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법정 추리물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법정 추리물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01/02

법의 체면 - 도진기 : 별점 2점

안녕하세요, 2026년 새해가 밝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새해 처음으로 리뷰를 올리는 작품은, 척박한 한국 본격 추리물 시장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입니다.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과 "완전범죄" 두 편은 좋습니다. 법을 잘 아는 작가가 법에 대한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덕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진기 작가만 쓸 수 있을 법한 작품이에요. "완전범죄"는 본격물을 방불케 하는 추리가 펼쳐지기도 하고요.
"애니"는 다소 독특한 설정의 SF인데, 이 역시 설정만큼은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당신의 천국"과 "행복한 남자" 두 편은 한마디로 망작이었고, 앞서의 세 편 역시 전개와 묘사 등 소설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빼어난 설정과 아이디어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작가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점수를 줄 만한 흥미로운 지점은 분명 있는데, 아쉽게도 단점이 더 많습니다.

수록작별 상세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의 체면

호연정 변호사에게 변상일이 찾아와 자신의 장물 취득 사건 3심 변호를 의뢰했다. 변상일의 유죄가 확실했지만, 시한부 인생이라는 변상일의 청에 못 이겨 호연정은 사건을 맡았다. 그러나 예상대로 상고는 기각되었다.

그러나 상고 기각 확정 후, 변상일이 강원도 홍천에서 일어났던 ‘청테이프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체포되었다. 증거는 현장에서 발견된 변상일의 쪽지문이었다.

호연정 변호사 시리즈 단편입니다. 변상일의 조작으로 유죄가 확정된 장물 취득 사건이 일어난 날짜가 청테이프 살인사건 발생 일자와 같아서, 변상일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지만 풀어줄 수 없는 딜레마를 다룹니다. ‘법의 체면’이라는 제목 그대로이지요. 법관들은 체면 때문에 이전 판결을 뒤집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는 굉장히 흥미롭고, 변상일이 과거 음주운전 사고로 딸과 아내를 잃었는데, 음주운전 가해자 장봉호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탓에 장봉호와 법에 복수하려고 결심했다는 서사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 변상일의 범행 과정을 1인칭의 단순 강도 살인 사건처럼 묘사한건 반칙입니다. 독자는 변상일이 진범이 아니라고 오해하게 되니까요. 전개에 필요했던 부분도 아니니 빼야 합니다. 마지막 변상일의 자살도 좋은 마무리는 아니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을 잘 풀어냈지만,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아쉽습니다.

당신의 천국

국회의원 최명환에게 상담 차 장애가 있는 박성혜라는 젊은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명환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용의 거의 대부분은 막장 드라마를 쓰다가 시민단체로 고발당하고 취조당한 끝에 자살 시도로 몸을 망쳤다는 박성혜의 1인칭 고백입니다.

그러나 장황한 고백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설득력도 낮고 시시합니다. 박성혜가 최명환에게 살의를 품은 이유도 별로 와 닿지 않고요. 무슨 논리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최명환을 살해하는 방법도 생수통에 독을 풀었다는 것인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여자가 생수통에 어떻게 약을 풀었는지, 청산가리는 어디서 구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묘사도 문제입니다. 28살 여성의 한 서린 독백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건질 만한 점이라면 박성혜가 ‘신시아’라는 필명으로 썼다는 막장 드라마의 내용뿐인 막장 범죄물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완전범죄

석지연은 동거하던 직원 방미래 과실치사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사인은 의심할 바 없는 뇌출혈이었고, 방미래가 술에 취한 줄 알아 방치했다는 변명은 설득력 있어 보였다.

의사 출신 김 검사는 피해자가 거액의 질병 사망 보험에 가입했다는 점을 근거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기소하는데...

과실치사로밖에 보이지 않는 완전범죄가 등장하는 본격 추리물이자, 법정에서의 공방이 벌어지는 법정물 단편입니다.
작 중, 김 검사가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동기. 단지 직원 방미래에게 숙식을 제공할 뿐인 사장 석지연이 그녀를 살해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2. 범행 방법. 마침 그 시간에 뇌출혈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김 검사는 첫 번째는 거액의 보험으로, 두 번째는 평소 피해자에게 뇌출혈 전조 증상이 있다는 점을 눈치챈 범인이 보험 가입을 유도했고, 뇌출혈이 일어났을 때 방치했다는 답을 내놓습니다. 그리고 방미래의 연인 류소이의 증언 등을 통해 법정에서 전조 증상은 2개월 전 부터 있었다는게 밝혀지고요.

이러한 본격 추리적인 재미에 더해 법적인 딜레마 부분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의사 출신인 김 검사는 방미래의 의료 기록을 보고 그녀가 뇌출혈을 일으켰을 때 거의 즉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는 석지연이 방미래를 방치했던건 방미래의 죽음과 인과관계가 없는 행동이기 때문에, 그녀를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본격물적인 요소와 법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드는 딜레마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나 황 판사가 의사인 아내를 통해 방미래의 사인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에 대한 극심한 혐오로 이를 숨긴 채 사형 선고를 내렸다는 결말은 작품을 완전히 망쳐버립니다. 아쉽기만 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애니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던 동한은 금사원 박사의 연구에 피험자로 응모했다. 하룻밤에 한 사람의 한 평생에 대한 꿈을 꾸게 해 주는 ‘영생’ 실험이었다.

설정은 정말 멋집니다. 한 평생의 꿈을 꾸게 하면 결국 그것이 영생에 가깝다는 발상은 정말 혹할 만 하니까요. 친구 수민에게 사 주었던 전기 충격기로 뇌에 삽입된 칩을 제거한다는 결말도 작가의 작품치고는 보기 드물게 깔끔합니다.

하지만 연구로 만들어진 ‘꿈’에 자아가 생겨 본체를 지배하려 한다는 전개는 뻔합니다. 설명도 충분하지 않아 와 닿지 않고요. 애니와의 사투 역시 박진감은 넘치지만,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탓에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설정과 마무리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다는 점은 마음에 듭니다. 다른 작품들도 이 정도로만 정리되었다면 훨씬 좋을텐데 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행복한 남자

꽃뱀에게 당한 한 남자의 약 반년에 걸친 일기 형식을 빌린 독백으로 내용도 뻔하지만, 그나마의 설득력조차 낮습니다. 문체가 30대 남자의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구식이고, 과장되고 낡은 표현이 많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맞는 결말 역시 식상하며 전혀 현대적이지 못합니다.

낡은 설정을 낡게 풀어낸, 새로운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탓에 2025년에 읽을 이유가 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5/30

판사 이한영 - 이해날, 문성호 / 전돌돌 : 별점 2점


드라마도 제작될 정도로 인기있는 웹 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기본 설정은 뻔한 회귀물+복수극이지만, 주인공 직업이 '판사'라는 특이한 차별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법정 배경 작품 중에서 검사나 변호사가 아니라 판사가 주인공인건 처음 접해 보네요. 그 덕분에 법정물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한영이 회귀 후, 과거 판결 결과와 사건 진상을 기억하고 있어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면서 승승장구한다는 전개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지는데, 이게 꽤 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선희는 전 연인 박혁준에게 스토킹당하다가 사망했는데 마침 박혁준이 보험금 수령자이기도 해서 유력한 용의자로 부상하지요. 하지만 이한영은 박혁준과 불륜 관계였던 피해자의 사촌 김가영이 진범이라는걸 여러가지 주변 증거를 통해 밝혀냅니다. 살인 미수 누명을 쓴 서민훈 사건은, 서민훈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유성그룹의 음모라는걸 택시의 블랙박스 영상 등으로 증명하고요. 이처럼 추리물에 가까운 구성과 연출이 돋보이는 사건들이 제법 많아서 단순한 법정극 이상의 재미를 줍니다. 이한영의 판결은 대기업 회장이나 강신진 판사같은 빌런에게 무려 '사형선고'를 내릴 정도로  '사이다' 판결이라서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 있고요.

아울러 판사가 재판을 통해 얼마나 판결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부분은, 최근 국내에서도 논란이 되는 ‘접대 판사’ 문제와 맞물려 있어서 더 흥미로왔습니다.

이한영의 복수 서사도 나쁘지 않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강신진과 장태진을 무너뜨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박철우 검사, 로펌 에스로펌 소속의 유세희, 기자 송나연 등 각각의 역할이 분명한 조력자들의 도움이 잘 그려진 덕분입니다.

하지만 복수가 구체화되어 갈 수록 긴장감과 개연성은 퇴색되어 버립니다. 대부분 사건들이 녹화나 녹취 파일 한두 개나 주요 인물의 배신으로 쉽게, 뻔하게 증명되는 탓이 큽니다. 압도적인 권력을 가진 인물들이 이런 증거와 증언 한, 두개에 무너진다는건 현실적이지도 않고요. 또한 강신진과 장태진 같은 인물들이 직접 범죄에 가담하고, 치명적인 증거를 남긴다는 전개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검사, 경찰도 아닌 판사가 드러난 증거 외의 것에 간섭한다는 설정부터가 말도 안되지요.
이한영이 에스로펌의 후계 구도에 간섭하고, 장유린 판사와 손을 잡는 등의 불필요한 서사도 거슬렸습니다. 에스로펌을 몰락시키겠다는 의도와 후계 구도에 간섭해서 유세희를 밀어주는 행동은 아무리 봐도 앞 뒤가 안 맞더라고요.
만화적인 과장도 지나칩니다. 법정 장면은 과장되고 고증이 부족하며, 석정호나 박철우 검사의 전투력 묘사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등장인물들도 두서없습니다. 강력한 빌런이자 라이벌로 보였던 김윤혁은 일관되게 찌질함만 보여주다가 별다른 활약없이 퇴장해 버리고, 에스로펌의 유선철은 조력자로 나설 듯 하다가 갑자기 흑화하는데 결말도 허무하기 그지 없습니다. 러브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한영과 유세희, 송나영, 윤슬혜 간 관계는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고, 김진아 검사는 뜬금없이 박철우와 엮이는 식이니까요. 이런 점에서 깊이 생각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한 티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부의 구성력과 법정 내외의 갈등 구조,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분명 매력적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현실성과 논리 전개가 약화되면서 아쉬움을 남깁니다. 앞부분에 여러 가지 사건을 배치해서 흥미를 자아내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흥미를 잃게 만드는 흔한  법정 드라마와 비슷했어요.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네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2/09/04

대단한 밀실 트릭! 신비로운 고전 걸작 5편 소개 (from 'honto')

일본의 전자책 서점 honto에는 책 전문가인 북 큐레이터가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선정하여 소개해주는 서비스 '북트리'가 있습니다. 그 중 밀실 트릭 고전 걸작 소개입니다. '고전 걸작'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고전이면서도 트릭면에서 나무랄데없는 좋은 작품들입니다. 이런 류의 추천치고는 일본 작품 비중이 비교적 낮다는 것도 장점이고요. 이 서비스를 좀 더 이용해 보아야겠네요.

소개작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모르그 거리의 살인" 에드거 앨런 포 

밀실에서 일어난 범행이라는 수수께끼, 홈즈의 원형이라고 불리우는 명탐정 듀팽, 논리적인 해결, 의외의 범인 등의 요소로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의 막을 연 작품.

2. "노란 방의 비밀" 가스통 르루 

"오페라의 유령" 원작자로도 유명한 저자가 그려낸 '완벽한 밀실'인 노란 방에서의 범행, 거기에 두 개의 인간 소실 수수께끼까지 더해져 있다. 고전 모험 활극의 향기도 느껴지고, 밀실 추리물 최고의 걸작이라고 칭송받기도 하는, 올 타임 베스트에 단골 선정되는 명작.

3. "유다의 창" 존 딕슨 카 

엘러리 퀸, 크리스티 여사님과 함께 황금 시대 (골든 에이지) 삼대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딕슨 카의 작품. 밀실의 거장이라고도 불리운 카의 작품답게 밀실 살인과 법정 미스터리가 결합되어 있다. 밀실에서 피해자와 함께 있었던 피고를 명탐정인 법정 변호사 헨리 메리베일경이 변호하는 내용으로, 아주 유명한 트릭이 사용되었지만 트릭을 알아채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

4. "혼진 살인사건" 요코미조 세이시 

명탐정의 대명사 긴다이치 코스케의 데뷰작. 열쇠도 없고, 장지문으로 만들어져 밀실에는 적합하지 않은 일본 가옥을 무대로 한 최초의 밀실 추리물로도 유명한 불후의 명작.

5. "문신 살인 사건" 다카기 아키미쓰

다카기 아키미츠의 데뷔작으로 명탐정 카미즈 교스케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유명 문신가의 문신을 한 3자매 중 한 명이 토막난 사체로 밀실에서 발견된다. 쌍둥이 자매, 토막난 시체, 욕실이라는 밀실에서의 살인이라는 본격 추리물의 재료가 가득한 작품. 트릭도 훌륭하다.

2022/09/03

파기환송 - 마이클 코넬리 / 전행선 : 별점 1.5점

파기환송 - 4점
마이클 코넬리 지음, 전행선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방검사장 게이브리얼이 미키 할러에게 특별 검사 자리를 제안했다. 아동살해범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20년 이상 수감되어 있었지만, 스스로 사법 투쟁을 벌여 파기 환송을 만들어낸 제이슨 제섭 사건 때문이었다. 사건 당시 발견되었던 정액이 DNA 분석 결과, 제이슨 제섭의 것이 아니었다는게 결정적 이유였다. 앞으로 60일 이내에 검찰은 그를 무죄 방면할지, 재심할지 결정해야 했다. 게이브리얼은 사건을 재심하기를 원했지만 특별 검사제를 시행해야 하는 상황이라 미키 할러가 필요했다. 

전처 매기를 차석 검사로, 이복형 해리 보슈를 전담 수사관으로 임명하는 조건으로 사건을 받아들인 미키는 팀을 꾸렸고, 재판을 위해 여러가지 자료를 조사한 끝에 세라의 증언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는걸 알아챘다. 사건 당시 13살의 나이로 제섭을 범인으로 지목했던 그녀는 현재 실종 상태였다. 해리 보슈는 수사를 통해 세라를 찾아냈고, 그녀를 증언대에 세우는데 성공하는데....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 이후 이어지고 있는 마이클 코넬리미키 할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전 작에서 언급되기는 했었지만, 미키 할러가 '특별 검사'로 변신하여 자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변호사 클라이브 로이스와 맞서 싸운다는 설정 변주가 독특했습니다. 전처인 검사 매기 맥퍼슨, 그리고 작가의 또 다른 인기 시리즈 주인공 해리 보슈와 함께 하는 '드림팀' 구성도 볼만했고요.

그러나 내용은 실망스러웠습니다. 특히 제이슨 제섭 사건 재판은 분량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대단한 조사가 진행된 듯 하지만, 실상은 세라의 증언 - "제이슨 제섭이 동생을 납치한 바로 그 사람이다", "정액이 묻었던 옷은 원래 내 옷으로, 양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탓에 정액이 묻었었다." - 가 증거의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이를 뒤집기 위한 클라이브 로이스의 카드도 별볼일 없습니다. 세라의 전 남편인 에디 로만을 증언대에 세워, 당시 양부가 멜리사를 죽였으며 이를 숨기기 위해 세라에게 거짓 증언을 시킨 거라는걸 폭로하려 했는데, 이 시리즈 내내 반복되어 왔던, '검찰 측 거짓 증인' 이나 '교도소 내 밀고자' 를 통한 물 흐리기 작전과 똑같아서 식상했어요. 

게다가 미키 할러가 법정에서 에디 로만을 무너트리는건 전작들보다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에디 로만의 현재 동거인 소니아 레이예스를 법정 안에 데리고 들어온게 전부거든요. 그녀가 있거나 없거나 에디 로만의 증언이 바뀔 이유가 딱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에디가 그녀를 본 뒤 증언을 완벽하게 번복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클라이브 로이스의 작전은 배심원들에게 의심의 씨앗만 심으면 충분했는데, 이렇게 전적으로 증언을 번복할 이유 역시 없고요.

추리, 범죄, 스릴러물로도 기대 이하입니다. 멜리사 사건의 진범이 제섭이고, 초반 재판의 키 포인트로 보였던 정액이 양아버지 것이었던 이유는 세라가 성폭행 당했기 때문이라는 등 주요한 수수께끼 모두는 세라의 증언으로 밝혀지니까요. 세라는 제섭의 얼굴을 24년이 지났지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양아버지 정액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는 전무합니다. 

다른 수수께끼들은 억지스럽기만 합니다. 제섭이 재판 전, 한 밤중에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따라 프랭클린 캐니언 등의 공원에 몰래 방문해서 촛불을 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수수께끼가 대표적이에요. 제섭은 연쇄 살인범으로 자기가 죽였던 피해자들이 묻혀있어서, 그걸 기념(?)하는 행동이었다고 주장하고, 이를 해리 보슈의 지인인 FBI 심리 분석관 레이철의 분석으로 설명하는데 이해하기 힘듭니다.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뒤,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피해자를 살해했던걸 어떻게 연쇄 살인과 연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동 살해범이 이전에도 범행을 저질러왔던 연쇄 살인마라는건 당황스러울 정도로 전형적이었을 뿐더러, 설령 그렇다쳐도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수 있는 곳을 어슬렁거리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묻혀있는 시체를 제섭과 연결시킬 수 없으니 일단 묻고 가자는 미키 할러의 주장은 용납할 수도 없고요. 그게 제섭의 범행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종된 여자들과 그 가족에 대한 기본적인 동정심이 있다면 만사 젖혀두고 시체를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제섭이 해리 보슈의 집 앞에 머물렀던 이유, 은밀한 거처를 만들었던 이유 등도 딱히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답답했습니다.

전개도 시원치 않습니다. 우선 미키 팀이 피해자의 언니 세러를 찾아내서 인터뷰하는 부분이 작품의 1/3 정도 지점이라 그 이후 제섭 사건에 대한 흥미는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제섭이 진범이라는게 확실하니 당연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에 미키 팀이 에디 로만의 증언을 박살내 버린 후, 좌절한 제섭이 자기 변호사 팀과 감시하던 SIS 요원들을 사살하고 도주한다는 결말은 최악입니다. 법정물, 추리물 비스무레한 뭔가에서 헐리우드 액션물로 전락해버리는 탓입니다. 제섭이 도주 후 딱히 하는 것 없이 사살당하는 장면도 허무했고요. 복수를 노린 것도 아니고, 뭔가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단지 숨어있으려고 했던 것 뿐이라 실망스럽습니다. 

아울러 중반부에서 엄청나게 치밀하고 복잡하다고 설명되었던 SIS 감시 시스템이 제섭의 도주로 별볼일 없이 무너져버리는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이미 제섭이 총을 손에 넣었다는걸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무려 4명이나 제섭에게 살해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SIS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해리 보슈의 등장이라던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름 흥미로운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결말에서 제섭이 도주해서 사건을 키우지 않았다면, 배심원 중 한 명이 반대해서 - 심지어 미키 할러의 의도로 재판 초기에 바뀐 배심원 - 무죄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나름의 반전도 괜찮았고요. 그러나 단점이 훨씬 더 많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이 시리즈도 이제 더 읽을 일은 없을 듯 합니다.

2022/08/07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 김선형 : 별점 2.5점

가재가 노래하는 곳 - 6점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살림

아래 리뷰에는 트릭과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슾지대에서 태어난 카야는 엄마와 언니, 오빠들, 마지막으로 아빠마저 집을 떠나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졌다. 하지만 카야는 어린 나이와 마을에서는 '마시 걸'이라고 불리우며 차별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다. 놀라운 생존 본능과 흑인 점핑, 그리고 첫 사랑 테이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심지어는 글을 깨우친 뒤 독학으로 슾지에 대한 여러가지 연구를 진행하며 책까지 출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테이트와의 이별, 첫 남자 체이스에게 배신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몇 년이 지나 돌아온 체이스는 그녀를 강간하려 시도했고, 카야는 겨우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뒤, 체이스는 망루에서 떨어진 시체로 발견되었고, 카야는 유력한 용의자로 법정에 서게 되는데...

일전에 소개해드렸던 랭킹에서 해외 미스터리 걸작 베스트 10에 당당히 선정되어 있기에 궁금한 마음에 읽어보게 된 작품입니다. 

'버려진 아이'인 카야가 테이트와 점핑의 도움만으로 훌륭한 늪지대 전문가로 성장한다는 낭만적인 성장기와 체이스 살인 사건이 병행해서 전개됩니다. 초반부 어린 카야 시점에서의 여러가지 묘사들과 성장기스러운 분위기, 남부 노스캐롤라이나에 대한 엄청난 디테일 - 제목부터가 엄청난 오지인 노스캐롤라이나 늪지대를 의미합니다 - ,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재판이 있던 1970년까지 난무했던 인종 차별, 여성 차별, 편견이 난무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대한 묘사와 이야기의 절정 부분이 법정 장면이며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함께 펼쳐진다는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앵무새 죽이기"를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많습니다. 성장기 측면에서는 이 작품 쪽이 더 볼만한 부분이 많아요. 개인적으로는 여러가지 남부 요리들에 대한 묘사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그리츠'가 기억에 남습니다. 옥수수 가루로 만든 죽인데, 처음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먹는 형편없이 빈약한 일상식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거의 40여년이 흐른 뒤에는 관광지의 별미처럼 격상하는게 재미있었어요. 우리나라로 따지면, 보릿고개 때 소나무 껍질로 만들어 먹다가 지금은 지역 명물 별미가 된 송기떡 같은 경우겠지요? 그 외의 음식들 묘사도 그럴듯했습니다. 카야를 도와준 몇 안돼는 지인인 흑인 점핑과 메이블 가족과의 에피소드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카야의 첫 책이 출간되었을 때, 당시 시대 분위기 때문에 서로 포옹하지는 못했지만 두 손을 꼭 감싸쥐었다가 돌아서서 떠나는 장면은 많은걸 생각하게 해 주었어요.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애매합니다. 디테일의 끝판왕이기는 한데, 한 끝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인간 관계부터 그러하지요. 어린 카야만 남겨두고 엄마부터 시작해서 언니, 오빠들이 집을 떠난 뒤 아예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건 쉬이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카야의 아빠를 비롯, 조디 오빠, 테이트, 체이스 등 카야 주변의 모든 백인 남자는 모두 한 번씩 카야를 버렸다는 일관된 설정도 영 별로였습니다. 카야가 체이스같은 인간 쓰레기에게 손쉽게 농락당하는게 특히나요. 전혀 카야스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야는 늪지 생태계에 대한 상세한 관찰을 통해, 암컷이 수컷을 짝짓기와 먹이로 이용하는 방법을 이미 통달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수컷은 무가치하며, 암컷들을 전전하며 거짓으로 암컷을 유혹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요. 그렇다면 본능적인 팜므 파탈로, 체이스의 등골까지 뽑아먹는 악녀로 묘사되는게 더 설득력이 높지 않았을까요? 단지 암컷으로서의 본능 때문에 체이스의 유혹에 넘어간다는건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추리물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알리바이 트릭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카야가 빠듯한 시간 안에 망루에 도착해서 체이스를 살해할 수 있었던 건, 그 지역의 '이안류'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는건데, 전문적이면서도 설득력도 높았으니까요. 그 지역에서 보트만 십 년 넘게 타 왔던 카야라면 쉬웠다고 생각될만큼 카야에 대한 배경 설정도 완벽하고요. 마침 사건 당일 출판사로 출장을 떠났던 카야가 도심이 아니라 버스 정류장 근처 호텔에 숙박했었던 등의 요소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검사측 주장대로 걸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자연에서 지내다보니 도심 속 호텔을 싫어했으리라는 것도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버스에는 카야와 체형이 흡사한 승객이 탑승했었다는 일종의 변장 트릭도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과연 카야가 법정에 피고로 서서 유죄 판결을 받을만 했나? 라면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은 법정 추리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녀가 체이스를 살해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단 하나도 없는 탓입니다. 체이스 옷에 그녀의 모자 섬유가 묻어 있었던건 사건 당일 묻었다고 볼 근거가 없고, 체이스 살해 현장으로 그녀가 이동했다고 확신하는 증인도 없습니다. 아니, 그녀가 체이스 살해 현장으로 시간 맞춰서 이동이 가능했는지조차 검사는 증명할 수 없었지요. 게다가 이 모든게 사실이라서 그녀가 망루에서 체이스를 만났다 한 들, 그녀가 체이스를 밀쳐 떨어트려 살해했다는 증거 역시 없습니다. 즉, 제대로 정신이 박힌 배심원이라면 그녀가 유죄라고 판단할리 없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배심원들의 편견인데, 마침 배심원 중에는 그녀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는 설정이니 그녀가 무죄로 풀려나는건 당연합니다. 카야가 흑인은 아니지만, 비슷한 편견 때문에 유죄를 받는 식으로 흘러갔다면, 그건 그야말로 "앵무새 죽이기"의 복제에 불과했을테고요.

카야가 체이스의 목걸이를 풀어 가져간 이유를 제대로 설명 못하는 약점도 거슬렸습니다. 목걸이가 남아있었더라면 그냥 사고사로 처리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그 목걸이를 아무리 잘 숨겨 놓았다 하더라도 집 안에 숨겼다? 완전 범죄물로 보기 힘들 정도의 큰 결격 사유에요. 완전 범죄를 계획했던 범인이 자기 집에 결정적인 증거를 가져다 놓는건 아무리 봐도 말이 안되니까요. 이는 진상을 어떻게든 드러내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했습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카야가 죽은 뒤, 그녀와 결혼한 테이트가 집 안 비밀 장소에서 목걸이와 카야가 쓴 글을 찾아내어 진상이 드러난다는 결말도 식상했고요.

즉, 법정 미스터리나 완전 범죄 추리물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기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낭만적인 성장기로는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다소 진부했고, 추리물로서도 미흡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역대 서양 미스터리 베스트 10 중 한 작품으로 꼽힐 작품은 아니에요. 그래도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인건 맞습니다. 이런 류의 랭킹은 불신이 더 컸었는데, 가끔은 참고할만 하네요.

2021/06/11

범죄 캘린더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5점

범죄 캘린더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엘러리 퀸 단편집으로 비교적 후기작입니다. 엘러리 퀸이 주인공인 라디오 드라마를 책으로 엮은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읽다보니 확실히 라디오 드라마구나 싶었습니다. 설득력있는 동기, 복선으로 뒷받침되는 탄탄한 이야기 구조보다는 극적인 상황을 쉽게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릭도 정교하기 보다는 말로 전달하기 쉬운 트릭들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책으로 읽을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겁니다. 트릭들은 추리 퀴즈 수준이고, 이야기 구조가 단순한 탓에 동기와 사건이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득력도 낮은 탓입니다. "~ 모험" 이라는 제목 때문에 걸작 단편집이었던 "엘러리 퀸의 모험" 수록작 수준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또 '캘린더'라는 제목답게 1월부터 12월까지 매월 한 편씩의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는데, 해당 월에 이야기가 진행될 필요가 있었던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3월의 소득세 신고, 5월의 전몰 장병 기념일 정도만 특정 날짜와 사건이 연결되어 있을 뿐이에요. 10월의 할로윈과 12월 크리스마스에 사건이 벌어지는 두 작품은, 날짜를 사건과 무리하게 연결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드는 망작이었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라디오라면 모를까 책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믾지 않고, 권해드리기도 어렵습니다. 엘러리 퀸의 이름만 믿고 읽으시면 실망하실 거에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부자 모임의 모험" 

이스턴 대학교의 유서깊은 야누스 클럽의 멤버 빌 업다이크가 엘러리 퀸을 찾아왔다. 야누스 클럽은 13학번들로 이루어진 모임으로, 현재 생존자는 7명 뿐이었는데 그 중 3명이 최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업다이크는 야누스 클럽 안에 5명으로 이루어진 내부자 모임이 20만달러라는 돈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자신과 또 다른 멤버 중 생존자가 모든 걸 갖게 될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48시간 뒤, 빌 업다이크는 살해되고 말았다.

1월의 야누스 클럽 정기 모임 날짜에 맞춰 벌어지는 이야기로 야누스 클럽이니, 내부자 모임이니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을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핵심은 암호 트릭입니다. 피해자 업다이크가 내부자 모임 멤버들 이름에 공통점이 있다는 말을 남겼었고, 그 말이 유일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지요. 

이 트릭은 미국인이 아니면 풀 수 없는, 하지만 미국인이라면 쉽게 풀었음직한 트릭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멤버들 이름을 변주하자면, 황연세, 한국민, 양홍익, 김아주, 서인하인 식이지요. 업다이크의 경우는 부부의 이름을 합쳐 윌러임 앤 메리 칼리지라는 약간의 변주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이 역시 우리나라식으로 박성균, 최관이라는 식이니 딱히 정교한 장치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라디오에 적합한, 추리 퀴즈에 가까운 아이디어였습니다. 전개도 정교하지 못하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3명의 회원이 우연찮게 자연사한 뒤, 살의를 품었다는 동기를 잘 풀어내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대통령의 5센트 은화 모험" 

미모의 아가씨 마사 클라크는 전보로 엘러리 퀸과 죠지 워싱턴 관련 골동품 수집가 패치, 희귀 주화 수집가 체크 남작부인, 희귀 서적 수집가 쇼 교수를 불러모았다. 죠지 워싱턴이 남긴 칼과 은화를 찾기 위함이었다. 이는 오래 전 죠지 워싱턴이 마사의 조상 시미언 클라크를 만났을 때 농장에 묻었던 물건들이었다.

2월 죠지 워싱턴 생일에 맞춰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추리적으로는 눈여겨 볼 부분이 전무합니다. 시미언 클라크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워싱턴이 당시 심었던 나무 중 하나 아래에 칼과 은화를 묻었다고 쓰여 있거든요. 이건 암호도 아닙니다. 당연히 별다른 트릭도 없어서 추리의 여지도 없고요.

이 말에 따라 마사 클라크 가족이 워싱턴이 심었다는 나무 12그루 밑을 모두 파 보았지만, 칼과 은화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는 더 황당합니다. 원래 13그루를 심었는데, 한 그루가 죽어 버린 탓이라는데 정삼각형 모양으로 간격까지 정확하게 심은 12그루의 나무는 멀쩡하고, 삼각형 한 가운데 심은 나무만 죽었다는건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게다가 13그루 나무를 심었다는 엘러리 퀸의 주장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미국 건국은 13개 주였기에 나무는 13그루를 심었어야 한다!"라는게 근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아무 것도 없어요. 또 애초에 농장을 잃을 위기였다면, 나무 밑이 아니라 나무 근처 땅을 모두 파 보는게 정상 아니었을까요? 전개도 이상합니다. 이야기 처음에 패치 등 관계자들을 불러 모을 필요는 없었어요.

이런 문제 투성이의 본편 이야기보다는, 엘러리가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게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도입부가 추리적으로 더 볼만했습니다. 돈이 많지만 자동차를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인데, 꽤 그럴듯했거든요. 엘러리의 비서 니키가 미인인 마사 클라크를 질투하는 묘사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거의 없네요. 추리물이라고 할 수도 없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이클 마군의 3월 15일 모험" 

퀸 경감의 옛 동료였던 사립탐정 마이클 마군이 엘러리를 찾아왔다. 3월 15일 소득세 신고를 앞두고 관련 서류를 도난당했기 때문이었다. 서류 도난 당시, 사무실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한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엘러리 일행은 다시 사무실에 방문하지만 그곳에서 사무실을 관리하는 카슨 부인이 참혹하게 살해된걸 발견하는데...

이야기 초, 중반부까지는 "왜 도둑은 소득세 신고와 관련된 서류를 훔쳐갔을까?"가 핵심입니다. 이는 마군의 서류 중에 사교계 지배자 벤돔 부인의 딸이 도벽이 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으로 밝혀지고요. 이렇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기묘한 사건이 특별한 강력 범죄와 연결되는 전개는 재미있었습니다. 소득세 신고일이 3월 15일이고, 소득세 신고용 자료가 협박의 근거가 된다는 식으로 3월이라는 날짜와 이야기를 엮은 방식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마군이 화재 소동을 일으킨 뒤 서류가 도난당한걸로 위장했고, 이를 카슨 부인이 눈치채 죽였다는 진상은 여러모로 불합리합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엘러리를 찾아와 서류가 도난당했다고 하소연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앨러리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냥 강도가 살해한걸로 무마할 수도 있었을테니까요. 엘러리 말대로 벤돔 부인을 협박할 생각을 버리고 카슨 부인을 죽인거라면, 더더욱 서류가 도난당했다는걸 드러낼 필요는 없었어요. 협박할 생각을 버렸다면, 카슨 부인에게 불을 지른 이유를 둘러대는게 살인보다는 훨씬 나은 해결책이었을겁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고 했던게 오피스를 쉐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안일한 발상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했다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마군이 서류가 도난당했다고 주장한 시점보다 나중인 신문지가 들어있었던 증거는 명확했지만, 이러한 이유들로 아주 잘 만든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황제의 주사위 모험" 

퀸 경감은 엘러리, 니크와 함께 오랜 친구 짐 해거드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역으로 마중나온 짐의 아들 마크 해거드는 아버지 짐이 살해당했다며 10년 전 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해거드 가족은 아버지를 쏜 건 가족 중 한 명이라며 지난 10년간 지옥처럼 살아왔다고 말했다. 엘러리는 짐이 죽었을 때 손에 쥐고 있던 '황제의 주사위'에 주목해서 범인을 알아내는데...

짐이 쥐고 있던 주사위는 일종의 다이잉 메시지였습니다. 두 개 중 한개가 항상 6만 표시한다는 의미로, 6번 피스톨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의미했던 거지요. 그런데 이 뒤는 가관이에요. 6번 피스톨은 왼손잡이가 잡기에 용이해서, 가족 중 유일한 왼손잡이인 딸이 범인이라는 추리가 펼쳐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총을 쏘는 것도 아니고, 꺼내는데 왼손잡이냐 아니냐가 뭐가 중요할까요? 중요했다 한 들 이 정도로 딸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그 총은 '왼손잡이만 잡을 수 있었다'는걸 명확하게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그런 설명은 전혀 등장하지 않거든요. 칼리굴라와 주사위 속임수에 대해 이런저런 소개도 이야기에는 하등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잡지식에 불과했고요.

무엇보다도, 3월 마지막 날에 수수께끼를 풀어내며 이 모든게 퀸 경감과 니키, 해거드 가족이 함께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을 속이기 위함이었다는 반전은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40년 전 결혼식과 10년 전 40번째 결혼 기념일에 선물을 드렸다는 모순은 말장난이면서도, 너무 명확하게 드러나서 속임수같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점수를 주기 어려운 망작입니다.

"게티즈버그 나팔의 모험" 

엘러리가 니키와 함께 한 충동적인 게티즈버그 여행 중에 자동차가 고장나버렸다. 그 때 잭스버그 군수 스트롱이 그들을 도와준 뒤, 마을에서 진행하는 남북전쟁 전몰장병 추모일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날 남북전쟁 생존자가 게티즈버그 나팔을 부는게 전통이었는데, 작년에 생존자 중 가장 고령이었던 케일럽이 나팔을 불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고령이었지만 건강했고, 다른 생존자 2명과 남북 전쟁 중 찾았던 보물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군수는 수상쩍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전몰장병 기념일 아침에 또 다른 생존자 애브너 체이스가 뇌졸증으로 사망하고, 기념일에서는 나팔을 불던 마지막 생존자 잭 비글로마저 나팔에 묻힌 독으로 죽고 마는데...

어디선가 읽었던 작품. 4월 전몰장병 기념일에 맞춘 이야기는 깔끔합니다. 노인들이 이야기하던 거액의 보물은 휴지조각과 같은 남부 정부가 발행했던 지폐라는 설정도 좋았고, 애브너 체이스의 손녀 시시가 진범이라는 반전도 그럴듯했거든요. 이를 드러내기 위한 엘러리의 추리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잭 비글로가 마지막 생존자로 남게된건 애브너 체이스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우연 덕분이었다는게 핵심이지요.

하지만 이 추리로는 시시가 진범인지, 잭 비글로의 손자 앤디가 진범인지는 드러낼 수 없습니다. 앤디가 할아버지가 남긴 돈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기에, 그 돈을 보다 빨리 갖고 싶어서 할아버지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즉, 엘러리는 그냥 용의자를 한 명 추가한거에 불과합니다. 이래서야 법정에서도 유죄 판결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거에요.

그래도 본격 추리물로는 완벽한 얼개를 갖추고 있고, 이야기도 재미있게 전개되는 수작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약 손가락의 모험" 

트로이는 딸 헬렌 결혼식에 엘러리를 초대했다. 헬렌을 흠모했던 루즈 때문이었다. 그는 헬렌이 헨리 예이츠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의를 드러내다가, 이후 갑자기 변심해서 사죄하고 신랑 들러리로 결혼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심한 불안감을 느낀 트로이의 부탁으로 엘러리는 벨리 경사와 결혼식에 참석해서 루즈를 철저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식 직후 헬렌은 결혼 반지 속 독침에 의해 살해되고 마는데...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엘러리가 범행을 막지도 못했고, 경찰보다 범인을 찾아내는데 늦어버린 완벽한 실패담이라는겁니다. 엘러리는 루즈가 아닌 신랑 헨리 예이츠를 범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거는 결혼만 하면 헬렌의 유산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고요. 하지만 결혼 반지는 왼손에 끼고, 압력을 가해 독침이 튀어나오게 하려면 왼손으로 악수를 해야 했기 때문에 왼손잡이가 범인이다! 라는 논리로 루즈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이 사실은 흉기인 반지 조사로 경찰이 밝혀내고요. 이렇게 엘러리는 체면만 구긴 셈이며, 사건은 경찰 수사를 통해 종료되기 때문에 추리물로는 볼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추리적으로 별볼일 없고, 이렇게 길게 풀어낼 필요도 없는 졸작입니다.

"추락한 천사의 모험" 

센터 저택에는 기괴한 키마이라 조각이 튀어나와 있었다. 현재 센터 제약 사장인 마일스의 아내 도로시는 니키의 친구로, 그녀가 니키에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걸 고백한 뒤 마일스가 저택 지붕에서 떨어진 키마이라 조각상에 깔려 죽을뻔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조각상은 마일스의 동생 데이비드의 아틀리에 지붕 쪽에 위치했었다. 데이비드를 의심한 마일스는 엘러리 퀸에게 관련된 조사를 의뢰했고, 데이비드 아틀리에를 조사하기 위해 엘러리가 방문한 날 마일스는 총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데이비드는 실종되었고, 도로시가 범행을 자백하는데...

도로시의 불륜 상대가 밝혀지기 전 까지, 범인은 데이비드 아니면 마일스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마일스만 없으면 센터 제약과 그 아내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마일스는 아내의 불륜에 대한 복수심으로 데이비드를 실종으로 위장해서 죽이고, 다친걸로 위장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진상은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비서 하트가 폭죽으로 알리바이를 만든 뒤 살해했다는 겁니다. 즉, 도로시가 사랑에 빠진게 마일스의 동생 데이비드가 아니라 비서 하트였다는 반전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상식을 깨는 맛은 괜찮았습니다. 7월 4일 독립 기념일과 '폭죽'을 연결한 아이디어도 좋았고요. 캘린더라는 주제에도 잘 맞을 뿐더러, 간단한 트릭이지만 효과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상을 드러내는 핵심 증거 중 하나가 '떨어진 키마이라 조각상'이라는 전개도 마음에 들고요.

물론 편의적인 전개를 위해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마일스가 총에 맞았을 때, 누가 쐈는지 보지 못했다는게 대표적이지요. 여기서 그가 죽지 않은 것도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작위적이고요. 차라리 죽는게 전개면에서는 더 깔끔했을거에요. 또 45Kg이나 되는 조각상에 데이비드를 죽인 뒤 매달아 물에 빠트리는게 혼자서 어떻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가능했을 일인지도 잘 모르겠네요. 도로시가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이유가, 하트가 총을 쏘는걸 목격했기 때문이었다는 설명도 잘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정통 본격 추리 단편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평작은 충분히 되는, 군더더기가 별로 없는 잘 짜여진 단편이었으니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늘 귀의 모험" 

유명 탐험가 에릭슨은 결혼한 조카딸 잉가의 남편과 그 아버지에 대한 조사를 엘러리 퀸에게 의뢰했다. 잉가의 남편 홉스-왓킨스 부자가 에릭슨이 거주하는 섬에서 잉가와 자기를 살해하지 않을까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 섬에는 캡틴 키드가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고, 엘러리는 보물 찾기 핑계를 대고 섬으로 향하는데..

엘러리는 키드가 남겼다는 일종의 암호를 간단히 풀어내고 보물을 찾아내지만 그 보물은 키드가 묻은게 아니었다는 반전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그 증거가 보물 상자 속 '백금' 이라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백금은 1900년대 이후 보석 셋팅에 이용되었기 때문으로, 박학다식한 엘러리에게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습니다. 보물은 홉스-왓킨스 부자가 훔친 장물로, 장물을 공식적으로 유통하기 위해 키드 전설을 이용했다는 앨러리의 추리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에릭슨이 죽기 전 쏜 총알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롱 존의 의족에 박혔기 때문이라는건 많이 뻔했습니다. 그리고 롱 존이 홉스-왓킨스 부자와 공모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가 에릭슨을 단순한 탐욕으로 죽였다고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어요. 보물을 묻은게 부자라는게 증명될 수는 있어도, 그들이 에릭슨을 살해할 의도가 있었다는건 증명이 불가능했습니다. 롱 존이 자백한다 한들, 증거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롱 존을 이용해서 에릭슨을 죽이는 전개만 빠졌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좀 아쉽네요.

"세 개의 R의 모험" 발로 대학 학장 발로 박사는 엘러리 퀸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 문학을 가르치는 칩 교수의 실종 때문이었다. 니키와 함께 미주리 주에 있는 발로 대학을 찾은 엘러리는 칩 교수 방의 핏자국, 그리고 도서관에서 대출 된 책을 통해 교수가 6월 30일 밤에 살해당했다고 추리했다. 그리고 칩 교수가 여름을 보낸다고 알려진 아칸소 주 통나무집에서 칩 교수의 백골화된 사체와 그가 쓰던 추리 소설인 "세 개의 R의 모험" 원고를 발견하는데...

칩 교수가 쓴 추리 소설대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게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건 연극이어고, 엘러리 퀸은 발견된 시체가 백골이었다는걸 토대로 진상을 추리해냅니다. 고작 10여주 동안 사체가 백골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동기는 칩 교수가 쓴 추리 소설 홍보를 위해서였지요. 유명 탐정이 헛다리를 짚은 이야기를 기사화할 생각이었다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추리적으로 깔끔하고, 주어진 단서도 공정한 괜찮은 본격물이에요.

하지만 교수들이 꾸민 계획은 여러모로 부실했어요. 핏자국을 발견한 시점에 경찰을 부르지 않은 이유부터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제가 탐정이라면 먼저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했을 겁니다. 또 백골 사체가 이상하다는 근거도 빈약합니다. 사체를 백골로 만드는 무슨 방법을 썼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했기에 감점합니다.

"죽은 고양이의 모험" 

니키 포터 양은 저주받은 검정 고양이 모임 회합에 엘러리 퀸과 함께 참석했다. 10월 31일의 챈슬러 호텔에서의 비밀 회합은 니키의 친구가 개최한 할로윈 파티였었다. 파티 중 추리 게임을 하다가 참석자 중 한 명인 크롬비가 살해당했고, 동기는 그의 무분별한 여자 관계 때문으로 드러나는데...

핼로윈 파티에 대한 장황한 묘사를 빼면, 핵심은 한 가지입니다. 파티를 위해 복잡하게 꾸며놓은 호텔 방을, 불이 꺼져 있었던 추리 게임 당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구냐는 것이지요. 엘러리 퀸의 추리는 이 방을 꾸민 루시 트렌트가 범인이라는 것이었고요. 

하지만 방을 꾸몄다고해도 과연 어두운 상황에서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었을까요? 또 파티가 시작하고 한참 뒤에 추리 게임이 시작되었다면, 다른 사람들도 외울 수 있지 않았을까요? 루시 트렌트 범인설은 이렇게 설득력이 약합니다. 복잡한 여자 관계가 동기인데, 정작 당사자가 아니라 그 동생이 복수했다는 설정도 영 와 닿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이런 범행을, 세계 최고의 명탐정을 초대해서 추리 게임을 하는 동안 저지를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용의자가 될 만한 사람도 몇 명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추리 게임이라는 작 중 소재처럼, 추리 퀴즈 수준의 졸작으로 점수를 줄 여지는 전무합니다.

"비밀을 폭로하는 병의 모험" 

추수감사절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배달하던 엘러리 퀸과 니키는 우연히 방문한 프랑스 레스토랑이 마약을 밀매하고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캐리가 마약 밀매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가 누명을 썼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체포하기 전에 마약을 건넨 웨이터가 살해되는데...

우연히 방문한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샤토 디켐"을 주문하니 마약이 나오고, 우연히 탄 택시에서 그 이야기를 했는데 택시 운전사가 흑막이라서 그가 레스토랑 웨이터를 살해했다는 내용의 작품. 우연으로 점철된 전개로 실소를 자아내는 졸작입니다. 작품이 아니라 입문자용 추리 퀴즈라고 하는게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별점은 1점입니다.

"황태자 인형의 모험" 

입슨 양이 30년을 쏟아 부어 만든 인형 컬렉션인 '돌렉션'문제로 변호사 본들링이 퀸 부자를 방문했다. 컬렉션 중 가장 가치가 큰, 49캐럿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황태자 인형을 유명한 예술품 도둑 코머스가 훔치겠다고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입슨 양 유언으로 돌렉션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백화점 전시가 예정되어 있었고, 퀸 부자는 직접 경찰과 함께 철통같은 방어망을 구축했지만, 인형은 결국 가짜로 바꿔치기 당하는데...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예고장을 보내는 전설적인 괴도가 등장한다는 만화같은 설정의 작품입니다. 

진상은 간단합니다. 변호사 본들링이 도둑 코머스였던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인형을 직접 바꿔치기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본들링이 예고장을 보내면서까지 사건을 키울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 꾸준히 예고장을 보내왔다면 모를까, 예고장을 보낸건 이번이 처음이라고도 하니 더더욱 불필요한 행동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을 변장시켜 경찰의 시선을 끈 행동 역시, 대역들이 체포되면 금방 드러날 유치한 작전이었고요. 그냥 다이아몬드가 사라진다면 본들링이 무조건 혐의를 받을 테니 그 혐의를 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본들링이 범인이라는 엘러리의 추리는 너무 당연해서, 그의 정체는 어쨌건 드러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이런 위험을 짊어질 이유가 있었을까요?

산타클로스로 변장해서 인형을 지켰던 벨리 경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크리스마스를 무대로 한 작품다운 왠지모를 유쾌함과 활기는 좋았지만, 추리 퀴즈 수준밖에 안 되는 작품이에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중반에 잠깐 라디오 극본을 그대로 옮긴 듯한 부분이 있는데, 의도인지 잘 모르겠지만 작품과 잘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라디오 극본이라는걸 알려주기 위한 의도였다면, 극본 전체를 부록처럼 수록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2020/11/1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 모래시계 외 - 로버트 바 외 / 이정아 : 별점 2.5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2 : 모래시계 외 - 6점
로버트 바 외 지음, 이정아 옮김, 박광규/코너스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두 번째 권입니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 문학의 초기인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발표되었던 단편들이 수록된 앤솔러지입니다.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과 마찬가지로 정가 할인되었기에 구입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셜록 홈즈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탐정들 등장이 많은게 이채롭습니다. 유명한 외젠 발몽, 마틴 휴잇을 비롯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당대 탐정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산사나이, 자연인 명탐정 노벰버 조와 초창기 퇴마 탐정 플랙스먼 로우는 독특해서 인상적이더군요. 플랙스먼 로우는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지만 수록작들 수준이 모두 높지는 않습니다. 셜록 홈즈의 영향을 짙게 받은, 모방작이 많은 탓입니다. 시대와 유행에 충실했지만, 뛰어넘지는 못한 셈이지요. "두 개의 양념병"이라는 걸작이 수록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수준 이하 작품도 많습니다. 하지만 정가 인하된 가격이 워낙 저렴하기에 만족스러운 독서였습니다.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거브 탐정, 일생 일대의 사건"

파일로 거브는 마대 자루에 꿰메어진 채 익사한 헨리 스미츠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나섰다. 그의 활약을 모든 리버뱅크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브 탐정은 피해자가 끊어진 전구를 쥐고 있었던 사실에 주목하는데...

도배 및 인테리어 사업을 하면서, 통신 교육으로 탐정이 된 파일로 거브가 활약(이라고 쓰고 좌충우돌이라고 읽는)하는 시리즈 단편입니다.

통신 교육을 받은 탐정은 "탐정 피트 모란"이 유명합니다. 그런데 피트 모란은 겉에 드러난 것들만 1차원적으로 해석하는 단순한 인물이었습니다. 고민따위는 하지도 않지요. 당연히 추리보다는 코미디가 핵심인 이야기 들이었고요. 이 작품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탐정에 대한 희화화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요. 마을 주민 모두가 변장이라는 걸 알아채는 변장을 한 뒤 탐문 수사에 나선다던가, 파일로 거브가 펼치는 수사를 마을 주민 모두가 지켜본다는 등의 묘사 등이 그러합니다.

그래도 "피트 모란" 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웃음거리를 제외하면, 나름대로는 추리물이기 때문입니다. 작 중 기묘하게 죽었던 헨리 스미츠 사건의 결정적 단서는 피해자가 쥐고 있던 전구였으며, 거브 탐정은 피해자가 "어디서 전구를 갈았는지?"를 파악한 뒤 피해자의 작업실로 올라가 전구를 가는 동작을 따라하다가 진상을 알게 되거든요.
피해자는 자신이 만든 '양고기 자동화 포장 기계'로 넘어져 마대 자루로 포장된 뒤 강물로 던져졌던 겁니다. 단서를 찾고, 추리한 뒤 추리를 검증한다는 순서만큼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 셈이에요. 추리라기 보다는 겉에 드러난 단서를 '추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넓은 범주의 추리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대단한 추리는 아니며, 흡사 "월레스 앤 그로밋"을 연상케 하는 황당무계한, 일종의 다고베르트 머신같은 기계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도 언급되긴 했는데, 단지 '역사적 중요성'에 대해서만 점수를 받았을 뿐입니다. 당연합니다.

"두 개의 양념병" 

로드 던세이니가 1934년에 발표했던 작품으로 장르 문학을 사랑하시는 모든 애호가 분들이라면 누구나 아실 고전 걸작 단편입니다. 마지막의 의외성이 돋보이는, 이른바 '기묘한 맛' 장르의 대표작이지요.

이전에 다른 앤솔러지에서 읽었었는데, 정통 추리물 성격이 강할 뿐더러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량이 충실해서 놀랐습니다. 이는 마지막 반전을 훨씬 돋보이게 만들기도 합니다. 상세한 묘사를 통해 반전을 탐정역인 린리 씨가 룸 메이트인 스메더스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은근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스메더스는 살인 용의자 스티거가 구입했다는 양념 '넘누모'를 파는 행상인이라서 린리씨는 샐러드에 뿌려먹게 넘누모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스메더스는 거절합니다. "고기와 짭짤한 음식에만 뿌려 먹는 겁니다"며, 잘 모르고 채소에 뿌려 먹더라도 "두 번은 안 하죠"라고요. 이 말로 진상이 드러납니다!

2주일 동안 고기를 어떻게 보존했을지, 뼈와 정말 먹을 수 없는 내장 같은 부산물은 어떻게 처리했을지 등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는 합니다. 그래도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준 고전 걸작임에는 분명해요.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린리 씨와 스메더스가 등장하는 시리즈를 더 많이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백작의 사라진 재산" 

외젠 발몽 시리즈 단편으로 "위풍당당 명탐정 외젠 발몽"에도 수록되었던 작품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트릭이 황당해서, 이전만큼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작품인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주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모래시계" 

버트럼 이스트퍼드는 골동품상에서 오래된 모래 시계를 구입했다. 시계는 30분 정도 지나면 시간이 멈추는 문제가 있었다. 그날 밤, 모래 시계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던 (?) 버트럼 앞에 옛날 군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그 모래 시계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190여년 전 자신이 참전했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시계에 얽힌 이야기를 해 주는데...

표제작으로 저자는 '외젠 발몽' 시리즈 작가인 로버트 바인데, 작품은 외젠 발몽 시리즈와는 관계없는 역사 판타지입니다.

일단, 모래 시계 소유권을 주장하던 캐스퍼 센토어 중위가 해 준 전쟁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중위는 장군으로부터 기습 공격 작전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래 시계가 멈춘걸 몰라서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작전 실패 후 체포되었습니다. 장군은 '모래 시계 모래가 다 떨어지면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리를 떠나고요. 그러나 모래 시계가 멈춘 탓에 총살을 집행할 수 없었고, 장군도 그 사실을 확인한 뒤 총살 지시를 철회한다는 내용입니다. 긴박하면서도 왠지 모를 유머, 여유가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그러나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았어요. 캐스퍼 센토어 중위가 어떻게 버트럼 앞에 나타났는지부터 이유 불명이니까요. 왜 모래 시계가 파괴되고 중위는 사라졌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래서야 버트럼 이스트퍼드가 꾼 꿈이라고 해도 될 정도에요. 그래서 점수는 2.5점입니다. 여러모로 마무리가 아깝습니다.

"일곱 명의 벌목꾼" 

노벰버 조를 벌목꾼 막사 책임자 클로즈 씨가 찾았다. 작년에 나타났던, 벌목꾼을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이는 검은 가면이 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클로즈 씨로부터 범인 체포를 부탁받은 조는 파트너 쿼리치와 함께 막사로 향했다. 다음날, 강도를 막기 위해 여섯 명이 뭉쳐 떠났던 인부들이 강도를 당했다며 돌아 오는데...

탐정 노벰버 조 시리즈 단편입니다. 노벰버 조는 깊은 산 속에서 일하는 벌목꾼이라는 특이한 직업의 소유자이지요.

전개 방식은 셜록 홈즈와 동일합니다. 주어진 단서를 통해 귀납적 추리를 펼쳐 범인을 잡아내니까요. 여섯 명 벌목꾼이 차를 마셨던 주전자를 깨끗이 씻은 행동 등 보통 사람은 생각하기 힘든 사소한 일이 단서가 된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마신 차에는 수면제가 들어있었고, 그걸 숨기기 위해 주전자를 씻었던 겁니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단서가 범인을 드러내는건 아닙니다. 범인을 드러내는건 돈을 숨겨 놓았을 막사를 해체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덕분이거든요. 이에 놀란 범인을 현장에서 잡는게 전부입니다. 차에 수면제가 들어있던건 분명해서, 그걸 씻으나 안 씻으나 별 차이가 없었고, 범인이 특정 시간에 개울가에서 무슨 짓을 했건 별로 중요한 단서가 아니에요.

결론적으로 완성도는 그닥이었습니다. 셜록 홈즈 흉내를 내고는 있지만, 그 수준은 한참 미치지 못해요. 벌목꾼이라는 직업이 유용하게 사용돼지도 못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부여한 가치도 역사적 중요성과 초판본 희귀성 뿐입니다. 엘러리 퀸도 '오지 탐정' 이라는 개념 도입만 높이 평가한 셈입니다.

"유령 저택의 비밀" 

잘 생각해보게. 톡톡 두드리는 소리, 흐물흐물한 물체 그리고 밴 뉘센 씨가 트리니다드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말이지. 또한 거기에 덧붙여 이 단 하나의 발자국까지 잘 생각해보게 뭔가 번쩍하고 해답 같은 게 떠오르지 않나?" 

심령학에 정통한 '퇴마 탐정' 플랙스먼 로우가 등장하는 단편. 심령 현상도 과학과 추리로 풀어낸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톡톡 두드리는 소리, 흐물흐물한 물체 그리고 밴 뉘센 씨가 트리니다드섬에 살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나병에 걸렸다는걸 추리해 내는 과정도 합리적이었고요.

그러나 진짜 유령이 나온거라는 결말 만큼은 영 별로네요. 이 정도까지 추리로 풀어내었다면, 사람이 꾸민거라는 진상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이디어는 좋고, 추리도 볼만하지만 앞서 설명드렸듯 진상, 결말 때문에 감점합니다.

"레이커 실종 사건"

은행에서 수금을 담당하던 사원 레이커가 실종되었다. 그는 1만 5천 파운드를 지닌 채였다. 경찰은 그가 돈을 가지고 도주한걸로 판단했지만, 마틴 휴잇은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다.

사립탐정 마틴 휴잇 (휴이트) 시리즈 단편입니다. 마틴 휴잇은 셜록 홈즈 시리즈가 연재된 스트랜드 매거진 출신 탐정으로 셜록 홈즈의 라이벌 중 한 명이지요. 그래서인지, 작품은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입니다. 사건이 벌어지고, 탐정이 사건을 조사하여 추리 한 뒤, 경찰과 다른 결론을 내린다는 내용이니까요.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추리한 결과가 의외라는 전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래도 셜록 홈즈의 라이벌답게 추리적으로는 꽤 괜찮습니다. 수금할 때 레이커를 제대로 바라본 은행 직원은 거의 없었다, 은행 중 한 곳은 입구가 수리 중이었다는 수금 당시 정황, 그리고 레이커가 파리행 표를 살 때 본명을 댔고 독특한 우산만 채링크로스 역에 남겨졌다는 도주 정황을 통해 마틴 휴잇은 수금을 한 레이커는 변장한 가짜라고 추리하는데 이는 합리적입니다. 발표 당시에는 의외성있는 반전이었을 테고요.

하지만 마틴 휴잇이 진범을 알아내는건 작위적입니다. 레이커 이름이 적힌 우산 속 광고지가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요. 광고지만 없었더라도, 이 범행은 완전 범죄가 되었을거에요. 광고 내용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범인들에게 진범이 자기 집으로 오라고 광고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지요. 최소한 암호 정도는 써 줬어야 합니다. 이럴 거라면 마틴 휴잇이 구태여 발품을 팔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신문 광고란 속 수상한 광고만 보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마틴 휴잇 캐릭터도 문제에요. 유명세에 비하면 별다른 매력은 없기 때문이에요. 이름만 바꾸면 셜록 홈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전형적이더라고요. 후대에 그나마 이름을 남긴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은 다들 차별화된 특징들이 있었지요. 도둑인 뤼뺑을 비롯해서 장님인 맥스 캐러도스,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모르는 안락의자 탐정 구석의 노인, 멋드러진 별명만큼은 길이 남은 밴 듀슨 (반 두젠), 법의학 탐정의 시조인 손다이크 박사처럼요. 물론 독특하다고 해서 역사에 길이 남는건 아닙니다. 아마추어 괴도 탐정 래플스처럼 지금은 잊혀진 존재도 허다하지요. 그러나 이는 작품 수준이 기대 이하였던 탓입니다. 마틴 휴잇 시리즈는 추리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던 만큼, 마틴 휴잇만의 개성과 매력을 더하지 못한게 아쉽기만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셜록 홈즈 스타일을 잘 따르고 있는,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이야기지만 단점이 명확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바다 건너온 살인자"

로프터스 디컨 씨가 자택의 하치만 성상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현장은 거의 밀실이었다. 다음날 아침, 고인의 친구이자 변호사인 헨리 콜슨 씨는 명탐정 호러스 도링턴에게 사건을 의뢰했고 둘은 함께 현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헨리 콜슨 씨는 고인이 애지중지했던 '마사무네 검'이 사라졌다는걸 알아챘다. 그 검은 일본인 게이고 가나마로가 되찾기 위해 부탁과 협박을 반복했던 과거가 있었다. 가나마로는 원래 검의 소유주 아들로, 아버지 영전에 검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헨리 콜슨 씨는 게이고 가나마로가 일본으로 돌아갈 표를 예약했다는걸 알아내는데...

아서 모리슨이 쓴 단편인데 의외로 마틴 휴잇 시리즈가 아니네요. 내용은 전형적인 셜록 홈즈 스타일로, 마틴 휴잇이 등장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겁니다. 등장하는 명탐정 호러스 도링턴이 마틴 휴잇, 셜록 홈즈와 구분되는 특별한 매력이나 특기, 특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볼만 했습니다. 추리가 진행되는 과정이 합리적이고, 단서도 공정한 편이거든요. 약간의 범인 심리 분석도 눈길을 끄는 요소였고요. 디컨 씨는 외출했다가 급한 용무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집 안에 있었던 누군가가 범인이었을테고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집 안으로 들어왔을까요? 경찰은 침실 창문을 주목했지만, 도링턴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침실 창문으로 들어왔다면, 디컨 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침실로 향했을테고, 그곳에서 범행이 일어났을텐데 그렇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요. 그리고 도링턴은 하치만 성상이 집에 들어온 날 범행이 일어났고, 성상이 원래 있던 상점에서 물건이 없어지고 부서진 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통해 '하치만 성상 안에 누군가 숨어서 잠입했다'고 추리하지요. 물건 안에 범인이 숨는 이야기는 많을테지만, 이 정도면 꽤 설득력있는 이야기였다 생각되네요. 범인 카스트로를 특정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볼 만 했습니다.

게이고 가나마로를 유력한 용의자로 등장시킨 전개도 좋습니다. 앞서 피해자가 집착했다는 마사무네 검과 보라빛 옻칠 세공품 소개를 통해 가나마로가 한 말 - 큰 돈을 들여서 겨우 검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의미 - 의 뜻이 드러나는 결말도 마음에 들었고요. 그 외에 여러가지 일본 물품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 했습니다.

물론 하치만 성상 무게에 대해 좀 대충 넘어가고 있기는 합니다. 사람 한 명 무게가 추가되었다면 이상함을 느끼는게 당연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리고 범행을 저지른 카스트로가 다시 성상에 숨은 뒤 몰래 빠져나갈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습니다. 한 몫 잡아서 도주 자금을 마련하는게 상식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단점은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빼어난 점이 분명 있고요. 탐정이 조금만 더 매력적이었다면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날 밤의 도둑"

프로비던트 은행 지점장 아일랜드가 텅빈 금고를 보고 혼절했다. 그런데 경비원 제임스 페어베언은 전날 밤, 지점장 아내인 아일랜드 부인이 지점장실을 향해 남편을 부르는걸 목격했었다. 아일랜드 부인은 그 사실을 부정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지점장이 지점장실 문을 통해 금고로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건강을 회복한 뒤, 범행 시간에 있었던 완벽한 알리바이를 입증했다. 그리고 그의 재산 상태는 완벽해서 금고 돈을 훔칠 필요가 없다는게 드러나는데...

'구석의 노인' 단편입니다. 이 시리즈는 좋아해서 여러 편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낯서네요. 이전 다른 단편집 수록작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다른 단편집에서 빠진게 이해가 되더군요. 단순하고 뻔한 탓에 재미없고 지루했습니다. '지점장은 범인이 아니다', '지점장 아내는 거짓말을 해가며 누군가를 감싸주려 한다'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 결론은 쉽게 추리할 수 있어요. 범인은 바로 아일랜드 지점장의 아들이었던 거지요. 아들이 사건 발생 후 은행을 바로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도 이 추리를 뒷받침하고요. 이 정도 사건을 구석의 노인에게 의지하는 버튼 양은 너무 무능력한게 아닌가 싶네요. 경찰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좋아하는 시리즈의 미번역 초역을 읽어보았다는 의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대리 살인" 

작가는 M.M 보드킨입니다. 작가는 영국에서 판사까지 역임했던 법조인이었다네요. 그래서인지, 클라이막스는 법정 공방이더군요. 정식 법정은 아니고, 검시이긴 합니다만 배심원이 배석하고, 변호사가 반대 심문을 하는 등 정식 법정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법정 미스터리라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이야기의 핵심은 밀실에서 구식 전장총이 발사된 장치 트릭입니다. 물병을 돋보기처럼 쓴 게 진상이고요. 엉클 애브너 시리즈인 "둠도프 사건"으로 익숙한 트릭이지요. 엉클 애브너는 1918년 발표되었으니 이 작품이 원조일 수도 있겠습니다. 문제는 작가 보드킨과 탐정 폴 벡이 포스트와 명탐정 엉클 애브너만큼 알려지지 못했다는 겁니다. 원조로서의 영광은 커녕, 잊혀져 버린거지요.

읽어보니 잊혀진 이유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소설 완성도가 별로인 탓입니다. 우선 쓸데없는 묘사가 많고 장황합니다. 에릭 네빌이 정원으로 나가 복숭아를 먹는 묘사가 2페이지에 걸쳐 설명될 이유는 없어요. 그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 트릭은 대충 넘어가는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에릭 네빌이 압박에 못 이겨 자백하고 쓰러진다는 결말은 최악이었어요. 트릭이 간파되었다 하더라도, 실수인지 살의가 있었는지 증명하는건 쉽지 않은 상황이니까요. 에릭 네빌이 정말로 목이 말라서 물병을 그곳에 놓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엉클 에브너 시리즈가 훨씬 좋은 작품입니다.

2020/10/0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 신예용 : 별점 2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4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지음, 신예용 옮김, 박광규 기획.해설/코너스톤

1890년대 후반에서부터 1940년대 까지, 추리소설의 여명기와 황금기까지의 시기에 발표된 여러가지 단편들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이런 류의 앤솔러지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이 접해보았지만, 국내에 비교적 소개되지 않았던 유명 시리즈 작품들 위주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퀸의 정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 외의 다른 가치를 느끼기는 함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전 작품인 탓입니다. 여러모로 설득력도 떨어졌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초창기 추리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저같은 사람이 많이 없는지 재정가로 가격이 3000원 수준으로 떨어져서 가격도 착하거든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터들리 농장의 공포" 

의사인 나에게 스터들리 부인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스터들리 농장으로 찾아가 준남작과 만났는데, 준남작은 자신이 밤마다 유령을 보는 탓에 공포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준남작과 방을 바꾸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는데...

코난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며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즈 단편 연재를 중단했을 때, '스트랜드 매거진'이 구멍을 메꾸고자 투입한게 바로 이 작품이 포함된 '어느 의사의 일기 시리즈' 였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의사'인 핼리팩스 박사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로 '퀸의 정원' 에서는 최초의 '의학 미스터리'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아쉽게도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작품 발표 계기, 그리고 연재 시점을 보면 정통 본격물의 시조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추리 소설의 여명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완성도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스터들리 준남작과 부인의 방은 옷장의 비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저승길 동행을 위해 준남작에게 밤마다 유령쇼를 펼쳤다는게 진상인데, '나' (핼리팩스 박사)가 침실을 바꾸고 유령을 목격한 뒤, 유령이 나타난 옷장을 수색한 것 외에는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가 변장만 하고 추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이를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스터들리 부인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부인은 '나'가 준남작에게 두뇌 질환으로 환영을 보는 걸로 이야기해줄걸 기대했다는데,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가 유령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거라 생각한건 영 납득이 가지 않네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울러 '의학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전무해서 아쉬웠습니다.

본격 추리 소설 초창기 단편 중 한 편을 만나 보았다는 기쁨, 그리고 오스틴 프리먼손다이크 박사 이전에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 탐정이 있었다는 사료적 가치, 마지막으로 스터들리 부인이 유령을 만들어낸 장치가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이라는 상당한 하이테크 제품이라는 점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금고실의 다이아몬드" 

헤드와 친구 두프라이어는 둘의 세계적인 악녀 마담 콜루치가 다이아몬드 상인 칼튼의 파티에 초대된 걸 알고 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담 콜루치는 칼튼 부인의 전남편이 살아있다며 그녀를 협박하는 것과 동시에, 칼튼 부인을 시켜 빼돌린 로체빌 다이아몬드를 칼튼의 철벽 그곳에서 훔쳐낼 계획이었다....

L.T. 미드와 로버트 유스터스가 합작하여 1890년대 후반 발표되었던 연작 단편집 "일곱왕 연맹" 수록작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악녀로 비밀 범죄 조직 '일곱 왕 연맹'의 총수인 마담 콜루치와 과학자이자 탐정 노먼 헤드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시리즈라고 하네요.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역시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이해가 갑니다. 특히 이 단편은 그 수준이 아주 미흡해요. 내용부터 딱히 건질게 없거든요. 헤드와 마담 콜루치와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큽니다. 헤드의 활약이라고는 고작해야 칼튼 부인을 설득해서 전 남편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거든요. 그나마도 실패하고요.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놓쳐버리기 때문에 이래서야 명탐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못하는게 없는 희대의 악녀인 마담 콜루치 캐릭터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됩니다. 또 열쇠를 돌리면 비상벨이 울리는데, 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칼튼의 열쇠를 조작해서 열쇠의 머리 부분만 헛돌게 만든 거지요. 즉, 열쇠를 돌려도 잠기지 않은거고, 당연히 다시 열어도 벨이 울리지 않은 것입니다. 열쇠를 돌릴 때의 저항감, 소리, 마지막으로 금고가 정말 잠겼는지 확인을 왜 안했는지 등 딴지를 걸자면 끝도 없지만, 열쇠 하나의 조작으로 모든걸 일이루어 낸, 대담한 발상의 트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연작 단편을 이어서 다 읽는다면 모를까,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점수를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더욱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 스페이드" 

맥스 블리스가 협박 받고 있다는 전화를 스페이드에게 남긴 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샘 스페이드는 아는 형사 던디 등이 수사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실 해밋이 쓴 샘 스페이드 단편입니다. 묵직하고 거친 사나이 매력을 담뿍 풍기는 이야기이며, 피해자의 딸이 몰래 만나던 불륜남, 광신도이면서 못생긴 가정부 에피 부인이 묘하게 엮여서 사건이 복잡해 지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과 다를게 없는데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다는게 놀랍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피해자의 동생 시어도어가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며, 시체에 놓여져 있던 '새 넥타이' 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 등은 본격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피해자는 옷을 벗던 중 살해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럴 경우 매고 있던 넥타이가 아니라 새 넥타이가 놓여져 있는건 이상하다는 이유입니다. 이를 발견한 스페이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요. 

샘 스페이드는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4시 5분전 쯤 받았는데, 시어도어는 4시에 법정에서 결혼을 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에 대한 트릭도 간단하고 깔끔합니다. 시어도어는 3시 30분 쯤 피해자를 죽이고 법원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전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고 전화를 걸은 겁니다.

물론 스페이드가 한 추리의 증거가 범인 시어도어 손에 난 상처 뿐이라는건 빈약합니다. 상처가 났다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가정부 에피 부인도 손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특이한 상처도 아니고요. 손의 상처보다는, 법원에서 전화를 건 기록을 찾아서 시간을 대입해 보는 식으로 풀어갔더라면 더 깔끔했을 겁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시어도어에게 협박?의 댓가로 지불한 돈은 2만 5천불일텐데 2'억'으로 기입된 오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와 본격 추리와의 결합에 성공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퀸의 정원'에 소개된 "샘 스페이드의 모험" 수록작으로 이 책은 역사적 중요성, 희소성은 물론 퀄리티까지 인정받고 있네요. 당연합니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시계"

8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로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수록작과 동일합니다. 

당시에는 혹평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점도 많았습니다. 자브라스키 박사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과정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 덕분입니다. 흥분한 자브라스키 박사가 '층을 착각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우연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고요. 번역의 차이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우연에 의한 작위적인 범죄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는 물씬 납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별점 1.5점을 줄 작품은 아니에요. 다시 매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총알"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사장'에게 고용되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립 탐정 바이올렛과, 부유하고 젊은 사교계의 꽃 바이올렛이라는 설정이 재미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해먼드 씨가 자신의 아기와 함께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맞았으며, 아기는 죽은 해먼드 씨의 손에 눌려 질식사했지요. 해먼드 씨 가슴의 총알은 그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근접 거리에서 손 총격은 아니었고, 해먼드 부인인 열린 창문을 통해 누군가 해먼드 씨를 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해먼드 씨 몸 속 총알과 함께 해먼드 씨가 쏜 총알도 발견되었어야 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이 두 번째 총알이 어디있는지 추리해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해먼드 씨 몸속 총알은 해먼드 씨의 총에서 발사된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과학의 수준은 많이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앞서 거의 단언하다시피한 정황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총알을 아기가 삼켰고, 그것 때문에 질식한 것이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해먼드 씨가 아니라 총알이 후두를 막은게 질식사의 원인이 된 거지요. 어디론가 사라진 총알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손 꼽을만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이 진상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참고로, '퀸의 정원'에서는 A.K 그린 (애나 캐서린 그린)의 "미스터리의 걸작들" 이라는 단편집을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성'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아닌 듯 하네요. 가치가 크게 다를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급행열차 안 객실에서 르웰린 부부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권총이 사라진 탓에 자살은 아니었는데, 객실 문은 1인치 정도 열린 채 쐐기로 고정되어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남아 있던 승무원과 승객의 신분도 모두 확실했으며, 그들이 범인일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열차를 떠났을 텐데, 객차의 앞 쪽 침대칸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뒷 쪽 3등칸에는 아이가 울어 달래러 나온 부부가 있었다. 객실 문 옆 승객이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열차를 어떻게 떠났을까?

고전 본격물의 걸작 "통"과 '프렌치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운 내용을 F.W. 크로포츠 본인이 오랜 철도업 종사자라 쓸 수 있었을 상세한 기차 구조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열차의 구조와 얼마나 불가능한 범행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탓입니다. 이런 기차 여행이 흔했던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기차를 별로 타지도 않는 지금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더욱이 역부족이었어요. 차라리 만화라던가, 최소한 삽화 등으로 트릭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범행이 밝혀지는건 추리의 결과가 아니라 범인의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추리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친구 르웰린에게 연인을 빼앗기자 복수심에 저지른 치정 범죄라 트릭은 알 수 없어도 동기만 확인되면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찰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던 작품이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퀸의 정원'에도 소개되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와서 읽을 가치는 별로 없겠지요. "통"이나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살인자" 

서밋 이라는 도시에 찾아온 맥스와 알은 식당에서 식사를 시킨 뒤, 사장 조지와 요리사, 그리고 손님 닉을 협박하며 그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올레 앤더슨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올레 앤더슨은 식당 단골로, 킬러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미국 현대 문학 거장인 헤밍웨이의 작품인데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느낌이 나는 드라마거든요. 킬러가 등장해서 식당 관계자들을 협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추리 애호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운과 죽음을 의인화하여 드라마로 풀어낸 짤막한 꽁트라 생각됩니다. 2인조 킬러는 식당 관계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나기와 다를게 없는 불운, 올레 앤더슨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닉은 불운과 죽음 모두를 맛 본 뒤, 서밋이라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는걸 보면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지요.

짤막하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닥없는 우물" 

전쟁 영웅인 노장 헤이스팅스 경이 고대 아랍 전설이 얽혀있는 오래된 바닥없는 우물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함께 있었던 보일 대위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과 불륜 관계였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체스터튼의 단편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연작 단편 중 한 편으로, 시리즈 제목 그대로인 '너무 많이 아는 남자' 혼 피셔가 주인공입니다. 중동 어딘가에 있는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지요.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던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영국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영국 정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게 인상적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아니라 식민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해 보였어요.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용서와 화해를 권했을테니, 이런 류의 독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을테지요.

추리적으로도 작가의 명성에 값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일 대위가 범인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게 진상인데, 그 이유와 방법이 설득력있게 설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헤이스팅스 경이 먼저 보일 대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가로 산책을 제의했다는게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게 좋았어요. 보일이 죽으면 시체를 우물로 던져넣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보일은 범인이 아니기에 시체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요.
범인이 독을 마신건 순전히 회전식 책꽂이 때문에 찻잔이 뒤바뀌어 일어난 사고라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 물론 충동적인 범행에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고라는건 합리적인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한 솜씨는 과연 거장의 그것이었어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시카고의 여성 상속인" 

롬니 프링글은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이상한 남자가 공들여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본 뒤, 그의 편지 압지를 빼돌렸다. 암호와 같은 압지 문구 해독을 통해 '실링하머'라 자칭하는 남자가 런디 후작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손다이크 박사'로 잘 알려진, R.A. 오스틴 프리먼의 롬니 프링글 시리즈 단편입니다. '퀸의 정원' 분류에 따르면 엄청난 희귀본이라고 하네요. 롬니 프링글은 도둑이자 사기꾼인 안티 히어로인데, 이 작품에서는 협박자 실링하머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이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링하머가 후작을 협박하는게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신문 기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범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당연히 런디 후작이 형들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줄 알았는데, 단지 그들이 '자살'했다는 진상도 협박거리가 될 걸로 보이지 않았고요.

롬니 프링글의 작전 역시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실링하머에게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마지막에 경찰을 자칭하여 그를 잡아서 돈 지갑을 빼앗는 것도 여러모로 어설퍼보였거든요. 압지의 글귀 해독도 논리가 뒷받침 되어있는 암호 해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요.
경찰을 자칭하고 후작을 찾아가, 협박자에게는 현금을 주는게 낫겠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만 조금 그럴듯 했을 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역서적 가치', '희소성'에 '퀄리티' 가치까지 부여받은 3관왕인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0/08/01

현란한 유리 (絢爛たる流離) - 마쓰모토 세이초 / 이규원 : 별점 2점

현란한 유리 - 4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의 소유자들이 온갖 범죄에 휘말린다는 내용의 마쓰모토 세이초의 연작 소설입니다. 1963년에 연재된 작품을 모아서 출간했다니 비교적 초기작이지요. 그래서인지 대담한 시도와 아이디어들이 눈에 띕니다. '연작'이라는 구성과 12편 중 8편의 작품이 두 편 씩 이어지는 구조라는 점, '트릭'이 괜찮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시대별로 상세한 배경 설정과 묘사도 돋보였습니다. 고물이 돈이 되는 상황에서 불량품 철사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는 "티켓" 에서는 시대 상황이 범죄의 이유가 되기까지 합니다. 작가의 조선 주둔군 시절을 바탕으로 한 "백제의 풀"과 "도망"은 경험없이는 쓸 수 없는 묘사들로 가득차 있고요.

그러나 이야기 하나하나의 완성도는 아쉽습니다. 구태여 연작으로 엮을 필요가 없었던 이야기들도 많았기에, 12편의 이야기 수를 좀 더 줄이고, 다이아몬드 반지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더 좋있을 겁니다.

단편들 전체를 평균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다른 단편집들과 비교하면 많이 처집니다. 이 보다는 저도 몇 편 소개해드렸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들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무려 12편이나 되니 리뷰도 큰일이네요. 읽다 지치실듯.

"토속 인형" 

기타큐슈의 광산 재벌인 야쓰오 광업의 데릴사위 다다오와 딸 다에코 부부는 별거 상태로 지내다가, 불황으로 야쓰오 광업이 무너진 뒤 다다오는 취미인 토속 인형 수집품과 함께 도쿄의 다에코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 다에코에게는 아버지의 유산이 많이 님아 있었던 덕분에 화려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에코가 취미로 배우는 '노' 관련된 사범들이 집에 드나들면서 다에코와 어울리는걸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던 다다오가 병으로 사망한 얼마 뒤, 다에코는 살인 혐의로 재판정에 섰다. 다다오 유골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기 때문이지만, 다행히 변호사 기타야마의 활약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쇼와 초기 기타 큐슈 광산 재벌에 대한 묘사도 상세하지만, 정말 남의 눈과 입을 빌어 이야기하는 듯한 완벽한 3인칭 묘사로 진행되는 부부의 관계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변호인의 변론이 아주 기가 막히거든요. 토속 인형 수집품에 독살스러울 정도로 도드라지는 빨간색 인형들이 있었는데 이 빨간색은 비소가 함유되어야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인형 수집품을 다다오와 함께 화장해서 비소가 검출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현대의 과학 수사로는 비소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다다오의 유해인지, 인형 때문인지) 충분히 구분할 수 있겠지만, 1930년에는 불가능했을테니 무죄 판결을 받은건 당연해 보입니다. 어차피 형식적인 부부였는데, 금융적인 부분도 다에코가 전권을 쥐고 있고 다다오의 죽음으로 별로 얻어서 다에코가 살의를 품을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이를 법정에서 밝혀 무죄 판결을 끌어내기 때문에 괜찮은 법정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다다오 살해가 급작스럽게, 뜬금없이 일어난다는 점, 특별한 살해 동기가 없다는건 분명한 약점입니다. 오랜 시간동안 살의를 품고 비소를 먹였는데, 그 이유가 불분명하니 답답하더군요.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부인의 쓰즈미" 

1편에서 활약한 기타야마 변호사가 다에코의 집에서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다에코의 노 사범 중 한명인 쓰즈미 사범 오쿠라 고헤이였다. 그는 현장에서 도주했다가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흉기인 비수에 강습용 쓰즈미의 끈이 감겨 있었기 때문에 범인으로 몰렸다...

비수가 여자 힘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깊게 꽂혀 있었고, 다에코는 흰 기모노를 입고 있었지만 혈흔이 전혀 묻어있지 않아서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갑니다. 그러나 결국 다에코가 범인이었다는게 밝혀진다는 이야기지요.

트릭은 간단합니다. 빨래용 대나무 장대 끝에 비수를 묶은 뒤 먼 곳에서 찌른거에요. 지렛대 효과로 더욱 강한 힘이 가해져 깊숙이 찔렀고, 먼 거리라서 흰 기모노에 피가 튀지 않았지요. 트릭의 밑밥을 깔기 위해 다에코가 몇일 전부터 이웃집에 '노' 강습을 권하러 갔다던가, 그날따라 계절과는 맞지 않는 흰 기모노를 입었다던가 하는 사전 준비도 설득력있게 묘사되며, 쓰즈미 사범 오쿠라 고헤이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간단한 조작 - 단도에 쓰즈미 끈을 감아 둔 - 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 범행이 작품에서처럼 성공했을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뼈 등이 있어서 한 방에 가슴을 찌르는건 먼 곳에서는 쉽지 않았을테니까요. 또 다에코가 범행을 자백한다는 결말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버려진 빨래용 대나무 장대에 경찰이 주목한 정도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살해 동기, 즉 남편을 살해한건 다에코가 맞으며 기타야마는 이를 가지고 다에코를 협박했기에 살해했다는 동기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에 다에코가 다시 처벌 받을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사부재리에 대해서는 기타야마가 다에코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동기 없이도 가까운 남자들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다에코라는 악녀의 최후를 그렸다는 것에 의미가 있을 뿐, 추리적으로나 내용면으로나 특별히 건질건 없습니다.

"백제의 풀"

일제 강점기 막판, 전라북도 금읍에서 일하던 일본인 이하라는 아내를 두고 군에 소집되었다. 부대는 집과 가까왔지만 이등병 신분으로 외출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부대의 고급 참모 야나기하라 소좌가 자신의 사택에 하숙한다는걸 알고 난 뒤, 이하라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느 날, 모악산 기슭 금산사 경내에서 야나기하라 고급참모가 단도같은 흉기로 난도질당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조선이 무대라서 반가왔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조선 주둔군 소속 일본군인들이며, 살인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 백제 고찰 금산사거든요. 죽은 야나기하라가 오른손으로 풀 한 줌을 꽉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제목도 "백제의 풀"이지요. 전쟁 말기 조선 정읍이라는 지방에 대한 여러가지 상세한 묘사도 돋보였는데 작가가 전쟁 말기, 조선 정읍에서 주둔했던 경험을 토대로 쓴 티가 물씬 납니다. 내지보다 조선이 안전하다, 미국도 조선은 독립시켜 장차 우방으로 확보해 두고 싶을테니 폭격하지 않을거라는 이하라의 식견이라던가, 불령선인이 범인일 수 있다는 등 디테일들도 좋았고요.

추리적으로도 군인으로 위장한다면 만사형통이었을거라는 아이디어, 그리고 이를 위한 간단한 변장 트릭과 이 트릭이 결국 단서가 된다는 전개 모두 괜찮았습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야나기하라 소좌는 사건 당일 누군가 다른 군인과 함께 걸어서 어딘가(금산사) 로 이동하는게 목격되었습니다. 그래서 범인은 정체 불명의 군인이라 여겨졌고요. 그러나 유이치와 친분이 있던 보급 담당자 다카스기의 추리는 달랐습니다. 유이치가 새 군복을 부탁해서 몰래 새 군복 한 벌을 주었지만, 유이치가 새 군복을 결국 입지 않았던걸 단서였어요. 유이치는 새 군복을 어디에 썼을까? 정답은 유이치는 새 군복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몰래 부대를 나가, 군복을 입고 군인으로 위장한 아내와 밀회를 즐겼는데, 그만 야나기하라에게 발각되어 버린거죠. 그래서 아내가 이를 가지고 협박하던 야나기하라를 살해했다는 겁니다. 이 추리가 정답이었는지, 결국 유이치는 사지 오키나와로 전속되어 버린다는게 이야기의 결말이고요. 이 범행을 알아챈 윗 선의 누군가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이하라 부인이 군인으로 변장해서 금산사까지 이동해 밀회를 즐길 이유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집 근처 어딘가, 혹은 부대 근처 어딘가에서 밀회를 하는게 당연한 발상 아닐까요? 이하라의 장인은 결혼 선물로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줄 정도의 재력이 있는 인물인데, 이 정도 인물의 후광으로도 근처에 있는 아내를 보러가는게 과연 불가능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밀회를 알아낸 뒤, 야나기하라 역시 부인을 절로 꾀어내어 즐기려다가 살해당했을거라는 추리도 이상합니다. 야나기하라는 이하라 부인 집에 하숙하고 있었는데 구태여 밤에 외출할 필요는 없잖아요.

무엇보다도 전시에 그나마 편한 조선에 있으면서 아내와 밀회를 즐기려고 몰래 부대를 빠져나간 병사는 솔직히 죽어도 싸다고 생각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도망" 

전라북도 금읍에 위치한 남조선 연안 방비 사단에 새로 부임한 시노하라 겐사쿠 경리 대위는 사택 부인들과 안면을 텄다. 그리고 고고학 전공자라서 휴일에 금산사 경내를 산책하던 중, 사택 부인 중 한 명인 히사코를 만나 일종의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금산사를 더 자주 찾다가 하숙집 주인인 야마다 기사장, 금읍 최고의 부자 일본인인 속물 오이시 등만 차례로 만난 뒤, 이들이 왜 절에 왔는지 의문을 품게 되는데...

전편에 이어지는, 조선 주둔 일본군의 최후를 그린 작품입니다. 수수께끼는 야마다 기사장과 오이시가 왜 금산사를 찾는지? 인데, 이는 추리가 아닌 시노하라 대위의 미행을 통해 드러납니다. 야마다 기사장은 절에 초단파 수신기를 숨겨두고 몰래 전황을 들어왔던 겁니다. 기사장은 일본이 망하면 조선인이 봉기할테니 빼돌린 금을 가지고 바로 달아날 생각이었거든요. 오이시 역시 같은 목적이었고요.

여기까지는 꽤 흥미롭지만, 진상이 밝혀지는건 미행에 따른 결과라 추리물로 보기는 힘듭니다. 게다가 이후 전개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합니다. 착하고 순진해보였던 역사학도 출신 군인 시노하라 대위가 일본 패망을 알고 군비를 빼돌리고 오이시와 야마다를 꼬드겨 일본으로 탈출하다가 둘 다 살해한다는 막장 이야기로 흘러가기 때문이에요. 심지어 이하라 부인마저 살해하고 반지를 빼앗는다는 암시마저 등장하니 말 다했지요.

일장기에 색을 칠해 태극기를 만들고 봉기한다는 등 당시 조선에 있지 않았다면 몰랐을 디테일은 여전히 놀라운 수준이고, 일본인들이 자기 하나 살자고 조강지처까지 버리면서 발악하다가 모두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어요. 허나 앞서 설명드렸듯이 추리적으로나 전개 면으로나 그다지 점수를 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비와 2층" 

전쟁 때 군대에서 운전사로 일하던 하타노는 물자를 빼돌린 뒤 전후 암시장을 통해 한 몫 단단히 잡았다. 레이코와 바람이 난 하타노는 아내 아키에와 이혼하고 싶어지지만 위자료가 아까와 죽일 생각을 하게 되는데...

하타노가 아키에를 살해하는데 사용된 기상천외한 트릭이 눈길을 끕니다. 아키에에게 큰 장화를 뒤집어 씌운 뒤, 곧바로 외출하면서 아랫층 관리인에게 부인이 히스테리를 부리니 윗층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지시했던 겁니다. 피해자는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든 장화를 벗으려 발버둥 쳤지만, 관리인은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생각해서 올라가지 않았고요. 이후 아키에는 질식해서 죽음에 이르지만 이 때까지는 살아있었으니 범인 하타노의 알리바이도 완벽하게 성립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일종의 시한장치 트릭인거지요. 

트릭도 트릭이지만 흉기인 고무 장화는 하타노가 취급하는 물자로 현장에 널려있었다는 점, 또 시체를 발견한 뒤 곧바로 장화를 벗기고 자신이 신어서 증거를 인멸한 마지막 행동이야말로 진짜 탁월한 아이디어였습니다. 하타노가 1년 뒤 암시장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는 허무함도 전후 일본의 상황과 잘 어울렸고요.

범인 하타노가 대단한 완력을 지녔다는 등의 디테일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그건 조금 아쉽네요. 그래도 추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석양에 물든 성" 

스미코는 아버지의 지인인, 국회의원이었다는 아와시마에게 속아 시골 명문가의 미치광이 외동아들에게 시집간다. 행복했던 나날은 잠깐 뿐, 남편의 광증을 알게 된 스미코는 이혼한 뒤 본가로 돌아온다. 그런데 뻔뻔한 아와시마는 되려 그녀를 농락하고, 살의를 품은 스미코는 아와시마를 사고로 위장하여 살해한다.

시골 명문가의 미치광이 외동아들, 후계자라는 뻔한 소재가 등장하기는 하는데 그 존재는 사건과는 무관하다는게 특이했던 작품입니다. 솔직히 왜 등장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그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부분도 없어요. 스미코가 아와시마에게 농락당한다는 전개도 지금 보면 영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스미코가 러브 호텔에 투숙한 아와시마에게 수면제를 탄 맥주를 먹이고, 욕실에서 익사시킨다는 범행의 설득력은 높지만 추리적으로는 그닥입니다. 결국 사고사로 처리될 뿐 범행은 드러나지도 않고, 추리의 여지도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신세 망친 처녀의 복수를 그린 드라마인데 전형적이고 뻔해서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전등" 

아버지의 골동상에서 일하던 스미코에게 혼담이 들어오지만 계속 거절하던 어느 날, 그녀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혼담을 가져오던 가나이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추파를 던지던 무라타였다. 둘 중 누가 범인인가?

전편의 주인공 스미코가 이번에는 피해자로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스미코가 살해된 시간과 그녀의 방에 침입한 수법 등 범행 관련 정보를 초반부에 상세히 알러줍니다. 이 과정에서 '왜 범인은 살해 후 도주하면서 전등을 켜 놓았는지?'라는 수수께끼도 드러나고요. 전등만 꺼 놓았다면 시체가 보다 늦게 발견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수수께끼가 앞서의 범행 시간, 범행 방법과 조합되어 뭔가 대단한 트릭이 나오겠구나! 싶은 기대를 품게 만듭니다.

그런데 진상은 생뚱맞습니다. 불을 끄지 않은 이유는 범인이 도주할 때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을 무서워한 범인이 경황없이 도주했기 때문이라는 건데, 앞서의 복선이나 단서를 통해 밝혀지는게 아니거든요. 이를 경찰이 밝혀낸건 가나이가 연행된 상태에서 지진이 일어난 덕분입니다. 운과 우연이 조합된 결과인거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착상은 재미났지만, 정교함이 아쉽습니다.

"티켓"

고물상 다이치는 골동상의 첩 스가를 통해 철공소의 폐품 철사를 얻어 팔게 된다. 철사의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폐품 철사를 풀어서 파는데 큰 인건비가 들게 되어 고민 끝에, 고물업자 사카이의 요청 - 철사 푸는 기계를 만들테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 - 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가까지 끌어들여 큰 돈을 투자한 기계는 실패했고, 스가의 독촉에 시달린 나머지 다이치는 사카이와 함께 스가를 살해하고 그녀가 가진 돈을 가로챌 계획을 세우는데...

다이치와 사카이가 스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를 범행 현장까지 끌고가 죽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도서 추리물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범인의 완벽한 계획을 파헤치는 수사가 이어서 펼쳐지지는 않고, 사카이가 다이치까지 죽이려다가 자신이 죽고만다는 다소 허무한 결말이라서 도서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추리물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어려워요. 사카이가 다이치를 죽일 이유가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이왕 한 명을 죽였다면, 한 명 더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이려면 인적없던 스가 살해 현장에서 바로 죽이는게 당연합니다. 스가가 가지고 있던 돈을 반으로 나누지 않아도 되니까요. 멀고 먼 시골 촌구석인 현장에서 기껏 도망쳐 나온 뒤, 시체에 유력한 증거인 '기차표'를 남겨두었다는 말로 다시 다이치를 현장으로 보낼 이유는 없어요.

전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돈에 매달리는 인간 군상에 대한 디테일은 좋습니다. 범죄에 빠져드는 과정, 범행이 일어나기까지의 긴장감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그러나 정작 중요한 범행 동기가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필"

쓰치다 사부로의 집에 하숙하는 양공주 나쓰코는 대필을 업으로 하는 도쿠라와 사귀게 되었다. 그녀는 빅터라는 중사의 '키푸' (병사 한 명에게만 전속된 아가씨)였는데, 종종 빅터에게 폭행을 당해 멍이 들고 화상을 입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나쓰코는 도쿠라와 밀회를 위해 준비했던 집에서 죽었다. 사인은 질식사였는데, 그녀의 몸 어디에도 아무런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가스 중독이나 약물에 의한 죽음도 아니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데...

범인이 나쓰코를 어떻게 살해했는지?가 이야기의 핵심인 본격물입니다. 허나 후더닛물은 아니에요. 범인은 도쿠라일 가능성이 가장 높거든요. 가장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뿐더러, 유력한 용의자는 빅터와 도쿠라밖에 없는데 빅터는 나쓰코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그래서 범행 방법만 알아내면 되는, 구태여 표현하자면 하우더닛물인 셈이지요.

등장하는 흉기는 전기입니다. 변압기를 연결하여 가정용 100볼드를 승압하여 감전사 시킨 것으로, 도쿠라는 간다에 있는 전기 학교를 졸업했다는 부연 설명도 있고, 나쓰코 시체에 땀을 많이 흘렸다는 단서도 제공하는 등 나름 공정한 정보 제공에도 신경 쓴 티가 납니다.

그러나 전기 감전사의 경우 몸에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도쿠라가 나쓰코 화상 자리에 전선을 가져다 대었다 한들 그 흔적이 완벽하게 감추어졌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어요. 또 앞서 말했듯 유력한 용의자는 도쿠라밖에 없기에, 경찰이 조금만 더 파고들었다면 범행 방법은 몰라도 범인을 밝혀내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생각되고요. 무엇보다도 도쿠라의 동기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양공주와 관련된 사건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대표작인 "제로의 초점"이 떠오르네요.

"안전율"

도아 철강 회장 가구 류헤이에게 좌익 학생운동 단체인 총학련 재정부 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흥미를 느낀 가구는 후쿠시마 준이치와 만나 그들의 사상을 들은 뒤, 2만엔을 기부했다. 그 뒤, 가구는 자신과 내연 관계에 있는 스탠드바 '코스타리카'의 마담 사호코가 바텐더 기미지마로부터 협박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총학련 시위를 이용해 기미지마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적군파로 대표되는 60년대 급부상했던 좌익 학생 운동이 등장하는게 이채로왔던 작품. 사회적 이슈를 고발하는 작품을 써 왔던 사회파 작가답습니다. 좌익 운동의 지도부는 대학생 애송이들이지만 당시 사회 지배층들이 상당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묘사도 신기했고요. 또 프락치를 멤버들이 구분하여 린치하기 위해 특별한 표식을 한다는 설정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좌익 운동은 그냥 신기한 소재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합니다. 이를 범행에 사용할 의도였다면 목적, 방법이 명확했어야 하는데 , 단지 등 뒤에 마크를 하는 정도로는 많이 부족해요. 기미지마가 연적이라 할 수 있는 가구의 초대로 선뜻 학생 운동 현장에 나타났다는 내용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시위가 격해지기 전에 귀가해 버렸을 수도 있는 등 헛점도 많습니다. 차라리 마크는 경찰을 속이기 위함이며, 가구 회장이 직접 살인을 저질렀다는 식의 전개가 나았을거에요. 여러모로 너무 대충 넘긴 느낌입니다. 이 한 편만으로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네요.

아울러 "시마 과장" 등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당시 일본 고위 인사가 내연의 처가 있는게 별로 문제가 되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문제가 되었더라도, 회장이 직접 살인에 나선다는건 현실적이지 않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림자"

전 편에서 기미지마가 좌익 학생 운동 단체에게 살해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호코가 살해했다는게 밝혀지는 이야기입니다. 전 편이 완성된 작품이 아닌 느낌이 든 건 당연합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기미지마 살해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니까요. 사호코 마담이 기미지마를 바에서 찔러 죽인 것이라고요. 그 뒤 그녀는 가구를 위해서 죄를 지었기에 그를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사랑 이야기죠? 그런데 와 닿지 않기는 전편과 마찬가지입니다. 전 편은 이야기의 구멍이 많은게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범행 방식이 문제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용해 유리를 잘라 흉기로 사용했다는게 특히 억지스러워요. 바에 흉기가 한두개가 아닐텐데 왜 흉기를 만들어가면서까지 범행을 저질렀을까요? 그것도 끼고 있던 다이아몬드로 유리를 잘라가면서까지? 그냥 유리를 깨도 뾰족한 조각은 쉽게 얻을수 있었을텐데? 게다가 마지막에 다이아몬드에 난 상처가 큰 증거인 것 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걸로 유리를 잘랐다는건 증명하기도 불가능하고요.

경찰 수사망에 반지가 걸리는 것도 우연에 불과한 등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소멸" 

N시 호텔 공사 현장에서 일하게 된 17세 소년 지로는 휴일에 우연히 별장촌 주민 도요코를 만났다. 그녀는 지로가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걸 알고 여러가지 선의를 베풀었고, 지로는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도요코는 결혼하여 별장촌을 떠난다고 지로에게 말했고, 지로는 도요코의 약혼자를 살해한 뒤 약혼 반지를 빼앗지만 이후 주박처럼 반지에 얽메이는데....

계급간 격차로 인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살의를 불러온다는 통속적인 내용의 작품. 그래도 밑바닥 노동자와 부잣집 딸이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계급 격차를 빼면 '질투심'으로 살인을 저지른다는 이야기이니까요.

그러나 도요코가 경찰에게 지로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무엇인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별장에 초대해서 식사까지 대접해서 별장 고용인들도 아는 사실인데 왜 함구시켰을까요? 그녀 역시 나름대로 지로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걸까요? 하지만 그에 대한 묘사는 전무합니다. 

게다가 마무리는 최악입니다. 지로가 증거인 다이아몬드 반지를 두려움 때문에 항상 소지하고 다녔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낮지만, 급작스럽게 반지를 공사현장 철근에 용접한 뒤 철근이 떨어져 이상한 흔적이 들통난다는 결말은 우연치고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심지어 공사장 옆을 지나가던 행인이 떨어진 철근 자재에 맞아서 중상을 입고, 그래서 경찰이 함께 현장을 조사하던 중 철근에 백금이 달라붙은걸 알게 된다? 이 정도면 지로가 반지를 낀 채로 사건 담당 형사 앞에 떨어진다 수준의 우연일 겁니다.

고도 성장이 시작되는 상황에서의 빈부 격차, 사회 문제를 통속적이고 다룬 진부한 이야기로 추리적으로도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반지를 이야기에 억지로 엮다가 마지막에 없애기 위해 만든 이야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2019/11/09

블러디 프로젝트 - 그레임 멕레이 버넷 / 조영학 : 별점 3.5점

블러디 프로젝트 - 6점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조영학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

1869년 8월 10일 아침, 스코틀랜드 북부의 마을 컬두이에서 17세의 소년 로더릭 멕레이가 메켄지 일가를 참혹하게 살해한다. 그는 인버네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중, 자신의 일생과 저지른 범죄를 반추하는 비망록을 작성한다.

우리나라 작가 한강이 수상했던 2016년의 맨부커상 후보작이기도 했다는 범죄물입니다. 별다른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손에서 책을 떼기 힘들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책은 크게 메켄지 일가를 살해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로더릭 멕레이의 비망록, 그리고 로더릭 멕레이가 사건 당시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싱클레어 변호사와 검사측의 치열한 싸움이 펼쳐지는 재판 과정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이 중 비망록 부분은 정말이지 무섭습니다. 로더릭 멕레이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과 같은 삶에 갇혀 있다는 내용으로, 그 어떤 희망도 볼 수 없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고, 오히려 빚 때문에 모든걸 잃고 가족은 행정관 메켄지에게 농락당하지만 아무에게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소년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가족의 붕괴는 시간문제였을거에요. 

이어지는 재판 과정, 법정 다툼에서 여러 증인들의 증언에 의해 비망록의 진실이 하나 둘 씩 밝혀지는 과정의 흡입력도 대단합니다. 작가의 구성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덕분이지요. 무엇보다도 재판 과정에서 제임스 톰슨 박사에 의해 밝혀지는 범행의 진짜 동기는 그야말로 충격입니다. 메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별 생각없이 저지른 충동적인 범죄가 아니라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매켄지의 딸 플로라를 능욕하는게 목적이었다는 것이지요. 검시 결과와 같은 여러가지 현장 조사 기록과 법정에서 증언으로 밝혀지는 현장의 모습 등도 이러한 진짜 동기를 강하게 뒷받침하고요. 이 작품을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이 장면만큼은 아주 괜찮았어요. 이외에 특별히 법정 미스터리같은 부분은 없습니다만, 교도소 의사인 먼로 박사를 다그치는 싱클레어 변호사의 활약은 꽤 볼만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와중에 밝혀지는 제임스 톰슨 박사의 사고방식은 정말이지 기도 안 차더군요. 범죄가 유전의 산물이고, 하층민의 전유물처럼 여기며 소장농들을 무시하는 지독한 특권 의식에다가 범죄자는 미적 감상이 불가능하다는 등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인데 이런 사람이 당대 최고의 범죄 심리 전문가로 인정받았다니 정말 야만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영적으로 주민들을 이끌고 보호해야 하는 목사마저도 주민들이 야만적이고 소년은 사악하다는 사심을 가감없이 드러내니 말 다했지요.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로더릭 멕레이의 비망록의 문체입니다. 더 날 것 느낌이 났어야 했어요. 아무리 소년의 지능이 보통 이상이며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오래 받거나,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보지 못한 상태에서 쓴 글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공의 소설을 실제 있었던 사건처럼 서술한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는 점을 볼 때 원문을 읽지 못했고, 읽을 실력도 없지만 번역하면서 유려하게 매만진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데, 좀 오버스럽기는 해도 차라리 '사투리' 로 막말을 포함하여 번역되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또 아버지 존 멕레이의 존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입니다. 메켄지에게 농락당한건 그렇다 치더라도, 딸이 성폭행당해 임신까지 했는데 침묵한다는건 말이 안되잖아요? 아무리 무관심, 무저항으로 일관한다고 해도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존 멕레이의 존재가 모든 사건을 일으킨 것과 다름이 없는데, 캐릭터의 설득력이 부족하다는건 분명한 단점이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작품의 가치를 저해할 정도는 아닙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입니다. 재미와 함께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들을 안겨주는 좋은 작품입니다. 작가의 필력, 구성력도 나무랄데 없고요. 단점을 약간 언급하기는 했지만 작품의 수준을 해칠 정도는 아닙니다. 소년의 끔찍한 삶이 너무 잔인해서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019/04/06

블러디 머더 - 줄리안 시먼스 / 김명남 : 별점 2.5점

블러디 머더 - 6점
줄리안 시먼스 지음, 김명남 옮김/을유문화사

추리 작가인 줄리언 시먼스가 쓴 추리, 범죄 장르 문학 역사서입니다. 이쪽 바닥(?)에서는 확고한 명성을 다지고 있는 책이지요. 1794년 출간된 윌리엄 고드윈의 "칼렙 윌리엄스" 부터 시작해서 비도크, 에드거 앨런 포와 찰스 디킨스, 월키 콜린스, 에밀 가보리오로 이어진 범죄 문학이 셜록 홈즈로 대표되는 단편 추리물로 만개하고, 애거서 크리스티, 도로시 세이어스, 앤서니 버클리 콕스, 반 다인 등 거장들에 의해 추리 문학 "황금기"인 1920~30년대에 이른 후 정통파에서 하드보일드 등으로 변주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범죄 문학 역사의 주요 변곡점과 주요 작품들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국, 프랑스 및 기타 국가의 추리, 범죄 소설도 비중있게 언급됩니다. 뒤렌마트의 범죄 소설들이라던가 부알로 - 나르스자크, 세바스티앙 자프리조의 작품들이 그러하죠. 스웨덴의 페르 - 마이셰발 작품도 마찬가지고요. 특히나 페르 - 마이셰발 작품이 좌파적 견해를 드러낸다는 시각이 독특한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그런 느낌이 떠오르기는 하네요. 저는 이런게 유럽 스타일이구나 싶었는데 말이지요. 

마지막으로 스파이 소설은 아예 한 단락을 할애합니다. 대부분 아는 작가와 작품들인데 이 중에서도 문학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최초의 스파이 소설인 어스킨 칠더스의 "사막의 수수께끼"야 말로 모든 스파이 소설과 모험 소설 중 최고작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는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번역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북이 저렴하게 나와 있으니까요.

하지만 대략적인 추리, 범죄 문학의 역사는 익히 잘 알고 있던 내용이라 딱히 새롭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눈길이 간 건 저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러 작가와 작품들에 대한 평가입니다. 저자 본인이 추리 소설 작가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트릭에 대해서는 평가가 박하고 문학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추리 소설은 정통파, 고전 퍼즐 미스터리를 선호합니다만, 작가의 주장처럼 수수께끼 풀이는 그냥 핏기없고 인물없는 게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는 어느정도 수긍이 가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수수께끼 없이 범죄와 인물에만 기댄 작품도 반쪽짜리일텐데, 그런 부분에 관대한건 좀 이해가 되지는 않았어요. 예를 들어 해밋의 "유리 열쇠"를 당대 최고작이라 극찬하는데, 그 이유는 캐릭터 묘사로 대표되는 문학적 성취 때문입니다. 트릭은 부차적이고요. 하지만 단지 캐릭터와 인간관계만으로 최고 성과라니 평이 과하다 싶습니다.
스펜서 시리즈로 유명한 로버트 B 파커를 챈들러의 후계자로 언급된다고 소개한 단락도 뭔가 싶었네요. 전형적인 펄프 픽션 작가로 좋은 평을 줄 만한 부분이 전혀 없는데 말이지요.

반대로 윌리엄 아이리쉬를 플롯이 한심하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는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모든 작품들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렇게 박한 평가를 받을 작가는 아닙니다. 평가 절하된 작가는 또 있습니다. 조세핀 테이가 대표적이에요. 지루하다는 이유인데 역시 수긍하기 힘듭니다. 그 외에도 존 르 카레, 제임스 엘로이 등도 평이 좋지 않더군요. 

작가 특성상 단편에 좋은 평을 주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러리 퀸의 초기 단편집에 좋은 평가를 한 건 눈에 뜨입니다. 암, 좋은 작품이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비슷한 수준으로 여기는 푸아로미스 마플 단편에 대해서는 좋은 평을 주지 않는건 의외였습니다. 장편보다 훨씬 수준이 떨어진다는게 그 이유인데 말도 안됩니다!

이렇게 평가는 좀 갈리지만, 잘 몰랐던 작품들에 대해 스포일러 없이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소개는 일품입니다. 몇 몇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해봅니다.
우선 1920년대 작가인 필립 맥도널드가 있습니다. "줄"에서 엔서니 게스린 대령을 소개했다는데 최고작은 "리녹스"와 <> 두편이라는군요. 존 딕슨 카는 저 역시 좋아하는 작가인데 줄리언 시몬스는 최고 작품으로 "할로 맨"을 꼽습니다.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으로, 1980년대 전문가 집단의 최고의 밀실 소설 투표에서 카의 다른 작품들 - "구부러진 경첩", "유다의 창", "열개의 찻잔" - 보다 두배 가까운 표를 얻었다고 하며 "환각과 위장에서 문제를 끌어낸" 소설이라니 궁금해서 미치겠네요. 마찬가지로 황금기 작품인 C.데일리 킹이 쓴 세 편의 "오벨리스트" 시리즈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다른 학파의 심리학자들이 함께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완벽하게 공정한 정통파 추리소설이라니까요.
황금기 이후 작품 중에서는 페트릭 퀜틴의 "두 아내를 가진 남자"와 "로널드 셸던의 아내", 에드먼드 크리스핀의 "움직이는 장난감 가게"와 "피 흘리는 사랑"에 대한 평이 괜찮고요. 시릴 헤어의 "법정의 비극"은 코미디적 감각과 인물에 대한 진실된 감정으로 순회 재판 판사의 삶이 잘 묘사된 그의 최고작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도 소개된 에드거 러스트가튼의 "대답해야 할 사건", 케네스 피어링의 "커다란 시계", 헬렌 유스티스의 "수평의 남자", 존 프랭클린 바딘의 "악마의 푸른 꼬리 파리" 모두 한 번 읽고 싶어 집니다. 국내 소개된건 아쉽게도 "커다란 시계"밖에 없지만요. 

이후 현대로 넘어오면서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를 범죄 소설가 중 가장 중요하다며 소개하는 단락은 동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아주 좋아하는 작가라 무척 반갑기도 했고요. 이어서 소개되는 마고 베넷의 작품들도 굉장히 흥미로운데, "비행하는 남자들"은 국내에 소개되면 참 좋겠습니다. 로스 맥도널드에 대한 호평도 좋았고요. 마거릿 밀러의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지만, 여기서 최고로 치는 "천사처럼"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으니 이 작품까지는 읽어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작품 소개만 흥미롭다면 인터넷 서점 리뷰보다 나을게 없죠. 아니, 국내 소개된 작품이 드물다는 점에서는 인터넷 서점보다도 못합니다. 전문가적인 시각이 반영되었다고는 하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느낌이 강해서 마음에 들지 않고요. 명성에 비하면 조금은 실망스러운 책이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11/17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 서미애 : 별점 1.5점

당신의 별이 사라지던 밤 - 4점
서미애 지음/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 모종의 사건으로 딸을 잃은 우진은 깊은 슬픔에 빠진 채 간신히 삶을 지탱해 왔지만, 아내마저 갑작스럽게 떠나자 장례를 치르고 절망 속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우진은 누군가 남긴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건 "진범은 따로 있다"는 단 한 줄의 메모였다.
이후 우진은 딸과 아내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풀기 위해 그 한마디를 붙들고 다시 일어났다. 가슴에 묻어둔 딸의 살인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진실을 외면하고 침묵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 드러나는데……

한국 추리, 장르 문학 암흑기부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작가 서미애의 신작 장편입니다. 제목의 별은 주인공 우진의 딸 수정을 의미합니다. 딸이 고등학생 일당에게 살해 당한 후, 모든 것을 잃고 지옥에서 살게 된 우진의 심정을 잘 나타낸 제목이지요.

우진이 자살하려는 아내 혜인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뛰어가는 도입부, 그리고 아내의 자살 이후 자신이 몰랐던 아내의 처절한 고독과 새삼스러운 딸의 부재를 깨닫는 장면의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작가의 말의 따르면 친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후 쓴 작품이라는데, 확실히 이런 슬픔을 느껴본게 분명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묘사는, 자신도 죽을 결심을 한 우진이 "진범은 따로 있다"는 메모를 발견하고 혼자만의 수사를 시작하는 전개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수사 초기, 아내 자살의 원인이 된 병원에서의 수모를 우진이 새삼스럽게 겪는 부분까지는 정말이지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내용은 솔직히 엉망입니다. 어설픈 클리셰가 난무하고 캐릭터의 설정과 역할도 제대로 배분되어 있지 못하지만, 무엇보다도 추리, 스릴러물로 볼 수 없는 이야기 전개 때문입니다. 범죄, 사건은 등장하지만 추리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도 없고, 스릴도 당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진범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부터 황당하기 짝이 없어요. 우진이 사건에 뛰어든 직후, 3인조 윤기, 재강, 승찬의 대사를 통해 세영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3인조는 우진이 다시 추궁을 시작해서 세영을 만나려 한 것이고요. 그럼 진범은 누구겠어요? 당연히 세영이지요... 이렇게 이야기의 핵심이 초, 중반에 드러나 버립니다. 

또 사건의 진범을 쫓는 전개에서 우진이 하는 일은 세영의 아버지인 검사 출신(딸 사건 담당) 변호사 재혁에게 문자를 남기는 것 뿐입니다. 정작 독자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역할은 사건을 은폐한 핵심 인물인 재혁이 담당하니 이게 뭔가 싶더군요. 재혁도 검사 시절 연줄로 우진의 위치를 추적해서 뒤를 쫓는 것 외에 하는게 없기는 마찬가지고요. 추리가 없으면 분위기라도 잡아줘야 하는데 우진과 세영은 평범한 부녀처럼 바다, 천문대 여행을 즐길 뿐이라 긴장감 역시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전개도 작위적입니다. 세영과 우진이 엮이는 장면부터 그러합니다. 세영은 우진의 딸을 살해한 3인조에게 쫓기던 와중에 '우연히' 우진의 차를 타게 되고, 우진과 함께 '우연히' 바다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우연히' 트럭 사고에 휘말려 응급실을 방문하고 여기서 '우연히' 우진이 세영의 핸드폰으로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됩니다. 도대체 우연이 몇 번 겹쳐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네요.

그리고 사건을 '우연히' 키우게 된 원인인 3인조가 세영을 만나려 한 의도도 전혀 설명되지 않아서 의아합니다. 진범이 따로 있다고 해도 3인조가 지금 시점에 안달이 날 필요는 없어요. 이미 법의 심판은 받았고,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재강은 서울대 법대에 다닐 정도로 모두들 부모의 재력으로 잘 살고 있는 와중에 무얼 두려워 하는걸까요? 본인들이 저질렀지만 숨겨 놓은 죄가 밝혀지는게 아니라, 본인들이 저지르지 않았지만 뒤집어 쓴 죄가 밝혀진다는데,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그들을 단죄한 검사 재혁이 세영의 아버지로 일종의 딜을 통해 가벼운 형벌을 주었다 쳐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다시 법정에 세워 판결을 내리는 건 어렵습니다. 어차피 자기들끼리 여자를 보호하려는 기사도 정신을 발휘한 것이라고 입만 맞춘다면 무거운 형벌을 받지도 않을테고 부모들에게 피해가 갈 리도 없고요.
한마디로 쓰잘데 없는 행동입니다. 이를 3인조의 브레인같은 서울대 법대생 재강이 모른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습니다. 무엇보다도 3인조가 내분을 일으키고 재강이 윤기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당쵀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이 상황에서 재강이 당당하게 빠져나갈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장면도 이해가 되지 않고 말이죠.
이러한 무리수는 제가 보기에는 독자는 다 알지만 작가 스스로만 세영의 정체를 잘 감추었다고 생각하고, 진정한 흑막은 3인조, 그 중에서도 재강이다! 라는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전형적인 추리 소설류에서 따온 뻔한 설정인데 정말이지 무의미했습니다.

아울러 캐릭터 설정과 묘사, 배분도 엉망입니다. 누가봐도 주인공 우진이 탐정 역할을 수행하며 악을 단죄해야 하고, 사건의 절대악은 진범인 세영과 이를 은폐한 재혁이어야 합니다. 허나 우진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하는게 없고, 세영은 마지막 부분의 묘사를 빼면 시종일관 가정 불화로 고통을 겪는 불쌍한 소녀로 그려집니다. 재혁도 세영 부분의 묘사와는 다르게 딸 바보 인격자로 묘사되고요. 3인칭 시점이었다면 단서가 복선처럼 등장했을지도 모르게지만, 세영과 제혁 모두 각자의 시점으로 묘사되어 이야기의 공정함이라던가 복선 모두 안드로메다만큼 거리가 멉니다. 세영이 마지막에 절대악으로의 면모를 드러내며 범행을 고백하는 장면도 뜬금없기 그지 없고 무언가 깔끔하게 단죄하는 느낌도 들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요. 또 이를 핸드폰으로 촬영한 것 정도로 다 잘 해결될거라고 보는 것도 무리죠. 재혁과 세영을 감금, 포박한 상태에서 얻은 자백이 과연 증거 효력이 있을까요? 고문해서 증거를 날조한 거와 다를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딸과 아내처럼 가족, 친지를 잃은 사람의 슬픔이 어떤지를 그리는 절절하고 먹먹한 묘사만큼은 일품입니다만 추리, 스릴러 장르물로서는 꽝이에요. 추리물을 표방하지만 신파 드라마 쪽 완성도가 훨씬 높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한국 장르물이구나 싶네요. 여튼,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절대로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