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최면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최면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5/01/31

사라지는 아들 - 안도 요시아키 / 오정화 : 별점 2점

사라지는 아들 - 4점
안도 요시아키 지음, 오정화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가미 호수 가족 여행 중 아들 케이스케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이 살해당했다고 말했다. 아들과 최면 치료를 받으러 간 가즈오는, 케이스케가 33년 전 사가미 호수에서 살해당했던 '오이카와'라는걸 알게 되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33년 전, 사건 직전으로 돌아간 가즈오는 오이카와 사건이 일어나는걸 막았다. 그러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뒤, 아들 케이스케가 태어나지도 않은 현실에 좌절했다. 오이카와가 죽지 않으면, 케이스케는 태어나지 못할 운명이었다...

타임 슬립, 즉 시간 여행과 환생이라는 소재를 결합하여, 한 가족 관계의 수수께끼와 33년 전 사건의 진상을 풀어나가는 작품. 주인공 가즈오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33년 전의 사건을 풀어나가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장점이라면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세 번에 걸친 시간 여행을 통해 사쿠마가 아니라 센다가 진범이라는 진상이 드러나고, 후미요의 증언에 의해 센다가 처벌받은 뒤 통해 가족이 다시 회복되는 결말까지 잘 짜여져 있습니다. 

가즈오의 두 가지 딜레마도 흥미를 더해줍니다. 첫 번째는 아들 케이스케는 오이카와의 환생이고, 가즈오는 범인 사쿠마의 환생이라고 믿게 된 상태에서 '전생의 내가 죽인 사람이 환상한 뒤, 내가 환생한 그 사람의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오이카와가 살해당하지만 그를 살리면 아들 케이스케가 태어나지 못하는데 그를 살릴 것인가?'라는 것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타임 패러독스로도 꽤 그럴듯한 부분이었어요.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를 바꾸고 현재로 돌아오면, 역사와 기억이 다시 쓰여져서 기억이 사라지고 만다는 설정도 괜찮았습니다.

또한, 33년 전 당대의 배경을 생생하게 재현한 점도 눈에 띕니다. 견직물 공장의 공정은 물론, 하치오지 특산물인 넥타이 직물을 둘러 싸고 벌어졌던, 미국과 일본의 섬유 협상 탓에 어려움에 처한 공장들 분위기가 생생합니다.
소니 트리니트론 텔레비젼, 아이돌 야마구치 모모에, 세이코의 로드매틱 시계 등 소품들도 잘 그려지고 있는데, 특히 자동차들에 대한 언급이 상세합니다. 사쿠마는 히노 자동차의 콘테사, 오이카와는 닛산 스카이라인(원래 GT-R을 가지고 있었다), 센다는 토요타 크라운을 탄다는 식으로요. 그런데 차종과 인물을 잘 배치한 것 같아서 재미있었어요. 약삭빠르고 치고 빠지는데 능한 사쿠마는 소형차이자 레이싱카로도 진화했던 콘테사가, 흑막이자 거물 센다에게는 중후한 토요타 크라운이 잘 어울리니까요. 오이카와가 연인 후미요의 빚을 갚기 위해 차를 GT-R에서 스카이라인으로 바꿨다는건 돈의 흐름을 알려주는 중요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차종만큼은 고집한 점에서 뭔가 남자의 자존심같은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이카와는 정말 한 우물만 파는 우직한 남자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가즈오가 33년 전에는 통용되지 않는 지폐를 가지고 있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과 상표로 만들어진 유니클로 점퍼와 나이키 신발로 오이카와에게 추궁을 받으며, 스마트 폰을 들켜 카메라로 얼버무리는 등 미래에서 와서 겪는 고초도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설정이 정교하지 못한건 단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초반에 가즈오가 오이카와를 살해했다는 꿈 때문에, 가즈오는 사쿠마의 환생인 것처럼 끌고 가지만 알고보니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가즈오는 사쿠마는 물론, 오이카와 살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었다는게 진상이지요. 이는 앞서의 딜레마 - 나는 살인범의 환생이고, 아들은 내가 죽인 피해자의 환생 - 로 흥미를 주기 위해, 억지스럽게 설정을 집어 넣은 느낌입니다. 가즈오가 이런 꿈을 꾼 이유도 설명해 주지 않으며 대충 수습하는 전개 역시 영 별로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사쿠마가 진범이 아니고 센다가 악인이었다는건 꽤 이른 시간에 눈치챌 수 있을 뿐더러, 사쿠마와 센다의 관계, 센다의 범행 및 동기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묘사되지 않는 탓이 큽니다.
우선 센다가 사가미 호수에서 오이카와를 살해한건 완전 범죄를 노렸을 텐데, 그 자리에 후미요가 있었던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둘이서만 만났어야 했습니다.

또 센다가 오이카와를 살해할 정도로 후미요를 가지고 싶었다면, 범행 후 그녀와 결혼하거나 살림을 합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흥미와 재미를 위해서라면 후미요와 센다가 합친 미래가 훨씬 나았을 겁니다. 가즈오에게 센다가 '삼촌'이 아니라 '아버지'로 인식되어 있다면 극적인 효과가 배가되었을 테니까요.
같은 이유로 오이카와가 친부라는걸 가즈오가 진작에 눈치챘다면, 앞서 두 번째 딜레마가 더 강하게 와 닿았을겁니다. 이런 부분의 전개는 여러모로 아쉽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흔해빠진 시간 여행물이지만, 흥미로운 소재들을 잘 엮어서 소소한 재미를 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핵심 설정 곳곳이 설명이 부족하고 오류가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2024/08/23

괴물이라 불린 남자 - 데이비드 발다치 / 김지선 : 별점 1.5점

괴물이라 불린 남자 - 4점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북로드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머스 데커는 미해결 사건을 다루는 FBI 수사팀의 일원이 되었다. 팀의 첫 사건은 데커가 주목한, 고등학교 미식축구 스타 출신 사형수 마스 사건이었다. 멜빈 마스는 20여년 전 부모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집행 당일에 찰스 몽고메리라는 사형수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하여 형 집행이 정지되었다.
데커와 수사팀은 몽고메리가 돈을 받고 위증을 했다는 증거를 찾아냈지만, 몽고메리는 사형 집행을 당했고 그의 아내도 폭발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데커는 마스의 부모 사진이 없는 것, 마스가 전국구 스타가 된 뒤 사건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주목하여 마스의 부모가 증인 보호 프로그램 대상자와 같이 의도적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고 추리했다. 그리고 마스의 아버지 로이가 사건의 핵심 인물이라는걸 밝혀내는데...


특이한 능력을 지닌 수사관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수사하다가, 사건 배후에 거대한 국가적인 음모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챈다는 흔해빠진 스릴러. 전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 이어지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 수사관으로 과잉 기억 증후군에 시달리는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입니다.

멜빈 마스 시점에서의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사형 집행 당일, 누군가 자기가 진범이라고 고백해서 살아났는데 그 누군가가 알고보니 진범이 아니었다면, 나는 다시 사형수가 된다는 뜻이니 매 순간 순간이 긴장될 수 밖에 없지요. 20년이나 버려두었다가 사형 집행 당일이 되어서야 그를 구해준 '누군가'의 의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구해줄거면 더 빨리 구해주던가, 아니면 아예 죽게 내버려두는게 맞을텐데 왜 하필 이 시점에?
마스의 어머니가 말기 뇌종양이어서, 남편이 그녀가 편한 죽음을 맞도록 도와준 뒤 살해당한 걸로 위장했다는 진상도 괜찮습니다. 원래 아버지 로이는 소싯적에 흑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테러에 가담했다가, 보험삼아 테러 증거물을 훔치고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스가 슈퍼스타가 되어 행적이 노출되자 다시 죽은척 몸을 숨기게 된 겁니다. 이는 마스의 부모님이 전국방송에 등장했던게 사건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추리와도 연결되며, 숨어 지내고 싶었지만 아들의 출세가 발목을 잡고 만 아이러니한 상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스 이야기 외 다른 모든 부분은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너무 엉망이라서 무엇부터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우선 사건부터 설득력이 없어요. 마스에게 누명을 씌운게 아버지 로이였다는 것부터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약 조직의 성노리개였던 여자를 사랑해서 탈출했는데, 그 여자가 마약 조직 보스의 아이를 임신했었고 그게 마스였다! 더러운 놈에게 복수를 직접 하지 못했으니 그 자식에게 복수하겠다!는 동기인데 황당하기가 그지 없어요. 이걸 추리해내는건 더더욱 말도 안되니, 추리물로 볼 여지도 없습니다. 등장하는 단서라고는 마스의 어머니가 스페인어를 잘했다던가, 집에 은제품이 있었다(조직의 물건을 훔쳐서 나온것)는 정도인데, 이걸로는 턱도 없지요.
마스에게 최면을 걸어 들은 '초차'라는 말을 근거로 로이가 죽은 척 몸을 숨겼다고 추리한 것도 말이 안됩니다. '초차'는 콜롬비아 칼리 지방의 방언으로는 '주머니쥐'이고 주머니쥐는 죽은척한다는 이유인데, 근거도 빈약하고 억지로 가져다붙인 느낌만 전해줍니다. '창녀'라는 명확한 일반 명사가 있는 단어에 전 세계에서 딱 한 지방에서만 쓰는 방언으로 해석한다는건 억지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요.
20년만에 구해준 이유도 너무나 사랑했던 아내의 '아이는 구해달라'는 유언을 따르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처구니가 없지요. 병주고 약주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과거 마스 사건에서 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은 이유도 불분명합니다. 사건 당일, 모텔 직원의 증언으로(나중에 위증일 수 있다는게 밝혀지지만) 마스가 집에 들러 범행을 저지를 시간이 있었다는건 증명됩니다. 그런데 마스가 사건을 저지를 동기는 제대로 증명되지 못합니다. 가정 불화가 특별히 언급되지도 않았는데, 얼마가 될 지도 모르는 미래의 계약금 일부 때문에 부모를 죽인다는게 그렇게 설득력있는 동기인가요? 누가 보아도 마스는 수천만불의 연봉을 받을 슈퍼스타가 되었을텐데 말이지요. 어머니 루신다의 혈흔이 마스의 차에 남아있다는건 증거가 될 수 없어요. 이전에 코피를 흘리거나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변호사만 잘 선임했어도 마스가 사형선고를 받을 일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로이가 마스에게 누명을 씌우는게 그렇게 철저하지는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따라서 이야기도 치밀함, 정교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지게 만듭니다.

데커가 NFL에서 뛰었던 미식축구 선수였고, 오래전 시합에서 마스와 겨루었다는 과거가 마스와 연결되어 사건이 시작되고, 결국 둘이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데커의 독특한 특기(?)인 과잉 기억 증후군이 이 작품에서 하는 역할은 전무하다는 점에서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의 정체성을 흐립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제대로 된 팀을 꾸리지만 팀원들이 하는 역할도 없어요. 심지어 동료 대븐포트는 비교적 초반에 납치되어 멤버에서 빠지는데,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에요. 다른 멤버들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동료로 여겼던 마스의 변호사 올리버가 알고보니 과거 테러를 저질렀던 삼총사의 밀정이었다는 반전도 별로입니다. 올리버가 주장하던 마스를 위해 제기했던 소송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증거입니다. 삼총사 중 한 명인 매클렐런과 함께 찍은 사진같은 억지 증거는 불필요했습니다.
로이가 소싯적 손재주(?)가 좋아서 폭탄을 만들어 테러에 가담했지만, 70대가 된 현재에도 신출귀몰하며 FBI와 거물 킬러들을 엿먹이는 전문가가 된 경력도 불분명하고, 죽기 전 데커에게 지갑을 남겨 도서관증 --> 대출한 책 --> 금고 열쇠로 이끄는 과정도 설득력이 떨어지고, 과거 삼총사가 저질렀던 테러 증거가 황당할 정도로 상세했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요. 뭐 하나 제대로 와 닿는게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초반부는 분명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질낮은 흔해빠진 헐리우드 스릴러로 마무리됩니다. 인기 요소는 잔뜩 집어 넣었지만 설득력도 낮고 정교함도 떨어지는 탓입니다.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시리즈가 이 뒤로도 몇 편 더 이어지는 듯 한데, 더 읽을일은 없겠네요.

2023/12/15

"우먼 인 윈도"에서 소개된 애나 폭스의 영화들

"우먼 인 윈도" 속에서 소개된 애나 폭스의 영화들 목록입니다. 책 뒤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10월 24일 일요일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The Man Who Knew Too Much)
1956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도리스 데이 주연, 히치콕 감독이 자신이 1934년 만든 동명의 영화(영국) 를 리메이크한 작품, 휴가를 보내던 가족이 암살 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으로, 극중에서 도리스 데이가 부른 'Que Sera, Sera'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수상했다.

길다(Gilda)
1946년. 미국. 찰스 비도르 감독, 리타 헤이워스, 글렌 포드 주연, 도박꾼 조니는 카지노 사장의 심복이 된다. 사장의 집에 초대받아간 조니는 사장의 부인이 된 전 애인 길다를 만난다. 두 사람은 강하게 이끌리고 선을 넘는다. 리타 헤이워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이다.

10월 27일 수요일
과거로부터 (out of the Past)

1947년, 미국, 자크 투르뇌 감독. 로버트 미첨, 제인 그리어 주연, 왕년의 사설탐정으로, 지금은 은퇴하고 주유소에서 일하는 제프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조용히 살아가려던 그의 앞날에 과거의 위험한 사랑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에어플레인(Airplane)
1980년. 미국. 데이비드 주커, 제리 주커 공동 감독 및 주연, 택시 기사인 테드 스트라이커는 공군 조종사로 참전한 기억 때문에 비행공포증을 앓는다. 어느 날, 비행 승무원인 여자친구 일레인이 결별을 선언하자 테드는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비행기에 오른다. 그런데 식중독으로 기장이 정신을 잃고, 테드가 조종간을 잡게 된다.

10월 29일 금요일
디아볼릭(Les Diaboliques)

1955년, 프랑스,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 시몬 시뇨레, 베라 클루조 주연, 폭력적인 남편인 미셸 때문에 괴로워하는 크리스티나에게 미셸의 정부인 니콜이 찾아와 함께 그를 죽이자고 제안한다.두 사람은 성공적으로 미셸을 죽이고 시체를 수영장에 던지지만, 그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몰락한 우상(The Fallen Idol)
1948년, 영국, 캐럴 리드 감독. 랠프 리처드슨, 미셸 모건 주연, 런던의 프랑스 대사관, 대사관 집사의 아내가 죽고, 유일한 목격자는 어린 소년 필립이다. 유럽 심리 스릴러의 고전.

공포의 내각(Ministry of Fear)
1944년, 미국, 프리츠 랑 감독, 레이 밀랜드, 마조리 레이놀즈 주연, 제2차 세계대전 중 출소한 닐이 뜻하지 않게 첩보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10월 30일 토요일
39 계단(The 39 Steps)

1935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로버트 도넷, 매들린 캐럴 주연, 리처드는 자신이 첩보원이라고 주장하는 애너벨라를 돕는다. 다음 날 새벽, 애너벨라가 공격을 받아 죽고, 살인 혐의를 뒤집어쓴 리처드는 도망자가 된다.

이중배상(Double Indemnity)
1944년, 미국 빌리 와일더 감독, 프레드 맥머레이, 바버라 스탠윅 주연, 보험회사 직원인 월터는 고개인 디트리히슨의 집에 방문 했다가 그의 아내 필리스의 유혹에 넘어간다. 두 사람은 디트리히 슨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보험사는 이를 수상하게 여기고 수사에 들어간다.

가스등(Gaslight)
1944년, 미국. 조지 큐커 감독. 샤를르 보와이에, 잉그리드 버그먼, 조셉 코튼 주연. 폴라는 잘생긴 그레고리와 결혼해 상속받은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폴라의 외출을 막고,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몰고 간다. 가스라이팅 (gaslighting)'이라는 심리학 용어와 관련이 있다.

파괴공작원(Saboteur)
1942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프리실라 레인, 로버트 커밍스 주연, 공장에서 일하던 배리는 화재로 친한 친구를 잃고 방화범으로 몰린다. 배리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방화의 배후에 있는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려 한다.

빅 클락(The Big Clock)
1948년, 미국, 존 패로 감독, 레이 밀랜드, 찰스 로튼 주연, 어떤 이를 살해한 언론 재벌 얼은 무고한 남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다. 남자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 한다.

그림자 없는 남자(The Thin Man) 시리즈
1934~1947년, 미국. 윌리엄 파월, 머나 로이 주연, 은퇴한 경찰인 닉 찰스와 그의 아내 노라 찰스가 사건을 풀어가는 코미디 탐정물, 은퇴한 형사인 닉 찰스는 부유한 집안의 딸 노라와 결혼한다. 닉은 느긋하게 은퇴 생활을 누리고 싶어하지만 스릴을 원하는 노라 때문에 이런저런 사건에 뛰어든다. 대실 해밋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시리즈로, 모두 6편이 있다.

도살자(The Butcher, Le Boucher)
1969년, 프랑스, 이탈리아. 클로드 샤브롤 감독, 스테파니 오드런, 장 얀느, 안토니오 파살리아 주연, 시골 학교에 부임한 교사 엘렌은 푸줏간 주인 포폴을 만난다. 포폴은 엘렌에게 반해 사랑을 고백하지만 엘렌은 거부한다. 한편 마을은 연쇄 강간, 살해 사건으로 흉흉해지고 엘렌은 포폴을 의심한다. 히치콕을 모방했으면서도 히치콕보다 더 히치콕답다는 평을 받았다.

다크패시지(Dark Passage)
1947년, 미국, 델머 데이브즈 감독, 험프리 보가트, 로런 바콜 주연, 빈센트는 아내를 살해한 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가까스로 감옥에서 탈옥한 빈센트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하고 그런 그를 아이린이라는 여자가 돕는다.

나이아가라(Niagara)
1953년, 미국, 헨리 해서웨이 감독. 마릴린 먼로, 조셉 코튼, 진피터스 주연.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 온 신혼 부부가 다른 투숙객 부부의 갈등에 휘말린다.

샤레이드(Charade)
1963년, 미국. 스탠리 도넌 감독. 오드리 헵번, 캐리 그랜트 주연, 남편의 재산을 노리는 남자들에게 쫓기는 여자 레지나와 이를 돕겠다고 나선 조슈아가 파리에서 겪는 일을 다룬다.

서든 피어(Sudden Fear)
1952년, 미국. 데이비드 밀러 감독, 조안 크로포드, 잭 팰런스 주연, 상속녀이자 극작가인 마이라는 배우인 레스터를 만나 결혼한다. 그러나 레스터에게는 아이린이라는 정부가 있었다. 레스터는 아이린과 함께 마이라를 죽이고 그녀의 재산을 가로채려 한다.

어두워질 때까지(Wait Until Dark)
1967년, 미국, 테렌스 영 감독, 오드리 헵번, 알란 아킨 주연, 수지는 최근에 시력을 잃었다. 그녀의 남편은 비행기에서 인형을 잠시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인형 속에는 밀수된 마약이 있었고, 악당들은 수지에게 접근해 인형이 숨겨진 곳을 알아내려 한다.

배니싱(The Vanishing)
1988년, 프랑스, 네덜란드, 조지 슬루이저 감독. 버나드 피에르 도나디우, 기니 베르보에츠 주연, 연인인 렉스와 사스키아는 여행을 떠난다. 중간에 들른 휴게소에서 사스키아가 실종되고 렉스는 그녀를 찾아 주변을 뒤진다. 그리고 삼 년 후, 렉스에게 한 남자가 접근한다. 그는 평범한 교사로 보이지만 실은 정신병자였다.

실종자(Frantic)
1988년, 미국. 로만 폴란스키 감독. 해리슨 포드, 베티 버클리 주연, 파리로 여행을 온 부부, 리처드가 샤워를 하는 사이 호텔방에서 부인이 사라진다. 리처드는 아내의 실종이 바뀐 가방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이드 이펙트(Side Effects).
2013년, 미국,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루니 마라, 채닝 테이텀, 주드 로 주연, 우울증 환자 에밀리는 의사인 뱅크스가 처방해준 신약을 복용하고 증세가 호전된다. 하지만 몽유병 증세가 나타나면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모든 것이 약의 부작용 때문이라 믿는다.

카사블랑카(Cassablanca)
1942년, 미국, 마이클 커티스 감독,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 모로코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릭은 우연히 옛 사랑인 일자를 만난다.

밤 그리고 도시(Night and the City)
1950년, 미국, 영국. 줄스 다신 감독, 리처드 워드마크, 진 티어니 주연, 런던의 밤거리를 헤매는 해리는 은퇴한 세계적인 레슬링 선수를 만나고, 생각지도 못한 음모에 휘말린다.

소용돌이(Whirlpool)
1949년, 미국, 오토 프레밍거 감독, 진 티어니, 리처드 콘트 주연. 마비 증상으로 고통받는 여자가 최면요법을 시도한다. 하지만, 최면에서 깨어난 그녀는 기억에 없는 살인 현장에서 발견되고, 용의자가 된다.

안녕, 내사랑 (Murder, My Sweet)
1944년, 미국,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 디 포웰, 클레어 트레버, 앤 셜리 주연, 전직 사기꾼의 여자친구를 찾는 일에 고용된 필립은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미스터리에 빠진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을 영화화했다.

나이트 머스트 폴(Night Must Fall)
1937년. 미국, 리처드 소프 감독. 로버트 몽고메리, 로사린드 러셀 주연, 브람슨 부인은 고립된 저택에 사는 자산가이다. 그녀는 저택을 돌봐달라며 대니를 고용한다. 그녀의 조카 올리비아는 그에게 끌리면서도 그를 의심한다.

로라(Laura)
1944년, 미국. 오토 프레밍거 감독. 진 티어니, 데이나 앤드루스 주연, 광고회사 디자이너인 로라가 자신의 집에서 살해되고, 한 남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10월 31일 일요일
현기증(Vertigo)
1958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킴 노박 주연, 고소공포증 때문에 은퇴한 경찰 스코티는 사립탐정이 된다.그는 사건을 맡았다가 마들레인이라는 여인에게 연정을 느끼고, 마들레인이 자살한 이후 그녀를 너무나 닮은 주디라는 여인에게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
1949년, 영국, 캐럴 리드 감독, 조셉 코튼, 알리다 발리 주연,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삼류 소설가 마틴스가 친구에게 일자리를 얻으려고 비엔나를 방문하지만, 친구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 것을 알게 된다.

리피피 (Du Rififi Chez Lex Hommes)
1955년, 프랑스, 이탈리아. 줄스 다신 감독, 진 세바이스, 칼 모너 주연,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토니는 여전히 충성스러운 부하 조를 다시 만난다. 조는 토니에게 보석상을 털자고 제안한다. 이 마지막 한탕을 끝으로 은퇴하자고 말이다.

11월 2일 화요일
스펠바운드(Spellbound)
1945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잉그리드 버그먼, 그레고리 펙 주연, 정신병원의 의사로 근무하는 콘스탄스는 새로 부임한 의사 에드워드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사실 에드워드가 아니었고, 죽은 친구의 이름임이 밝혀진다. 남자는 기억하지 못하는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경찰의 추적을 받는다.

죽음의 항해 (Dead Calm)
1989년, 오스트레일리아. 필립 노이스 감독, 니콜 키드먼, 샘 닐주연,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부가 요트 여행을 떠난다. 조용할 줄만 알았던 여행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만난 한 남자로 인해 흔들린다.

레베카(Rebecca)
1940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로런스 올리비에, 주디스 앤더슨, 조앤 폰테인 주연, 수줍은 여자가 부인과 사별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 대저택에 들어가지만, 남자는 아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1월 3일 수요일
열차 안의 낯선 자들(Strangers on a Train)
1951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팔리 그레인저, 루스 로먼 주연, 프로 테니스 선수 가이는 아내를 두고 외도를 즐기며 이혼을 바라고 있다. 어느 날 가이는 기차 안에서 브루노를 만나고, 브루노는 그에게 교환살인을 제안한다. 영화 마지막에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 장면이 등장한다.

위커 맨(The Wicker Man)
2006년, 미국, 닐 라부티 감독,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 고속도로 사고로 죽어가던 모자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경찰관 에드워드는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옛 연인의 편지를 받는다.

로프(Rope)
1948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 두대학생이 재미삼아 동급생을 밧줄로 목 졸라 죽인 후 그의 시체를 아파트에 숨긴다. 이들은 완전범죄를 위해 친구와 가족을 초대해 파티를 연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1959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캐리 그랜트, 에바 마리 세인트 주연, 뉴욕의 광고업자가 외국첩보기관에 의해 정부요원으로 오해받아 살해될 위기에 처한다.

숙녀 사라지다(The Lady Vanishes)
1938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마가렛 락우드,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주연, 여행 중인 젊은 여성이 기차에서 한 부인의 도움을 받는다. 두통으로 잠이 들었던 여성은 깨어난 뒤 그 부인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찾아 나선다. "반드리카 초특급"이라는 제목 으로도 알려졌다.

11월 4일 목요일
아담스 패밀리(The Adams Family)
1991년, 미국, 베리 소넨필드 감독, 안젤리카 휴스턴, 라울 줄리 아, 크리스토퍼 로이드 주연, 아담스 가에 이십오 년간 행방불명이던 친척이 찾아온다. 1964년 TV 시리즈로 방영된 동명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으로, 개봉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미스터 에드(Mister Ed)
1961~1966년, 미국, 저스터스 아디스 외(外) 감독. 앨런 영, 코니 하인즈 출연, 미국 C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TV 시리즈. 말하는 말인 에드와 그 주인의 좌충우돌을 다루었다. 이 소설에서 애나가 올리비아에게 언급한 물론(Of course)이라는 말이 주제가에서 말장난으로 반복된다.

11월 5일 금요일
무법자(The Outlaw)
1943년, 미국, 하워드 휴즈, 하워드 혹스 감독. 잭 부텔, 제인 러셀 주연, 서부의 무법자들이 리오 맥도날드라는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좌충우돌한다. 제인 러셀이 전형적인 핀업걸 이미지로 등장하는 포스터로 유명하다.

열정(Hot Blood)
1956년, 미국, 니콜라스 레이 감독, 제인 러셀, 코넬 와일드 주연, 열정적인 여성 애니와 정략결혼으로 얽힌 형제 이야기, 집시 스커트를 입고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제인 러셀을 담은 포스터로 유명하다.

11월 7일 일요일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
1943년, 스릴러,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테레사 라이트, 조셉 코튼 주연, 미국 소도시에 사는 찰리의 단조로운 삶은 이름이 같은 찰리 삼촌이 찾아오면서 활기를 띤다. 그러나 찰리는 삼촌이 연쇄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진다.

이창(Rear Window)
1954년, 미국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그레이스 켈리 주연, 다리를 다친 사진작가가 이웃들을 엿보는 것으로 소일하던 중 한 이웃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확신한다.

11월 8일 월요일
싸인(Sign)
2002년, 미국, 나이트 샤말란 감독. 멜 깁슨, 호아킨 피닉스 주연.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 옥수수 농장을 운영하는 그레이엄은 어느날 원과 선으로 만들어진 복잡하면서도 거대한 미스터리 서클을 발견한다.

로즈메리의 아기 (Rosemary's Baby)
1968년, 미국, 로만 폴란스키 감독. 미아 패로 주연, 새로운 아파 트로 이사 온 젊은 부부가 이상한 일들을 겪게 되고, 부인이 임신한 후에 더욱 심각해진다.

침실의 표적(Body Double)
1984년, 미국.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크레그 워슨, 멜라니 그리피스 주연, 단역배우 제이크는 폐소공포증 때문에 배역을 잃는다. 애인에게서도 버림받은 제이크는 다른 사람의 집을 관리해주기로 하고, 그 집에서 이웃 여자를 훔쳐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끔찍한 일에 휘말린다.

욕망(Blow-up)
1966년, 영국, 이탈리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세러 마일스 주연, 런던의 사진작가가 황량한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정리하던 중 의심스러운 것을 발견한다.

2023/08/26

명탐정의 제물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 2.5점

명탐정의 제물 - 6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리뷰에는 트릭, 진상 그리고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탐정 오토야 다카시의 조수 리리코는 민박집에서 일어났던 밀실 사건을 멋지게 해결한 뒤, 학회에 참석해야 한다며 사무실을 떠났다. 귀국 예정일이 지나도 리리코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오토야는 가이아나의 조든 타운으로 향했다. 알고보니 리리코는 짐 조든이 이끄는 종교의 광신도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 조든 타운을 조사하기 위해 찰스 클라크가 조직한 조사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착 직후 오토야와 동행했던 저널리스트 노기가 타운의 보안군에게 총살당했고, 뒤이어 클라크 조사단원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불가능 상황에서 살해된채 발견되었다. 리리코는 오토야와 함께 조사를 펼친 끝에 미국 하원의원 라일랜드가 조든 타운을 방문한 날,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사건들은 모두 사고였고 불가능 상황이 된 건 신도들의 의지였다는 추리를 밝혔다.
그러나 라일랜드 일행을 타운 보안군이 사살하고 리리코마저 살해당한 날, 오토야는 대규모 자살쇼를 앞둔 조든과 신도들 앞에서 숨겨져 있었던 진상을 폭로하기 시작하는데....

최근 추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어 있는 일본 본격 추리물. 2023년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을 비롯하여 '고노미스',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등 유명 미스터리 어워드 상위권을 휩쓴 작품이지요.

유치해보이는 표지와 부제 탓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화려한 수상 이력이 증명하듯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가 높다는게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조든 타운에서 벌어진 무려 4건의 불가능 범죄를 비롯하여, 도입부의 요코야부 요스케 밀실 살인 사건 등 사건도 풍성하고, 사건에 관련되어 있는 단서가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며, 오토야와 리리코를 통해 각 사건마다 여러가지 추리가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리리코가 왜 오토야에게 가짜 서명이 되어 있는 <<탐정 교과서>>를 가져왔었는지 등 사소하지만 디테일한 추리들도 잘 짜여져 있고요.
특히 핵심이 되는 조든 타운에서 벌어진 불가능 범죄에 대한 트릭과 추리가 기발해서 만족도가 높습니다. 사건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은데요.
  1. 전 FBI 조사관으로 인민교회 간부로 위장한 알프레드 덴트가 밀실인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죽음.
  2. 조든 타운 요리반 멤버들과 티 타임을 갖던 사이비 과학 탐정 조디 랜디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었는데, 차는 함께 했던 요리반 멤버들 모두가 같이 마셨음.
  3. 한국인 이하준이 상, 하반신이 토막난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이하준은 가방에 갇혀서 오토야와 리리코의 눈을 피해 빠져나갈 수 없었음.
  4. 묘지에서 리리코를 살해한건 아이였는데, 묘지 관리인 크리스티나는 아이는 누구도 묘지에 절대 들어오지 않았다고 단언함.
여기서 진상은 '조든 타운의 광신도들은 스스로 아무도 질병이나 몸의 이상이 없으며, 사람들을 이상이 없는 완전한 모습으로 바라보지만 외부인들은 그들의 모습을 현재 그대로 바라본다'는, 오토야의 표현을 빌자면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를 통해 밝혀지게 됩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덴트는 이미 칼에 수차례 찔린 채로 방에 들어간 뒤 문을 닫고 밀실을 만든 뒤 죽었습니다. 그러나 방에 가던 덴트를 목격했던 Q는 덴트의 치명상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조든 타운의 신도가 몸에 상처가 있을리 없기에, 기억에 왜곡을 일으켰던 겁니다.
두 번째 사건에서 조디 랜디는 오른 손으로 차를 마시는 사람의 입이 닿는 부분에 묻혀진 독을 먹고 죽었습니다. 함께 했던 요리반 멤버 중 크리스티나는 오른 손이 없었고, 블랑카는 왼손잡이였으며 레이첼은 오른 손가락이 골절되어 오른 손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서 오른 손으로 차를 마셨기 때문이지요. 이를 위해 범인은 사전에 레이첼의 오른 손가락을 부러뜨렸지만, 레이첼은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주위 사람들도 레이첼이 다쳤다는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사건에서 범인은 감방에서 이하준을 살해한 뒤, 상하체를 토막내어 각각을 간수 프랭클린을 이용해 밖으로 옮겼습니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다리가 있다고 믿었기에, 휠체어 하반신 쪽에 설치(?)된 사체 토막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시체를 옮길 때 마다 범인에 의해 기절했던 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요. 
네 번째의 리리코 사건은 범인 레이 모튼이 어른이지만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던 탓에 아이같은 외모를 가졌던게 이유였습니다. 오토야는 실제 그대로 어린아이를 목격했지만, 묘지 관리인 크리스티나의 눈에 레이 모튼은 정상적인 성인이었기에 상반된 증언에 의한 불가능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광신자 집단의 잘못된 믿음같은 일종의 대규모 집단 최면은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기는 했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작품 중에서는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이 대표적이지요. 특정 집단 전체에 걸려있는 일종의 최면으로 정보 자체가 왜곡된다는건 동일합니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 소개된 <<다카마가하라의 범죄>>는 '현인신은 신이라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녀가 조서를 들고 2층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보초 눈에 보이지 않았다'라는, 종교 단체의 신앙으로 비롯된 현실 왜곡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는 아예 똑같은 발상일테고요.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과 트릭을 꽤 현실적으로, 설득력있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로 있었던, 정신병자 교주가 주도하여 신도들이 집단 자살했던 가이아나 존스 타운 사건 (인민 사원 사건)을 사건의 바탕으로 삼고있는 덕분입니다. 실제 사건을 본격물로 풀어내어 다채로운 트릭을 선보인 것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다소 팩션같은 느낌을 전해주는게 좋더라고요.

하지만 이 '외부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 외의 추리들은 설득력이 약하다는 문제는 큽니다. 리리코의 추리부터 살펴보자면, 그녀는 사건들은 모두 사고였다고 - 덴트는 밀실에서 실수로 칼에 찔려 죽었고, 조디 랜디는 지병인 협심증으로 사망했으며, 이하준은 간수 프랭클린으로 변장하여 휠체어를 타고 급경사에서 고속으로 도주하다가 와이어에 걸려 토막이 났다 - 생각했습니다. 이를 발견한 조든 타운의 신도들이 '질병도 없고, 사고도 없는 조든 타운'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현장을 조작했다고 추리했고요. 
그런데 협심증이야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칼이 튀어 등에 찔려 죽었다? 고속 휠체어 이동으로 몸이 토막났다? 솔직히 어이없는 발상입니다. 이런 추리에 수긍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물론 이는 사건을 대충 수습해서 무마하기 위해 억지로 풀어낸 추리였다는 전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 오토야의 '신앙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는 더 한심했습니다.
오토야는 덴트의 방을 밀실로 착각하게 만든 열쇠와 조디 랜디에게 다과회 시점에 녹아내리도록 독이 든 캡슐을 낮은 온도에서 녹는 저융점 합금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융점 합금은 별다른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조든 타운에서도 어떻게든 가공할 수 있는 소재였을 수는 있어요. 문제는 이 합금이 그렇게 흔하지도 않았을테고, 원하는 모양으로 딱 맞춰 만들기도 쉽지 않았을 뿐더러, 때 맞춰 녹아내리도록 한다는건 더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이건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사용될 수준의 트릭이었어요. 그나마 3일 전 사망했던 오토야의 지인 노기의 사체를 토막내어 이하준 사체로 위장한 뒤 발견되도록 만든 다음에 이하준을 살해했다는 추리 정도만 괜찮았습니다. 이후 이하준 사체를 토막내서 공동묘지 관리 오두막의 노기 사체와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죠.
'신앙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추리의 끝이 짐 조든이 범인이라는건 설득력이 더욱 약했습니다. 저융점 합금을 사용할 수 있고, 이하준의 사체를 빼돌리기 위해 1감옥에 갇혀 있던 오토야와 리리코를 석방시킬 수 있었던건 짐 조든 밖에 없었다는게 근거인데, 애초에 저융점 합금을 사용했다는게 말도 안될 뿐더러, 짐 조든은 앞서 맹인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이 낮다는게 이미 언급되기에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조든이 카리스마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의 천벌같은 불가능 범죄를 저질렀을거라는 동기도 미흡하기 짝이 없고요. 설령 조든이 그런 생각을 했다 한들, 직접 범행을 저지를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수족같은 간부나 광신자를 이용하겠지요. 맨슨 패밀리의 찰스 맨슨이나, 오움 진리교의 이시하라 쇼코가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애초에 '명탐정' 들이 다수 등장하는 설정부터가 별로에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괴사건 해결 전문 명탐정을 실체 있었던 사건과 결합하여 풀어나가니 괴리감만 크게 느껴집니다. 오토야와 리리코를 사이비 종교 전문가로 설정해서 조든 타운으로 향하게 만드는게 훨씬 좋았을거에요.
정보도 공정하게 제공되기는 하나, 너무 과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느낌도 들게 만듭니다. 대표적인게 덴트 방 옷장의 혈흔입니다. 등에 칼을 찔렸다고 혈흔이 저렇게나 튄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문이 어떻게 열리든 그게 별로 중요해 보이지도 않았고요.

도입부의 밀실 살인 사건도 그닥입니다. 밀실 안에서 죽은 사람은 유명탐정 요코야부 유스케였고 사체에 남겨진 탄환 감식 결과, 그를 쏜 건 10여년 전 권총을 훔친 뒤 11명을 사살했던 108호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건이지요. 오토야는 추운 날씨인데도 요코야부가 얆은 옷에 난방도 켜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이는 범인이 요코야부의 겉옷을 벗겨갔으며, 그 이유는 겉옷에 총을 쏜 흔적을 숨기기 위해서였고, 따라서 요코야부는 자살했다, 이유는 요코야부가 108호였기 때문으로, 실수로 권총이 오발된 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창 밖 바다에 총과 겉옷을 버렸고, 그 때 그걸 목격한 거리의 떠돌이 소년을 쏴 죽였으며, 문만 열어두면 침입한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여겨졌겠지만 힘이 다해 문을 열기 전에 죽고 말았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리리코는 요코야부의 겉옷을 벗겨간 건 자기보다 큰 재킷을 입고 있었던 거리의 떠돌이 소년이며, 그가 바로 108호였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요코야부에게 원한을 품은 108호는 요코야부에게 총을 쏜 뒤 오토야의 추리처럼 그를 108호로 몰기 위해 총을 객실에 두고 나왔는데, 기력이 남아있던 요코야부가 창 밖의 108호를 쏴 죽인 뒤 108호로 오인받지 않으려고 권총을 던져버렸다면서요. 108호는 10년 전에도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는데 지금도 어린 소년으로 보이는 이유는, 성인이 되지 못하는 선천성 질환인 하이랜더 증후군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하는데, 이는 경찰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지게 됩니다.
오토야와 리리코의 추리는 괜찮습니다. 추운 날씨인데도 켜지 않는 나방과 입지 않은 외투, 안에서 보기에 열릴 것 처럼 보이지 않는 바다로 향한 창, 다른 객실 투숙객이 들은 물 튀기는 소리 등 단서도 잘 제공되고 있거든요. 
하지만 총을 훔쳐 11명이나 죽였던 범인이 알고보니 성장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었다는게 너무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며,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오토야가 조든 타운 신도들을 모두 독살한 진범이었다는 마지막 진상으로 이어진다는건 해도 너무했습니다. 명탐정 리리코가 고작 세 명을 살해한 잡범에게 살해당했다는걸 인정할 수 없어서 - 요코야부는 11명을 죽인 108호에게 죽었는데! - 수백명을 참살하도록 만들었다는데, 정말 가관이었어요. 일본식 명탐정 허세의 극을 달리는, 정신줄 놓게 만드는 황당한 동기였습니다. "탐정은 때로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며 탐정의 역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도 옥의 티이고요. <<유리탑의 살인>>도 그렇고, 왜 이렇게 명탐정이라는 존재에 목숨을 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동기야 어쨌건 오토야가 독을 탔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루이스의 유서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에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어요. 신도 중 생존자였던 Q가 루이스가 이상했지만, 당시 조든 타운 신도였기에 이를 몰랐다는 주장을 펴는 것 역시 입증할 증거는 전무하고요. 오토야가 범행을 순순히 인정하고 체포되어 수감될 이유가 도저히 보이지 않네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 실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추리와 결합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솜씨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만화같은 불필요한 설정, 그리고 추리에 사족이 많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본격 추리물로는 충분한 재미를 선사하는건 분명하니, 추리 애호가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3/04/23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7. 곰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7. 곰 인형
토시오가 사고를 알게 된 것은 다음 날 점심, 중국집의 감도가 떨어진 TV를 통해서였다.
토시오는 오전에 조사 보고서 작성에 몰두했다. 마이코가 지시했던 업무였다. 그녀는 업무 지시 후 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토시오는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가,  무심코 보고 있던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았다.
".... 오늘 오전 9시, 실수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아이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망한 아이는 시나가와구 니시하라 마와리 마사오(馬割真棹)씨의 장남인 마와리 토우이치(馬割透一)라는 두 살배기 남자아이입니다. 어젯밤 9시 경, 토우이치 군은 잠자리에 들기 위해 방에 들어간 뒤, 가족들이 놓아 두었던 수면제 병을 열어 약 50알을 거의 다 마셔버렸습니다. 가족들은 이를 모르고 있다가 오늘 아침에야 토우이치 군의 사망을 알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토우이치 군은 엊그제 운석 낙하로 사망한 마와리 토모히로(馬割朋浩)의 아들로, 어젯밤 토모히로의 상을 지낸 탓에 온 집안이 잠을 자고 있어 토우이치 군이 수면제를 가져간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가족은 연이은 불운에 휩싸여 있습니다. 다음 뉴스는......"
토시오는 무심코 젓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마사오의 얼굴이 TV 해설자의 얼굴과 겹쳤다. 그대로 마사오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마이코가 알면 바로 사무실에 전화를 걸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시오는 식사를 대충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구로사와가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 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를 내밀었다. 역시나, 마이코에게서 온 전화였다.
"토우이치가 죽었어."
마이코가 거칠게 소리쳤다.
"저도 방금 뉴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토모히로의 고별식은 열한 시부터야. 토모히로의 집에 가면 별 수 없겠지만, 화장터에 가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곧 가겠습니다."
"위치를 알려주지."
화장터는 교외에 있었다. 토시오는 위치를 적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연이어 벨이 울렸다. 구로사와가 다시 토시오를 불렀다.
"마이코, 있나?"
교통과 교도 형사의 전화였다.
"부재중입니다. 지금 만나기로 했는데요."
"여전히 바쁠 것 같군. 마와리 토우이치가 죽었어."
"뉴스를 통해 방금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말이 빠르겠군. 나도 방금 서에 돌아와서 알았어. 담당이 니시하라 경찰서의 나라키 경감으로 정해졌어. 마이코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네. 마이코를 만나면 나라키 경감에게 연락하라고 전해줘."

화장장은 넓은 묘지 한 켠에 있었다.
수용소를 연상케 하는 콘크리트 대기실에는 조문객들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마사오의 모습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나무 벤치에 데츠바와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토시오는 무심코 움츠러들고 말았다. 하룻밤 사이에 다섯 살, 여섯 살은 더 늙어버린 것 같았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생기고 뺨의 살도 빠졌다. 어깨선도 한 뼘 더 작아 보이는 것은 기우일까. 두 사람 모두 침묵하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토시오는 두 사람 곁에 다가갈 수 없었다.
마이코가 토시오의 모습을 보고는 인파를 헤치고 다가왔다.
"정말 혼잡하네. 어제는 흉한 날이었다고 하던데."
"교도 형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그래?"
"이번 사건은 니시하라 경찰서의 나라키 경감이 담당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나라공인가.......1과가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알는 분입니까?"
"응. 고등학교 때 동기였어. 벌써 경감이 되었나? 아, 니시하라서에는 키츠네자와 씨도 있었지?"
"우다이 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연락해 달라고 했어요."
"뭐, 이따가 연락하면 돼. 그런데 마사오는 뭐라고 해?"
"저도 지금 막 도착해서요.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이코는 조문객들 사이에서 마사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다가갔다. 마사오는 표정을 잊은듯 했다. 토시오를 보아도 감정의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거나, 기억 자체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데츠바도 마찬가지였다. 일자로 다문 입은 전혀 열리지 않았다. 마이코도 짧은 인사만 하고 두 사람의 곁을 지나쳐 왔다.
"해바라기 공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걸까?"
토시오는 회사 사람의 얼굴을 몰랐다.
"숨이 막히네. 이런 건 잘 못하겠어. 밖으로 나가자."
대기실 밖은 자갈이 깔린 마당이었다. 바람은 차갑지만 햇볕이 잘 드는 곳이었다. 마이코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조문객들이 어슬렁어슬렁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일단 나라공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이 좋겠지."
마이코는 수첩을 펴고 생각했다. 공중전화는 대합실 안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가끔씩 스피커에서 납골 차례가 된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토시오는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처는 새로 조성된 묘지였다. 묘비는 모두 새것이고 묘목도 작았다. 군데군데 꽂혀 있는 생화의 색이 선명했다.
"어머, 안 계신 줄 알았어요."
토시오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상복을 입은 카오리가 굳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밝은 햇볕 아래 건강한 피부색은 검은색 옷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카오리는 거의 껴안을 듯이 토시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 뉴스에서 봤어요.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어쩔 수 없어요. 저, 우연이라는 것이 정말 무섭네요."
카오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어제 아버지와 오빠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저는 마사오씨 집에 머물렀어요.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의 절반은 내 책임이지요."
"도대체 그 수면제는 누구의 것이었습니까?"
"돌아가신 토모 씨의 것이었어요"
"토모히로 씨는 평소에도 수면제를 먹는 습관이 있었나요?"
"아니요. 마사오 씨 부부가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던걸 알고 계시죠? 그 약은 환경이 바뀌어서 잠을 못 잘 때를 대비해서 토모 씨가 마사오 씨에게 사다 준 거라고 하더군요."
토시오는 문득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사오와 같은 약국에서 구입한 작은 약 상자가 그대로 들어 있었다.
"마사오 씨는 집을 떠나기 전에 약을 토모 씨에게 건넸다고 했어요. 그리고 여행을 떠나느라 바빠서 어디다 둔 채 깜빡한 것 같아요."
".......아이의 손이 닿는 곳에요?"
"그 부분이 좀 명확하지 않아요. 아침부터 경찰이 계속 물어봤어요. 그런데 마사오 씨도, 할머니도, 저까지 어젯밤 마사오 씨 집에 묵었던 세 사람 모두 토우이치 군이 어디서 약병을 자기 방으로 가져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해요."
"누가 토우이치 군을 재운 거죠?"
"마사오 씨예요. 어젯밤 토우이치 군은 흥분해서 좀처럼 잠들지 않았어요. 할머니가 재우려고 해도 금방 일어났지요. 그럴 만도 한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본 적도 없는 일을 시작했으니까요. 아버지와 오빠가 돌아갈 때 쯤이 되어서야 마사오 씨가 토우이치 군을 이불 속에 넣었죠."
"잠드는 모습은 보지 못했군요."
"그래요. 항상 그렇게 재우고 있어요. 토모 씨는 훈육이 엄격했거든요."
"그 방에 수면제 병이 있었던 거군요"
"결과적으로는 그렇죠. 하지만 마사오 씨는 이불을 깔고 토우이치 군을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재울 때까지 그 병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나도 그 방에 드나들었지만 당연히 보지 못했고요."
"토우이치 군이 손에 들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겠군요"
"그렇죠. 할머니가 토우이치 군에게 옷을 갈아입혔으니까요."
"그럼, 아무도 모르게 한 번 누워있던 토우이치 군이 일어나서 다른 방으로 갔다는 건가요?"
"내가 잠든 건 열두 시가 넘었을 때였어요. 마사오 씨도 같은 시간에 잠을 잤지만 거의 잠들지 못했다고 해요. 뭐 그렇다쳐도 토우이치 군이 잠에서 깬 뒤 몰래 다른 방으로 갈 수는 있었겠지만, 두 살짜리 아이가 그런 짓을 할까요?"
"안 하겠지요."
"그렇죠. 그래서인지 경찰은 더 무서운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서운 일?" 
"만약 누군가가 토우이치 군의 침대 옆에 수면제를 몰래 놓았다고 가정하면, 누가 누구와 함께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라는 거지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 때 마사오 씨 집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가능했을거라고 대답해 주었어요.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요. 누구라도 토우치군의 베개에 약을 살짝 놓고 올 수 있었어요."
"그럼 토우이치 군의 침대 옆에서 그 병을 발견한 건가요?"
"그래요. 평소에는 7시 반이면 일어나지만, 어젯밤은 늦게까지 깨어 있었으니 그저 푹 자고 있는 줄로만 알았죠. 설마 토우이치 군이 죽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누가 발견했습니까?"
"마사오 씨예요. …… 잔인했어."
카오리는 뒤를 돌아보며 천천히 무덤 사이로 걸어갔다. 토시오도 카오리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카오리는 걸음을 멈추고 빙글빙글 돌면서 토시오를 향해 말했다,
"카츠 씨는 마사오 씨를 좋아하는군요."
갑자기 말했다.
"...... 내가? 그런….."
토시오는 속으로 당황하며 말문이 막혔다. 처음 마이코가 마사오의 사진을 보여줬을 때부터 마사오에 대해 다른 여자를 볼 때와는 다른 감정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은 막연한 호의라고 생각했다. 호의 이상의 것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이 카오리에게 보였을까.
"괜찮아요."
카오리는 다시 뒷걸음질 쳤다. 변명 같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 마사오를 좋아해도 괜찮다는 뜻일까?
"..... 이것은 이것은 동그라미에 횡목과……동그라미에 가지 잎…… 오동나무……......"
카오리는 무덤의 문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문장의 이름을 잘 알고 있군요."
카오리는 토시오를 보고 살짝 웃었다.
"처음 들었어요, 당신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건."
그 말이 맞았다. 아까의 말은 가벼운 질투심이었을까. 토시오는 젊은 여자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저는 미술을 전공하고 있어요."
"화가가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수다쟁이에게 들었군요. 그리고 나에 대해서 또 어떤걸 카츠 씨에게 알려주었죠?"
"여러 가지입니다."
일부러 신경을 쓰게 하려고 돌려 말했다.
"알려주지 않을거에요? 못됐네."
알려주고 싶어도 그 이상은 알고 있는게 없었다.
"카오리 씨 집의 가문 문장은 무엇입니까?"
"......포옹하는 명자 나무요. 하지만 원래는 나사 매화였다고 하네요. 나사 매화는 매화꽃을 담은 매병의 문양이지요. 카츠 씨의 집은?"
"그게….., 모르겠어요."
카오리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그 수다쟁이가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건 거짓말이겠지요."
놀림을 당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 것 같았다. 토시오는 입을 다물었다. 카오리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모레 우리 집에 오시지 않을래요?"
"저요?"
"그래요. 모레가 내 생일이거든요. 애도 중이니 화려한 행사는 열 수 없어서 은밀하게 몇 명만 부르기로 했어요. 괜찮지요? 마사오 씨도 올지도 몰라요."
"슌키치 씨도요?"
"그 사람은 안 돼요. 분명 일이 있을 테니까요. 오늘도 바로 돌아갔어요."
카오리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카오리 씨의 아버지에게 우다이 씨가 할 말이 있다고 하네요."
"아, 그 위풍당당한 사람 말이죠. 그 사람, 당신의 상사에요?"
"네, 뭐, 그런 편입니다."
"직접 만나시면 좋을텐데. 아버지는 이제는 딱히 거물이 아니에요."
"이럴 때일수록 말을 꺼내기 힘들죠. 게다가 즐거운 얘기가 아닐 것 같아서요."
"좋아, 내가 밑밥을 깔아줄게요. 하지만 남자는 왜 일, 일만 하는 걸까요?"
"기분 나빴어요?"
"그래요."
스피커에서 마와리 가문의 이름이 들려왔다. 카오리는 화장터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 토시오로 시선을 돌렸다,
"생일에 못 온다고 미리 선물을 준 사람도 있었어요. 즉 '부재중 선물'이지요. 카츠 씨도 초대받으셨으니 꽃다발 정도는 가져오세요."

"꽤나 마음이 맞는 것 같잖아."
차 안에서 마이코가 말했다.
"생일에 초대받았어요. 우다이 씨가 만나고 싶다는 말을 데츠바에게 전해 줄 것 같네요."
"그거 고맙네. 카오리는 너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반대로 ......"
마사오를 좋아한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어젯밤에 대해 카오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이코는 가만히 토시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수면제는 마사오가 사준 거라고 했지?"
"맞습니다."
"카츠군이 사준 감기약은 어떻게 됐어?"
"아직 주머니에 들어 있어요. 상의 왼쪽에 있어요."
마이코의 손이 주머니를 뒤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토시오는 왼손을 손잡이에서 떼어내어 감기약 상자를 꺼냈다. 마이코는 상자를 열고 작은 병을 꺼냈다. 병에는 상자와 같은 선명한 녹색 디자인의 라벨이 감겨져 있었다. 마이코는 나사 뚜껑을 열었다. 처음 열 때 약간의 힘이 필요했다.
"흠, 뭔가 이상하네."
마이코가 중얼거렸다.
"토우이치의 죽음 말인가요?"
"그래. 마사오가 약을 산 것은 여행을 떠나기 직전이었어. 토모히로도 낮에 수면제 따위를 먹을 리가 없으니 포장은 버렸을지언정 병뚜껑은 열지 않았을거야. 그렇다면 처음 여는 견고한 나사 뚜껑을 두 살짜리 아이의 힘으로 열 수 있었을까? 아이 혼자서 나사 뚜껑을 여는건 어려워. 게다가 새 병의 입구에는 알약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무로 꽉 채워져 있는 법이고. 충전재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병 뚜껑을 열고 충전재를 제거한 후 일부러 병 뚜껑을 느슨하게 다시 조여 놓은 것일까요?"
"그런 무서운 일을 가볍게 단정 지을 수는 없지. 토우이치가 열어놓았던 병은 다른 병이었을지도 모르니깐."

니시하라 경찰서의 나라키 경감은 하얀 피부와 콧대가 높은 남자였다. 턱이 깎인 듯 뾰족하고, 눈썹 사이에는 깊은 세로 주름이 있었다.
"유카와 씨......아니, 실례지만, 결혼 후 이름이 뭐였습니까?"
나라키의 목소리는 높았다.
"마이코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옛날 그대로? 그럼 마이코."
"뭐라고? 나라공!"
나라키의 세로 주름이 깊어졌다. 머리카락을 칠대삼으로 나누고, 한 올 한 올 흐트러짐이 없었다.
"......역시, 이전처럼 부르도록 하죠. 그 편이 낫겠군."
"그래요. 경감님답게 말이죠. 저는 우다이라고 합니다. 나라키 경감님, 담배 한 대 피워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요. 그리고 당신은?"
토시오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서 우다이 경제연구회 직원이라고 덧붙였다.
"우다이 씨, 당신은 어젯밤 마와리 가족의 철야에 참석하셨죠?"
"네, 다녀왔습니다."
마이코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몇 시쯤까지 그 집에 있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경이 끝나고 여러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후 스님과 함께 오노와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9시 조금 전 쯤이었을 겁니다."
"토우이치 군은 아직 깨어있었군요?"
"깨어 있었습니다."
"어떤 모습이었나요?"
"어떤 모습이었냐면, 보통 아이들 모습 그대로였어요. 어른들 주변을 돌아다니고, 과자를 집어먹고, 곰 인형을 안아주기도 하고 ......"
"특별히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특이한 점은 없었어요."
마이코는 담배 연기를 나라키에게 내뱉었다.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뭔가 의심이 가는 게 있나요?"
나라키는 마이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변사니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만일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거죠."
"만일의 경우라고 하면 살인도 고려하고 있는 건가요?"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시체는 해부했겠지요. 결과는?"
"공식적인 보고는 아직 안 나왔지만……"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한 것은 틀림없겠군요."
"글쎄요."
"그 약은 마사오 씨가 구입한 약이 틀림없습니까?"
"우다이 씨, 잠깐만요. 내가 물어보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나라키 형사님. 하지만 이게 마지막 질문이니 알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라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제조번호를 약국에 대조해 봤습니다. 약은 마사오 씨가 구입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다이 씨, 오늘 마바시 토모히로 씨의 고별식에 갔었지요?"
"정확히 고별식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화장터에서 유골을 안치하는 데 참여했을 뿐입니다."
"그 동안 마와리 가문 사람들과 함께 있었겠지요?"
"그렇습니다."
"마와리 가문 사람들….. 장례식 참석자까지 포함해서요,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어요. 데츠바 씨와 마사오 씨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카오리 씨도 딱히 말씀드릴만한게 없었던건 마찬가지입니다. 나머지 분들과는 안면이 없고요. 그러고 보니 소우지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네요."
"소우지 씨는 토모히로 씨 집에 남아 있었어요."
"그랬군요. 하긴, 죽은 아이를 혼자 두면 안 되겠지요. 경감님의 질문도 있을테고."
나라키가 다시 얼굴을 찌푸렸다.
"우다이 씨. 협조해줘서 고마워요. 오늘은 이만 물러가셔도 됩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도움이 되건 없는데요. 그런데 나라키 씨, 이제부터 토모히로의 집에 가시는 거죠?"
"......"
"데츠바 씨와 마사오 씨와 카오리 씨에게 물어보실 게 남아있을 텐데요. 그녀들은 이제 집에 돌아갔을 거예요. 우리도 향을 피우러 갈 건데,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실래요?"
"아뇨, 됐어요. 아직 할 일이 조금 남았어요."
나라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호시자와 씨도 한동안 만나지 못했어요. 잘 지내고 있겠지요?"
"호시자와 군은 현 경찰로 전근을 갔어요."
"현 경찰로......."
마이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험 점수는 좋았을지 몰라도 그 정도로는 안 되는 거였군요."

마이코는 에그 속에서 나라키를 비판했다.
"첫째, 우리도 알 수 없는 것만 물어보고 있어. 히라 형사님들이 훨씬 더 잘 물어보는 것 같아. 호시자와 씨도 변함없이 쫓겨다니고만 있고 ......"
마이코는 가방에서 감기약 병을 꺼내어 토시오의 왼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조금 더 신경써서 정보를 전해줄까 했는데, 너무 태도가 별로라 오늘은 그만두기로 했어......"

토모히로 집의 장의용품은 거의 다 치워져 있었다. 주택가는 다시 원래의 고요함으로 돌아갔고, 한 사람의 죽음 따위는 잊어버린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자 향 냄새가 진동했다. 안방에는 토모히로의 유골과 사진이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토우이치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토우이치의 관은 없었다. 대신 익숙한 곰 인형이 놓여 있었다.
마와리 가문의 유족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가벼워 보였던 소우지마저도 표정이 굳어 있었다.
토시오 일행의 뒤를 이어 나라키 경감을 포함한 두 명의 수사관들이 도착했다. 수사관들의 태도는 정중했다. 조문(弔問)이 끝나자 두 사람은 별실의 응접실을 배정받았다. 마사오를 시작으로 한 명씩 응접실로 불려갔다. 심문은 길지 않았다. 사고의 자세한 내용은 이미 마사오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들었을테니, 나라키 일행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전날의 행동을 물어보았을 뿐이었다.
일행의 심문이 끝나자, 데츠바가 몸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어지럽다고 했다.
"약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요?"
마사오가 물었다. 데츠바는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빨간 라벨이 벗겨져 있었다. 병 안에는 빨간 캡슐이 반쯤 들어 있었다.
"아니, 잊지 않았어. 항상 이렇게 가지고 다닌다고. 아침 식사 후에 꼭 먹으니까. 오늘도 제대로 먹었어. 나는 다른 약은 먹을 생각이 없어. 너만 믿는다."
"어제부터 너무 피곤하신 것 같아요. 집에 가서 푹 주무세요. 따뜻하게 하고 계시고요. 소우지 씨, 그렇게 해 주세요."
소우지는 데츠바와 마사오를 보며 서성이다가 마사오가 강권하는 바람에 코트를 집어 들었다.
"우다이 씨, 미안하지만 마사오 씨를 위해 조금만 더 있어 주시면 안 될까요?"
소우지는 현관을 나가면서 마이코에게 속삭였다.
그 말을 전후로 나라키들도 자리를 떴다.
"아, 뭔가 곤란한가 보군."
마이코가 나지막이 말했다.
"카츠 군만 남아줘. 나는 또 다른 일을 해야 하니까."
그리고 현관으로 나갔다.
엔진 소리가 멀어지자 집 안은 조용해졌다. 마사오의 권유로 마사오의 어머니도 2층으로 올라갔다. 마사오의 어머니의 이름이 아키코(秋子)라는 것을 이때 알게 되었다. 아키코는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집을 비울 예정이었던 일주일 전부터 이 집에 와 있었다고 했다.
카오리와 토시오만 남았다.
마사오는 무의식적으로 토우이치의 곰인형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손이 쉴 새 없이 곰인형의 주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몇 번이고 곰인형의 등을 열었다 닫았다. 소우지의 말대로 배터리를 넣을 수 있는 주머니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동작이 마사오의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 같았다. 배터리를 넣고 곰인형이 걷는 모습을 토우이치에게 보여주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 하지만 마치 노의 가면같이 굳은 마사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카오리는 자꾸 토시오에게 말을 걸었다. 토시오는 어쩔 수 없이 복서였다는 과거를 말해 주었다. 항상 잊으려고 노력하는 일이었지만, 이날만큼은 말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다. 더 심하게 상처받은 사람이 듣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토시오는 과감하게 패배한 경기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그 정도밖에 할 말이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마침 그 때 카오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누구한테서 온 전화인가요?"
마사오가 물었다.
"슌키치 씨예요.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거절했어."
"용무가 있는 거 아니에요?"
"볼일 따위는 없어요. 너무 일 얘기만 하길래 화를 냈는데 그게 생각났나 봐요. 내가 오늘 밤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왜 전화했을까요? 정말 미친 것 같아."
"그건 안 돼요. 나 때문이라면 나는 괜찮아요. 나에게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거절하면 내가 곤란해져요."
카오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건 토시오도 알 수 있었다.
"전화는 회사에서 걸려온 거죠?"
"네."
"그럼 빨리 다시 전화하세요. 빨리 전화하지 않으면 놓쳐 버릴지도 몰라."
"마사오 씨, 미안해요."
카오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카오리가 전화를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나면 꼭 혼내 줄게요. 카츠 씨, 부탁할게요."
전화를 마친 카오리는 서둘러 현관으로 나갔다.

"좋은 때야."
카오리를 배웅한 마사오가 툭 던진 말이었다.
"술 한 잔 하고 싶어요. 카츠 씨, 같이 가세요."
마사오는 응접실 문을 열었다. 아담한 방이었다.
"어느 걸로 할까요?"
마사오는 양주 선반 앞에 섰다. 토시오는 적당한 병을 골라 탁자 위에 놓았다. 마사오는 방을 나갔다.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서른 전후의 남자였다. 초점이 흐릿한 데다 갈색으로 변색되어 특징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단단히 묶은 입술이 데츠바를 닮은 부분이 있었다.
마사오가 얼음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토시오가 바라보던 사진을 보고는 "저기, 토모히로의 아버지입니다. 류키치라는 이름이었어요."라고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데츠바씨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네요."
"비슷하긴 하지만 데츠바씨와 류키치 형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토모히로가 늘 이야기하곤 했어요."
토모히로와 소우지의 관계와 비슷했을까? 마사오는 류키치의 사진을 보면서 말을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두 사람의 아버지 때 해바라기 공예에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어요. 형제끼리 같은 일을 하다 보면 종종 그런 일이 생기죠. 게다가 두 사람의 아버지는 병약해서 해바라기 공예 일은 두 사람의 손에 맡겨져 있었어요. 개성이 강하고 재능이 있는 두 형제는 서로에게 양보하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마사오는 토시오에게 의자를 권했다. 자신은 소파에 걸터앉아 두 잔에 술과 얼음을 넣고 한 잔을 토시오에게 권했다.
"류키치는 창의적인 사람이었어요. 기츠키라든가 수영하는 금붕어. 그런 오래된 장난감을 개량해서 더 재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재능이 뛰어났어요. 한편, 데츠바도 이에 뒤지지 않았어요. 판로를 개척하고 이윤을 추구하는 상술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죠."
마사오는 약을 마시듯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술을 음미하는 모습이 아니다.
"류키치에게는 자신이 고안한 장난감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자기 것인 양 상품화하여 자랑스럽게 판매하는 데츠바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류키치는 그것을 도둑질이라 부르며 어린 토모히로에게 저 녀석은 도둑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두 분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그래도 해바라기 공예 일로 힘을 합쳤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합니다. 재산 분배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어요. 문제는 전쟁을 눈앞에 둔, 장난감 산업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던 시대였던데다가 상속권도 장남이 한 손에 쥐고 있던 시대였기에, 류키치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거지요."
마사오는 말수가 적어졌다. 무언가에 열중하지 않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결국 장남 데츠바가 오노와의 땅과 거래처를 독점해버렸어요. 류키치는 적은 자금으로 다른 회사를 차릴 수 밖에 없었지요. 주로 해바라기 공예의 하청을 맡았다고 해요. 전쟁이 끝난 후 류키치는 몇 가지 새로운 장난감을 만들었지만, 장사에 소질이 없던 탓에 상품으로서는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고요. 데츠바는 전처럼 내가 아니면 안 된다며 류키치에게서 아이디어를 싸게 사들였어요. 류키치는 아쉬운 마음에 애써 만든 작품을 포기했지만, 죽을 때까지 데츠바를 도둑놈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마사오의 얼굴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야기와 술에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류키치가 죽고 나서, 토모히로는 데츠바에게 맡겨졌어요. 나도 마찬가지지만, 마와리 가에는 친척이 별로 없었어요. 토모히로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데츠바뿐이었죠. 그러나 토모히로에게는 적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는 것과 같았던 셈이에요. 토모히로의 음울한 성격은 그런 데서 비롯되었겠지요. 아무 불편함 없이 자란 소우지 씨와 카오리 씨 사이에서 토모히로는 많이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런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어요...... 나만 말하는 것 같네요. 카츠 씨, 지루하지 않아요?"
"지루하지 않아요. 하지만 부인은 피곤하지 않으신가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요. ...... 나, 토모히로와 결혼하기 전에 병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데츠바 씨를 진료할 수 있는 거군요."
"데츠바는 의사를 싫어해요. 나는 예전에 한의학을 공부한 적이 있어요. 데츠바는 나를 믿어주고 있고요. 그게 환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죠."
"한약도 캡슐을 쓰나요?" 
"아, 그 약이요. 겉은 캡슐이지만 속은 한약이 들어있지요. 편리해졌죠?"
마사오는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학교를 졸업한 지 3년째였어요. 토모히로와 처음 만났을 때였어요. 토모히로는 위궤양 수술을 받고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했었어요. 우리는 거기서 알게 되었어요. ...... 이런 이야기 듣기 싫지 않나요?"
"아뇨, 괜찮습니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술잔에 술을 더했다.
"처음엔 토모히로는 온순하고 얌전하고 음침한 청년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고집스럽고 생각도 비뚤어진 면도 있었고요. 수술이 끝나고 결과가 좋게 나오자 밝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저와 친해지자 이기적인 환자로 변해버렸어요. 자기 얘기를 많이 하고, 내가 없으면 어린아이처럼 심술궂게 굴었지요. 하지만 면회 온 사람들 앞에서는 다시 원래의 음침한 청년으로 돌아갔어요. 그의 주변에는 마음을 달래줄 사람이 없었나 봐요. 그는 끊임없이 열등감을 가지고 사람들의 선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어요."
마사오는 술을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퇴원하던 날, 토모히로는 나에게 청혼을 했어요. 나는 망설였지만,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외로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우리는 그 해에 결혼식을 올렸어요."
"결혼해서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네라고 해야 되겠죠. 하지만 그것이 내 덕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그렇다면 소우지와의 관계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토시오는 그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토시오는 술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때요? 마음을 열게 되었나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토모히로가 카츠 씨의 회사에 새로 거래할 회사의 신용 조사를 의뢰한 것을 알고 나서야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토모히로는 데츠바 일가와 헤어지려고 했던 것이었군요."
"그리고 우리는 그날 미행을 했습니다"
"그랬군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우리는 의뢰인인 토모히로 씨는 미행할 필요가 없었는데요."
마사오는 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모님을 미행하고 있었던 거죠. 아침부터 ......"
마사오의 표정이 심하게 동요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이 크게 떠졌다.
"그것도 토모히로가 부탁한 거군요."
"그렇습니다."
"비겁한 짓이군요."
마사오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날 샹보르관 옆방에는 저와 우다이 씨가 있었어요."
마사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토시오는 말을 더 강하게 했다.
"마사오 씨의 얼굴은 그 전에 사진을 보여줘서 알고 있었어요. 어딘가에 여행을 갔을 때 찍은 사진에서 부인은 붉은색에 가까운 감색 옷을 입고 웃고 있었어요."
"올 여름에 나는 토모히로와 함께 가나자와를 여행했었지요...."
"하지만 저는 믿지 않습니다. 설령 마사오 씨와 소우지 씨가 샹보르관의 같은 방에 있었다고 해도, 거기서……."
"그만해! 그냥 평범하게 생각해 주시면 돼요. 나와 소우지는 어린 아이들이 아니에요. 평범한 어른이라고요."
마사오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술잔을 마셨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어요. 당신 남편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운석이 차에 부딪혔을 때, 자신이 도망치기 전에 당신부터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병원에서 남편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누가 봐도 남편을........"
"말하지 마세요!"
"......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잠깐만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나, 토모히로가 살아있을 때 그 일을 말해야만 했어요. 나는 소심하고 겁이 많았어요.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어요. 토모히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카츠 씨, 들어보세요. ......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나, 앞뒤가 맞지 않는 말만 하는 것 같은데?"
"이 세상에 앞뒤가 맞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요"
"토모히로는 죽었어요. 이제는 그 일을 누구에게 말해도 상관없어요. 소우지도 그렇게 만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알았어. 당신은 소우지 씨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었군요. 당신과의 관계를 남편에게 들킬까봐요."
"토우이치의 죽음은 제가 받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마사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 모습은 토시오에게 깊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토시오는 일어서서 마사오의 뒤를 돌아보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다른 이야기를 하죠."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마사오는 자신의 소파 옆에 토시오를 앉혔다..
"토모히로가 퇴원했을 때, 그는 해바라기 공예에 입사한 지 5년쯤 되었을 때로 독신으로 살고 있었어요. 휴일이 되면 나는 토모히로의 아파트에 가서 빨래를 하고, 밥을 해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었어요. ......"
지금의 카오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을 하든 만족스러운 삶…….
"어느 날, 삼촌 데츠바가 중매 이야기를 들고 왔다고 하면서 토모히로는 고민에 빠졌어요. 우리 둘의 상견례는 곧 결정되었습니다. 며칠 후, 토모히로는 나를 데리고 나사 저택으로 가서 데츠바를 만나게 했지요. 데츠바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데츠바는 토모히로가 없는 곳에서 나에게 말했주었어요. ‘토모히로는 죽은 아버지 류키치를 닮아 성격이 외골수다, 나는 토모히로의 행복을 가장 바라는 사람이다, 제발 토모히로를 부탁한다’고요. 나는 토모히로를 밝게 해줄 자신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나사 저택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어요."
그것은 평범한 사랑과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것 같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토시오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 소우지를 소개받은 것도 그 때였어요. 그는 마치 희귀한 물건이라도 보는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소우지는 자신의 방에 세계 각국의 장난감을 모아놓고 있었죠. 오래된 오르골이 달린 서양의 카라쿠리 인형,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 고베의 흑인 소년의 카라쿠리 인형, 작은 것들로는 스케로쿠(助六)의 날고 뛰는 인형, 단쥬로(団十郎)의 숨은 병풍까지, 거의 모든 유명한 장난감은 빼 놓지 않고 수집하고 있었어요. 그 하나하나를 나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것이 즐거웠던 것 같아요. 그런 희귀한 장난감은 나사 저택에는 잘 어울렸는데, 나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어요."
나사 저택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자란 소우지가 장난감 애호가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 듯했다.
"나사 저택에는 울타리로 만든 미로가 있습니다. 나는 그냥 울타리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만들어진 미로라는걸 알려준 것도 소우지였어요. 소우지는 자꾸만 안을 안내해 주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왠지 으스스해 보여서 나는 거절했지요. 소우지는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어요. ……어느 날 나는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토모히로의 뒷모습을 봤어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문득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미로 속에서 토모히로를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길을 잃으면 토모히로를 부르면 되겠지, 라며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미로에 발을 들여놓았어요. 어렸을 때 종이에 인쇄된 미로를 손끝으로 따라가면서 놀아본 적이 있을 거에요. 대부분 쉽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죠. 내 미로에 대한 지식은 그 정도였습니다. 나사 저택에 만들어진 미로는 실제로 만들어졌으니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어요."
"빠져나올 수 없게 된 거군요."
"네. 미로는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듯 울타리가 무성하고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어요. 어떤 곳은 하늘도 보이지 않는, 마치 동굴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고요. 미로라는 게 이렇게까지 방향을 알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뒤였어요.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서쪽도 동쪽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서둘러 원래 왔던 길로 나가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 깊숙이, 더 깊숙이 빠져드는 느낌이었어요. 나는 그 미로를 만든 인간의 악의를 알게 되었습니다. 악마 같은 지혜로 정상적인 지각을 망가뜨리는 곳이구나, 라는걸요. 나는 그저 헤매기만 했어요. 그러다 무서워져서 반쯤 울면서 토모히로의 이름을 불렀어요.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긴 시간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미로는 시간 감각마저도 미치게 만들더라고요. 그러던 중 어느 모퉁이에서, 누군가 갑자기 내 눈을 가렸어요. 따스한 손길의 감촉에 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죠. ’왜 좀 더 빨리 오지 않았어요? 내가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기다린거에요?’라고 말했는데, 그 누군가는 내 눈에서 손을 떼지 않고 나를 돌려 입술을 맞닿았어요. ……그리고 나는 깨달았어요. 그건 토모히로가 아니라 소우지였지요."
마사오는 술에 취해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는 특유의 말투가 강조되고, 목소리의 톤이 느슨해졌다. 확실히 술에 취한 것이 느껴졌다.
"...... 미로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토모히로로 착각했던 것 같아요. 나는 소우지를 밀어냈습니다. 소우지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내 손을 잡고 미로를 걸어 나갔어요. 나는 그렇게 당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소우지가 갑자기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 다시 껴안는 것보다는,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더 안전했으니까요. 소우지는 어느 모퉁이를 돌면서 '자, 도착했어요, 아가씨'라고 말하며 손을 놓았습니다. 그곳은 미로의 출구가 아니라 미로의 중심이었어요. 열 평 남짓한 넓이로 중앙에 오각형의 돌로 된 테이블이 놓여 있더군요. 소우지는 돌 의자에 앉자마자 차분히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지요. 나를 훝듯이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마사오는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머리를 쓸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 마사오는 아름다웠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주세요’라고 부탁했지만, 소우지는 '좀 더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어요. 아니면 혼자 나갈 수 있으면 나가봐요'라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는 과감히 혼자서 미로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중심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어버리려고 했지요.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면 다시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이러다가는 언제까지나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없겠될까? …… 바보 같지만, 평생 미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기분은 미로에서 한참을 헤매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거에요. 결국 나는 다시 미로 한가운데로 돌아가야만 했어요. 소우지는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없으면 안 되겠지'라고 말하면서 저를 안으며 풀밭 위로 밀어붙였어요."
유리잔 안의 얼음이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마사오는 잔에 새 얼음을 넣었다. 그 손길이 답답해 보였다.
"그 후로 소우지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 마다 내 몸을 요구했어요. 그래요. 카츠 씨가 말한 대로 나는 계속 협박을 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거부하면 소우지는 우리의 관계를 토모히로에게 말한다면서 겁을 줬어요. 그게 가장 무서웠어요. 소우지에게는 다른 여자가 있었어요.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카라쿠리 인형을 만지작거리듯 나와의 접촉을 즐긴 것 뿐. 하지만 소우지는 선천적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특히 토우이치가 태어난 후, 토모히로에게는 남자로서의 힘이 없어졌어요. 변명 같지만, 그런 것도 있어서 나는 소우지가 말하는 '둘만의 금지된 맛'을 배우게 되었어요........ ......"
격정이 마사오를 덮친 것 같았다. 입술이 떨리고 목소리 톤이 변했다.
"하지만 더 이상 싫었어요. 그런 거짓으로 가득 찬 삶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토모히로에게 고백할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해외여행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좋은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여행 중에 당신에게 모든걸 털어놓기로 결심했지요."
마사오는 토시오를 당신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피로와 상처와 취기가 토시오에게 토모히로의 성격을 부여한 것일까.
"당신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어요. 당신이 해바라기 공예를 떠날 마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나도 소우지와는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
마사오는 최면에 걸린 듯이 말했다.
"화내지 말고, 한 가지 더 얘기할 게 있어......., 당신 듣고 있어요?"
마사오는 토시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토시오는 토모히로로서 대답을 주저했지만, 마사오의 감정에 이끌려 대답했다.
"...... 듣고 있어요."
토시오는 작게 말했다.
"기쁘다……"
마사오는 토시오를 붙잡고 입술을 밀착시켰다. 마사오의 입술은 부드럽고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사오는 대담하게 혀를 내밀었다. 토시오는 반쯤은 포기하고 마사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조금씩 마사오는 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마사오는 조용히 얼굴을 떼어냈다.
"...... 또 다른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입니까?"
토시오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팔에서 몸을 떼어내어 탁자 위에 엎드렸다.
"그것만은....... 더는 안 되겠어요….."
잔이 굴러서 양탄자 위에 떨어져 깨져버리고 말았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2022/12/04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한국일보 경찰팀 : 별점 4점

덜미, 완전범죄는 없다 1 - 8점
한국일보 경찰팀 지음/북콤마

국내에서 과학 수사를 통해 해결했던 여러 사건들을 정리한 논픽션. 2부 구성으로 모두 22건의 사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1부는 특정 과학 수사 기법이 해결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던 대표적인 사건들이 소개되고 있어서, 해당 수사 기법에 대해 이해를 돕는 구성입니다. 현장 검증과 검시는 물론이고, 비산 혈흔 등 혈흔 형태 분석, DNA 분석, 프로파일링, 법 최면, 지문 감식, 지리 프로파일링 등이 등장하며, 수사 기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물론이고 전문가들에 대한 인터뷰 등 부가 자료들도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습니다. 사건도 밝혀진 모든 내용이 소개되고 있으며, 사건 현장 사진과 도해로 구성된 사건 상황 등 도판도 완벽합니다.
2부는 완전 범죄를 노렸지만, 수사관들이 끈질긴 수사로 밝혀낸 사건들이 담겨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소개는 1부와 마찬가지로 완벽한 수준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4점. 우리나라 범죄를 다룬 논픽션 중에서는 최고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여,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사건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해 드립니다.

첫 번째는 <<마포 만삭 의사 부인 살해 사건>>입니다. 의사 남편이 만삭 부인을 살해했던 엽기적인 범행으로, 피고인 남편 측에서 캐나다 법의학 전문가까지 증인으로 불러 법정 다툼이 있었던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니, 남편 범행이 확실하더군요. 피해자의 목졸림 흔적과 얼굴과 몸의 멍자국, 저항하다 생긴 것으로 보인 손톱 밑의 남편 DNA 등 현장 증거가 뚜렸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남편 쪽에서 주장했던, "욕조에서 넘어져 죽은 것 같다"는걸 설명할 수 없는, 피해자 몸의 혈흔과 상처가 결정적인것 같아요. 욕조에서는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양양 일가족 방화 사건>>은 무식한 범인이 교과서처럼 단서를 남긴 범행이라 기억에 남습니다. 현장 검증과 검시로 피해자 일가족 시신에서 수면제가 검출되어 누군가 방화를 저지른게 명백하다는게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경찰 진술에서 필요도 없는 말을 해 가며 자살이 맞다고 주장했고, 결국 현장에서 발견된 차용증 등으로 동기마저 드러나버리고 말았지요. 범행 직후 소방차를 따라 다시 현장에 나타난 것까지, 하는 행동 모두가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단순 무식한 범인을 연상케합니다. 아울러 고작 2,0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어린 소녀가 포함된 네 명의 일가족을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에게 무기징역은 너무 관대한 선고였습니다. 능지처참하고 저잣거리에 효수를 했어야....
<<서울 광진구 주부 성폭행 사건>>은 그야말로 한 편의 추리소설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DNA 감식을 통해 드러난 범인은 범행 당시 수감 중이었지만, 과학수사관 권경사의 추리 덕분에 진범이 체포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수감 중인 용의자의 일란성 쌍동이라는 추리였지요.
<<60대 남녀 변사 사건>>은 단순 자연사로 보였지만, 현장 검증을 통해 몇 가지 이상한 정황이 포착되어 살인 사건이라는게 드러난 경우입니다. 현장에서의 구토 흔적과 기묘한 자살 시도 흔적, 그리고 자연사는 이불 한 장만 반듯이 덮고있는게 일반적인데 이불 두 장이 포개져 쌓여 있었던 것, 피해자 옷과 맞지 않았던 방에 떨어져 있던 단추 등이 단서가 되었습니다. 검시 결과도 살인 사건임을 증명해 주었고요. 현장 상황과 시신의 모습 등을 분석하는 과정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안성 부부 살인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사건 해결에 핵심 역할을 했다는 데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잔혹한 현장 모습으로 청부 살인이나 원한 살인이 의심되었지만 프로파일러들은 "돈을 목적으로 한 범죄이며, 근처에서 일어났던 침입 사건의 범인과 동일인물일 것이다. 침입이 발각되어 과도한 공격으로 피해자들을 살해했고,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최근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몰린 사람이며, 피해자들은 물론 마을을 잘 알고 있는 면식범일 것이다"는 그림을 그려냈습니다. 이는 실제 범인 모습과 일치했지요. 어떻게보면 좀 뻔한데, 현실은 픽션과는 엄연히 다르다는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양주 전원 주택 살인 방화 사건>>을 통해서 지문은 고온에서는 수분이 증발하면서 흔적 자체가 사라지는 특성이 있어서, 화재 현장에서는 '열 사각 지대'에서 집중적으로 지문을 채취한다는 등 실제 현장에서의 지문 감식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 수 있었고, <<의정부 연쇄 절도 사건>>은 이름도 생소한 '지리 프로파일링'을 접하게 해 주어 좋았습니다. 범죄가 발생한 장소와 시간을 토대로 범인이 머무는 곳과 다음 범행 장소를 예상하는 과학수사 기법이라는데, <<넘버스>>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던 적이 있지요. 실제 사건을 해결할 정도로 정립된 기법이라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2부의 <<고급 전원주택 연쇄 강도 사건>>은 완전 범죄를 노린 3인조 일당들이 증거를 남기지 않고 전원 주택을 털었던 사건으로, 집에 설치된 폐쇄 회로 TV는 본체까지 뜯어서 들고갔고, 현장에 남긴 담배 꽁초도 어디선가 주워와 일부러 흘리는 등 굉장히 치밀하게 범행을 저지른 사건입니다. 범행 장소를 오간 차량이 없었다는게 특히 주목할만 합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전원 주택이 산과 가깝다는걸 이용하여, 목표지 인근까지 대포차로 이동한 뒤 야산에서 하루 노숙을 하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군요. 현장에 일부러 뿌린 꽁초 중 동일한 DNA가 검출된 탓에 덜미가 잡히고 말았지만, 정말로 대단한 지능범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산 교수 부인 살인 사건>>은 한 때 뉴스를 도배했던 사건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당시는 범죄 전문가 교수가 경찰과 두뇌 싸움을 벌인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사건 개요를 읽어보니 별다르게 머리를 쓴 부분은 없어서 놀랐습니다. 내세운 알리바이도 엉망이었고, 내연녀를 동원한 시체 유기도 곧바로 경찰에 발각되어 버리고 말았으니까요. 언변만 빼어날 뿐 일개 잡범 수준에 불과했어요. 차라리 앞서의 고급 전원주택 연쇄 강도 사건 범인들 수준이 더 높았습니다. 범인의 직업이 선입견을 만든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것도 일종의 미스디렉션이겠지요.

2022/01/30

고쿠 1~6 - 테라사와 부이치 : 별점 2점

[고화질세트] 고쿠 (총6권/완결) - 4점
테라사와 부이치 지음/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걸작 "우주해적 코브라"로 스페이스 판타지의 신기원을 연 작가 테라사와 부이치의 또다른 대표작입니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1987년에는 비교적 먼 미래로 느껴졌을, 2014년을 무대로 한 근미래 SF 액션 스릴러로, 우리나라에는 e-book으로만 소개되었습니다. 설 연휴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은 경찰 출신의 사립탐정 후린지 고쿠입니다. 맨 몸에 쟈켓을 입고 목에 넥타이를 메는 다소 충격적인 패션 센스를 가진 남자지요.

고쿠는 첫 번째 사건에서 악당의 최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왼쪽 눈을 찔러 실명하는데, 누군가 그 왼쪽 눈에 소형 컴퓨터 단말기가 장착된 '의안'을 설치해 줍니다. 그 의안은 전 세계의 모든 컴퓨터는 물론, 인공위성까지도 연결하여 제어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요. 고쿠는 이른바 '신의 눈'이라고도 하는 이 의안을 최대한 이용하고, 그 누군가가 전해 준 또다른 장비 여의봉(?)을 무기로 악당들과 싸워나갑니다.

여러 면에서 작가의 출세작 "코브라"가 떠오릅니다. 미인들의 부탁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기본 전개부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한마리 외로운 늑대로 엄청난 마초인데다가 시니컬하면서도 독특한 유머 넘치는 대사를 내뱉는 고쿠 캐릭터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갖추고 있는 피지컬만으로도 세계관 최강자인데다가, 강력한 무기 '싸이코 건' 까지 소유한 코브라와는 다르게 고쿠는 비교적 평범한 인간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차이도 전능하다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은 왼쪽 눈의 의안 덕분에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의안으로 왠만한 적들은 쉽게 무력하게 만드니까요.

그래도 단순한 자가복제 아류작은 아닙니다. '신의 눈'이라는 아이디어 덕이 큽니다. 모든 단말에 접속하여 조작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최소한 10년 이상 시대를 앞서간 것입니다. 인공 위성으로부터 현재의 GPS, 카 네비게이션과 동일한 정보를 전달받아 이를 추격에 활용하는 장면 등은 미래를 보고 온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인공 위성과 각종 단말을 조작하여, 악당 하크류 겐지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영상을 건물 전광판으로 표시하는 장면은 능력의 특징을 제대로 선보여준 명장면이었고요.

정보를 장악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탐정'이 주인공인 이야기에도 잘 어울렸어요. Private Eye가 Midnight Eye를 갖게 되니, 금상첨화인 셈이지요.

탐정물답게 놀라운 진상과 반전을 갖춘 이야기들도 꽤 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의 류는 의붓 아버지에 의해 사이보그로 개조되어 몸에 강력한 보호막을 두르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중화제를 투약하지 않으면 미치광이 살인마로 돌변하기 때문에, 여동생 요시코는 고쿠에게 류를 죽여달라고 의뢰했고요. 그런데 알고보니 류는 의붓아버지 젠조의 복제인간으로 창조된지 고작 30일에 불과했던 생명체였습니다. 젠조는 자기 몸에 보호막을 설치하기 위해 류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겁니다. 수정체를 만든 건 여동생인줄 알았던 요시코였고요. "차이나타운"이 떠오르는, 하드보일드스러운 막장 관계를 인공수정, 급속 성장, 기억 이식 등 미래 기술에 녹여낸 멋진 이야기였습니다. 슈퍼 스타 시노즈카 레이라가 자기 노래를 표절했다며 죽이려고 하는 지하 록의 여왕 야마가미 리사와 동일 인물이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꽤나 놀라운 진상을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4권(일본 기준)으로 끝나버린 이유도 분명합니다. 뒷 부분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암흑의 선녀" 편에서 귀신 '천동녀'의 정체는 쿠키 일족의 정신을 넣은 인공두뇌로 구현된, 일종 에너지 덩어리였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우주해적 코브라"의 사라만다 설정과 똑같죠. 다카르 랠리에 참여한 오토바이 레이서 보니의 문신 속에 마이크로 필름의 정보가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도 "우주해적 코브라"와 유사했고요. 유령 유전자 실험에 자원하여 스스로 생명체의 모든 진화를 구현해 낼 수 있게 된 카산드라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실험 덕분에 생물 진화의 최종 단계로 변신할 수 있었고, 그건 바로 악마였다는건 재미있는 발상입니다만 이는 "코브라"에서 화성의 최종 병기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악마가 고작 금괴를 노린다던가, 그 최후가 녹아버린 뜨거운 금을 뒤집어 쓰는 것에 불과했다는 등 세부적인 이야기 완성도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요. 

후반부 에피소드들에서는 '신의 눈'의 능력도 잘 선보이지도 못합니다. 모든 장치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기본 설정만 답습할 뿐입니다. 이런 능력을 활용하여 악당에게 자신의 경고를 날린다던가, 공장에서 자기만을 위한 특별한 무기를 만든다던가 하는 초반부 에피소드들같은 새로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걸 통제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악당들과 육탄 액션을 펼친다는 설정도 별로였고요. 

또 한국어판 e-book은 에피소드별 제목이 제대로 부여되어 있지 않은 등 편집이 그닥이며, 마지막 권에 '지금 밝혀지는 고쿠의 비밀'이라는 저자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고 소개되는데 정작 수록되어 있지 않은 등 문제가 많아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던게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유튜브를 뒤지면 카와지리 요시아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을 찾아볼 수 있는데, 비교적 수작인 초반부 에피소드를 영상화한 만큼 애니메이션만 찾아서 보시는게 낫습니다.

2021/09/25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 정진영 : 별점 2.5점

좀비 연대기 - 6점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근대 시기 유명 장르 소설가의 좀비 관련 중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작가들의 명성과 장르 문학치고는 고전급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낡은 느낌이 강했던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는 다르게, "지옥에서 온 비둘기"라던가 "좀비 감염 지대"같은 시대 초월 명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좀비'라는 말을 만들고, 아이티 부두교 좀비 설정을 확립했다는 "마법의 섬"과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하고요. 크리쳐 호러물 외에도 저주받은 저택, 호러 모험 액션, 판타지에 SF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장르 스펙트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열 두편의 수록작 중 수준 이하 졸작도 제법 됩니다. 발표된지 100여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리고 제목에서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좀비'라고 하면 떠올릴 몬스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없습니다. 아이티 등 열대 섬나라에서 부두교 주술 등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 노예처럼 부렸다는 초기 좀비 전설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물론 이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설정을 그대로 반복한 판박이같은 작품이 많다는거지요.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클래식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그런 앤솔러지였습니다. 좀비라는 크리쳐의 창작 초기 설정과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온 비둘기" 

그리스웰과 존 브래너는 비둘기 떼가 날아가버린 폐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중에 공포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잠을 깬 그리스웰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도끼에 맞아죽은 브래너가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다. 도망치던 그리스웰을 구해준 보안관 버크너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수수께끼와 브래너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자 늙은 부두교 주술사를 찾아갔지만, 주술사도 뱀에 물려 죽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버크너와 그리스웰은 흉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지만, 그날 밤 그리스웰은 악령에게 홀려 2층으로 향하는데...

좀비물이라기 보다는, 저주받은 저택 장르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죽은 브래너의 습격, 마찬가지로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실비아 블래슨빌 모두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복수를 위해 부두교 주술로 저주한게 원인이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저주물에 더 가깝고요.

저주받은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악령에게 습격받는 초반부 묘사는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하고 심심했지만, 버크너 보안관 등장 이후부터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버크너가 브래너의 시체를 발견한 뒤의 전개는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해서 독특했습니다. 상황은 그리스웰이 범인일 수 밖에 없어요. 둘만 있던 흉가에서 한 명이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버크너는 그리스웰의 옷에 피가 전혀 튀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리스웰이 범인이라면 죽은 버크너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이유로 추가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핏자욱을 따라 2층의 사건 발생 현장으로 이동한 뒤, 무언가 이상한 존재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지요. 단서를 통한 추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수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밀 방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3명의 가족이 목을 메고 죽어 있었다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진상도 오싹했습니다. 사람들을 습격해 죽였던 괴물 '주벰비'가 실비아 블래슨빌을 원망했던 혼혈 하녀 조안이 아니라, 실비아 블래슨빌이었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었고요. 조안은 주벰비가 되는 검은 술을 자기가 먹지 않고 주인에게 몰래 먹였던 겁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네요.

믿음직하고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겁 많은 애송이 그리스웰의 조합도 반 헬싱 교수와 조나단 하커 관계와 좀 비슷한데, 전형적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딱 맞는 조합이더군요. 무서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겁쟁이와 사건을 해결하고 악령을 응징하는 용감한 보안관이 조합되니, 두려움과 공포, 액션과 정의의 응징을 다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무 옛스럽게 쓰여졌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여러모로 부족한 묘사가 특히 거슬렸어요. 오래된 폐가, 몰락한 가문, 뱀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도망쳤던 생존자가 남긴 일기 등 모든 면에서 미쓰다 신조의 "흉가"가 떠오르는데, 공포를 자아내는 묘사와 전개는 전혀 미치지 못했거든요. 미쓰다 신조가 같은 작품을 썼다면 훨씬 무섭게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 방식으로 영상화하면 훨씬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검은 카난" 

커비 버크너는 고향 카난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귀향하다가 혼혈인 마녀의 유혹을 받았다. 최면에 걸렸던 버크너는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습격한 거구의 흑인 세 명을 물리쳤다. 마을에 도착한 버크너는 마을 흑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통해 늪지대에 사는 괴인 솔 스타크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조사 중 버크너는 마녀의 최면에 걸려 솔 스타크의 본거지로 본의 아니게 끌려가게 되었고, 친구 브랙스턴이 그를 돕기 위해 따라가는데....

부두교 주술사가 카난이라는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마을 지도자 버크너가 이를 물리친다는 호러 액션 활극입니다. 마녀의 최면, 주술로 만든 물고기 인간같은 공포스러운 요소가 등장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버크너 시점의 심리 묘사만 있는 탓이 큽니다. 버크너 캐릭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쾌남 영웅 스타일이라 공포를 크게 느끼지 않거든요. 공포에 사로잡힌 묘사도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마녀와 괴물들이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과, 최면술말고는 주인공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작품이 무섭지 않은 이유이고요.

그래도 모험 활극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버크너는 전작의 버크너 보안관의 선조, 혹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버크너 유니버스도 한 번 제대로 소개되면 좋겠네요.

"천 번의 죽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와 그 부하들이었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물에 빠져 죽었었지만 아버지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되살리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SF 호러 범죄물을 잭 런던이 썼다는건 특이했지만, 내용은 평이합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건 "프랑켄슈타인" 에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설정이니까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섬에 틀어박혀 생체 실험을 한다는건 "닥터 모로의 섬"과 똑같고요. 물론 생체 실험의 대상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로, 그가 반복적인 죽음과 소생을 거듭한다는 설정으로 확실히 차별화되기는 합니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 신체 장기에 아무런 훼손이 없는 죽음은 단지 생명의 보류 상태'라며 죽음과 소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점도 독특했어요.

하지만 차별화 요소를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독약, 질식 등으로 수차례 죽음을 맞는 고통이 잘 그려내지 못한 탓입입니다. 생체 실험의 고통을 극명하게 그려냈다면 호러물로 충분히 값했을텐데 말이지요. 과학적인 설명도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알맹이 없는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물질을 원소 상태로 되돌리는 장치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그 부하들을 없애고 탈출한다는 결말은 최악이네요. 아버지의 흑인 부하들이 자기 방으로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올 때 마다 없애고,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선 아버지를 없앴다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방에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칼로 찌르는게 빨랐을겁니다. 특별한 장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피해자들도 한 명씩 들어와 사라질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는데 왜 진작에 탈출하지 않은건지도 이유를 모르겠고요. SF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엄청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던 아버지의 최후라기에는 너무 허무했고요.

유사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호러물로는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했고,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아이티 호텔에서 머물다가, 호텔에서 일하는 노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과 호텔 직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과거 아이티 독립 전쟁 당시 '소금을 먹지 마라'는 금기를 어겼다가 시체가 된 연인 트레생에 대해 말해 주는데...

뒤에 수록된 "좀비와 함께 걷다"를 읽어야 설정이 이해가 되는 작품입니다. "좀비와 함께 걷다"에 따르면,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자신이 죽었다는걸 깨닫고,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트래생은 물론 마리도 진작에 죽었던 좀비였다는 뜻이고요. 트래생이 흑인 해방 등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똑똑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니, 다른 좀비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보면 되겠지요.

문제는 이 설정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마리도 좀비였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고요. 죽었다는걸 깨달은 좀비들이 무덤으로 폭주하는 장면 묘사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귀환자들의 마을" 

좀비 전설이 있는 열대 섬마을에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유혹당한 파파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괴담 소설로 유명한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인데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좀비와 다른, 열대 섬나라 좀비에 대한 설명과 파파가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별개로 진행되어 혼란스럽고, 별다른 내용도 없는 탓입니다. 섬마을의 여러 풍광에 대한 관능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를 걷어내고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한, 두페이지로도 충분했을 이야기입니다. 수록작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나트에서의 마법" 

조티크 대륙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 지라의 왕자 아다르는 노예 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된 약혼녀 달리리를 찾아 여러 왕국을 헤멨다. 그러다 그녀가 향했다는 요로스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탑승했지만 항해 중 폭풍에 휘말렸고, 상선은 사악한 섬 나트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달릴리의 구조로 홀로 살아남은 아다르는 나트의 마법사 우두머리 바카른을 만나, 그녀는 바카른이 되살려낸 익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데....

"코난 더 바바리안"을 연상케 하는 작품. 존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을 무대로 마법사와 영웅이 등장해서 대결을 펼치는 고대 판타지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결말이 예상 외라 놀랐습니다. 영웅 포지션인 아다르가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바카른의 두 아들 음모에 가담하여 바카른을 죽이려다고 되려 찔려 죽고 말거든요. 그리고 바카른의 아들에 의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는게 끝입니다. 달릴리와 뭔가 관계가 이루어진다던가, 정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던 족제비 괴물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런 이유로 방대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물의 일부만 수록된 느낌입니다. 최소한 아다르와 달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아이티 공화국 헌법에 좀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아이티에 진짜 좀비가 있다는 다양한 증언들이 이어지는 작품.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같은, 페이크 논픽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고, 좀비가 소금 맛을 보면 죽었다는걸 깨닫고 열일 제쳐놓고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무덤으로 향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경험담이 이어질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화이트 좀비" 

아프리카 엔스와지 지방의 행정관 제프리 에일럿은, 어느날부터 느껴지는 악취 탓에 겁에 질렸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결국 에일럿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돌봐준 신부는 과거 에일럿과 함께 했던 전우 싱클레어의 미망인이 수상하다고 말했고, 에일럿은 탐문과 잠복 끝에 그녀가 부두교 주술로 시체들을 조종하는 현장을 목격하는데...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부대로 부두교 주술이 등장하는 이색작입니다. 서술은 장황하지만, 정작 내용은 에일럿이 잠복해서 부두교 좀비 축제? 현장을 목격하고, 거기서 싱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부두교 주술솨를 쏴 죽인다는게 전부입니다. 악취라던가 불길한 안개 등의 설정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부의 존재도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좀비 사건의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싱클레어 부인이 부두교 주술에 빠져 시체를 되살렸는지는 아프리카의 심장 운운하며 농장 관리 목적이었다고 소개되지만 명확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되살릴 이유도 없었고요. 에일럿이 악취를 느낀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딱히 아프리카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묘사만으로 작 중 무대가 아프리카처럼 느껴지지도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할로 맨" 

한 남자가 아프리카로부터 15년만에 영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부두 거리를 헤메다 모모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자신이 15년 전에 죽여 매장했던 고팍이 자기 식당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경악했다. 고팍은 표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며, 자기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모모가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라면서. 식당에 고팍이 머문 뒤, 식당은 서서히 망해갔고, 딸 버블스마저 고팍에게 홀려 생기를 빼앗기자 모모는 고팍을 또 다시 한 번 죽일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은 자가 돌아왔다가, 다시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단 모모 시점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요. 과거에 저지른 죄로, 손을 씻고 가족과 열심히,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에게 지옥문이 열린 상황인데, 고팍의 존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묘사에서는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내용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 표범 인간이 고팍을 되살렸는지, 고팍이 영국에는 어떻게 왔는지 등이 모두 드러나지 않아요. 버블스의 생기를 빼았는다는 것도 대충대충 넘어가고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고팍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걸로 마무리되는데, 이럴 거였다면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여러모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나는 농부 폴리니스로부터 아이티 지역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들었다. 다른건 유럽과 흡사했지만, 이 지역에만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좀비였다. 나는 좀비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좀비"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작품으로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대리석 무덤에 묻히고 싶어하고, 자기 집 마당에 묘를 만들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길가나 도로변에 무덤이 많은 이유로 좀비를 설명하는 등, 좀비를 실존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티 형법을 증거로 내미는 장면도 그런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폴리니스가 해 준 늙은 추장 조제프가 데려온 좀비 이야기는 이 책에 앞서 수록되어 있는 다른 아이티 좀비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좀비가 소금기를 접한 뒤 다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최후까지요. 좀비가 되었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조제프에게 복수를 했다는 결말 정도만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발표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고, 무서운 이야기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 작품을 다른 유사 작품들보다 앞서 수록하지 않은 이 책의 문제가 너무 커 보입니다. 지금 책의 구성은, 후대의 아류작으로 원조의 가치가 퇴색되는 셈이거든요.

하여튼, 원조라는 역사적 가치를 더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투셀의 창백한 신부" 

흑인 부자 마티외 투셀은 스무살은 어린 혼혈 아가씨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기념일에 투셀은 카미유를 시체와 함께 하는 파티에 초대했고, 카미유는 미쳐버리는데....

화자가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 형태로, 화자의 말대로 '흐지부지되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결말이 없거든요. 투셀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셀이 파티가 연 의도가 무엇인지, 시체들은 누구였는지, 아내에게 1년간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시체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문제가 많았던 소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비" 

그랜빌리 씨는 1차 대전에서 폐를 다친 뒤, 서인도 제도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섬에서 친해진 제프리 다 실바와 럼주 칵테일을 함께 하던 어느날, 그랜빌리 씨는 '점비'에 대해 물었고 다 실바는 자기가 젊었을 때 목격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나온 집사 출신이라는 작가 이력이 특이했던 작품. 이런 이력이라면 좀비가 실제 있는 것 처럼 묘사되는 작품은 쓰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그러나 작품은 작가 이력만큼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다 실바가 친구 이베르센이 죽은 날, 이베르센의 유령을 만나고, 밤길에서 공중에 떠 있는 점비를 목격하고, 이베르센 집에서 개 인간을 만났다는 체험담이 이어질 뿐으로, "내가 했던 무서운 체험" 류의 기승전결없는 괴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점비'나 개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래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 감염 지대" 

고든 파넘 박사는 아발론 섬에서 불사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혈청을 개발했다. 마침 섬에 닥친 화산 폭발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박사는 혈청을 이용하여 그들을 되살릴 생각을 하는데...

부두교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좀비가 등장하는SF 호러물입니다. 앞서 잭 런던의 단편과 비슷한 소재이지만, 되살리는 과정을 나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게 큰 차이점이자 볼거리입니다. 특히 인체는 기계와 같다는 등의 고든 파넘 박사의 생명에 대한 이론이 아주 재미있고 풍성했어요. 이 이론과 박사가 여러 동물로 진행하는 실험으로 이야기 여러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불멸성을 부여받은 실험체들이 번식을 통해 불멸성 유전을 증명했지만, 태어난 실험체들이 태어난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는 이야기는 별도의 단편으로 꾸며도 재미있겠더라고요.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영혼과 두뇌가 없이 본능만 남은 상태라 야수로 돌변한다는 발상도 아주 좋았어요. 이들이 죽지 않는 상태로 군대, 경찰을 휩쓸어버리고, 잘려진 손발이 꿈틀대며 잘린 조각들이 엉망으로 붙어 괴물이 되어버리는 묘사도 일품이었고요. 절대 죽지 않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화산 폭발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린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합니다. 스케일이 정말 남달라요.

물론 화산 폭발을 사람이 제어한다는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기에,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 정도 허풍은 충분히 허용범위 안쪽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아니 시대를 초월한 끔찍한 아비규환을 그려낸 SF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영화로 나와도 아주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20/09/20

심리 조작의 비밀 - 오카다 다카시 / 황선종 : 별점 3점

심리 조작의 비밀 - 6점
오카다 다카시 지음, 황선종 옮김/어크로스

사이비(책 속에서는 컬트 교단이라고 칭함) 종교나 각종 강매 행위가 어떠한 방식으로 심리 조작을 일으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지를 상세하게 파헤쳐서 알려주는 책입니다.
심리 조작, 세뇌, 최면 등이 소개되는데, '심리학'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심리 조작과 세뇌, 최면을 거는 방법 및 실제 사례들이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어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항상 궁금해왔던 질문에 대한 답도 많고요. 예를 들면 '사이비 종교를 믿는 이유는 폭력적인 남편에게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를 의심하면, 자기 자신마저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더 강한 믿음이 생길 수 밖에 없다네요.
소규모 집단, 배타적인 작은 팀에서 외부 정보가 차단되면 공동 생활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는 테러리스트 훈련 과정은 왜 시골 마을이 배타적이고 자신들만의 룰을 강요하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에 딱 들어맞고요.
또 애착불안이 강한 의존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자신을 지탱해갈 수 없기에 가까이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게 되기 쉽다고 합니다. 즉, 눈앞에 그 사람이 있을 때는 헤어지는 일은 생각도 못할 정도로 끈끈하게 연결된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눈앞에서 사라지면 혼자서 살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아주 간단하게 다른 사람에게로 가버리는 거지요. 남자 친구가 군대 간 사이, 여자 친구가 복학생 오빠와 사귀는건 애착불안이 강한 의존성 인격장애일 수 있다는 겁니다!

더블 바인드라는 기법도 눈길을 끕니다. 상대가 무언가 해주기를 바랄 때, 그 일을 할 생각이냐 아니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선택지를 준비해 질문하는 방법으로, 복수의 선택지가 제시되지만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국 같은 결과로 유도됩니다. 자동차를 살까말까 갈등하는 고객에게 "이 장치를 달아놓을까요?” 아니면 "자동차 색깔은 흰색을 좋아하세요? 아니면 검은색을 좋아하세요.?"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식으로 자동차를 구매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다음 선택 사항으로 고객의 관심이 향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이는 아이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을 때 “국어와 수학 중 어느 쪽부터 할까?”, “숙제를 엄마와 함께 할래? 아니면 혼자서 할래?" 라고 공부를 하는걸 전제로 묻는 등 다양한 응용이 가능합니다. 강하게 저항하리라고 예상되는 경우에는 “숙제를 간식 먹기 전에 할래? 아니면 먹고 나서 할래?”와 같은 식으로 한 발 물러난 제안을 하여 하나를 선택하게 하거나, 반대로 “숙제를 할래? 목욕탕 청소를 할래?”와 같은 식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함께 넣어서 선택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고 하네요. 직접적으로 뭔가를 하라는 말을 들으면, 명령받았다고 받아들여 반항심이 생기지만 간접적으로 넌지시 말하거나, 하는 것을 전제로 놓고 말하면 저항감이 생기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고 놀고 있을 때 공부하라는 독촉은 효과를 보기 어렵지만, “내년 이맘때에는 이렇게 가족이 모두 모여 한가롭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없겠네. 대학교는 1학년 때가 가장 바쁘다고 하니 말이야.”와 같이 말하는게 훨씬 효과가 좋다는 뜻이지요. 아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비난도 명령도 아니기에 마음에 저항이 생기기 어려우니까요. 그럴싸 합니다. 꼭 한 번 써 먹어 봐야겠습니다.

조언은 항상 긍정적으로, 좋은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실제 사례로 설명해 주어서 와 닿았던 이야기도 있습니다. 에릭슨 박사의 이야기로, 어느 날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 10대 소년에게 에릭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너의 행동이 얼마나 변할지 상상조차 못하겠는데." 이 말은 소년이 변하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단정 짓지도 않지요. 또 이 말을 들은 소년은 안도감과 함께 자신의 행동이 전문가가 예측조차 못할 정도라고 바뀐다는 것에 자극받아서 실제로 소년의 행동은 변했다고 합니다.
상대가 예스라고 대할 수 있는 질문을 하는 방법으로 신뢰성을 높여 최종적인 질문에도 예스라고 대답하도록 이끄는 예스 세트도 같은 원리입니다. "노!" 대신 상대가 “예스!"라고 대답하도록 유도하면, 상대의 저항을 없애고 본심에 다가서거나 결단을 좌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군요. 예를 들면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죠?”라고 묻는 식입니다. 또는 “그와 헤어지고 싶나요? 아니 그럴 리가 없죠.”와 같이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하거나요. 이렇게 하면 “아뇨.”라고 부정하고 저항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건 심리 상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명확하게 표현된 말이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문제와 마주 서서 의식화된 경우에 한하거든요. 문제와 마주 서기를 피하고 핑계만 생각할 때는 직접적으로 지적당하면 더욱 강하게 저항하고 부정하게 되는거죠.

생활과 행동을 유형별로 분류해놓고, 다음 행동이나 생각으로 전환시킬 때 신호가 되는 자극을 주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에요. 정해놓은 음악을 틀거나 벨을 울리는 행위가 널리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뇌에 대한 굉장히 상세한 이론과 실제 예가 소개되는 부분도 눈길을 끌고요. 이 부분은 내용이 워낙 많아서 제가 요약해서 설명드리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정말 그럴듯해서 와 닿았습니다.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주제의 반복이 많고, 목차가 조금 정리가 되지 않은 느낌이 들거든요. '오옴 진리교' 사건 직후 발표된 책인지 오옴 진리교 이야기도 지나치게 많고요. 읽다보면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아요. 그래도 별점 3점은 충분한 좋은 책이었습니다. 심리 조작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된 덕분입니다. 제가 소개해드린 부분은 빙산의 일각이니만큼, 이런 류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2018/04/06

히틀러의 비밀 서재 - 티머시 W.라이백 / 박우정 : 별점 3.5점

히틀러의 비밀 서재 - 8점
티머시 W. 라이백 지음, 박우정 옮김/글항아리

히틀러가 남긴 장서들이 보관되어 있는 의회 도서관, 공공 기록 보관소, 민간 보관소 등을 저자가 직접 찾아다니며 뒤져본 후, 히틀러가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영향을 끼쳤을 책들을 골라 소개하는 책입니다. 

'책이 수집가를 보존하며 수집가가 소멸된 뒤에는 그 삶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대로 히틀러의 장서를 통해 히틀러라는 인물의 실체를 알려주려는 시도만큼은 무척 독특합니다. 틀린 말은 아닌게 이 리뷰를 쓰면서 제 책장을 쭉 훝어 보니, 정말 저라는 인물에 대해서 쉽게 알 수 있는 책장이구나 싶더라고요. 요리 관련 서적 20%, 역사서 20%, 과학 관련 서적 10%, 장르문학 30%, 만화책 20% 정도의 구성인데 이 블로그 리뷰 비율과도 비슷하고 실제 제 관심사와도 같으니까요. 장서가 수집한 사람의 취향과 관심사를 개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목차는 열개 항으로 나뉘며, 중요한 책도 열 권이지만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책들은 그 외에도 많은데 이 중 히틀러에게 영향을 끼쳤거나 관심을 가졌던 책들을 분류하자면 크게 네 가지입니다.
우선 히틀러의 사상과 철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거나, 최소한 그러한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책들이 첫 번째입니다. 오스보른의 "베를린", 직접 쓴 "나의 투쟁", 그랜트의 "위대한 인종의 쇠망", 권터의 "독일 민족의 인종적 유형론", 그리고 그 스스로 자기 최면에 걸릴 수 있도록 한 스벤 헤딘의 "대륙 전쟁 속 미국" 등입니다.
두 번째는 히틀러라는 인물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 혹은 히틀러에 대해 증언한 인물들이 관련된 책입니다. 히틀러의 정치 인생 초반에 그를 후원하고 이끌었던 유명 작가 에카르트의 "페르 귄트", 유명 영화인 레니 리펜슈탈이 선물한 "피히테 전집" 이 대표적입니다. "피히테 전집" 은 리펜슈탈과 히틀러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목적 외에도, 피히테라는 철학자가 히틀러에게 끼친 영향도 약간이나마 설명된다는 점에서 첫 번째 분류와도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고요.
세 번째는 책 자체가 목적이나 수단이 되어 히틀러 주변에서 움직인 경우입니다. 히틀러가 싫어했다는 로젠베르크의 "20"과 이에 맞서 나치와 카톨릭을 결합시키려 했던 후달의 "민족사회주의의 기초"는 각각 책 소개와 함께 실제 히틀러 주변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일화가 함께 소개됩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총통이 실무, 그리고 공부를 위해 읽은 책입니다. "슐리펜",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전기와 각종 전쟁사나 전술 및 각종 무기 관련 서적들 처럼요.
이러한 책들을 히틀러의 성장 과정 순으로 소개하고 있어서 그가 점차 어떤 사상, 철학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상도 대략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역사서라고 보아도 무방하고요.

항상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후대 역사가의 사료를 통해서만 접했던 히틀러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반가왔습니다. 접근 방식이 신선한 덕분입니다. 용감하고 전우애 넘치는, 독일 제국에 충심을 다 한 군인, 생사의 기로에서 짧은 쾌락에 탐닉하지 않고 독서를 통해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은 노력가, 제대로 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방대한 독서로 자신만의 이론과 세계를 완성하고 이를 토대로 누구와도 토론이 가능했던 천재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무기 관련 연감을 통독하여 후일 할더에게까지 한 방 먹였다는 에피소드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독재자이고 살인자라고 해도 16,000권이 넘는 장서를 읽고, 중요한 내용은 기억하고 담아두었다가 써먹었다니 흉내도 내기 힘든 일이긴 하지요. 세계와 맞 상대할 수 있었던 제국을 십 년 이상 철권통치한 인물이 보통 인물일리야 없겠지만, 제 생각보다도 훨씬 뛰어날 뿐 아니라 엄청난 노력가라는 점에서 탄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전성기 때의 모습은 그야말로 반신반인이더라고요. 물론 말도 안되는 민족주의에 우생학을 결합시켜 유대인을 학살한 잔혹한 독재자의 모습, 스스로를 유럽 대륙의 구원자로 생각한 과대망상 독재자의 모습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히틀러의 독서법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책을 제대로 독파하는게 아니라 스스로 특정 관념을 형성한 뒤, 책의 목차와 색인을 살펴 쓸만한 정보를 조금씩 모으는 방식입니다. 때로는 결론부터 읽기도 할 정도로 책의 내용을 깊숙히 이해하기보다는 필요한 정보만 집중적으로 습득하는 방식인데, 논문을 쓸 때의 방식과 비슷하네요. 스스로의 목표나 관념이 명확하다면 나름 효율적일 수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러나 실제로 책의 목적, 그리고 광고 문구 - 1만 6000권 장서 중 단 열 권이 역사를 바꿨다 - 에 부합하는 내용인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소개되는 절반 가까이의 책들이 최상의 혈통인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우생학적 관점, 이 때문에 유대인을 말살해야 한다는 반유대인주의 형성에 관련되어 있는 탓이 큽니다.
게다가 몇몇 책들은 히틀러가 소장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읽었는지조차 불분명하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에요. 이래서야 저자의 주장을 설득력있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책을 선정한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특정 인물을 구체화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단편적인 정보일 뿐이고요.
물론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허나 이렇게까지 억지스럽게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었어요. 더 다양한 책들로 다양한 분석을 해 주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제임스 쿠퍼의 "가죽 장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카를 마이의 "사막 횡단", 스벤 헤딘의 모험담 등 평소 즐겼다는 모험 소설들도 여러 권 언급되는데, 이런 책들을 좀 더 분석하는 게 더 취지에 맞는 방향이 아니었을까요? 아울러 서재에 각종 추리 소설도 꽂혀 있었다는 증언이 있는데 과연 어떤 책이었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최소한 제목 정도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이것도 추리 소설 홀대의 하나인지 궁금하네요.

그래도 한 인물을 다른 각도로 들여다 보게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는 추천작입니다. 취지에 딱 들어맞는다고 보기는 좀 어렵고, 신뢰성 측면에서도 다소 부족하지만 읽는 재미도 쏠쏠하니 히틀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5점 입니다.

덧붙이자면, 책장이 소유자에 대해 대략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요새는 사람들이 정말 책을 안 사고, 안 읽는 시대죠. 모든 컨텐츠 소비가 스마트 폰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수십년 뒤에는 "스마트 폰 로그로 분석한 누구누구" 와 같은 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7/10/28

엔드 오브 왓치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엔드 오브 왓치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랜 컴비 홀리와 함께 사설업체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던 빌 호지스는 의사로부터 췌장암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 "메르세데스 킬러" 브래드 하츠필드는 재핏이라는 게임기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이동하여 조종하는 능력을 손에 넣었고, 이 능력을 이용하여 세상과 빌 호지스에게 복수하려 했다. 
재핏 게임기와 관련된 기묘한 자살 사건, 특히 제롬의 여동생 바브라에게 닥친 자실 미수 등을 접하며 빌 호지스는 사건의 이면에 브래디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만 브래디는 담당 의사 배비노의 몸을 빼앗아 도주해 버렸다.
빌 호지스는 브래디의 음모를 막기 위해 생명을 걸고 마지막 승부에 나서는데...

스티븐 킹빌 호지스 3부작(요새 말로 트릴로지) 마지막 편입니다. 이번에는 병원에서 신비한 능력을 얹은 1편의 살인마 "미스터 메르세데스" 브래디 하츠필드가 재등장하여 빌 호지스와 숙명의 대결을 펼칩니다. 결말은 "끝"을 의미하는 제목 그대로고요. 시리즈는 정말 확실하게 끝납니다.

재미만큼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납니다. 그런데 다른 시리즈와 확실한 다른건, 이 작품은 추리물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1편은 2015년 에드거상 수상작답게 분명 추리라고 할 수 있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정교하지는 못했지만요. 2편은 빌 호지스 시리즈라고 부르기 민망할 뿐 범죄물로는 괜찮았고요. 허나 이번 편은 추리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장르도 "싸이킥 호러 스릴러"라고 해야 합니다. 브래드가 손에 넣은 특별한 능력 - 염력과 재핏 게임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침투하여 그들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 - 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니까요.
물론 빌 호지스가 브래디의 능력을 알아내는 과정은 수사 비스무레한 절차를 거치기는 하지만, 브래디의 능력이 상식을 초월했다는 것만 문제지 그의 행방과 음모를 추적하는 과정은 너무 뻔하고 단순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지 못합니다. 몇가지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결국 브레디의 담당 의사가 수상하다! 녀석을 쫓아가자! 그냥 이게 전부거든요.

그래도 브래디의 능력은 설득력 있게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 않은 것을 있음직하게 그려내는 스티븐 킹의 특기가 잘 발휘되어 있지요. 단지 능력에 대한 묘사 뿐 아니라, 재핏 게임기를 활용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침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의 계획도 볼거리입니다. 기술을 더욱 발전시킨 후 게임기를 확산시켜 자살을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준다는 음모인데, 희대의 IT 전문가이자 정신병자 살인마인 브래디 캐릭터에도 잘 어울리는 설득력 높은 설정이었어요.

또 여러모로 열세였던 빌 호지스가 브레디의 최면 침투를 이겨내고 반격을 가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앞부분에 사용되었던 커다란 벨소리라는 복선이 적절하게 사용된 것은 정말이지 기가 막힌 명장면입니다! 너무나 전형적인 헐리우드 스타일 엔딩이지만 저는 마음에 들었어요. 아,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냥 통증 때문에 침투에 걸리지 않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를 위한 기지국 복선 역시 적절했고요.

다만 브래드의 음모는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문제 투성이이기는 합니다. 왜 최면에 게임기를 반드시 써야 하는지가 가장 의문이에요. 그냥 화면을 들여다보고 탭하는 것으로 최면에 걸릴 수 있다면,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유도하는게 훨씬 빠르고 저렴한 방법이잖아요? 사이트 뿐 아니라 앱 형태로 뿌리면 갯수 제한이 있는 게임기보다 훨씬 넓게, 멀리 확산시킬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게임기라는 특정 조건이 꼭 필요한 것으로 설명되지도 못한 탓도 큰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아울러 브레디의 자살 전염, 전파 계획은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좀 허무합니다. 대량 학살을 저지르려 했던 살인마가 개개의 사람들 마음 속 빈틈을 파고들어 자살을 유도 한다는게 너무 소박해 보였던 탓입니다. 피해자들이 주변인들을 죽이게끔 하는 장치가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피해자가 고작 서너명이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요.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제롬의 비중이 등장이 적다는 것도 별로였어요. 이럴바에야 등장하지 않고 그냥 홀리와 빌 컴비의 활약만으로도 충분했을 겁니다. 특히 이번 편에서 빌 캐릭터가 너무나 멋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고통도 참아가며, 심지어 마지막에 오줌까지 싸 가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정의를 위해 싸우는,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친구와 선한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지금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까지하는 정말 멋진 올드 히어로거든요. 지금은 멸종해버린 서부영화 주인공인 셈으로, 죤 웨인이 늙어서 형사 역할을 맡는다면 이련 역할이 정말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여튼, 늙은 죤 웨인의 최후의 활약을 뒤로하고 젊고 잘생긴 신예가 마무리를 짓는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교하지도 않고, 추리물로써의 가치는 낮지만 스티븐 킹은 정말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걸 새삼 느끼게 해 준 작품입니다. 킬링타임용 책을 찾으신다면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타임슬립이 무엇인지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덧붙이자면, 빌 호지스 캐릭터가 정말로 멋지게 그려진 만큼 그의 젊은 시절 활약을 그린 프리퀄이 나와 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