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원의 독수리 - ![]() 마이클 모퍼고 지음, 마이클 포맨 그림, 보탬 옮김/내인생의책 |
hansang.egloos.com 의 이사한 곳입니다. 2021년 1월, 추리소설 리뷰 1000편 돌파했습니다. 이제 2000편에 도전해 봅니다. 언제쯤 가능할지....
2023/06/17
설원의 독수리 - 마이클 모퍼고 / 보탬 : 별점 2점
2025/06/06
노인의 전쟁 - 존 스칼지 / 이수현 : 별점 2점
“맹세코 그놈을 때려눕히려고 했다니까. 월드시리즈 우승도 한번 못하고 200년이 지났으니 컵스는 마이너리그로 강등 시켜야 한다지 뭔가."
75세를 맞은 존 페리는 사랑했던 아내 캐시와 사별한 뒤, 미련을 버리고 '젊은 육체'를 준다는 우주개척연맹(CDF)에 입대했다. CDF는 외계 생명체로부터 우주 식민지를 보호하는 군대로, 외계에서 구한 최신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젊고 강화된 육체를 갖게 된 존 페리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 방위군에 복무하게 되었고,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데...
SF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있을 유명작입니다. 미국 작가 존 스칼지의 데뷔작으로, 읽은지 제법 되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75세 이상의 노인들이 입대하면 최신의 젊고 강하며 잘생긴 육체로 바꾸어준다는 설정의 참신함입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늙어가고 있는 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설득력 역시 무척 강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최전선에서 외계인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제대가 가능한 10년 뒤의 생존율이 25%에 불과하고, 두 번 다시 지구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조건이 붙지만, 어차피 더 잃을 게 없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한 도박이니까요. 아마 저도 가족에 대한 미련만 없다면 입대했을거에요.
젊은 군인으로 거듭난 존 페리가 같이 입대한 전우들과 훈련을 받는 장면도 생생합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악덕 상사 루이즈의 입담이 돋보였는데, 특히 젊었을 때 광고 문구를 썼던 존 페리와 루이즈 상사 간의 추억담 티키타카가 백미였습니다. 왜 상사들은 이렇게 입담이 좋은걸까요? 사뭇 궁금합니다.
훈련 후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외계 종족과의 전투도 흥미롭습니다. 지구인보다 앞선 과학 문명을 지녔지만 독특한 종교관으로 인해 전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콘수 종족의 설정은 이렇게 소비되기에는 아까울 정도였어요. 3부 마지막 코랄 행성 전투에서, 어떻게 코랄인들이 도약 추진한 전함의 위치를 파악해 타격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와 대응안도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고요. 콘수인이 관련 기술을 전해 주었지만 협상을 통해 기기 한 대만 전달된 것이 확인되어, 이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 전개가 기승전결이 완벽하여 몰입도를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 또한 분명합니다. 우선, 젊어져서 훈련을 받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SF 밀리터리물에 불과해져 버리고 맙니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이 과정에서 노인이었던 전생의 경험과 기억이 뭔가 역할을 해 준다면 독특함을 이어갈 수 있었을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이는 존 페리가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비현실성을 높이는 데에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한 번 죽을 뻔했지만, 그 외에는 영웅이 되기까지 탄탄대로인데,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려면 지구에서의 전생이 관련되어야 했습니다. 다른 군인들도 모두 노인이었던건 마찬가지니, 정말 독특한 경험과 기억이 있었다는 설정이었다면 좋았겠지요. 예를 들어 프로 바둑 기사라서 전략적으로 대국을 볼 줄 알았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전개도 후반부로 가면 처집니다. 여러 행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단편 에피소드처럼 나열되는 탓입니다. 게다가 사별했던 아내 캐시가 ‘제인’이라는 클론으로 되살아났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지구의 그 누구라도 클론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굳이 노인들을 징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시체를 수거해 육체를 복제하면 될 일입니다. 같은 이유로 초반부에 젊어지는 시술을 받기 직전 지병으로 사망한 존 페리의 룸메이트 디크는 왜 되살려 클론으로 만들지 않은걸까요? 그냥 존 페리의 러브라인과 해피엔딩을 위한 사족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은 흥미롭고 몰입도도 높았지만, 이후의 전개가 전형적이고 개연성에서도 아쉬움이 커서 감점합니다. 후속권이 있던데 더 읽어보지는 않을 듯 합니다.
2004/05/28
트로이 - 볼프강 페터슨 : 별점 2점
고대 그리스, 가장 잔인하고 불운한 사랑에 빠지고 만 비련의 두 주인공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올란도 블룸)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다이앤 크루거).
사랑에 눈 먼 두 남녀는 트로이로 도주하고, 파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 (브렌든 글리슨)는 치욕감에 미케네의 왕이자 자신의 형인 '아가멤논'(브라이언 콕스)에게 복수를 부탁한다. 이에 아가멤논은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규합해 트로이로부터 헬레네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의 명분은 동생의 복수였지만, 전쟁을 일으킨 진짜 이유는 모든 도시 국가들을 통합하여 거대한 그리스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심이었다.
그러나 '프리아모스' 왕(피터 오툴)이 통치하고 용맹스러운 '헥토르' 왕자(에릭 바나)가 지키고 있는 트로이는 그 어떤 군대도 정복한 적이 없는 철통 요새. 트로이 정복의 결정적인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불세출의 전쟁 영웅 위대한 전사 '아킬레스' (브래드 피트) 뿐. 그러나 아킬레스는 전리품으로 얻은 트로이의 여사제 브리세이스(로즈 번)를 아가멤논 왕이 빼앗아가자 몹시 분노해 더 이상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칩거해버린다. 아킬레스가 전의를 상실하자 연합군은 힘을 잃고 계속 패하게 되고 트로이의 굳게 닫힌 성문은 열릴 줄을 모른다. 병사들이 점차 지쳐갈 때쯤, 이타카의 왕인 지장 오디세우스(숀 빈)가 절묘한 계략을 내놓는다. 그것은 바로 거대한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 성을 함락시키자는 것...
보기가 망설여졌던 영화입니다. 평이 워낙에 안 좋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의외로 재미있더군요! 일단은 “전쟁” 보다는 인간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전개 방식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여러 주요 등장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방식은 큰 전투 위주의 기존의 대하 역사극과는 사뭇 다른 전개를 보여주는데 나름대로 괜찮더라고요. 아킬레스와 헥토르를 중심으로 각 등장 인물들을 어느 정도 비중 있게 묘사하지만 이야기의 밀도가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이런게 감독의 역량이겠죠.
배우들의 캐스팅도 좋은 편입니다. 무엇보다 “에릭 바나!” 헥토르 역의 에릭 바나는 이 영화 최고의 수확이에요. 헐크에서는 몰랐지만, 서사 시대극에 어울리는 외모와 진지한 카리스마 곁들여진 연기를 통해 헥토르라는 캐릭터를 정말 근사하게 보여줍니다. 광신자이지만 자비롭고 현명한 왕 프리아모스 역의 피터 오툴이라던가, 나오자마자 아킬레스의 일격에 죽어버리기는 하지만 WWE 스타 출신의 레슬러 네이선 존스도 반가왔어요.
하지만 2억불이나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기대보다 대작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관계에 초점을 맞춘 탓이죠. 딱히 전투씬이 압도적으로 그려지거나 하지 않아서 스펙터클은 기대 이하입니다.
그리고 기존 신화를 각색한 방향성에도 문제가 많아요. 신화적인 요소를 철저히 배격하고 인간 중심의 새로운 역사극으로 각색한 것, 또 아가멤논이라는 캐릭터를 최대의 악역으로 설정한 것은 나쁘지 않은데 몇몇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감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다른 여러 매력적인 영웅들이나 신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습니다. 트로이의 목마가 너무도 시시하게 그려져서 극의 긴장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도 단점이고요.
무엇보다 주인공 아킬레스 역의 브래드 피트가 제일 문제에요. 사실 비쥬얼만 놓고 본다면 아킬레스보다는 파리스역에 훨씬 잘 어울리는 배우라 생각되거든요. 아무리봐도 지상 최강의 전사는 아니고 달달한 “가을의 전설” 필의 로맨틱가이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영 와닿지 않더라고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던 파리스역의 올랜도 블룸도 실망스러웠으며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비롯한 여배우들도 다 그냥 그랬습니다. 특히나 여주인공인 브리세이스...전 처음엔 신지인줄 알았습니다. 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에릭 바나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만 2억불짜리 대작답지 않다는 허전함은 어떻게 해도 채우기 어렵군요. 세세한 인간 관계와 현실적인 신화 이야기는 좋았지만 2억불짜리는 그만한 스펙터클이 있어야하는 법이겠죠.
2005/09/26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 마이클 매클리어 / 유경찬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지음, 유경찬 옮김/을유문화사 |
"우리가 미국에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도덕적인 지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 호치민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역사서입니다. 1945년 프랑스 식민지 지배와 호치민의 첫 등장에서 시작하는 글은 1975년 남베트남의 사이공 함락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30년, 약 10000일에 걸친 이 기간동안의 베트남에 있었던 여러 전투와 베트남의 실상에 대한 자세한 묘사와 더불어 미국 사회의 다양한 반응까지 알기쉽게 실제 주요인물들의 인터뷰까지 실어가며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저자가 기자 출신이라 상당히 원칙에 충실하고 사실을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나 방대한 기록을 잘 정리해 놓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책을 읽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프랑스와 미국의 개입이야말로 전혀 불필요했고 무의미한 돈과 희생만을 불러온 전쟁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해 줍니다. 자칭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는 안하무인적인 사고방식이 얼마나 큰 댓가를 요구했는지가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각에서 묘사되거든요. 미국 수뇌부의 오만과 무지를 까발림과 동시에 반전운동에 대한, 그리고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해 정말 기사를 보는 듯이 상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반전운동의 대부였던 유진 매카시 상원의원과 반전 운동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이색적이고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베트콩"이라 불리웠던 영웅들에 대한 사실감 넘치는 묘사야 말로 압권입니다. 반공교육때문에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아왔던 우리와 우리 바로 앞 세대 한국인들에게 반드시 알려야만 하는 정보들이라 생각됩니다. 호치민은 물론이요 보 구엔 지압이나 둥 장군같은 전쟁영웅들의 청렴하고도 용맹한, 애국적인 삶은 재조명 받아야 마땅하다 보이네요. 그에 반해 남베트남의 티우 대통령이 영국 대 저택에서 가명으로 살고 있다는 것에 씁쓸함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상당 수준의 병력을 파병한 파병국으로 우리 나라에 대한 설명도 좀 들어갔으면 했는데 그런 내용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용병 장사가 좀 자세히 조명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쨌건 미국에 보수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을때마다 세계가 위기에 처하는 것 같아 무섭네요. 이번에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다행히 하늘이 노한 것 같아 태풍을 내리니 정신차리기만 바랄 뿐입니다.
2017/01/06
고려전쟁 생중계 - 정명섭 외 / 김원철 그림 : 별점 2.5점
| 고려전쟁 생중계 - 정명섭 외 지음, 김원철 그림/북하우스 |
고려의 역사를 뒤흔든 10번의 전투가 소개된 미시사 - 전쟁사 서적입니다. 전작 "조선 전쟁 생중계"가 아주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최대 장점이라면 조선사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려사의 재조명입니다. 특히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여러가지 전쟁, 전투의 디테일이 아주 좋았습니다. 수록된 내용 중 그나마 좀 아는 전투는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 정도 뿐, 나머지는 새롭게 안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대표적인 예로 몽골의 1, 2차 일본 원정에 대한 상세하게 기술을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일본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 하다가 '카미카제'의 덕으로 운 좋게 살아났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렇지만은 않더군요. 1차 원정 때에는 하카다 만에서 일본 무사 집단 고케닌의 심한 저항에 부딪힌 이유도 크다고 설명되거든요. 총사령관이 철군을 주장할 정도로요. 2차 일본 원정 역시 가마쿠라 바쿠후가 해안에 방어벽, 즉 방루를 세운 덕에 상륙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무사들의 분전으로 방어선을 유지한게 침략을 모면했던 결정적 이유였다고 하고요.
물론 마침 불어온 태풍이 원정 실패의 가장 큰 이유라는건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바쿠후와 고케닌, 일본군의 분전이 뒷받침 되었다는건 분명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이 와중에 십중팔구 죽을게 뻔한 이키시마 지휘관으로 임명된 인물은 총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진자이부교 쇼니 쓰네시게의 아들이었다는 인선은 또 다른 감탄을 불러일으킵니다. 일본군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 눈에 거슬리기도 하지만,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본받을 만한 점도 분명 있죠.
그리고 공민왕의 개혁 정책이 좌절된 계기인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준동도 인상적인 항목입니다. 홍건적과 왜구 모두 단순한 도적의 무리로 알았는데, 홍건적은 당시 북송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여 대송국을 세운 당당한 혁명군이었고, 왜구 역시 5백척에 달하는 배로 침략을 해 올 만큼 그 수가 엄청났을 뿐 아니라 일본 영주로 볼 수 있는 패가대만호, 아기발도와 같은 장수들이 있다는 점에서 일본 정규군과 다름이 없었다라는 시각이 아주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전쟁 영웅들을 경계하여 숙청한 공민왕의 정책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게 된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던가, 이 때 이성계의 활약이 시작되었다던가 하는 소소한 뒷 이야기도 볼거리였고요.
승리하거나, 또는 최소한 지지는 않은 그런 전투가 많다는 점도 의외였습니다. 대승을 거둔 귀주 대첩 외에도 윤관, 척준경의 활약이 돋보이는 귀문관 전투, 여진족의 공격을 버텨낸 길주성 전투, 당대 최강 몽골군을 막아낸 충주산성 전투가 그러합니다. 대포로 왜구를 박멸한 진포, 황산 대첩도 대승에 속할테고요. 또 강제로 참전하게 된 몽골의 1,2차 일본 원정도 최소한 지지는 않았으니 수록된 10개의 전투 중 7개 항목이 최소한 지지는 않은 셈입니다. 실제로 이 정도 승률이면 전투 국가라 불러도 좋을 정도죠. 하긴... 무신 척준경, 이성계가 활약한 나라에다가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던 나라이기도 하니 당연한 결과일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전작에 비하면 여러모로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책의 구성부터가 문제에요. 실제 전쟁을 생중계한다는 본편의 컨셉이 제대로 살아있지 못하거든요. 이러한 컨셉이 본문과 잘 맞아 떨어졌던 전작대비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또 전작에 비해 부족한 도판(특히 지도)과 불친절한 설명도 문제입니다. 고려의 전투가 주로 북방에서 이루어지다 보니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지명이 별로 등장하지 않는데, 친숙하지 않은 단어나 지명은 보다 자세히 설명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수록된 지도도 내용과 묶어서 이해하기에는 지명, 구성의 복잡함 탓에 난이도가 제법 높은 편이거든요. 여러차례에 걸친 원정과 전투가 반복된 경우는 순서대로 풀어내는 방식을 사용했어야 합니다. 그 외 중간중간 오타도 제법 있는 등 완성도, 디테일 면에서 아쉬움을 많이 남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잘 알지 못했던 역사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 만큼은 좋았지만 완성도때문에 조금 감점합니다.
2016/04/09
그들이 본 임진왜란 - 김시덕 : 별점 2점
| 그들이 본 임진왜란 - |
17~19세기 일본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였다는 오제 호안의 "다이코기", 하야시 라잔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호리 교안의 "조선정벌기", 그리고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행한 장편 역사 소설 "에혼 다이코기"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주제가 흥미로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는지부터 시작하여, 전쟁의 전초기지인 나고야성 건립,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한 전쟁 서사, 명나라 원군의 출정과 화의 시도, 정유재란과 히데요시의 죽음, 그리고 전쟁의 종결까지를 순차적으로 설명해 주는데,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아 특별히 새로운 정보는 없었습니다. 시각의 차이는 존재해도, 역사적 사실 자체는 크게 다르게 다루어지지는 않은 탓입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통역에 대한 설명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전쟁 중이니만큼 통역은 필수였고, 쓰시마번의 소 요시토시가 보유한 통역뿐 아니라 점령지에서 확보한 인력도 활용했다고 합니다. 그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고려말에 대하여"라는 한국어 회화집이 존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 길인가", "곧이 이르라", "나이 몇이고", "자식 있는가" 같은 질문형 문장부터, "피리 부는가", "장인인가", "글 하는가"처럼 포로 중 유능한 인물을 식별하기 위한 문장들, "잘 씻으라", "술 덥혀라", "이거 가지고 있어라" 등 포로를 부리기 위한 표현, 그리고 "사람 많이 죽였다", "네 목 벨 것이야"처럼 위협적인 문장까지 수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전 상황에서 상당히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씁쓸했던건 여성을 성폭행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고운 각시 더불어 오라", "옷을 벗으라" 같은 문장이 회화집에 있었다는 설명은 읽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로 진출하여 '오란카이'라는 말을 듣고 '오랑캐'를 상대하겠다며 여진족 지역을 침공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고,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을 공격해 승리한 전투가 문헌상에 "세루토스"라는 거인을 이긴 전투로 묘사되는데 '세루토스'는 절도사를 의미하는 표현이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일본 측 문헌이긴 하지만, 조선군 인물의 활약도 일부 언급됩니다. 유극량을 비롯해 송상현, 류성룡, 신각, 곽준, 곽재우 등이 기록되어 있고, 이순신은 아예 '영웅'으로 칭해집니다. 물론 이러한 서술은 일본군의 우수함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그럼에도 조선 인물의 언급 자체는 반가웠습니다. 행주산성 전투에 이가 지역의 닌자가 투입되었다는 기록도 꽤 신선하게 느껴졌고요.
다만 이 책에서 묘사된 전쟁은 삼국지의 장면처럼 과장되고 영웅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영웅으로 이상화된 반면,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에도 시대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한 고니시가 할복하지 않고 처형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당시의 유교적 가치와 충돌했다는 해석이 붙습니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사료적 가치 측면에서는 그리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깊이 있는 내용도 부족하고,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다고 하기에는 다소 평이해서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 책 보다는 "징비록" 정도만 읽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20/02/23
그때, 맥주가 있었다 -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 이상원.장혜경 : 별점 2.5점
![]() | 그때, 맥주가 있었다 - ![]() 미카 리싸넨.유하 타흐바나이넨 지음, 이상원.장혜경 옮김/니케북스 |
유럽의 기나긴 역사에서 맥주가 중요한 대목을 장식했던 이야기들을 선별하여 소개해 주는 독특한 미시사, 음식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역사 속 맥주가 관련된 특정한 사건을 수 페이지 정도 소개한 뒤, 해당 사건과 관련된 현대의 맥주를 마지막에 소개하는 식으로 구성된 스물 네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취지에 걸맞는 내용이 많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연히 맥주 때문에 역사의 흐름이 바뀐 이야기는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어떤 한 장면에서 맥주가 멋지게 등장하거나 활용된 정도를 기대한 정도이지요. 그러나 절반 이상의 이야기가 그렇지 못합니다. 단순히 유럽의 특정 역사를 소개하면서 '그 때는 아마 맥주를 마셨을거다' 정도에 그치는 탓입니다.
물론 추정 자체는 꽤 그럴싸 합니다. 문제는 사료로 증명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조금 맥주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야기들은 단지 등장인물들이 맥주에 관련된 직업에 종사했거나, 맥주 회사가 관련되어 있는 정도에 그치고요. 예를 들자면 난센의 북극 탐험은 단지 링그네스 양조장에서 탐험 비용을 후원했을 뿐입니다. 히틀러가 맥주집에서 바이에른 정부를 실각시키고 제국 정부를 수립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역사를 맥주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건 억지고요. 옥스퍼드 대학 문인들이 펍에서 열리는 문학 클럽에 참석하다가 "반지의 제왕"과 "나니아 연대기" 등을 발표하게 되었다는 것 역시 장소가 펍일 뿐입니다. 딱히 맥주와 관련이 있지는 않아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 장관 역할을 멋지게 수행했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이야기나 체코 대통령 하벨의 이야기는, 그 둘이 술집에서 일했던 경력이 있다는게 전부입니다.
그래도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도 많고 시기적으로는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을 때 부터 현대까지, 장소로는 유럽 전역을 무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그 폭은 상당히 넓고 방대합니다. 덕분에 재미있는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들이 적지는 않은 편이에요.
맥주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부터 살펴보자면, 30년 전쟁 당시, 목마른 스웨덴 왕 구스타브 아돌프가 농부로부터 맥주를 대접받은 후 커다란 루비가 박힌 금반지를 답례로 선사하고,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일화는 명백히 맥주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료로 증명되지는 않은 전설급의 이야기라고는 하지만요. 그래도 이 전설 후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계속 맥주를 만들어 왔으며, 지금의 크로스티츠 양조장은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양조 시설 중 한 곳으로 대표작인 '파인헤르베스 필스너'는 라벨에 구스타브 아돌프의 초상화를 담아 판매되고 있다고 합니다. 400년 이상 된 전설 속 맥주라니 마케팅으로는 더할 나위 없네요.
1836년, 유럽 대륙 첫 철도 운송 화물이 뉘른베르크 레데러 양조장에서 퓌르트로 보낸 맥주 두 통이었다는건 역사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레데러는 현재도 독일 리데베르거 그룹의 계열사로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를 계속 출시하고 있답니다.
파스퇴르가 맥주 양조 분야에서 독일을 물리치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맥주가 중심입니다. 영국 위트브레드 양조장과 협력하여 최적의 열처리 온도가 섭씨 50~55도라는걸 알아내는 등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맥주에 관한 연구"라는 유럽 맥주 양조인의 경전과도 같은 책을 출간했다는 내용이니까요. 그런데 그의 맥주 실험의 가장 큰 수혜자는 프랑스가 아니라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양조장이라는게 재미있네요. 결국 칼스버그에서 파스퇴르의 꿈이었던 미생물없는 라거 맥주 효모 배양에 성공했다니 진짜 후계자인 셈입니다.
처음 알게 된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오줌싸게 소년 동상의 모델은 브라반트 공국의 수장인 어린 고드프리 3세로,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어린 나이로 출정했을 때 반란군을 향해 오줌을 싼 게 유래라는 설이 대표적입니다. 이 때, 유모가 맥주를 마시고 수유를 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맥주를 마셔서 요의를 느꼈을 거라고 설명하는건 좀 억지스러웠지만, 나름 재미있었어요. 함께 알려주는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지 브뤼셀의 전통있는 맥주 '램빅'도 아주 입맛을, 아니 흥미를 돋구고요.
스웨덴의 미식가 전쟁 영웅 요한 아우구스트 산델스 역시 이전에는 알지 못했었던 인물입니다. 1808년, 스웨덴과 러시아가 핀란드에서 벌였던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입니다. 다만 소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맥주 관련된 일화는 없습니다. 러시아 군 보급품을 털었을 때, 맥주도 함께 털었을거라고 추정하는게 전부죠. 그래도 지금 '산델스'라는 이름의 맥주가 산델스가 활약했던 핀란드 양조장 올비에서 양조되어 판매된다니 한 번 마셔보고 싶네요.
근현대사로 넘어오면서는 재미가 덜하지만, 1935년 투르 드 프랑스 경주에서 맥주 탓에 벌어진 순위 변경이라던가, 이탈리아 경제 성장기에 함께 발전한 페로니 맥주의 마케팅 전략, 아일랜드가 무섭게 성장하다가 리먼 사태 등으로 휘청일 당시, 카우언 총리의 기네스 맥주 사랑 등은 기억에 남네요. 특히 폴란드의 맥주 애호가 정당 이야기는 온갖 정당이 창궐하는 지금의 우리나라를 연상케 해서 제일 인상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획 의도대로 완벽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 알게된 이야기들이 많기도 하고, 저자들의 글 솜씨도 유쾌하기 때문이죠. 맥주 한 잔 하면서 읽으면 더욱 좋지 않을까 싶네요. 마지막으로, 책에서 소개하는 맥주 리스트를 인용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파는 맥주는 한 개 씩 구입해서 마셔볼 예정입니다.
- 생 푀이엥 트리플 St-Feuillien Triple 벨기에
- 칸티용 괴즈 100% 램빅 바이오 Cantillon Gueuze 100% Lambic Bio 브뤼셀 (벨기에)
- 아인베커 우어 보크 둔켈 Einbecker Ur-Bock Dunkel 아인베크 (독일)
- 린데만스 파로 Lindemans Faro 블렌제비트 (벨기에)
- 우어 크로스티처 파인헤르베스 필스너 Ur-Krostitzer Feinherbes Pilsner 크로스티츠 (독일)
- 발티카 No.6 포터 Baltika No.6 Porter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 A. 르꼬끄 포터 A. Le Coq Porter 타르투 (에스토니아)
- 올비 산델스 Olvi Sandels 이살미 (핀란드)
- 레데러 프리미엄 필스 Lederer Premium Pils 뉘른베르크 (독일)
- 위트브레드 베스트 비터 Whitbread Best Bitter 웨일스의 마고 (영국)
- 칼스버그 Carlsberg 코펜하겐 (덴마크)
- 링그네스 임페리얼 폴라리스 Ringnes Imperial Polaris 오슬로 (노르웨이)
- 그랭 도르주 뀌베 1898 Grain d'Orge Cubee 1898 릴 (프랑스)
- 레벤브로이 오리지널 Lowenbrau Original 뮌헨 (독일)
- 베를리너 킨들 바이세 Berliner Kindl Weisse 베를린 (독일)
- 크로넨버그 1664 Kronenbourg 1664 오베르네 (프랑스)
- 그래비타스 Gravitas 브릴 (영국)
- 스핏파이어 프리미엄 켄티시 에일 Spitfire Premium Kentish Ale 파버샴 (영국)
- 페로니 나스트라즈로 Peroni Nastro Azzurro 로마 (이탈리아)
- 크라코노시 스베틀리 레작 Krakonos Svetly Lezak 트루트노프 (체코)
- 지비에츠 Zywiec 지비에츠 (폴란드)
- 사라예브스코 피보 Sarajevsko Pivo 사라예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기네스 드래프트 Guineness Draught 더블린 (아일랜드)
- 하이네켄 Heineken 암스테르담 (네덜란드)
2004/11/02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 별점 4점
|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아침이슬 |
몇권 읽어왔던 십자군 관련 역사서의 대미를 장식한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아랍계 저널리스트 출신 작가 (레바논 출신이라고 하더군요)가 당대의 역사서를 인용하며 그야말로 아랍인의 시각으로 십자군 전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십자군을 국적 불문하고 모두 "프랑크 인"으로 묘사하는 것에서부터, 초반의 십자군의 승승장구를 십자군의 당시 무적과도 같았던 기마병 때문만이 아니라 이슬람 세계의 분열이 큰 원인을 차지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초반부의 이슬람 세계의 혼돈기에서부터 장기, 누르 알 딘을 거쳐 이후 살라딘의 아유이브 왕조, 그리고 마지막의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까지의 이슬람 세계 통일사에 내용의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고요.
일견 아랍식으로 쓰여져 이름도 외우기 힘든 여러 제후들과 왕, 영웅들이 등장하는 딱딱한 역사서 같지만 하여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놓고 싸우는 내용과 당대의 큰 전투들이 여러 전략, 암투와 어우러지는 내용은 "삼국지"와 비교할 만큼 큰 재미를 안겨다 줍니다. 다른 십자군 역사서들은 전체적으로 조금 딱딱하고 지루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책은 아무래도 전문 "작가"가 쓴 만큼 소설적인 재미가 보다 뛰어난 듯 싶어요. 무엇보다 소설가 적인 상상력 보다 고증에 의거하면서도 이만큼의 재미를 끌어내는 것이 대단하다 할 수 있겠죠.
또 그간 알고 있었던 상식을 깨는 이야기도 많고, 전형적인 서양 중심의 시각으로 알고 있다가 색다른 시각과 상황으로 해석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내용도 다수 있어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아랍인들도 인정했던 티베리아스의 레몽 이야기나 독일의 프리드리히 왕이 이슬람 세계에 경도되어 서로 우애를 주고 받은 사이까지 발전했다거나, 몽고제국의 침략 시 프랑크 왕국들과 몽고 제국이 동맹을 맺어 이슬람 왕국을 위협했다는 내용 같은 것은 처음 접한 내용이라 무척 신선했어요.
아울러 아랍인의 시선으로 보았기에 당연하겠지만 유명한 이슬람의 제후들과 영웅들, 의외로 그들이 유일하게 인정했다는 로마제국의 황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에게도 유명한 "말리크 알 인키타르 - 사자왕"리처드등의 유럽 십자군 인물들의 묘사가 거의 없는데 이런 종류의 역사서로는 약간 특이하기도 하네요.(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린스 아르나크" 르노 샤티옹의 묘사가 약했다는 점 정도는 약간 아쉬웠습니다만...)
여튼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치밀한 고증과 조사를 바탕으로 한 역사서이긴 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재미와 지적 흥분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보기드문 책입니다. 유럽인의 시각에서만 십자군 전쟁을 보아 왔다면 한번쯤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06/08/19
저주받은 자, 딜비쉬 (Dilvish, The Damned) - 로저 젤라즈니 / 김상훈 : 별점 2.5점
![]() | 저주받은 자, 딜비쉬 - ![]()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너머 |
형이 사둔지는 꽤 되었지만 그닥 손이 가지 않다가 얼마전 읽게된 책입니다. 일단 손이 가지 않은 이유는 형의 혹평도 많이 작용했기에 아무리 젤라즈니 선생의 책이지만 그동안은 좀 멀리하게 되었네요. 하지만 읽고 나니 생각보다는 재미있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단편집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딜비쉬와 그 친구인 블랙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딜비쉬는 이 바닥에서는 좀 뻔한 설정의 재반복이긴 합니다. 예를 들자면 고귀한 자의 후예로 용병 생활을 통해 해방자로 거듭나는 사연이나 타고난 강함, 냉정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 모두 이런 영웅담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반복된 이야기이긴 하죠. 그러나 저주받아 떨어졌던 지옥에서 익힌 주문과 보이지 않는 검과 엘프의 선물이라는 녹색장화 (발자국이 남지 않고 어딘가에서 떨어지거나 할 때 발부터 떨어지게 됨) 라는 아이템 등 디테일이 특이하고 젤라즈니 선생 특유의 묘사가 좋아서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가져다 주는 인상적인 캐릭터로 창조된 것 같습니다.
또한 강철로 된 말같은 형상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친구 블랙의 설정은 그야말로 왔다!입니다. 판타지의 기본이 되는 아이템인 "말" 그 자체를 주인공의 하나로 만드는 발상이 기발하기도 하지만 이 말이 강철로 된 몸을 지녀 거의 무적에 가깝고 마법까지 쓸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말(言)도 하는데 이 블랙이 지껄이는 대사가 시니컬하면서도 꽤나 유머스러운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여자가 길을 지나는 딜비쉬를 붙잡고 애인을 구해달라고 통사정 할 때 하는 말입니다. "이건 고전적이다 못해 해묵은 수법 아니오. 저 여자 뒤를 따라가면 매복하고 있던 무장한 사내 두어명이 당신을 덮칠거요. 그자들을 처치하면 여자는 뒤에서 당신 등을 찌를 거고. 이런 것을 소재로 한 발라드까지 나와 있지 않소"
하지만 이러한 멋진 설정도 이야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겠죠? 이 책에는 총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딜비쉬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셀린데의 노래"를 제외한다면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셈이죠. 저는 개인적으로는 스케일이 큰 전쟁 이야기 보다는 적은 규모의 무대와 인물들을 바탕으로 색다른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메라이사의 기사" 와 "악마와 무희",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저주받은 자 딜비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이건 순전히 제 개인 취향이니 다른 분들은 다른 편이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제 취향이든 아니든 대부분 본격적인 영웅담을 한번 써 보고 싶어서 손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맛이 잘 살아 있어서 쭉쭉 읽는 재미 하나는 확실합니다.
뭐 젤라즈니 선생 수준에 걸맞지 않는 단순하고 뻔한, 그냥 무협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알맹이가 없긴 하지만 젤라즈니 선생도 심심풀이로 쓰고 싶은 책도 있을 테니까요. 작품의 수준을 논하지 않고 젤라즈니의 작품에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수준으로 보면 적당할 것 같네요. 작가 이름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이라 생각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7/01/14
묵공 (墨攻: Battle Of Wits, 2006) - 장지량
2007년도 들어 처음 본 영화같군요. 어둠의 경로를 통해 구해 보았습니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영 땡기지가 않아서... 원작 만화를 보긴 했지만 만화도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누구나 이야기하는 아스트랄(?)한 결말은 둘째치고라도 양성 사수 이후의 이야기는 너무 사족이 심하다고 보여져서요. 그래서 가장 완성도 있던 에피소드인 양성 사수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든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결과물 역시 생각만큼의 스케일, 생각만큼의 이야기 구조를 지닌채 완결되었다고 보여지는군요. 묵가의 혁리와 조나라 장수 항엄중의 대결 구조가 이 스토리의 핵심인 만큼 그런대로 이야기 줄기는 잘 잡아서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화는 만화이고 영화는 영화일 뿐이겠지만, 영화는 만화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평민출신 자단을 장군으로 발탁하는 이야기는 원작의 평범한 백성이 양성 사수의 핵심이 되는 이야기보다 설득력도 떨어질 뿐더러 평범한 백성이 전쟁과 평화에 대해 자각을 갖게 된다는 주제를 전혀 표현하지 못하거든요. 그리고 억지로 끼워 맞춘 여성 캐릭터 일열은 만화에서의 혁리 캐릭터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 빼는 것이 나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불필요한 캐릭터들을 배치시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원작처럼 정말로 쪼끄만 성에서 백성들과 똘똘뭉쳐 사수전을 진행하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더 리얼할 것 같기도 하고요.
또한 만화를 보신 분들이 기대하셨을 혁리와 항엄중의 두뇌싸움이라던가 수성 방법의 논리적인 부분 같은 것 역시 거의 건너뛰고 있고, 특히 주인공이자 가장 핵심적인 캐릭터인 혁리의 영웅성만 강조될 뿐 민초들을 규합하는 부분이나 묵가의 사상을 전파하는 것에 대한 설득력이 무지하게 떨어져서 영화 내내 전쟁을 부정하지만 결국 전쟁영웅에 머무르는 평면적인 캐릭터로 전락해 버린 것이 제일 아쉽더군요. 마지막 부분에서 모략이 오가는 것은 좋았지만 외려 영화의 주제의식을 떨어트릴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실망했던 것은 영화의 스케일이었습니다. 조나라의 십만 대군이 쳐들어 오는 거대한 스케일은 한 5분 나오고 결국 조나라 결사대 천명만 남는 것이 주요 전개가 된다는 것, 한마디로 말해 스케일이 100분의 1로 주는 전개가 만화와는 다르게 너무 급작스럽게 이루어 지기 때문에 뭔가 좀 스펙터클한것을 기대했지만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군요. 정말 예고편에 나온 것이 스펙터클의 전부인거 같아요.
어차피 어둠의 경로로 본 것이라 군말하기 어렵지만 솔직히 극장에서 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는 영화라고 밖에는 말 못하겠네요. 두뇌싸움이나, 깊이있는 주제의식이나, 아니면 스케일이던가 하나의 꼭지만 확실히 보여 주었어도 더 완성도 높은 영화가 되었을텐데 말이죠.
아울러 합작 영화답게 국내 배우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관심거리였는데 안성기씨의 항엄중 역할은 실미도의 연기를 그대로 보여주긴 하지만 (특히 마지막 장면은 "날 쏘고 가라" 그대로더군요) 그런대로 무난했다 보여집니다. 그리고 슈퍼 주니어라던가? 최시원이라는 친구가 연기한 양왕 아들 양적은 스티븐 시걸의 연기, 즉 표정이 어떤 장면에서도 절대 바뀌지 않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성우 더빙 덕인지 그런대로 볼만 했었습니다.
2017/01/14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 윤덕노 : 별점 3점
| 전쟁사에서 건진 별미들 - 윤덕노 지음/더난출판사 |
이런저런 음식관련 저서로 유명한 음식 컬럼니스트 윤덕노씨의 신작입니다. 제목 그대로 전쟁사와 관련된 음식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음식이라면 제가 아는 것만 해도 통조림, 타르타르 스테이크, 햄버거, 양고기 전골, 만두, 크로와상, 스팸, 환타, 고기감자 조림 등 많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6장 52항목에 달하는 방대한 양 덕분에 처음 접하는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정 주제를 잡아서 역사와 정보를 잘 요약해 주고, 하나의 주제에서 여러 이야기를 함께 진행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마무리하는 글솜씨 역시 윤덕노씨 다왔고요.
그러나 이전 유사한 책에서 느꼈던 문제점도 똑같은데, 가장 큰 문제는 실제 '전쟁'과는 무관하거나, 너무 억지로 가져다 붙인 항목들이 제법 많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군대의 보급 작전, 전쟁터에서의 굶주림을 가지고 특정 요리를 대입하는 식이에요. 그리고 어디서 사료를 가지고 왔는지 모를 이야기들도 상당히 많아서 자료적으로 조금 애매한 부분도 없지는 않고요.
그래도 재미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식문화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이야기 몇개 소개해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독일군 각성제 초콜릿 쇼카콜라"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 항공전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각성제용으로 지급한 커피, 초콜릿, 콜라를 합친 식품입니다. 카페인이 풍부한 식품 세 개를 합쳐 놓은 덕분에 졸음을 날려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쇼카콜라'로 초콜릿에 커피와 콜라의 성분이 넣었는데, 각각 카카오는 60%, 커피 2.6%, 콜라 열매 1.6%의 비율이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그렇게 독해 보이지는 않는데, 한번 먹어보고는 싶네요. 특수 작전 투입 병사에만 지급되어 일반병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종전 무렵에는 최후의 결사항전을 벌이기 전 마지막으로 지급되어 되려 사기를 떨어트리기도 했다는군요.
"전장에 날아든 요리책"
"위대한 장군과 훌륭한 요리는 전쟁터에서 만들어진다." - "C-레이션 요리책" 첫 머리말.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에게 보내진 요리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C-레이션으로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소개해 주는데, 같이 보내진 타바스코 핫 소스의 제조회사 사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하는군요. 식품회사 메킬레니의 회장 메킬레니 역시 2차대전 참전용사라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타바스코 핫 소스에 대한 짤막한 역사도 함께 소개되는데 이 역시 인상적이에요. 남북전쟁의 부산물로 처음 출시되었다고 하며, 이후 다양한 전장에서 활약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지휘관의 호들갑과 미숫가루 파동"
지금 생각해도 미숫가루는 정말 전쟁에 유용하다 싶을 양식입니다. 일단 불과 물 모두 필요가 없고 많은 양을 옮기기도 용이하니까요. 그런데 이 미숫가루의 역사가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몰랐습니다. 근거는 조선시대 "동문선"입니다. 이 책에 화랑들이 미숫가루를 먹었다는 시가 실려있다고 하네요. 사료로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의 영웅에서 조롱의 대상으로"
광해군에게 맛있는 요리를 바쳐 권력을 잡았다는 '사삼 각로' 좌의정 한효순과 '잡채 상서' 호조판서 이충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사삼 각로', 즉 더덕을 맛있게 요리한 한효순의 더덕 요리 레시피도 실려있는데, 더덕으로 만든 강정인 '밀병'이라고 합니다. 이를 서산 어리굴젓의 유래 중 하나로 추정될 정도로 음식 솜씨가 각별히 뛰어났던 한효순 집안의 손맛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요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도 '한'씨 가문의 피를 이은 덕분이려나요?
하지만 임진왜란 때 용장이기도 했던 한효순이 광해군 때의 처신으로 손가락질을 받았고, 결국 인조반정 이후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 수난을 당했다니 이 또한 인생무상입니다.
"케이준은 원래 요리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메뉴에서 흔히 보아왔던 '케이준 Cajun'이라는 음식의 유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지금과 같은 조리 용어가 아니라, 본래 북아메리카에 살았던 프랑스계 이민자의 후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군요. 프랑스와 인디언 연합군이 영국에게 패한 후 프랑스계 이민자 후손들이 대거 남부 루이지애나 지방으로 추방된 이후, 루이지애나 지방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늪지대 해산물의 갯냄새를 없애기 위해 강한 향신료를 듬뿍 넣은 것이 요리의 시초라고 하고요.
"거북선과 과메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식량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한 고찰입니다. 둔전제를 통한 농사, 소금을 만들어 곡식과 교환하여 식량을 마련한 것에 더해 어업, 그 중에서도 청어를 잡아 군량 및 곡식과 교환했다고 합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틀에 걸쳐 40만 마리의 청어를 내다 팔았다고 하니 그 양이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접시 위의 초밥 두 개"
초밥이 보통 한 접시에 대략 10개 나오는 이유, 회전초밥의 작은 접시 위에 같은 초밥 2개가 올려져 있는 이유를 알려줍니다.
패전 후 배급제로 초밥을 팔 수 없게 된 초밥 요리사들이 손님이 가져온 쌀을 초밥으로 만들어주기 시작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1인당 쌀 한 홉으로 초밥 10개까지만 교환할 수 있는 제한 조건 탓에 이렇게 된 것이죠. 이 때 생선 역시 모자라서 10개를 모두 다른 생선으로 만들 수 없었던 탓에, 같은 종류의 초밥 2개를 내기 시작했고요.
2020/02/02
그림엽서로 본 일본 근대 - 도미타 쇼지 / 유재연 : 별점 3점
![]() | 그림엽서로 본 일본 근대 - ![]() 도미타 쇼지 지음, 유재연 옮김/논형 |
1년여 전, "호텔"이라는 미시사 서적으로 접했던 도미타 쇼지의 또다른 미시사 서적입니다. 제목 그대로 메이지~다이쇼~쇼와 시대 일본의 그림 엽서들을 통하여 당대의 이슈, 인물, 유행과 명소 등을 조망하고 있습니다.
각 소재별 그림엽서 도판과 해당 그림 엽서에 보여지는 장면에 대한 소개가 한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론과 이런저런 대표 그림 엽서들을 컬러로 수록한 초반부를 지나서 1853년, 가에이 6년의 페리 제독 내항에서부터 본격적인 조망이 시작됩니다.
그 뒤 내용들은 실제 시간 흐름과 동일한 연대순입니다. 역사적 사건보다는 인력거 제조와 영업 허가, 신식 우편제도의 시작, 오사카에 설치된 조폐료, 육군성과 해군성 발족, 철도 개통, 군복을 입은 천황 등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생활 밀착형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다는게 눈에 띄고요. 특히 많이 소개되는 것은 여러가지 새로운 건축물들입니다. 전작에서도 소개했던 호텔들은 물론이고 신식 다리, 각종 정부 기관 건물이나 역사, 박물관과 조선소, 세관 등 주요 건물은 거의 빠짐없이 다룹니다. 아무래도 당대 보기 힘들었던 '최첨단' 건물이 그림 엽서로 사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겠지요. 유명 명승지 사진이 수록된 관광 안내 책자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한 페이지씩 넘겨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모두 일본의 건물이고 역사이기는 하나 친숙한 지명이나 장소, 건물 등이 간혹 등장하며, 이에 대한 정보들 역시 꽤 흥미로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도 피서지로 유명한 가루이자와가 피서지로 발전하게 된 건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알렉산더 C.쇼와 영어 교사 제임스 M. 딕슨이 방문한게 계기라는 것 처럼요. 가루이자와가 피서지로 적합하다 생각한 쇼가 가루이자와에 별장을 갖춘 교회를 지은 뒤, 외국인들에게 가루이자와를 널리 알려 유명해졌다고 하네요.
메이지 시대인 1900년대 초기의 긴자 거리와 아사쿠사의 풍경,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유원지 하나야시키의 개장 모습 등도 지금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자료들이며 그 외 다양한 박람회라던가, 라디오 방송의 시작과 같은 사회 뉴스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는 오페라 가수 후지와라 요시에, '아래향'으로 유명했던 일본계 가수 리코란 (이향란)의 엽서도 흥미로왔습니다. 사할린과 대만, 조선과 같은 당시 일본 식민지에 관련된 엽서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히 수록된 편이고요.
이처럼 새로운 신문물이나 유행 관련된 엽서가 대부분이지만, 도고 헤이하치로나 히로세 중좌와 같은 전쟁 영웅들과 러일 전쟁 관련 엽서들, 다양한 개선문에 관련된 엽서들, 만주 점령 당시의 엽서 등 극우화되며 전쟁으로 치닫는 일본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엽서들을 통해 당시 분위기도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메이지, 다이쇼 천황의 사망이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엽서들에서는 천황의 신격화도 잘 알 수 있었고요. 그 외에도 도판이 풍부하며, 글의 양도 많지 않아서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 위주, 재미 위주가 아니라면 그렇게 큰 자료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과 그 주변국의 근대 시대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이 없다면 크게 찾아볼 필요는 없는 책이죠. 저는 이 시기에 항상 흥미를 가지고 있기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만,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7/02/16
켈리의 영웅들 (Kelly's Heroes) - 브라이언 G 허든 (1970) : 별점 3.5점
켈리는 정찰활동중에 생포한 독일군 장교로부터 1600만불 상당의 금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 마침 소속 부대가 3일간의 짧은 야전 휴가를 얻은 것을 이용하여 켈리는 부대를 꼬드겨 금괴 탈취를 위해 적 후방 30마일 위치에 있는 마을 은행을 털기 위한 작전을 세우고, 작전이 진행되어 적의 방어벽을 돌파한 켈리의 부대를 용감한 병사들로 오해한 장군은 전 병력을 투입하여 역습에 나서게 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팽팽한 얼굴로 나오는 1970년도 전쟁영화입니다. 요새 전 최신 영화보다는 좀 낡은 영화가 좋더라고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어쨌건 1970년대 영화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미군이 무조건적인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고 단지 "돈"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훈장이나 명예도 (당연하지만) 돈 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내용에다가, 심지어는 독일군 마저도 돈 앞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독특한 시각이 설득력있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또한 켈리와 그 일당들이 은행까지 가기위해 적진을 돌파하여 적 후방에서 전투를 벌이는 상황을 장군이 무선을 감청하며 오해하는 장면이 무엇보다 발군인데요. 예를 들자면
- 켈리 - "(금괴때문에) 우리는 5분도 기다릴 수 없다"
- 벨라미 - "다리가 맛이 가서 안돼! 우리도 (금괴때문에) 이 작전에 목숨을 걸었다!"
- 장군 - "저 용기와 투혼을 보라고!!!"
마지막에 독일군 티거 전차 1대가 남은 상황에서 그 전차를 잡을 수 있는 방도가 없기에 리더인 켈리와 빅죠, 그리고 기갑대 리더 오드볼 3명이 황야의 무법자같은 분위기로 담판을 지으러 가는 장면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서 연상되는 서부극 분위기까지 풍겨주는 등 여러모로 즐길 거리가 많은 유쾌한 영화였습니다.
오락영화답지않게 고증도 나름 신경쓴 편이라 갖가지 군장이나 장비가 꽤 디테일하고 셔먼 탱크를 몰고 도적질(?)에 합류하는 오드볼이 티거 전차를 보고 절대로 잡을 수 없다고 하는 장면 등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티거 전차의 디테일도 제가 본 영화 중에서는 최상위권에 속할 정도로 잘 표현되어 있더라고요. 영화에서는 셔먼으로 티거를 1대 잡기는 하지만 이건 미국 영화니까 이 정도까진 봐 줘야죠.
중간중간 에피소드들이 제대로 정리가 안된채 이어지는 느낌이 좀 들기는 하며, 철저한 오락 영화 답게 전투에서 우리편이 죽지 않는 식으로 더욱 즐겁게 꾸며나가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재미나게 볼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여기서 가당치도 않은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식으로 한발 삐끗했더라면 영화가 아주 산으로 갔을텐데 비교적 적당히 마무리되었다 생각되거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나름 최근 영화인 "쓰리킹즈"가 이 영화에서 모티브를 많이 차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드는데 실제로는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PS : 도널드 서덜랜드는 느낌상 당연히 독일군, 그것도 잔인한 장교역으로 나올줄 알았는데 미군에서도 제일 꼴통인 전차장으로 나와서 좀 뜻밖이었습니다.
2004/05/15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 제임스 레스턴 / 이현주 : 별점 3점
|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제임스 레스턴 지음, 이현주 옮김/민음사 |
이 책은 십자군 운동(전쟁), 그 중에서도 3차 십자군 중심의 역사 서적. 특히 3차 십자군에서도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영국의 사자심 (Lion Heart) 왕 리처드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을 축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둘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신성 로마제국의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1세,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5세, 예루살렘의 왕 기, 그의 자리를 노리는 배교자 몬페레도의 콘래드, 기사도의 표상 아벤의 제임스 등 많은 매력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흥미진진한, 한편의 대하 군웅 - 서사극을 방불케 하는 재미를 전해 줍니다.
읽으면서 새롭게 안 사실도 많은데 리처드와 살라딘은 결국 승패를 가르지 못하고 협상 후에 헤어졌으며 그 둘에 관련된 여러 낭만적인 전설은 다 거짓말이었다.. 는 것이 가장 큽니다. 십자군 내부에서의 벌어졌던 분열과 다툼 역시 상세한 설명 덕분에 많이 이해할 수 있었고요. 그 외에도 십자군 당시의 예루살렘 왕국이라던가 전투들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리처드가 진정 용감한 전사였다는 것, 비록 탐욕과 허풍,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긴 하지만 전쟁에 있어서만큼은 탁월했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분으로 실패했지만 살라딘의 부대를 크게 격파한 것은 사실이고, 때문에 제대로 자웅을 겨루지는 못했지만 살라딘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이라는 묘사로 가득해요. 반대로 살라딘은 여러 휘하 아미르 (태수) 들에게서 존경은 받았지만 군사적으로는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고 묘사되네요. 뭐 서양인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나저나, 읽으면서 요사이 이라크의 현실과도 어느정도 겹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역사는 돌고 돈달까요? 십자군 당시에는 “성지”를 탈환한다는 미명하에 남의 나라 땅을 노략질 하고 약탈했다면, 현재는 “석유” 때문이라는 것만 차이점일 뿐 결과적으로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중동 지방 전체가 조각조각 쪼개져 버려 힘을 못 쓰는 덕에 미국의 부시가 새로운 리처드 1세로 등극할 수 있었겠죠. 중동지방에 살라딘 같은 지도자가 있다면 세계 3차 대전이 벌어졌을텐데 우리 같은 변방 국가들에게는 그나마 나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랍인들에게는 대재앙이지만….)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상당히 재미있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런 저런 생각도 들게 만드는 것도 좋았고요. 앞으로 보다 냉정한 평가를 위해서 아랍인의 시각에서 쓴 십자군 책도 한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사실 1차 십자군 때부터 활약한 케라크의 영주 샤티용의 레지널드의 이야기가 더 관심이 있었는데 1차~2차 십자군 때의 이야기는 간략히 묘사해서 아쉽더군요. 희대의 악인이자 도적인 Dark Prince, 케라트의 어둠의 왕자 레지널드는 그의 행적만 묘사해도 대단한 책이 될 것 같은데…
2004/05/24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살라딘 - 스텐리 레인 풀 / 이순호 : 별점 4점
| 살라딘 스탠리 레인 풀 지음, 이순호 옮김, 정규영 감수/갈라파고스 |
얼마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을 읽고 생겨난 십자군과 살라딘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챙겨보게 된 살라딘의 전기.
위대한 군주 살라흐 앗 딘, 즉 살라딘의 일생을 출생에서부터 사망까지 그리고 있습니다. 간단한 일대기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 살라딘의 출생
- 이집트 정복을 발판으로 이루어낸 제국의 건설
-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평정함으로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 성전(지하드)을 통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거의 평정
- 관대한 포로 정책으로 정복하지 않고 남겨둔 티루스를 기반으로 한 3차 십자군과의 공방전과 휴전
- 사망
이러한 내용을 충실한 사료,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상세하고 냉정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서양인 시각에서는 십자군과 기사도라는 잣대에 가중치가 부여될 수 밖에 없는 만큼, 그동안 이교도 군주 살라딘에 대한 세간의 일반적 평가는 사자왕 리처드보다 낮을 수 밖에 없었던 면이 있습니다. 때문에 인지도 측면에서 상당히 낮게 평가되고 있었고요.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모든 상식을 뒤집으며, 또한 살라딘이 왜 아직까지 중동 지방에서 추앙받고 영웅시 되는지 잘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는 전투에서는 거의 항상 승리하고 패자에게는 관대했으며 통치하는 백성들을 아끼고 독실한 이슬람 교도로서 기도와 참회에 충실하고, 스스로는 단 한푼의 부정축재나 사치를 하지 않은 진정한 군주였던 것으로 설명되거든요.
특히나 수없이 많은 배신을 때려버리는 유럽인 이교도들에게 관대한 정책으로 일관하여, 결국 3차 십자군의 난입을 허용하는 그의 실수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뭐 결국 3차 십자군도 성지 탈환에 실패하고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절반의 성공을 이끌어내긴 했지만요. 물론 그도 개인적 원한이 쌓여있던 케라크의 레지널드에게만은 단호한 모습을 보이긴 합니다만.
그의 맞수로 표현되는 사자왕 리처드와의 비교를 통해 본다면 뛰어남이 한층 더 돋보입니다. 사자왕 리처드는 전쟁에는 탁월했지만 다른 어떤 점에서는 살라딘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장점이 단 하나도 없더라고요. 오히려 동네 깡패에 가깝다고나 할까…. 뭐 영국 입장에서야 영웅으로 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이라크인들이 부시라는 존재에 대해 느끼듯 중동인에게는 거대한 재앙일 뿐이었겠죠.
이렇게 서양인이 썼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서양인 시각에서만 바라보지 않은 공정함이 돋보인 살라딘 전기라는 점에서 추천하는 바입니다. 치밀한 도판과 서술로 그려진 전쟁장면과 여러 일화들도 뭐 하나 빼놓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나 아주 만족스러웠어요.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너무 살라딘의 찬양 일색이라 왠지 어색하다는 것 정도? 때문에 별점은 4점입니다. 십자군에 대해 공정한 시각을 가지고 위해서, 또 살라딘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아닌가 싶네요.
2012/01/12
퍼스트 어벤져 - 조 존스톤 : 별점 2점
작년에 개봉했던 마블 히어로 영화입니다. 감상 직후 작성했던 리뷰가 날아가 버린 줄 알고 잊고 있었는데, 우연히 백업본을 찾아내어 늦게나마 올려봅니다. 줄거리 요약은 필요 없으시겠죠?
이 영화의 두 시간여 러닝타임은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허약하지만 애국심은 넘치는 크리스 에반스가 신기술의 힘으로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과정을 그리는 초반부, 군 홍보 모델에서 벗어나 전쟁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중반부, 그리고 레드스컬과의 최후 결전을 다룬 후반부로요.
이 중 초반부는 제법 괜찮습니다. 허약하지만 애국심이 투철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는 크리스 에반스의 캐릭터를 여러 에피소드로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유머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반부 이후의 전개는 심각할 정도로 별로였습니다. 레드스컬의 세계 폭격 계획으로 대표되는 지구의 위기가 전혀 실감 나지 않아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에요. 또한, 캡틴의 친구 버키와 덤덤 더간으로 대표되는 용감한 미군 병사들만 있으면 캡틴이 필요 없을 정도로 히드라 군단의 전력이 형편없다는 점도 몰입을 방해했고요. 대단해 보였던 코스믹 큐브와 그에 관련된 신무기들도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고, 그런 신무기를 보유하고도 미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는 히드라 군단을 보고 있으면, 레드스컬이 대체 무엇을 믿고 히틀러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세계 정복을 꿈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스토리가 별로여도 액션이 멋지다면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장르이기에 위와 같은 단점이 반드시 결정적인 결함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레드스컬이 명배우가 연기했든 말든, 액션만 멋지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기대했던 캡틴의 활약이 부족했기 때문에 액션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단순히 싸움을 잘하는 병사 수준의 느낌이랄까요? 특유의 방패 던지기 장면 몇 개만 볼 만했을 뿐, 조금 힘이 세고 높이, 멀리 뛸 뿐이라서 과거 홍콩 영화 "동방독응" 같은 작품과 비교해도 더 나은 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캡틴의 액션이 십수 년 전 홍금보, 원표가 보여줬던 액션과 별반 다를게 없다면, 이 영화의 가치가 대체 무엇일까요?
게다가 마지막 레드스컬과 캡틴의 1:1 결투는 정말이지... 휴고 위빙이 아까울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소모될 캐릭터는 절대 아닌데 말이죠.
밀리터리물과 슈퍼히어로물을 결합하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전쟁 장면도 부족했고 액션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으며,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점에서도 심각한 결격 사유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 3점, 중반부 1.5점, 후반부 1점의 평균입니다)
많은 분들의 평가대로, 이 영화는 단순히 거대한 "어벤져스" 예고편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조 존스턴 감독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히어로물인 "로케티어"를 연출한 감독이라 나름 기대했는데, 2000년대 이후 작품들이 부진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실망스러웠습니다. 다행히 흥행에는 성공한 듯하지만, "어벤져스"와는 무관한 독립적인 스토리로 속편이 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2020/09/06
죽음과 모래시계 - 도리카이 히우 / 정대식 : 별점 1.5점
![]() | 죽음과 모래시계 - 도리카이 히우 지음, 정대식 옮김/영상출판미디어(주)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동의 작은 산유국 제리미스탄은 고갈되는 석유 자원 이후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감옥 국가"로 거듭났다. 거대한 사형수용 감옥을 만들고, 세계 각지의 사형수들을 돈을 받고 수감한 뒤 사형까지 집행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사형 제도가 쇠퇴함에 따라 흉악 범죄와 무기수의 종신 수용을 위한 비용 증가에 고심하던 각 국은 사형수 한 명당 수만 달러의 비용으로 제레미스탄 "종말 감옥"에 처분을 맡겼다.
이 "종말 감옥"에 부모를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앨런 이시다가 수감되었고, 그는 사형수로 감방장을 맡고 있는 슐츠의 조수가 되어 감옥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 해결에 나서는데....
2016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입니다. 모르는 작가의 모르는 작품이지만, 본격물의 애호가로서 놓치기 힘든 수상 이력이라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형수를 수감하는 "종말 감옥"이라는 설정은 재미있습니다. 감옥의 운영, 죄수의 관리 및 감독 방식 - 죄수 몸 속에 삽입되어 죄수가 특정 지역을 벗어나면 전기 충격으로 기절하게 만드는 마이크로 칩 - 등을 꽤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런 설정들을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기도 하고요. 고작 수만불로 흉악한 사형수를 받아들인다는게 말은 안되지만, 이 정도는 눈 감아 줘야겠지요. 안그러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될테니까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거의 모두가 설득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망작들인 탓입니다. 그나마 처음의 두 편,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과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정도만 조금 볼만한 트릭이 나올 뿐이고, 다른 작품들은 이야기하기도 민망한 수준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다운 본격물도 별로 없고요. 읽어보신 분들이 대부분 칭찬하는 마지막 에필로그의 반전도 저는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평균 별점은 1점 이하 수준이지만, 종말 감옥의 설정만큼은 그런대로 재미있었기에 0.5점을 더합니다. 강호순 같은 범죄자는 이런 곳으로 보내버리면 좋겠네요.
짤막하게 요약한 수록 단편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 담겨있으니 참고하세요.
"마왕 샤보 돌마얀의 밀실"
맨 몸에서 칼이나 만년필을 끄집어내는 물질화 마술로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샤보는 사형 집행 전날 독방에서 난도잘당해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맞은편 독방의 용병 출신 사형수 난조는 목이 베여 죽었다. 완벽한 밀실이고 흉기도 발견되지 않은데다가, 사형 집행 전날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불분명한 상태였다...
샤보는 전쟁 때 손상된 엉덩관절을 인공관절로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장착한 넙다리 인공골두 안이 텅 비어 있있지요. 그래서 그 안에 이런저런 물건을 넣어두었다가 꺼낼 수 있다는게 물질화 마술의 정체입니다. 피부에 작은 구멍을 통해 손을 넣어서 빼낸거지요. 때문에 물질화 마술로 꺼낼 수 있는건 가늘고 긴 물건들(만년필)로 한정되고요. 샤보는 이 트릭으로 몸 속에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어 던져 난조를 죽였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전쟁 때 용병 난조에게 가족을 잃었는데, 그 복수를 직접 하기 위함이었지요. 난죠를 죽인 뒤 칼(에 묶어둔 실 따위로)을 회수하여 자신의 몸을 난자한 뒤 실혈사했습니다. 난자한 이유는 마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습니다. 피를 다 흘리기 전에 칼을 다시 숨길 수 있고, 상처가 많으면 칼을 꺼내는 구멍의 존재도 숨길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물질화 마술이라는 흥미로운 설정과 대담한 트릭은 볼 만 하지만 트릭이 그렇게 설득력 높아보이지 않으며, 자살한 뒤 칼을 다시 숨길 이유가 없다는건 눈에 거슬립니다. 마술의 트릭을 밝히지 않는게 마술사의 사명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아픔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몸을 난자한다는건 말도 안되잖아요? 구태여 사형 집행 전날 난조를 죽인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그나마 이게 이 단편집 최고 작품 중 하나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영웅 첸 웨이츠의 실종"
종말 감옥에서 탈옥한 사람은 딱 한명, 의사 출신의 반체제 정치범 첸 웨이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마이크로 칩을 무력화하였을까? 그리고 왜 훤한 보름달이 뜬 밤 탈옥을 하였을까? 왜 가장 건장한 경비원 다르위시가 감시탑에서 근무할 때 탈옥을 하였을까? 다르위시는 어떻게 죽였을까?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사리흐 아리 파힐은 슐츠에게 사건 해결을 명하는데...
감옥이 나오니 탈옥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겠지요. 두 번째 작품이 바로 탈옥물입니다.
첸 웨이츠가 의사 출신으로 중국인 죄수들의 신임을 얻은 뒤, 그들의 사체를 이용하여 마이크로 칩이 어디있는지 알아냈다는 추리는 괜찮았습니다. 100Kg이 넘는 다르위시가 경비하는 날을 노린 이유도 그럴듯해요. 다르위시의 목에 가죽 밴드를 엮은 끈을 걸어 살해하고, 그의 시체를 버팀돌 삼아 감시탑을 올라간게 진상이니까요. 탑을 오르기 위해서는 체중이 제일 무거운 경비원이 필요했던 겁니다. 보름달도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어 다르위시의 주목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고요.
하지만, 트릭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은 모두 설명도 부족하고 설득력도 낮습니다. 의무실의 허술한 보안으로 메스 한 두개, 죄수 구속용 밴드 여러개를 빼돌려 탈옥에 이용했다는 것부터가 그러하지요. 사형수들이 많은 감방에서 메스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3미터 위의 감시원 목에 올가미를 던져 건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있는 고정된 목표라면 모를까, 살아있는 경비원이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올가미를 보고 피하지 않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밝은 보름달 밤이라 죄수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라면 더더욱 그러하지요.
이거에 비하면 담을 넘은 뒤 야생 낙타를 올가미로 잡아 사막을 가로질렀다는 탈출 방법은 오히려 쉬워보이네요.
이렇게 거대하면서 대단한 감옥 도시가 CCTV없이 감시원에게만 의지하고 있으며, 감시원도 2인 1조가 아니라 1명만 근무를 선다는 등의 허술함에 바탕을 둔 탈옥이라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아울러 영웅 첸 웨이츠가 탈옥 후 현실의 벽에 부딛힌 나머지 3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고 진짜 사형수가 되어 종말 감옥에 복귀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안 나오니만 못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발상은 나쁘지 않지만 추리 퀴즈 이상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감찰관 제마이야 칼리드의 도회"
종말 감옥을 감찰하기 위해 찾아온 감찰관이 배를 칼로 찔려 죽은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감찰에 걸려 좌천될 예정이었단 옥졸 무바라크였다.
악덕 옥졸 무바라크의 혐의가 짙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작중 최악의 빌런이 용의자라면, 없던 죄도 만들어 누명을 씌울 판인데 그를 위해 진상을 밝힌다? 영 와닿지 않아요. 사건을 조사하는 슐츠와 앨런 입장에서는, 감찰관이 자살했건 살해당했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 진상을 밝힐 이유도 없고요. 감찰관이 자살하면서 악덕 옥졸인 무바라크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진상도 별로입니다. 업무에 대한 사명감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감찰관이 지병을 앓고 있었으며, 이를 그의 삭발과 구토 흔적으로 추리해내는 부분 외에는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많이 줘 봤자 1.5점입니다.
"묘지기 라쿠파 걀포의 긍지"
티벳 출신 사형수로 제리미니스탄 어를 익히지 못해 소통이 불가한 죄수 라쿠파 걀포는 홀로 사형 집행된 죄수의 묘를 파는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그가 사체를 다시 파헤쳐 먹었다는 소문이 돌고, 조사를 통해 최근에 묻힌 사형수 사체의 일부가 훼손되어 사라진건 사실로 확인되었다. 슐츠는 고심한 끝에 이를 숨기지만, 사형수 로드리고 소토홀의 시체가 완전히 훼손된게 밝혀지자 걀포 역시 곧바로 사형 집행을 받게 되는데...
소토홀과 걀포가 친구였으며, 티벳인 걀포는 소토홀을 위해 최고의 장례인 '조장鳥'을 치뤄주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앞서 시체를 훼손했던건 그 고기(?)로 독수리를 모으기 위해서였고요. 이 정도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네요. 애초에 수천명의 사형수의 묘지를 감옥 내에 만든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본국 가족에게 인계하거나, 화장하는게 당연하잖아요? 증거도 걀포가 티벳인이라는게 전부입니다.
소토홀이 언어 천재였다는 복선으로 그가 걀포와 친구였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 외에는 뭐 하나 건질게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여죄수 마리아 스코필드의 잉태"
남감방과 분리된 여감방의 죄수 한 명이 임신했다게 알려지고, 이 사건 진상 조사를 위해 여감방 의사 라일라는 추리력으로 유명한 슐츠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다. 그러나 슐츠는 이야기만 듣고 사건 조사를 앨런에게 위임했고, 앨런은 직접 여감방에 방문해서 임신했다는 여죄수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죄수는 앨런의 어린 시절 친구였던 마리아였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지만, 교도소 안에서 임신을 할 리 없지요. 그냥 앨런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작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어린 시절부터 앨런을 좋아했었고, 정말로 그의 아이를 임신하기 위해 레즈비언 관계였던 여의사 라일라에게 부탁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유와 동기, 결말 모두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난다고 해서, 앨런이 여죄수 감방에 방문한다는건 생각하기 어려우니까요. 슐츠와 앨런에게 사건 의뢰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라일라는 거짓말의 뒷 수습을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지도 궁금하고요. 또 이미 임신 3개월이라고 거짓말을 했는데, 그 시점에 앨런의 정자로 마리아를 임신시키면 주차가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었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한 마디로 점수를 줄 수 없는 망작입니다. 이 정도면 나무한테 미안한 수준이에요. 별점은 0점입니다.
"확정수 앨런 이시다의 진실"
앨런 이시다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4일. 그 동안 앨런은 독방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된 부모 살인 사건의 진상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앨런 부모가 죽은 사건에 대한 앨런의 회고라 추리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나마 부모 사건의 도화선이 된 친아버지가 보낸 편지 - 자신이 TS 바이러스의 보균자라는걸 밝히는 - 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친아버지가 슐츠라는걸 알아내는 과정만 추리라 할 수 있지요.
슐츠는 생화학 병기를 연구하던 테러리스트로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서 앨런의 어머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테러로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된 뒤, 종말 감옥에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메일 등을 활용할 수 없었던건 감옥이었기 때문으로, 앨런은 종말 감옥의 편지지 등을 확인하고 자신의 추리가 맞다는걸 확신합니다. 예상대로지만 나쁘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어지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제레미니스탄의 수장 파힐이 직접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인으로, 홀로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사형을 집행한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이런 집행인 상대라면 인간 흉기급 사형수라면 너끈히 제압하고도 남을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죽을거, 발악이라도 해 보는게 당연하고요.
파힐이 앨런에게 신경을 쓰는 틈을 타 몰래 잠입한 슐츠가 파힐을 협박하여 통행증을 받아 앨런에게 건네주고 탈옥시킨 뒤, 파힐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 감옥 경비의 허술함, 파힐의 무능함이 합쳐진 결과인데 이 정도라면 진작에 사단이 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또 파힐이 전 세계 부호들에게 사형 순간을 생중계해 주는 댓가로 돈을 받고 있었다는 설정은 왜 넣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렇지않아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아예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릴 뿐입니다.
이야기가 끝났다는것 하나만 위안이 되는 졸작. 별점은 0.5점입니다.
"에필로그"
슐츠는 파힐의 시체를 숨긴 뒤 바이러스 발작이 일어남을 느낀다. 그는 갓난아기 앨런에게 TS 바이러스를 주입해 보균자로 만든 과거를 떠올리며 죽어간다...
읽어본 사람들 모두가 인상적이라 칭했던 반전이 등장하는 마무리입니다. 생화학 병기를 이용한 테러를 꿈꾸던 슐츠가 전 세계에 자신이 만든 TS 바이러스를 흩뿌린다는 결말로, 앞서 망작이었던 5, 6편 이야기는 모두 이 반전을 위한 복선이었습니다. 그 두 편이 왜 망작이었는지는 살짝 이해가 됩니다. 반전을 위한 부품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러나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뒷통수를 쎄게 후려치는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그렇게 빼어난 반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앨런이 보균자였다면 투옥되기 이전 생활에서부터 착실히 주변인들에게 감염을 이어왔을겁니다. 앨런의 탈옥이 무슨 계기라도 된 것처럼 부풀릴 필요는 없어요. 잠복기 수십년인 바이러스의 발작이 때마침 마지막 순간에 일어났다는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이런 류의 작품을 너무 많이 읽었나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 |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2022/03/04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 박지영 : 별점 2점
![]() |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지음, 박지영 옮김/시그마북스 |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첩보 활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으로, 시대 순으로 유명 스파이와 첩보 활동, 주요 활약상 및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장치, 암호 등을 소개해 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250여 페이지의 분량을 풀 컬러로 가득 채운, 화려한 도판입니다. 모든 주제를 한 장 안에 도판과 함께 담고 있어서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짤막하게 요약하여, 다양한 도판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카드 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 속 유명 스파이, 첩보 활동 중 몰랐던 내용도 많았습니다. 남북전쟁 때, 노예해방론자들과 흑인 노예들은 남부 연합 안에서 정보원 활동을 했었고, 반대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사교계 인사 로즈 오닐 그린하우는 북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는 이야기처럼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네요. 영국이 인도 지형을 조사할 때 고용했던 현지인들 중 가장 유명했던 '1번' 나인 싱 라와트도 보다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졌고요.
1차 대전 시기부터는 친숙한, 고전적인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는, 약간 낭만적이기까지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외다리였던 몸을 이용하여 측량 기계를 의족을 숨긴 채 독일의 알프스 지역 요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다녔던 미국인 하워드 버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강 악화로 죽을 때 유언마저도 '독일군은 알프스 산맥에 전선을 구축할 계획이 없다' 였다니, 죽음마저도 고전전이네요. 프랑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루이즈드 베티니가 첩보망을 조직, 운영하였고, 벨기에에서는 '하얀 여인' 첩보방을 전화 기술자 발테르 드베가 운영했다는 등의 일반인 영웅들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회 지도층 아마츄어들 - 백만장자 빈센트 에스터, 루스벨트 주니어 - 이 뭉쳐서 '더 룸' 이라는 명칭으로 첩보 활동을 했다니 확실히 미국적이다 싶군요. 당시 미국인이 머나먼 유럽 등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 러시아에서 활약했다는 영국의 에이스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는 사실 별 활약 없이 1925년, 볼셰비키 타도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는 등의 팩트 체크도 볼거리였고, 치머만 전보의 암호 해독처럼 실제로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놀라운 성과들도 눈에 뜨였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는 막강해진 국가별 정보 기관들과 고위층 스파이 '두더지' 들, 상대편 스파이들을 속여서 체포하고, 내부 스파이들을 솎아낸 뒤 처형하거나 변절자로 만드는 (더블 크로스 시스템) 등 현대적인 스파이 작전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이 중에서는 독일 해외방첩청 아프베어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나리스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반나치 정책을 나름대로 펼친 끝에, 종전 직전 사형당했다는데 과연 살아있는채로 종전을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아무리 반나치 주의자였다 한들, 방첩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는 모두 정보가 미리 유출되었기 때문이며,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한게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독일 침공을 사전에 첩보원들이 파악하여 제보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스탈린의 사례를 볼 때, 첩보 활동 자체가 중요하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이 이렇게 그를 위해 일했던 첩보원들을 전쟁 후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후일담이 더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독일 최고의 스파이로 중립국 터키의 영국 대사 휴 내치불휴게슨의 부하였던 바즈나의 활약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네임이 오버로드라는 등의 고급 정보를 넘기는 활약을 했지만, 독일은 그 정보의 진가를 몰라봤다지요. 심지어 그에게 준 30만 파운드의 거액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찍어내었던 위조지폐였다고 하고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영화같은 일화였습니다.
냉전부터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존 스마일리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 등 익히 잘 알려진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M16의 수장으로 KGB 스파이였던 킴 필비와 그의 동료들이었던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와 이스라엘이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켰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흥망성쇠가 흥미로왔습니다. IBM과 히타치의 분쟁 등 산업 스파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F1 레이스에도 산업 스파이가 개입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니까요. 페라리의 정비사 나이절 스테프니가 멕라렌에게 정보를 넘겼던 사건인데, 스테프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버려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교가 자기들의 면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백설 공주 작전'이라는걸 벌였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국세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방 검사 사무실까지 뒤졌다니 종교의 힘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힘 있는 사이비 종교들이 최근 많아진 듯 한데,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 외. 첩보 기술에 대한 설명들도 볼만했습니다. 동독의 '로미오 스파이' 작전처럼요. 25~35살 사이의 교육을 잘 받은,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이용하여 서독 여성들을 포섭했다지요. 러시아의 여성 해외 정보 요원 '스패로'는 이와 반대로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다는데, "레드 스패로"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건 분명해 보입니다. 두 작전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카메라, 통신 장비, 암살 장비 등의 소개는 비밀 무기류에 사족을 못 쓰는 제 동심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독침 우산과 청산가리 가스총이 언급되는데, 이 둘을 합친 장비가 "마스터 키튼"에도 등장했었지요. 고양이 몸 속에 배터리, 안테나, 마이크를 장착하여 도청하려는 '어쿠스틱 키티' 계획도 황당하지만 멋졌고요. "쉬리"가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드네요. 1984년 미국 모스크바 대사관, 레닌그라드 영사관의 타자기에 설치되었다는 키 자동 기록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기묘한 레트로함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타자기 내부에 설치되어 활자 뭉치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자기장 교란을 측정하여 입력되었을 법한 글자를 추측한 뒤, 전파를 터트려 도청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내는 장치였다는데, 당시 기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이테크 기기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왔던 이야기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주제를 한 장으로 요약한 탓에 깊이가 없으며, 스파이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대 시대 이야기는 너무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가 스파이 덕분인 것 처럼 써 놓았을 정도로요. 실제 내용을 보면 스파이가 아니라, 단순히 사전 염탐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패배 역시 정찰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스파이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패권이 무함마드가 스파이 활동에 통달한 덕분이었다는 언급도 어처구니 없었고요.
이런 류의 과장은 뒤에도 계속됩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게 스파이 카를 슐마이스터가 거짓 정보를 뿌려 오스트리아 군이 속았기 때문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남부 목화 판매 댓가로 전쟁 물자를 구입했던 제임스 불럭을 스파이라고 부르는 것도 억지였고요. 이건 단순한 통상 업무에 지나지 않잖아요? 암살과 테러범들 이야기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급 창부였던 '크리스틴 킬러' 마저도 한 챕터를 차지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암호에 대한 소개가 적지 않은데, 9세기 학자 야쿱 이븐 이스하크 알 킨디가 암호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떤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많이 사용된다는 원리인 빈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등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도판도 충실했고요.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암호의 과학" 등에서 많이 보아와서 별로 새롭지 않았고, 책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가격에 비하면 별로 깊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이 책 보다는 특정 스파이 활동과 작전, 혹은 암호 등에 촛점을 맞춘 다른 전문 서적을 읽어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
2025/05/11
화산전생 - 정준, 토마씨 : 별점 1.5점
화산의 장로였던 주서천은 죽은 뒤, 과거로 회귀했다. 주서천의 시대에서 암천회와 무림의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영웅들이 죽었던 탓에, 주서천은 영웅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암천회의 음모 좌절에 새로운 생을 걸었다.
인기 웹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인기가 많다기에 이번 연휴에 몰아서 완결까지 보았습니다.
뻔한 회귀물이지만 인기작답게 나름대로 독특한 점은 있네요. 단순한 무공 대결보다는 전략과 정보전이 강조된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암천회는 소문과 거짓 정보를 활용해 무림 인물들을 현혹시키고, 9파 1방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질투심과 자격지심을 교묘히 자극해 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꽤 설득력 있습니다. 마지막 무림맹과 암천회의 결전은 수천의 병력이 각자 군사의 지휘 하에 지형과 다양한 작전을 활용해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무협지보다는 말 그대로 '전쟁'을 그려내고 있고요.
전통적인 무협의 틀을 벗어나, 기관 전문가와 상인이라는 인물을 주력 조력자로 배치한 점도 특이합니다. 기룡 제갈승계는 초반에는 단순한 기관 돌파 전문가 정도의 역할이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다양한 병기와 기관으로 암천회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참호전 당시 첫 등장했던 기관총을 연상케 하는 그의 활약은 열세인 무림맹의 승리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작 중 대립 상대인 '암천회'의 설정도 괜찮습니다. 비록 숙청당할까봐 두려워 숨어지냈지만, 황실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은 암천의 다양한 재보, 자금과 군대까지 엮을 수 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 무협물은 황실과 거리를 두는게 보통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설정에 녹여낸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보았습니다.
또한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명쾌해서 고구마스럽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점도 장점 중 하나입니다. 주서천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인간 관계를 - 심지어 여자 관계까지! - 칼같이 정리하는 덕입니다. 주변 인물들도 불필요한 감정선 없이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건 마찬가지에요. 선악의 구도도 명확하고, 악인은 반드시 최후를 맞이하는 단순하지만 시원한 구성도 이야기를 더욱 속도감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회귀물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전개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반복되어온 구조이며, 과거의 기억으로 모든 정보를 꿰뚫고 최강자가 되는 설정은 지극히 뻔했던 탓이 큽니다. '기연이 있는 장소를 미리 알고 찾아서 확보한다'가 거의 전부거든요. 별 탈 없이 레벨(?)을 올린 주인공이 상대방을 모두 해치우며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개는 새로움을 느끼기 어려웠어요.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무협이라는 장르의 틀을 벗어나 전형적인 판타지물처럼 변모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혈마가 강시를 만들고 시신을 활용해 몸을 바꿔치기하며, 인어와 이무기, 현무, 말하는 독거미 등 이종족(북해빙궁은 엘프더군요)과 몬스터에 이상한 주술까지 등장하는데 무협물이 아니라 혼합 장르물 혹은 마법 판타지로 느껴집니다. 등장인물들의 강함을 일종의 레벨처럼 표현하고, 최강자들의 필살기(심상구현이라 부르는)는 각자 독특한 무공이 한 개씩 있다는 것 역시 전형적인 만화 판타지 세계관으로 보이고요. 뒤로 가면 이게 무협물일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나마도 무공이라면 모를까 주서천이 마지막 암천회주와의 결전에서 시간을 되돌리는건 어이가 없었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도 아니고... 주서천의 심상구현인 모든 상처를 치료해주는 '회귀'로 주서천이 치명상을 입은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암천회주에게 한 방을 먹이는 정도가 적당했습니다.
그 외 전개에서 이상하게 늘어지며 억지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아요. 대표적인게 무림맹주 남궁위무의 퇴장입니다. 암천회와의 결전 직전에 무림맹 내부의 다툼으로 처형된다는 전개보다는, 백의종군하여 마지막 대결에 참여하게 했더라면 훨씬 개연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비급과 보물이 과도하게 등장하는 점도 몰입을 방해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이 없지는 않으나, 전형적인 판타지 회귀물과 별다를게 없고 작화가 심하게 좋지 않아서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별호'가 이렇게 별로인 무협지는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검 좀 쓰면 검성, 검신, 검선, 검마로 돌려막는 식이거든요. 제가 만든 챗봇으로 화산파 장문인 검선 우일문의 별호를 만들어보니 '매영검옹(梅影劍翁)'을 추천하는데, 검선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나 싶습니다.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