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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6

하늘을 나는 말 - 기타무라 가오루 / 정경진 : 별점 3점

하늘을 나는 말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기타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동서 미스터리 100"의 일본편 17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걸작이지요. 오래 전 부터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작품입니다.
사실 국내 소개가 이렇게나 늦어진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에요. 앞서 말씀드린 "동서 미스터리 100"선 상위 20개 작품 중 국내 미출간 작품은 이 작품과 아유카와 데쓰야의 "검은 트렁크" 두 작품이 유이할 정도거든요. 이 중 "검은 트렁크"는 1950년대 출간된 묵직한 고전이지만, 이 작품은 80년대 발표된 나름 신세대 미스터리 작품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일상계 미스터리는 국내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이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등으로 제법 인기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고요. 온갖 수준 이하의 작품들까지 번역되는 일상계 추리물의 홍수 속에 이 유명 작품이 이제서야 소개된 것 자체가 미스터리같습니다. 무슨 어른의 사정이 있는지 조금은 궁금하네요.

여튼, 그만큼 기대가 컸는데 다행히 재미있었습니다. 작가가 여성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섬세한 묘사들이 가득하여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며, 추리적으로도 정통에 가까운 이야기들인 덕분입니다. 기묘한 이야기가 선보이고, 그것을 엔시씨가 주어진 단서만으로 풀어낸다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인데, 대체로 설득력있고 합리적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화자 "나"와 라쿠고가 탐정 엔시 씨 캐릭터도 좋아요.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물론, 주인공의 "국문학도" 로서의 전문가적인 지식과 엔시 씨의 "예인"으로서의 특수 능력 - 놀라운 기억력과 라쿠고 연기를 통해 단련한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 - 이 이야기와 잘 결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단점이라면 분량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이 좀 부족하다는 것 정도? 이것은 엔시씨와 나, 그리고 그 외 등장 인물들과 본 편 추리와는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은 탓입니다. 덕분에 캐릭터가 생동감있게 다가오고, 전개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더해진다는 장점은 있습니다만, 추리 부분의 비중이 작아진건 개인적으로 아쉬웠어요. 국내 소개되었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 - "시미가의 붕괴" - 등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었기에 의외이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이 작품이 발표된 해가 버블의 정점이었던 1989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여유있고 풍요로왔던 시대에 어울리는 느긋한 분위기가 가득 느껴지니까요.

그래도 숨 넘어갈 것 처럼 달리는 와중에도, 쉬어갈 필요는 있는 법이지요. 단점은 사소할 뿐, 시대를 뛰어넘는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일상계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오리베의 망령" 

"나"는 우연히 대학교 은사 가모 교수의 부탁으로 라쿠고가 엔시씨 인터뷰에 동행했다. 인터뷰 후 회식 자리에서 가모 교수는 어린 시절 꾸었던 기묘한 꿈 이야기를 했는데, 엔시 씨는 이야기만 듣고 진상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증거 보완을 위해 한 달의 시간을 요청하는데...

화자인 "나"와 탐정역인 라쿠고가 엔시씨가 등장하는 기념할만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섬세하면서도 느긋하고, 조금은 할머니 취향인 "나"와,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가 제대로 소개됩니다. 전통 일본적 소재인 라쿠고와 오리베 자기, 그리고 교수님 꿈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전개도 괜찮고요.

추리적으로도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교수님 꿈의 이유가 된 숙부님이 평소 책을 함부로 대했다는게 핵심이거든요. 물론 교수님이 어렸을 때의 일본 사회 분위기, 당시 경매 제도 디테일 등은 국내 독자로서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만, 일본 한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시작으로는 적절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설탕 합전" 

"나"는 어느 날 엔시 씨를 우연히 만나 함께 홍차를 마시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앞 테이블에 앉은 3인조의 기묘한 행동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사소한 것에서 진상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의 능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핵심 추리는 "왜 세 명의 마녀(?)가 설탕 합전을 벌이는가?" 이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 신경쓰는 사람들이 세 명의 여자 아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녀들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라는걸 예언하는 등의 소소한 추리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설탕을 홍차에 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설탕을 꺼내려는 목적이었다"에서 시작되는 핵심 추리의 흐름 및 진상도 충분히 합리적이고요. 변장과 연기(?)로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엔시 씨의 활약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 무언가 이상한 것(소금)을 넣는 것을, 원래 퍼낸 설탕을 다시 넣는 것으로 착각한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다른 용기에 담아온걸 넣었을 텐데, 이걸 착각한다는건 무리니까요. 앙심을 품은 알바생이 너무 자신을 드러내놓고 가게에 출입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시대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아주 좋은 일상계 소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두 껍데기 안의 새" 

"나"는 친구 다카오카 쇼코와 함께 도호쿠 여행을 떠났다. 엔시 씨의 공연도 보고, 온갖 절경을 감상하며 여행을 즐기던 중, 현지에서 만난 친구 에미의 차 시트가 모두 벗겨진 채로 발견되는데...

분량은 약 90페이지에 가까운데, 80여 페이지에 걸쳐 도호쿠 여행담이 소개됩니다. 아무리 일상계 작품이라지만 이래서 되나 싶을 정도로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아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나"와 친구들 사이의 대화 역시 지나치고요. 

작품 속 추리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동일 차종의 차 커버를 벗겨 위장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단지 시트 커버만 벗긴다고 차가 비슷해질까요? 그 안의 모든 디테일, 소품이 다를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이렇게 위장하려고 했던 대상이 어린 여자아이라는걸 쉽게 떠올리는건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물론 배경 묘사는 아주 근사합니다. 일본 인형 코케시의 고장이라고도 하는 "자오산"의 풍광이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나"가 문학에 대해 정말 조예가 깊다는게 잘 드러나는 점도 좋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있기에 감점합니다.

"빨간 모자"

"나"는 동네 치과에서 우연히 함께 대기실에 있던 "점 여사"로부터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알고 있는 점 여사의 동창 모리나가 유미코 씨의 집 앞에, 매주 일요일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였다.

전편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편의 결과(아이를 버린 어머니)를 궁금해 한 엔시 씨가 "나"를 공연에 초대한 후 이야기를 듣는다는 설정과 본편 이야기가 이혼에서 비롯되어 있다는 점에서요.

추리적으로는 무난합니다. "빨간 모자" 이야기는 사실 모리나가 유미코의 창작으로, 점 여사가 찾아온 날 화장실 옆에서 신발장을 정리한게 핵심 단서라는 것은 괜찮았어요. 충분히 일상계스러우면서도,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준 셈이니까요. 그날 목격한 "빨간 모자"는 유미코의 딸일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점 여사의 남편과 모리나가 유미코가 불륜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간 관계, 인간 심리를 그려낸 묘사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점 여사의 방자한 태도, 마지막에서 "나"가 사고가 날 뻔한 상황 등에 대한 묘사는 솔직히 불필요했고요. 본 편 추리하고는 동떨어져 있는 모리나가 유미코의 "빨간 모자" 동화 묘사도 지나치게 깁니다. 이러한 점은 한 편당 8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냥저냥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늘을 나는 말"

"나"는 집 근처 상점 "모퉁이 집"의 젊은 사장 구니오 씨가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후 "나"는 부탁을 받아 유치원 크리스마스 공연 비디오 촬영을 나섰는데, 그 곳에서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구니오 씨를 다시 만났다. 그날 그는 유치원에 가게에 있던 목마를 선물로 기증했다. 그런데 이웃집 며느리로부터, 유치원 마당에 놓여져 있던 목마가 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표제작으로 일상계 단편집 마무리에 어울리는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추리적으로 수수께끼 자체는 평이하지만, 다무라씨(구니오씨의 연인)가 날짜를 착각했다는게 잘 설명되고 있는 만큼 즐길거리는 충분합니다. 일상계에 딱 어울리는 정도의 수수께끼였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읽었던 크리스마스용 소품들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나"의 생일이 크리스마스이고, 소재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며, 이야기의 핵심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이만큼 좋은 작품이 또 있을까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더해 별점은 3.5점입니다.

2016/10/03

변두리 화과자점 구리마루당 2 - 니토리 고이치 / 이소담 : 별점 2점

변두리 화과자점 구리마루당 2 - 4점 니토리 고이치 지음, 이소담 옮김/은행나무

전편을 읽고 호감이 생긴 덕에 연이어 읽게 된 후속권입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1권에 미치지 못합니다. 추리적으로도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런 류의 요리 전문가 이야기에서 가장 최악인 "맛있는 음식 먹고 한 건 해결!"이라는 내용이 수록된 세 편 중 무려 두 편 - "가미나리오꼬시", "사쿠라모찌" - 에서 펼쳐지는 탓입니다. 단절된 부자 관계가 맛있는 오꼬시 과자를 먹은 후 회복되고, 대입 실패 충격으로 거식증에 걸린 아가씨가 모찌떡을 먹고 식욕을 회복한다는데, 인생사가 이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사실은 그렇지 않지요. 1권에서도 마지막 이야기가 이러해서 조금 불안했는데 역시나,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가 않는 걸까요.

물론 즐길거리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화과자 장인이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여 소소한 드라마를 해결해 나간다는 전개 자체는 나쁘지 않고, 이에 따라 각 이야기별로 등장하는 화과자들은 충분히 볼거리이긴 하거든요. 캐릭터 관계가 1권에 비하면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것도 시리즈 독자로서 반가운 부분이었습니다. 구리타와 아오이의 관계, 아오이의 성이 호죠라는 것, 그녀가 대단한 집안의 딸이라는 암시 등이 그러합니다(그런데 이 장면은 "맛의 달인" 1권에서 신선한 재료를 위해 목장으로 유우코를 데려간 지로에게 목장 사람이 '도련님'이라고 부르던 장면과 똑같습니다... 이 정도면 일종의 클리셰라고 해도 무방할 듯?).

그 외 변두리 오래된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인간관계, 아사쿠사 곳곳을 발로 누비며 쓴 듯한 디테일한 배경 묘사도 여전해서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훨씬 많기에, 그리고 기본적인 재미가 떨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한없이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4권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1권은 그럭저럭, 2권은 실망이라 3권을 읽어야 할지 망설여지는군요. 점수 하락 추세로 보면 그만 읽어야 할 듯 싶은데, 일단 인터넷 리뷰 등 추이를 좀 지켜보겠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이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가미나리오꼬시"

오코노기라는 남자가 오꼬시 과자를 찾았다. 이유는 아내와 사별한 후 멀어진 아들 가즈야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구리타와 아오이는 이런저런 추리로 즐겨 먹었음직한 가미나리오꼬시 과자 가게를 추천해 주었고, 심지어 직접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들은 강한 거부감만 보이는데...

등장하는 화과자는 아사쿠사의 명물이라는 가미나리오꼬시입니다. 구리타가 직접 만드는 묘사를 통해 재료와 제법까지 자세하게 소개되는데, 묘사와 설명 모두 맛깔집니다. 

"왜 가즈야가 가미나리오꼬시를 싫어하는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괜찮습니다. 답은 "오꼬시"라는 화과자가 사실은 두 종류 - 도쿄의 가미나리오꼬시와 오사카의 아와오꼬시 - 라는 것입니다. 화과자에 대한 전문 지식과 수수께끼가 잘 결합되어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이에 대해서 구리마루당을 습격한 가즈야가 오사카 사투리를 쓴다는 묘사로 비교적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좋았고요(물론 한국인 독자에게는 별로 공정치 않았습니다만...).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 엇나가기 시작한 아들과의 극심한 갈등이 과자 하나로 해결된다는 전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맛의 달인" 에피소드 중 코이즈미 국장이 아들에게 '급제죽'이라는 요리를 해 주고 관계를 회복한다는 이야기와 굉장히 흡사한데, 1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중편 소설이 30여 페이지도 안 되는 만화 단편과 흡사하다는 것부터가 문제죠. 참고로 구리마루당에서 날뛰는 가즈야가 구리타의 눈빛에 제압당하는 묘사도 만화적이라 아주 별로였어요. 덧붙여진 부연 설명도 완전한 사족일 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오꼬시가 사실은 두 종류였다는 소재 자체는 좋았는데, 억지스러운 부자 화해보다 다른 이야기로 쓰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만주"

구리타와 아오이는 아사쿠사 연예홀로 향했다. 단골 라쿠고가 슌코테이 후쿠미미가 주문한 만주를 배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공연을 감상하던 커플은 후쿠미미의 스승 다이쇼의 호출로 후쿠미미가 급작스럽게 잠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면 유도제가 든 만주를 먹은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에서 세 명의 용의자가 떠오르는데...

나름대로 진지한 범죄가 등장하는 추리물입니다. 엄연히 독(?)을 먹인 것이라 일상계로 보기는 무리니까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내용이 라쿠고 "만주가 무서워"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만주를 실컷 먹고 "지금은 녹차가 무서워"라고 이야기했다는 라쿠고인데, 이 라쿠고를 공연하려 한 후쿠미미가 만주는 먹었지만 음료수를 먹은 흔적이 없다는 것에 착안한다는 식으로 본편과 이어지는 전개가 꽤 절묘합니다.

하지만 만주와 어울리는 음료수는 우유라고 단정짓는 추리는 비약이 심했습니다. 범인을 끌어내기 위해 쓰레기장으로 향한다는 전개도 어색해고요. 쓰레기장에 우유팩이 한 개만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우유팩이 발견되더라도 범인이 빠져나갈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만주가 도구에 불과할 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단팥빵의 기원이 만주라던가 하는 식으로 화과자에 대한 정보가 펼쳐지기는 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조연 수준도 안 되는 단순한 먹거리에 불과합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인 화과자와 이야기의 조화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았어요.

후쿠미미의 강철 체력 때문에 힘들어한 제자 고미미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동기 정도만 참신할 뿐, 별로 건질만한 내용은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사쿠라모찌"

오랜 라이벌 아사바가 대입 실패로 거식증에 걸린 여동생 가에데를 위해 사쿠라모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쿠라모찌의 핵심인 벚나무 잎을 구할 수 없는 계절이지만, 구리타는 장인의 자존심을 걸고 분투하는데...

추리물도 아니고, 음식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된다는 단점만 가득한 이야기입니다. 사쿠라모찌를 만드는 과정이라도 재미있게 풀었어야 했는데 그 역시 영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구리타의 행동은 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장인의 자존심을 걸고 벚꽃잎을 얻어오지 않겠다!라고 결심해서 모찌 제작이 벽에 부딪히는 과정까지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벚꽃잎(화과자의 70%)은 이즈의 한 공장에서 만들어 납품하니까 공장에 가서 벚꽃잎을 받아오자!라는 마무리가 참으로 황당했던 탓입니다. 이럴 거라면 공장에 가서 받아오나 동네 가게에 가서 얻어오나 결국 같은 거잖아요?

앞서 말씀드렸듯 사쿠라모찌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결말도 최악입니다. 거식증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서 나을 수 있는 병인지도 잘 모르겠고요. 심리적 문제가 크다니 그럴 수 있다 쳐도 몸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작품 속 등장하는 말 - 곤란할 때,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다정한 사람이 옆에 있어준다 - 는 짠하게 와 닿으며, 고토토이라는 지명, 미메구리 신사에 대한 설명 등 아사쿠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여전히 좋습니다. 구리마루당을 살리기 위한 신제품 홍백 사쿠라모찌 설정도 나쁘지는 않고요.

허나 전개가 이래서야 도저히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05/16

밤의 매미 - 기타무라 가오루 / 정경진 : 별점 2.5점

밤의 매미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일상계 추리의 시조인 '엔시 씨와 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하늘을 나는 말"은 이미 3년 전에 읽었는데, 후속 시리즈를 읽는게 많이 늦어졌네요. 

이번 권에는 세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일상계 추리물임에는 분명한데, 최근의 일상계와는 다른 점들이 눈에 많이 뜨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분량입니다. 중편 분량의 이야기들은 다른 일상계 시리즈에서는 보기 힘드니까요.
전작과의 차이도 보이는데, '나'의 친구들, 가족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라는게 대표적입니다. 전편만 보면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문학 소녀 느낌인데, 이번 편을 보면 단짝 친구도 있는 등 나름 정상적인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듯 하여 반갑더라고요. 또 꼼꼼하지 못하고 덤벙대는 성격이라는게 의외였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엔시 씨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친구와 가족 비중이 높으니 당연하겠지요. 전작에서는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 해결하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결정적 순간에 등장해서 사건을 해결해 주는 조력자 역할에 머물 뿐입니다. 전작에서는 홈스였다면, 이번에는 '구석의 노인' 인 셈이죠.

그래도 장점인 순문학적인 흥취를 돋우는 문체와 분위기는 여전합니다. '으스름달밤', '밤의 매미'라는 각 이야기 제목이 대표적입니다.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귀족의 신분이지만, 현실은 헤이안 시대의 그것이 아니라 에도 시대의 벼슬아치쯤 된다. 생활수준이 높지 않다는 뜻이다."와 같은, '나'는 확실히 일본 문화 전공자구나! 싶은 표현도 즐거웠고요. 이런 묘사들이 이야기마다 빼곡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은근하고 멋진, 순문학적인 분위기가 본 편 사건과는 분리되어 있다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분위기에 치중하지 않았다면 훨씬 짧게 요약될 수도 있었을 거에요. 그만큼 추리적인 이야기와는 명백히 분리되어 있는 묘사들이었어요.

또 추리적으로 내세울만한 부분 역시 많지 않습니다. '일상계의 시조' 시리즈의 이름이 무색할 정도에요. 이유는 사건들 대부분의 설득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세 편의 수록작에서 동기가 명확해 보이는건 첫 번째 "으스름달밤" 에서의 사건 뿐이며,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은 동기도 모르겠고 상황도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일상 속 수수께끼를 다룬다는 명제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비일상적인 상황들이라는 점도 감점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묘사와 분위기도 좋고, 읽는 것 자체는 즐겁지만 추리적으로는 그리 높은 수준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다는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으스름달밤" 

나'는 친구 쇼코가 아르바이트하는 서점에서 국문학 코너의 책 일부가 뒤집혀져 꽂혀 있는걸 발견했다. 엔시 씨와 도예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나'는,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엔시 씨에게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앞서 요약했던 장,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작품입니다. 장점인 묘사는 유려하고, 분위기도 좋습니다. 작품에서 핵심적인 분위기를 잡아가는 건, 친구 쇼코의 '창작 시음회' 발표된 동명의 시구인데, 시 자체도 멋있지만 를 '밑바닥을 건넌다'고 표현하여 그 위 에 펼쳐진 무한한 밤을 의식하게끔 했다는 해석은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시구, 분위기는 쇼코가 아르바이트하는 서점에서 책이 뒤집혀져 꽂혀있는 기묘한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분위기만 멋드러지게 만들 뿐이에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물론 쇼코가 별자리를 말하기 싫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생일을 알아내는 전형적인 일상계스러운 추리는 좋아요. 하지만 책이 뒤집혀 꽂혀 있었다는 이야기 속 핵심 수수께끼에 대한 엔시씨의 추리는 억지입니다. 범인의 목적이 '환불'이었다는건데, 환불 목적이라면 앞서의 사건, 즉 책을 뒤집어 꽂는 사건을 범인이 일으킬 이유는 없습니다. 딱 한 번만 행할 수 있는 범죄를 위해, 그 전에 무려 3번이나 서점을 방문해서 책을 뒤집어 놓을리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런 사전 작업이 책 환불의 근거가 되는 책의 슬립이 잘못 꽂혀진걸 뒷받침 한다는데, 보통은 그 책을 구입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을까요?
또 책을 뒤집다가 발각될 경우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부족하며, '나'가 아니었다면 이 범행 자체가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헛수고가 될 수도 있었던 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아울러 라쿠고에서 본 편에 등장하는 주요한 단어에 대해 미리 설명해주는 '서설' 이라는 용어를 통해 이 범죄를 설명하는 묘사 역시, 그리 와 닿지 않더군요. 라쿠고 및 라쿠고가 엔시 씨와의 연결 고리를 만들기 위한 사족에 불과했습니다.

덧붙이자면, '나'가 호감을 가진 '안도 선배'의 본명이 사카이리였다는 이야기는 재미있었고, '나'가 쇼코에서 진심으로 분노한다는 심리 묘사는 인상적이었습니다만, 이 역시 추리적인 요소는 없습니다. 안코 + 도넛의 약자로 '안도'라는 별명이 붙었다는건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6월의 신부"

가루이자와로 향하여 시간을 보내는 부분에 대한 공들인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풋풋한 대학생들의 여행을 그리고 있는데 아련하고 좋더군요. 약간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또 곁다리 사건이나 이야기없이 체스의 퀸이 없어진 사건만을 다루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결국 카루이자와 별장 여행을 함께 했던 다섯 명 중 한 명이 장난을 친 건 분명하니까요. '나'가 범인이 아니면 후보는 네 명으로 줄어듭니다. 그렇다면, 네 명 중 거의 그 날 처음 만난 듯한 귀공녀 미네, 가사이 선배와 요시무라 선배는 범인이라 하더라도 쉽게 알아챌 수가 없을테니, 에미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지요.
또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건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에미가 요시무라 선배가 체스를 두지 않고 시간을 보낸 걸 숨기기 위함이었다는 동기는 그럴듯해요. 하지만 이런 장난까지 칠 필요가 있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딘가 다른 곳에 떨어졌다던가 하는 식으로 대충 얼버무리는게 상식적이죠. 실제로 트럼프 카드나 체스 말이 없어지는건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설령 이를 얼버무리기 힘들었다 하더라도, 냉장고 속 달걀과 바꿔치기하고, 달걀은 휴대용 거울과 바꿔치는 등의 수고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에미와 요시무라 선배가 서로의 교제를 숨겨야 하는 상황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저녁에 술을 먹으면서 미네와 가사이 선배는 어느정도 선(?)을 넘었다는 묘사가 등장하는 걸로 봐서는, 딱히 남녀 교제가 터부시되는 상황도 아닌데 말이지요. 여행을 떠날 때 귀공녀 미네와 가사이 선배, 에미와 요시무라 선배로 커플이 맞추어진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나'가 범인이 누군지 알았다!는 일종의 추리쇼 역시, 설득력이 약합니다. 에미의 자백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밝혀내는 단서 역시 일본어 '리스 (다람쥐)'와 버금간다는 한자 '아'를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이라 일본인이 아니면 어차피 알아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러한 본 편 추리보다는 차라리 '나'의 중학교 시절, 교무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더 인상적입니다. 칠석은 7월 7일이니 여름같지만, 7,8,9월이 가을이라 칠석은 가을의 계어 라는 말입니다. 이유는 음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름은 4,5,6월이고요. 음력은 확실히 과학적인 단위임이 분명합니다.

"밤의 매미"

언니는 교제하던 남자 미키에게 충동적으로 가부키 표를 보냅니다. 그러나 공연에는 미키가 마음에 두던 신입사원 아가씨가 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언니는 미키와 확실하게 연을 끊지요. 문제는 사와이라는 신입사원은 이 표를 미키가 보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언니는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비열한 악녀가 되어 버린 상황인데, '나'가 엔시 씨의 도움으로 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이야기지요.

진상은, 언니 동료 오누키 씨가 저지른 일이었다는 겁니다. 언니는 회사 우편물을 다량으로 보내면서 미키에게 이 편지를 함께 보냈는데, 오누키씨가 미키와는 헤어지는게 좋겠다 생각하여 집배원에게 통사정하여 우편물을 모두 돌려받습니다. 그리고 미키 씨 이름으로 사와이 씨에게 표를 보낸거죠.

그러나 이유, 동기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합니다. 오누키 씨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다른걸 다 떠나서, 우편물을 거짓말을 해 가며 집배원에게서 받아내는건 범죄입니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에요. 누군가의 연애를 훼방놓고 싶다 하더라도 말이죠.
게다가 빼돌렸다 하더라도 그걸 가짜 이름으로 다시 보내는건 더 지나친, 정말이지 악행인데 오누키 씨가 미키 씨 이름으로 사와이 씨에게 표를 보낸 이유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습니다. 거 봐라, 둘이 사귀고 있지 않냐!를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합니다. 비싼 표를 누가 보내 준다면,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공연에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약간의 호감이 있다면 더더욱 그러하고요. 단지 공연에 왔다는게 무슨 증거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도야 어쨌건, 결과적으로 언니가 최악의 여자가 된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건 정말 바보입니다.

아울러 이 이야기를 라쿠고 "미끌미끌"와 연결하려는 시도도 그리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미끌미끌"에서 광대 가즈야가 사랑에 실패하는건 본인의 실수 때문이니까요. 그 누구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애매하기에, 이야기를 엮는 것 자체가 억지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나마 오누키 씨가 이 상황을 모두 사와이 씨에게 말해서, 사와이 씨는 모든걸 알고 있었지만 가련한 피해자 역할을 수행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만, 문제는 사와이 씨에게 고백했는데 언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 역시 모르겠어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언니와의 관계가 아직은 깔끔하게 끝나지 않은 느낌인데, 후속권에서 무슨 이야기가 진행될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

2022/11/13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기타쿠니 고지 / 문승준 : 별점 2점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 4점
기타쿠니 고지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변호사가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작품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도시타는 가난한 동네 변호사로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의뢰 해결이 주 업무라 법정 다툼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정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그보다는 일본 추리 소설 시장에서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마을에서 특정 분야 전문가가 소시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일상계 추리 단편집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다른 전문가 - 서점 점원헌책방 주인, 요리사, 화과자 장인, 시계 수리 전문가, 사진가, 바리스타라쿠고가복화술사, 호텔리어, 심지어 스님까지 - 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은 각자의 직종과 관련된 사건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반해, 이 작품은 그냥 동네 사람들의 다양한 의뢰를 받기 위해서 변호사라는 직업을 설정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법률 전문가스러운 느낌이 별로 들지 않거든요. 도시타는 화자이자 커뮤니케이션 담당일 뿐, 탐정 역할은 도시타의 동생 리쓰가 담당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리쓰 캐릭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일단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떨어지고,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도시타' 에 관련된 말을 하는 루틴이 있고, 현재 상황과 분위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해야 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닙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를 떠오르게 만드네요. 결은 좀 달리하지만 엄청나게 머리가 좋다는 설정마저도 똑같고요. 그러나 우영우만큼 호감가게 묘사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문가 일상계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비일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독특함에 목숨을 건 나머지 이상한 만화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만 거지요.
또 추리한 결과를 형에게 바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설명이 없는데, 여기에 무뚝뚝하고 무례한 행동에 더해져 굉장히 비호감이었어요. 다른 캐릭터들도 글래머 소꼽친구 간호사 사키, 여자를 밝히는 스님 마루메, 전 야쿠자 출신이자 현 카페 주인인 이모부 등 비현실적이거나, 호감가지 않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고요.

그래도 추리적으로 괜찮았다면 나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수록된 네 편의 단편들 모두 그렇게 좋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정보 제공이 공정하지 못하거나, 이야기 전개가 리쓰 캐릭터처럼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설정이 많았던 탓입니다. 입 안에 넣은 치과 치료용 충전물이 라디오처럼 동작한다는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따뜻한 인간 드라마 중심의 전형적인 일상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전문가 일상계로 보기에는 전문성, 일상성 모두 떨어지며 추리적으로도 그닥이라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 가지 꼽자면 일본에서도 변호사가 먹고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정도?
딱히 영상화 되었다는 소식도 없고, 후속권도 출간되지 않았으며 국내에서도 금새 절판된걸로 보면 다른 분들의 평가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되네요.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참고로 '고양이'는 내용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시피 한 수준이므로 집사분들께서는 낚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1화 <<못된 며느리와 낙서 소동>>
고토에 아줌마는 도시타에게 며느리 험담 끝에 며느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고토에 아줌마가 돌아간 후, 리쓰는 그녀의 섬망성 기억 상실을 눈치챘다. 형제는 사태 수습을 위해 며느리 에가와 씨를 만나러 갔다가 , 마을에서 벌어지고 있던 낙서 소동에 휘말리는데...

진상은 알고보니 고토에 할머니의 병을 낫기 위해 며느리 에가와가 마당에 자생하는 디기탈리스 잎을 떼어 말린 뒤 몰래 먹였다는 겁니다. 고토에 할머니는 디기탈리스 잎의 부작용으로 치매와 비슷한 용태를 보인거지요.
그런데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디기탈리스가 심장병에 효과가 있지만 독성 또한 강하다는건 정보 검색으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자동 완성으로 '디기탈리스 중독'이 함께 뜰 정도로요. 이걸 약재로만 알고 먹였다? 설득력이 약합니다. 자기 험담만 하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살의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이를 효심으로 포장하는 마무리는 억지스러웠습니다. 도시타가 제대로 된 변호사였다면 며느리를 경찰에 신고하는게 맞았어요.
추리를 하기 위한 정보 제공도 빈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고요.

차라리 낙서 소동 쪽이 추리적으로는 조금 더 낫습니다. 다른 낙서들과는 그림이 달랐고, 키가 작은 사람이 그렸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꽤 그럴싸했거든요.
하지만 진상은 앞서 사건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더군요. 초등학교 3학년생이 새가 부딛힐까봐 '버드 스트라이크'를 리카 씨네 가게 쇼윈도에 그렸다는게 전혀 와 닿지 않았거든요. 쇼윈도가 그 가게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닐테고, 1층 건물 쇼윈도에 새가 날다가 부딛힐일이 그렇게 많을리 없으잖아요. 애초에 범인 신지의 집 창문에 새가 부딛혀 죽은 것부터가 작위적이지요. 이를 리쓰가 맨션의 깨진 창문만 보고 바로 알아챘다는 추리도 비현실적이고요.

아울러 전혀 다른 두 이야기를 억지로 결합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화 <<협상 상대는 요통으로 고생하는 전과자>>
도시타 형제는 연립 재건축을 앞두고, 퇴거를 거부하는 임차인을 설득하는 의뢰를 받았다. 리쓰는 찾아간 임차인 아라키 데쓰조의 집 안에서 '사취'가 나는걸 느꼈고, 여러가지 주변 정보들을 조합하여 그가 길고양이를 돌보고 있다는걸 추리해 내는데...

길고양이를 돌본다는걸 훔쳐온 쓰레기 봉투 속 내용물을 통해 추리하는 과정, 그리고 사취는 길고양이가 물어온 쥐의 시체였다는 진상까지의 전개와 과정은 깔끔했습니다. 퇴거를 불응했던 이유가 유치원에 드는 햇볕 때문이었다는 내용도 작위적이지만 나쁘지는 않았고요.

전반적으로 잔잔한 일상 드라마 느낌을 가득 전해주는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로 꼽을 만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3화 <<만화가 지망생과 사라진 유언장>>
도시타는 이모네 카페 단골인 만화가 지망생 레논 씨의 사건 을 수임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형이 레논 씨가 유언장을 숨겼다고 주장해서 법정에서 다툼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레논 씨는 도시타에게도 유언장은 없었다고 말했지만, 형이 어머니가 유언장을 남겼다는 말을 녹음해서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

수록작 중 유일하게 변호사가 활약할만했던 이야기. 핵심은 '유언장은 어디에 숨겼나?' 라서 변호사가 나설만한 부분은 없지만, 레논 씨가 왜 유언장을 숨겼는지에 대해서는 법률적 해석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레논 씨가 어머니 장례식 초야 직후, 카페를 방문한 뒤 책꽂이 위에 있는 책을 떨어 트렸다는 점에 착안하여 카페의 만화책 중 한 권 안에 유언장을 숨겼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만화책에 대해 사소해보였던 레논 씨의 질문이 중요 단서가 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하지만 유언장 내용이 유산을 형이 아니라 레논 씨에게 전부 남긴다는 거라서 유언장을 숨기고 형과 유산을 반으로 나누려 했다는 동기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바보같아도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리고 이런 동기였다면 유언장을 숨기는게 아니라 태워버리는 식으로 없애는게 당연합니다. 유언장을 어떻게든 드러내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전개를 보면 더더욱요. 이는 유언장이 없을 경우 법률적으로 레논 씨가 한 푼도 건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작가가 선택한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4화 <<한심한 피고인과 소음 트러블>>
도시타는 마약용 주사기를 수백개 구입하려다 경찰에게 상처를 입힌 에비스 씨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되었다. 어떻게든 집행유예를 받으려고 도시타는 노력했지만, 에비스 씨는 거부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리쓰가 급작스럽게 증인 요청을 하여 판결은 연기되었다.
그 사이 도시타는 소꼽친구 사키의 소개로 이웃이 내는 소음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도모코 씨를 만났다.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조사한 결과, 도시타 형제는 아무런 소음도 들을 수 없었다....


도시타가 국선 변호사로 선임되어 법정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법정에서 날선 공방이 펼쳐지는 법정 미스터리는 아닙니다. 왜 에비스 씨가 징역형을 받고 싶어하는지를 추리해낸 뒤, 진상을 파악하여 그의 갱생을 돕는다는 감동적인 (?) 인간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도모코 씨 이야기도 마찬가지에요. 소음 공해는 단순한 소재였고, 도모코 씨 남편이 정리 해고를 앞두고 회사에서 수모를 당하면서 근무하는 상황의 극복이 핵심이거든요.

드라마 모두 좋은 이야기에요.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에비스 씨 시간의 경우, 오래전 이혼한 아내가 키우던 아들이 칼에 찔린 뒤, 부모는 수혈이 안 되는 탓에 행인들로부터 피를 뽑으려고 주사기를 구입했다는 동기부터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딱히 추리를 할 부분도 없고요.
도모코 씨가 치과 진료를 받은 이후, 이빨에 채운 충전물이 우연히 방송을 수신하게 되어, 일종의 광석 라디오처럼 동작했다는 진상도 황당하기 그지없더군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극히 드물겁니다. 설령 실제 일어나더라도 입 안에서 소리가 나는걸 모른다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마지막 이야기였는데, 아쉬움이나 여운을 남기기는 커녕 더 읽어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만 굳게 만들어 주네요.

2026/06/27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8) 카레가 건너 온 추리 소설

카레는 친숙한 요리입니다. 한국군 전투식량에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요. 우리와 교류가 적었던 인도의 전통 요리가 이렇게 친숙해진 건, 영국의 인도 식민지 지배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식민지에 진출했던 영국인들이 현지에서 고용했던 요리사들과 함께 귀국하면서 여러 인도 요리가 영국에 들어왔지요. 이후 이 음식들은 영국인의 입맛에 맞게 밀가루를 넣은 스튜 형태로 변형되었고, 때마침 영국 회사 C&B에서 인도 향신료를 배합한 가정용 분말을 출시하면서 널리 퍼졌습니다. 

고기와 채소를 썰어 넣은 걸쭉한 스튜처럼 조리하되, 시판 향신료 분말로 이국적인 맛과 향을 더한 음식. 영국인들은 이를 인도 타밀어로 ‘소스’라는 뜻의 ‘카리(Kari)’에서 따와 ‘커리’라고 불렀습니다. 정작 인도에는 없는, 영국에서 탄생한 인도 요리인 셈입니다. 참고로 커리라는 명칭은 카릴, 혹은 카리라고 불리던 매콤한 남부 인도 요리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영국인들의 삶 속에 커리가 얼마나 깊이 들어왔는지는 빅토리아 시대를 무대로 한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경주마 은점박이" 사건에서 마방 조교사 집의 저녁 식사로 양고기 카레가 등장하니까요. 범인은 마굿간 청년들에게 맛이 강한 아편 분말을 섞어 먹이기 위해 이 요리를 택했습니다. 커리의 강렬한 맛이라면 웬만한 약을 숨기기에 적절했을 테니, 범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홈즈가 사건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하지요.

"해군 조약"에서는 의뢰인 펠프스와 함께하는 식사 메뉴 중 하나로 닭고기 커리가 나옵니다. 허드슨 부인의 특기처럼 소개되는데, 이렇게 평범한 저녁 메뉴로 등장할 정도라면 당시 영국에서 커리는 우리나라의 김치찌개 정도 위치의 음식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영국에서 커리의 인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01년, 영국 외무부 장관 로빈 쿡은 인도 카레라이스의 일종인 치킨 티카 마살라를 ‘진정한 영국의 국민 음식’이라고 선언했을 정도니까요. 2015년에 발표된 피터 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도 정통 인도 커리인 치킨 코르마가 자주 먹는 요리로 소개됩니다. 코르마는 주 향신료인 마살라에 버터와 크림, 요거트 등을 넣어 부드러운 맛을 내는 커리인데 여주인공 릴리는 단골집에서 테이크아웃해 온 치킨 코르마에 견과류를 갈아 넣습니다. 심한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연인 에릭을 살해하기 위해서요. 에릭은 예상대로 치킨 코르마를 먹은 뒤 발작을 일으키고, 릴리가 치료제를 숨긴 탓에 결국 질식사합니다. 약을 섞지도 않은, 그야말로 완전범죄라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이렇게 영국인의 일상에 깊이 자리 잡은 커리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카레는 단순한 서양식 요리를 넘어, 밥과 함께 먹는 국민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일본에는 1870년대 국비유학생 야마가와 겐지로가 최초로 영국식 커리를 전래했습니다. 이때 일본식 발음으로 ‘카레’라는 이름이 붙었고요. 당시 일본에 여러 서양 요리가 전파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카레는 독보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때마침 일본 해군이 영국군을 따라 카레를 장병들에게 보급했던 덕이 컸습니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 주요했지요. 고기도 작게 썰어 넣어, 육고기가 익숙하지 않았던 당대 일본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후 다이쇼 시대에 돼지고기와 감자, 당근이 들어가는 현대적인 레시피가 정착합니다. 영국 C&B 카레 가루를 국산화한 카레 가루 제조사도 등장하면서, 우리가 잘 아는 ‘카레라이스’가 가정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3분 카레’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즉석 카레 역시 1968년 일본 오츠카식품이 레토르트 파우치에 카레를 넣어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입니다. 일본은 카레에 정말 진심이었던 모양입니다.

일본에서 카레의 인기는 밥과 함께 먹는다는 개념을 넘어, 여러 음식으로 확장된 모습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카레빵이 대표적입니다. 이름 그대로 속에 카레를 넣은 빵이지요. 도쿄 명화당이 1927년 특허 등록한 양식 빵이 원조라고 합니다. 라쿠고가 엔시 씨가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소설 "가을꽃"에서 맛있게 빵을 먹는 삼원칙 이야기가 나올 때도 언급되었지요.

카레 우동은 1909년 와세다대학 옆의 오래된 소바집 ‘산초안’에서 개발한, 메밀국수 위에 카레와 파를 얹은 카레 남만이 발전한 음식입니다. "시인장의 살인" 도입부에서 낯선 여학우가 무슨 메뉴를 주문할지를 두고 아케치와 하무라가 추리 대결을 펼칠 때, 아케치가 선택한 메뉴이기도 합니다. 일본 전통 요리와 카레가 결합된 음식이라는 점에서, 좀비물과 본격 추리물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작품과도 잘 어울립니다.

이런 나라니 당연히 카레 전문점도 많습니다. ‘아비꼬’나 ‘코코이찌방야’ 같은 일본 카레 전문점은 우리나라에서도 영업 중이지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광취"에는 ‘파라다이 로스트’라는 카레 가게가 등장합니다. 이 가게는 미나코가 중학생 때 교회 부설 고아원인 ‘성모의 정원’에서 임신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뒤 시작한 곳입니다. 그녀의 아들 분지는 정신지체아로, 성장한 뒤 가게에서 함께 일하게 됩니다.
미나코는 성모의 정원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하지만, 수녀들은 더럽다는 이유로 그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녀가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근처에서 실종된 어린아이를 찾기 위해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카레를 제공했을 때뿐이었지요.
그 뒤 죽어서도 교회 묘지에 묻히기를 거절당한 미나코를 성모의 정원 안으로 들여보내기 위해, 분지는 먼저 어린아이를 유괴합니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교회에 모인 자원봉사자들에게 미나코의 사체로 만든 카레를 제공합니다. 고기의 특성을 지울 수 있는 카레였기에 가능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처럼 영국에서 태어나 일본의 생활 음식으로 자리 잡은 카레는, 카레는 우리나라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본격적으로 소개되었고, 곧바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컸을 것입니다. 1932년 4월,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도 경성지방법원에 호송된 뒤 법원 구내 식당에서 카레라이스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김치가 아주 잘 어울린다는 장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사냥개 탐정"의 류몬 다쿠는 후쿠신즈케가 곁들여지지 않은 것은 카레라이스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에게 김치도 한 번 권해 주고 싶네요.

하지만 카레가 세계적으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슴 따뜻한 드라마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알려주듯 “날마다 먹어도 질리지 않고, 그러면서도 영양 균형이 좋은 음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도에서 출발한 향신료 요리는 영국에서 스튜가 되었고, 일본에서 밥과 만났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김치와 함께 먹는 일상식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한 끼를 든든하게 채우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점만은 같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카레가 어떠신가요? 기왕 먹을 것이라면, ‘컨트리 캡틴 치킨’을 한 번 시도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요리는 1849년 출간된 책에 실린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레시피로 널리 알려졌는데, 시기적으로 볼 때 허드슨 부인이 홈즈를 위해 만들었던 닭고기 커리도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리델 박사의 컨트리 캡틴 치킨
로버트 플라워 리델, "인도 가정과 요리책", 1849

  1. 닭고기를 잘게 썬다. 
  2. 양파는 채 썰어 버터에 갈색이 되도록 볶는다. 
  3. 닭고기에 소금과 커리 가루를 뿌리고 노릇해질 때까지 볶는다. 
  4. 스튜 냄비에 수프 1파인트와 재료를 함께 넣는다. 
  5. 국물이 반으로 줄 때까지 뭉근히 끓인 다음 밥과 함께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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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7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10)

남자의 면 - 4점
츠치야마 시게루 지음/미우(대원씨아이)

츠치야마 시게루 화백의 먹부림 만화입니다. 면과 라쿠고를 너무나 사랑하는 영업맨 이케다 멘타로가 이런저런 면 요리들을 먹으며 겪는 일화들 여섯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소바와 우동, 냉면과 오키나와 소바, 나고야면 (기시면, 녹말소스 스파게티, 타이완 라면, 된장곰탕 우동), 라면, 야키소바 등 평범한 면들이 소개되며 에피소드들도 평범한 직장인들이 마주칠 법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내용도 모든 면은 다 맛있다! 류의 만만세 해피엔딩이 대부분이고요. 대기업 츠카모토 전기 회장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기는 하지만, "맛의 달인"처럼 면 요리로 모두가 하나된다는 결말입니다. 

약간의 특징이라면 주인공이 이케다 멘타로이기는 한데,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주체는 면 요리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케다 멘타로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하는건 초반의 두, 세 개 정도이며, 다른 이야기들은 전부 그냥 면 요리를 먹으면서 이야기가 생겨나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장인 정신이 지나친 라면 가게를 '진검 승부' 하는 집이라며 마음에 들어해서 좋아하는 여직원을 데리고 갔지만, 즐겁게 먹는게 더 중요하다는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린다는 이야기처럼요.

하지만 역시나, 다른 요리, 먹부림 만화와 확실히 구분되는 무언가를 찾기 힘들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여섯 편의 에피소드만 남기고 사라졌겠지요. 면 요리 만큼은 정말로 맛있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 넘쳐나는 먹부림 만화 시장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미식가 탐정 료지 1,2" 블랙 잭을 닮은 요리사 아지사와 료헤이가 등장하는 만화 '더 쉐프' 시리즈의 작가 카토 타다시의 작품입니다. 만화 도서관 Z에서 무료로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뭐 볼게 없나 하고 뒤져보다가 제목에 호기심이 동해서 읽어보게 되었네요.

제목만 보았을 때에는 음식과 추리가 결합된, "절대미각 식탐정" 류의 추리물로 생각했었는데 아니더군요. 추리의 비중이 극히 낮습니다. 등장하는 탐정 소재 이야기 중 볼만했던건 부사장파와 전무파가 세력 다툼을 하는 회사에서 전무파의 핵심 인물인 개발부부장 뒷조사를 위해 그의 집에 잠입해서 PC를 열어보는 에피소드 뿐이거든요. 이를 통해 부장이 컬트 (사이비) 교단 핵심 관계자였다는게 드러나게 되지요. 북해도 출신 가출 소녀를 찾을 때, 사투리를 무심코 대답하게 만드는 작전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외에는 탐정 업무로 볼 만했던 내용은 없었습니다. 대부분 불륜 조사로 미행 후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을 찍는 정도이며, 그 외에는 아들 결혼 상대에 대한 상세 조사, 데릴 사위에 대한 탐문 조사 등이 전부입니다.

반면 음식, 요리 관련 이야기는 이야기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주인공 탐정 렌죠 료지부터가 일류 요리집 쥬가와의 주인 토가와의 아들로 요리에 굉장히 박식하고 능숙하다는 설정이니까요. 초반부는 그가 조사 및 탐문 과정에서 우연히 먹게 된 요리가 너무 형편없어서 한 마디 했다가 결국 그 요리를 업그레이드시켜준다는 전개가 많고요. 

하지만 이런 전개는 억지의 극치죠. 탐정이 이런 일을 해 줄 이유가 없잖아요? 작가도 억지라는걸 알았는지 뒤로 갈 수록, 탐정업 보다는 요리에 집중합니다. 요리 승부가 계속 펼쳐지는 식으로요. 문제는 흥미를 돋우는 효과는 있지만 작품의 정체성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욱 하는 성격으로 승부를 한다고 해도 한 두번이지, 세 편 연속 요리 승부는 지나쳤어요. 

아울러 렌죠 료지와 그의 아버지에 얽힌 이야기는 "맛의 달인"과 흡사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렌죠 료지가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바로 발끈하며 비판하는 모습, 그리고 그의 목표가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만든 요리가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는 등 캐릭터 설정도 "맛의 달인"과 거의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 요리 만화 붐에 편승해서 이런저런 인기있는 소재를 가져다 썼지만 결과물은 영 신통치 않았던 망작입니다. 유일한 장점은 공짜로 봤다는 것 뿐입니다.

요리 만화들 짤막한 감상 (9)

2019/08/17

도연사의 쌍둥이 탐정일지 - 오카자키 다쿠마 / 민경욱 : 별점 1.5점

도연사의 쌍둥이 탐정일지 - 4점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후쿠오카 내 유치쿠 시에 위치한 도연사의 승려 가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등장하는 일상계 추리물은 굉장히 많습니다. 해당 분야의 지식이 추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현학적인 재미를 함께 가져다 줄 수 있고, 손님이 수수께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서 이야기 전개를 쉽게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일상계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하늘을 나는 말"탐정역부터가 '라쿠고가'라는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이기도 했고요. 현재까지도 추리 소설계에서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동안 읽었던 작품들로는 서점, 고서점, 화과자점, , 골동품점, 중고매장사진관, 수프가게, 초등학교 (선생), 시계방 등을 무대로 해당 분야 전문가나 업무 종사자가 활약하는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스님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아토다 다카시의 "A사이즈 살인 사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을 이미 읽어 보았고요.
이 작품도 배경 설정만 놓고 보면 절에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가 주요 소재로 사용되고, 스님이 핵심 인물로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생각과는 다르더군요. 우선 화자인 도연사의 부지주 잇카이가 탐정역을 맡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 좋은 어른으로 갈등의 중재자이자 해결사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탐정 역할을 맡는건 제목의 쌍둥이입니다. 그래서 절이나 스님 관련된 이야기가 중요한 소재로 쓰이는 전문가적인 이야기보다는, 학생들이 등장하는 학원 일상계 스타일 느낌이 강합니다. 네 편의 이야기 중 그나마 공양을 주요 소재로 삼은 세 번째 이야기 정도만 소재와 어울립니다.
물론 법사, 법요, 불경, 공양 등 디테일한 절과 스님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묘사되지 않는건 아니지만, 이야기의 핵심, 추리적인 부분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배경 묘사에 그칩니다.

그런데 이 쌍둥이 설정은 여러모로 거슬립니다. 남자아이 렌은 "절 옆에는 귀신이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성악설 신봉자, 여자아이 란은 "불천인신천인(仏千人神千人)"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성선설 신봉자로 정반대인 이 둘이 서로를 보완해가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데 지나칠 정도로 작위적이고 만화적입니다. 란이 단 것을 미친듯이 좋아한다는 설정도 과하고요. 다른 주요 캐릭터들 - 사투리를 입에 달고 사는 아버지인 주지스님 신카이와 절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먼 친척으로 잇카이를 가지고 노는 (?) 어린 처녀 고테가와 미즈키 - 은 상당히 괜찮았기에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차라리 쌍둥이없이 잇카이를 탐정역으로 내세워 절과 신도들에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추리면에서도 눈여겨 볼 부분은 없기 때문에 별점은 1.5점입니다. 널리고 널린 일상계 물 중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없는 평균 이하의 작품입니다. 에피소드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1화. 절 옆에는 귀신이 살까?

마을 유지로 자산가인 오가미 집안의 장례식에서 오가미 집안 아들 딸들의 조의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스님이 주관하는 장례식에서 조의금이 도난당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이야기입니다. 범인은 접수대를 맡았던 야스에로 그녀가 고인의 가족들 봉투를 다른 것과 바꿔치기 해서 넣었던게 진상이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봉투만 바꿔치기해서 가져갈 이유가 없는 탓입니다. 봉투째 가져가는게 당연하지요. 어차피 맨 밑에 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았을테고요, 봉투를 바꿔치기 하는 것 자체가 지문 등의 단서가 남을 수도 있고, 바꿔치기할 수 있는 사람은 극도로 제한된다는 점에서 평범한 조의금 도둑이 할 범행이 아닙니다. 차라리 조의금 도난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가 강했다는걸 부각했어야 하는데 이야기 상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아서 이도저도 아닙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보다는 절을 방문했던 란의 동급생은 사실 새전함을 노리고 있었을거라는 서두의 추리가 더 재미있습니다. 

제2화. 할머니의 매화가지 떡

도연사 일행은 신도인 마쓰다이라 상점댁을 찾았다. 13주기 제사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법요가 끝난 후 할머니가 권한 상점의 명물 매화가지 떡을 중학생 손녀 유카리가 집어 던져 버렸다. 유카리가 반항(?)한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매화가지 떡을 굉장히 좋아했지만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이를 집어 던질 정도로 손녀 유카리가 비뚤어진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는 이야기인데 역시나 추리를 끌어내기 위한 단서가 너무 부족합니다. 단지 아침에 비닐 봉투 한 가득 청소를 했다는 정도로 무언가 결론을 끌어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렌의 반에 전학온 다이손의 존재가 추리의 결정적 근거가 된다는건 지나치게 작위적이고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억지스러웠던 이야기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제3화. 아이를 생각하다

미즈키의 지인 유나가 유산된 아이 '미즈코'를 공양하며 임신을 기원하는데, 사실 그녀는 이미 임신을 하고 있었다. 한달 뒤, 유나의 임신을 알게 된 남편 슈운이치는 도연사로 찾아와 임신 기간 중 자신은 출장 중이었다고 말하며 잇카이와 유나의 관계를 의심한다...

절과 스님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는 유일한 이야기입니다. 불심이 깊은 시어머니와 틀어진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부처님 덕에 임신했다는걸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동기 역시 사뭇 불자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대단한 추리력이 발휘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나의 고백으로 모든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4화. 저 세상의 꿈, 이 세상의 생명

교통사고로 사망한 불쌍한 여인의 경야를 맡게 된 잇카이는 고인이 자신이 전날 꾼 꿈에 등장한 여인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잇카이는 그녀가 쌍둥이의 모친일 것이라 확신하는데...

교통사고로 사망한 여인의 경야, 법요가 소재로 등장하지만 핵심 내용은 사망한 여인의 아이를 찾는 것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수록작 중 가장 볼 만 합니다. 사고를 당한 여성은 열쇠가 없었으니 다이얼 식 열쇠였을 것이다, 어딘가 맡길 형편이 안되니 근처의 빈집일 것이다, 사고 장소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다 등 모든 추리가 이치에 맞는 덕분입니다. 아이를 빈 집에 몰래 두고 일하러 갔다는 진상도 쇠락해가는 시골 마을 분위기와도 잘 어울리는 좋은 아이디어였고요. 

문제는 아이의 실종을 잇카이가 꿈을 통해 알게된다는 오컬트적인 전개입니다. 망자가 잇카이에게 이를 전달할 이유도 딱히 모르겠고, 절과 스님이 등장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과했습니다. 이어지는 가족간의 사랑 어쩌구 하는 분위기도 영 닭살돋아서 취향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0/05/16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 야마모토 요시타카 / 서의동 : 별점 4점

일본 과학기술 총력전 - 8점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음, 서의동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과학기술이 주요 축의 하나였던 일본근대화 150여년에 대한 역사서입니다. 메이지 초기 이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뒤 전쟁을 거쳐 현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에서의 과학 기술의 역할과 '총력전' 이라는 형태의 방식에 대해 7장, 400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조망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굉장히 유익했던 독서였습니다. 그동안 항상 궁금했었던 여러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도 있었고, 잘 몰랐던 여러가지 사항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것은 물론, 일본의 현재 모습이 어떻게 비롯된 것인지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기본적인 방향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고요.

궁금했었던 의문이 해결된 것 중 가장 대표적인건 "일본은 고작 몇 년 정도 앞서 개항한 걸로 어떻게 20세기 초중반, 세계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는지?" 입니다. 그 해답은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는 것이네요. 서구에서도 물리학에서 신학적 내용과 같은 불필요한 내용이 추방되고, 수학도 정리되어 세련되어 갔으며, 과학 연구와 연구자 양성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되어 학문의 습득이 쉽고 체계적이 된 19세기 후반에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덕분인겁니다. 여기서 조금만 빨랐어도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을테고, 50년만 늦었어도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이 태동한 뒤라 습득 장벽이 높아서 서구 물리학과 관련 학문을 쫓아가는건 굉장히 어려웠을거라는군요.

그리고 흔히 이야기하는 '과학기술'이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과학은 순수한 학문적 영역이었으니 두 단어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19세기에는 여러가지 과학 분야의 연구가 실제 기술 개발에 적용되는 사례가 부각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쳐서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보면 '과학' 보다 그 결과물인 '기술' 분야에 집중했고, 과학이라는 학문 영역도 '기술'에 도움이 되는 분야에 보다 촛점을 맞추었고요. 한마디로 과학은 기술을 위한 보조학인 셈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서 일본의 과학 교육은 세계관, 자연관 함양보다는 실용성에 큰 비중을 두고 있고요. 덕분에 일본이 근대화에 빨리 성공하기도 했지만, 이는 일본 근대화의 바닥이 얕은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사농공상' 대신 학력에 의한 질서 형성을 추진하는, 이른바 '사민평등'의 시기에 접어들었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평등은 아니었습니다. 서구 과학기술 수입의 핵심기관인 공부성이 주도한 방침 자체가, 재래의 직인층을 독려해 종래 기술을 개량하고 발전시키는게 아니었던 탓입니다. 사족 중 유능한 자를 기술관료로 육성한 뒤 서구 과학기술을 그대로 도입하는게 핵심이었거든요. 그래서 상급학교에 진학한건 거의 사족의 자제였고, 메이지 시대 기술자의 태반이 사족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사족은 직인, 상인의 일을 경멸했던 터라 이런 계급적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기술을 지배층만의 것으로 권위를 부여하고, 이들을 엘리트로 재래의 직인과 차별화하는 작업이 필요했던거지요. 그래서 대학생들에게 강렬한 엘리트 의식을 함양시켰다고 합니다. 국가와 나라를 위해 일하는걸 당연히 여겼고요.
이 탓에 상급 기술자들은 엘리트 의식 과잉에 배타적 성격을 지니나, 반면 관료적이고 조직과 국가에 순종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학제, 시스템을 식민지 시절 도입당한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는 이야기라 여러모로 와 닿네요.

책에서 소개하는 근대화와 함께 한 과학기술 진흥의 흐름을 간략히 살펴보면, 메이지 초기 해외 사절단 등을 통해 일본 지배층은 상공업의 발전이 선진국의 필수 조건이며, 특히 과학이 기술에 직결되고 산업 발전과 군사력 강화의 불가결한 요소일 뿐 아니라 국가가 과학과 기술의 진흥과 혁신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걸 알게 됩니다. 막말 연달아 일어난 대지진으로 지배층의 권위 실추와 새로운 사정, 문물의 유입이 이루어지던 시기라 여러모로 혼란스러웠던 민중에게 합리적이면서 과학적인 사고를 추구하는 '궁리窮理학'이 대 유행하게 되고요. 이를 통해 서양과학기술 계몽서가 유행하는데, '궁리'라는 라쿠고까지 나왔다니 그 유행을 미루어 짐작할 만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제목의 '총력전' 이 소개됩니다. 메이지 유신 후 국가 주도 개혁에서 군부 독재에 의한 제국 주의가 심화되며 국가가 통제하는 경제 발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무척이나 상세해요. 전쟁에 대비하여 총력을 다해 이를 준비한다는 '총력전' 체제로 모든 산업, 경제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일부는 우리나라와도 겹치는 부분이 많아 보이더군요. 군부 독재에 의한 것이지만 미국의 뉴딜 정책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시각도 흥미로왔고요. 또 이러한 '통제'는 좌, 우익 모두 찬성했다는데, 우익이야 그렇다쳐도 좌익은 좀 의외였습니다만 그 이유도 책에서의 설명으로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좌익은 자본의 이윤 추구를 억제한다는 그 자체에 무조건 찬성한거라네요. 제목처럼 총력전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는 내용도 잘 알려줍니다. 군부 주도의, 군사 목적의 발전이면 기술 개발이 빠질 수 없으니 당연하겠지요. 덕분에 과학기술 분야에 엄청난 연구비가 투입되고, 여러가지 혜택도 많았다고 하고요. 전후 과학자들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전시가 가장 연구 환경이 좋았다고 할 정도로요.

또 총력전을 통해 결국 빈부 격차가 줄어들게 되었다는 의외의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징병제 때문에 농촌의 인구와 생활 수준을 유지시켜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의료 보험 등 복지에 대한 여러가지 제도가 만들어지는 등의 긍정적인 효과는 눈여겨 볼 만 합니다. 그러나 총력전 이전, 근대화 과정에서 있었던 일반 민중들의 희생도 잊으면 안 될 역사입니다. 이 책에서는 '기계화'가 생각했던대로 인간의 노동을 경감시킨게 아니라 오히려 환경 오염을 일으키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야간 근무가 도입되고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해져서 민중은 그만큼 희생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성공과 기적은 운이 좋았던 덕분인데다가, 효과적인 교육제도가 형성된 등의 이유도 크지만, 농촌 노동력의 가혹한 수탈과 농촌 공동체의 무참한 파괴가 불가결의 요인이었던거죠. 제국주의가 되면서 이러한 수탈, 파괴는 식민지로 옮겨지고, 우리나라는 그러한 수탈과 파괴, 희생의 직격탄을 맞있다는 점에서 더욱 뼈저린 역사입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이후의 이야기도 새롭습니다. 대표적인게 일본의 패배를 파시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지 않는다는 시각입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군부 독재 시기에 총력전 체제에 의한 사회의 구조적 변경과 재편성이 이루어졌는데, 이 구조가 전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저자의 시각으로는 지금도 일본은 '전시 체제'인 셈입니다! 아직도 소수의 관료, 선택받은 엘리트들이 국가 주도의 정책을 세우고 이를 모든 사회에 강요하는 구조라는 뜻입니다. 제대로 된 민주화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인거지요. 최근 드러나는 일본 정치의 후진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덕분에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수의 관료, 엘리트들이 새로운 일본의 재건에 나서는데, 이 역시 총력전 체제와 다름이 없다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또 여기에서도 일본은 운이 대단히 좋다는 걸 알게 되었고요.전쟁 당시 추진해서 만들어놓은 생산 설비가 비교적 온존되어 있었고, 전시하에서 급성장하고 축적된 기술과 기술자층이 많아서 고도 성장의 주역이 되었으며, 은행과 군수 기업은 망하지 않은게 다시금 총력전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네요. 식민지 시절 수탈과 희생을 발판삼아 만들어 놓은 사회 구조로 다시 고도 성장을 한 것이죠. 또 고도 성장의 핵심은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통한 시장의 급성장 덕분이었다니, 이 정도면 천운을 타고났구나! 싶은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러한 고도 성장도 전전의 '총력전' 처럼 약자의 생활과 생명 경시를 동반한게 오늘날의 '후쿠시마' 사태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니, 역시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에요. 이러한 고도 성장 과정에서 여러가지 환경 문제나 사고가 일어났지만 정치가들이나 기업가들의 거짓말, 그리고 이들의 지원을 받는 지식인들과 기술자들이 기업편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날조하며 언론 역시 이에 동조하여 거짓 기사를 써 낸 행태를 보면 우리나라의 과거가 겹쳐지기도 해서 조금 씁쓸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예를 보아도 "무슨무슨 5개년 계획" 등으로 국가 주도로 산업을 일으켰지만, 그 과실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받은건 재벌과 권력자라는걸 부인하기는 어렵기도 하고요.

마지막으로 현재 일본의 문제점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이어지는데, 이는 그냥 좌시하기 힘든 내용이었어요. 바로 원자력이 핵심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정치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성장'에 모든걸 걸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시에서의 발상으로, 지금 시점에 맞는 방향은 절대 아닙니다. 기술 혁신만으로 인구 감소에 따른 시장 축소를 감당할 여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결국 일본은 가격이 유지되는 시장인 군수 산업에 올인해서 전쟁 유발을 획책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으며, 이를 위해 일본이 집중한게 바로 원자력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과거 평화적 이용이라는 환상을 과대 포장하여 원자력 개발을 진행하였으나, 1980년대에 이르르면 이미 전력 수요는 넘어서는 원전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원전 비즈니스를 위해 원자력 개발을 하고 원전을 지은 것에 불과한거죠. 국가 주도의 총력전이 지금은 원자력에 집중되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나 원자력은 수백년 사용하면 수십만년 보관해야 하는 폐기물 문제가 더 큰, 무한한 미래를 희생하여 당장의 현재를 사는 굉장한 낭비에 불과하다는걸 통렬하게 알려줍니다. 원전 자체가 불완전하기도 하고요. 게다가 원전에 큰 투자를 감행했던 도시바의 몰락은 일본식 총력전을 무력하게 만들어, 조만간 '일본 주식 회사'의 실패를 불러올거라고 하니 무서울 정도네요. 우리나라 모 회사가 어려워진게 국가에서 원전을 더 이상 짓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말을 하는 분들께 이 책을 한 번 권해드리고 싶네요. 원자력은 현재라고 하기 어렵고, 미래는 더더욱 아닙니다. 후쿠시마의 예를 꼭 들지 않더라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친환경, 재생 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이 더욱 시급한 시점이 맞습니다. 그리고 일본처럼 국가 주도의 비즈니스 드라이브를 걸다가 나라가 망해가는건 그 누구도 원치 않으실거라 믿고요.

결론과 후기를 통해 저자는 앞으로는 총력전 체제에 따른 경제 성장 자체가 불필요할 것이라 합니다. 경제가 성장해봤자 국민 개인은 성장하지 않는다는게 이미 증명되었으니까요. 때문에 글로벌 교류를 통한 전쟁없으며 연대를 이루는 시민 사회의 성장, 이를 통한 실업없는 제로 성장 사회로 연착륙 하는게 맞는 방향이고, 여기에 과학적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저 역시 이 생각에 100% 동의합니다. 문제는 최근의 코로나 사태가 시민 사회의 교류와 국가간 교류를 단절시켰다는 점이지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세상이 바뀔거라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이제야 조금 와 닿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굉장히 얻은게 많은 독서였습니다. 물론 저자 혼자만의 주장이 담겨있어서 다양한 시각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일본 전시 체제를 뒷받침한 가장 중요한 동력인 식민지 수탈을 너무 짧게 짚고 넘어간 것도 적절치 못하고, 일본 원자력 산업도 정확한 파악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자료가 필요해 보이고요. 과연 공평한 논리와 시각인지도 깊이 고민해 봐야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을 평가하고 검증해야 하는건 오롯이 독자의 몫일 겁니다. 새로운 시각만으로도 무척 반가왔으며, 현재의 일본과 우리를 알기 위해서는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싶네요. 심지어 가격까지 저렴한 편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18/02/16

패러독스의 세계 - 다무라 사부로 : 별점 2.5점

패러독스의 세계 - 6점
다무라 사부로/전파과학사

오래전 사랑했던 추억의 전파과학사 문고가 저렴한 가격의 ebook 대여 행사를 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행사가 끝났네요.

이 책에는 연인의 사고사 후 자살하려던 천애고아 미다 타로가 우연히 외계인 퀴리그인에게 납치된 후, 퀴리그 별에서 가정교사 및 기술자로 일하며 여러가지 수학 논리를 설명해 주었던 과거에 대한 일종의 수기와 "웃지 말 것 - 웃음과 패러독스", "읽지 말 것 - 수학과 패러독스" 라는 두 개의 챕터로 여러가지 패러독스 상황을 관련된 이야기들로 설명해 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미다 타로의 수기 부분은 솔직히 왜 이런 기묘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구태여 외계 행성 설정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설명 가능한 부분이었거든요. 그래도 초-중학생 수준의 외계인 아이들에게 수학과 논리를 가르친다는 설정 덕분에, 수학에 기반을 둔 내용이 많음에도 아주 어렵고 심오하지 않아서 이해가 쉽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들이 제목 그대로 "패러독스" 관련된 역설 이야기가 많아서 퍼즐을 푸는 듯한 재미도 넘치고요. 각종 공작이나 퍼즐, 심지어 미다 타로가 외계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요술' 관련된 도판까지 도판이 생각 외로 많은데 이 역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단순한 즐거움 외에도 현학적인,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기쁨 역시 컸습니다. "12 척의 배를 가진 부자가 장남에게는 1/2을, 차남에게는 1/4을, 막내에게는 1/6을 주기로 했는데 1척이 침몰해버렸다. 그런데 이웃에서 배를 빌려와서 장남에게 12척의 1/2인 6척, 차남에게는 1/4인 3척, 막내에게는 1/6인 2척을 주니 모두 11척이라 이웃에게 배를 돌려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라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지만 답을 몰랐던 수학 문제의 답을 알게 된 것 처럼요. 정답은 애초부터 잘못된 유언이라는 것입니다! 1/2 + 1/4 + 1/6 이 "1"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이 여관에 숙박비로 1인당 1만원 씩 지불했다. 그런데 여관 주인이 서비스로 5천원을 깎아 주었다. 그러나 이를 돌려주던 종업원이 2천원을 슬쩍하고 3천원만 돌려주었다. 각자 1만원 씩 냈는데 1천원씩 돌려 받았으니 1인당 낸 돈은 9천원이고, 3명이서 2만 7천원을 내었다. 여자 종업원이 2천원을 슬쩍한걸 더하면 2만 9천원. 1천원은 어디로 갔을까?" 라는 문제도 이 책 덕분에 속 시원하게 정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받은 돈은 2만 5천원이고, 종업원이 가로챈건 2천원이라 이는 손님 세 명이 지불한 돈과 일치합니다. 여기에 깎아준 3천원을 더하면 처음의 3만원이 됩니다. 이 돈에 또 슬쩍한 돈 2천원을 억지로 더해서 발생하는 오류지요.

이러한 퍼즐같은 이야기 외에도 정통 수학에 기반을 둔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앞의 두개의 수의 합이 다음 수가 되는 피보나치 수열의 이웃한 3개의 수는 항상 한가운데 수의 제곱과 양 끝 두 수의 곱은 언제나 1만큼 다르다' 라는 사실 등 새롭게 알게 된 이론도 많고요.
'큰 원의 원 둘레와 작은 원의 원 둘레가 1:1로 대응하더라도 길이는 똑같다고 할 수 없다' 는 이유 등 몰랐던 수학 이론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좋았습니다. "1/3 + 1/3 + 1/3 은 1인데 1/3은 0.333333333..... 이라 1/3을 더하면 완벽한 1이 되지 않는데?"라는 문제에 대한 답도 미력하나마 깨우칠 수 있었고요.

수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논리 퍼즐도 대미를 장식할 만 합니다. 아주 인상적이었기 상세하게 소개해 드릴께요. 일단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개의 문이 있는 방이 있다. 한 방은 정답, 다른 방은 오답이다. 방에는 언제나 사실을 말하는 정직 족, 언제나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 족으로 이루어진 별에서 온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어느 부족인지는 모른다. 이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한번만 질문할 수 있다. 그들의 답은 "팔" 또는 "다아" 중 하나이다. 이 "팔"과 "다아" 중 어느 쪽이 yes이고 어느 쪽이 No 인지는 알 수 없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하고, 답은 어떻게 되는가?" 입니다. 논리 퍼즐로 한참 고민해도 됨직한 멋진 이야기죠?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이를 수학 공식화하여 설명해 줍니다! 내용 중 "동치" 개념과 교환율, 간략화 공식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공식으로 "왼쪽의 문이 정답입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당신이라면 "팔" 이라고 대답합니까?" 라는 답이 도출되는 과정은 놀라왔습니다. 수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여러분들도 이 답이 맞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미타 타로의 수기와 비교한다면 이어지는 "웃지 말 것 - 웃음과 패러독스" 부분은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 패러독스를 다양한 글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라쿠고나 잡지의 유머 등을 인용하여 이해를 돕는건 좋지만 너무 장황한 탓입니다.
물론 유머, 우스개 들에서 패러독스 이론을 끄집어 내는건 대단했고, 유머만 소개되는게 아니라 체스터턴의 단편과 "라쇼몽"이 인용되는 등 볼거리가 많긴 합니다. 그래도 글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도판이나 다른 보조 장치가 필요했어요. 거짓말 관련된 패러독스가 내용의 대부분이라는 점도 아쉬웠고요. 마지막의 "읽지 말 것 - 수학과 패러독스"에 제목처럼 수학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 그 비중이 높지 않습니다. 도입부에서 칸토어의 정리를 쉬운 집합 형태로 바꾸어 설명하는 부분은 재미있었지만, 이외에는 패러독스를 수학으로 설명하기 위한 여러가지 이론 설명 비중이 더 크거든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읽을만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책의 가치를 번역이 반 이상 깎아먹고 있는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수학 이야기인데 어떤 항목은 번역된 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책 자체는 별점을 3점 이상 주고 싶어도 번역 때문에 도저히 2.5점 이상은 주기 힘드네요.
수학을 공부하는 중학생 정도라면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되어 수학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리고 싶은데, 번역 때문에 선뜻 권해드리기 어렵군요. 조금 현대적으로 각색해서 새롭게 번역되어 출간된다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2023/09/16

[소설가 감수] 미스터리 소설 추천 인기 랭킹 33선 (2023년 최신판)

NTT에서 운영하는, 리서치 설문조사와 접속수를 바탕으로 모든 장르의 랭킹을 망라한 종합 랭킹 사이트인 goo 랭킹에서 선정했던 랭킹입니다.
전부 33편의 작품이 소개되는데, 랭킹을 감수했다는 소설가 OO씨가 선정한 작품 5개만 소개해드립니다. 상세한 내용은 원문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스릴은 미스터리의 묘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세계에서도 미스터리는 인기 있는 장르이지요. 재미있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이번에는 소설가 OO 씨의 감수를 받아 '읽고 싶다! '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해 드립니다. 수상작과 영상화된 작품, 그리고 선택 방법도 함께 소개하니 꼭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설가가 알려드립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고르는 방법
취재 협조 소설가 OO :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작품을 출간하고 있는 소설가. 일반 소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을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작품도 창작에 활용하기 위해 열심히 보고 읽는다.
OO 씨에게 미스터리 소설을 고를 때 중요한 포인트를 물어보았다.

POINT① :
각종 랭킹 상위권이나 문학상 수상작은 수준이 높다! 그런 작품인지 체크!
화제작이나 실력파 작가의 작품을 우선적으로 읽고 싶은 분들에게는 '고노미스', '서점대상', '나오키상' 등 각종 미스터리 랭킹 상위권 작품이나 문학상 수상작을 추천합니다. 매년 진행되는 랭킹에 오른 작품들은 수준이 높고 읽기 쉬운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발표될 때마다 체크해서 소설을 쓸 때 참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골라 읽다 보면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작품들의 줄거리를 확인하고 자신에게 맞는 작품을 골라보세요.

POINT②
깜짝 놀랄 만한 트릭과 논리가 충분히 전개되는 본격 미스터리 작품인지 확인하자.
미스터리라고 하면 예상치 못한 트릭이나 논리적인 구조가 재미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은 본격만을 다루는 상이므로 트릭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POINT③
숨 막히는 전개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 작품인지 확인하자
서스펜스 요소가 있는 작품은 독자로서 비일상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경찰 소설이나 모험 소설, 하드보일드 소설 중에서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작품이 많으니 그 중에서 고르는 것도 추천합니다.

POINT④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싫다면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룬 작품인지 확인하자.
'사람이 죽거나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는 이야기는 싫다'는 분들에게는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룬 소설을 추천합니다. 가게나 학교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수수께끼와 궁금증을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여운이 남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편집부
미스터리 소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피했던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나 선택 포인트가 있을까요?

OO 씨
사회파 미스터리나 서스펜스는 트릭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읽을 수 있어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등은 좋은 작품입니다.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와 같은 가벼운 미스터리도 쉽게 다가갈 수 있고요.
그중에서도 첫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붐의 시발점이 된 작품으로, 다양한 정수가 응축된 작품이거든요. 이 작품을 발판 삼아 점점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면 좋겠습니다.

편집부
반대로 '대부분의 작품은 다 읽었다'는 미스터리 소설 마니아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의 종류와 선택 방법이 있나요?

OO 씨
미스터리 계열의 신인상은 많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스타일이나 설정 등의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고, 보다 폭넓게 미스터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로 최근 트렌드 장르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입니다.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그 안에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으로, '시인장의 살인', '젤리피쉬는 얼어붙지 않는다' 등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소설가 OO 씨 추천! 미스터리 소설 5선
<<까마귀의 엄지>>
사기가 생업인 중년의 두 남자의 이야기. 점차 동거인이 늘어나면서 인생을 건 거대한 계획이 시작된다. 충격적인 전개와 감동적인 결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걸작.
'고노미스'의 단골손님인 미치오 슈스케의 첫 나오키상 후보작으로, 제62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상쾌한 느낌의 초인기 작품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
사기꾼인 중년 2인조가 동거인들과 함께 사기 계획을 세웁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에 '당했다!'는 놀라움과 함께 짜릿한 쾌감도 느낄 수 있는 명작입니다.

<<13계단>>
가석방 중인 청년과 정년을 앞둔 교도관 두 사람은 10년 전 살인사건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조사를 하게 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은 범행 당시의 기억이 없고, '계단을 올라갔다'는 단서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무고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데뷰작이자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 2003년에는 영화화되기도 했다. 서스펜스를 충분히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사형수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는 주인공 교도관. 단서 몇 개와 사형 집행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과연 그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숨 막히는 서스펜스와 함께 독서 후의 만족감도 큰 작품입니다.

<<제 3의 시효>>
F현 경찰 수사 제1과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집으로, 등장하는 형사들의 개성이 강하고 경찰 내부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장감 넘치는 걸작. 제16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작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독서 후의 충격과 고양감을 맛보고 싶은 분이나 형사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
살인사건의 공소시효에 얽힌 '제3의 공소시효'를 파헤쳐 나가는 형사들. 시효 성립 직전의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 경찰소설이자 단편소설의 대가인 저자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단편소설집입니다.

<<최후의 증인>>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인 주인공이 불리한 상황에 도전하는 법정 미스터리 작품. 점차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과 충격적인 전개에 빠져들게 된다. 2015년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시리즈도 방영되었으니, 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겼다면 확인해 볼 것.
OO 씨 comment :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가 활약하는 법정 미스터리. 반전이 있는 법정 장면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데, 꼭 시리즈 전부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하늘을 나는 말>>
사람이 죽지 않는 '일상계 수수께끼'의 명작으로 여대생과 만담가가 '일상 속 수수께끼'를 추리해 나가는 연작 단편집. 살인 사건이나 흉악 범죄와 같은 무서운 소재가 아닌, 일상에 숨어 있는 위화감을 풀어간다. 미스터리 추리의 짜릿함을 맛보고 싶은 분이나 따뜻한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두 사람의 여유롭고 차분한 분위기와 곳곳에 등장하는 라쿠고(만담) 이야기 등 전체적으로 느긋한 느낌이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내용의 이야기나 인간의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묘사도 존재.
OO 씨 comment :
여대생과 만담가가 일상 속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본격 미스터리로, '일상계 수수께끼' 장르의 선구자격 작품입니다. 살인 사건 등 흉악 범죄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이면서도 안심하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2023/04/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8. 만화경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8. 만화경

저녁이 가까워지자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임차인들이 사무실에 들러 연락 사항을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전화 사용도 많아져 통화 소리와 담배 연기가 좁은 방에 가득 찼다. 비가 내린 탓에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토모히로의 고별식 다음 날,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데츠바가 마이코를 만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토모히로의 초칠일 전인 토요일로 정했고, 시간은 추후에 알려주겠다고했다. 카오리는 전화를 끊으면서 내 생일을 잊지 않았겠지요, 라고 상기시켰었다.

그래서 시간 확인차 카오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마와리 집안의 가정부였는데, 꼼꼼한 성격 탓인지 카오리가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무실 전화번호를 꼼꼼히 물어보았다.

토우이치는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장례식 이후 마사오를 만나지 못했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벽녘에는 마사오의 꿈을 꾸었다. 마사오는 죽은 줄 알았던 토모히로와 팔짱을 끼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 마사오는 샹보르관을 나왔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토시오는 가슴이 먹먹해져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꿈의 맛은 이상하게 달콤했고, 아침에도 좀처럼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9만 파운드짜리 자동 음악 기계인가 ......"

아까부터 신문을 읽고 있던 후쿠나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동 음악 기계?"

마이코가 되물었다. 요즘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술품 경매입니다. 영국 버크셔 백작의 성, 멘트모어 타워스가 경매에 나왔다고 하네요."

"백작님도 돈에 쪼들리는건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문제지요. 7대째가 막대한 상속세를 물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이 사람은 달마니라는 성을 하나 더 가지고 있긴 하지만요. 눈에 띄는 미술품은 전부 그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건 극히 일부라고 합니다."

"일부라도 대단한 재산인가 보군요."

"그렇죠. 세계 각국에서 3만 명의 바이어가 사전 답사를 마치고 경매는 열흘 동안 계속된다고 합니다. 멘트모어 타워스는 18세기부터 백 년 동안 수집한 프랑스 그림과 가구, 도자기, 시계 등이 가득한 보물창고라니까요요. 예를 들어 루이 14세의 책상이 5만1천 파운드, 방금 말한 두 마리의 새가 조각된 루이 15세의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 루이 16세 시대의 자카드 로스가 만든 필사 인형 같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필사 인형이라고 하면 글씨를 쓰는 인형인가요?"

"그렇겠지요."

"설마 인형 안에 아이 같은 걸 넣는 장치는 아니겠죠?" 

"하하하, 우다이 씨가 말씀하신건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인데요, 그런 트릭도 물론 있었지만  18세기에는 이미 카라쿠리 인형의 기술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트릭이 아니라 실제로 기계만의 힘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글씨를 쓰는 인형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지루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렇군요. 그 사람은 그만큼 트릭을 좋아하나 봅니다. 물론, 장난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트릭으로 보충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마술은 기계공에서 마술사의 손으로 넘어갔고, 기계공은 기계의 가능성만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프랑스 궁정에서는 유명한 자크 드 보캉송이 활약했습니다. 보캉송은 클레오파트라의 뱀, 파우누스 신의 옆구리 피리 부는 사람 등 많은 카라쿠리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오리였습니다. 이 오리는 살아 있는 오리처럼 헤엄을 치고, 소리를 내고, 물을 마시는데다가 먹이를 던져주면 목을 쭉 뻗어 쪼아먹고, 음식물을 소화하고 배설까지 했다고 하네요. 이 오리는 훗날 마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베르 우당(Robert Wodan)의 손에 의해 수리되었고, 동시에 모든 메커니즘이 밝혀졌다고 하고요."

"마술사가 인형을 고쳤다고요?"

"그 당시 우당은 아직 시계 장인이었습니다. 그 후 우당은 오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스스로 다양한 카라쿠리를 만들었지요. 줄타기하는 인형, 기계 없이 움직이는 시계, 컵과 구슬의 기예를 하는 인형까지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마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으로, 나중에는 마술사로 변신해 마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지요. 오리가 생각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진 수영하는 오리를 팔던 장사치가 있었어요."

"저는 몰라요."

"뭐 오래 전 이야기니, 그렇겠죠. 이 오리는 더러운 통 안에 떠서 신기하게도 스스로 헤엄쳐 다녔어요. 그리고 가끔은 먹이를 잡기 위해 부리를 물속으로 집어넣기도 하고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요."

"기계 장치인가요?" 

"아니요. 보캉송의 오리도 저렇게 생물처럼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에요. 생물의 움직임에는 기계에는 없는 불규칙한 부분이 있는 법인데, 노점상 오리는 그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어요."

"어떻게요?"

"그 오리를 사면 어디서든 팔고 있는 평범한 셀룰로이드 오리를 줍니다. 다만,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어요. 그리고 그 종이에는 오리를 움직이는 비결이 적혀있었죠."

"네?"

"<오리의 목에 실을 달고 그 끝에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매달아 두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거, 사기 아닌가요?"

마이코는 입을 열었다.

"사기는 아닙니다. 속임수죠. 에도 시대부터 있던 장난감이에요. 원래 이름은 '부동새'였어요. 가마우지를 본뜬 장난감이었지요. 분세이 말기, 우에노야마시타 부근에서 처음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셀룰로이드 오리는 장사치들 사이에서는 '즌부리코'라고 불렸습니다. ......반대되는 트릭도 있었어요. 이것은 만든 시체 인형을 살아있는 까마귀가 쪼아댄다는 것이었죠."

"시체 인형?"

"네, 막부 말기에는 기괴한 구경거리가 활발하게 등장합니다. 이른바 시체 세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익사체를 모방한 인형으로, 물벼락에 맞은 얼굴 등이 사실적으로 만들어진데다가 시체를 진짜 까마귀가 쪼아댔다고 하더군요."

"알겠어요! 그 시체에는 미꾸라지가 숨겨져 있었군요."

토시오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역시 우다이 씨네요. 맞아요. 재미있는 것은 미꾸라지를 너무 많이 먹은 까마귀가 쓰러졌다는 흔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에요. 즌부리코도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이 근처에서 팔면 돈벌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사람이라면 화를 낼 것 같네요"

"그게 문제에요. 옛날 사람들도 화를 냈어요. 하지만 아이디어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싼 거지요. 저런 걸작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니까. 백화점 같은 데서 파는게 나을거에요.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교육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될 테고요. 아이디어라고 하면, 187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의 메카니컬 뱅크도 아이디어만으로 팔렸죠."

"메카니컬 뱅크? 들어본 적 없는데요?"

"기발한 구조의 저금통이었는데요. 주물로 만든 견고한 구조로 동전을 넣는 상자 위에 사람이나 동물의 장난감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이 중에 ‘조련사’라는 저금통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동전을 조련사의 손에 들고 상자에 달린 레버를 누르면 옆에 있던 개가 뛰어올라 조련사의 동전을 물고 저금통 안으로 떨어트립니다. ‘광대’는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레버를 누르면 입이 열리고 손이 움직여 동전을 입에 집어넣고요. 가장 걸작은 '정치가'라는 저금통입니다. 큰 의자에 꼿꼿이 앉은 정치가의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무게에 의해 팔이 움직여 주머니에 만들어진 동전 넣는 구멍에 동전을 쏙쏙 집어넣습니다. 정치가의 무표정한 얼굴이 참 웃기죠. 그 외에도 마술사, 펀치 앤 주디, 엉클톰, 링컨 등 200여 종의 제품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금통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모터가 움직이면서 상자 안에서 해골 손이 나와서 동전을 잡고 상자 속으로 사라지는 장난감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그런 게 메카니컬 뱅크, 즉 기계식 저금통입니다. 처음 개발되었던 당시에는 모터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지만요. 오히려 그런 소박한 점이 좋았어요.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라쿠고(落語) 속에만 남아 있지만, 히다리 진고로(ひだりじんごろう)가 만들었다는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 마네키네코(招き猫)가 그것이에요. 손바닥 위에 정해진 수의 동전을 올려놓으면 사라져 버리는 장치인데, 이것도 메카니컬 뱅크, 기계식 은행의 일종이었을 것 같네요."

"히다리 진고로는 장난에 관련된 전설이 많네요."

"맞아요. 카라쿠리에는 전설이 많이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카라쿠리를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현존하는 물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나무와 종이로 만든 집에 살았고, 도시의 역사는 큰 화재의 반복이었으니까요."

"외국에는 오래된 장난감이 많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야 많죠. 물론 중요한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은 필라델피아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어요. 하지만 런던 박물관에 가면 17세기 마스켈라인의 카라쿠리을 볼 수 있습니다. 조라든가 사이코라든가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메카니컬 뱅크도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취재한 적이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요. 뉴욕의 사미엘 F 프라이어 씨가 수집한 것으로 주모우의 카라쿠리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어요."

"주모우라고 하면 비스크 인형이네요."

"우다이 씨, 잘 알고 계시네요."

"저를 비스크 인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 닮았네요. 주모우의 작품은 카라쿠리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나 한다니까요…."

소우지 씨는 주모우의 인형을 몇 점 갖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골동품 가치가 있는 자동 기계 인형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한 재산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 도중에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카츠 씨 회사, 정말 바쁘신가 봐요. 몇 번을 전화해도 통화 중이었어요."

"미안해요." 

카오리는 시간을 지정했다. 내일 1시에 나사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우다이 씨와 함께 오라고 했다.

"카오리 씨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네, 카네이션이 좋아요. 연홍색으로, 아셨죠?"

카오리는 그렇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이 뭔지 알아?"

다음 날, 나사 저택으로 향하는 에그 안에서 마이코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렇겠지. 꽃말은 열애야."

"...... 그러나 그녀가 지정한 겁니다."

"놀리는 걸까, 아니면 의외로 진심인걸까?"

"카오리 씨에게는 슌키치라는 약혼자가 있어요."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이지?"

"맞습니다."

"그럼 오늘은 못 올거야.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앞둔, 장난감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니깐. 토요일이라고 해도 정시에 퇴근하는 건 불가능해. 특히 젊은 평사원은 말이야."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어. 괜찮아. 정 어려우면 카오리의 억지에 당한 척 하라고."

어제 내린 비는 완전히 그쳤고, 오랜만에 하늘이 맑게 개었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오르니 씻겨 내려간 단풍의 색이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나사 저택의 중앙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서 바라본 인상보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저택 건물의 비틀림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벽은 원래는 선명한 주홍색으로 빛났을 터였지만 지금은 기괴한 검붉은 색이었고, 벽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담쟁이 덩굴이 겹겹이 쌓인 모양은 마치 거대한 뱀의 비늘을 연상케 했다. 당나라 풍의 기와에서 튀어 나와있는 푸른 오각뿔 모양의 탑은 기괴한 조합으로 보였다.

흙담은 곳곳이 무너져 무질서하게 관목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당초 문양의 철책문은 열린 채였다. 토시오는 문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에 고풍스러운 클래식 자동차가 놓여 있다. 소우지의 애마(愛車)일까? 토시오는 그 옆에 차를 세웠다.

황량한 정원이었다. 저택 맞은편은 낮게 경사져 있고,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왼쪽의 기하학적인 녹색 면이 이야기로 들었던 미로인 것 같다. 연못과 미로 건너편에는 녹나무, 소나무 등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카오리는 빨간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카오리만 알고 있던 토시오에게 카오리의 모습은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카오리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표정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가슴이 풍만하게 솟아오른 모습은 지금까지의 카오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토시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카오리의 뺨에 금방이라도 수줍은 홍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방으로 안내할게요."

카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탑 아래가 홀이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바로 카오리의 방이었다. 계단, 난간, 문짝의 나무는 모두 세월의 흔적이 묻어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은 지금까지의 건물 인상과는 달리 밝은 색채로 가득했다. 창문이 두 개 있는데, 한 쪽 창문을 통해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이 아래가 오빠 방, 그 앞이 아버지 방이에요."

카오리 씨가 설명했다. 그 안쪽이 조리실이고, 가사 도우미의 작은 방이 있다고 한다. 2층은 카오리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아틀리에라고 했다.

"그런데 아틀리에로 마사오 씨가 이사를 올지도 몰라요."

"마사오 씨가?"

토시오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두 사람이나 되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너무 쓸쓸해 보여서요. 제가 권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결정하지는 못햇어요. 방금 전에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마사오 씨는 이 집에 계신가요?"

"그래요."

카오리는 하얀 화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연신 모양을 다듬었다.

"뜻밖의 선물 ......"

카오리는 꽃병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꽃병 옆에는 길쭉한 화장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카오리는 마사오와 소우지와의 관계를 모르는 것 같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사오를 불러들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오리는 잠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거, 전부 카오리 씨의 작품인가요?"

마이코는 아까부터 벽에 걸려 있는 여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카오리의 방에 화사한 색감이 넘쳐나는 것은 밝은 색감의 그림들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그림은 추상적인 면과 선의 교집합이 선명한 색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조금 과장된, 시제품 같은 느낌이에요."

카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듯 했다.

마이코는 그 중 한 장의 그림에 마음이 꽂힌 듯 했다. 중앙에 패턴이 있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림이었다.

"만화경을 보는 것 같네요......"

마이코는 이렇게 평했다.

"훌륭해요."

카오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만화경이라는 제목이에요. 언젠가 만화경을 보다가 그 그림의 주제가 떠올랐어요. 만화경의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애를 썼어요."

토시오는 만화경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만화경이라고 하면, 장난감?"

"그래요, 만화경. 카츠 씨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지금은 어른들이 보기에도 좋은 멋진 만화경들이 많이 팔리고 있어요."

카오리는 일어서서 유리장 문을 열고 예쁘게 채색된 원통 몇 개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원통은 미세한 체크 무늬가 있고 한쪽에 작은 렌즈가 달려 있었다.

"만화경의 원형은 영국의 데이비드 브루스터라는 물리학자가 만들었다고 해요. 원형은 통 안에 들어 있는 색종이를 사방의 거울에 비춰서 다른 쪽의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인데, 이 만화경에는 그 종이가 없죠. 파타노스코프라고 해요."

토시오는 원통에 눈을 돌렸다. 원통 안쪽에서 마이코의 얼굴이 여러 개로 분해되어 겹쳐 보였다. 그 기형적인 이미지에 숨을 죽였다.

"색종이 조각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거죠. 망원경과 만화경을 합친 거죠."

파타노스코프는 마이코에게 넘어갔다. 마이코도 신기하다는 듯이 방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파생품 중 하나인데, 작은 조각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지만 통을 움직이면 안쪽의 거울이 움직여요."

그 작은 조각은 불규칙한 색종이 등이 아니라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통을 움직이면 인물이 요염하게 얽히고 설키며 갈라졌다.

"통이 아닌 만화경도 있어요. 스피아로스코프라는 것은 두 장의 맞닿은 거울 아래에서 무늬가 있는 원반을 돌려서 그림을 변화시키는 거죠.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거예요. 안티스코프예요."

카오리는 또 다른 검은색 통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내 얼굴 좀 보세요."

그것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카오리의 얼굴이 삐뚤빼뚤하게 휘어져 있었다. 시점을 바꾸면 크고 작은 눈알이 흔들거렸다. 코만 거품처럼 날아와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만화경의 어떤 파생품에서도 기본은 변하지 않아요. 그것은 어떤 불규칙한 형태도 순식간에 규칙적인 대칭으로 바꿔버리는 거울의 마술이죠. 그런데 안티스코프는 어떤 질서정연한 대칭도 비틀어 버리고 말아요. 원통 안의 거울을 구부러뜨린 것이겠지요. 이걸로 보면 인간의 형상은 모두 벨마이어의 인형처럼 변해버리게 되지요. 이 ‘반’ 만화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의 매력은 정돈된 형태가 순식간에 그로테스크하게 변하는 기괴함이에요."

토시오는 안티스코프로 카오리가 그린 만화경을 보았다. 색채가 뒤틀리고 흐르고 기묘하게 뒤섞여 마치 썩어가는 고기 덩어리처럼 보였다.

"만화경에 열광하는 나를 보고 오빠가 만화경을 준 적이 있었어요. 작은 평범한 만화경이었어요. 한참을 들여다 본 나에게 오빠가 이상하다며 거울을 건네줬어요. 거울로 보니, 내 눈 주위에 동그랗게 먹물이 칠해져 있었어. 만화경 눈과 맞닿는 부분에 먹물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정말 장난이 심하지 않아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정부가 들어왔다.

"......어르신께서 손님을 모셔다 달라고 하십니다."

마이코와 카오리가 방을 나갔다.

토시오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택 바로 앞은 화단이었을 것이다. 잡초 사이로 기하학적인 흔적이 보인다. 왼쪽에 연못 쪽으로 튀어나온 석가산이 있고, 그 위에 기울어진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에 서면 정원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자 앞은 가파른 경사면으로, 경사면 끝자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물줄기는 연못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연못 왼쪽 안쪽에 있는 미로에 눈이 갔을 때였다.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볼품없죠?"

정신을 차려보니 카오리가 옆에 서 있었다.

"이런 정원도 운치가 있지요."

토시오의 말에 카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츠 씨, 아첨을 잘 못하시네요."

카오리는 토시오와 함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 하늘 저 멀리."

카오리가 중얼거렸다. 쳐다보니 카오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히로 씨가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마사오 씨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을 텐데...."

젊은 여성과 단둘이 있는 방에서, 그것도 여성이 감상에 젖어 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카오리는 토시오를 잠시 쳐다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우다이 씨 이야기란, 무슨 이야기인가요?"

모처럼의 배려이긴 하지만 마이코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어려워 보이던데요."

"맞습니다 ......."

토시오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첨을 잘 못한다는 말을 듣고 위축되어 버린 것 같았다. 대답은 당연히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다.

"연분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을 아시나요?"

카오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요. 열애일 거에요."

"알고서 주셨군요."

"카오리 씨의 희망이었으니까요. 슌키치씨가 오늘은 오지 않을 줄 알기도 했고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으니 회사가 바쁘겠죠."

카오리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당신, 대단해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좀 더 센스 있는 대사를 쓰지 않으면 안 돼요. 이런 건 어때요?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토시오는 카오리의 말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광대 같다고 생각했다.

"시도해 보지 않겠어요? 사실은, 진짜 미로가 있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제 미로에 관한 책도 조금 읽었죠."

"그럼 잘 알고 있겠군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카오리는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복도로 나와 현관을 등지고 정원에 면한 문을 열었다. 문은 무거운 기척을 내며 열렸다. 화단으로 나가는 돌계단을 내려가서 화단을 지나면,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로 굽이굽이 연못을 향하고 있었다. 연못은 예상외로 물이 맑고 깨끗했다. 카오리의 모습을 발견한 새하얀 오리 서너 마리가 헤엄쳐 왔다.

"샘이 의외로 풍부해요."

카오리는 한 마리씩 오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못을 따라 왼편으로 가니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 나왔다. 광장 중앙에 높은 담장 같은 울타리가 보였다.

카오리는 울타리 앞에 섰다. 그곳은 울타리가 끊어지고 안쪽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입구인데, 자신 있어요?"

"있습니다."

토시오가 대답했다.

"그럼 안내해주세요."

"카오리 씨는 미로 길을 모르시나요?" 

"몰라요. 어렸을 때는 오빠랑 자주 놀았는데, 그 때는 작은 나뭇가지의 조합이나 길의 느낌으로 절대 길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아이는 그런 직감이 예민하잖아요. 카드 뒷면의 작은 얼룩을 기억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미로에 계속 들어가지도 않았고, 감도 둔해졌을 거예요."

"그럼, 제 손을 잡고 가시죠."

토시오는 울타리 사이로 들어갔다. 카오리는 토시오의 오른손을 잡았다. 토시오는 미로에 들어가자마자 왼손을 뻗어 울타리 왼쪽에 댔다.

"뭐하는 거에요?"

"미로 책에 나온 방법이에요. 이 왼손은 절대로 울타리에서 떼지 말고 걸어야 해요.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왼손을 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있어요. 다만, 조금 돌아갈 수는 있지만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길은 쾌적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울타리 덤불이 길을 좁게 만들고, 나뭇잎에는 어제 내린 비가 아직 묻어 있었다. 서너 번 모퉁이를 돌자,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왼손만이 의지할 수 있는 길잡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가에 타원형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의자요. 길을 잃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돌의 중앙에는 빗물을 통과시키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토시오는 의자 앞을 지나쳤다.

꽤나 긴 길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도착했나요?"

하지만 그것은 둘이 들어왔던 원래의 입구였다.

"실패했네요."

"아닙니다. 자, 아직 손이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죠. 책에 보면 미로를 한 번 빠져나와서 바깥쪽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고 나와 있었어요."

"융통성 없는 방법이네요, 뭐, 괜찮아요."

두 사람은 미로의 바깥쪽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서 이 미로가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뒤에서 카오리가 말했다.

"내기할까요?"

"무엇에요?"

"만약 카츠 씨가 골인하지 못하면 모두가 모였을 때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는 잘못하는데요."

"하지만 미로에는 자신이 있지요?" 

"네, 있어요."

"있어요. 그럼 내가 골인 지점에 도착하면?"

"카츠 씨에게 키스를 할게요."

카오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왠지 모르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자 다시 입구로 나왔다.

"내가 이겼네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토시오는 카오리의 손을 놓았다. 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 미로와 복연결 미로 두 가지가 있어요. 단연결 미로라면 지금의 방법으로도 골인할 수 있어요. 따라서 이 미로는 복연결 미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연결이 뭐예요?"

"이 미로의 울타리를 모두 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지금 끈의 한쪽 끝을 잡고 공중에 매달아 놓았다고 생각하면, 단연결 미로라면 모든 끈이 다 들어올려질 수 있어요. 하지만 복연결 미로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땅 위에 남겨진 밧줄이 생기게 됩니다. 햄튼 코트의 미로 역시 복연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복연결 미로에서도 골인 지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뭐라고요?"

"예를 들어 백묵 등으로 길의 왼쪽에 선을 긋고 가는 거죠. 모퉁이를 돌면 원하는 방향으로 꺾어가는 거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양쪽에 두 줄로 체크된 길을 만날 때가 있어요. 양쪽에 두 개의 선이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갔다가 다시 돌아온 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피해서 지나가야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최단거리의 길을 찾을 수 있고요. 즉, 표시된 길 하나만 따라가면 되니까요."

"좋은 방법이네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잠입한 테세우스는 미녀 아리아드네스로부터 받은 비단실 구슬을 풀면서 나아갔다고 하죠. 테세우스도 분명 같은 생각이었겠지요. 비단실을 가져올까요?"

"백묵을 준비해 왔어요."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백묵의 작은 상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왼손으로 벽을 쓰다듬으면서 갈 수는 없겠지요."

"그럼 나는 잠시 볼일을 보고 다시 올게요."

카오리는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기는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알아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약속이 있어요."

카오리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 최단 거리를 찾아줘요."

라고 말하고는 빙글 돌아서서 달려갔다.


미로를 백묵으로 체크하며 진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땅은 어둡고, 백묵은 쉽게 끊어졌다. 땅에 웅크리고 선을 긋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탓에 토시오는 몇 번이고 일어나서 허리를 크게 펴야 했다. 카오리는 현명하게도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작업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 나중에 경찰 수사관에게 끈질기게 추궁을 당하게 되지만, 십오 분, 삼십 분 정도인 것 같았다.

갑자기 날카로운 폭발음이 들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폭발음은 한 번 뿐이었다. 토시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돌아온 고요함은 이전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작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쿵'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에 이어 물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폭발음으로 인해 청력이 예민해져 있지 않았다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금세 작아졌고, 곧 사라졌다.

토시오는 무언가 모를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느다란 백묵의 선을 따라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렸다. 폭발음의 방향은 물론이고 방향도 알 수 없다.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미로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길을 잘 살펴본 덕에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것만은 면했다.

미로를 벗어나자마자 연못 쪽으로 돌아갔다. 길은 그 길밖에 몰랐기 때문이었다. 언덕길을 화단 쪽으로 올라가려다 마주오던 마이코와 부딪혔다.

"무슨 소리야?"

마이코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르겠어요. 미로 속에 있었으니까요."

"연못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

"연못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로 안에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그럼 전망대 정자 쪽으로 가보자."

마이코는 방금 왔던 화단 길을 되돌아갔다. 저택 앞에 소우지가 서 있었다.

"오, 비스크, 아니, 우다이 씨였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소우지 씨는?"

"제 방에 있었어요. 왠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와 보았습니다."

"정자 쪽으로 가 보시죠."

세 사람은 일단 저택 앞을 나와 주차장이 되어 있는 공터 앞을 지나 정자로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갔다.

정자에 도착하기 전,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붉은 옷이 보였다. 그 옆에는 마사오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부인,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오리는 연못을 바라보며 마사오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토시오는 카오리를 일으켜 세웠다. 토시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카오리의 얼굴 밑에 고인 피였다.

카오리의 얼굴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왼쪽 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알이 부서지고 찢어진 붉은 살덩어리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매캐한 피 냄새 속에서 토시오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카오리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이 사라지고 주위가 하얗게 변했다. 그는 자신이 기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