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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9

2024 블로그 리뷰 결산

안녕하세요. 어제의 "사카나와 일본"을 끝으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스물 한 번째 블로그 리뷰 결산을 진행하겠습니다. 2024년 동안 읽은 총 책 권수는 110권입니다. 카테고리별 독서 권수 및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괄호는 작년):
  • 추리 / 호러: 76권 (61)
  • 기타: 14권 (15)
  • 역사서: 10권 (7)
  • 기타 장르문학: 5권 (4)
  • Food / 구루메: 5권 (3)

1. 추리 / 호러

베스트: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별점 4.0
- 현실이 픽션을 능가한다는 증거.

워스트: 유리병 속 지옥 - 유메노 큐사쿠 : 별점 1.0
- 완독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던 망작.

2. 기타

베스트: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 - 정재승 : 별점 3.5
- 일상 속 과학을 알게 해주는 즐거운 입문서.

워스트: 선량한 차별주의자 - 김지혜 : 별점 1.5
- 비논리적이고 편협한 주장들.

3. 역사서

베스트: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0
- 19세기 살인 사건을 치밀하게 재구성한, 흥미진진한 논픽션.

워스트: 당신이 몰랐던 결투의 세계사 - 하마모토 다카시 외 / 노경아 : 별점 1.5
- 소재는 흥미롭지만 깊이 없는 서술로 일관.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눈의 황홀 - 마쓰다 유키마사 / 송태욱 : 별점 4.0
- 독특한 시각과 감각이 돋보임.

워스트: 별점 2.5이 최하점이라 특별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로봇 소년, 학교에 가다 - 톰 앵글버거, 폴 델린저 / 김영란 : 별점 3.0
- 유쾌한 스토리와 따뜻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청소년 소설.

워스트: 트레몬의 모험 - 로버트 바 / 남원우 : 별점 1.0
- 빈약한 플롯, 단조로운 전개에 최악의 현지화 각색이 더해진 환장의 콜라보. 

6. Food / 구루메

베스트: 딜리셔스 - 롭 던, 모니카 산체스 / 김수진 : 별점 4.0
- 과학적으로 분석한 음식들의 놀라운 이야기들.

워스트: 일본 현지 아이스크림 대백과 - 아이스맨 후쿠토메 / 김정원 : 별점 1.5
- 단순한 정보 나열에 불과.

2024/12/28

사카나와 일본 - 서영찬 : 별점 3점

사카나와 일본 - 6점
서영찬 지음/동아시아

에도시대부터 현대까지 해산물이 일본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다루며,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의미까지 조명하는 책. 총 570여 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을 6장 34항목으로 나누어, 항목별로 해당되는 해산물, 어식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몇 가지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요약해서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정어리는 에도 시대 서민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생선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급 무사 사카이 반시로의 일기에서도 모두 42회 나올 정도로 서민들이 가장 자주 소비하던 음식이자, 당시 가난과 서민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재료였습니다. '서민이 자주 먹는 밥반찬은 무엇인가'라는 테마의 '반즈케'에서도 생선 부문 1위는 이와시(정어리)였다고 하고요.
단순히 식탁 위의 먹거리일 뿐만 아니라, 어비(생선 비료)로 활용되어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업 생산력의 증가는 화폐 경제를 발달시켰고, 쌀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사무라이 정권 체제 기반인 석고제가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정어리의 활용은 단순한 생선을 넘어 일본 사회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이지요.

다시마는 일본 경제와 사회 변화를 이끌어낸 중요한 해산물로, ‘다시마 길’이라 불리는 무역 루트를 통해 일본 상업 경제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홋카이도의 다시마가 교토와 오사카로 수송되던 이 루트는 일본 자본주의의 씨앗을 뿌린 경제적 기초였습니다. 한 차례 항해로 현재 화폐 가치로 따지면 1억 엔 정도를 벌어들였다니 대단하네요. 사쓰마번은 불법적인 대중국 다시마 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무기류를 수입하며, 이 무기가 훗날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즉,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일본 역사를 바꾼 거대한 동력이었던 것이지요. 조금 과장된 느낌이지만 재미있는 발상이었어요.

쿠사야는 독특한 냄새와 풍미를 가진 일본 전통 발효 생선입니다. "어시장 삼대째"를 통해 단순한 건어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쿠사야액'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그리고 쿠사야는 해산물이 사회에 영향을 끼친 사례와는 달리, 당시 열악한 환경이 만들어낸 독창적인 생존 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근대 이전 유배지로 알려진 이즈제도와 고토열도에서는 자원이 부족해 소금물을 재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을 통해 쿠사야액이 만들어지고 쿠사야가 탄생하게 되었거든요. 이는 단순히 발효 음식을 넘어, 생존 전략으로서의 음식 문화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덴푸라는 에도 시대에 스시, 소바와 함께 미식을 대표하던 외식 메뉴였습니다. 값이 싸고 맛이 좋아 에도의 삼미(三味)로 꼽힐 만큼 큰 인기를 끌었지요. 덴푸라와 관련된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 중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있습니다. 건강을 중시하던 이에야스는 교토에서 유행하던 도미튀김을 처음 맛보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바람에 복통을 겪었고, 이후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군요. 그 외 덴푸라가 =일본 음식 문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다수 소개됩니다.

명절 음식으로 서일본에서는 방어가, 동일본에서는 연어가 명절 요리로 소비되며, 이는 지역적, 계절적 특성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방어는 도야마만에서 잡혀 염장되어 집합지인 내륙의 히다, 그리고 주요 소비처로 운송되었으며 귀족과 무사 계급에게 주로 소비되었습니다. 도야마 - 히다 - 다카야마 - 마쓰모토 - 니가타를 이은 U자 모양 지역이 서일본 방어와 동일본 연어를 구획하는 경계선이 되었습니다. 두 갈래 방어 길은 수백 년간 지탱되면서, 각자 고유한 문화가 나뉘는 경계선으로 자리매김하였고요.

가쓰오부시는 2차 대전 당시 남태평양에서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가쓰오부시의 본고장 야이즈는 어선이 징발되면서 마을 기간산업이 존폐 위기에 몰린 탓에, 남태평양의 마리아나제도, 팔라우 공화국, 미크로네시아 연방, 마셜 제도를 포함하는 남양군도로 집단 이주해 가다랑어 잡이와 가쓰오부시 제조를 이어나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난요부시'가 이때 탄생한 것이지요. 야이즈부시와 태평양전쟁 군납에 얽힌 일화도 있습니다. 1942년 해군은 항공대 식량으로 쓰려고 가쓰오부시 가루를 압축해 만든 사각형 조각에 대해 야이즈 업자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업자는 습기와 기온에 따라 부스러질 수 있으니 캐러멜처럼 말캉말캉하게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제안대로 납품 계약이 체결되었고요. 군납 제품명은 '반키리 가쓰오부시'로 '적군 만 명을 벤다'는 의미였습니다.
한편 난요부시는 어떻게 되었냐 하면, 전황이 악화하면서 남양군도의 야이즈 주민은 수시로 징집돼 전장에 투입되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야이즈 주민 620명이 남양군도로 건너가 286명이 전사했고, 46%는 영영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패망은 자업자득이지만, 어민들은 좀 안됐군요.

그 외에도, "술 한잔 인생 한입"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장어 먹는 날 '도요노우시노히'의 유래, '청어 소바'의 유래 등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도판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생선의 생김새, 특징과 소개된 요리들의 실제 모습과 조리법을 그림과 사진으로 설명해주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겁니다. 방어길과 다시마길은 지도가 함께 있었더라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테고요.

또 해산물을 단순한 식재료로 다룬 내용도 많은데, 이 경우는 스시, 타코야키, 사시미나 라멘의 유래처럼 이미 잘 알려진 게 많아서 다소 지루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맥락을 짚어주는 부분도 애매한 게 제법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동과 서를 나누는 방어길입니다. 히다에서 왜 동쪽으로는 방어를 옮기지 않았을까요? 나가노에서 니가타까지의 거리와 도쿄까지는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요. 단순히 동쪽에서는 연어를 먹는 걸로 정해져 있었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이 주제 하나를 더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면,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에 버금가는 이야기가 될 수 있어 보였는데 아쉬웠어요.

그래도 일본의 해산물과 엮인 문화사 서적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로운 읽을거리임에는 분명합니다. 해산물이 일본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12/27

전생 귀족, 감정 스킬로 성공하다 - season 1 (2024) : 별점 1.5점

미래인 A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입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하였습니다. 이세계 전생물과 전략 시뮬레이션의 특징을 결합한 작품입니다. 총 12화 구성입니다.

약소 영주의 아들이자 주인공인 아르스가 사람들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특별한 스킬을 활용하여 인재를 발굴하고, 자신의 영지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중, 약혼녀 리시아의 야망이 높아 경계했지만, 그녀의 야망은 "훌륭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는 설정은 독특했습니다. 기존 이세계물에서 흔히 다루지 않는 감정과 야망의 조화가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약소 영지에서 점차 세력을 키워가는 과정도 꽤 몰입감이 있는 편이고요. 아르스가 '감정' 말고는 능력이 없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단점이 더 큽니다. 우선 아르스가 전생에 샐러리맨으로 살며 게임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왜 그 능력이 이세계에서 감정 스킬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때문에 설정에 몰입하기 어렵습니다. "신만이 아는 세계"처럼 미연시 마스터까지는 아니더라도, 샐러리맨 시절 즐겼던 게임과 실력에 대해서는 선보였어야 이야기가 더 실감났을겁니다.

타인의 능력을 게임처럼 확인할 수 있다는 설정도 너무 흔하고 전형적입니다. 게다가 능력을 숫자나 명칭으로 단순하게 나누고, 이게 곧바로 실적으로 연결된다는건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사람이 그렇게 명확히 분류될 수 없으니까요. 이런게 가능하다면 대기업 입사에서도 MBTI를 측정해서 사람을 분류하여 배치하겠지요. 하지만 그게 가능할리 없잖아요?

아르스의 영지를 위해 모이는 주변 가신들 이야기도 진부합니다. 주인공의 이상에 공감하고 따르는 과정이 지나치게 평범하며, "삼국지" 등 고전 군웅물과의 차별점을 찾기 어려운 탓입니다. 가신 개개인의 서사도 비중이 들쭉날쭉하고요. 특히 로젤과 밀레이유부터는 능력조차 제대로 표현되지 못합니다. 솔직히 로젤은 왜 나오는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능력은 밀레이유와 겹칠 뿐더러, 10살도 안된 아이를 전장에 군사로 투입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연출과 음악도 별볼일 없어서 화려하거나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이 거의 없으며,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엔 부족합니다. 딱 한 가지, 밀레이유와 리츠의 시합에서 추격씬은 조금 웃기기는 했습니다만... 그저 그 뿐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흔해빠진 이세계 전생물의 하나입니다.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더 볼 생각은 없네요.

2024/12/22

황제가 돌아왔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몰락과 부활 (2024) : 별점 1.5점

2024년 최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의 1968년 컴백 스페셜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공연없이 쓰레기같은 영화 출연에 일관하다가, 비틀즈 등 신예 밴드들이 급부상하며 경력이 위기에 처했던 시점에서 다시 한번 방송을 통해 대중 앞에 서게 된 과정을 상세히 보여줍니다. 작년에 영화 "엘비스"를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으로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장점으로는 다큐멘터리에 사용된 풍부한 자료 화면들을 들 수 있습니다. 당연히 1968년 컴백 스페셜에서의 공연 장면이 많은데, 이 장면들은 리마스터링된 듯한 선명한 화질로 멋진 공연을 감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특히 컴백 스페셜의 백미였다는, 엘비스가 팬들과 가까이 교감하며 펼친 잼 세션이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음악캠프"같은, 토크와 음악이 어우러지며 라이브를 펼치는데, 여러모로 엘비스의 스타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아내였던 프리실라 프레슬리를 비롯, 브루스 스프링스틴, 바즈 루어만, 코난 오브라이언, 빌리 코건, 달린 러브 등 다양한 유명인들이 출연하여 엘비스의 삶과 음악, 그리고 컴백 스페셜에 대한 여러 의견을 제공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특히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엘비스에 대해 극찬한 내용은 아주 강렬했어요. 

그러나 별로 재미는 없습니다. 엘비스 영화와 차별화되지 않은 탓이 큽니다. 엘비스가 매니저 파커에 의해 마치 가스라이팅을 당하듯 조종당하며, 저급한 영화 출연에 열중하다 경력을 망치는 과정은 흥미롭다기보다는 지루했고요. 확실히 조롱거리로 보였던, 엘비스가 영화에서 'Old Macdonald had a farm'을 부르는 장면같이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드뭅니다.
또한 제목처럼 몰락, 그리고 1968년 컴백 스페셜 공연을 통해 엘비스가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몰락은 쓰레기 영화에 나왔다는게 전부입니다. 엘비스의 명성과 수익 등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흥행 실패작에 출연했던 팝스타들은 부지기수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몰락했다고 하지는 않지요. 몰락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근거를 제시해 주었어야 합니다.
부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연 장면들은 훌륭했으나, 그 공연이 그의 커리어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거나 설명해 주지는 못합니다. 애초에 몰락에 대한 근거가 없으니, 부활에 대한 근거가 없는건 당연하지요. 이래서야 '몰락과 부활'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전반적으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한 번 더 보는게 나은 선택일거라 생각됩니다. 

2024/12/21

이세린 가이드 - 김정연 : 별점 2점

이세린 가이드 - 4점
김정연 지음/코난북스

“이세린 가이드”는 "혼자를 기르는 법"을 그렸던 김정연 작가의 두 번째 만화로, 음식 모형 제작자 이세린의 이야기입니다. 이세린이 음식 모형을 만들며, 해당 음식과 관련된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며 독백 형식으로 전개되는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주로 가족과의 추억이라던가 현재의 고민,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찾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이 작품의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다양한 음식 모형을 만드는 방법을 상세하게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라면 모형을 만들기 위해서, 시판되는 플라스틱 면에 열을 가하여 구불구불하게 만드는 등, 작가가 실제로 음식 모형을 만드는 일을 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디테일이 뛰어납니다. 
작가 특유의 다소 기발한 상상력도 볼거리입니다. 컬러칩에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는데, 음식 모형 제작가답게 '대만 카스텔라', '진도 구기자', '초당 두부' 등으로 이름을 붙이고 "올해의 색은 광천토굴 새우젓입니다!"라는 발표를 하는 상상을 하는 장면처럼요.
해당 음식이나 음식 모형과 관련된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재미를 더합니다. 한국 라면이 매워진 이유가 박정희 대통령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던가, 국회의사당 건축 당시 해태상 밑에 ‘노블 와인’ 200병을 묻었다는 이야기, 모카포트의 창안자인 비알레티의 유골함이 모카포트라는 사실 등 흥미로운 정보도 많아요. 그동안 음식 관련 책을 많이 읽어왔지만, 이렇게 새롭게 알게 되는 일화들이 계속 있는게 신기합니다.

하지만 단점도 존재합니다. 이 작품은 이세린 혼자만의 독백이 중심이라 드라마틱한 요소가 부족합니다. 그녀의 과거사와 가족사가 그려지기는 하지만, 극적인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여성 서사에 대해 많이 언급되었으나, 이 역시 뻔한 이야기로만 가득 차 있어 특별히 와닿지는 않았고요. 작화도 전작에 비하면 좀 별로였습니다.
무엇보다 음식 모형보다는 음식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기대했던 저에게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다수의 음식이 등장하지만, 마지막의 ‘주말 전골’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음식과 연계된 매력적인 이야기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모형 제작에 더 무게중심이 쏠려있는 탓입니다. 참고로 주말 전골은, 혼자 사는 독신 여성이 재료를 남기지 않고, 설겆이 거리도 최소화하면서 주말 하루를 차려 먹기 위해 고안한 것으로 냄비에 물과 장국을 넣은 뒤, 온갖 재료를 넣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끓여먹는 것입니다. "술 한잔 인생 한입"의 소다츠라면 정색을 할 요리라고 할 수 있지만, 여러모로 와 닿았어요.

결론적으로, “이세린 가이드”는 음식 모형 제작이라는 독창적인 소재와 이를 통해 엮인 감정적 서사를 담아냈으나, 극적인 재미와 음식과 관련된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4/12/20

탈주자 - 리 차일드 / 안재권 : 별점 1.5점

탈주자 - 4점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시카고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리가 불편한 여성을 도우려다가 그녀와 함께 무장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 납치된 리처와 홀리가 도착한 곳은 몬태나의 깊은 숲 속 민병대 은신처였다. 민병대 사령관 보우 보켄은 합참의장의 딸이자 대통령의 대녀인 홀리를 이용하여 미국 정부를 압박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잭 리처는 감금 장소에서 탈출한 뒤, 보우 보켄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탈주자"는 리 차일드의 대표작인 잭 리처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 기준으로는 시리즈 16번째로 읽은 작품이고요.

기존 잭 리처 시리즈와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눈에 뜨입니다. 가버 장군이 직접 총을 들고 나서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팔팔한 모습으로 M16을 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이 신선했습니다.
시리즈 최고의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리처의 파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도 역시나 존재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인 운전사 피터 웨인 벨과 민병대 사령관 보우 보켄의 오른팔인 파울러를 제압하는 장면이 그러합니다.

홀리의 행방을 쫓는 수사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1998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발표된 초창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각도의 흑백 CCTV 화면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복원하여 다른 각도로 찍혀있던 용의자의 정면 사진을 얻어내는 과학 수사가 등장한건 아주 놀라왔어요. 지금은 아마 가능한 기술 같기는 한데, 이걸 1998년 발표 작품에 써먹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연방수사국이 불탄 차량을 단서로 납치범들의 은신처를 좁혀나가는 과정도 설득력이 높았고요. 

연방수사국 요원 두 명이 모두 배신자였다는 나름의 반전도 존재합니다. 이 과정에서 밀로셰비치가 배신자임을 드러낸 후, 브로건이 배신자일 것이라는 리처의 추리가 이어지는데, 그 직후 브로건이 민병대에게 잡혀가는 장면으로 전개되고, 마지막에 리처의 기지로 브로건의 정체가 밝혀지는 흐름도 깔끔합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헬렌이 납치되었지만 선거 때문에 드러내놓고 헬렌을 구출하지 못하는 상황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높았습니다.

합참의장의 딸이자 FBI 요원인 헬렌도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도구를 활용하여 활약하는 모습 덕분입니다. 주체적이면서도 강한, 리처에게 보호받는다기보다는 동등한 관계의 여성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되네요. 실제로 리처의 생명을 한 번 구해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장점들보다 단점이 훨씬 커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잭 리처 시리즈의 기존 매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중반부까지는 리처가 시카고에서 홀리의 납치 사건에 휘말려 몬태나 숲 속 민병대 은신처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과정만 반복될 뿐,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지루합니다. 최초 납치 시, 그리고 이동 중에 탈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리처의 모습도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몬태나에 도착한 이후의 전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백 명 이상의 군사 조직이라는 점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잡혀있는 동안, 리처가 감시를 빠져나간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너무 쉽게 풀려나고 빠져나가서 긴장감을 느낄 여지가 없을 정도에요. 감시병을 물리치는 대신, 엄청난 화술로 속여서 탈출하는 장면은 신선했지만, 이런 수작은 영 잭 리처답지 않아서 별로였습니다.

사건의 전개도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보우 보켄이 헬렌을 납치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그의 계획은 몬태나로 모든 이목을 돌린 후 샌프란시스코 연방 준비 은행을 1톤의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에 헬렌은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독립 국가 선언문을 발표해도 충분히 시선을 끌 수 있었을 텐데, 굳이 헬렌을 납치해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습니다. 헬렌이 합참의장의 딸이자 대통령의 대녀라 한 들, 그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굳이 몬태나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진주만과 같은 사건을 언급하며 전략적으로 필요했다는 설명이 붙지만, 아무도 그들의 범행을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의문이 듭니다. 샌프란시스코를 폭파한 후 성명문을 발표하는게 더 논리적인 전개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911' 테러 전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을까요? 그럴리 없지요.

연방수사국 요원 두 명이 배신자라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게다가 이 두 명만을 선발하여 수사팀을 꾸렸는데 두 명 모두가 배신자였다는건 어처구니가 없어요. 맥그래스 지부장이 정말 유능한 인물인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스팅어 미사일을 훔친 이유 역시 애매합니다. 등장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고, 스케일만 억지로 키운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아군 공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등장하지도 않고요. 설령 아군 공격이 가능했다 한 들, 몬태나에서 농성하며 연방군을 상대할 때 스팅어가 그렇게 강한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이보다는 핵폭탄과 같은 강력한 장치가 더 설득력이 높았을 겁니다.

잭 리처 특유의 시원한 복수와 응징이 부족했던 점도 실망스럽습니다. 잭 리처의 파괴력보다는 저격 실력에 대한 묘사가 더 많고, 보우 보켄은 단 한 발의 저격으로 처리되며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보켄의 잔혹함과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근거없는)카리스마, 이야기에서의 무게감을 고려할 때 이런 결말은 개운하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고어스러운 묘사나 총알 발사 과정에 대한 과도한 설명 등도 분량을 늘리기 위한 불필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55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은 이러한 묘사를 줄였다면 100페이지 정도는 줄어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어판 제목인 "탈주자"도 무슨 의미인지 영 알 수가 없네요. 여기서 탈주한 사람은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반전과 흥미로운 수사 과정은 돋보였지만, 지루한 전개와 비현실적인 설정이 작품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린 졸작입니다.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었어요.

2024/12/15

이상한 책들의 도서관 - 에드워드 브룩-히칭 / 최세희 : 별점 2점

이상한 책들의 도서관 - 4점
에드워드 브룩-히칭 지음, 최세희 옮김/갈라파고스

저자가 소장하고 있는 희귀하고 기묘한 책들을 소개하는 책. 사람의 실제 피부로 만들어진 책같이 쉽게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책들이 가득합니다. 도판이 특히 빼어난 편으로 눈도 즐겁고,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중세와 근대 서양 서적이 중심을 이루지만, 중국의 갑골문과 잉카의 매듭책 키푸 같은 다른 문화권에서 유래된 책들도 포함되어 흥미를 더합니다. 후반부에 소개된 초소형 책들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고요.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책과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입니다. 예를 들어, 그림책 "가장무도회"는 책 속의 암호를 풀면 보석 장식의 황금 산토끼가 묻힌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출간 후 3년 뒤 정답자가 나왔고, 황금 산토끼 역시 정말 존재했다는게 밝혀졌지요. 게다가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니, 아주 환상적인 판매 전략이었다 생각됩니다.
미국 저널리스트 마이크 맥그레이디가 저급하고 선정적인 소설의 인기를 풍자하기 위해 기획한 로맨틱 코미디 소설 "낯선 남자는 나체로 왔다"는 끝없이 섹스 장면만 이어지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출판 사기' 섹션은 더욱 흥미로왔습니다. 하워드 휴즈의 자서전을 가짜로 써 수십만 달러 계약을 따냈던 클리퍼드 어빙의 사기 사건이나, 히틀러의 일기를 무려 60권이나 날조한 독일의 콘라드 쿠야우 사건처럼 단순한 출판을 넘어 범죄적 성격을 띤 사례들을 소개해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단점도 눈에 뜨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책의 구성과 흐름에서 두서가 없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소장하거나 조사한 기묘한 책들을 나름대로 분류하여 소개하고 있지만, 이는 책의 형태나 제작 방식에 지나치게 치우쳐 있습니다.
또 대부분 흥미 위주로 소개하고 있어서 역사적 맥락이나 책의 의미를 깊이 다루는 내용도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피부로 만들어진 책과 같은 사례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단순히 기묘한 소재로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분량도 과도하게 할애되어 있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희귀한 책을 화려한 도판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소개하지만, 두서없는 구성과 얕은 깊이로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도 비슷한 정보는 쉽게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2024/12/14

윤석열 탄핵안 가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지만, 다행히 통과되어 정말 기쁩니다. 그러나 찬성 숫자가 204표에 그친 점은 아쉽습니다. 특히 반대가 85표나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황당합니다. 정권 유지를 위해 내란을 일으킨 내란 수괴가 직위를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일일까요? 게다가 “다음 대통령 이재명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다”라는 주장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발언이 투표로 선출된 선출직 국회의원들에 의해 나왔다는 점에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국민의 힘'이라는 당이 얼마나 문제인지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다음 선거에서는 반드시 국민들이 앞장서서 이 정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탄핵을 반대하며 앞장섰던 윤상현, 나경원, 강명구, 권성동, 우재준, 배현진 등의 인물들은 정치권에서 영원히 퇴출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여튼, 지난 2주 동안 국민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원식 국회의장께서 말씀하신 대로 송년회를 다시 추진하며 즐거운 연말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2024/12/13

노스탤지어 너드의 레트로 하드웨어 - 피터 리 / 김근태 : 별점 3점

노스탤지어 너드의 레트로 하드웨어 - 6점
피터 리 지음, 김근태 옮김, 꿀딴지곰 감수/스타비즈

20세기까지 출시된 다양한 게임기와 PC를 흥미롭게 소개해 주는 책. 게임기의 기본 사양과 조작 방식, 그리고 각 기기의 판매량 및 당시 반응까지 상세하게 다루며, 게임기의 역사를 출시 연대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해줍니다.

가장 큰 장점은 잊혀진 고전 게임기를 미려한 도판과 함께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마그나 복스에서 단순한 그래픽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했던 '스크린 오버레이(TV에 셀로판지를 붙여서 그래픽을 구현)' 아이디어, 시대를 앞서간 마텔 인텔리비젼의 숫자패드 입력 장치 등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80년대 가정용 PC의 대명사였던 애플2의 대항마들도 충실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코모도어의 PC들, 탠디의 TRS-80, 아타리의 8비트 컴퓨터, 영국을 대표했던 싱클레어의 PC 등을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생생한 사진과 함께 설명하고 있어서 자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당연히 닌텐도, 세가, 소니 등 우리에게 친숙한 브랜드의 게임기들도 빠지지 않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오래전 즐겼던 MSX가 무척 반가왔습니다.

풀 컬러인 책의 완성도, 인쇄의 질도 빼어납니다. 편집이 잘 되어 있어서 아주 읽기 편했어요. 레트로 게임 전문가 '꿀단지곰'의 감수로 한글 번역의 신뢰성도 높고요.

그러나 51개나 되는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각각의 분량이 짧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기기별로 5~6페이지에 걸쳐 주요 스펙과 시장 반응, 입력 장치를 소개하고 추천 게임 두 가지와 피해야 할 게임 하나를 언급하는데, 이는 심도깊은 설명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지요.
그리고 피해야 할 게임을 굳이 소개해야 했는지 의문입니다. 이보다는 추천 게임의 도판을 더 크게 보여주는 것이 더 좋았을겁니다.

결론적으로 레트로 하드웨어에 대한 입문서로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20세기 게임기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도 크고요. 매니아에게는 깊이가 부족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개론서가 마찬가지이니 단점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12/08

2024.12.07. 내란의 힘

 


이번 계엄 사태를 통해, 국민의 힘은 국가와 국민 따위는 내려놓은 내란 동조자, 반역자, 부역자들로 이루어진 당임을 증명했다. 앞으로 이 당을 찍는 인간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겠다. 제 정신이 아니니까.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기도 했고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12/06

헌책방 기담 수집가 - 윤성근 : 별점 2점

헌책방 기담 수집가 - 4점
윤성근 지음/프시케의숲

헌책방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인 윤성근 작가가 특별한 책을 구하려는 손님의 사연을 수집한 뒤, ‘사랑’, ‘가족’, ‘기담’, ‘인생’이라는 네 가지 주제로 쓴 29의 꽁트가 수록된 책입니다. 

헌책방을 사랑하기에 관심이 많았던 책으로 소재, 그리고 이야기 전개 방식은 추억 속 요리를 재현해주고 관련된 사연을 들려주는 만화 "추억을 파는 식당"과 똑같은데, 이를 '헌책'으로 대신했다는게 특징입니다. 짧고 간결한 이야기들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크고요. 자주 찾았던 헌책방인 '공씨책방'이나 '숨어있는 책' 등이 언급되는 것도 반가왔습니다. 특정 책의 정체를 추리하고, 당시 책을 출간했던 출판사 영업 사원은 책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등 책을 구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했습니다. 

하지만 무려 29편이나 되는 이야기가 수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재미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남는건 단 한 편도 없고, 읽다가 졸릴 정도였어요. 이야기의 설득력이 낮은 탓입니다. "꼬마 니꼴라"를 보고 흉내를 내다보니 학교의 인기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에요. 학교 분위기와 상황이 아예 다른데 뭘 흉내내서 인기를 끈단 말입니까?
등장하는 책들도 오래전에 절판된 잊혀진 소설이거나, 지금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인 경우가 많아 희귀함이나 새로움을 느끼기도 어렵고, 책의 매력도 잘 전해주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도 읽어보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책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아이디어는 좋은데 전혀 살리지 못했습니다. 후속작이 있는 듯 한데,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4/12/01

숨겨진 건 죽음 - 앤서니 호로위츠 / 이은선 : 별점 3점

숨겨진 건 죽음 - 6점
앤서니 호로위츠 지음, 이은선 옮김/열린책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명 이혼 전문 변호사 리처드 프라이스가 와인병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현장에는 초록색 페인트로 '182'라는 숫자가 남겨져 있었다. 탐정 호손은 사건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계약한 작가 호로위츠와 함께 수사에 나섰다. 
리처드 프라이스는 직전 맡았던 록우드 이혼 사건으로 록우드의 전처 안노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고, 6년 전 동굴 탐험에서 사고사했던 친구 사건도 사건과 관계가 있는게 아닐까 의심되었다.
호로위츠는 사건을 분석하다가 범인은 록우드라고 확신하고 이를 경찰에 제보했지만, 호손은 전혀 다른 사람이 진범이라고 말했다...

"숨겨진 건 죽음"은 앤서니 호로위츠의 전직 형사 호손과 작가 호로위츠 콤비가 등장하는 시리즈입니다. "맥파이 살인사건"이 참 좋았기에 집어들었는데, 두 번째 작품이더군요.

"맥파이 살인사건"처럼 현대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입니다. 과학 수사가 발달한 오늘날에도 본격 추리 소설의 전통적 요소를 훌륭히 구현하여 독자에게 치밀하게 구성된 스토리와 탄탄한 추리의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특히, 이야기 초반부에 제공되는 단서들이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피해자의 이웃 노인이 본 '손전등을 든 남자', 집 앞에 남은 기묘한 흔적, 피해자가 남긴 마지막 말, 그리고 사건 현장에 있던 두 개의 콜라 같은 단서들은 모두 범인을 지목하는 열쇠가 됩니다. 손전등과 흔적은 '자전거'를, 피해자의 말과 콜라는 '미성년자'를 연상하게 하여 범인이 등장인물 중 유일한 소년인 콜린이라는걸 드러내거든요.
마지막에 데이비나가 진범인지, 콜린이 진범인지를 풀어내는 호손의 추리도 참으로 명추리였습니다. 

물론 이를 곧바로 밝히지 않고 호로위츠와 함께 독자도 잘 속입니다. 여러 용의자가 각기 그럴듯한 동기와 함께 등장하는 덕분이지요. 록우드, 안노, 데이비나 등 모두가 사건과 얽힌 비밀을 품고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록우드가 수백만 파운드의 와인 컬렉션을 숨겼던 것, 안노는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작가지만 사실 남성 판타지를 자극하는 포르노적 소설로 대박이 났다는 비밀이 있다는 것, 6년 전 동굴 탐험 사고에 대한 진상 등은 모두 사람 한 명은 충분히 죽일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비밀들이기도 하고요.
독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 데이비나가 벌인 연극도 좋았어요. 콜린의 행동에 대해 갑자기 말을 바꾼다던가, 세탁기 앞을 가린 등의 사소한 디테일들인데, 이게 다 이유가 있었다는게 놀랍기도 했고요.

셜록 홈즈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도 눈에 띕니다. 피해자 집 벽에 적힌 '182'는 "주홍색 연구"의 'RACHE'를 연상시키고, 그 외 사건 중 등장하는 여러 설정이 셜록 홈즈의 모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본적으로 '런던을 무대로 작가인 조수와 함께 활약하는 명탐정'이라는 설정과 호손이 사소한걸 토대로 일상 속 진상을 짤막하게 추리해내는 요소 - 대표적인건 서두에 호로위츠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걸 추리해내는 장면 - 도 셜록 홈즈와도 똑같지요. 이는 고전 추리 소설 애호가에게는 더욱 특별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작가 앤서니 호로위츠 본인이 왓슨으로 등장해서 호손에게 농락당하고, 수사에 이리저리 치이는 묘사도 큰 재미 요소였고요.

하지만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존재합니다. 우선, 범인 콜린이 남긴 메시지 '182'가 젊은 세대의 표현인 '너를 미워해(I Hate You)'에서 온 것이라는 점은 한국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해석하기는 어렵기에 추리의 재미를 반감시킵니다.
또 독자를 속이기 위한 억지 전개가 과한 편입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처음 경찰 심문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작가 안노와 편집자 돈이 사건 당시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거나, 피해자의 남자 애인이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했다는건 지나치게 부자연스럽습니다. 캐릭터들도 대체로 과장되어 있어서 현실적이지 못했고요. 근육위축증에 걸린 소년 비벡이 호로위츠의 폰을 해킹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런 불필요한 설정들은 분량 늘리기에 불과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결말도 급작스러운 편이며, 주요 용의자가 몇 명 안되는데 경찰 수사로 이를 밝혀내지 못한 것도 이해하기는 어려운 점입니다. 콜린이 현장에서 그렇게 완벽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울 수 있었다는건 영 와 닿지 않았어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뛰어나고, 유쾌하면서도 흥미로운 전개는 큰 만족감을 줍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시리즈 1편도 찾아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