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티드 맨 -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 |
장르문학계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SF 환상문학 단편선. "SF 대장"에도 당당히 실려 있는 작품으로, 개별 단편들은 서로 직접적인 연관이 없지만, 모든 이야기가 '문신을 새긴 사나이'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에서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라는 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책 뒤 해설을 보니 장편으로 출간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던 것 같더군요.
전설적인 작가의 단편집이기에 기대가 컸는데, 솔직한 감상은 "그저 그랬다"입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작품을 읽을 때와 비슷한데, 아무래도 작품들이 지금 읽기에는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겠죠. 동서냉전과 인종차별, 매카시즘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1951년 당시에는 유효했을 설정들이 지금 기준에서는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졌고요. 젤라즈니 같은 작가처럼 세련된 문체나 심오한 대사로 아이디어를 포장했다면 덜 시대를 탈 수도 있었겠지만, 브래드버리는 단편의 제왕다운 직설적인 문체로 정면 승부하는 스타일이라 이런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었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설정을 SF에 녹여낸 점은 흥미롭긴 했지만, 저 같은 무신론자가 공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화성의 불덩어리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건 없건 그게 무슨 상관인지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18편이나 되는 작품이 실려 있는 만큼, 명성에 걸맞은 독창적이고 인상적인 이야기들도 많았습니다.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아이들 놀이방을 소재로 독특한 반전을 보여주는 "대초원에 놀러 오세요"는 지금 읽어도 신선한 작품이었고, 끝없이 비가 내리는 금성을 무대로 한 재난 모험물 "기나긴 비"도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또한, 너무나 평온한 세상의 마지막 밤을 다룬 "세상의 마지막 밤"은 명백한 걸작이었죠. 환상특급 느낌이 물씬 나는 "마리오네트 주식회사"는 "스텝포드 와이프"의 원형처럼 보이는 시대를 앞선 아이디어가 돋보였고요.
개인적으로는, 우주공간에서 사고를 당한 우주비행사들이 각자 끝없이 추락하며 나누는 대화와 사색을 담은 "만화경처럼"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시한부 인생을 다룬 심리 드라마이자, 동시에 SF적인 요소를 결합한 복합적인 장르의 작품인데, 겨우 12페이지 분량으로 이런 깊이를 담아냈다는 점이 감탄스러웠습니다. 이 작품만큼은 단편의 제왕다운 솜씨를 보여준 멋진 결과물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문신을 새긴 사나이"의 이야기도 나름의 반전과 함께 마무리되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 지금 읽기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느낌이지만, 60여 년 전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 충격을 받았을 당시의 독자들은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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