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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0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박산호 : 별점 1.5점

근대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초창기 거장 중 한 명인 윌키 콜린스의 단편집입니다. 저자의 단편은 이전에 몇 편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럽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감성 그대로의, 낡고 지루한 내용이 가득한 탓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예상대로이며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거장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쌍둥이 자매"는 첫 눈에 반한 여성 제인과 결혼하게 된 스트릿필드가 결혼식 날, 자신이 반했던 여자는 제인이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클라라는걸 깨닫는다는 상황 설정이 기가 막힙니다.

"페루지노 포츠 씨의 인생길"은 영국 신사임을 자처하는 속물 포츠 씨가 거구의 이탈리아 여성에게 속박당하는 수난의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합니다. 이른바 영국식 유머 소설 느낌인데, 포츠 씨 일기라는 형태의 1인칭 시점으로 화끈하고 깨는 맛을 더해주는게 좋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아주 기묘한 침대"는 10여년 전에 읽었던 단편인데 여전히 재미있었어요. 침대가 서서히 내려오는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제미나이로 그려본 아주 기묘한 침대가 놓여진 방

하지만 예전보다는 장황함이 지나치게 느껴졌는데, 빅토리아 시대 원전에 충실한 번역 탓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덕분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언급하며 방을 꼼꼼히 살핀게 '나'가 생명을 구한 이유가 되었다는걸 알게 되었지만, 예전만큼 '걸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의, 경마 시즌이라 빈 방이 없던 탓에 여관 주인의 '말없고 조용한 동숙인'이라는 말에 속아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아서 홀리데이의 상황만큼은 기발합니다. 시체를 바라보다가 시체가 움직인걸 알아챈 순간의 묘사 - 이제 거길 보자 침대 옆으로 축 늘어진 길고 흰 손이 보였다. 그 손은 시체의 머리 쪽과 발치를 가린 두 장의 커튼이 만나는 곳에 꼼짝도 않고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모든 것을 감춘 채 길고 흰 손만 보여 주었다. - 도 일품이고요.

하지만 이외 작품들은 모두 지루하며,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은 볼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입니다. "얼어붙은 땅"에서 연적과 표류하게 된 리처드처럼요. 그는 목숨걸고 연적 프랭크를 옛 연인에게 데려다 주고 죽고 맙니다. 순애보도 아니고, 그에게는 일종의 '임무'였기 때문이라는데, 참 낡아빠진 발상이지요.

좋았다고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일부 상황 설정이 재미있을 뿐, 낡고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손"이 대표적이에요. 시체와 함께 있는 두려운 상황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었는 사람이었고 그는 아서 홀리데이의 의붓형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결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대부분의 작품에 가득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기대했던 범죄, 추리 계열 작품도 없다시피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4/08/02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4). - 아야츠지 유키토

「돈돈 다리, 떨어지다」의 「문제편」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속으로 살짝 일어난 화를 누르며 U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책장에서 꺼내온 우메즈 가즈오의 만화(『오로치』의 SUNDAY COMICS판, 네 번째 권이다)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아, 다 읽으셨어요?"
내 시선을 느낀 U군은 책을 덮으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우메즈 가즈오는 몇 번을 읽어도 대단하죠. 저는요, 그를 인생의 스승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환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우메즈 가즈오가 대단한 것은 나도 전적으로 인정하는 바지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생의 스승"이라고까지 치켜세우는 그의 천진난만함(이라고 할까 뭐라고 할까)이 이때의 나에게는 왠지 몹시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는 "스승"의 책을 정중히 옆에 놓으며 "자, 아야츠지 씨"라고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떻습니까? 설마 벌써, 풀어버리셨나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제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그렇네요."
U군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30분 정도 남았군요. 그 정도면 괜찮으세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세 번째 세븐스타 담배 포장을 뜯었다. 불을 붙이면서, 지금 느끼는 이 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피해자인 악동의 이름이 "유키토"라는 것 때문인가? 그것도 완전히 관계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안 된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학생이다. 악의가 있을 리는 없고, 어설픈 농담이라 웃으며 관대하게 넘겨야 한다.
불만을 제기하자면 오히려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그렇다 치고, 이 M** 마을 주민들의 이름은 대체 무엇인가. "포",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캠프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도 끔찍하다. "반 다이스케"는 반 다인의 패러디인가? "아사노 요우지"에 "사이토 사카에"——웃기지 않는다. 전혀 웃기지 않는다. 미스터리 매니아의 유치함이라면 듣기 좋겠지만, 읽는 내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이런 이름짓기는 정말 참아주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이 인물들, 읽다 보면 전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구별은 가능하지만, 아무리 '범인 맞추기' 단편이라 해도,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상 조금 더 제대로 된 묘사를 해주었으면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A, B, C……로 표기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나는 이렇게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맞아, 바로 이것이다.
목구멍까지 나왔던 그 말(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고)을 간신히 삼키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커피라도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아마추어 학생이다. 여기서는 선배답게 그 부분은 눈감아주고, 어쨌든 이 '문제'에 도전해야 한다.
"자, 그럼."
두 잔의 커피를 테이블에 내놓고, 나는 「문제편」의 원고를 다시 한번 대충 넘겼다. "잘 먹겠습니다"라며 컵에 손을 뻗으면서, U군은 내 표정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자신작이라고 할 만하군. 꽤 어려운 문제야."
라고 말했다. 사실 나의 진심이었다. 사건의 상황은 이른바 '준밀실'이다. 20미터의 공간으로 격리된 '열린 밀실'에서의 불가능 범죄. 설정과 이야기에서 뭔가 장치가 있을 것 같은 냄새가 풍기지만, 초점은 역시 이 불가능한 상황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20미터의 거리를 극복했는가. 그 트릭을 간파하면 자연스럽게 범인의 정체도 알 수 있는, 그런 타입의 '문제'다. 과연……?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한 후, 나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부분부터 파고들어갔다.
"'당했다', '밀쳐졌다', '사……사아……'라는 유키토의 말은, 글 중에 나와 있듯이 '다잉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지막 '사아'는 범인이 누구인지 말하려던 것이라는 거네."
"글쎄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실지……"
U군은 얼버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얄미운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사'가 머리에 오는 등장인물은, 이 중에서는 사키와 사카에군. 사카에는 성도 사이토지. 설마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겠지만.——흠. 달려온 사카에의 목소리를 듣고 '사이토 씨'라고 대답하려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군."
"그렇죠. 하지만, 다잉 메시지라는 건 대부분 보조적인 단서일 뿐이잖아요. 아야츠지 씨의 작품에서도, 항상 그렇지 않나요?"
"뭐, 그렇다고 하면 그렇지. 그럼, 이건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리고 나는 일단 정석적인 '소거법'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알리바이 등 데이터를 통해 범위를 좁혀나가는 거야. 먼저, M** 마을 사람들부터——"
범행 시각인 오후 2시 40분에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은,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네 사람이다. 이 중 카는 중상을 입고 위독한 상태니까, 당연히 제외된다.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체력적으로 생각해도 다리까지 왕복해야 하는 범행은 무리겠지.
엘러리는 어떤가. 가령 어떤 트릭을 써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죽였다고 해도, 그 후 25분 이내——즉 포가 그를 광장에서 본 3시 5분까지——마을로 돌아오려면, 어떻게든 [옆길 B]를 내려와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①의 루트를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파이프 바위에 있던 린타로는 그 시간에 통나무 다리를 건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엘러리도 범행은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남은 사람은 아가사뿐이지만, 그녀의 경우 엘러리와 달리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없으므로, ②의 루트를 통해 돌아왔다고 해도 시간적인 모순은 없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는 그녀가 범행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보면, 올츠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어떤 트릭을 썼다 해도, 상대는 20미터의 계곡이니까.
결국 여기서는 네 사람 모두 제외된다. 포가 말하는 X는, 그들 중에는 없는 것이다.
한숨을 쉬며, U군의 반응을 본다. 그는 또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고,
"10분 남짓 남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역시 얄미운 얼굴이라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음은 캠프의 네 사람."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나는 소거법을 계속했다.
요우지와 사키는, 오후 2시 40분 시점의 알리바이는 없지만, 다이스케가 돌아온 2시 50분에는 분명히 캠프에 있었다. 범행 후, 10분 안에 다리에서 돌아올 수는 없다. 다이스케가 다시 돌아온 루트도 20분 걸렸으니까. 예를 들어 [옆길 A]로 꺾어 [지류 B]를 따라 올라왔다면,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제외해야겠군.
당연히 다이스케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2시 40분에 범행을 저지른 후 되돌아갔다면, 아무리 서둘러도 2시 50분에 캠프에 도착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남는 사람은 사카에인가. 사카에가 빈사 상태의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 — 여기에는 시간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그는 시간적인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이스케가 산등성이 길을 되돌아간 것과 엇갈리면서 [옆길 A]에서 산등성이로 올라와 다리까지 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디. 그렇게 범행을 끝낸 후, 강으로 내려갔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겠지.
물론 사카에가 강가에서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 몇 개 있던것 같기는 하다. 때문에 정말로 사카에가 범인이라면, U군이 '페어 플레이의 룰은 엄격히 지켰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건 이상하다. 그 부분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걸까.
자, 어쨌건 문제는 그 다음이야—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알리바이로는 사카에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유키토를 절벽에서 떨어뜨렸을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황당한 트릭이 떠올랐다.
“흠. 굳이 계곡을 건너 유키토 곁까지 갈 필요는 없었겠군.”
“어떻게요?”
“사카에의 배낭에는 이때 낚싯대가 들어 있었어. 여기에 튼튼한 긴 낚싯줄을 달고, 그 끝에 예를 들면, 야구공 정도의 크기의 돌을 묶어서 말이야...”
“휘둘러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맞췄다고요?”
“그런 거야. 무리일까.”
U군은 복잡한 표정으로 “하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
“이런 건 어떨까.”
극약을 먹는다는 심정이 되어, 나는 거기서 새로 떠오른 트릭을 말했다.
“남아 있던 한 줄의 로프를 따라 뱀을 보내는 거야. 놀란 유키토는... 아니, 이건 안 되겠군. 유키토는 뱀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런 건 어떻지. 들쥐의 목에 긴 끈을 묶어 로프를 따라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구해줄 테니까 그 끈을 잡으라고 명령하는 거지. 멍청한 유키토가 그 말을 믿고 따랐을 때, 힘껏 끈을 당긴다. 균형을 잃은 유키토는...”
점점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애당초 이런 물리적인 트릭을 고안하는 게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시는군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고, U군은 조금 유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틀렸어요. 실행 가능 여부를 떠나서, 그것만으로는 ‘밀쳐져 떨어졌다’는 것이 되지 않으니까요. 유키토는 어디까지나, X의 손에 의해 ‘밀쳐 떨어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전한 유키토의 죽기 직전의 대사에 ‘거짓’은 없고, 본문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명기되어 있습니다.”
“흐음.”
“유키토는 X의 손에 의해 밀쳐져 떨어졌다. 이것은 즉, 범행이 일어난 2시 40분 시점에서, X는 확실히 돈돈다리 북쪽 돌출 부분에 있었고, 자신의 손으로 유키토를 거기서 밀쳐 떨어뜨린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슬슬 시간 초과네요.”
라는 무정한 선언을 듣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U군은 왼팔을 들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 뒤, “그럼, 이걸로”라고 말하며 ‘해답편’ 원고를 건넸다.
---

### 해답편
○반 다이스케, 아사노 요우지, 아사노 사키, 사이토 사카에 네 명은 시간적 혹은 물리적으로 생각해도 명백히 범행이 불가능하다. 또한, 본문에서 알리바이가 명기된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X가 아니다.
○따라서 X는 M** 마을의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 중에 있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카는 범행 불능. 한 팔이 없는 아가사는 범행 불능.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범행 불능.
○이상으로 X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엘러리 뿐이다.
○엘러리는 다이스케가 도망친 후 돈돈 다리를 건너가 유키토를 공격해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범행 후 다리를 건너 고개 길로 돌아가, [옆길 B]를 내려가 [지류 A]의 나무 다리를 건너는 루트로, 오후 3시 5분에 마을 광장에 돌아왔다.
○동기는 복수. 전날, 아들 카가 '금단의 계곡'에 갔다가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잔혹한 소년 유키토의 짓이었다. 사키의 바지에 묻은 빨간 손자국은 그때의 피에 의한 것이었다.
[끝]
---

"이게 끝이야?"
순간적으로 아연한 후, 나는 물었다. U군은 씨익 웃으며 "네, 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잠깐만, 그건 아니지 않나."
나는 본의 아니게 큰 소리를 냈다. U군은 태연하게,
"왜죠?"
라고 되물었다.
"왜긴 왜야, 이건 전혀 해결이 안 됐잖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역시 조금 불친절했나."
"불친절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테이블에 몸을 기울여 따졌다.
"첫째로 말이지, 다리가 부서진 후 남은 로프는, 작은 초등학생인 유키토의 몸무게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구. 지문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어. 그런 로프를, 어떻게 어른인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던 거야? 거리는 20미터나 된다고.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강하고, 로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어. 가령 엘러리가 난쟁이고, 또 줄타기의 명인이었다 하더라도, 이 로프를 건너는 건 무리였다고 생각하는데."
"음, 확실히. 그런데요…"
"그리고, 범행 후는 ①의 루트를 통해 마을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린타로에게 들켰을 거라고.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쓰여 있었잖아. 그건 거짓말이었던 건가."
"그건 아야츠지 씨의 오해입니다."
U군은 단호히 말했다.
"사실,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로, 도중에 타케마루가 두 번이나 심하게 짖었다고 했죠. 타케마루는 자기들 앞을 지나가는 수상한 자를 알아차린 거예요. 그래서 짖은 겁니다."
"그럼, 역시 범인 이외의 등장인물의 말에 '거짓'이 있는 거잖아."
"아니에요. 왜냐면, 린타로는 이렇게 증언했잖아요. '그 다리를 건넌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엘러리를 보지 못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U군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와 나는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다른 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부서진 돈돈다리를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인데요."
U군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아니고 줄타기 명인도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남아 있던 로프 한 줄로 계곡을 건널 수 있었던 겁니다. 아주 쉽게요."
"그런…"
나는 산소를 찾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설마, M** 마을이 닌자의 숨은 마을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런건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설령 닌자라 하더라도, 미군의 특수 공작 부대라 하더라도, 이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도전'에 주석을 단 대로, 그런 도구는 여기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라고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해, 나는 불안하게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U군도 자신의 담배(같은 세븐스타)를 물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는 말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줄타기 명인도 닌자도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유키토의 다잉 메시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에…?"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을 멈추고, 나는 테이블 구석에 던져진 '문제편' 원고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유키토를 자신의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 같은 묘기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해요.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설마"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겨우 하나의 단어(설마)가 떠올랐다. 나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설마 그 '사…'라는 게, '사루(원숭이)'를 말하려고 한 건가?"
"정답입니다."
U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타케마루가 격하게 짖은 거예요. 옛날부터 개와 사이가 나쁜 동물이라고 하면 정해져 있잖아요. 타케마루와 엘러리는 문자 그대로 견원지간이었던 거죠."
잠시 멍해져서 중얼거리듯 "원숭이, 원숭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U군은 여전히 순진한 미소로 응시하며,
"처음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으로 돌아가 쓴 것'이라고.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이죠?"
"—사기다. 불공평해."
겨우 기운을 짜내어, 나는 항의했다. 그러나 U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M** 마을에 사는 일본 원숭이들을 '인간'이라고는,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나 '두 사람' 같은 표현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자'라는 한자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인간이 아닌 생물일 가능성을 암시하기 위해 '자'라고 굳이 히라가나로 표기했습니다.
애초에, 아야츠지 씨, 일본 본토의 산속에 포라든가 엘러리라든가 하는 이름의 인간들이 사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덧붙이자면, M** 마을의 M**는 'monkey'를, H** 대학의 H**는 'human'을 각각 암시한 이름입니다."
"원숭이를 '남자'나 '여자'라고 썼잖아."
"남자 = 인간 중, 수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수컷도 지칭.
여자 = 인간 중, 암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암컷도 지칭.
출처는 산세이도의 '신명해 국어사전'입니다. '코지엔'이나 '다이지린'이어도 상관없어요."
"젊은 여자들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원숭이가 그런 걸 할 리 없잖아."
"그건 물론 그루밍을 말하는 거예요. 원숭이의 털 손질. 아시죠."
"—더럽다. 비겁해."
"더럽다니요. 나이 많은 포우가 참나무 열매를 깨물고 있거나,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고 있는 등, 그들이 원숭이라는 복선을 몇 가지 깔아놓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조금 흥분한 나머지, 어조를 강하게 했다.
"하지만 말이야, 원래 원숭이가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규칙'이라든지 'X'라든지 '복수'라든지......"
그러자, U君은 "어머 어머"라는 듯 얇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전부 어디까지나 원숭이의 세계에서의 일이니까요. 인간과 대화를 나누진 않잖아요? 대사도 전부 캠프의 인간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중 괄호로 묶여 있죠. 게다가 고금을 통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부터 도룡뇽까지, 생각하는 동물도 있고 나름의 문화를 가진 동물도 있어요. 인간의 말을 이해하거나, 인간적인 감성으로 행동하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최근의 미스터리에서도 있었죠. 은퇴한 경찰견의 일인칭으로 쓰인 이야기. 미야베 미유키 씨의 '퍼펙트 블루'."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그런가요?"
나는 점점 더 흥분하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야."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U君은 간단히 "네, 맞아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라 '범원숭이 맞히기'죠. 그래서 그런 언어의 엄밀성을 중시해서, 작품 속에서도 아야츠지 씨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한 마디도 '범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어요. X 같은 진부한 미지수 기호를 끄집어낸 건 고육지책이었어요. '문제편'의 체크, 해 보실래요?"
"........"
"꽤나 고심했어요, 그 부분은. 아야츠지 씨라면 분명 그 고심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불쾌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래서 아마추어 학생은 곤란하다......라고 마음속으로 독을 품으며, 심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대로 침묵하고 있자,
"저기, 텔레비전 켜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U君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러게."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이상하게 밝고 씩씩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U君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쩐지 지금 막, 시계의 바늘이 오전 0시를 지난 모양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이다.
브라운관 속에서는, 익숙한 연예인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축하해, 축하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화면의 한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원숭이잖아."
어째서 U君이 굳이 오늘 밤을 선택해서 나를 찾아왔는지. 하필이면 섣달그믐의 이런 늦은 시간에, 추운 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도 연출("복선"이라고 그는 말할지도 모르겠지만)의 하나였던 것이다. 내가 이 '범원숭이 맞히기'를 다 읽을 즈음에 딱 새해가 밝는, 그런 타이밍을 그는 노렸다. 그래서 그렇게,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던 것인가.
1992년, 원숭이해의 시작――.
어깨에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 사라져가는 듯한 기분을 나는 맛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느끼던 화가 몹시 하찮게 느껴지고, 동시에 그런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져서......
나는 U君 쪽을 보았다. 하지만, 소파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검은 배낭도 가죽 장갑도, 크림색에 초록색 줄무늬가 들어간 헬멧도, 거기에는 없었다. "돈돈다리, 무너졌다"라고 표지에 크게 적힌 원고만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확실히 익숙한 얼굴. 잘 아는 이름. 무엇인지 무척 그립고, 그렇지만 조금 얄밉고, 그 천진난만함이 때로는 이상하게 짜증스럽고......
'아, 그렇구나'라고 나는 그제야 생각해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그건...... 아니, 이제 그만두자. 이 이상은 적지 않기로 하겠다.
남겨진 '돈돈다리, 무너졌다'의 원고에 살짝 손을 뻗으며, 다음에 그가 찾아오는 건 언제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2023/07/02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4. 잠자는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4. 잠자는 인형
"그건 귀찮은데."
마이코는 호시자와에게 말했다.
"뭐가 귀찮아?"
호시자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마이코도 굴복하지 않았다.
"첫째, 나는 데츠바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둘째, 아까 내가 온 것을 환영하지 않았잖아. 마지막으로, 나는 너무 바쁘다고."
"하지만 말이야. 데츠바가 죽었잖아. 그것도 너가 마침 왔을 때 말이야."
"내가 사신이라도 되는 건가?"
"너처럼 뚱뚱한 사신 따위가 어디있어. 혹시 너, 데츠바가 살해당할걸 알고 있었던 것 아니야?"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범인을 못 알아낸 모양이군."
호시자와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라키 경감도 곤란한 상황이겠네."
"맞아. 그래서 부탁하는데, 혹시 만났을 때 경감이 뭔가 물어본다면 알고 있는건 대답해주라고."
"내가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리고 데츠바가 정말로 죽었다면 나 역시도 큰일이야."
"마이코가? 왜지?"
"나라키 경감이 말해주지 않았어? 데츠바는 내 마지막 증인이었다고."
"증인?"
"내가 경찰서를 그만두게 된 경위를 알고 있지? 나한테 지폐를 주고 도망친 차 사건 말이야. 그 차가 해바라기 공예의 차라는 걸 알아냈어. 데츠바는 그 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고."
"그럼 지폐를 마이코에게 건네준 사람은 누구였지?"
"운석에 맞아 죽은 마와리 토모히로였어."
"잠깐만. 그러면 마이코의 증인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건가."
"그래서 곤란한 거야."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마이코가 서에 돌아오게 되면 누가 가장 곤란할까?"
"교도 씨인가. 그 시끄러운 여자가 또 돌아온다고."
"다른 사람은?"
"이 사람이야. 또 실직하게 될테니."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며 말했다. 호시자와도 묘한 표정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 동기는 너무 약하네. 예를 들어, 우다이 군 같은 경우는 어떨까?"
"우리 남편?"
"서에 마이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에 돌아가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마이코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네, 그거. 하지만 그렇다면 소우지의 죽음은 어떻게 해석할거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어."
호시자와는 처음으로 이빨을 드러냈다.
"나라키 경감에게 가 봐."
"그 대신 교환 조건을 걸지. 마사오를 만나게 해줄 수 있어?"
"그건 안 돼."
"안 된다고? 왜?"
호시자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 마사오는 중요한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야."
"설마? 지금 어디에 있는데?"
"방금 전까지 카오리의 방에서 계속 조사를 받고 있었어"
"도대체 왜 그녀가 중요한 용의자로 지목된 거지?"
호시자와는 힐끗 토시오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안심할 수 있어. 말하지 않으면 나라키 경감도 만나지 않을 거야. 이대로 돌아갈거라고."
"어쩔 수 없군. 마이코 상대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니까…... 데츠바는 자신의 방에서 죽어 있었어. 사인은 청산성 화합물에 의한 중독사. 감식 보고는 아직 없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의 틀림없어. 그리고 데츠바가 쓰러져 있던 책상 위에 약병이 놓여 있었는데, 그건 마사오가 주었던 약이었어."
"그렇다고 해서 마사오가 독약을 넣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토시오가 항의했다.
"글쎄, 끝까지 들어봐. 그 약병 안에 독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마사오밖에 없어."
"그럼 그 약병 안에 독약 캡슐이 섞여 있었단 말이야?"
"그 약병이라고? 그럼 마이코는 그 약병을 알고 있는 건가?"
"토모히로의 철야 당시, 데츠바가 불편하다고 했었지. 마사오가 약은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복용하고 있느냐고 묻자, 데츠바는 매일 가지고 다니면서 아침마다 제대로 복용하고 있다고 대답하며 약병을 꺼내 보였어. 빨간 라벨이 붙어있었는데, 라벨 가장자리는 벗겨져 있었어."
"그건 중요한 증언이 될 거야. 그걸 본 사람이 또 있어? 그 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누구였어?"
"그때 그 방에 있던 사람은 소우지, 카오리........"
"모두 죽었어."
"그 약병이라면 나도 보고 있었어요."
토시오가 입을 열었다.
"라벨의 가장자리가 말려서 뒤집혀 있었어요. 틀림없어요."
"그 약병이 데츠바가 죽은 현장에 있었던거야."
마이코가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약병에 독약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마사오밖에 없다는 거지?"
"여기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그 약병의 캡슐에는 전부 독이 섞여 있었어."
"전부 다…….?"
마이코는 토시오와 눈을 마주쳤다. 의외의 일이었다.
"한 알도 빠짐없이?"
"그래, 한 알도 남김없이. 당연히 자살은 아니야. 자살을 하려면 모든 캡슐에 독약을 넣고 그 중에서 한 알만 마시는 짓은 하지 않을테니."
"데츠바는 정말 그 캡슐 독을 마신게 맞아? 다른 음식에 섞여 있던건 아니야?"
"아니야. 시체를 해부하면 녹아내린 캡슐도 발견될 거야. 약병이 마이코가 본 것이라면, 약병을 범인이 준비한 독약병과 바꿔치기한 것이 아니라 캡슐만 바꿔치기한 것이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지? 데츠바가 계속 그 약을 먹고 있던건 확실해?"
마이코의 목소리가 숨을 헐떡거렸다.
"데츠바는 매일 아침마다 약을 빠뜨리지 않았어. 특히 어제 아침에는 데츠바가 그 약을 먹는 것을 동거하는 가정부가 목격했어."
"어제는 죽지 않았었으니........"
"그래. 캡슐이 바꿔치기 된 건 어제 데츠바가 약을 먹고 오늘 아침 데츠바가 약을 먹은 지 24시간 사이에 이루어진거야."
"그 동안 약병은 어디에 있었지?"
"데츠바의 주머니에 있었어."
"밤에는?"
"데츠바의 방이야. 데츠바 저택은 문단속이 엄격할 뿐 아니라, 데츠바는 두 자식이 죽고 난 뒤부터 더 신경질적으로 변했어. 밤은 물론 낮에도 필요 없는 문은 잠가두었어. 어제 나사 저택에 있었던 사람은 데츠바, 마사오, 가정부 세 사람밖에 없었어. 나사 저택을 드나든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낮에 누군가가 침입해서 나사 저택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나사 저택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불가능해. 게다가 데츠바는 잠을 잘 때 자기 방에 자물쇠를 잠그고 잤다고."
"자물쇠를?"
"마이코도 가 봤으니까 알겠지? 데츠바의 방은 들어가면 서양식 응접실이고, 그 안쪽에 일본식 거실이 있어. 방의 출입은 응접실 문으로만 가능한데, 그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었어."
"열쇠는? 찾았어?"
"데츠바 주머니에 있었어."
"그럼 마사오라도 데츠바의 약병 속 캡슐을 갈아 끼울 수는 없잖아."
"나라키 경감은 마사오라면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
"그건 왜지?"
"데츠바는 마사오를 신뢰하고 있었어. 그래서 마사오라면 데츠바에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군."
"그리고 마사오가 데츠바의 주머니에서 캡슐만 빼냈다는 거지?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다만 마사오라면 어떻게든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하더라고. 말로 잘 다독여서 말이야."
"무슨 말?"
"그건 모르지."
"무슨 말을 해야 데츠바를 속일 수 있었을까?"
마이코는 팔짱을 끼고 미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던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마이코는 동굴을 통과하면 데츠바의 방에 몰래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데츠바의 약병의 캡슐을 바꾼 인간, 그것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저녁에 데츠바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누구야?"
"가정부야. 이부자리를 깔고 데츠바를 방에 들여보냈고, 데츠바가 자물쇠를 내리는 소리도 들었다는군."
"아침은?"
"평소와 똑같아. 아침을 마사오와 함께 먹고 방으로 돌아갔어. 그게 마지막이었어."
"오늘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들이 이곳에 모이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간부들이 모인 건 9시 반부터 10시까지였어. 그때는 이미 데츠바는 죽어 있었지."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은 결국 데츠바를 만나지 못했군?"
"그래. 시간이 되어도 데츠바는 좀처럼 방에서 나오지 않았어. 응답도 없었고. 마침 우리도 왔던 터라, 그 자리에서 자물쇠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지."
"데츠바가 죽어있었군."
마이코와 토시오가 데츠바의 방에서 동굴로 돌아온 직후였을 것이다.
"데츠바는 오늘 해바라기 공예의 간부들을 모아놓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
"그건 아무도 모르지. ...... 이봐, 마이코. 이제 그만하자. 같이 가자고."
호시자와가 손짓했지만 마이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약병의 캡슐에 대해서."
마이코는 겨우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독을 넣은 캡슐을 오래 전에 데츠바의 약병 속에 섞어 놓은 게 아닐까 싶어서."
"마사오를 감싸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왜?"
"왜라고? 마이코답지 않네. 데츠바의 약병 속 캡슐에는 모두 독약이 섞여 있었어. 그리고 데츠바는 어제까지 살아있었고. 마이코의 말대로 이전에 독 캡슐이 투입되어 있었다면, 범인이 약병 중 몇 개의 약병에 독을 섞어 놓았는데 데츠바는 그 다음 날부터 일반 캡슐만 골라 먹다가 일반 캡슐이 다 떨어진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독약 캡슐에 손을 댔다는거라고."
"그건 안 되나?"
"불가능하지. 데츠바는 일일이 캡슐을 고르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어. 누구나 하듯 약을 먹었어. 약병을 기울여 우연히 굴러나온 한 알을 집어 입에 넣는 거지. 가정부도 그렇게 증언했어.”
"어제까지만 해도 우연히 평범한 캡슐만 데츠바의 손바닥 위로 굴러나왔다는 것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잖아."
"절대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낮을거야. 누가 그런 걸 믿겠어?"
호시자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사관들은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라키 경감의 표정이 달라져있었다. 수사 도중 그의 눈앞에서 사람이 또, 세명이나 살해당한 것이다. 이런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임에 틀림없다.
나라키는 끈질기게 질문을 반복했지만, 토시오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미로의 중심부에 동굴이 있다는건 굳이 숨길 필요가 없었다. 나라키는 동굴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질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라키가 알고싶어한건 마이코가 자주 나사 저택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였다. 토시오는 자신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무것도 모른다고만 대답했다.
토시오를 대신해 마이코가 불려갔다. 마이코도 나라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이코가 카오리의 아틀리에에 배치된 수사본부에 들어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이코는 돌아와서 말했다,
"생각보다 마사오에 대한 혐의가 짙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마사오 씨는 어디 계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데츠바의 응접실인 것 같아. 감시를 받고 있다는군. 만나게 해달라고 했지만, 어림 반푼어치도 없었어."
"이제 어떻게 할까요?"
"요코누마 씨에게 보고서를 전달해야 해. 오늘 중으로 전달하기로 약속했거든. 대동 흥신소에 가야 해."
마사오를 만나지 못해 아쉬웠다. 곁에 있으면서도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움마저 느껴졌다.
"마사오 씨는 어떻게 될까요?"
"저런 상태라면 구금될지도 모르겠어."
"우다이 씨는 정말 마사오 씨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세요?"
"...... 데츠바가 죽어 있는 상태가 저렇다고 가정하면 말이야."
토시오는 침착함을 잃었다. 마사오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은 어느새 토시오의 손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구름이 낮아지고 있었다. 회색 하늘에 검은색 굵은 구름이 두 줄로, 옆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기온도 올라가는 것 같았다. …..마사오가 데츠바의 캡슐에 독을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마사오가 위험에 처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사 저택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야, 뭐 하는 거야?"
마이코가 고개를 돌렸다. 토시오는 조용히 땅을 내려다보았다.
마이코는 토시오의 발밑을 보았다. 토시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마이코는 시선을 옮겼다.
"어?"
마이코는 한 점을 보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나사 저택을 크게 감싸고 있는 굵은 담쟁이덩굴의 뿌리 부근이었다.
"카츠 군, 보고 있어?"
토시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코가 무엇을 보고 있다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잡초 속에 작은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이코는 몸을 숙여 눈을 땅에 가까이 가져갔다. 토시오는 별다른 관심 없이 그 빛나는 물체를 보았다.
"주사기네…… 아직 새 것이야."
마이코가 말했다.
그것은 가느다란 바늘이 빛나는 작은 주사기가 틀림없었다. 3분의 1 정도 액체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왜 주사기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조금, 곤란하네."
마이코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이런 걸 찾았다고 하면 또 발이 묶일 것 같아."
"제가 발견한 걸로 하고 형사에게 설명할게요."
그때의 토시오는 그저 나사 저택에 남아있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괜찮을까? 아니, 내가 남아 있을게. 너는 서류를 요코누마 씨에게 전달해줘. 전달만 해 주면 돼."
그래도 좋았다. 마이코와 헤어져 혼자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코는 에그의 문을 열고 서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전달하고 나면 사무실에 들러."
마이코는 하늘을 바라보며 에그에서 검은색 코트를 꺼냈고, 가방 속 양초와 손전등은 좌석에 올려 놓았다.
경관이 문에 매단 밧줄을 풀었다. 토시오는 에그를 몰고 밖으로 나갔다. 마이코는 경관에게 무언가 말을 걸고 있었다.
토시오는 도로로 나가자 속도를 줄이고 나사 저택 뒤편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잡목 숲 속에 좁은 길이 있었다. 에그를 거칠게 몰고 나아갔다.
미로 바로 뒤에 차를 세운 토시오는 에그에서 손전등을 꺼내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풀숲을 헤쳐 나가자 미로가 보였다. 인적은 없었다. 경찰은 미로 안쪽이 나사 저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듯 했다. 토시오는 미로 입구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미로의 길은 이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중심부에 도착한 토시오는 마이코와 마찬가지로 울타리 아래를 살폈다. 곧 레버가 손에 닿았다. 세게 당기자 반응이 있었고, 중앙에 놓인 돌 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시오는 몸을 날려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미로에 들어갔을 때와 달리, 섬뜩함이나 공포감은 사라졌다. 손전등과 기억만 의지할 뿐이었다. 가파른 돌계단에서 좁은 통로를 지나 폭포가 있는 석실을 통해 동굴에서 가장 넓은 E 지점에 이르자 토시오의 심장 박동은 이미 빨라져 있었다.
마지막 돌계단을 숨을 몰아쉬며 올라서려고 할 때였다. 돌계단 위에 빛이 보였다. 토시오는 본능적으로 전등을 끄고 바위 그늘에 몸을 숨겼다.
빛은 천천히 움직이면서 돌계단을 내려왔다. 전등을 든 사람은 마사오였다.
하지만 그것이 마사오라는 사실을 알고도 의심이나 놀라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하면 마사오를 놀라게 하지 않고 자신을 알릴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조용히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마사오가 돌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토시오는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 부인"
전등 불빛이 멈췄다. 토시오는 계속 말했다.
"저입니다. 카츠입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토시오는 전등을 켜고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마사오는 긴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한 손으로 손전등을 들고 토시오를 향해 서 있었다. 마사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몸을 움츠리고 있는 기색은 알 수 있었다.
"도와주러 왔습니다."
토시오는 계속 말하면서 다가갔다. 마사오는 뒤로 물러났다. 토시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토시오가 조용히 손전등을 비추자 마사오는 거부하는 듯 얼굴을 돌렸다.
토시오는 옆으로 다가가 손전등을 들고 있는 마사오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저항하는 마사오의 힘은 너무 약했다.
"안심하고, 나를 따라오세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나직히 말했다.
"난폭한 짓을 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해요."
"저를 어떻게 하려는거죠?"
마사오는 겁에 질린 눈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마사오의 이런 눈빛을 전에는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그의 눈동자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부인, 저를 믿어주세요. 저는 당신의 편입니다."
"내 편? 그게 무슨 뜻이죠?"
마사오의 눈빛에 다소 침착함이 돌아온 것 같았다.
"이쪽으로 가면 미로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어요."
토시오는 손전등을 검은 구멍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알아요."
이 말은 조금 의외였다.
"안다고요?"
"토모히로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토모히로에게 들었다고?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나가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소름끼쳐서 안쪽까지 들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카츠 씨는 왜?"
그것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부인, 저를 싫어하세요?"
싫다고 대답해도 좋았다. 하지만 한 번쯤은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싫다느니 뭐니 하는 것은 ......"
마사오는 토시오의 단호한 말투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럼 저를 따라 오세요. 길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려고요?"
"동굴을 지나서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미로 끝에 차를 두고 왔어요. 저와 함께 도망치시죠."
"도망친다고요?"
"조금만 더 있으면 당신에 대한 체포영장이 나올 겁니다. 데츠바 씨를 살해한 범인으로 말입니다."
"데츠바를 내가 죽였다고요 ......"
마사오는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그럴까봐 혼자서 나사 저택을 빠져나온거 아닌가요?"
"아니요."
부정하는 마사오의 말에는 오히려 너무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토시오는 마사오의 손목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마사오는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마사오는 스타킹만 신고 있었다. 어떻게든 급히 도망칠 생각 뿐이었구나, 라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좁은 동굴에 들어가자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잡은 손의 촉감과 숨소리가 들릴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시오는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폭포야……. 이상하네요."
폭포의 석실에 들어서자 마사오가 작게 외쳤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소리였다.
"다리는 괜찮나요?"
토시오는 바위가 많은 길에서 말했다.
"괜찮아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마사오는 몇 번이나 걸려 넘어져 토시오의 가슴에 쓰러질 뻔했다. 출구가 가까워질 무렵에 두 사람은 거의 서로를 끌어안은 채였다.
미로 한가운데로 나오자 안개 같은 비가 얼굴에 내려앉았다.
"비가 오네요."
마사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시오는 아까부터 마사오의 무심한 표정이 신경 쓰였다. 두려움이 사라진 마사오의 표정에는 천진난만함이 묻어났다.
동굴 입구를 닫고 토시오는 마사오의 손을 잡으려 했다. 보니 손목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너무 심하게 움켜쥐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팠나요?"
토시오는 마사오의 얼굴을 보았다.
"아니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으며 꽉 쥐고 있던 손전등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미로 출구에서 나사 저택을 둘러보았다.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몸을 움츠리고 미로 뒤를 돌아보았다.
"또 이 차로 도와주시는군요."
마사오는 길에 놓인 에그를 보고 말했다. 뒷좌석에는 마이코의 샌들이 놓여 있었다. 토시오는 샌들을 마사오의 발에 신겨주었다.
차를 도로로 올려놓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푸세요."
토시오가 말했다. 마사오는 뒤로 묶은 머리를 풀었다.
"그리고 립스틱을 짙게 바르세요."
마사오는 가방을 열어 립스틱을 짙게 칠했다.
"뒷좌석에 우다이 씨의 코트가 있으니 입어보세요."
마사오는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여 마이코의 오렌지색 코트를 입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사오의 행색이 많이 달라졌다.
국도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했다. 차량 검문때문인 것 같다고 토시오는 직감했다. 토시오는 에그를 길가에 세워두고 차에서 내린 뒤, 진흙투성이 옷 위에 자신의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다시 국도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예감이 맞았다. 검문이 있었지만, 경찰관들은 소형차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마사오가 물었다.
"일단 슈젠지로 가죠."
토시오의 마음가짐은 정해져 있었다.
"슈젠지…… 여행 같네요."
마사오가 말했다.
"체육관에서 알게 된 친구가 있어요.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거리로 나가자 마사오가 신고 있는 마이코의 샌들이 눈에 띄었다. 토시오는 터미널 백화점에 들어갔다.
"돈이라면 있어요."
마사오는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이상하게도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갖고 싶어요."
마사오는 화려한 빨간 스카프를 보고 말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6/27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초창기 단편집. 1990년에 발표되었던 <<성>>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1981년부터 1985년 사이에 발표되었기에, 초창기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이 BS 망가 야화에서 소개되었을 정도니까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방주가 오던 날
  2. 난파선
  3. 진수의 숲
  4.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5. 늪의 아이
  6. 유사(流砂)
  7. 쿠로이시지마(黑石島) 살인사건
  8. 성(城)
  9. 파란 무리
  10. 그림자의 거리
이 중 앞의 두 편은 아주 짤막한 가벼운 개그물로 언급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크리쳐 호러(?)물 <<진수의 숲>>, <<늪의 아이들>>은 <<자선단편집>>에 수록되었던 작품이고요 (궁금하신 분들은 이전 리뷰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 작품들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
자신이 외계인이며 UFO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고 말하는 동급생 후리오와 어울리다가, 약간의 차원 뒤틀림(?)을 경험한다는 내용.
작가의 말에 따르면, 폴 사이먼의 노래 (Me and Julio Down by the Schoolyard)에서 제목을 따 와 만들었다고 합니다. 내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요. 


그런데 가사를 잠깐 찾아보니 '훌리오와 내가 교정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는데 엄마가 뭔가 법에 위배되는걸 봤고, 그래서 나와 훌리오를 잡으면 구치소에 집어 넣는다'는 내용이더라고요. 정확한 의미는 영 알 수가 없는데 (폴 사이먼 본인도 엄마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변했답니다.), 이런 노래의 모호함이 만화의 결말과 일치한다는게 재미있습니다. 후리오가 UFO를 타고 갔는지, 그냥 버스를 타고 평범하게 떠났는지 제대로 드러내지 않고 여운을 남기니까요.
보는 시각에 따라서 일상 속에서 약간의 뒤틀림을 보여주는 일상계 SF물, 아니면 평범하지만 조금은 독특한 성장기로 볼 수 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SF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더 폴 사이먼, 그리고 모로호시 다이지로 스타일에 가까우니까요. 흥겨운 노래하고도 잘 어울리고요. 기껏 상상력을 발휘했는데 그냥 버스타고 이사간거라면 너무 슬프잖아요.
대표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유사>>
주인공과 친구들은 사막과 엄청난 유사 폭포 탓에 감옥과 다름없는, 미래가 없는 별 볼일없는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분투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 모두가 합심해서 그들을 막아서는데....

SF의 탈을 쓰고 있기는 하나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하고 위기에는 전혀 대응하지 않으려는, 그리고 젊은 청춘의 뒷다리만 잡는 기성 세대를 풍자하는 작품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1980년대는 모로호시 다이지로도 기성세대보다는 청년에 가까운 나이라 그릴 수 있었겠지요? 사력을 다하는 청춘을 기성 세대가 뒤쫓는 결말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는 낡은 소재와 전개라는건 단점입니다. 불합리한 현실을 탈출하려고 애쓰는 청춘 이야기는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예를 들어, 이런 마을을 벗어나기 위해 불법적인 범죄를 저지르면? <<총몽 (알리타)>>이 되는거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쿠로이시지마 살인사건>>
외딴 섬에서 젊은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어 형사가 파견되었고, 섬 사람 누군가의 딸로 여겨져 장례식이 열렸다. 그런데 장례식 와중에, 그 딸이 살아있다는게 밝혀진다.
다른 사람이 피해자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그녀 역시 살아있었고, 바닷물의 영향으로 사체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형사에게 없었던 일로 하자며 반 쯤은 협박하듯이 부탁하는데....


우리나라 모 섬에서 일어났던 범죄가 떠오르는 작품.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흔합니다.
그런데 전형적인 모로호시 다이지로 그림체인데다가, 전개 방식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호러물스타일이라서 기묘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개그 콘서트 꽁트를 정극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하는 느낌이랄까요? <<유사>>처럼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성 세대에 대한 풍자로 볼 수도 있을테고요.
흔한 이야기인데 여러모로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기묘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성>>
대기업에 서류 하나를 전해주러 왔던 사원의 출장은 서류에 관계된 회사간의 복잡한 정리, 대기업의 인사 이동 등으로 장기화되고 말았다. 팩스로 지시를 기다리는 자택 대기 명령을 받은 뒤,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죽었을 때 지시가 전달되었다. 일반 사원들은 1층 이상 올라가보는게 꿈이라는 본사 건물 15층으로 오라는 지시였다....

대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드라마.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했습니다. 결말도 다소 뜬금없었고요. 왜 마지막에 15층으로 부른 걸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란 무리>>
장기 매매가 일반화된 미래. 하층민은 장기를 팔고 인공 장기로 교체하여 삶을 이어나간다. 판매된 장기는 하나로 모아져 부자 노인의 뇌를 이식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알고보니 장기를 팔아 인공 장기로 교체하는건 단순한 빈민 대책으로 무의미한 시술이었고, 이 모든건 권력자들이 권력을 쥐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80년대 유행했던 전형적인 디스토피아 SF물.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이야기였습니다. 기묘한 세포 덩어리로 피해자들을 변질시킨다는 결말에서 모로호시 다이지로 특유의 이형 생태 결합을 선보이기는 하는데, 장기 매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서 이야기에 잘 녹아들지 못하더군요.  <<소일런트 그린>>정도의 충격적인 반전도 아니었고요. 지금 시점에서 다시 언급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자의 도시>>
한 초등학생이 모르는 아이에게 이끌려 낯선 골목길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과 건물을 잡아먹었다. 꿈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잡아먹혔던 아이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잡아먹힌 학원도 불에 타 버렸다.
괴물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걸 깨달은 아이는 괴물에게 모델건을 쏘고 기절했다. 그리고 정신이 든 뒤, 싫은 일이 생길 때 마다 모르는 골목길로 항하게 되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영향을 주었다는걸로 유명한 작품. 아래의 장면 덕분일겁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소 뻔했습니다. 이세계에서 경험한 일이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많으니까요. <<앨리스 죽이기>>가 떠오르네요. 때문에 지금 읽기에는 진부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화로는 작품의 분위기를 잘 시각화하지 못하고 있고요.

하지만 초등학생이 주인공이고 진짜 악당 - 싫어하는걸 없애버리는데 주저함이 없으니 - 이라는 점은 특이했습니다. 이 점 하나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6/16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3 나사 저택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13 나사 저택
"건드리지 마!"
마이코는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건드릴 리 없었다. 토시오는 다다미방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이코는 데츠바 옆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데츠바의 양손 손가락이 비틀려 있었다. 죽기 직전에 데츠바는 어떤 고통에 시달렸을까. 의복 가슴 부분의 흐트러짐도 고통의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방금 전에 죽었네."
마이코는 토사물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았다.
검은 칠을 한 책상에는 주홍색 쟁반이 놓여 있고, 물이 반쯤 담긴 컵이 놓여 있었다. 쟁반 옆에는 뚜껑이 잘 닫힌 작은 빨간 병이 놓여 있었다. 낯익은 병이었다. 병 바닥에는 여전히 몇 개의 빨간 캡슐이 들어 있었다.
마이코는 방을 둘러보았다. 방의 가구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흐트러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미로로 돌아가자. 누군가 발견하면 귀찮아질테니까."
마이코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앉아있던 다다미 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뒤, 다다미방 안쪽으로 돌아갔다. 낡은 도구들이 쌓여 있는 방에 들어서자 마이코는 평소의 그녀와는 다르게,
"젠장 ...... 드디어 나의 마지막 증인까지 죽여버렸군……"
라는 말을 내뱉었다.

"데츠바는 어떻게 죽었습니까?"
동굴의 세 갈래 길, 마이코가 말한 E 지점으로 돌아왔을 때, 토시오는 물었다.
마이코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았다. 그것은 데츠바의 죽음을 목격한 뒤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의 행동을 위해 몸을 추스르기 위한 것 같았다.
"자살이 아니야. 독약을 먹은 거야."
마이코는 그렇게 단정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병을 기억하겠지? 그건 마사오가 데츠바를 위해 준 약이었어. 만약 데츠바가 자살했다면 죽기 직전에 그 병을 놓아두었을리 없어."
"그렇군요."
"데츠바는 아침 식사 후 늘 그렇듯이 그 약을 먹었을거야."
"식사에 독극물이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토시오는 마사오가 준 약에 독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지. 식사에 독이 들어있었다면 당연히 식사 중에 쓰러졌을테니까."
"식사를 누군가가 치웠을 수도 있잖아요?"
"안 돼. 책상 위의 토사물은 책상이 깨끗하게 치워진 상태에서 토한 것이니까."
"컵의 물 속에 독극물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마이코는 멍하니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책상 위에 약병이 있는 이상, 독극물은 그 약에 섞여 있었다고 생각하는게 자연스럽지 않겠어?"
"그건 그렇긴 하지만 ......"
"당신은 마사오가 데츠바에게 건네준 약병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분명 누군가가 똑같은 캡슐에 독을 담아서, 그 약병과 똑같은 약병에 담아서 바꿔치기 한 것이겠죠."
"하지만 데츠바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신경을 많이 썼을 거야. 최근에 가족이 네 명이나 죽었으니까. 데츠바가 가지고 있는 약병을 바꿔치기 할 틈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은걸."
"......독극물 캡슐을 하나만 준비해서 데츠바의 약병에 몰래 넣었다는건 어떻습니까? 카오리 씨와 소우지가 죽기 전에요. 데츠바가 아직 자기들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 말입니다."
"호오......."
마이코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꽤나 그럴싸한 말을 하는군. 맞아. 독약 캡슐을 하나만 넣었다면 가능성은 있어. 책상 위에 있던 약병 안에 얼마나 많은 캡슐이 남아있었을까?"
"열 알도 채 안 됐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 그 약병이 캡슐로 가득 차면 몇 알 정도 들어갔을까?"
"오십 알은 들어가겠지요."
"데츠바는 그 캡슐을 매일 아침 한 알씩 먹는 습관이 있었어. 따라서 범인이 독극물을 넣었다면 거의 40일 전에 넣었다는 뜻이지. 그렇다면, 역시 가장 쉽게 독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마사오야"
"독은 무엇일까요?"
"청산성 독극물인 것 같더군...... 마사오는 병원에 근무한 적이 있었지?"
"독극물은 꼭 병원이 아니어도 구할 수 있어요. 청산가리라면 도금에도 쓰이지 않나요? 해바라기 공예는 작지만 도금 공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
마이코는 손전등으로 동굴의 바위 하나하나를 비추고 있었다. 마치 아이가 거울로 햇빛과 놀고 있는 것처럼 전등 불빛이 춤을 추었다.
"마사오 씨는 동기가 없어요."
토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
마이코는 무심코 말했다.
"데츠바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마와리 가문의 유산은 마사오의 것이야."
"유산이라니........"
"있어."
마이코는 전등을 크게 움직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건, 제니야 고헤에가 덴포 14년에 오노 벤키치에게 상담했던게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야."
"제니야 고헤에가 ......"
토시오는 마이코의 말 뜻을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오노 벤키치의 츠루슈일록 첫머리에 적혀 있었잖아.
‘…. 비, 카네이시로 감. 회의 후 심사숙고 끝에 승인을 미룸.’
카네이시는 당연히 고헤에의 집이야. 비가 오든 말든 벤키치는 카네이시에 갔어. 그만큼 중요한 용건이었음을 알 수 있지. 카네이시에서 은밀한 회의가 있었고, 고헤에는 중요한 일을 벤키치에게 부탁했던거야. 하지만 쉽게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고심 끝에 승낙을 미루었고."
"그게 뭐였을까요?"
"다음 날들의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 ‘하루 종일 고민하다.’ 다음 날은 ‘도면은 진전이 없다….. ‘라고. 너무 큰 일이라서 도면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던거야. 그리고 다음 날, 구우에몬이 모리타치노치토세를 가지고 찾아왔어.…..구우에몬에게 맡길까, 벤키치는 고민했지. 또 다음 날, 맑은 날씨가 계속되고 통풍이 회복된 우타는 역립인형의 의상을 만들었어. 이 기록은 구우에몬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한 벤키치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아."
"그 구우에몬이란?"
"마와리 사쿠조야."
마이코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람은 가명을 지을 때 아예 엉뚱한 이름으로 짓지는 않는 법이야. 그때 스승 벤키치는 칼로 베지 못하는 말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지. ……..말을 베는 마와리 사쿠조, 어때? 딱 맞는 이름 아니야?"
"............"
"구우에몬은 그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번을 떠나 도망쳐 버렸어. 명목상으로는 시녀에게 손을 댔다고 하지만, 꾸며낸 이야기야. 구우에몬은 가나자와를 떠나 오나와로 옮겨왔지."
"사쿠조의 아내는 오나와 태생이었어요."
"거기서 비롯되었겠지. 구우에몬은 생계를 위해 가나자와에서 배운 기우라기리코보시(起上り小法師)와 쌀을 먹는 쥐에서 힌트를 얻은 키츠키(きつつき)를 만들기 시작했어. 카라쿠리를 배웠던 만큼, 섬세한 일에 능했을테고. ……생활이 안정된 후, 구우에몬은 가게 이름을 츠루슈도(鶴寿堂)로 짓고, 아이에게도 도키치(東吉)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 벤키치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지 않아?"
"그렇다면 구우에몬이 물려받은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제니야 고헤에의 입장이 되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
"...... 모르겠습니다."
"이봐. 가가번의 중신 오쿠무라 히데미가 죽기 전, 고헤에는 절정의 시기였어. 나이는 칠십. 하지만 가가번에서 반대파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고, 세간의 시기와 질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 오히려 더 강하게 느꼈을거야. 지금 손을 잡고 있는 히데미도 병이 들었다, 반대파가 정권을 잡으면 내일은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요도야 진고로(淀屋辰五郎)의 사례도 있다, 사소한 일로 상인이 재산을 몰수당한 사례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시대였어. 자신을 지키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이코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말했다,
"재산의 일부를 은닉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았을까?"
토시오는 생각에 잠겼다. 재산의 은닉.......그래, 그것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도 가끔 금화를 담은 항아리가 발굴되는 경우가 있다. 재산을 은닉하는 것은 당시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식적인 일임에 틀림없었다.
"제니야 고헤에의 자산이 삼백만 양이었다니 10%만 해도 삼십만 양이야. 천량상자가 삼백 개나 된다고."
마이코는 회계업자처럼 계산을 했다.
"고베에가 아무리 해운업자였더라도 그런 막대한 돈을 다른 번으로 쉽게 옮길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노 벤키치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니었을까? 벤키치는 젠고 재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두뇌였어. 하지만 벤키치는 거절했어. 벤키치의 은둔 생활을 보면 상상이 가. 벤키치는 지금까지 없던 가라쿠리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번주의 눈을 피해 재산을 은닉하는 일은 꺼려했어. 너무 세속적이고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벤키치는 고민 끝에 모든 것을 구우에몬에게 맡기기로 결심했어."

"구우에몬이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랬다고 생각해. 무엇보다도 벤키치에게 푹 빠져 있었고, 동시에 제니야 고헤에의 신봉자였다고 생각되는군. 그렇지 않다면 벤키치가 구우에몬에게 상담할리도, 고헤에가 일을 맡길리도 없었을테니까."
"구우에몬은 그 일에 성공했군요?"
"그렇지. 구우에몬은 시녀에게 손을 댔다는 이유로 탈번 후 가나자와를 떠났지. 벤키치는 그 때 마지막 작별의 선물로 역립 인형을 주었을테고. 그리고 어떤 계획에 의해 고헤에의 재산의 일부가 이 오노와에 숨겨졌던거지. 장소는 이 동굴 안이 틀림없을거야."
"그 재산은 아직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구우에몬은 정직한 사람이었어. 고베에의 재산을 맡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스스로 장난감을 만드는 일을 시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그러던 중 가가 번에서는 결국 집정관 히데미가 죽어버려서 반대파가 득세하게 되었어. 고헤에는 공식어선의 지위를 빼앗긴 뒤, 하호쿠가타 매립공사에 착수했다가 투독사건의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했고, 제니야 가문은 순식간에 몰락했어. 구우에몬은 가슴이 아팠을거야. 유산을 제니야에게 돌려주어야 했는데 불가능해져버렸으니까. 결국 그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병으로 죽고 말았지."
"그 사실을 자신의 아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물론, 말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아들 도키치는 한, 두 가지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어."
"마와리 호도말씀이시죠?"
"그래. 도키치는 자신의 이름도 버린 뒤 호도라 자칭하고, 츠루슈도를 없애고 해바라기 공예라 했지. 문장까지도 바꾸었고. 이유는 하나야. 가나자와와의 인연을 끊고 고헤에의 재산을 자기가 차지하려고 했던거야."
마이코는 손전등을 크게 움직였다.
"호도는 요코하마의 도박판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하지만, 그 자금은 고헤에의 재산 중 일부였을거야. 하지만 호도는 상술에 능한 사람이었어. 은닉 재산의 대부분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을 거야."
마이코는 계속했다,
"호도는 요코하마를 떠나 오노와로 이주했어. 물론 동굴에 재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말이야. 그리고 기괴한 나사 저택을 지었어. 장난감을 싫어하는 호도가 이런 건물을 지은건 아까 말했듯이 이 저택에 미로 같은 것이 있어도 부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야. 그 미로는 지하 동굴의 지도이자 입구였고. 평범한 건물에 미로 따위를 만든다면, 미로는 금방 관심의 대상이 되었겠지. 그러면 미로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동굴도 발견되고 말았을테니까."
"나사 저택 전체가 입구를 숨기기 위한 하나의 커다란 미로였던 셈이군요."
"그리고 호도의 언행도 생각해보면 마찬가지야. 호도는 기행이 많은 남자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격 역시 의도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꾸민 것이었을거야. 무슨 일이 있어서 숨겨진 재산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동굴 속에 재산을 숨겨놓는건 과연 호도가 할만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위해서. 호도가 나사 저택을 만든 진짜 속뜻은 바로 이것이야."
"호도는 이 사실을 아들에게 말하지 않았던걸까요?"
"아마도? 미로로 그린 지도만 남겼지. 설령 아들에게 전했을지 몰라도 데츠바에게는 전해지지 않았어. 데츠바는 전쟁 후 가난을 경험했잖아? 만약 알았더라면 당연히 은닉 재산을 사용했을 거야. 그리고 둘러보니 이 동굴이 발견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인 것 같아."
"누가 발견했을까요? 토모히로, 아니면 소우지?"
"둘 다겠지. 소우지는 오노 벤키치의 역립 인형을 발견했어. 역립 인형은 데츠바의 다실 다다미방 안쪽 작은 방에 있었고........ 토모히로가 가나자와의 다카라다 노인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두 사람 뒤에 찍힌 소나무 숲의 모양이 카네이시의 소나무 숲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토모히로는 가나자와에 갔었군요"
"그렇다면 마사오도 당연히 제니야 고헤에의 은닉 재산에 대해 들었을거야. ...... 이제 가 봐야겠다."
마이코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동굴 밖으로 나오자 약한 햇살이 비췄지만,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눈에는 꽤나 눈부셨다.
마이코는 남은 양초와 손전등을 가방에 넣었다. 두 사람의 옷은 진흙투성이였다. 마이코는 진흙을 털어낸 뒤, 닫힌 담벼락 문 아래로 손을 뻗었다.
물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돌판이 조용히 동굴 입구를 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울타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며 미로의 문을 열었다.
"정말 잘 만들었어."
마이코는 오각형의 돌탁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울타리 사이로 몸을 넣었다.
미로를 걷던 중, 미로 입구에서 제복을 입은 경찰을 만났다. 두 사람의 모습을 쫓고 있던 순경이었다.
"어머, 마중 나왔어요?"
마이코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요, ......"
경찰관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길을 잃었어요. 출구를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게 ......"
"그건 곤란하네요. 아마 이쪽인 것 같은데요."
마이코는 순경과 자리를 바꾸어 먼저 나섰다.
미로를 빠져나와 소정 쪽으로 가니 호시자와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덕분에 좋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어요."
마이코가 지나가려고 하자,
"나라키 씨가 만나고 싶대요."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오호. 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구나."
"그런 게 아니야. 데츠바의 시체가 발견됐어. 이제는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수 없다고. 각오해."
마이코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1. 베이지 않는 말

2023/05/07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9. 역립(逆立)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전문가가 아니다보니 카라쿠리의 과거 등은 제대로 번역하기 힘드네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9. 역립(逆立) 인형
카오리가 아틀리에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캔버스, 이젤은 한쪽으로 치워졌고, 책상은 수사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밝지만 장식이 적은 방이라 그림과 화구가 없으면 수사관들이 어슬렁거려도 부자연스럽지 않았다.
"총소리를 들었을 때 어디에 있었지?"
눈가에 짙은 다크서클이 있는 경찰관이다. 현경본부 수사 제1과의 노련한 호시자와 형사였다. 마이코가 아직 쇼조와 결혼하지 않았을 때 같은 서에서 근무했고, 마이코의 술친구였다. 너무 마음이 잘 맞은 탓에, 두 사람 모두 결혼 대상으로 서로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호시자와는 나라키 경감보다 한 살 위었다. 나라키 때문에 호시자와가 연기 같은 존재가 된 것 같다고 마이코는 토시오에게 말했다.
"호시자와 군이 현경에 배치된 것은 분명 나라공 때문일 거야."
마이코는 아무래도 나라키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라키의 얼굴도 보였다. 변함없이 눈썹 사이에 깊은 세로 주름을 짓고 있었다.
토모히로와 토우이치의 연이은 사고사. 거기에 더해 카오리의 기이한 죽음. 당연히 경찰은 흥분 상태였다. 소우지의 신고로 즉시 여러 대의 경찰차가 도착했다. 나사 저택에는 수많은 수사관들이 긴급 배치되었다.
"미로 속에 있었어요."
토시오는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정자에서 쓰러졌을 때, 넘어지면서 뭔가에 부딪힌게 아닐까 생각했다.
"총소리는 어느 방향에서 났지?"
"모르겠습니다. 미로 속을 빙빙 돌고 있었기 때문에 방향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의 위치는 기억나지 않나요?"
"알 것 같아요. 저는 백묵으로 길을 표시하면서 가고 있었으니까요."
"그 위치에 서면 총소리가 들린 방향을 알 수 있을까요?."
"나중에 실제로 미로 안에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미로를 빠져나온 후에는?"
호시자와가 질문을 이어갔다.
"연못 주변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니 화단으로 나왔습니다. 저택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무슨 일인지 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연못 주변 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게 있다면 말해 주세요."
"아무것도요.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후로?"
"우다이 씨를 만났습니다."
호시자와는 마와리 저택의 약도를 보여주었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만났던 곳과 소우지가 서 있던 곳, 세 사람이 정자까지 달려온 경로를 표시했다. 그리고 카오리가 쓰러진 상태, 마사오가 서 있던 위치 등을 설명했다.
"당신은 카오리 씨가 쓰러진 정자에서 뭐든 떨어뜨린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 떨어뜨린 물건? 글쎄요........"
"시체를 본 게 처음인가요?"
호시자와의 말에는 가벼운 경멸이 섞여 있었다.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끔찍했다"고 말하려는 순간, 토시오는 말을 멈췄다. 여성인 마이코도 마사오도 기절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미로에서 나와서 ...... 의식을 잃을 때까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나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 그림자라든가, 풀의 움직임이라든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라도 괜찮습니다.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나중에 미로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소우지의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소우지의 방을 두드리자 마이코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우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유리 선반이 여러 개 눈에 들어왔다. 선반은 수많은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평범한 장난감이 아닌 것 같았다.
수많은 인형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상자 위에 앉아서 기타를 들고 있는 검은색 낡은 인형. 상자 아래에 나사가 보여서 전원을 켜면 바로 기타를 울릴 것 같았다. 아름답게 채색된 상자는 깜짝 상자임에 틀림없어 보였다다. 그 옆의 상자는 옛날 하코네 세공품일까? 회전목마에는 분명 오르골이 달려 있을 것이다. 시계를 내려놓은 인형이 그냥 그 자세를 계속하고 있을 리가 없다. 소우지의 손에 들어온 인형은 모두 생명을 얻어 보는 사람을 이차원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것 같았다.
그 외 분라쿠(文楽)의 목, 동물, 자동차, 배, 서로 결합되어 있는 알 수 없는 톱니바퀴. 언젠가 마사오가 이야기했던 단쥬로의 숨은 병풍 ....... 새로운 것으로는 팬텀 램프, 밸런스 토이, 파이버 옵틱스 ....... 선반에서 넘쳐나는 장난감은 바닥과 책상 뿐 아니라 손 닿는 곳마다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장난감 상자를 뒤집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벽에도 여러가지 시계가 걸려 있는데, 모두 인형이나 오르골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 중 몇 개는 확실히 동작하는 물건이었다.
그 한가운데 소우지는 창백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역시 여동생의 죽음때문인지 평소의 가벼운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이코는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마이코가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에 토시오는 살짝 놀랐다.
토시오의 뒤를 이어 수사관이 찾아와 소우지를 데리고 갔다.
"총에 대해 물어봤지?"
둘만 남았을 때 마이코가 물었다.
"총? 네, 정자에 뭐든 떨어뜨린 물건이 없었는지 물어보더군요."
"흉기를 찾지 못했어."
"흉기?"
“네가 기절해 있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어. 이 방도 구석구석 다 뒤졌지. 그리고 소우지가 가지고 있던 사냥총이 압수당했어."
"소우지가, 설마?"
"수사관이 총구 냄새를 맡았지만 최근에 사용한 흔적은 없는 것 같았어. 22구경 볼트액션으로 구 제국 육군이 사용하던 38식 보병총과 같은 형태야. 이 총은 원래부터 저택에 있었다고 하더군. 소우지가 손질해서 사용한 적은 있지만, 최근에는 총으로 사냥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사용한 적이 없었다고 해.”
"그렇다면 문제가 없겠네요."
"하지만 총을 손에 발견했을 때 수사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어. 그리고 카오리의 방도 '당연히' 수색을 당했어."
"카오리 씨는 피해자잖아요"
"자살 가능성도 고려한 모양이야. 하지만 자신의 눈을 쏘는 자살자는 드물고, 현장에는 총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살인이지. 카오리 씨의 뇌에서 총알이 검출됐어."
"총알이요…."
"그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은 것 같아."
"우다이 씨도 총을 보지 못했습니까?"
"보지 못했어. 좀 더 빨리 저택에서 나왔더라면 범인을 보았을지도 몰랐는데."
"마사오 씨가 가장 빨리 현장에 도착한 것 같네요."
"그래. 하지만 마사오 역시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어."
"그녀는 어디 있었는데요?"
토시오는 카오리의 방 창문을 통해 미로 근처에 있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사오는 연못 근처를 걷고 있었다고 하더군."
창밖으로 연못이 보인다. 연못 주변에는 여러 명의 경찰관들이 보였다.
"연못 속을 수색하는 걸테지."
"총을?"
"맞아. 경찰은 마와리 저택 안에 있는 사람의 범행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듯 해."
".....설마......."
"이러면 토모히로와 토우이치의 죽음도 다시 한번 문제 삼을 것 같군"
"마와리 저택 안 사람이라고 해도 마사오 씨, 소우지와 테츠바. 그리고 가정부밖에 없잖아요?"
"우리도 포함이지. 물론 이 저택은 담이 무너진 곳도 있고, 정원 안쪽은 그대로 숲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범인이 외부에서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정보에 따르면, 정자 주변에는 마사오와 소우지, 나와 너, 그리고 카오리, 이 다섯 명의 발자국만 남아 있었어."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요......."
"그래. 정자 부근의 길이 부드러워졌지? 범인이 카오리에게 접근하면 당연히 발자국이 남았을 거야."
"데츠바는 우다이 씨와 함께 있었죠?"
"그랬지. 만약 카오리가 권총으로 살해당한게 맞다면, 테츠바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될거야."
"데츠바와의 대화는 잘 됐습니까?"
마이코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데츠바는 그 차에 타고 있었다는 걸 인정했어. 그리고 토모히로가 나에게 돈을 주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어. 증언은 언제든 할 수 있다고 하더군. 하지만 ...... 이런 상태니 나를 위한 뒷전으로 밀릴 수 밖에. 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증언해 주는 것이 좋지만, 어쩔 수 없지."
"도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일을......."
토시오는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카오리는 이기적이지만 장난꾸러기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 얼굴에 범인은 무자비하게 총알을 쏜 것이다. 그것은 악마의 소행과 다름없었다.
"마와리 가문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것같군."
마이코는 천천히 방 안의 장난감들을 둘러보았다.
소우지가 방으로 돌아와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스케치북 사이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뭐야, 그게 뭐야?"
마이코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미로의 설계도입니다. 예전에 그렸던 게 생각나서요. 경찰이 이걸 원하더라고요."
누렇게 변색된 켄트지 위에 오각형 무늬가 보였다. 마이코는 눈을 반짝였다.
"소우지 씨, 저거 베껴도 될까요?"
"좋아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한 적 없으니까."
마이코는 종이를 받아 재빨리 미로 그림을 베꼈다.
"한번 해볼래?"
소우지가 나간 후 마이코는 그림을 보여주었다. 토시오는 그림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서너 군데, 손가락 끝이 막다른 골목에 빠졌지만, 그래도 중앙을 찾아갈 수 있었다.
".......52초"
마이코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손가락 끝이 골인 지점에 도착했다.
"실제로 안에 들어가서 본 느낌은 어땠어?"
"이 방법으로는 어려웠습니다. 결국 골인 지점까지 도착하지 못했어요."
"그렇겠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이코는 서둘러 그림을 접었다.
경찰관이 얼굴을 내밀고 토시오를 향해 미로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이코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사하러 온 사람은 호시자와 형사와 젊은 수사관이었다.
토시오가 먼저 서고, 소우지, 두 명의 수사관, 마지막으로 마이코가 억지로 따라 왔다.
길에 새겨진 백묵의 흔적은 토시오가 직접 밟아서 사라질 뻔한 곳도 있었다. 그래도 표시를 따라가다 보니 토시오가 총소리를 들었던 곳에 도착했다. 선은 그 지점에서 끊어졌고, 떨어져 있던 백묵이 밟혀 산산조각이 났다. 자신이 밟은 것일까.
토시오는 일어서서 기억을 떠올렸다. 토시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호시자와는 그림과 나침반을 비교했다.
"틀림없는 것 같군. 정자의 방향과 일치한다."
그리고 소우지를 향해 말했다,
"미로의 중심부로 가고 싶은데, 안내해 주세요. 지도를 볼까요?"
소우지는 지도가 없어도 괜찮다고 대답했다. 소우지는 토시오를 대신해 소우지가 먼저 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미로는 여전히 깊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 마지막 굽이굽이에서 오각형의 돌 테이블이 보였을 때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 대단한 미로네요."
호시자와는 돌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소우지를 바라보았다.
"이 미로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입니까?"
"이 저택이 지어질 때 동시에 만들어졌어요. 다이쇼 초기에 호도라는 분이 설계했어요. 제 증조부이십니다."
"무엇을 위해 정원에 미로를 만들었을까요?"
"무엇을 위해 만들었냐고 묻는다면 곤란하죠."
같은 질문은 많은 카라쿠리 제작자들도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인형을 움직이는 것에 몰두하느냐고 묻는다면 말이다.
토시오는 오각형의 돌 테이블을 앞에 두고 주변 울타리를 둘러보았다. 그래, 혼자 있고 싶을 때 이곳이 가장 이상에 가까울 것이다. 일곱 겹 여덟 겹의 울타리 방벽은 한 겹의 철문보다 더 견고했을 것이다. 기행가 호도는 이 미로 속에서 무엇을 사색하고 있었을까?
호시자와는 불이 꺼진 성냥개비를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 저택 안에 우물은 없나요?"
호시자와는 소우지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우물? ...... 조리실에 한 개가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우물은 말랐나요?"
"글쎄요. 우물이 왜요?"
"사실 총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정자로 달려간 사람은 마사오 씨인데, 그때 카오리 씨는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죽지 않았다고?"
소우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카오리의 최후를 떠올린 것일까.
"카오리 씨는 자꾸만 입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중 한 마디만 귀에 쏙 들어왔다고 합니다. '마른 우물'이라는 말이었다고 하더군요."

미로를 빠져나오자 수사관 일행을 만났다.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마사오의 가냘픈 어깨가 보였다.
마사오는 짙은 감청색 정장을 입고 흰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검은색은 입지 않았지만 인상은 거의 상복에 가까웠다. 마사오는 토시오 일행을 발견하고는 바람에 날리듯 곁으로 다가왔다.
"잠시 방으로 돌아가도 괜찮다고 하네요."
도움을 청하듯 말했다.
"내 방으로 오세요. 우다이 씨도 함께 있어요."
소우지가 마사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봐요, 이렇게 차가워졌어요."
"하지만 카오리 씨의 방에 있으라고 했어요."
"그건 무신경하네. 그렇지 않습니까, 우다이 씨."
마이코는 나라키 경감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경감님, 마사오 씨가 소우지 씨 방에서 쉬어도 되겠지요?"
나라키의 눈썹 사이 세로 주름이 깊어졌다.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다만 소우지 씨는 남아서 우물 안내를 부탁합니다."
소우지는 작은 혀를 내밀며 껌을 입에 집어넣었다.
소우지의 방에 들어가자 마사오는 잠시 안도감을 느끼는 듯 했다.
"밝고, 영리한 사람이었어요."
마사오는 카오리를 회상했다.
"토모히로와 함께 신혼여행을 갔을 때가 기억나요. 숙소에 도착하니 방에 큰 꽃다발이 놓여 있었어요. 꽃다발 사이사이에 메시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카오리 씨로부터 온 것이었어요. 저녁 식사 후 두 사람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해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지요. 우리는 저녁을 먹은 후 창문을 크게 열어놓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어요. ......"
정말 카오리답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마이코는 가만히 마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오리 씨가 당신에게 이 저택에 살 것을 권유했다고 들었어요."
마사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곧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카오리 씨의 배려에 감사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카오리 씨는 저와 소우지와의 사이를 모르시거든요. 만약 이 저택에서 소우지와 함께 살게 된다면 그는 또다시 나를 농락할 거예요."
마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
"데츠바 씨는 어떻게 지내세요? 아까 만났을 때는 안색이 좋지 않으시던데요?"
"혈압이 조금 높은 것 같아요."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게 권유했어요. 하지만 진정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여전히 약을 복용하고 계십니까?"
"그것만은 제대로 복용하고 있어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서 소우지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이런, 저들은 이 집을 유령의 집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마른 우물 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정자까지 이어져 있는것 같다고 하면서, 방금 젊은 녀석 한 명이 뛰어들었어요."
"그래서, 구멍은 찾았나요?"
"아니요, 바닥에는 물이 있고, 옆에 구멍은 없는 것 같았어요. 덕분에 한 명의 진흙 인형이 만들어졌지요."
마사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소우지는 눈치를 보며 마사오를 쳐다보았다.
"진흙 인형, 그것도 정교하게 움직이는 인형이지요."
마사오는 소우지의 과장된 말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나, 웃고 있었어."
"아니, 당신이 슬픈 표정을 짓게 해서는 안 돼죠. 카오리는 당신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오늘 계획을 세웠으니까요. 마침 우다이 씨도 왔으니, 비스크 인형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우지는 일어섰다. 발판에 올라가 유리 선반 안쪽에서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화려한 패션 인형이었다. 루이 왕조풍의 의상은 다소 색이 바랬지만, 손이 가득 찬 꽃 자수에서 당시의 사치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인형의 특징은 도자기로 만든 머리였다. 피부는 지금 막 가마에서 꺼낸 것 같은 선명한 분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반원형의 굵은 눈썹 아래에는 커다란 눈이 있었다. 푸른 홍채가 방사형으로 빛나서 쳐다보고 있노라면 섬뜩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풍만한 뺨과 작은 입매. 전체적인 얼굴형은 확실히 마이코를 닮은 것 같았다.
"에밀 주모우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요. 게다가 이 인형은 자동 인형 - '오토마티즈크' - 입니다."
인형은 왼손에 접시를 들고 오른손에는 작은 나팔 모양의 관을 들고 있었다. 소우지는 서랍에서 작은 병을 꺼내어 안에 있는 액체를 접시에 부었다.
소우지는 병을 치우고 인형의 등 뒤로 손을 뻗어 태엽을 감았다. '딱딱', 작은 소리가 이어졌다.
"잘 보세요."
소우지는 인형에서 손을 뗐다.
작은 톱니바퀴 소리와 함께 인형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형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가 왼손으로 들고 있는 접시 안에 관 끝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조용히 입에 옮기더니 손아래에 있는 튜브를 입에 넣었다.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인형의 가슴이 크게 숨을 쉬자 튜브 끝에서 비눗방울이 튀어나온 것이다.
비눗방울은 관을 벗어나 일곱 빛깔로 빛나며 공중에 떠올랐다.
"가슴의 움직임을 보세요. 솜씨가 아주 섬세하죠?"
인형은 여러 개의 비눗방울을 뿜어냈다. 귀여운 어설픔에 약간의 섬뜩함까지 더해진 인형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소우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다가 잠시 후 기계를 멈춰 세웠다.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겠죠?"
마이코는 인형이 움직이지 않자 소우지에게 물었다.
"기원전 2천 년 전의 인형이 이집트에서 출토된 적이 있어요."
"기원전 2천 년 전이라니......."
"인간은 도구를 만들면서 동시에 인형도 만들기 시작했나 봐요. 게다가 자동 인형도요. 이집트 인형은 몸통과 팔다리를 따로따로 만들어 조립한 것으로, 허리에 있는 끈을 당기면 손이 위아래로 움직여 빵을 반죽하는 동작을 하지요. 일본의 고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형이 출토되었어요."
"인간이 장난감에 쏟아 부은 에너지는 엄청났군요."
"쇼소인에 남아 있는 물건들도 투호, 탄환궁, 바둑, 스고쿠 등 사치와 기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놀이기구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요. 그 중의 하나가 카라쿠리 바둑판입니다. 양쪽에 바둑돌을 넣는 서랍이 만들어져 있는데, 한쪽을 당기면 다른 쪽도 나오도록 되어 있지요. 엑스레이를 통해 내부의 장치가 알려졌는데, 매우 정교한 장치가 돋보입니다. 문헌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건 고사기 속 기록입니다. 고야쿠 친왕이 카라쿠리 인형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지요."
언젠가부터 소우지의 표정에서 어둠이 사라졌다. 좋아하는 카라쿠리의 세계에 빠져든 것 같았다.
"......카라쿠리가 성행한 것은 에도 시대였을 거에요. 그 당시에는 시계도 카라쿠리 중 하나였는데, 간분(寛文) 4년에 시조가와라(四条河原)에서 시계 놀이가 유행해 큰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고 해요. 원래 시계와 카라쿠리의 관계는 깊습니다. 간분 2년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카라쿠리 연극의 기치를 올린 다케다 오오미는 원래 시계 장인이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에이세이 시계라는 백과사전만한 대형 시계를 나무로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가에이(嘉永) 연간에 다나카 히사시게가 만년시계를 만들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건 알고 계신가요?"
"언젠가 국립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카라쿠리 하면 히다다카야마(飛騨高山)의 카라쿠리 수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답니다."
"그렇네요. 아이치, 기후의 축제를 위해서 정교한 카라쿠리가 만들어졌죠. 바닷가에서는 가메자키의 조수제, 산에서는 다카야마의 산왕제.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다카야마의 호테이다이(布袋台)일 것입니다. 우다이 씨, 알고 계시나요?"
마이코도 소우지의 말에 이끌려 장난감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래, 생각나요. 본 기억이 있어요. 무대에 내밀어진 팔 위에서 천으로 된 칠복신이 춤을 추고 있었어요. 그리고 두 명의 가라코 (唐子 *중국풍의 옷을 입은 아이)가 여러 개의 가라코를 넘나들며 곡예를 했어요. 마지막에는 두 사람 모두 칠복신의 어깨와 팔에 올라타게 되고요. 칠복신이 손을 흔들면 긴 깃발이 흘러나왔습니다. …….인형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동작들이었어요."
"가라코 인형은 그네를 타고 날아갈 수 있거든요. 이른바 자유분방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분세이 5년에 우에노산 아래, 화재 대피용 공터에서 행해진 축포세공 웃음 주머니는 더 대단합니다."
"웃음 주머니?"
"원래 제목은 '나니와가타하나노 스가타미(なにわがたはなのすがたみ)'. 오사카의 오오에 우베에(大江宇兵衛)라는 사람의 작품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카라쿠리는 눈알을 움직이면서 여유롭게 화살촉을 닦는 화살촉의 고로(矢の根の五郎), 옷깃에 꽂힌 바람개비에 손을 들며 기뻐하는 아이. 흙다리를 건너는 미인 등 십여 종이었습니다. 춤추는 모습과 말투, 문지기까지 모두 카라쿠리 인형이며, 마지막에 웃음 주머니를 팔았습니다. 칠복신과 가라코들의 놀이에서는 다카야마의 호테이다이와의 연관성도 느낄 수 있지요. 마지막에 이 축포세공 칠복신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복하게 웃음을 터뜨립니다. 크게 웃을 때는 얼굴 표정이나 몸놀림은 말할 것도 없고 배꼽까지 흔들렸다고 하니, 에도 사람들도 깜짝 놀라서 앞 다투어 산 아래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나라도 그렇겠네요."
마이코가 말했다. 마사오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소우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소우지는 그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덴포 4년, 에도 후카가와 하치만(深川八幡)에서 수호전이 상연되었습니다. 이는 하세가와 칸베에(長谷川勘兵衛)의 작품이며, 수호전의 호걸들이 대거 등장해서 활약하죠. 무대도 간도라케, 세리아케, 텐지라케 등이 많이 사용되어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그 외에도 오오후네 사계절의 순풍, 요코덴, 기야만선의 카라쿠리 등이 유명세를 탔습니다. 그 중에서도 스케일이 컸던 것은 아사히나(朝日奈)의 대작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금화로도 남아있는데, 머리의 크기가 한 뼘이 넘고, 담뱃갑이 두 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인형도 움직였나요?"
마이코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설마, 인형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아사히나가 들고 있는 연통 위에 인형의 다이묘 행렬이 지나가고, 케누키 위에서 처녀가 춤을 추고, 연통에 달린 네츠케에서 입이 나오는 등 여러 가지 장치가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개막 직전에 이 인형은 사사(寺社)봉행관으로부터 흥행금지 처분을 받았습니다."
"너무 커서?"
"그래요. 당시에는 대형 인형극 금지령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거기에 걸렸다고 하네요. 그런데 금지령이 내려진 분세이, 덴포 시대에는 큰 구경거리가 즐비했다고 하네요."
"그런 장난의 유행은 계속 이어져 왔던 건가요?"
마이코가 물었다.
"아니, 카라쿠리라는 것은 공예의 천재가 나타나면 번성하다가, 그 천재가 없어지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아요. 독창적인 천재성과 정교한 기술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거죠. 따라서 평범한 인형사는 인형을 어떻게 움직이느냐보다 어떻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느냐에 제작의 노력을 쏟게됩니다. 그들은 인형의 표정에 움직임을 더하고, 자세에 쓸데없는 고심을 거듭하지만, 정작 인형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죠."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인형에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도 예술 아닐까요? 소우지 씨의 말을 들어보면 예술적 표현보다 기발한 장치가 더 중요하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사람에게는 다양한 입장이 있어요."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웃었다.
"예술가들이 보기에 카라쿠리 인형사들은 얼마나 엉성해 보일까요. 아무리 훌륭한 인형극이라도 그들은 절대 예술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반대로 과학자들이 보기에 카라쿠리 인형사는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일 겁니다. 실제로 에디슨은 보캔슨에게 "어린아이 속임수 기계”라고 말했죠."
"카라쿠리 인형은 두 세계 모두에서 어린아이 장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거군요"
"하지만 사기꾼의 눈에는 예술도 과학도 모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미, 아시겠나요?"
"주모우의 인형을 보니까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 하여튼, 이런 카라쿠리 인기도 초대가 죽은 후 기껏해야 3대 정도까지만 이어질 뿐이었지만, 후대의 연극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 분라쿠의 '카시라(かしら)'가 그렇죠."
소우지는 일어서서 다른 선반에서 한 개의 인형 목을 꺼냈다.
인형은 둥근 상투머리로 묶여 있다. 부분적으로 칠이 벗겨졌지만, 고운 눈썹과 통통한 뺨에서 기품 있는 유부녀의 색기가 느껴졌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목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속임수가 숨겨져 있어요."
소우지는 목 아래쪽에서 튀어나온 나무 돌기를 눌렀다. '쿵'하고 많은 단단한 나무가 한꺼번에 결합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인형의 이마에서 커다란 뿔이 두 개가 튀어나왔다. 눈이 위로 치솟고 입이 귀까지 찢어졌다. 평온한 유부녀가 순식간에 귀녀로 변해버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귀신의 인상이 마사오의 가방 속에 있던 ‘마도죠’의 얼굴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마이코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우울한 표정으로 귀신을 보면서,
"소우지 씨, 나에게 토모히로 씨가 마도죠라는 인형을 보여 준 적이 있어요. 그 인형은 이 목에서 힌트를 얻은 거였나요?"
"토모 씨가 마도죠를?"
소우지는 목을 다시 돌려놓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네. 그 인형을 본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 뭐, 이 목이 힌트가 되었을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 목은 인형의 한 표정이 그대로 바뀌는데, 마도죠는 한 목에 두 개의 얼굴이 있어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취향은 아니라서 나는 제작을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뭐, 바보짓이였죠. 토모 씨도 시제품을 한두개 만들다가 결국 내 의견에 동의한 것 같습니다. 판매할 생각도 없던 것 같고요."
소우지의 말 속에는 토모히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느껴졌다. 마이코는 마사오의 얼굴을 옆에서 바라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이 분라쿠의 목도 사람의 힘을 필요로 하는 장난이잖아요?"
"이런, 날카로운 질문이군요."
소우지는 다시 한 번 풍자극 세계의 얼굴이 되었다.
"이집트의 빵 반죽 인형은 당연히 손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이에요. 우다이 씨가 본 다카야마의 호테이타이에서 무대에 튀어나온 팔은 '카라쿠리도이(からくりどい)'라고 합니다. 인형을 조종하는 줄은 여러 개의 기관통을 통해 줄잡이의 손에 전달되는데, 복잡한 줄타기를 하려면 40조에 가까운 줄을 8명의 줄꾼이 협력하여 조종해야 합니다. 당연히 줄을 다루는 장인의 명인에 가까운 기술이 필요한거라 완벽한 카라쿠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웃음 주머니도 마찬가지에요. 천가방 옆에 희미하게 어두워진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에는 촛불이 놓여져 있어 살짝 비춰서 잘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 거기에 장치가 있을 거라고 간파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블랙매직과 같은 원리죠. 당시의 속임수는 모두 똑같았어요. 관객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인형을 조종했던 거죠. 즉, 멜첼의 자동 체스 기사와 같은 발상이었어요."
"즉, 속임수라고요?"
"네, 트릭입니다. 사람이 인형을 움직이는 거죠.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실을 사용하는 방법. 천으로 된 자루대를 사용하는 방법. 멜첼의 자동 체스기사와 같이 사람이 인형 속으로 들어가는 방법. 웃음보처럼 교묘하게 조명의 공조로 인형을 움직이는 인간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법 ......"
"정말 많네요."
"이런 트릭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한 책이 쿄오호오(享保)년도에 출간되었었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죠? '기공훈몽감초(機工訓蒙鑑草)'라는 책인데, 방금 이야기한 트릭이 모두 설명되어 있습니다. 물론 자동 체스 기사의 트릭의 원리도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케다의 속임수인데, 인형극에서 배우까지도 5촌 상자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죠. 사람이 5촌짜리 상자에 들어갈 수 있을리가 없으니 당연히 속임수고요. 의상만 남기고 배우는 무대 위 구멍을 통해 바닥으로 도망쳐 버리는 거였죠."
"그럼 주모우처럼 완벽한 카라쿠리는 없었나요?"
"그게 바로 ......."
소우지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있어요. 많이 있어요. ‘기공훈몽감초’가 출간된 지 66년 후에 출간된 ‘기공도휘《카라쿠리즈이》’는 완전한 카라쿠리만을 모아놓은 해설서입니다. 실이나 현기증을 유발하는 트릭은 일절 없어요. 기본은 태엽 장치이기 때문에, 첫머리에 시계의 도해가 제대로 붙어 있고요. 각 인형에는 치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고, 작은 부품 하나하나까지 빠짐없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전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이런 책이 한 권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소우지의 눈빛이 빛났다.
"가장 유명한 카라쿠리는 차를 나르는 인형이에요. 주인이 인형의 양손에 들고 있는 쟁반 위에 찻잔을 올려놓으면 인형이 고개를 흔들며 걸어갑니다. 손님이 찻잔을 가져가면 인형은 걸음을 멈추고요. 손님이 차를 다 마시고 찻잔을 다시 놓으면 인형은 다시 걷기 시작해 좌석을 돌아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이하라 사이카쿠도 이 인형을 보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몇 개는 지금도 소중히 보존되어 있지요."
"그것도 고래의 수염으로 만든 태엽 장치를 사용한 것인가요?"
"초기 것은 그렇습니다. 막부 말기에는 금속제 기어와 태엽을 이용한 인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또 수은을 사용한 카라쿠리 인형도 만들어졌고요."
"수은이 인형에?"
"오단반지나 연리반지라는 인형에 수은으로 만든 카라쿠리 인형이 사용되었어요. 이 인형은 손에 들고 봐도 장치가 보이지 않아요. 인형의 몸 안에 들어 있는 수은의 이동에 의한 것이지, 태엽 장치가 아니기 때문이죠. 이 인형을 맨 윗 단에 올려놓으면, 어느새 양손을 들어 올리고, 몸을 뒤틀고, 돌고 돌기를 반복하며 5단의 단을 이동해 나갑니다. 그 밖에도 잉어가 폭포를 타고 올라가 용으로 변하는 용문폭포, 아이가 북을 치면서 피리를 부는 고테키지도(鼓笛児童), 앞에 놓인 물건이 됫박을 내려놓을 때마다 네 가지로 변하는 물건 인형, 소년이 말의 목을 타고 노는 하루고마(春駒) 인형.... ..."
"정말 많네요."
에도 시대 중기에 이미 대규모 카라쿠리 연극이 상연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토시오에게 있어서는 처음 알게 된 놀라움이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완전 자동화된 여러 가지 카라쿠리를 듣고 있자니, 그 기술을 이용하여 소정에서 카오리를 쏘아 죽이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인형을 만드는건 아주 쉬운 공작처럼 느껴졌다.
"너무 수다스러운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 같네요. 이런 이야기만 들어서는 재미없을 것 같네요. 이제부터 실물을 보여드릴까요?"
소우지는 마사오를 바라보았다.
"마사오 씨, 역립(逆立)인형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습니까?"
"역립 인형... 들어본 적 있어요."
마사오는 바로 대답했다.
"언젠가 토모히로가 흥분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소우지 씨가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창고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어요. 토모 씨와 둘이서 고쳐서 움직이게 만든 자동 인형이에요."
소우지는 일어서서 책상 위에서 네모난 포장지를 꺼내 세 사람 앞에 놓았다.
낡고 오래된 회색 면 봉투였다. 펼치자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직사각형의 오동나무 상자가 나타났다. 오동나무는 까맣게 그을려 있었지만, 위에 '역립인형(逆立人形)'이라고 적힌 필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상자를 열어보니 목화솜으로 감싼 물건이 들어 있었다. 소우지는 조심스럽게 포장을 풀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에치고 사자 의상을 입은 어린아이 인형이었다. 인형은 사자 목을 달고 만자(万字)의 문양이 새겨진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 소우지는 인형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기공도휘'의 목록에도 없는 희귀한 카라쿠리입니다. 태엽 장치에 수은까지 내장되어 있지요. 처음에는 잘 움직이지 않았어요. 엑스레이 사진을 찍어보니까 수은이 증발해서 수은의 양이 줄어들었더라고요. 수은을 보충해 주었더니 신기하게도 작동이 되더라고요. 작가도 분명합니다. 오노 벤키치(大野弁吉), 가에이 2년의 작품입니다."
소지는 상자 뚜껑을 뒤집었다. 표지와 같은 필체로 '嘉永二年三月 大野弁吉 |拵 之《これをこしらう》'라고 적혀 있었다.
"오노 벤키치…… 사기꾼인가요?"
마이코가 흥미롭게 물었다.
“'사기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보다 폭넓은 학문을 익힌 과학 기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 카라쿠리 기에몬(からくり儀右衛門)의 다나카 히나시(田中久重) 등 카라쿠리를 만든 사람은 모두 걷는 사자를 만든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마찬가지로 학식과 기예가 여러 방면에 이르렀습니다. 오노 벤키치는 가나자와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나가사키에서 난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가나자와의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内)라고도 불리며, 시조류(四条流)의 그림과 조각을 잘했고, 목조각, 죽세공, 금세공, 도자기, 유리공예, 마키에(蒔絵) 등의 작품이 남아있지요. 학식은 의학, 이화학을 비롯해 약학, 천문학, 역학, 항해술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그의 천재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우지는 테이블을 옆에 두고 카펫 위에 공간을 만들어 인형을 꺼내 들었다.
"태엽을 감아볼래요?"
그 말에 마사오는 인형을 바라보았다.
"태엽이 어디에 있죠?"
"허리 옆쪽. 하카마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됩니다."
"안 돼요. 떨어뜨리면 안 돼잖아요."
"그렇군요. 그럼 제가 감아 드릴게요."
소우지는 세 사람의 곁을 떠나 바닥에 앉았다.
"이 시대가 되면 태엽도, 기어도 모두 금속으로 만들게 되죠. 그래서 보존도 잘 되어 있습니다."
소우지는 즐거워하는 듯이 태엽을 감았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한 번 감았을 때였다.
"아, 아퍼!"
소우지는 갑자기 오른손을 인형에서 떼어냈다.
소우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엄지손가락 밑부분에서 엷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엽이 끊어진건 아니야. 이상하네. 하지만 괜찮을 거야."
소우지는 조심스럽게 인형을 세 사람을 향해 세우게 했다.
인형은 가벼운 톱니바퀴 소리를 내며 걷기 시작했다. 목에 달린 사자 관이 좌우로 흔들렸다. 양손이 움직여 허리춤에 달린 북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쿵, 쿵 하는 북소리와 톱니바퀴 소리가 삐걱거리는 인공의 생명을 움직이고 있었다.
에치고 사자 소년은 세 사람 앞에 이르자 멈춰 서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잘 보세요 ......"
소우지의, 괴로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토시오는 그 목소리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지만, 인형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인형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형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뒤로 젖혀졌다. 두 발이 땅을 딛고 인형은 거꾸로 서게 되었다. 두 손 사이로 하얀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인형은 주인에게로 걸어갔다.
소우지 앞에서 인형은 멈춰 서서 천천히 두 발을 다시 땅으로 내려놓았다. 인형은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걸음걸이가 다소 어정쩡하게 소우지의 옆을 지나치려 했다.
"멈추지 않아요 ...... 이상하네요 ......"
소우지가 신음하듯 말했다.
토시오는 처음으로 소우지의 얼굴을 보았다. 소우지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
“소우지 씨!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가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소우지는 걸어가는 인형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순간 무게 중심이 무너지면서 소우지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괜찮아!"
마이코가 달려와 소우지를 일으켜 세웠다. 소우지는 열심히 힘을 쥐어짜고 있었다.
"...... 하지만, 훌륭하군, 그렇지......."
격렬한 고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소우지는 마이코를 튕겨내고 몸을 새우처럼 구부렸다.
마사오가 무언가 외쳤다.
"의사를 불러!"
마이코가 소우지를 내려다보았다. 토시오도 일어섰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기어 소리가 들렸다. 에치고 사자 인형이 구석에 쌓여 있는 장난감 상자에 부딪혀 옆으로 쓰러져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토시오는 무의식적으로 인형에 손을 뻗으려 했다.
"만지지 마!"
매서운 마이코의 목소리였다.
문을 열자 수사관들이 달려왔다. 한 수사관은 소우지의 상태를 보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의사가 도착해 맥박을 쟀을 때, 소우지의 숨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방 전체가 기어 소리로 가득 찼다. 여러 개의 시계가 시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오르골이 울려 퍼지고, 시계 인형이 움직였다. 또 다른 시계의 창문이 열리고 기괴한 짐승이 얼굴을 내밀고 짖어댔다.

2023/04/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8. 만화경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8. 만화경

저녁이 가까워지자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임차인들이 사무실에 들러 연락 사항을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전화 사용도 많아져 통화 소리와 담배 연기가 좁은 방에 가득 찼다. 비가 내린 탓에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토모히로의 고별식 다음 날,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데츠바가 마이코를 만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토모히로의 초칠일 전인 토요일로 정했고, 시간은 추후에 알려주겠다고했다. 카오리는 전화를 끊으면서 내 생일을 잊지 않았겠지요, 라고 상기시켰었다.

그래서 시간 확인차 카오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마와리 집안의 가정부였는데, 꼼꼼한 성격 탓인지 카오리가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무실 전화번호를 꼼꼼히 물어보았다.

토우이치는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장례식 이후 마사오를 만나지 못했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벽녘에는 마사오의 꿈을 꾸었다. 마사오는 죽은 줄 알았던 토모히로와 팔짱을 끼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 마사오는 샹보르관을 나왔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토시오는 가슴이 먹먹해져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꿈의 맛은 이상하게 달콤했고, 아침에도 좀처럼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9만 파운드짜리 자동 음악 기계인가 ......"

아까부터 신문을 읽고 있던 후쿠나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동 음악 기계?"

마이코가 되물었다. 요즘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술품 경매입니다. 영국 버크셔 백작의 성, 멘트모어 타워스가 경매에 나왔다고 하네요."

"백작님도 돈에 쪼들리는건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문제지요. 7대째가 막대한 상속세를 물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이 사람은 달마니라는 성을 하나 더 가지고 있긴 하지만요. 눈에 띄는 미술품은 전부 그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건 극히 일부라고 합니다."

"일부라도 대단한 재산인가 보군요."

"그렇죠. 세계 각국에서 3만 명의 바이어가 사전 답사를 마치고 경매는 열흘 동안 계속된다고 합니다. 멘트모어 타워스는 18세기부터 백 년 동안 수집한 프랑스 그림과 가구, 도자기, 시계 등이 가득한 보물창고라니까요요. 예를 들어 루이 14세의 책상이 5만1천 파운드, 방금 말한 두 마리의 새가 조각된 루이 15세의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 루이 16세 시대의 자카드 로스가 만든 필사 인형 같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필사 인형이라고 하면 글씨를 쓰는 인형인가요?"

"그렇겠지요."

"설마 인형 안에 아이 같은 걸 넣는 장치는 아니겠죠?" 

"하하하, 우다이 씨가 말씀하신건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인데요, 그런 트릭도 물론 있었지만  18세기에는 이미 카라쿠리 인형의 기술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트릭이 아니라 실제로 기계만의 힘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글씨를 쓰는 인형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지루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렇군요. 그 사람은 그만큼 트릭을 좋아하나 봅니다. 물론, 장난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트릭으로 보충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마술은 기계공에서 마술사의 손으로 넘어갔고, 기계공은 기계의 가능성만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프랑스 궁정에서는 유명한 자크 드 보캉송이 활약했습니다. 보캉송은 클레오파트라의 뱀, 파우누스 신의 옆구리 피리 부는 사람 등 많은 카라쿠리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오리였습니다. 이 오리는 살아 있는 오리처럼 헤엄을 치고, 소리를 내고, 물을 마시는데다가 먹이를 던져주면 목을 쭉 뻗어 쪼아먹고, 음식물을 소화하고 배설까지 했다고 하네요. 이 오리는 훗날 마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베르 우당(Robert Wodan)의 손에 의해 수리되었고, 동시에 모든 메커니즘이 밝혀졌다고 하고요."

"마술사가 인형을 고쳤다고요?"

"그 당시 우당은 아직 시계 장인이었습니다. 그 후 우당은 오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스스로 다양한 카라쿠리를 만들었지요. 줄타기하는 인형, 기계 없이 움직이는 시계, 컵과 구슬의 기예를 하는 인형까지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마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으로, 나중에는 마술사로 변신해 마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지요. 오리가 생각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진 수영하는 오리를 팔던 장사치가 있었어요."

"저는 몰라요."

"뭐 오래 전 이야기니, 그렇겠죠. 이 오리는 더러운 통 안에 떠서 신기하게도 스스로 헤엄쳐 다녔어요. 그리고 가끔은 먹이를 잡기 위해 부리를 물속으로 집어넣기도 하고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요."

"기계 장치인가요?" 

"아니요. 보캉송의 오리도 저렇게 생물처럼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에요. 생물의 움직임에는 기계에는 없는 불규칙한 부분이 있는 법인데, 노점상 오리는 그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어요."

"어떻게요?"

"그 오리를 사면 어디서든 팔고 있는 평범한 셀룰로이드 오리를 줍니다. 다만,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어요. 그리고 그 종이에는 오리를 움직이는 비결이 적혀있었죠."

"네?"

"<오리의 목에 실을 달고 그 끝에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매달아 두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거, 사기 아닌가요?"

마이코는 입을 열었다.

"사기는 아닙니다. 속임수죠. 에도 시대부터 있던 장난감이에요. 원래 이름은 '부동새'였어요. 가마우지를 본뜬 장난감이었지요. 분세이 말기, 우에노야마시타 부근에서 처음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셀룰로이드 오리는 장사치들 사이에서는 '즌부리코'라고 불렸습니다. ......반대되는 트릭도 있었어요. 이것은 만든 시체 인형을 살아있는 까마귀가 쪼아댄다는 것이었죠."

"시체 인형?"

"네, 막부 말기에는 기괴한 구경거리가 활발하게 등장합니다. 이른바 시체 세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익사체를 모방한 인형으로, 물벼락에 맞은 얼굴 등이 사실적으로 만들어진데다가 시체를 진짜 까마귀가 쪼아댔다고 하더군요."

"알겠어요! 그 시체에는 미꾸라지가 숨겨져 있었군요."

토시오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역시 우다이 씨네요. 맞아요. 재미있는 것은 미꾸라지를 너무 많이 먹은 까마귀가 쓰러졌다는 흔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에요. 즌부리코도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이 근처에서 팔면 돈벌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사람이라면 화를 낼 것 같네요"

"그게 문제에요. 옛날 사람들도 화를 냈어요. 하지만 아이디어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싼 거지요. 저런 걸작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니까. 백화점 같은 데서 파는게 나을거에요.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교육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될 테고요. 아이디어라고 하면, 187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의 메카니컬 뱅크도 아이디어만으로 팔렸죠."

"메카니컬 뱅크? 들어본 적 없는데요?"

"기발한 구조의 저금통이었는데요. 주물로 만든 견고한 구조로 동전을 넣는 상자 위에 사람이나 동물의 장난감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이 중에 ‘조련사’라는 저금통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동전을 조련사의 손에 들고 상자에 달린 레버를 누르면 옆에 있던 개가 뛰어올라 조련사의 동전을 물고 저금통 안으로 떨어트립니다. ‘광대’는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레버를 누르면 입이 열리고 손이 움직여 동전을 입에 집어넣고요. 가장 걸작은 '정치가'라는 저금통입니다. 큰 의자에 꼿꼿이 앉은 정치가의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무게에 의해 팔이 움직여 주머니에 만들어진 동전 넣는 구멍에 동전을 쏙쏙 집어넣습니다. 정치가의 무표정한 얼굴이 참 웃기죠. 그 외에도 마술사, 펀치 앤 주디, 엉클톰, 링컨 등 200여 종의 제품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금통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모터가 움직이면서 상자 안에서 해골 손이 나와서 동전을 잡고 상자 속으로 사라지는 장난감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그런 게 메카니컬 뱅크, 즉 기계식 저금통입니다. 처음 개발되었던 당시에는 모터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지만요. 오히려 그런 소박한 점이 좋았어요.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라쿠고(落語) 속에만 남아 있지만, 히다리 진고로(ひだりじんごろう)가 만들었다는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 마네키네코(招き猫)가 그것이에요. 손바닥 위에 정해진 수의 동전을 올려놓으면 사라져 버리는 장치인데, 이것도 메카니컬 뱅크, 기계식 은행의 일종이었을 것 같네요."

"히다리 진고로는 장난에 관련된 전설이 많네요."

"맞아요. 카라쿠리에는 전설이 많이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카라쿠리를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현존하는 물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나무와 종이로 만든 집에 살았고, 도시의 역사는 큰 화재의 반복이었으니까요."

"외국에는 오래된 장난감이 많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야 많죠. 물론 중요한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은 필라델피아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어요. 하지만 런던 박물관에 가면 17세기 마스켈라인의 카라쿠리을 볼 수 있습니다. 조라든가 사이코라든가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메카니컬 뱅크도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취재한 적이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요. 뉴욕의 사미엘 F 프라이어 씨가 수집한 것으로 주모우의 카라쿠리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어요."

"주모우라고 하면 비스크 인형이네요."

"우다이 씨, 잘 알고 계시네요."

"저를 비스크 인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 닮았네요. 주모우의 작품은 카라쿠리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나 한다니까요…."

소우지 씨는 주모우의 인형을 몇 점 갖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골동품 가치가 있는 자동 기계 인형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한 재산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 도중에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카츠 씨 회사, 정말 바쁘신가 봐요. 몇 번을 전화해도 통화 중이었어요."

"미안해요." 

카오리는 시간을 지정했다. 내일 1시에 나사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우다이 씨와 함께 오라고 했다.

"카오리 씨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네, 카네이션이 좋아요. 연홍색으로, 아셨죠?"

카오리는 그렇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이 뭔지 알아?"

다음 날, 나사 저택으로 향하는 에그 안에서 마이코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렇겠지. 꽃말은 열애야."

"...... 그러나 그녀가 지정한 겁니다."

"놀리는 걸까, 아니면 의외로 진심인걸까?"

"카오리 씨에게는 슌키치라는 약혼자가 있어요."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이지?"

"맞습니다."

"그럼 오늘은 못 올거야.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앞둔, 장난감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니깐. 토요일이라고 해도 정시에 퇴근하는 건 불가능해. 특히 젊은 평사원은 말이야."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어. 괜찮아. 정 어려우면 카오리의 억지에 당한 척 하라고."

어제 내린 비는 완전히 그쳤고, 오랜만에 하늘이 맑게 개었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오르니 씻겨 내려간 단풍의 색이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나사 저택의 중앙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서 바라본 인상보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저택 건물의 비틀림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벽은 원래는 선명한 주홍색으로 빛났을 터였지만 지금은 기괴한 검붉은 색이었고, 벽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담쟁이 덩굴이 겹겹이 쌓인 모양은 마치 거대한 뱀의 비늘을 연상케 했다. 당나라 풍의 기와에서 튀어 나와있는 푸른 오각뿔 모양의 탑은 기괴한 조합으로 보였다.

흙담은 곳곳이 무너져 무질서하게 관목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당초 문양의 철책문은 열린 채였다. 토시오는 문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에 고풍스러운 클래식 자동차가 놓여 있다. 소우지의 애마(愛車)일까? 토시오는 그 옆에 차를 세웠다.

황량한 정원이었다. 저택 맞은편은 낮게 경사져 있고,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왼쪽의 기하학적인 녹색 면이 이야기로 들었던 미로인 것 같다. 연못과 미로 건너편에는 녹나무, 소나무 등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카오리는 빨간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카오리만 알고 있던 토시오에게 카오리의 모습은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카오리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표정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가슴이 풍만하게 솟아오른 모습은 지금까지의 카오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토시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카오리의 뺨에 금방이라도 수줍은 홍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방으로 안내할게요."

카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탑 아래가 홀이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바로 카오리의 방이었다. 계단, 난간, 문짝의 나무는 모두 세월의 흔적이 묻어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은 지금까지의 건물 인상과는 달리 밝은 색채로 가득했다. 창문이 두 개 있는데, 한 쪽 창문을 통해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이 아래가 오빠 방, 그 앞이 아버지 방이에요."

카오리 씨가 설명했다. 그 안쪽이 조리실이고, 가사 도우미의 작은 방이 있다고 한다. 2층은 카오리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아틀리에라고 했다.

"그런데 아틀리에로 마사오 씨가 이사를 올지도 몰라요."

"마사오 씨가?"

토시오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두 사람이나 되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너무 쓸쓸해 보여서요. 제가 권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결정하지는 못햇어요. 방금 전에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마사오 씨는 이 집에 계신가요?"

"그래요."

카오리는 하얀 화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연신 모양을 다듬었다.

"뜻밖의 선물 ......"

카오리는 꽃병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꽃병 옆에는 길쭉한 화장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카오리는 마사오와 소우지와의 관계를 모르는 것 같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사오를 불러들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오리는 잠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거, 전부 카오리 씨의 작품인가요?"

마이코는 아까부터 벽에 걸려 있는 여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카오리의 방에 화사한 색감이 넘쳐나는 것은 밝은 색감의 그림들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그림은 추상적인 면과 선의 교집합이 선명한 색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조금 과장된, 시제품 같은 느낌이에요."

카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듯 했다.

마이코는 그 중 한 장의 그림에 마음이 꽂힌 듯 했다. 중앙에 패턴이 있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림이었다.

"만화경을 보는 것 같네요......"

마이코는 이렇게 평했다.

"훌륭해요."

카오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만화경이라는 제목이에요. 언젠가 만화경을 보다가 그 그림의 주제가 떠올랐어요. 만화경의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애를 썼어요."

토시오는 만화경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만화경이라고 하면, 장난감?"

"그래요, 만화경. 카츠 씨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지금은 어른들이 보기에도 좋은 멋진 만화경들이 많이 팔리고 있어요."

카오리는 일어서서 유리장 문을 열고 예쁘게 채색된 원통 몇 개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원통은 미세한 체크 무늬가 있고 한쪽에 작은 렌즈가 달려 있었다.

"만화경의 원형은 영국의 데이비드 브루스터라는 물리학자가 만들었다고 해요. 원형은 통 안에 들어 있는 색종이를 사방의 거울에 비춰서 다른 쪽의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인데, 이 만화경에는 그 종이가 없죠. 파타노스코프라고 해요."

토시오는 원통에 눈을 돌렸다. 원통 안쪽에서 마이코의 얼굴이 여러 개로 분해되어 겹쳐 보였다. 그 기형적인 이미지에 숨을 죽였다.

"색종이 조각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거죠. 망원경과 만화경을 합친 거죠."

파타노스코프는 마이코에게 넘어갔다. 마이코도 신기하다는 듯이 방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파생품 중 하나인데, 작은 조각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지만 통을 움직이면 안쪽의 거울이 움직여요."

그 작은 조각은 불규칙한 색종이 등이 아니라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통을 움직이면 인물이 요염하게 얽히고 설키며 갈라졌다.

"통이 아닌 만화경도 있어요. 스피아로스코프라는 것은 두 장의 맞닿은 거울 아래에서 무늬가 있는 원반을 돌려서 그림을 변화시키는 거죠.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거예요. 안티스코프예요."

카오리는 또 다른 검은색 통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내 얼굴 좀 보세요."

그것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카오리의 얼굴이 삐뚤빼뚤하게 휘어져 있었다. 시점을 바꾸면 크고 작은 눈알이 흔들거렸다. 코만 거품처럼 날아와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만화경의 어떤 파생품에서도 기본은 변하지 않아요. 그것은 어떤 불규칙한 형태도 순식간에 규칙적인 대칭으로 바꿔버리는 거울의 마술이죠. 그런데 안티스코프는 어떤 질서정연한 대칭도 비틀어 버리고 말아요. 원통 안의 거울을 구부러뜨린 것이겠지요. 이걸로 보면 인간의 형상은 모두 벨마이어의 인형처럼 변해버리게 되지요. 이 ‘반’ 만화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의 매력은 정돈된 형태가 순식간에 그로테스크하게 변하는 기괴함이에요."

토시오는 안티스코프로 카오리가 그린 만화경을 보았다. 색채가 뒤틀리고 흐르고 기묘하게 뒤섞여 마치 썩어가는 고기 덩어리처럼 보였다.

"만화경에 열광하는 나를 보고 오빠가 만화경을 준 적이 있었어요. 작은 평범한 만화경이었어요. 한참을 들여다 본 나에게 오빠가 이상하다며 거울을 건네줬어요. 거울로 보니, 내 눈 주위에 동그랗게 먹물이 칠해져 있었어. 만화경 눈과 맞닿는 부분에 먹물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정말 장난이 심하지 않아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정부가 들어왔다.

"......어르신께서 손님을 모셔다 달라고 하십니다."

마이코와 카오리가 방을 나갔다.

토시오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택 바로 앞은 화단이었을 것이다. 잡초 사이로 기하학적인 흔적이 보인다. 왼쪽에 연못 쪽으로 튀어나온 석가산이 있고, 그 위에 기울어진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에 서면 정원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자 앞은 가파른 경사면으로, 경사면 끝자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물줄기는 연못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연못 왼쪽 안쪽에 있는 미로에 눈이 갔을 때였다.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볼품없죠?"

정신을 차려보니 카오리가 옆에 서 있었다.

"이런 정원도 운치가 있지요."

토시오의 말에 카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츠 씨, 아첨을 잘 못하시네요."

카오리는 토시오와 함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 하늘 저 멀리."

카오리가 중얼거렸다. 쳐다보니 카오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히로 씨가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마사오 씨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을 텐데...."

젊은 여성과 단둘이 있는 방에서, 그것도 여성이 감상에 젖어 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카오리는 토시오를 잠시 쳐다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우다이 씨 이야기란, 무슨 이야기인가요?"

모처럼의 배려이긴 하지만 마이코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어려워 보이던데요."

"맞습니다 ......."

토시오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첨을 잘 못한다는 말을 듣고 위축되어 버린 것 같았다. 대답은 당연히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다.

"연분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을 아시나요?"

카오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요. 열애일 거에요."

"알고서 주셨군요."

"카오리 씨의 희망이었으니까요. 슌키치씨가 오늘은 오지 않을 줄 알기도 했고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으니 회사가 바쁘겠죠."

카오리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당신, 대단해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좀 더 센스 있는 대사를 쓰지 않으면 안 돼요. 이런 건 어때요?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토시오는 카오리의 말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광대 같다고 생각했다.

"시도해 보지 않겠어요? 사실은, 진짜 미로가 있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제 미로에 관한 책도 조금 읽었죠."

"그럼 잘 알고 있겠군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카오리는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복도로 나와 현관을 등지고 정원에 면한 문을 열었다. 문은 무거운 기척을 내며 열렸다. 화단으로 나가는 돌계단을 내려가서 화단을 지나면,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로 굽이굽이 연못을 향하고 있었다. 연못은 예상외로 물이 맑고 깨끗했다. 카오리의 모습을 발견한 새하얀 오리 서너 마리가 헤엄쳐 왔다.

"샘이 의외로 풍부해요."

카오리는 한 마리씩 오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못을 따라 왼편으로 가니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 나왔다. 광장 중앙에 높은 담장 같은 울타리가 보였다.

카오리는 울타리 앞에 섰다. 그곳은 울타리가 끊어지고 안쪽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입구인데, 자신 있어요?"

"있습니다."

토시오가 대답했다.

"그럼 안내해주세요."

"카오리 씨는 미로 길을 모르시나요?" 

"몰라요. 어렸을 때는 오빠랑 자주 놀았는데, 그 때는 작은 나뭇가지의 조합이나 길의 느낌으로 절대 길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아이는 그런 직감이 예민하잖아요. 카드 뒷면의 작은 얼룩을 기억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미로에 계속 들어가지도 않았고, 감도 둔해졌을 거예요."

"그럼, 제 손을 잡고 가시죠."

토시오는 울타리 사이로 들어갔다. 카오리는 토시오의 오른손을 잡았다. 토시오는 미로에 들어가자마자 왼손을 뻗어 울타리 왼쪽에 댔다.

"뭐하는 거에요?"

"미로 책에 나온 방법이에요. 이 왼손은 절대로 울타리에서 떼지 말고 걸어야 해요.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왼손을 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있어요. 다만, 조금 돌아갈 수는 있지만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길은 쾌적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울타리 덤불이 길을 좁게 만들고, 나뭇잎에는 어제 내린 비가 아직 묻어 있었다. 서너 번 모퉁이를 돌자,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왼손만이 의지할 수 있는 길잡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가에 타원형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의자요. 길을 잃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돌의 중앙에는 빗물을 통과시키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토시오는 의자 앞을 지나쳤다.

꽤나 긴 길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도착했나요?"

하지만 그것은 둘이 들어왔던 원래의 입구였다.

"실패했네요."

"아닙니다. 자, 아직 손이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죠. 책에 보면 미로를 한 번 빠져나와서 바깥쪽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고 나와 있었어요."

"융통성 없는 방법이네요, 뭐, 괜찮아요."

두 사람은 미로의 바깥쪽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서 이 미로가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뒤에서 카오리가 말했다.

"내기할까요?"

"무엇에요?"

"만약 카츠 씨가 골인하지 못하면 모두가 모였을 때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는 잘못하는데요."

"하지만 미로에는 자신이 있지요?" 

"네, 있어요."

"있어요. 그럼 내가 골인 지점에 도착하면?"

"카츠 씨에게 키스를 할게요."

카오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왠지 모르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자 다시 입구로 나왔다.

"내가 이겼네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토시오는 카오리의 손을 놓았다. 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 미로와 복연결 미로 두 가지가 있어요. 단연결 미로라면 지금의 방법으로도 골인할 수 있어요. 따라서 이 미로는 복연결 미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연결이 뭐예요?"

"이 미로의 울타리를 모두 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지금 끈의 한쪽 끝을 잡고 공중에 매달아 놓았다고 생각하면, 단연결 미로라면 모든 끈이 다 들어올려질 수 있어요. 하지만 복연결 미로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땅 위에 남겨진 밧줄이 생기게 됩니다. 햄튼 코트의 미로 역시 복연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복연결 미로에서도 골인 지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뭐라고요?"

"예를 들어 백묵 등으로 길의 왼쪽에 선을 긋고 가는 거죠. 모퉁이를 돌면 원하는 방향으로 꺾어가는 거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양쪽에 두 줄로 체크된 길을 만날 때가 있어요. 양쪽에 두 개의 선이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갔다가 다시 돌아온 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피해서 지나가야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최단거리의 길을 찾을 수 있고요. 즉, 표시된 길 하나만 따라가면 되니까요."

"좋은 방법이네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잠입한 테세우스는 미녀 아리아드네스로부터 받은 비단실 구슬을 풀면서 나아갔다고 하죠. 테세우스도 분명 같은 생각이었겠지요. 비단실을 가져올까요?"

"백묵을 준비해 왔어요."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백묵의 작은 상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왼손으로 벽을 쓰다듬으면서 갈 수는 없겠지요."

"그럼 나는 잠시 볼일을 보고 다시 올게요."

카오리는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기는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알아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약속이 있어요."

카오리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 최단 거리를 찾아줘요."

라고 말하고는 빙글 돌아서서 달려갔다.


미로를 백묵으로 체크하며 진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땅은 어둡고, 백묵은 쉽게 끊어졌다. 땅에 웅크리고 선을 긋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탓에 토시오는 몇 번이고 일어나서 허리를 크게 펴야 했다. 카오리는 현명하게도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작업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 나중에 경찰 수사관에게 끈질기게 추궁을 당하게 되지만, 십오 분, 삼십 분 정도인 것 같았다.

갑자기 날카로운 폭발음이 들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폭발음은 한 번 뿐이었다. 토시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돌아온 고요함은 이전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작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쿵'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에 이어 물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폭발음으로 인해 청력이 예민해져 있지 않았다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금세 작아졌고, 곧 사라졌다.

토시오는 무언가 모를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느다란 백묵의 선을 따라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렸다. 폭발음의 방향은 물론이고 방향도 알 수 없다.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미로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길을 잘 살펴본 덕에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것만은 면했다.

미로를 벗어나자마자 연못 쪽으로 돌아갔다. 길은 그 길밖에 몰랐기 때문이었다. 언덕길을 화단 쪽으로 올라가려다 마주오던 마이코와 부딪혔다.

"무슨 소리야?"

마이코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르겠어요. 미로 속에 있었으니까요."

"연못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

"연못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로 안에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그럼 전망대 정자 쪽으로 가보자."

마이코는 방금 왔던 화단 길을 되돌아갔다. 저택 앞에 소우지가 서 있었다.

"오, 비스크, 아니, 우다이 씨였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소우지 씨는?"

"제 방에 있었어요. 왠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와 보았습니다."

"정자 쪽으로 가 보시죠."

세 사람은 일단 저택 앞을 나와 주차장이 되어 있는 공터 앞을 지나 정자로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갔다.

정자에 도착하기 전,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붉은 옷이 보였다. 그 옆에는 마사오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부인,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오리는 연못을 바라보며 마사오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토시오는 카오리를 일으켜 세웠다. 토시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카오리의 얼굴 밑에 고인 피였다.

카오리의 얼굴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왼쪽 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알이 부서지고 찢어진 붉은 살덩어리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매캐한 피 냄새 속에서 토시오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카오리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이 사라지고 주위가 하얗게 변했다. 그는 자신이 기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