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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0

콜드 문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2.5점

콜드 문 - 6점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뉴욕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현장에 시계, 기묘한 시와 함께 자신을 '시계공'이라고 서명한 범인을 찾기 위해 링컨 라임과 아멜리아 색스가 나섰다. 한편 색스는 이 사건 외에도 자살로 위장한 사업가 살인 사건을 맡게 되었다. 경찰 118번 지구대가 범행에 연루되어 있다는게 드러났으나, 당장은 내사과 투입이 어려워 부시장 월러스와 경정 매릴린 플레허티의 합의로 색스 혼자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것이었다.

전신마비 법의학자 링컨 라임과 그의 수족인 여성 경찰 아멜리아 색스 컴비의 활약이 그려지는 제프리 디버의 베스트셀러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서 해외편 6위에 당당하게 위치해 있는 탓에, 평소 궁금하게 여기다가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장점이라면 흡입력, 재미입니다. 거의 550여페이지에 달하는 대장편인데 쉽게 읽힙니다. 시계공 던컨의 범죄 행각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유행했던 "싸이코 연쇄 살인마와 천재 경찰의 대결"을 비튼 아이디어도 좋아요. 반전도 괜찮으며, 철저한 증거 위주의 수사로 수집한 증거를 통해 이런저런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그것들이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마음에 듭니다.
새 캐릭터인 동작학 전문가 캐스린 댄스의 심문 과정에 대한 묘사도 그럴듯합니다. 거의 인간 거짓말 탐지기 수준으로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럴듯하게 묘사되어서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는 덕분입니다. 다른 링컨 라임 주변인물 묘사도 시트콤스러운게 유쾌했고요. 아멜리아 색스가 아버지의 추문, 경찰에 대한 신뢰 추락이라는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한다는 결말도 전형적이지만 나쁘지 않았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은 잘 되고 나쁜 사람은 파멸하는 이야기가 감정이입이 잘 되더라고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걸 알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에서 지난 30년간 작품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으로 꼽을만하냐면,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여지가 많지 않은 탓입니다. 다음 단계로의 진행은 모두 주요 관계자의 증언에 따를 뿐입니다. 빈센트 체포 후 빈센트의 증언으로 다음 피해자 대상이 좁혀지고, 이는 베이커의 작전이었지만 베이커 체포 후 던컨 본인도 체포되어 연쇄 살인극이 아니라는게 그의 입으로 밝혀지고, 던컨이 풀려난 뒤 그의 다음 목표가 델파이 메커니즘이라는 것도 빈센트와 이전 시계점 증언으로 밝혀지는 식이거든요. 이래서야 링컨 라임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솔직히 링컨 라임이 없어도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또 지나친 반전과 어처구니없는 진상도 문제입니다. 초, 중반까지는 연쇄 살인극을 꾸미는 시계공 던컨과 조수격인 성범죄자 빈센트가 몇 명의 여성 희생자를 집요하게 노리는 묘사가 이어지죠. 그러나 빈센트는 그냥 미끼였고, 던컨의 진짜 목표는 118번 수사대 비리와 연류된 비리 경찰 베이커의 의뢰로 색스를 연쇄 살인범의 범행으로 위장해서 죽인다는 반전, 베이커 뒤에 흑막으로 부시장 월러스가 있었다는 반전, 시계공 던컨의 진짜 목적은 세슘 시계를 조작해서 이전부터 탐낸걸로 묘사된 '델파이 메커니즘'을 훔치려는 것, 인줄 알았지만 진짜 중의 진짜는 뉴욕 도시 개발 공사에서 뉴욕시와 국방부 등이 주최하는 행사에서 사람을 다량으로 살상하는 테러였다는 반전이 계속 이어집니다. 이렇게 반전이 너무 많다보니 가면 갈 수록 흥미가 떨어지더군요. 90년대 후반부터 유행했던 '반전물' 들을 보고, "내가 진짜 반전이 뭔지 보여주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쓴 느낌인데, 지나쳤어요. 과유불급이랄까요....

게다가 '시계공의 목적은 무차별 대량 살상 테러였다!' 라는 진상도 너무 별로입니다. 작 중에서는 사람은 죽이지 않고, 이전에 사람을 죽였다고 언급헸던 범행의 대상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라 안티 히어로 모습을 보여주던 천재 범죄자 시계공이 왜 무작위로 사람을 살상하는 테러를 선뜻 받아들이는지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계공의 캐릭터도 이상해져 버렸고요.
마지막 범행, 즉 테러를 위해 연쇄 살인 시도를 가장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 역시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입니다. 자물쇠를 따고 숨어드는게 쉽다면, 루시 릭터가 친구를 만나러 나갔을 때 집에 침입해서 필요한 서류를 찍어가지고 오면 되는거잖아요? 꽃가게 조앤의 화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구태여 엄청난 숫자의 뉴욕 경찰이 동원될만한 살인극을 가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비리 경찰 베이커의 의뢰를 받아들인 목적도 불분명합니다. 시계공의 범행이 가짜이고 해프닝에 불과했다는걸 구태여 드러낼 이유는 없어요. 테러를 위해서라면 그냥 연쇄살인극을 위장하는게 나은 선택 아니었을까요? 구태여 아는 사람을 늘릴 이유도 없고, 베이커에게 복수하겠다는 가짜 동기 등 시계공의 모든게 가짜라는게 드러나는 것도 시간 문제인데 말이지요. 베이커의 의뢰를 받아들여 아멜리아 색스를 연쇄 살인범에 의한 것으로 가장하여 살해하려는 의도였다고 중간에 설명되지만, 이는 시계공이 베이커의 범행은 실패하게끔 총을 조작했다는 이야기 전개를 보면 역시나 합리적이지 않아요. 차라리 링컨 라임과의 대결을 위해 도전한다는걸 보다 명확하게 표현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무랄데 없습니다만, 비리 경찰 베이커와 아멜리아 색스의 아버지 이야기를 빼고 350~400 페이지 정도로 이야기를 정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2024/10/27

종이학 살인사건 - 치넨 미키토 / 권하영 : 별점 2점

종이학 살인사건 - 4점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범인 및 진상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준세이 의대 부속 병원 조직 검사실 병리의 치하야의 아버지 미노루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병리해부를 유언으로 남겨서 치하야는 동기이자 지도의 시오리의 보조로 해부에 참석했다. 그런데, 아버지 위에는 암호가 새겨져 있었다. 암호는 28년 전 어린 아이들을 노렸던 미제 연쇄살인극 '종이학 살인사건'의 마지막 피해자 진나이 양의 시신이 숨겨진 곳을 의미했다.
둘은 이를 몰래 알리려 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28년 전 형사였던 아버지의 동료 사쿠라이 형사와 진범을 찾아내려 나섰다. 그와 함께 다시 연쇄 살인극이 일어났고, 현장에는 28년 전과 똑같이 '종이학 살인사건' 범인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유리탑의 살인"으로 이름을 날린 치넨 미키토의 장편 소설. "유리탑의 살인"처럼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 생각했는데, 전형적인 연쇄 살인마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그래도 아래와 같이 '위 속에 암호를 새겼다.'는 독특한 설정은 흥미로왔어요. 덕분에 이야기 중반까지 흥미를 잘 잡아줍니다. 
치하야, 시오리가 의사이며 특히 시오리가 병리해부를 맡은 병리의라는 설정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미노루가 생전 유전병인 '구루병'을 앓고 있었다는걸 알아내는 식으로요.

뼈가 약해지는 구루병은 X염색체 변이가 원인으로 100% 딸에게 유전됩니다. 즉, 키도 크며 격투기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튼튼해서 구루병을 앓지 않는 치하야는 미노루의 친 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노루의 친 딸은? 목이 부러진채 발견된, 28년 전의 피해자 진나이 양으로 알려진 시신의 진짜 주인공이었습니다. 구루병 탓에 급작스럽게 딸이 죽어 혼란에 빠졌던 미노루의 아내가 진나이 양을 유괴했고, 범인이었던 야기누마(타치바나) 와카코가 이 사건을 연쇄 살인극이 하나로 위장했던 겁니다. 알리바이를 통해 혐의를 벗기 위해서요. 마침 유괴 사건을 엮어 미노루를 협박하기도 해서 운 좋게 빠져나갈 수 있었지요. 범인을 놓아준 죄책감에 경찰을 그만 둔 미노루는 더 이상의 범행을 막기 위해 와카코를 계속 감시해왔고, 미노루가 죽자마자 와카코는 범행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죠.

하지만 여러모로 전작보다 못합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많이 부족해요. 범인을 추리할 만한 단서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미노루가 경찰을 그만둔 뒤,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무언가를 감시했다' 정도만 의미있는 단서입니다. 그 외의 단서들은 모두 쓸모가 없어요. 핵심 증거와 단서들은 모두 마지막에 범인이 치하야를 납치하며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후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시오리가 알아낸 아버지의 유전병이라는 단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특했던 '위에 암호를 새긴다는 설정'도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작품에서처럼 위궤양으로 암호가 지워질 수도 있는 등 변수도 많아요. 차라리 변호사에게 사쿠라이 형사에게 전해주라고 편지를 남겼으면 될 일입니다. 게다가 암호로 남길 이유도 없었고, 암호의 내용도 불합리합니다. 마지막 사건의 시신 위치를 알린다 한 들, 이는 진상과 연결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냥 범인 이름을 써 놓지 않았을까요? 범인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탓에 피해자도 두 명이나 생겼는데 말이지요. 암호 해독도 특별한게 없고요.

전개도 어이가 없습니다. 둘이 암호를 곧바로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 시신 발굴 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 사쿠라이와 비밀 수사를 하는 이유 모두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경찰 수사도 많이 어설픕니다. 특히 가장 어이가 없었던건, 이전 수사 담당자 이노하라가 타치바나 사장의 자식이 마지막 사건에서만 알리바이가 없었다고 알려주는 장면이었어요. 모든 연쇄 살인이 단독범의 소행일리 없는데, 마지막 알리바이가 없다고 유력한 용의자를 그냥 풀어주는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려 다섯 명의 아이가 살해된 사건인데, 경찰이 너무 안이한거 아닙니까? 범인이 유괴한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운다는 설정도 많이 접했던것이라 식상합니다. 이에 대한 정보도 많이 전해주고요.

이렇게 위에 새긴 암호, 병리의, 유전병 정도의 소재를 제외하면 연쇄 살인범과 형사의 대결을 그리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범죄 스릴러와 흡사합니다. 범인의 정체도 반전처럼 등장하지만 굉장히 뜬금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은 흥미롭지만 그 뒤의 이야기들은 모두 설득력낮고 억지스러우며, 뻔했다는 점에서 위에 암호를 새기는 상황을 떠올리고, 전체적인 얼개없이 재미있겠다 싶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게 아닌가 싶네요. 

2019/06/29

천사의 잠 - 기시다 루리코 / 오근영 : 별점 1.5점

천사의 잠 - 4점
기시다 루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북스캔(대교북스캔)

교토의 의학부 연구원 아키자와 소이치는 조수 결혼식에서 13년 전 불같이 사랑했던 여성, 아키호 히후미를 만났다. 소이치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지듯 떠난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지만, 뜻밖의 만남 앞에서 반가움보다는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였다. 이미 중년이 되어 있어야 할 그녀가 20대의 젊음과 미모를 그대로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그녀의 딸은 열다섯 살 소녀로 성장해 있는데, 어째서 그녀만은 세월을 거스르듯 오히려 13년 전보다 더 앳된 모습인 걸까? 과거의 열정이 되살아나 다시 그녀 주변을 맴돌던 소이치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를 사랑한 주변 남자들이 모두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사라졌던 13년 동안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

"살인 단백질 이야기"로 접했던, 유전병인 치명성가족성불면증 (FFI)를 앓다가 죽어가는 가족이 주요 소재입니다. 자세하게는 몰라도 대충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라 반갑더군요. 그나저나, "살인 단백질 이야기"를 읽고나서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10년도 더 전인 2006년에 이미 관련 작품이 발표가 되었었네요.

소재도 반갑지만 여성 작가다운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여러가지 음식들 묘사에 더해 패션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빨간색 코트에 초록색 정장을 받혀 입는다던가 초록색 캐시미어 재킷에 하늘색 원피스, 노란 부츠에 파란색 가방이라는 히후미의 패션은 화려한 수준을 넘어선, 상상도 잘 안 될 정도로 시대를 앞서간 컬러 조합이니까요. 교토를 주 무대로 하여 은각사, 은사탄 등 각종 명소와 거리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전해주고요.

그러나 소재와 약간의 묘사만 괜찮을 뿐, 내용은 수준 이하입니다. 아무리 현실을 뛰어넘는 이야기는 없다지만 실존하는 이탈리아 FFI 가족 이야기보다도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어딘가에서 괜찮아 보이는 실화를 접한 뒤 깊은 조사 없이 그냥 동기로 이용해서 책을 쓴 것에 지나지 않아 보입니다. 사실 작품 내용만 본다면 프리온 어쩌구, 유전병 어쩌구를 소재로 사용할 이유도 없어요. 그냥 심장 이식이 필요했다고 해도 무방했을테니까요. 

그리고 범행 동기인 히후미의 에마에 대한 걱정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머니 입장에서 자신의 딸에게 같은 병이 유전되었을지 모른다는건 어마어마한 고민이겠지만, 아무런 의학적 검사 없이 그냥 '유전병이니 죽을거야' 라고 생각한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프랑스의 유명한 연구소까지 갔다 왔다는 설정 때문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살인 단백질 이야기"를 보면 이미 20세기 후반에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유전자 변이에 대한 검사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발표된 시점에서는 이미 발병 여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거에요. 최소한의 검사도 없이 무조건 병에 걸릴거라고 믿는다? 최소한 '의학 미스터리'라고 홍보한다면 이런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그래도 절박한 어머니의 심정만큼은 설득력이 있다고 칩시다. 저 역시 딸이 병을 앓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고쳐주고 싶을테니까요. 하지만 프랑스 연구소에서 5억엔을 기부받으면 치료약을 완성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설정, 이 5억엔이 동기가 되어 부유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살해하는 연쇄 살인극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전무합니다. 지금도 프리온 관련 병의 치료제는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냥 완벽한 사기지요. 5억엔이라는 애매한 금액은 대체 뭔가 싶고요. 차라리 피실험자로 자원한다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그걸 위해 최소한의 체류비를 목표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말은 되니까요.

연쇄 살인극 이야기는 더 가관입니다. 핵심 트릭인 '바꿔치기' 부터가 어이 상실이에요. 아무리 지인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나이부터가 차이나는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삼는다는 것 부터 어처구니가 없어요. 그것도 불법 체류자를 자신의 대역으로 마련한다? 완전히 비상식적입니다. 게다가 불법 체류자를 가르쳐서 한 사람의 간호사로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도 말도 안되지요. 간호사들의 업무가 그렇게 호락호락할걸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으니까요. 대역 본인도 아니면서 13년전 소이치와의 과거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 히후미 본인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걸 너무 쉽게, 대충 넘기고 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왜 이런 범행을 저지르는지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13년 전 시점에서 히후미는 굉장한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되며 나름 유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5억엔을 위장 결혼과 살인으로 마련하느니 지위가 높은, 예를 들면 의사와 결혼하여 마련하는게 더 현실적인 방향입니다. 최소한 살인 계획을 짜기 전에 그런 노력이라도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히후미는 서슴없이 살인을 선택했어요. 그렇다면 5억엔을 마련하려면 범행을 최소화했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연쇄 살인극을 벌이고요. 경찰을 우습게 알아도 이건 너무 과합니다.
그리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더라도 동기가 명확한 사람이 한 명뿐이라면 범행이 연달아 성공할리도 없어요. 공범자를 밝혀내는게 수사의 기본이니 분명히 꼬리를 잡혔을겁니다. 부유한 남편들이 연달아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면 더 이상 희생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근거지를 옮기지도 않고 버티는 건 무슨 배짱인가 싶네요.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키자와 소이치의 존재도 작품을 수렁으로 몰고갑니다. 히후미를 불같이 사랑하여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그녀를 '가장'한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원래의 히후미는 가차없이 버린다는 이야기의 결론만 놓고 보면, 사랑 따위는 없고 결국 그냥 젊고 예쁜게 좋았을 뿐이라는 거니까요.
또 새로운 연인이 히후미와 교제할 때 옆집에 살던 중국에서 온 매춘 소녀 레이카였고, 히후미가 소이치와 동거를 결심한게 레이카를 자신의 대역으로 삼으려던 의도였다는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유치하고 어이없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부터 레이카가 소이치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안 넣으니만 못한 설정은 한마디로 쓰레기 더미에 얹은 음식물 쓰레기 느낌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소재는 흥미로우나 이를 전혀 살리지 못한 졸작입니다. '의학 미스터리' 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함량 미달이고요. 추리적으로도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오래전 작품으로 이미 절판되었지만 혹시나 눈에 뜨이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전무합니다.

2009/05/17

꼬리 아홉 고양이 - 엘러리 퀸 / 문영호 : 별점 3점

꼬리 아홉 고양이 - 6점
엘러리 퀸 지음, 문영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엘러리 퀸의 1949년 작 장편. 국명 시리즈나 라이츠빌 시리즈같은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는 조금은 독특한 작품입니다. 정통 고전파 퍼즐 트릭물의 거장으로서의 엘러리 퀸의 모습보다는, 헐리우드 스릴러에 가까운 모습이 더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제임스 페터슨이나 마이클 코넬리 같은 후대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선구자적인 모습이 엿보인달까요? 대도시 뉴욕을 무대로 벌어지는 무차별 연쇄살인극을 그리고 있는 점이라던가, 이 연쇄살인에 어떤 트릭이 있다기 보다는 "범인이 누구인지"를 특정하게끔 하는 일종의 패턴을 파악하는 것이 사건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는 점 등이 그런 느낌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이런 작품에서는 특히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피해자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이 범인을 밝혀내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이 부분을 상당히 공들여 잘 표현하고 있기에 중간부분까지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색다른 공통점이라 생각되며 맹점을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설정이었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좀 오래된 탓인지, 완성도 측면에서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제일 큰 아쉬움은 피해자들에게서 찾아낸 공통점이 너무 한가운데 직구라 그때부터 범인이 특정화되면서, 마무리까지는 지루해진다는 점이었죠. 가장 마지막 부분에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사건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추리적으로는 무가치한 수준의 반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범인의 동기 부분이었습니다. "정신병"으로 몰아가는 것은 21세기에 읽기에는 너무 뻔했거든요. 쉬운 설정이고 작품에도 어울리긴 했지만, 진부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앞서 말했듯 헐리우드 스릴러물에 가깝기 때문에 "정통 추리물"을 기대한 저같은 독자에게는 기대에 갚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겠죠.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에는 솔직히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추리의 과정에 독자가 동참할 수 없기에 개인적으로 실망도 좀 컸고요. 물론 어설픈 트릭과 트릭때문에 이야기 전개가 무너지는 억지스러운 작품보다야 훨씬 낫긴 하지만 제가 "엘러리 퀸"이라는 작가에게 기대한 것과는 너무 달랐어요. "독자에게 도전" 하던 정통 퍼즐러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연쇄살인범 "고양이"와 엘러리 퀸의 대결을 통해 엘러리 퀸의 색다른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과 싸이코 연쇄살인극의 선구자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쉬움도 있지만 별점은 3점 정도의 무난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2011/12/02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 맥스 브룩스 / 장성주 : 별점 3점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 - 6점
맥스 브룩스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

가상의 존재인 좀비에 대해 상세한 설정을 부여한 뒤 좀비가 창궐하였을 때의 대처법을 설명하는 독특한 책.

따지고 보면 대체역사 소설과 비슷한 장르물이긴 하지만 "교본"이라는 형태로 구성하여 현실감을 높이고 독자로 하여금 디테일한 설정에 빠져들게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말이지 아이디어의 승리에요. 어렸을 때 좋아했었던 일본 괴수, 애니메이션 대백과 생각이 나기도 합니다. 터무니없는 설정을 진짜처럼 포장해서 풀어나가는 점 때문입니다.

실려 있는 내용도 꽤 상세합니다. 좀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무기와 전투 기술, 방어요령, 피난요령, 공격요령, 좀비 천지에서 살아남기에 이어 기록에 남은 좀비 공격 사례라는 가상 역사로 마무리하고 있는데, 모든 내용이 가짜라는걸 알아도 읽고 나면 뿌듯해질 정도로 그럴듯합니다. 거의 전 지구를 포괄하는 가상 역사도 흥미진진하고요.

또 그동안 좀비물의 상식을 깨는 이론도 돋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쇼핑몰이 좀비 방어에는 최악의 장소라든가, 버스는 탈출 수단으로는 젬병이라는 것 등입니다. 전통적인 좀비 영화나 만화의 설정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것들인데, 워낙에 합리적으로 설명해 주어서 감탄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혹시 모르니 필수 상비품인 "배척 (빠루)"는 바로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셰티"도 한 자루 챙겨 놔야겠고요. "월아산"을 어떻게 구해 놓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창의 안정성과 일본도의 살상력 겸비)

하지만 내용 대부분을 글로 떼우고 있다는 점에서 최고점을 주기에는 부족합니다. 좀 더 치밀한 도판과 자료 사진으로 도감 형태를 갖추었어야 합니다. 이 정도로는 좀비 세상에서 살아남는 가이드로는 부족해요. 그 밖에 농사짓는 법이라든가 피난처를 짓는 방법도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되었어야 합니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슬쩍 짚고 넘어가는 수준이라서, 정작 위급한 상황에서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런 소재로 이만큼이나 진지하게 접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하고, 취미와 실용 (?)을 만족시키는 보기 드문 작품으로 장르물 애호가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좀비물 팬이라면 놓치지 마시길.

이어지는 시리즈로 "북두신권 세상에서 살아남기"라든가 "연쇄살인극에서 살아남기" 등으로 시리즈가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연쇄살인극에서 살아남기"는 직접 써 봐야겠네요!

그런데, 좀비가 왜 이렇게 사랑받는 몬스터가 됐을까요? 제가 어릴 적에는 3대 몬스터 - 드라큘라, 프랑켄슈타인, 늑대인간 - 에 끼지도 못하는, 미이라보다 못한 마이너 몬스터였는데 말이죠(대관절 프랑켄슈타인이 저기 왜 끼어 있는지는 미스터리지만). 80년대 이후 피로 전염되는 AIDS라는 병에 대한 경각심 때문일까요? 어쨌든 80년대 이후, 기존의 귀족적인 스타일에 더하여 핸섬한 게이 혹은 엄친아로 진화한 흡혈귀에 비한다면야 몬스터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뚝심 하나만큼은 높이 사고 싶긴 합니다

2010/08/26

데드트릭 1,2 - 카린펜 (華倫変) : 별점 3점


나나모토서에 근무하는 순사장 이치모리 잇페이, 과학수사 연구소 수사관 도쿠가와 도쿠코, 그리고 변태 명탐정인 경시청 수사1과 경부 하다케야마 미치아키가 나나모토서 관할구역에서 발생한 기상천외한 범죄사건을 수사하여 해결하는 정통파 수사 추리만화입니다. 국내 소개된 작품은 아니고 원서로 구해봤죠.

슥 한번 훝어봤을때는 작화나 전개가 왠지 어설픈 부분이 많이 보여서 크게 기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권을 읽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평범한 추리만화 이상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추리강국 일본의 힘이겠죠?
범인이 앞부분에서 살짝 드러나는 도서 추리물 형태임에도 진상트릭은 끝까지 숨겨놓고 수사가 중심이 되는 본격 추리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도 제법이지만 독자가 추리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와 단서를 수사과정과 맞물려 제공하는 전개방식 역시 정통 본격 추리물에 걸맞는 수준이라 만족스러웠어요. 곳곳에서 느껴지는 추리라는 장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과학수사에 대한 세밀한 자료조사 역시 돋보이는 부분이었고요.

작화, 컷 구성 등 만화적인 완성도가 떨어지며 캐릭터들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점 (주역인 도쿠코조차 전개에 사실 큰 필요가 없습니다), 1권에 비해 2권은 완성도가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은 아쉬우나 기대 이상의 신선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은 3점입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작가라 궁금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카린펜 (華倫変 かりんぺん)은 에로망가 출신 작가로 5권의 작품만 남기고 2003년 급성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하네요. 젊은 나이에 사망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국내 출간은 어려워 보이지만, 이 작품이라도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권 : "연속자궁 강탈 살인사건"

나나모토 고교 여고생과 양호 교사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두 사체 모두 자궁이 적출된 상태였다. 경찰은 나나모토 고교에서 발견된 육망성 표식 등을 근거로 '악마 숭배' 의식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추정했다.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것은 왕따이자 저주와 주술 등에 취미를 가지고 있던 2학년생 츠지모토 가즈야였다.

제목 그대로 '자궁 적출'이라는 잭 더 리퍼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연쇄살인극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연쇄살인극이 단지 악마 숭배나 잔혹함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진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용의자에게 사건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공정하게 독자를 속인다는 점에서 정통 고전 본격 추리물 성향을 잘 따른다고 할 수 있고요.
그 외에도 추리 애호가를 사로잡을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잭 더 리퍼 사건의 가설 중 하나를 채용한 진상이라던가, 탐정역인 하다케야마가 진범을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로 진상을 풀어낸다는 결말은 형사 콜롬보를 연상케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증거를 제시하라는 범인 앞에서 범인의 통화 녹음을 듣고 주변 소음으로 위치를 추적한 뒤, '공중전화'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공중전화에서 범인의 지문이 묻은 동전을 찾아내는 등의 과학에 기반한 철저한 수사도 볼거리였고요.

과연 자궁 적출이라는 행위를 단시간에 처리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의문 등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있고, 작품과 어울리지 않는 유머 등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 작화면에서 세련되지 못한 점이 아쉽지만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하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2권 : "도쿠코의 범죄"
연휴에 도쿠코에게 친구 미에가 찾아온다. 그녀와 술을 마시다 잠들어버린 도쿠코는 자신의 옷이 피에 젖어 있다는 것, 그리고 피로 물든 칼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4일 후 다카이라는 청년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고, 도쿠코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도쿠코 옷과 칼의 피가 피해자의 것이었고 그녀의 모발이 피해자 방에서 발견된 것!
도쿠코를 구하기 위해 이치모리는 하다케야마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도쿠코가 범인일리가 없기 때문에, 독자는 미에가 범인임을 확실히 알고 이야기를 읽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에는 피해자 사망 추정시각에 교통사고로 체포되었는데, 체포장소에서 범행장소까지는 차로 2시간이 걸려서 그녀는 범인일리 없다'알리바이 트릭을 어떻게 깰 것인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촛점을 맞추게 되고요.

그러나 이 트릭은 특별한 조작이 있던건 아니었고, 경찰 수사의 헛점으로 철벽의 알리바이가 생겼다라는 설정이라 좀 별로였습니다.
오히려 도쿠코가 범인이 아님을 증명하는 철저한 과학 수사가 더 인상적이었어요. 모발의 상태와 헤어 스프레이의 성분조사를 통한 오류 증명 - 현장에서 발견된 모발은 두종류의 스프레이가 뿌려져 있기에 같은날 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다 - , '곤약'은 위에서의 소화시간이 길기 때문에 사망시간 추정할 때 감안해야 한다는 것, 이문(耳紋)의 채집을 통해 범인 미에가 현장에 있었다는걸 증명하는 것 모두가 철저한 과학 수사에 기반합니다. 이런 류의 다른 컨텐츠들에 못지 않은 수준으로요.

설정과 내용에 비하면 지나치게 길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는 앞서 말했듯 경찰 수사의 헛점으로 우연히 발생하는 알리바이가 핵심이고, 범인의 동기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고요.

그래도 평작은 충분히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제대로 된 편집자가 붙어서 보강했더라면 아주아주 좋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조금 아쉽네요. 

"이치모리군의 도전장"
이치모리가 자신이 신참때 해결한 사건을 도쿠코에게 풀어보라고 소개하는 이야기. 
밀실에서 소녀가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열쇠를 가진 사람은 경비원 뿐이었고, 처음에 아이 어머니와 조사할 때 방은 비어있었다. 다시 조사할 때 시체를 발견하였으나 경비원은 항상 아이 어머니와 함께였다. 범인은 경비원인데 어떻게 살해했나? 라는 문제였다. 
단서는 처음 시체 발견 시에는 모포가 뒹굴고 있었으나, 구급차를 부르고 돌아왔을 때에는 모포가 사라졌다는 것 뿐.

미스터리 매니아 이치모리의 추리소설담이 펼쳐지는 소품으로 쩌리 이치모리가 낸 문제답게 추리적으로는 별볼일 없습니다. 작중 토쿠코가 이야기하듯 흔해빠진 거울 트릭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미스터리 매니아 이치모리의 장황한 이야기가 나름 재미를 줍니다. 특히나 본격물은 프로레슬링, 사회파는 아마레슬링이라고 비유하는게 기억에 남네요. 아마레슬링이 각본없는 진정한 승부지만 작위적인 프로레슬링이 훨씬 재미있다는 논리죠. '바보같지만 재미있어!'랄까요.

또 사건의 동기와 이후 이야기를 작위적으로 짜맞추는 이치모리의 모습에서 최근 추리만화를 풍자하는 느낌이 풍기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12/18

일곱 명의 술래잡기 - 미쓰다 신조 / 현정수 : 별점 2.5점

일곱 명의 술래잡기 - 6점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니시도쿄의 생명의 전화 자원봉사 상담원 누마타 아예는 "다~레마가 죽~였다 ..." 라는 섬뜩한 전화를 자정 경에 받았다. 어린아이가 놀이를 하는듯한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전화는 곧이어 자살을 결심했다는 남자로 연결되었다. 다몬 에이스케는 자살할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 신사를 찾았다가 옛 추억이 떠올라 당시 함께 놀던 친구들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전화가 연결되지 않으면 목을 맬 요량이었다. 그러나 친구는 그를 포함해 여섯명 뿐이어서 월요일부터 한 명씩, 다섯명의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토요일에는 생명의 전화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후 다몬이 실종되었고, 친구들도 괴전화를 받고 한 명씩 차례로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유준, 사야에 토시까지 죽고, 사건 해결을 위해 힘을 함친 다츠요시와 고이치만 남게 되었다. 그들은 일곱번째 친구 '사카야노 요시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요시코와 관련되었던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미쓰다 신조의 장편 소설. 호러가 아니라 정통 추리물에 가까왔다는게 특이했던 작품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하야마 고이치가 추리쇼를 펼치기 직전까지는 호러물로의 가치도 높습니다. 과연 미쓰다 신조 작품다왔달까요. 연쇄 살인극이 마타테 시에서 아직도 두려워하는 다레마 가문의 귀신 들린 아이, "다~레마가 죽~였다 ..."는 동요와 결합되어 섬뜩함을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동일한 "다~레마가 죽~였다 ..." 놀이를 하다가 술래가 뒤를 돌아보자,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는 이야기를 가지고 공포스럽게 풀어낸 솜씨도 절묘했어요. 그래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친구들을 한 명 씩 술래가 잡았던 거지요, 설득력 넘치면서도 호러물에 딱 맞는 그런 상황과 이야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추리물로서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탐정역인 하야마 고이치의 활약이 눈부셔요. 호러물 설정으로만 보였단 '다레마의 귀신 들린 아이'가 실존했고, 그 사건과 자기들의 어린 시절 놀이가 어떻게 엮였는지를 밝혀내는 과은 꼼꼼하면서 합리적이었습니다. 여기서 과거, "오오니타 군"을 "오오타 군" 이라고 말하는 식으로 세 번째 음절을 빼먹고 말했던 요시코의 버릇을 떠올려 요시코가 '사카야노 요시코'라고 말한건 사실 '사카X야노 요시X코", 즉 "사카나야노 요시히코"라고 말했던 거란걸 걸 밝혀내는 추리도 굉장했고요.
오오니타가 남겼던, TF라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를 이용하는 추리도 깔끔했습니다. 이건 완성된 메시지가 아니며, TEL을 쓰려고 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전화 상담을 했던 누마타 야예가 진범이었다는게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어지는 누마타 아예의 범행 동기와 과정도 이치에 맞습니다. 아무리 30년 전 일이라고 해도, 금쪽같았던 아들이 사라지고, 남편이 자살한 사건에 관련된 아이들에게 살의를 품는건 당연합니다. 범행을 실제로 저질렀던 '귀신 들란 아이'도 나쁘지만, 이 범행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던 아이들도 큰 잘못을 한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연쇄 살인극에서 오오니타를 마지막에 죽이려 했던 이유가 그가 술래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인상적이었어요. 술래는 처음부터 엔카쿠, '귀신 들린 아이'가 뒤에 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제일 악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데 아주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지나치게 전형적인 설정이 문제입니다. 마타테 시에 아직도 영향력을 끼치는 다레마 가문과 그들의 융성과 몰락을 가져왔단 다레마 신사의 다루마, 몰락의 상징같은 잔혹했던 후계자 '귀신 들린 아이' 등의 설정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너무 많이 보아와서 식상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끔찍한 기억은 봉인되고 말았다는 지극히 편의적인 설정입니다.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친구들 모두가, 그것도 초등학교 4학년이라는 비교적 고학년인데 요시코가 납치되는걸 보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모두 똑같이 기억을 잃었다? 말도 안돼죠. 게다가 "다~레마가 죽~였다 ."는 동요를 듣자 봉인이 풀리고 다시 기억을 떠올린다는건 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공정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처음에 다몬 에이스케가 생명의 전화에 걸었던 전화 내용 묘사가 그러합니다. 사실을 적시하는 것 처럼 쓰여 있지만, 이 전화 내용만 가지고 상담원 누마타 야에가 자기 아들의 실종과 죽음이 다몬 에이스케와 친구들과 관계가 있다는걸 알아채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에요.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한게 분명합니다. 즉, 애초부터 공정함과는 거리가 먼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처음에 "다~레마가 죽~였다 ."는 노랫소리가 들려온 것도 설명되지 않고요.
또 야에의 범행도 세세한 면에서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구호단체 직원들보다 먼저 현장을 찾아가 다몬 에이스케를 살해한 첫 번째 범행이 대표적입니다. 어차피 자살을 앞두고 있었다면, 자살하도록 놔두고 친구들 정보를 빼 내는게 훨씬 손 쉬운 방법이었을거에요. 그가 구조를 받는다면, 그 뒤에 죽여도 되고요. 현장에 누군가 출동한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르는건 여러모로 무모했습니다. 다른 범행들도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며, 특히 범행 전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어서 "다~레마가 죽~였다 ."를 들려준건 납득이 되지 않네요. 범행 과정 전반은 죽은 요시히코의 원념이 도왔을거라는 지극히 미츠다 신조스러운 설정이 덧붙여져 있습니다만, 이건 합리적인 추리물과는 거리가 멀지요.
엔카쿠 다카야키 경부가 다레마가의 귀신 들린 아이였다는걸 밝히는 마지막 추리쇼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근거는 오오니타가 남겼던 TF라는 메시지로, 이는 TE를 쓰다가 만 것으로 사건 관계자 중 TE라는 이니셜을 가진 엔카쿠 다카아키 경부밖에 없다는게 요지였지만 이건 TEL을 쓰려고 했다는 거니까요. 이 이니셜을 엔카쿠 경부와 엮을 필요는 없었어요. 이런저런 디테일로 그가 사건 해결에 소극적이었다는걸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그가 요시히코 등을 납치해서 죽였던 다레마가의 귀신 들린 아이였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하고요. 비약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된 추리라고 하기 어려웠습니다. 현장에 나타나 하야미 고이치와 대면한다는 지극히 작위적이면서 편의적인 상황 설정은 둘째치고서라도요.

그 외에도 다레마 신사에 모셔진 다루마의 정체라던가, 다몬 에이스케가 전화를 하려고 했던 일곱번째 친구가 누구인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에요.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 처럼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는 '맥거핀'의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 불필요하고 진부했던 설정을 일부 제외하고, '귀신 들린 아이'가 엔카쿠 경부였다는 비약을 잘 정리했더라면 훨씬 간결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4/05

무증거 범죄 - 쯔진천 / 최정숙 : 별점 2점

무증거 범죄 - 4점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현장에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가 인쇄된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다른 어떤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네 번째 특별조사팀마저 성과 없이 해산되자, 경찰은 수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한순간의 실수로 불량배를 죽이게 된 청년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증거를 없애줄 테니 범죄를 부인하라며 경찰 대처법을 가르쳐주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수정 인용)

중국 추리 소설찬호께이의 작품 3편 - "13 .67",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 과 원샨의 "역향유괴" 만 읽어보았습니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대체로 평작 이상이었지만 원샨의 작품은 기대 이하였었는데, 이 작품은 어떨까 싶어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트릭이 존재하는 본격 추리물은 아니며, 범죄자와 탐정두뇌 싸움이 핵심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러나 제목의 '무증거 범죄'가 의미하는 완전범죄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前 수사전문 요원이었던 뤄원이 깡패 소태보가 살해된 현장을 조작하는 과정의 디테일, 그리고 이 사건이 범죄논리학자 옌량에 의해 하나씩 단서가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이 볼 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만 위안이 넘는 큰 돈을 하트 모양으로 작게 접어서 사건 현장에 숨겨 놓는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했어요. 이 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몰려들어 현장이 훼손되게 만드려는 의도였는데, 아주 설득력 넘쳤습니다.
이 사건과 항저우 시에서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모를 남기고 벌어진 연쇄 살인극이 맞물리는 전개도 좋습니다. 뤄원이 자신의 아내와 딸이 실종된 현장에 남겨진 지문의 소유자를 찾기 위해, 그 지문의 소유자가 범인인 살인극을 조작하여 일으켰다는 동기였는데 대담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설득력 덕분에,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됩니다. 

옌량이 추리한, 뤄원이 주후이루와 궈위가 저지른 살인 은폐를 도와준 이유도 그럴듯합니다. 뤄윈이 소태보를 애초부터 살해할 목적이었지만, 선수를 빼앗긴 뒤 은폐를 도와주었다는 이유인데,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그게 사실이라는걸 암시하니까요. 좀 작위적이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외에 익숙치 않은 중국식 묘사들도 흥미로왔습니다. 제목의 '무증거 범죄(완전범죄)'를 비롯하여 상식적이다, 이론적이다라는 말을 '유물론자'라고 표현한다던가, 범인이 경찰 수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걸 '역수사 능력' 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두뇌 싸움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옌랑과 경찰이 뤄원을 잡아 넣을 증거를 찾아내는데 결국 실패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옌량의 활약이 없는건 아니지만, 두뇌 싸움의 결과는 일방적입니다. 게다가 고차방정식 운운하며, 증거가 없으니 범인부터 대입해서 시나리오를 짠다는 옌랑의 방법론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특정 인물을 범인으로 만드는 조작극과 별로 차이가 없어서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이는 뤄원이 "모든 이야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내가 범인이라곤 할 순 없어. 자네의 시나리오는 아무한테나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범행 동기를 설명할 수 있지."라고 통렬하게 부정하지요. 옌랑은 마지막에는 감정에 호소해서 어떻게든 자백을 이끌어내는게 전부로, 한 마디로 뤄원한테 완패한 셈입니다. 이래서야 공정한 두뇌 싸움으로 보기는 어렵죠.
또 뤄원이 연쇄 살인극을 벌이는 와중에, 과연 단 한 번도 경찰 수사 물망에 오르지 않을 정도의 완전범죄가 가능했을지?에 대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뤄원이 대단한 전문가라는걸로 퉁치기는 힘들어요. 실제로 공원에서의 범행은 목격자도 있었는데 말이죠. 하긴, 이는 뤄원의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죄가 완전범죄가 된 것에 비하면 약과이기는 합니다. 우발적으로 급작스럽게 벌인 범행인데도 불구하고, 경찰 최고의 전문가가 사력을 다해 찾았지만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할 완전 범죄가 성립된걸 단지 운이라고 치부하는게 가능할까요? 작 중에서 뤄원의 능력이 시종일관 대단한걸로 묘사되는 것과는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해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옌랑이 뤄원을 수상하다고 여긴 계기가 된 뤄원의 차에 대한 감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뤄원답지 않은 좋은 차는, 범행을 저지르고 용의선상에서 쉽게 빠져나가기 위함이라고 추리하지만, 뤄원이 과거 출원했던 특허로 성공한 부자라고 설명되는 만큼, 좋은 집과 좋은 차는 그 재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요. 또 그게 수상했다면 좋은 집에 사는 건 왜 트집을 잡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사소할 뿐, 가장 큰 문제는 책 뒤 해설에서도 실려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과 너무나 비슷한 구조라는 점입니다. 수학, 과학과 관련된 천재들의 두뇌 대결, 순전히 선의에 의해 사건 은폐에 가담한다는건 완전 판박이입니다.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두 청춘 남녀가 결국 파멸한다는 결말까지도 똑같고요. 작가 스스로도 영향을 받았다는걸 인정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무언가 새로운게 있었어야 했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요소는 중국이라는 무대의 특성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리지널 만큼의 수작은 아닙니다. 그나마 캐릭터를 가져오려면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옌량과 뤄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갈릴레오 유가와 역인 옌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범죄자와의 승부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으며, 뤄원은 아무리 아내와 딸 실종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잔챙이 범죄자들을 다섯 명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질 여지가 없으니까요. "용의자 X의 헌신" 속 이시가미처럼 뤄원이 아내와 딸의 실종 이후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독자에게 잘 공감시키지 못하기도 했고요. 이건 작가가 놓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죠. 어설프게 캐릭터를 베끼지 말고, 초반부에 옌량이 똥이 있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벌어지는 사고는 재미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좀 어설픈 인물로 그려가는게 차별화되고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나쁘지 않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 비교하자면 한없이 부족하네요. 중국 추리 소설이 궁금하신게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중국 추리 소설은 찬호께이만 믿고 가야겠습니다.

2012/04/11

마리오네트의 덫 - 아카가와 지로 / 이용택 : 별점 1점

마리오네트의 덫 - 2점
아카가와 지로 지음, 이용택 옮김/리버스맵

프랑스어 전공 대학원생 우에다 슈이치는 지도교수의 소개로 외딴 곳에 위치한 미네기시 집안의 대저택에서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일하던 중 슈이치는 우연히 미네기시 집안의 막내딸 마사코가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풀어주었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연쇄살인범이었다... 

마사코의 연쇄살인극이 펼쳐지는 동안 슈이치의 약혼녀 미나코는 슈이치를 구해내기 위해 미네기시 집안 마약 밀매의 본거지인 요양소로 잠입하는데...

아카가와 지로의 초기 대표작 중 한 편인 범죄 스릴러. 요새 아카가와 지로 출판 러시에 힘입어 정발되었네요. 사실 명성에 비하면 그리 높은 퀄리티의 작품을 쓰는 작가는 아닌, 일본의 "시드니 셀던" 정도의 작가로 알고 있어서 별로 챙겨 읽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읽고 난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마약왕의 외딴 대저택을 무대로 미모의 세 자매(흑묘관인가?)가 등장하고, 자매 중 큰 딸은 색녀이고 막내는 광기 어린 연쇄살인마라는, 현실성은 아예 찾아볼 수도 없는 설정을 바탕으로 치밀하지도 않은 즉흥적인 연쇄살인을 모래성처럼 쌓아 올린데다가, 중간중간에는 정사 신 같은 자극적인 묘사를 끼워 넣은 싸구려 3류 소설입니다. 십여 페이지에 한 번씩은 자극적인 장면이 등장하니 3류 소설의 교과서라 해도 되겠어요. 물론 자극적인 장면을 등장시킨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나름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했던 '로망 포르노'라는 장르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은 그냥 자극과 흥행이 될 만한 요소만 집중적으로 파고든 펄프 픽션에 불과합니다.

추리적으로 본다면 애초부터 추리소설이라고 하기는 힘들고, 미치광이 연쇄 살인범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서스펜스 스릴러로 부를 수 있으나 이야기 자체가 허점투성이라 점수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전무합니다. 슈이치가 마사코를 조종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이유와 방법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것이 가장 큰 예이겠죠. 그 외의 설정과 여러 사건들은 솔직히 성인 만화라고 해도 유치할 수준이고요. 마지막에 반전이 있기는 하나, 반전 역시도 설득력이 전무한 만화 같은 이야기라는 문제점은 동일합니다.

어떻게 보면 제 기대 수준을 거의 맞추긴 했습니다. 그만큼 애초에 기대치가 낮기는 했지만요. 그러나 제 기대치보다도 형편없었다는 건 좀 문제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혹 궁금하신 분들께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남으셔도 세상에는 훨씬 유익한 것이 많으니 이 책만큼은 관심 두지 않으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왜 이 작가가 일본에서(나마) 인기가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한층 더 깊어지네요.

2023/09/17

전래 미스터리 - 홍정기 : 별점 1점

전래 미스터리 - 2점
홍정기 지음/몽실북스

DC인사이드의 추리소설 갤러리에서 괜찮은 한국 추리 소설이라고 누군가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된 작품.

결론부터 말하면, 대실망이었습니다. 완성도가 지나치게 낮은 탓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수준 이하에요. 전래 동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에서 '변태 스토커', '알리바이', '스위치' 라는 말이 나온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고증은 둘째치고서라도 문체, 묘사라도 고전처럼 가져갔어야 했습니다. 잔인하고 자극적인 묘사가 쓸데없이 많은 것도 불쾌했으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어요. 
고전을 모티브로 잔혹함을 버무렸다는 점에서 한 때 유행했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시리즈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의 괴담물인 <<삼개주막 기담회>>와 비교해도 그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고요. <<삼개주막 기담회>>는 이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에 비하면 노벨문학상 감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아마츄어가 어딘가 커뮤니티에 올렸던 반 장난스러운 글이 출판된 걸로 보여지는데, 결과물 수준에 대해서는 출판 담당자의 책임도 커 보입니다. 최소한 어느정도 완성된 글로는 보이게끔 방향을 알려줬어야 했어요. 뭐 지금 말해봤자 별 의미는 없겠지만요. 앞으로 이 작가, 이 출판사 책을 두 번 다시 읽어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콩쥐 살인사건>>
콩쥐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팥쥐가 원님과 결혼하기 위해 발목을 스스로 자른다던가, 원님의 칼에 언년이 머리가 토막난다단가, 마지막에 팥쥐 목이 배달(?)되어 오는 등 쓸데없이 잔인한 묘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급작스럽게 언년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트릭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핵심 트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팥쥐가 도깨비 감투를 쓰고 방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트릭, 또 하나는 쥐가 언년이의 손톱을 먹은 뒤 언년이로 변신했다는 트릭이지요. 그러나 도깨비 감투 트릭은 창문이 작아서 어차피 성립할 수 없었고, 쥐가 언년이를 대신한 알리바이 트릭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쥐를 변신시킨게 아니라, 마침 쥐가 변신한걸 보고 즉흥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말이 안됩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니까요.
단서 제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콩쥐가 죽은 어머니로부터 기이한 보물을 물려받았고, 그 덕분에 계모가 시킨 말도 안되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정도만 앞에서 설명될 뿐입니다. 이런걸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는건 말도 안됩니다.

고전 설화 속 설정을 트릭으로 써먹는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과물은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나무꾼의 대위기>>
사슴과 사냥꾼이 짜고 선녀 날개옷을 훔치도록 유도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극적인 반전도 생기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이 관음증 환자일 수 있다는 설정은 워낙에 흔해서 새로울게 없었습니다. 금도끼 은도끼 신령이 갑자기 나오고, 탐정역으로 토끼가 나오는 등의 뜬금없는 전개는 황당했고요. 탐정역인 토끼는 이 모든게 나무꾼을 범인으로 몰기 위한 산신령까지 포함된 음모의 결과라는데, 그 때문에 산신령이 범인 선녀, 나무꾼, 사슴을 참살하는 결말도 영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옥황상제 앞에서의 공식 재판도 아니었으니, 그냥 나무꾼을 죽이고 거짓말로 고해 바치면 되는게 아니었을까요? 이런 연극을 꾸밀 이유가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굶주린 사냥꾼이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고팠다면 애초에 사슴을 죽여서 잡아먹었어야 하잖아요?

추리적으로도 엉망입니다. 범인 선녀가 물 속에서 죽은 선녀 다리를 끌고 움직이는 척 해서 옮긴 뒤, 온천의 뜨거운 열로 시체가 사후 강직이 풀리는걸 이용하여 스스로 주저 앉는것처럼 꾸몄다는 트릭인데, 만화에서도 써먹기 힘들겁니다. 뜨거운 물 속에 숨느라 갈대를 입에 물었다는 디테일도 유치하기 짝이 없고요. 애초에 사슴이 말하고, 선녀가 날아다니는 세계관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트릭을 쓴다는게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해와 달>>
떡장수 아주머니가 식인범에게 사로잡혀 산채로 먹히는 장면은 잘 그려냈습니다. 식인범의 설정도 꽤 탄탄하고 무서웠고요. 마츠모토 세이초의 <<전골을 먹는 여자>>를 떠오르게 만드는데, 그만큼 설득력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식인범이 어미의 머릿가죽을 뒤집어쓰고  찾아와 딸을 속이려 하는 장면, 그 뒤 정체가 탄로난 식인범이 딸과 사투를 벌이는 부분도 괜찮았습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크리처물인 <<사냥감>>이 떠오르는 박진감넘치는 묘사와 전개가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러나 해와 달이 쌍둥이고, 해는 타고난 살인마였다는 진상은 영 아니었습니다. 시간대별로 풀어가는 전개도 불필요했고요. 착한 남매가 기지를 발휘하여 식인범을 없애는 식으로 - 썩은 동아줄을 활용한다면 더 좋고 -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나마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연쇄 도살마>>
보름이 될 때마다 집의 가축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고, 큰 아들 일남은 막내 미호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먹었다고 하는데...

여우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 먹는다는 이야기를 추리적으로 풀어낸 이야기. 
알고보니 일남이 진범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문제 투성이입니다. 우선, 가축들을 차례로 죽이고, 나중에 부모 형제까지 죽였다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한 번에 다 죽이면 되잖아요? 뭐하러 땅을 파고 몸을 숨겨가면서까지 범행을 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미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이유도 없어요.
미호의 짓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미호의 신발을 신고 발자욱을 남긴건 괜찮았지만, 미호 시체를 소의 항문을 통해 쑤셔 넣어 은폐했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추리물 흉내를 조금 내기는 했지만 설득력 떨어지는 전개로 일관하는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스위치>>
나는 백정의 아들로 파란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눈을 누군가 나뭇조각을 댓가로 가져갔다. 나는 나뭇조각이 타인의 신체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 능력이 마을 주민들을 기괴한 모습으로 죽게 만든 연쇄 살인극의 진상이었다.

스위치라는 표현을 천연덕스럽게 쓴다는 것부터 황당했던 이야기. '혹부리 영감'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신체 전환(?) 설정은 그래도 볼 만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죽기 전에 뇌를 바꿨는데, 갓난 아이가 되어서 실패했다는 황당한 결말로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한 10살 정도 되는 아이하고 뇌를 바꿨으면 될 것을 왜 갓난아이랑 바꿨는지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연한걸 모를리 없을 정도로 능력을 계속 써 왔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초반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의 연쇄 살인극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나간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0/11/29

리라장 사건 - 아유카와 데쓰야 / 김선영 : 별점 3점

리라장 사건 - 6점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시공사

리라장이라 불리는 건물에 일곱 명의 학생이 피서차 방문했다. 서로 친구들이었지만 각자의 사연으로 갈등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대상으로 한 무서운 연쇄 살인극이 시작되는데...

아유카와 데쓰야의 1958년도 발표 작품입니다. "필독 본격 추리 30선"이나 "동서 미스터리 베스트 100" 같은 리스트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전 본격물이지요. '판타스틱'에서 주최한 이벤트 덕분에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인물들에게 닥친 연쇄 살인이라는 기본 설정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전형적인 일본 고전 본격물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도 1958년이라는 발표 시기 때문에, 기존 고전 본격물과의 차이점도 몇 가지 눈에 띄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리라장'이라는 장소의 존재입니다. 보통 이런 유형의 연쇄 살인은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클로즈드 서클' 형태로 전개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경찰이 수시로 오갑니다. 심지어 경찰이 리라장에서 함께 거주하기까지 하는 파격적인 설정을 선보입니다. 경찰의 수사 과정이 탐정보다 훨씬 비중이 높고, 반대로 탐정은 니조와 호시카게 류조의 두 명을 등장시키면서도 이들의 매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묘사도 특이했고요.

이런 점을 본다면 고전 본격물에서 트릭의 핵심만 남겨두고 작위성을 덜어낸, 고전 본격물에서 근대 사회파 추리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를 드러내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1950년대로 여전히 고전 본격물 쪽에 더 치우쳐져 있지만,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 다카기 아키미쓰의 "야망의 덫" 등 장르의 주류가 점차 사회파 미스터리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과도기적인 모습에서 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우선, '리라장'이라는 장소와 스페이드 카드로 대표되는 작위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용의자가 축소되고 특정될 수밖에 없는 외딴 별장의 휴가 여행을 범행 무대로 삼기보다는, 도쿄에서 사고로 위장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인게 당연한데 말이지요. 탐정 캐릭터의 매력이 희박한 것도 고전 본격물에서 중요한 요소가 빠진 느낌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핵심인 알리바이 트릭은 명성에 걸맞게 훌륭한 편이지만, 살로메 - 유키타케 살인 사건 이후에는 그렇게 정교하게 짜여 있지는 못합니다. 사건의 전개도 우연과 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요. 예를 들면, 알리바이부터가 경찰 수사의 부실함이 원인이었고, 하나 씨의 증언을 경찰들이 초반에 무시한 것, 하나 씨의 증언을 남편이 듣지 못한 것, 니조가 조사를 핑계로 입을 다물면서 사건이 이어지게 된 것 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찰이 상주하는 리라장에서 연쇄 살인이 계속 벌어진다는 것은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특히 마지막 사건의 경우, 범인이 아비코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애초에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경찰에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가능 범죄를 또 저지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기본이 되는 트릭 자체는 상당한 수준이며, 초반부 살로메-유키타케 사건까지는 몰입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야기가 너무 확장되면서 사족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졌고, 무리한 전개가 많아진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런 점에서 명성과 기대에는 살짝 미치지 못했네요. 물론, 기대가 너무 컸던 탓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니조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마무리했더라면 더욱 괜찮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최근 읽은 책 중에서 책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판형도 마음에 들고 표지 디자인도 세련되었으며, 앞부분의 등장인물 소개, 중간중간 포함된 약도, 뒷부분의 해설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옛날 추리 문고 스타일이 떠오르는데,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2024/10/12

세상 끝의 살인 - 아라키 아카네 / 이규원 : 별점 1.5점

세상 끝의 살인 - 4점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4년 9월 7일,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충돌 날짜는 정확히 반년 뒤인 2025년 3월 7일이었다. 그 뒤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루의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도망갔고, 아버지는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남동생 세이고는 뉴스 전부터 중학교 때 학교 폭력을 저지른 탓에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었다. 매일을 운전 면허 교습을 받으며 소일하고 있던 하루는 고속도로 실습날인 12월 31일에 운전학원 실습차 트렁크에서 칼에 찔려 죽은 여성 사체를 발견했다. 
전직 형사였던 운전학원 강사 이사가와와 함께 얼떨결에 사건 수사에 나선 하루는,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있는 하카타와 이토시마에서 펼친 끈질긴 수사로 사건에 NARU라는 인물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런데 NARU는 하루의 동생 세이고였다. 모든건 세이고가 중학생 때 다른 친구들과 나카노 이쓰키라는 동급생을 심하게 이지메하고 괴롭혔던 과거와 관련되어 있었다.

제 68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얼마 뒤 지구는 멸망하는데 운전학원에 다니는 여자와 운전을 가르치는 여자 교관이 차 트렁크에서 시체를 발견한 뒤, 연쇄 살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는 기발한 설정이 돋보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상황도 그럴듯합니다. 세이고는 유이치, 준야와 함께 지구 멸망 전, 자기가 괴롭혔던 이쓰키에게 사과하려고 변호사 히츠미의 도움으로 그를 불러냈던 겁니다. 그런데 마침 불러낸 현장이 폭주 택시 연쇄 살인마인 경찰 이치무라가 시체를 버리던 초등학교였지요. 범행이 들통났다고 여긴 이치무라는 우선 세이고를 현장에서 살해했고, 도주한 유이치, 준야, 히쓰미를 차례대로 살해했던 겁니다. 이 때 세이고의 차를 유이치가 타고 달아나서 범인의 동선이 기묘해졌던 것이고요. 
피해자들이 방심한 상황 - 왜 차 안에서 창문을 열어서 범인이 손쉽게 찌를 수 있게 했는지 - 을 통해 범인이 경찰이라는걸 은근히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의감이 너무 넘치는 탓에 범죄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사가와 강사 캐릭터도 강렬합니다. 그외 멸망을 앞둔 상황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도 다채롭고요.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히쓰미의 신원을 알아내어 사건 파일을 입수하고, 피해자 준야를 처음 발견했다는 료도 형제와 우연찮게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듣고 동행하고, 세이고의 '마지막 사과'와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현장에 있었던 이쓰키가 하루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알려주고, 이치무라가 직접 나타나서 하루 등을 납치하지만 료도 형제와 중간에 만났던 소녀 나나코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가는 탓입니다. 이 과정에서 추리가 개입될 여지는 전무합니다. 이사가와 강사의 추리력이 번득이는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본 사건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그리고 범인이 경찰 이치무라라는건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경찰차 범퍼에 가해진 손상이 비중있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폭주 택시'가 경찰차라는걸 목격자들이 놓쳤다는게 더 말이 안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높은 가드레일 탓에 경찰차 특유의 도장을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되는데, 지극히 운과 우연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치무라의 동기가 작품의 핵심인 '지구가 곧 멸망하는데 사람들을 죽이는 까닭이 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무대 설정만 기발할 뿐, 결국 뻔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극과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면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작품처럼 그 설정이 추리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다른 후보작이 어땠기에 이 작품이 만장일치 수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란포상 수상작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의 망작이었습니다. 추리물도 아니고, 특수 설정도 이야기에 잘 녹여내지 못해서 좋은 점수를 도저히 줄 수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에 가까운 1.5점입니다.

2003/12/15

아이덴티티 : 별점 3점


폭우 속의 잇단 사고, 모텔에 고립된 11명의 사람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네바다주 사막의 외딴 모텔에 10명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여배우와 그녀의 리무진 운전사, 경찰과 호송중인 살인범, 라스베가스의 매춘부, 신혼부부, 3인의 가족과 신경질적인 모텔 주인까지 총 11명. 거센 폭우에 전화선마저 끊겨 꼼짝없이 모텔에 고립된 사람들은 어둠과 폭우가 걷히기를 기다리지만, 곧 하나 둘씩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믿지마라! 그것이 너 자신이라도...

예측할 수 없는 연쇄살인으로 극도의 공포로 몰린 생존자들... 현장에 남겨진 것이라곤 모텔 룸 넘버가 적힌 열쇠뿐이고, 남은 사람들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열쇠는 룸 넘버대로 카운트다운하며 다음 살인을 예고한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가운데 모두가 기억조차 하기 싫었던 모두의 공통점이 서서히 베일을 벗는데...

미국에서도 흥행 1위를 했었던, 그리고 간만에 접하는 꽉 짜여진 추리 스릴러물이라는 소개에 기대를 많이 했던 신작 스릴러. "폭우에 고립된 모텔에 여러가지 이유로 모인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라는 고전적인 추리소설 테마를 가지고 "연쇄살인극"의 줄기를 따라 진행됩니다. 그런데 중반 이후는 고전적인 추리극의 틀을 벗어난 반전이 준비되어 있더군요.

솔직히 추리극으로 보기에는 정보가 너무 빈약하고 한방에 터트리는 맛이 강해서 지적 쾌감을 느끼기는 힘들었고 차라리 반전에 승부를 거는 스릴러로 보는게 타당할 것 같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중반부까지, 다양하게 얽힌 인간관계와 숫자키로 이루어진 연쇄 살인이라는 스토리와 분위기가 더 좋았습니다. 이런 면을 보강해서 차라리 더욱 멋진 정통 추리물을 만들었음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네요.

그래도 스토리와 반전은 좋았던만큼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6/01

실험부부 (炎の女) - 다카기 아키미쯔 / 홍영의 : 별점 3.5점

정치가 가네꼬 센죠와 시오다 고헤이는 서로 앙숙으로 가문도 원수같이 지내는 상황. 가네꼬의 딸 하츠에와 시오다의 아들 쇼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헤어져야만 했고 하츠에는 앙갚음의 심정으로 쇼지의 회사 상사 모리 나오키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뒤 모양새만 갖춘 부부로 지내게 된다.

이러한 하츠에를 견디지 못한 모리는 정부 리츠코와 공모하여 알리바이를 만들고 하츠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나 알리바이를 위해 리츠코가 하츠에로 변장한 직후 화재사고로 화상을 입어 하츠에의 신분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며, 리츠코가 입원한 이후부터 시오다 가문의 주변에 연쇄살인이 발생하고 모든 살인 사건 현장에 하츠에를 암시하는 향수에 적신 손수건이 발견되는데...


다카키 아키미쯔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 제목이 너무나도 황당한데 원제도 "불꽃(같은) 여자"라는 조금은 낡은 듯한 제목이네요. 제목과 너무나도 형편없는 책 디자인에 비해 번역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밀고자" 이후의 작품으로 시리즈의 다섯번째 장편이라고 합니다. 발표년도는 1967년이군요.

전작들처럼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가 여러 단서를 모아 조합하여 추리하는 전개인데, 정통물에 가깝게 모든 정황과 사건에 관한 증거들이 독자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지적인 만족감을 느끼면서 즐길 수 있는 정교한 작품입니다. 여전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그리고 평범한 인물에 가까운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라는 캐릭터도 그다지 튀지는 않지만 사건들을 차분히 이해하고 평가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해결하는, 한마디로 해설자와 탐정을 결합한 또다른 형태의 탐정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고요.
그간 읽었던 2편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와는 다르게 4명이나 살해당하는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연쇄살인극은 사건이 많으므로 단서도 많이 제공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용의자가 점점 줄어들어 막판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기 쉬워진다는 약점이 존재하나 이 작품은 치밀한 전개와 기발한 트릭으로 이러한 약점을 끝까지 잘 커버하고 있습니다.
또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를 제외하고 주 화자로 등장하는 리츠코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해서 사건마다 급변하는 주변 상황에서 오는 불안감과 공포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 되면서도 돋보이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작인 "야망의 덫 (밀고자)"와 비슷한 전개라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약간 (정말 아주 약간~) 식상할 수도 있는 트릭이라는 점,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증거보다는 일종의 함정수사를 펼친다는 점은 반칙으로 느껴졌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결정적인 증거 자체가 없다는 점은 정통파로서는 큰 약점이라 생각되고요.
그리고 범인이 막판에 사건을 "미궁"으로 모는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정적인 범인역의 희생자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도 천재적 발상의 범죄에 비해 조금 부족해 보여서 아쉬웠어요.

그래도 전작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된 구조로 전개되기 때문에 읽기전에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의 작품에서도 상당히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이라 그런지 시대적으로 낡은 티도 적으며 즐길거리도 많거든요. 무엇보다도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와 천재적이고 악마적인 범인과의 두뇌 게임 하나만으로도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범인이 "거의" 성공할 뻔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죠. 구하실 수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05/07/28

옥문도 (獄門島)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4점

옥문도 - 8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시공사
쇼와 21년, 즉 1946년 일본이 항복한 직후 옥문도라는 섬에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가 찾아온다. 그가 찾아온 이유는 전우 기토 치마타의 죽음을 알리고 유서를 전하기 위해서라는 표면적인 이유 뒤에 그가 죽으면서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세 여동생이 살해당할 것이라며, 그것을 막아달라는 유언이 있었기 때문.

기토 가문은 섬의 선주로 막강한 권세가 있었지만 다이코라고 까지 불리웠던 막강했던 선대 선주 카에몬이 죽은 이후 본가와 분가와의 세력 다툼과 두 후계자의 징집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가세가 기울고 있던 상태였었다. 치마타의 배다른 세 여동생은 대단한 미인들이었지만 모자란 듯 한 묘한 분위기의 자매들이었고 명탐정이라고 불리우는 코스케의 방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곧 세 자매는 차례로 괴이한 방식으로 살해당하게 되는데....

기대하고 또 기대했던 "옥문도"의 정식 번역판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대표작이기도 하고 국내에는 "김전일"에서 할아버지로 잘 알려진 긴다이치 코스케의 활약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동서에서 "혼진 살인사건"이 이미 출간되었긴 하지만 "혼진"의 경우는 트릭이 너무 일본적이고 동기면에서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강했으며 지루한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재미와 전개면에서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먼저 외딴섬 "옥문도"와 그곳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연쇄살인의 배후에 있는 섬을 지배하는 가문 (국내 영화 "혈의 누"도 거의 동일한 설정이었죠) 같이 음울하면서도 굉장히 폐쇄적인 이질적 공간을 무대로 한 것과 고르고의 세자매라 칭해지는 세자매, 그리고 자매들의 아버지인 광인인 요사마츠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등장함으로써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에도가와 란포의 변격물적인 분위기를 어느정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란포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분위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주도해 나가지만 이 작품에서는 일종의 동기와 트릭에 연관된 장치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차이점이겠지만요. 또 이야기에서 이러한 인물들이 비교적 합리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극 구성에서 효과적으로 배치되어 이야기가 진행됨으로써 몰입도를 높이고 재미를 배가시키는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일본의 본격물로 명성있는 작품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뛰어난 편입니다. 연쇄살인극이 펼쳐지는 와중에서 각각의 사건의 트릭 수준이 상당하거든요. 보통 엽기적인 범죄의 경우 그러한 엽기적 연출의 타당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많은 작품들이 실패하고는 하는데 이 작품은 상황과 트릭이 잘 맞물리는 괜찮은 트릭으로 보여집니다.
그 중에서도 첫번째, 두번째 사건에서의 알리바이 공작 트릭은 정말 빼어납니다. 세번째 사건 트릭은 예상 가능한, 약간은 뻔한 트릭이지만 범인을 특정하는데 있어서 장소의 특이성을 이용하여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상황 설정이 좋아요.
독자와의 승부도 굉장히 공평한 편이라 가장 중요한 단서를 앞머리에서 부터 설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중요 단서와 상황에 대한 묘사를 디테일하게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탐정인 긴다이치 코스케와 동일 선상에서 두뇌게임을 하게 하는, 본격물로서의 미덕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물론 트릭이 우연에 의지한 부분이 있으며 세밀하지 않다는 약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아울러 살인범이지만 악하지만은 않은, 나름의 소신과 신념으로 범행을 계획하고 진행해 나가는 카리스마 확실한 범인이 킨다이치 코스케보다도 더 마음에 들었는데 범인이 자신의 모든 범행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막판의 작은 반전 후 너무나 급격하게 무너져 버리는 부분도 좀 아쉬웠어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중요한 단서가 지극히 일본적인 것이고, 동기 역시 소설에서 칭하듯 "너무나 봉건적인" 일본 특유의 상황에 기인하는 탓에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 공감을 얻기에 좀 부족하다 싶더군요. 몇몇 부분에서 묘사와 설명이 너무 장황해서 지루하고, 중요 단서마다 꼭 토를 다는 방식 같이 세월을 느끼게 하는 요소도 단점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너무 오래전에 발표된 탓이 크겠죠.

하지만 이러한 단점은 굉장히 사소한 부분으로 일본의 본격물의 풍취를 느끼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내용 전개와 기본 설정부터 지극히 일본적인 요소가 강해서 번역에 어려움이 있었으리라 예상되지만 번역도 깔끔하고 특히 일본 속담이나 여러 인용되는 인물과 고사들을 각주 처리하는 등의 배려도 좋았고요. 책 자체도 최근 출간된 추리소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이즈와 디자인으로 폼나게 출간되어 고맙기만 할 뿐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기획에서 출판까지 책임져 주신 decca님께 원츄를 날리며.....! 부디 많이 팔려서 앞으로 시리즈가 간행되길 바랍니다. 

덧 1 : 마지막 긴다이치 코스케와 범인과의 한판 대결로 압축되는 결말 부분은 죽어야 할 모든 인물들이 죽은 이후에 범인을 밝내는 뒷북 성격이 강해 역시나 김전일의 할아버지구나.... 싶었습니다.

덧 2 :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만큼 영상화도 많이 되었는데 캐스팅은 여기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저도 본 적이 있는 "팔묘촌"도 올라와 있어서 재미있기도 하고,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있네요.

2006/12/16

월관의 살인 상/하 - 아야츠지 유키토 / 사사키 노리코 : 별점 2.5점

월관의 살인 -하 - 6점
사사키 노리코 지음/삼양출판사(만화)

기차를 혐오하는 어머니 때문에 기차를 단 한번도 타보지 못한 여고생 소라미는 어머니의 사후, 자신에게 외할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고 외할아버지의 초대로 "월관"에 찾아가게 된다. 월관으로 가는 특별 열차를 탄 소라미는 그 열차의 동승객들이 전부 철도 매니아, 즉 철광이라고 불리우는 인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에 놀라며, 이윽고 열차가 출발한 뒤, 철도 매니아만 노리는 연쇄 살인범에 의해 살인극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관 시리즈의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와 독특한 일상속 개그를 선보이는 만화가 사사키 노리코의 공동 창작물.
하지만 이 책만 놓고 본다면 아야츠지 유키토 스러운 분위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연쇄 살인범이 등장하는 사사키 노리코의 개그 만화를 봤다라는 인상이 더욱 강할 정도로 만화적 재 창조가 원작을 압도하기 때문인데 굉장히 조화롭지 못하면서도 독특한 느낌을 전해 주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사키 노리코의 재 해석이 더욱 빛났다고 할 수 있겠네요.
특히 사사키 노리코의 굉장히 세밀한 특정 직업군들 (수의대생, 간호사, 프랑스 레스토랑 직원 등)에 대한 묘사가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예전에 봤던 "아이러브 트레인" 이라는 철도 매니아 만화가 생각날 정도로 철도 매니아 (철덕)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이게 철도 매니아 만화인지 추리 만화인지 헛갈리기 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사키 노리코의 재해석은 단점도 있어서, 추리적으로도 나름 괜찮은 설정과 복선이 깔려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묘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추리 만화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떨어집니다. 아야츠지 유키토 특유의 폐쇄적인 공간, 그리고 공간의 특수성을 이용한 살인극이 이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펼쳐지는데 다른 요소들, 특히 개그적인 부분에 많이 묻히고 있는 탓입니다. 
사사키 노리코의 담담하면서도 일상적인 연출 탓에 사람이 많이 죽는데도 불구하고 극의 긴박감이나 위기감이 정말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 역시 추리 만화로서는 감점 요인이겠죠.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개그물을 보는 느낌마저 들었으니까요....

사사키 노리코의 팬이라면 어떠한 이야기도 자신만의 세계로 만드는 그녀의 능력에 경탄하며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야츠지 유키토나 추리물의 팬이라면 뭔가 이질적이고 기대하지 못한 결과물로 볼 수 있을 거에요. 추리적으로는 분명 아쉽긴 하거든요. 저는 두 작가 모두의 팬이기에 어느 정도 만족했지만, 취향을 좀 많이 탈 듯한 느낌이 드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사사키 노리코의 팬이 훨씬 두터운 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해 봅니다. 대박나서 이러한 창작물이 많이 나오면 그걸로 좋은 거니까요.

그리고 제가 산 것은 초회 한정판인데 굉장히 싼티나는 보드게임이 부록으로 들어 있더군요. 절대 해 볼 것 같지는 않지만 뭐 부록은 부록이니까...

2012/10/03

토로스 & 토르소 - 크레이그 맥도널드 / 황규영 : 별점 2.5점

토로스 & 토르소 - 6점
크레이그 맥도널드 지음, 황규영 옮김/북폴리오

실제 인간을 토르소(torso, 목과 팔이 없는 조각 작품)처럼 만드는 엽기적인 살인극이 1935년부터 1961년까지 30여년의 긴 세월 동안 펼쳐진다. 이 살인극에는 인기 범죄소설 작가 헥터 라시터가 깊숙히 개입해 있는데...

국내 최대의 추리 애호가 커뮤니티 하우미의 이벤트를 통해 읽게 된 작품입니다.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먼저 감사 인사 드립니다.

범죄 소설가 헥터 라시터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 스릴러입니다. 크게 1935년 플로리다의 키웨스트, 1937년의 스페인, 1947년의 헐리우드, 1959년의 쿠바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단락별로 아직까지 육상에서의 중심기압 기록을 가지고 있는 1935년의 태풍 상륙, 1937년의 스페인에서의 프랑코에 대항한 내전, 1947년의 "블랙 달리아" 사건이라는 큰 실제 사건들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초현실주의 토르소 연쇄살인사건과 엮여서 진행됩니다.
굵직한 실제 사건들이 배경인데다가 헤밍웨이와 오손 웰즈, 리타 헤이워드 등 당대 실존인물들이 등장해서 한몫 단단히 하기 때문에 팩션 느낌도 강하게 전해줍니다. 이를 엄청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묘사로 그려내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어요. 미술사적인 시점에서의 그림 묘사들도 디자인 전공자로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그러나 팩션적인 재미 외의 범죄 소설로의 재미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블랙 달리아" 사건에서 작가가 상상한, 이른바 "초현실주의 연쇄 살인사건"의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는 탓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초반의 살인사건은 범인이 현장까지 엄청난 무게의 기계장치들을 옮기고, 나머지 잔해들을 처리하기 위해 굉장한 체력과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거라고 말하는데, 정작 방법은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부실하죠.
게다가 "블랙 달리아" 사건은 팩션치고는 각색이 너무 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쇼트가 배우를 꿈꾸는 화가 아르바이트였다니, 좀 지나쳤어요. 레이첼 - 알바의 1인 2역 트릭도 뻔해서 점수를 주기 힘들었고요.

마지막으로 엄청나게 많은 유명한 초현대미술 작품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도판이 거의 없는 책의 구성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헥터 라시터의 활약도 문제입니다. 권총에 수류탄까지 휘두르는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터프가이 작가라니, 이 자체가 초현실주의가 아닐까요? 또한 현대미술 작가들을 진보주의자에서 최소한 좌파(빨갱이?), 변태에 연쇄살인마 집단으로 묘사한 점과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헥터 라시터가 FBI의 끄나풀 역할도 하면서 이런 집단을 응징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 마초이즘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꼬시려고 협잡질도 마다하지 않는 헥터의 모습은 후반부 현대미술가들의 난교 파티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모습과 부합하지 않아서 어색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귀경길에 한시간이나 비행기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정도로 재미는 넘치지만 크라임 미스터리, 범죄소설로는 애매해서 감점합니다.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터프가이 모험극 느낌도 강했고요. 그래도 읽는 재미 만큼은 확실한 만큼 킬링 타임용으로 추천합니다.

2026/02/06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양억관 : 별점 4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츠노시마의 '십각관'에 K 대학교 미스터리 연구회 회원 일곱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머물게 되었다. 회지 작업 등을 위해서였다. 십각관은 괴짜 천재 건축가로 유명했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로 그는 반 년 전에 아내, 고용인과 함께 십각관 옆 청옥부에서 불타죽었다. 곧이어 연구회 회원들도 오르치부터 한 명 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육지에 남았던 전 연구회원 가와미나미는 시마다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나카무라 세이지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냈다는 괴문서를 받은게 계기였다. 여기에는 같은 연구회원 모리스도 힘을 보태는데...

아주 오래 전, 20년도 더 전에 학산 문화사 출간본으로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스 미디어에서 재간된 버젼으로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되었길래 옛 추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엄청난 성공으로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클로즈드 서클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고전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젊은 작가가 젊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괴짜 천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려낸 덕분에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십각관'은 정말 후속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츠노시마에서 일가가 불타 죽었던 괴짜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관련되었던 반 년 전 사건부터 볼거리가 많습니다. 실종된 정원사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 나카무라 세이지의 아내 가즈에의 왼손은 왜 잘려 나갔는지 등 수수께끼가 가득하니까요.

섬에서 일어난 살인의 트릭은 겉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마스터 키를 이용해 방을 열고, 음료나 담배에 독을 넣는 방식이 중심인 탓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에서 트릭보다 더 중요한 건 범인의 정체입니다. 연구회에서 닉네임 ‘밴’을 쓰던 범인은, 육지에서 가와미나미, 시마다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모리스 교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스가 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한 충격을 안겨다 줍니다. 그는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와 섬을 오가며 연쇄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을 엘러리가 저지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공했던 겁니다. 
'십각관'이라는 장소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컵이 십각형인데 딱 한 개의 컵만 십일각형이었다는걸 독살에 활용한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트릭이나 단서의 제시도 공정한 편입니다. 섬과 육지를 보트로 쉽게 오갈 수 있다는건 진작부터 제시되는 정보이며, 루르가 살해당한 현장의 발자욱을 토대로 엘러리가 펼치는 추리는 결정적이니까요. 여기서 루르는 선착장에서부터 쫓아온 범인에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선착장으로 사라졌다는게 명백히 드러나거든요.
이런 여러 정보와 단서가 있음에도, 초반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심어주어서 범인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카무라 세이지나 나카무라 고지로일거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아울러 미스터리 연구회 출신 작가다운, 현대 무대 탐정 소설은 클로즈드 서클 물을 쓸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추리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의 등장도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워드프로세서로 쓴 것에 대한 분석, 십각관 사건에 대한 연구회원들의 추리 등 소소한 추리들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탐정역인 시마다 기요시는 이 작품에서는 하는게 별로 없습니다. 모리스 교이치의 완전 범죄극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시리즈 탐정이 될 정도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리스의 완전 범죄 계획도 큰 구멍이 있습니다. 가와미나미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받고 모리스를 만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게 핵심인 탓입니다. 가와미나미가 모리스의 전화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 활동에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답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알리바이를 만들기야 했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첫 날 알리바이는 날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낸 듯한 편지 역시 범행 후 엘러리가 보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이고요.
동기도 빈약해요. 치오리가 술을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품는다? 별로 와 닿지 못합니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게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요.

또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너무 쉽게 살해당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의심 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료를 마시는 장면,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 장면 등은 미스터리 독자답지 않은 행동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치오리와 모리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오리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딸이라는 걸 오르치조차 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섬에 오지도 않았을테고, 처음에 연쇄 살인에 대한 의심이 싹틀 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지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모리스가 자신의 범행 계획을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고, 훗날 그 병을 주워 자백하는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적입니다. 완전 범죄를 달성하기 위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범인의 감성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젊은 작가의 감정 과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불만은 번역입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모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모리스'라고만 소개되었습니다. '모리스 교이치'라는 전체 이름이 아니라요. 그래서 '모리스'도 다른 연구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닉네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가 밴 다인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 버젼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리스 르블랑과 밴 다인은 같은 사람일 수 없지만, 모리스 교이치는 밴 다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클로즈드 서클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독자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완벽한 완전 범죄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계속 회자되고, 미디어 믹스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09/03/27

천사의 나이프 - 야쿠마루 가쿠 / 김수현 : 별점 3점

천사의 나이프 - 6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수현 옮김/황금가지

커피숍 점장 히야마 다카시는 4년 전 13세 미만 소년 강도들에게 아내가 살해당해 어린 딸과 살아가는 싱글대디이다. 당시 소년들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경미한 처벌에 그쳤고, 히야마는 TV 를 통해 그들을 죽이고 싶다는 속마음을 피력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소년 강도들이 차례로 살해당하자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히야마는 누명을 벗고 당시 사건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그리고 소년범들에 대해 알기 위해 스스로 사건의 조사에 뛰어드는데...


이 책은 51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번 이글루스 렛츠 리뷰에 당첨되어 읽게 된 책입니다. 사실 그동안의 란포상 수상작은 반정도는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았었을 뿐 아니라 이 작품은 제목과 작가가 생소해서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절대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네요. 정말이지 너무너무 재미있었습니다!

일단 과거의 범죄가 현재의 연쇄살인극과 연관되어 펼쳐지는 과정도 괜찮았을 뿐 아니라, "소년범죄"를 소재로 하여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솜씨가 제법이라 감탄했습니다. 소년들이 저지른 과거의 범죄가 현재의 연쇄살인과 연결되는 이야기 구조는 시미즈 레이코의 "비밀"이나 소설 "소년탐정 김전일" 등에서 읽었던 것과 좀 유사하긴 한데 나름 합리적으로 잘 포장해서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앞부분의 만화경이나 저금통장의 출금액 같은 사소한 단서를 복선으로 잘 포장해서 결말로 이끌어내는 부분과 마지막 반전 부분에서는 정교함도 엿보였고요. 얼마전 TV에서 실제 일본에서의 한 소년범죄의 실존 인물이 이후 변호사로 성공했다는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소설이 같은 해당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부분도 있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소년범죄"라는 것에 생각해 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도 좋은 점이겠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촉법소년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형사책임무능력자 - 은 조사해 보니 국내에서도 소년법에 따른 보호 처분을 받는다고 하네요. 국내에서도 이 소설에서처럼 피해자를 무시한채 소년들의 인권을 고려한 처벌을 내리는 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 소설에서의 소년들에 대한 처벌과 그 결과는 정말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충격적이긴 했습니다. 한가지 궁금한게, "계획범죄" 라도 아이들은 보호를 받나요? 어쨌건 이 이야기대로라면 아이들에게 거금을 주고 살인을 청부하는 이야기도 생각해 볼만 하겠더라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아쉬움도 있긴 합니다. 솔직히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이야기의 구조가 일직선이기도 해서 추리적으로 특기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으며, 범죄의 동기 자체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과정과 결과 역시 납득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죠. 특히 야기라는 범인이 히야마에게 단서를 제공하는 부분은 정말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해 너무 억지를 부린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더군요. "사회파 추리소설" 이라고 광고를 하고 있기는 한데 그냥 "사회파" 소설이랄까요...

아울러 소년범죄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덕분에 메시지 전달은 더 강하게 이루어지지만, 이 범죄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다는 설정은 너무 지나쳤어요... 작가의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좀 덜어내는 것이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아울러 결말도 너무 급작스럽게 끝나버려서 좀 맥이 빠지는 감이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서둘러 대충 마무리 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몇몇 단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추리 매니아로 평가하기에는 추리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누가 읽어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1급 쟝르 문학이라는 것은 확실하니까요. 개인적인 별점은 3점이지만 재미만 놓고 따진다면 4점을 줘도 아깝지 않은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재미난 작품이 사회적 메시지까지 확실하게 담고 있으니 란포상을 탄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싶더군요. 추리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반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기에 국내 쟝르문학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잘 팔려주면 좋겠습니다.

PS : 좋은 독서의 기회를 제공해 주신 이글루스와 황금가지 관계자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2009/03/16

최근 읽은 추리만화 감상

비밀 5 - 4점
시미즈 레이코 지음/서울문화사(만화)

이번 권은 두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네요. 그중 첫번째 이야기가 메인으로 "60년 전 유괴하여 살해한 죄를 자백한 한 시한부 인생 노인의 고백, 그리고 고백대로 시체를 발굴한 현장에서 20-2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성인 남성의 시랍화된 시체가 발견된 뒤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우연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었습니다. 시리즈의 팬으로서 감찰의 유키코의 재등장. 아오키의 프로포즈 등 세세한 볼거리는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왠지 시리즈 초반의 과학과 추리가 상상력과 잘 결합되었던 독특한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범행의 동기 역시 절절하긴 하지만 진부하기 그지 없었고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본 사건과는 무관한 최초의 유괴사건에 관련된 이야기가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키 경시정의 "추리" - 감찰의 유키코의 친구를 보고 내리는 추리나 시체의 자상을 통해 범인을 추리하는 것 등 - 가 상당히 돋보이긴 했고요. 
하지만 평작 이하 수준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그나저나 이 작품도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별점이 추락하는군요... (덧붙이자면, 두번째 이야기는 꽁트수준으로 짤막할 뿐더러 뇌 스캔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풍자하듯 다룬 작품이기에 별로 언급할게 없었습니다)


소년탐정 김전일 2부 8 - 4점
아마기 세이마루 지음, 사토 후미야 그림/서울문화사(만화)

한권짜리 단편입니다. 흑마술 살인사건이라는 부제인데 거창한 이름이 붙은 저택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극, 그것도 인형을 통해 연쇄살인을 미리 예고한다는 것과 같은 정통 미스터리적인 요소에 흑마술을 통한 오컬트적 분위기, 그리고 "지옥의 광대" 타카토 요이치까지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노리고 만든, 인기를 끌만한 요소를 그러모아 과거의 활력을 찾아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보이더군요 . 
그러나 사건의 동기 부분에서 기존 김전일 시리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구태를 반복하고 있으며,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줄만한 정교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등 작품의 핵심 본질 자체가 별로 좋아지지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트릭은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었고요.
그래도 전작보다는 나은 수준이라는게 어찌보면 황당할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Q.E.D 큐이디 31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도 31권째네요. 이번 권에는 두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가벼운 이야기 - 무거운 이야기가 보통 같이 실리곤 했던 전례처럼 첫번째 이야기는 연구 데이터 분실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살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가벼운 이야기 쪽의 트릭이나 구성이 더 좋았었지만 이번 권에서는 첫번째 이야기가 더 별로였습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전개가 납득되지 않는데 이유는 범인이 애시당초 사건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테니까요. 또한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봐줄만한 요소가 없기도 해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작가 스스로도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죠. 로키와 에바가 등장하고 미국을 무대로 한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팬으로서 즐겁게 읽었고, 우리나라의 "황우석 박사" 사건이 연상되는 등의 잔재미는 있지만 평작 수준에 못미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나마 두번째 이야기는 조금 나았습니다. 일단 트릭이 괜찮았거든요. 간만에 본 "만화에 아주 적합한" 형태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식으로 트릭이 구성되어 있고 결말부분의 반전도 존재하기 때문에 추리적으로 즐길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작품 안에서도 밝혀지듯 동기가 너무나 약하며, 경찰의 적절한 증거에 대한 검사만 있었더라도 범인을 보다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는 점 때문에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만 보완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되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 이야기가 쪽박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평작이라 두 작품의 합한 평점은 2점 정도로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