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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2

복수의 심리학 - 스티븐 파인먼 / 이재경 : 별점 2.5점

복수의 심리학 - 6점
스티븐 파인먼 지음, 이재경 옮김, 신동근 추천/반니

복수에 대한 생물학적, 역사적, 사회적 사례들을 예로 들어가며 복수에 대해 설명해 주는 인문학 서적.

생물학적 사례는 책 서두에 설명된 2000년 사우디아라비이아에서 있었던, 비비 원숭이가 인간에게 덤벼들었던 복수 사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비비 원숭이와 침팬지를 통해 복수가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삶의 목적이 패권과 짝짓기라면, 이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한 보복믄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인간 영장류와 다르지 않다네요.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집단이 훨씬 크고, 삶의 목적과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도 훨씬 복잡하기 때문에 단순한 개인적 응징은 사라지고, 국가가 공정과 냉철을 원칙으로 대신 복수를 하게 된게 현재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법 체계라고 할 수 있고요.

뒤이어 종교, 문학, 사법 체계, 여성 대상 범죄 등 여러가지 복수의 역사와 실제 사례가 소개됩니다. 예를 들어 종교에서 복수는 대체로 신의 것이며, 대부분 종교 교리는 복수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카르마, 즉 업과 윤회가 공통 사상이라서 남을 해치면 내게도 화가 미치게 됩니다. 기조 사상인 아힘사는 비폭력과 불살생을 표방하고요. 그래서 폭력적 말과 행동은 삼가야 합니다. 불교에서 보복 행위는 적은 남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에요. 그러나 이 모든 영적 이상은 세속 정치에 의해 엇나갑니다. 사람들은 교리와 경전을 각색해서 복수를 정당화하지요. 종교간, 종파간 분쟁과 전쟁은 지금도 끊이지 않으며,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증오와 분노만 가득한 선동은 지금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이 쯤 되면 교리와 경전은 없고, 지도자들 개인의 복수심만 남아 있는 상황이지요. 이 책을 읽으니 종교를 믿을 이유가 없다는 신념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 외에도, 소프클레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서가 깊다는 서두에서 시작된 문학에서의 복수에 대한 소개는 흥미로왔습니다. 중세 결투와 종교 재판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 16세기 이후 지역 공동체가 국가 대리인 역할로 법을 집행했던 상황에 대한 설명 등에서, 법 집행이 복수나 보복일 수 있다는 견해도 굉장히 그럴듯했고요. 이와 반대로, 특정 지역 부족간, 가족간 보복이나 명예 살인, 갱단의 보복은 영역과 위상을 지키기는게 전부인 후진적 발상이라는 설명도 와 닿더군요.
여성 대상 범죄와 여성들의 복수는 사회 체제가 미개하고 잘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라는 소개에서는, 우리나라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참고로 리벤지 포르노와 학교 내 총기 사고. 학교 총기 사건 방지는 교사와 학교 상담사, 학부모 역할이 중요하다. 심리적 위축과 같은 위험 징후들을 경계하고 방심하지 말아야 한답니다.
직장 내 복수 사례에서는 큰 사건은 물론 상대방 커피에 침을 뱉는 류의 자잘한 복수까지 망라하고 있는데. 콜 센터나 식당, 항공사 등 감정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복수 사례가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재 정치가 끝나고 복수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지만 새 정권이 통치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지난 정권 지지층 반발을 피하는데 급급해서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설명은 뼈 아팠습니다.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경우니까요. 일제 강점기 때 친일 부역자들과 독재자 전두환과 그 일당은 제대로 처벌해서 정의를 바로 세웠어야 했습니다. 책에 나온 스페인 프랑코 정권 피해자가 "화해의 미덕은 믿지만, 반성과 사죄 없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고 했는데, 말 그대로죠. 사면 따위는 사치였습니다.
정치 보복 역시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아왔기에 남 이야기 같지 않더군요. 그 중에서도 "인신 공격은 대중매체가 정치를 사유화하는 경향이 강한 풍토에서 더욱 극성을 떤다. 이 점에서도 미국이 선두다. 토머스 제퍼슨이 애덤스 뒷통수를 친 사건이나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가 좋은 예이다." 라는데, 언론의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기사가 많은 우리나라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언론의 보복이 민주주의 투사들과 맞장을 떠 온 역사도 마찬가지에요. 책에서는 토머스 제퍼슨과 랜돌프 허스트의 언론을 이용한 여론 조작, 그리고 루퍼트 머독이 호주 정치에 개입한 악질적인 사례가 언급되는데, 우리나라 사례를 추가시켜 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정도에요.

하지만 재미있고 인상적인 내용이 많음에도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복수가 필요하다는건 잘 전달하고 있기는 한데, 제목처럼 '복수'에 대한 심리학적인 분석을 잘 담고 있느냐 하면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법 집행을 광의의 복수로 보는 시각도 그럴듯하지만, 이건 심리학과는 좀 거리가 있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심리학적으로 풀려면 피해자와 법 집행에 의해 처벌받는 가해자와의 관계와 그 심리를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어야 했어요. 그 외의 이야기들도 사례는 재미있지만 심리학적인 부분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요. 책의 부제인 "사람들이 왜 용서보다 복수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정의도 없습니다. 관련된 사례, 그리고 일종의 교훈?만 존재할 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0/11/06

선택의 심리학 - 배리 슈워츠 / 형선호 : 별점 2.5점

선택의 심리학 - 6점
배리 슈워츠 지음, 형선호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제목 그대로의 책입니다.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선택들, 그에 따라 좌우되는 심리(주로 '후회'), 그리고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한 원칙까지 담긴, 그야말로 '선택의 심리학'에 대한 종합 선물세트 같은 책이죠.

하지만 전체적으로 '당연하다', '뻔하다' 싶은 내용까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심리학적으로 분석한건 지나쳤습니다. 지루하기도 했고요. 또, 후회 없는 선택을 위한 원칙 역시 결국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동양철학적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케팅에 접목하면 유용할 법한 이론과 개념이 많다는 점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선택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후회도 커진다는 것(대안이 많을수록 후회가 커진다), 자기 자신이 받는 비용보다 남보다 얼마나 더 받는지가 중요하다는 점 등은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 활용할 수 있는 개념이라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이 책에 따르면 결국 모든 것은 선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에 최적화된 전략을 구축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요.

그러나 담고 있는 결론 자체가 뻔하기에, 아무리 이론이나 설명이 흥미롭고 유익하더라도 평이한 수준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던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9/06/01

이웃집 살인마 - 데이비드 버스 / 홍승효 : 별점 4점

이웃집 살인마 - 8점
데이비드 버스 지음, 홍승효 옮김/사이언스북스

사람이 왜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는지를 진화심리학 측면에서 분석해서 알려주는 책입니다. 살인이라는 감정이 생기는 이유에 대한 분석이 굉장히 설득력 있습니다. 짝짓기, 성적 경쟁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며 다양한 예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그러합니다. 여성이 자신을 보호해주고, 많은 음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남성을 선호하기 때문에 남성은 폭력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겁니다. 반대로 남성은 여성의 외모와 젊음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여성 간에는 이러한 부분에서 경쟁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고요. 이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후손을 많이 남기기 위해 남성은 최상의 생식 능력을 지는 여성을 선호하도록 진화한 것이거든요. 당연하겠지만 단자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종에 거의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라고 하네요. 정답이라고 하기에는 심리학 측면 내용이 많아 애매하지만, 최소한 저에게는 아주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남녀 관계를 분석한 부분도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여성의 배란 시기가 은폐되어 남성과 여성이 후손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남성의 손해와 희생을 불렀다는 대목입니다. 시간과 에너지가 한정되는 탓에, 남성이 자신의 후손을 가진 여성 외의 여성에게 자원을 투자하기가 힘들어 졌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가 가치있고 유지되어야 함을 보장해야 했기 때문에'사랑' 이라는 감정이 등장했다는 식입니다.
또한 이렇게 이어진 남성과 여성의 등급차가 존재하게 되면 각자 바람을 피우는 식으로 서로에게 원하는 자원을 획득하려는게 정상이라고도 합니다. 저자의 연구진이 여성들이 단기적인 관계를 가질 때에는 '섹시한 아들' 유전자를 추구한다는 정황적인 증거를 찾아내어 이를 증명했지요. 섹시한 아들이 후손을 많이 남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내가 바람을 핀 경우 남자는 자신이 자원을 투자한 여성이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후손을 남기면 이중의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살인이라는 감정이 생겨나게 된다는데 굉장히 와 닿습니다. 이를 통해 사랑에 빠지거나 빠졌다고 착각한 남자가 왜 위험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에 대한 검증도 통계와 실제 사례로 충실하게 이루어 집니다.

강간범에 대해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분노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도 합리적입니다. '성의 약탈자'는 상술한 자연스러운 후손 만들기와 그것을 위한 자원 투자에 역행하는 중요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사악한 행위로 유전자에 깊이 기록되는건 당연합니다. 계부가 의붓 자식들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자원을 투자하기 싫다는 자연스러운 진화 이론의 결과고요. 

이외에도 다양한 살인의 유형을 진화와 심리학적 측면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각 유형별로 실제 사례도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의 방향성이 맞다면 일본의 유토리 세대나 우리나라의 3포 세대처럼 결혼과 가정, 후손에 특별한 목적 의식을 지니지 않는 사고 방식이 퍼지면 살인이 감소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긴, 다른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이 살인과 같은 노력과 수고가 많이 필요한 일을 벌이지도 않겠지만요.

실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살의'를 품었다는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이 많다는 점 외에는 딱히 단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좋은 책입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살인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궁금하신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2/02/28

미스터리 심리학 - 리처드 와이즈먼 / 김영선 : 별점 3.5점

미스터리 심리학 - 8점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김영선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세상에 알려진 각종 기현상을 파헤치는 내용의 교양서적입니다. 마술의 비법을 밝히고 사기꾼들의 수법을 폭로하는 책들과 유사한데, 저도 전에 "신비의 사기꾼들"이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심리학적으로 접근한게 특징이며, "재미있게 쓰여졌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용 자체가 상당히 위트 있고 유머러스하게 구성되어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어요.

또한, 각종 기현상을 꼭지별로 나누어 역사부터 소개하는 자세한 설명이 좋았으며, 심리학자 등이 전문적 능력과 다양한 실험을 통해 수수께끼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적인 재미도 느껴졌습니다. 이런 류의 책들은 항상 기본 이상의 만족도를 주는 것 같습니다.

실려 있는 모든 내용이 흥미진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영매나 점술가의 콜드 리딩을 설명하는 첫 번째 꼭지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상대를 칭찬하며 애매모호하게 말하고, 듣는 사람이 자신의 상황에 맞게 해석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인데, 결국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 여러 실험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정말 무릎을 칠 만한 내용이었어요. 이건 단순한 콜드 리딩이 아니라 사기의 기법이기도 하니까요!

이왕이면 동양의 사주팔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점이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 (사주팔자는 일종의 DB 개념으로 봐야 할까요?)

그 외에도 영화 제목으로까지 사용된 영혼의 무게, 강령술과 테이블 움직임, 위저보드에 대한 해석, 영혼과 유령에 대한 과학적 접근, "오렌지로드" 팬들에게는 익숙한 예지몽의 허구성, 독심술과 최면 등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한, 사기는 단순할수록 효과적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깨닫게 해 주기도 했고요.

문체는 좋았지만, 이론적인 설명이 지나치게 직역에 가까워 약간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고, 뒤로 갈수록 주제 면에서 흥미와 몰입도가 조금 떨어진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 그래도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2008/07/26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로렌 슬레이터 / 조증열 : 별점 4점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8점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에코의서재

부제는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입니다. 부제 그대로 10개의 위대한 심리실험과 그 결과에 대한 내용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10개의 실험 모두 너무나 흥미롭고 재미있었으며, 저자인 로렌 슬레이터의 쉽고 편하면서도 정보 제공을 소홀해 하지 않는 문체 역시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든 실험이 인상적이었고 뛰어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많은 부분에 응용될 수 있는, 저 자신도 많은 영향을 받은 내용들로 충격적인 실험 결과와 더불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여 줍니다.

뭔가 창조적인 영감을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다고 생각이 드는데, 10개의 연구 중 "우리가 기억하는 기억은 진짜 기억인가?"를 예로 들자면, 결론적으로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 아주 쉽게"라는 연구 결과를 싣고 있습니다. 딸이 이십년 전 아버지가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를 강간, 살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주장했던 사건에서 비롯된 실험과 그 결과로 억압된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죠. 
이 실험과 결과에서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괴로워하고 그 사실에 발목이 잡혀있는 대표적인 인물인 "브루스 웨인"을 대입해 보면 어떨까요? 실제로 브루스 웨인의 부모는 그의 눈 앞에서 악당에게 저격당해 살해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죽었다면? 그리고 부모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암시하는 다른 어른이 그에게 이러한 왜곡된 이야기를 주지시켜 기억을 조작했다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주위에 있었던 유일한 어른이자 조언자인 집사 알프레드에게 혐의가 실리겠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악에 대한 증오를 품게 된 알프레드가 자신에게 없는 젊음과 기회, 재력을 가진 어린 브루스 웨인에게 실제로는 다른 이유로 사망한(뭐, 교통사고라고 하죠) 부모님의 죽음을 전해 주며 지속적인 암시로 그의 눈 앞에서 잔인하게 살해 당했다고 기억을 심어 버린거죠. 때문에 브루스 웨인은 알프레드의 조작대로 조종되어 배트맨이 되어 버린 것이고요. 결말은 진실을 알게된 배트맨이 알프레드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어쨌건 요렇게 바라보니 심리학이라는 것도 정말 재미있네요.


이외에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윤리적인 부담을 이겨내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숙제 역시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으며, 해당 연구에 대한 반대파의 의견도 충실히 조사하여 서술하고 있어서 균형을 잃지 않았다는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별점은 4개 얻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여간 다양한 심리학 서적을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심리학이라는 것이 정말 범위도 넓지만 충격적인 사실도 많아서 흥미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 뿐더러 창조적인 작업에도 많은 부분 도움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전부 이 책 처럼 재미있진 않겠지만요...

2016/09/03

크리피 - 마에카와 유타카 / 이선희 : 별점 2점

크리피 - 4점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창해

외딴 주택가에 거주하며 가끔 TV에 출연하던 범죄심리학 교수 다카쿠라는 제자 린코와 플라토닉한 관계를 유지하던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인 고교 동창생 노가미가 연락해서 8년 전 일어났던 미제 사건인 혼다 일가 실종 사건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노가미는 다카쿠라의 집까지 직접 찾아올 정도로 열의를 보였지만, 실종된 후 다카쿠라 옆집 노모녀 화재 현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 다카쿠라의 옆집 니시노 일가의 수상쩍은 가족 관계가 점차 불거졌고, 결국 니시노의 폭주가 일어나는데...

격조했습니다. 인륜지대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중대사인 "이사"를 하느라 지난 한 주간 정말 정신없이 보냈네요.

어딘가의 멋드러진 소개글을 보고 읽게 된 작품입니다. 작가 마에카와 유타카의 출세작이지요. "검은 집"처럼 평범함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싸이코패스의 가공할 범죄를 그리고 있습니다. 약간의 미스터리가 가미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고요.

초~중반부는 인상적입니다. 다카쿠라가 거주하는 주택 단지 구성이 8년 전 히노 시에서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 현장과 유사하다는게 드러나고, 옆집 남자 니시노와 가족이 뭔가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갑자기 그 집 딸이 "그 사람은 우리 아빠가 아니에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고, 그 뒤 급작스럽게 옆집 남자가 돌변하여 폭주하는 과정까지는 정말 대단합니다.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니시노가 식칼을 집어들고 광기를 보이는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입니다.

알고 봤더니 옆집 남자 니시노가 모든 연쇄 살인의 범인인 "위장 살인마"이며, 그의 정체는 사건을 추적하다가 실종된 후 결국 사체로 발견된 형사 노가미의 형 야지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하지만 좋았던 중반부를 지나 노가미가 유서처럼 남긴 편지를 통해 야지마의 범행이 일목요연하게 밝혀진 후부터는 힘이 빠져버립니다. 370페이지라는 분량에서 240~50페이지 정도가 되면 진상이 밝혀지는데, 이후는 완전히 사족입니다. 너무 일찍 답을 정해놓고 이야기가 흘러가버리니 재미가 있을 리 없지요. 이렇게 쉽게 밝혀질 것을 뭐 이리 질질 끌었나 싶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수사도 어설펐고요.

게다가 마지막 반전 — 야지마가 죽인 줄 알았던 노가미는 사실 전처 소노코가 죽였다, 야지마는 뒷처리를 도와준 것일 뿐이다, 편지 역시 소노코가 쓴 것이다 — 는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정의감을 불태운 줄 알았던 노가미가 형 야지마 못지않은 쓰레기일 뿐이었다는건 독자를 우롱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진상을 밝히는 다카쿠라의 추리도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소노코의 양녀 유가 사실은 실종된 여고생 미오였고, 야지마는 이미 소노코에 의해 살해된 뒤였다는 나름의 해피엔딩(?)을 그리기 위한 억지 전개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야지마가 구태여 오와다 옆집에 살면서 정보를 캐내 스토커 짓을 한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뭔가 있는 것으로 보였던 주인공 다카쿠라와 여대생 린코의 플라토닉한 사랑 이야기는 야지마와의 최종 대결에서 오와다가 죽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온 것 이외의 가치가 없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린코는 비중에 비하면 하는 것이 너무 없거든요. 비중을 볼 때 다카쿠라의 불륜 상대가 아니라면 최소한 범죄 심리학 전문가로서 뭔가 보여줬어야 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위장 살인마"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로 한 가족에 침입하여 가장 행세를 하며 가족들을 한 명씩 차례로 죽이는 악의 천재 야지마의 능력이 전혀 부각되지 않는 점입니다. 작품의 설득력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야지마가 어떻게 가족들을 지배했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서술했어야 합니다. 작중 묘사된 정도로는 설득력이 너무 약해요. 다카쿠라가 잠깐 설명한 대로 공포와 협박, 좁은 공간의 3가지가 갖춰져 마인드 콘트롤이 용이했다 하더라도, 외부 활동을 했음이 분명한 아들과 딸이 잠자코 오랜 기간 그의 말을 따랐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이지가 않는 탓입니다. 비슷하게 싸이코패스의 치밀한 범죄가 그려지는 작품들 — 앞서 말씀드린 "검은 집"을 비롯해서 — 은 동기는 물론 범행 과정에 있어서도 범행의 현실성을 높게 그리고 있는데 말이지요. 확연히 비교되는 단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역대급 초반부를 지녔지만 중반부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해서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좋은 리뷰로 존경해 마지않는 정윤성님의 리뷰에 100% 동의하는 바입니다.

조금 조사해보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으로 영화가 발표되었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요소 (린코, 반전 등)를 다 쳐내고 범죄 심리학자 다카쿠라와 형사 노가미 (그리고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다니모토)가 악의 천재 야지마와 대결하는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그려낸다면, 즉 선–악 구도를 명확하게 각색한다면 소설보다는 훨씬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5/09/30

FBI 심리 분석관 (Whoever Fights Mosters)- 로버트 K 레슬러, 톰 샤흐트만 / 황보석 : 별점 3점

FBI 심리분석관 - 6점
로버트 K. 레슬러 & 톰 샤흐트만 지음, 황보석 옮김/미래사
실제로 FBI에서 범죄 심리학 전문의 심리 분석관으로 20여년을 일한 로버트 K 레슬러의 기록물. 20여년간 여러 연쇄 살인범들의 수사에 참가하고 프로파일링 및 그들의 심리분석을 토대로 사건 해결에 기여하는 과정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물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연쇄 살인범인 테드 번디나 보스턴 교살자 드 살보, 세크라멘토 흡혈귀 트렌튼 체이스, 맨슨 일당 등 저명한 살인범들과의 인터뷰 내용이라던가 실제 연쇄 살인 기록, 사건개요, 당시 작성된 프로파일링 내용과 범인에 대한 비교 및 묘사, 상세한 수사 활동 및 반성과 앞으로의 과제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사하게 연쇄 살인범의 심리와 사회상을 분석한 표창원 교수의 "한국의 연쇄살인"이라는 책과 비교해 본다면 아무래도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저같은 한국 독자에게는 "한국의 연쇄살인"이 더 낫긴 하겠지만 범죄에 대한 과학적이고 상세한 접근은 이 책이 보다 뛰어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실제 사건을 직접 수사했던 전문 분석관이 직접 저술했기 때문이고 범인과의 인터뷰까지 상세하게 분석해 놓았기 때문이죠.
저자가 "양들의 침묵"과 "천재 정신과 의사의 살인광고" 라는 두권의 책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전문가라는 내용도 들어 있는데 책에 기록된 여러 사건들만 보아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 하다고 생각되네요. 실제로 엽기적인 연쇄살인범을 인터뷰하는 과정의 묘사나 신문광고를 통한 희생자 낚기 등은 충분히 저자의 실제 수사 경험에서 우러나온 아이디어로 보이거든요.

다만 FBI 조직 발전사 같은 부수적인 설명과 저자 개인의 사건에 대한 평가가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 약간 지루한 부분이 있고 책의 목차도 시기별이나 수사상의 발전에 따른 구분이 아닌 약간 모호한 상태로 구분되어 있어서 조금 혼란스럽더군요. 조금 더 재미있고 풍성하게 구성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약간 아쉽습니다. 

어쨌건 저는 꽤 관심가는 분야의 내용인지라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지루한 부분도 없잖아 있지만 범죄 심리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볼 책인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08/12/30

매드 사이언스 북 - 레토 슈나이더 / 이정모 : 별점 4점

매드 사이언스 북 - 8점
레토 슈나이더 지음, 이정모 옮김/뿌리와이파리

제목 그대로라면 미친 과학에 대한 책으로 보이겠지만 이 책은 여러 다양한, 그리고 기상천외했던 과학실험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제목처럼 미친 짓도 적잖이 등장하나 등장하는 사례들이 다 미친짓은 아니고 의미심장한 것도 있고 지금 엄청나게 큰 영향을 끼친 실험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300년대부터 소급해서 여러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도 방대하지만 재미있기도 하고 새로운 사실들이 많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네요. 저도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잘못" 알려진 것이라는 것도 많기도 했고요.

조금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단 잘못 알려진 사례로는 "영혼의 무게는 21그램" 과 "영화 중간에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삽입하여 콜라와 팝콘을 엄청나게 많이 판 사건" 을 들 수 있겠네요. 저도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는 실험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았는데 이 실험 결과가 엄청나게 오류에 가득차 있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과 마케팅적으로도 아주아주 유명한 콜라 판매 실험 역시 거의 사기..에 가깝다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 재미있었고 특기할 만한 것이라면 영화 "익스페리먼트"의 모델이 된 모의 감옥 실험이라던가, 투자한 비용이 아까워 실패한 투자를 멈추지 못하는 것에 대한 연구인 "1달러 경매" 등이 무척 흥미진진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히치하이크를 하는데에는 예쁘고 가슴큰 여자가 유리하다는 상식이나 하룻밤을 같이 보내자는 유혹에 대한 실험도 인상적이었고요. 몇가지 이야기는 소설 소재로 써먹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익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의 웹사이트 등의 참고 자료의 소개도 엄청나게 충실하고요.

전체적으로 약간은 심리학적인 부분에 책의 내용이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은 좀 강하지만 제가 워낙 심리학에 관심이 많기에 그다지 하자가 있는 부분으로 보이지는 않더군요. 때문에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A급인 별 4개짜리 책입니다. 5개를 줘도 좋겠지만 아쉽게도 번역이 약간 지루하고 따분한 점이 있어서 약간 감점하였습니다. 그래도 읽는데는 전혀 지장없는 수준이니 이런 분야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참고로, 매드사이언티스트가 전면에 등장하지는 않으니 그러한 것을 기대하신 분이라면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2006/03/28

디자인과 인간 심리 - 도널드 A 노먼 / 이창우, 김영진, 박창호 공역 : 별점 4점

디자인과 인간심리 - 8점 도널드 노만 지음/학지사

각종 생활용품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디자인들을 사례로 하여 저자가 디자인의 문제점을 요목조목 지적하면서 인지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재미있게 논한 인지심리학 전문 서적 입니다.

일단 저자 자신의 주장이 확실하면서도 이치에 맞게 이론적으로 정립되어 있는데 그 이론들이 하나같이 심플하면서도 팍팍 와 닿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자가 제안하는 생활용품의 디자인 방법:

- 어떤 때라도 그 시점에서 어떤 행동이 가능한지를 결정하기 쉽게 하라.
- 시스템의 개념적 모형, 대안적 행동들, 그리고 행동의 결과를 포함하여 일이 가시적이게 하라.
- 시스템의 현재 상태를 평가하기 쉽게 하라.
- 하고자 하는 것(의도)과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간의, 행동과 그 결과간의, 그리고 가시적인 정보와 시스템 상태의 해석 간에 자연스러운 대응을 따르라.

다른말로 한다면 (1) 사용자가 무엇을 해야 할지와 (2)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알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 GUI에서 강조되는 사용자 Feedback과 Context, 그리고 Interaction의 함수관계를 잘 나타낸 말인데 10년도 훨씬 전에 이러한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최대 장점은 "쉽고 재미있다" 라는 것이죠. 저자 특유의 독설로 여러 바보같은 생활 용품의 디자인 조작 방식의 멍청함을 논하는 부분은 어디를 읽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라 생각되네요. 여러가지 종류의 문들과 수도꼭지, 전화 등을 예로 들어 해당 사물들에 존재하는 오류를 도판과 더불어 확실하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는데 그냥 읽기에도 수긍이 가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물론 등장시킨 사례들이 좀 오래되었다는 것, 그리고 번역 자체가 무지 딱딱하다는 것과 현재와 같이 GUI가 널리 퍼진 시대에는 맞지 않는 이론들도 있다는 것은 단점입니다만 기본 그 자체는 동일한 만큼 충분히 이해 가능한 수준에서 읽어 내려갈 수 있더군요. 즉 디자인은 미적으로도 우수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용자가 편하고 쉽게, 안전하게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라는 것이죠.

한마디로 UI 디자이너 입문용으로 이쪽 업무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어지는 책이었습니다. 이쪽 책이 너무 이론적이라 어렵고 재미없는 것이 많은 편인데 쉽게 시작하기에는 정말 딱이라고 생각되거든요. 이렇게 재미있고 알기 쉽게 글을 쓰는 것도 정말 대단한 재주이니 부러울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인 도널드 A 노먼의 강의를 한번 듣고 싶어지더군요. 강의도 무척 재미나겠죠? 별점은 4점입니다.

덧붙여....

어려운 과제를 쉽게 만드는 일곱가지 원칙

1. 머리 속의 지식과 세상 속의 지식을 모두 이용하라.
2. 과제의 구조를 단순하게 하라.
3. 일이 가시적이게 만들어라. 실행의 간격과 평가의 간격을 좁혀라.
4. 대응관계가 올바르게 만들어라.
5. 자연스러운 제약 및 인공적 제약의 위력을 활용하라.
6. 만일의 오류에 대비한 디자인을 하라.
7. 이 모든것이 잘 되지 않으면 표준화하라.

2007/01/26

카나리아 살인사건 상/하 - 반 다인 / 전윤경 : 자유 추리 문고 24~25 : 별점 2.5점

카나리아 살인사건
S.S. 반 다인 지음, 안동민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카나리아라는 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브로드웨이의 무희 마거리트 오델이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지방검사 매컴의 요청으로 수사 협력을 위해 파일로 번스는 친구인 변호사 반 다인과 함께 사건 현장과 여러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를 확인했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보석 상자의 흔적으로 전문 절도범인 "멋장이" 토니 스킬의 절도가 의심되나 그의 알리바이를 경찰은 깨트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마저도 살해당해서 사건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파일로 번스는 애초부터 다른 인물에 혐의를 두고 있었고, 스스로의 직감과 심리학적 분석으로 진범을 파악한 뒤 알리바이를 벗겨내는데 성공한다.

반 다인의 파일로 번스 시리즈 두번째 작품입니다. 원체 제가 잘난척 하는 탐정을 좋아하지 않아 그동안 읽지 않은 장편인데, 저번 자유 추리 문고 구입 Rush에 편승하여 구입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읽고난 감상은 역시 파일로 번스는 제 취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도 제가 읽은 시리즈, "벤슨" "승정" "가든" 중에서는 "승정 살인사건" 다음으로 꼽을 만한 괜찮은 요소가 많이 있어서 나름 재미나게 읽긴 했습니다.

특징은 파일로 번스의 이른바 "심리학적 분석"이 굉장히 중요하게 쓰인다는 점입니다. 특히 포커 승부를 통해 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이 꽤 참신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사실 그다지 와 닿지는 않았지만 카이지나 타짜 느낌이 약간 묻어나는, 나름 원조격 느낌을 전해주더군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트릭인 알리바이 트릭은 솔직히 기대 이하였습니다. 경찰의 현장 수사 부족으로 성립되는 트릭이라 무척이나 실망스러워요. 또한 당시 상황에서는 그런대로 과학적인, 이치에 합당한 트릭으로 쓰일 수 있었을지 모르나 지금 읽기에는 상황이 너무 부실하고 증거가 너무 결정적이라는 단점 때문에 더더욱 수긍하기 힘들었습니다. 트릭이 성립하기 위한 복선이 지나치게 묘사되는 탓에 범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역시 단점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의 가장 획기적 설정인 "살인 사건 현장에 있던 두 사람" 이라는 설정에서, 둘 중 한사람이 범인이라고 할 때 둘 중 누가 범인인지를 특정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가능하다는건 큰 맹점입니다. 한 명이 살해당했더라도 죄 값을 받은 것인지, 증거 인멸 차원에서의 범죄인지가 결국은 추리에 의해서만 증명될 뿐이니까요.

이러한 점들 때문에 퍼즐 트릭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설정은 기발했지만 트릭과 이후 전개가 그에 따르지 못했다 할 수 있겠네요.

아울러 파일로 번스의 장황한 현학적 지식의 나열이나 그에 못지 않는 작가 주석은 그렇지 않아도 긴 작품을 더더욱 짜증나게 합니다. 잘난척도 정도가 있어야지... 화가 날 정도에요. 다양하고 방대한 인용구와 단어들 때문에 번역은 힘들었겠지만 그러한 어려움이 재미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고전 추리물의 걸작이기도 하고 추리사에 나름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걸작 반열에 올리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심리적 분석"이라는 참신한 요소는 굉장히 높이 살 만 하고 몇몇 설정이 돋보이며 재미 역시 그런대로 있는 편이라 고전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 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제가 읽은 바로는 파일로 번스 물은 "승정 살인사건" 만 읽고 넘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2021/05/23

사이코패스 :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 - 나카노 노부코 / 박진희 : 별점 3.5점

사이코패스: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 - 8점
나카노 노부코 지음, 박진희 옮김/호메로스

제목 그대로, 사이코패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심리학, 과학, 인문학 교양서. 사이코패스에 대해 그 존재 이유 및 특징, 문제점과 대처 방안, 치료 방법 등 거의 모든 관련 항목을 알게 도와주는 책입니다. 분량도 부담이 없고, 설명도 쉬운 편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접했던 정보들이 아주 많은데, 사이코패스의 신체적 특징으로 얼굴이 긴 남성보다는 얼굴 폭이 있고 완고한 인상의 남성이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부터가 그러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의 농도가 높을수록 얼굴이 옆으로 넓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많으면 경쟁심과 공격성이 높아지니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설입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좋은 정보 같습니다. 단, 여성의 경우 얼굴 폭은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답니다.

심박수가 낮고 잘 높아지지 않는 사람일 수록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기 쉽다는건 당연합니다. 무언가 사건을 저지른 뒤 심박수가 높아지지 않으면 행동에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을테니까요. 그런데 이게 남성이 여성보다 폭력성, 반사회성이 높은 근거가 될 수 있다는건 재미있었어요. 남성이 여성보다 심박이 1분간 약 6회 정도 늦은 탓일 수도 있다고 하거든요. 청중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이나 법정에서의 변론 등에서 긴장하지 않고, 냉정하게 행동하는 경영자나 변호사도 사이코패스가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박수가 낮아야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이코패스는 보통 'IQ 높은 천재 범죄자'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설명도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착각이 생긴건 사이코패스가 사회 통념상 할 수 없는 일을 거리낌없이 해 버려서, 특별해 보인 것 뿐입니다. 한마디로 '돌아이'와 '천재'를 착각한 것에 불과한 거지요. 이는 사이코패스가 불안에 강한 특징 때문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불안을 느끼는 강도가 높아 위축되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불안의 강도가 낮아 대범해지는 반면, 사이코패스는 불안의 강도가 높은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덕분에 검거하기 쉬운 사이코패스가 생겨난건 다행입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지 않아 위험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래서 회피가 힘들어지게 된다고 하네요.

그리고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스스로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심리를 읽어내는 재능이 뛰어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정성은 낮지만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 권위의 존중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등이 소개됩니다. 허언증이 있을 경우도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고요. 거짓말에 죄의식이 없다,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점은 사이코패스의 특징 그 자체지요. 사이코패스가 상대방의 신뢰를 잘 얻는건 이런 거짓말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할 테고요. 실제로 허언증이 있던 사이코패스 사례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특징을 본다면, 사이코패스는 프로 도박사가 가장 적합한 직업이 아닐까 싶어요. 불안을 느끼지 않고, 위험한 순간에도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하며, 거짓말을 잘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읽으면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말이지요. 이런 특징들에 더해 조직에 충성한다는 점에서는 킬러도 잘 어울릴 것 같네요.

그동안 궁금했었던,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이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과학자들의 시각이냐, 사회학과 교육학자의 시각이냐의 차이더라고요. 이런 존재를 심리학, 생물학, 유전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을 선호하고, 이 존재가 사회의 영향력이나 유년기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니, 결국은 명칭의 차이일 뿐 큰 차이는 없는 셈입니다.
이 책에서는 이 양쪽 모두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걸 알 수 있었습니다. 유전적인 이유에 어린 시절의 환경, 교육 등이 결합해야 사이코패스가 탄생한다는걸 여러가지 실험 결과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거든요.

직전에 읽었던 <<n분의 1의 함정>>에 등장했던 '최후 통첩 게임'을 사이코패스를 찾아내는데 사용하는 실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정해진 돈을 나눌 때, 분배자가 정한 비율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거부하는 사람 보다는,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 사이코패시 성향이 높다는군요. 복수하듯 거절하기 보다, 단 돈 1엔이라도 받는게 이득이라고 냉철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럴듯했어요. 입사 면접에서 한 번 해볼만한 테스트가 아닐까 싶네요.
사이코패스는 보통 사람과 뇌의 특정 부분의 문제와 차이점이 있다는 연구 결과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뇌의 전두전피질 가운데 안와전두피질과 내측전두전피질의 양쪽 기능이 저하되어 있으면 반사회적 행동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사이코패스는, 편도체와 안와전두피질 혹은 내측전두전피질과의 연결성이 약하다고 알려져 있다." 등인데, 앞으로는 이를 통해 사이코패스의 구분이 의학적으로 가능해 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을 판별하는데 중요한 척도로 쓰이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책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유전의 영향이 어느정도 있다고 하니, 의학적인 결과와 혈통적인 계보가 결합하면 그 완성도는 더욱 높아질테니까요. 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일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또 각종 문헌을 통해, 사이코패스는 오래전부터 세계 각지에 있어왔다는 내용도 신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알래스카 북서부의 소수민족 유픽 (이른바 이누이트) 의 'kunlangeta'가 그러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것을 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거짓말을 하며 속이거나 훔치는 남자’를 의미하는데, 500명에 한 명꼴로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리들과 사냥에 나가지 않고 다른 남자들이 마을을 나서면 많은 여자들에게 섹스를 강요하며. 비난을 받아도 개의치 않으며, 장로의 앞에 끌려가 벌을 받아도 몸가짐을 고치지 못해서 결국 누군가 죽여버리고 만다는군요. '선천적이므로 고칠 수 없다'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지요.
아울러 승리자 그룹에 속하는 사이코패스도 많다며 오다 노부나가, 모택동, 표토르 대제 및 여러 미국 대통령들을 예로 들어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주는데, 그럴 듯 했습니다. 이 중 가장 놀라왔던건 성녀 마더 테레사도 사이코패스일거라는 주장이었어요. 그녀가 보살폈던 아이들과 측근들에게 냉담했다는 여러 기록이 근거라네요. '박애주의자'는 특정 소수의 인간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지 못하므로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성립되는데, 좀 무서워지는군요.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에서 사이코패스가 계속 나타나고 일정 비율로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이코패스가 생존에 유리했다면 그 수가 늘어났을 테고, 생존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면 자손을 남기지 못하여 도태되고 말았을텐데 말이지요. 이 책에서는 사이코패스와 같은 개체가 일정 수 존재하는게 거시적인 시점에서 집단 생존에 유리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와 개척자도 사이코패스였을테고, 전쟁에서 아군의 피해에 눈 하나 깜짝않고 적을 죽이는 전쟁 영웅도 사이코패스였을테니까요. 이렇게 사이코패스가 필요한 상황이 많아서, 사이코패스 유전자가 소실되지 않았다는 해석이지요.
필요에 더해, 사이코패스는 집단에서 배척당하고, 제거될 가능성이 높기도 하지만 반대로 집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여 도리어 살아남기 용이했고, 복수의 이성을 홀려 유전자를 남겼을 가능성이 높았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이렇게 사이코패스 존재 이유를 설명하면서 소개된, "여성들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이유는?"에 대한 고찰도 재미있었습니다. 남성의 경우 인기있는 타입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육아에 노력을 분배, 할애할 것 같은 남성, 그리고 또 하나는 사이코패스 타입이라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 하고, 강함을 어필하여 번식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물론 문명화된 현대에서는 육아를 도와줄 남성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생리 주기에 의해 호르몬 밸런스가 원시적으로 변화할 경우 - 여성 호르몬과 세로토닌의 농도가 내려가는 배란기 전후 3일과 생리 전 일주일 - 사이코패시 성향이 높은 남성이 선택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사이코패스의 삶도 소개됩니다. 스티브 잡스가 사이코패스인 이유부터 상세히 설명된 이 장에서 가장 주목할만했던건, 면접을 중시한 채용 시험, 그리고 배심원 참여 재판의 문제입니다.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하고, 항상 당당하며 불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면접을 통과하거나, 배심원들을 설득해서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악덕 고용인, 악플러, 서클 크러셔 등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사이코패스 및 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추종자들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왔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아나키"같은 여러 비합리적인 커뮤니티 멤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추종자들은 속았다는걸 알게 되더라도 '믿는 편이 기분이 좋기 때문에' 계속 추종자로 남게 된다는군요. 인지부하, 즉 스스로 판단하는건 부담스럽기에, 뇌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무언가를 믿는 쪽을 택하는 거지요. 종교와 별 다를게 없는 셈입니다.
 
마지막 장은 사이코패스 진단법과 분류, 그리고 치료 방법입니다. 치료를 위해서 사이코패스에게는 벌이 아닌 보상을 규칙으로 학습시킬 수 밖에 없다는 실험 결과가 기억에 남네요.

이렇게 사이코패스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목차가 다소 두서가 없다는 점, 그리고 반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 등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빼어난 책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궁금하셨던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0/11/07

셜록 홈즈가 틀렸다 - 피에르 바야르 / 백선희 : 별점 3점

셜록 홈즈가 틀렸다 - 6점
피에르 바야르 지음, 백선희 옮김/여름언덕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에 읽고 상당히 놀랐던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의 저자 피에르 바야르의 또 다른 추리비평서입니다. 이번에는 "바스커빌가의 개"가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심리학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셜록 홈즈가 아니라 코난 도일입니다. 코난 도일이 자신의 창조물이기도 한 셜록 홈즈에 대한 부담감, 즉 '홈즈 컴플렉스'에 시달린 나머지 그를 '죽게' 만들었고, 이후 부활시키는 과정에서도 부담을 느꼈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증명은 작품 속 단서들을 근거로 치밀하게 분석하여 이루어지는데, 그 과정이 매우 그럴듯하고 흥미로왔습니다.

예를 들어, "바스커빌가의 개"에서 홈즈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고, 추리 과정에서 무책임함과 오류를 드러낸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또, 홈즈에 대한 부담감이 그를 '개'에 비유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바스커빌가의 개'와 '베이커스트리트의 개'라는 이름이 발음상 유사성을 통해 대칭점에 놓이게 되었다는 주장은 매우 기발했고요.

그러나 기대했던 소설 속 진범 찾기 부분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물론 스태플턴이 진범이 아니라는 근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앞서 언급한 '홈즈 컴플렉스'와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에 '인'을 바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고, 결국 '이득'을 보는 인물이 베릴밖에 없다는 이유도 너무 큽니다. 또한, 베릴의 동기인 '스태플턴에 대한 복수'와 '바스커빌가의 유산'을 노린다는 설정에는 헨리 바스커빌이 베릴에게 반했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헨리 바스커빌이 베릴에게 반한건 이전 찰스 바스커빌 사건과 무관합니다. 즉 이는 예상하기 어려운 인과관계로 보였습니다. 아울러 저자는 찰스 바스커빌 사건을 거의 사고로 몰아가고 있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낮습니다. 차라리 진범이 베릴이 아니라 공범이었고, 나중에 베릴이 배신했다는게 더 설득력 있었을 겁니다.

전체적으로 흥미롭지만,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와 비교하자면 신선함이나 추리적인 부분에서의 재미가 다소 떨어집니다. 심리학적인 분석도 코난 도일보다는 셜록 홈즈 쪽을 진행하는 편이 팬들에게는 더욱 반가웠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셜록 홈즈 팬이라면 읽어볼 만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로 만족하는게 나을겁니다.

2024/04/19

미술관에 간 과학자 - 미우라 가요 / 지종익 : 별점 3점

미술관에 간 과학자 - 6점
미우라 가요 지음, 지종익 옮김/아트북스

과학자가 쓴 미술 작품 해설(?) 책은 전에도 읽어보았습니다. 이 책 역시 유명 작품을 저자의 전문 분야로 분석하는 책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약간 달랐습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하는건 맞습니다. 다만 그게 화학이나 물리학이 아니라 '심리학'이더라고요.

심리학으로 그림을 분석한 책은 처음 보았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습니다. 사진 등을 통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장면의 묘사가, 실제 눈을 통해 지각할 수는 없다는건 놀라왔어요. '초점'이 빛나간걸 확인할 수 없다는 것처럼요. 상식적으로 바라보는 사물에 초점이 맞을 수 밖에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인데, 여태까지 생각하지도 못했었습니다.
시간과 날짜 등에 따라 다른 색의 변화를 그려낸 아래의 모네의 루앙 성당 연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이걸 눈으로 확인하는건 무척 어렵다는군요. 인간의 눈은 조명이나 그림자를 배제하고 원래의 색으로 보게끔 만들어져 있는 탓입니다. 즉, 모네는 '뇌'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입니다! 여태까지 빛의 변화를 인상파 작가들처럼 느끼지 못했던 저의 둔감한 센스를 탓했었는데 알고보니 그게 당연한거라니, 위안이 됩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이 프랙탈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연구도 신기했습니다. 프랙탈 차원 값은 1에서 2까지로 2로 갈 수록 복잡해지는데, 폴록의 초기작은 인간이 가장 기분 좋음을 느끼는 1.45 정도였다가 말년으로 갈 수록 수치가 상승해서 1950년 작품은 최대치라 할 수 있는 1.9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냥 물감을 뿌린게 아니라 굉장히 고민하고 연구하여 그렸다는건데 어떻게 연구해야 저런걸 물감을 뿌려 완성할 수 있는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확실히,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니네요. 이를 통해 코끼리가 그린 그림이 예술이 아닌 이유도 알 수 있었고요. 연구와 고민이 뒷받침되지 않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은 예술 작품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외에도 그림에서 안정, 불안감을 느끼는 요인 - 광원이 왼쪽에 있는게 안정적임 - 이라던가 그림속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 방향 - 왼쪽에서 오른쪽 -, 그림 속 인물들의 시선 방향에 따른 감상자의 생각들, 광택이 나는 장식품을 투명하게 만드는 방법에 따른 '투명시' 설명 등 그림의 여러 요소들을 이용한 연구들이 가득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또 예시 작품들이 흔히 보지 못했던 독특한 것들이 많아 좋았습니다. 인간의 시각은 복수의 정보를 통해 얻은 정보를 콜라주해서 얻었다는걸 호크니의 사진 콜라주를 통해 알려주는게 대표적이에요. 호크니는 화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진 콜라주 작품도 발표했는지 몰랐네요.

다만 도판이 너무 작아서 알아보기 어렵고, 어떤 내용은 정보와 내용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설명도 제법 되고요. '인간의 눈에는 단파장, 중파장, 장파장에 반응하는 세 종류의 시세포가 있다. 이중 빨간색을 지각하는 건 장파장에 반응하는 시세포로 알려져 있다. 놀랍게도 전형적인 빨강에 해당하는 파장 760나노미터가량의 빛에 대한 시세포의 반응은 거의 0에 가깝다. 빨강은 눈길을 사로잡는 색이지만 눈의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색이라는 것이다. 이 장파장에 반응하는 시세포의 절정은 656나노미터 정도로, 우리에게는 황색으로 보인다. 즉, 단파장, 중파장, 장파장의 세 시세포는 청, 녹, 적이라는 빛의 삼원색에 반응하는 수용기가 아니다. 어떤 색으로 보일지는 세 종류의 시세포가 반응하는 비율에 따라 결정된다. 그 결과, 보일 리 없는 빨간색이 어떤 색보다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는 글처럼요. 빨간색이 왜 선명하게 보인다는건지, 저는 이 글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애초에 글 자체가 친절하게, 쉽게 쓰여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목차 구성도 불만스럽습니다. 앞서 광원 등의 위치로 심리적 안정감과 시간의 흐름이 정해진다는 설명은, 글을 반대로 읽는 일본이나 아랍권에서의 예를 비교해주면서 설명해 주는게 당연히 좋았을거에요. 하지만 일본의 예는 한참 뒤에 따로 소개되어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웠어요.

그래도 워낙 좋은 내용이 많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서구권, 그리고 일부 일본 작품만 연구에 활용되었는데, 우리 작품도 이런 시각으로 연구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5/11/30

속임수의 심리학 - 김영헌 : 별점 2.5점

검찰 수사관으로 오랜 기간 일해온 저자가 다양한 사기 범죄를 심리학적으로 고찰한 범죄 인문·심리 교양서입니다. 각종 사기의 수법과 사람들의 심리적 허점을 교차 분석하며 ‘왜 사람은 속임수에 쉽게 넘어가는가’에 대해 알려줍니다. "심리 조작의 비밀"과 약간 비슷한데, 더 우리나라 중심의 사례와 사기 범죄 위주의 내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선급금 사기’ 등 대표적인 수법을 비롯해 다양한 사기의 유형이 등장하는데, ‘경품 당첨’을 가장한 사기의 뿌리가 1800년대 후반 ‘스페인 죄수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는 등 그 소개가 무척 상세합니다. 사기 수법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지금도 형태만 바뀌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걸 잘 알려줍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이 사기에 잘 걸리는 이유를 인간의 유전적 본성 때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은 본래 집단 내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존재이고, 집단의 의견에 따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고대 사회에서 무리에서 떨어지는 것이 곧 생존의 위협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생겨난 본능적인 성향이라고 하고요. 또한, 누구나 손실을 피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사기꾼들이 파고드는 겁니다. 대표적인게 댓글과 별점 조작입니다. 최근 유행하는 주식, 코인 투자 열풍과 연결되는 ‘FOMO(Fear of Missing Out, 놓칠까 봐 두려운 심리)’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이는 리딩방에서 쉽게 사기 행각이 일어나는건 당연합니다.

사기꾼들이 흔히 사용하는 심리 기법인 '콜드 리딩’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신뢰를 얻는 화법, 예를 들어 “당신은 외향적이면서도 내성적인 면이 있군요”처럼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모호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이런 애매한 화법은 점술가나 역술인이 자주 쓰는데, 이런 화법으로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점점 더 정보를 얻고 맞춰가는 구조라고 합니다. 특히 건강, 돈, 인간관계에 대해 넘겨짚어 질문을 던지고,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은 사기성 상담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신흥 종교의 포교 방식도 다루고 있습니다. ‘미끼 – 끌어올리기 – 격리 – 사랑 – 헌신’이라는 5단계 전략을 통해 상대를 통제하는 방식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심리를 조작하고 세뇌하는 것입니다.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의 겐조의 수법도 이런 방식이었겠지요.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 이슈가 되는 사이비 종교들, 그리고 해외의 세뇌 범죄가 다 이런 방식이고요. 핵심은 '격리'라고 하니, 어딘가에서 합숙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단체 모임은 정말 조심해야 할 것 입니다. 

결혼 사기의 심리적 기제도 설명되는데, 여성은 대체로 사랑에 신중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깊이 빠지는데, 그 시점이 되면 상대의 실체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남성의 경우는 성욕과 관련된 유전적 특성으로 인해 여성의 신호를 과도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사기에서 빈번히 이용되는 심리적 허점이니 역시 조심해야 할 부분이고요.

‘사기를 피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도 풍부합니다. 공짜에는 반드시 숨은 목적이 있다는 사실, 욕망이 클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는 조언, 후회라는 감정이 오히려 사기의 브레이크를 무디게 만든다는 설명 등은 관련된 사기 범죄와 함께 소개되어 굉장히 와 닿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반드시 조사하고, 정과 감정에 휘둘리지 말며, 거절은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말도 당연하지만 실제로 행하기 어려운 것인데 명심해야 할 테고요.

이런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는데, 전반적으로 유사한 사례가 반복되며, 목차 간 구성의 차이도 뚜렷하지 않아 중후반부로 갈수록 흥미가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사기라는 주제가 기본적으로 ‘속인다’는 공통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례 중심, 수법 중심, 예방 중심으로 명확히 분리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사례도 실제 유명 사건보다는 소설처럼 각색된 예시가 많은데 이 역시 아쉬운 부분이고요.
사기를 피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도 전반적으로는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 상식적인 말들을 정리해 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같은 사기 과잉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자주 잊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2/16

구제의 게임 - 가와이 간지 / 이규원 : 별점 1.5점

구제의 게임 - 4점
가와이 간지 지음, 이규원 옮김/작가정신

미국 캘리포니아의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 자리한 ‘성스러운 나무 언덕’이라는 뜻의 ‘홀리파인힐’ 골프코스에서 열린 PGA챔피언십에서 ‘골프 신의 총애를 받는 남자’ 닉 로빈슨이 우승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18번 홀에서 위기를 맞이했다. 첫 타를 숲에 박은 것이었다. 그곳에는 기병대에 의한 원주민 학살이 이뤄졌다는 불길한 전설이 내려오는, 4,500년 수령의 거목 ‘신의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이 신령한 나무는 오르면 벼락을 맞고 떨어지다가 옆의 나무 기둥에 몸통이 관통되어 죽는다는 재앙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로빈슨과 캐디 토니 라이언은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나 마침내 승리를 따 냈지만, 이튿날 로빈슨은 골프 역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을 세우고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이듬해 같은 장소에서 열린 US오픈에서 예선을 1위로 통과한 일본계 미국인 잭 아키라 그린필드와 캐디 팀 브루스는 첫 승 도전에 나섰다. 하버드에서 진화심리학을 전공한 잭은 자신만의 골프 이론과 탁월한 기술을 겸비한 천재 골퍼였다. 그러나 대회 당일 아침, 18번 홀에서 깃대에 복부가 관통된 끔찍한 모습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데드맨"의 작가 가와이 간지가 쓴 본격 추리 장편 소설입니다.

솔직히 작가의 전작에 대한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추리적인 부분은 괜찮았지만, 전개가 영 그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도서관이나 서점을 가기 힘들어져서, 온라인 도서관으로 읽을거리를 찾다가 소갯글을 보고 호기심이 당겨서 읽게 되었네요.
호기심이 당긴 이유는 딱 한가지, 작품이 "골프"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트라이크 살인"이나 "마구"처럼 야구라던가, 엘러리 퀸의 단편의 소재로 등장했던 권투, 딕 프란시스의 모든 작품에 소재로 사용된 경마, "검은개""사라진 테니스 스타"의 테니스, 스키 등 여러가지 스포츠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많이 봤지만, 골프를 소재로 한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거든요. 골프라는 스포츠를 즐기지는 않지만, 규칙은 잘 알고 있고 평소 관심도 있었고요.

이런 스포츠 소재 작품들 중 어떤 작품은 단순히 해당 경기의 선수가 등장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이 작품은 다행히 그 정도 수준은 아닙니다. 사건의 핵심 동기가 '벌타'규정에 따라 우승을 놓치게 된 슈퍼스타 닉 로빈슨의 캐디 토니 라이언이 어쩔 수 없이 벌인 부정행위이며, 또 이 부정행위 탓에

  1. 캐디의 판단보다 세 단계나 짧은 클럽을 선택했다. 
  2. 루틴을 무시하고 손수 클럽을 뽑아 들었다.
  3. 서드 샷 전에 에이프런에서 한참 멈칫거렸다.
  4. 지극히 단순한 라이에서 생크를 냈다.
  5. 우승 공을 처음으로 직접 챙겼다.
  6. 우승 직후 뜻밖의 은퇴 발표를 했다.
  7. 은퇴 이튿날 18번 홀에서 드라이버 연습을 했다. 

는 닉의 이상한 행동들이 결정적 단서가 되니까요. 게다가 이 부정행위 탓에 협박받게 된 캐디가 살인을 저지르고 자살한 장소가 US 오픈이 열리는, 요세미티에 위치한 더 홀리파인힐 리조트이며, 탐정 역할을 맡은건 US 오픈 출전권을 갓 획득한 일본계 미국인 잭 아키라 그린필드이고 왓슨 역할은 그의 캐디 팀이 수행한다는 점, 그리고 “골프는 훌륭한 스포츠야. 바람, 풀, 나무, 물, 모래, 흙, 늘 자연과 함께하는 스포츠잖아.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려서 실수해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아. 인간은 겸손해야 한다는 걸 가르쳐주지." 라는 잭의 후원자 맥거번 회장의 말이나, "골프는 스포츠 중에 유일하게 심판이 없는 경기다, 골퍼는 양심과 자존심을 걸고 규칠을 지키며 정직하게 플레이해야 한다"는 잭의 말 등 이야기 전반에 걸쳐 골프라는 스포츠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골프 추리 소설' 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그런 작품입니다. 제목도 아주 근사하지요.

"데드맨"도 그랬지만, 추리적으로도 꽤 그럴싸합니다. 특히 앞서 설명드린 닉 로빈슨의 기묘한 행동을 파고들어 해당 경기에서의 부정을 밝혀내는 부분, 그리고 사건을 담당하는 휴즈 형사의 접근법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그는 토니 라이언이 살해된 현장을 보고 세 가지 의문을 느낍니다. 첫 번째는 왜 전설과 일치하도록 범행했는지, 두 번째는 깃대로 어떻게 몸을 관통시켰는지, 세 번째는 왜 많은 사람이 모이는 US 오픈 현장에서 범행했는지입니다. 그러나 휴즈 형사는 앞의 두 가지는 버리고, 마지막 의문에만 집중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의문이며, 이 의문을 풀어 범인을 체포하면 앞의 두 가지는 범인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굉장히 와 닿습니다. 온갖 불가능 범죄가 난무하는 고전 본격물에 도입하면 꽤 괜찮겠다 싶은 현실적인 추리법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잭과 팀의 티격태격하는 대화는 만담같은 재미가 잘 살아있으며, 가끔 등장하는 골프 장면도 박진감있게 묘사되어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그러나 역시나, 작품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단, 토니 라이언 살인 사건의 동기가 닉 로빈슨의 마지막 경기이며, 그 중에서도 다른 공을 발견한 척 했다는 건 읽다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를 밝혀내려고 하는 휴즈 형사와 잭의 추리에 대한 흥미는 상대적으로 떨어져요. 그런데 다른 피해자 앤서니 스미스가 발견되고, 그가 닉 로빈슨 마지막 경기에서 공을 발견한 당사자였다? 이렇게 되면 진범은 닉 로빈슨이거나, 최소한 닉이 강하게 연루되었으리라는건 뻔한 추리입니다. 앞서 휴즈 형사의 추리 방법론에 따르면 그로부터 자백을 이끌어내면 되는거죠.

토니 라이언이 닉을 보호하기 위해 앤서니 스미스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진상도 석연치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토니의 동기는 설득력이 높지만 인디언 전설에 따라 현장을 조작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토니는 자신도 살해된 것처럼 꾸며서 닉을 지키기 위한 의도였다고는 하는데, 동기가 명확하기 때문에 닉이 빠져나갈 방법은 애초에 없습니다. 차라리 앤서니 스미스의 시체를 싣고 US 오픈 현장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차와 함께 불태워 버리는게 더 나은 해결 방법이었을거에요. 이 작가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실력이 아무리 봐도 너무 부족해 보입니다.
아울러 끝이 뭉툭한 깃대를 몸에 관통시킨 방법은 드라이버 샤프트로 미리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라는 진상 역시 그다지 새롭지 않을 뿐더러 무의미했어요. 차라리 앤서니 스미스의 몸을 관통한 나뭇가지 끝은, 사고 후 부러졌다는 추리가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습니다.

여기에 더해, 인물들이 지나치게 만화적이라는 것도 설득력을 떨어트리는 요소입니다. 주인공 탐정인 잭에 대한 설정이 대표적이에요. 하버드에서 진화심리학을 전공하였으며, 골프는 시작한지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1년 만에 골프 스윙의 진리를 발견한 뒤 US 오픈 출전권을 획득했고 일종의 시범 게임에서 세계 1위를 압도적으로 이긴다는 묘사는 해도 너무하지요. '사고기계' 반 두젠 교수도 규칙만 이해하면 충분하다며 체스를 익힌지 단 하루만에 체스 세계 챔피언을 이기긴 했다지만 이건 1900년대 초반의 이야기입니다. 21세기에 먹힐 수 있는 설정은 도저히 아니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골프를 소재로 한 거의 유일무이한 추리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골프를 정말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분께 어필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평범한 추리 애호가에는 그닥 인상적이거나 흥미로운 부분이 없는 평범 이하의 작품입니다.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09/04/18

절규성 살인사건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최고은 : 별점 3점

절규성 살인사건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북홀릭(bookholic)

범죄 심리학 조교수이자 실제 사건에도 뛰어들어 활약하여 "임상 범죄 학자"라는 타이틀로도 불리우는 천재 히무라 히데오가 탐정역으로, 그의 대학동창이자 친구인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도우미로 활약하는 단편집으로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이후 두번째로 국내에 출간되었네요.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때와 똑같이 이 컴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국명 시리즈" 이외의 작품이 계속 출간되는 것은 여전히 궁금합니다만, 제가 좋아하는 일본 추리 단편집이라 주저없이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이 단편집에는 전부 6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두 작가 후기에 등장하는 작가의 의도, 즉 "... 살인사건" 이라는 주제로 단편 연작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충실하게 따른 단편들입니다. 연작 시리즈 답게 일종의 "저택"을 무대로 해서 밤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연관성을 가지게 하겠다라는 것 역시 동일하고요. 그러나 "저택"을 무대로 하는 것이 의미가 있었겠구나... 싶은 작품은 "월궁전"과 "홍우장" 2편 정도? 나머지는 그냥 다른 이야기로 꾸미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추리적으로 필요도 없는데 "저택"을 무대로 하는 설정을 도입하는 것은 작가의 욕심에 불과해 보였거든요. 트릭 자체는 신본격의 대표 작가답게 괜찮은 것들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작가의 욕심,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지나친 작위성 때문에 외려 완성도가 낮아진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냥 놓고 본다면 괜찮은데 작위적인 설정 덕에 단편마다 완성도의 편차가 심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사실 이 작가의 가장 큰 단점이라 할 수 있는 "스스로의 설정에 매달리는" 모습은 작가의 작품을 여러권 읽어왔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고 거슬리기만 하는데, 이제는 계속 구입해 봐야 하는건지 솔직히 의심스러운 수준인 듯 합니다. 별거아닌 트릭을 작위적으로 포장한 얄팍하고 빈약한 과대포장된 선물상자같은 느낌이라서 말이죠... 작가의 최고 걸작이라는 "쌍두의 악마" 가 출간되면 읽어보고 최종 평가를 내려야겠지만 현재로는 위험수준!입니다.

그나마 별점은 실망스러운 감상평과는 별도로 수준높은 작품 몇편이 끌어올리고 있어서 평균점 자체는 괜찮은 편이네요. 괜찮았던 작품은 "흑조정", "홍우장" 두편이었고 "호중암", "월궁전", "절규성" 은 평작~범작 수준, 그리고 "설화루"는 절망적인 쓰레기 수준으로 토탈 평균은 한 3점 되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책의 사이즈, 장정, 디자인, 커버는 모두 아주아주 마음에 들더군요. 같은 학산계열인데 "경성탐정록"과는 비교가 되는 수준인데, 앞으로 출판사에서 경성탐정록도 신경좀 써줬으면 좋겠네요.

단편별로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흑조정 살인사건"
히무라와 아리스는 대학 동창인 화가 아마노의 요청으로 그가 거주하는 시골 저택 "흑조정"을 방문한다. 과거 "흑조정"의 주인이었지만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던 전 은행가 나미키 마사토의 죽은지 얼마 안되는 시체를 발견한 아마노는 기이한 사건의 해결을 부탁하는데....
"흑조정"이라는 설정을 도입할 필요는 전혀 없었던 단편이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아마노의 딸 마키를 통해 다양한 복선과 수수께끼를 전달하는 이야기 구성이 무척 좋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스무고개 퀴즈를 작품에 녹여내는 전개와 이솝우화를 가지고 풀어낸 트릭도 마음에 들었고요. 짤막하지만 복선과 단서가 잘 배치되어 있어서 단편의 왕도를 걷는 작품이라 생각되기에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4점 주겠습니다.

"호중암 살인사건"
"호중암"이라 불리는 지하의 밀실에서 기묘하게 살해된 시체가 발견된다. 피해자 츠보우치 토마의 시체가 밀실에서 항아리를 뒤집어쓴채 매달려 있었던 것.
밀실 트릭물입니다. "호중암"이라는 밀실의 이름과 피해자의 이름, 사체의 상태를 연결시킨 것은 흡사 엘러리 퀸의 억지스러운 본격물 트릭을 연상케 하더군요. 21세기에 먹히기는 어려운 설정이죠. 그래도 기계적인 장치를 사용한 트릭은 깔끔한 편이라 중간정도는 되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너무 작위적이고 장치적이라 "만화"에 더 적합해 보이긴 했다는 것은 단점이겠죠. 별점은 3점입니다.

"월궁전 살인사건"
히무라와 드라이브 도중 아리스는 우연히 자신이 발견했던 황당했지만 예술성있던 노숙자의 무허가 건물을 이야기한다. 근처에 도착한 그들은 그 집을 찾아보는데 마침 "월궁전"이라 불리우던 그 집이 방화로 불타고, 노숙자도 사망한 것을 알게된다.
"월궁전"이라는 단어에서 뽑아내어 집과 연결시킨, "집" 이라는 설정과 트릭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단편입니다. 깔끔하게 정리해서 마무리했기 때문에 읽기도 편했고 완성도도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단순해서 정통 본격물이라기 보다는 소품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것이 좀 아쉽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설화루 살인사건"
"설화루"라 불리우는 공사가 중단된 여관건물에서 거주하던 남자가 살해당한다. 처음에는 자살로 생각되었지만 머리에 둔기에 의한 상처가 발견되어 살해된 것으로 판단되나, 눈오는 건물 옥상에는 남자의 발자국만 남아있던 상태.
불가능범죄를 테마로 한 작품인데 작위적인 수준을 떠나서 황당 그 자체의 우연을 다룬, 추리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작중 아리스가 이야기하는 다양한 가설 (예를 들면 부메랑 같은) 이 차라리 트릭으로 더 의미가 있는게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말이죠. 이 단편집의 워스트입니다. 작가 스스로는 영화 "매그놀리아" 이야기를 하면서 어물쩍 빠져나가고 있는데 택도 없는 소리죠. 별점? 1점도 아깝다.

"홍우장 살인사건"
화장품 회사의 CEO였다가 은퇴한 이지마 쇼코의 자살로 위장한 사체가 "홍우장"이라 불리우는 그녀의 자택에서 발견되고, 출동한 경찰과 히무라 - 아리스는 세간에 진짜 "홍우장"으로 알려져 있는, 과거 영화촬영 세트로 쓰여 유명한 저택에 살고 있는 이지마 쇼코의 자녀들을 찾아가게 되는데...
저택과 살인사건, 그리고 트릭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두번째 작품입니다. 트릭의 완성도도 높고 사건이 밝혀지는 중요 단서도 설득력이 있으며 동기도 확실한 편이라 추리적으로는 확실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죠.
그러나 범인의 동기가 좀 작위적이고 우연이 겹쳐져 사건이 이루어 졌다는 것, 그리고 단편 전체적으로 이 저택이 유명세를 타게 된 "바람도 모른다"라는 영화 이야기를 계속 등장시키는 것 등은 확실히 단점으로 생각됩니다. 그래도 단편으로 풀어내기에는 괜찮은 소재이고 작품 자체도 잘 썼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4점 주겠습니다.
그나저나 홍우장에서는 "청소"라는 것을 하지 않는것일까요? 저도 가끔 테이블은 걸레로 닦아 주는데.... 사소한 점이지만 추리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는 부분이니 만큼 작중에서 설명을 좀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네요.

"절규성 살인사건"
'나이트 프라울러' 라고 자칭하는 부녀자 연쇄 살인범의 등장으로 전 일본이 공포에 빠진다. 결국 네번째 피해자가 발생하고, 히무라는 사건을 조사하여 그 뒤에 숨겨진 진상을 파악하게 된다.
"절규성"이라는 게임을 테마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연쇄살인을 다루고는 있지만 트릭이 별게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주제는 상당히 묵직했는데 결말이 좀 안이해서 중간 이후 트릭과 진상을 짐작할 수 있도록 이야기가 흘러가거든요. 때문에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게임"과 현실을 잘 믹스한 설정, 특히 "게임"에 대한 설정이 괜찮기에 작품 전체 수준을 놓고 본다면 평작 이상 수준은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별점은 3점 주겠습니다.

2020/06/28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강석기 : 별점 2점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 4점
강석기 지음/Mid(엠아이디)

과학 전문 컬럼니스트 강석기의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 에세이로 과학 동아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엮은 책입니다. 

그런데 일러스트는 사실 별 볼일 없습니다. 딱히 일러스트가 있어야 할 이유도 모르겠고요. 또 모두 50편의 수록된 컬럼 모두가 흥미롭거나, 재미를 자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재미있는 주제도 없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꼽아보자면, 우선은 사람들의 대인관계 범위, 즉 네트워크가 한정돼 있어 새로운 사람을 사귀게 되면 기존 네트워크에 올라와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군가를 잘라내기 마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1990년대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로빈 던바 교수는 사람의 뇌 크기를 토대로 인류의 이상적인(구성원 각자가 서로 잘 아는) 집단의 규모가 150명 내외라고 주장했다는군요. 이를 '던바의 수'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던바의 수는 실질적인 인적 네트워크의 한계로 인식되고 있다고 합니다. 즉, 네트워크에 한계가 있으니, 누군가 선호 네트워크에 추가되면 누군가는 내려가야 하는 법인 셈이죠. 저는 150명까지는 안 될 것 같은데, 나중에 한 번 추려봐야겠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들의 산책 습관과 이들의 엄청난 창조력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놀랍습니다. 학술지 실험심리학저널 2014년 7월호에는 걷기가 정말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고 하네요. 걷는 게 무조건 도움이 되는 건 아니며, 걷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걸음, 즉 산책 같은 걷기가 효과가 있다는데,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른답니다. 여튼, 회사에서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잠깐 걷는게 상책인 듯 합니다.

선택 어업의 부작용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 물고기는 한 번에 알을 수만 개나 낳고, 이 가운데 살아남은 강한 녀석들이 짝짓기를 해(물론 체외수정이지만) 종을 이어갑니다. 자연계에서는 어리거나 병든 녀석들은 사망률이 높기 마련이고요. 그런데 선택 어업은 정 반대로 작고 어린 녀석들은 그물망을 빠져나가 살아남으며 커다란 물고기만 잡히게 됩니다. 어획량이 적다면 자연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겠지만, 지금처럼 어자원고갈에 이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총량을 규제하는 상황에서는 선택어업이 덩치 큰 물고기의 사망률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몸집이 크게 자라고 늦게 성숙하는 유전자를 지닌 물고기들의 비율이 줄어들고 대신 조숙하고 몸집이 작은 경향의 물고기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큰일이에요.
이런 부자연 선택은 캐나다 큰뿔양의 뿔 크기에서도 증명됩니다. 사냥꾼 한 사람이 사냥할 수 있는 큰뿔양 마리수를 제한하자, 사냥꾼들은 돈을 많이 받을 수 있는 '큰 뿔을 지닌 큰뿔양만을 골라 사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과 20여 년 만에 뿔의 크기는 평균 25%나 줄어들었다네요. 원래 큰 뿔은 성선택으로 나타난 표현형으로, 뿔이 크고 화려할수록 수컷이 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친다는 증거이므로 암컷들이 선호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큰뿔양의 뿔은 더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는데 사람들이 선택적인 사냥에 나서면서 불과 20년만에 성선택에 완전히 반대가 되는 방향의 진화를 이끌어낸 셈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선택어업' 대신 어획량과 크기를 규제하지 말고 어획량만 규제하는 '균형어업'으로 어업정책을 바꿔야 할 때라고 하는데, 그럴 듯 합니다. 앞으로는 "도시 어부"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자를 대고 기준에 못 미치는 물고기는 놓아주는 모습도 사라져야 할 것 같네요.

아울러 더운 여름, 주목할 수 밖에 없었던 내용이 있습니다. 완벽한 냉난방 시스템은 우리 몸의 대사율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는 내용이지요. 25도 내외에서 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우리 몸이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너무 더우면 땀을 내 체온을 식혀야 하고 너무 추우면 몸을 덜덜 떨어, 즉 근육에서 영양분을 연소시켜 열을 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25도 내외의 온도가 유지되어 몸의 대사율이 떨어지면, 즉 에너지를 덜 쓰게 되면 섭취한 여분의 에너지는 지방으로 축적되고 이것이 현대 사회 비만이 만연하게 된 원인 중 하나라고 하네요. 그래서 연구자들은 겨울철 난방 온도를 좀 내려 몸이 지방을 태우는 '열생성'을 통해 체온을 유지하게 만들자고 주장한다는데, 잘 되면 좋겠습니다.

집단의 크기가 문화적 복합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도 재미있습니다. 그물 설계 실험을 거쳐 집단 내 구성원 숫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걸 증명한 실험입니다. 이를 통해 고립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은 복잡한 문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피험자들이 두 과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실험 조건 역시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군요. 능력에 따른 노동의 분업을 통해 두 과제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ABE 문고에서 "마지막 인디언"이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결국 이 마지막 인디언이 모든 문화를 전달하는건 불가능했을거라는게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나는 전설이다"역시 마찬가지고요.

마지막으로 동아시아인들이 관계지향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하는 이유가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며, 개인주의이고 분석적 사고를 하는 서구인은 밀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재미있어요. 벼농사는 물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규모 관개시설이 필요하고 농사를 지을 때도 이웃 간에 물을 잘 나눠 써야 한며, 피를 뽑는 작업 등 밀농사에 비해 두 배 이상 손이 많이 가는 탓입니다. 그 결과 벼농사권에서는 상부상조하는 관습이 이어져왔고 나보다는 우리'를 앞에 둘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밀농사는 자연 강우에만 의존하고, 일이 고되기는 해도 나 혼자 힘으로 내가 먹을 걸 얻는 데 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농사의 독립성이 컸고 그만큼 다른 사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이런 생활패턴이 수천 년 이어져오면서 동아시아인과 서구인의 사고방식에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고, 동아시아인 가운데서도 특히 논농사가 압도적인 한국인과 일본인에서 전형적인 동아시아적 사고 패턴이 보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럴싸하지요?
그러나 요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 개인적으로는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부상조하는 전통만큼은 앞으로도 유지되면 좋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 글은 소수이고, 전체적으로는 재미 측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제 관심사 밖의 이야기도 많았고요. 또 제목처럼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지만, 내용은 별다를게 없는 글들도 실망스러웠습니다. 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 그냥 인간이 오래 전에 키웠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내용은 없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7/31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3). - 아야츠지 유키토

### 4. '금단의 계곡'의 젊은이들
같은 8월 1일 오후. 장소는 바뀌어, 여기는 M** 마을 사람들이 '금단의 계곡'이라 부르는, 돈돈산의 서쪽이다.
돈돈다리에서 능선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파이프 바위로 내려가는 샛길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쳐서 좀 더 남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꺾이는 샛길이 있다. 경사는 동쪽에 비해 훨씬 완만하고, 발밑 상태도 좋다.
자세한 위치 관계는 첨부된 지도(27페이지 "현장 부근 약도")를 참조해 주시고, 이 길을 내려가 만나는 계곡의 한 구석에 어제 저녁부터 두 개의 빨간 텐트가 쳐져 있었다. 포우가 말한 "사악한 마음을 가진 외지인들"의 일행이었다.


"요우지. 유키토는 어디 갔어?"
물길에서 돌아온 반 다이스케가 나무 그늘에 앉아 계곡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던 아사노 요우지에게 말을 걸었다. 요우지는 스케치북에서 눈을 들어 시큰둥한 표정으로 "글쎄"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까지 저기 있었는데. 사키를 또 괴롭혀서 혼내줬더니, 혀를 내밀고 도망갔어."
다이스케는 한숨을 쉬었다.
항상 그렇듯, 유키토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머리도 나쁘고 난폭하며, 성격도 전혀 귀엽지 않았다.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는데, 나이에 맞는 분별력도 전혀 없다. 저 아이가 내 친동생이라니, 정말 한심하고 어쩔 수 없는 기분이었다.
다이스케는 H**대학 이학부 2학년으로, 이번 봄에 스무 살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좋아해, 틈만 나면 이렇게 가까운 산으로 캠프를 오곤 했다.
이번 일행은 다이스케를 포함해 다섯 명이다.
중학교 때부터 산행을 함께했던, 소꿉친구인 아사노 요우지. 같은 H**대학 문학부 2학년. 취미로 그림을 그리며, 대학에서도 미술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다.
그의 여동생으로, 고등학교 3학년인 사키.
요우지의 미술 동아리 후배로, 사키의 남자친구이기도 한 사이토 사카에.
그리고, 다이스케의 동생 유키토.
캠프 계획은 다이스케와 요우지가 세웠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초조해하는 사키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본래 목적이었고, 사이토 사카에를 초대한 것은 요우지였다.
처음에는 네 명이 갈 예정이었지만, 유키토가 자기도 가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너는 아직 초등학생이라며 거절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울부짖는다. 엄하게 꾸짖으면 엄청난 소리로 운다. 부모님도 늦둥이로 태어난 유키토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하다. 그래서 결국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유키토는 골칫덩어리다.
최근 초등학생 치고는 작고, 겉모습은 얌전해 보이지만, 제멋대로 자라서인지 심리학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의 발달이 현저히 늦어졌다. 열두 살이 되어서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의 구별을 거의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이다. 초등학교 2, 3학년 때부터 싸움을 하고 수업을 빼먹는 문제아였다. 아직 잡힌 적은 없지만, 도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이웃집 고양이를 모닥불에 던져 죽인 일도 다행히 들키지 않았지만, 유키토의 소행이었다. 새해 첫 참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데려가면, 주차된 차의 타이어에 못을 박거나, 커터칼로 다른 사람의 옷을 찢는 등, 범죄에 가까운 나쁜 장난을 일삼았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언젠가 경찰 신세를 지게 될 게 뻔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유키토가 그런 행동이 "나쁜 일"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점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재미 삼아 하는 것이다. 어딘가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학교 성적은 당연히 좋지 않다. 특히 국어와 사회는 최악이라, 이 점에 대해서는 부모님도 한탄했다. IQ는 그렇게 낮지 않고, 오히려 우수한 편이라지만…….
"꺄!"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텐트 안에서였다. 바로 아사노 사키가 뛰쳐나와 오빠 요우지에게 눈물 섞인 목소리로 호소했다.
"이거 봐요, 오빠. 내 배낭 안에……"
투명한 비닐봉지를 바닥에 던졌다. 그 안에는 토막 난 뱀의 사체가 들어 있었다.
"또 그 애 장난이야."
"정말 미안해, 사키."
다이스케는 황급히 사과했다.
"나중에 잘 말해둘게."
"유키토를 데려온 건 정말 실수였어."
라고 요우지가 말했다.
"정말이야! 이제 지긋지긋해."
사키는 상당히 히스테릭해졌다. 아까는 스치면서 유키토에게 가슴을 만졌다고 한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유키토는 최근 여성의 몸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말 앞날이 걱정되어 다이스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말하긴 그렇지만, 그 애는 정상 아니야. 분명 어딘가 이상해. 어제도 내 엉덩이를 만지고, 나중에 바지를 보니 빨간 손자국이 있었어. 아마 피였을 거야.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미안해."
다이스케는 그저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사이토 사카에가 능선길 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혼자 산책이라도 다녀온 모양이다.
"무슨 일이야, 사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또 유키토야? 뭐, 뭐.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상대는 아이잖아."
사카에는 아주 느긋한 태도였다.
"사이토 군. 유키토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
"위쪽에서 봤어요. 저쪽 다리 쪽으로 걸어가더군요. 너무 멀리 가지 말라고 했더니, 혀를 내밀었어요."
"다리라면, 막다른 곳에 있는 출렁다리?"
"네."
위험하다고, 다이스케는 생각했다. 아무리 문제아라도, 역시 동생은 동생이다.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유키토에게 관대한 것은 부모님뿐만 아니라, 다이스케도 마찬가지였다.
"흥. 저런 녀석, 계곡 아래로 떨어져 버리면 좋겠어."
사키는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 5. 유키토의 수난
반 유키토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누가 좀! 도와줘!"
아까부터 목이 쉬도록 소리치고 있었지만,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넓은 산 속에서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그들의 캠프까지는 닿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라고 유키토는 생각했다. 다리 앞에 있던 그 더러운 표지판. 거기에 적혀 있던 것은 어떤 경고였을까?
"노후화로 위험"—그 글자는 국어를 잘 못하는 유키토는 읽을 수 없었다.
현수교를 건너는 것은 그야말로 스릴이 넘쳤다. 양손으로 로프를 더듬듯이 잡으며, 군데군데 큰 틈이 난 판자 위를 처음에는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씩 갈 때마다 다리 전체가 삐걱거리고 흔들렸는데,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재미있었다. 점점 흥분한 나머지, 마지막 5미터 정도를 뛰어갔는데, 그 순간이었다. 유난히 큰 삐걱거림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다리의 형태가 무너졌다. 다리를 지탱하던 로프가 마침내 끊어진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유키토는 이미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절벽 가장자리에서 계곡 바닥을 내려다보며, 천하의 악동 유키토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건너편까지는 20미터 가까이 된다. 남아 있는 것은 간신히 끊어지지 않은 로프 한 줄과 거기에 매달린 몇 장의 판자뿐이었다. 강한 바람에 휘말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두려운 마음에 로프에 손을 대보았지만, 크게 흔들리더니 남아 있던 판자가 계곡 바닥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것으로는 도저히 유키토의 체중을 견딜 수 없다. 이쪽 길은 절벽 때문에 2미터 정도만 가면 막힌다. 주위는 모두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한 절벽이었다. 도움을 청하는 것 외에는 유키토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한여름의 태양이 무자비하게 내리쬐고 있다. 작은 그늘도 없는 천연 발코니였다. 이대로 2, 3시간만 이 뜨거운 햇볕 아래 있으면, 일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 유키토는 간절히, 매주 보고 있는 TV 속 변신 히어로가 되고 싶다고 빌었다.
"도와줘…"
이제는 외치는 것도 지쳐갔다. 이제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고 반쯤 포기하려던 그때,
"유키토!"
능선 쪽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 다이스케의 목소리였다.
"형!"
유키토는 손을 흔들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부서진 현수교 건너편에 다이스케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기야, 형. 도와줘."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마."
다이스케가 큰 소리로 답했다.
"기다려. 지금 모두를 데리고 올 테니까. 알겠지? 거기서 움직이지 마. 무리하지 마!"
"—알았어."
"괜찮아. 금방 돌아와서 도와줄 테니까. 아무튼 가만히 있어."
그리고 다이스케는 몸을 돌려 능선 길로 돌아갔다. 오후 2시 반의 일이었다.

### 6. 다가오는 그림자
다이스케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유키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쏟아지는 햇볕의 더위를 견디고 있었다. 평소에 말썽꾸러기인 유키토도 이 상황에서는 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 오지 말 걸, 그런 짓을 하지 말 걸...'이라고, 그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후회하면서 유키토는 그대로의 자세로 다이스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의를 품은 어떤 존재의 그림자가 다리 건너편에 나타났을 때도, 유키토는 전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M** 마을의 오후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숲이 끊긴 곳에 생긴 광장에 모여, 모두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옷을 벗고 건강하게 뛰노는 아이들, 나무 그늘에서 바느질을 하는 젊은 여자들… '수염의 노사' 포우는 광장 한쪽에 있는 노천 온천에 어깨까지 몸을 담그고, 그런 마을의 풍경을 한가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희미하게, 무언가 이상한 외침이 들려왔다.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지금 그 소리는?'
중얼거리며 포우는 뭔가 불길한 예감에 흰머리가 섞인 눈썹을 찌푸렸다.
'출렁다리 쪽에서 나는 소리 같았는데…'
오후 2시 40분의 일이었다.


다이스케가 캠프장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50분이었다. 능선길을 따라 곧장 달려와, [샛길 C](지도를 참조할 것)를 뛰어 내려왔다.
나무 그늘에 깔린 그라운드 시트 위에 사키가 누워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쪽 텐트 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사키, 사키야!"
"응?"
졸린 듯 눈을 비비며 사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숨을 가쁘게 내쉬는 다이스케를 보고,
"무슨 일이에요, 반 씨? 그렇게 급하게."
"큰일났어. 요우지와 사이토 군은 어디 있어?"
"무슨 큰일이죠?"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요우지가 텐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다이스케는 서둘러 사정을 설명했다. 요우지는 팔짱을 끼고 불만스럽게 아랫입술을 내밀었고, 사키는 "꼴 좋다"는 듯한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어 보였다.
"흠. 그거 우리만으로는 어쩔 수 없겠네."
요우지가 말했다.
"어쨌든 빨리 돈돈 마을로 달려가서 구원을 요청해야겠어."
"부탁해. 나는 다리로 돌아갈게. 사이토 군은 어디에 있어?"
"낚시하러 계곡으로 내려갔어."
라고 사키가 대답했다.
"알겠어. 그럼, 사키는 여기서 대기하고, 그가 돌아오면 함께 다리 쪽으로 와줄래?"
말을 끝내자마자, 다이스케는 뒤돌아섰다.

### 7. 유키토의 최후
다이스케가 돈돈 다리로 돌아온 것은 오후 3시 반이었다. 같은 경로를 거쳐 올라왔지만, 능선까지는 오르막길이어서 시간이 더 걸렸다.
'서두르지 말자,' 라고 여러 번 스스로에게 말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다리의 상태를 생각하면, 구조대가 올 때까지는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유키토를 진정시키고,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있다. 다행히 날씨가 나빠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다리 앞에 도착했다.“노후화로 인해 위험”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붙잡고 체중을 지탱하며, 헐떡이는 숨을 고르면서 동생의 무사함을 확인하려고 다리 너머를 보았다. 그때――.
다이스케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유키토가 없었다.
몸을 숨길 만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비록 20미터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시야는 탁 트여 있었고, 다이스케의 시력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부서진 다리의 모습도 아까와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곧이어 다이스케는 다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게 느껴졌다. 다리 중앙에 도착하자, 그는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다이스케는 유키토의 작은 몸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몸은 이상하게 비틀려 있었고, 움직임이 없었다.
다이스케는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고통과 절망을 억누르며 다리 밑으로 내려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어떻게 해야 유키토를 도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곧 알게 되었다. 유키토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눈물을 참으며 다이스케는 다리 밑으로 내려가, 유키토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유키토의 마지막 순간을 느끼며, 다이스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말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공허함을 채울 수 없었다.


사이토 사카에는 캠프를 떠나 혼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고 고생을 했지만, 결국 본류의 돈돈 강과 만나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가에 서서 사카에는 오른손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돈돈 다리라는 현수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다리가 부서져 있었다. 양쪽 절벽에는 끊어진 로프가 늘어져 있었고, 강가에는 다리의 잔해로 보이는 나무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카에는 조심스럽게 다리 쪽으로 다가갔다. 몇 걸음 나아가다 문득, 건너편에 누워 있는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유키토?"
그는 소리쳤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하지만, 사람 그림자는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강물은 불어나고 흐름도 거셌다. 어디서든 건너갈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을까 하고, 사카에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몇 미터쯤 위쪽으로 가보니, 여기저기 바위가 드러나 있는 곳이 있었다. 저 바위를 따라 건널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카에는 낚싯대 등이 들어있는 배낭을 강가에 던져두었다.
여러 번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건너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달려가 보니, 쓰러져 있는 것은 역시 유키토였다.
"이봐, 괜찮아?"
소리치자, 그에 답하듯 소년의 입에서 "으으" 하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신 차려. 이봐."
"……으으"
사카에는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이 위에서 떨어진 건가? 그렇다면 이렇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이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봐, 유키토. 이봐."
등을 받치고 여러 번 불러보았다. 유키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 들여다보니, 갈라진 머리에서 흐르는 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으……으……"
어쩐지 희미하게 의식이 있는 듯했다. 유키토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뭐? 뭐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당했다……"
"뭐라고?"
"……밀……쳐……졌……"
소년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당했다" "밀쳐졌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는 바로 다잉 메시지였다. 그리고——.
"사……사……아……"
그렇게 결국, 악동 유키토는 숨을 거두었다.

### 8. M** 마을의 소동
돈돈 다리의 북쪽 절벽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정보는, 그날 저녁이 되어서야 정찰을 다녀온 엘러리가 전해주었다. 죽은 사람은 유키토라는 이름의 소년으로, 어제부터 '금단의 계곡'에 머물던 외지인들 중 한 명이었다. 보고에 따르면, 유키토는 문제의 절벽 위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다"고 했다.
포우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며, 좋아하는 도토리를 씹어 먹으면서 모두의 반응을 살폈다.
"엘러리,"
마침내 포우는 엄숙한 얼굴로 침묵하고 있는 젊은 리더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일을 나에게 맡겨보는 게 어떻겠느냐?"
"맡기죠,"
엘러리는 대답했다. 포우는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모인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좋다, 우리 중에 이 살인을 저지른 자가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어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할 것이다. '금기를 어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금단의 계곡'에 간 카도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물론 우리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해된 소년의 동료들 중에 있을 수도 있다만..."
"잠깐 기다려 주세요, 포우,"
엘러리가 끼어들었다.
"그 소년은, 하지만..."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살인은 살인, '금기를 어기는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더럽혀진 땅'에 온 사악한 마음을 가진 인간을 죽였다는 것은, 이중의 '더러움'이 아니겠느냐. 이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엘러리는 반론하지 않았다. 포우는 계속해서 말했다.
"다리 쪽에서 그 비명 소리가 들려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광장에 있었다. 그때 여기에 없었던 사람은 누구인가? 우리 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 여기서는 가칭 X라고 부르자, 그 X가 있다면, 당연히 그때 이 광장에 없었던 자일 것이다..."
모두에게 물어본 결과, 문제의 시간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은 엘러리와 그의 아내 아가사, 엘러리의 두 번째 아내 올츠이, 그리고 엘러리와 아가사의 아들 카, 이 네 명 뿐이었다. 이 중 카는 어제 다친 이후로 여전히 누워 있었다.
"아가사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포우의 질문에 중간 키의 아름다운 여자가 일어섰다. 아가사였다. 그녀는 작년 봄, 숲에서 곰에게 공격받아 오른쪽 팔꿈치 아래를 잃었지만, 그 기품 있는 아름다움은 여전히 빛났다.
"저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중환자 상태인 자신의 아이가 여전히 걱정스러운 듯, 그녀의 표정은 유난히 어두웠다.
"올츠이는? 어떻게 했느냐?"
올츠이는 아가사보다 한참 작은 젊은 여자였고,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포우의 질문에 그녀는, 오후 내내 광장에서 떨어진 나무 그늘에서 몸을 쉬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엘러리, 너는 어떻게 했느냐?"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은 엘러리는 현재 리더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듯 강한 앞니를 드러내며 다소 무뚝뚝한 어조로,
"혼자서 숲 속에 있었습니다."
라고 답했다.
"저도 그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포우."
"흠."
고개를 끄덕이며 포우는, 그 비명 소리를 들은 후 잠시 지나 엘러리가 광장에 나타났던 것을 떠올렸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두자. 돈돈 다리에서 비명 소리가 들린 시간은 오후 2시 40분이었다. 그리고 포우가 광장에서 엘러리를 본 시간은 정확히 25분 후인 오후 3시 5분이었다.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이번 장에서 다시 등장하는 인물은 "고뇌하는 자유업자" 린타로이다. 린타로가 그의 애견 타케마루와 함께 파이프 바위까지 와서,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그곳에서 약 세 시간, 즉 오후 4시가 조금 넘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즉,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는 M** 마을에서 능선 길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그 통나무 다리를 계속해서 감시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 소설에서 '신의 시점'을 취하는 작가가 지문에서 이렇게 명시하고 있으니, 그 사실은 틀림없다.
작가의 인터뷰에 응한 린타로는 이렇게 단언한다.
"그 통나무 다리는 그 시간 동안 항상 제 시야 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놓쳤을 가능성은 없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복잡하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다리를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면 절대 알아챘을 것입니다."
다만――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 시간 동안 두 번 정도, 그의 발치에 있던 타케마루가 심하게 짖었다는 것이다. 타케마루는 겁이 많기 때문에, 아마도 풀숲에서 뱀이라도 보고 놀랐을 것이라고 린타로는 이야기했다.


### 9. '신'에 의한 데이터 제공
문제의 실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여기서 두세 가지 설명을 추가하겠다.
M** 마을 및 ‘금단의 계곡’의 캠프지에서 돈돈다리로 가는 길은, 첨부된 지도에 표시된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예를 들어, 포우 일행만이 아는 비밀의 지름길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범람한 동쪽 지류에 대해서도, 그림에 표시된 것처럼, 적어도 파이프 바위 부근보다 하류 부분에 대해서는, 그 통나무 다리를 사용하지 않고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꾸로 말하면, 더 상류로 돌아가면 바위를 타고 건널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가령 포우가 말하는 X가 M** 마을 사람이라고 가정하고, 그가 마을에서 돈돈다리까지 가려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루트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1. 통나무 다리를 건너고, [횡도 B]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2. 일단 [지류 A]의 상류로 돌아가서 강을 건너고, [횡도 D]에서 능선길로 올라 돈돈다리로.
각 루트의 소요 시간을 기록해두자면, 1번 루트는 가는 데 35분, 돌아오는 데 20분, 2번 루트는 가는 데 1시간 반, 돌아오는 데 50분이 걸린다.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최단 소요 시간이다.
가능성을 논하자면 물론, 이 두 가지 외에도 돈돈다리까지 가는 루트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횡도 D]에서 한 번 능선길로 나온 뒤 [횡도 C]를 내려가거나, [지류 B]를 따라 계곡을 내려간 뒤 [횡도 A]를 올라 다시 능선길로 나오는 등의 극단적인 우회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다른 정규 “길”을 통하지 않고 능선까지의 경사를 오르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앞서 언급한 1번과 2번 루트에 비해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분명하다.
추가로,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경우, 엘러리의 알리바이는 오후 3시 5분 이후 완전히 성립한다. 아가사와 올츠이에 대해서는 모두 오후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전혀 없다. 아가사는 계속 카의 곁에 있었다고 하지만, 위독한 상태였던 카는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한편 캠프의 네 명은, M**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들은 오후 2시 40분 시점에서는 모두 단독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각자의 증언에 따르면――
- 다이스케: 모두에게 유키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능선길을 되돌아가던 중이었다.
- 사키: 캠프의 나무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 요우지: 텐트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듣고 있었다.
- 사카에: 낚시를 하기 위해 [지류 B]를 내려가고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것은 사건의 핵심을 다루는 것이다, 오후 2시 40분에 포우 일행이 들은 문제의 비명은 확실히, 유키토가 돈돈다리 북쪽 절벽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밀쳐졌을 때 외친 목소리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신’인 작가가 지문에서 말하는 것이므로 절대 틀림없다.

.【독자에게 던지는 도전】
○ 문제 1
반 유키토를 죽인 X의 이름을 맞춰주세요. X는 단독범으로, 어떠한 의미에서도 공범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 제3자의 범행도 아닙니다.
○ 문제 2
범행 방법은? X는 어떻게 유키토를 죽였는가, 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으로는, 연, 행글라이더, 낙하산, 기구, 괴인20면상이 애용하는 미니 헬리콥터 등 작품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특수한 도구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초능력이나 우주인, 이공간통로 등 초자연적인 존재나 개념도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종류의 퍼즐 미스터리의 규칙에 따라, 본문에는 전혀 거짓된 기술이 없음을 여기에 명시합니다. 또한, 논리가 무의미하게 복잡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 "문제"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도 동일한 규칙을 설정했습니다. 다시 말해, X 이외의 것들의 대사에는 거짓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위 조건을 바탕으로 답을 제출해 주세요.
건투를 빕니다.


2019/08/03

살인 카드 게임 - 제임스 패터슨 / 조은아 : 별점 1점

살인 카드 게임 - 2점
제임스 패터슨 지음, 조은아 옮김/북플라자

내 소개를 하지. 이름은 딜런. 저명한 심리학 교수지. 어느 날, 아름답고 당찬 여형사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지. 그녀는 대뜸 내게 피 웅덩이 위에 쓰러진 피해자의 사진을 보여주었어. 맙소사, 사진 속 모습이 얼마나 참혹한지 역겨움이 들 지경이었어. 그녀는 범인이 시신 옆에 트럼프 카드 ‘킹’을 두고 갔다고 설명했어. 남기고 간 카드로써 다음 희생자를 예고하는 연쇄 살인 게임이 시작된 거야. 나는 그녀를 도와 범인을 잡는 수사에 참여하기로 했지. 그런데 빌어먹을! 놈은 그런 우리를 비웃듯이 교묘한 방법으로 살인을 계속 저질렀어. 과연 이 살인 카드 게임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미국의 인기 작가 제임스 페터슨의 신작입니다. 이 작가의 작품은 아주 오래 전 몇 권 읽어보았는데, 사실 좋았던 기억은 없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른 만큼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살짝 기대를 했지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역시나 실망이었습니다. 그냥 실망도 아니고 왕실망이었어요.

미치광이 연쇄 살인마와 주인공이 대결하는 작품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살인마가 특정 소재 - 동요라던가, 타로 카드라던가... - 로 살인 예고를 한다는 작품도 많고요. 무작위로 보였던 피해자들에게 무언가 공통점, 패턴이 있다는 이야기도 굉장히 흔합니다. 그렇다면 이야기에 무언가 특별한걸로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차별화된 재미 요소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주인공만 조금 독특한 정도입니다. 딜런 라인하르트 교수는 예일대의 이상 행동 분석 교수로 정신 감정 전문가이자 전직 CIA요원, 거기에 아이를 입양하려고 하는 게이 부부의 남편! 이라는 설정이니까요. 파트너격인 엘리자베스 니덤은 게이마저도 반할만한 매력적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에 뒤지지 않고요. 그런데 이게 재미요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헐리우드 영화같기는 한데 이야기와는 별 상관이 없는 탓입니다.

또 이렇게 캐릭터를 구성하기 위한 여러가지 이야기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해서, 정작 본 사건 이야기는 구멍 투성이입니다. '트럼프 카드'로 다음 피해자를 예고한다는 핵심 설정부터 억지스러워요. '클로버 킹'이 뉴욕 클럽의 왕으로 군림했던 두번째 피해자를 나타낸다는 것, 그리고 '하트 퀸'이 여성 흉부외과 전문의를 가리킨다는 정도만 아슬아슬하게 설정과 어울리며 그 외에는 전부 무리수입니다. 예를 들어 하트 2가 두명의 불륜 남녀를 가리킨다? 그 대상자는 뉴욕에 수만명은 될 겁니다. 킹스맨 재판 관련자라는 조건이 걸리더라도 둘의 불륜을 어떻게 알아낼까요? 최소한 경찰은 알아내기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래도 억지스럽지만 피해자들을 어떻게든 알아내기는 합니다. 허나 범인보다 앞서가고자 할 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항상 범인이 앞선다는 식상한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너무 뻔해서 놀랄 정도였어요. 그리고 이렇게 범인에게 계속 뒤진다면 경찰이 딜런 교수에게 협조를 요청할 이유도 없습니다. 실제로 딜런 교수가 사건 해결을 위해 한 일은? 거의 없어요! 피해자들 모두 악인들로 킹스맨에게 재판받았다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진범이 엘리야 티미츠라는걸 눈치챈 뒤 그라임스 기자에게 달려간 정도만 경찰보다 빠른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건 무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엘리야 티미츠는 그라임스 기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킹스맨 판사가 범인이 아니라는게 밝혀진다면 그의 자동차, 옷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엘리야 티미츠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는건 시간 문제였고요.
마지막에 시장을 구하는 활약? 범인이 죽기전 '나를 야구장으로 데려다 주오'를 부르고 손목에 문신이 새겨졌다는 정도로 무언가 행동을 벌인다는건 억지 아닐까요? 그야말로 작위적인 전개의 끝판왕입니다. 딜런 교수의 유일한 활약은 총상을 입은 엘리자베스를 구한게 전부에요.

범인 엘리야 티미츠의 설정과 그의 범행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경찰에 특별한 연줄도 없고, 대단한 기술을 배우지도 않은 흑인 청년이 어떻게 이런 복잡하고 거대한 살인 계획을 경찰보다 앞서 실행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무합니다. 그냥 어릴 때 부터 다이너마이트와 피를 가까이하면서 살았는게 고작입니다. 전직 경찰이었다, 전직 무슨 요원이었다는 등으로 어떻게든 설득력을 갖추고자 하는 시도도 없습니다. 등장도 급작스러워서 반전의 묘미도 없고요.

한마디로 독서에 들인 시간이 아까운 수준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리뷰를 쓰기도 아깝지만 다른 피해자 (?) 분들을 막기 위해 몇 자 적습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제임스 페터슨의 소설은 손에 대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2006/01/14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아리스가와 아리스 : 별점 2점

ロシア紅茶の謎 (講談社文庫) (文庫) - 4점
아리스가와 아리스/講談社

범죄 심리학 조교수이자, 실제 사건에서의 활약으로 "임상 범죄 학자"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천재 히무라 히데오와 추리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컴비 시리즈 단편집. 아리스가와 아리스(저자)의 첫번째 단편집이기도 합니다. 그의 "국명 시리즈"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책에는 전부 6개의 단편과 작가 해설 등이 담겨있습니다.
일본 여행 가서 구입한 책으로 장편이 아니라 단편집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중간에 번역 한번 해 볼까 하고 삽질하느라 걸린 시간도 있어서 이래저래 거진 한달이 걸렸네요.... 2006년 들어서는 처음으로 완독한 책인 것 같습니다. (만화책은 수도없이 읽었지만서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 이하였습니다.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고도 불리우는 신본격 작가라서 굉장히 기대했는데 말이지요. 이유는 작품 대부분이 "트릭을 위한" 이야기들이라 트릭에 매몰된 듯한 느낌인 탓입니다. 트릭도 만들기 쉬운 암호 미스테리가 많아서 별로였고요. 표제작이며 작가 스스로 마음에 든다는, 이른바 국명 시리즈인 "러시아 홍차의 비밀"이 제일 어처구니 없고 수준이하였다는 점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또한 탐정역의 히무라 히데오의 캐릭터가 너무 전형적이라는 것도 감점 요인입니다.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기에는 단편이라는 특성상 쉽지 않은 부분이 많았겠지만, 잘난척 하는 천재라는 고전적 스테레오 타입 그대로의 인물이라 새로운 면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도 신본격답게 문제-해결이 명확하고 이야기 하나하나가 깔끔하게 매듭지어지는 것은 좋았습니다. 용의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고 단서에 대한 범위를 좁혀줌으로써 이해를 돕는 추리만화 타입의 전개도 쉽게 읽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요.

결론내리자면 그냥저냥한 평작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 자체는 제법 괜찮은게 있고, 뛰어난 작품도 분명있기는 합니다. 위에 말한 단점은 장편을 보면 많이 상쇄될 것도 같고요. 다음번에는 장편에 한번 도전해 봐야 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한 3개월은 걸리겠지만....

개인적인 베스트는 "동물원의 암호"와 "팔각형의 함정" 입니다.

작품별 상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동물원의 암호 :
동물원 원숭이 우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사육사. 그는 죽기 직전 암호로 된 쪽지를 남긴다. 그 암호는 퍼즐광이었던 피해자가 공들여 만든 것으로 암호를 해독하면 범인을 알 수 있으리라는 판단 하에 주인공 컴비는 동물 이름으로 구성된 암호 해독에 도전하는데...
"동물 이름으로 구성된 암호" 자체가 무척 괜찮습니다. 기발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그런 암호거든요. 일본 거주자가 아니면 풀기 힘들다는 약점은 있지만 말이죠. 내용 전개도 명쾌하고 논리적이라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 중 하나였습니다.

2. 지붕 밑의 산보자 :
하숙집 주인이 살해되는데 경찰 조사로 발견한 그의 일기에서 그가 하숙집 지붕을 밤에 돌아다니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었다는 사실과 하숙인들 중 인근 연쇄 강간마로 짐작되는 인물이 있다는 것도 밝혀진다. 그런데 하숙인들을 암호화된 이니셜로 표기하고 있어서 정체를 모르는 상태. 연쇄 강간마이자 하숙집 주인 살인 사건의 범인인 그 하숙인을 찾기 위해 두 컴비가 나선다.
역시 암호 트릭입니다. 이 작품은 암호 자체는 무척 간단한 편이라 정교한 맛은 좀 없더군요. 그래도 에도가와 란포의 동명 단편을 응용한 센스와 마지막의 살짝 등장하는 반전은 무척 좋았다 생각됩니다.

3. 붉은 도처 (稻妻) :
한 여인이 투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무라 히데오의 제자인 학생이 목격자로 나서 그 여자가 방에서 밀려 떨어졌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 여자의 방은 완벽한 밀실 상태.
밀실 트릭물입니다. 그러나 트릭의 정교함은 떨어지는 편이고 작품에 흥미를 느낄만한 요소가 너무 적어서 이상할 정도였어요.

4, 룬의 가르침 :
외국인 기자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요청받아 찾아간 히무라 히데오. 그는 피해자가 손에 쥐고 죽은 "룬 문자판" 4개의 수수께끼를 푸는데 주력한다.
이 책의 단편들 중에서 전개가 가장 이색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히무라 히데오의 방에 놀러간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책상위에 놓여진 룬 문자판을 보게 되자 히무라 히데오가 그것에 관련된 사건을 들려주는 셜록 홈즈물 스타일의 전개로 이루어지거든요. 트릭은 역시나 일본 독자들만이 풀 수 있는 암호인데 평이하기도 하지만 좀 억지성이 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룬 문자"라는 요소가 왜 들어갔나 싶게 쌩뚱맞아서 의아했는데 책 뒤의 작가 후기를 보니 "고대문자"에 관련된 트릭 추리물을 써 달라는 의뢰의 결과물이더군요. 뭐 그냥저냥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5. 러시아 홍차의 비밀 :
인기 작사가 독살 살인 사건에 참여한 컴비. 아무도 그의 찻잔에 독을 주입할 기회가 없었던 상황에서 사건의 해결에 도전한다.
표제작이자 국명 시리즈라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저는 이 책에서 이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트릭도 억지에다가 범인이 왜 그런 트릭을 썼는지에 대한 타당성 자체가 불분명 합니다. "아무도 죽일 수 없는 상황" 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든요. 어차피 제일 의심 받을 수 밖에 없는 인물이었는데.... 본격물의 정도를 벗어나 너무 트릭에만 집착한 씁쓸한 결과물로 보입니다.

6. 팔각형의 함정 :
아리스가와 아리스 원안의 추리극을 상연하는 연극 예행 연습에 초대된 두 컴비는 실제로 살인 사건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런게 실제로 있군요! 만화에서만 보던 "추리극" 공연과 관객이 함께 하는 범인 맞추기 이벤트라는 연극을 위해 아리스가와 아리스(작가)가 실제로 원안을 제공했던 연극 각본의 소설화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도 본격물에 걸맞는 깔끔하고 완벽한 구성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작품이었습니다. 트릭도 아주 약간을 제외한다면 수긍할 만 했고 범인이 왜 그렇게 트릭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합당하며 범인을 알게 되는 단서 역시 이치에 맞거든요. 일종의 문제편 격인 서술 뒤에 "독자에게의 도전장" 이 있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으로 본다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