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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7

백조와 박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백조와 박쥐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망높은 변호사 시라이시 겐스케가 살해당했다. 형사 고다이와 나카미치는 시라이시에게 연락했던 구라키 다쓰로가 수상하다는걸 알아내었고, 수사를 통해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 - 구라키가 30여년 전 하이타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게된 시라이시가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자살했던 후쿠마 준지 유가족에게 사죄하라고 강요했기 때문 - 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자백과 동기에 의문을 품은 구라키의 아들 가즈마와 시라이시의 딸 미레이는 각자 조사를 통해 구라키의 자백의 헛점을 각자 찾아내었고, 이는 경찰의 재수사로 이어지는데...


히가시노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에 있길래 읽어보게된 작품.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년 기념작이라고도 하네요.

상당한 분량, 그리고 여러가지 사회 문제를 작품을 통해 고발하는 사회파 추리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읽기 쉽다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최대 장점은 여전합니다. 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억압하여 자살하게 만든 33년전 사건과 구라키 다쓰로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진 현재의 시라이시 겐스케 살인 사건을 통해 검찰, 경찰과 가해자 변호인 모두 재판에서 이기는게 목적이지 진상에는 관심이 없다는걸 드러내며 비판하는 것을 비롯하여 살인죄 공소 시효 폐지가 정당한지, 피고인의 진심어린 사죄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부모, 가족이 저지른 범죄로 다른 가족과 자녀가 피해를 입는다는게 말이 되는지, 황색 언론의 어거지 취재와 발표의 폐해가 얼마나 큰지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녹여내고 있는데 무겁지 않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라키가 공들여 만들어서 헛점이 거의 없었던 자백이 사소한 단서들에 의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볼만합니다. 경찰과 유족, 관계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각자의 영역에서 조사를 진행하는 덕분에 설득력도 높았고요. 예를 들어 구라키는 시라이시 변호사에게 TV에서 유산 증여에 대한 방송을 보고 궁금한 점이 생겨 전화를 한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자백이지요. 하지만 그 날 TV에서 관련된 내용은 방송되지 않았고, 구라키가 가지고 있던 명함첩을 통해 이미 다른 변호사에게 똑같은 내용을 물어보았다는게 추가 조사 결과 밝혀집니다. 이런 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수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라키가 거짓 자백을 해서 죄를 뒤집어 쓴 이유, 시라이시가 살해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명쾌하게 이루어집니다. 33년전 사건이 도화선인건 맞아요. 다만 구라키가 아니라 시라이시가 진범이었던 겁니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당시 누명을 쓰고 자살했던 후쿠마의 손자 안자이 도모키가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던게 진상이고요.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를 위한 구성이 탄탄해서 별로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의 딸과 가해자의 아들이 진상을 밝힌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힘을 합쳐 사건을 조사한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제목 그대로 완벽한 정 반대의 커플의 조합이니까요. 둘이 힘을 합침으로서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단서 -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그리고 진짜 동기 - 를 알아낸다는건 그야말로 무릎을 칠만 했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둘 사이에서 이성으로서의 감정이 싹트게 된다는 것도 독자로 하여금 납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작품들에서 많이 보아왔던 소재와 설정을 뒤섞어 보여주는 자기복제에 가까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오래전 사건이 동기가 된다는건 작가의 수많은 다른 작품에서 보아왔던 설정이며, 살인자의 가족이라고 고통받는 이야기는 작가의 "편지" 등에서 선보였고, 살인자의 죗값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십자가"에서, 촉법소년과 사적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방황하는 칼날"에서, 피해자의 이동 경로가 핵심 단서 중 하나가 된다는건 "기린의 날개"나 "신참자"를 연상케합니다. 정 반대측에 놓인 청춘 남녀가 함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몽환화"와 거의 똑같고요.

또 하나씩 제시되는 단서들을 통해 구라키의 자백이 거짓이라는게 하나씩 밝혀지데, 이 단서들이 단계별로 소개되지도 않아서 '추리'적으로 좋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앞서 구라키가 시라이시를 만났던 계기가 거짓말이라는 것 등은 모두 제각각 독립적인 단서들이며, 친할머니에게 하이타니가 사기를 쳤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시라이시의 동기도 시라이시 겐스케의 어린 시절 사진과 호적 등본이라는 독립적인 단서로 밝혀지거든요. 즉, 이 단서를 먼저 접했다면 중간의 다른 조사는 불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의 단서가 다른 단서로 이어지는 식의 정교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가즈마와 미레이가 힘을 합치게 되는 과정에 따른 빌드업만 있을 뿐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시라이시를 살해한 안자이 도모키의 동기를 설명하는 일종의 에필로그는 최악이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가족을 불행에 빠트린 진범을 응징했다고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는 거짓말이었고 단지 살인에 흥미를 느껴 저지른 범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라이시가 고백하지 않아서 어머니가 이혼을 한건 명백한 사실이니 소년은 시라이시에 대해 원한을 가질 이유는 충분해요. 구태여 중학생 싸이코패스 설정을 집어넣어 이야기를 흐릴 이유는 없었습니다. '촉법소년' 제도를 고발하기에는 안자이 도모키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서 별로 와 닿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은 후쿠마 준지의 딸 아사바 오리에가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명을 쓰고 자살하고, 어머니와 자기는 살인자의 딸이라며 손가락질 받다가 이혼까지 당했고, 연심을 품었던 남자(구라키) 는 사랑을 받아주지도 않고 죽었는데 아들까지 살인범이 되었다니.... 이렇게까지 기구하고 잔혹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있게 읽었고, 생각할 거리도 많지만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는 한없이 미흡했습니다. 다른 작품들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2022/12/25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3.5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2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1권과 동일하게 각종 사건들의 상세한 소개에 더해 수사와 특별히 관계되어 있던 법의학법과학 방식이 소개되는 논픽션.
이번에는 거짓말 탐지기, DNA 분석, 루미놀 시약, 삭흔, 뼈, 법보행 등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도 범죄의 종류 - 실종, 도굴 - 이라던가 수사 방식 - 잠복, 공개 수배 -, 범인의 특징 - 싸이코패스, 피해망상 -, 단서로 사용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 자백, 간접증거 - 등 많은 범죄 관련 소재가 언급됩니다. 이건 법의학과 법과학 관련 소재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을걸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사건 쪽에 관심이 많이 가게 되는데, 특기할만한 점 첫 번째는 여러 지능범들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체 인멸, 현장 조작에 알리바이 트릭까지 사용하는 놀라운 범인들의 모습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특기할 점은 범인들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범인들의 행태에 대한 언급을 읽으니 사형 제도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하게 되네요.

특정 주제에 맞는 대표적인 사건을 선정하기 쉬웠을 1권보다는 주제부터가 다소 정리되지 않았다는건 아쉽지만, 상세한 사건 정리가 여러 자료와 도판 등으로 뒷받침되는 좋은 범죄 논픽션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두 타석 연속 장타!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렸던 범죄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몇몇 사건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 몇가지를 아래에 소개해드립니다.

<<아산 노부부 살인 방화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1).
범인은 범행을 저지른 다음날 알리바이 조작을 위해 현장에 다시 침입했습니다. 양초를 이용한 장치로 시간 조작 방화를 일으키려고요. 범인은 집을 비웠던 시간에 영화 다운로드를 걸어 두어서 집에 있는척 했다는 알리바이 트릭까지 써먹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확실히 만화와 다른 법입니다. 범인은 한 달도 더 지난 사건 당일 행적을 너무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했던 영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해서 덜미가 잡히고 말거든요. 체포되어서 다행입니다.

<<환경 미화원 살인 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2)
추리 소설에서나 봄직했던 정교한 시신 유기가 놀라왔던 사건입니다.
범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뒤 철물점에서 사온 50리터짜리 검은색 비닐봉투 15장과 이불로 시신을 감싸고 그 위에 100리터짜리 종량제 쓰레기봉투 2장을 덧씌웠습니다. 이불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버리는 걸로 보이도록요. 그리고 환경 미화원이었던 범인은 자기 담당 구역에 '쓰레기'로 위장한 시신을 미리 가져다 놓은 뒤, 다음날 시신을 함께 일하는 동료와 함께 쓰레기 수거 차량에 던져 넣었습니다. 시신은 그대로 전주 시내의 한 소각장으로 이동 후 소각 처리되고 말았다는군요. 무섭습니다.

<<거여동 여고 동창 살해사건>>
지능범 등장 사건 (3)
단순 질투로 친구와 친구 아이 두 명을 살해했던, 비상식적인 잔혹함으로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사건으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손에 목장갑만 꼈어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을 정도의 지능범으로 방 열쇠를 넣은 핸드백을 방범창 안으로 던져 넣는 식으로 일종의 밀실 트릭까지 사용된, 거의 성공했던 완전범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아이들이 너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 그리고 피해자가 손에 현장에는 없었던 종잇조각을 쥐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현장 수사관들의 식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참고로, 종잇조각은 범행 도구로 준비해왔던 페트병으로 만든 빨랫줄 고정판에 붙어 있던 것이었다네요.
하지만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을거라고 경찰을 도발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집에 범행 기록을 꼼꼼히 적어둔 일기장을 남겨두었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과시욕' 이라는게 있었던걸까요?
아울러 이런 계획 살인의 경우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았어야 했는데 무기 징역에 그쳤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제발 이런 범인은 좀 죽입시다.

<<신혼부부 니코틴 살인 사건>>
범인은 신혼 여행을 떠났던 일본에서 범행을 저질렀고, 시신 화장을 서둘러 증거 인멸을 시도했지만 일본 경찰의 부검 감정서로 덜미가 잡힌 경우입니다. 피해자의 사인은 혈관 내 다량 투여된 니코틴에 따른 급성 중독사인데, 시신의 왼쪽 팔에서 두 곳, 오른쪽 팔에서 한 곳, 총 세 곳에서 주사바늘 자국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인이 입증되었거든요. 처음 주사했을 때 바로 독성이 나타났을터라, 그 다음 나머지 두 곳에 스스로 주사를 놓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아니라면 타인이 주사를 놨다는 것이고, 사망 장소에는 남편밖에 다른 이는 없었으니 범인은 뻔한 셈입니다.
단지 돈 목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살해한 인면수심의 뻔뻔한 살인범이라는 특징도 잘 살아있는 사건으로, 남편이라는 놈은 이 증거가 드러나자 자살 방조라고 우겼다는데,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네요. 이런 놈도 좀 죽입시다....

뻔뻔함이라면 <<포천 암매장 살인 사건>>범인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싸이코패스인 범인이 완벽한 증거 앞에서도 범행을 끝까지 부인하는 가공할만한 뻔뻔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첫 조사에서 "사건 당일 피해자를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하더니, 두 사람이 함께 포천으로 이동하는 장면이 찍힌 폐쇄회로 TV 화면을 제시하자, “함께 갔지만 피해자는 포천이동갈비를 먹으러 갔다"고 바로 말을 바꾼다던가, "함께 어머니 산소에 들렀는데, 피해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비상식적 변명을 늘어놓는 식이었다네요. 이런 변명이 통할거라 생각한 것도 어이가 없고, 끝까지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도 놀라왔어요.

<<미아동 노파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남아시아계라는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잠복 중이던 형사가 혼혈로 보이는 어린 형제를 보고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이 중 큰 아이가 "아빠다!"라고 외쳐서 범인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정말 잔인한 행동이었어요. 잔혹한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잡아야하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혼혈 아이들의 집만 알아내어도 다른 방법으로 아이들 아빠 신원을 알 수 있었을텐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울주 노인 연쇄살인 사건>>
사건 현장에 범인의 DNA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폐쇄회로 TV 영상도, 목격자도 없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자백 진술과 이 진술에 신빙성을 더하는 정황증거가 더해지면서 용의자가 범인이 됐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자백'이 증거가 되기 위한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고요.
피고인의 자백이 곧바로 유죄 증거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최근에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법적으로도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또는 기망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의심되거나, 혹은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일 땐 자백은 유죄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고요.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조건도 까다롭다네요. 과거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강도 살인'처럼 허위 자백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경우가 많은 탓이겠지요.

<<이천 무덤 연쇄 도굴 사건>>
정신병자가 저지른 범행으로 범행 자체는 특기할게 없는데, 피해자가 너무 안타까왔던 경우입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최씨는 부모 무덤이 도굴당한건 자신에 대한 원한 때문이라고 믿어서 11년간 주변 사람들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친지와 가족 대부분을 잃었다고 하거든요. 정신병자 한 명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버렸는데, 이런건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해야 할까요?

<<제주 보육교사 피살 사건>>
미제 사건인줄 알았었는데, 과학 수사를 통해 이전에도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던 택시 운전사가 검거되었더군요. 사건 당시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어서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과학 수사를 통해 피해자 사망 시각이 재조정되어 결국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 사체를 이용한 실험 결과로, 시신이 발견된 배수로는 그늘인 데다 바람이 심했고, 사후 일주일이 넘은 뒤에도 부패가 진행되지 않았다는걸 확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물증이 없다는 약점이 있어서 경찰은 다시 철저한 재조사에 들어갔는데, 9년 사이 미세 증거물을 증폭해 보는 기술이 발달한 덕에 다행히 추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해자 옷에서 범인 옷과 동일한 섬유 조각이, 범인의 차에서 피해자 섬유 조각이 수집되었던 것이지요. 섬유 조각이 범인이나 피해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교차 발견되는게 많아지면 둘이 만났다는 의심이 높아질 수 밖에 없겠지요.
이 책에서는 이렇게 수사를 통해 용의자를 구속 기소하는 단계까지만 언급되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용의자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나, 섬유 증거만으로는 증거력이 약하네요. 그 외의 증거들도 용의자가 범인이다! 라고 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요. 법원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쉽습니다. 언젠가 진범이 잡혀 피해자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2025/09/05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 - 시모무라 아쓰시 / 남소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카가와에서 만든 전기 자전거의 결함으로 사람이 죽은 뒤, 회사에는 비난이 폭주했다. 그 때문인지 시카가와 사장이 목을 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사장과 관계가 있는 일곱 명의 남녀가 한 폐쇄 공간에 갇혔다. 그들을 가둔 '게임 마스터'는 그들 중 시카가와 사장을 죽인 범인만 살려주겠다며 48시간을 주었다. 사고를 기사화하며 시카가와를 비난했던 기자 카미사와, 피해자 대표 유메코, 사장의 아내 카나에, 시카가와의 부장 린도와 과장 이시와다, 사장의 운전사 쿠라모치와 청소부 하야시의 일곱 명은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며 지은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가 시모무라 아쓰시의 장편입니다. 

닫힌 공간, 클로즈드 써클에서 범인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는건  "방주"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이라는 제목의 상황을 잘 구현했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거리의 상황에 놓인 탓에, 일곱 명의 시카가와 사장 관계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백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보도, 증거 날조, 거짓 증언 등으로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서 사장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자연스럽게 사장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이 살해했다는 자백으로 이어지지요. 즉 모두가 '범인'입니다. 그러나 자백한 사람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 자백에 허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자백을 격파하여, 자연스럽게 탐정 역할을 분담하게 됩니다. 즉, 모두가 '탐정'인 거지요. 마지막에는 한 명만 살아남고 전부 죽음으로써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추리적인 부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시카가와 사장의 사망은 그의 사무실에서 발생했고, 이 사무실은 항상 CCTV로 감시되고 있었기에 자살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범인이 되기 위해서는 밀실 살인을 일으켰어야 했기 때문에, 이 밀실 살인의 트릭을 파헤쳐나가게 됩니다. 처음에 CCTV를 피해 사무실에 들어간 트릭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사장을 살해했고, 어떻게 나왔는지를 다른 사람의 자백을 들은 뒤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은 더 정교한 트릭을 구성해서 '내가 진짜 범인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요. 여러 명의 추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독 초콜릿 사건"도 떠오르네요.
진범이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트릭도 단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아 만족스럽습니다. 사장실 문을 열면 CCTV가 가려져 사각지대가 생기고, 탈출할 때는 녹화를 약 30초간 멈춘 뒤 재개되도록 설정(여러 시간 동안 동일한 장면만 촬영한터라, 조사하는 사람도 배속 재생해서 보기 때문에 30초는 눈치채기 어렵다)해서 그 사이에 탈출했다는 트릭입니다. 두 개 모두 기술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외의 자백에서도 유메코가 주장한 '냉장고에 숨어 있었다'는 트릭은 기발했습니다.

아울러 유일하게 실질적인 죄를 짓지 않은 카미사와(과장되게 비난했고, 정보 제공자 쿠라모치에게 금품을 건넨 실수는 했지만 보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므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어서 죽었다는 결말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러웠다는 점에서 고전 추리 소설에 대한 오마쥬 느낌도 전해줍니다. 작가의 전작도 다른 작품의 영향이 짙게 느껴졌는데, 이런 스타일의 작법을 즐겨 하나 보네요.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탓입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성인들이 선뜻 폐쇄 공간에 모여 무려 이틀 동안이나 목숨을 건 추리 게임을 펼친다는게 과연 현대 사회에서 가능할지 의문이에요. 핸드폰 전파 신호가 닿지 않는다는 것 부터가 억지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중간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의 난입, 현재 진행 중인 게임이 알고보니 경찰이 탐정들을 고용해 만든 '연극 무대'라는 설정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고 불필요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가상가족놀이"와 흡사한 설정인데 그만큼의 동기나 반전이 있지도 않습니다. 연극이라는 장치는 빼고 진짜 게임으로 밀고 가는게 훨씬 더 긴장감 넘쳤을 겁니다.
게다가 연극 속에서 등장한 카미시마가 사실 진짜 사장이었고, 사망한 인물은 사장의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결말은 억지의 화룡점정입니다. 경찰 수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닌가요? 카미시마가 다른 피해자들을 단검으로 살해해서 살아남았는데, 이를 린도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진상도 불필요한건 마찬가지고요.  

설명도 부족합니다. 일곱 명이 시카가와 사장이 무고하게 비난받게 된 원흉이라는걸 시카가와 사장이 알아낸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내의 불륜, 회사 과장 이시와다의 거짓 증언, 운전사 쿠라모치의 증거 조작은 알 수 있었다고 해도, 하야시의 경우는 실제로 크게 드러난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대표 유메코의 아버지가 실제로는 자전거 결함으로 죽은게 아니었다는 것, 카나에의 불륜 상대가 린도였다는 것 역시 알아내기 어렵고요.
작 중에서는 그들을 가둔 건물을 사장실 구조로 만든게 아니라, 그 건물 구조로 사장실을 리모델링했다고 설명되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을 들여 몰래 이런 계획을 구체화했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한참 회사가 비난받고 있는 와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의 구조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전체적인 전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결말은 억지스러운 반전이 도드라집니다. 흥미는 있지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작가 작품은 다시 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14/04/22

자백의 대가 - 티에리 크루벨리에 / 전혜영 : 별점 2.5점

자백의 대가 - 6점
티에리 크루벨리에 지음, 전혜영 옮김/글항아리

'캄보디아 크메르 루즈' 폴 포트 정권에서 S-21 교도소의 소장으로 일하며, 이른바 킬링 필드에서 1만 2천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 데 관여했던 남자 ‘두크'의 국제 재판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이 책이 알리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두크가 저지른 범죄가 과연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크를 비롯한 전범들은 혁명을 위해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열심히 일했을 뿐이며 이는 불가항력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데, 이는 일제 강점기 친일이나 독재 정권 시기 순응과도 맞닿아 있는 주제이지요. 때문에 우리에게도 시사점이 큽니다.

책은 두크의 주장뿐만 아니라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생존자들과 희생자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과 인터뷰를 500쪽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제공하며, 독자로 하여금 마치 재판에 참여하고 함께 판단하게 만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두크가 자신의 범죄를 불가항력으로 주장하고, 고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는게 초반부입니다. 중반부는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열고 도움을 준 프랑스인 프랑수아 비조의 이야기 및 크메르 루즈 지도자들의 말로, 그리고 프놈펜 함락 이후 두크의 삶에 대한 내용이고요. 후반부는 재판 과정 중 가장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장면, 즉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여야 했던 풍 떤 교수 가족의 인상적인 등장과 함께 재판의 결말로 이어집니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두크의 천재적인 기억력, 수십 년 전 심문 대상자의 자백을 기억하는 능력, 재판장에서 보여준 능수능란한 대응 등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책을 통해 그는 "밀그램의 복종 실험"처럼 단순히 권위에 복종한 인물이 아니라는걸 잘 알 수 있었어요. 처음에는 스스로의 이상을 위해, 나중에는 기계적으로 범행에 가담한 독특한 사례로 이해됩니다. 더불어 교도소장이던 시기를 제외하면 그는 선생, 목회자 등으로 성실하고 신뢰받는 인물이었다는 이중적인 모습도 특이했고요.

그러나 제 기대와는 조금 다른 부분도 있었습니다. ‘자백의 대가’라는 개인에 집중하기보다는, 크메르 루즈라는 거대한 조직 내에서 그가 왜 범죄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를 구조적으로 조망하는 데 주력하는 탓이 큽니다. ‘자백의 대가’로서의 조종 능력, 심리적 설계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고요. 제가 기대했던 방향은 아니었어요.

재판 논픽션으로서도 법정극적인 재미는 다소 부족한 편입니다. 두크의 범죄가 워낙 명확해서 빠져나갈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고문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부인하지만, 그가 직접 작성한 방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마지막에 프랑수아 루 변호사가 펼치는 변론 역시 공허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재미’의 측면에서는 부족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책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나라의 격동의 근현대사와 맞닿아 있는 주제를 담고 있고, 두크라는 인물이 고문 기술자 이근안과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점도 똑같고요.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회심은 과연 가능하며 진실한가?” 하는 점인데, 등장하는 목사는 이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책이 내리는 결론은, 두크는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는 인물이며, 과거에는 공산당이 그 믿음의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종교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바뀌지 않은 이기적인 믿음일 뿐이라는 분석이죠.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크메르 루즈의 집단학살 현장이 현재는 관광산업의 일환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참혹한 현실이 상업화되는 모습은 씁쓸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남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는 부족하지만, 크메르 루즈와 캄보디아의 현대사, 집단학살과 전범 재판, 인간 심리라는 주제에 관심 있는 분들께는 의미 있는 독서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 "어차피 죽일 거면 대체 왜 고문을 한 겁니까?"

2021/03/06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을 읽는 자들 - 권일용, 고나무 : 별점 3점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 6점
권일용.고나무 지음/알마

권일용은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입니다.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형사로 근무하다가 발탁되었지요. 감식 업무에서 재능을 발휘했던걸 눈여겨 보았던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장 윤외출의 덕이었습니다. 그 뒤 여러 수사에서 능력을 발휘하여 프로파일러로서의 입지를 굳혔고요. 

이 책은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서 수사에 참여했던 6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국내 수사 기관에서 프로파일링이 어떻게 시작되어 성장했는지를 설명해주는 논픽션입니다.

첫 번째 사건은 2001년 조현길이 저질렀던 여아 살인 사건입니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피해 여아 사체를 냉동실에 보관해서 사체 등 부분에 생겨난 일정한 간격의 가늘고 긴 눌린 흔적으로 냉장고 모델을 찾아낸 겁니다. 해당 냉장고는 업소용 중대형이었고, 이를 비롯한 여러가지 직접 확인한 단서를 토대로 권일용은 한국 범죄 사건 수사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보고서를 제출하게 됩니다. 그의 보고서가 수사에 기여한 바가 있고, 보고서 속 범인상이 진범 조현길과 대체로 일치했던 덕분에 이후 국내 범죄 수사에서도 프로파일링이 활용되게 되었고요. 국내 프로파일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뒤이어 권일용이 투입되었던 2003년 유영철 사건에서는 연쇄 살인을 알아채지 못하는 실패를 겪게 됩니다. 매스미디어를 통해 유영철이 경찰 수사 방향을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유영철은 범행 수법을 바꾸었고, 그 탓에 권일용은 이전 사건과 이후 사건을 연결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정통 수사기법의 한계도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수사팀은 대낮에 범행을 저지르고 피가 묻은 상태에서 도망을 갔는데도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차량을 이용한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수색에 집중했지요. 하지만 권일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지 않는걸 깨닫고, 차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들어맞았습니다.
최초 노인 살인 사건 현장 근처에 교회가 있었던게 나름 의미가 있었다는 것도 권일용의 생각대로였습니다. 유영철은 '교회가 옆에 있지만 바로 앞에 사는 이 사람도 무참히 죽는다’라는 걸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체 매장 현장에 표식을 한건 완전히 헛다리를 짚기는 했습니다. 권일용은 범인이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추하고 되돌아볼 것이라는 낭만적인 추정을 했는데, 유영철은 그냥 '사체를 묻은 데를 또 파면 귀찮아서' 표시를 한 것 뿐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단순한 실패보다는 나름 성과가 있었던 유영철 사건이 있었던 덕분에 권일용은 더욱 성장했고, 경찰 내에도 프로파일링 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뒤이은 정남규 사건에서는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단순 강도 상해범으로 체포되었던 정남규가 서울 서남부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임이 드러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자백을 권일용이 이끌어내게 되거든요.

2009년 강호순 사건에서도 권일용 팀의 분석이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범인은 '호의동승'으로 피해자들을 유인했고, 이를 위해 고급차를 탔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일거라는 분석이었는데 실제로 강호순은 에쿠스를 탔으며, 범행 당시 깔끔한 양복을 입기도 했고, 차 대쉬보드 위에 개와 함께 있는 사진을 장식해 놓는 등 치밀하게 본인을 위장했다고 밝혀졌으니까요. 주변 사람들 평가도 굉장히 좋았다고 하지요

강호순 사건 중간에 맡았던 2007년 제주에서 발생했던 아동 성범죄자 성유철 사건은, 프로파일링의 활용보다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2007년에 벌어졌던 고정민 (가명) 양 실종 사건에서는 사람의 자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거짓 자백에 이르는 과정과 거짓 자백 후 범행의 줄거리를 지어내는 모습 모두 교과서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더라고요. 흔히 이야기하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확 물어버리고 소리를 지르는걸 왜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제대로 설명하기는 힘든 '공포심' 때문이라는데 굉장히 와 닿았어요.

또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통해 1960~1970년대에는 살인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죄였는데, 왜 그 양상이 달라졌는지에 대한 분석도 상세합니다. 자본주의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가 일부 구성원들을 스트레스로 압착할 때 일부 반사회적인 범죄자들이 복수심으로 무차별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반사회성은 후천적 영향일 가능성이 높고요. 서구 사회에서는 반사회성에 유전적 요인이 있다고 여기지만, 단일 민족인 한국에서 유전적 이유로 누구는 괴물이 된다는 건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복수심,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었던 유영철, 정남규와는 다르게 진짜 서구적인 쾌락 연쇄 살인을 저지른 강호순과의 차이도 잘 드러나고요. 하지만 저는, 과거에도 잔혹 범죄는 존재했던 만큼 연쇄 살인이 양극화로 더 증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경찰 수사력의 발달로 과거 사건화되지 않았던 사건들도 밝혀지고, 이게 과거보다 발달한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탓에 증가한걸로 보이는게 아닌가 싶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 깊게 연구된 자료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 외 단순히 당시 벌어졌던 범죄와 그 수사, 해결 과정 뿐 아니라 수사에 참여했던 프로파일러들의 생각과 행동도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프로파일러가 무슨 마법사나 천재가 아니라, 수사를 돕는 역할이라는게 잘 드러나지요. 수사 현장에서 쓰이는 전문적인 은어 등 디테일도 좋습니다.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의 가슴 아픈 현실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사형 제도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잠깐 스쳐지나가듯 등장하기는 하지만, 권일용도 사형 집행에 찬성하는 입장이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도소에서 교정, 교화가 가능하다고 쳐도,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의 중죄를 저지른 범인을 교정, 교화시켜 사회에 복귀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읽어 볼 만한 논픽션인건 분명한데, 건조한 르포르타쥬 문체가 아니라 권일용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적인 구성과 문체로 쓰여진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 불호 쪽이에요. 분명 실화인데 뭔가 각색되어서 왜곡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프로파일링의 역사를 담기 위한 취지 탓이었겠지만, 익히 알려진 사건에서 누구나 다 아는 정보를 빼곡하게 채워 놓은 부분들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 범죄사, 프로파일링 역사에 대해 알고싶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6/11/18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3점

천사들의 탐정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2022/12/17

밤에 걷다 - 존 딕슨 카 / 임경아 : 별점 2점

 

밤에 걷다 - 4점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 경시청 총감 방코랭은 스포츠 스타 살리니 공작으로부터 신변 보호 요청을 받았다. 아내 루이즈의 전남편 로랑이 협박 편지를 보낸 탓이었다. 로랑은 정신병으로 입원했다가 의사를 죽이고, 성형 수술을 한 뒤 도주 중인 위험인물이었다.
공작 부부를 만나러 페넬리의 가게에 방문한 방코랭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한 밀실에서 목이 잘린채 살해된 공작의 시체를 발견했다.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공작의 친구 보트렐르도 목이 베여 살해되고 말았다.
로랑은 어떻게 유럽 대륙을 건너 밀실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깜쪽같이 사라졌을까?


존 딕슨 카의 앙리 방코랭 시리즈 장편. 데뷰작이기도 합니다. 괴이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 그리고 정신병자 살인마가 괴이한 상황에서 사람 목을 베어 죽이는 간담 서늘한 묘사들은 고딕 호러물 느낌도 전해줍니다. 같은 시리즈인 <<해골성>>과 비슷하게요.

추리적으로는 밀실의 제왕 존 딕슨 카다운 밀실 살인 사건이 서두부터 등장하여 눈길을 잡아끕니다. 펠리니의 가게 3층의 방은 앞, 뒷문 모두 감시가 확실했고 (심지어 문 하나는 방코랭이 직접 감시!), 창 밖으로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으며 비밀 통로도 일체 없었던 완벽한 밀실이었고,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도 완벽했거든요. 트릭이 무엇이었을지 아주 궁금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지명수배범인 로랑이 국경을 건넌 방법에 사용된 트릭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륙에서 공작을 살해한 뒤, 공작으로 변장하고 국경을 건넌 것으로, 간단해서 현실적일 뿐 아니라 단서들 제공이 아주 공정했던 덕분입니다. 유럽 대륙을 갔다온 이후 공작이 180도 변했다는 증언과 단서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거든요. 공작이 마약 중독자였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초반부 공작의 짐은 국경에서 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와 연결하여 '공작이 마약 밀수를 했다'는 식으로 독자를 이끌지만, 알고보니 스포츠맨 공작은 마약 중독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단서였지요.
탐정으로서 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방코랭의 추리법에 대한 소개 등도 추리 애호가로서 볼 만 했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없이 타고난 통찰력만으로 수사관이 될 수 없다며, 과학 수사 기법을 비롯하여 분석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일갈하는데,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었어요.

벨 에포크 시대를 정면으로 다루는 배경 설정도 볼거리였습니다.. 공작 등 귀족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며 마약을 빨면서 검술 대결을 펼치는데, 자동차를 타고다니고 전기불이 존재하는 이색적인 세계의 풍광이 잘 묘사되어 있으니까요. 분명 존재했던 과거인데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라서 이런 곳이라면 명탐정과 미치광이 연쇄 살인범이 있어도 자연스러울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제 강점기 당시, '마굴'이라 불렸던 상하이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딕슨 카의 다른 걸작들에 비하면 많이 처집니다. 추리적인 부분에서의 문제가 너무 커요. 밀실 트릭부터가 알고보면 별게 아니었거든요. 설명도 부족했고요. 공작 (으로 변장했던 로랑)은 이미 11시경에 부인에게 살해당했고, 11시 30분에 목격된 공작은 보틀레르의 변장(?)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카드룸 입구를 지켜보는 경찰 눈에 뜨이지 않고 흡연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카드룸 문은 벽 때문에 홀에 서 있는 그 누구라도 문을 볼 수 없었다나요. 그렇다면 이건 밀실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런걸 현장에 있었던 명탐정 방코랭이 몰랐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이 중요한 사실이 독자에게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맨 첫 장에서 약도가 제공되기는 하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보틀레르가 아무런 변장도 하지 않고 로랑처럼 보였던 이유, 루이즈 부인 몸에 반드시 튀었을 핏자욱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등 설명되지 못한 점도 너무 많습니다. 보틀레르가 가발이라도 썼더라면 모를까, 여러모로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처음에 등장해서 살해당했던 살리니 공작은 변장한 로랑이었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고 얼굴이 닮았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아니고, 이 당시 성형수술 수준은 별볼일 없었을텐데 말이지요. 옛 친구야 안 만났다쳐도, 공작 가문의 오래된 변호사 키라르의 눈까지 속였다는건 지나쳤어요.
또 변장에 성공했는데, 자기 자신을 협박하는 편지를 써서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을 한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경찰과 게임을 하고 싶었던 것 같지도 않고, 그나마 생각해 볼만한건 자기 과시지만 그걸 위해서는 잃는게 너무 많아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방코랭의 추리대로 루이즈 부인을 살해하고 도주할 생각이었다면, 경찰을 부를 이유는 없었어요.

루이즈 부인의 자백만으로 마무리되는 결말도 그닥이었습니다. 첫 번째 범행은 그렇다쳐도, 보틀레르를 살해할 때의 증거는 이미 방코랭이 차고 넘치게 모은 것으로 보여서, 구태여 자백은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자들에게 농락당한 기구한 인생이라는게 잘 그려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용한 남자들을 깔끔하게 살해한 팜므 파탈로 보기에는 범행이 허술해서 이도저도 아닌 캐릭터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게다가 루이즈 부인이 모든 트릭과 살해 방법을 스스로 말하는 탓에, 방코랭은 별로 하는게 없다는 문제도 큽니다. 모든 트릭을 알아챘다고는 하지만, 정작 하는거라고는 루이즈 부인의 자백에 추임새를 넣는 것 밖에 없어서 이게 과연 명탐정인가 싶더라고요. 물론 진짜 공작의 시체를 발견하고, 루이즈 부인이 진범이라는걸 알아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명탐정이라면 마지막 루이즈 부인 자백에서도 뭔가 존재감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이 방코랭을 다른 딕슨 카의 명탐정들만큼이나 기억에 남지 못한 이유가 아니었나 싶네요.
화자인 미국인 제프 역시, '사랑꾼' 으로의 모습 말고는 아무런 활약을 보이지 못해서 인상이 흐릿한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절판된지 오래인데,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번역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독성도 떨어지는 편이고요.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봅니다. 제가 읽었던 딕슨 카 작품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2013/01/20

미스터리의 계보 - 마쓰모토 세이초 / 김욱 : 별점 4점

미스터리의 계보 - 8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북스피어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마츠모토 세이쵸의 논픽션. "전골을 먹는 여자", "두 명의 진범",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이라는 세 편의 이야기와 상당한 분량의 해설이 실려 있습니다.

"전골을 먹는 여자"는 군마현 호시오 마을에서 종전 직후 벌어진 식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상호 간 도와주는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산골 마을의 무지와 야만이 결합해 벌어진 끔찍한 범죄입니다. 작가가 이 일대를 여행했을 때의 과정을 설명하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정말이지 엄청난 오지더군요.

내용은 사실 뻔합니다. "벽장 속의 치요"의 한 이야기와도 유사하지요. 그러나 논픽션이기에 훨씬 충격적일 뿐 아니라, 진상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도라는 왜 죽였어!"라고 윽박질렀을 때 범인이 답하는 "먹었어"라는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찟했습니다. 이어서 설명해주는 노구치 오사부로, 스기무라 가즈요의 범행 역시 굉장히 흥미로웠고요.

근친 결혼으로 인한 저능한 가족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영국의 소니 빈 일족 일화, 기아로 인한 범죄라는 점에서는 "얼라이브"나 난파선 구명보트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두 명의 진범"은 스즈가모리 석탑 부근에서 살해된 다나카 하루 사건을 다룹니다.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두 명 중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일본의 사형 및 재판 제도 문제와 연결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억울한 용의자 다카무라의 자백 및 심문 조서에서 모순을 밝혀나가는 세이쵸의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특히 "흰색 고시마키가 두꺼운 플란넬 소재였다"라는 중요한 사항을 짚어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경찰의 갖가지 증거 조작과 고문으로 날조된 자백 탓에 두 번째 범인이 생겼으며, 진범이 유죄 판결을 받은 후에도 재판이 계속되어 6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무죄로 풀려났다는 점에서, 제도적인 야만을 규탄하는 사회파적 의미도 강하게 느껴졌고요.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은 미스터리, 범죄 매니아에게는 친숙한 쓰야마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입니다. 무려 3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량 살인 사건이죠. 워낙에 유명한 사건이라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범인 도이 무쓰오의 출생에서부터 범행에 이르는 과정을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그리고 있어서 단숨에 읽어버릴 정도로 흡입력 넘쳤습니다.

외딴 산골의 문란한 성 풍속, 소문으로 비롯된 따돌림, 한 개인의 컴플렉스가 결합하여 벌어진 사건이라고 하는데, 피해 의식이라는 것은 주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그러나 위의 두 사건과는 다르게, 이 사건은 시대적 야만으로 빚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세이쵸의 글만 보면 사회적인 따돌림과 본인 스스로의 컴플렉스가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설명되지만, 한 마을 자체를 거의 날려버린 잔인무도한 범행에는 그 어떤 핑계도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보이네요. 우리나라의 우범곤 순경 사건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루었던 농약 음료수 사건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적 격리가 필요한 인간 말종일 뿐이라 생각됩니다.

결론 내리자면, 세 편의 이야기 모두 흥미롭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읽으면서 전율이 느껴지는 충격적인 내용도 가득하고,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줍니다. 또한, 작가의 명성에 걸맞는 미려하고 흡입력 있는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으며, 무지와 야만이 범죄의 원인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사회파 작가다운 고발 정신도 살아 있는 명편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왜 거장이 거장인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이라 생각되네요.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 세이쵸의 원고지라는 부록이 들어있는데, 전혀 쓸데없는 물건이었습니다. 차라리 책값을 천 원이라도 낮추는 방안을 출판사에 건의드리는 바입니다.

2020/10/16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 미나가와 히로코 / 김선영 : 별점 3점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 6점
미나가와 히로코 지음, 김선영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세기 런던, 해부학 교실을 운영하는 외과의사 대니얼 버턴의 연구실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사지가 잘린 소년과 얼굴이 짓뭉개진 중년 남자였다.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은 부하들과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섰다. 대니얼의 제자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사체로 발견된 소년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를 위해 사체를 훼손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소년과 중년 남자 해링턴을 죽인 범인으로 대니얼 버턴의 형인 로버트 버턴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는데...

"죽음의 샘"으로 잘 알려진 여류 작가 미나가와 히로코의 대장편입니다. 제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허구추리"와 공동 수상했다지요. 사실 이 상의 권위에 대해 개인적으로 의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검증된 '본격 추리물' 임에는 분명할 거라는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 영국 해부학 교실이 무대인 역사 추리 소설로 해부학 교실이라는 소재를 이야기 전개와 트릭에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제목부터 해부학 교실을 위해 몸을 열게 해 준 시체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요.

무대가 이러하니 당연히 시체가 많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해부학 교실에서 기묘한 사체 두 구가 발견된 사건입니다. 손과 발이 토막나 사라져 있던 첫 번째 사체는 가난한 소년 네이선, 얼굴이 뭉개져 있던 두 번째 사체는 퍼블릭 저널 사장이자 대중을 선동하는 선동가 해링턴으로 밝혀집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려는 치안판사 존 필딩에게 대니얼 버턴의 제자 에드워드와 나이절이 사체를 훼손했다고 고백합니다. 네이선이 자살한걸 발견한 뒤, 자살자는 구원을 받지 못할거라 여겨 상흔이 있던 손을 떼어냈다는 거지요. 손만 떼어내면 이상하니 발까지 떼어 은닉했던 겁니다.
해링턴 사체는 해부학 교실 제자들도 몰랐다고 하는데, 존 필딩은 백년도 더 전에 사용했던 '루퍼트 왕자의 난로' 구조를 이용하여 은닉한 상황을 보고 난로 구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범인이라고 추리하죠. 그래서 해부학 교실 관계자 외에 유일하게 난로 구조를 알고 있을 저택 주인 로버트 버턴이 용의자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주식 중개인이자 사기꾼 가이 에번스가 치안판사 부하들 눈 앞 밀실에서 살해되는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에번스가 있는 방으로 로버트 버턴이 들어간게 목격되었지만, 그는 사라지고 에번스의 시체만 발견되었습니다. 로버트는 침대에 걸려있더 천을 이용하여 옆 방으로 탈출한 걸로 드러나고요. 그런데 에드워드가 이 사건은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합니다. 네이선을 이용하고 괴롭힌 에번스에 대한 복수라면서요. 그러나 만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네이선을 위해 에드워드가 살인까지 저지른다? 여러모로 석연치 않지요. 여러모로 로버트 버턴이 범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로버트는 에번스에게 사기를 당해 거액을 빚지고 있었고, 에번스가 계획한 사기를 돕기 위해 해링턴까지 살해했다는걸로 밝혀지니까요. 토마스 해링턴은 네이선이 가지고 있는 고문서 작성 능력을 알고 있어서 입막음을 위해 죽인겁니다.

뒤 이어 로버트 버턴이 에번스 자택에서 불에 타 죽은 채로 발견된 세 번째 사건으로 연쇄 살인 사건은 막을 내립니다. 에드워드가 자백한건, 궁지에 몰린 로버트에게 해부학 교실과 교실이 보유한 여러가지 표본, 즉 대니얼 버턴의 가진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각서를 쓰게 만드려는 계획으로 밝혀집니다. 즉, 모든 사건은 로버트 버턴이 저질렀고 결국 채무 관련 문서를 불태우려다가 죽은 걸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진범은 에드워드와 나이절이었습니다. 대니얼 버턴이 발견한 내용, 표본 등을 자기 것으로 하고 있던 로버트 버턴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가이 에번스에게서 네이선이 탈출해 찾아온걸 계기로 이 모든걸 꾸민겁니다.
둘은 우선 변장하여 가이 에번스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으로 로버트 버턴을 불러 궁지에 몰리게 한 뒤, 탈출시켜 각서를 쓰게 만들고 살해합니다. 대담하게 치안판사 수사 중에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당시 런던에서는 누군가가 고소하지 않으면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는걸 이용했던 것입니다.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이 두 사건, 즉 가이 에번스가 로버트 버턴의 살해에 대한 재판이 열리지 않을걸로 판단했거든요. 예상대로 에반스에게는 상속인이 없었고, 로버트는 저지른 범죄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날 수 있는 탓에 미망인은 소송을 포기하지요. 

그러나 치안판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도 두 사건에 대한 재판은 포기하지만, 네이선 어머니의 고발을 통해 네이선 사건 실행범으로 둘을 재판에 회부하는 데에는 성공하니까요. 네이선이 남긴 유서와 옷의 잉크 흔적이 일치하지 않는걸 단서로 둘이 궁극적으로 로버트를 살해하려고 네이선을 먼저 죽였다고 추리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재판정에서 네이선이 살아있다는게 밝혀지며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달리 구입한 사체를 네이선으로 꾸몄던게 진상입니다.

이렇게 사건도 많고, 토막 시체와 밀실 살인 등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으며, 진짜 네이선이 살아있있다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까지 괜찮아서 추리적으로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본격 추리물답게 탐정 역인 치안판사 존 필딩과 독자에게 주어진 단서도 거의 공정합니다. 독자는 존 필딩과 판사와 같은 수중에서 추리를 전개할 수 있어요. 이 정도면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도 납득이 가네요. 

아울러 디테일하게 그려낸 18세기 런던에 대한 묘사가 아주 빼어납니다. 여기에 더해 실존 인물이 등장하기까지 해서 설득력도 배가됩니다. 당시 재판 방식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부분도 인상적이고요. 일본 작가가 18세기 영국을 무대로 소설을 쓰면 당연히 엉망일거라고 생각한 제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 줍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죽음의 샘"보다 훨씬 낫더군요.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도 눈에 뜨입니다. 범행 동기가 그 중 첫번째에요. 에드워드와 나이절은 네이선과 사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를 위해 사람을 죽어가며 복수를 한다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석연치 않지요.
게다가 로버트 버턴에 대해 복수심과 살의를 품고 범행을 저지른건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버트가 대니얼의 성과와 재산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한다 한 들, 그건 두 형제의 문제이지 제자들의 문제는 아닙니다. 소중한 해부학 교실을 지키기 위해서? 그런 사명감이나 연대 의식이 작품 속에서 잘 드러나지 있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로버트가 대니얼의 재산을 포기하게 만들려면, 구태여 에번스를 죽일 필요도 없었어요. 일레인 양 사건과 토머스 해링턴 사건으로 협박만 하면 충분했을 테니까요. 

가이 에번스와 네이선이 얽힌 과거사 이야기는 함께 전개되어 독자가 그 인물들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반면, 로버트에게 대한 묘사는 전무하다시피 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가 에번스가 엮여 거액의 손해를 보고 해링턴은 죽이는 과정, 그리고 에번스 사건의 범인으로 몰린 뒤 에드워드 방 옷장 안에서 에드워드가 각서의 댓가로 범행을 고백하는걸 엿듣는 장면 정도는 로버트 시점에서 묘사해 주었어도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일레인 양을 임신시킨 뒤 살해한 사건도 곁가지로 나오기 보다는, 로버트를 악인으로 확실히 부각시킬 수 있도록 그 진상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테고요. 

에드워드 본인의 복수심과 때문에 재판이 엉망이라는걸 대중 앞에 선보이려고 일부러 재판에 회부된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는 정말이지 작위적인, 그야말로 반전을 위한 전개일 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드워드와 나이절이 변장해서 밤문화(?)를 즐기는 인물이라는 설정은 설명도 부족하고, 등장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더군요. 여장 후에는 그 바닥에서 요정 여왕(?) 이라고 불리우는 나이절이 자기 매력을 이용하여 치안판사의 부하인 데니스 애벗마저 유혹해 정보를 빼돌린다는 등 억지스럽기만 할 뿐이었어요. 안 나와도 됐을 듯 합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 측면에서 나무랄데 없는 작품입니다. 4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은 충분하니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 애호가 분들 중에서도 역사 추리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1/03/15

메그레 - 조르주 심농 / 성귀수 : 별점 3점

매그레 - 6점
조르주 심농 지음, 성귀수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퇴 후 시골에 내려가 전원생활을 만끽하고 있는 매그레의 집에 처조카이자 파리 경찰청 형사로 일하는 필리프가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실수로 자신이 감시하던 경찰청 주변의 카페 주인 페피토 팔레스트리노가 살해당하는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즉시 파리로 향해 자신에게 너무도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 매그레는 일부 옛 동료들의 불편한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용의자로 지목된 조카를 구하기 위해 독자적인 조사에 들어간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메그레 시리즈 공식적인 마지막 장편입니다. 은퇴한 메그레 반장이 누명을 쓴 조카를 구하기 위해 범죄자 제르맹 카조와 대결한다는 내용이지요.

정밀한 과학 수사가 발달하기 전, 범죄자들이 여러 명 범행을 공모하고 서로의 알리바이를 위증한다면 어떻게 체포할 수 있었을까요? 오래 전 부터 궁금했던 주제인데, 이 작품 속 제르맹 카조가 딱 그러합니다. 그는 A를 죽이기 위해 B를 고용하고, B가 위험해지면 C가 B를 죽이게 하는 식으로 조직을 관리하거든요. 자기 손에 절대 피를 묻히지 않고요. 어쩌다 경찰이 A, B, C를 모두 심문하더라도 괜찮도록, 사전에 확실하게 말을 맞추어서 위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찰은 카조를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증거가 없을 때 마음 먹고 위증을 하면, 그걸 밝혀내는건 거의 불가능했으니까요. 

메그레도 궁지에 몰립니다. 은퇴한 상태라 체포도 못하고, 고문이나 가혹 행위를 가할 수도 없는 탓입니다. 이 과정에서 풍부한 드라마가 생겨납니다. 특히 딸같은 창부 페르낭드를 대하는 모습은 좀 이색적이었습니다. 좌충우돌하다가 카조와 마지막 정면 승부를 벌여 자백을 끌어내는 1:1 대결은 클라이막스로 충분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화기를 들어올려 카조가 자백하는걸 경찰이 들을 수 있도록 조작한 간단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별 건 아니지만 이 트릭을 숨기기 위한 노력 등으로 긴장감을 끌어내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었어요. 카조가 반쯤은 자랑스럽게 자백을 하게 만드는, 오스프가 살해되었을거라는 결정적 추리도 아주 깔끔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메그레 시리즈와는 다르게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에 큰 헛점이 존재합니다. 카조가 이렇게 완벽하게 수하와 범행을 조종할 수 있었다면, 구태여 오스프라는 목격자를 내세워서 현직 경찰인 메그레의 조카를 범인으로 몰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런 쓰잘데 없는 조작으로, 메그레가 직접 나서서 사건에 뛰어들게 했을 뿐 아니라, 컨트롤이 힘든 약쟁이 오스프를 처리해야 하는 부담마저 짊어지게 되었으니까요. 이들의 위증이 너무 뻔뻔했던 탓에 검사까지 격분하여 메그레 수사에 전면 협조한다는 묘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애초에 사건을 조작하지 않았다면 경찰에 오스프와 일당들이 체포되지도 않았을겁니다. 또 메그레가 짜증내는 묘사가 많은 것도 부담스러웠습니다. 나이든 꼰대 느낌이 너무 강해서 캐릭터에게 매력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더군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하고, 트릭도 나름 사용된 점은 마음에 듭니다. 큰 헛점은 감점 요소이지만, 이 정도면 제법 무난한, 대미를 장식하기 충분한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2009/09/11

절벽 - 현재훈 : 별점 3.5점

거의 백만년만의 추리소설 포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새 너무 독서가 뜸했네요. 개인적으로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보니 책을 지긋이 읽는 것 자체가 좀 무리더군요.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이번에는 단편집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이 책은 저도 잘 몰랐던 한국 작가 현재훈님의 단편집입니다. 우연찮게 검색을 통해 알게된 작가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분들을 알게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척박한 국내 추리 문단에서 작품을 발표해 왔다는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쨌건 책 소개를 하자면, 이 책에는 "절벽", "곰팡이", "낙화", "검은 반점", "기만자", "부녀", "모래성", "흑무", "복제인간", "잠꼬대", "목소리", "족적" 이라는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몇몇 작품은 20여페이지 내외의 꽁트 분량이지만 양적으로는 풍성합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일본 사회파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독재시대인 80년대 당시의 분위기를 작품과 캐릭터, 설정에 드러내면서 이야기와 연관시키는 본격적인 사회파 작품은 아닙니다("검은 반점"에서 노동운동이 약간 표현되는 정도입니다). 분위기만 따라갈 뿐이지요. 그래도 황금만능주의를 주요 테마로 하여, 범행의 동기와 수사의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정통 사회파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낙화"나 "검은 반점"의 트릭은 작품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며, "부녀"나 "모래성"에서의 경찰 수사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한국 추리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을 심리묘사 중심으로 끌고나가는 문장력도 빼어납니다. 순수문학가 출신다운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네요. 한국적인 특색을 살린 몇몇 묘사들도 굉장히 반가웠고요. 그야말로 숨겨졌던 한국 추리문학의 재발견에 가까운 작품이랄까요.

그러나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큽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A"가 저지른 사건에는 "B"과 관련되어 있고 "A"와 "B"가 티격태격하다가 전혀 엉뚱한 "C"에 의해 사건이 밝혀진다.'는, 반전도 아닌 깜짝쇼에 의존한다던가, 결국 범인이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상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요.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들과 설정 등에서 지나칠 정도로 유사성을 보이는 점도 거슬렸던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표제작인 "절벽"의 예를 들 수 있겠죠. 이 작품은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권에 수록된 "수사권외의 조건"의 설정을 많이 따라했거든요. 사실 백영호라는 인물이 복수를 위해 "8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자신을 감추는 과정과 범행에 대한 디테일(상상이지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잠꼬대"라는 작품에서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과 주요 트릭을 언급하고 있으며, "곰팡이"는 "제로의 촛점"과 캐릭터 면에서 유사한 등 많은 부분이 겹칩니다.

그리고 작품마다 여러 고전과 명대사, 명언등이 언급되고 철학적 주제를 논하기까지 하는데 영 별로였습니다.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묘사를 들어내면 작품이 더 깔끔해졌을텐데 아쉽네요. "추리소설"이 그다지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70~80년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주 색다른 작품들이었고 좋은 독서였습니다. 비록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추리문학을 논할때 빼놓으면 안되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작품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의미도 크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85년도에 출간된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구하실 수 있다면 한번 찾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절벽

이승준은 과거 가난했지만 사장의 딸 홍정아와 결혼하여 출세했다. 그러나 과거의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하여 불륜을 저지르고, 과거 부하 백영호의 아내와도 불륜관계였다가 그 아내를 사망케하고 도주한 과거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백영호는 때를 기다린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출세하고 싶었던 가난뱅이 청년과 황금만능주의는 "아메리카의 비극" 등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테마죠.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출세를 위해 과거 교제했거나 임신한 여인을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출세하고 난 뒤에 불륜이 시작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지나치게 통속적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공범자가 있다는 트릭과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사회파 추리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백영호"라는 인물의 설정을 앞서 말했듯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따왔다는 점입니다.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곰팡이"

부유한 저명인사 허진영은 그녀의 과거가 양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학수라는 인물에게 협박을 당하는데.... 

6.25 동란때의 숨겨야 하는 과거와 현재가 밀결합되고 있는 점, 그리고 과거에서 파생된 범죄가 범죄를 낳는 점 등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과 사건 전개, 그리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촛점"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협박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어 같이 살해당한 여인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탐정역의 박상호라는 인물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단점이 아쉽습니다.

"낙화"

화가인 내가 작품 활동을 위해 머무는 산장에 친구 박희주 부부가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박군은 아내 문영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 처제 난영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문영이 산장 베란다 밑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다. 방은 밀실상태였고 문영의 손에는 박희주의 양복단추가 쥐어져 있던 상태였다. 

밀실 + 심리 트릭이 돋보이는 잘 짜여진 정통 추리물입니다. 지나칠정도로 치정극으로 치우쳐져서 통속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인물 설정과 상황 묘사들로 추리적인 매력이 많이 희석된게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동기와 트릭, 범행방법 모두 납득할만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결말부분에서 너무 "끝"을 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튀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작품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닙니다.

"검은 반점" 

신혼여행 중 신부 한미숙이 바닷가에서 실종된 후, 위도라는 섬에서 청산가리를 음독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가 입고있던 실내의가 바닷물에 오염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바닷물로 흘러간 상태는 아니었지만, 구역내의 어떠한 배도 위도로 여자를 실어다 준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시체가 어떻게 그 섬에 있을 수 있었을까? 라는 순간 이동 트릭을 테마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꿔치기 트릭도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바탕이 된 듯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범인이 시체를 은닉하거나 자연스럽게 유기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만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과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범인의 자백으로 작품을 마무리 지은 것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드네요.

"기만자"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과연 아내 희숙을 죽인것은 또는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경선을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C군은 어떻게 된 것인지가 뒤엉켜서 흘러가는 복잡한 작품이기는 한데 썩 재미는 없더군요. 참신한 시도는 눈여겨 볼 만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부녀" 

진아물산 사장 김인호의 큰딸이 밀실에서 청산가리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형사 김익수는 치밀한 수사 끝에 여러 정황증거를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되는데... 

과거의 사건에 의한 범죄라는 테마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이죠. 이 작품은 과거의 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다는 줄거리와 더불어 현재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치밀한 수사가 디테일하게 그려진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입니다.

작중에 경찰 스스로의 입으로 밝히듯 결정적 증거가 없다!라는 추리소설로서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결말도 범인의 자백으로 끝나는 등 "추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개는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수작입니다. 디테일한 수사와 여러 단서를 통해 유추해내는 추리가 무척이나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모래성"

H부동산의 회장 신병호가 자신의 저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수사관 한정수는 제한된 단서와 증언을 토대로 서서히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데... 

여러 용의자, 복잡하게 꼬인 단서들과 서로 다른 증언들이 교차되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사 추리물입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범행을 하기 전 똥을 누면 운이 좋다"와 같은 속설까지 작품에 끌어들일 정도로 세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속 불가능 범죄가 아닌 현실의 실제 있는 강도사건을 보는 듯한 자세한 상황 및 배경 묘사가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이나 침투경로, 새벽에 들은 소리, 왜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는지 등의 다양한 단서들을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던져주는 등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신병호의 과거와 현재, 강남 복부인들과의 관계라던가 실제 사건에서의 몇몇 미심쩍은 단서 등 벌려놓은 소재를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맺은 마무리 부분이 너무나 아쉽네요. 보다 긴 중편 이상 길이의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로 전개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추리문학의 고전으로 길이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말이 매끄럽지 못해서 평작에 머무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봄직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흑무"

문학교수 김용석은 학문에서 좌절하고 부인 이지영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여 술로 고독을 삼키던 중,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한 여인에게 끌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복수극이긴 한데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소품입니다. 주인공의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여인, 그에게 원한이 있는 범인 등 한번 수사를 한다고 치면 걸려들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범죄로 가장하기에는 너무 미흡하지 않나 싶더군요. 작가의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정도로 토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문학적인 이론과 평가가 난무하는 것은 내용에 혼란만 더하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복제인간 

2015년 서울 교외의 아파트촌에서 주미리여사가 살해당했다. 사건과 더불어 복제인간 유아 성추행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근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흉기가 총이라는 것과 복제인간 아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SF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게 특이합니다. 사실상 복제인간 아이라는 것도 "쌍둥이"라는 설정을 위해 가져온 것이니 만큼 별다른 것이 없어서 왜 근미래를 무대로 묘사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이야기 자체는 평이하고 예상대로 전개되기에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소품 수준의 평작입니다.

"잠꼬대" 

최건호는 아내 은영의 불륜을 의심하여 여러가지로 그녀를 시험해본다. 그러던 중 은영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숨지고, 사건은 자살로 판명되는 듯 하지만.... 

한마디로 "의처증"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집요하고 수법이 잔인한 편이라 좀 놀랍더군요. 시대를 앞서간 듯한 강박증에 대한 심리묘사도 대단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의처증 이외의 사건 전개는 너무 막 나가기에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건이 주요 전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끝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의처증 증세의 진상이 폭로되는, 즉 최건호는 의처증으로 의심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앞부분에서는 결백한 듯 했던 은영이 실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식의 전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목소리" 

박찬식은 사업과 연애의 라이벌이었던 정진호를 제거하고 그의 아내 미경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미경이 살해되고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자 박찬식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도청과 가명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피력되는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도청" 방법 이외의 추리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엔 무리가 있네요. 경찰의 수사로 인해 끝나는 결말 역시 많이 허무한 편입니다.

"족적" 

조숙경이 살해된다. 제1용의자는 불륜관계였던 화가 김기오. 그러나 김기오는 스스로 누명에 빠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 연상되는 이색단편입니다.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스스로의 진술을 사기친다는 설정이 동일하거든요. 하지만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으며 별로 공평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아서 굉장히 무리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음에도 기소하지 않는 황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평균 이하인 졸작입니다.

2020/08/09

테미스의 검 - 나카야마 시치리 / 이연승 : 별점 3점

테미스의 검 - 6점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동족 인간이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불손하고 오만하네. 구로사와 재판관 (시즈카 재판관의 스승) 

쇼와 59년 (1984), 부동산업자 구루마 부부가 살해당했다. 우라와 경찰서 검거율 1위인 나루미 경부보는 유력한 용의자 구스노키 아키히로를 불법으로 연행하여 심문한 뒤 자백을 이끌어냈다. 나루미의 파트너인 신참 형사 와타세는 나루미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지만, 말없이 따랐다.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아키히로는 결국 몇 년 뒤 구치소에서 자살했다. 

헤이세이 1년 (1989) , 나루미의 은퇴 후 도지마와 파트너가 된 와타세는 가미키자키에서 발생한, 고급 주택에서 아이와 아이 엄마가 강도에게 살해된 사건 수사에 나섰다. 주변에 목격자가 없는 환경이라 수사는 난항을 겪지만, 도지마와 와타세 컴비는 이 사건이 단순 빈집털이 사건인 오하라 현장과 유사하다는걸 알아낸 뒤, 흉기와 도구에서 열쇠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확인하고 관련자들을 수사해 나간 끝에 범인 사코미즈를 체포했다. 그리고 와타세는 이 사건이 쇼와 59년 부동산업자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는걸 깨닫고 심문을 통해 사코미즈가 진범임을 밝혀냈다. 

와타세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다가 조직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지만, 시즈카 재판관 등의 조언을 받고 사코미즈의 조서를 공개했다. 이후 언론의 대대적인 공세와 함께 사건 관계자들은 모두 좌천되거나, 해임되고 말았다. 그러나 핵심 수사관이었던 나루미는 이미 퇴임한지 3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리고 와타세는 내부 고발자로서 온다 검사로부터 보호받아 처분에서 빠져나갔다. 와타세 본인은 이에 대해 크게 자책하며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23년 뒤인 헤이세이 24년 (2012).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사코미즈는 출소 직후 공중 화장실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수사 1과 1반을 맡는 경부가 된 와타세는 독자적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시리즈 등으로 접했던 작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편입니다. 잘못된 수사와 판결에 의한 '원죄'를 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왜 가해자보다 피해자 가족이 더 비참해져야 하는지, 흉악한 살인범도 인권이라는게 있는지 등 여러가지 질문을 많이 던져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파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사회파스러운 소재에 더해진 본격 추리라는 작풍이 작가의 특징인 듯 한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에요. 특히 '재판, 특히 사형 판결을 내린다는게 얼마나 무거운 행위인지' 알려주는 작품은 여러 편 보아 왔지만 묵직한 내용을 추리적으로 잘 포장한 작품은 "데이비드 게일"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그런 점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합니다.

이야기는 시대순으로, 사건별로 구분되어 전개되지만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사건 용의자 아키히로의 자백을 받아내어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강도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진범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수사에 대한 묘사는 빼어납니다. 우선 부동산 업자 부부 살인 사건에서는 나루세 경부보가 용의자 아키히로를 옭아매는 조작 수사와 그 결과에 의한 재판이 아주 상세하고, 5년 뒤 일어난 고급 주택가 모자 살인 사건에서는 와타세 형사의 추리에 이은 수사에 대한 설득력이 높습니다.
모자 살인 사건 범인은 '열쇠업자' 일거라는 착안이 특히 빼어납니다. 범인은 도주하면서 직접 만든 자물쇠 따는 도구인 '피크'를 버렸는데, 와타세는 다시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한 뒤 관련자 수사에 나서 범인을 체포하게 되거든요. 이후 범인 사코미즈가 전편에 등장했던 부동산업자 살인도 저질렀다는걸 알아차리는 과정 역시 이치에 합당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중반 이후, 진범 사코미즈가 모범수로 감형되어 23년 후 출소하자마자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 다룹니다. 앞서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수사 중심이지만, 의외로 본격 추리물 느낌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알리바이 조작, 흉기 은닉과 같은 정통 트릭이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마지막에 와타세 경부가 범인인 아키히로의 부친을 찾아가 사건 시각에 경운기에 탔던건 치매에 걸린 아내이고, 흉기는 농기구인 경운기 부품이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추리쇼와 다를게 없고요. 여기에 사코미즈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반전 -그를 죽이려는 온다 검사의 음모였다는 - 까지 더해져 추리적으로는 아주 풍성한 편입니다.

주인공인 와타세 경부도 매력적이에요. "연쇄 살인범 개구리 남자"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수사 기계처럼 등장했었는데, 이 작품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납니다. 과거 원죄를 저지른 과오를 깊게 인식하고 두 번 다시 수사에 오점을 범하지 않는 형사가 될 것을 결심하는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수사 기계보다는 인간적인 모습, 고뇌하고 고민하는 입체적인 모습이 많이 보여져서 좋았습니다. 내부 고발자라 주위의 눈총을 받는 탓에 출세를 포기하고 범인 체포에 열중하는 모습도 설득력 높고요. 작품 속 진짜 수사 기계인 나루미 경부보는 알고보니 사건 해결에만 집착하는, 자기 중심적인 악당이라서 대비가 강렬했던 탓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 것 같습니다. 본 작품이 와타세 경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이라는데, 후속권도 계속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개구리 남자"의 주인공이었던 고테가와의 카메오 출연도 반가왔고요.

그러나 '진짜 흑막은 온다 검사!'라고 내세운 반전은 지나쳤습니다. 초반에 정의로운 모습을 보였던 온다 검사가 부동산 부부 살인 사건의 목격자로, 사건 당시 현장 근처 러브호텔에서 불륜을 저지르다가 범인을 목격했지만 나서서 증언하지 않은 바람에 애꿎은 아키히로가 사형 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다는 설정까지는 그럴싸 합니다. 범인 사코미즈도 '커플에게 들켰지만 경찰은 찾아내지 못한것 같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비오는 밤에 커플이 사코미즈의 얼굴을 기억했을지 여부도 불투명하거니와, 사코미즈가 당시 목격자인 온다 검사의 얼굴을 기억하여 협박하려 했다는건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무려 28년 전 비오는 밤에 잠깐 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게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또 와타세 경부의 수사처럼, 28년 전 사건의 첫 목격자가 당시 '유명 연예인을 닮은 사람'을 보았던걸 떠올린 덕분에 그 선을 수사하여 진상을 알아냈다는건 그나마 말은 됩니다. 허나 이 역시 그 연예인 닮은 사람이 진짜 그 연예인이었다는건 지나친 우연으로 느껴집니다. 이런 불확실한 목격 증언에 기대는 것 보다는, 사코미즈가 출옥한다는 편지를 피해자 가족에게 보낸 누군가를 상세히 캐 보는게 더 현실적이지 않았을까 싶군요.

그리고 사코미즈가 아키히로 부친에게 살해당한다는건 더욱 억지스러웠습니다. 직접적인 피해자 가족인 부동산 업자 부부의 딸이나, 모자 살인 사건의 남편이 살해했다면 말은 됩니다. 하지만 아키히로의 부친이 진범 사코미즈를 살해한다? 부친이 원죄 사건에 대해 복수를 하고자 하면 최우선 목표는 나루미 경부보가 되어야 합니다. 사코미즈는 원죄의 원인이기는 하지만, 아키히로가 사형 판결을 받고 자살한건 경찰의 무리한 수사, 검찰의 무리한 기소, 그리고 이를 제대로 확인못한 재판관의 잘못이니까요. 그리고 와타세 경부도 이야기 하듯, 무려 28년을 (아키히로가 자살한 것부터로는 25년 쯤?)참고 살다가 급작스럽게 복수를 결심한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아울러 이 세 명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온다 검사는 어쩔 셈이었는지 설명되지 않는 것도 문제에요. 사코미즈를 없애기 위해서는 세 명의 피해자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는 정도로는 불충분했을텐데 말이죠. 애초에 편지를 보내는 것 보다는 그냥 사코미즈의 주장을 무시하는게 정답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그리고 중반부에서 경찰 조직이 과거의 실수를 알아채고 증거 (조서)까지 확보한 와타세가 이를 밝히려하자 철저히 격리시키고, 심지어 폭행까지 저지르는 과정이 지나치게 뻔하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조직의 잘못을 알게 된 언론도 대중과 영합하여 총 공격에 나서며, 관계자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보호되고 처벌받으며 이 와중에 지나친 관료 주의가 대두되는 등등 모두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왔던 묘사들이에요. 게다가 와타세가 관계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며 사죄하는 모습은 솔직히 어이가 없더군요. 당연한 결과인데 말이지요. 본인이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것은 의아해할 수 있어도, 이는 조직에서는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내부 고발자는 보호하는데 마땅하니까요. 와타세는 나루미 경부보만 처벌받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것일까요? 말리는 선배까지 힘으로 눌러버리던 모습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묘사는 와타세 경부라는 캐릭터를 위해서는 불필요했다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비록 단점은 있지만 묵직한 주제를 추리적으로 재미있게 포장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원죄에 대한 뻔한 묘사는 조금 줄이고, 온다 검사 수사에 조금만 더 설득력을 부여했더라면 별점 4점도 충분했을거에요. 물론 이 정도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이니만큼,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2021/05/14

더블, 더블 - 엘러리 퀸 / 이제중 : 별점 2점

더블, 더블 - 4점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에게 신문기사가 담긴 편지가 도착했다. 라이츠빌에서 일어났던 루크 매캐비의 죽음, 루크의 유산 4백만 달러가 주치의 세바스티안 도드에게 상속된 것, 유산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하트 방적 공장 사장 존 스펜서 하트가 자신이 유용한 루크의 돈 때문에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4월 7일에는 마을에서 구걸을 했던 술꾼 톰 앤더슨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담긴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엘러리 퀸에게 톰 앤더슨의 딸 리마가 찾아와 아버지는 죽었을 거라며 사건 해결을 의뢰했고, 엘러리 퀸은 리마와 함께 십여년 만에 다시 라이츠빌로 향하는데...

엘러리 퀸 장편 중에서는 수작들이 많이 모여있는 '라이츠빌 시리즈'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이었던 국명 시리즈에 반해, 라이츠빌 시리즈는 범죄 드라마 성격이 강하다는게 특징이지만, 이 작품은 기존 라이츠빌 시리즈와는 조금 다릅니다.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범죄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도둑, 의사, 변호사가 차례로 죽는다'는 마더 구스 동요 중 한 편의 내용대로 살인 사건이 벌어지거든요.

그러나 확실히 라이츠빌 시리즈는 라이츠빌 시리즈에요. 이야기 자체는 전혀 본격물처럼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로 여겨진 탓에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도 않는 탓입니다. 경찰이 방관하는 동안, 탐정인 엘러리 퀸 역시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낸다던가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답게 인간 관계와 동기에 집중합니다.

덕분에 왜 동요가 사건과 연결되는지? 왜 범인이 엘러리에게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한, 와이더닛물로는 꽤 흥미로운 편입니다. 특히 동요와 사건과 연결되는 이유가 참신했어요. 범인 케네스는 죽음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서 유언장 쓰기를 미루던 도드 의사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순순히 유언장을 쓸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사건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두 건의 사망 사고의 피해자 직업에서 착안하여 톰 앤더슨을 죽이고, 니콜 자카르도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한 뒤 이 모든게 마더구스 동요 법칙에 따른 죽음으로 다음 차례가 도드 의사인걸 명심하게 만든 것이지요.
도드 의사가 오래 앓아온 신경증 탓에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게 전개와 묘사에서 계속 드러나서 설득력도 넘칩니다. 우발적인 죽음이 목표한 살인의 연결고리로 이용된다는 트릭은 제법 많이 보아 왔지만, 이 작품에서의 동기만큼은 신선하면서 설득력 높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허나 후더닛물로는 좋은 작품은 못됩니다. 범인은 케네스 아니면 리마일게 너무 뻔했으니까요. 그런데 리마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몰랐던 바깥 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을 수는 있습니다. 속박에서 풀려나기 위해서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을 죽일 동기는 없습니다. 때문에 범인은 케네스인 거지요. 도드 박사의 유산 4백만 달러는 동기로 차고 넘치잖아요. 세 번째 사건인 니콜 자카르 사살 사건은 어쨌건 케네스가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했고요. 

물론 도드 박사의 유언장이 공개된 뒤, 거의 모든 유산은 종합 병원에 기부되기 때문에 케네스의 동기는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도드 박사 뒤에 살해된 변호사 홀더필드, 양복장이 월더 형제 사건에서는 동기가 아예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도드 박사 살해까지는 케네스가, 그 뒤 범행은 리마가 저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도드 박사가 죽은 뒤 결혼했으니 뭔가 동기를 공유했을거라고 본 것이지요. 사실 뒷 부분은 여러모로 리마인게 더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동요 순서대로 '대장'이 마지막에 죽는다면, 이는 앞서 엘러리가 리마에게 말했듯 엘러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결말은 결국 케네스가 진범이라서 조금 맥이 빠졌습니다. 케네스의 자백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 그리고 그가 엘러리가 꾸민 리마 체포 쇼를 보고 자백했다는 결말도 좋은 후더닛 본격물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요.

국명 시리즈로 대표되는 엘러리 퀸 본격물처럼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단점도 큽니다. 동요와 사건을 무리하게 엮은 탓입니다. 동요 순서대로 변호사와 장사꾼 (양복장이)가 죽는 상황은 순전히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도드 박사가 유언장을 두 번 남겼다는 것도 우연이고, 이를 진작에 데이비드 월도가 밝히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변호사 비서 플로스가 때마침 라이츠빌을 떠났다는 것도 동요에 끼워 맟추기 위한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비서 플로스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게 그나마 말이 되었을 겁니다. 

엘러리 퀸에게 케네스가 편지를 보냈다는 설정은 억지의 정점입니다. 엘러리 퀸의 입으로 도드 박사에게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서라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케네스는 그냥 신문에 투고만 했어도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범이 탐정을 불러서 피해자가 죽는걸 예언하게 만들다니, 억지도 정도껏 해야죠.

캐릭터들도 현실적이지 않은, 만화같은 캐릭터들 뿐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산 속 움막에 살던 청순한 소녀 리마가 대표적입니다. 도드 의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경증 증상을 보인다는건 사건 동기 설명을 위해 필요했던 묘사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점치기를 시도한다는 설정 등 다른 캐릭터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고요. 엘러리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던 리마가 케네스와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라이츠빌 시리즈라면 아예 리마와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게 맞았을테고, 이왕 등장한거라면 팬들에게는 리마가 엘러리와 연결되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나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예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라이츠빌 시리즈의 장점보다는 기존 엘러리 퀸 시리즈의 단점이 더 불거진 망작입니다. 역시나, 유명하지 않은 작품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2017/03/11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29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1.5점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29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씨엠비 CMB 박물관 사건목록 28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 2점

전통의 시리즈입니다. 출간된 지 1년 가까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읽었네요. 이번 권에는 모두 네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완성도가 심하게 부족합니다. "Q.E.D"와 함께 진행하는 이유를 정말이지 모르겠어요. 이래서야 두 이야기에서 베스트만 뽑아도 평범한 수준에 머무를 듯 합니다. 부디 작가가 한 길에 집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프라 크르앙" 

신라와 타츠키는 사망한 실버의 유품에 관련된 의뢰 때문에 미국 석유왕 실버 루빈 저택을 찾았다. 유품은 프라 크르앙으로, 타이에서 악령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휴대하는 부적인데 그다지 비싸거나 귀하지 않은, 별 볼일 없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실버의 손녀 프리실라의 부탁으로 신라 일행은 유물에 대해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뭔가 훈훈한 이야기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실버가 생명의 은인 시타를 가지고 논 것(?)이라는 씁쓸한 결말로 끝나는 작품입니다. 문제는 이 정도 반전이라면 이야기가 좀 더 정교했어야 한다는 겁니다. 곳곳에 구멍이 너무 많아요. 시타가 타락하여 송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극단적인 설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를 위해 그다지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도 않고요.

한마디로 점수를 줄만한 부분이 거의 없는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피해자 가해자 목격자" 

신년 참배를 위해 방문한 신사에서 사츠키는 가방을 둘러싼 절도를 목격했다. 곧바로 가방을 습득한 사츠키는 경찰에게 전달했지만 가방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두 명 나타났다. 내용물 중 화장품은 여성의 것으로 보였지만 지갑은 남자 것이고, 심지어 남자는 금액까지 맞췄다. 가방은 누구의 것일까?

"Q.E.D"에서 자주 접했던, 상반된 증언에서 진실이 뭔지 밝혀내는 전형적인 카토우 모토히로 스타일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는 심하게 별로입니다. 절도 사건의 핵심 이유인 현금 카드에 대한 추리가 비약이 너무 심한 탓입니다. 이 정도면 거의 초능력 영역이니까요. 게다가 신라가 가방이 여성의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가 단지 립스틱 컬러가 같아서라는건 근거가 약합니다. 유행하고 있는 컬러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나마 남자가 금액을 확신한게 이상하다 - 도난당했으면 돈이 없어진게 당연할 테니 - 는 정도만 논리적으로 말이 되기는 하는데, 이 역시 아무리 도난 당했어도 "얼마가 들어있었다"라고 주장하는게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편에 비하면 추리물이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하기 때문에 약간의 점수를 더합니다만, 평균 이하라는 점은 같습니다.

"동백 저택" 

몇 대 째 이어져 온 하리바 상사의 현재 사장은 철없는 애송이로, 자금난으로 위기에 처한 회사를 구하기 위해 상속받은 낡은 저택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려 하는데...

일종의 보물 찾기 이야기인데 화투가 관련되어 있다는게 너무 명백하고, 이외의 별다른 수수께끼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정원을 돈을 들여 깔끔하게 고치는 와중에 숨겨진 다리와 금고를 못 찾아낸 것부터 말이 안되고요. 

동백과 산다화의 차이를 알려주는 것 정도만 건질만 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자백" 

신라의 지인 류보쿠를 살해한 용의로 수감된 가모우는 범행을 부인해오다가 결국 자포자기한 채 자백했다. 하지만 변호사는 가모우의 옷에 피가 튀지 않았다는걸 물고 늘어지는데...

이번 권에서 그나마 가장 제대로 된 추리물입니다. 가모우의 범행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수수께끼인 '왜 살해 현장이 현관이었는지?''왜 가모우에게 피가 튀지 않았는지?' 모두 추리를 통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첫 번째 답은 '피해자가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것 같아 길을 지키고 있던 것'이며, 두 번째 답은 '피해자가 들고 있던 칼에 맞서 범인이 우산꽂이를 가지고 싸우다가, 우산꽂이에 칼이 끼워져 창처럼 사용해 피해자가 찔려 죽었는데 우산 덕분에 피가 튀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추리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적 증거이자 트릭인 우산꽂이의 경우,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약점에 더해 당연히 우산꽂이에 묻었을 혈흔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우연한 트릭이 경찰에 발견되지 않았다는건 설득력이 약하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3/04

가상가족놀이 - 미야베 미유키 / 김선영 : 별점 2점

가상가족놀이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코로다 료스케라는 이름의 남자가 공사 현장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수사 끝에 사흘 전에 일어난 21세 여대생 이마이 나오코 살인 사건과의 연관성을 찾아냈고, 언뜻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것처럼 보였던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가상가족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서로 얼굴도 실명도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딸, 아들로 연극을 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딸의 닉네임인 '가즈미'는 도코로다의 친딸 이름이기도 했다.

진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인터넷상의 가상가족에게만 몰두한 피해자. 경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진짜 가족이 매직미러 너머로 취조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인터넷상에서 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오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미야베 미유키의 범죄 수사물입니다. 초반부에 살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 잠시 등장한 뒤에는 취조실에서 진행되는 3 명의 가짜 가족에 대한 심문, 그리고 이를 매직 미러 뒤에서 지켜보는 피해자의 딸 가즈미와 그녀를 보호하는 경찰의 시점을 오가며 진행됩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만 등장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연극적이지요. 실제로 심문은 '연극' 이기도 하고요.

비교적 짤막한 길이에, 이야기도 재미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다는건 장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가짜 가족을 만들어 서로가 각자의 역할을 연기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요. 가족 해체가 진행 중인 현재 시점에 통용될만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은근하고 깊은 심리 묘사들도 여전히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문제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은 별 재미가 없다는 점입니다. 가짜 가족을 데려다가 진행하는 심문부터가 아무리 봐도 진범을 밝히려는 목적은 없어 보인 탓입니다. 심문 과정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 가짜 가족 놀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살인 사건은 언급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심문의 목적은 뭘까요? 서로 너가 죽였지! 너가 범인이야! 라고 싸우다가 누군가 자멸하여 자백할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가즈미가 가짜 증언에다가 범인과 가짜 가족들에 대한 지나친 복수심과 적대감을 드러내고, 심문이 진행되는 와중에 계속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수상쩍은 행동을 거듭하기 때문에 가즈미가 범인일거라는 추리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문은 가즈미가 동요하게 만들어 자백하게 하려는 목적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심문 자체가 연극이었다는 것 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이었지만요. 

그러나 이렇게 거창한 연극을 벌여가면서 가즈미의 범행을 드러내려 하는데, 그 방법이 고작해야 전화 통화를 엿듣는 정도라는건 어설픕니다. 또 경찰이 연극을 벌여가며 가즈미를 함정에 빠트리는게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사건 수사가 벽에 부딪혔다 하더라도, 이런 노골적인 함정 수사는 위법 아닌가요? 아울러 범행 때 사용된 파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온 이상, 어차피 가즈미의 애인 이시구로 다쓰야는 체포할 수 있었을테고, 그렇다면 범인을 잡는건 시간 문제였을텐데 말이죠. 실제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헛수고였어요. 연극에는 가즈미의 분노와 복수심을 달래기 위한 목적도 있어 보이지만, 경찰이 두 명이나 죽인 살인범을 특별히 배려해서 연극을 벌인다는건 말도 안되겠죠. 경찰이 아니라 또다른 피해자 이마이 나오코 가족이 연극을 벌였다던가 하는 식이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겁니다. (가면 산장 살인 사건?)

가즈미가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동기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에요. 아버지가 진짜 가족을 내버려두고 외부에서 가짜 가족, 심지어 딸 이름이 똑같은 가족을 만들어 놀았다는걸 알면 분노할 수는 있을거에요. 그러나 이게 살인으로 이어지게 될까요? 그것도 그 사실을 알고 난 직후가 아니라, 아버지의 전 젊은 연인이었던 이마이 나오코를 가짜 가족 가즈미로 착각해 살해한 다음에? 연기이건 아니건, 친아버지가 살인에 대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데 거기서 더 큰 살의가 생겼다는 뜻인데 이건 납득이 되지 않네요. 아무리 아버지 료스케가 실수를 많이 했다 해도, 이런 진심까지도 연기로 치부되어 살해된다는건 지나친 비약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불만과 단점을 잔뜩 썼는데, 이는 책 뒤 소개글에 낚인 탓도 큽니다. 책 뒤에서 두 번의 반전이 있다고 소개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일단 가즈미가 진범이라는 건 앞서 말씀드렸듯 반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그녀에 대한 묘사가 영 수상쩍기 때문에요.
두 번째 반전인 세 명의 가짜 가족이 경찰의 대역이라는건 앞서 말씀드렸듯 예상하지 못한건 맞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초반부에 다케가미가 대역의 대사 운운하는 장면을 통해 제공해주고요. 그러나 이 사실이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는건 전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이런 연극을 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개인적으로는, 다쓰야의 파카에 엄청난 피가 튄 걸로 봐서 료스케 살인의 실행범은 다쓰야가 아닐까 싶기는 한데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즉, 반전물도 아니고, 그나마 있는 반전도 대단하지 않으므로 반전물을 기대한 저 같은 독자는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애초에 수사를 위해서는 진행할 이유가 없는 연극이 소재인 탓에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그 외의 장점은 딱히 없습니다.

2017/10/18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런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에서는 "정신자살"에서는 보여주었던 변격물적 취향이 많이 엿보입니다.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지요.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에 그칩니다. 그래도 일부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다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경찰에 순순히 체포된 그는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입니다.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겠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게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무리수였던 탓입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라는건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쉽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이는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미묘한 소품입니다.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한 할머니가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의뢰했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죽었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중이었다...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기묘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입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 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진상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고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렸다는 결말이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기를 바랍니다.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했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고 마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로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하지만,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단연코 워스트입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차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 사건을 수임하였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했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전해 듣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입니다.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고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게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이며,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공정했을 겁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걸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지요.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로 타임 슬립을 다룹니다.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고요.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두 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게 결말이니까요.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의견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뜻인데,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합니다.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게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한데,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당했고,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꼬여만 갔고, 결국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입니다. 수준도 높습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덕분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게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