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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2

연애곡선 - 고사카이 후보쿠 / 홍성필 : 별점 2점

연애곡선 - 4점
고사카이 후보쿠 지음, 홍성필 옮김/파라북스

고사카이 후보쿠라는 전혀 모르는 일본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1920년대에 의학전공자가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추리 소설을 썼다는 소개만 보고 구입했습니다. 제가 워낙 고전을 좋아라 하니까요. 

전부 1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꽁트라 해도 어울릴정도의 굉장히 짤막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작품이 "반전"에 많이 기대고 있는 "기묘한 맛" 류의 작품들이라는 점, 그리고 의사나 의학지식이 중요한 작품이 많다는 것도 특징이고요.

하지만 아쉽게도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당시에는 충격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낡은 느낌이 너무 간한 탓이에요. 너무 뻔하거든요. 
에도가와 란포의 스승이라는 작가 소개글 처럼 뭔가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란포 수준의, 지금도 먹히는 스멀스멀한, 또는 변태적인 묘사가 하나도 없이 단지 구성만 유사할 뿐 너무 담백해서 싱거워보이기까지 하고요. 반전이 괜찮은 작품이 몇개 있긴 한데 이 담백한 묘사 때문에 빛이 많이 바래는 것 같아요.

이런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평범한, 또는 평범 이하의 자료적 가치밖에 없는 작품집의 번역 소개보다는 좀 더 유명한 작품이 소개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좀더 상세하게 작품별로 설명하자면, (뻔한 내용이 많아 Copy & Paste 신공으로 작업합니다)
보기 드문 범죄 : 3인조 보석 강도일당 중 2명이 보석을 삼키고 죽은 다른 1명의 위장을 경찰에게서 빼내오기 위하여 분투하는 이야기. 지겨울 정도로 뻔하고 설득력도 없지만 반전 하나만큼은 괜찮았습니다. 물론 지금 보면 좀 뻔하기도 하지만요...^^;; (1)

얼간이의 복수 : 자신을 무시한 환자와 선배 의사에게 복수하는 주인공의 이야기. 의학전공자 출신다운 의사와 환자를 대상으로 한 복수극으로 당시에는 무척 충격적이었을 것 같은 작품입니다. 물론 지금 보면 좀 뻔하기도 하지만요...^^;; (2)

연애곡선 : 표제작입니다. 란포 스타일이 물씬 풍기는 작품으로 광기와 애정이 잘 결합되어 있습니다. "연애곡선" 이라는 이론도 나름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기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죠. 그러나 아쉽게도 반전이 너무 뻔해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더군요.

메두사의 머리 : 섣부른 장난이 불러오는 비극에 관한 짤막한 꽁트. 간경병에 대한 증상을 작품에 잘 녹여내고 있다는 점은 좋지만 그 외에 특기할 점은 별로 없네요.

수술 : 식인에 관련된 괴담 꽁트로 반전의 맛이 괜찮았던 작품이죠. 너무 짤막해서 다른 이야기는 할게 없습니다...

죽음의 키스 : 콜레라의 전염에 관련된 이야기로 장황하긴 한데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는 평균 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유전 : 형법학에 따른 꽁트. 형법학의 1조항을 가지고 풀어낸 이야기인데 아이디어가 참 기발해서 마음에 들은 작품입니다.

시체양초 : 여름날 밤 순간적으로 지껄이는 창작괴담 수준의 꽁트입니다. (1)

어리석은 자의 독 : 아비산 중독으로 죽은 노부인 사건에 대한 단편인데 이야기의 전개과정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증거가 확실하면 그냥 체포하면 될텐데 너무 극적인 무대를 만들려고 억지스러운 설정을 가져다 붙여 놓았거든요. 추리적인 과정은 좋았기에 아쉬움이 더 큽니다.

혈우병 : 당시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혈우병과 인간심리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으로 뭔가 2% 아쉽더군요. 150세 먹은 할머니가 피를 흘리게 된 이유같은게 더 설명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안락사 : 반전이 인상적인 꽁트. 물론 지금 보면 좀 뻔하기도 하지만요...^^;; (3)

안마사 : 여름날 밤 순간적으로 지껄이는 창작괴담 수준의 꽁트입니다. (2)

투쟁 : 조금은 독특한 정신분석학 이론을 가지고 전개하는 작품으로 이 작품집의 베스트로 꼽을 만한 완성도 높은 수작 단편입니다. 의학이론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물론이고 살인에 대한 동기, 그것을 밝혀내는 과정과 마지막의 암호트릭까지 다양한 장치가 독자를 즐겁게 해 줍니다. 암호트릭이 조금 유치하고 너무 전문적, 설명적이라는 점은 아쉽지만 이 정도야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이죠.

2017/11/04

고양이는 알고 있다 - 이상우 : 별점 1.5점

국내 대표적 추리 작가 중 한 분이신 이상우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하여 일곱 편의 꽁트 및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우연찮게 읽어보았는데, 수준은 낮은 편입니다. 평균 별점은 1.5점 정도? 때문에 권해드리기는 무리지만 그래도 딱 한편, "황매실의 하룻밤"은 괜찮았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이 작품 하나만큼은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낭랑 18세" 

수위와 짜고 빈 사무실을 터는 보일러실 직원의 실패담입니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재미있는 트릭이 등장합니다. 지하에서 일하는 직원이 어떻게 빈 사무실을 알아냈나?는 것으로 답은 공범자인 수위가 휴게실에 틀어놓은 음악 테이프였습니다. 음악을 듣고, 보일러실 직원이 레코드 가게에서 그 노래의 길이로 몇 호인지를 알아낸 겁니다. 4분 12초 짜리면 412호라는 식으로요. 그러나 결국 덜미가 잡히는데, 그 이유는 가게 점원에게 부탁하여 낭랑 18세를 찾은 탓이었습니다. 점원이 찾아준게 오리지널이 아니라 최근에 유행한 리메이크 버젼이었기 때문이지요.

발상은 재미있지만, 문을 따기 전에 최소한 안이 비었는지 아닌지 정도는 최소한 확인하고 문을 땄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그리 현실적인 아이디어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백사도"

김내성스러운 제목에, 주인공인 그로테스크한 화풍으로 유명하다는 화가 김몽산도 김내성스러운 설정이라서 혹시나 했는데, 내용을 보니 정말로 김내성의 백사도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더군요. 김몽산의 최신 대표작 제목이 "백사도" 거든요.

그러나 내용 자체는 김내성 작품과는 무관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혹평하는 평론가 곽충빈에게 살의를 품고 독이 든 얼음을 만든 김몽산의 계획이 실패하고 허무한 결말에 이르는 내용으로, 독이 든 얼음을 직접 챙기지 않고 딸에게 운반시킨 잔꾀 때문에 망한다는 것입니다. 설령 김몽산의 계획이 성공하여 곽충빈이 죽었어도 김몽산이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도 지극히 회의적이고요.

거장의 명성에 기대기만 한 수준 이하의 내용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예고 살인"

유전공학을 이용한 제품으로 유명한 주식회사 무진에서 일하는 천재 학자 김묘숙 박사와 그녀와 함께 기술팀을 이끌던 장주석 기술 이사가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추경감과 강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이 단편집 속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으로는 완성된 편입니다. 김묘숙 박사에게 1시간 이상 지나야 녹는 독약 캡슐을 전해주고, 100kg이 넘는 장이사의 체중을 이용하여 일정 무게 이상의 사람이 밟아야 독이 주입되는 독 주사기를 장치하는 식으로 트릭이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범인인 변사장이 범인으로 삼을 희생양(이이사)을 준비하여 사건을 꾸미고 이이사가 범인이라고 몰고 간다는 점, 마지막으로 변사장의 동기가 비교적 상세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요.

하지만 이 모든 점들이 잘 연결되어 완성되어 있지는 않아서 아쉽습니다. 일단 김묘숙 박사에게 준 캡슐이 1시간이 지나야 녹는다는 것은 마지막 추경감의 추리 외에는 그 어떤 단서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트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요. 장이사 체중을 이용한 트릭은 조금 낫기는 하지만 너무 뻔할 뿐더러, 경찰이나 다른 사람이 과체중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은건 문제입니다. 또 이이사라던가, 비서 미스 구 등을 엮어서 범인으로 꾸미려는 변사장의 계획도 그닥 치밀하게 전개되지 않고요.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증거인 "괴문서"를 만든 신문이 변사장 집에서 발견된다는 점에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증거 앞에서 또 다른 추리들은 전부 불필요해져 버리니까요. 그 외에도 변사장의 계획은 헛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추경감과 강형사의 툭탁거리는 캐미는 좋고, 앞서 말씀드렸듯 추리물로서의 기본 조건은 갖추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조금만 더 신경썼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아내의 남자들"

우연찮게 추경감은 한 주부의 불륜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 주부가 살해되었다는 것을 전해듣고 사건 수사를 돕기 위해 나섰다.

지극히 평범한 불륜 치정극입니다. 약간의 수사가 진행된 후 현장에 남겨진 증거 - 현장 도어 손잡이 지문과 체모 - 로 범인이 체포되기에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무리입니다. 정숙해 보였지만 사실은 문란했던 한 주부에 대한 묘사를 선보이는게 목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쪽으로도 많이 부족했고요. 딱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황매실의 하룻밤"

두 쌍의 젊은 부부가 시골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려고 이동 중에 별장 옆 황매실이라는 작은 촌락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곳에 거주하던 사람들 모두 부부를 보고 말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급한 일로 밤에 전화를 쓰려 별장에서 황매실로 이동한 부부는 황매실 마을이 텅 빈 것을 보고, 황매실 마을이 전설처럼 구미호들이 사람 행세를 하고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며 두려움에 떠는데...

몇 페이지 되지 않는 꽁트인데 이 단편집 최고의 작품입니다. 공포스러운 상황도 설득력이 넘칠 뿐더러, 결말 역시 와 닿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진상은 바로 '황매실 주민들은 할아버지 제사로 밤에는 모두 아랫 마을에 다녀온 것이며, 제사드리는 날은 목욕 제계하고 외간 사람들과 말도 나누지 않는 법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정말 그럴듯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공포스러운 하룻밤에 대한 묘사가 조금만 더 생생했더라면 5점도 충분했겠지만, 이대로도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고양이는 알고 있다" 

최건일이 청산 중독으로 사망했다. 원인은 팔에 난 상처로, 경찰 수사를 통해 상처의 원인이 된 고양이 발톱에 청산이 발라져 있었다는게 밝혀졌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수사를 통해 최건일의 복잡한 가정사에 주목하는데...

니키 에쓰코의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표제작으로, 전형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콩가루 집안이 등장합니다. 빚에 쪼들리는 동생(최건식), 방탕한 아들(최호정), 아버지가 반대하는 남자와 교제하는 딸(최현아), 최건일의 오랜 불륜 대상인 가정부(석이네) 등 등장인물 모두 전형적이니까요.

그러나 콩가루 집안에 대한 묘사 외에는 추리물로 볼 만한 여지가 전무합니다. 강형사의 현란한 헛다리짚는 추리가 펼쳐지는 것 정도는 볼거리이지만, 실상 진상은 별 볼일 없기 때문이에요. 차라리 고양이 발톱에 바른 청산이 흉기였다는게 더 재미는 있었을텐데, 실상은 건식이 소독약을 바꿔치기한게 진상이라니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것이 밝혀지는 것도 최호정의 자백에 불과하고요. 도대체 고양이가 뭘 알고 있었던건지 당쵀 알 수가 없네요. 

무엇보다도 방탕하고 철없던 최호정이 마지막 순간에 휴머니스트로 돌변하여 눈물까지 쏟는다는 결말은 최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고로 별점은 1점입니다.

"아내는 탐정"

술을 끊은 김말구는 아내 박순임, 딸 김민희와 무인도로 캠핑을 떠났다. 그런데 텐트에서 소주병이 발견되고, 김말구는 새벽에 몰래 술을 마시러 나오는데...

남편이 술을 사다가 텐트에 숨겨놓은 후, 오래전 술을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위장하여 다시 술을 입에 대려고 한 것을 알아챈 아내가 술을 물로 바꿔치기했다는 내용의 꽁트입니다. 아내가 이를 알아챈 이유는 술병을 쌌던 신문지가 올해 것이었다는 겁니다. 여러모로 딱히 점수를 주기 애매한 수준의 작품이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03/12/15

정건섭 추리 꽁트집 -미스터리34- - 별점 1.5점

한국의 대표적인 추리작가 중 한명이신 정건섭씨의 추리 꽁트 모음집입니다.

"덫"이나 "5시간 30분"을 꽤 재미있게 읽어서 나름대로 기대를 했던 책입니다. 하지만 단편도 아닌 "꽁트"가 모여있어서인지 추리 퀴즈집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소설로서의 재미나 수준은 사실 기대 이하였습니다. 거기에 트릭들로 구태의연하고 지루하기 이를데 없어서 다 읽는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네요.
약간 특이한 것은 작품들 속에서 "추리소설을 많이 읽어서 머리가 좋다"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고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추리작가가 등장하는 편도 있다는 점인데, 뭐 추리소설가의 꿈이라고 해 둬야겠죠...

별점은 1.5점. 정건섭씨의 탐정 캐릭터인 박문호 형사가 주로 등장하니까 박문호 형사 팬이라면 소장할 만 하겠으나 아닌 분들은 그냥 이런 책도 있구나... 싶은 정도로 끝내도 될 듯 싶습니다.

2014/01/13

민들레 소녀 - 로버트 F 영 / 조현진 : 별점 3점

민들레 소녀 - 6점
로버트 F. 영 지음, 조현진 옮김/리젬

전부 1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SF 단편집.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3"을 읽고 읽게 되었습니다. 뭐 도저히 안 읽을 수 없게 소개를 해 놔서... 도대체 그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참고로 "비블리아.." 이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클라나드"에서 비중 있게 언급된 것을 계기로 되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고 해설에서 소개해 주네요. 일본 SF 쪽에서는 그만큼 잘 알려진 작품이라는 뜻이겠죠?

여튼 각설하고, 이 책의 가장 대단한 점은 넓은 장르 범위를 커버한다는 점입니다. 작품의 폭이 넓은 작가야 스티븐 킹 등 이쪽 분야에서는 널리고 널렸습니다만, 모든 장르 자체를 섭렵하여 넘나드는 작가는 보기 드물지요. 킹의 코미디야 있다고 쳐도, 달달한 러브 스토리는 쉽게 연상이 되지 않잖아요? 그러나 이 단편집은 러브 스토리에서 시작해서 코미디, 풍자극, 정통 SF, 쇼트-쇼트 스타일 꽁트 등 다양한 장르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젤라즈니의 문학적인 SF, 어떤 작품에서는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가, 어떤 작품에서는 아시모프의 묵직한 종교적 SF가, 어떤 작품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블랙 유머나 '기묘한 맛'이 떠오르거든요.

보다 자세하게는, 달달하고 잔잔한 사랑 이야기로 딱 한 번 남은 시간여행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깜짝 반전이 괜찮은 타임슬립 SF "민들레 소녀", 유쾌한 결말이 돋보이는 깜찍한 SF 요정물(?) 코미디인 "프라이팬 조종사", 자본가들의 계획으로 단순 소비재인 자동차와 TV에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가는 소시민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 및 풍자하는 "21세기 중고차 매장에서", "팝콘 튀기는 TV", 종교적인 성찰을 다룬 "과거와 미래의 술""약속의 별", 문학의 중요성을 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안드로이드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시인과 사랑에 빠진 큐레이터", "당신의 영혼이 머물 자리", 우주비행사의 고독을 일상계스러운 분위기로 굉장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 분위기 있는 정통 SF "별들이 부른다", 가벼운 쇼트-쇼트 스타일 콩트 코미디인 "파란 모래의 지구", "하늘에 새겨진 글자", "시계장치 오렌지"를 연상케 하는 끔찍한 마인드컨트롤 설정이 돋보이는 기묘한 맛 류의 "붉은 학교", 일종의 타임 패러독스 SF "시간을 되돌린 소녀"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록작들의 완성도 역시 명성에 걸맞으며 책장도 쭉쭉 넘어가는, 쉽게 읽히면서도 독자의 흥미를 끄는 작품들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난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도 많습니다. 유쾌한 꽁트나 코미디 쪽은 괜찮은데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 풍자적인 작품의 경우는 많이 낡아 보였어요. 종교적 색채가와 설교적 분위기가 과한 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아울러 전체적으로 독자에게 설명이 부족합니다. 여운을 많이 남기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하는게 작가의 스타일로 보이지는 하지만, 남용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완성도 높은 단편집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민들레 소녀" , "프라이팬 조종사""붉은 학교"를 꼽겠습니다. "민들레 소녀"는 SF 장르물 중에서는 손 꼽을만한 멋진 러브 스토리이며, "프라이팬 조종사"는 기발한 상상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붉은 학교"는 교육에 대한 서늘한 비판이 인상적이었고요. 다른 작품들도 괜찮은 만큼 읽기 편한 SF 장르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이 책을 소개한 다른 창작물에 의해 접하고 흥미를 가지신 분들이라면, 와닿지 않을 작품이 제법 많다는 점은 꼭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2019/11/17

히가시노 게이고의 무한도전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히가시노 게이고의 무한도전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히가시노 게이고에세이집입니다. 미공개 단편 소설 3편이 수록되어 있다는 말에 낚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에세이 모음이라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노보드에 빠져 열중한 2002~2003년의 2년여 동안 연재된 에세이와 그 외 - 해당 시기에 벌어졌던 한일 월드컵 준결승, 결승전 관전 에세이 등 - 의 에세이 몇 편이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미공개 단편은 에세이를 가장한 단편,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를 비롯한 에세이 속 주요 등장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하는 짤막한 꽁트에 불과합니다. 솔직히 뭘 이런 책까지 번역해서 출간했나 싶을 정도에요.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요.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의 열정과 노력에는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겠더군요. 데뷰 이후 매년 2~3권 가량의 책을 수십년간 꾸준히 발표할 정도로 작업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짬을 내어 스노보드에 대한 열정을 붙태우며 스키장을 다니고 연습하는 과정이 정말 대단하니까요. 여기서 눈여겨 볼 건 히가시노 게이고가 스노보드에 빠져든 이유입니다. 단순히 재미 때문만은 아니라 '향상' 때문이라고 합니다. 타면 탈 수록 어쨌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그런 성취감이 너무나 즐겁다는 것이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어제는 못한 것을 오늘은 해냈다는 성취감, 이런 사소한 성취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성실한 노력가라는건 당연한 일일겁니다. 그러니 매일 몇 시간을 운전해서 스키장을 찾아가 십여회의 활강을 즐긴 뒤 다시 돌아가 작품을 쓸 수 있었을테고요. 아, 이런 노력과 꾸준함은 정말 부럽습니다.

그리고 저같이 겨울 스포츠를 싫어하는걸 넘어서 혐오하는 사람 -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의 안도의 말을 빌자면 "힘들여 이렇게 추운 곳까지 와서, 판대기를 밟고 눈 위를 미끄러지는게 뭐가 그리 신나는지" 모르겠다는... - 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잘 쓰여진 에세이이기도 합니다. 글 자체를 재미있게 잘 쓰는 작가 답게 별거 아닌 스노보드 당일치기 여행에도 어떻게든 이야기를 집어넣으려는 노력이 특히 눈에 뜨입니다. 실존인물이라도 등장 인물들에게 명확한 캐릭터를 부여하고, 캐릭터에 맞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과정이 잘 그려지고 있거든요. 어떤 이야기는 그 도가 지나쳐서 에세이가 아니라 아예 소설이 되어버린 이야기도 있기는 하지만요.

대부분의 에세이들 모두 재미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여러 추리 소설가들이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니카이도 레이토, 누쿠이 도쿠로, 신인작가 구로다 겐지 등과 스키 투어를 간 이야기로 여기서 구로다 겐지가 상당한 변태라는게 드러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별 인기가 없는 작가라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팬이 읽었더라면 치를 떨 만한 그런 내용이거든요. 그 외에도 아비코 다케마루, 가사이 기요시라던가, 교코쿠 나쓰히코 등이 언급되는 등 이런저런 작가들이 자주 등장해서 깨알같은 재미를 안겨줍니다.
아울러 골프에 대한 독특한 시각도 기억에 남네요. 골프를 칠 생각이 들지 않는 이유가 이상한 옷 때문이라는 내용인데 꽤 그럴싸 했기 때문입니다. 여자 친구에도 보여줄 수 없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어야 하는 스포츠는 해 봤자 재미있을리가 없다는 논리지요. 요새는 골프 웨어도 상당히 괜찮은게 많고, 지극히 편협한 시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본인의 취향이나 철학은 확실히 확고하구나 싶더라고요.
한신 타이거즈의 팬으로 느낀 2003년 호시노 센이치의 기적과 같은 리그 우승에 대한 이야기도 야구 팬으로서 와 닿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우승 따위는 기대도 안하는, 눈 앞에서 열심히 뛰고 특히 자이언츠나 이겨주면 좋다는 마인드는 우리나라의 모 팀 팬을 연상케 했어요. 야구 팬은 어느 나라에 가도 똑같은가 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지막에 수록된 스노보드 관련 꽁트는 솔직히 완전히 수준 이하였습니다. 그냥 팬 서비스에 불과해요. 스키장 상급자 코스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유력한 용의자는 스노보드 초보자라서 아래까지 내려오는데 오래 걸려서 알리바이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용의자는 초보자로 가장한 실력자였지요. 스노보드 타는 방법 - 구피 스탠스와 레귤러 스탠스 - 을 이용한 간단한 트릭이 등장하는데, 이 정도로 범인이 빠져나가길 바라는건 아무리 보아도 무리라 생각됩니다. 피해자 주변만 조사해도 동기는 쉽게 드러날 테고, 그렇다면 트릭이야 어찌 되었건 범인 체포는 문제가 없었을테니까요. 흉기로 소음총을 썼다는 등의 무리수는 단점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틈이 많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에세이는 쉽게 읽을 수 있고 재미도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열정과 노력도 잘 느껴졌고요. 우리나라에서 스노보드가 유행한지도 10년은 더 지난 듯 한데, 스노보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11/09

병속의 미녀 - 정태원 엮음 : 별점 1.5점

병속의 미녀 - 4점 정원태/이성

다시 접한 정태원씨가 엮은 단편 앤솔러지. 헌책방에서 몇권 구입한 시리즈 중 마지막입니다. 목차는
  • 존 콜리어: 병속의 미녀 / 무서운 교배 / 잠자는 미녀
  • 클라이브 바커 : 수의의 고백 / 섹스와 죽음과 별빛 / 재클린 에스 / 마돈나
  • 아토다 다카시 : 여난 / 이상한 벌레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제가 "미스터리 에로티카"고, 책 소개도 에로틱한 미스터리 단편을 모아놓았다고 되어 있는데 선정 기준이 의심됩니다. 존 콜리어의 작품들은 그닥 에로틱하지도 않고 미스터리도 아니었고, 클라이브 바커는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취향의 작품만 실려 있습니다. 그나마 아토다 다카시 작품들이 비교적 괜찮지만 너무 짧은, 그야말로 꽁트 길이밖에 안되는 소품이고요. 한 마디로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아요. 무언가 좀 부족하고 모호하달까요? 여튼 제 판단으로는 절대로(!) 미스터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클라이브 바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들었겠지만 저에게는 많이 아쉬운 단편집이었습니다. 그나마 "잠자는 미녀"와 "이상한 벌레"는 독특한 반전과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으로 비교적 추천할만 하지만 나머지 작품은 별로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겠네요.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병속의 미녀"
지니가 들어있다는 마법의 병을 산 남자가 지니를 이용하여 온갖 향락을 즐기다가 병에 자신이 갇히게 된다는 이야기. 뻔한 동화의 뻔한 패러디죠...
 
"무서운 교배"
농부가 시체를 묻은 밭에서 기괴한 호박을 캐내는 이야기. 약간 섬찟하긴 한데, 무섭지도 않고 그냥 기묘하기만 했습니다.

"잠자는 미녀"
한 부자가 서커스에서 우연히 만난, 몇년째 잠을 자는 여인이라는 존재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동원하여 그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잠에서 결국 깨어나게 만들고요. 그러나 그녀가 깨어난 직후 바로 실망한다는 내용입니다.
외모 지상주의의 현대 사회에 비판을 가하는 듯한 탄탄한 줄거리와 이색적인 반전이 마음에 듭니다.

"수의의 고백"
포르노 사업가의 속임수에 빠져 가족과 생활을 잃은 회계사가 복수를 꾀하다가 살해된 직후, 자신의 수의에 빙의하여 마지막 복수를 완성한다는 내용입니다. 클라이브 바커 특유의 디테일한 묘사는 빛을 발하지만 얄팍한 줄거리와 허무한 결말로 그냥저냥한 작품이 되어버렸습니다.

"섹스와 죽음과 별빛"
클라이브 바커의 다른 단편집 "피의 책"에서 이미 읽은 작품입니다. 연기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는 일종의 좀비물입니다. 평작수준이라 보여집니다.

"재클린 에스"
이 단편집에서 가장 특이한 작품입니다. 섹스에 대한 치밀하고도 기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기이한 초능력을 가진 마녀와 같은 여인 제클린 에스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잔인하고도 엽기적인, 변태적인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밖에 보이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제 취향에는 전혀 맞지 않더군요.

"마돈나"
위의 작품만큼은 못하지만, 마찬가지로 특이했습니다. 클라이브 바커의 "한밤의 지하철"이 연상되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와 "운명에 휩쓸린 평범한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보면 종교적으로, 하지만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뭐 이것도 그닥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여난"
평생 여자에게 눌려살던 한 소시민이 자살 직전에 군중들의 이목을 끌고 잠시 다른 세상을 꿈꾸지만 군중들은 바로 미인 여성 자살자에게 이목을 돌리게 된다는 이야기. 뭔가 공감이 가는 내용이더군요. 짧지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상한 벌레"
20페이지도 안되는 꽁트입니다. 플라스틱을 갉아먹는 벌레를 발견한 사나이의 이야기입니다. 짧지만 성형수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반전까지 괜찮은 완벽한(!) 작품입니다. 역시 단편의 제왕 아토다 다카시다운 면모를 보인달까요?

2006/12/03

미스터리 익스프레스 - 엮은이 정태원 : 별점 1.5점

미스터리 익스프레스
정태원/책세상

이 책은 추리계의 거목이신 정태원선생님께서 직접 엮으신 추리 꽁트 + 퀴즈집입니다. 헌책방 쇼핑 중 발견했는데 추리 꽁트+퀴즈는 켄 웨버라는 이 바닥의 거물이 이미 모범답안을 제시한 방식이기에 어떻게 책을 구성했는지 호기심이 생겨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우송비가 아까와서 불필요하지만 구입했다는 것이 더 적합하겠네요)

그러나... 실려있는 총 30여편의 에피소중 70% 이상이 유명 단편을 어레인지해서 실어 놓은 것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유명 단편이 추리 "퀴즈" 형식으로 쓰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들이라 어거지성이 짙더군요. 그래서 책의 성격이 애매합니다. 뭐 어차피 실려있는 작품들을 거진 다 다른 책을 통해 읽은 저로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원체 없었겠지만요.
그나마 창작 에피소드들은 그나마 추리 "퀴즈"의 형식을 적절히 따르고는 있지만 정말 몇몇 에피소드를 제외하고는 유치한 수준이라 제대로 된 추리 퀴즈로의 역할 수행을 하지 못해서 더욱 아쉬웠습니다. 한마디로 퀴즈라는 형식을 억지로 가져다 붙인 결과물이랄까... 딱 중-고생 정도 수준에게 어울리는 책이더군요. 싼티 줄줄 흐르는 책 안의 삽화는 이 책의 가치를 보다 떨어트리는 요소였고요.

그나마 읽을만한 작품은 (괜히 각색만 하지 않았더라면 더욱 훌륭했을) 마저리 엘린검의 "보이지 않는 문"과 로렌 D 에슬렌의 "책들의 함정", 페트릭 퀜텐의 "토요일 밤의 살인사건" 정도였습니다. 어차피 어거지성 추리 퀴즈 형태로 바꾸어 놓아서 작품이 완전히 망가졌지만요.

작가와 작품 소개라도 충실히 했더라면 이 정도로 별로인 책은 아니었을텐데 안타깝습니다. 제값주고 샀더라면 단연코 후회했을텐데 2000원에 구입했는데도 돈이 아까우니 더 할 말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냥 단편들을 각색하지 않고 제대로 모아서 앤솔러지로 출간하였으면 더욱 좋았을 것 같습니다.

2005/06/21

공포특급 6 일본편 -정태원 편역 : 별점 2점

공포특급 6 - 4점
출판사/한뜻

한때 붐이었던 괴담류 서적 유행에 편승해서 쏟아졌던 기획 도서 시리즈 중 한 권. 터미널 가판대에서 접할 수 있는 싸구려(?) 급조 기획물입니다. 평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헌책방 쇼핑중 일본편만 한국 추리문학계의 큰 기둥 중 한분이신 '정태원' 선생님께서 편역했다는걸 알고 주저않고 구입했습니다. 

싼 가격에 두께도 얄팍해서 쉬엄쉬엄 읽기에도 좋을 뿐더러, 정태원 선생님이 손댄 덕분인지 유치찬란 싸구려 표지와 기획의도에 걸맞지 않게 내용이 무척 알차서 마음에 듭니다. 선정 작가들도 일본 단편의 제왕 아토다 다카시와 호시 신이치, 아카가와 지로, "허무에의 공물"로 유명한 나카이 히데오,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오야부 하루히코 등등 화려한 편이고요.

또 추리 작가들이 많아서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만하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단편 끄트머리에 짤막하게 소개되는 정태원 선생님 특유의 작가 소개 부분도 좋습니다. 

그러나 역시 기획 도서의 특성이자 한계로 대부분의 수록작들이 2~3페이지 내외의 꽁트로 구성되어 있다는건 아쉬웠습니다. 225페이지짜리 책에 실린 단편이 40편이 넘을 정도거든요. 물론 짧다는게 무조건 단점은 아닙니다. 문제는 작품으로서의 기본 수준을 갖추지 못한, 정말로 형편없는 이야기들이 많다는 겁니다. 특히 아토다 다카시 작품들이 그러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은 수준의 작품도 제법 있더라고요. 이 작가도 정말 작품 편차가 심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정태원 선생님의 이름을 믿고 구입한 보람은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품"의 기획 의도를 따르면서도, 고심해서 작품을 선정한 정태원 선생님의 노고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네요. 소장가치가 있는 걸작선은 아니지만 일본 단편을 좋아한다면 한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내용 요약은 워낙 형편없는 작품도 많아 하지 않겠습니다만, 아래 작품들이 괜찮았습니다.

  • 아토다 다카시 : 기발한 발상과 서늘한 반전이 인상적인, 전형적인 작가 스타일이었던 "스타탄생".
  • 아토다 다카시 : 야구장의 홈런볼을 이용한 기상천외한 살인사건을 다룬 추리적 성향이 짙은 "검은 홈런".
  • 아토다 다카시 : 두 남자의 결투를 다룬, 추리물에 가까운 "색다른 결투".
  • 아토다 다카시 : 피식하는 재미가 있는 "저주의 나이프".
  • 하야마 요시키 : 순문학적이면서도 괴기스럽고 엽기적인 상상력이 잘 발휘된 "시멘트통 속의 편지".
  • 이쿠시마 지로 : 짤막한 꽁트지만 제목과 이야기 전개가 잘 어우러져 극적 반전을 짧은 페이지 안에서 이끌어 내는 "유전".

2022/02/06

디오게네스 변주곡 - 찬호께이 / 강초아 : 별점 3.5점

디오게네스 변주곡 - 8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중화권 추리 소설의 대표작가 찬호께이의 단편집입니다. 본격적인 작가 데뷰 초창기에서부터 최근작까지 1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작업했던 결과물을 모아 놓았는데 본격 추리는 물론 호러, SF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고 있어서 찬호께이라는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책 뒤에 실려있는 작가의 작품별 후기도 굉장히 좋습니다.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떤 생각으로 그 작품을 썼는지를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습작 1,2,3"가 쓰여진 방법이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임의로 키워드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에 가서 다섯 개의 단어를 얻은 뒤, 그 키워드를 순서대로 연결해서 아주 짤막한 엽편 소설을 쓴 결과물이라고 하거든요. 읽을 때는 이런걸 뭐하러 실어 놓았나? 싶었는데, 쓰여진 방법을 알고나니 달라 보이더라고요. 특히 "습작 1"이 놀라와요. 이런 키워드로 어떻게든 말이 되는, 그것도 반전까지 있음직한 엽편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과연 잘 나가는 작가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저도 이 방법은 한 번 따라 해보고 싶어지네요.

전체적으로 작품들 수준이 고르지는 않지만, 장르문학 팬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단편집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범인, 진상 등을 까발리는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란유웨이는 겉보기에는 유능하고, 사회성 좋은 청년이지만, '삼람소옥'이라는 블로그를 엿보며, 다크 웹에 접속하는 은밀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삼람소옥'의 운영자 샤오란의 가족 관계, 거주지, 체형, 취미 등 모든걸 알아낸 그는, 결국 샤오란의 집에 침입하여 여자를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고 마는데.... 

초기작으로 제 7회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작입니다. 고작 사흘 걸려서 썼다는데, 그렇게는 믿어지지 않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란유웨이가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시작부터 상세하게 설명되는 도서 추리물로도 뛰어나지만, 란유웨이가 살해한게 샤오란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린치칭이라는 반전의 서술 트릭물이라는 복잡한 구성을 잘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린치칭이 샤오란을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고를 위장해서 죽였다는 설정인데, 이러한 반전이 다크 웹에서의 회원들 사이 의견 교환, 삼람소옥의 글 들을 통해 교묘하게 등장해서 설득력이 높았습니다. 삼람소옥 글만으로 사용자를 추리해내고, 감시하는 과정은 "망내인"을 연상케하는 점도 작가의 팬이라면 즐길 수 있는 재미 요소고요.

린치칭이 연쇄 살인마는걸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설명이 부족한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산타클로스 살인 사건" 

금융 위기로 전재산을 잃은 테일러는 가족을 떠나 노숙자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른 노숙자 샘을 만나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이브날, 산타의 집에 산타클로스를 살해하겠다는 살인 예고 편지가 날아온 뒤 산타가 머리 없는 시체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굉장히 짤막한 꽁트인데, 나름 추리물로 제 역할을 다 합니다. 존의 짤막한 이야기의 몇몇 디테일을 통해 펼치는 테일러의 추리가 일품인 덕분입니다. 그는 썰매 위에 흰 수염이 흩어져 있었다는 설명을 듣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때 피아노줄로 목을 잘리게 만든 트릭이 아닐까 생각했지요. 그러나 죽은 뒤 목이 잘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타클로스가 대역이 살해당한 걸로 꾸미고 숨었다는 진상을 밝혀냅니다. 존이 산타클로스였고, 일련의 이야기는 테일러를 가족에게 돌려보내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길이를 조금 더 줄였더라면 좋았겠지만 지금 이 정도도 아주 좋았던, 크리스마스에 적합한 소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참고로 왜 무대가 미국 뉴욕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작가 후기를 보니 '존'이라는 이름을 '존 도'에서 따 왔다는 복선을 사용할 생각이었다고 하네요.

"정수리" 

아홍은 어느날부터 사람들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모두가 똑같은걸 보지만 못 본채 해 왔던 것이었다! 지친 아홍이 결국 현실에 순응하기로 결정하자 아홍의 머리 위 천 뭉치가 열리고 도마뱀같은 괴물이 나타났다... 

2018년에 발표된 비교적 최신작입니다. 한 매체로부터 '귀신'이라는 주제로 단편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썼다고 합니다. 쓰여진 이유답게 판타지 일상계 호러물로 볼 수 있습니다. "환상특급"에 나오면 괜찮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획일화되고, 개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대 사회를 상징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관련된 언급은 없네요.

그러나 흥미로왔던 도입부를 지나 뒤로 갈 수록 재미를 찾기는 힘듭니다. '왜'라는 측면에서 부족함이 많은 탓입니다. 결국 머리 위 이상한 물체들에 대한 묘사 외에는 건질게 없었어요. 작가 후기를 보니 의도적으로 논리나 추리 요소보다는 황당무계한 현실이 주는 스릴에 집중했다는데, 이래서야 고어 포르노와 크게 다를바 없는 셈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시간이 곧 금" 

리원은 시간 거래 센터를 방문하여 자기 시간을 팔게 되었다. 고통을 잊고, 돈과 성공을 빠르게 누리기 위해서였다... 

2010년에 발표된 비교적 초기작으로 이 역시 "환상특급"이 떠오르는 단편입니다. 

제일 재미있던건 시간 거래에 대한 설정입니다. 시간을 팔면, 해당 시간이 곧바로 지나가고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은 남지만 현실감은 사라집니다. 시간을 사면 시간이 길어졌다고 느끼게 되고요. 돈 벌이, 그리고 힘든 기억과 고통을 피하기 위해 시간을 적극적으로 판 리원, 그리고 필요한 시간을 조금씩 사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 연적 아리의 대비가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특히 아리가 시간을 샀다는걸 마지막에 반전처럼 등장시켜서,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전개가 일품입니다. 아리의 말대로 인생에 고통이 있어야 기쁨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지나치게 양비론적인 접근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극단적으로 팔거나 살 필요는 없고, 적당히 사고 팔면서 인생을 사는게 합리적일테니까요. 예를 들어, 군대에 가게되면 이 시간은 당연히 파는게 낫잖아요? 좋은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 소설가의 등단 살인" 

유명 편집장이 작품을 가져온 신인 작가에게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는 이유였다. 신인 작가는 등단을 위해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사람을 죽일 결심을 했다. 그녀가 추리 소설, 특히 밀실 살인을 비난했기 때문에, 완벽한 밀실 트릭을 만들어 살해하는데... 

초반의 편집자의 주장은 아주 와 닿았습니다. 직접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고민해야 현실감을 느끼게 만들 수 있을거라는 취지는 공감하거든요. 주인공 신인 작가의 범행도 그래서 설득력있었습니다. 신인 작가라면 혹할만한 주장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았습니다. 밀실에는 사람이 드나들 수는 없지만 창이 있었는데, 이 창을 통해서 끈만 집어넣어 피해자를 교살했다는 트릭이 특히 좋아요. 피해자가 직접 목을 집어 넣어야 하기에 '이게 가능하겠어?'라고 생각이 들게 하지만, 피해자가 참가했던 연극 연습을 위해 스스로 밧줄 안에 목을 집어 넣었다는걸 꽤 설득력있게 풀어내고 있는 덕분입니다. 과학 수사를 통해 경찰이 진상을 밝힌다는 결말도 좋았습니다. 이런 밀실 트릭이 21세기에 먹힌다는건 사실 말도 안되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모든걸 뒤집는 반전이 놀랍습니다. 편집장은 가짜였고, 유명 작가가 신인 작가를 부추켜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 후, 진상을 듣고 자기가 사건을 해결한 것 처럼 꾸며 경찰에 제보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반전이 너무 많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수작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필요한 침묵" 

지옥의 수용소에 처 넣어진지 10년만에, '나'는 친구 라오왕이 죽은 뒤 과거에 자신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나'는 킬러였다는 짤막한 꽁트. 특기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설명도 너무 부족하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품을 쓰게 된 동기와 작품 내용도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영화 "언디스퓨디드" 시리즈처럼 화끈하게 풀어내는게 더 재미있었을겁니다. 별점을 따로 줄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가라 행성 제 9호 사건" 

가라 행성에서 아홉번째 (제 9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전의 사고들을 일으켰던 316형 중력 붕괴 엔진의 문제를 해결한 신형 317형 엔진을 탑재한 카로카호는 정상 작동 중이었다. 그러나 3명의 승무원은 상륙정으로 가라 행성에 상륙했다가, 끔찍하게 죽고 말았다. 사고 당시, 장거리 통신 시스템만 분해되어 상륙정에 실려 있었다. 

사건 조사 중 승무원이 최후를 맞는 동영상에서,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을 위해 통제와 소수 희생을 강요하는 발전파의 거두 모모코 사령관이 범인임을 암시하는 파우스타 함장의 발언이 녹화되어 있다는게 밝혀지자, 조사 위원회는 탐정 두핀핀을 불렀다. 맥켄넨 총독은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SF 추리물인데 추리적으로는 본격 추리물로 보아도 될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단순하지 않고, 반전과 함께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도 일품이고요. 우선 함장의 발언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승무원들을 매수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추리가 먼저 선보입니다. 모든 주민 행동을 녹화하는 시스템 '눈'으로 모모코 사령관이 통신병을 만났다는게 증거고요.

그러나 사건은 맥켄넨 총독이 일으켰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그는 선체 엔진이 316형 엔진인 것 처럼 조작했던 겁니다. 함장은 폭발할까봐 카로카호를 버리고 탈출했고요. 장거리 통신 시스템은 상륙 후 본성과의 통신을 위해 떼어 갔던 겁니다. 그러나 사고로 승무원들 모두가 사망했고, 총독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스스로 두핀핀 탐정을 불러 이 모든걸 밝히끔 유도했다고 설명됩니다. 개인을 통제하고, 오로지 외계 행성으로의 진출만 경주하는 발전파도 '탐정'이라는 쓸데없는 직업의 도움을 받은 셈이라 보수파도 나름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는 내용과 함께요. 추리와 전개 모두 합리적이며,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작가가 스스로 세운 설정 중심이라 추리가 쉽지 않다는 단점은 있지만요.

무엇보다도 작가 후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의도가 놀라왔습니다. '후기 문제'로 인한 본격 추리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본격 추리 소설을 쓰기 위해서였다는데 그 의도에 완벽하게 부합하거든요. 후기 퀸 문제는, 소설 속 탐정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이고 자기의 결론이 유일무이한 진실인지 여부를 작품 속에서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즉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정함은 탐정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러리 퀸도 후기작에서는 독자에의 도전을 없앴다지요. 찬호께이는 완벽한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단서는 '눈' 시스템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합니다. 두핀핀 탐정은 아예 사건과 무관한 탐정으로 이 기록만 가지고 추리를 진행하며, 무엇보다도 탐정 스스로가 '사건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SF로도 생각할 거리가 많았어요. 특히 가라 성 거주 생명체 바보우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수명은 인간에 비하면 극도로 짧은데, 이렇게 모든건 서로 상대적이라는걸 지구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재해를 빗대는 부분이 특히요.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제대로 된 하드 SF를 써도 좋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지루한 설정만 참는다면, 그 이상의 보답을 얻을 수 있는 걸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내 사랑 엘리" 

나는 처제 수와 그 남편 토니를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다. 아내 엘리는 아프다고 했지만, 사실은 2층에서 시체로 누워 있었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수와 토니 앞에서 만드는 '나'의 작전이 먼저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알리바이 트릭의 핵심은 시체를 끈을 당겨 움직이게 만드는 정도로 현실적이라서 괜찮았어요. 수를 죽인게 토니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엘리와 토니가 불륜 관계였다는걸 입증하는 증거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둘이 불륜 관계로 함께 도망갔다고 수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면 말이지요. 단순 실종으로 수사가 시작되면 어떻게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이런 점에서 좋은 추리, 범죄물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습작 2" 

고독을 주제로 한 짤막한 꽁트. 전염병 숙주인 남자 혼자 세상에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다지 의외성도 없고 너무 짧아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커피와 담배" 

시사 잡지 포커스의 기자인 나는 일요일 오전 10시 8분에 모르는 공원 벤치에서 정신을 차렸다. 지난 수요일 이후 기억은 잃은 상태였다. 몸은 간절히 커피를 원했고, 커피를 마시고자 편의점과 여러 가게를 돌아다닌 나는 지금 세상은 담배가 합법이고 커피가 불법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결국 몰래 커피를 판다는 약국에서 커피를 입수하다가 경찰에 체포된 나는 난동을 부리다가 기절해 버리고 마는데.... 

모든건 흡연자였단 '나'의 금연 치료를 위해 루 박사가 행했던 IC 금연 치료 실험 탓에 벌어진 착각이었다는게 진상인 이야기입니다. 측두엽, 후두엽, 전두엽 간 관계 문제로 '나'는 담배를 커피로 인지했고, 이를 언어로 구성할 때는 '마약'으로 말했던 겁니다. 루 박사의 시계를 붕대로 착각하고 있어서, '나'의 치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고요. 

기묘한 상황을 나름대로 잘 설명하고 이는 독특한 SF이자 판타지로, 이 작품도 "환상특급"에 사용되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자매" 

'나'는 여자친구 아쉐가 기생충인 언니 아신을 죽여서 시체를 숨길 계획을 세웠다. 우선 중고 냉장고를 구입하여 아쉐 집으로 옮긴 뒤, 원래 집에 있던 냉장고에 아신의 시체를 담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컨테이너 화물차 안에서 시체를 꺼냈고 냉장고는 버렸다. 아신으로 변장한 아쉐가 경비원에게 눈도장을 찍고 외출하도록 시켰고, 아신의 시체는 밤에 바다에 버렸다...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범행 과정만큼은 그럴싸하게 그려진 범죄물입니다. 그런데 '나'가 아쉐와 결혼할 경우. 600만 홍콩 달러에 달하는 집 명의자에 추가되고 아이가 생기면 아예 상속자가 되어버려 아신은 집 상속권을 잃게 되기 때문에 아신이 먼저 아쉐를 죽일 계획을 꾸몄었고, 이를 알아챈 '나'가 아신을 죽였다는 반전은 뜬금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악마당 괴인 살해 사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던, 지구 정복을 꿈꾸는 악마당 본부에서 간부 감자 괴인이 머리가 으깬 감자가 되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우두머리 바다 대왕과 살아남은 간부인 양파, 사마귀, 해삼 괴인 앞에서 코작 참모는 사건이 감자 괴인의 자작극이라는 추리를 펼치는데... 

일본 전대물 설정을 본격 추리물에 끌어들였는데, 의외로 수준이 높아서 깜짝 놀랐던 작품입니다. 감자 괴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던건 사마귀 괴인과 가면전사 1호의 무기였다는 단서가 앞 부분에 제공되고, 코작 참모의 기묘한 행동을 통해 코작 참모가 가면전사 1호였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아주 일품인 덕분입니다. 코작 참모가 이를 가자 괴인 자작극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나름대로 합리적이라 설득력 높은 추리였고요. 재미와 추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걸작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영혼을 보는 눈" 

나는 담배를 피우다가 한 노인을 알게 되었다. 노인은 자신이 잘나갔던 영매였지만, 30년 전 사건으로 몰락했다며 그 사건 이야기를 해 주었다. 프로그래머 A씨 아내가 몸을 열 번 넘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던 사건이었다. 아내의 영혼은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A씨 지문이 묻은 흉기를 찾는 것도 도왔기에 결국 A씨는 사형당했다. 그러나 다른 사건이 벌어졌고, 진범은 시체를 발견했던 가정부였다는게 밝혀졌다. A씨 아내 영혼은 A씨가 불륜녀와 행복하게 살 까봐 거짓말을 했던 것이었다.... 

잡지 요청으로 귀신을 주제로 썼다는 점은 "정수리"와 비슷하네요. 하지만 공포 자체에 집중했던 "정수리"보다 못했습니다. 무섭지도 않고, 그리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영혼이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처음 접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그렇게 효과적으로 살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킬러였으며 노인은 방금 죽인 타겟의 영혼이 '나'의 뒤에 있는걸 보았다는 결말도 진부했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숨어있는 X" '

나'는 강의 후 급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진 탓에 옆 강의실의 '추리소설의 감상, 창작, 그리고 분석'이라는 강의를 청강하게 되었다. 강의 시작 후, 학생들과 대화를 하던 교수 '수염남'은 학생들에게 추리 게임을 제안했다. 지금 강의실에 조교가 학생인 척 숨어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이유와 증거를 제시해 보라는 게임이었다. 정답을 맞춘 한 명에게 무조건 A학점을 주겠다는 말에, 강의실 학생들 모두가 참여하게 되는데.... 

찬호께이는 후더닛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클리셰를 벗어날 수 없고(아마 가장 수상해 보이지 않은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그런걸 의미하는 말 같습니다), 독자가 직감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기 때문이라네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할 수 있는 후더닛물의 변주를 고민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창작 의도에 걸맞게 클리셰는 먹히기 힘듭니다. 애초에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대화를 시작했기 때문에 각자의 별명. 그리고 생김새와 성격 묘사만 있을 뿐이니까요. 이 정도 단서로는 수수께끼를 풀어내기에 벅차지요. 범죄도 아니기에 동기나 범행 수법으로 당사자를 찾아내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 지목받은 사람은 자기 정체를 드러내야 하고, 지목에 실패한 사람은 탈락한다는 게임의 기본 룰과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합리적으로 수수께끼는 풀리며, 교수인 줄 알았던 수염남이 조교였고 학생인 줄 알았던 '코다 쿠미'가 교수였다는 진상도 깜짝 놀랄만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화자이자 주인공 '냉커피' 역시 학생이 아니라 교수여서 수수께끼를 풀어냈다는 반전섞인 결말도 아주 깔끔했고요. 눈으로 고립된 산장에 초대받아 방문한 서로를 모르는 투숙객들 중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을 찾아내는 정통 추리물을 현실감있게, 그리고 완성도높게 구현한 수작이에요.

물론 게임이 이렇게 강의 시간안에 딱 맞게 잘 끝났을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교수가 수수께끼를 마지막까지 숨기려는 의도가 더 많았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무조건 차례대로 한 명씩 지목하면, 결국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한 명 생기고 그 사람이 진상을 깨우칠 수 있다는 결정적 약점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게임'이 작위적이라고 감점하는건 말도 안되겠지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2014/02/20

11인이 있다! - 하기오 모토 / 서현아 : 별점 2.5점

11인이 있다! - 6점
하기오 모토 지음, 서현아 옮김/세미콜론

애니메이션으로 미리 접했었던 작품. 생각해보니 하기오 모토 작품을 책으로 읽는 것도 처음이네요. 유명세에 비하면 읽는 것이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한데, 뭐 국내 소개가 늦은 탓이 크겠죠? 여튼 표제작 "11인이 있다!"와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이라는 두 편의 중편과 함께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의 "스페이스 스트리트"라는 짤막한 개그 꽁트가 실려있더군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오래된 걸작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시간이 흐른 탓에 명성만큼의 재미나 가치를 느끼기는 어려운건 모든 고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이겠지요. 가끔, 정말이지 아주 가끔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 있기는 한데, 이 작품은 그럴 정도의 명작은 아닙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좋은 번역과 디자인으로 국내에 소개하여 주신 출판사 세미콜론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나 가격이 너무 쎄요. 정가가 거의 만 원이라니! 할인된 금액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이른바 "가성비" 측면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한 번쯤 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 만큼 아직 읽지 못하신 장르문학(만화) 팬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지 나름 시대를 앞서간 반짝이는 부분은 확실히 있으니까요. 가격 부담만 없으시다면...

간단한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1인이 있다!"

동명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우주대학 입학 시험을 그린 작품입니다.

10명의 수험생이 시험을 치루는 우주선에 11명의 수험생이 타고 있다는 기발한 설정 하나만큼은 최고입니다. 고립된 단체 속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설정은 흔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한 명이 수상하다!"라고 알려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품은 보기 드무니까요. "우주해적 코브라"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소위인지 중위인지가 두 명이라 둘 중의 한 명이 가짜다! 라는 이야기였는데...
어쨌거나 이 설정 하나 덕분에 우주선에 닥치는 갖가지 위기에서 서로 단합하기 어렵고 누가 11번째인지를 찾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기에 단순할 수 있는 입학시험이 흥미롭게 흘러가게 됩니다.

또 천편일률적이기는 해도 몇몇 캐릭터는 아주 괜찮았어요. 특히 여성이 될지 남성이 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의 히로인 프롤의 독특함이 기억에 남네요.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히로인입니다. "남자"가 될 것을 주장하는 히로인이라니!

허나 시대를 거스르기는 힘들었던 것일까요? 솔직히 이야기의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점은 초반 테스트에서 꽤나 강력해 보였던 타다의 초능력이 왜 먹히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 점입니다. 여기서 11번째는 충분히 밝혀졌어야 하지 않나요?
또 흥미로운 전개에 비해 11번째가 결국 자백(?)에 의해 밝혀진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설득력은 있지만 시시했거든요. 뭔가 단서라도 던져줘서 독자에게 함께 추리하게 만들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흥미로운 설정에 비하면 전개는 부족하고 결말은 시시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이러한 단점이 과연 시대가 흐른 탓인지, 아니면 애니메이션은 각색을 잘 했었던 것인지 궁금하네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

"11인이 있다!"의 후일담으로, 우주대학에 합격하여 훈련받는 타다 - 프롤 커플이 마야왕 바세스카의 초대에 응해 마야에 방문하나 급진파 - 전통파의 충돌로 전쟁 목전의 상황에 처한다는 이야기로 전형적인 SF 판타지 군웅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일 캐릭터를 등장시켜 약간 하드한 SF에서 판타지로 이어지는 구조는 초인 로크의 "신세계전대" - "빛의 검" 구성과 유사하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11인이 있다!"보다도 더 문제가 많습니다. 행성 마야의 위기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악당들의 음모도 유치하기 그지없으며,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과 그 와중에 낀 타다와 프롤의 행동 역시 별다른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또 타다와 프롤이 대체 이 사건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는지도 애매하고, 입학 동기인 4세의 죽음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다른 동기들의 활약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후일담치고는 부족한 점도 많아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페이스 스트리트"는 정말이지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이라 별점을 주기는 애매합니다만, 후일담 성격으로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2009/09/11

절벽 - 현재훈 : 별점 3.5점

거의 백만년만의 추리소설 포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새 너무 독서가 뜸했네요. 개인적으로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보니 책을 지긋이 읽는 것 자체가 좀 무리더군요.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이번에는 단편집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이 책은 저도 잘 몰랐던 한국 작가 현재훈님의 단편집입니다. 우연찮게 검색을 통해 알게된 작가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분들을 알게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척박한 국내 추리 문단에서 작품을 발표해 왔다는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쨌건 책 소개를 하자면, 이 책에는 "절벽", "곰팡이", "낙화", "검은 반점", "기만자", "부녀", "모래성", "흑무", "복제인간", "잠꼬대", "목소리", "족적" 이라는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몇몇 작품은 20여페이지 내외의 꽁트 분량이지만 양적으로는 풍성합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일본 사회파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독재시대인 80년대 당시의 분위기를 작품과 캐릭터, 설정에 드러내면서 이야기와 연관시키는 본격적인 사회파 작품은 아닙니다("검은 반점"에서 노동운동이 약간 표현되는 정도입니다). 분위기만 따라갈 뿐이지요. 그래도 황금만능주의를 주요 테마로 하여, 범행의 동기와 수사의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정통 사회파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낙화"나 "검은 반점"의 트릭은 작품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며, "부녀"나 "모래성"에서의 경찰 수사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한국 추리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을 심리묘사 중심으로 끌고나가는 문장력도 빼어납니다. 순수문학가 출신다운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네요. 한국적인 특색을 살린 몇몇 묘사들도 굉장히 반가웠고요. 그야말로 숨겨졌던 한국 추리문학의 재발견에 가까운 작품이랄까요.

그러나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큽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A"가 저지른 사건에는 "B"과 관련되어 있고 "A"와 "B"가 티격태격하다가 전혀 엉뚱한 "C"에 의해 사건이 밝혀진다.'는, 반전도 아닌 깜짝쇼에 의존한다던가, 결국 범인이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상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요.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들과 설정 등에서 지나칠 정도로 유사성을 보이는 점도 거슬렸던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표제작인 "절벽"의 예를 들 수 있겠죠. 이 작품은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권에 수록된 "수사권외의 조건"의 설정을 많이 따라했거든요. 사실 백영호라는 인물이 복수를 위해 "8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자신을 감추는 과정과 범행에 대한 디테일(상상이지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잠꼬대"라는 작품에서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과 주요 트릭을 언급하고 있으며, "곰팡이"는 "제로의 촛점"과 캐릭터 면에서 유사한 등 많은 부분이 겹칩니다.

그리고 작품마다 여러 고전과 명대사, 명언등이 언급되고 철학적 주제를 논하기까지 하는데 영 별로였습니다.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묘사를 들어내면 작품이 더 깔끔해졌을텐데 아쉽네요. "추리소설"이 그다지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70~80년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주 색다른 작품들이었고 좋은 독서였습니다. 비록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추리문학을 논할때 빼놓으면 안되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작품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의미도 크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85년도에 출간된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구하실 수 있다면 한번 찾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절벽

이승준은 과거 가난했지만 사장의 딸 홍정아와 결혼하여 출세했다. 그러나 과거의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하여 불륜을 저지르고, 과거 부하 백영호의 아내와도 불륜관계였다가 그 아내를 사망케하고 도주한 과거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백영호는 때를 기다린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출세하고 싶었던 가난뱅이 청년과 황금만능주의는 "아메리카의 비극" 등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테마죠.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출세를 위해 과거 교제했거나 임신한 여인을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출세하고 난 뒤에 불륜이 시작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지나치게 통속적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공범자가 있다는 트릭과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사회파 추리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백영호"라는 인물의 설정을 앞서 말했듯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따왔다는 점입니다.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곰팡이"

부유한 저명인사 허진영은 그녀의 과거가 양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학수라는 인물에게 협박을 당하는데.... 

6.25 동란때의 숨겨야 하는 과거와 현재가 밀결합되고 있는 점, 그리고 과거에서 파생된 범죄가 범죄를 낳는 점 등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과 사건 전개, 그리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촛점"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협박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어 같이 살해당한 여인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탐정역의 박상호라는 인물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단점이 아쉽습니다.

"낙화"

화가인 내가 작품 활동을 위해 머무는 산장에 친구 박희주 부부가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박군은 아내 문영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 처제 난영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문영이 산장 베란다 밑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다. 방은 밀실상태였고 문영의 손에는 박희주의 양복단추가 쥐어져 있던 상태였다. 

밀실 + 심리 트릭이 돋보이는 잘 짜여진 정통 추리물입니다. 지나칠정도로 치정극으로 치우쳐져서 통속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인물 설정과 상황 묘사들로 추리적인 매력이 많이 희석된게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동기와 트릭, 범행방법 모두 납득할만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결말부분에서 너무 "끝"을 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튀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작품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닙니다.

"검은 반점" 

신혼여행 중 신부 한미숙이 바닷가에서 실종된 후, 위도라는 섬에서 청산가리를 음독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가 입고있던 실내의가 바닷물에 오염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바닷물로 흘러간 상태는 아니었지만, 구역내의 어떠한 배도 위도로 여자를 실어다 준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시체가 어떻게 그 섬에 있을 수 있었을까? 라는 순간 이동 트릭을 테마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꿔치기 트릭도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바탕이 된 듯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범인이 시체를 은닉하거나 자연스럽게 유기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만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과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범인의 자백으로 작품을 마무리 지은 것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드네요.

"기만자"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과연 아내 희숙을 죽인것은 또는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경선을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C군은 어떻게 된 것인지가 뒤엉켜서 흘러가는 복잡한 작품이기는 한데 썩 재미는 없더군요. 참신한 시도는 눈여겨 볼 만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부녀" 

진아물산 사장 김인호의 큰딸이 밀실에서 청산가리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형사 김익수는 치밀한 수사 끝에 여러 정황증거를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되는데... 

과거의 사건에 의한 범죄라는 테마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이죠. 이 작품은 과거의 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다는 줄거리와 더불어 현재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치밀한 수사가 디테일하게 그려진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입니다.

작중에 경찰 스스로의 입으로 밝히듯 결정적 증거가 없다!라는 추리소설로서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결말도 범인의 자백으로 끝나는 등 "추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개는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수작입니다. 디테일한 수사와 여러 단서를 통해 유추해내는 추리가 무척이나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모래성"

H부동산의 회장 신병호가 자신의 저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수사관 한정수는 제한된 단서와 증언을 토대로 서서히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데... 

여러 용의자, 복잡하게 꼬인 단서들과 서로 다른 증언들이 교차되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사 추리물입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범행을 하기 전 똥을 누면 운이 좋다"와 같은 속설까지 작품에 끌어들일 정도로 세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속 불가능 범죄가 아닌 현실의 실제 있는 강도사건을 보는 듯한 자세한 상황 및 배경 묘사가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이나 침투경로, 새벽에 들은 소리, 왜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는지 등의 다양한 단서들을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던져주는 등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신병호의 과거와 현재, 강남 복부인들과의 관계라던가 실제 사건에서의 몇몇 미심쩍은 단서 등 벌려놓은 소재를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맺은 마무리 부분이 너무나 아쉽네요. 보다 긴 중편 이상 길이의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로 전개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추리문학의 고전으로 길이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말이 매끄럽지 못해서 평작에 머무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봄직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흑무"

문학교수 김용석은 학문에서 좌절하고 부인 이지영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여 술로 고독을 삼키던 중,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한 여인에게 끌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복수극이긴 한데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소품입니다. 주인공의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여인, 그에게 원한이 있는 범인 등 한번 수사를 한다고 치면 걸려들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범죄로 가장하기에는 너무 미흡하지 않나 싶더군요. 작가의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정도로 토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문학적인 이론과 평가가 난무하는 것은 내용에 혼란만 더하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복제인간 

2015년 서울 교외의 아파트촌에서 주미리여사가 살해당했다. 사건과 더불어 복제인간 유아 성추행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근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흉기가 총이라는 것과 복제인간 아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SF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게 특이합니다. 사실상 복제인간 아이라는 것도 "쌍둥이"라는 설정을 위해 가져온 것이니 만큼 별다른 것이 없어서 왜 근미래를 무대로 묘사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이야기 자체는 평이하고 예상대로 전개되기에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소품 수준의 평작입니다.

"잠꼬대" 

최건호는 아내 은영의 불륜을 의심하여 여러가지로 그녀를 시험해본다. 그러던 중 은영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숨지고, 사건은 자살로 판명되는 듯 하지만.... 

한마디로 "의처증"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집요하고 수법이 잔인한 편이라 좀 놀랍더군요. 시대를 앞서간 듯한 강박증에 대한 심리묘사도 대단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의처증 이외의 사건 전개는 너무 막 나가기에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건이 주요 전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끝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의처증 증세의 진상이 폭로되는, 즉 최건호는 의처증으로 의심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앞부분에서는 결백한 듯 했던 은영이 실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식의 전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목소리" 

박찬식은 사업과 연애의 라이벌이었던 정진호를 제거하고 그의 아내 미경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미경이 살해되고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자 박찬식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도청과 가명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피력되는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도청" 방법 이외의 추리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엔 무리가 있네요. 경찰의 수사로 인해 끝나는 결말 역시 많이 허무한 편입니다.

"족적" 

조숙경이 살해된다. 제1용의자는 불륜관계였던 화가 김기오. 그러나 김기오는 스스로 누명에 빠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 연상되는 이색단편입니다.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스스로의 진술을 사기친다는 설정이 동일하거든요. 하지만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으며 별로 공평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아서 굉장히 무리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음에도 기소하지 않는 황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평균 이하인 졸작입니다.

2017/01/02

문호의 식채 - 미부 아츠시 / 혼죠 케이 : 별점 2.5점

문호의 식채 - 6점
미부 아츠시 원작, 혼죠 케이 그림/대원씨아이(만화)

독신 기자 카와나카 케이조가 본사 정치부에서 후카가와 지국으로 좌천된 후, 메이지 시대 일본 문호가 즐겼던 음식을 소개하고 그에 얽힌 드라마를 탐구하는 기획 기사를 쓴다는 내용의 연작 단편 만화입니다. 총 6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등장하는 요리는 별로 대단치 않지만 해당 요리가 작가가 남긴 작품, 그리고 작가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시선이 생각보다 깊이가 있어서 놀랐습니다.

문제라면 등장하는 작품들이 별로 친숙하지 않다는 겁니다. 작가들도 반 정도 - 나츠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 를 제외하면 모르는 작가들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여러모로 색다른 식도락 만화로써 한번 읽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합니다. 일본 근대 작가들에 대한 공부가 뒷받침 된다면, 즐길 거리가 더 많을 것 같네요.

덧붙이자면, 후속권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만약 나온다면 좀 더 친숙한 작가가 등장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추리작가로 말이죠.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작가와 작품, 요리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츠메 소세키 "도련님" 모미지 야키 

마돈나로 대표되는 가짜 서양식, 가짜 근대의 대척점에 있는 유모 키요를 상징하는게 모미지 야키라는 내용입니다. 가짜 근대화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라는 해석인데 꽤 그럴듯합니다.

마사오카 시키 "앙와만록" 한 끼 식사. 

"앙와만록"은 먹는 것, 심지어 싸는 것까지 디테일하게 기록한 시키 만년의 일기라고 합니다. 누워서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작가가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다'는 것을 상기하며,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썼다는 식으로 풀어가는데 깊은 울림을 전해 주네요. 

재료를 따지거나 화려함보다는 소박한 밥상을 추구한 삶은 하이쿠에서 기교를 거부한 시키의 작품과도 닮았다고 하는데 과연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지도 궁금해지고요. 조금 찾아보니, "고추잠자리, 추쿠바에 구름도, 한 점 없구나" "어린 연어가, 둘로 나위어, 오르는구나" 등의 시가 검색됩니다. 형식에 집착한 하이쿠에서 현실을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 시로 표현해 나간 최초의 인물이라고 하는군요. 운율과 발음 모두 굉장히 일본적인 시라 한국어로 번역하면 여러모로 애매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시대를 열은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히구치 이치요 "탁류" 카스텔라 

이 시리즈의 또다른 주제인 "작가가 먹었던, 혹은 작품 속에 등장한 음식은 무엇인가?"에 가장 충실했던 에피소드입니다. 약간 식탐정스러운 분위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히구치 이치요가 다녔던 학교 선배가 쓴 소설 속에 등장한 카스텔라는 "후게츠도 (風月堂)"의 것으로 아마 히구치 이치요도 먹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탁류"의 주인공인 창부 오리키가 산 카스텔라는 후게츠도의 것과 같은 고급이 아닌 빈민가에서 팔았을 "닌교야키" 였을 것이다'라는 일종의 추리가 등장하는 덕분입니다. 그냥 허튼 소리도 아닙니다. 가게 이름은 모르겠지만, 이치요 사후 그녀의 집에 하숙한 소세키의 제자 모리타 이치요에 따르면 축제날 근처에 닌교야키 포장마차가 와 있었다는 글을 남겼다는 식으로 증거에도 충실하거든요. 이 정도면 한편의 짤막한 추리 꽁트로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가이 카후 "단장정일승" 비프 스튜, 치킨 리버 크레올 (애리조나 키친), 카시와 남반 (오와리야), 야나가와 나베, 누타, 초시 1병 (이다야), 돈가스 덮밥, 오신코, 초시 1병 (다이코쿠야) 

이른바 '단골'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신선합니다.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아 별다르게 주문하지 않아도 똑같은 음식이 나오는, 그게 단골이고 편하다는 논리는 꽤 새로왔어요. 나이든 카후가 기름진 음식을 고집한 이유, 즉 젊은 시절의 노스탤지어라는 것도 나쁘지 않은 해석이고요.

하지만 이러한 논리와 해석보다 이 에피소드가 중요한 것은 유일하게 등장하는 모든 음식을 아직 남아있는 가게에서 먹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재현' 측면에서 그야말로 압도적이죠. 언제 일본을 또 가게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기회가 된다면 '애리조나 키친'은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

그러고보니 "술 한잔 인생 한입"에서도 소다츠가 카후의 식도락 순례를 똑같이 하던 에피소드도 떠오르네요. 거기서는 '나가이 가후'라고 소개되었지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혼죠 료코쿠" 쿠즈모치 (후나바시야) 

굉장히 짤막한 내용입니다. 수필 "혼죠 료코쿠"는 아쿠타가와가 자살 2개월 전 마지막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작품 치고는 묘하게 밝다고 하네요. 여기서의 해석은 어린 시절, 정든 고향을 떠올리며 쓴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겁니다. 등장하는 음식점이 아직도 실존하고 있어서 찾아가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은 나가이 카후 에피소드와도 같고요. 단, 멧돼지 전골 등 딱히 땡기는 음식이 아니라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그냥저냥한 평작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비잔" 비잔 세트 (장어 덮밥 세트) (와카마츠야) 

다자이 오사무는 그 속마음을 당쵀 알 수 없는 작가라는 결론이 전부였던 작품. 상당히 허무했습니다. 다른 에피소드에 비하면 내용과 깊이 모두 찾아보기 어렵고요. 다자이 오사무라는 유명 작가를 등장시키기 위한 목적 외의 가치를 찾아보기는 힘들었습니다. 이 책 수록작 중에서 워스트입니다.

2019/12/20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에드 멕베인 외 / 이리나 : 별점 2점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 4점
에드 맥베인.로런스 블록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북스피어

미국 뉴욕에는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유명한 '미스터리 서점'이 있습니다. 유명 추리소설 편집자이자 비평가인 오토 펜즐러가 운영하는 서점으로 1979년에 문을 열었다니 올해로 40년이 되었네요. 이 책은 오토 펜즐러가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서점 고객들에게 선물로 증정했던 소책자에 수록되었던 단편들을 모아 엮은 단편집입니다.

오토 펜즐러의 말에 따르면, 소책자용 이야기의 기준은 세가지였다고 합니다. 첫번째는 이야기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할 것, 두번째는 당연하겠지만 미스터리를 포함할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적어도 몇몇 장면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어날 것이 그 기준입니다. 이 책이 국내 첫 출간될 당시, 책을 펴낸 북스피어가 이벤트삼아서 이와 유사한 조건의 꽁트를 모집했었습니다. 저의 짤막한 글도 다행히 선정되어 "작가의 수지"라는 멋진 책을 경품으로 증정받았었죠. 그러나 이벤트가 당첨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선뜻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오토 펜즐러가 자신의 서점 고객용으로 준비한 글을 엮었던 "라인업" 같은 경우, 소설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 생각하고 있다가 드디어 올해 크리스마스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네요.

일단, 작가진은 굉장히 화려합니다. 오토 펜즐러의 유명세와 인맥 덕분이겠죠. 도널드 E 웨스크레이크, 로렌스 블록, 에드워드 C 호크, 에드 멕베인, 토머스 H 쿡, 메리 히긴스 클라크 등 제가 소개했었던 유명 작가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가득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오토 펜즐러가 고전 본격물 스타일의 탐정 역할을 소화하는 작품마저 있을 정도에요. 미스터리 서점이 사건의 무대가 되고, 서점 직원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많고요. 오토 펜즐러가 내세운 기준 때문이겠죠. 마찬가지의 이유로 미스터리 서점에서 열리는 파티를 소재로 한 작품도 제법 되는 편입니다.

허나 이러한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 팬, 고객을 위한 서비스적인 묘사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볼만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이야기의 완성도가 낮은 탓입니다. 오토 펜즐러가 내 건 조건들도 작위적으로 충족시킬 뿐이에요. 특히나 미스터리 서점에서의 흥청망청 크리스마스 파티는 영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희귀본을 수집하는 수집가가 자신의 서재에 술취한 손님들이 들어오는 파티를 연다는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솔직히 전체 평균내면 2점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나마 반올림한 점수죠. 수많은 추리 작가, 추리 소설들이 인용되고 작품 속에서 활용되는 것을 보는 재미는 괜찮았지만 극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점수를 주기가 민망한 수준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작가들의 명성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상황인데, 작가들 역시 단순한 팬 서비스 정도로 여긴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토 펜즐러와 미스터리 서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특정 작가의 팬이라도 마찬가지고요. 몇몇 괜찮은 작품이 있기는 하나 극소수거든요. 나중에 e-book으로 각 단편들이 분철되어 판매되면 고려해 보시길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에 소개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표지 디자인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아요. 크리스마스라기 보다는 할로윈에 가까운 느낌입니다.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일러스트보다는 그냥 깔끔하게 서점 + 크리스마스 소품이라는 미국 원작 스타일 표지였다면 판매는 조금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낌없이 주리라"

도둑 도트문더가 크리스마스날 맨해튼 호텔에서 고대 주화를 훔쳐 달아나다가 우연찮게 '미스터리 서점'에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주인 오토와 다른 일행들의 착각으로 그들이 벌이는 포커판에 끼어든 도트문더는 정직하게 게임을 해서 240달러 정도를 땄다. 그러나 경찰이 출동하여 수상한 사람에 대해 탐문하는데....

걸작 "도끼"와 유쾌한 케이퍼 소설 "뉴욕을 털어라", 묵직한 복수극 "인간 사냥" 등으로 잘 알려진 유명 작가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단편. 좋은 단편도 여러 편 발표했기에 작품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습니다. 마침 국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뉴욕을 털어라"의 주인공인 도둑 도트문더가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수수께끼는 딱 한가지, "왜 오토와 친구들은 도트문더를 경찰에 고발하지 않은 것일까?" 인데 그 진상이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거든요. 이유는 바로 도트문더가 240여달러의 돈을 땄기 때문이죠. 도트문더가 체포되면 포커판은 깨지고 돈도 다시 찾을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도트문더가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오토와 친구들에게 돈을 잃어주기로 결심했다는 결말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포커판의 유지가 중요했다면, 240여 달러를 다시 잃는 것 보다 오토와 친구들의 돈을 모조리 따는게 게임을 끝내기에 더 현실적인 방법이니까요. 돈은 게임이 끝나고 공평하게 돌려주면 되잖아요? 돈을 다 따거나, 아니면 240여 달러를 다 잃거나 어느 쪽이건 게임이 끝날 때 오토와 친구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기도 하고요. 아울러 크리스마스날 일어난 사건일 뿐, 크리스마스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주제에 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 깊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쓴, 오토 펜즐러의 세 가지 기준에만 맞춘 졸작입니다.

"계획과 변주"

희귀 서적 중개인이 뉴욕에서 차례로 살해당했다. 파로아 러브 형사는 그들의 죽음이 대실 해밋의 잃어버린 원고인 "마른 여자"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고, 자신의 친구 오토 펜즐러를 찾아가 책 수집상 와일리 에머슨을 함께 찾아가 보자고 부탁했다. 와일리 에머슨이 "마른 여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와일리 에머스는 "마른 여자"라는 원고는 본 적도 없다며, 자신을 찾아왔던 수집가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오토는 와일리 에머슨이 썼다는 원고 뭉치를 들고 나오는데...

흑인 동성애자 형사 파로아 러브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저술한 조지 백스트의 파로아 러브 단편. 크리스마스가 배경이기는 하나 이야기에 영향을 주는 부분은 없습니다. 대실 해밋의 "마른 여자"라는 원고를 와일리 에머스가 숨긴채 가지고 있던 이유도 썩 납득이 되지 않고요. 원고를 쫓는 악랄한 무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다는데 어차피 돈 받고 팔 생각이었다면 마찬가지 결과였을텐데 말이죠. 게다가 범인이 오토 펜즐러 서점의 매니저 알렉스였다는 진상도 뜬금없습니다. 나름의 복선이라고 등장하는건 찢어진 청바지와 원고를 노리는 도라를 배웅해 주었다는 것 뿐이라 억지스러웠어요.

한마디로 단편에 적합하지 않은 이야기를 무리하게 펼쳐낸 느낌입니다. 조금 더 길게, 상세한 설명을 더하여 풀어냈어야 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녹슨 책갈피 도난 사건"

닉 벨벳은 크리스마스 주간에 고등학교 때 친구 찰스 오닐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의뢰는 오토 펜즐러에게 판매한 대량의 헌 책 속에 끼워진 금속 책갈피를 훔쳐와 달라는 것이었다. 닉은 택배기사로 변장하여 서점에 잠입한 뒤, 책갈피를 빼내오는데 성공하는데...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단편의 제왕 에드워드 D. 호크의 단편. 시리즈 캐릭터인 괴도 닉 벨벳이 주인공입니다. 확실히 제왕다운 작품이에요. 오토 펜즐러의 어떻게 보면 무리한 요구를 모두다 들어주면서 완성도까지 높은 수작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크리스마스라는 시즌을 유효적절하게 써먹고 있는게 눈에 뜨입니다. 크리스마스라 바빠서 닉의 변장이 잘 먹혔거든요. 오토 펜즐러가 대량의 추리 소설을 구입한 것과 그 탓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책갈피를 훔치게 되는 과정도 그럴듯합니다.

또 녹슨 책갈피를 거액의 수고비를 지불하면서까지 훔치게 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도 인상적입니다. 사실 진상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요. 앞서 찰스의 여동생 마시의 남편이 목을 칼로 베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가 이미 상세하게 설명되니까요. 그래도 '구리는 녹슬지 않는다. 이건 부식한게 아니다!'라는 닉 벨벳의 착안과 이를 통해 진상을 끌어내는 추리는 꽤 그럴듯합니다. 자수하라는 닉의 제안도 깔끔하고요.

무엇보다도 닉이 택배기사로 변장할 때, 위장을 위해 준비했던 여자친구의 추리소설들 중 한 권 - 놀랍게도 수 그래프턴의 "알리바이의 A" - 이 꽤나 값나가는 작품이었다는 결말이 아주 크리스마스답습니다. 오토 펜즐러씨가 횡재했다는 결말인데, 원고도 써 주고 덕담까지 해 준 셈이니 에드워드 D.호크는 상당한 대인배였던 것 같네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 오토 펜즐러의 기획 의도에 정확하게 부응하는 작품입니다. 완성도를 떠나 이 정도로 의도를 잘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역시 대가는 대가구나 싶네요.

"모작 살인 사건"

안 팔리는 아동 추리소설가 루페 페티코드는 자신의 교육 센터 창작 수업 수강생이 검토를 요청한 원고에 홀딱 반했다. 그 원고를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넘겨 선인세로 거액을 약속받은 루페는 원작자 도라 윔블러를 어쩔 수 없이 살해하는데...

잘 모르는 작가인 론 굴라트의 작품. 다른 누군가의 작품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기 위해 원작자를 살해한다는 이야기는 많을겁니다.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럴듯한 동기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은 좋아보였던 도라 윔블러의 작품도 사실은 '도작' 이라는 진상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 덕분에 기존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옛 고전물을 떠올리게 만드는 걸작이라고 칭송받지만, 사실은 고전물의 모작에 불과했던 것이죠! 정말 유쾌하면서도 인상적인 반전이었습니다.

루페 페티코드의 나름 절박한 현실, 작가로서의 뒤틀린 긍지와 복수심이 만화적으로 과장되어 있는게 옥의 티이기는 합니다. 너무 스테레오 타입의 묘사였거든요. 반전 외의 모든 전개 역시 스테레오 타입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뻔했고요. 그래도 반전만으로 모든게 용서되는 작품. 별점은 3점입니다.

"이보다 더 어두울 순 없다"

네로 울프를 추종하는 탐정 레오 헤이그의 조수이자, 그가 해결한 사건들을 소설로 발표하는 칩 해리슨은 오토 펜즐러의 요청을 받아 '미스터리 서점'을 찾았다. 크리스마스가 끝난 직후, 귀중한 코넬 울리치의 육필 원고가 도난당한 사건을 해결해달라는 의뢰 때문이었다.

매튜 스커더 시리즈로 유명한 로렌스 블록의 단편. 매튜 스커더 시리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코믹한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특히 화자인 칩 해리슨의 거침없는 언변이 아주 돋보여요. 온갖 고전 추리소설을 비트는 독설, 그리고 오토 펜즐러가 흠모하던 여성과 하룻밤을 보냈지만 술 때문에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상황을 풀어낸 전개도 유쾌하고요. 오토 펜즐러에게 장난치기 위해 쓴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에요.

문제는 로렌스 블록답지 않은 유쾌함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다는 점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파티의 구실일 뿐 이야기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으며, 추리 역시 대단할게 없거든요. 용의자들을 불러 모아 순서대로 증언을 듣는걸로 사건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여섯명, 아니 일곱명의 용의자가 원고를 돌려보았으며, 마지막에 원고를 읽었던 연회업체 사장 진 보트레이가 오토 펜즐러의 침대 옆에 원고를 올려놓아 곧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진상은 허무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의 명성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졸작으로 로렌스 블록의 광팬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요정들의 선물"

보스턴에서 희귀 초판본 배달을 의뢰받고 오토 펜즐러의 '미스터리 서점'에 방문한 사설탐정 존 프랜시스 커디는 오토 펜즐러부터 새로운 의뢰를 받았다. 그가 수집한 추리 소설가들의 소장품이 동일 가격의 돈이 들은 봉투와 바꿔치기 당한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력한 용의자는 세 명의 추리 소설가였다. 존은 세 작가를 차례로 탐문한 뒤, 진상을 알아낸다.

진상은 림프종으로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작가 모리가 꾸민 장난이었다는 소품으로 오토는 손해본게 실제로 없기 때문에 진지한 범죄가 아니라 장난이라는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토 펜즐러를 피해자로 삼은 생생한 추리 소설을 오토 펜즐러에게 선사한다는 건 추리 소설가가 세울법한 계획이구나 싶어 재미있었습니다. 모리의 시한부 삶이 다음 크리스마스를 맞지 못할 것 같다는게 도화선이 되었다는 설정은 필요없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지만요. 이 설정 때문에 밝고 유쾌할 수 있는 작품의 분위기가 좀 묵직해졌거든요.

그래도 미스터리 서점의 주인과 그의 친구인 추리소설가들이 벌일법한 크리스마스 장난과 선물이라 단편집 주제에 꼭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엄마가 산타클로스 아저씨를 죽였어요"

어느 바쁜 크리스마스 오후,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는 앨런의 앞에 맥스라는 꼬마가 나타나 산타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기 시작했다. 

제목이 스포일러입니다! 제목이 다 망쳤어요. 맥스가 산타클로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할 때 부터 맥스의 엄마가 산타클로스를 죽였다는건 명백해집니다. 산타클로스의 정체가 대체로 아빠라는 점에서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동기도 대체로 짐작이 가고요.

물론 추리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잔뜩 등장하는 전개는 볼만 합니다. 특히 서점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인 2급 형사 로지의 말이 기억에 남네요. '경찰 소설을 쓰는 작가 중에 정작 경찰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데, "87분서"> 시리즈로 일세를 풍미한 작가 스스로에 대한 자학개그로 느껴졌거든요. 역시 로지가 고양이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싫어한다면서 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고양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말도 굉장히 와 닿았고요. "삼색털 고양이" 시리즈는 솔직히 첫 편을 제외하고는 엉망이었죠. "펠리데"는 괜찮았었지만요. 또 범죄물의 거장 에드 멕베인답게 맥스의 엄마가 서점에 나타나는 장면의 긴박감도 꽤 훌륭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제목만 조금 비틀어서, 은유적으로 표현했더라면 훨씬 나았을텐데, 에드 멕베인답지 않은 안일한 구성이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동방 박사의 간계"

오토의 손님 키티는 오토에게서 한 희귀본의 완벽한 표지를 가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 오토를 위해 희귀본을 완벽하게 만들어 선물하려던 키티는 그 남자 가토의 방에 잠입하여 표지를 빼내 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물용 희귀본 "바깥 화장실 가는 길"이 도난당한걸 알게 되는데... 

오토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두 도둑이 각자 서로의 희귀본과 표지를 훔친다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의좋은 형제"같은 내용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완성도는 낮습니다. 전반적으로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왜 오토에게 귀중한 희귀본을 선물하려고 하는지, 키티와 가토는 직업이 도둑인지 등 기본 설정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거든요. 둘이 자신에게 선물을 하려는걸 오토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고요. 또 오토가 둘이 그에게 선물하려던걸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흘린 정보로 둘이 각자 상대방이 가진 물건을 훔쳐내리라고 예상하는건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게 둘의 인연을 이어주려는 오토의 계획이었다니! 억지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했어요.

크리스마스, 선물, 해피엔딩 등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어울리는 소재들을 잔뜩 가져다 쓰기는 했지만 이래서야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내 목표는 신성하니"

윌슨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스터리 서점을 방문한다. 삼촌에게 고가의 책을 선물하려 한다는 핑계를 대고 오토 펜즐러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목적은 선물 구입이 아니라 개인적인 복수였다...

오토 펜즐러에게 원고를 퇴짜맞은 후, 복수심에 사로잡힌 작가가 그를 죽이려 한다는 서스펜스 스릴러. 그러나 아쉽게도 긴장감이 잘 살아나지 않아서 서스펜스물로는 실격입니다. 정말로 윌슨이 오토 펜즐러를 죽이려고 했는지조차 모호하게 느껴질 정도니 말 다했죠.

그러나 마지막에 오토가 윌슨에게 지금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써 내면 고료를 주겠다고 구슬리는 장면의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대단한 반전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퇴짜를 놓은 평론가가 퇴짜를 맞은 작가에게 한다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로 느껴지거든요. 작가를 인정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잖아요?

그래도 별점은 1.5점입니다. 전개가 엉망이라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고양이 요정 스피릿"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찰서장 커디 맨검은 우연히 옛 인연이 있는 뉴욕 형사 로리를 만나 함께 오토의 미스터리 서점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가했다. 그리고 유명 작가 바트 웰스의 전처 클라우디아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는 미스터리 서점에 대한 떠들썩한 묘사는 볼거리입니다. 화자인 커디 맨검의 과장섞인, 허풍스러운 말투가 인상적인 탓으로 오토 펜즐러가 통이 커서 캐비어와 샴페인을 "전쟁과 평화"에서 보다도 많이 내 놓았다는 류의 말이 가득하기 때문이에요. 또 오토 펜즐러의 관심사, 미스터리 서점과 그곳에서 키우는 고양이에 대한 상세한 묘사 등은 작가가 오토 펜즐러를 속속들이 알고 있구나 싶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건은 너무나도 별볼일 없습니다. 장황한 파티, 여러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 후 시체가 발견되고 사건이 해결되기까지는 달랑 2페이지 정도로 마무리되거든요. 고양이 스피릿이 바트 웰스의 바지에서 귀걸이를 발견하는게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러한 고양이의 도움이 없었어도 범인이 드러나는건 어렵지 않았을거에요. 흉기인 샴페인 병에 바트의 피가 묻어 있었고, 동기마저도 명확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주인공의 장황한 대사만 돋보일 뿐, 추리적인 부분에서 아무리 봐도 점수를 줄 부분이 없다면 추리 소설이 아니라 무슨 스탠딩 코미디와 다를 바 없지요.

"크리스마스가 남긴 교훈"

프리랜서 편집자 베로니카 크로스는 박봉 때문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며 부수입을 챙겨 왔다. 그녀는 토요일마다 서점에 나타나 싸구려 중의 싸구려 소설인 브루노 클렘의 페이퍼 백만 찾는 손님 해리에게 도대체 왜 브루노 클램 책을 읽는지를 묻는데... 

토머스 H 쿡의 단편. 심리 묘사의 대가다운 진중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또 누구나 가졌을 법한 질문, 이런 싸구려 책을 뭐하러 읽는가?에 대한 깊이있는 답도 인상적이고요. 베트남 전쟁에서의 무자비한 살인으로 후유증에 시달리는 해리에게는 싸구려 페이퍼백, 펄프 픽션이 일종의 스카치 위스키나 마약과도 같은 효과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읽는다는게 그 진상인데, 이를 대단히 유려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 고급 문학만 읽는 베로니카 역시 이런 류의 고통 - 강한 증오심으로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후려쳤던 것 - 을 잊기 위해 책으로 도피하는게 아닐까 싶은 결말도 돋보입니다. 결국, 수준을 떠나 문학은 마약이라는 결론이랄까요?

문제는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신간이 나오지 않는 브루노 클램의 책 대신, 시리즈가 많은 다른 싸구려 소설을 권해주고, 베로니카도 누군가가 무언가를 원하는건 위안을 얻기 위해서라는 교훈을 얻는다는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딱히 흥겹거나 유쾌하지도 않고요. 또 미스터리라고 할 법한 내용이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아주 좋네요. 다른 졸작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후회하게 될 거에요"

미스터리 서점은 끔찍한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오토 펜즐러의 유일한 희망은 미스터리 소설을 수집하는 백작 부인이 찾는 "데인 가의 저주"를 찾아내어 판매를 성사시키는 것 뿐. 다행히 크리스마스에 책을 구하는데 성공하지만 백작 부인에게 건네기 전, 책을 분실해 버리고 마는데... 

오토 펜즐러의 아내라는 아동 도서 작가 리사 미쉘 앳킨슨의 이야기. 크리스마스에 미스터리 서점에서 벌어진 미스터리라는 조건은 충족시키지만 완성도는 별로입니다. "데인 가의 저주"가 사라진 이유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어요. 급료 없이 스티븐 킹의 신간 스릴러를 원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마지막 근무와 책을 숨기기 위해 스티븐 킹의 표지를 덮었다는 묘사가 합쳐지면 그 답은 너무나 뻔하잖아요. 게다가 백작 부인이 고가의 컬렉션을 오토 펜즐러에게 남기고 사고로 죽는다는 결말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것도 순록이 끄는 썰매에 치어서 죽는다니,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도저히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긴 겨울의 한잠"

프리랜서 사진가였던 '나'는 오토 펜즐러의 도움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빠져나와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맞은 첫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아래층 화장실을 방문했던 산타클로스의 시체를 발견한다. 산타클로스의 정체는 서점 직원 알란이었다. 

셜록 홈즈 원고가 동기인 고전 본격물 스타일의 정통 추리 단편. 오토 펜즐러가 직접 탐정역을 수행하는게 독특했습니다. 전개, 특히 셜록 홈즈와 비슷한 추리쇼를 펼쳐가면서 범인을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 등에서 고전 본격물을 잘 흉내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흉내에 그칠 뿐이라 아쉽습니다. 고전물 만큼의 정교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수께끼인 "왜 희귀본을 창고에 넣는다고 했던 알란이 산타클로스 옷을 입은채 살해되었는가?"부터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으니까요. 당연히 산타클로스가 알란을 죽이고, 옷을 갈아입힌게 뻔하잖아요? 그렇다면 산타클로스는 누구냐는 수수께끼가 남는데, 여기서 억지스럽게 이야기가 비약해 버리고 맙니다. 시체 발견이 계기가 된 튜바 연주자 더그가 범인으로, 그는 시체 근처에 떨어진 튜바의 밸브 오일을 감추기 위해 다시 현장을 방문했다는 설정인데 이건 말도 안되죠. 현장을 무사히 빠져 나왔다면 다시 돌아가서 증거를 인멸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그냥 도망가버리면 되지요. 현장의 튜바 밸브 오일이 그렇게 대단한 단서가 될 수도 없었을겁니다. 애초에 서점에 나타나지 않은걸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여러모로 부족했지만, 고전 본격물에 대한 팬심으로 조금은 후한 점수를 줍니다.

"콜드 리딩"

미스터리 서점에서 일하는 로저의 특기는 손님들을 파악하여 그들이 원하는 책을 권해주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크리스마스 이틀 전, 매들린 커크라는 아가씨가 나타났다. 유명 작가였던 할머니 매들린 커크 (동명이인)의 미발표 원고를 발견하고 그 값어치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로저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원고를 확인하기로 약속하는데, 원고를 빼앗기 위해 누군가 그녀를 습격한다. 로저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해낸다.

서점 손님을 보고 그들이 원하는 책을 추리해낸다는 로저의 특기는 재미있습니다. "시인장의 살인"에서 학생 식당 손님이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추리 배틀을 펼치는 아케치 교스케와 하무라 유즈루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저는 별로였지만 존.D.맥도널드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가 중요 소재로 등장하여 관련된 정보가 사건 해결의 중요한 열쇠가 되는 등 추리 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도 인상적이었고요.

문제는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라는 일상계스러운 추리라면 모를까, 폭행 납치에 살인 미수까지 벌이는 범인을 추리하기에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범인인 맥도널드 팬을 특정하는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이를 위한 복선도 없지는 않고요. 그러나 단편 소설 분량에서 쉽게 풀어낼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크리스천 킬러"

지능은 좀 떨어지지만 사람 죽이는 일에 충실한 킬러 사케시언은 독실한 크리스천. 어느날 자신의 타깃인 스티븐의 여동생을 진짜 천사로 착각한 뒤 살인을 그만두는데...

크리스천 킬러가 천사 분장을 한 타깃의 여동생을 만난 후 살인을 그만두지만, 또 다른 킬러의 살인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봐도 "레옹"이 떠오르지요? 우직한 킬러 사케시언, 살아있는 천사같은 헤일리 캐릭터도 딱 그러하고요. 마지막에 사케시언이 죽고 마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별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에요. 타깃인 인간 쓰레기 스티븐이 살아남는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딱 한가지, 사케시언이 죽기 전 진짜 천사를 보았다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 뻔하지만 극적인 전개에 이 결말을 더하면 평작 수준은 되다고 보여지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오토 펜즐러의 조건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작품이에요. 특별히 수수께끼가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칠십네번째 이야기"

미스터리 서점에서 칠십 세가지 이야기가 수록된 단편집을 구입한 주인공은 책에 수록된 "어셔가의 몰락"을 읽은 후,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드는 아래층 한국인 편의점 주인을 트렁크에 넣어 땅에 파 묻는다... 

영미권 작품에 흔한, 1인칭 시점의 정신병자가 등장하는 사이코 스릴러. 하지만이 작품의 주인공은 사이코패스 이기는 한데, 지능지수가 너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어린 시절에 저질렀던, 동물들을 땅에 파묻던 행동을 범죄와 연결시키는데 발상이 지극히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별다른 동기도 없는 충동적인 행동이라는 점도 그러하고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루스 렌들같은 심리 묘사를 선보였다면 나름 볼만한 작품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묘사 역시 전혀 그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마지막 목격자로 오토 펜즐러와 서점 직원을 등장시킨 건 명백한 패착입니다. 지나치게 억지스러웠어요. 때문에 별점은 1점입니다.

"이름이 뭐길래"

전직 공중 곡예사 렉시 스미스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할머니의 유언으로 그녀가 퇴짜맞았던 원고들을 쓰레기 봉투에 담아 내 놓은 뒤, 친구 알비라의 사인회로 향했다. 사인회가 끝난 뒤, 사인회장이었던 미스터리 서점의 오토 펜즐러와 파티를 가지게 된 렉시는, 그곳에서 할머니의 작품 중 한 편이 유명 작가의 작품과 5년 전에 바꿔치기 되었다는걸 알고 경악한다. 

서스펜스 스릴러물로 유명한 메리 히긴스 클라크의 단편. 작은 애완동물들을 사랑하고 추리 소설가를 지망했던 할머니 캐릭터 설정이 귀여웠던 작품입니다.

문제는 특별한 반전이 있는건 아니며, 할머니의 작품이 사실은 대단한 걸작들이었다는 결말이 지나치게 안일했다는 점이죠. 렉시가 전직 곡예사였다는 설정도 딱히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아니고요. 분쇄될 뻔 했던 봉투를 더 극적으로 회수했었어야 했어요.

그래도 크리스마스 특별 단편이니 이 정도는 눈감아줄 만합니다. 전개도 깔끔하고 시원시원해서 읽을 만 하고요. 완성도보다는 분위기가 적당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1/06/14

백주의 악마 - 애거서 크리스티 / 하영진 : 별점 4점

백주의 악마 - 8점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김윤정 옮김/황금가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영국 래더콤만에 위치한 졸리 로저 호텔을 찾았다. 그들 중 케네스 마셜 대위의 아내 알레나는 엄청난 미인으로, 주변 남성들을 본의아니게 유혹하는 존재였다. 갓 결혼한 패트릭 레드펀이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녀에게 열중하여 여행객들 사이의 갈등은 깊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알레나가 해변 근처 섬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제목은 왠지 예스럽고 촌스럽지만 원제도 Evil Under The Sun! 책 뒤 해설을 보니 '마더구스 동요'에서 따온 제목이라 하네요. 찌는 듯한 태양 아래 휴양지에서의 악마의 소행같은 범죄를 다룬 이 작품에 정말로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소설도 명작이지만 피터 유스티노프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가 더욱 잘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죠. 저 역시도 영화로 먼저 접해보았기에 그간 독서를 미루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트릭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겁니다. 일종의 '순간 이동 알리바이 트릭'인데 지금 읽어도 무릎을 칠 만큼 기발합니다. 영화를 볼 때도 감탄스러웠지만 원작도 감동이 남달랐어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하나씩 주어지는 사소한 단서들을 모아서, 놀랍지만 사실일 수 밖에 없는 결론을 내리는 포와로의 추리는 작중에 언급된대로 그야말로 '퍼즐을 맞추는 듯한' 고전 정통 본격물의 미덕을 제대로 전해주고요. 이런 단서는 독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공정성 측면에서도 백점 만점을 주어도 충분합니다. 포와로의 기이한 언행 묘사를 통해 진짜 명탐정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실히 각인시켜 주는 것도 매력적인 요소였습니다. 한 마디로, 여러모로 추리소설 애호가로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물론 전개에서 아주 약간의 허술함이 느껴지기는 합니다. 범인들이 옭아매려 한 유력한 용의자의 알리바이가 우연찮게 증명된 이후에도 사건의 전개가 너무 범인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점입니다. 우연이 너무 심하게 겹쳐요. 막판 추리쇼의 기반이 되는 린다의 자살 소동도 좀 지나친 감이 들어 거북했고요. 그리고 증거가 없다고 운운하며 추리쇼를 펼치는데, 사진을 가지고 범인들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설득력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변치않는 정통 고전 추리소설의 묵직하면서도 충실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30년대 고전 황금기 시대를 대표하는, "왕도"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뒤에 실린 정말로 짤막한, 꽁트 수준의 단편 "말벌집"도 정통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심리 드라마지만 완벽한 범죄계획과 상황에 잘 맞는 해결이 존재하기에 걸작의 여운을 즐기는 식후 디저트로서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도 다시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2010/11/24

꽁트 - 우리 동네 이야기

이거 참 황당해서.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 얘기 좀 들어봐.

우리 동네에 인간말종 노숙자 같은 동네왕따 상거지가 한 명 살고 있어. 근데 얘가 내 친척이야. 오래전에 대판 싸우고 의절하기는 했지만. 어쨌건 그래서 우리 옆집에 터 잡고 살고 있어. 문제는 담뱃값 좀 달라, 소주 먹고 싶다, 이러면서 가끔 행패를 부리는 거야. 고성방가는 물론이고 우리 집에 돌을 던지든가 빈병을 던지든가 하는 식으로.

그래도 얼마 전까지 불쌍하기도 해서 좀 챙겨줬기 때문에 조용했었어. 그런데 최근에는 화가 나기도 하고 돈도 아까워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거든? 그랬더니 역시나 다시 뒤숭숭하더라고. 최근에는 가족문제도 좀 있는 모양이고.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는 아예 작정하고 소주병을 나한테 바로 던지더라고! 정통으로 맞아서 피도 나고 눈이 핑 돌데? 이건 좀 심하잖아! 나도 열받아서 병을 바로 집어던지는 식으로 맞섰지. 녀석도 맞은 것 같긴 한데 얼마나 다쳤는지는 잘 모르겠고... 솔직히 지금 아파 죽겠고 마음 같아서는 아예 잘근잘근 밟아서 반 죽여버린 다음에 동네에서 영원히 쫓아내고 싶어. 자랑은 아니지만 싸우면 당연히 내가 이길 것 같긴 하거든.

그런데 싸워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문제야. 일단 쟤 칼 갖고 있어. 나도 다칠지 몰라. 게다가 얘가 가끔 동네 사람들한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빈 통 안에 휘발유 들어 있다. 나 건드리면 확 불 싸지르고 나도 죽을 거다 하는 식으로 얘기하고 다니곤 했거든. 동네 경찰 아저씨가 몇 번 확인하고 수거도 해 가기는 했는데 아직도 저 통 안에 뭐가 있는거 같아. 혹 쫓겨나기 전에 불이라도 확 싸지르면 어떡해? 우리 집과 내 가족은 물론이고 최신식 삼성 TV와 현대차, 기타 등등 전재산이 날아가면 나도 망하는 거잖아.

그렇잖아도 어제 한판 싸웠다는 소문 도니까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 근처에 가지 말라고, 우리 집 애랑 놀지 말라고 주의주는 판이라 동네에서 큰소리 좀 치는 형님들에게 도움은 청해봤는데 별 소용 없더군. 가끔 저 상거지 깡패 돌봐주는 옆집 중국집하는 형님도 웬만하면 좋게좋게 넘기라고 하고 있고 우리 집 앞에 CCTV 설치해준 쌀집 아저씨 (별로 고맙진 않아. 관리비나 전기료는 내가 내니깐) 도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느냐고 하더라고. 하긴 그동안 경찰이나 형님들도 어쩌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뭐가 바뀔리는 없겠지.

하아~ 이럴 거면 속은 엄청 쓰리지만, 그냥 담뱃값이나 주면서 달래줄걸 그랬나 봐.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 노숙자 깡패 원수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2006/05/15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 걸작선 - 이경재 / 정태원 : 별점 2점

에도가와 란보상 수상작가걸작선
이경재 옮김/명지사

에도가와 란보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단편을 모아놓은 앤솔로지입니다. 총 1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니시무라 교타로와 니키 에쓰코의 작품이 2편씩 실려 있기 때문에 소개된 작가는 9명입니다.

그러나 에도가와 란보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작가들의 단편 (수상작이 아닌!)을 아무 생각없이 수록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작품 수준 편차가 심하고 작품들의 성격도 천차만별이더군요. 이렇게 소개할 바에야 실제로 에도가와 란보상을 수상한 작품을 시리즈로 하나씩 출간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또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 아닌 작품도 여러편 실려 있어서 신선함도 많이 떨어집니다. 그나마 그 작품이 모두의 공감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지만 진슌신의 "얼룩 화필" 같은 작품은 이렇게 많은 앤솔로지에서 소개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은 아닌데 솔직히 의외에요. 니시무라 교타로의 "친절한 협박자"역시 마찬가지고요.
무엇보다도 작품의 존재 의미를 알 수 없는 졸작들, 도가와 마사코의 "잠자는 추녀"라는 맥락 없는 어설픈 작품과 추리 퀴즈용 꽁트 수준으로 보이는 "홍콩 힐튼 살인사건" 이 두편은 정말이지 이런 앤솔로지에 속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요. 도가와 마사코는 자기 자신이 좀 환상적이고 기묘한 설정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되는지 예전에 읽었던 "노란 흡혈귀"와 비스무레한 설정으로 작품을 써 내려간 것 같은데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발상과 전개를 보여줍니다. 이건 단지 제 취향과 맞지 않다고 보기 이전의 문제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으니까요.
또 "홍콩 힐튼 살인사건"은 뭐 작품 자체가 말이 안되는 수준이니.... 이런 수준 이하의 작품들을 어거지로 끼워넣는 것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 아닐까요?

그래도 니키 에쓰코의 "빨간 고양이" 는 정통 추리 단편의 전통과 설정을 잘 계승한 좋은 작품이라 생각되고 구사카 게이스케의 "꾀꼬리를 부르는 소년"도 섬세한 묘사와 더불어 이야기의 전개가 깔끔한 재미난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빨간 고양이"는 미스 마플의 일본판 재림을 보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는데 이 두 편이라도 최소한의 값어치는 해 주니 다행이었지 안 그러면 정말 화날뻔 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매니아와 일반 독자를 모두 노린 괜찮은 기획이긴 했지만 작품 수준이 어설퍼서 이도저도아닌 실패작이 된 듯 싶네요. 앞서 말한대로 란보상을 실제로 수상한 작품집으로 제대로 출간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니키 에쓰코씨의 데뷰작이자 란보상 수상작인 "고양이는 알고 있다"가 곧 출간된다고 하는데 이 작품이나 꼭 사 봐야 겠습니다.

PS : 이렇게 엄한 작품들이 하나둘씩 실려있는 앤솔로지보다는 추리 매니아들이 엄선한 단편만 실어놓은 앤솔로지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갑자기 드는군요. 아니면 매니아들이 한편씩 번역해서 싣는다던가.... 제가 번역한 "긴 추락"은 어떨까요?^^
한밤중의 살의 - 오타니 료타로
불륜관계에 있던 남자의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로 고민하던 주인공 가와베 유미코는 남자가 자신과의 정사 후 되돌아가 아내를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단서를 포착하는데...

꾀꼬리를 부르는 소년 - 구사카 게이스케
지방신문 기자 오케다니는 한 남자의 살해혐의로 체포된다. 피해자는 자신이 예전에 쓴 기사로 인해 집안이 몰락한 병원 가문의 외동아들. 오케다니는 자신과 밀회하던 다구치 히사에의 아들 마사오에게 농담삼아 한 말로 꼬투리를 잡히지만...

수험 지옥 - 니시무라 교타로
기무라 마사히코는 T대의 입시 시험날 늦잠을 자게된다. 그는 시험 시작 시간에 도저히 맞추어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학교에 한통의 전화를 걸게 된다...

친절한 협박자 - 니시무라 교타로
이발사 신키치는 뺑소니 사건의 기억으로 괴로워 하던 중 그 사실을 목격한 한 남자에게 협박받게 된다...

수직의 함정 - 모리무라 세이이치
다카무라는 아들 신이치가 산악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20여년 전 자신과 친구 에나쓰가 저지른 살인 때문이었던 것. 하지만 아들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고 결국 아들이 20여년전의 친구 에나쓰의 아들과 위험한 등반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얼룩 화필 - 진슌신
조직 폭력배의 살인현장을 목격한 화가가 그들에게 자살을 가장하여 살해당하지만 그는 한통의 유서와 마지막 유작을 남기는데 성공한다...

빨간 고양이 - 니키 에쓰코
누마데 다카코는 어렵게 살아오던 중 한 노부인의 말벗으로 취직하는데 성공한다. 노부인 이쿠씨는 70대 중반으로 몸도 불편하지만 사실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인물로 다카코의 어린 시절의 살인 사건의 진범을 알아내게 되는데...

엄마는 범인이 아니다 - 니키 에쓰코
어느날 엄마가 같이 사는 불량배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경찰에 잡혀가게 되지만 "나"는 엄마가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잠자는 추녀 - 도가와 마사코
도망친 아내가 한 병원에서 의식 불명의 상태로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구보다니 고지는 병원을 방문하여 기묘한 환경과 조우하게 되는데...

에노시마 비가 - 사이토 사카에
이시가미는 같은 아파트 단지의 직업 매춘부와의 관계를 끝내기 위해 그녀를 살해할 결심을 한다...

홍콩 힐튼 살인사건 - 도모노 로
추리소설 작가 이치무라 후미히데는 홍콩 여행 중 자신에게 실언을 한 호텔 직원에게 취중 폭언을 하게 되고 그 직원이 살해당하는 소설의 초고를 작성하지만 그 직원이 실제로 살해당하자 유력한 용의자로 몰려 체포당하게 된다...

2014/03/02

일년 반만 기다려 / 一年半待て (2010) : 별점 2점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을 TBS에서 드라마 스페셜로 영상화한 작품.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영상화도 수차례 되었는데 제가 본 것은 2010년도 버전입니다. 종전 직후를 무대로 한 원작을 현대물로 각색하였더군요.

짤막한, 거의 꽁트에 가까운 단편을 1시간 30분짜리 영상물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부가적인 것들로 이야기를 늘리고 있습니다. 덕분에 법정물 분위기가 많이 느껴지는게 특징이고요. 그것도 정통 법정물이 아니라 타키코 변호사가 머리카락을 잘라 현장에 버린다든지, 꽃집 총각을 빼돌리고 정보를 언론에 미리 흘리는 식의 페리 메이슨 스타일 느낌이라서 조금 신선했습니다.

가정 폭력의 증거로 블로그가 사용되는 등의 현대적인 설정도 괜찮았고, 원작에서는 순수한 선의로 움직이던 타키코 변호사가 영상물에서는 개인의 이득을 최우선시하는 속물로 그려지고, 사토코도 1억엔을 남에게서 훔쳐내는 식으로 악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도록 각색되었는데 이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진정한 승자는 타키코 변호사라는 결말도 인상적이고요.

그러나 확실히 원작보다는 별로에요. 사토코의 치밀한 계획이 원사이드하게 전개되는 빠른 템포의 원작에 비하면, 영상물은 길게 늘이기만 했을 뿐 딱히 재미있는 부분은 없는 탓입니다. 아울러 원작에서는 사토코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아 반전의 매력이 더 컸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고 약간은 뻔한 법정물이 되어버리면서 일사부재리 설정도 별로 부각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나쁘지 않았으나 그것을 살리지 못하는, TV 영상물의 한계로 보이는 저렴한 화면도 몰입을 저해합니다. 솔직히 화면만 봤을 때는 80년대 작품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짧지만 임팩트 있던 원작 쪽이 훨씬 좋았어요. 원작을 읽으셨다면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30분짜리 단막극으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2014/03/25

최후의 억만장자 - 박태원

인구 3,400명의 섬나라 트레몰로국은 위생시설이 완비되어 파리 한 마리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수천 마리의 파리가 나타나서, 경찰도 없는 소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억만장자 안단테 모데라토 옹은 범인 체포를 위해 명탐정 셜록 홈스 선생을 초청하는데...

소설가 박태원이 1935년 영화 "최후의 억만장자"를 보고 영감을 얻어 발표한 작품입니다. 즐겨찾는 부끄럼님의 블로그에서 읽고 포스팅합니다.

그런데 읽고 나서 좀 놀랐어요. 첫 번째 이유는 1930년대에 이미 이 땅에서 셜록 홈즈 패스티쉬가 창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홈즈가 수상한 동양 청년을 범인이라 단정하고, 그가 뤼팽의 변장임을 믿는다는 설정을 통해 일종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다는 점(심지어 가니마르까지 언급됩니다)이고요. 마지막으로는 박태원 본인의 창작물인 소설가 구보씨가 진짜 탐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존 인물을 탐정으로 내세운 가상 역사 추리소설은 많지만, 이렇게 창작물 속 캐릭터를 변주한 또 다른 창작물이 시도된 것은 국내 최초 사례가 아닐까 싶어요. 꽤나 유쾌한 호청년으로 그려져서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은 게 안타까울 정도이고요.

설정부터 개그스럽고(등장인물들 이름부터 그러하지요), 추리적으로는 패러디물에 가까운 탓에 딱히 언급할 만한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파리채와 파리약 분실과 룸바 종남작을 연결시키는 "독일산 파리채"라는 단서는 나쁘지 않더군요. 추리소설을 많이 읽고 쓴 느낌이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짧은 꽁트로, 한 십여 분이면 읽을 수 있는 만큼 고전 단편 추리물과 홈즈 시리즈의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당시 한국 추리물인 "괴남녀 이인조""마희"도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좋은 작품을 소개해 주신 부끄럼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09/03/16

최근 읽은 추리만화 감상

비밀 5 - 4점
시미즈 레이코 지음/서울문화사(만화)

이번 권은 두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네요. 그중 첫번째 이야기가 메인으로 "60년 전 유괴하여 살해한 죄를 자백한 한 시한부 인생 노인의 고백, 그리고 고백대로 시체를 발굴한 현장에서 20-2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성인 남성의 시랍화된 시체가 발견된 뒤 벌어지는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우연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었습니다. 시리즈의 팬으로서 감찰의 유키코의 재등장. 아오키의 프로포즈 등 세세한 볼거리는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왠지 시리즈 초반의 과학과 추리가 상상력과 잘 결합되었던 독특한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범행의 동기 역시 절절하긴 하지만 진부하기 그지 없었고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본 사건과는 무관한 최초의 유괴사건에 관련된 이야기가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키 경시정의 "추리" - 감찰의 유키코의 친구를 보고 내리는 추리나 시체의 자상을 통해 범인을 추리하는 것 등 - 가 상당히 돋보이긴 했고요. 

하지만 평작 이하 수준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그나저나 이 작품도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별점이 추락하는군요... (덧붙이자면, 두번째 이야기는 꽁트수준으로 짤막할 뿐더러 뇌 스캔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풍자하듯 다룬 작품이기에 별로 언급할게 없었습니다)


소년탐정 김전일 2부 8 - 4점
아마기 세이마루 지음, 사토 후미야 그림/서울문화사(만화)

한권짜리 단편입니다. 흑마술 살인사건이라는 부제인데 거창한 이름이 붙은 저택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극, 그것도 인형을 통해 연쇄살인을 미리 예고한다는 것과 같은 정통 미스터리적인 요소에 흑마술을 통한 오컬트적 분위기, 그리고 "지옥의 광대" 타카토 요이치까지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노리고 만든, 인기를 끌만한 요소를 그러모아 과거의 활력을 찾아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보이더군요 . 

그러나 사건의 동기 부분에서 기존 김전일 시리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구태를 반복하고 있으며,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줄만한 정교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독자에게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등 작품의 핵심 본질 자체가 별로 좋아지지 못했습니다. 정말이지 트릭은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었고요.

그래도 전작보다는 나은 수준이라는게 어찌보면 황당할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Q.E.D 큐이디 31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도 31권째네요. 이번 권에는 두편의 이야기가 실려있습니다. 가벼운 이야기 - 무거운 이야기가 보통 같이 실리곤 했던 전례처럼 첫번째 이야기는 연구 데이터 분실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살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가벼운 이야기 쪽의 트릭이나 구성이 더 좋았었지만 이번 권에서는 첫번째 이야기가 더 별로였습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전개가 납득되지 않는데 이유는 범인이 애시당초 사건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을테니까요. 또한 추리적으로는 정말이지 봐줄만한 요소가 없기도 해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작가 스스로도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죠. 

로키와 에바가 등장하고 미국을 무대로 한 스케일이 큰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팬으로서 즐겁게 읽었고, 우리나라의 "황우석 박사" 사건이 연상되는 등의 잔재미는 있지만 평작 수준에 못미치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나마 두번째 이야기는 조금 나았습니다. 일단 트릭이 괜찮았거든요. 간만에 본 "만화에 아주 적합한" 형태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식으로 트릭이 구성되어 있고 결말부분의 반전도 존재하기 때문에 추리적으로 즐길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작품 안에서도 밝혀지듯 동기가 너무나 약하며, 경찰의 적절한 증거에 대한 검사만 있었더라도 범인을 보다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는 점 때문에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만 보완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평작 수준은 되는 것 같습니다. 첫번째 이야기가 쪽박이고 두번째 이야기는 평작이라 두 작품의 합한 평점은 2점 정도로 생각되네요.

2014/09/30

하늘의 공포 - 아서 코난 도일 외 : 별점 2.5점

표제작을 포함한 6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단편집입니다. "직지 프로젝트"의 결과물 중 하나로 구글북스를 통해 무료로 읽었습니다.

이 시리즈의 특징이기도 한데, 번역 및 책의 구성이 초등학생 수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각 단편 서두에 실려 있는 짤막한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도 학습 문고 스타일이고요. 예전에는 이런 책들도 이렇게 포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조금 씁쓸하긴 하네요.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괜찮지만 이렇게 대상 연령대에 맞추어 가공된 탓에 저 같은 일반인 독자가 읽기에는 여러모로 조금 애매했습니다. 평균 별점은 2.5점 정도? 무료이니 한번 읽어보시고 괜찮다 싶으시면 정식 번역본(비록 많지는 않지만)을 구해 읽어보는게 좋을겁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 H.G 웰즈

지구가 갑자기 멈추면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는 고전적인 과학 지식이 등장하는 유명한 꽁트. 포저린게이가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반전의 묘미가 살짝 있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많이 낡은 작품이죠. 별점은 2점입니다.

"하늘의 공포" 아서 코난 도일

비행기로 고공 기록에 도전할 경우 비행사들이 이상하게 죽는 - 비행기 잔해는 발견되었지만 비행사 시체는 발견되지 않는다든지, 겨우겨우 비행장에 돌아와도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는다든지, 시체의 머리만 없어진 채 발견된다든지 - 사건에 도전한 영국의 명조종사 조이스 암스트롱의 수기 형식으로 구성된 작품입니다. 코난 도일 경도 초창기에는 수기 형식을 굉장히 애용한 듯 싶네요. "J. 하버쿡 젭슨의 진술"처럼요. 이 수기가 몇 페이지가 찢겨져 있다며 궁금증을 자아내는 도입부는 아주 괜찮았어요.

그러나 암스트롱이 "고공밀림"이라 부르는 곳에 도달하여 그곳에 사는 괴물들과 조우한 내용을 간략하게 다루며 끝나버려 실망스러웠습니다. 딱히 대단한 수수께끼가 있지는 않은 그냥저냥한 크리처물에 불과한 탓입니다. 수기의 마지막 글 "아아 이제 끝장이다"는 여운이 남기기는 하지만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작은 거인" 폴 F 에른스트

1만 미터가 넘는 깊이의 구리 광산 갱도에서 신발을 신은 인간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다. 그리고 난장이들의 유령이 보인다는 설이 퍼지는데...

지하에 거주하는 난장이 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펼친 SF입니다. 지하는 기압이 높고 열도 높은 탓에 지하 인간의 몸은 분자구조 자체가 단단하게 되어 콘크리트 같은 물질도 물처럼 유영할 수 있다는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 발자국 화석도 밀도가 높아서 무게로 그냥 땅이 푹푹 파였다는, 설정을 뒷받침해주는 증거였지요(물론 현실성은 없습니다만).

또 지하 인간들이 지성인으로 나름의 과학기술을 갖추고 있지만, 굉장히 호전적이라서 주인공의 친구를 죽이고 표본으로 삼기 위해 시체를 가져가려 한다는 일종의 크리처물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주인공이 지하 인간의 지구 정복이 머지않았다고 절망하는 결말도 나름 괜찮았고요. 

다만 주인공의 걱정을 뒷받침해주는 복선이 약간이라도 등장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쉬웠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벽속의 아프리카" 레이 브래드베리

아이들 방이 가상현실을 투영한 공간으로 바뀌는 고도로 자동화된 세계에서 벌어진 기이한 참극입니다. 섬뜩한 SF의 거장인 레이 브래드베리 (브래드버리)의 솜씨가 잘 발휘된 단편으로,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에 수록된 "대초원에 놀러 오세요"와 동일한 작품이지요.

"왜 가상현실의 사자가 현실이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무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자동화된 기계에 모든 것을 맡겨 극도로 이기적이면서 양심과 도덕에 대해서 둔감해진 아이들에 대한 묘사는 지금 읽어도 섬찟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우주 스파이" 필립 K 딕

우주인과 전쟁 중인 지구에 우주인이 지구인과 똑같이 생긴 폭탄을 몰래 잠입시키는데...

"사기꾼 로봇 (Imposter)"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한 작품이지요. 폭탄 로봇이 살해당한 원래 인간과 똑같은 인격을 지니고 행동한다는 점에서 "바디 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설정도 기발하지만 주인공 올햄이 자신은 로봇이 아니라고 믿으며 진상을 밝히기 위해 벌이는 사투가 긴박하게 묘사되며 마지막 결말까지 인상적인 걸작입니다. 아동용 축약 버전이 아니라 정식 버전으로 다시 읽고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우주에서 온 거머리" 로버트 셰클리
"불사판매 주식회사"의 저자인 셰클리의 단편으로, 물리적인 모든 것을 흡수하는 바위(거머리)가 등장하여 점점 커져가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인류가 사투를 벌인다는 내용입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거머리보다는 거머리를 배탈나게 하기 위해 굉장히 강력한 물리적 힘(수소폭탄)을 동원하는 멍청이 오도넬 장군의 폭주로 오히려 사건이 커지는 중반부가 인상적입니다. 원폭에 대한 시대적 공포를 반영한 풍자로 보이는데, 오도넬 장군이 억지로 거머리를 폭파시킨 뒤 더더욱 큰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는 결말까지도 완벽한 풍자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예전 "로보트 킹"에서 유탄이 에너지를 흡수하는 적에게 오도넬 장군 마인드로 킹의 모든 에너지를 때려넣어 과부하로 폭파시키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하긴 유탄은 무식한 놈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