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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10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2) 달콤 미스터리 페어의 비밀 샌드위치

이번에 소개해 드릴 요리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조용한 무더위" 수록작인 "파란 그늘 7월"에 등장하는 샌드위치입니다. 아주 화려하거나 수상해 보이는 음식은 아닙니다. 오히려 티타임에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얌전하고 소박한 샌드위치지요. 그런데 이 작고 평범한 음식이 뜻밖에도 사건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 작품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인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로, 하무라 아키라가 일하는 살인곰 서점의 도야마 점장이 기획한 ‘달콤 미스터리 페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디저트가 나오는 미스터리 소설을 모아 전시하고, 티파티까지 열겠다는 행사이지요. 이 중 한 편이 대프니 뒤 모리에의 "레베카"입니다. 맨덜리의 4시 반 티타임에는 버터를 듬뿍 넣은 크럼펫, 작고 귀여운 토스트, 따뜻한 스콘, 생강 쿠키, 엔젤 케이크, 오렌지 필과 레이즌이 든 케이크처럼 누구라도 혹할 만한 디저트들이 줄줄이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정작 이 작품 속 핵심은 이런 화려한 디저트들이 아닙니다. 교통 사고로 사망한 피해자 쓰구미의 어머니는 서점을 찾아와, 딸이 "레베카"의 티파티를 열고 싶어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메뉴 가운데 하나로, 작품에 등장하는 비밀 재료를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 생각이었다고 덧붙이지요. 쓰구미가 준비했던 속재료는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이었다고 합니다.

커민 시드는 향신료의 하나로 씨앗처럼 생겼고, 음식에 넣으면 조금 이국적이고 묵직한 향이 납니다. 카레에서 맡아 본 듯한 향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비슷합니다. 병아리콩은 고소하고 담백하며, 삶으면 포슬포슬하고 부드럽지요. 으깨면 샐러드처럼 만들기도 좋고요. 짐작컨대 삶은 병아리콩을 으깨고, 소금으로 약하게 간한 뒤 커민 시드를 섞었을 겁니다. 여기에 마요네즈나 버터를 조금 더해 부드럽게 만들고, 식빵 사이에 얇게 펴 발랐겠지요. 화려하지는 않지만 티타임 메뉴로는 꽤 잘 어울리는 샌드위치였을 거예요. 달콤한 과자들 사이에서 살짝 다른 결을 만들어 주기도 했을 테고요.
모양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티파티에 올릴 샌드위치이니, 두툼하고 투박한 형태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부드러운 식빵 사이에 병아리콩 속을 얇게 넣고, 가장자리를 잘라낸 뒤 작고 단정하게 썬 형태였겠지요. 삼각형이거나 길쭉한 손가락 모양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맛도 좋았겠지만, 이국적이고 독특한 재료라는 점에서 누구나 쉽게 떠올릴 만한 샌드위치는 아닙니다. 그런데 도야마 점장이 티파티를 위해 찾은 과자 장인 MIHARU의 글에서,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이 '레베카'의 비밀 재료 샌드위치 재료라며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쓰구미가 사고로 죽어 가던 때 레시피가 적힌 노트를 훔쳐간 범인이 MIHARU라는 걸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보통 미스터리의 단서라고 하면 핏자국이라든가 이상한 쪽지, 누가 들어도 수상한 말 같은 눈에 띄는 걸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 대신에 티파티 메뉴에 들어갈 샌드위치 속재료라는 아주 사소한 디테일을 사용한다는게 인상적입니다.

게다가 "레베카"에는 이보다 더 눈에 잘 띄는 샌드위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맥심의 할머니가 티타임에 먹는 물냉이 샌드위치나, 맨덜리에서 먹는다고 언급되는 오이 샌드위치처럼요. 영국식 티타임을 떠올리면 바로 연상되는 익숙한 메뉴들입니다. 하지만 와카타케 나나미는 이런 샌드위치보다 조금 더 낯설고, 그만큼 더 고민이 필요한 ‘비밀 샌드위치’를 사건과 연결합니다. 그 솜씨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원작의 디테일을 세심하게 읽어낸 것도 놀랍지만, 그것을 살인곰 서점의 이벤트와 엮어 하나의 미스터리로 다시 조립해 낸 방식이 무척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미스터리는 종종 아주 작은 것에서 움직입니다. 맛있어 보이는 다과 목록 한가운데 툭 끼어 있는 샌드위치 하나, 언뜻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속재료 하나 같은 것에서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을 떠올리면 화려한 케이크보다도 먼저 그 병아리콩 샌드위치가 생각납니다. 가장 수수한 음식이, 끝내 가장 또렷한 단서가 되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커민 시드로 밑간한 병아리콩 샌드위치 레시피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1. 병아리콩 준비하기
    삶은 병아리콩 1컵 정도를 준비한다.
  2. 향내기
    커민 시드 1작은술을 마른 팬에 약하게 볶아 향을 살린 뒤, 살짝 으깬다.
  3. 속재료 만들기
    병아리콩을 포크로 대충 으깨고, 소금 약간, 볶은 커민 시드, 후추 조금을 넣어 섞는다.
  4. 부드럽게 다듬기
    마요네즈나 버터를 1~2큰술 넣어 질감을 부드럽게 맞춘다. 너무 곱게 갈기보다는 약간 포슬한 느낌이 남는 편이 좋다.
  5. 샌드위치 만들기
    식빵 사이에 속재료를 얇게 펴 바르고, 가장자리를 잘라낸 뒤 삼각형이나 손가락 모양으로 작게 썬다. 티타임용이라면 한입 크기로 작게 만드는 쪽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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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3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1) 반전을 차린 식사

그동안 추리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음식, 요리들에 대해 몇 차례 글을 써 왔습니다. 단순히 배경 설명으로 등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단서가 되는 등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음식이나 요리들 중심으로요. 글을 엮어 책을 출간하기도 했지요. 출간 후 수 년이 지났고, 다시 자료와 정보가 좀 모였기에 관련 글을 이어서 좀 써 볼까 합니다. 

이번에는 조금 독특한 사례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요리가 아니라, 오히려 등장인물들이 질색하는 음식입니다. 그런데도 이 음식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을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였지요. 바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에 등장하는 식사입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히 ‘반전’이 뛰어나다는 평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작품인데, 작품에서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식사 장면이 반전을 뒷받침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작중 화자인 마모루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기숙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왜 이곳에 모였는지, 무엇을 위해 이런 생활을 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지요. 그리고 그 생활 속에서 아이들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식사입니다.

식사를 맡고 있는 코튼 부인은 꽤 나이가 많습니다. ‘교장 선생님’에게는 어머니뻘, 아이들에게는 할머니뻘 정도니까요. 흰머리를 뒤로 둥글게 틀어 올리고, 검은 옷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얼핏 보면 오래된 저택에서 일하는 노련한 하녀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들 눈에는, 요리만큼은 영 기대할 게 없습니다. 단순히 맛이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먹는 식사치고는 지나치게 부실하고, 메뉴도 너무 단조롭기 때문입니다. 고기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저녁이면 어김없이 자투리 채소를 잔뜩 넣어 걸쭉하게 끓인 수프 비슷한 음식이 나옵니다. 또 하나 빠지지 않는 것이 매시드 포테이토 비슷한 음식인데, 맛은 분명 그쪽 계열이지만 정말 감자로 만든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흐물흐물하고, 밍밍하며 씹는 맛도 없습니다. 마모루가 도무지 밥을 먹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덕분에 원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베이컨조차, 여기서는 그야말로 진미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모루의 친구인 ‘시인’은 코튼 부인의 요리가 하나같이 푹 끓여져 부드럽고, 간이 심심한 이유에 대해 단순히 요리 솜씨가 없어서가 아니라 본인 입맛과 사정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라고 추리합니다. 치아가 좋지 않은 할머니에게 어울리는 음식이라는 이야기인데, 꽤 그럴듯해요. 이는 기숙학교의 엄격하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배경 소품 역할에 충실할 뿐 아니라, 코튼 부인이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이 식사는 작품의 핵심 반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추리소설에서 말하는 서술 트릭은, 말 그대로 서술의 방식 자체를 이용해 독자를 속이는 기법입니다. 화자가 거짓말을 한다기보다는, 독자가 당연하다고 여기도록 묘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코튼 부인이 만드는 수프와 매시드 포테이토 비슷한 음식, 고기가 빠진 식단, 지나치게 부드러운 조리 방식, 간이 약한 맛이라는 요소들도 그러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배경 소품과 인물 설명 역할에 불과해 보이니까요.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이 학교 식사들도 반전으로 이어지는 서술 트릭에 활용된 디테일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서술 트릭은 정보를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정보는 일찍부터 독자의 눈앞에 내놓습니다. 다만 그것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만들지요. 앞부분의 사소한 묘사들이 뒤늦게 다른 의미를 띠고, 독자가 처음 읽을 때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서술 트릭의 매력입니다.
이 작품 속 수프와 매시드 포테이토 역시 그런 예입니다. 맛은 별로지만 이야기의 중심에서 교묘하게 제 역할을 해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디테일들을 활용해 서술 트릭을 완성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반전인지는 직접 책을 읽으며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정통 매시드 포테이토 조리법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1. 감자 삶기
    감자 껍질을 벗기고 큼직하게 썬 뒤, 소금을 약간 넣은 물에 부드러워질 때까지 삶는다.
  2. 물기 제거하기
    감자가 익으면 물을 버리고, 냄비에 잠시 두어 남은 수분을 날린다.
  3. 감자 으깨기
    뜨거울 때 감자를 곱게 으깬다. 체에 한 번 내리면 더 부드럽다.
  4. 버터와 우유 넣기
    버터를 먼저 넣어 녹이고, 따뜻한 우유나 생크림을 조금씩 넣어 원하는 농도로 맞춘다.
  5. 간 맞추기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잘 섞는다. 취향에 따라 파슬리나 치즈를 조금 넣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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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0

기억 속의 유괴 - 오야마 세이이치로 / 한수진 : 별점 2.5점

저자의 "붉은 박물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작을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 않아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았습니다. 단편다운 기발하고 신선한 부분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수록작 전부가 빼어나지는 않고, '설녀' 히이로 사에코 관장의 만화적인 설정은 여전히 별로지만 이 정도면 한 번 읽어볼 만은 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고생 추락사 사건"

1991년 2월, 기타구 도립 니시가하라 고등학교에서 2학년 여학생 후지카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했습니다. 후두부를 화단 모서리에 강하게 부딪친 것이 사인이었고, 사건 당시 아래층에서 일하던 작업자는 옥상에서 한 소녀가 "이제 곧 작별이네요. 저는 선배를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말 때문에 유리코가 선배에게 고백했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여겨졌고, 같은 미술부 3학년 남학생 세 명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어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고 공소시효까지 만료되었습니다.

'붉은 박물관장' 히이로 사에코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져 있던 사건의 전제를 뒤집어 버립니다. 당시 고백한 사람은 유리코가 아니라 그녀의 후배인 1학년 여학생이었고, "이제 곧 작별"이라는 말 역시 죽음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 전학을 뜻하는 말이었다고요. 그래서 당시 1학년생 가운데 전학을 간 학생을 추적해, 그 학생이 진범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대단한 트릭이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고정관념'을 깨는 맛이 잘 살아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연쇄 방화 사건"

1990년, 후추, 고쿠분지, 구니타치, 다치카와 일대에서 연쇄 방화 사건이 발생했었습니다. 피해자들 사이에 별다른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에 보험금을 노린 자작극이나 교환 방화설은 설득력을 잃었고, 여러 건 가운데 한 건만 진짜 목적이고 나머지는 위장이라는 해석도 방화 횟수가 너무 많아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범인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다는 사건의 실마리가, 범인을 신고하려다 살해당한 가타노 사치에의 전화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사건은 '야채 장수 오시치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확인된 유일한 공통점은 방화 대상이 된 집들이 모두 24~25년 전에 지어졌다는 점뿐이었습니다.

사에코는 우선 소거법을 이용해 범인이 찾고 싶어 했던 대상들을 추려냅니다. 소방관은 다른 사람이 출동할 수 있어서 제외하는 식으로요. 그리고 동시에 특정한 조건을 가진 집들을 계속 태웠다는 점을 연결해 사건의 목적을 밝혀냅니다.

그렇게 해서 추리해 낸 진상은 현장검증 책임자 벳쇼가 진범이며, 그는 연쇄 방화가 일어나면 동일한 수사 인력이 반복적으로 현장에 투입된다는 점을 이용해서 특정 시기에 지어진 집들 가운데 한 곳의 바닥 밑에 묻혀 있을 어머니의 시신을 찾아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 안의 사람들은 미리 대피시켰습니다. 시신이 훼손되거나 혼동되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시치 사건이라는 아이디어도 좋고, 연쇄 방화 피해자들의 공통점을 통해 범인의 목적과 정체를 밝혀 나가는 추리도 빼어납니다. 어머니의 사체를 찾기 위해서라는 목적으로 저지른 범죄치고는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단점이 조금 거슬리지만, 큰 흠은 아닙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토막 사체 사건"

1999년 3월 23일, 아라카와 하천 부지에서 토막 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머리와 몸통, 양팔의 위아래 부분, 양다리의 위아래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위가 관절을 중심으로 절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습니다.

보통 토막 사체는 운반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관절 부위를 추가로 정교하게 잘라낸 목적이 무엇인가를 두고 흥미로운 추리를 펼쳐 보입니다.

사에코는 범인이 "가동 범위가 큰 관절"을 의도적으로 제거했다고 보고, 이것이 시신의 마지막 자세를 숨기기 위한 행위였다고 추리합니다. 피해자는 죽은 뒤 사후 경직이 일어나 특정 자세로 굳었을 것이고, 그 자세만 보면 범행 현장이나 범인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논리이지요.
또 범인은 경직이 풀릴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굳은 자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시신을 관절 위주로 절단해 유기했다는 점을 통해 사에코가 지목한 범인은 피해자의 지인 쓰카모토 가즈오였습니다.

피해자는 가즈오의 중고차 가게에서 차를 타며 자주 놀았는데, 차에 앉아 있던 피해자를 살해한 뒤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바람에 피해자가 운전하는 자세로 굳어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즈오는 피해자의 아내 오리에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녀가 남편 호소다의 성으로 장례를 치르는 상황을 막고 싶어서 시신이 빨리 발견되도록 유기할 수밖에 없었고요.

이처럼 사후 경직으로 범행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관절'을 제거했다는 아이디어가 아주 좋네요. 정말 획기적입니다. 단편 특성상 용의자가 몇 명 등장하지 않아서 범인이 빠르게 짐작된다는 단점은 있지만,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회사원 살해 사건"

1990년 3월 14일, 미나미시나가와에서 회사원 후지시로가 살해당했습니다. 후지시로는 주변 동료들에게 거액의 채무를 지게 만들고, 그런 상황을 즐기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성격 때문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은 많았고, 사건 역시 원한 관계를 중심으로 수사가 전개되었지만 유력한 용의자에게 알리바이가 있어서 결국 미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앞선 작품들에 비하면 평균 이하였던 졸작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의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에코는 후지시로가 속한 재료과 멤버들을 중심으로 용의자를 좁혀 가는데, 그 전제부터 억지스럽게 느껴집니다. 협박이나 금전적 압박이 특정 부서 사람들에게만 향했을 리 없으니까요.
또 후지시로의 집에 있던 의자의 위치를 보고 그가 어깨를 다쳤다고 추리하는 부분까지는 흥미롭지만, 그것이 사건 해결의 핵심 근거가 되는 과정은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의자를 무엇에 썼는지는 피해자가 죽었으니 밝힐 수 없기도 하고요. 청소하느라 빼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여기에 더해 진범 사와모토가 구보데라를 살해하고 그의 신분을 빼앗았다는 반전은 최악입니다. 앞서 구보데라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제시해 놓고, 나중에 사실은 그 인물이 이미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 있었다고 뒤집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를 납득하게 할 만한 사전 단서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기억 속의 유괴"

26년 전, 다섯 살이던 토다 나오토가 유괴당했습니다. 당시 범인은 몸값을 요구했지만, 결국 별다른 이유 없이 나오토를 풀어주었다.

친모가 나오토와 동반 자살을 할 목적으로 납치했지만 양부모에 의해 살해당한 뒤, 양부모는 친모의 사체를 유기하고 나오토가 납치당한 기억을 왜곡시키기 위해 유괴 사건을 자작했다는 것이 진상입니다.

양부모가 매년 어디론가 참배를 갔던 점, 범인의 이상했던 당시 몸값 요구 같은 단서는 있지만 친모의 정체 등 독자에게 공유되지 않는 정보가 많아서 좋은 추리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네요. 납치와 유괴,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가 등장하지만 이상하게 소품 느낌을 준다는 점도 별로였고요. 납치와 살인은 우발적이고, 유괴가 작위적인 연극인 탓이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4/03/06

오무라이스 잼잼 13, 14 - 조경규 : 별점 2.5점 / 2점. 마지막일듯.

오무라이스 잼잼 13 - 6점
조경규 지음/송송책방

신간이 나온지 꽤 되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권은 코로나 펜데믹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가지 못해 급식을 먹지 못한다던가, 좋아하는 농구 직관을 가지 못하다가 어렵사리 강원도 원주까지 원정 직관을 하러 간다는 등의 에피소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 가격이 제가 1권을 샀을 때 보다 많이 올라서 이제 정가 19,000원인데, 가격에 걸맞는 볼륨은 갖추고 있습니다. 거의 600페이지에 가까운 풀 컬러 인쇄본이니까요. 웹툰이라 페이지 내 여백이 많아서 정보량은 페이지수 대비 많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가격은 납득이 되는 수준입니다.
작가 가족의 이야기 비중이 높아져서 전형적인 가족 일상툰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과 요리에 대한 정보도 기대에 값합니다. 후추의 종류와 제조 방법, 딸기 우유의 빨간색을 내는 방법, 사우전드 아일랜드 샐러드 드레싱의 제조법과 역사, 대파와 양파의 차이 등 잘 몰랐던 여러가지 정보들을 언제나처럼 재미있게 소개해주고 있거든요. 이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초코 다이제 맛있게 먹는 방법"이었습니다. 초코 다이제를 차에 담갔다가 먹는 방법은 '이그 노벨상'까지 수상한 과학적 방법이라는군요. 꼭 한 번 따라해봐야겠어요.
조경규 작가의 그림을 보는 재미도 좋습니다. 다양한 튀김 덮밥들, 치킨 버거들 등등... 왠만한 사진보다 먹음직스럽고 예쁘게 그려져있는 덕분입니다.

하지만 웹툰을 이미 본 독자에게는 중요할 부가 정보는 별로 없습니다. 독자분들이 뽑은 오무라이스 잼잼 베스트 에피소드는 책에 수록할만한 정보는 아니었고요. 
그 외 이런저런 정보 소개도 대부분 식당 탐방 수준이며, 김영환 선수 인터뷰는 농구팬이 아니라면 큰 관심을 가지기 힘든 내용이라 책 성격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만화와의 연결고리를 가져가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이보다는 차라리 농구팀 식단같은 정보를 알려주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아울러 작가 가족 이야기 비중이 너무 과합니다. 예전처럼 조금 독특한 이야기도 없고요. 그냥 가족들과 뭘 먹으러 갔다, 준영이가 많이 먹는다 등의 이야기가 반복될 뿐입니다. 연재가 이어지면서 소재가 고갈된 탓일까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무라이스 잼잼 14 - 6점
조경규 지음/송송책방
13권과 함께 구입한 14권. 14권이 되니까 드디어 20,000원으로 가격이 올랐네요. 물론 536페이지에 풀 컬러의 볼륨이라는 측면에서 비싸다고만은 할 수 없겠지요.

이번 권은 요리 관련 정보보다는 경험담 비중이 높더군요. 물론 요리, 음식 관련 정보가 아주 없는건 아닙니다. 몇가지 소개해드리자면 
  • 해쉬브라운은 1887년 요리책에 '해쉬드 앤 브라운드 포테이토스'라고 처음 등장했는데, 생감자를 강판으로 채 썰고 녹말 제거 후 버터나 기름으로 지져낸 요리였다
  • 우리나라 마라탕은 2012년 대림동의 라화쿵부가 시초
  • 키세스 초콜릿은 키스하는 입 형태에서 따온게 아니라 19세기의 일반적인 작은 사탕의 통칭에서 따 온 이름이다었다.
  • 볶음밥을 달걀로 감싸고 토마토소스를 얹은 오무라이스는 홋쿄쿠세이가 원조로 오믈렛과 흰밥만 먹는 단골을 위해 변주해서 만든 요리가 시초, 렌카테이의 원조 오므라이스는 밥을 날달걀에 먼저 비비고 팬에 지져낸 것이다.
  • 미국식 멕시코 요리 텍스-멕스는 따지고보면 우리나라식 중화요리같은 것으로 이 중 구운 고기와 채소를 토르티야에 직접 넣어 만드는 화이타도 1969년 텍사스주 소도시 카일에서 '화이타 킹' 소니 팔콘이 처음 만들어낸 미국의 발명품.
  • 회오리 감자도 한국인의 발명.
등입니다.
작가와 제가 살아온 시대가 거의 같아서 저 역시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었던 에피소드도 재미있었어요. 옛날 기차에서 팔던 그물망 포장 삶은 계란과 종이 포장 소금과 군대에서 전자레인지로 데워먹던 냉동 만두처럼요.

하지만 집에서 감동란을 만들어 먹고, 곤지암으로 소머리 국밥을 먹으러 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라탕을 먹으러 가고, 태국과 홍콩 등지에서 망고를 먹고, 인생 첫 순대국을 먹으러가고... 하는 식의 경험담은 별로 재미가 없더군요. 보통은 경험과 함께 해당 음식의 역사를 함께 풀어주곤 했었는데 그런 내용도 많지 않고요. 은영이가 투모로우바이투게더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또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재미도 없고, 관심도 가기 어려운 이야기였어요.

이제는 완전히 가족 일상툰이 되어버린 느낌으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다음 권은 연재분을 먼저 확인해봐야겠지만, 이대로라면 더 이상 구입해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조경규 작가 가족 이야기는 딱히 궁금하지 않으니까요.

2022/02/11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쿠스미 마사유키 / 박정임 : 별점 3점

일단 한잔, 안주는 이걸로 하시죠 - 6점
쿠스미 마사유키 지음, 박정임 옮김/살림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가로 잘 알려진 쿠스미 마사유키먹부림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총 3부 구성인데, 가장 비중이 높은 1부는 혼자서 혼술을 마실 때, 어떤 안주를 직접 만들어 어떤 술과 함께 먹는지에 대해 쓴 글들입니다. 2부는 혼자서 술집에 갈 때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 주고 있고요. 3부는 술을 다 먹고 마무리로 어떤걸 먹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술과 안주를 사랑하는 작가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정말로 술과 안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저자의 다른 에세이에서는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술과 안주를 사랑하고, 먹거리에 대한 특별한 고집과 집착을 보이는 모습을 접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술잔이라던가, 차림상의 구성을 꼬치꼬치 따지는 모습은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다츠와 별다를게 없어 보였고요. 얼마 전에 읽었던 "혼밥 자작 감행"의 쇼지 사다오도 그러했는데, 혼술하는 아저씨의 전형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먹는 방법에 대해 여러가지 '전략, 전술'을 고려해서 안배한다는, "음식의 군사"가 떠오르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돈가스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돈가스를 소금, 간장, 소스 순서로 찍어 먹는다던가, 마지막 두 조각을 미리 소스를 뿌려 절여두었다가 밥이랑 함께 먹는다는 등의 이야기는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에피소드와 거의 똑같았으니까요. 오뎅을 접시에 담을 때 색감을 고려해서 담는다는 등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쥬쿠 카페 베르크의 커피 역시 "음식의 군사"에서도 소개되었었지요,

그러나 돈가스 정식을 일종의 '코스 요리'라고 생각한다는건 기발한 발상이었습니다. 육류에 전채 (야채절임), 샐러드 (양배추), 수프 (미소시루), 푸짐한 채소 요리 (밥)이 곁들여 나오기 때문이라는데, 아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이왕 코스 요리니 주문할거면 값은 비싸도 히레가스 정식을 주문하자라던가, 맥주를 시킬 때 "이집 맥주는 어디 건가?"하고 브랜드를 물어보면 와인 느낌이 난다는 이야기에 이르르면, 이런걸 만화로 선보였다면 아주 좋았을텐데 좀 아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음식의 군사" 속 돈가스 요리 에피소드보다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후지코 후지오의 "만화의 길" 속 추다와 멘치빵을 재현해 먹는 에피소드는 과연 만화가구나! 싶어서 기억에 남고요.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라 더 기억에 남은 것 같네요. 참고로 원작 속 '츄다' 레시피는 소주 3, 사이드 7의 비율입니다. 멘치빵은 아래와 같고요.

기요켄의 슈마이 도시락에 대한 글은 저자의 데뷰작 "스키야키"가 떠올라서 반가왔습니다.

혼자 안주를 만드는 이야기 속 레시피도 짤막하지만 충분히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건 가다랑어 안주입니다. 조금 얇게 썬 가다랑어를 준비하고, 그 위에 대파를 잘게 다져서 듬뿍 올립니다. 다음은 양하도 잘게 다지고, 차조기나 깻잎 한 장도 채썰어 올립니다. 마지막이 비법이라 할 수 있는데 마늘 대신 편을 썬 마늘장아찌를 올리는겁니다. 생마늘은 맵고, 간 마늘은 느낌이 약하기 때문이랍니다. 이걸 레몬즙을 섞은 간장에 찍어먹는다는데, 반주로 니혼슈, 조금 비싼 사케가 제격이라네요. 가다랑어 회는 구하기 힘들겠지만 방어회로 다음에 도전해 볼까 합니다. 방어회는 먹다보면 물려서 남기기 십상이니까요. 

다른 먹부림 콘텐츠에서 탕두부라고 소개되는 물두부 레시피는 정말 쉬워 보여서 인상적입니다. 평범한 냄비에 다시마 한 장을 깔고 물을 담아 가스버너 등에 올리고, 한 입 크기로 자른 두부를 넣은 뒤 끓고 나면 간장과 가쓰오부시, 다진 파를 섞은 종지에 찍어 먹으면 된다니까요. 간단하기로는 '조야나베'도 만만치 않아요. 냄비에 물을 붓고 저민 생강 두 조각 정도를 넣은 뒤 끓이다가 큼직하게 썬 양배추, 기다란 삼겹살을 세 토막 낸 걸 넣고 갈은 무와 다진 파를 듬뿍 넣은 아지폰(감귤 과즙 폰즈 상품명)에 찍어 먹는게 끝입니다. 폰즈가 집에 없기는 한데, 그 외에는 재료나 조리법 모두 너무 쉬워서 당장 해 먹어도 됨직한 수준이네요. 심지어 우러난 국물은 제가 좋아하는 우동 사리를 넣어 먹으면 끝장이라니, 꼭 한 번 해 먹어 봐야 겠습니다. 

그 외에도 가열한 올리브 오일에 큼직하게 썬 양배추를 넣어 재빨리 볶은 후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먹는 양배추 볶음, 오니기리를 프라이팬에 올려 약한 불로 굽다가 간장과 미림, 미소 양념장을 발라 굽는 오니기리 구이, 간단한 여주 볶음밥, 통조림 참치에 잘게 다진 양파를 넣고 후추와 소금을 뿌린 후 마요네즈와 버무려 만든 속을 버터 발라 구운 식빵에 끼워 먹는 참치 토스트(굽지 않은 빵에 머스터드를 바른 뒤 슬라이스 치즈를 깔고, 그 위에 참치 마요네즈를 올려 구워도 맛있다네요) 등 대부분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레시피만 소개되고 있어서 아주 반가왔습니다.

뻔한 먹부림 에세이지만 재미도 있고, 레시피들도 괜찮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적당합니다.

2021/11/21

카레로 보는 인도 문화 - 가라시마 노보루 / 김진희 : 별점 3점

카레로 보는 인도 문화 - 6점
가라시마 노보루 지음, 김진희 옮김, 오무라 쓰구사토 사진, 최광수 감수/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맛의 달인 걸작 에피소드 중 하나인 '카레 전쟁' (24권) 편에서 카레 전문가 교수님으로 출연했었던, 인도 역사 교수가 쓴 식문화사 책입니다. 한방약을 카레에 섞어 먹곤 한다던 그 교수님이지요. 전공 분야라는 인도 역사에 대한 지식, 그리고 다년간의 인도 유학 경험과 학자다운 방대한 참고 문헌을 바탕으로 인도 요리가 무엇이며, 왜 지역별, 문화별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책은 왜 '카레'라는 요리가 생겨났으며, 그 어원이 무엇인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인도 식민지 지배로 인해 인도 식문화가 영국에 자연스럽게 유입되었다는건 다른 책들에서도 소개되었던 내용인데, 카레 가루가 생겨난건 영국에 생 스파이스가 없어서였다, 밀가루를 버터로 볶아 만든 루는 볶은 양파, 토마토 페이스트, 코코넛 크림 등으로 조리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걸쭉함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는 디테일은 좋았습니다. 

교수님이 등장하셨던 "맛의 달인" 에서도 소개되었던 '커리'의 어원에 대한 추론은 다시 읽어도 흥미로왔어요. 영어 '커리'는 16~17세기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이 기록한 '카릴'에서 유래되었을 거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칸나다어와 타밀어 커리는 야채와 고기라는 뜻인데, 왜 당시 사람들은 수프를 부어먹는 식사를 인도인들이 '카릴 이라고 부른다고 썼을까요? 저자는 당시 포르투갈, 네덜란드 인은 수프를 부은 밥 요리 이름을 물었는데, 인도인들은 수프에 들어있는 건더기, 즉 야채와 생선과 고기에 대해 묻는다고 생각해 대답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럴듯하지요? '캥거루' 어원 가설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저는 저자의 추론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인도 요리와 그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고찰이 이어집니다. 특징이라면 앞서 '커리'의 어원 추론처럼 어원, 요리 유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는 점입니다. 북인도의 긴 후추를 피랄리라고 하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원정 당시 그리스로 가져간게 현재 영어 페퍼의 어원이 되었다는 식으로요. 저자가 역사 학자인 덕분이겠지요. 

각 지방 및 요리하는 사람의 특성에 따라 요리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도 확실히 연구자가 썼구나 싶은 부분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인도 식문화는 남인도에서 성립된 스파이스를 혼합하여 맛을 내는 '카레 문화'와 우유를 기름, 버터, 요거트 등의 다양한 형태로 요리에 활용하는 북인도의 '우유 문화'가 오랜 역사 과정에서 적절하게 융합되어 구축되었다고 합니다. 근거는 7-8세기 남인도 힌두교 사원에 남아있는 신에게 올리는 식사 관련 글귀에 등장하는 재료 - 밀라구 (후추), 만질 (강황), 지라가 (커민), 시르 카두구 (겨자), 코타말리 (코리엔더) - 목록이고요. 이건 현대 카레에 가장 중요한 스파이스로 꼽는 '터메릭, 커민, 코리앤더, 후추, 겨자'와 동일합니다. 즉, 당시 남인도에는 커리의 원형이 이미 존재했다는 뜻이지요. 반면 북인도에서는 불교에서 석가에게 우유죽을 공양했던 고사에서 보듯, 우유 식문화가 탄생했고요. 이런 지역에 따른 대립은 카레, 우유 뿐 아니라 밀과 쌀 중 무엇이 주식인지, 재료가 고기인지 생선인지, 논베지테리언인지 베지테리언인지 등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됩니다. 북인도는 밀 생산 지역으로 쌀이 아니라 로티라고 부르는 밀가루 빵이 주식이라는게 대표적인 예이고요. 

이런 역사와 지역, 문화를 통한 요리 구분이 굉장히 상세한게 큰 장점으로, 심지어 '자이나교 요리'까지도 별도로 다루고 있을 정도입니다. 자이나교는 철저한 불살생으로 베지테리언 요리로 유명한데, 우리도 인도 요리점 요리로 친숙한 '파니르'가 대표 요리더군요. 파니르는 끓인 우유에 식초를 넣어 굳힌 코티지 치즈이고, 이걸 카레 소스로 끓여낸 요리이지요. 여기에 시금치를 넣은게 '팔락 파니르'고요. 

무굴 제국의 궁정 요리도 별도 항목을 할애하여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정복 세력이 인도로 침입한 것이라, 그 역사적 배경이 다른 인도 요리와는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우선 무굴 요리의 시작은 유목민의 캐러밴 요리로 케밥이 그 원점이라네요. 무굴 제국의 이름도 몽골에서 유래했고, 그들은 원래 아프가니스탄 유목민 출신이니 중앙 아시아 유목민 문화가 그들의 바탕인 건 당연합니다. 여기에 2대 황제가 이란에 망명했던걸 계기로 페르시아의 맛과 정취가 더해졌고요.

특정 지역에 독특한 식문화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인 이유 설명도 그 깊이가 남다릅니다. 남인도 케랄라 식문화 소개가 좋은 에에요. 이 곳은 원래부터 후추와 카다몬이 자생하였던 향신료의 천국이었는데, 이후 남서 해상 무역 중계 기지라 남동아시아에서 클로브, 넛맥이, 스리랑카에서 시나몬이 운반되어 향신료의 폭이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로마 및 서방 지역과도 관계가 깊어서 이미 1세기에 그리스도 포교가 이루어졌고, 유대교 성당인 시나고그도 있었으며, 무슬림도 거주하면서 커피 재배 등에 종사했을 정도로 국제 도시이기도 했고요. 중국배 역시 12세기 경부터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15세기 초에는 정화의 선단이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런 지역이라면 향신료를 풍부하게 사용하면서, 외부 식문화도 많이 유입된 요리가 생겨날 수 밖에 없겠지요. 

또 스리랑카 신할족은 북인도 왕자의 후예라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언어와 전통은 북인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식문화는 가까운 남인도 카레와 밀착되어 있으며 특징은 매운 맛, 그리고 몰디브 피쉬의 사용, 코코넛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스리랑카의 식문화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맛의 달인의 '카레 전쟁'의 스리랑카 요리 소개 부분과 똑같아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몰디브 피쉬를 절구로 빻는 장면은 사진까지 똑같더라고요!

소개되는 요리들에 대한 소개도 재미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요리는 빈달루입니다. 어원은 포르투갈 요리 카르니 드 비나달로스의 비냐달로스라네요. 이게 인도식 발음으로 변형되었던 거지요. 16세기 초에 포르투갈이 고아를 점령했을 때 전래되었던 요리라고 합니다. 처트니도 영국식 잼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힌디어로 '다'라는 뜻의 '차트나'가 어원인 인도 요리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그외 정 요리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몇몇 요리는 레시피도 함께 소개해주고 있어서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칠리, 터메릭, 커민, 코리앤더와 후추가 듬뿍 들어간다는 라삼 파우더로 만든 라삼은 우리 입맛에도 잘 맞을 듯 싶더군요. 타밀어로 '후추 주스'라는 뜻이라니, 매콤한게 딱일거 같아요.

이런 내용들 소개에 이어, 책은 현대 인도 요리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마무리됩니다. 인도 요리란 어디까지나 스파이스와 우유를 주요소로 하는 요리의 총칭이며, 원래 다양한 지방에서 자기들끼리만 먹었었지만, 지방 요리가 인도 전체로 퍼져 현대 인도 요리가 된 것이라고요. 이를 '다양성 속의 통일성' 이라고 말합니다.

카레, 커리 뿐 아니라 '인도 요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해 준 좋은 책입니다. 단순히 흥밋거리가 아니라, 근거가 확실한 전문가적인 식견으로 썼다는 점이 돋보였고요. 목차가 조금 두서가 없다는건 아쉽지만, 이 정도면 별점 3점은 충분하지요. 좋은 책이었습니다. 커리와 인도 요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글도 한 번 읽어보시면 좋겠고요.

그나저나 일본에 좋은 카레 책이 많이 나오는걸 보면, 확실히 카레에 진심인 나라가 맞긴 맞나보네요.

2021/01/16

스파이스 - 잭 터너 / 정서진 : 별점 2점

스파이스 - 4점
잭 터너 지음, 정서진 옮김/따비

스파이스, 즉 향신료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그리고 왜? 향신료가 이렇게 큰 인기를 끌고 교역 대상이 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식문화사이자 미시사 서적입니다.

이 중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부분은 굉장히 흥미로왔습니다. 책이 향신료 교역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 부터가 아니라 콜럼버스, 바스쿠 다 가마 등 포르투칼과 스페인 탐험가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읽다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니까요. 모험과 탐험 이야기이니까 당연하겠지요. 특히 다 가마가 인도 캘리컷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간단한 제노바어와 카스티야어를 할 수 있던 튀니지인을 만났던 순간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 튀니지인 : 빌어먹을, 당신네들이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지?
  • 데그레다도 (처음 외지인과 접촉하는 사람) :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향신료를 찾아서 왔다.

이 엄청난 대모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이후 포르투칼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캘리컷에 포격을 퍼붓고 잔인하게 포로를 죽였다는데, 유럽인들의 자기 중심적인 논리가 극초기부터 작용했다는건 씁쓸하네요. 그들이 '미개인' 이라고 불렀던 신대륙이야 그렇다쳐도, 그들 이상의 문화와 문명을 가진 다른 세계는 대화를 통해 협조를 구하는게 마땅했습니다. 하긴, 이런 자국 중심 논리는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지요.

그리고 본격적인 향신료 무역 역사가 소개되는데, 로마 시대에 이미 인도와의 향신료 교역로가 개척되어 존재했다는건 놀랍더군요.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라 홍해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었던 덕분입니다. 홍해를 지나 아라비아 반도, 인도양을 지나 계절풍을 타고 서고츠 산맥 근처 항구에 기항하는 항로였습니다. 여기서 확보한 후추 및 각종 향신료는 로마 사회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가격도 우리 생각만큼 비싸지는 않더라고요. 후추 1파운드 (450g)가 자유 노동자 이틀치 일당이었다니, 대충 최저 시급을 9천원으로 계산하면 14만원 정도 되는 셈입니다. 100g에 3만 2천원 정도라면. 아주 대단한 사치품이라고 하기는 조금 어렵겠지요.
조금 의외였던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 향신료를 항상 과하게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부를 과시하기 위해서 도를 넘는 향신료 소비가 이어졌고, 이러한 향락, 사치 풍조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니, 향신료도 로마 멸망에 일조한 셈입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이 홍해 항로를 장악하며 직접 교역이 끊기면서 비잔틴, 이슬람 상인을 통해 향신료를 수입해 사용하다가 앞서 설명한 포르투칼과 스페인에 의해 대항해 시대가 열려 향신료 수입 무역이 재개되었으며,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패권이 네덜란드, 영국에 의해 무너지고 현재에 이르는 과정이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향신료가 이렇게 널리 사용되고, 큰 돈을 벌어다 주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몇가지 핵심만 요약하자면, 일단 유럽인들은 향신료가 파라다이스, 즉 지상낙원에서 자란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종교적 상상을 뛰어넘는 일종의 진리이자 신조에 가까왔다고 하네요. 즉, 향신료는 에덴 동산에서 온, 기쁨과 같은 의미를 가진 어휘였던 거지요. 향신료 중에는 이름이 아예 grains of paradise라는 것도 있었다니까요. (지금의 멜레구에타 후추입니다) 그래서 '향기' 를 이용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굉장하 중요하게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중세 의학의 중심이었던 체액론에서 향신료가 중요한 요소였던 탓도 큽니다. 건강, 그리고 '성' 측면에서 향신료가 치료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음식 부패가 심해서 냄새와 맛을 감추기 위함은 아니었습니다. 향신료를 사용하는 것 보다 새로 재료를 사는게 더 싸니 당연하겠지요. 오히려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순절이나 겨울철에 보존을 위해 소금에 절인 생선 등만 먹는 경우가 많아서 향신료가 어쩔 수 없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향신료 와인은 당시 술의 품질이 굉장히 떨어져서 생겨났다고 하고요. 이외에 당연히 사치, 과시를 위해 쓰여진 측면도 존재했기에, 이런 이유들로 왕실에서는 많이 사용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비쌌고, 무역업자들에게는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죠.

근대로 접어들면 후추는 수입이 늘어나며 꾸준히 가격이 하락했고, 상류층 관심은 좀 더 희귀한 향신료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클로브나 넛메그같은 향신료로요. 넛메그를 손에 넣기 위해 네덜란드가 뉴암스테르담, 즉 뉴욕을 포기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러시아가 알라스카를 미국에 판 것과 비슷한 멍청한 행동으로 소개되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그럴만 한 행동이었어요. 네덜란드가 넛메그로 벌어들인 이익은 원가의 2,000%에 달했다고 하니까요. 몇 년 장사를 잘 했다면, 다시 돈으로 뉴욕을 확보할 수도 있으리라 여겼겠죠. 

뒤이어 설탕, 차, 초콜릿, 커피 등에게 그 지위를 넘겨준 현재가 짤막하게 소개되고 책은 마무리됩니다. 스파이스 시대의 종말이 찾아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파이스가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탐욕을 금했고, 종교 시장에서 향신료는 퇴출되었으며, 근대에 접어들면서 향신료가 가지고 있었던 이런저런 신비로운 이미지는 모두 희미해지고 재료의 맛을 강조하는 레시피가 유행하는 등의 영향도 컸고요. 이 책에 언급된대로 지금은 향신료를 많이 쓴 요리는 왠지 모르게 후진적이라는 이미지가 덧 씌워져 있지요.

이렇게 큰 틀에서 향신료, 스파이스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데, 문제는 단점도 크다는 겁니다. 제일 큰 단점은 지루하다는 점입니다. 특히 향신료가 널리 사용된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엄청나게 지루합니다. 종교적, 의학적, 식문화적 등의 이유가 나열되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수백 페이지에 걸쳐 계속 반복되는 탓이에요. 주제별로 묶어서 핵심만 요약했어야 했습니다. 도판도 별다른게 없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디테일한 설명은 좋지만, 너무 세부적인 부분에 집착해서 거시적인 흐름을 보기 힘들다는 단점도 만만치 않습니다. 향신료가 인기가 있었다는건 반복된 설명으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향신료 교역은 항로를 개척했던 몇몇 인물들과 몇몇 교역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만 소개될 뿐, 어떻게 항로와 무역 흐름이 진행되고 변화되어 왔는지가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국가간의 큰 흐름없이 세부적인 사건과 에피소드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향신료 교역을 직접 인도 항구에서 시도했다면, 그들은 무엇으로 교역을 했을까요? 또 어떻게 이들의 패권을 네덜란드가 빼앗아 올 수 있었을까요? 다른 유럽 국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 와중에 인도양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 그리고 동방의 맹주 중국은 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요?
또 항로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제대로 된 지도 하나 수록되지 않은 것도 큰 문제에요. 읽으면서 계속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는데, 불편하기도 불편할 뿐더러 항로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지도는 없어서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분량은 방대하지만, 쓸데없이 길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직전 읽었었던 "외국어 전파담" 처럼 세계사적인 흐름과 합쳐서 더 큰 시각으로 볼 수 있도록 정리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책은 아닙니다.

2020/07/16

어른의 맛 - 히라마쓰 요코 / 조찬희 : 별점 3점

어른의 맛 - 6점
히라마쓰 요코 지음, 조찬희 옮김/바다출판사

푸드 저널리스트 히라마쓰 요코의 에세이집으로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소다츠가 자신의 식도락 생활을 하이쿠가 아니라 일반 수필, 산문 형태로 써 내려간다면 이런 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글들이 가득합니다. 

은근하면서도 섬세한 묘사도 돋보입니다. 특히 "혼자의 맛"은 작가가 리얼 소다츠라는걸 증명하는 글이에요. 자신만의 음식 조합이라던가, 서서 마시는 선술집에서 어른스럽게 술을 마시는 방법, 혼자서 이자카야를 즐기는 법이 실려있는데 각 방법들 모두가 "술 한잔 인생 한 입"의 에피소드와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술집에서의 일화나 음식과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글들도 소다츠가 바로 떠오르고요.

그러나 단순한 술꾼, 먹보 미식가의 글만도 아닙니다. 깊은 연륜과 경험이 묻어나는 글들도 인상적입니다. "눈물나는 맛"이라는 제목의 글 구성이 특히나 마음에 듭니다. 글은 와사비 초밥과 고추가 들어간 김치 등 매운 요리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다츠가 먹음직한 아귀 간, 가라스미, 슈토 등 다양한 진미를 열거하며 어른이 되어 알고 먹게 된 맛에 대한 각별한 감정을 이어나가지요. 그 뒤는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된 여러가지 맛이 소개됩니다. 찜통에 찐 무화과에 참깨 소스를 얹은 일품 요리와 같은 대표적인 예가 등장하는건 물론이고요. 또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을 다시 맛볼 때 재회의 기쁨도 크다며 곶감, 톳 등의 맛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글의 마무리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렸을 때 먹었던 엄마의 맛입니다. 어른이 조용히 흐느끼게 되는 맛은 바로 그 맛인거지요. 음식에 대한 맛있는 묘사에 살짝의 감동까지 곁들여진 좋은 글이라 생각됩니다.

"깊은 산의 맛"에서 료칸 우쓰오장의 음식을 소개하는 글도 대단합니다. 사진 한 장 없지만, 음식의 형태와 맛이 떠오를 정도로 잘 묘사한 글이기 때문이에요. 산촌의 맛을 표현하면서 '오독오독, 꾹, 섬벅, 바삭, 아삭아삭, 담백, 미끈미끈, 혹은 어떤 것은 쌉싸래하고 어떤 것은 은은히 달고 끈끈하고 아리다.'라고 설명하는 문장처럼요. 이 정도 글 솜씨면 오히려 사진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따라해보고 싶은 레시피도 실려 있습니다. 시금치를 데쳐서 서벅서벅 잘라 물기를 쫙 빼고 으깬 두부와 함께 무친 일종의 나물이 그러합니다. 간은 올리브오일과 소금, 간 후추가 전부라는데 쉽게 따라해 볼 만 하지요. 맛도 좋을 듯 싶고요.
해삼 손질법은 집에서 하기는 어렵겠지만 기억하면 좋겠더군요. 일본 전통 해삼 손질 방법인 '자부리'에 대한 소개인데, 뜨겁게 끓인 녹차에 채썬 해삼을 넣고 재빠르게 휘저어 살짝 데친 뒤 채반에 받치면 됩니다. 녹차 온도는 보통 80도 정도이고요. 이 뒤 유자 식초에 담가 손님에게 내면 됩니다. 이렇게 데치면 오독한 식감이 경쾌해지고 녹차가 해삼 특유의 알싸한 맛을 누그러뜨려 좋다는군요.

간간히 언급되는 음식 관련 정보도 볼만합니다. '로산진의 낫토 먹는 법'은 처음 알았네요. 일단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상태에서 305번, 그 다음 간장 넣고 119번, 이렇게 총 424번을 섞으면 낫토가 가장 맛있다는 설인데 솔직히 말도 안된다고 생각됩니다. 저자가 여러 낫토로 실험해 본 결과로는 횟수는 전혀 중요하지 않답니다. 어떤 낫토냐가 더 중요한 거지요.
물의 경도에 따라 다른 맛이 나는 이유를 고찰한 "물의 맛"도 흥미롭습니다. 연수는 수용성 성분을 잘 유출하고, 경수는 미네랄 성분이 많아서 가교 결합이 이루어져 소재를 딱딱하게 만들기 때문에 연수는 일본 요리에, 경수는 유럽 요리에 어울린다고 하네요. 유럽에 스튜나 스톡이 많은 이유입니다. 경수라서 미네랄 성분이 소재와 더욱 잘 결합해서 진한 감칠맛을 내기 때문이지요.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렇게 재미도 있으며, 음미할만한 글이 많은 좋은 에세이였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크고요. 저도 이런 글을 쓰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0/05/31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김동진 : 별점 2.5점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6점
김동진 지음/위즈덤하우스

제목 그대로 조선에서의 소고기 식문화에 대해 고찰하는 책입니다. 

근거가 확실하여 신뢰가 가도록 쓰여진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조선 시대때 소고기를 정말 많이 먹었다는걸 증명해 주는데, 그 양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세종 때에는 무려 소가 15만 여 마리에 달했다니 놀라울 정도지요. 맛은 물론 몸에도 좋아서 성찬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전쟁 때 병사들에게 베푼 '호궤'의 중심이 소고기였다는 걸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양도 어마어마해서 숙종 때에는 군졸 한 명 당 0.81kg 부산물 제거 시 400g 정도 할당되었고, 술은 소고기 한 근당 술 다섯 홉까지 지급했다니 군 생활도 나름 할 만 했을 것 같네요. 소주 한 병이 2홉이니 고기에 술 2병 반이면 괜찮은 셈이잖아요? 이 양은 영조 때는 2.44배 등으로 이후 계속 증가했다고 하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역 (소 전염병)이 퍼지면 소가 죽을게 뻔해서 일찌감치 잡아서 먹었던게 소고기 식문화가 널리 퍼지고 전형화된 이유라는 것 역시 재미있는 이론이었고요.

이러한 조선 시대 소고기 식문화 관련 자료는 물론이고, 후반부에 소개되는 다양한 소고기 요리들도 볼거리입니다. 당연히 당시 자료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15세기는 주로 "산가요록"을, 16세기는 "촌가구급방", "수운잡방", "묵재일기"를, 17세기는 "음식디미방"을, 18, 19세기는 "산림경제" 속 요리와 조리법을 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비슷한 요리들도 있지만, 지금은 잊혀진 요리와 조리법들이 더 눈길을 끕니다. 어떤 요리들은 상당히 맛있을거 같아서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600여년 전 요리인 육면, 토장, 양 식해가 대표적입니다. 육면은 고기를 솔잎처럼 가늘게 썰어서 깨끗이 씻어 밀가루 또는 메밀가루를 반복해 묻혀 끓는 물에 삶는 국수 요리입니다.
토장은 밀가루 한 되와 고운 쌀가루 한 홉, 녹두가루 한 홉을 물로 반죽해 밀판에 놓고 밀어 길이 두 치(약 6센티미터)에 너비 한 치 반(약 4.5센티미터)으로 자릅니다. 이를 대광주리에 담아 끓는 물에 익혀 물에 담가 차갑게 식히고, 들깨즙에 간장을 넣고 여러 가지 향채와 맛있는 고기, 계란면, 표고 등을 섞어 먹습니다. 일종의 냉 비빔국수인 셈이죠.
양식해는 양을 먼저 물에 깨끗이 씻어 둥글게 조각내어 후추를 갈아 넣고 물이 펄펄 끓을 때 양을 잠깐 넣어 반만 익혀 꺼낸 것을 차게 식힌 뒤, 소금을 살짝 뿌리고 진밥 한 사발과 누룩 한 움큼을 고루 섞어 버무려 항아리에 담아 기름종이로 봉하고 재[灰] 속에 깊이 묻어두었다가 꺼내어 썰어먹는 일종의 젓갈입니다. 고춧가루를 더해도 괜찮을 듯 싶네요.

지금도 흔하게 먹는 소고기국과 곰국의 조선 시대 레시피도 인상적입니다. 소고기국은 "산림경제"를 통해 그 유래가 사슴고기국임을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나라 요리의 흐름을 아는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되네요. 조리법을 보면 지금의 소고기국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고기를 소금과 술, 식초를 써서 담그고 기름과 후추를 넣어 볶은 뒤 국을 만드는 식이며 내장 등의 고기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고춧가루를 넣으면, 지금의 내장탕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반대로 곰국은 끓는 물에 넣고 뭉근한 불로 오래 익히는 지금 방식과 똑같다는 것도 재미있고요. 그 외 요리들 소개 모두 나름대로 볼 만 했습니다.

또, 당시의 소고기는 대부분 늙은 소의 고기였기 때문에, 이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여러가지 노력들도 인상적입니다. "음식디미방"에서는 소고기를 삶을 때 살구씨 빻은 것과 떡갈나뭇잎을 넣는게 비결로 소개됩니다. 처음부터 고기를 물에 넣지 말고, 펄펄 끓을때 넣는 것도 비법으로 이는 "수운잡방"에서도 소개된 방법입니다.
"음식디미방"에서는 질긴 고기는 산앵두나무를 함께 넣고 뽕나무로 때서 삶으라고도 하고요. 저자는 조사를 통해, 살구씨는 굳은걸 풀어주는 성분이 있고 떡갈나뭇잎은 가죽을 부드럽게 만드는 타닌이 함유되어 있으며, 산앵두나무 역시 굳은 것과 부은 것을 풀어주는 성분이 있어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해 주었을거라고 알려줍니다.

소고기를 많이 먹었다는건, 보관 방법과 오래된 고기의 조리법도 비중있게 소개되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상한 고기의 경우, "당추자唐秋子에 구멍을 서너 개 뚫는다. 말만한 크기의 고기에 (당추자) 서너 개를 같이 넣고 삶으면 상한 것 같지 않다."며 조리해 먹을 정도입니다. 이는 소고기의 유통양이 적고 희귀했다면 관심가질 일이 없는 항목일테지요.

그러나 이러한 레시피들의 효과에 대해서 실제로 실험을 통해 증명한건 없으며, 단지 추정만 있는건 아쉽습니다. 또 소고기를 먹어야 장수했으며, 소고기를 먹지 않아 단명했다는 사례를 소개하는 등의 항목과 같이, 저자 입맛에 맞추어 가공된 자료가 많다는 것도 거슬렸던 점이고요. 이렇게 일반화 시킬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무엇보다도 전반적인 내용이 학술적 자료에 근거한, 논문과 같이 쓰여져 있어 읽는 재미를 느끼기 힘들었다는 것도 감점 요소였어요.

조선 시대 소고기 식문화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꼭 한 번 읽어봐야 하는 책이라는건 분명하지만, 재미 측면에서는 도저히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좀 더 에피소드 중심의 이야기를 수록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2020/04/19

중세 유럽의 레시피 - 코스트마리 사무국 / 김효진 : 별점 1점

중세 유럽의 레시피 - 2점
코스트마리 사무국 지음,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주제에 대해 깊숙히 파고들어, 일반 상식 이상의 정보를 전해준다는 취지의 AK Trivia books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제목 그대로 중세 유럽 요리의 레시피 43개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레시피 외에 중세 요리 및 저자의 중세 축제 체험기를 다룬 컬럼 몇 편이 함께 수록되어 있고요.

특징이라면 중세 유럽의 레시피를 현대의 재료로 재현하는걸 중요한 포인트로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제인 "손쉽게 만들어 즐겁게 맛보는 중세 요리'에 충실한 셈이죠. 그래서 수록된 대부분의 레시피들이 실제로 현재, 그리고 가정 내에서 구현 가능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맛이 짐작 가능해서 딱히 신선한 레시피는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쿠민 수프'는 향신료 쿠민이 들어갈 뿐, 현재도 우리가 즐겨먹는 '달걀국'과 같아요. 버섯 수프 '펑거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닭 육수에 다듬은 버섯들과 파, 시나몬, 클로브, 후추를 넣고 끓이는 레시피와 결과물 사진을 보면, 닭 육수를 쓰기는 하지만 멸치 다시마 육수를 써서 만드는 버섯국과 별로 맛이 다를걸로 보이지 않습니다. '작은 새의 무덤' 이라는, 중세풍 이름의 요리도 그 정체는 다진 마늘, 소금, 후추와 버무린 닭다리살을 볶은 뒤 타임, 로즈마리를 넣고 레드 와인과 물에 조리는 와인 닭찜입니다. 이 정도라면, 우리가 흔히 먹는 닭가슴살 간장 조림에서 간장만 와인으로 대체하면 되는 수준이라 집에서도 충분히 만들어 먹을 수 있겠죠.
또 현대에 재현하기 위해 재료를 나름 응용한다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중세의 허니 토스트를 재현하기 위해 '식빵'을 쓰는 식으로요.

물론 현대에 중세 요리를 재현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나쁠건 없습니다. 문제는 내용의 깊이와 전문성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점이지요. 레시피 하나하나의 분량은 많아야 2페이지 정도에 머물 뿐으로, 정말 '레시피' 이외의 다른 정보가 거의 소개되지 않을 뿐더러, 레시피들의 출처들도 소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저자의 마음 속에서 그럴듯하게 꾸며낸 중세 유럽의 요리인지, 아니면 실존했지만 이를 현대에도 맛볼 수 있게 어레인지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전문성 측면에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수록되어 있는 컬럼들도 중세 유럽의 장미, 백합, 제비꽃에 대해 알려주는 정도만이 괜찮았을 뿐 그 외에는 별볼일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쓸데 없는 저자의 중세 축제 체험기나 일본 내 중세 유럽 관련 행사에 대한 정보에 대한 사진과 비중이 높다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풀 컬러지만 재현한 음식들 한 컷씩만 실려있는 수준의 도판도 딱히 대단하지 않으며 책의 완성도도 그냥저냥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중세 유럽의 레시피를 현대에 재현한다는 취지 외에 건질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17,000원이라는 가격도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고요. 이쪽 분야에 관심이 지극히 많으시더라도,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0/03/08

질풍론도 - 히가시노 게이고 / 권남희 : 별점 2점

질풍론도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박하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즈하라는 탄저균을 활용한 생물병기 'K-55'를 비밀리에 개발했지만, 부당 해고당한 뒤 연구소장 도고에 대한 원한으로 K-55를 훔쳐내어 스키장으로 향했다. 코스 밖 너도밤나무 밑에 세균이 담긴 용기를 묻고, 장소를 알아낼 수 있는 표식으로 너도밤나무에 발신기가 넣어진 테디 베어를 걸어 둔 구즈하라는 설산과 테디 베어가 찍힌 사진 두 장과 함께 3억 엔을 요구하는 메일을 도고 소장에게 보냈다. 돈을 보내지 않으면 세균은 방치될테고, 이후 계절이 바뀌어 섭씨 10도 이상이 되면 보관 용기는 깨져서 탄저균에 의한 재앙이 시작될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였다.
그러나 곧바로 구즈라하는 급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죽었고, 도고 소장은 K-55를 경찰에 알리지 않고 은밀히 찾아낼 것을 선임 연구원인 구리바야시 가즈유키에게 명령했다. 구리바야시는 스노보드 마니아인 중학생 아들 슈토와 함께 구즈하라의 사진으로 알아낸 유력 후보지인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으로 향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설산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설산 3부작 시리즈답게 "백은의 잭"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던 네즈가 사토자와 온천 스키장의 패트롤로, 치아키는 슬럼프에 빠진 프로 선수로 등장하며, 스키, 스노보드와 스키장에 대해 깊은 이해가 동반된 묘사로 가득차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K-55 묻혀있는 스키장을 사진 하나로 찾아낸다던가, 스키장으로 이동하는 방법, 스키 종류에 대해 풀어놓는 부분들 처럼요. 특히 활주에 대한 매력을 풀어내는 장면은 실제로 그런 멋진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쓸 수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의도는 불순하더라도 구리바야시가 아들 슈토와 스키장에 온 후, 점차 부자 관계가 회복되어 가는 묘사도 뻔하지만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설득력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이는 전작의 이리에 부자 이야기와도 어느정도 겹쳐서, 역시 시리즈구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또 K-55가 묻혀있는 나무를 나타내는 테디 베어를 찾는 후반부 박진감도 괜찮습니다. 오리구치가 협박으로 병원균이 담긴 용기를 손에 넣지만, 치아키와의 추격전 끝에 네즈에게 빼앗기고, 그러나 카페에서 용기가 실수로 깨진 뒤 바꿔치기 되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세균을 가졌을 유키를 쫓고, 또 바꿔치기하고... 하는 과정이 결말까지 이어지는데 숨돌릴 틈이 없을 정도에요. 이런저런 등장인물들이 총 출동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무슨무슨 대소동'같은 오래전 활극 느낌인데 저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울러 이 후반부가 제목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질풍은 말 그대로 세게 부는 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추격전을, A-B-A-C-A 처럼 어떤 주제로 넘어가더라도 다시 A로 돌아오는 형식의 악곡인 론도는 어떤 의외의 상황, 곁가지 이야기가 펼쳐져도 결국 '탄저균 용기'로 귀결되는 전개를 의미하는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모로 전작보다는 못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은 정교한 맛을 찾아보기 힘든, 그냥 모험물에 불과한 탓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스키장을 찾아내는 정도만 약간의 추리가 있을 뿐, 테디베어를 찾는건 순전히 발품파는 것 밖에는 없으니까요. 별다른 단서도 없고, 그냥 열심히 찾다보면 발견할 수 있다는건 결국 어린아이들 소풍 중의 '보물 찾기'와 다를 바 없는 이야기인 셈이죠.

이는 작품 속 악역의 우두머리인 도고 소장이 무식하고 무능력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백은의 잭"의 신게쓰 고원 스키장 임원들은 악당이기는 했지만 나름 계획도 세우고, 음모를 꾸미는 정도의 두뇌는 갖췄던 것에 반해 도고 소장은 무리한 지시만 늘어놓는 재수없는 상사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독자가 두뇌 게임을 즐길 여지와 정교한 맛 모두 전무합니다. 도고 소장에 비하면 차라리 죽은 구즈하라, 그리고 소장 뒤에서 암약한 악녀 오리구치 마나미가 더 낫기는 합니다. 특히 마나미는 '독수리는 발톱을 숨긴다'는 명제를 따라 몸을 숨기며 한 탕을 노리는 캐릭터인데 은밀한 흑막에 참 잘 어울린다 싶더라고요. 그녀가 학생일 때 '백 점을 맞을 수도 있지만, 그래봤자 질투를 받거나, 학급임원 일을 떠맡을 뿐'이라며 일부러 몇 개 틀린다는 에피소드가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큰 돈은 한탕 승부를 걸 수 밖에 없다, 그 때가 올 때 까지는 느려터지고 둔해보이도록 위장하여 기회를 기다려야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된다'는 생각도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렸고요. 인상적인 캐릭터에 비하면 활약과 결말에서의 퇴장도 미약한 편인데, 도고 소장보다는 차라리 마나미를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나가는게 어땠을까 싶네요. 도고 소장 옆에서 구리바야시를 도와주는 듯 했지만, 마지막에 구리바야시 뒷통수를 치는 식으로요.

또 은백색의 스키장에서 펼쳐지는 스키와 보드 활주가 너무 매력적으로 그려지고, 슈토의 풋사랑, 네즈와 치아키의 사랑과 고민에 대한 비중이 높은 탓에 위험한 생물병기 탄저균 K-55의 위험이 전혀 와 닿지 않는 전개도 단점입니다. 그냥 보물 찾기에 대한 청춘 모험물로 밖에는 보이지 않더라고요.

전작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습니다. 테디 베어를 아무 상관도 없는 중학생들이 먼저 발견한다는 전개도 그렇고, 처음 네즈가 겨우 입수했던 K-55가 중학생 유키에 의해 후추로 바꿔치기 되었었는데, 결국 찾아낸 진짜 K-55마저도 구리바야시의 아들 슈토에 의해 소시지로 바꿔치기 당햔다는 결말은 좀 지나쳤어요. 이런 요소까지 오래전 '대소동' 류의 이야기를 따를 필요는 없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쑥쑥 읽히는 맛은 있기는 한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팬이 아니시라면 꼭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소설로 읽기보다는 한바탕 신나는 액션이 신나게 펼쳐지는 코믹 액션 영화로 감상하는게 훨씬 나을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일본에서는 아베 히로시 주연의 코믹 액션 영화로 이미 발표되었던데, 사람들 생각은 다 똑같나 봅니다.

2020/02/14

커리의 지구사 - 콜린 테일러 센 / 강경이 (주영하) : 별점 4점

커리의 지구사 - 8점
콜린 테일러 센 지음, 강경이 옮김, 주영하 감수/휴머니스트

"지구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 있는 식문화 역사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이 전에 시리즈 중 세 권을 읽고 리뷰를 남겼었죠(위스키, 치즈, 피자). 그런데 예쁘게 잘 만들어져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별로 인상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시리즈는 구입했지만 그동안 손대지 않고 있던 차에, 얼마전 읽었던 "카레라이스의 모험"을 읽고 급작스럽게 땡겨서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만족도가 높습니다. 커리에 대한 역사는 물론, 세계화된 과정과 세계속 커리 요리들, 그리고 커리의 현재까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동안 항상 궁금했었던, '커리는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채소와 고기를 기름에 볶은 매콤한 카릴 혹은 카리라는 남부 인도 요리가 영어로 '커리'로 변형되고, 이 말이 일반적인 인도 요리를 가르키는 말로 굳어지게 된 것이라고요. 중국 요리를 서양에서 '찹 수이'라고 퉁쳐 말하는 것과 똑같은 상황인 셈이죠.
그리고 원래 인도 아대륙에는 강황, 생강, 카마린드, 인도산 후추라는 자생 향신료가 있었는데, 인도 상인들이 다양한 국가와 교역을 하면서 온갖 외국 요리들이 인도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그 뒤 포르투칼과 영국 등의 침략, 식민지 운영을 통해 서양 요리가 인도 요리, 재료와 결합되며 18세기 말에는 영국인들에게 '커리'라는 말과 요리가 일반적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커리의 오랜 세월을 거친 발전 과정도 상세하게 소개해 줍니다. 

인도 뿐 아니라 인도인들이나 다른 교역을 통해 커리가 전파된 이웃 국가들의 커리 요리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습니다. 영국은 물론,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은 식민지 운영 국가는 물론 카리브 해, 모리셔스, 스리랑카, 피지 및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커리가 어떻게 전파되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여러가지 요리들의 명칭과 상세한 소개는 물론, 유명 요리의 경우 간략한 레시피까지 수록되어 이해를 도와주는데 미국 남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커리 중 하나라는 영국식 인도 음식 컨트리 캡틴 치킨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수록된 '리델 박사의 컨티리 캡틴 치킨' 레시피는 1849년 출간된 서적에서 인용된 것인데 현대 커리 레시피와 별로 다르지 않더군요. 양파를 채 썰어 버터에 갈색이 될 때 까지 볶다가 잘게 썬 닭고기와 소금, 커리 가루를 뿌리고 볶은 후 수프를 부어 끓이면 됩니다.

상세한 설명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것들도 많아요. '탄두리 치킨'이 파키스탄 난민 쿤단 랄 구즈랄에 의해 만들어진지 고작 70여년 밖에 되지 않은 레시피라는 것입니다! 버터 치킨 역시 쿤단 랄 구즈랄이 만들었다니 그리 오래 된 요리가 아닌건 마찬가지고요. 탄두리 화덕의 역사와 함께 하는 오래된 레시피라 생각했는데 의외였어요.

마지막에 수록된, 주영하 님이 쓴 한국 커리의 역사도 자료적 가치가 무척 높습니다. 일본인들에 의해 20세기 초반 전파된 후, 1930년대 이후는 일반화되었고 해방 이후 1960~70년대에는 이미 직장인들의 주된 점심 메뉴로 자리잡았으며, 같은 시기에 인스턴트 카레가 발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과정이 도판과 함께 충실히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지구사" 시리즈다운 판형과 디자인도 마음에 들며, 풀 컬러로 수록된 도판과 각종 자료도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과연, 카레왕이 추천할 만 합니다. 카레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카레라이스의 모험 - 모리에다 다카시 / 박성민 : 별점 3점

2020/01/23

카레라이스의 모험 - 모리에다 다카시 / 박성민 : 별점 3점

카레라이스의 모험 - 6점
모리에다 다카시 지음, 박성민 옮김/눌와

카레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저자가 카레의 정체를 탐구하고, 뒤이어 일본식 카레와 카레라이스의 형성 과정에 대해 고찰한 음식사, 문화사, 미시사 사적입니다.

읽으면서 "맛의 달인" 24권의 '카레 승부' 편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도대체 카레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인도까지 가서 카레가 무엇인지를 조사하고, 영국으로 찾아가 카레 가루의 원형을 찾는다는 이야기 전개 구조가 완전히 똑같기 때문입니다. 그 뒤 일본 카레의 형성 과정을 깊숙히 파고든다는 점은 차이점이지만 스리랑카는 카레에 몰디브 피쉬라는 가다랑어 종류 건어물을 사용한다, 카레의 맛이 부족하면 한방약을 털어서 섞어 먹으면 좋다는 등 "맛의 달인"에도 등장했던 이야기가 뒤에도 계속 등장합니다. "맛의 달인" 24권이 출간된건 1990년이며, 이 책이 언제 출간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이런저런 카레 서적을 발표하며 '카레왕' 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저자이니, 이 책에 등장했던 전개와 이야기들이 원조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나 당연히 책이기 때문에 "맛의 달인" 보다 카레에 대한 정보 제공은 훨씬 자세하며 정보의 폭도 넓고 깊습니다. 여러가지 아이디어들도 돋보이고요. 일본에서 시판되는 카레를 조리해서 인도인에게 먹여본다는 도입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실제로 인도인들도 꽤 맛있어 했다는게 인상적이었어요.
인도의 여러 향신료를 조합하여 만든 요리를 '카레'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맛의 달인"에 이미 나왔던 내용이지만, '카레'의 어원은 타밀어에서 무언가 끼얹어 먹는 소스를 의미하는 '카리'에서 왔거나, 힌디어로 향이 강하고 맛있는걸 뜻하는 '터카리'라는 말에서 왔거나, 아니면 옛 인도 북부의 요리 이름인 카디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재미있었습니다. '캥거루' 어원에 대한 전설처럼, 영국 지배 시기에 영국 관리가 인도인들에게 먹는 요리를 물어보았는데 그들이 맛있다고 한 '쿠리'라는 말에서 유래했던 설은 거짓말이라는 디테일까지 완벽했습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한 시기의 이야기라면 18세기 이후 이야기인데, 커리가 처음 영어 문헌에 등장한건 1598년이기 때문이라네요.
그 외에도 인도인들도 카레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던가 - 등장하는 요리사인 쟈인 씨는 국물이 있는 요리라고 하지만 마살라, 즉 향신료를 조합하여 사용하는 요리는 모두 카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 매운 맛의 기본은 특별한 향신료가 아니라 고추와 후추가 중심이며 인도에서 카레를 만들 때 양파를 카라멜라이즈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등 새롭게 알게 된 정보가 가득합니다.

이러한 카레의 정체에 대한 탐구 뒤 펼쳐지는 일본식 카레의 형성에 대해 심도있는 고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문화권에 완전히 이질적인 요리가 도입되어 국민 요리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제대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맛의 달인"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우선 소개되는건 일본 카레의 기원입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카레 조리법인 "서양요리지남" 속 카레는 개구리! 카레였으며, 야채로 파를 사용했다는군요. 이 책이 나온 19세기 후반에는 일본식 카레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으며, 양파, 감자, 당근이 생소한 채소였기 때문입니다. 1879년 간행된 "서양과채조리법" 속 파는 “오니언” 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고, 다른 책에는 “아니언”이라는 표기도 있었으며 “뿌리를 식용으로 하며, 겉의 껍질을 벗기고 잘 씻는다”라고 주석이 달린걸 보면 파 역시 당시에는 잘 알려져 있던 재료가 아니었을테고요. 이러한 개구리 카레 스타일의 카레 요리법이 1900년대 초반까지 퍼지게 되는데, 지금과 다른 점은 카레 가루를 넣은 소스로 고기를 익힌 요리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인도식과는 다르게 카레 가루를 쓰고, 밀가루로 걸쭉하게 만들었다는게 특징이지요.
지금과 유사한 카레 요리법인 걸쭉한 카레 루에 고기와 함께 양파, 감자, 당근을 함께 넣어 볶고 끓여 만드는 방식은 다이쇼 시대 이후 확립되었습니다. 군대에서 이러한 레시피로 카레를 조리하여 배식한게 결정적 역할을 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러한 조리법의 역사와 함께 저자는 카레가 일본의 국민 요리가 된 이유를 추적합니다. 우선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 시스템을 받아들여 국가를 개조하던 와중에 육식이 유행하게 됩니다. 대표 요리인 규나베가 널리 퍼진 뒤, 카레가 일본인에게 서양 요리의 입문격 요리로 알려지고요. 이유는 이미 익숙한 쌀밥과 함께 먹을 수 있고, 고기도 규나베처럼 작게 썰어 넣어 부담스럽지 않았던 덕분입니다.
그 뒤 '1. 레스토랑, 식당 등의 메뉴에 등장한다. -> 2. 잡지, 서적(현재라면 TV)과 같은 미디어에서 요리법 또는 '요즘 이런 요리가 유행'이라는 말 등이 소개된다. -> 3. 일반 가정의 식탁에도 등장하게 된다.' 라는 외부 요리 수용 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도입 초기의 소스형에서 스튜형으로 조리법도 바뀌고요. 소스형 카레는 주재료가 고기지만, 가정 요리로는 요리하는 데 돈이 많이 들지 않도록 고기는 적게, 그리고 밥에 국물을 끼얹어 먹는 식의 음식으로 발상을 전환한게 그 이유입니다.
그 결과가 본래의 서양 요리와는 다른 일본풍의 양식 '카레라이스'인 것입니다. 그 뒤, 일본 카레 가루 제조와 카레 루의 판매, 인스턴트화 등을 거친게 현재의 일본 국민 요리 카레라이스입니다.

이렇게 일본 카레라이스에 대해서만 연구한 결과물이라는건 아쉽지만, 카레가 아니라 그 어떤 요리라도 다른 문화권에 흡수될 때에는 비슷한 과정을 거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독서였습니다. 책의 장정과 디자인, 구성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카레왕께서 추천한 참고 도서인 "카레의 지구사"도 빨리 읽어봐야겠군요.

2019/05/19

세계 야채 여행기 - 다마무라 도요오 / 정수윤 옮김 : 별점 3점

세계 야채 여행기 - 6점
다마무라 도요오 지음, 정수윤 옮김/정은문고

몇몇 야채들에 대해 그 역사와 주요 레시피에 대해 다루고 있는 독특한 요리,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모두 6개의 야채 - 양배추, 감자, 고추, 가지, 토란, 사탕수수 - 에 대해 원산지와 유래, 전래된 국가별로 사용되는 다양한 레시피, 문화적인 측면에서 두드러지는 점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소개해 줍니다.
읽으면서 식견에 감탄했던 "레시피가 없어도, 그럴싸하지 않습니까"의 저자 다마무라 도요오 여사의 책이라 구입했습니다.

본인의 경험과 다양한 자료를 통해 얻은 지식을 쉽게 전달하는 능력만큼은 역시나 일품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단한 건 글 솜씨입니다. 등장하는 야채들과 여러가지 음식, 재료 관련 이야기는 다른 관련 도서에서 분명 많이 접했던 것들인데 이를 통합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내면서 거기에 자신의 경험을 담아내는게 감탄스러워요. 또 분명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깊이와 내공을 잘난척하지 않고 써 내려간 것도 높이 평가하고요. 최소한 저 같은 속물은 흉내내기도 어려울 정도에요.
대표적인 예는 후추가 왜 중요하게 취급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입니다. 고대로부터 신에게 공물을 바칠 때 육류를 최대한 깨끗이 해야 했으며, 이를 위해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식물이나 동물성 향료 및 각종 향신료를 대량으로 사용한게 시초라고 소개합니다. 향유 등 향기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가지 신화나 전설을 통해 많이 접해온 사실인데, 이를 후추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실로 놀랍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 후추만큼 자극적이고 독특한 향신료는 달리 찾아보기 힘드니까요.
"대구"에서 방대한 분량으로 소개했던 뉴펀들랜드와 서인도 제도, 아프리카를 잇는 삼각무역을 사탕수수를 통해 간단하게 요약해서 설명하는 부분도 인상적입니다.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지식까지 곁들여 이야기를 확장하고 있거든요.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추출하고 남은 찌꺼기인 당밀을 뉴잉글랜드(뉴펀들랜드)로 대량으로 가져온 탓에 럼주 공장이 생겨 큰 이익을 불러왔다는 식으로요. 노예와 럼주라니, 뭔가 지옥의 악순환으로 보이네요.

또 본고장의 요리법같이 쉽게 알기 힘든 이야기를 경험 기반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그 중에서도 캐비아처럼 맛있다는 중동의 '가지 캐비아'는 꼭 한 번 해 먹어보고 싶네요. 구워서 으깬 가지에 올리브 오일, 요구르트나 레몬즙만 섞으면 된다고 하니까요.
요리 전문가답게 저자가 창조한 독특한 레시피들도 인상적으로 그 중에서는 "삼단 냄비 요리"가 가장 땡깁니다. 우선 질냄비에 다시마를 깔고 두부와 파, 배추 등의 야채와 버섯, 어패류를 끓인 후 폰즈 소스에 찍어 먹은 뒤, 양배추와 양파를 넣고 우유를 듬뿍 부어 서양식 크림 스튜 스타일 치킨 냄비 요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카레 가루와 같은 향신료를 넣어 카레를 만드는 건데 "술 한잔 인생 한입"에서 소다츠가 선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육수를 차례로 우려내면서 만들어 먹으면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겠죠! 

그 외에도 사소하지만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음식 관련 상식도 별 것 아닌 듯 툭툭 던져지는데 이 역시 재미를 더해 줍니다. 박하는 엷을 박薄에 짐 하荷를 써서 박하를 수증기 증류하여 기름을 추출하고 캔에 담으면 양이 줄어서 옮기기 편하기에 '박하'라고 했다는 이야기 등 처럼요.

아쉬운 점이라면 인용한 서적의 소개라던가, 진위 여부를 따질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점과 부실한 도판입니다. 너무 두서없이 이야기를 펼치는 탓에 조금은 정리해 주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와 현학적인 즐거움 모두를 충족시켜주는 좋은 책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볍게 즐길 수 있으면서도 깊이있는 미시사, 문화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9/03/30

맛의 천재 - 알렉산드로 마르초 마뇨 / 윤병언 : 별점 5점!

맛의 천재 - 10점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윤병언 옮김/책세상

이탈리아인이 자국의 유명 요리와 그 요리에 관련된 주변 역사까지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는 요리 관련 미시사 서적입니다. 딱딱할 내용을 재미나게 써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전세집 운운하는 박찬일 셰프의 소갯글부터가 재미난데 이어지는 본문도 시종일관 유쾌하면서도 기묘한 유머가 가득합니다. 

요리 역사에 대한 사료적 가치도 엄청납니다. 피자만 해도, 피자의 역사만 오롯이 다룬 책도 읽어보았지만 오히려 이 책 쪽이 밀도가 더 높을 정도니까요.
원래, 19세기 초 까지만 해도 반죽에 먼저 치즈 등 식재료를 올리고 그 위에 토마토 소스를 뿌렸다는데 언제 이 순서가 뒤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마르게리타 피자는 원래 있었지만 요리사 라파엘로 에스포지토가 재치(피자의 이름을 묻는 왕비에게 왕비의 이름이라고 대답한)를 발휘한 덕분에 역사에 길이 남았다는 등 시시콜콜하면서도 실제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합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우선 스파게티의 마르코 폴로에 의한 중국 유래설은 오류라고 합니다. 1929년 미국의 "마카로니 저널" 이라는 월간지에 실린 근거없는 기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사를 읽어보니 베네치아 뱃사람 이름이 스파게티였다는 등 황당하기 짝이 없어서 이 기사가 사실처럼 굳어진게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애초에 재료부터 다르니까요. 물론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 수마트라 지방의 파스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은 실제 중국에서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전해주기는 합니다. 당연히 마르코 폴로보다는 훨씬 전 시대에 말이죠.
또 스파게티가 주력 국수가 되고 마카로니는 샐러드 용으로 밀려난 계기는 1927년 크래프트 사의 파마산 치즈 가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마케로니는 귀족들의 음식이었는데 안타까와요.

샐러드는 이탈리아 대표 요리의 하나랍니다. 로마에서부터 먹어왔다지요. 소개되는 로마식 샐러드 레시피를 보니 식초는 아끼되 기름은 아끼지 말고, 소금은 많이 후추는 적당히 쳐서 먹는다는데 완전 제 취향입니다.
프로슈토는 고대 로마에서도 먹었던 유서깊은 음식으로 포 강 유역의 에트루리아 문명터에서 발굴된 뒷다리가 없는 돼지의 뼈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고 합니다. 당시의 돼지 종류는 지금과 달랐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좋았어요. 또 놀랐던 건 당연히 생으로만 먹을 줄 알았는데 볶거나 익혀먹는 레시피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튀김까지 있는데 그 맛이 궁금해집니다. 

카르파초가 그 명성에 비하면 만들어진지 고작 5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에도 놀랐네요. 실존 인물로 의사가 건강 문제로 날고기를 권했던 후작 부인 니나 모체니고를 위해 만들어진 요리라는 역사도 흥미롭고요. 이름도 화가 카르파초의 이름에서 따온 직접적인 네이밍이라는데 역시나 처음 알았습니다. 요리 창조자인 베네치아 해리스바의 주세페가 아들 아리고와 요리 이름에 대해 고민하다가 앞 벽에 화가 비토레 카르파초의 전시회 포시터를 보고 옳다쿠나 싶어 이름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화가가 즐겨 쓴 붉은 색이 요리의 색상과 유사했기 때문이라는데 무릎을 칠 만 합니다.

후반부 누텔라 이야기에서는 다시금 책의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누텔라가 어떻게 생겨났고, 그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현재와 같은 세계 정복 (?) 이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를 그야말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경쟁 제품까지 소개하니 말 다했죠. 그나마 누텔라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소개했던 "오무라이스 잼잼"에서의 내용은 그냥 겉핥기에 불과하더라고요. 그 외에도 옥수수, 모짜렐라, 와인, 티라미수 등 친숙한 음식에 대한 방대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과감한 발상도 돋보입니다. 포크에 대해 소개하며 샤를마뉴 재위 당시 왕과 귀족들은 사냥한 동물들을 끊임없이 먹어야 했기 때문에 통풍이 직업병과 같았다는 반쯤은 우스개스러운 이야기도 좋은 예지만, 로마 시대에 늑대는 야수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로마인들이 기본적으로 채식주의자라는 사실에 기반하며, 그들이 양을 먹지 않았기에 늑대는 경쟁자, 야수가 아니라 친구였다는거지요. 그러나 인간이 양을 먹기 시작하면서 늑대가 야수가 되었다는데, 무척이나 그럴듯합니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게 젖을 먹인게 늑대였던 것이 이 발상을 뒷받침합니다.
와인과 사과주의 대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와인이 세계를 뒤덮은 이유를 기독교와 연결시켜 설명하거든요. 초기 기독교, 로마 교회는 포도주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는데 알프스 북쪽 드루이드 교도는 사과주를 마셨다는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드루이드들 천국 명칭 '아발론'은 아발의 섬, 즉 사과의 섬이라는 뜻이라는 말과 함께요. 결국 로마 교회가 승리한 뒤 사과가 지옥을 상징하며 종교 행사에서 사과주가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지요.
샐러드가 식사의 시작에서 식사 도중의 곁들임 음식으로 밀려나는 과정과, 다시 식사 시작 음식으로 복귀하는 과정이 실제 역사적 사실 - 식초가 들어간 음식을 거부하는 문화와 비타민 유행 - 과 결합해 보여주는 내용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디테일이 탁월한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의 연회 문화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다양한 책을 읽었지만 와인을 따르던 전문가 코피에레에 대한 묘사는 처음 봤네요. 온갖 좋은 점은 한 몸에 다 갖춘 듯한 사람이더라고요. 길게 늘어뜨린 옷에 주홍색 양말,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 벨벳 신발을 신는다는 패션 센스마저 돋보입니다.
또 당시 요리들은 모두 단품이 아니라 코스였으며 당시 설탕을 많이 사용했던건 소금의 짠맛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는 발상도 눈에 띕니다. 그리고 안 좋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료가 필요했다는 것도 사실과 멀었다는군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어야 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비싼 향료를 살 여유도 없었을 거라는게 이유인데 확실히 와 닿습니다.
캐비아는 원래 굉장히 싸구려 음식으로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영국 병사들에게 보급품으로 캐비아 캔을 나누어 줄 정도였다는 것도 신기합니다. 참치 대뱃살, 킹크랩과 같은 과정을 밟은 셈이네요.

그 외에도 유명한 디자이너 브루노 무나리의 손길이 닿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저도 사용해 본 적이 있는 모카 에스프레소 디자인 등 디자인 강국 이탈리아스러운 이야기들도 마음에 들었고 다빈치가 실제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는 이야기, 그곳에서의 일화도 기억에 남습니다. 음식의 양을 줄이고 플레이팅에 신경을 쓴 최첨단의 세련된 레스토랑이었는데 손님들 모두 격분해서 경영은 실패하고 말았답니다. 과연, 플레이팅 따위보다는 가성비가 최고인거죠.

이런 내용이 재미난 글과 함께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빼곡하게 실려 있습니다. 단점을 찾는게 힘들 정도로 재미있고 가치도 높은 책입니다. 2만원이라는 가격도 수긍할만 합니다. 제 별점은 5점! 요리, 특히 이탈리아 요리를 사랑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 이탈리아인들은 정말로 위대한 민족이에요. 요리와 예술 측면에서는요.

2018/12/29

술 취한 식물학자 - 에이미 스튜어트/ 구계원 : 별점 3점

술 취한 식물학자 - 6점
에이미 스튜어트 지음, 구계원 옮김/문학동네

부제인 "위대한 술을 탄생시킨 식물들의 이야기" 그대로 을 만들때 사용되는 다양한 식물들에 대해 소개하는 책입니다. 친숙한 사과나 보리, 포도, 쌀 등 고전적인 술의 원료에서 시작하여 바나나와 카사바와 같은 이색적이고 독특한 재료들, 다양한 허브와 향신료, 꽃과 나무, 열매들, 견과류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재료가 망라되고 있습니다. 이 재료로 만들어진 술들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관련된 칵테일 레시피도 50여가지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요. 집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재료인 경우, 그 재배법까지 실려있고요.

분량도 400여 페이지를 훌쩍 넘어서 볼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마시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술에 대한 소개입니다. 켄터키 버번이 첫 번째입니다. 켄터키가 지금과 같은 버번의 땅이 된 이유가 아주 매력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옥수수가 재배하기 쉬웠고 초기 이민자들이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출신이라 증류기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맑고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풍부한 석회암 매장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특히 석회수는 지하에서 솟아 나올 때 10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는데, 이 온도는 냉각과 응결 과정에 꼭 맞는 완벽한 온도라네요. 석회수의 높은 알칼리성과 풍부한 칼슘, 마그네슘, 인산 함유도 맛을 더해주는 요소고요.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한 번 구입해야겠어요.
담배로 만든 술인 프랑스의 "페리크 리쾨르 드 타박"도 맛보고 싶습니다. 니코틴을 완벽하게 제거했다는데 과연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합니다. 참고로 담배로 고급 술집에서 수제로 "시가 비터즈"를 만들어 제공하기도 하는데, 이는 담배와 향신료를 알코올 도수 높은 증류주에 우려내는 것으로 지나치게 많은 니코틴이 함유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는군요.
포틀랜드 증류업자 스티븐 매카시의 갖은 노력으로 완성된 미송 증류주도 탐납니다. DOUGLAS FIR BRANDY 라는 술인듯 한데 1년에 250상자만 제조하는 술 치고는 가격도 5만원대로 저렴하군요. 우리나라에서 구하려면 그 배를 주어도 구하기 어렵겠지만요.

갖가지 토막 상식도 재미를 더합니다. 금주법 시행 당시 캘리포니아의 포도 재배 업자들은 "과일 벽돌"을 팔았다고 합니다. 포토를 말려서 압축한 뒤 와인 제조용 효모와 묶은 상품으로 물을 더하면 양조가 시작되는 물건이었다는군요. 아이디어가 정말 빼어나죠?
또 프랑스 포도나무는 19세기 포도나무뿌리진디에 의해 초토화 된 후 미국 포도나무와 접목하여 살아남은 것이며, 현재의 칠레 와인이 포도 나무 뿌리 진디 이전의 포도나무로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이유 외에도 칠레 와인을 사랑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은 셈입니다.
호밀이 맥각균에 감염되면 LSD 성분이 생기고, 이 맥각중독이 중세의 무도병의 원인이라는것도 마찬가지로 처음 알았고요. 마약 중독자라면 호밀 재배를 시도해봄직 하겠네요.
"그로그"는 영국에서 선원들에게 럼을 배급할 때 홀랑 마셔버리지 않게 물과 라임 주스, 설탕을 섞어 배급한 음료입니다. 그런데 럼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선원들의 의심이 커지자 비중을 증명하기 위해 럼과 화약을 섞어 불을 붙이는 테스트를 했다는군요. 대략 57% 정도의 알코올이 함유되어야 불이 붙었다는데, 이 테스트 결과를 "프루프 Proof" 로 제시한 것에서 현재의 프루프 단위가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즉 57%의 알코올이 함유된 병은 100 프루프인 것이죠. 미국에서는 더 간략화해서 50%의 알코올이 100 프루프고요.
그 외에도 중국 요리에 많이 사용하는 "팔각"은 허브 리큐어에도 사용되지만 독감약 "타미플루"의 원료이다, 스위트 우드러프라는 여러해살이 풀의 "달콤한 풀내음"은 잠재적 독성 성분인 쿠마린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표시이다는 등의 설명도 신기했습니다. 그런데 풀내음에 대한 설명은 정말 맞는 말인지 궁금하네요. 달콤한 풀내음을 가진 풀은 많으니까요. 의외로 우리나라 들판에도 독초가 가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록된 칵테일 레시피도 볼게 많은데, 감자로 만든 보드카인 스웨덴의 칼손스 골드 보드카로 만든 "블랙 골드"는 심플함이 눈을 사로잡습니다. 칼올드패션드 글래스에 얼음을 채운 후 그 위에 칼손스 골드 보드카 1과 1/2온스를 붓고 후추를 갈아 뿌리는게 전부거든요. 상당히 터프한 느낌인데 맛이 궁금하네요.
사케 칵테일은 니코리 사케 4, 망고 복숭아 주스 2, 보드카 1, 도멘 드 캉통 진저 리큐어 소량을 잘 섞은 뒤 칵테일 잔에 따르고 셀러리 비터즈 한 방울을 떨어트려 만듭니다. 대충 느낌은 복숭아맛 호로요이 느낌이 아닐까 싶군요.

이렇게 많은 정보가 수록된, 술과 관련된 식물의 백과사전이라 해도 무방한 책으로 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소장가치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단순 정보의 나열 뿐이라 읽는 재미가 덜한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었지만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8/12/08

원더랜드 - 스티븐 존슨 / 홍지수 : 별점 4점

원더랜드 - 8점
스티븐 존슨 지음, 홍지수 옮김/프런티어

"재미와 놀이가 어떻게 세상을 창조했을까" 라는 부제로, 여러가지 대중 오락에 얽힌 역사를 풀어나가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의미있는 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냥 재미와 유희, 놀이를 통해 만들어진 무언가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무언가에 이르른 갖가지 사례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줍니다.
재미 외에 특별한 목적이 수반된 경우도 있습니다. 자주색 염료를 만들 수 있는 뮤렉스 달팽이를 찾아 페니키아인들이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으로 나아갔다는 활동은 명백히 "돈"을 위함이니까요. 책에서는 이 역시 자줏빛 의상이 그것을 걸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요. 즐거움을 주는 물건들은 가치가 있어서, 사람들이 이를 상업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신기술을 개발해서 시장을 개척한다는 논리인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네요.

첫번째 단락은 상점을 무대처럼 장식하여 고객을 사로잡고, 구매 행위를 일종의 오락처럼 만드는 과정과 면직물의 유행을 통해 산업 혁명이 촉발된 후 "유행"이 "소비"를 창출하여 "백화점" 이 등장하는 과정, "쇼핑몰"이 도시 계획과 맞물린 후 미래 도시의 비젼을 제시했다는 내용입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로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이는 각종 악기의 발전과 오르골 등을 거쳐 로봇 공학과 자동 방직기로 이어집니다. 방직기는 프로그래밍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요.
악기의 발전은 전문적인 공학의 발전과 맞물려야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 그리고 음악 관련 기술의 발전이 현대의 디지털 시대에 이르는 과정 모두가 굉장히 설득력있게 설명됩니다.

유희, 즐거움이라면 미식이 빠질 수 없죠. 향신료 교역이 불러온 갖가지 이야기도 소개되는데, 로마 제국이 후추에 너무나 열광해서 아피키우스의 요리책 조리법의 80%가 후추를 사용한다는 이야기 같은 잡학이 가득해서 마음에 듭니다. 프랑스인 푸아브르가 네덜란드가 독점하다시피 한 정향을 빼돌려 재배에 성공한다는 일종의 산업 스파이 이야기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향신료 중 가장 마지막까지 사치품 지위를 유지한게 바닐라라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네요. 토머스 제퍼슨이 바닐라 아이스크림 조리법을 미국에 도입했다던가, 가루받이가 어려워 퍼지기 어려웠지만 한 노예 소년의 아이디어로 양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특히 이 노예 소년 이야기가 향신료 교역을 상징합니다. "스페인이 지배하는 멕시코에 자생하는 식물을 인도양에 있는 한 섬에서 프랑스인이 재배했고, 프랑스 노예상인들이 그 섬에 데려온 아프리카인의 후손인 한 소년이 그 꽃을 최초로 가루받이 했다" 는 이야기니까요.

다음에는 만들어진 "환영" 에 대한 소개가 이어집니다. 영화의 전신인 특수 효과 공연과 이 중 가장 유명했던 유령 쇼 "팬태즈머고리아", 풍경을 실제처럼 느끼게 해 주는 파노라마 전시, 활동 사진과 월트 디즈니의 혁신, 이윽고 등장하게 된 "유명인들" 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다양한 도판과 함께 설명됩니다. 이러한 시각 효과를 활용한 오락거리가 문화적으로 어떻게 침투했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고찰이 함께 진행되는데,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게임 또한 빠지지 않습니다. 여기 소개된 단락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인데 체스 게임은 "비유"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도입부부터 신선했고, 이를 통해 인공 지능이 발전되는 과정, 그리고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게임이 된 보드 게임 (모노폴리) 등 모든 소개 내용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한 "공 놀이"가 고무라는 혁신적인 물질의 역사로 이어지는 과정과 비디오 게임의 등장이 컴퓨터를 재미로 쓸 수 있다는 혁신적인 발상의 시작이었으며, 덕분에 컴퓨터가 일상 생활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는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마지막은 다양한 놀이 공간에 대한 이야기인데 선술집에서 시작해서 커피 하우스, 박물관, 동물원, 공원 등의 역사가 실려 있습니다.

이렇게 즐거움, 놀라움을 추구하는 인간이 얼마나 새로운 걸 많이 만들어내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 혁신을 하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 재미있게 즐기는 마음가짐이 필수일 듯 합니다. "즐기는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옛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닌거죠. 또 단지 혁신에 대해 되새겨 보는 측면 외에도 다양한 놀거리와 즐길거리에 대한 미시사 서적으로도 탁월해서 만족스럽네요.
글의 내용이 통사적 구분이라기 보다는 주제별로 좀 널뛰는 감이 없잖아 있다는건 단점이지만 장점에 비하면 극히 사소합니다. 도판도 충실한 편이고요. 이렇게 취미에 가까운 놀거리, 즐길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최소한 엉망인 제 리뷰보다 훨씬 좋은 책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참고로 책 뒤 "감사의 말씀"을 보니 방송 프로그램을 책으로 만든 듯 싶더군요. 책보다는 방송으로 보는 게 훨씬 나은 내용일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방송으로 봤다면 4점 이상도 줬을 것 같습니다.

2018/11/24

일본의 식문화사 - 이시게 나오미치 / 한복진 : 별점 2점

일본의 식문화사 - 4점
이시게 나오미치 지음, 한복진 옮김/어문학사

선사 시대( 정확하게는 후기 구석기 시대)부터 근대까지 이어지는 일본의 식문화를 정리한 책입니다. 특정 요리나 특정 시기만을 다루지 않고 통사적으로 전반적인 식문화사를 다루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몇가지 기억에 남았던 부분을 꼽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조몬 시대 초 2만 명 정도였던 일본 열도의 인구가 조문 시대 중기 26만여명 까지 늘어났는데, 그 이유는 도토리, 상수리 나무 열매 및 각종 견과류가 식량 자원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수리 나무 열매는 동일 면적 대비 생산량으로 따지면 생산량이 많은 벼의 1/8에 해당될 만큼 생산량이 많아서 유용했다고 하네요. 이는 발굴된 당시 인골이 충치가 많은 것으로도 증명됩니다.
쌀이 주식으로 도입된 이유는 벼가 몬순 아시아에 적합하고 수확량이 많을 뿐더러 토양 침식이나 연작 장애가 없다는 농학적 장점에 더해 칼로리원이며 단백질도 우수하다는 영양학적 장점이 큰 덕분입니다. 부식물 없이 인체 유지를 위한 단백질을 쌀만으로 섭취하려면 체중이 70kg인 사람의 경우 조리하지 않은 쌀을 하루에 약 0.8kg 먹어야 하는데 이는 위장에 부담을 줍니다. 그러나 위장에 일단 채워두는게 가능했기에 유용했습니다. 이만큼을 밀가루로 섭취하려면 3kg을 섭취해야 하는데 이는 위장에 넣어두기 불가능한 양이라네요. 여튼, 이를 위해 농번기에 일본 농민은 하루에 1.5kg씩 쌀을 먹기도 했답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고봉밥으로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은 이유도 마찬가지겠죠.
식육의 공급은 여러모로 부족했고, 유제품 역시 거의 활용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기록에 남은 유제품은 '소'입니다. 유즙을 1/10로 졸인 음식입니다. 추측으로는 우유를 은근히 가열하여, 표면에 떠오른 막을 반복하여 걷어내 만든 유피일거라네요.

그리고 9세기 경에 현재에 계승된 전통적인 일본 요리의 기본적 조리법이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차이점이라면 기름을 이용하는 요리법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육식을 하지 않아 동물성 지방, 버터를 이용할 수 없었고 식용유를 짤 수 있는 깨 등의 작물은 매우 비쌌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름진 맛이 진하고 품위없다는 인식이 정착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연회의 형식도 같은 시기 확립되었는데, 공적 질서를 중시하는 전반부 음주가 끝나고, 자리를 바꾸어 예를 찾지 않는 2차회가 이어지는 2부 구성입니다. 현대와 똑같은데 이러한 형식이 헤이안 시대에 이미 확립된 것이라니 재미있네요.

그리고 다회, 가이세키 요리 등 지금도 친숙한 여러가지 용어가 등장합니다. 이 중에서 네덜란드나 포르투칼 요리에서 비롯된 '난반 요리' 설명이 특히 재미있습니다. 서양식 요리를 일본식으로 변경한 아이디어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가사키의 '히가도'는 참치, 무, 당근, 고구마를 주사위 모양으로 썰어 간장으로 맛을 낸 조림 요리로 원래는 소고기를 기름에 볶은 조림 요리라고 합니다. 소고기 대신 붉은 빛의 참치로 변경하고, 기름을 많이 쓰지 않는 일본 요리처럼 소테 과정을 빼고 조림 요리로 변화시킨 겁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전통적 식문화의 완성, 그리고 근대에 외국 요리가 대거 도입되며 일어난 변화로 식문화사를 정리하는데 이 과정도 난반 요리와 유사한 점이 엿보입니다. 대표적인게 우스터 소스의 사용입니다. 간장을 만능 조미료로 사용했던 전통적 식문화에 기반하여, 쌀밥에 어울리는 우스터 소스를 서양 간장으로 이해하여 이를 적극 활용하게 된 것이지요. 중국 요리가 일본적으로 변형되고, 여기서 '시나 소바'가 '라면'으로 변화하는 과정도 같은 시각으로 설명합니다. 시나 소바는 원래 돼지고기와 닭뼈 스프에 구워서 조린 돼지고기를 얹고 후추를 뿌려 먹은 면 요리인데, 소바와 우동 등 전통적인 면류를 야식용으로 행상이 팔았던 것 처럼 야식으로 시나 소바가 활발히 팔리면서 일본적으로 변형된게 계기라고 말이죠. 그리고 예를 든 건 고명으로 차슈 외에 멘마, 나루토말이, 다진 파를 얹은 것입니다

이러한 식문화 역사가 1부 분량이며 2부에서는 식문화, 즉 예법과 용품, 조리법, 조리 기술 등을 망라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법과 용품에 대한 내용은 딱히 흥미롭지 않았으며, 조리법 등을 소개하며 사시미, 스시, 스키야키, 두부, 라멘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다른 관련 서적에서 익히 보아왔던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아 실망스러웠습니다. 30여 페이지에 불과한 3부인 세계로 뻗어나가는 일본 식문화에 대한 소개는 정말 볼 내용이 없었고요.

이렇게 기대에 미치지 못한 2부, 3부의 내용 외에도 책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도판이 부실한 점은 그렇다 쳐도 번역이 너무 엉망입니다. 보다 쉽게 쓸 수도 있었을텐데 너무 어렵고, 맞춤법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오탈자도 많은 탓입니다. 번역을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요리 전문가가 했기 때문으로 보여지는데, 요리 전문가가 각종 용어에 대해서는 훨씬 잘 알 수 있기야 하겠지만 "제 2의 창작" 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번역의 역할을 너무 간과했습니다. 어찌되었건 20,000원이라는 가격에 어울리는 수준은 아닙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 국가의 식문화를 통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으로 인상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완성도에 걸맞는 가격은 아니라서 감점합니다. 같은 이유로 권해드리기는 어렵네요.

2018/09/30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 구스미 마사유키 / 최윤영 : 별점 2점

먹는 즐거움은 포기할 수 없어! - 4점
구스미 마사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인디고(글담)

국내에는 "고독한 미식가" 원작가로 잘 알려져있는 구스미 마사유키의 음식 관련 에세이집입니다. "고독한 미식가" TV 시리즈를 보신 팬이시라면 에피소드가 끝나면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가게에 찾아가 음식을 즐기는 구스미 마사유키의 모습이 친숙하실테지요. 고기구이, 라면, 돈가스 등 모두 26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습니다. 전부 저자가 특정 음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추억을 갖고 있는지를 털어놓으며, 맨 마지막에 아주 짤막한 4컷 만화로 마무리되는 구성이고요. 하나의 음식 이야기 전부 해서 10페이지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을 뿐더러 만화 외의 그림도 많아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조금 특이했던 것은 음식에 대해 확고한 자기 생각이 있으며, 이와 다른 스타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컵라면은 갑자기 먹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원조 닛신 컵누들이 제일 좋다. 이런 저런 맛을 낸다는 본격파 따위는 필요없다. 건방지다'면서 본격적인 라면이 먹고 싶으면 나가서 사 먹으라고 하는 식으로요. 자기 주장이 과하고 일방적이라 좋게 보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이와마 소타츠하고 그야말로 판박이라 재미있었습니다. 몸에 좋고 맛있는 것 보다는 정크 푸드를 가끔이지만 찬양하는 모습 등 그 외에도 소타츠와 비슷한 부분이 많네요. 이런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라면 피곤하겠지만, 그냥 지켜본다면 재밌게 감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먹는 방식에 대한 일종의 체계와 룰도 재미있었습니다. 고양이 맘마는 대체로 단무지 두 조각이 나오는데 마지막 밥 한 입과 단무지 반 조각이 남도록 조절하여 함께 입에 넣어 음미하는게 마무리이다, 돈가스 조각을 먹는 순서와 돈가스를 맛있게 먹으려면 돈가스 양의 최소 다섯배의 양배추가 필요하다는 등 처럼요. 돈가스 관련된 내용은 "음식의 군사" 에 등장했던 내용과 조금 비슷하기도 합니다.

간단힌 레시피도 몇 가지 소개되는데 그 중에서도 양배추 요리가 가장 땡깁니다. 밤새 뼈 째로 푹 고아 만든 토종닭 수프를 걸러낸 후, 여기에 십자로 칼집을 넣은 양배추를 통째로 넣어 소금으로만 간 한 후 통냄비로 한 시간 정도 푹 끓여낸 수프입니다. 누룽지밥에 유자 후추를 살짝 뿌려 먹으면 맛있다는데 꼭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닭 백숙 육수로 끓여내면 되려나요? 간단하게 치킨 스톡을 써도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볼만한 내용이 적지 않지만, 만화였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구스미 마사유키라는 작가가 아니라 허구의, 가상의 캐릭터였다면 보다 마음 편하고 재미있게 읽었을 것 같거든요. 너무 자기 주장이 센 부분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요. 또 딱히 건질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라 권해드리기는 조금 애매하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18/09/16

역사를 만든 백가지 레시피 - 윌리엄 시트웰 / 안지은 : 별점 2.5점

역사를 만든 백가지 레시피 - 6점
윌리엄 시트웰 지음, 안지은 옮김/에쎄

제목 그대로 특정 역사를 대표하는 요리사 - 미시사 서적입니다. 레시피 소개에 이어, 해당 레시피가 어떤 역사를 만들었는지 여러 페이지에 걸쳐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상상 속 레시피는 아니며 모든 레시피가 명확한 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레시피인 고대 이집트의 빵은 룩소르 세네트 묘실 벽 기록이 근거이며, 두 번째인 바빌로니아의 카나수 수프는 설형문자 점토판이 출처라고 하네요.

레시피만 보면 이게 뭔가 싶기도 한데, 읽어보면 "역사"를 만들었다는 제목에 수긍이 갑니다. 인류사, 아니면 최소한 요리계에 영향을 준 것들 중심으로 수록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고대 로마 카토의 햄 레시피는 그 자체가 특별한건 아니지만 이를 '염장 보관' 과 연결하여 그 중요성을 드러내며, 로마 문화의 절정은 소스가 가장 맛있었던 시대였다는 해석처럼 설명도 아주 그럴듯합니다. 소개되는 소스는 후추, 로바지, 파슬리, 말린 박하, 회향, 포도주에 적신 꽃, 구운 견과류나 편도 열매, 소량의 꿀, 포도주, 식초를 섞은 수프를 가열하여 휘젖다가 녹색 셀러리 씨와 개박하를 넣는 소스인데, 이 정도의 재료를 갖추어 요리할 정도의 문명이라면 대단히 번성한건 분명할테니까요.
그 외에도 샌드위치가 이동이 잦아진 시대에 유행했다는 해석, 키치너 박사의 레시피와 책을 통해 영국의 쓸데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형식주의를 드러내고, 카렘의 유명한 과자 레시피로 프랑스 요리의 화려함을 극명하게 알려주는 등 볼거리가 많습니다.
레시피를 통해 새로운 식재료가 전파된 것, 그리고 요리가 국가와 대륙 사이로 이동이 이루어 졌다는걸 당대 문화 교류사와 엮어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초콜릿의 전파와 식민주의를 연결하는게 대표적인 예이고요.

근대 이후는 라디오 방송에서 시작된 쿡방으로 레시피가 널리 알려지고, 전자 레인지로 대표되는 여러 도구들의 도입을 통해 획기적으로 식생활이 변하는 과정, 전쟁 당시 배급제로 빚어진 열악한 레시피들, 풍요의 시대를 거쳐 즉석 식품의 유행, 그리고 방송과 언론, 미슐랭 가이드를 통해 연예인 수준의 유명인이 된 셰프들의 등장, 각종 먹거리의 범람에 대한 반동과 환경 운동으로 등장한 채식주의와 슬로 푸드 운동, 인터넷과 앱으로 매체가 변하고 마지막에는 다시 중세의 레시피 재해석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절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실제 역사의 흐름과 요리, 레시피가 특별한 해석 없이도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는게 재미있어요. 브리아 샤바랭의 말 처럼 "무엇을 먹는지"를 통해 그 사람과 시대를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나저나, 다시금 중세 요리로 복귀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라면 중세의 그 으리으리하고 시끌벅적했던 쇼와 같은 만찬이 다시 등장하지 말라는 법도 없겠네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직접 연출을 지휘하기도 했다는 르네상스 연회는 항상 궁금했었는데, 곧 실제로 보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세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레시피를 다루고 있기에 당연히 범위도 넓습니다. 고대의 경우는 중국을 포함해 모든 고대 문명의 레시피가 수록된건 물론이고 역사적으로도 고대 - 중세를 거쳐 타이방 이후 체계를 갖추는 과정, 중세 이후 근대, 현대, 그리고 지금 현재까지를 대표하는 레시피가 소개됩니다. 타이방과 카렘에서 줄리아 차일드, 제이미 올리버 등 유명 셰프들의 레시피도 많으며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먹는 에그 베네딕트, 흘렌다이즈 소스, 피치 멜바 등 친숙한 요리 소개도 반가왔어요.

하지만 주로 "영국" 기준으로 쓰여진건 아쉬웠습니다. 세계사와 관련된 요리를 다루는 것도 앞부분의 잠깐일 뿐 결국 영국의 요리, 영국의 요리사, 영국의 식당이 관련된 레시피 비중이 높은 탓입니다. 근대 이후에는 동양권 요리는 찾아보기도 힘들고요. 그리 큰 비중은 아니더라도 일본의 제국주의의 시작과 "고기 감자 볶음" 정도는 연결해서 설명해줄 만 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읽기 쉬운 글도 아니었습니다. 도판이 부실하여 글만으로 요리와 그 맛에 대해 상상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딱딱하고 단순한 번역투 문체가 상당히 거슬렸어요.
아울러 정말로 역사적인 레시피이냐? 라고 할 때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레시피도 제법 수록되어 있다는 점도 약점이에요. 어떤 역사를 대표한다거나, 요리 역사에 있어서 변곡점이 되었다거나 하는 레시피가 많은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획 자체의 아이디어는 좋고 소장 가치가 있는 단락도 있지만 600페이지 가까운 분량 모두가 흥미롭지는 않습니다. 요리와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괜찮지만, 재미가 있는 책은 아닌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