 보내기도 쉬운 탓에 피해가 더 컸지요. 다행히 화산 폭발의 영향은 곧 사라지기는 했지만, 인간의 온실가스는 현재 진행형이라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중국의 탕산 대지진은 당시 폐쇄적이었던 중국 환경 탓에 외부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오저뚱 사후 4인방이 숙청당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중국 고전에서 지진은 황제가 죽어가는 상황 외에 두 가지 주요 원인으로 음기가 강해져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하들이 황제의 권력을 빼앗는 경우, 또다른 하나는 여자가 정치에 나서는 경우로요. 4인방, 그리고 중심인물이 마오의 아내 장칭이라는게 이 경우에 해당되어, 인민들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데 꽤 그럴싸 했어요.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의 죄수의 딜레마도 기억에 남습니다. 불어난 강물이 제방에 막대한 압력을 가할 때, 위험에서 마을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맞은편 제방을 부수는 겁니다. 건너편 이웃들을 익사시킴으로써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말 '딜레마'라는 말이 걸맞는 상황입니다. 놀라운건 뉴올리언스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건너편 제방을 부쉈다 - 는 것이고요.

그리고 이런 재난 상황 발생 시 일어났던 참극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이 소개된건 참 고마왔어요. 이 책에서는 학살 이유를 전통적인 세계관을 대체할만한 과학 이론이 부족하여 희생양이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작위성에 대한 거부감이 폭력적으로 발현된 주장은 말은 되지만, 그렇다면 그 이후의 인종 차별과 범죄는 설명하지 못하는 문제는 있습니다. 1927년 미시시피강 홍수 당시에 흑인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제방을 보강하게 시켰다가, 제방이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서 수백 명의 흑인들이 죽도록 만든 범죄처럼요. 제방이 무너진 뒤 재방 붕괴지점 근처에 구조를 위해 동원된 배에도 백인과 흑인 모두 동등하게 타지 못했습니다. 간토 대지진 이후 불과 4년 뒤라 세계관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일본과 미국의 당시 사회 특성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수십년의 차이는 있었을터라, 단지 세계관에 따른 탓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참극과 학살은 인종 차별과 인종 혐오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라는걸 분명히 해 주는게 좋았을 거에요.

이외의 토막 상식도 많은데요, 예를 들어 미시시피강 홍수 때 구호활동을 지휘했던 후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건, 당시 흑인들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선 후 배신하여 흑인 표를 잃고 루스벨트에게 패하고 말았지요.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지원금이었던 10억 달러의 연방정부 자금 중 7억 달러가 불분명하게 사용되었다는 것도 새로왔습니다. 그냥 없다고 처리하기에는 너무 큰 돈인데, '잭 리처'가 나서야 하는 사건이 아닌가 싶어요.
지진 자체에 대한 설명도 많은데, 지금도 지진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규모 5의 지진이 일어난다고 예측했지만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났다면 성공한 예측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설명도 새로왔어요. 규모 4.7의 지진이 일어날 확률은 규모 5의 두 배이기 때문이라지요. 어차피 지진 관련해서는 확률에 대한 논의를 피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하니까요.

이렇게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데, '세계사'라는 제목에 걸맞는 미시사적 관점으로 볼 부분이 많지 않은건 아쉽습니다. 주로 과학과 재해 전, 후의 대책에 대한 주장이 보다 많은 편입니다. 마지막 장은 아예 지진에 대비해야 하는 내용이고요. 앞서 리스본 대지진에서처럼 자연재해가 불러일으킨 결과를 역사적 관점으로 설명해주었으면 더 좋았을겁니다.
설명도 쉽고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도판도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4/05

무증거 범죄 - 쯔진천 / 최정숙 : 별점 2점

무증거 범죄 - 4점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현장에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가 인쇄된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다른 어떤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네 번째 특별조사팀마저 성과 없이 해산되자, 경찰은 수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한순간의 실수로 불량배를 죽이게 된 청년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증거를 없애줄 테니 범죄를 부인하라며 경찰 대처법을 가르쳐주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수정 인용)

중국 추리 소설찬호께이의 작품 3편 - "13 .67",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 과 원샨의 "역향유괴" 만 읽어보았습니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대체로 평작 이상이었지만 원샨의 작품은 기대 이하였었는데, 이 작품은 어떨까 싶어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트릭이 존재하는 본격 추리물은 아니며, 범죄자와 탐정두뇌 싸움이 핵심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러나 제목의 '무증거 범죄'가 의미하는 완전범죄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前 수사전문 요원이었던 뤄원이 깡패 소태보가 살해된 현장을 조작하는 과정의 디테일, 그리고 이 사건이 범죄논리학자 옌량에 의해 하나씩 단서가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이 볼 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만 위안이 넘는 큰 돈을 하트 모양으로 작게 접어서 사건 현장에 숨겨 놓는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했어요. 이 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몰려들어 현장이 훼손되게 만드려는 의도였는데, 아주 설득력 넘쳤습니다.
이 사건과 항저우 시에서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모를 남기고 벌어진 연쇄 살인극이 맞물리는 전개도 좋습니다. 뤄원이 자신의 아내와 딸이 실종된 현장에 남겨진 지문의 소유자를 찾기 위해, 그 지문의 소유자가 범인인 살인극을 조작하여 일으켰다는 동기였는데 대담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설득력 덕분에,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됩니다. 

옌량이 추리한, 뤄원이 주후이루와 궈위가 저지른 살인 은폐를 도와준 이유도 그럴듯합니다. 뤄윈이 소태보를 애초부터 살해할 목적이었지만, 선수를 빼앗긴 뒤 은폐를 도와주었다는 이유인데,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그게 사실이라는걸 암시하니까요. 좀 작위적이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외에 익숙치 않은 중국식 묘사들도 흥미로왔습니다. 제목의 '무증거 범죄(완전범죄)'를 비롯하여 상식적이다, 이론적이다라는 말을 '유물론자'라고 표현한다던가, 범인이 경찰 수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걸 '역수사 능력' 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두뇌 싸움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옌랑과 경찰이 뤄원을 잡아 넣을 증거를 찾아내는데 결국 실패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옌량의 활약이 없는건 아니지만, 두뇌 싸움의 결과는 일방적입니다. 게다가 고차방정식 운운하며, 증거가 없으니 범인부터 대입해서 시나리오를 짠다는 옌랑의 방법론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특정 인물을 범인으로 만드는 조작극과 별로 차이가 없어서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이는 뤄원이 "모든 이야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내가 범인이라곤 할 순 없어. 자네의 시나리오는 아무한테나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범행 동기를 설명할 수 있지."라고 통렬하게 부정하지요. 옌랑은 마지막에는 감정에 호소해서 어떻게든 자백을 이끌어내는게 전부로, 한 마디로 뤄원한테 완패한 셈입니다. 이래서야 공정한 두뇌 싸움으로 보기는 어렵죠.
또 뤄원이 연쇄 살인극을 벌이는 와중에, 과연 단 한 번도 경찰 수사 물망에 오르지 않을 정도의 완전범죄가 가능했을지?에 대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뤄원이 대단한 전문가라는걸로 퉁치기는 힘들어요. 실제로 공원에서의 범행은 목격자도 있었는데 말이죠. 하긴, 이는 뤄원의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죄가 완전범죄가 된 것에 비하면 약과이기는 합니다. 우발적으로 급작스럽게 벌인 범행인데도 불구하고, 경찰 최고의 전문가가 사력을 다해 찾았지만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할 완전 범죄가 성립된걸 단지 운이라고 치부하는게 가능할까요? 작 중에서 뤄원의 능력이 시종일관 대단한걸로 묘사되는 것과는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해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옌랑이 뤄원을 수상하다고 여긴 계기가 된 뤄원의 차에 대한 감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뤄원답지 않은 좋은 차는, 범행을 저지르고 용의선상에서 쉽게 빠져나가기 위함이라고 추리하지만, 뤄원이 과거 출원했던 특허로 성공한 부자라고 설명되는 만큼, 좋은 집과 좋은 차는 그 재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요. 또 그게 수상했다면 좋은 집에 사는 건 왜 트집을 잡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사소할 뿐, 가장 큰 문제는 책 뒤 해설에서도 실려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과 너무나 비슷한 구조라는 점입니다. 수학, 과학과 관련된 천재들의 두뇌 대결, 순전히 선의에 의해 사건 은폐에 가담한다는건 완전 판박이입니다.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두 청춘 남녀가 결국 파멸한다는 결말까지도 똑같고요. 작가 스스로도 영향을 받았다는걸 인정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무언가 새로운게 있었어야 했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요소는 중국이라는 무대의 특성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리지널 만큼의 수작은 아닙니다. 그나마 캐릭터를 가져오려면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옌량과 뤄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갈릴레오 유가와 역인 옌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범죄자와의 승부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으며, 뤄원은 아무리 아내와 딸 실종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잔챙이 범죄자들을 다섯 명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질 여지가 없으니까요. "용의자 X의 헌신" 속 이시가미처럼 뤄원이 아내와 딸의 실종 이후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독자에게 잘 공감시키지 못하기도 했고요. 이건 작가가 놓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죠. 어설프게 캐릭터를 베끼지 말고, 초반부에 옌량이 똥이 있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벌어지는 사고는 재미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좀 어설픈 인물로 그려가는게 차별화되고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나쁘지 않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 비교하자면 한없이 부족하네요. 중국 추리 소설이 궁금하신게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중국 추리 소설은 찬호께이만 믿고 가야겠습니다.

2025/03/07

비잔티움의 역사 -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 최하늘 : 별점 3점

비잔티움의 역사 - 6점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더숲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급격히 비잔티움 제국에 관심이 생겨 찾아본 역사서입니다. 제목 그대로 비잔티움, 즉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제국의 시작을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로 정의합니다.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방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되면서, 그리스와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제국만 남게 된 4세기 이후를 비잔티움 제국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고요.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9개의 시기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각각 탄생, 영토 확장, 이슬람의 공세, 부활, 최대 전성기, 십자군 원정과 지방 분권화, 분열, 몰락, 멸망 등의 흐름을 따라가며, 각 시기별 황제들이 누구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한때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며 ‘천년 왕국’이라는 위상을 지녔던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가장 신기했던건 황제들이 동시에도 여러 명이 존재했고, 배신과 찬탈이 끊임없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이 천 년이나 존속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권한이 집중되어 있었고, 무역을 통해 축적한 자금을 바탕으로 자체 군사력보다는 용병과 외교에 의존했던 덕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귀족 가문과 대립을 벌이면서도 정치를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황제의 권한이 강력했던 점(특히 전성기)도 주요 요인이었고요. 예를 들어, 바실리오스 2세는 수십 년 전 기근 이후 판매된 토지를 아무 대가 없이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으며, 거대 귀족 가문의 토지를 몰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강력한 황제의 중앙 집권적 체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겠지요 서방 제국에서 흔히 있었던 교황과 황제 간의 권력 투쟁도 비잔티움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이는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테고요. 

게다가 황제들이 자주 교체되다 보니, 가끔 유능한 인물이 등장하여 영토를 확장하거나 천재적인 외교 전략을 펼치면서 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끌어들여 이슬람의 확장을 저지했던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라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자체적인 강력한 군사력없이, 주변보다 앞선 우수한 문화와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용병 고용과 동맹, 외교로 버티는건 한계가 있었습니다. 중국 송나라처럼요. 그러고보면 중국 송나라와 비슷하게 많네요. 비단이 유명했다던가, 강력한 무기가 - 송나라는 화포, 동로마는 그리스의 불 - 있었다던가 등등등.

하여튼,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는 ‘분열’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소아시아, 그리스 지역을 중심으로 한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후계국 세 개(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군주국, 트라페준트 제국)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지만, 과거의 광대한 영토를 다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강력했던 황권도 약화되었고, 귀족층에게 권력이 분산되면서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의 도시국가로 전락하며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이 이러한 문제에서 교훈을 얻어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은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쇠퇴도 초래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 특히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얻은 무역 특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활동 범위가 급격히 축소되었습니다. 특히, 흑해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제노바는 15세기 이후 사실상 무역 기반을 상실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문화의 중심이 프랑스와 영국 등 보다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이런 흥미로운 비잔티움, 동로마 제국의 흥망성쇠 외에도, 불가르 제국처럼 낯설고 새로운 역사적 명칭과 국가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제국의 비밀 병기 '그리스의 불'이 실제로 대활약해서 이슬람 제국의 공세를 꺾을 수 있었다는건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역사서로 보니까 굉장히 새로왔습니다. 슬라브권에서 널리 쓰이는 키릴 문자가 비잔티움 제국의 학자 콘스탄디노스(성직명 키릴로스)에 의해 창안되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네요. 슬라브어 선교를 위해 제작된 이 알파벳이 훗날 키릴 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호기심이 생겼던건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총리대신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운명 이야기였습니다. 루카스 노타라스 가문의 남자들은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처형되었으며, 그의 두 딸과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에디르네로 끌려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루카스는 생전에 베네치아와 제노바 은행에 상당한 재산을 맡겨 두었었고, 딸 엘레니가 고생 끝에 결국 동생들을 몸값을 지불하고 구해냈다는군요. 이 정도면 대하 소설로 만들 법한 극적인 이야기아닐까요? '몰락 미녀 귀족 영애가 술탄의 노예가 되었지만, 갖은 노력 끝에 집안 재산을 되찾아 가족을 구해낸다!'.

그리고 비잔티움 제국이 유럽의 주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때문이더군요. 기번은 이 책에서 비잔티움 문화를 ‘이민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철저하게 폄하했는데, 이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서구 역사학계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이 없었다면 이슬람 세력이 훨씬 빠르게 그리스와 발칸 반도, 혹은 그 이상까지 확장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폄하는 부당하지요. 서구 유럽이 중심이 된 근대사의 또다른 폐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좋은 내용이 가득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도판이 황당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각 시기별 제국의 판도를 쉽게 이해하고, 주요 전장 및 도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지도가 필수적인데, 기본적인 지도조차 부실하여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랑캐의 역사”에서도 지도가 부족했는데, 앞으로 이러한 역사서에서 지도 부실 문제는 꼭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대전투나 영웅적인 활약, 스캔들 같은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건조하고 일반적인 서술 방식으로 전달하여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냥 누가 즉위했고, 어떤 일을 했다라는 서술이 이어질 뿐이거든요. 천년 제국의 역사를 한 권으로 정리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건과 전투는 조금 더 풍성한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 접하기 어려웠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점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9/10/12

사치와 문명 - 장 카스타레드 / 이소영 : 별점 2.5점

사치와 문명 - 6점
장 카스타레드 지음, 이소영 옮김/뜨인돌

문명, 문화 발전에 사치가 큰 동력이 되었음을 설명하는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이전 설혜심 교수의 "소비의 역사"를 읽고 쓴 리뷰에 댓글로 존경하는 이웃 블로거이신 홍차도둑님께서 함께 읽으면 좋을거라고 추천해 주셨던 책이지요. 절판되었지만 근성으로 찾아내어 구입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지요.

"소비의 역사"가 당대 특정 상품과 문화, 유행별로 항목을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면 이 책은 역사적으로 특정 '시기'의 거대 국가, 집단에서 어떠한 사치 행위가 있었으며, 해당 행위가 어떻게 문명 발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소개합니다. 수메르부터 시작하여 아시리아, 고대 이집트, 히브리, 그리스, 크레타와 로마 등의 기원 전 고대 문명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원 후의 인도와 이슬람 문명, 마야, 아스텍, 잉카 문명, 아프리카, 중국, 일본 및 현대 BRICs 국가까지 망라하는 방대한 분량이죠. 사치 행위도 단순 기호품은 물론이고 문자, 건축, 종교 및 식사에 이를 정도로 폭 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책 소개글에 나온 것 처럼 사치가 단지 '소모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활동의 표식 그 자체이면서도 문명 형성과 발전의 주요 원동력임을 알게 됩니다. 특정 품목, 혹은 행위에 대한 기호 자체가 어느 정도 발전된 사회에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치는 타인에게 선망과 질투, 욕구를 불러 일으켜 사회의 기본 원칙 중 하나인 '목적 의식'을 일으킨 이유가 되기도 했고요. 지금 우리가 성공하려고 발버둥치는 것 역시 이러한 고대로부터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좋은 집, 좋은 차, 아이를 위한 좋은 학교 등 모두가 사치 행위니까요. 명품에 대한 열망 역시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당연한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쓴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듭니다. 욕망이 목적 의식을 불러 일으키고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 된다는 주제가 반복될 뿐이거든요. 물론 시기별, 문명별, 지역별 각종 사치에 대한 소개는 재미있지만, 이를 모두 담기에는 분량이 부족했습니다. 도판도 부실하고요.
또 서양 문명에만 집중하지 않은 점은 높이 평가하나, 타 지역 사치가 심도깊게 소개되었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예를 들자면 중국의 경우 등장하는 비단과 옥, 건축물 등은 이국적인 소재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일본 역시 4~5페이지 분량의 짤막한 역사 소개가 끝나면 바로 메이지 유신 이후 해외 사치 문화가 유입되어 현재에 이르렀다는 결론이 전부고요. 이럴 바에야 이야기를 서양 중심으로 맞추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또 마지막 BRICs 역시 책이 출간되고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 된 것 처럼, '현대' 기준의 시각과 소개는 되도록 줄이는게 바람직했을 겁니다. 어치피 현대의 사치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책의 주제를 설명하는데 구태여 현재 시점의 사치 소개가 필요한건 아니니까요.
아울러 설혜심 교수의 책에 비하면 읽는 재미는 많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특별한 이야기나 드라마없이 소개에 그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내용이기는 한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그래도 문명 발전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24/06/14

유리병 속 지옥 - 유메노 큐사쿠 / 이현희 : 별점 1점

유리병 속 지옥 - 2점
유메노 큐사쿠 지음, 이현희 옮김/이상미디어

이 책은 데뷰작 "기괴한 북"을 비롯하여 11편의 단편과 단편 모음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시골 마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모아 짤막하게 소개하는 "시골의 사건"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제였다면 섬찟했겠다 싶은 이야기들이 몇 편 있었던 덕분입니다. 못생긴 과부가 딸의 연인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가 파국을 맞는 "오래된 냄비"가 대표적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스타일로 황당무계한 아이디어가 바탕이 된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중국 최고의 진귀한 차 '곤륜차'를 마시는 방법을 장황하게 펼쳐놓는 "미치광이는 웃는다", 사람을 마약으로 취하게 만든 뒤 레코드를 들려주어 그대로 재생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한 "인간 레코드"와 같은 이야기들이 그렇습니다. 로마노프 왕가의 아나스타샤 공주가 살아남아 탈출했다는 설정의 단편 "사후의 사랑"은 나름 시대를 앞서간 느낌을 줍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가 치정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사갱"의 당시 탄광 분위기 묘사와 같은 디테일들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전개가 황당해서 이야기의 완성도가 낮거나, 비슷한 설정과 전개가 반복되는 탓이 큽니다. 정신병자가 나오는 몇 편의 이야기들이 특히 그러했어요. 에도가와 란포의 변격물적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대부분으로, 정통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도 감점 요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완독하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더 이상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1/01/15

외국어 전파담 - 로버트 파우저 / 혜화 1117 : 별점 2.5점

외국어 전파담 - 6점
로버트 파우저 지음/혜화1117

외국어 전파 과정을 통해 시대별로 당대 패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알려주는 사회사,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책 속 저자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모어 외의 외국어를 개인이 배우는 이유는 '권력과 자본'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주장을 역사적인 흐름을 통해 잘 설명해 줍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모든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층은 모두 모어 외 외국어로 라틴어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귀족과 상인 세력이 성장하고, 제국이 붕괴되고 도시 국가가 융성하면서 고대 그리스어가 유행하게 됩니다. 유명한 메디치 가문이 고대 그리스어 문헌을 라틴어로 번역하는걸 지원하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문헌을 모은 도서관을 설립하는 등 카톨릭 교회 견제를 위해 고대 그리스 문화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 과정에서 금속 활자로 독일어 성경이 출간되며 라틴어 영향력은 더 줄어들었고, 대항해 시대와 제국주의 시대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최고의 강대국이 됨으로써, 영어와 프랑스어가 외국어에서도 패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세계 최강국이 된 미국의 영향하에 프랑스어도 밀려나 버렸습니다. 영어의 세계화는 외교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영어로 통일된 것으로 대표됩니다. 한국과 일본은 당대 동아한시아 최강국 중국 영향권하에서, 모어와는 다른 한자어를 지배계층이 열심히 배웠다는 측면에서는 이와 다르지 않겠지요.

이러한 유럽 중심의 흐름과 함께, 제국주의와 식민지 하에서 유럽 국가의 언어가 제 3세계로 어떻게 뻗어나갔는지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권력과 자본에 의한 외국어 학습이라는 맥락은 동일하고요. 침략과 선교를 위해서, 일단 유럽인들이 현지 언어를 배웠다는 시작만 조금 다를 뿐입니다. 얼마전 읽었던 "빨간 리본"에서도 중국으로 향하던 선교사들이 중국인 '싼'으로부터 중국어를 배우는 장면이 등장했었죠. 그러나 일단 자리를 잡고 난 뒤에는 현지인들이 권력, 자본을 손에 쥐고자 침략자들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 뒤에는 식민지의 피지배층이 독립을 꿈꾸는 민족의식을 생성하지 못하게끔, 침략자들이 해당 식민지의 모어를 의도적으로 말살시키려 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공식 언어로 침략자들 언어를 쓰는 간단한 정책에서부터, 아예 민족 고유의 이름까지 바꿔버렸던 일본 제국 주의처럼 강력한 정책 등이 모두 이에 해당됩니다. 이 책에 따르면 이렇게 식민지를 '내국인화' 하려는 강력한 정책은 식민지와 지배국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서 그 예로 아일랜드와 조선을 들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한 발상이에요.
민족 고유 언어를 중요시하는, 민족주의가 극대화된 파시즘적인 발상과 이 때문에 세계 공용어를 꿈꿨던 에스페란토어 관계자들이 히틀러에게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도 비슷한 관점으로, 눈여겨 볼 만 했습니다. 꼭 필요한건 아니겠지만 화려한 도판도 여러모로 흥미를 자아냈고요.

그러나 이렇게 세계사 흐름과 동기화되는 언어 전파 과정은 굉장히 흥미로왔지만 책의 또다른 축인 '어떻게' 배우는지, 즉 '외국어 학습법'에 대한 내용은 솔직히 지루했습니다. 문법을 참고하는 학습법은 1471년 시작되었으며, 17세기에 예문으로 단어를 설명했고, 19세기 말, 벌리츠가 말하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학습법을 크게 유행시켰고 이후 습득 이론, 청각 구두 교수법, 의사 소통 중심 교수법 등으로 진화했다는 내용 등인데, 우선 각 학습법의 차이가 명쾌하게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더라고요. 글보다 말이 중요하고, 독해보다 회화가 중요하다는 개념 정도만 이해될 뿐이었어요.

또 외국어 학습법과 외국어 전파 과정이 잘 연결된다는 느낌도 받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전파와 학습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처럼 세계사 흐름과 병행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었어요. 세계사 흐름과 일치하여 머리에 쏙속 들어오는 외국어 전파 과정이 흐려질 뿐이였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외국어가 전파되는 부분, 그리고 학습 방법의 진화 부분은 분리해서 따로 소개하던가, 외국어 전파 과정만 더 상세하게 서술하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네니다.

2004/09/28

복수 - 장철 : 별점 3점

"영웅본색"의 적룡의 젊은 시절! 남다른 근육과 배에 꽂힌 손도끼를 보라!

주인공 "강대위"의 이른바 "살벌한 쿨함"

저 패션감각! 멋지다! (이퀄리브리엄인가....)

최후의 결투! 특유의 굳은 표정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대단함!

1925년 중국의 어느 도시, 경극의 무술 전문 배우로 활동하던 관옥루(적룡)는 자신의 아내에게 호시탐탐 유혹의 손길을 뻗치던 봉사부의 도장의 간판을 부수며 자신의 아내에게 손을 뗄것을 경고하나 봉사부와 그의 일당등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한다. 이에 남쪽에 거주하던 관옥루의 동생 관소루(강대위)는 복수를 위해 찾아와 형의 원수들을 하나씩 처치하기 시작한다.

장철 감독의 1970년도 영화입니다. 명성이 워낙 자자하여 한번 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던 차에 우연찮게 구해 보게 되었습니다.

일단 당시 영화답지 않은 화면 구성이 놀랍습니다. 장철 감독도 호금전과 더불어 재평가 받고 있는 감독이지만 초반부의 경극 장면과 관옥루의 살해 장면을 교차 편집한 장면이나 여러 액션 장면은 대가의 풍모를 느끼게 합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액션! 주인공 관소루는 2:8 가름마에 미소를 절대 띄지 않는, 누군가가 표현한 "살벌한 쿨함"으로 무장하고 눈에 띄는 원수의 패거리는 일단 다 죽입니다. (그 당시 중국 치안 상황이 정말 황당한 수준이었나 보더군요^^)

대략 보아도 30~40여명은 혼자 쓸어버리는데 그 살육의 장면을 극대화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정통 홍콩 쿵푸영화의 아류가 아닌 독특한 칼부림 액션으로 표현하여 화면에 피가 난무하는 그야말로 하드고어 액션을 보여줍니다. (특수촬영에 장철 감독이 돈을 더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습니다)
거기에 마지막에 복수를 완료하고 죽어가는 관소루의 모습까지 겹쳐지며 영화의 화룡점정을 찍어버리네요.
70년대 영화다운 닭살스러운 장면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것과 ("음식이 다 식어요" "난 식은것을 더 좋아하오") 약간은 허접한 촬영 방식이 옥의 티지만 이 영화는 당시 무술 영화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묘한 에너지와 "무릇 남자는 강해야 한다!"라는 남자다움을 극한으로 강조하는 고전! 오히려 저는 최근의 세련되고 특수효과 남발한 중국산 무협보다는 이 영화가 더욱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