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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4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2024) - 김민수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명득 형사와 이동혁 형사는 부패 경찰로 담당 구역에서 돈을 갈취해 왔다. 김명득 형사는 딸아이 수술비 마련을 위해서, 이동혁 형사는 도박에 빠져 거액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두 형사는 중국인 조직이 현금을 옮기는 정보를 우연히 입수했고, 김명득 형사는 이동혁 형사를 설득해 돈 강탈에 나서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이동혁 형사의 지인 박정훈 순경도 끌어들였다.

조직이 운반하던 돈은 손에 넣었지만, 총격전이 벌어져 중국인 조직원들과 박정훈 순경, 그리고 광수대 형사가 죽은 탓에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고, 두 부패 형사가 꾸민 일이라는게 중국 조직원과 광수대 팀장 모두에게 알려지고 마는데...

넷플릭스에서 한동안 1위를 하던 한국 영화입니다. 나름 기대감을 가지고 관람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눈에 띄었습니다. 거칠고 냉소적인 부패 형사 김명득 역을 맡은 정우는 외형과 분위기 모두 잘 어울렸고, 김대명은 자신의 선한 인상을 잘 살려서 조금 어리숙하면서도 적당히 타락한 이동혁을 입체감있게 그려냅니다. 

하지만 이야기와 연출은 모두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전개가 식상하고 허술한 탓이 큽니다. 중국 조직의 검은 돈을 노리는 부패 형사 컴비의 범죄 계획이 영화의 중심축인데 이를 위한 치밀한 두뇌 싸움이나 전략적인 모습은 거의 그려지지 못하거든요. 범죄 장면은 계획이라기보다 단순한 강탈에 가깝고, 그마저도 긴장감이나 디테일이 부족해서 장르적인 재미를 거의 느낄 수 없습니다. 이래서야 케이퍼 무비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건 수사 과정도 매우 단순합니다. 두 형사가 사건을 맡게 된 상황이라서, 조여오는 수사망 속에서 자기들의 범행을 숨기며 탈출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그런 부분은 전무한 탓입니다. 중국인 조직과 광수대가 두 형사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전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과 운에 의지할 뿐이니까요. 그래서 극적인 긴장감을 느낄 여지도 없습니다. 액션도 눈에 띄게 부족해서 범죄물에서 기대할만한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광수대 팀장 오승찬도 이 돈을 노리고 있었다는 반전도 수많은 작품에서 반복되어온 장치라 신선함이 부족합니다. "범죄도시 2"와도 별로 다를게 없지요. 김명득이 오승찬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는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고요.

클라이막스에서 돈을 숨겨둔 비닐하우스에 중국 조직과 사건의 흑막인 광수대 팀장이 모두 출동해 모두를 일망타진한다는 결말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뻔합니다. 특히 범행에 총이 사용되었음에도, 중국인 조직원들이 형사들에게 총이 있을거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등 허술한 부분도 많고요. 김명득은 죽고, 살아남은 이동혁이 김명득의 딸을 데리고 호주로 가서 새 인생을 산다는 마무리도 별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김명득이 부패하게 된 이유가 아내와 딸의 병원비와 수술비 때문이라는 설정은 최악입니다. 신파적일 뿐 아니라 낡아 빠져서 21세기에 볼 만한 설정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30여년 전 "투캅스"에서처럼 순수하게 '돈이 좋아서'라고 풀어내는게 더 그럴듯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도, 인상적인 이야기 전개도 없었고, 전반적으로 구성이 허술해 아쉬움만 남습니다. 코로나 시기 촬영 완료 후 창고행이었다가 작년 극장 개봉하여 폭망했다고 알고 있는데, 창고행과 흥행 실패 모두 납득이 가는 졸작입니다.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10/23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시마다 소지 / 한희선 : 별점 2.5점

북의 유즈루, 저녁 하늘을 나는 학 - 6점
시마다 소지 지음, 한희선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시청 수사 1과 형사 요시키 다케시에게 이혼한 전처 가노 미치코로부터 5년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불길함을 느낀 요시키 형사는 우에노를 찾아 유즈루 9호에 탄 미치코를 창 밖에서 배웅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오모리에 정차한 유즈루 9호에서 젊은 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휴가를 내어 아오모리 경찰서를 찾은 요시키는 피해자가 미치코는 아니라는걸 알았지만, 미치코가 걱정된 탓에 그녀가 이혼 후 머물렀던 홋카이도 구시로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의 용의자라는걸 알게 되는데....

시마다 소지가 쓴 요시키 형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 본격 미스테리 100선에도 선정되어 있습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는 이전에 딱 한 작품만 읽었습니다. 그래서 잘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전형적인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보다는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탐정이라 느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시키 형사의 인간적인 매력이 잘 드러나 있거든요. 돈이나 지적 만족감 따위는 필요없이, 사랑하는 전처가 무죄라는걸 증명하기 위해 나서는 사랑꾼으로 그려졌기 때문이지요. 심지어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고도 그녀를 구하는 모습은 슈퍼 히어로를 연상시킵니다.

범인들이 미치코 집 안에 시체 두 구를 옮겨 놓는 순간 이동 트릭도 괜찮습니다. 시체가 발견된 미치코 집과 범행 현장인 범인들 자택 사이의 건물 옥상에 로프를 매달아 만든, 일종의 커다란 그네(진자)를 이용하여 시체를 옮긴 겁니다. 시체에 갑옷을 입혀 진자 운동을 시키면, 반대쪽 정점에 오면 속도는 0이 됩니다. 그러면 회수는 가능했을테니 나름 '과학적'이지요.
가면 무사가 유령처럼 사진이 찍힌 이유도 이 진자 운동 트릭과 맞물려 '과학적으로' 설명됩니다. 사진을 찍는 순간 관리인실 뒷 창을 막 지나게 되어 사진에 찍힌 겁니다. 발상만큼은 정말 기가 막혀요.
이 때 로프가 난간에 부딛혀 나는 소리를 현장에 있었던 '밤에 우는 돌' 전설과 연결시키고, 시체가 벽에 부딛혀도 괜찮도록 시체에 갑옷을 입힌걸 '가면 무사' 유령 전설과 엮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민속 탐정 야쿠모" 속 베스트 에피소드에 뒤지지 않을 정도에요. 그만큼 전설이 사건과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면 본격 추리 100선에 꼽힐만 합니다.

요시키 형사 시리즈 대부분이 갖춘 특징인 여정 미스터리 성격도 잘 드러납니다. 도쿄에서 아오모리로, 아오모리에서 배를 타고 하코다테로, 하코다테에서 삿포로를 타고 삿포로로, 삿포로에서 기차로 구시로로 향하는 과정, 그리고 구시로 범화가인 기타오도리 외길 및 구시로를 포함한 각 지역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트릭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맞은편 건물까지, 개천을 하나 사이에 두고 있으니 약 10m 떨어져 있다고 칩시다. 1층 관리인실 창문을 지날 정도면 5층 높이이니 거의 비슷하겠죠. 후지쿠라 레이코가 시체를 놓쳤을 때 회수를 쉽게 하려고 로프를 한 번 더 연장했다니 두 배, 그러니까 최소 20m는 되는 긴 로프가 필요합니다. 현장도 두 곳이라 두 군데에 걸쳐 설치해야 하고요. 그런데 사람 눈에 띄지 않게 로프를 잘 설치하고, 회수한 방법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 10m 로프에 매달린건 갑옷 입은 시체입니다. 50kg 이라고 할 때, 속도와 운동에너지는 엄청났을 겁니다. 특히 중심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요. 이 속도로 가운데 건물에 충돌했다면? 갑옷을 입었다고 시체가 무사할리 없습니다. 그 소리를 관리인 등이 들었을게 뻔하고요. 한마디로, 운이 엄청나게 좋아서 성공했을 뿐입니다. 설득력은 무척 낮아 보여요. 최소한 건물에 로프를 걸 부분이 튀어나와 있었다는 설명은 필요했습니다.

진범인 후지쿠라 이치로, 지로 형제에 대한 묘사도 아쉽습니다. 이런 고급 트릭(?)을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겼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실수가 많은 탓입니다. 유쾌한 모습을 요시키 형사에게 들키는 첫 등장부터 실수에요. 레이코가 실종되었다는건 미치코를 죽인 뒤, 자살로 위장하려는 계획이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미치코가 살아서 증언한다면 그들도 충분히 수사 선상에 오를 수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는건 여러모로 어설펐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을 의심한 요시키 형사를 습격해서 중상을 입힌건 그야말로 엄청난 실수입니다. 용의선상에 있지도 않은데 도쿄 경시청 수사 1과 형사를 습격해서 폭행한다? 아예 죽일 생각이었다면 모를까, 요시키 형사가 살아만 있다면 중상을 입건 말건,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정황상 요시키 형사를 습격한건 그들 형제가 분명하니까요. 두 형제와 요시키 형사의 다툼을 카페 아르바이트와 손님들이 목격하기도 했고요. 즉, 살인 혐의가 아니더라도 요시키 형사 폭행 혐의로 충분히 수사 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자기 무덤을 판 셈이에요.

나중에 직접 미치코를 살해하려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어설퍼요. 원래 계획대로 미치코를 자살한 걸로 위장해야 말이 됩니다. 그런데 미치코는 살아서 누군가의 차를 타고 호텔을 떠난게 목격되었습니다. 형제가 운영하는 카페 '화이트'에 전화를 건 뒤, 카페에서 보낸 차를 타고 떠났다는 것도 호텔에서 증언해 줄 수 있고요. 그런데 이 뒤에 호수에서 미치코 목을 졸라 죽인다? 바로 체포될 겁니다. 설령 경찰이 호수에 빠트린 미치코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요. 정황이 너무 확실하니까요.

그리고 요시키 형사 습격과 미치코 살인 미수 당시에는 별다른 알리바이를 만들지 않는 행동에서도 고급 트릭을 고안하고 실행한 두뇌파 살인범으로 보이지 않있습니다. 이래서야 요시키 형사 상대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죠.

그 외에도, 게이코가 미치코 집에 들어간건 관리인에게 안 들켰고 열쇠도 복제해 놓았을 뿐이라던가, 미치코가 어린 시절 형제에게 지은 죄로 살인 공작에 끌려 들어갔다던가 하는건 모두 작가 편의에 따른 전개에 불과해 보입니다. 정교함은 찾아보기 힘들어요. 미치코가 형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할 정도로 죄의식이 있었다면, 형제가 거창하게 장치를 마련해 살인을 저지를 이유도 없습니다. 최소한 미치코 돈부터 빼앗는게 순서죠. 

전개도 작위적입니다. 요시키가 중상을 입고, 추리에 시간 제한이 있다는 점에서요. 특히 시간 제한은 이해가 안 되더군요. 미치코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도 공식 재판까지 시간을 두고 추리해도 되니까요. 구태여 영장 발부 전으로 시간을 정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영장이 발부된다고 다 전과자가 되는게 아닌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무리수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은 확실하지만 단점도 명확한, 전형적인 신본격 추리물입니다. 선뜻 권해드릴 정도는 아니지만, 본격물 팬이고 요시키 형사 시리즈가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습니다.

2020/11/28

형사의 눈빛 - 야쿠마루 가쿠 / 최재호 : 별점 2점

형사의 눈빛 - 4점
야쿠마루 가쿠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야쿠마루 가쿠가 쓴 단편집으로 모두 일곱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징이라면 한 편 한 편이 완결되는 이야기이지만, 긴 이야기가 포함된 연작 구성이라는 점입니다. 긴 이야기는 주인공이자 탐정역인 나츠메 노부히코가 형사가 된 계기가 된, 나츠메 딸의 폭행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단편별로 사건이 조금씩 설명되며 마지막 수록작인 "형사의 눈물"에서 진상이 드러나는 구성이지요. 나츠메 노부히코는 범죄 아동을 담당하는 법무부 직원이었지만, 30세에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고 6년간 파출소에서 일한 뒤 형사가 된 집념의 사나이죠. 추리력도 만만치 않고요. 작품 내내 '인간미'를 느끼게 만든다는게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추리적인 완성도는 그닥입니다. 사건들 대부분 증거가 명확하고, 범인들의 자백도 잘 이루어지고 있어서 추리할 여지가 많지 않은 탓입니다. 나츠메 형사가 펼치는 약간의 추리는 볼거리이기는 합니다. 문제는 이 추리가 사건 해결에 영향을 미치는건 별로 없다는 거지요. 오히려 이렇게 추리력을 드러내기 위해 억지스럽게 전개한 이야기들이 많은 편입니다.
설정과 동기가 극단적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려 한다던가, 아동 대상 잔혹 범죄가 등장하는 극단적인 이야기가 절반에 가깝거든요. 흥미를 잡아 끄는 설정에 능하지만, 추리적으로는 부족했던 작가의 전작들이 떠오른데 전작들보다도 못해요. 설정의 재미를 느끼기에는 분량이 덕없이 부족한 단편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오무라이스" 

방화로 히데아키가 죽었다. 그러나 사실혼 배우자인 케이코의 아들 유우마는 덤덤했다. 친아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연립 주택 근처에서 벌어졌던 연쇄 방화 사건 범인 소행으로 의심되었지만, 나츠메 형사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의외의 진상을 추리해내는데...

케이코가 진범이며, 원래는 아들 유우마가 목표였다는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정부의 육체에 빠져 재혼에 걸림돌이 된 아들을 살해하려 한 거지요.

그러나 반전을 드러내는 추리는 모두 억지스럽습니다. 현장에 남아있던 오므라이스가 단서가 된다는 것 부터 그러합니다. 나츠메 형사는 케이코가 히데아키가 집을 비운다는걸 이미 알고 있어서 수면제가 든 오무라이스를 유우마 용으로 한 개만 준비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러나 히데아키가 애인 시즈카에게 만나자는 보낸 문자 메시지를 케이코가 봤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케이코에게 그날 늦는다고 메시지를 보냈다면 모를까요. 즉, 히데아키가 집을 비울거라는걸 알았다는건 순전한 상상입니다.
또 유우마는 히데아키를 싫어해서 그가 있으면 집에서 저녁을 먹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녁을 한 명분만 준비한게 이치에 맞지요. 아들 유우마가 어머니의 살의를 눈치채었을거라는 추리도 마찬가지에요. 수면제 오므라이스가 자기 몫이었다는걸 유우마가 확신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케이크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한 환자 야스오카 씨 손에 서툰 주사자국이 많았던게 단서가 된다는 묘사도 이해하기 힘듭니다. 주입구(?) 역할을 하는 주사 바늘은 고정시키고, 링겔액만 바꾸는게 일반적이지 않나요? 마지막에 케이코가 흔들려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도 영 설득력이 없었어요. 끝까지 버텨 정상참작을 받는게 현실적이니까요. "일년 반만 기다려"처럼요. 아울러 젊은 새 애인의 육체에 빠진 탓이라는 일본 AV스러운 동기도 그저 그랬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여러모로 추리적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빨간 줄" 

코이데 신이치는 일하던 이자카야에서 막 해고되었다. 11년 전 삼촌을 살해했던 전과자였기 때문이었다. 그 뒤 함께 사는 조카 하루나의 친구 요코세의 아빠가 살해되는데...

범인은 신이치의 누나 나오코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던 요코세를 구해주려다가 살인을 저질렀던 겁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추리는 약합니다. 별다른 단서가 없는 탓입니다. 누나 나오코가 요코세의 집에서 벌어진 사망 소식을 듣고, 피해자가 요코세가 아니라 그 아빠임을 확신하고 반문한게 증거다? 턱도 없는 주장입니다. 어차피 나오코가 자수해서 범행이 드러나서 추리의 여지도 거의 없고요.
11년 전 사건도 누나가 진범이었고, 신이치가 위증했다는 반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딱히 증거도 없고, 작위적이에요. 모든 남자가 아동 성범죄자에 아내와 딸을 구타하는 인간 말종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물론 누나 나오코를 위해 거짓으로 자수한 신이치의 위증을 나츠메 형사가 곧바로 밝혀내는 장면은 괜찮았습니다. 신이치가 인형 뽑기에서 뽑았다는 인형이 결정적 증거가 되지요. 신이치가 말했던 시간에는 기계 안에 없는 인형이었거든요. 인형 뽑기 경품 교체 시간은 수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정보로, 꼼꼼한 수사가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잃어버린 심장"

마츠시타 마사유키는 7개월 전, 아들 토모키를 사고로 잃었다. 그 뒤 아내 사에코를 질책하다가 이혼 서류를 남겨 놓고 그 길로 출근하던 회사를 지나치고 노숙인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속한 노숙인 무리의 리더 쇼우가 살해당하는데...

쇼우에게는 오래 전 괴롭히던 학우를 죽였던 과거가 있었는데, 얼마전 TV에 나왔을 때 피해자 가족에게 발견되어 타겟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범인은 같은 노숙자인 나카 씨였고요.

그런데 그닥 신선하지는 않았습니다. 흉기인 술병에 나카 씨 지문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추리할 여지도 없고요. '힛츠미'라는 요리를 나카 씨가 모르는걸 보고, 나카 씨로 변장한 가짜라는걸 알아채는 "절대미각 식탐정"스러운 추리만이 볼거리였습니다. 이 추리는 사건 해결에 딱히 영향을 주지 못하지만요. 

여러모로 추리물보다는 드라마에 가깝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자존심"

수사 1과 형사 나가미 와타루는 나츠메 형사와 파트너가 되어 연립주택 살인 사건 해결에 나섰다. 둘은 피해자 사쿠라이 아야노가 다녔던 직장에서 몇 가지를 알아냈다. 그녀가 직장을 옮긴건 전 남자 친구가 괴롭혔기 때문이며, 지금은 다른 사람과 사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며 번민했다는데....

수사 과정에서 두 형사는 피해자 친구라는 아가씨 미우를 만납니다. 남자같은 화물 운송업을 하고, 복싱 도장까지 다니는 남자같은 아가씨였지요. 그런데 알고보니 범인은 그녀였습니다. 미우는 성정체성 장애로 스스로를 남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아야노와도 '남자로서' 진지하게 사귀었고요. 그러나 육체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어서, '바람을 피우던' 아야노를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살해한거지요. 설정은 꽤 재미있었어요.

그러나 추리는 역시나 억지스럽습니다. 나츠메 형사는 미우가 '남성적'이라는 말을 듣고 흥분한걸 보고 그녀가 성정체성 장애를 갖고있다는걸 눈치챘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남자라고 생각하는데, 여자 치고는 남자같다는 의미의 말을 들어서 흥분한거라면서요. 그러나 그냥 끼워맞춘 이야기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싫다던가, 남자 자체를 싫어했다던가, 남자같다는 말을 듣고 불쾌할 이유는 수도없이 많은데, 하필이면 가장 생각하기 어려운 상황을 추리한다는건 이상하지요. 게다가 권투 스파링을 통해 그녀가 마음만큼은 남자라는걸 알아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입니다. 만화에나 나옴직한 발상이에요.

'카이'라는 피해자 애인 이름에 대한 추리는 나쁘지 않아요. 미우라는 이름을 뒤집어 우미 (海), 그리고 카이로 이어졌다는 거지요. 하지만 이 역시 미우가 범인임을 밝혀낸 다음 끼워맞춘거라 대단한 추리로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아버지의 휴일" 

요시자와 아츠로는 아내 아키코가 7년 전 병으로 죽은 뒤, 아들 류타와 함께 살아왔다. 어느날, 그는 귀가하다가 류타가 수상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걸 목격했다. 그리고 류타가 금속 케이블 절도단에 속한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증거들이 집에서 발견되었다. 요시자와는 친구 나츠메와 상담한 뒤, 나츠메와 함께 류타를 미행하는데...

결국 경찰에 의해 류타는 체포됩니다. 류타는 진짜로 금속 케이블 절도단에 속해 있던 거지요. 류타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약간의 반전은 있습니다. 이는 집에 단서를 보란 듯이 놔 두었으며, 공중 전화로 직접 경찰에 신고했다는 정황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공중 전화 신고는 시간과 장소만 특정되면 별다른 추리가 필요한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운, 나츠메 형사가 왜 형사가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연작 단편의 가교 역할에 불과한 이야기였습니다. 딸 에미가 연쇄 테러 사건으로 식물인간이 된 모습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모습이 어떻든 미래의 가능성을 믿으라면서"며 자기 딸 에미도 지금 누워 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거라는 희망을 드러내는 나츠메의 말은 울림을 남기고요.

하지만 별점은 1.5점입니다. 점수를 줄 부분이 별로 없군요.

"흉터" 

고등학교 상담 교사 타나베 쿠미코는 결석, 자해를 반복해 온 유카가 걱정이었다. 결국 유카는 자살 시도를 하고 입원하는데, 다음날 학교로 나츠메 형사가 찾아 왔다. 학교 학생이 상해 치사 사건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해 치사 사건 피해자인 사와무라는 유카의 몹쓸 사진을 찍고 협박해 왔습니다. 유카는 지하철에서 무고한 사람에게 성추행 누명을 씌우고, 돈을 갈취하는 사기에 가담했지만 그 때마다 죄책감에 자해를 했습니다. 그러다 이 범행의 피해자로 모든 걸 잃은 이와사키 씨가 진상을 알게 되어 상해 치사 사건을 일으켰던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건 유카와 이와사키 씨가 한 자백으로 설명됩니다. 계속 반복되듯, 나츠메 형사가 특별히 추리력을 발휘할 부분이 없어요. 이래서야 추리물은 아닌 셈이지요. 나츠메가 형사가 된 건 딸 아이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범인에 대한 복수심 때문은 아니었다... 는 심리 묘사 정도만 볼만 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형사의 눈물"

츠카모토 세이지와 쿄코 부부는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세이지는 자기가 괴롭혔던 오오타를 만났다. 오오타는 세이지가 어린 아이를 망치로 때리는걸 목격했다며 협박하기 시작하는데....

작품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으로 나츠메 형사 딸이 식물인간이 된 사건의 범인이 밝혀집니다. 불량 학생이었던 세이지는 나츠메로부터 진심어린 충고를 듣지만, 오히려 짜증과 증오가 일어나 그 딸을 테러했던 겁니다. 오오타는 이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 협박했고요.
하지만 사진에 함께 찍혀 있었던 여성 목격자가 쿄코라는 진상은 조금 의외였어요. 그녀는 세이지를 좋아해서 신고를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오오타가 일으킨 모방 범죄로 여동생 야스코를 잃고 만 거지요. 이를 통해 오오타에게 협박당해 농락당하다가, 야스코를 죽인건 오오타라는걸 알고 그를 살해한게 오오타 사건의 진상입니다. 

자기가 신고만 했다면 동생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쿄코가 놓인 기구한 상황만큼은 인상적입니다. 빠져나가기 힘든 생지옥 상황은 야쿠마루 가쿠의 특기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불쾌했습니다. 세이지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탓입니다. 세이지가 현재 시점에서 개과천선한 괜찮은 청년처럼 묘사되고 있는데, 그가 과거 오오타를 괴롭혀서 히키코모리로 만들었고, 에미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범행을 저지른건 사실입니다. 이런 놈이 최소한 죗값을 치루지 않고 행복하게 살 자격 따위는 없어요. 오오타를 만나 협박당하는 정도는 형벌로 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자수할 생각 없이 살해할 결심을 한다는건 쓰레기라는걸 재차 인증한 셈입니다.
물론 오오타 역시 죽어 마땅한 범죄자인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오오타가 범죄를 저지른건 세이지 탓이 큽니다. 세이지가 저지른 테러를 모방한 범죄니까요. 그런데 오오타와는 다르게 세이지는 나쁜 녀석이 아니고, 그냥 궁지에 몰렸던 것에 불과하다고 전개하니, 영 와 닿지 않아요. 가혹한 왕따 가해자들 시점으로 그들이 정당하다는 식으로 묘사한 "콜드 게임"만큼 불쾌한 묘사였습니다.
오오타를 죽인 진범인 쿄코 역시 딱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신고하지 않아서 여동생이 죽은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두 부부가 각각 살인과 과거 폭행으로 형을 받는다면, 남겨진 딸은 어떻게 하나요? 끝까지 무책임한 모습에서 일말의 연민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이지는 어린 아이를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계획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동기도 보복 목적에 가깝고요. 이는 비난 동기 살인 미수에 해당되며, 가중 처벌 요소가 많습니다. 18년 이상에서 무기 징역까지 선고받을 수 있어요. 그나마 나츠메 형사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던가, 초범이며 진지하게 반성한다는 등의 감경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15년 이상은 선고받을 중범죄죠. 쿄코는 피해자가 친족을 살해했다는 명확한 귀책 사유가 있어서 참작 요소가 많기는 하나 최소 3년은 복역해야 할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역하고 나와서 정상적인 직업을 갖고, 정상적으로 딸을 양육할 수 있을까요? 부모가 모두 살인자인 셈인데, 왕따나 안 당하면 다행일겁니다. "편지"에서처럼, 살인자 가족이 피해를 받고 사는건 당연하고요.

전개도 우연, 억지가 많이 겹쳐 있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마침 세이지가 오오타를 살해 결심한 날, 쿄코가 오오타를 살해했다는 것 부터 그러합니다. 애초에 오오타가 쿄코를 농락하고 있었다면 구태여 세이지를 찾아가 협박을 할 필요도 없었어요. 얻을게 없으니까요. 과거 세이지가 범행을 저지르던 순간과 목격자를 적절하게 사진에 담았다는 설정도 작위적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쿄코가 놓인 생지옥 상황만큼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딱히 좋은 부분이 없네요. 아니, 불쾌하고 불편한 이야기였습니다. 나츠메 형사가 세이지를 사살하는 결말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12/09/21

부호형사 - 쓰쓰이 야스타카 / 최고은 : 별점 1.5점

부호형사 - 4점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최고은 옮김/검은숲

"천재" 쓰쓰이 야스타카의 몇 안 되는 추리물입니다. 명성이 자자했던 작품이지요. 꽤 인기 있던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기도 하고요. 국내 소개된 지는 꽤 되었는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그런데 읽고 난 느낌은 한마디로 별로였습니다. "부호형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서 범인을 밝혀낸다는 기본 설정은 꽤 재미있었고, 이러한 류의 설정과 장르물의 원조 격이라는 것은 잘 알겠지만 아무리 봐도 추리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에요. 굉장히 만화 같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어요. 유사한 설정이라도 조금이나마 더 현실적이고 최소한 추리소설의 모양새는 갖춘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가 훨씬 좋았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쓰쓰이 야스타카의 작품은 다작 탓인지 명성에 비하면 영 아닌 작품이 제법 있는 편인데, 이 작품은 제게는 "영 아닌" 쪽이네요. 대관절 왜 높은 평가를 받는지 알 수가 없는데, 본격 추리물 애호가께서는 가급적 피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부호형사의 미끼"

주인공과 주요 등장인물, 작품 설정이 소개되는 시리즈 첫 작품. 5억 엔이라는 돈을 은닉한 범인이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부호형사가 접근해서 돈을 쓰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내용입니다.

첫 작품부터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하더군요. 개그 만화에 가까운 비현실적이면서도 황당한 설정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추리소설로 볼 만한 구석이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장르가 "개그소설"이었던 걸까요? 그러나 별로 웃기지도 않아서 역시나 기대 이하였어요. 별점은 1점입니다.

"부호형사의 밀실"

밀실에서 갑작스러운 화재 사건이 벌어지고, 불에 타 죽은 피해자의 경영 라이벌이 유력한 용의자가 되지만, 범행 방법을 몰라 체포하지 못하는 상황.

역시나 부호형사 다이스케가 자신의 재력으로 용의자와 동종 업종 회사를 차려 라이벌로 급부상한 뒤 살의를 일으키게 만들고 다시 범행을 저지르게 유도한다는 내용인데, 황당하기는 전편과 충분히 견줄 만합니다. 그래도 "트릭"이라는 게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전편보다 조금은 낫네요.

그러나 범행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작위적이고 우연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살인을 연속해서 저지르게 만든다는 과정의 설득력도 그닥이고 말이죠. 등장인물이 독자에게 갑자기 말을 거는 등의 전개는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정말 개그소설인가? 별점은 1.5점입니다.

"부호형사의 함정"

강도 사건, 밀실 살인 사건에 이어서 벌어지는 사건은 유괴 사건.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네 편의 단편 중 가장 괜찮았습니다. 동기가 다른 단편들보다는 설득력이 있고,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이라 추리적으로 합격점을 줄 만할 뿐더러, 독자에게 직접 설명해 주는 독특한 전개 방식, 자잘한 부호형사의 활약도 볼거리인 등 재미와 완성도 측면에서 읽을 만했기 때문이죠. 부호형사의 활약도 단돈 (?) 500만 엔 정도로 끝나기 때문에 그나마 현실적으로 느껴졌고요.

물론 장난기 어린 문체와 전개는 여전해서 전체적인 느낌은 그닥... 이긴 합니다. 몇몇 장점이 있기는 하나, 시리즈 전체가 지닌 단점이 너무 커서 도저히 덮을 수 없는 상황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호텔의 부호형사"

야쿠자들의 회합 장소로 다이스케가 호텔을 제공하는데, 그 호텔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이야기.

만화와 같은 이 시리즈의 대단원을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등장인물, 상황 설정, 전개 모두가 전작 이상으로 황당했거든요. 문제는 이 황당함이 좋은 쪽으로 작용한 게 아니라는 점이겠죠... 설정이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내용에 몰입하기도 힘들고, 일어난 범죄도 장난같이 느껴지더군요.

게다가 추리적으로 뭔가 있어 보임직하지만 별거 없는 트릭이라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범인의 이치에 맞지 않는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끌어내는 추리의 과정 하나는 그럴싸하지만, 트릭 자체가 별볼일 없고 결국 경찰 조사로 쉽게 진상이 밝혀졌으리라는 점에서 말이죠. 딱 네 편의 이야기만 존재한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막 나가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3/04/01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4. 도넛 시계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4. 도넛 시계

경찰서는 아직 페인트 냄새가 남아있는 새로 지어진 깔끔한 건물이었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만 없었다면 실적좋은 최신의 회사 사무실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접수처의 여경에게 방문 이유를 밝히자, 한 구석으로 안내되었다. 책상 위에 도면을 펼쳐놓고, 양복을 입은 남자가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다. 여경이 토시오가 찾아왔다는걸 알리자 남자는 일어서서 스테인리스 의자를 끌어당겨 토시오에게 권했다.

"안녕하세요, 일부러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제가 이 사고를 담당하게 된 사람입니다."

얼굴이 넓고, 입 안의 이빨은 새하얗지만 치열은 심하게 나빴다.

형사는 사무적으로 토시오의 이름과 주소를 물었다. 직업이 무직이라고 대답하자 형사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워낙 특이한 사고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죠."

책상 위에 펼쳐진 것은 사고 현장의 도면이었다. 맨 처음 차량 두 대가 부딪힌 상태로 그려져 있었고, 한 대를 빼고는 큰 차량이 그려져 있었다. 탱크로리 차량인 것 같았다.

"당신의 차는 여기 있었죠?"

형사는 연필 끝으로 유조차 뒤에 있는 차를 가리켰다.

"맞습니다."

"그럼 사고 전후의 상황을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주세요."

토시오는 자신이 본걸 상세하게 말했다.

그림 위에 마사오가 쓰러진 위치가 새로 그려졌다. 반대편에 사람 모양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토모히로임에 틀림없다.

"이 사람은?"

토시오는 그림의 검은색 사람 모양을 가리켰다.

"방금 전에 연락이 왔어요. 사망했다고 합니다. 유감입니다."

"탈출하지 못했습니까?"

"안타깝습니다. 차 트렁크에서 자신의 짐을 꺼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짐 속에 기름 같은 것이 들어 있었는데, 넘어지면서 그 기름이 몸에 묻어 불이 났다고 여러 목격자가 말하더군요. 이 사람은 장난감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어요. 회사에 문의해보니 확실히 그런 장난감을 생산하고 있었고요. '도넛 시계'라고 하더라고요."

"도넛 시계?"

토시오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어떤 장난감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른 담당자가 조사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떨어진 유리 파편은 수거해서 감식반에 넘겼습니다. ……그런데........"

형사는 표정이 굳어지면서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눈빛에 의심의 빛이 보였다.

"당신의 차는 경찰서 주차장에 있지 않습니까?"

"아니요, 두고 왔습니다."

"두고 왔다고? 어디다 두었다고요?"

토시오는 말문이 막혔다.

"두고 온 것이 아니군요. 당신 차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을 거에요."

"그런 건 상관없잖아요."

이 말은 형사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형사는 위협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은 마와리 부부가 집을 떠날 때부터 차를 쫓아다녔죠."

"그런 일은 없습니다."

"택시 운전기사가 증언하고 있어요. 그는 이상한 차가 미행하고 있다고 마와리씨에게 주의를 주었다는군요. 뚱뚱한 여자와 함께 있었다고 하는데, 그 여자는 검문하는 경찰을 피해 달아났고요. 그 여자는 어디로 간 거죠?"

"모릅니다."

"차는 그 여자가 타고 간 것이군요."

"몰라요. 그리고 그 일은 그 사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요."

"면허증을 보여 주실래요?"

이를 거부하면 마이코에 대해 더 추궁당할 것 같았다. 토시오는 면허증을 꺼냈다. 형사는 면허증을 열었다. 안에서 명함 한 장이 떨어졌다. 형사는 명함을 집어 들었다.

"우다이 마이코.......? 뚱뚱한 여자........"

형사는 명함의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전화기를 끌어당겨 사무실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 우다이 경제연구회인가요?"

"네, 네." 

니시키 빌딩의 구로사와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마이코는 사무실에 없었다.

형사는 명함을 뒤집어 마이코의 집 전화번호를 돌렸다. 벨소리만 길게 이어졌다. 마이코는 집에도 가지 않았다.

형사는 명함을 뒤적거리며 이번에는 내선 번호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이쪽은 교통과 교도(京堂)입니다. 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2~3년 전에 정년퇴직한 요코누마 형사를 알고 계실 겁니다. 요코누마 형사의 현재 회사 전화번호를 알고 계십니까? 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교도 형사는 잠시 기다렸다가 연필을 휘둘렀다.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아, 다이토(大東) 흥신소군요. 이쪽은 에노키마치 경찰서 교통과 교도라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후지오카 씨였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잠시 의례적인 인사말이 이어지고 나서,

"그런데 우다이 씨도 오셨나요?"

곧이어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울려 퍼졌다.

"어떻게 여기 있다는걸 알았어?"

"감이 좋은 덕이지. 기운 넘치네."

교도 형사의 얼굴이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남편은 어때?"

"변함없어."

"그런데 카츠 토시오라는 젊은이가 여기 있어. 당신 사람이지?"

"어머, 그런 말을 했어?"

"아니, 입이 엄청나게 무겁더군. 그 점에서는 감탄했지만. 다만 면허증 사이에서 마이코의 명함이 나왔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데, 왜 도망쳤어?"

"왜냐면 ...... 잘 알잖아."

"...... 마이코도 마음이 약한 부분이 있군."

"뭐가? 확실하게 말해봐."

"넌 마와리 부부의 뒤를 쫓고 있었잖아"

"알아차렸어?"

"택시 기사가 그렇게 말했어. 무슨 일이야?"

"조금 복잡해. 하지만 사고와는 관계없어."

"아니, 관계없더라도 내가 물어보는 거야."

"교도 씨, 과를 바꾼 건 아니지 않아?"

"그래."

"그럼 왜 관계도 없는 것을 집요하게 물어보지?"

"말할 수 없나?"

"아냐, 얘기할게, 하지만 전화로는 좀 그렇잖아. 내일 갈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너무 이상한 사고라서 마이코의 의견도 물어보고 싶은 것 뿐이라고."

"사고의 원인은 뭐였어?"

"그게, 아무래도 운석이 떨어진 것 같아."

"운석?"

"그래, 유성이야. 대부분의 유성은 지상에 도착하기 전에 대기권에서 기화되어 버리지만, 일부는 다 타지 않고 떨어질 때가 있어. 그게 바로 운석이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공위성의 부품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 또 어떤 사람은 제트기가 상공에서 떨어뜨린 물이 얼어붙은 것일 거라고도 하고. 하여튼, 지금 전문가들이 조사하고 있는 중이야."

"운석이 자동차에 부딪히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생각도 못한 재앙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럼 내일 보자고."

"잠깐만, 카츠 군 좀 바꿔줘."

교도 형사는 토시오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뭐 괜찮아.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됐어. 그리고, 차에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마사오의 것이었나?"

"네, 맞습니다. ...... 잊고 있었어요."

"카츠 군, 검은색 넥타이는 있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가져와. 잊지 말아. 내일 토모히로의 철야가 있으니까. 알았지?"

"알겠습니다."

"출근은 10시."

"좋아요."

토시오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교도 형사에게 인사를 했다.

"바쁠 것 같군."

"그런 것 같습니다."

"언제 입사했어?"

"오늘입니다."

"오늘........ 마이코도 힘들겠네. 그게 가장 적성에 맞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교도 형사는 먼 곳을 바라보는 표정을 지었다.

"우다이 씨는 경찰관이었습니까?"

토시오는 샹보르관에서 여종업원에게 검은 수첩을 흘깃거리던 마이코를 떠올렸다.

"그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어."

"왜 그만두셨습니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마이코에게도 묻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알고 싶으면 도서관이라도 가서 작년 12월 신문을 찾아봐. 3면 기사에 나와 있어. ......"


에노키초 도서관은 경찰서 근처에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은 몇 년 만일까. 직원에게 이유를 말하자 곧바로 두툼한 신문 축쇄본을 꺼내주었다. 토시오는 그것을 열람실로 가져가 한 장 한 장 넘겼다.

12월 1일자부터 마이코와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활자가 너무 작아 가끔씩 먼 곳을 바라보며 눈을 쉬어야만 했다. 12월 중순이 지나자 한 작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여경의 부주의'라는 제목이었다.


16일 오후 3시경, 고모리시 에노키마치의 도로변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에노키마치서 교통과 경사 우다이 마이코는 우회전 금지구역에서 우회전하는 승용차를 정지시켰다. 그런데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우다이 순경의 손에 1만엔짜리 지폐 7장을 쥐어주고 도주했다. 우다이 순경이 그 지폐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으려는걸 다른 목격자가 신고하여, 우다이 순경은 출동한 경찰차에 의해 뇌물수수, 범인 묵인 현행범으로 연행되었다. 경찰서장의 담화를 통해 우다이 순경은 뇌물수수 의도는 없었고, 도주하는 차를 쫓기 위해 지폐를 잠시 주머니에 넣었다고 말했지만,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조금이라도 시민들에게 의심을 살 수 있는 행위가 있었던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글을 읽은 토시오는 마이코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이코가 그런 돈을 주머니에 넣을 리가 없다.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토시오는 축쇄본을 직원에게 돌려주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아름다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노을빛 하늘이었다.

토시오는 시계를 보았다. 백화점에 들러 도넛 시계의 실물을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시오가 백화점 장난감 매장에 가는 것도 몇 년 만일까. 오늘은 여러가지로 유난히 드문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명의 쇼핑객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은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도넛 시계는 확실히 수많은 진열된 장난감들 사이에서도 튀는, 이채로운 물건이었다. 40센티미터 남짓한 유리 원통형으로,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모양은 모래시계와 비슷했다. 모래시계라면 위쪽의 모래가 아래로 떨어지겠지만, 이 도넛 시계는 아래쪽의 진홍색 물체가 굴곡을 통해 위쪽으로 떠오르는데, 그 뜨는 방식이 참으로 기이했다.

먼저 유리 원통의 아래쪽 부분에 꽉 차 있는 붉은 물체가 마디 부분에서 조용히 떠오르려고 한다. 처음에는 콩알만 한 크기가 점차 작은 계란 정도로 커진다. 마치 수도꼭지에 고여가는 물방울을 거꾸로 보면 이런 움직임이 될 것이다. 계란만 한 크기의 빨간 그릇은 어느 순간 물줄기에서 벗어나 천천히 떠오르다가 문득 전체가 부르르 떨면서 수평으로 퍼져나가며 원반 모양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곧 얇아진 가운데 부분에 구멍이 뚫리면서 전체가 예쁜 도넛 모양으로 변해간다. 빨간 도넛은 천천히 유리 원통 속을 떠올라 천장에 쌓여 있는 빨간 물체에 부딪혀 부서져 사라진다. 그 사이 다시 마디 부분에 새로운 그릇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

"...... 아래쪽의 빨간 물체가 목을 통과해 완전히 위로 모일 때까지 정확히 십오 분이 걸립니다. 도넛이 하나 만들어지고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정확히 1분입니다 ......"

젊은 여직원이 자신만만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아래쪽 원통에 붉은 색이 완전히 사라지자 여직원은 원통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원통은 다시 수많은 도넛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직사광선이 닿는 곳에 내놓지 말라는 것은 위험하다는 뜻인가요?"

한 중년 남성이 여직원에게 물었다. 이 구매자는 도넛 시계에 붙어 있는 작은 스티커를 읽은 것 같았다.

"아니요, 보통은 햇빛에 노출되어도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부에 특수한 유성 액체가 들어있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고온인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경고문은 안전에 대한 제조사의 배려입니다."

여직원의 말투는 이런 스티커를 붙인 제조업체를 부러워하는 듯했다.

"그렇군요, 기름을 사용했군요."

쇼핑객은 감탄하며 말했다. 여직원은 이 고객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도넛 시계의 구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 유리통은 투명하지만 특수한 표면 장력을 가진 투명한 기름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다음은 이 빨간 도넛입니다. 이것도 특수한 액체인데, 붉은 색을 띠고 있습니다. 두 액체는 섞이지 않습니다."

점원은 도넛 시계를 들고 양손으로 흔들듯이 강하게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퍼져나가면서 통이 분홍색으로 변했다. 점원은 그것을 보고 조용히 유리 케이스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통은 아래쪽부터 맑아지기 시작했고, 곧 붉은 액체와 투명한 액체로 깨끗하게 나뉘었다. 그리고 시계는 원래처럼 빨간 도넛을 만들기 시작했다.

"...... 두 액체의 비중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빨간 액체가 조금 더 가볍죠. 그럼 잘 보세요. 빨간 도넛이 통의 목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입니다. ...... 보이시죠? 그리고 방출되는 반동으로 액체 아래가 움푹 패이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튕김이 전체에 전달되어 액체가 아름다운 도넛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죠. 이를 위해서는 액체의 표면장력, 통목의 크기, 지구의 중력 등의 미묘한 균형이 잘 맞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마와리 토모히로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할 수 있는 도넛 시계의 생명체를 닮은 움직임에 토시오는 마음을 빼앗겼다. 유리 안의 반투명한 짙은 붉은색이 점점 커져가는 움직임에서 비현실적인 생생한 탄력이 느껴졌다. 도넛 모양으로 변화하는 움직임은 번데기가 나비로 변태할 때와 비슷했다.

"언제부터 판매되고 있었나요?"

토시오는 여점원에게 물었다.

"재작년부터요. 해외에도 수출되어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토모히로가 위험을 무릅쓰고 불타는 차에서 꺼내려고 했던 것이 이 시계가 아니었나 싶었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판매되고 있었다면 국제 완구 박람회에 출품해 상을 노리는 장난감일리는 없었다.

"마도죠라는 장난감은 없나요?"

"마도죠요?"

여직원은 이상한 표정으로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들어본 적도 없네요."

방금 전의 쇼핑객이 지갑을 꺼냈다. 이를 계기로 토시오는 매장을 떠났다.

가게 안의 마이크가 6시 폐점을 알렸다. 다만 식당가는 9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토시오는 갑자기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집을 나온 이후 샹보르관에서 맥주만 마셨던 것이다.

식당 창밖으로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도로에는 자동차 불빛만이 흐르고 있었다.

토시오는 식사 전에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허락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사치.

…… 건배.

마음속으로 말한다. 혼자만의 입사 축하라고. 맥주의 쌉싸름한 맛이 지금의 기분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마이코, 마사오, 토모히로, 소우지, 교도 형사 등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니시키 빌딩, 샹보르관, 키타노 제일의원, 에노키초 경찰서, 도서관, 백화점 …… 지금까지 집과 헬스장만 오가던 토시오에게는 눈사태 같은 경험이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이 있었다. 마이코의 일이었다. 신문에서 읽은 마이코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맥주의 취기로 마이코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그녀의 집에 가서 사정을 들어보자.

토시오는 일어섰다. '당신은 생각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기는 남자다'라며 토시오를 비판했던 마이코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의 방문에는 핑계가 있었다. 도넛 시계를 봤다는 보고다. 토시오는 백화점을 나와 어두워진 길을 따라 전철역으로 향했다.


낡은 시영주택이었다. 계단 아래에는 세발자전거 몇 대가 방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방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마이코의 방은 4층 구석에 있었다. 노란 커튼 너머로 창문 빛이 보였다.

토시오는 입구에 놓인 우편함을 둘러보았다. 우다이 쇼조(宇内省三)라고 적힌 우체통에 석간 신문이 꽂혀 있었다.

토시오가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위에서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느린 발자국 소리와 함께 작게 딱딱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토시오가 망설이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1층 계단에서 돌아서서 나타났다. 거친 얼굴의 남자로 긴 머리에 무뚝뚝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남자는 몸을 새우처럼 구부려 우다이 쇼조의 우편함에서 신문을 꺼냈다. 그리고 목발에 의지해 다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토시오는 우다이 쇼조라고 생각되는 남자의 모습을 본 뒤, 마이코를 만나서 그 사건을 추궁하고 싶은 마음이 급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토시오는 아파트를 떠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약한 탓에 금방이라도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별들만 보였다. 그때 시야 가장자리에 작은 별똥별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토시오는 걸어가며 찬란하게 쏟아지는 유성우 속에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2005/02/16

밀랍 인형 (Wax Work) - 피터 러브시 : 별점 4점

밀랍인형 - 8점
피터 러브제이 지음/뉴라이프스타일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왕립 식물원이 있는 고급 주택가 큐 스트리트의 고급 사진 스튜디오에서 사진사 하워드 클로우머의 조수 퍼시벌이 독살당했다. 경찰은 그가 사진사의 아내 미리엄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미리엄을 기소했다. 그녀는 피해자가 즐겨 마시던 와인 디캔터에 사진관에서 쓰던 청산가리를 넣어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자술서를 제출했고, 법원은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며칠 안 남은 어느날, 형사부장 크리브에게 이 사건에 대한 엄중 조사 명령이 하달되었다. 사실은 독약을 꺼낼 수 있는 금고의 열쇠는 피해자 퍼시벌과 남편 하워드만이 가지고 있었고, 미리엄은 열쇠를 손댈 수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건 수사에 나선 크리브는 미리엄 주변에 비슷한 형태의 자살-독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워드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하워드가 종적을 감춘 탓에, 크리브는 법으로 엄중히 금지되어 있는 사형수 미리엄과의 면회를 통해 진상을 밝힐것을 결심하는데....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로 접했던 영국작가 피터 러브시의 작품. 작가에 대해 호감도 있었지만, 이 작품에 대한 다른 여러분들의 호평을 인터넷 상에서 익히 접해왔기에 헌책방에서 눈에 띄었을때 주저없이 구입하였습니다.

고전 황금 시대인 19세기 후반의 영국이 무대입니다. 손에 잡힐 듯한 시대 묘사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고보니 이 작가의 시대 묘사는 특출합니다. 3편의 장편 모두 다른 시대가 배경인데도 말이지요. 현대가 무대인 "마지막 형사"야 그렇다 치더라도, 20세기 초엽의 "가짜경감 듀"나 이 작품 모두 창문 밖 거리를 보고 쓴 듯한 현실감 넘치는 묘사가 압권이거든요. 특히나 이 19세기 후반의 영국이라는 무대는 "적당히 수사와 재판 등의 조직이 살아 있으면서도 무언가 2% 부족한 듯한" 고전 추리소설적인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시대인데 작품과도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작가가 그것을 의도하고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작품 속 탐정역의 크리브 형사 부장은 시리즈 캐릭터라고 하는데, 상사에게 치여살며 만년 형사부장에 머물러 있는 궁상맞은 현실적인 모습과 함께 자존심도 있고 행동력, 추리력이 탁월한 능력있는 탐정의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홈즈를 의식하진 않았겠지만, 당시 경찰에도 레스트레이드같은 무능한 인물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설정은(출세는 못하지만) 재미있는 아이디어였어요. 뭐 레스트레이드도 우직하고 성실하다는 점에서는 능력있는 인물이겠지만요.

하지만 이 크리브 형사 부장보다 이 작품을 빛내는 인물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미리엄이라는 영국 스타일 "팜므파탈"입니다. 주로 "몸"으로 승부하는 경향이 짙은 미국식 팜므파탈에 비교해서 상류계급의 귀부인이라는 사고방식, 엄숙하고도 단정하면서도 곧은 행동거지로 무장하고 약점과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고 독사같은 면모를 갖춘 독특한 악녀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매력을 뽐냅니다. 그림과도 같은 아름다움 역시 갖추고 있고요.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은 굳은 마음과 치밀함도 큰 무기입니다. 비록 마지막 장면에서 결정적 실수를 범하며 무너지긴 했지만, 아주 흥미로운 캐릭터였습니다. 이야기도 스토리텔러로서의 피터 러브시의 진가를 잘 보여줍니다. 크리브 형사부장이 서서히 사건을 파헤치며 드러나는 과거의 또 다른 자살 사건, 그리고 과거 사건과의 이해할 수 없는 연관성에서 비롯된 추리를 바탕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승부! 결국 마지막에 "일사부재리 원칙"이라는 결정적 법 조항으로 밝혀지는 진범의 정체와 반전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독자를 서서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나중에 뒤통수를 치는 반전을 드러내는 솜씨는 그야말로 대가다왔습니다. 제목 그대로 사형집행인과 타소 밀랍 인형관의 이야기를 교차시켜 보다 긴장감을 자아내면서도, 당시 시대상을 느끼게 해 주는 연출 역시 발군이고요.

하지만 작 중에서 가장 큰 의문인 "도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자물쇠를 열 수 있었을까?"에 대한 답을 마지막 승부에서 크리브 형사부장이 이끌어내는 부분은 약간 치밀함이 부족했고(물론 이 사건에서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는 없다는 나름대로의 전제조건이 있어서 좀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해답이 급작스럽게 돌출된다는 하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트릭으로 지적 흥분과 재미를 가져다 준다는건 분명합니다. 중편 정도의 부담없는 분량도 매력적이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만한 매력적인 팜므파탈이 등장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PS : 그나저나 "마지막 형사"와 "가짜경감 듀"는 물론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은 책이지만 좀 길었다고 느껴졌었는데 이 책은 깔끔하네요. 아무래도 이 정도 길이가 저한테는 딱 맞는 것 같습니다.

2003/12/15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 - 프레드리히 뒤렌마트 / 유혜자 : 별점 4점

재판하는 사람 집행하는 사람 - 6점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유혜자 옮김/아래아
이 책은 현대 독일 문학의 거장이라는 프레드리히 뒤렌마트의 소설로 베를락 형사와 악당 가스트만의 40여년에 걸친 대결을 다루고 있습니다.

40여년에 걸친 대결..이라고 하면 소설이 굉장히 장편같이 느껴지는데 소설은 오히려 중편에 가까운 소품으로 짤막하지만 상당히 깊이있는 울림을 줍니다.

도로변에서 슈미드형사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됩니다. 슈미드형사의 상관인 베를락은 젊은 형사 찬즈와 같이 사건을 맡게 되고 이들은 슈미드형사가 가명으로 지역유지이자 명사인 가스트만의 파티에 참석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가스트만은 베를락 형사와 40여년 전부터 알고 온 사이로 둘 사이에는 가스트만이 죄를 지으면 베를락이 밝혀내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베를락이 한번도 이기지 못한 내기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악은 처벌받고 병마와 싸우던 베를락 형사는 "딱 1년만 더"를 중얼거리며 묘한 여운을 남기고 소설은 끝납니다.

아무래도 거장의 책이니 만큼 "추리적 기법이 사용된"운운 하면서 책을 소개하는것이 이 땅에 널리 퍼져있는 추리소설 경시풍조탓인것 같습니다만, 평단의 평이야 어찌되었건 개인적으로 이 책은 추리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사건의 발생과 그 수사과정, 곳곳에 숨어있는 반전과 트릭 등이 잘 짜여져 있는 추리소설이죠. 물론 독자와의 승부같은 정통파 추리적인 묘미는 약하지만 추리 매니아로서도 읽는 재미가 상당한 소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극적 반전이 기막힌 것이 한편의 영화로 꾸며도 괜찮겠더군요. 베를락 형사이야기는 시리즈로 몇편 더 나와 있나 본데 꼭 구해서 읽어보고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순문학은 어렵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추리소설 저변 확대에 기여할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됩니다.

2013/05/24

살의의 쐐기 - 에드 멕베인 / 박진세 : 별점 3.5점

살의의 쐐기 - 8점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87분서 형사실에 갑자기 찾아온 여자 버지니아. 그녀는 한 병의 니트로글리세린과 권총으로 형사실의 형사들을 제압했다. 스티브 카렐라 형사의 죽음이 목적이었다. 카렐라 형사가 남편을 체포하여 형무소로 보낸 탓에 남편이 죽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로 대표작 중 한 편입니다. 그간 유명세는 많이 들어왔으나 국내에 소개되지 않아서 아쉬웠었는데, 드디어 번역 출간되었네요.

읽어보니 역시나 명불허전! 스티브 카렐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총과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무장하고 87분서 형사실로 쳐들어온 연약한 여자 한 명에게 동료 형사들이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는 도입부부터 흥미진진합니다. 여자 한 명이 터프가이 형사들 모두를 제압한다는 이색적인 상황이 눈길을 사로잡는 덕분입니다.

게다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형사들 한 명, 한 명의 심리와 작전 묘사도 대단합니다. 흡사 모두가 주인공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요.

업무를 가장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쪽지를 작성한 뒤 밖으로 날려 보내는 마이어 마이어, 일부러 방의 온도를 올린 뒤 범인인 버지니아가 코트를 벗기를 유도하여 코트 주머니 속 권총을 확보하려는 코튼 호스, 전화와 방문자들에게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번스 반장 등 각자의 노력이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속에 펼쳐집니다.

또한 버지니아가 스티브 카렐라가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는 카렐라의 활약도 볼거리입니다. 자살로 보이지만 실은 밀실 살인이었던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인데, 트릭이 상당히 그럴듯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대중적인 펄프픽션 작가로 알고 있던 에드 멕베인의 필력이 제대로 폭발하는(물론 좋은 번역 탓도 크겠지만) 문장들도 감동이었어요. 도시를 여자로 비유하는 장면은 코넬 울리치를 연상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버지니아가 스티브 카렐라의 등 뒤에 총알을 꽂아넣지 않고 일부러 87분서로 쳐들어온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지는 않는 단점은 큽니다. 니트로글리세린의 취급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그걸 들고 직접 이동하여 경찰서를 찾은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또 번스 반장을 비롯한 형사들 모두가 버지니아가 카렐라를 죽이면 상황이 종료될거라 생각한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누가 봐도 폭탄을 터뜨려 다 죽이고 끝낼 상황이잖아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리고 싸구려 헐리우드 영화 느낌이 철철 나는, 과연 에드 멕베인이구나 싶었던 작위적인 부분도 단점입니다. 푸에트리코 미녀 안젤리카의 등장과 역할, 카렐라의 부인 테디가 등장하고 그녀로 인해 결말에 이르는 과정이 대표적입니다.

허나 단점은 모두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큰 재미와 줄거리를 해칠 정도는 아닙니다. 서스펜스를 제대로 느끼게 해 주는 전개가 워낙에 빼어나서 읽는 동안에는 흠이라 생각되지도 않았고요. 이제서야 소개된 게 의아할 정도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제목과 명성만큼 멋진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추리 애호가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신생 출판사 피니스 아프리카에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 직접 번역한 책인 듯한데 앞으로도 건승하세요!

2021/05/15

고독한 늑대의 피 - 유즈키 유코 / 이윤정 : 별점 2.5점

고독한 늑대의 피 - 6점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작가정신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88년, 구레하라 동부서 2과 폭력반계 오가미반에 신참 형사 히오카가 배속되었다. 그는 반장 오가미 슈고와 짝을 이루어 사금융 업체 구레하라 금융 경리 담당이었던 우에사와 지로 실종 사건 수사에 나섰다. 한편 시내에서 가코무라 구미와 적대적인 오다니구미 조직원들끼리 다투다가 오다니구미 조직원이 살해된 뒤, 대규모 항쟁으로 비화될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려는 가코무라 구미, 그리고 그들의 우방 조직 이라코카이의 음모였다.

오가미는 수사를 통해 우에사와는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들에게 납치되었다는걸 알아냈다.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들이 구레하라 금융에서 소액 대출 후 유흥비로 탕진한걸 들킬 위기에 처하자, 우에사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뒤 납치 살해했던 것이었다. 이게 사실로 증명된다면, 가코무라 구미의 두목과 주요 간부 모두를 체포하여 장기간 징역에 처할 수 있어서, 가코무라 구미는 와해되고 항쟁은 자연스럽게 끝나게 될 터였다. 

하지만 가코무라구미 상위 조직인 이라코구미가 오다니구미와의 항쟁에 불을 붙였고, 결국 감찰 때문에 자택 근신 중이던 오가미가 중재를 위해 나섰지만 살해되고 마는데....

1988년의 히로시마 근방 소도시 구레하라 시를 무대로 한 하드보일드 범죄 드라마로 야쿠자와 강력반 형사들이 뒤엉킨 거칠고 수컷 냄새나는 범죄와 인간 관계가 그려지는 작품입니다. 제목의 '늑대'가 가리키는건 형사반장 오가미 슈조입니다. 이름부터 오오가미(늑대)에서 따 왔으니까요. 

이렇게 한 마리 늑대와 같은 형사가 홀로 안팎의 적대 조직과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는 일본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주쿠 상어"가 좋은 예겠지요. 그러나 오가미 반장은 항상 아들과 같은 부하 히오카와 함께 하며, 자신이 이끄는 오가미 반 부하들의 신뢰도 두텁고, 강력한 야쿠자 조직인 오다니구미와 다키이구미 두목급들과 두터운 친분을 맺고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고독한 늑대는 아니에요.

이야기에서도 야쿠자와의 관계, 친분이 핵심 동기 및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우에사와 실종 사건 수사가 특히 그러합니다. 오가미가 사건을 빨리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기는 구레하라 시에서 야쿠자들간 항쟁이 일어나는걸 막기 위해서, 또 자신이 밀고 있는 오다니구미 부두목 이치노세 모리타카가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도록 하기 위함이니까요. 사건 수사도 야쿠자와의 연줄과 그들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를 기반으로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총동원하여 진행됩니다. 가코무라 구미 조직원 요시다 시게루를 몰래 불러내어 포박한 뒤, 식칼로 뺨을 긋는 등 협박을 가하다가 당근(오다니구미로부터 확보한 500만엔)을 제시해서 우에사와가 납치된 뒤 살해되었다는 진술을 확보하는 장면처럼요. 그밖의 증언들도 대부분 증인들을 협박해서 이끌어내는건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불법에 가깝지만, 수사는 합리적이며 범죄 묘사도 그럴듯해서 범죄 수사물로도 손색 없습니다. 우에사와의 목을 베어 죽인 뒤, 어선을 빌려 무인도에 유기하는 과정, 사체를 찾아내는 과정, 이를 위한 심문 등 범행과 수사에 대한 묘사들 모두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덕분입니다.

범죄 수사와 함께 펼쳐지는 야쿠자 조직 간 항쟁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뒷골목 사람들끼리 나누는 의리와 우정에 대한, 사뭇 마초스러우면서도 왠지모르게 낭만적인 이야기는 항상 기본은 해 주지요. 오래전, 80~90년대 유행했던 홍콩 느와르 분위기랄까요. 여기에 특정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세력 다툼과 전쟁, 음모는 군웅물스러운 재미도 느껴지고, 오가미가 자신의 연줄로 주도권을 잡아나가는 모습은 악을 더 큰 악, 안티 히어로가 응징하는 쾌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도 명확합니다. 야쿠자, 그리고 야쿠자와 결탁한 문제 형사를 미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담배가게 노파 가쓰, 술집 '시노' 주인 아키코의 입을 빌어 오가미가 불쌍한 사람을 돕는 히어로였다는걸 부각시키고는 있습니다만, 그가 야쿠자에게서 돈 상납을 받는, 야쿠자와 유착되어 있는 불량 형사라는건 명백한 사실인 탓입니다. 고독한 늑대가 아니라 하이에나 패거리 중 한마리에 불과한 거지요. 

그나마 상납받은 돈은 사건 수사에 썼다고 치더라도, 자기와 친한 조직이 구레하라시를 장악하도록 노력한다는건 도저히 용납이 안됩니다. 가코무라 구미는 우에하라 살인 사건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와해될 예정이었지만, 이후 벌어진 이라코카이와 오다니구미간 다툼에서 오다니구미에게 유리하게 중재한다는건 정도가 지나쳤어요. 오가미가 목숨까지 걸 이유도 없었고요. 

이를 포장하려고 다키이와 이치노세를 인의를 아는, 야쿠자지만 남자답고 괜찮은 인물이라고 묘사한 것도 볼썽사나왔습니다. 그렇다고 야쿠자가 서민들 등골을 빼먹고 사는 인간 쓰레기라는게 바뀌는건 아니잖아요? 협객이니, 사나이니 하는 미사여구를 아무리 가져다 붙여봤자, 쓰레기는 쓰레기입니다. 차라리 쓰레기답게 오다니구미가 오가미를 죽이고, 이를 이라코카이에게 뒤집어 씌웠다게 진상이었다면 더 볼만한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후 수사 일지를 보면, 오가미가 죽은 뒤 대형 항쟁은 결국 일어났고, 이치노세가 구레하라시를 장악했다는걸 알 수 있으니까요. 애초에 오가미가 중재에 나섰던 항쟁도 알고보면 오다니구미가 일으킨 것이기도 하고요. 

아울러 오가미가 살해당했다는 전개도 아쉬웠습니다. 이렇게 쉽게 죽어버리면 그동안 온갖 수라장을 헤치고 나왔다는게 말이 안되잖아요? 오가미가 버틸 수 있었던건 주요 인물들의 비밀을 쥐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왜 진작에 오가미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설정, 묘사, 전개도 너무 뻔하며 작위적입니다. 오가미 반장에 대한 설정과 묘사부터 그러합니다. 조직과 잘 섞이지 못하는 형사라면 누구나 떠올릴법한 스테레오 타입 묘사에 그치며, 캐릭터를 형상화하는 쇼트피스 담배와 파나마 모자, 늑대가 새겨진 지포 라이터는 만화적이며 유치했기 때문입니다. 모든걸 잘 알고 있고, 통제까지 가능하지만 신참에게 속내를 잘 비추지 않는 고참 형사와 그의 수사 방식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지시에 따르다가 어느새 감복하여 존경하게 되는 신참 형사 캐릭터 구도도 식상하고 뻔하기 그지 없습니다. 예컨데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와 똑같습니다. 다키이나 이치노세, 아키코 마담 등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도 어딘가에서 본듯한, 만화적인 캐릭터들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애초에 오가미가 반장인 이상 신참과 파트너가 되어 현장을 발로 뛸 이유도 없습니다. 전형적인 캐릭터 구도를 만들기 위한 억지에 불과해요. 오가미가 히오카에게 히로시마 경찰 내부의 추문을 담은 노트와 거액의 돈을 남긴 것도 억지스러운건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일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은 히오카보다는 믿고 신뢰할만한, 오래도록 함께 일한 믿음직한 부하들에게 넘기는게 당연하잖아요? 히오카의 이름이 죽은 아들 이름과 같아서, 진짜 아들처럼 여겼다는 설명이 추가되어 있기는 하지만,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들로 여겼다면 이런 무거운 짐을 남기면 안될 것 같은데 말이지요. 히오카가 감찰의 끄나풀이었다는 약간의 반전, 그리고 나름의 유산을 남긴게 그 때문이었다는 암시도 별로 와 닿지 않았어요.

이렇게 단점도 많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대로 재미만큼은 괜찮았습니다. 홍콩 느와르 영화나 무협지스러운 재미는 충분하니까요. 킬링 타임펄프 픽션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더운 여름, 잠이 오지 않는 긴 밤을 보내기에 적당하리라 생각됩니다.

2008/07/22

제 3의 시효 - 요코야마 히데오 / 김성기 : 별점 3점

제3의 시효 - 6점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노블마인

요코야마 히데오의 연작 단편집으로 만화 "강력1반"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F현 경찰청 강력반의 이야기로 총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1편은 1반, 2편은 2반, 3편은 3반, 4편은 3반 모두의 이야기이며 5편은 1반의 신참형사, 마지막 6편은 1반과 3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반의 이야기가 좀 많긴 한데 나름 균형은 잘 맞추고 있는 편입니다.

전부 3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직에서 각 반마다 지나칠 정도로 치열한 경쟁의식을 품고 있다는 설정도 특이하지만 각 반마다 특색있는 반장들이 그려지는데 이 반장들 캐릭터가 굉장히 잘 살아 있습니다. 1반의 절대 웃지 않는 "파란 귀신" 구치키와 2반의 전 공안 출신의 엘리트이자 감정없는 냉혈한인 구스미, 3반의 절대 육감의 소유자인 무라세라는 캐릭터들이 각각의 별명과 설정에 잘 어울리는 수사방법, 즉 구치키의 끈질기고 합리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정공법 스타일과 구스미의 용의자를 함정에 빠트리는 지능형 스타일, 그리고 구스미의 육감을 이용하여 범인을 그려내는 수사방법들이 작품에 잘 드러나고 있거든요.

경찰들이 주인공인 경찰 소설이기에 본격 추리의 맛을 느끼기는 좀 어렵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상당한 수준의 트릭이나 두뇌게임이 등장해서 추리 애호가로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던 것은 덤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을 준다면 3점은 충분한 작품으로 보이네요. 아울러 개인적인 베스트를 꼽자면 제일 마지막 작품인 "흑백의 반전"을 꼽겠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좋지만 만화로 이미 접한 작품은 신선함이 조금 떨어지긴 했으니까요.
만화화 된 것은 1편에서 4편까지이며 나머지 2편은 처음 접한 작품인데 원작을 읽고나니 만화쪽도 비록 복사본을 많이 사용해서 쉽게 만든 작품이기는 하지만 캐릭터도 잘 구현하고 스토리도 매끄럽게끔 잘 극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화도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1. 침묵의 알리바이
구스미의 1반이 맡은 사건은 현금차량 탈취 살인 강도 사건으로 용의자 유모토를 체포하는데 성공하나 유모토는 법정에서 범행을 전면 부인한다. 알리바이를 제시함에 따라 조사를 맡았던 시마즈의 미숙함과 더불어 찾아온 위기에 1반 반장 "파란 귀신" 구치키가 직접 나서게 된다.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서가 부족하고 법정물로 보기에도 애매하지만 구치키의 캐릭터와 함께 몇가지 사소한 단서에서 풀어내는 진상이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조금 더 길게 가져가서 정통 수사물로 만드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은 들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2. 제 3의 시효
부녀자 강간 후 남편 살해사건을 저지르고 도망중인 용의자 다케우치의 공소시효를 앞두고 2반은 다케우치의 범행 피해자의 집으로 출동한다. 다케우치가 1주일 간 대만으로 도피했던 것으로 공소시효가 연장된 것을 모를 것이라 여기고 과거의 인연으로 다케우치가 연락할 것을 기다린 것.
냉혈한 구스미와 1반 소속 형사로 2반에 지원나온 모리 형사가 주축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공소시효 연장에 따른 긴장감도 넘치지만 구스미의 치밀한 계략에 따른 "제 3의 시효"와 진범에 대한 추리가 아주 좋았습니다. 단서도 비교적 공정한 편이라 추리 애호가로서 즐겁게 읽은 작품입니다.

3. 죄수의 딜레마
형사과장 다하타는 자신의 휘하 3반 소속 반장들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서로의 경쟁 때문에 고민이 많다. 마침 진행되는 사건은 3건. 1반의 주부 살인사건과 2반의 조리사 살인사건, 3반의 증권맨 살인사건.
3건의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형사과장 시점에서 그린 이색작입니다. 2반의 사건은 제목의 "죄수의 딜레마"를 끄집어 내기 위한 장치일 뿐이지만 구스미의 심리 조작이 빛났고 1반, 3반의 사건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사건이라 보다 흥미진진 했습니다. 나름 형사들의 인정이나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훈훈함이 남다르기도 했고요.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4. 밀실의 탈출구
무라세 반장이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3반의 히가시데가 반장 대리를 맡는다. 마침 백골로 발견된 여성 사체 사건의 용의자를 알아낸 히가시데는 용의자의 맨션을 덮치지만 용의자는 깜쪽같이 사라져버리고, 이 사건을 위한 대책회의가 열리는데..
3반이 주역이지만 주역은 무라세 반장이라기 보다는 반장 대리 히가시데 입니다. 반장 대리의 역할을 맡았지만 동기인 이시가미와의 경쟁으로 날카로운 심리 상태와 용의자가 사라진 것에 대한 의심 등 다양한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어서 읽는 재미가 느껴지더군요. 흡사 본격물의 느낌을 주는 제목만큼의 대단한 트릭이 나오지는 않지만 비교적 합리적인 트릭이기도 하고, 정보의 제공이 공정하며 추리의 과정도 설득력이 높다는 점 역시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5. 페르소나의 미소
청산가리를 이용한 노숙자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과거의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신참 형사 야시로가 수사를 맡게된다.
1반의 신참 형사 야시로가 주인공인 단편입니다. 야시로의 과거의 트라우마 (어렸을 때 유괴사건 범행에 연루된 것) 가 자세하게 설명되는 등 추리와 수사보다는 한 개인에 대한 소품같은 느낌을 많이 가져다 준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도 굉장히 적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은 것 같기도 하네요.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되는 트릭은 괜찮았지만 이 단편집에서는 제일 처지는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6. 흑백의 반전
일가족 세 명이 칼에 찔려 살해된 사건이 발생한다. 다하타 과장은 3반이 맡은 이 사건에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1반을 보조로 투입시키지만 두 반은 경쟁의식으로 과열되어 과장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수사가 전개된다.
2반이 등장하지 않고 1반과 3반이 경쟁하는 작품입니다. 두 반의 반장 캐릭터와 유사한 각각의 수사방법이 잘 묘사되어 있기도 하지만 트릭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모처럼 "본격" 스러운 작품이라 굉장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국 과장이 의도한 대로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며 사건이 종료되는 것 역시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결말이기도 했고요. 사건의 동기와 범인, 트릭, 수사과정 모두 합리적이고 잘 짜여진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