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sang.egloos.com 의 이사한 곳입니다. 2021년 1월, 추리소설 리뷰 1000편 돌파했습니다. 이제 2000편에 도전해 봅니다. 언제쯤 가능할지....
2020/03/26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2) - 아토다 다카시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1) - 아토다 다카시
"매니저 다무라라는 남자는 어떤가? 그...... 알리바이는......?"
사무라가 고심한 끝에 바둑판 위에 돌을 내려놓자, 스님은 응수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사건 당일 오후에는 아타미에 가 있습니다. 다음 공연을 위한 미팅이 있어서요. 도쿄를 오전 11시에 출발해서, 미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치가사키에 있는 누님 집에 들러 여러 명의 지인을 만난 게 확인되었습니다. 의심할 여지는 전혀 없어요."
"드러머는?"
사무라가 편의상 종이에 적어놓은 11명의 악단원 이름을 건네주었지만, 스님은 그쪽에는 눈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우치노는 집이 코가네이인데요. 오후에는 동네 아이들과 캐치볼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조사해봤겠지?"
사무라가 이번에 놓은 수로 열 집 가까이 확보했지만, 스님의 쪽 세력도 만만치 않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사무라는 첫판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번 판은 마음이 편했다. 그것보다도 사건에 대해 스님으로부터 뭐든 좋은 의견을 듣는 게 더 중요했다.
"틀림없어요."
"다른 멤버들은......?"
"반년 정도 전까지 에토 준코와 관계가 있었던 오오이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는 문제의 오후엔 추가 시험을 2개나 봤기 때문에 아무리 의심해도 범행은 절대 무리에요."
"과연"
"그리고 기타의 오오스기. 이자가 제일 수상하다면 수상합니다, 알리바이 측면에서는 말이죠. 느긋하게 12시 넘어서 하숙집에서 일어나서 밤까지 영화를 보거나 빠칭고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인간은 누구라도, 그렇게 알리바이를 의식해 행동할 수는 없으니까. 진범 이외의 인간은 특히 더 그럴 테고......"
"예, 그건 뭐......"
"나도 독경 때문에 보살님들 댁을 돌 때면 몰라도, 그냥 훌쩍 밖에 나왔을 때 말이야,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고."
"맞습니다. 그래서 오오스기 카즈야가 단지 알리바이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저희도 어쩔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살해된
에토 준코와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요." "두 아가씨 멤버는?"
"치노라는 아가씨는 집에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데 1일은 마침 그 수업을 하는 날이었습니다. 와카이는 집이 오오미야인데, 마작 견학차 마작 그룹 방문을 위해 오후 1시 쯤 집에서 나왔습니다. 야시로의 집에 도착한 게 세 시를 조금 넘었을 때이니, 가는 시간을 생각해보면 알리바이는 확실합니다."
"오오스기를 제외하면 모두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다는 말이로군."
스님의 흑돌은 오른쪽 구석의 세력을 살려 중반 이후부터 조금씩 판세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묘수라도 찾지 못하면 이 세력을 가로막기는 어렵다. 사무라는 체념하듯 아무렇게나 돌을 내려놓았다.
"그래요. 그래서 수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죠. 에토 준코의 옛 친구라던가, 호텔 종업원 등을 차례대로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그럴듯한 범인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이구먼."
"네에, 뭐......"
그때 승리를 의식한 스님이 약간의 실수를 범했다. 스님이 내려놓은 수로. 오른쪽 구석에 뜻밖의 패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이런! 이건 안 돼!"
스님은 큰 소리를 지르며 바둑판 위에 몸을 던졌다.
"2연승인가요."
"아니지, 아니야, 그렇게는 안 돼."
그리고 한동안, 바둑판 위에서 사투가 계속되어, 사건 이야기는 뒷전으로 밀렸다. 사무라는 조금 전 스님의 실수로 얼마간 이득을 보았지만, 그래도 그 이전에 스님이 얻은 세력이 너무 큰 탓에 결국 승부를 뒤집지는 못한 채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일승일패입니다."
"어때, 한 판 더."
"가시죠."
물론 사무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둑 자체도 즐겁기는 했지만, 아직 스님에게서 아무런 추리를 들은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소득 없이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번째 판은 서로 과묵하게 승부를 진행했다. 그러나 스님이 바둑 이외의 일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모습으로 잘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바둑이 소홀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게 바로 스님의 이중구조식 두뇌의 신기한 점이었다. 추리는 추리, 바둑은 바둑이라기보다 오히려 추리가 잘 진행될 때가 바둑 쪽의 수도 느긋하면서도 뛰어났다.
스님과 사무라의 대전 성적은 지금까지, 아주 약간 사무라가 좋은 편이었다. 표를 만들어 정확하게 기록한 건 아니지만, 사무라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스님 쪽도 어렴풋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항상 말했다.
"자네는 언제나 기묘한 사건 이야기를 꺼내서 내 머리를 교란하니까 말이지. 그것만 아니라면 내가 자네보다 훨씬 셀 거야. 그렇지?"
이 말에 사무라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스님의 바둑은 어려운 문제를 추리하고, 추리가 핵심에 가까워질 때가 더 날카롭기 때문이었다. 이론보다 증거이니 가까운 시일 내에 아무 사건도 가져오지 말고, 그냥 훌쩍 놀러 와 볼까? 그렇다면 스님은 분명 말도 안 되는 수를 놓을텐데. 하지만......흉악범 담당 형사에게 그럴 여유가 생길 수 있을까? 오늘도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한가롭게 잡담을 나누며,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둘 수 있는 것이다.
"3월 1일 7시 30분에 그 어쩌고저쩌고 하는 악단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지?"
대국은 중반, 한창 패싸움이 벌어지는 지점에 접어들었다. 스님의 수가 의표를 찔러왔다. 사무라는 허둥지둥하면서도 속으로 싱글벙글했다. 스님의 바둑이 쾌조라는 건, 스님의 두뇌가 순조롭게 회전하여 명추리가 진행되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뜻이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이 판단에는 단연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맞아요"
"모인 순서는?"
"순서요? 잠깐만요. 공책에 적혀 있습니다."
사무라는 일어서서, 아까 수행승이 옷걸이에 걸어 준 양복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게 매니저 다무라, 이게 6시 50분입니다. 다음이 치노 카즈요. 그리고 오오이다, 다음에 마작 그룹 멤버 5명과 와카이 요코가 야시로가 운전하는 승합차로 도착. 그 뒤로 오오스기, 우치노 순서인데 모두 일곱 시 반까지 왔다고 합니다. 죽은 에토 준코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연주자가 한 명 없는데, 곤란하지 않았나?"
"곤란하죠. 매니저는 상당히 초조하게 기다린 것 같더라고요. 결국 공연 시간이 임박하자 어쩔 수 없이 클라리넷을 하나 뺀 채로 공연했다고 합니다."
"그런 게 쉽게 가능한가?"
"저도 좀 의아해서 물어보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멤버들이 아픈 적도 있고 해서, 여러모로 편성 교체는 익숙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연주가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단, 콘트라베이스 같은 특별한 악기는 그렇게 하는게 어려워서 결원이 생겼을 때 부랴부랴 보충했다고 하네요."
"그렇군."
스님은 다시 잠자코 바둑판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섣불리 말을 걸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돌은 살아있나?"
스님이 고개를 흔들고, 사무라의 세력 한복판에 돌을 놓았다.
"엣......?"
사무라가 소리를 질렀다.
"그런 수가 있었나요?"
묘수였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대마가 빠져나가기 힘든, 멋진 수였다.
"살기 어렵겠는데요. 괴롭군요."
"그런 듯하네."
스님이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묘수가 나오다니......? 사무라는 그 뒤에도 돌을 계속 내려놓기는 했지만, 패배를 예감했다. 스님의 수는 묘수 이후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끝났습니다."
"계가해 볼까."
계가해 보니, 사무라가 덤을 빼고도 일곱 집 부족했다. 완패였다.
"창피한 바둑을 두었네요."
"희한하게도 2승 1패구먼."
스님은 유쾌한 듯 웃었으나, 이내 근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자네도 마작을 하나?"
"아니요, 저는 안 합니다."
"호오, 그렇군. 그런데 마작도 바둑처럼 더 센 사람이 이기지 않나? 오늘의 나처럼."
자신이 2승 1패로 이겼다고 멋대로 말하고 있다.
"후후, 마작은 아무래도 운이 따라야 하니 약한 사람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아니, 자네처럼 마작을 하지 않는 사람의 의견은 필요 없다고. 학생들은 밤을 새워가며 마작을 했다며? 그렇게 오래 하면, 반드시 강한 사람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해. 그랬는지 어땠는지 한 번 물어봐 달라고. 마작 그룹의 누군가에게."
"예...?"
"그리고, 야시로 씨라고 말했지? 그 사람 외삼촌 집 뜰에 어떤 나무가 심겨 있는지도. 정원에 심은 나무라면 진달래, 등대꽃, 칠엽수.... 동백나무도 있을지 몰라. 그리고 현관까지의 길은 콘크리트인지, 돌을 깔았는지도 알아봐 주지 않겠나?"
스님의 추리는 언제나 마지막에 진짜 질문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죽은 에토 준코 씨, 브래지어 사이즈는 어떻게 될까? 분명 A 사이즈는 작았을 테고, C 사이즈는 컸을 텐데..."
정말이지 이 스님은 모르는 게 없다. 하지만 브래지어 사이즈가 살인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것뿐인가요?"
"그리고 악단의 여성 멤버 중 누가 가장 매력적이었는지도."
"네"
"그럼 오늘은 그 정도면 된 것 같네."
"네에..."
"내일 오후에 나는 계속 집에 있을 거라네. 오늘 부탁한걸 전부 조사하고 나면, 우리 집에 바둑두러 오라고. 아마 내일은 세 판이나 둘 필요는 없을걸세. 자네도 여러모로 바쁘기도 할 테고..."
스님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세 번 고개를 끄덕였다. 추리는 거의 80% 정도 진행된 게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질문해봤자 대답해 줄 스님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완벽주의자, 나쁘게 말하면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고.... 아니, 스님이라고 해도 아직 추리가 제대로 되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몇 가지 의문이 남아 있고, 그것이 스님 생각대로라면 추리를 확신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의문은... 아무래도 브래지어의 사이즈와 정원의 정원수, 그리고 누가 제일 매력적인 여성 멤버인지와 같이 두서없는 질문의 답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늦게까지 실례했습니다."
"그럼 내일 보자고. 잘 가게."
사무라가 스님과 수행승의 배웅을 받으며 묘법사를 나선 건 거의 자정 무렵이었다.
2004/05/19
본인방 살인사건 - 우치다 야스오 : 별점 2.5점
| 본인방 살인사건 - 내전강부/범조사(이루파) |
고고한 인품으로 소문난 일본 바둑계의 노장 다카무라 본인방이 친구 세가와 9단의 제자 우라카미 8단과의 천기위 방어전을 끝낸 직후 변사체로 발견된다. 천기위전의 주최 신문사인 대동신문사의 고노에 기자는 다카무라 본인방의 마지막 대국이었던 천기위전의 기보를 정리하다가 기보에 숨겨진 비밀을 알아낸 뒤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며, 고집세고 우직한 성격의 우라카미 8단도 그 과정에 동참하여 본인방 죽음의 배후에 얽힌 연쇄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게 된다…
과거 <빙설의 살인>으로 접했던 우치다 야스오의 데뷰작입니다. 그간 제목은 자주 봤지만 별로 관심이 없던 차에 헌책방 순례(?)중 우연히 실물을 보고 싼 가격에 별 생각없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왠걸! <빙설의 살인>은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 탐정 아사미 시리즈인데도 불구하고 완전 기대 이하였었는데 이 작품은 기대 이상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작품에서 보기 드문, 사상 초유의 암호 트릭은 정말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독특할 뿐더러 "바둑"과 실제 프로 바둑시합에 있는 제한시간이라는 소재를 사용했다는 점이 정말 신선하거든요.
하지만 암호 트릭이 오히려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트릭 하나에 소설 전체가 좌우되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작가 스스로 걸작 트릭이라고 생각했는지 소설 전체에 걸쳐 사용한 탓으로 막판에는 조금 힘이 떨어지는 감이 있습니다. 중반보다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한번 더 터트려 주는게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리고 데뷰작인 탓에 전개 등 많은 부분이 어설픈 덕에 암호 트릭이 돋보인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범행 동기도 그닥 와 닿지 않고, 동기 및 배후를 풀어나가는 전개도 매끄럽지 못한 등 초짜티를 풀풀 내고 있으니가요.
아울러 사회파 분위기를 어설프게 따라가면서 무언가 해결을 봄직하다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버리는 결말 부분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나마 해피엔딩이라는 점 하나는 괜찮았습니다만....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깔끔한 분량에 쉽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고스트 바둑왕> 등으로 어느정도 알려진 일본 프로 바둑의 세계를 예전에 굉장히 독창적인 트릭과 함께 보여준 부분은 높이 사고 싶네요. 그러나 아쉬움도 적지 않기에 감점합니다.
그나저나, 탐정 아사미 시리즈는 정말 괜찮은 작품인가요? <빙설의 살인>은 정말 실망스러웠는데 다른 작품들은 괜찮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읽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트릭의 내용을 남깁니다. 흰색 글씨이니 드래그해 보시길.
다카무라 본인방은 우라카미 8단과의 최후의 대국에서 고심하다가 평범한 수를 두고 결정적 순간에 생각 없이 바로 대응하는 등의 이해할 수 없는 바둑을 둔다. 고노에 기자는 이 기보를 분석하다가 우라카미 8단이 바둑의 "시간제한"룰, 즉 한 수를 두는데 걸리는 시간을 이용하여 모르스 부호 암호를 남겼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2022/12/18
본인방 살인사건 - 우치다 야스오 / 이희성 : 별점 2.5점
![]() | 본인방 살인사건 - 내전강부/범조사(이루파) |
바둑 기전의 하나인 '천기위' 타이틀을 놓고 본인방이기도 한 노장 다카무라 9단과 젊은 피 우라카미 8단이 격돌을 벌이게 되었다. 나루코 온천 호텔에서 펼쳐진 1박 2일의 대국에서 결국 우라카미 8단이 승리했지만, 다카무라 9단은 수를 놓는 고려시간을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행동으로 패배를 자초했던 덕분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사라진 다카무라 9단이 아라오 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현지 경찰의 수사는 난관에 봉착했지만, 고노에 기자는 우라카미 8단의 도움을 얻어 다카무라 9단의 고려시간이 일종의 암호였다는걸 밝혀내는데....
명탐정 아사미 미츠히코 시리즈로 유명한 여정 미스터리의 대가 우치다 야스오의 작품입니다. 하지만 아사미 미츠히코 시리즈는 아닙니다. 바둑 기사인 8단 우라카미와 바둑 전문 기자 고노에가 탐정역으로 활약합니다. 우연찮게, 십 수년만에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십 수년 전에는 간략하게 감상 중심으로 리뷰를 남겼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리뷰를 남겨볼까 합니다.
고노에 기자와 천기위 우라카미 8단이 탐정으로 활약하는데, 기사라는 직업의 특성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세가와 9단이 몰래 고쳐놓은 기보의 고려시간을 우라카미 8단이 밝혀내는 식으로요. 기사만의 굉장한 기억력을 발휘했던 겁니다. 이런 기억력은 다카무라 본인방과 살해된 사립탐정 와타나베를 연결시키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본인방 유품 중 하나였던 라이터가 원래 와타나베의 것이었다는걸 기억해 낸 덕분이니까요.
핵심 트릭인 본인방이 대국 중 고려시간을 이용하여 발신한 모르스 부호도 다시 읽어보니 제 기억보다도 잘 짜여져 있더군요. 유별날 정도로 길게 고려시간을 사용한 뒤 메시지 전달이 시작된다는 점, 그리고 메시지 전달을 위해 세 가지 타입 (장, 단부호와 스페이스)의 기호가 필요했는데 세 종류의 시간을 이용한다는 발상이 고려시간과 잘 어울렸거든요. 아주 디테일하게 숫자를 맞추기 힘든 대국 중 고려시간 특성에도 딱 맞아 떨어집니다.
그 외에도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은 또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본인방과 와타나베 탐정을 연결하는 고리가 된 '라이터'의 주인을 추적하는 수사 과정의 디테일이 대표적입니다. 과정도 설득력이 높지만 독특한 디자인의 라이터라서 제조사를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마침 제조사 영업 담당이 바둑 애호가라 우라카미 8단을 도와주기 위해 나선다는 식으로 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방이 살해당했던 상황에 대한 진상도 기발했습니다. 수사 결과, 본인방은 어딘가를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내려서 다시 호텔로 걸어 돌아오던 중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본인방을 그 곳에 내려준 뒤 한참 뒤에 다시 돌아가서 본인방을 살해했다는건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요. 어차피 인적도 없는 곳이었는데 왜 그 곳에서 바로 살해하지 않았을까요? 고노에와 우라카미는 범인이 사람을 잘못 태웠고, 본인방이 살인범의 차를 타고 있다는걸 깨닫고 중간에 내렸다고 추리합니다. 본인방은 세가와 9단으로부터 와타나베 탐정이 살해당했다고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에서 와타나베 탐정이 가지고 있었던 독특한 라이터를 발견해서, 이상함을 눈치챘다는 것이지요. 원래 차를 타기로 했던 세가와 9단은 본인방과 동년배 친구였고, 본인방과 마찬가지로 하오리 정장을 입고 있어서 범인이 착각했을거라는 설정 등 이를 뒷받침하는 정교한 장치들도 일품입니다.
모르스 부호를 역시 잘 알고 있었던 세가와 9단이 기보를 몰래 고치면서, 고친 부호가 범인 '아네시마'의 이름을 나타내도록 고쳤다는 결말도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여러 지방의 풍광 묘사도 여정 미스터리의 달인답습니다. 초반 본인방 살해의 무대가 되는 나루코 지역의 상세한 묘사는 물론, 마지막 세가와 9단이 진상을 밝히고 자살하는 한시로오토시 절벽은 대단원의 무대로 나무랄데 없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 마키노가 세가와 9단을 협박해서 천기위 기전 개최 권한을 대동신문사로부터 빼앗아 J 일보로 넘기려고 했다는게 무려 5명이라는 사람이 죽은 사건의 동기라는건 설득력이 떨어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천기위 기전이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불법적 요소는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본인방이 고용한 와타나베 탐정이 검은 뒷돈 거래 정도를 알아냈더라면 모르지만, 그런 언급은 아예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사건이 확대될 위험을 무릎쓰고 살인을 저지를리 없습니다. 결국 마키노 의원 조직에 갓 합류한 운전사 아네시마가 과하게 충성심을 발휘하여 와타나베 탐정을 살해한 것이 진상이었는데, 많이 허무했어요. 그 뒤에 본인방을 살해한건 억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드러난 동기가 없거든요. 본인방을 세가와 9단으로 착각하고 잘못 태웠다는걸 나중에 알았다손 치더라도, 그게 사람을 죽일만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와타나베 탐정이 그 차에 탔었다는 (그리고 살해당했다는) 중요한 단서인 라이터를 잃어버렸다는걸 알게되었다면 모르지만, 그렇다면 살해 후 라이터를 회수하지 않은건 이상합니다. 니미야 3단이 기보가 수정된걸 알아챘다한들, 이 역시 살해할만한 이유로 보이지는 않았어요. 수정하지 않았다고 딱 잡아 떼더라도 증거가 없으니까요. 세가와 9단의 인망이라면 충분히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겁니다.
그리고 그리고 어쨌건 본인방도 일본기원 소속입니다. 천기위 기전을 어느 신문사가 주관하는지가 기사 입장에서 그렇게 중요할까요? 정해진 수익만 전달되면 기사 입장에서는 마찬가지일텐데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최악은 세가와 9단이 범인 아네시마와 함께 자살한다는 결말이었습니다. 딸 레이코에게 씌워질 수 있는 오명을 차단하기 위해 사고사로 위장하고 자살한다는 거지요. 진상을 묻어버렸기에 마키노 국회의원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결말인데, 아무리 산 사람이 더 중요하다지만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우라카미와 레이코의 행복을 위해 진상을 묻어두겠다는 고노에 기자의 행동도 별로였어요. 사람이 네 명이나 죽었는데 이걸 묻어둔다는게 말이나 되나요?
세가와 9단의 딸 레이코는 사실 마키노 의원의 딸이었고, 그 사실을 밝히겠다는 협박 때문에 범행에 가담했다는 설명은 바둑 기사들을 악역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지만, 구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프로 바둑 기사를 주인공으로, 기전을 동기로, 바둑 대국을 주요 무대 및 핵심 트릭의 장으로 활용한건 독특했지만, 이야기의 설득력 측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네요. 평작 수준은 충분하나, 딱히 찾아 읽어봐야 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2020/03/26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1) - 아토다 다카시
이 책은 대략 13년 쯤 전에 원서로 읽었었습니다. "나폴레옹 광"으로 유명한 쇼트쇼트의 대가 아토다 다카시 유일의 본격 추리 소설 단편집입니다. 1978 ~ 79년에 '월간소설'에 연재되었던 이야기들로 모두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사이즈 살인사건'은 단편집 표제작이자, 각종 설정과 이야기 구조를 확립하는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추리적인 완성도도 개중 높은 편이고요.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보니, 번역도 손을 대게 되었네요.
의역으로 가득찬 졸역이지만, 심심하신 분들께 위안거리가 될까 싶어 창피함을 무릅쓰고 올리니, 부디 즐겁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길이가 길어 세 편으로 나누어 올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세외승경(世外勝境)'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낡은 문기둥에 쓰여져 있는 글자이다. 바로 옆에까지 빌딩이 세워진 절에 어울리는 말은 아니다. 수행자들의 관습이려나? 아니면 이 문을 세웠을 무렵은 일대가 훨씬 속세를 벗어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석문을 지나면 앞쪽에 본당이, 오른편 나무문 안쪽에 주지 스님 가족이 머무는 안채가 있다.
"실례합니다."
"예"
까까머리에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수행승이 나타나 큰절을 올렸다.
"이쪽, 2층으로 올라오세요."
미리 전화로 연락해 놓았던 덕분인지, 2층의 손님 방은 이미 패널 히터로 따뜻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벌써 바둑판까지 놓여 있었다.
사무라 에이스케는 크고 푹신한 방석에 앉아, 수행승이 가지고 온 차를 입에 머금었다.
묘법사의 주지 스님과 알게 된 건, 순직한 친구의 묘가 묘법사에 있기 때문이었다. 가끔 성묘를 오면서 스님과 얼굴을 익혔고, 어느 날부터 함께 바둑을 두는 사이가 되었다. 사무라는 서른, 스님은 쉰을 서너 살 넘은 나이로 나이 차는 크지만 묘하게 마음도 잘 맞았다. 바둑 솜씨는... 사무라는 자신이 조금 더 낫다고 믿지만, 스님은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주지 스님의 경력까지는 사무라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묘법사는 스님의 생가는 아니며, 스님은 데릴사위이다. 이만한 사찰의 주지인 만큼 불교 대학에서 전문 수업을 배우고 어느 정도 수행도 쌓았겠지만, 처음부터 승직에 도전한 사람은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하고 싶은 대로 대충 살아왔지만, 도중부터 무언가의 사정으로 스님이 되었고, 지금은 어느새 주지 스님의 위치라 사뭇 신묘한 척 불도를 설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어, 오래 기다렸지?"
주지 스님도 검은 터틀넥 스웨터 차림으로 나타나 말했다. 스님이라기보다는 변두리 가게의 장인 같은 모습이었다.
"춥지는 않나? 저녁 식사는? 이미 했다고? 그럼 술이나 한잔할까?"
이 스님은 동네 카바레 소문까지 통달하고 있을 정도이니, 술이나 회 정도는 문제도 아니다.
"이거 참, 그동안 소식이 뜸했네요."
"바빴나 봐?"
"조금..."
"자네가 한가한 게 세상에는 좋은 일이긴 한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스님은 바둑판을 잡고 끌어당겼다.
살인 담당 형사와 주지 스님의 조합,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의외로 가까운 조합이다. 형사도 스님도 시체가 없으면 장사가 시작되지 않으니까.
"선을 가려볼까."
스님이 백돌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사무라는 흑돌 두 개를 판에 올렸다. 스님이 집은 돌을 세어보니 열세 개였다. 사무라가 규칙에 따라 백을 잡았다. 수행승이 술과 안주를 쟁반 위에 얹고 와서 둘 곁에 내려놓았다.
사무라가 묘법사에 오는 건 바둑을 두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주지 스님을 상대로 조용한 방에서 바둑을 두며 맛있는 술을 대접받는 건, 방문 목적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니, 이왕이면 그 목적만으로 묘법사의 문을 넘고 싶었다. 그러나 수사 1과의 형사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호텔 저수조에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나왔어요."
승부가 중반에 접어들 무렵, 사무라는 본격적으로 오늘의 용건을 내비쳤다.
"매춘으로 잠깐 쉬었다 가는, 그런 곳인가?"
스님은 바둑판을 노려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도대체 스님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어 있는 걸까? 죽으면 꼭 부검해 보고 싶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해도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으니 말이다.
"아니요, 에메랄드 호텔입니다. 초일류라고는 할 수 없어도 어엿한 호텔이에요."
"알아, 알아, 그곳이라면. 이런! 실수를... 잘못 두고 말았네."
사무라는 스님만큼 재주가 있는 건 아니라서, 찬찬히 생각하고 돌을 놓은 뒤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호텔 뒤편에 직원용 출입구가 있고, 직원은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각 층으로 갑니다. 그 출입구를 지나면 풀숲에 오래된 저수조가 있어요. 누군가 풀어둔 금붕어가 있고 초록색 이끼가 떠 있지요."
"깊은가?"
"2m 정도에요. 돌무더기를 묶어서 가라앉혔습니다."
"사인은?"
"교살입니다. 목을 졸랐어요."
"죽인 뒤에 시체를 저수조 속에 빠트렸다는 이야기인가?"
"맞습니다."
"시체를 발견한 건?"
"호텔 보이입니다. 좀처럼 사람이 가지 않는 곳입니다만, 3월 3일 아침에 저수조 표면이 얼어붙었다는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보이가 대나무 장대로 얼음을 깨려다가 수조 바닥에 이상한 게 있다는 걸 눈치챈 거죠."
"얼음은 그날 아침에 언 걸까?"
"아니요, 3일 아침은 그렇게 춥지 않았습니다. 추웠던 건 2일 아침으로, 결빙 상태를 보면 얼음이 언 건 2일 아침으로 보입니다. 그늘이라 쉽게 녹지 않은 걸로 보입니다."
"여자가 죽은 건?"
"아마도 1일 오후입니다. 1일 정오 조금 전에 집에서 나갔다고 하거든요."
"그럼, 범인의 범위도 그렇게 넓을 것 같지는 않은데? 범행 시간, 시체를 수조에 감춘 시간 모두 한정되어 있으니까. 아이고, 그나저나 자네가 묘한 이야기를 꺼낸 탓에 바둑이 엉망이 되어 버렸네."
"던지시겠습니까?"
"응, 이번 판은 내가 졌네. 그럼 아까 그 이야기, 재미있어 보이는데 더 들려주지 않겠어?"
사무라가 스님의 기묘한 재능을 깨달은 건 서로 바둑을 두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사무라가 맡았던 클럽 마담 살인 사건이 피해자의 문란한 남자관계 때문에 도무지 진도가 나아가지 못하던 중이었다. 사무라는 주지 스님과 바둑을 두던 중 무심코 사건 이야기를 잠깐 꺼냈었다. 며칠 뒤 사무라가 다시 방문하자, 스님은 사건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사무라에게 물어보고 나서, 이내 훌륭한 추리를 들려주었다. 사무라는 약간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지만, 스님의 추리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에 그 선을 따라 수사를 진행했고, 결국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스님의 추리대로였었다.
그 후 비슷한 경험을 한두 번 더 겪고 난 지금은, 사무라도 완전히 벽에 부닥친 사건의 경우는 묘법사를 찾아가 바둑을 두며 스님의 의견을 듣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 사건은 발생 당초에는 그다지 어려운 사건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피해자는 N 대학의 4학년생인 에토 준코, 시체 발견 장소는 스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에메랄드 호텔 직원용 출구 뒤쪽에 위치한 낡은 저수조 안, 발견된 것은 3월 3일 아침 11시경.
에토 준코는 N대학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악단 '빅&큐티'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악단 이름의 유래는 멤버 중 남성은 모두 덩치가 크고, 여성은 작은 것에서 유래했다. '빅&큐티'는 아마추어 악단이기는 했지만, 매니저인 타무라의 수완이 좋았고 멤버 각자의 실력도 뛰어났기 때문에 이런저런 클럽과 호텔에서 출연 제의가 많았다. 에메랄드 호텔에서도 3월 1일부터, 즉 에토 준코가 살해되었다고 추정되는 날 밤부터 7층 라운지에서 '빅&큐티'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나?"
스님은 두꺼운 술잔에 입을 대고 몸을 약간 비스듬히 눕히며 들이켰다.
"네, 10일까지요. 클라리넷이 하나 부족하긴 했지만,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어쨌든 예정대로 끝내기는 했답니다."
"그럼 우선은, 그 죽은 아이 이야기부터 해 보시게."
"네, 뭐라고 해야 하지? 집은 특별히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아요. 보통의 중산층입니다. 어머니가 계모고요."
"집에서는 걸림돌 취급받고 있었나?"
"특별히 심한 취급을 받은건 아니지만... 어머니 쪽 이복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으니까요. 피해자에게는 그렇게 아늑한 집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친구들이나 남자 친구는?"
술이 텅 빈 것을 깨달은 스님은 벽에다 툭툭 손을 치면서 말했다. 절 주변이 조용하기 이를 데 없어서, 스님이 손을 치는 소리는 아래층까지 잘 울려 퍼졌다. 수행승이 술 한 병을 들고 와 문을 열었다. 이런 고요한 상황에는 '세외승경'이라는 말도 과장은 아니고 잘 어울린다.
"악단 동료들과의 교류가 대부분이었어요. '빅&큐티'에는 남자 멤버 몇 명인가가 있는데, 그들 중 두 세 명과는 꽤 깊은 관계까지 간 모양입니다."
"그건 육체관계를 의미하나?"
"그럼요. 요즘 여대생들은 금방 거기까지 가 버리니까요."
"같은 악단 내에서, 이 남자, 저 남자와 그런 관계를 맺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여러 남자와 몰래 사귀는데에는 엄청나게 능숙했던 모양이더라고요. 비밀리에 말이죠."
"밝혔나 보지?"
"음, 피해자가 그런 걸 좋아했을 수도 있지만, 계모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외로움을 많이 탔다더군요. 하여튼, 악단원 중에서도 적어도 세 명과는 깊은 관계가 있었어요."
"호오, 그 세 명은?"
"피아노의 이케다, 기타의 야마우치, 그리고 같은 클라리넷의 오오이다입니다. 셋 다 이미 끝난 관계라곤 하지만요."
"그 셋이 제일 수상한가?"
"하지만 이케다와 야마우치의 알리바이는 탄탄합니다. 오오이다도 마찬가지에요. 손쓸 방법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호텔 내부 사람이나 떠돌이의 범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그건 좀 성급한 생각 같은데. 그 여자애 이름이 뭐였더라?"
"준코, 에토 준코입니다."
"그래, 그래, 준코가 살해된 건 1일의 몇 시쯤일까?"
"부검 결과로는 오후 한 시에서 세 시 사이에요."
"흠, 그날 밤 연주하기 위해 악단 멤버가 모두 모인 시간은? 준코가 그렇게 서둘러 호텔로 올 필요가 있었나?"
"네, 그게 문제에요. 매니저의 증언으로는 호텔 집합 시간은 오후 7시 30분까지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두 그 시간 즈음에 모여 있었고요."
"왜 그녀만 그렇게 이른 시간에 호텔에 갔을까? 호텔이 아니라 저수조 옆이었을지도 모르지만... "
"네... 누군가를 만날 약속이 있었다는 등, 그 이유에 대해 아직 밝혀진 사실은 없습니다."
"그녀는 뭐라고 하고 집을 나왔다고 하던가?"
"언제나처럼 별말 없었다고 하네요. 그냥 저녁밥은 필요 없다 정도였답니다."
"호오, 어쨌건 악단 멤버들의 알리바이는 모두 확실한 것 같군. 자네의 우울한 얼굴을 보니."
"그 말 그대로입니다. 우울한 건 마작 그룹 때문이기도 하고요."
"마작 그룹?"
"학생은 편해서 좋아요. 4학년이라 이제 졸업식을 기다릴 뿐이라 그런지, 악단 멤버 중 이케다, 야마우치, 다니키, 노무라, 이 네 사람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야시로 집에 모여 철야 마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28일 밤부터.... 야시로는 외삼촌 댁에 하숙하고 있는데 외삼촌이 여행을 가서 안 계신 틈에 학생들을 불러 모은 거죠."
"이케다, 야마우치, 다니키, 노무라, 거기에 야시로라.... 마작은 넷이서 하는 것이지 않은가?"
"보통 이런 경우 한 판이 끝나면 꼴등이 빠집니다. 꼴등은 잠을 자거나, 옆에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죠."
"그럼, 도중에 집을 몰래 빠져나간 사람은 없다, 그런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 집은 어디인가?"
"우라와에서도 제일 깊숙이 들어간 곳입니다. 에메랄드 호텔까지는 편도로도 두 시간 가까이 걸릴 겁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마작 그룹 멤버들이 서로 입을 맞추고 범행을 벌였을지도....."
"음,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닐 거에요. 지금 말한 멤버 중 한 명인 노무라가 제 조카거든요."
"이런, 이런"
"이상한 형태로 관계자가 되어버린 터라 조금 난감하고, 또 우울합니다만.... 조카는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녀석입니다. 거짓말 따위 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에요. 하물며 살인 사건에 관계되었다면 말이죠. 그런 일을 숨겨둘 수 있을 리가 없어요. 그래서 이 멤버들이 28일부터 1일 오후 4시 넘어서까지 마작을 하고, 저녁에 모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야시로의 승합차를 타고 제시간에 에메랄드 호텔까지 온 건 일단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확신합니다."
"그렇군.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 조카가 한 말은 맞는 말이겠지. 공동 모의한 범행은 없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날 무엇을 했을까...."
스님은 취기 탓에 살짝 붉어진 이마를 두드리며 바둑돌을 다시 잡았다. 자연스럽게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시체가 발견됐을 때부터 범인의 가능성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에토 준코의 교우 관계 쪽, 특히 '빅&큐티'의 멤버. 다음은 호텔 직원 혹은 관계자, 그리고 마지막은 우연히 호텔 근처에 온 방랑자.
두 번째, 세 번째의 가능성이 완전히 부정된 것은 아니지만, 사무라는 애초부터 첫 번째 가능성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낮의 호텔은 - 특히 직원 출입구 근처는 - 결코 사람의 출입이 적지 않다. 젊은 여자를 우연히 살해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에토 준코는 왜 예정보다 5시간이나 빠른 시각에 호텔로 왔을까? 누군가 지인과 약속이 있었던 게 아닐까? '빅&큐티'의 멤버는 에토 준코를 제외하면 매니저 겸 사회자 타무라와 마작 그룹 멤버인 이케다, 야마우치, 타니키, 노무라, 야시로, 드럼의 우치노, 기타의 오오스기, 뭐든지 능숙하게 연주하는 오오이다, 그리고 여성 멤버인 클라리넷의 치노와 플루트 겸 보컬인 와카이의 11명이다. 에토 쥰코가 오쿠보의 집을 나온 건 3월 1일 정오 조금 전이고 그 이후의 행동은 알 수 없다. 클라리넷을 들고나왔으니 그대로 저녁 공연에 참여할 생각이었음은 틀림없다. 클라리넷은 핸드백과 함께 호텔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중간의 하수도에서 발견되었다.
에토 준코의 사망 추정 시각이 오후 1시부터 3시 사이이니, 그녀는 집을 나간 후 수 시간 사이에 살해당한 셈이다.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3) - 아토다 다카시
[번역] A 사이즈 살인사건 (2) - 아토다 다카시
다음날 오후 1시 정각, 사무라 에이스케는 다시 묘법사를 찾았다.
대낮에는 어딘가 근처 건설 현장에서 콘크리트 기둥을 치는 공사를 하는 듯한 쿵쿵, 쿵쿵거리는 무거운 소리와 거리의 호객꾼 소리, 관광버스가 울리는 경적까지 들려왔다.
이 정도라면 역시 '세외승경'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고 사무라는 생각했지만, 스님은 창문이 흔들릴 정도의 공사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불가에는 '심두멸각(心頭滅却)', 즉 마음을 비우면 불조차도 시원하다는 고사도 있는 만큼 이 정도 소음은 예사로이 여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어, 한 판 두자고."
오늘도 2층 방에는 이미 바둑판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바둑을 두는 것이 차를 대신하는 셈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어놓은 차 역시 차대로 제대로 고급품이었다.
"어땠나?"
스님은 돌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전 중에 물어보신 모두는 완벽하게 조사했습니다."
"그렇군, 그렇군."
사건 수사 중에 고급스러운 차를 마시며 스님을 상대로 바둑을 둔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세외승경'의 경지일지도 모른다.
"우선, 브래지어 건입니다만...."
"응."
"A 사이즈였습니다. 정확하게는 A컵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만.... 시체를 본 형사 말로는 A컵도 필요 없을 절벽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게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자네, 이 빅 어쩌고저쩌고하는 악단은 남자는 덩치가 크고, 여자는 작다고 했었잖아."
"네"
"에토 준코도 작았지?"
"맞아요. 150 cm도 안 될 정도예요."
"거기에 A 사이즈의 절벽이라니, 굉장히 왜소했겠는걸. 비쩍 마르고 깡말라서 체중도 37, 38kg 정도밖에는 안 됐을 거야."
"뭐, 비슷할 겁니다. 사진으로만 봤을 뿐이지만요."
"그런 체형의 여자가 의외로 밝히는 사람이 많다고. 실제로 그녀는 남자관계도 꽤 화려한 듯하고."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사건과 무슨 관계가..."
"그렇게 당황해하지 말라고. 자네 차례야."
사무라는 당황해하며 검은 돌을 반상에 내려놓았다. 사실 바둑을 둘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스님은 사무라와 바둑을 두는 게 중요한 즐거움 중 하나이니, 적당히, 가볍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야시로 외삼촌 집에 심어진 정원수에 대한 것인데요."
"그래, 그래"
"말씀대로 대문에서 현관까지는 등대꽃, 칠엽수, 동백, 철쭉들이 다 심겨 있었어요. 우라와의 파출소에 전화해서 조사해 본 결과에 따르면요. 정원에는 그 밖에도 나무가 많아서 울창했는데......"
"아니, 아니, 이제 나무는 됐어. 문에서 현관까지는 콘크리트가 깔려 있었나?"
"그게, 담벼락에 쓰는 돌을 두 줄로 사십 개 정도 연결해서......"
"제일 매력적인 아가씨는 누구였지?"
"와카이입니다."
"역시 그렇군. 그리고 또 하나, 마작 쪽은 어땠나?"
"마작이요?"
" 잊었는가? 마작은 바둑 같은 것에 비하면 훨씬 운이 작용하기 쉬운 게임이지만, 그래도 서른 시간이나 하면 어떻게 되었겠냐고......."
"아, 그것도 일단 알아봤어요. 두 학생에게 전화를 걸어......"
"그래서, 결과는?"
스님의 뇌는 여전히 이중구조다. 보고를 들으면서도 바둑에 대한 판단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 오히려 뜻밖의 묘수가 많아졌다.
"오랜 시간 하면 보통 마작도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해요"
"그런데 얼마 전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스님의 말에 사무라는 어안이 벙벙해서 스님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렇습니다. 이런, 스님. 스님도 학생한테 물어보신 건가요?"
"아니, 난 그런 거 안 해. 하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 자네에게 물어 봤던 거지. 그래서……. 멤버 중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였지?"
"야시로입니다"
팟! 스님이 기세 좋게 내려놓은 흰 돌로 반상의 바둑돌들이 튀어 올랐다.
"응......?"
몰리고 있던 흰 돌의 형세가 갑자기 좋아졌다. 교묘히 도망치면서 오히려 사무라의 흑돌을 거꾸로 노리게 되었다.
"그 남자가 범인이야."
스님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런데 동기가 뭐죠? 게다가...... 야시로와 멤버들은 모두 호텔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마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죽일 수 있었던 거죠?
"우선 동기부터. 살해당한 에토 준코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지? 집이 계모 가정이라서. 그렇다면 겉으로 별로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더라도, 빨리 집을 나가고 싶었던건 당연해. 흔한 일이지. 그래서 여러 남자를 유혹한 거야. 즐기기 위해서만은 아니라고."
"하긴, 집이 그다지 편하지는 않았다죠."
"관계를 맺고 나서는 결혼을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했을거야. 하지만 남자들 모두 아직 어린 학생이니 그런 거에는 진절머리가 났을테고. 결국 그녀는 남자들에게 차례로 버려진 거지. 야시로의 경우 역시...."
"그렇다면 야시로와 에토 준코가 깊은 관계였다는 말인가요?"
"틀림없어. 이미 악단 멤버 세 명과 관계를 맺었는데, 네 명째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리 없지. 게다가 자네는 분명 콘트라베이스 같은 악기는 그렇게 쉽게 교체할 수 없다고 했어. 결원이 생겼을 때는 굉장히 난감해서, 급히 충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맞지? 악단 단원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건, 최근 콘트라베이스가 충원되었다는 뜻이야. 즉 야시로는 비교적 새로운 멤버이고, 준코도 새로운 남자에게 달라붙은 거지. 남자는 그냥 불장난이었겠지만, 지금까지 계속 버려져 왔던 여자는 더 필사적이었을 테고. 남자는 여자가 방해돼서……. 뭐, 그런 게 동기가 아니었을까 싶네."
"그렇다 하더라도 야시로는 어떻게 죽인 거죠?"
"대낮에 호텔 주변에서 그렇게 쉽게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 나의 추리도 거기서부터 시작했지."
"그렇다면..."
"에토 준코는 야시로의 집에 가 있던 거야."
"어떻게 아셨어요?"
"멤버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와카이가 마작 견학을 하러 가니까. 야시로는 그걸 준코에게 미리 이야기했을 거야. 전화 같은 거로....... 멤버 중 가장 매력적인 아이가 야시로의 집에 가고 있다고 하면, 쥰코가 과연 태연히, 잠자코 집에 있을 수 있었을까? 야시로가 '1시쯤 온다고'라고 했다면, 분명 그녀도 그 시간에 갈 수밖에 없었을거야. 무엇보다도, 그녀가 다른 누군가, 관계없는 사람과 만날 약속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그 상대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게 더 이상해."
"하지만 마작을 하던 사람들은 아무도 에토 준코가 왔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요..."
"그래. 문밖에 초인종 버튼이 있으면, 그걸 누르면 누구나 벨이 울릴 것으로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조금 손을 댄다면 램프만 깜빡이게 만들 수 있어. 준코는 1시 조금 지나면 오기로 했으니, 마작을 제일 잘하는 야시로는 그때 쯤 일부러 꼴등이 되어 빠진 거야. 그렇지 않았더라도 집주인이니 차를 대접한다고 하면서 자리를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지."
"그렇군요"
"준코가 와서 문밖의 벨을 누른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램프가 켜지고, 야시로만 이를 알아채고 현관으로 나갔지. 이를 위해서는 야시로의 외삼촌 집은 문에서 현관까지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나름 훌륭한 저택이어야만 해. 정원수나 포석의 종류는 문제가 아니야.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문에서 현관까지가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거리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어."
"……"
"정원수 종류도 많고 울창했지. 현관까지는 두 줄의 포석이 40개 정도라니 20~30m 쯤 되는 셈이고. 야시로는 여기서 준코를 목 졸라 죽인 뒤, 울창하다는 정원수 덤불 숲 속에 시체를 숨긴 거야. 그녀는 가냘프고 약했으니 죽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겠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그리고 모른 체하며, 그는 모두 마작을 하는 곳으로 돌아온 거지. 그 상황에서 마작을 잘 못한건 당연하고."
"하지만 스님. 씨, 모두가 야시로 외삼촌 집에서 출발할 때는 다 함께 승합차를 타고 출발했어요. 시체는 어떻게 된 거예요?
"소모산 (作麼生)!"
갑자기 스님이 바둑판 위에서 고개를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소모산 (作麼生)은 말할 것도 없이 선가의 말로 "자, 어때?"라는 뜻이다.
"야시로의 짐은 무엇이었지?"
여기까지 말하면 사무라도 짐작할 수 있다.
"설파 (説破)!"
사무라도 소리쳤다.
이건 '소모산'에 대해 답하는 선문답의 상투어다. 몇 번인가 스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이에 사무라도 외우고 말았다.
* 作麼生, 説破 : 자 어때, (이만하면) 알겠지. 라는 뜻
"그렇지, 설파. 콘트라베이스. 부처님은 그 안에 있었어. 덩치 큰 여자라면 어려웠겠지만 쥰코는 굉장히 왜소했으니까. 야시로의 콘트라베이스는 아마 사전에 호텔의 보관함이나 어딘가에 옮겨 놓았을 거야. 콘트라베이스의 케이스 안에 부처님을 넣고 호텔에 도착하면, 그는 차를 주차하고 와야 하니 일행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지. 그때 부처님을 저수조 안에 던져 넣은 거야. 돌덩어리를 매달은 건 그때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였다면 아마 그것도 미리 저수조 근처에 마련해 두었을걸세."
스님은 말하면서도 손은 바둑판 위를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 사무라는 응수했지만, 스님의 공격이 확실히 이득을 얻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의 응수는 건성에 불과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둑은 이미 완전히 끝나 버린 상태였다.
"졌네요. 던질게요."
"아쉽지만, 오늘은 한 판이면 끝이야. 자네도 바쁠 테고......"
사무라는 허겁지겁 돌을 치우고 자리를 떴다. 어차피 더 바둑을 둘 수는 없었다. 스님의 추리에 따라 하나하나 증거를 모아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사무라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실례하겠습니다."
"아이고, 사건이 또 진정되면 오라고."
헤어질 무렵, 사무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스님, 그 추리, 정말 맞을까요?"
"모르겠어, 선방의 억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뭐, 사물의 이치로는 그렇지 않을까 싶네만."
스님의 추리는 옳았다.
* 재미있으셨어요? 평, 반응이 좋다면 이 단편집의 다른 작품인 '2LDK 살인사건' 번역에도 도전해 볼까 하는데... 잘 될까요?
2020/04/03
[번역] 2DK 개미지옥 - 아토다 다카시
도요코 선의 N 역에서 하차하여 서쪽의 개찰구로 나오면, 길고 완만한 오르막 언덕이 나타난다.
"아저씨, 비켜비켜! 비켜요!"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아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위험하잖아!"
사무라 에이스케는 다급하게 보도 옆으로 몸을 피했다.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 옆을 지나갔다.
언덕의 길이는 50여 미터, 경사는 78도. 확실히 스케이트보드를 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학교에서는 분명히 도로에서 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시키고 있겠지만, 개구쟁이 아이들이 귀담아들을 리가 없다.
"뭐, 다른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사무라는 석양빛으로 길게 드러워진 아이들의 그림자를 뒤로 한 채, 다시 서둘러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을 오르면 바로 묘법사다. 절에는 산호(山呼)와 사호(寺呼)가 있는 법이니, 묘법사도 정식으로는 어딘가산 묘법사라고 불러야겠지만, 사무라도 산호까지는 모른다. 똑같이 시체를 취급하는 장사라도, 수사 1과의 형사가 산호까지 알 정도로 절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 리는 없다.
산호가 있는 건 절이 분명 산 위에 있기 때문이다. 묘법사 정문까지 긴 고갯길이 이어진 것에서도 그러한 산호의 유래를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 주변도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한적한 산길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회색 빌딩과 콘크리트 포장길이 무표정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 묘법사만 홀로 고집을 부리듯 화려하게 자연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채로 가는 쪽문을 빠져나와 마당 쪽으로 고개를 내밀자, 형형색색의 튤립이 피어 있는데, 툇마루를 따라 화려한 와인잔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
사무라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툇마루 쪽을 향해 말했다.
"여어. 기다렸다고."
감색 티셔츠를 입은 주지 스님이 사무라를 알아채고 고개를 까닥였다. 스님 앞에는 몇 년 전 은거한 노사가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주지 스님은 노사의 머리를 면도하는 중이었다. 노사는 치매가 시작된 후에는 좀처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은 탓이겠지. 사무라와 친한, 현재의 주지 스님은 데릴사위로 노사는 그의 장인이다. 주지 스님이 수행승이던 시절부터 장인의 머리를 깎는 일은 그의 몫이었을 거다. 그 습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으로, 평소엔 멍한 얼굴을 하는 노사도 오늘만큼은 위엄을 떨치듯 고개를 바짝 세우고 있었으며, 그 뒤에서 티셔츠를 입은 스님이 얌전히 면도하는 모습은 시간이 십수 년 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곧 끝나니까. 2층에서 기다리게."
지켜보던 사무라에게 주지 스님이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푹 쉬고 있으라고."
사무라는 현관으로 돌아 나온 뒤, 젊은 수행승의 안내로 언제나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는 아니나 다를까 벌써 바둑판과 방석이 갖추어져 있었다. 오월의 바람이 어디선가 꽃향기를 날라와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살인사건 얘기를 꺼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이렇게 상쾌한 봄날 저녁 스님을 상대로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지내고 싶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스님이 큼직한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사무라 에이스케는 살인 담당 형사로는 아직 신출내기로 쉰을 넘은 주지 스님과는 부모 자식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났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잘 맞았다. 바둑 솜씨는 서로가 상대보다 조금 강하다고 생각하는 정도. 세상에 이렇게 멋진 적수는 없다.
"자, 시작할까?"
스님은 바둑판 덮개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잡을게요'
사무라가 선을 잡았다.
"정선."
"네."
잡은 돌을 세어보니 열한 개였다. 흑을 잡은 사무라는 가벼운 묵례 후, 우상귀에 돌을 두었다. 돌은 고급품으로, 1.5cm 정도의 두께였다. 내려놓은 돌이 바둑판 위에서 살짝 떨렸다.
"오늘은 그쪽부터 두는건가?"
"우선 이쪽 집을 벌어 놓으려고요."
"그렇군."
번갈아 열 수 정도 둔 뒤, 사무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혼잣말하듯 사건을 입에 올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시체가 마중을 나왔답니다."
돌을 집어 든 스님의 손이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이런, 벌써 교란 전술 시작인가?"
"천만에요. 이건 진짜 사건이에요. 지난주 시모키타자와에서 일어난 정말 기묘한 사건이지요."
스님은 사무라의 공격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부처님은 남자였나? 아니면 여자였나?"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수행승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아직 식사하기에는 좀 이르지? 술이나 한잔하자고."
'항상 죄송합니다.'
안주는 죽순조림과 참치 초무침이었다. 닳고 닳은 스님 같으니라고. 술은 흠뻑 취할 정도로 마시고, 남의 살도 매우 좋아한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정말로 밝다. 살아가는 도중에 우연히 묘법사의 사위가 되어 스님이 된 것 같은데, 스님이 되기 전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사무라도 아직 물어본 적이 없다.
수행승이 나가자 사무라가 말했다.
"부처님은 남자입니다."
"그렇군. 그럼, 부처님은 새 신부의 옛날 애인쯤이려나."
"아니,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합니다."
"그럼 신랑의 친구였나?"
"그렇지도 않고요."
"호오. 그럼 신랑, 신부, 그 누구와도 관계가 없다고?"
"본인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 남자가 부부의 2DK 아파트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죽었는데 말이죠."
* 2DK : 방 2개 + Dining Room (식당) + Kitchen (부엌) 으로 이루어진 집
"아이고 부처님, 알몸으로? 그런데 이 돌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나저나 알몸으로 죽으면 안 되지."
스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구석진 돌을 공격해 들어갔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화요일, 5월 9일의 일입니다. 시모키타자와의 그린 아파트에 사는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이죠. 스즈미 코지와 스즈미 료코 부부로...."
"잠깐만. 아파트에 살던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아닐까?"
".….…?"
"그렇지만 맞잖아.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직 부부가 아니었으니까."
"아하하하. 스님의 억지는 당할 수 없네요.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결혼한 건 5월 3일입니다. 아파트를 빌린 것은 4월 중순이고요. 남자가 결혼식까지 혼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뒤 일주일간 규슈를 돌아보았고......."
"그리고 돌아와 보니 세상에나! 벌거벗은 남자가 죽어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 이건 안 돼. 방심하면 안 되지. 엄청난 실수를 할 뻔했군."
스님은 입을 삐죽이며 사무라를 노려보았다. 오른쪽 구석에서 사무라의 흑과 대치 중인 백의 생사가 불안했다. 스님은 얼굴을 바둑판에 묻고 그 돌 무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무라는 어려운 사건을 맡을 때마다, 고양이가 다래나무에 이끌리듯 묘법사를 찾는다. 그래서 스님은 웃으면서 '자네는 뭔가 풀 수 없는 사건을 만나면 절에 발길을 옮기는군'이라고 말하곤 했다.
오늘의 방문도 마찬가지 목적이다. 이번 사건은 정말로 기묘했다. 스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사건이 신고된 날은 5월 9일 화요일이었다. 그날, 시모키타자와의 번화가로부터 조금 뒷골목에 들어간 3층짜리 아파트에 스즈미 코우지, 료코 두 사람이 돌아왔다. 코우지는 굵은 체크 재킷에 밤색 바지, 료코는 꽃무늬 투피스에 연지색 모자를 차려입었다. 낡은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모습이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막 신혼여행을 끝낸 뒤, 걸음걸이도 가볍게 둘만의 스위트 홈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신랑이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도 기다릴 리 없는 방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인기척이 없는 실내에 공기가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신부가 이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결혼식 전에 짐을 나르고 청소를 하거나, 혹은 내친김에 미래의 배우자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이러쿵저러쿵 몇 번이나 이 아파트를 찾았었다. 그러나 정식 거주자로서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시각은 오후 4시가 넘었다. 실내는 밝았다.
"나올 때 커튼 치는 걸 깜빡 한거야?"
며칠 전 신랑은 이 방에서 결혼식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음, 그랬었나?"
코우지는 자신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료코는 시원시원하게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그런 다음 오늘부터 자신이 지배하게 될 땅을 점검하듯 부엌을 살펴본 뒤, 욕실 문을 열었다. 순간 숨을 삼키는 듯한 기색이 흐르고, "꺄악!"이라는 비명과 함께 료코가 도망치듯 튀어나왔다.
"왜 그래?"
"사, 사, 사람이......"
료코는 남편에게 매달려 욕실 쪽을 가리켰다. 코우지는 옆에 매달아 놓은 프라이팬을 손에 들고 조심조심 욕실로 향했다. 프라이팬을 든 것은 무의식중에서도 무기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기는 필요 없었다.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욕실 좁은 욕조 속에서 한 남자가 목을 늘어뜨린 채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죽었어."
"정말?"
"틀림없어……. 가스가 새고 있어."
확실히 욕실에 발을 들여놓자, 날카로운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즈미 코우지는 서둘러 욕실 창문을 열고 가스 욕조의 밸브를 잠갔다.
"누구야? 이 사람은?"
료코가 코를 막으며 물었다.
"모르겠어. 난 몰라, 이런 남자."
코우지는 숨을 멈춘 뒤, 다시 한번 욕실로 돌아가 시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34, 5살쯤 되어 보이네."
시체는 섬뜩했지만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야. 도대체 누굴까..... 너는 어때?"
새신랑은 "너"라는 호칭을 약간은 어색하게 사용하며 아내에게 말했다. 료코는 두려움을 억누르려는 듯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며 욕실을 들여다보았다.
"몰라, 이런 사람."
"그래도 모르니까, 잘 봐."
"잘 보라니......몰라."
"좋아. 어쨌든 경찰에 전화하자."
"으....."
축복받아야 할 새로운 삶의 첫걸음은, 낯선 노출광에 의해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죽은 남자의 신원은 알아냈나?"
묘법사의 주지 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위, 아래로 움직여 바둑의 형세를 가늠하며 물었다. 바둑은 중반의 접전을 끝내고 종반전에 진입한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전황은 사무라가 우세했다. 스님은 형세를 단번에 만회할 수단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이제 둘 곳도 없는 곳들을 상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둘 데가 없을걸요? 그 근처는."
"응. 없는 것 같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심야 방송을 들으면서 공부하는 게 효과적이라는데, 스님의 두뇌도 그런 구조인 것 같다. 바둑을 두면서 동시에 사건을 추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둑이 별로일 때에는 아직 추리 쪽도 정리되지 못한, 암중모색의 단계이다. 아까부터 변변한 수가 없는 걸 보면 스님의 추리는 아직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한 듯 싶었다. 사무라는 이 상태에서는 적당히 스님의 비위를 맞추며 질문에 대답하는 게 제일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했느냐 하면……."
사무라는 흑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걸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되지...."
팟! 하고 스님의 흰 돌이 응전해왔다.
"우리 경찰은 우수합니다. 당연히 밝혀냈죠."
"그렇군."
"미나토구의, 가전 제조업체 경리부에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이름은 코이즈미 노부히코, 나이는 37세. 가족으로는 아내와 자식은 두 명…….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와 유치원 다니는 남자아이입니다. 세타가야의 공단 주택에 살고 있고, 월급은 20 수만엔 정도. 잔업 수당은 부인에게 주지 않고 모두 용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듯한 평범한 직장인이고, 취미는......"
"골프와 마작."
"그것도 추리인가요? 하지만 틀렸습니다. 골프도 못 치고, 마작도 못 한다네요. 취미는 산책과 사교댄스, 그리고 패션이었답니다. 멋 내기를 좋아했다는군요."
"술은?"
"조금."
"유흥 업소는 다녔던가?
"스님이 그걸 물어볼 거로 생각해서 회사 동료에게 물어봤죠."
"잘했네. "
"직장인이라 가보긴 했지만, 부지런히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는군요. 구태여 말하자면 적당하였달까요?"
"흥, 흥......"
스님은 갑자기 화제를 바둑으로 돌렸다.
"어, 거기 그런 수가 있었나?"
"이쪽 돌은 덕을 좀 본 것 같죠?"
"이미 대세에 영향은 없나."
"그런 셈이죠."
"확실히, 여기서 끝났구먼."
"그런 것 같네요."
"유감이군. 이번에는 내가 졌네. 잠시 모습을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늘었는걸? 수사는 대충 하고 바둑책을 읽으면서 공부한 거 아냐? 덕분에 범인은 전부 다 놓치고 말이야."
"와, 엄청난 말씀이시네요. 스님 쪽이야말로 틈나는 대로 비밀로 전해진 전설의 두루마리를 숙독하면서 공부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아니, 환절기에는 부처님이 되는 사람이 많아서 절도 꽤 바쁘다고."
"그래요?"
계가해 본 결과, 흑집은 마흔 둘, 백집은 스물셋으로 덤을 빼도 무려 열네 집 반의 승리였다.
"아이고 망신스러워. 이건 대패야 대패."
스님은 갑자기 생각난 듯 손을 두드려 술을 추가 주문했다.
"그러면 다시 한 판 더?"
"네, 네."
첫판에서 사무라가 이기면 스님은 분해서 꼭 다음에는 이기려고 한다. 착수도 날카로워졌고, 그 영향으로 추리 쪽도 좋아진다. 사무라에게는 더 바랄 나위 없는 결과였다. 사무라는 따끈하게 데운 술을 목구멍에 흘려 넣고, 맛있게 버무린 초무침을 한 입 깨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흑으로 시작하지."
"네."
바둑돌을 치운 뒤,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스님은 흑 1, 3, 5로 시작하는, 슈사쿠 명인의 포석으로 두기 시작했다.
사무라가 손을 잠깐 멈춘 사이,
"그 살해당한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하고 스님 쪽에서 교란 전술을 써왔다.
"고이즈미 노부히코입니다."
"그래그래. 그 고이즈미와 신혼부부의 관계는?"
"그게 아무래도 확실치 않아요."
"호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남편은, 이런 남자는 전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아내 역시 이런 사람 알 리가 없다고 경찰에서 줄곧 증언하고 있거든요."
"그럼 왜 그 남자가 아파트에 있었지?"
바둑은 포석이 끝나고,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심사숙고가 필요한 중반의 공방전에 돌입하였다. 사건의 추리도 조금씩 조금씩, 까다롭고 어려운 부분을 향하였다.
"그게 문제라고요. 아파트 관리인이나 이웃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그런 남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 고이즈미 누군가가 전에 그 아파트에 살았던 건 아니겠지?"
"맞아요. 그 부분은 정말로 아주 상세하게 수사를 진행했는데, 고이즈미 노부히코와 그린 아파트를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아, 깜빡했네!
스님은 정석대로 흑돌을 놓으며 외쳤다.
"뭘요?"
"살인사건이 맞나?, 애초에, 욕실에는 가스 냄새가 났었잖아? 사고사 가능성은 없나?"
이번 한 수로 흑이 형성한 빗살 모양 세력이 백의 중요한 지점을 단절시켰다. 스님의 수는 두면 둘수록 점점 날카로워졌다.
"사고사 가능성도 있습니다. 목욕탕의 가스 욕조는 뚜껑을 닫으면 불이 꺼지도록 만들어진 물건인데, 고무관을 연결한 부분이 느슨하더군요. 그 부분에 가스 누출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하죠."
"하지만 자네 말로는 신혼부부는 아파트로 돌아가서 한동안 가스 냄새를 눈치채지 못했잖아? 작은 아파트 목욕탕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가스가 샜는데, 거실 다다미방에서 알아채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나?"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부부에게 물어보니 남편은 현관을 열자마자 약간 가스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했다 하고, 부인은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너무 놀라서 냄새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욕실에 얼마나 가스가 차 있었는지도 정확히는 알 수 없고요.".
"나중에 테스트 해봤을 거잖아. 같은 욕조로."
"물론이죠. "
"어땠나?"
"어느 쪽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전문가는 꽤 오랜 시간, 대략 한 시간 정도 가스가 누출된다면 모르고 목욕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응, 응. 그렇지. 가스 중독은 먼저 운동 중추를 마비시키니까. 뭐지? 몸이 이상한데?라고 깨달았을 때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스님은 부처님 만드는 법도 잘 아시네요."
"그런 거북한 소리 말라고. 그것보다도 구석의 이 대마 말이야, 이 녀석도 부처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아무리 스님이라도 좀 힘들어 보이는데요?"
"그래, 그래."
스님은 다시 바둑판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무라는 화제를 되돌렸다.
"그래서 욕실 정황만으로는 뭐라 말할 수 없어요. 목욕탕에서 가스가 누출되어 일어난 사고사는 도내에도 매년 몇 건씩 신고되니까요."
"그럼 고이즈미 누군가 씨도 사고사라고 하는 게 어때? 경찰도 바쁠 거잖아."
"가능하다면 그렇게 처리해버리고 싶기는 합니다. 위에서도 그럴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사인도 마침 일산화탄소 중독이니까요. 하지만 피해자가 어째서 생면부지의 집에서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문제에요. 그것 때문에 최소한 저는 그렇게 간단하게 사고사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국민의 경찰, 민중의 지팡이로서 말이죠."
"고맙군그려."
탁! 소리가 났다. 바둑판 위의 돌이 흔들렸다. 두 번째 판은 스님의 우세로 흘러가고 있다.
시신이 발견된 그린 아파트는 콘크리트 3층 건물로 문제의 방은 306호실, 계단을 올라 안쪽에서 두 번째 방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다다미 넉 장 반쯤 되는 식당 부엌이 있고, 오른쪽 안쪽으로 가스대와 싱크대가, 왼쪽에 좁은 널빤지를 세워놓은 듯한 욕실 미닫이문이 있다. 식당 겸 부엌의 안쪽은 다다미 6장짜리 방, 그 안쪽으로 다다미 8장짜리 방이 있는데 신혼부부는 이곳을 침실로 삼으려 했는지 큰 더블베드, 그리고 막상막하로 큰 옷장이 놓여 있다. 사체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각은 발견된 시간으로부터 40시간에서 45시간 전, 즉 전전날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의 사이이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질식사. 사체에 외상은 전혀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약물의 흔적도 없었다.
"자물쇠는 구석구석까지 채워져 있었겠군."
바둑은 세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판은 스님의 압승. 사무라는 도중에 돌을 던졌다.
"맞아요. 그리고 혹시 창문이 잠겨있지 않았었더라도 방은 3층이고 창문 밑은 절벽입니다. 현관 말고는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어요."
"현관문은 확실히 잠겨 있었나?"
"남편인 스즈미 코우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누군가의 옷과 신발은?
"있었어요. 욕실 미닫이문 위에 선반이 있는데, 거기에 놓인 의상 바구니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군."
세 번째 판은 중반까지 느긋하게 진행되었다.
"팬티, 셔츠, 양말, 이름이 새겨진 와이셔츠, 영국제 양복 상, 하의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습니다. 주머니에는 명함, 던힐 라이터, 테크노 시계 등. 신발은 구찌 제품으로 신발장 안에......"
"고급품뿐이네. 누군가의 지문은?"
"선명한 것은 침실에서 두 개, 다다미 6장짜리 방 하나, 부엌에서 목욕탕까지 일곱 개 정도."
"기묘하군."
스님이 과장되게 팔짱을 꼈다. 뭔가 복잡한 생각이 뇌리에 오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팟! 사무라의 흑집 안에 백돌을 놓았다. 세력을 새롭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신발에 붙어있는 흙은 아파트 부근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군."
"뭔가 아시겠어요?"
"아니, 아직 아무것도……. 신혼부부 사이는?
"좋은 것 같아요. 뭐, 신혼부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만....... 신랑 선배의 권유로 맞선을 보고 6개월의 교제 끝에 결혼. 당사자들은 물론 양가 부모님들 모두 좋은 인연이라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둘이 죽은 남자를 모른다는 게 정말이겠지?"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정성 들여 수사했지만, 고이즈미와 부부, 구리고 그린 아파트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저도 부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확실하겠지."
"이거 참, 송구스럽네요."
"죽은 고이즈미는 어떤 사람인가?"
"평범한 직장인인데, 여자관계는 깔끔하지 못한 편입니다. 4년에 한 번꼴로 부인을 울렸거든요."
"올림픽 같은 남자잖아."
스님은 자신의 농담을 즐기듯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바둑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말 별난 사건이구먼."
"예, 뭐......"
"죽은 남자의 회사는 그래, 경기는 괜찮았다던가?
"최근 몇 년 동안의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요."
"그래?"
스님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사건을 생각하고 있는지 바둑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사무라 쪽도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좋다.
"좋아."
생각을 마친 스님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사무라의 흑 세력을 비집고 장렬하게 돌을 내려놓았다. 묘수였다. 백에게도 위험한 수였지만, 흑으로서는 도무지 뾰족하게 응대할 방법이 없는 멋진 수였다. 무리해서 장렬한 싸움을 시작하더라도, 결과는 흑의 패배임이 눈에 보이듯 뻔했다.
"아! 굉장한 묘수네요. 완전히 당했습니다."
"아니야, 이쪽도 약점이 있어."
그러나 스님이 승리를 확신했다는건 말투로도 잘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스님의 추리도 막바지에 이른 게 틀림없다.
"사무라"
"네."
"자네, 피아노 칠 줄 아나?"
"아뇨, 음악은 전혀 재능이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자네 아파트에서는 피아노를 쳐도 되나?"
"예, 일단은요. 피아노를 치든, 방망이를 두드리든 뭘 해도 상관없습니다. 해 본 적은 없지만요."
"그럼 그린 아파트는 어떨까?"
"글쎄요......"
"그린 아파트에서 피아노를 쳐도 되는지,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되는지, 이 점을 조사해 주게."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기묘한 질문이 사건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무라는 검은 수첩을 꺼내 스님의 질문을 적었다.
"아무래도 바둑은 이것으로 끝이군요."
스님의 한수로 반상 위의 모든 싸움은 끝났다. 계가해보니 백의 일곱 집 반 승. 종반전에서 스님의 수가 절묘했던 덕분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사무라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니, 아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건 쪽 말인데...."
"네, 네."
스님은 뒤섞여 있는 돌들을 색깔별로 골라낸 뒤, 손끝으로 좌우로 나누며 말했다.
"신혼부부 아파트 침실......"
"예......?"
"거기 옷장 서랍......"
"네?"
"거기에 자석에 달라붙는 게 몇 개나 들어 있을까?"
"그걸 조사해야 하는 거군요."
"맞아. 내친김에 죽은 고이즈미 누군가 씨. 이 사람은 텔레비전 영화 따위를 보면서 자주 졸지 않았는지, 부처님 부인에게 물어봐 달라고. 그리고 사건이 있었던 306호실, 베란다에 러닝머신이 놓여 있었는지, 커다란 화분은 없었는지......"
"글쎄요. 그건 분명히......"
"일단 알아봐 달라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그린 아파트 306호실에 살았던 여자 중에서는 누가 수학을 제일 잘했을 것 같은지......"
"네? 그런 거 물어본다고 알아낼 수 있을까요?"
"뭐, 괜찮아. 아무튼 물어보라고."
"관리인이나 이웃을 만나서 어떻게든 대답을 모아보겠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해서 수학을 제일 잘할 것 같은 여자를 알아내면, 그녀를 만나서 수학을 제일 잘하는 여자를 만나서 개미를 좋아하는지 물어봐 줘."
"개미라니……. 그……. 저…. 설탕에 꼬이는 그거요?"
"그렇고말고."
"점점 모르겠네요"
"그렇게 불평하지 말고 한번 해 보라고."
"물론 물어보고말고요. 다른 건 없나요?"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오늘은 그 정도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알아낼 수 있겠나?"
"글쎄요."
사무라는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적은 수첩을 쳐다보았다.
"모레, 이틀 후 점심때까진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그거 딱 좋군그래. 나는 그날 2시 즈음까지는 잠깐 본업 쪽 일이 있어서 외출하지만, 3시 이후에는 완전히 비어 있거든. 또 바둑을 두러 오라고. 오늘은 내가 이겼지만, 모레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저는 항상 살인사건을 떠안고 다니기 때문에 바둑에 집중하는 건 어렵단 말입니다."
"천만에. 나야말로 자네가 힘든 숙제를 가져오기 때문에 여러모로 힘들다고."
"그럼, 이번의 숙제는 모레 무사히 해결될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지금 여기서 스님의 추리를 물어봤자 말해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모레의 즐거움. 사무라는 그때까지 스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탐문과 조사를 해 올 수밖에 없다.
"정말 귀찮게 해드렸습니다."
"조금만 더 붙잡고 싶긴 하지만, 자네도 바쁘잖은가."
"그럼 실례했습니다."
현관을 나서자 부드러운 바람이 또 어디선가 농밀한 꽃향기를 실어 온다. 사무라는 향긋한 냄새를 가슴 가득히 담으며 긴 고갯길을 내려갔다.
이틀이 지나고, 스님에게 부탁받은 조사를 모두 마친 사무라는 약속한 3시에 맞춰 묘법사로 이어지는 언덕을 올라갔다.
"아저씨, 위험해요!"
그저께와 같은 개구쟁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언덕을 내려왔다. 사무라는 아이와 지나쳐 절의 입구를 통과했다.
"실례합니다."
"시간을 딱 맞췄군."
스님이 감색 줄무늬 옷을 입은 채 현관으로 나왔다. 지금 외출에서 막 돌아온 것 같았다.
"모처럼이니까 한 판"
"네."
사무라는 한시라도 빨리 스님의 입에서 범인으로 점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듣고 싶었지만, 묘법사 주지 스님의 두뇌는 언제나 바둑돌의 움직임과 함께 활동을 개시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바둑을 두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자, 오늘은 기껏해야 한 판이겠네."
스님이 선을 잡은 결과, 사무라가 흑이었다.
"글쎄요. 과연 어떨지....."
"어때, 부탁한 조사 쪽은?"
"네, 다 조사를 마쳤습니다. 만족하실지 어떨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아니, 아니, 천만에."
"우선 피아노는 말이죠."
"그래."
"치는 건 금지입니다. 뻐드렁니에 쭈글쭈글한 아줌마로 엄청나게 짜증나는 스타일인 아파트 관리인이 신경질적으로 답하더군요. 벽이 얇아서 이웃에 폐를 끼치니까 악기류는 절대 사절! 이라고요."
"개,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금지지?"
"아, 그렇습니다. 잘 아시네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드네."
"그리고 다음에는......"
사무라는 주머니의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맞아, 맞아. 양복장 서랍에 자석에 달라붙는 게 몇 개 들어 있는지......"
"맞네 "
"스님의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조사해 왔습니다. 손톱깎이, 가위, 양복장 열쇠, 부서진 시계, 클립, 회사 배지, 금속 빗, 안전핀, 샤프펜슬의 이상 아홉 개가 자석에 붙었습니다. 샤프펜슬은 플라스틱이지만 연결 부분이 쇠로 되어 있어서 붙더라고요. 대충 이 정도입니다."
"수고 많았어."
"그다음에 죽은 고이즈미 노부히코가 TV를 보면서 자주 졸았는지 여부였죠? 이건 부인에게 물어봤어요."
"아, 4년마다 눈물을 쏟았다는 올림픽 부인?"
"맞아요. TV를 보면서 선잠 자는 건 항상 자기였으며, 남편은 졸지 않는 쪽이었다고 대답하더군요. 하지만 곧바로 이런 질문이 수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가운 눈총과 함께 쏘아붙여서 혼났습니다."
"그건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조사한 건……."
"이봐, 자네 차례야."
"아, 고맙습니다."
사무라는 스님만큼 편리한 이중구조식 두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바둑 쪽에는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
"다음은 베란다에 러닝머신과 화분이 있는지였죠?"
"그래. 맞아."
"스님에게 그걸 들었을 때, 나도, 어라?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조사해 봤습니다. 그런데....."
"베란다가 없었어?"
"맞아요. 아예 베란다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베란다에 러닝머신이든 화분이든 놓을 방법도 없죠. 창밖에 있을 수 있는 건 공기와 유령뿐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정말이에요? 바둑처럼 억지 부리시기 없습니다."
"바둑 쪽도 억지 따위는 부리지 않는다고. 어차피 요즘은 이기기만 하니까 억지 부릴 기회조차 없잖은가?"
"어, 그랬나요?"
"이론보다 증거. 이 수는 어떤가?"
스님이 둔 수에, 사무라 오른쪽 세력이 갑자기 약해졌다. 묘수였다.
"이건......"
"괜찮았지?"
"음....."
절묘한 수를 보니, 스님의 뇌세포는 최고조로 향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조사 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예상대로 지금까지 306호실에 살았던 여자 중에 누가 가장 산수를 잘하는지였습니다."
"산수가 아니야. 수학이라고."
"아, 맞네요. 하여튼 이웃 등을 조사한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3년 정도 전에 이사 간 미야오 씨라는 젊은 부인이 가장 잘하는 거로 결론났습니다. 이분은 약사 면허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이과 전공이라면, 당연히 제일 수학을 잘했을 거라는 이유죠."
"그러면 그 젊은 부인에게, 개미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는가?"
"네, 찾아가 물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권투 선수 말인가요? 라고 되묻더군요."
"무하마드 알리와 착각했군."
* 일본어로 개미는 '아리'
"네, 그래서 권투 선수가 아니라, 곤충인 개미 이야기라고 했더니,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라고요."
"그 여자는 매력적인 외모에, 두 살쯤 된 아기가 하나......"
"세상에, 맞아요! 스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팟! 스님이 돌을 한층 더 강하게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그 여자가 범인이니까"
"정말요?"
사무라는 아연실색하며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동기는? 어떻게 살해한 거죠?"
"본좌는 억지를 잘 부려잖나.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는 없지."
"억지는 농담이었습니다만... 빨리 알려주세요."
"자네 말을 하나씩 하나씩 듣다 보면, 이쯤에 범인이 숨어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
"자 보라고. 죽은 남자에게는 아무런 외상이 없고, 구두에는 아파트 부근의 흙이 묻어 있다고 했지?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고, 죽은 누군가 씨는 덩치가 상당히 큰 데다가 306호실은 후미진 곳에 있고 창문은 높아. 이런 걸 종합해보면, 누군가 씨는 자신의 두 발로 걸어서 306호실에 왔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해."
"그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사교댄스를 좋아하고, 패션을 좋아하는 멋쟁이고, 여자 문제로 4년에 한 번꼴로 아내를 울리는 남자가 한밤중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아파트를 방문했다는 것은……. 소모산 (作生)!"
스님이 웃으며 선문답의 표어를 외쳤다.
"즉, 여자겠죠."
사무라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306호실의 실제 거주자들은 한창 신혼여행 중. 그렇다면, 이 방에 들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유력한 건 관리인이겠지. 하지만 관리인은 고이즈미 누군가 씨가 도저히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짜증나는 쭈글쭈글 아줌마였어. 맞지?"
"네."
"그렇다면 그다음 후보는 306호실의 이전 거주자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이사할 때 방 열쇠는 관리인에게 돌려주지만, 그 이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여벌 열쇠를 만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그건 그렇죠."
"그린 아파트는 피아노를 쳐도 안 되고,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아파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사를 할 수밖에 없어."
"그렇군요."
"그렇다면, 306호실에는 지금까지 몇 명의 젊은 부인이 살았으며, 그 부인들이 아이를 낳은 뒤 어디론가 이사를 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해. 또 요즘 젊은 부인들이 남편 몰래 남자 친구를 만들고 있을 확률은 약 8%라고 하지."
"정말입니까?"
"아하하하. 주간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 매력적인 부인이라면 좀 더 비율이 높을지도 몰라."
"음, 확실히 그 젊은 부인, 미야오 유키에 씨라고 합니다만,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경찰이 이상한 관심 가지지 말라고."
"아이고, 이거 참, 잘 알고 있다고요."
"그 젊은 부인은 예전에 어딘가에서 고이즈미 누군가 씨를 알게 되어 불장난을 시작했던게 아닐까? 사교댄스를 추는 댄스홀에서 만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고이즈미 누군가는 별로 좋은 남자는 아니었어. 대단한 악당은 아니지만, 남의 약점을 잡은 뒤 협박하여 용돈을 갈취하는 정도의 범죄는 저질렀을 거야. 목욕탕 선반에 놓인 영국제 양복, 신발장의 신발은 경기가 별로인 회사에 다니는 월급이 20수만 엔인 월급쟁이에게는 사치스러우니까. 미야오 유키에 씨도 이 남자에게 협박을 당했겠지."
"그게 살인의 동기였을까요?"
"아마도. 마지막까지 몰린 나머지 살의를 품은 거야. 3년 전에 살고 있던 아파트의 열쇠를 이용할 생각을 한 뒤, 간단한 조사를 통해 지금 사는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떠나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운다는 걸 알아내고는 범행에 이용한걸세. 결혼과 신혼여행은 널리 알리는 경사이니만큼, 이웃에게 물으면 곧바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그 틈을 타서 남자를 유인해서 죽인 거야."
"그랬군요."
"남의 아파트를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속이고는, 남편이 출장을 갔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만나고 싶다는 정도만 말해도 플레이보이 고이즈미 누군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 조심을 거듭하여 몰래 숨어들어왔을 테지."
"그리고 그곳에서 목욕을 시키다가......"
"그건 아니야. 가스 목욕 중에 사고로 죽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계획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어려워. 일단 가스가 새는 상태에서 욕조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죽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나 자네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에게는 조는 버릇이 없었어. 욕조에서 자는 사람은 상당히 선잠을 좋아하는 사람일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하잖은가. 설령 졸았다 해도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약물 흔적도 없고."
"과연, 일리 있네요."
"게다가 범인으로서는, 혹시라도 이웃들이 가스 냄새를 눈치채면 큰일이란 말이지. 그런 위험한 짓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럼 어떻게...?"
사무라는 남은 돌을 바둑판 위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어라? 돌을 던지는 건가?"
"네, 도저히 승부가 안 되네요."
"음, 그렇겠지, 그렇겠지. 그러면 사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고이즈미 누군가가 살해된 건 목욕탕이 아니었어.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는 더 좁고 밀폐된 곳이 필요했어. 바로 침실 옷장이지. 옷장 열쇠는 서랍 속에 있었지? 자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말이야."
"자석에 달라붙는 게 뭔지는 그래서 조사를 시키신 거군요. 그런데 남자는 옷장 안에 왜 들어간 거죠?"
"여자가 시켜서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려는 찰나! 여자가 남편이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겠지. 방은 3층이고, 창문 밑은 절벽이야. 도저히 도망칠 방법이 없어. 숨을만한 베란다도 없는 데다가 알몸이고. 그 상황에서 고이즈미 누군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여자가 빨리 옷장으로 들어가요! 라고 말하면 들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지. 그 뒤 옷장 문을 밖에서 잠가야만 열 수 없다는 설명을 들으면,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 버려도 수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테고."
"스님, 보고 오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하하, 그럴 리가. 하지만 이 추리는 대충 맞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건 미야오 유키에 씨에게 자네가 개미 좋아하느냐고 물어봤기 때문이지. 그때 그녀가 새파랗게 질렸다고 했잖은가.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추리가 맞다는걸 롹신했다네."
사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개미를 좋아하면 어떻다는 것일까. 스님은 즐거운 듯이 웃고 있다.
"도시가스 냄새는 강하니까. 수면제라도 먹이지 않는 한 그렇게 쉽게 큰 남자를 죽일 수는 없어. 옷장 안에 숨어 있어도 가스 냄새가 나면 남자는 난리가 날 테고. 그래서 범인은 냄새가 없는, 순수한 일산화탄소를 맡게 할 생각을 한 거야. 그 뒤 사고사로 수습되기를 꿈꾸며 시체를 욕조에 집어넣은걸세. 잘만 됐더라면, 뭔가 이상한 사고사로 대충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
"그런 걸 생각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실행까지 하려면 확실히 화학에 대해 지식이 필요해. 그래서 수학을 잘하는 여자라는 힌트로 찾아보라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약사님이 등장하시더구먼."
"예"
"실험실에서 일산화탄소를 만들려면, 황산과 개미산을 혼합하면 된다네. 옷장 뒤에 구멍을 뚫어 튜브라도 꽂아두면, 쉽게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형사에게 갑자기 개미를 좋아하느냐는 말을 듣고 그 부인이 새파래진 것은 그 탓이야. 그녀는 개미라는 말을 들으면, 개미산이라는 특별한 약품을 떠올릴 수밖에 없거든. 범행이 인상 깊게 남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여자가 범인이라는 걸 확신한거야. 뭐, 일부 세세한 점은 내 추리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욕실에서 가스 중독을 시키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뒤, 내 추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네...."
스님은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건 신식 개미지옥이네요."
"그거 딱 어울리는 말이구먼. 이제부터 그린 아파트로 가서 옷장 뒤에 구멍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그다음에는 그 여자, 미야오 유키에 씨를 다시 한 번 방문한 뒤, 옷장 뒤에 개미구멍이 있었다고 말해 주라고. 매력적인 여성분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몹시 기대되는구먼."
놀랍게도, 스님의 추리는 이번에도 적중했다.
2006/11/23
A 사이즈 살인사건 - 아토다 다카시 : 별점 3점
북오프에서 구입한 책. 저자 아토다 다카시는 "기묘한 맛" 류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죠. 약간 로얄드 달 분위기도 나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추리물로도 상당히 유명하나 국내에 소개된 것은 없어서 아쉽던 차였는데 우연찮게 북오프에서 발견하여 서슴없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정통 추리 단편집이라는 표지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래도 일어 원서다 보니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잡은지 1주일만에 겨우 대충이나마 다 읽게 되어 포스팅합니다.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탐정역의 캐릭터로 탐정이 "묘법사"라는 절의 주지승입니다. 즉, 스님 탐정이죠.(만화 "잇큐"도 있지만 워낙 허접한 만화라...) 작중 스님의 말을 빌리자면 "시체 때문에 먹고 사는 직업"이라는 것은 형사- 스님이 똑같다라는 점이 와닿기도 하네요. 어쩐지 "브라운 신부"하고 일맥상통하는 부분도 있고요.
하지만 단지 직업이 독특한 것에 그치지않고 작품이 진행되어 나가면서 하나씩 성격과 매력이 드러나는데 세속의 여러 풍습과 문화에 굉장히 밝고 술과 고기도 즐기는 괴승으로 주인공 형사와 바둑을 두며 선문답 형식으로 추리를 전개해 나간다는 설정이 이색적이고 새로왔습니다. 장황하지 않으면서도 작가 특유의 감수성이 잘 살아있는, 유머러스하게 묘사된 성격 역시 딱 제 스타일이더군요. 한마디로 이런 독특한 탐정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이 스님이 바둑친구이자 형사인 사사무라가 미해결 사건을 들고오면 사건 이야기를 듣고 추리하며 바둑을 둔다는, 전형적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 추리물로 추리가 잘 풀리면 바둑이 강해진다는 디테일도 좋고 연재 당시의 계절과 세월의 흐름까지 잘 표현되어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든 부분이고요. 또한 트릭들 역시 본격에 가까운 정통적인 퍼즐 미스터리라 딱 제 취향이었습니다. 트릭에 큰 무리가 없으며 인간 심리를 이용하여 범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재구성도 꽤나 합리적이었고요.
물론 스님이 던지는 질문과 그것을 통해 추리를 이어나가는 과정의 설득력이 약간 떨어진다는 점은 약간 아쉽습니다. 그리고 책 소개에도 나와 있는 선문답으로 추리를 진행한다는 설정은 재미있기는 하지만 억지스럽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용의자 중 이과대학 출신의 인물은?" 이라는 질문을 "용의자 중 가장 수학을 잘 하는 사람은?" 이라고 물어보는 식이니까요. 너무 추리물에 어울리게 빙빙 꼬아 놓았다라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그래도 대체로 작품 모두가 단편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추리적, 이야기적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결론내리자면 아토다 다카시라는 작가의 재발견이랄까요? 기존에 많이 접했던 섬뜩한 느낌의, 또는 기발한 상상력의 중단편보다 저는 이 추리 단편들이 훨씬 마1음에 들었습니다. 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제 허접스러운 일본어 실력으로도 독해가 가능할 정도로 짤막짤막한 대사들로 구성된, 짤막하게 압축된 작품들이라는 것도 좋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저의 베스트는 트릭이 절묘한 표제작 "A 사이즈 살인사건", 그리고 기묘한 상황과 설득력 있는 트릭이 잘 부합하는 "2LDK 개미지옥" 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한번 번역해보고 싶네요.
그런데 문예춘추사 문고본인데 한자에 독음이 달려 있지 않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지명을 잘 알아보기 힘들더군요. 아쉽...
PS : 무려 24년전에 발간된 책이긴 하지만 단돈 2천원으로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이 사실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북오프 만세!)
1. A 사이즈 살인사건 :
호텔 뒷편 저수조에서 젊은 여자의 사체가 발견된다. 인적이 뜸한 곳이며 동기 등을 본다면 여자가 속해 있던 학생 오케스트라 멤버에 의한 살인으로 보이나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는 철벽과도 같은 상태.
표제작으로 사사무라가 묘법사에 바둑을 빙자한 사건 의뢰를 하는 첫 작품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관련된 설명이 조금 길게 실려 있긴 하나 무리없이 깔끔하게 흘러갑니다. 무엇보다도 트릭이 상당한 수준이며 정통적인 방법으로 전개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단, 제목이 내용에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트릭과 별 상관없는 것이라 약간 맥이 빠지긴 합니다. 단편집을 출간하면서 제목을 바꾼 모양인데 원제였던 "A 컵 살인사건" 쪽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게 그거지만. 어쨌건 좋은 작품. 별점은 3.5점입니다.
2. 2LDK 개미지옥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에 돌아오는데 모르는 남자가 알몸으로 욕조 안에서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남자는 신혼부부와 일면식도 없는 인물. 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살해 되었는가?
모르는 남자가 집 욕조 안에서 죽어 있다... 기발한 발상으로 시작하나 사건 자체는 합리적으로 풀어나간다는 점이 매력적인 작품. 트릭도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이 남자를 살해하는 과정의 재구성이 정말 딱딱 들어맞거든요. 딱 한가지 문제점이라면 경찰 수사로도 충분한 내용이었다는 것인데 사사무라가 너무 스님에 의존하는 것 같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3. 구두와 미약과 3인의 여자
한 남자가 독살된 시체로 발견된다. 그는 결혼했지만 3명의 여성과 관계를 맺고 있는 플레이보이. 3명의 여성을 조사하지만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동기도 명확하지 않다. 스님은 그 남자의 넥타이와 구두에 주목하는데...
독살 이야기인데 깔끔하게 전개되고 스님의 선문답도 이 작품에서는 그런대로 설득력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완성도도 높지만 무엇보다도 진상이 정말 의표를 찌르는 것이라 신선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좀 시시한 편이라 약간 소품같은 느낌이 들긴 하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4. 이중 인격의 죽음
한 기업 기숙사의 가장파티에 손님으로 참석했던 남자가 창고에서 목을 매단 시체로 발견된다. 자살로 보이지만 사사무라 형사는 자살의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타살이 아닐까 생각하나 유력한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는 철벽. 그는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묘법사로 찾아온다.
자살을 가장한 타살은 살인의 가장 편한 방법이지만 추리소설에서 이러한 방법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었죠. 이 작품은 그러한 맹점을 잘 파고들은 괜찮은 단편입니다. "가장파티"라는 특정 상황을 이용한 효과적인 트릭으로 보이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5. 맨발로 천국에
한 남자가 맨션에서 투신 자살한다. 그러나 사사무라는 죽은 남자가 구두를 정돈하지 않고 엉망으로 해 놓은 점이 계속 신경이 쓰이는데...
투신 자살할 때 왜 신발을 벗어서 가지런히 해 놓는가? 라는 것을 주제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이 명제 자체가 흥미로와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단 트릭이 약간 비현실적이고 스님의 선문답 물음의 하나인 "비와호" 관련 질문은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아 아쉽더군요. 너무 문답을 어렵게 만들려는 속셈이 빤히 들여다 보인달까요? 그래도 작품은 하나의 단편으로 충분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6. 고물취향의 사체
골동품 수집이 취미인 한량 대학원생이 자기 방에서 화약으로 머리 반쪽이 날아간 시체로 발견된다. 그러나 폭발을 일으킨 흉기는 없는 상태. 용의자도 애매한 상황에서 사사무라는 다시 묘법사로 찾아가 주지스님에게 사건을 문의하게 된다.
이 단편은 일종의 장치를 이용한 트릭이 등장하는데 장치의 조잡함은 둘째치고서라도 우연(?)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흉기를 숨기는 방법에 대한 디테일은 좋았지만 사소한 부분으로 추리적으로 다른 작품들에 비한다면 많이 처져 보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7. 벛꽃잎의 미로
황실과 친척관계인 명문집안에 협박장이 날아온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지만 긴장한 경찰은 사사무라를 비롯한 형사들을 수사에 투입한다. 그러나 협박 자체 부터가 애매할 뿐더러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자 사사무라는 주지스님에게 사건을 털어놓고 추리를 부탁한다.
소품입니다. 몇통의 협박장만 가지고 이야기가 이루어지거든요. 그렇지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소재이기에 공감이 많이 가더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8. 하프-문 살인사건
초등학교 교사가 살해당한다. 그녀는 너무나 형편없는 실력으로 학부모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독신 여성. 사사무라는 결정적 단서가 포착되지 않자 다시 묘법사로 찾아간다.
이 작품은 잘 알려진 트릭이 쓰이고 있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새로운 느낌을 별로 전해주진 않고 오히려 주지스님이 본사로 영전하게 되어 작품이 마무리 되는 시리즈의 최종장적인 설명이 더 중심인 듯 싶네요. 그래도 제목과 내용이 잘 어울리고 전개와 추리의 과정이 깔끔하며 합리적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7/06/04
요리책 쓰는 선비, 술 빚는 사대부 - 김봉규 : 별점 2.5점
요리책 쓰는 선비, 술 빚는 사대부 - ![]() 김봉규 지음/담앤북스 |
우리나라 유명 종가와 그 종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독특한 음식, 술을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제목처럼 내용은 크게 두 항목, 먹치레와 술치레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고요. 두 항목 구성은 약간 다른데 소개되는 내용은 항목별로 같습니다.
먹치레의 1장 '선비, 셰프가 되다'를 예로 들자면, 안동 계암종가와 삼색어아탕을 소개하면서 "수운잡방"이 안동 광산 김씨 가문의 탁청정 김유와 그 손자 계암 김령이 저술한 것이며, 이 책이 안동 계암종가에 물려 내려오면서 관련된 음식들이 전해졌다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수운잡방"에 나오는 30여가지 음식과 술을 재현하는데 삼색어아탕이 그 중 대표격으로 간략한 레시피를 알려줍니다. 은어, 숭어를 이용해 완자를 만든 후, 은어 삶은 물에 집간장으로 간을 한 탕을 만들어 완자, 녹두묵, 대하에 탕을 부어 완성한다고 하네요. 그리고 '김유'라는 인물에 대해 2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을 추가하며 마무리합니다. 먹치레 편의 모든 항목 구성이 이와 같습니다.
종가와 종부들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를 알게 되니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당연하지만 서애 류성룡이 '중개'(일종의 약과)를 좋아했다, 고산 윤선도는 의술에 밝아서 직접 장수를 위한 술을 담궈 먹었다는 것 처럼요.
처음 안 인물이지만 독특한 인물도 많습니다. 일제 강점기 바둑고수 노근영이 그러한데, 그의 삶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천재로 유명했다는 노사 기정진의 청나라 사신 수수께끼 풀이도 아주 인상적이었고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류이주를 알게 된 것도 수확입니다. 그의 자택인 '운조루'에는 항상 쌀 두가마니가 들어가는 뒤주가 있어서 배고픈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퍼 갈 수 있었다고 하네요. 심지어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굴뚝까지 낮았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종가 고택에 대한 설명들도 재미난게 많습니다. 전주 인재종가의 판소리 공연을 위해 지었다는 칠량집 학인당, 앞서 말씀드린 노근영의 자택이었던 노참판댁 고가는 한번 찾아가 보고 싶어집니다. 노참판댁 고가는 특별한 건 없지만, 노근영이 바둑 내기에 건 탓에 주인이 27번이나 바뀌었다는 이력이 호기심을 당기거든요.
또 잘 모르는 종가라도 음식만큼은 흥미로운게 많습니다. 지촌종가의 여름철 고급 별미라는 '건진국수'는 정말 맛있을 것 같아 꼭 한번 먹고 싶어집요. 국수를 삶아 바로 건져 사용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예상외로 뽑아낸 국수가 아니라 칼국수라는게 의외였습니다.
성주 사우당종가의 '은어 국수'는 은어를 잡아 내장을 제거하고 손질한 뒤 푹 고아 육수를 만드는데, 지금은 물이 오염된 탓에 은어를 거의 잡을 수 없어서 요리가 끊길 위기라는 소개에서 "라면 요리왕"에 나오는 세리자와의 라면이 떠올랐습니다. 그 라면은 말린 은어로 육수를 내는 것이었는데, 말린 은어를 이용하여 육수를 내어 재현하면 맛이 많이 달라질까요?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술치레 역시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술치레는 종가를 별도로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술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차이점은 있는데, 항목별 구성은 마찬가지로 전부 동일합니다. 어떤 집안에서 어떻게 전승되어 왔으며, 지금은 누가 비법을 이어서 빚고 있다는 유래와 어떻게 빚는지에 대한 방법의 상세한 소개, 뒤이어 술의 특징과 잘 어울리는 안주, 그 집안 유명인에 대한 짤막한 소갯글로 마무립니다.
제가 술을 좋아해서인지 먹치레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렇게나 모르는, 안 먹어본 술이 많다는 것에도 놀랐고요. 모두 18종의 독특한 전통주가 소개되는데,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것은 '교동법주'와 '안동소주' 뿐이니 말 다했지요. 그나마 교동법주와 안동소주도 제가 먹어본 것과는 뭔가 다른, 더 깊이있고 전통있는 술이 소개됩니다.
몇가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술들 소개를 꼽자면, 교동법주는 오랫동안 만석꾼이었던 경주 최부잣집 가양주입니다.
술 이름에 '춘'자가 붙는 춘주는 귀한 술에 붙는 별칭으로 당나라 때 생겨났고요.
이화주가 점성이 높아 숟가락으로 떠 먹기도 했고, 이화주의 梨花가 배꽃이 재료라는 뜻이 아니라 '배꽃이 필 무렵 빚는 술'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육당 최남선이 꼽은 조선 3대 명주는 '관서감홍로', 전라도 '이강고', '죽력고'라는데 세가지 맛 보고 싶습니다. 감홍로는 특히 이런저런 곳에서 언급되는데, "별주부전"에서는 자라가 토끼에게 용궁에 가면 감홍로가 있다고 꾀어 냈지요. "춘향전"에서 춘향이 이도령과 이별하는 장면에서의 이별주도 감홍로고요. 아~ 맛이 정말 궁금합니다.
안동소주는 최근 '명인 안동소주'에서 세계적 위스키가 되고자 2015년부터 오크통 숙성을 하고 있다는데 이 역시 꼭 한 병 소장하고 싶습니다. "맛의 달인"에서 일본 술에는 스피리츠가 없다고 한탄하던 평론가가 오키나와 고주를 마시고 감탄한다는 에피소드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이렇듯 재미있는 내용은 많지만, 음식과 술에 대한 소개에 그친다는 단점은 큽니다. 이런저런 정보들이 많기는 하지만 깊이도 많이 부족하고요. 종갓집 한 곳에서 음식 하나만 소개하는 구성도 아쉽습니다. 대표 음식이 많은 곳도 있을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책보다는 영상 다큐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지금 사업체로 발전한 종가와 종가 음식의 소개는 광고로 보이는게 좀 많았습니다. 물론 어떻게 하면 쉽게 먹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려는 취지였다고 생각은 됩니다. 의련 백산종가의 '설뫼 망개떡'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백산 안희제를 위함이라는 명분까지 있고요. 그러나 '오희숙 전통 부각'처럼 그냥 광고에 그치는건 빼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복원 전통주들 역시 광고로 보아도 무방할 듯 하고요. 내용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거라면 협찬 형식으로 좀 더 저렴하게 내 놓는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쁘지는 않으며 이쪽 분야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입문서로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가격이 비싼 편이고 편집에서도 페이지 낭비가 심해서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점은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종갓집별로 분리하여 책 한권씩을 따로 내는게 좋은 선택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살림 지식총서' 정도 두께로 말이죠. "한국 종가의 먹치레와 술치레' 시리즈! 멋지지 않습니까? 가격만 괜찮다면 저는 구입 용의 있습니다.
2004/06/16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 - 강석범 : 별점 2.5점
윤혜진, 협박용으로 내민 사표가 그 자리에 수리된 비운의 치과의사! 정의로운 완벽 주의자, 치과의사 혜진. 평의사의 인권을 위해 시위하며 내민 사표가 즉석에서 수리된 바람에 직장을 잃은 여자. 자신의 철두철미한 의료행위가 결벽증에 또라이라고 폄하되어도 굴하지 않는 여자. 천만 운전자를 대변하기도 하고, 수백만 성범죄 피해자들을 대변하기도 하는 그녀, 결국 취업을 거부당하고 작은 도시에 정착, 개업을 한다.
이후 홍반장과 윤혜진의 사랑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제목 그대로 동네 반장인 “홍두식”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내용의 한국산 로맨틱 코미디 영화. 기발한 예고편 (H-파일) 덕에 나름대로 기대 하던 차에 DVD로 발매되어 빌려보게 되었네요.
일단 영화의 핵심 매력 포인트는 홍반장 캐릭터입니다. 제가 그동안 보아왔던 그 어떤 로맨틱 코미디의 남자 주인공 설정보다 재미있더군요! 약간 억지스럽기도 하지만 그 어떤 일이건 일당 5만원에 해결한다는 설정은 정말이지 "왔다!'였어요. 부동산 중개업, 라이브 카페 가수, 전자기기 수리, 비디오가게 알바, 택배, 거기에 뛰어난 무술실력! 등등등…. 심지어 재벌가의 아가씨인 윤혜진의 남자친구 역할도 뛰어난 골프, 바둑 실력으로 해결하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맥가이버요, 어떻게 보면 구영탄 같은 캐릭터인데 정말 효과적으로 잘 표현해서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멋진, 재미있는 설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너무 뻔하고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에 불과해요. 홍반장의 캐릭터만 조금 더 살려주고, 로맨틱한 요소보다는 코믹한 요소를 조금 더 부각시켰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중반 이후부터는 억지스러운 윤혜진과 홍반장의 사랑 싸움 (윤혜진이 일방적이긴 하지만) 만 부각 시켜서 영화의 맛이 떨어지거든요. 마지막 홍반장이 윤혜진을 위해 준비한 와인 장면은 충분히 멋진만큼, 코믹한 요소를 강조하면서 전개하다가 이 장면 하나만 마지막에 살짝쿵 나와 주는게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리고 김주혁의 진지한 유머가 너무 자연스러운 홍반장은 충분히 실감나는데 반해, 사고뭉치 치과의사 역의 엄정화는 오버스러운 느낌이 너무 강해서 별로라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덧붙이자면, 조연으로 이번에 대종상 여우 조연상까지 받았다는 김가연은 왜 상을 탔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연기력이 필요했던 배역도 아니고 비중도 별로 없는 역이었는데…..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그냥저냥한 로맨틱 코미디지만 홍반장은 김주혁이라는 배우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보기드문 멋진 캐릭터였습니다. TV 시트콤에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김주혁의 진지한 코미디를 TV에서 볼 수 있게 된다면 좋겠네요.
2021/09/12
간송미술 36 : 회화 - 백인산 : 별점 2.5점
![]() | 간송미술 36 : 회화 - 백인산 지음/컬처그라퍼 |
간송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우리나라 국보급 서화 중 36점을 엄선하여 소개해 주는 책입니다. 저자 개인의 의견이고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저자가 간송 미술관장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공신력은 확보하고 있다고 봐야 겠지요.
선정한 서화에 대한 상세한 도판과 서화에 대한 소개가 어우러지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그 서화를 왜 선정했는지와 그 서화를 창작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실려 있습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와 비슷한 구성인데, 이런 책이 다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간송이 작품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알려주는 몇몇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다른 책들과 차별화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문화와 예술,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이야기하는데 적합한 작품을 선정했다는 기준에 따라, 단순히 창작자의 이름값이나 서화 자체의 유명세에 기대고 있지는 않다는 점도 차이점이고요.
이런 선정 기준답게, 당시의 풍속화라던가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그림들이 꽤 많이 선정되어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는 특히요. 이름도 잘 몰랐지만 당대에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삼재'라고 불리었다는 관아재 조영석의 "현이도" 가 대표적입니다. 장기를 두는 선비들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낸 좋은 작품이에요. '현이도'는 공자가 마음 쓸 곳이 없으면 차라리 바둑이나 장기라도 두어라라는 말에서 유래한 제목이라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이 말을 선비들이 장기 두는 그림의 제목으로 삼다니, 완전 자기 멋대로의 해석인 셈입니다.
그 외에도 거하게 취한 선비를 그린 "대쾌도", 윤용의 "협롱채춘", 김홍도의 "마상청앵", 김득신의 "야묘도추", 신윤복의 "미인도"와 "이부탐춘"이 선정 기준에 부합하는 풍속화들입니다. 36점 중 7점이니 무려 20%의 비중이네요. 물론 풍속화는 일부일 뿐이며, 신사임당에서 시작해서, 진경 산수의 거장 겸재 정선, 진경 산수에 중국 남종화풍을 합쳐 조선만종화풍을 만들어낸 심사정, 풍속화의 거장 김홍도와 신윤복, 이념미를 추구하는 청대 문인화를 조선으로 끌어들였던 김정희의 작품들이 엄선되어 소개되어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은 물론, 조선 시대 화풍의 변화를 잘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여러모로 완성도보다는 시대를 대표하느냐가 더 중요한 선정 기준이었던걸로 보입니다. 윤두서의 "심산지록"이 그러해요. 작품의 평가보다는 공재 윤두서의 현실과 시기적으로 조선 중기, 후기 화풍이 교차하던 당시 상황을 잘 반영했고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소개되고 있으니까요.
허나 문제는, 당대 화풍을 대표한다는 등의 설명 외에 미학적으로 "왜 이 작품이 뛰어난지?"가 잘 설명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추사 김정희의 "고사소요"를 설명하면서, 고도의 기교로 그려진 그림이다, 화의와 묘법 모두 추사의 지향과 이상이 잘 구현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게 뭔지를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잘 못 그린, 집에 걸어 두라면, 별로 걸어두고 싶지 않은 그림이었거든요. 이렇게 설명할 거라면, 고도의 기교는 물론 추사의 화의와 묘법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알려주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이러저러해서 추사의 문인화를 대표한다고 자세히 알려주던가, 그것도 아니면 "세한도"처럼 명확하게 미학적 가치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해주는게 더 좋았을 겁니다.
또 이정과 심사정, 김홍도의 작품은 각 세 점 씩, 겸재 정선의 작품은 무려 다섯 점이나 소개되는 등 중복이 심하며, 도판도 완벽한 수준이지만, 실물 사이즈로 보아야 잘 알 수 있는 느낌을 받기는 부족하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류의 책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래서 대형 작품의 경우 실제 사이즈 크기 도판을 접어서 제공한다던가, 아예 부록으로 제공하는 책들도 있었는데,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었지요. 설령 그렇게 제공했다 치더라도 "촉산도권"같은 7미터가 넘어가는 대작 느낌을 제대로 알려주기는 턱없이 부족했을 겁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쉽게 대중이 접하기 힘든 간송 미술관 서화의 정점을 집에 비스무레하게나마 소장하여 꺼내볼 수 있는, 도록으로는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관련된 정보의 전달 측면에서는 다소 미흡해서 감점합니다.
2008/12/23
소년탐정 김전일 2부 7 - 아마기 세이마루 / 사토 후미야 : 별점 1점
| 소년탐정 김전일 2부 7 - 아마기 세이마루 지음, 사토 후미야 그림/서울문화사(만화) |
김전일 2부 최신권입니다. 부제목에 적힌대로 "혈류실 살인사건"과 "후도고교 축제 살인사건" 이라는 두개의 단편이 실려있습니다. "혈류실 살인사건"은 후도고교가 매년 실시해온 바둑부 합숙 대결에 부원 부족으로 억지로 참가한 김전일, 그리고 인솔교사 대리로 참가한 겐모치 경감 앞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후도고교 축제 살인사건"은 제목 그대로 축제기간 중 사진부 메이트 카페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고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는 너무나도 재미없고 단순한 이야기였습니다. 혈류실 살인사건의 경우 목을 벤다는 등의 작위적인 알리바이 트릭이야 그렇다쳐도 다이잉메시지를 남긴 방식이나 동기도 설명하기 어려운 등 문제점이 산적해 있지만 무엇보다도 "동기"가 뚜렷한 인물이 한명 있다는 점에서 구태여 김전일이 나설 필요가 있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현역 경시청 경감과 명탐정의 손자가 함께 있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르다니... 이건 범죄 계획을 넘어서서 살인 그 자체에 집착하는 싸이코패스 수준아닌가요?
후도고교 축제 살인사건의 경우도 동기에 관련해서 경찰 조사만 병행되었더라면 어차피 밝혀졌을 범행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트릭인 "커피잔 따뜻하게 만들기" 가 지나칠 정도로, 정말 황당할 정도로 어이가 없는 트릭이어서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과학적으로 포장하긴 했는데 너무 변수가 많은 트릭으로 생각되거든요. 그나저나 이놈의 고등학교는 왜 아직도 폐교를 안하는거야?
어쨌건, 결론을 말하자면 아마기 세이마루의 능력도 여기까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젠 제발 그만 나와줬으면 하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네요.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건만.... 때문에 별점은 1점입니다. "김전일"의 제목을 달고 나와서 어처구니 없는 트릭으로 일관하는 추리만화에게는 절대로 좋은 점수를 주고싶지 않군요. 에잇 저주해 버릴테다.
2023/04/01
돌원숭이 - 제프리 디버 / 유소영 : 별점 1.5점
![]() | 돌원숭이(THE STONE MONKEY)(개정합본판) - ![]()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05/08
문신 살인사건 - 다카기 아키미쓰 / 김남 : 별점 3점
| 문신 살인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남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
전쟁 직후 패전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일본, 남방 필리핀에서 생환한 도쿄대 의학부 출신의 마쓰시타 겐조는 우연찮게 문신을 한 사람들로 조직된 "에도 조용회"라는 단체의 총회에서 등에 오로치마루의 문신을 새긴 기누에라는 여인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 문신사 호리야스의 딸로 그 문신은 도쿄대의 문신 수집가 하야카와 박사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첫 만남부터 겐조를 유혹하던 그녀는 생명이 위험하다는 수수께끼같은 말과 함께 각각 "지라이야"와 "쓰나데히메"의 문신을 새긴 오빠와 쌍동이 동생의 사진을 전해 주었다. 전갈을 받고 아침 일찍 그녀의 집을 방문한 겐조는 우연히 만난 하야카와 박사와 함께 집 안 밀실인 목욕탕 안에서 그녀의, 몸통이 사라진 시체를 발견했다.
겐조의 친형이자 경시청 수사과장인 에이이치로는 기누에 주변 인물에 대한 조사를 펼쳐 정부인 모가미 다케조를 지명 수배했지만 다케조마저 빈집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겐조가 사건을 알려준 후 독자적으로 조사하여 진범을 파악한 기누에의 친오빠 노무라 쓰네타로까지 살해당하고 말았다.
사건이 미궁에 빠지자 노무라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던 겐조는 "천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선배 가미즈키 요오스케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입니다. 도대체 언제쯤 번역되나 기다리고 있던 작품이죠.
간략한 줄거리만 본다면 일본 특유의 변격물 취향이 짙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변격물로서만이 아니라 정통 추리물과의 절묘한 결합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변격물 특유의 엽기적인 살해방식이나 기괴한 묘사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다른 변격물처럼 범죄의 엽기성에 주목하지 않고, 정통 추리물 특유의 트릭과 사건 전개 및 해결 방식을 잘 결합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된 것이지요. 범인이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머리가 좋은 인물이라는 설정, 세 건의 사건 중 제일 첫 번째 사건처럼 "밀실 안에서 몸통이 사라진 시체"라는 엽기적인 사건 내면에 왜 몸통이 없어져야만 했는지?에 대해 나름의 합당한 이유를 잘 조합한 점이 그러합니다. 이러한 특징을 놓고 본다면, 변격+전통 추리가 교묘하게 얽힌 현대 일본 추리 문학의 원조격인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전체적으로 트릭 자체의 완성도, 그리고 설득력은 약간 떨어지기는 합니다. 세 건의 살인 사건 중에 그나마 트릭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첫 번째 사건 뿐이고, 나머지 사건은 경찰의 조사가 보다 세밀했다면 밝혀낼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고요. 사건이 미궁에 빠지게 된 결정적 이유도 겐조의 결정적 실수 뿐 아니라 경찰의 수사 미숙이 한몫 단단히 한다는 점도 조금 아쉽습니다.
동기가 워낙에 명확해서 범인을 특정하기가 쉽다는 약점도 크며, 탐정인 가미즈카 요오스케가 독특한 천재성을 가진 안락의자형 탐정으로 설명되지만 묘사도 부족하고 극적인 맛이 떨어져 정통 추리소설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를 놓치는 기분이 듭니다. 가미즈카 요오스케의 등장이 소설 후반부에서나 이루어지는 탓도 크지만 여러모로 탐정보다는 화자에 가까운 겐조의 묘사가 상대적으로 더 세밀하고 재미있을 정도에요! 범인을 알아내기 위한 용의자들과의 도박, 바둑, 장기를 통한 심리 분석 역시 반 다인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독특함은 부족했고요. 최소한 작가의 다른 시리즈 캐릭터 사부로 검사 정도의 매력이라도 표현해 주었으면 추리팬으로서는 더욱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아쉬움을 더한다면 이른바 지라이야-오로치마루-쓰나데히메의 3자견제에 대한 내용은 지극히 일본적인 설정이라서 도판으로 설명을 도와주는 배려가 필요했습니다. "문신에서의 3자견제는 금기다!"라는 설정이 굉장히 중요하게 쓰이니까요. 개인적으로는 만화 "나루토"에서 한번 접해 보아서 이해가 좀 빠르긴 했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잘 모르는 내용이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동안 쭉 읽고 싶었던 작품을 완독한 후련함도 크고, 출간 당시에는 당시 일본 추리계의 어떤 매너리즘같은 것을 깨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걸작이었을 수 있겠지만, 지금 읽기에는 약간 낡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재미있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걸작으로 보기는 어렵네요.
그나저나 이제 "흑사관 살인사건"도 읽어 봐야 할텐데 당쵀 엄두가 나질 않는군요.
2025/06/06
노인의 전쟁 - 존 스칼지 / 이수현 : 별점 2점
“맹세코 그놈을 때려눕히려고 했다니까. 월드시리즈 우승도 한번 못하고 200년이 지났으니 컵스는 마이너리그로 강등 시켜야 한다지 뭔가."
75세를 맞은 존 페리는 사랑했던 아내 캐시와 사별한 뒤, 미련을 버리고 '젊은 육체'를 준다는 우주개척연맹(CDF)에 입대했다. CDF는 외계 생명체로부터 우주 식민지를 보호하는 군대로, 외계에서 구한 최신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젊고 강화된 육체를 갖게 된 존 페리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 방위군에 복무하게 되었고,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데...
SF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있을 유명작입니다. 미국 작가 존 스칼지의 데뷔작으로, 읽은지 제법 되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75세 이상의 노인들이 입대하면 최신의 젊고 강하며 잘생긴 육체로 바꾸어준다는 설정의 참신함입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늙어가고 있는 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설득력 역시 무척 강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최전선에서 외계인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제대가 가능한 10년 뒤의 생존율이 25%에 불과하고, 두 번 다시 지구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조건이 붙지만, 어차피 더 잃을 게 없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한 도박이니까요. 아마 저도 가족에 대한 미련만 없다면 입대했을거에요.
젊은 군인으로 거듭난 존 페리가 같이 입대한 전우들과 훈련을 받는 장면도 생생합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악덕 상사 루이즈의 입담이 돋보였는데, 특히 젊었을 때 광고 문구를 썼던 존 페리와 루이즈 상사 간의 추억담 티키타카가 백미였습니다. 왜 상사들은 이렇게 입담이 좋은걸까요? 사뭇 궁금합니다.
훈련 후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외계 종족과의 전투도 흥미롭습니다. 지구인보다 앞선 과학 문명을 지녔지만 독특한 종교관으로 인해 전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콘수 종족의 설정은 이렇게 소비되기에는 아까울 정도였어요. 3부 마지막 코랄 행성 전투에서, 어떻게 코랄인들이 도약 추진한 전함의 위치를 파악해 타격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와 대응안도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고요. 콘수인이 관련 기술을 전해 주었지만 협상을 통해 기기 한 대만 전달된 것이 확인되어, 이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 전개가 기승전결이 완벽하여 몰입도를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 또한 분명합니다. 우선, 젊어져서 훈련을 받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SF 밀리터리물에 불과해져 버리고 맙니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이 과정에서 노인이었던 전생의 경험과 기억이 뭔가 역할을 해 준다면 독특함을 이어갈 수 있었을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이는 존 페리가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비현실성을 높이는 데에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한 번 죽을 뻔했지만, 그 외에는 영웅이 되기까지 탄탄대로인데,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려면 지구에서의 전생이 관련되어야 했습니다. 다른 군인들도 모두 노인이었던건 마찬가지니, 정말 독특한 경험과 기억이 있었다는 설정이었다면 좋았겠지요. 예를 들어 프로 바둑 기사라서 전략적으로 대국을 볼 줄 알았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전개도 후반부로 가면 처집니다. 여러 행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단편 에피소드처럼 나열되는 탓입니다. 게다가 사별했던 아내 캐시가 ‘제인’이라는 클론으로 되살아났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지구의 그 누구라도 클론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굳이 노인들을 징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시체를 수거해 육체를 복제하면 될 일입니다. 같은 이유로 초반부에 젊어지는 시술을 받기 직전 지병으로 사망한 존 페리의 룸메이트 디크는 왜 되살려 클론으로 만들지 않은걸까요? 그냥 존 페리의 러브라인과 해피엔딩을 위한 사족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은 흥미롭고 몰입도도 높았지만, 이후의 전개가 전형적이고 개연성에서도 아쉬움이 커서 감점합니다. 후속권이 있던데 더 읽어보지는 않을 듯 합니다.
2013/11/26
저물어 가는 여름 - 아카이 미히로 / 박진세 : 별점 2.5점
| 저물어 가는 여름 - 아카이 미히로 지음, 박진세 옮김/피니스아프리카에 |
아카이 미히로의 유괴 미스터리 소설. 1955년생인 아카이 미히로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 작품의 주요 배경 중 하나인 닛폰방송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마흔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그때의 경험을 살려 쓴 본 작품으로 시라누이 교스케의 "매치메이크"와 공동으로 49회 에도가와 란포상(2003)을 수상했다.
20년 전 일어났던 유괴 사건 범인의 딸이 20년 후 유명 신문사 기자로 합격이 내정된다. 이 사실을 폭로한 경쟁사 주간지의 기사를 계기로 신문사는 20년 전 유괴 사건의 재조사를 개시한다. 몇 년 전 사고 때문에 신문사의 한직에서 시간을 보내던 전직 기자 가지가 회사의 명령으로 범인의 주변, 피해자, 당시의 담당 형사와 병원 관계자를 거듭 취재한 끝에 봉인되어 있던 진실을 밝혀낸다. '알라딘 책소개 인용'
제49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작품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에서 알라딘의 피니스 아프리카에 편집장 인터뷰를 접한 뒤 호기심이 생겨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좌천당한 기자 가지 히데카즈가 히로코의 입사를 위해 20년 전 유괴사건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뒤쫓아 숨겨진 진상을 파헤친다는 내용인데, 읽다보니 바로 직전에 읽었던 "킹의 몸값", 그리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천국과 지옥》이 중요하게 언급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참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유괴라는 범죄가 얼마나 부모와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지 한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도 한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데즈카 부부가 20년 동안 인형을 아이 대신하여 키워온 모습은 정말 짠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확실히 여성 작가가 썼다는 느낌이듭니다. 다른 유괴 관련 작품들은 범죄자나 피해자(부모)를 대상으로 범죄와 관련된 심리묘사가 주를 이루는 반면, 이 작품은 애틋한 묘사가 디테일하게 펼쳐진다는 점에서요. 확실한 차이점이지요.
허나 감정에만 호소하는 내용은 아니고 실제 유괴사건에 대한 박진감 있는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킹의 몸값"의 주제인 '누구를 유괴했는지 보다,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는지가 중요하다'가 그럴싸하게 변주되어 사용되고 있기도 하고요. 또한 유괴 사건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몸값 전달 방식이 기발하게 펼쳐지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5천만 엔 중 천만 엔을 만 엔짜리 지폐로 전달받은 뒤, 사람 많은 거리에 뿌리고 혼잡을 이용하여 나머지 돈을 가지고 도망친다는건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이디어이고 운에 의지한 측면이 강하지만 실제로 성공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반전 역시 충격적이라 마지막까지 읽는 사람을 몰입시키는 맛이 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가지가 사건 당시 취재 기자 중 한 명이었던 덕분에 사건을 지휘했던 이노우에의 비망록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다는 건 어이가 없었어요. 20년 뒤 일개 기자가 진상을 밝혀낼 정도라면, 당시 경찰이 무능했다는 이야기밖에는 안되니까요.
그리고 당시 제약회사 영업사원이었던 츠쿠모의 지인을 만나 주식에 대한 정보를 듣고 호리에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진상을 밝혀내게 되었다는데, 가지가 편집 자료실을 이용하여 사건 관계자 이름을 먼저 검색해보았다면 발품을 파는 시간을 훨씬 줄일 수 있었습니다. 저 같으면 비망록을 손에 넣은 시점에서 모든 관계자 이름을 검색해봤을 거예요. 이 부분은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더군요.
반전도 충격적이기는 하나 거기에 다다르는 과정에 대한 설득력은 낮습니다. 가지가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호리에의 웃음을 본 것만으로 사건의 진상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억지스러웠고, 무토 국장 아내의 키라던가 미키마우스 티셔츠에 대한 언급이 전무한 것은 공정하지 못했습니다.
이보다는 호리에에게서 약간의 설명을 듣는다는 식으로 전개하는 게 충격은 덜했겠지만 설득력은 더 큰 결말이 되었을 겁니다. 아니면 호리에를 진범으로 하여 이야기를 끝내던가요. 반전은 달리 보면 해피엔딩을 위한 사족일 뿐이거든요. 또 에필로그에 잘나가게 된 히로코를 묘사하는 것 역시 사족입니다. 차라리 진정한 피해자가 된 슌지에 대해 이야기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히로코는 결국 살인자의 아이는 아니지만 범죄자의 딸은 맞는데, 조사 결과로 뭐가 달라지는 건지는 아리송합니다. 거액의 빚을 지고 전전긍긍하다가 협박범이 된 뒤, 나중에는 부주의한 행동으로 인하여 애인과 함께 골로 간 멍청한 아버지가 인간 말종이라는 건 다를 바 없으니까요. 단지 살인만 저지르지 않았을 뿐인데,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의 능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아마추어 수준 이상의 바둑 고수이자 순간 기억능력을 갖춘 도자이 신문사의 사장 스기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끝판왕 포스가 철철 넘치는데 하는 일이라고는 여대생에게 회사 입사를 권유하는 것밖에 없어서 격에 맞지 않는다 여겨졌습니다.
때문에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읽는 재미는 있고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는 작품이지만 추리적으로는 부실한 점이 많아서 감점합니다. 란포상을 탄 작품들 대부분이 추리보다는 묘사에 더 치중하는 느낌인데 이 작품 역시 전례를 벗어나지 않네요.
2020/12/12
탐정 혹은 살인자 - 지웨이란 / 김락준 : 별점 3점
![]() | 탐정 혹은 살인자 - 지웨이란 지음, 김락준 옮김/북로드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청은 한때 대만 연극계에서 잘 나가는 교수였지만 술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크게 상처 입혔던 사건을 계기로 교수직을 그만둔 뒤, 슬럼가같은 골목 워룽제로 옮겨갔다. 그리고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라는 일을 시작했다. 첫 의뢰인 린부인의 의뢰는 갑자기 남편을 미워하게 된 딸아이 행동의 원인을 밝혀달라는 것이었다. 미행과 탐문을 통해 린씨와 불륜 관계로 보였던 미스 추는 병원 대상으로 협박을 일삼던 범죄자였다는게 드러나고, 린부인은 이혼했다.
그 뒤 워룽제 주변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용의자로 우청은 체포되었다. CCTV로 피해자들과 근처에 있었다는게 드러났으며, 결정적으로 범인이 우청으로 변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번째 사건에서 범인 스스로 변장을 드러내 우청은 풀려난다. 경찰과 수사에 함께 참여한 우청은 범행 장소가 자신(의 집)을 중심으로 정확히 4방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 범인의 변장 기술은 전문가에게 배웠을 거라는 것 등 여러가지 추리를 선보이고, 결국 범인이 자신을 추종하던 극작가 쑤훙즈라는걸 알아낸다. 그러나 경찰은 꼭꼭 숨은 쑤훙즈를 체포하지 못하고, 결국 다섯번째 범행이 벌어지는데....
"내 심경이 어땠냐 하면 좆나 엿같았습니다!"
중국 추리 소설은 몇 편 읽어보았지만 대만 추리 소설은 처음 읽어 보네요. 그런데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재미에는 주인공 우청의 지분이 상당합니다. 독특하면서도 생생한 매력을 그야말로 '분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본인 실수로 스스로 루저의 길을 택했다는건 정신병을 앓는 탐정, 주정뱅이 탐정, 패배자 탐정 등 다른 루저 탐정들과 조금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 '살아있다!'는 걸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차이는 큽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는 다른 루저들과는 정 반대지요. 우청 역시 루저가 되는걸 선택한 뒤 워룽제 골방으로 숨어든건 혼자 우울하게, 어둡게 지내보겠다는 취지이기는 했습니다. 한데 뒤로 가면 갈 수록 경찰, 언론은 물론 범인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맞서 싸우면서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칩니다. 루저가 아니라 시민 영웅인 셈입니다.
또 우청은 사회에 대한 불만도 딱히 없고, 내면에 특별한 분노도 없습니다. 가족과도 그런대로 원만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루저의 길을 택한 평범한 우리 이웃이라서 현실감이 넘칩니다. 루저가 된 계기인 공황장애라는 병과 연극인들에게 상처를 준 '구이산다오' 사건 설명도 상세하고 현실적이고요. 어린 아이를 죽이거나, 믿었던 아내가 바람나서 도망갔다던가,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상황보다는 훨씬 와 닿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당연히 그냥 루저는 아닙니다. 명확한 주관이 있으며 추리력도 갖춘 실력자이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생각, 견해를 드러내는 언변과 재치도 대단하고요. 루저 탐정들이 보통 경찰 출신이라서 자연스럽게 먹고 살려고 탐정이 된 반면, 우청이 '사설 탐정'이 된건 지병 탓이라는 독특함도 눈에 뜨여요. 공황장애로 생긴 불면증으로 많은 책을 읽어서 사람 내면을 파악하는 기술을 습득했다는게 이유거든요. 스스로 추리력은 대단하지 않지만, 추리 소설을 셀 수 없이 많이 읽었고 타이완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는게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하지요. 한 마디로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비범한 루저 탐정입니다. 이런 기묘한 캐릭터를 이렇게 잘 그려낸 작가에게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우청 탐정에 대한 여러가지 설정을 독자에게 소개하는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린 부인, 천제루가 의뢰한 첫 번째 사건부터 흥미로운 부분이 있거든요. 미행과 탐문, 단도직입적 질문으로 답변을 끌어내어 해결되기 때문에 추리할 여지가 많지는 않지만, 린 선생이 받은 분재 동호회 회원 메일에 포함된 상품 번호가 날짜와 버스 번호, 내릴 정류장을 알리는 일종의 암호문이라는걸 찾아내는건 재미있었어요.
이어지는 본편 사건인 연쇄 살인 사건은 무려 다섯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라서 당연히 추리적으로 훨씬 풍성합니다. 우청이 체포되었을 때 당했던 부당한 처사를 이용하여 경찰 수사에 합류한다는 설정부터 괜찮습니다. 허가도 받지 않은 사설 탐정이 연쇄 살인에 뛰어들어 범인을 잡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경찰과 협조해야 하니까요.
이후 수사 과정에서 우청이 단서를 하나씩 짚어내는 과정도 볼만해요. 우청이 7월 7일 타이베이에 없었다는걸 증명한 뒤, 7월 7일 CCTV를 뒤져 자신으로 변장한 범인 행적을 추적하는 식으로요. 이를 통해 범인이 변장의 달인이라는걸 알아낸 우청은 이 정도 변장은 어딘가에서 배웠을 것이다!고 추리합니다. 그래서 관련 세미나와 강의를 뒤져 수강생 명단에서 범인 쑤훙즈를 찾아내게 되지요.
불교의 사상, 이론과 상징을 연쇄 살인 사건에 녹여낸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기독교 상징에 따라 일어난 작품은 있었습니다. 묵시록 예언을 따르는 식으로요. 동요나 그림, 수학 법칙, 음악, 바둑, 체스, 심지어 추리 소설에 따라 일어났거나, 주요 소재가 된 작품도 읽어 보았었고요. 그런데 불교라니! 그동안 제가 읽어왔던 거의 1000편에 가까운 추리 소설 중 이런 작품은 없었습니다.
불교적인 상징이 사용된건 피해자들이 선택된 이유가 만(卍)자에 해당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최초 피해자들은 우청을 중심으로 위도, 경도가 정확한 정4방향 꼭지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범인이 해당 위치에서 무작위로 희생자를 선택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좌우 대칭의 정사각형이 완성되었으니, 가운데 있는 우청만 남은 셈이지요.
그러나 5번째 사건이 일어난 위치를 확인하여 도형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불교의 만(卍)자를 그리고 있다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범인 쑤홍주가 사건을 일으킨 동기도 우청을 깨우치게 만드는 종교적 목적이었고요. 물론 이는 불교 사상은 아닙니다. 불교를 믿었지만 지금은 자신만의 세계에 사로잡힌, '우리에게는 현생만 있는데 현생은 지옥이라는' 정신병자 쑤홍주 자신만의 주장이지요. 하지만 이 주장에 이르기까지 과정은 불교 사상에 닿아 있으며, 여러가지 소재를 통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특히 핵심 키워드였던 금강경의 한 구절 - "마음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으면 머물러 있는게 아니니라" - 해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울림을 줍니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살기 위하면서 겉모습에 미혹된다는 거지요. 즉, 어떻게 사는게 편안한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질구레한 일을 걱정하고, 인간관계 때문에 울고 웃는 거고요. 그래서 진짜 편안해지려면, 겉 모습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외에도 불교에 바탕을 둔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스쳐가듯 등장하는데, 모두 기억에 남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곁가지로 진행되는 황색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사회 지도층이 얼마나 썩었는지를 풍자하는 장면들도 재미납니다. 우청이 범인으로 몰렸던 상황에서 언론의 부정확한 추측 보도와 취재 경쟁이 블랙 코미디처럼 묘사되거든요. 우청의 보복 고소에 대한 묘사도 속 시원합니다. "언론 건드려 봤자 좋을 것 하나 없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이번에 언론이 사람 잘못 건드린 줄 알라고 하세요. 나는 공익을 위해 싸우지 않습니다. 난 그저 법원에서 언론에 한 방 먹이고 싶을 뿐입니다." 라고 일갈하는데, 멋지더라고요. 이런저런 결탁으로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지만, 고소라도 한 게 어딥니까. 우리 나라도 이런 고소, 그리고 언론사에 대한 징벌적 손해 배상제가 일상화, 법죄화되면 좋겠네요.
잘 모르는 대만의 복잡한 도시 묘사, 이런저런 문화와 풍습들 묘사도 새로움이 많았습니다. 경찰서에서 풀려난 뒤 족발 국수를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처럼요. 서민적이고 사람사는 느낌 가득한 묘사도 정겨움을 더해 줍니다. 우청과 어머니의 관계는 물론, 우청과 주변의 이웃과 친구들 모두 서민적이고 정감가는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거든요. 왁자지껄하면서 잔 정이 넘치는게 우리나라와도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수선스럽고 요란한 점은 옛날 보았던 홍콩 코미디 영화 정서와 비슷하다고 생각도 되네요.
그러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왜 쑤훙주가 우청을 함정에 빠트렸다가 바로 풀려날 수 있도록 범행을 저질렀는지부터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요. 우청을 고난에 빠트리려면 그를 살인범으로 모는게 당연했을텐데, 너무 쉽게 혐의를 벗겨주는 느낌이거든요. 우청도 이에 대해 고민하지만, 결국 그 이유는 등장하지 않고 작품은 마무리됩니다.
추리도 기발함은 있지만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아서 정교함을 느끼기 힘든건 마찬가지입니다. 범인 쑤훙주가 변장의 달인이라는게 전부니 어쩔 수 없지요.
경찰도 너무 하는게 없습니다. 우청과 동료들의 노력으로 범인이 쑤훙주라는게 드러난 이후에도 체포하지 못하는 모습은 지나치게 무능해 보였고요. 쑤훙주의 집과 변장한 모습을 우청이 어렵지 않게 알아냈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도 없어요. 대만의 치안이 심히 우려되더라고요.
마지막 결말은 지나치게 전형적입니다. 우청을 사로잡은 쑤훙주가 우청을 죽이기 전에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장황하게 설명한 뒤, 때맞춰 나타난 경찰에게 사살당하는데 여러모로 너무 시시했어요.
그래도 독특함, 신선함이 가득차 있는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우청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모로 영상물에 어울릴 듯 싶은데, 영화가 있는지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