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5/11/30

화과자의 안 - 사카키 쓰카사 / 김난주 : 별점 3점

화과자의 안 - 6점 사카키 쓰카사 지음, 김난주 옮김/블루엘리펀트

모두 5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가벼운 일상계 단편집입니다. '키 150cm, 체중 57kg'의 주인공 우메모토 교코가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 백화점 지하에 있는 화과자점 "미쓰야"에서 일하게 된 뒤 만나는 소소한 사건들을 다룹니다.

잘 모르는 작가의 작품으로 충동적으로 읽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꽤 괜찮았습니다. 쉽게 읽히는 재미는 물론 추리적으로도 제법이며 잘 몰랐던 화과자에 대한 현학적인 매력도 넘친 덕분입니다.

캐릭터들의 매력과 배분도 아주 적절합니다. 사건 해결은 괴인 츠바키 점장이 맡고, 이야기는 우메모토 교코가 빠른 눈치와 추진력으로 템포 있게 유지시키며, 화과자에 대한 지식은 게이 성향이 있는 화과자 장인 지망 베테랑 아르바이트생 다치바나가 덧붙여 주는 식으로 황금 분할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연산 - 파워 - DB의 3위 일체네요.

허나 화과자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추리를 따라갈 수 있기에 평범한 일반인, 그것도 한국인 독자가 추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일상계이지만 전문가적 지식이 발휘되는 작품이라는 측면에서는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나 "명탐정 홈즈걸"과 같은 스타일이지요.
물론 현학적인 재미로 보상해 주는 만큼 단점이라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 아주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갤러리 페이크"가 될 테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전문가 일상계 추리물의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추리소설에 입문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네요. 이야기도 소소하니 따뜻하고 즐거우며 맛있기까지 하니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각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화과자의 안"

회사원 아가씨가 생과자 "오토시부미" 1개에 "투구" 9개를 사간 이유에 대한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

츠바키 점장은 오토시부미를 특정 인물 1명 앞에 내어 놓을 필요가 있었으며, 그 이유는 "오토시부미"의 사전적 의미 —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을 쓴 무기명의 문서' — 에 따라 그 과자를 받는 사람은 뭔가 부정이 있다!라고 다도에 박식한 상관에게 넌지시 고하기 위함이라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회사원 아가씨가 과자를 사러 왔을 때에는 사건이 해결된 것을 알아차리고 '액막이용 과자'인 "물의 달"을 바로 내어주었지요.

화과자에 대해 잘 모르면 추리에 동참할 수 없다는 단점은 있지만 시리즈의 시작으로 캐릭터들의 소개와 더불어 이 작품이 화과자에 대한 일상계 추리물이구나! 라는 것은 충분히 알려줍니다. 현학적인 재미도 넘쳤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1년에 한 번 하는 데이트"

견우와 직녀가 만난 뒤의 칠석 과자 "까치"를 사러 온 여대생은 대만에 있는 남자친구와 원거리 연애 중으로 비행기를 타야 했고, 단골인 스기야마 할머니가 사 가는 과자는 사실 불단에 올릴 목적이었다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와 동일한 문제가 여전합니다. 일반인이 추리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그나마 여대생의 원거리 연애 에피소드는 독자도 추리할 만한 여지가 있긴 했습니다만, 스기야마 할머니 이야기는 정말 무리예요. 특히 할머니의 독특한 복장이 사실은 화과자의 "상제" 색 조합과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일반인의 영역은 아니니까요.

그래도 전문가적 지식을 토대로 한 일상계 추리물의 교과서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캐릭터들이 나름 성장하기도 하고, 츠바키 점장의 개인사도 살짝 엿보이는 등 읽는 재미도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는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싸리와 모란"

야쿠자가 와서 시비를 거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치바나의 사부가 가게의 전문성을 시험하느라 이런저런 전문 용어를 사용한 것이라는 이야기.

요약된 줄거리 그대로 추리의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 그냥 화과자에 대한 정보 전달이 주인 탓에 일상계 추리물이라기보다는 "갤러리 페이크"에 더 가까워요.

허나 워낙 재미있는 내용들이라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아주 재미있었어요. 화투에 멧돼지와 싸리가 반드시 같이 그려져 있는 이유가 멧돼지 = 보탄(모란) → 모란떡은 오하기 → 하기는 싸리, 그래서 같이 그린다라는 언어유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인데, 다른 작품에서 접하기 힘들 뿐 아니라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야쿠자스러운 말투와 엮어 재미나게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해서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신 캐릭터인 다치바나의 사부도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작품과 잘 어울렸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스위트 홈"

백화점 내 양과자집 "황금사과"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가쓰라자와가 팔다 남은 케이크를 "오빠"에게 가져가는 이유는?

"오빠에게 가져간다"는건 착각이었고 케이크를 "오빠", 즉 나이가 많은, 전날 팔다 남은 케이크라고 이야기했다는 내용인데 실제 자료 조사가 토대가 된 듯한 일종의 언어유희가 돋보였습니다. 화과자에 대해 몰라도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도 큰 장점이지요.
곁들여 주류 코너에서 일하는 구스다 씨가 떨이 도시락을 사재기한 이유가 함께 밝혀지는 구성도 참 좋았습니다.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아울러 양과자와 화과자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양과자와는 다르게 화과자는 이 나라에서 나는 재료를 사용해 이 나라의 기후와 습도에 맞게 만들어 관혼상제를 채색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는 것인데 정말 공감됐습니다. 한천은 여름에도 녹지 않는다는 일종의 화과자 부심(?)도 귀여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쓰지우라의 향방"

미쓰야에서 판매한 새해맞이 과자 "쓰지우라" 안에서 이상한 암호문이 나와 그것을 해독한다는 내용으로 암호 해독이 중심인 작품입니다.

종이는 누군가 바꿔치기한 것에 불과하고, 암호문은 일본어로만 풀어낼 수 있는 것이라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화과자가 중요하게 사용되지도 않아서 시리즈와 연계성도 조금 떨어지고요.

점장이 기다리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2화에 언급된) 설명되어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는 하지만, 점장의 연인이었던 과자틀 장인 "형풍"이 죽기 전 남긴 과자틀 반쪽을 안짱이 골동품 벼룩시장에서 건진다는건 우연이라도 너무 심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도 별로고 작위적이라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여러모로 마무리가 약한 느낌입니다.

2015/11/28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 - 미야모토 미치코, 나가사와 마코토 / 고세현 : 별점 2점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 - 4점
미야모토 미치코 지음, 고세현 옮김, 나가사와 마코토 그림/라임북

일본의 작가 미야모토 미치코가 남편 나가사와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몇 개월의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집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이 아니라 "부르조아의 우아한 식탁"으로 바꾸었어야 합니다. 1990년대 초반,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난 직후에 이런 생활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데다가 돈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전원 생활을 위해 잠깐 머무는 곳이 백작가의 빌라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부자 친구들 — 귀족 딸인 친구 줄리아나, 뉴욕 시절 친구로 화상으로 거부가 된 토마조와 네루 커플 등 — 에 대한 일화들 때문입니다. 친구 토마가 광대한 산과 땅을 산 뒤 그곳의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는 것 처럼요. 그냥 대자연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손을 댈 만큼 댔다는 스케일부터가 남달라 어리둥절할 정도예요.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설탕을 먹지 않는 등의 까탈스러운 식습관도 그렇고요.
하기사 저자의 여행 비결은 시간과 몸이 여유롭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건데 이거야말로 큰돈이 드는 여행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물론 아주 건질 게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건 함께 실려 있는 저자의 남편 나가사와 마코토의 그림들입니다. 스케치와 간단한 수채화인데 그야말로 최고더라고요. 저도 이런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또 등장하는 음식들에 대한 묘사 역시 기가 막힙니다. 소개된 것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1.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먹는 자가제 피자 — 그중에서도 도우에 루꼴라만 얹고 올리브유만 더한 단순한 것
  2. 간단하지만 풍성한 샐러드 — 올리브유, 레몬, 발사믹 식초, 소금, 후추 등을 입맛대로 뿌려 먹음
  3. 그롤라 커피 — 원두를 갈아 만든 에스프레소 커피를 주둥이가 여섯 개 나 있는 토기처럼 생긴 물건에 붓고, 커피에 설탕과 그라파를 넣어서 오래 휘저은 후 성냥불을 붙여 그라파의 알코올 성분을 태운 뒤 주둥이에 각자 입을 대고 먹는다
  4. 간단한 파스타들, 그중에서도 친구 네루가 저자를 위해 만든 페스토 소스 — 잘게 썬 바질과 마늘, 파르미자노 레자노 가루와 최고급 올리브유와 소금을 한데 섞는다. 생크림은 저자의 바람으로 넣지 않고 대신 버터를 넣어 만든다 — 로 만든 트로피에테(뇨키의 일종)

아, 정말이지 한 번 먹어보고 싶은 것들이에요! 저자 말대로의 토스카나 요리의 3대 특징 — 복잡하게는 하지 않는다 / 너무 열중하지 않는다 / 별로 미묘하지 않게 한다 — 에 기반한, 신선한 재료에 기대어 대충 만든다는 요리법도 와 닿고요.
아울러 귀족이 사는 곳이라 그렇지 별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목 그대로 전원 생활이기는 해서 거부감이 좀 덜하긴 했습니다. 특히 백작가의 사위 필리포의 삶은 부르조아보다는 아라카와 히로무의 "백성 귀족"이 떠올랐습니다.

허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으며, 특히 부르조아 사상에 기반한 내용들은 영 거북하기만 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토스카나에서 우아한 생활을 즐기려면 부자여야 한다는 씁쓸한 결론만 남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5/11/24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가면 산장 살인 사건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유키는 사고로 죽은 약혼녀 도모미의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그녀 가족의 산장으로 향했다. 도모미의 부모, 오빠와 친지 등 모두 여덟 명이 산장에 모인 당일, 두 명의 은행 강도가 침입해서 그들 모두를 감금했다. 은행 강도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던 중, 도모미의 사촌 동생 유키에가 칼에 찔려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꽤 인기 있는 작품인데 읽는게 늦었네요. 부유한 가족, 그리고 그들과 엮인 인물들이 모인 폐쇄된 산장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룬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설정의 흥미진진한 본격 추리물입니다. 

두 개의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첫 번째 사건, 즉 도모미의 죽음은 마지막에서야 진상이 설명될 뿐더러 범인은 관계자 증언밖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 사건은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설정일 뿐이지요. 허나 두 번째 사건인 유키에 살인 사건은 고전 본격물의 원칙에 충실합니다. 일종의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진 기묘한 범죄, 용의자는 공간 내 모두라는 상황 덕분입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유키에를 살해하는건 인질인 아쓰코 외의 모든 사람들이 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전의 상황, 즉 레이코가 몰래 적은 SOS를 지우고 타이머를 망가뜨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주목한 뒤 그 사람이 범인일 것이다!라는 식으로 연결되는 추리의 흐름이 설득력 높기 때문입니다. 타이머 관련 트릭 - 범인이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시간만 바꿔 놓은 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망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부순 것 - 도 간단하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허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탓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노부히코의 마지막 증언 - 레이코가 일기 페이지를 입에 넣었으며 그 페이지에 진상이 적혀 있을 것이다 - 부터가 그러합니다. 칼에 찔렸는데 죽어가면서도 일기장의 특정 페이지를 찢어서 입에 넣는다? 인간의 정신력이 아무리 놀랍다 하더라도 이건 무리지요. 그리고 일기에 뭐라고 적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필케이스 약통의 약이 정상적인 것으로 밝혀진 이상 큰 증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노부히코가 감금된 상태에서 유키에를 죽여야 하는 타당성 역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누군가를 살해한다? 탈출 후 유키에를 따로 손보는 게 상식적입니다. 최소한 풀려난 뒤 죽이고, 범인들에게 뒤집어 씌우는게 훨씬 나았겠지요. 진범을 밝히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는 후지의 협박 역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목격한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범인을 밝혀냈다고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노부히코가 자살한 시점에서는 협박할 건덕지가 사라져 버렸으니 다 죽이는 게 당연합니다.

하긴, 이 모든 게 거대한 연극이니 작위적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지요. 그보다는 다카유키를 옭아매기 위해 이런 추리쇼를 펼친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더 큰 문제입니다. 단지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도모미의 행동을 유키에가 보고 들었다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했을까요? 다른 추리 소설에서는 복수를 하고도 남을 증거인데 말이지요. 기껏 그걸 보강하려고 거대한 연극을 꾸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부터 범행 증명이 목적이었다면 이런 성공 가능성도 떨어지는 연극을 벌이는 것 보다는, 산장에서 다카유키를 제압하고 고문을 통해 자백을 받는 게 비용과 시간, 그리고 기분 등 모든 측면에서 나았을 겁니다.
마지막에 노부히코를 다카유키가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즉 연극이 실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다카유키 역시 그 순간에 노부히코를 죽인다 해도 빠져나가는건 거의 불가능했을 텐데,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발악을 하는게 납득이 되지도 않았고요. 약혼녀를 죽일 때에도 남이 슬쩍 보고 다른 약임을 눈치챌 수 있는 약으로 바꿔칠 정도로 무신경한 놈이니 이런 대책 없는 행동도 당연하다고 본 걸까요?

아울러 상황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어서 긴장감을 떨어트린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일 뿐더러 설정이 완전 말도 안 됩니다. 은행 강도 같은 케케묵은 설정이 통할 리 없어요. 핸드폰 세대에게는 도저히 먹힐 수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읽으면서 후지가 죽은 줄 알았던 레이코고, 그녀가 사람들을 동원해 도모미 사건의 진범을 밝히려고 하는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이야기였다면 좀 더 괜찮지 않았을까 싶네요.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인데, 화자라 할 수 있는 다카유키가 도모미 살해를 꾸몄다는 것 역시 반칙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과 스토리를 보면 영상물, 혹은 만화가 더 어울립니다. 유일한 가치라면 모든 잠재적 범죄자들은 최후의 그 순간, 즉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속영장이 청구될 때까지는 무조건 무죄를 주장하며 헛짓거리하지 말고 버티라는 교훈 하나만큼은 제대로 전달해 준다는 것? 그 외의 무언가는 딱히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덧붙이자면, 범인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 도주 중인 흉악범을 가장하고 범행을 저지른다는 유사 설정의 작품인 소년탐정 김전일의 "비련호 살인사건"과 비교해 본다면, 누군지는 모르지만 다 죽이겠다!("비련호 살인사건") 와 누군지는 알지만 확실치 않으니 확인해 보자!("가면산장 살인사건")의 차이인데 저는 "비련호 살인사건" 쪽에 점수를 더 주고 싶네요. 

그나저나, 최근 읽은 작품 중에서는 가장 리뷰하기가 힘들었는데 이유를 모르겠군요. 리뷰는 별거 없지만 거의 2주에 걸쳐 썼습니다. 리뷰 완성도도 낮고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지만 이게 한계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2015/11/23

야경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2.5점

야경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6편의 단편이 수록된 요네자와 호노부스탠드얼론 단편집.

요네자와 호노부는 널리 알려진 "빙과"같은 일상계 단편의 강자인데, 여기 수록된 작품들은 일상계라고 보기 어려운 묵직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대체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고요.

그래도 일상계스러운 분위기가 살짝 묻어나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추리적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석류"라는 용서하기 어려운 쓰레기 망작이 하나 섞여 있기는 하지만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무난하기에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이네요. "만원"이 워낙 잘 빠진 작품이라 멱살잡고 평점을 올려놓은 감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요네자와 호노부 팬 분들께 추천드릴 만합니다. 이런저런 상을 탄 이유는 확실히 있는 듯싶군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야경"

신입 경찰 가와토 히로시의 순직 사고의 진상은? 모든 것은 가와토의 의도로, 목적은 그가 실수로 발포한 총알을 은폐하기 위해서였다. 가와토는 불륜을 가장하여 다바라를 자극한 뒤 발포하여 살해하고, 자기가 이전에 쐈던 총알을 현장에 버리는데 성공했지만 다바라의 믿을 수 없는 생명력 탓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었다...

가와토 죽음의 진상을 파출소장 야나오카 경사의 시점으로 풀어나갑니다. 무려 두 명이나 사망한 무거운 내용이지만 분위기는 묘하게 일상계에 가깝습니다. 캐릭터가 선명하고 '실제 있을 법하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문제아 가와토보다는 경찰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자행한 야나오카 경사가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놈, 정말 나쁜 놈이더라고요.

딱 한 가지, 가와토는 정말로 경찰에 맞지 않는 소심한 민폐덩어리였다는 결말이 약간 찜찜하나 그 외 전개는 깔끔한 수작입니다. 역시나 일상계 전문가 요네자와 호노부답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가와토가 실수로 발포했다는 것에 지나친 우연이 겹쳐 있었다는 점에서 감점하지만, 읽을 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사인숙"

사라진 연인 사와코를 찾아 머나먼 시골 온천여관으로 향한 "나". 그곳은 자살의 명소로 알려진 곳으로, 누군가 흘린 유서를 발견한 사와코가 어떤 손님이 죽으려 하는지 찾아달라고 부탁하는데...

유서에 쓰인 글귀 중 "오늘로 이 년", "오늘 죽었다고 증언해 주시면 여한이 없겠습니다"를 통해 자살의 목적은 보험이지만 보험을 위해서는 이름과 날짜라는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다는걸 알아낸 뒤, 나머지 부분은 물에 흘려보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좋습니다. 사와코의 힘겨움을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 때문에 사건에 몰두하는 "나"의 심리 묘사 역시 설득력이 넘치고요. 마지막에 자살을 목적으로 한 사람이 사실은 두 명이었다는 반전도 의외성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유카타 색깔이라는 단서는 많이 부족했으며, 사와코가 그렇게까지 자살을 막고 싶었다면 입구 쪽에 CCTV를 설치하면 되는 문제인데 이게 왜 사건이 되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걸 보면 사와코도 결국 죽음을 홍보에 이용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러한 사와코의 기만 때문에 감점하여 별점은 2.5점입니다.

"석류"

딸 유코가 아버지 나루미를 남자로 느낀다는 야설 수준의 이야기. 둘이서 석류를 먹었느니 어쨌느니 하는, 두 번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찝찝하고 기분 더러운 내용입니다. 유코가 쓰끼꼬를 매질한 반전 정도는 기억에 남으나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는 쓰레기입니다. 별점은 없습니다.

"만등"

이케다 상사의 이타미와 OGO의 모리시타는 개발도상국 방글라데시의 가스전 개발을 위해 이를 거부하던 마을 장로 알람을 살해했다. 그러나 모리시타는 죄책감에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향했고, 불안해진 이타미는 그를 쫓아 입을 막으려 하는데...

모리시타가 콜레라에 걸렸으며 전 일본이 그를 쫓는다는 아이디어가 아주 좋았어요. 이타미와 모리시타가 연결되어 있다는건 아무도 모르지만 공항 검역에서 이미 이상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이타미가 콜레라에 걸렸다면, 원인은 모리시타와의 만남이라는 인과관계가 형성되니까요. 그리고 모리시타의 과거 행적을 쫓으면 잡점이 드러날 테니 이타미는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 외에도 무자비한 자원 개발을 반대하는 알람의 사고방식 등의 디테일도 볼 만했습니다.

딱 한 가지, 급작스러운 모리시타의 심경 변화가 제대로 그려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단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큰 흠은 아닙니다. 독특한 아이디어의 현대판 개미지옥 이야기로 별점 3점은 충분합니다.

"문지기"

오다와라에서 세 시간, 이즈 반도의 아마기 산맥을 넘어가는 즈난정을 향하는 가쓰라다니 고갯길에서 벌어진 네 건의 연쇄 교통사고 - 파칭코 프로 다카다, 사학과 학생 오쓰카, 기둥서방 다자와와 동거녀, 공무원 마에노가 죽은 사고 - 의 진상은 무엇인지?

전개도 흥미롭고, 할머니의 수다가 결국 진상에 이르게 만드는 여러 가지 복선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범행, 즉 살인일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고, 흑막은 모든 것을 보았다는 휴게소 할머니일 것이라는 점 역시 너무 뻔해서 긴장감은 다소 떨어집니다. 또 진상 - 모든 사건의 원인이 된 다카다의 죽음은 할머니 딸이 죽인 것이며, 흉기는 길가의 석불 행신으로 목이 당시 떨어져 나갔는데 그것에 주목한 사람들을 차례로 죽였다는 것 - 의 설득력이 낮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석불 사에노카미 목이 떨어진 정도가 무슨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몇 년 전 사건인데 말이죠. 물론 할머니의 노파심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납득하기는 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만원"

학창 시절 흠모했던 하숙집 여주인 다에코가 살인사건 피의자가 되자 변호사인 주인공 후지이가 그녀를 위해 재판에 나서는데...

가보인 족자에 피가 튄 것을 사건에 고의성이 없다는 유력한 정황 증거로 사용하지만(그렇게 귀중한 물건을 피해자를 만나는 자리에 내놓을 리가 없다) 사실 족자에 피가 튀도록 한 것 자체가 의도였다는 진상이 놀라웠던 작품입니다. 해당 물건이 중요 증거로 검찰에 압수되도록 하여, 다른 재산은 모두 차압당했지만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겁니다. 남편 우카와 시게하루가 병사한 뒤 상고를 포기한 것은 보험금으로 빚을 갚을 수 있어서 족자를 빼앗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고요.

이렇게 법 자체를 변호사도 모르게 범인이 교묘하게 이용했다는 점이 정말 돋보였습니다. 다에코가 주인공과 법률 관련 이야기를 들으며 법에 대해 지식을 빨아들였다 정도의 묘사만 있었어도 아주 완벽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런데 딱 한 가지, 상고를 포기한 것은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죽어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보다 빨리 출소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됩니다. 뭔가 타이밍 문제가 있었나 싶습니다.

그래도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법의 맹점을 다룬 단편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살의" 급이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15/11/22

오무라이스 잼잼 6 - 조경규 : 별점 2.5점

오무라이스 잼잼 6 - 6점
조경규 글.그림/씨네21북스

조경규 씨의 웹툰. 얼마 전 "박스셋트 유감"이라는 글을 올리긴 했지만, 만화 자체만 놓고 보면 국내 음식 관련 만화 중 손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발간된 걸 알고 주저 없이 구입했습니다.

이미 5권 분량, 100화가 넘는 이야기가 출간된 만큼 내용과 분위기 면에서 새로운 점은 많지 않습니다.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던 장단점은 거의 그대로에요. 하지만 6권만의 특징을 조금 언급하자면, 우선 이전 권에서 보였던 장단점이 많이 희석되었다는 점 입니다. 우선 장점이라고 했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묘함’이 이번에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 가족과 무엇을 함께 먹었다는 식의 일상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나쁘진 않았지만, 5권에서 이런 기묘함이 강하게 느껴졌던 터라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요.

반대로 가장 큰 단점으로 여겼던 가족 이야기가 그렇게 거슬리지 않았던 건 다행이에요. 부록이나 보너스가 예전처럼 가족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지는 않은 덕입니다. 아내에 대한 보너스 만화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는 허용 범위라 생각합니다. 물론 여전히 재미는 없었습니다.

또 이전 권에 비해 훨씬 두꺼워졌는데 - 4, 5권이 488쪽인데 6권은 568쪽 -, 24화 구성이라는건 같지만 보너스 만화가 꽤 길게 실려있는 등 부록과 보너스가 강화된 덕분입니다. 부록과 보너스 이야기들—아보카도 키우기, 풍선껌 불기, 결혼식 주례 에피소드, 클래지콰이와의 인연 등—과 몇 개 안 되지만 음식 관련 레시피 소개—절편 떡볶이, 집에서 만드는 파라타, 부위별 수육 도감, 스모어 만들기 등—이 단순 사진이 아닌 만화 형식으로 그려져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사진과 글 중심의 탐방기와 인터뷰도 상대적으로는 줄어든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묘한 재미는 줄어들었지만, 이전 권에 비하면 공짜로 볼 수 있는 웹툰 대비 소장 가치는 소폭 상승했습니다. 가격도 천 원 올랐으나 내용에 비하면 적정한 가격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내용이 웹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것이니 구입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야 겠지만요.

덧붙이자면, 초판 부록으로 들어 있는 빵 그림은 대체 왜 들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것은 조금 구겨져서 오기도 했고요. 혹시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2015/11/21

W의 비극 - 나쓰키 시즈코 / 추지나 : 별점 2.5점

W의 비극 - 6점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손안의책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학 재벌 와츠지 가문의 딸 마코의 가정교사인 이치조 하루미는 마코의 박사학위 논문을 도와주기 위해 일족이 휴가를 보내는 후지 5대호, 야마나카 호반의 별장을 찾았다. 그러나 그날 밤, 비명 소리와 함께 와츠지 요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마코는 할아버지에게 강간당하기 전, 저항하다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말았다고 고백했다. 일족은 추문을 덮고 마코를 지키기 위해 외부에서 강도가 잠입했다고 진상을 조작하려 하는데...

나쓰키 시즈코의 대표작입니다. 오래전 절판본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었는데, 고맙게도 재간되었더군요. 몇 년 전 일이긴 하지만 다시 읽게 되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좀 의외였습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일까요? 예전에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더군요.

물론 아래의 "민법 제 891조 2항"에 기초한 설정과 진상은 여전히 괜찮습니다.

* 민법 제 891조 아래에 해당하는 자는 상속인이 될 수 없다.
2. 피상속인이 살해당했음을 알고 이를 고발하지 않거나 고소하지 않은 자. 단, 그자에게 시비를 변별할 능력이 없을 때나 살인범이 배우자 또는 직계 혈족이었을 때에는 예외로 한다.

유산 상속이 진짜 동기라는 사실을 숨기고 별장에 모인 일족과 관계자들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이 진상을 독자에게 교묘하게 숨기고 경찰과의 두뇌 싸움을 그린 도서 추리물로 착각하게 만드는 전개도 훌륭합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후지 5대호 지방 중 아사히가오카 야마나카코촌을 무대로 여정 미스터리 분위기를 선보인 것도 좋고요.

하지만 민법 제 891조 2항의 존재가 300여 페이지의 분량 중 약 200페이지, 즉 2/3 지점에서 드러나는게 문제입니다. 그 이후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흘러가며, 급격히 힘을 잃거든요. 이어지는 다쿠오의 조사로 '배우자 또는 직계 혈족은 예외'라는 점까지 밝혀지면서, 이 조항에 해당하지 않는 인물이 단 두 명만 남게 되어버리게 되어 더 뻔한 전개로 흐르고요.

게다가 마지막에 범인인 와츠지 미치히코와 이치조 하루미가 1:1로 담판을 짓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냅니다. 오래된 서스펜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같은 작위적인 전개의 끝판왕이었어요. 악당이 아무런 실익도 없이 진상을 고백하며 여주인공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녀를 흠모하는 백마 탄 기사가 나타나 구해준다는건 지금은 멸종해버린 설정이라 생각되는데 말이지요. 이전까지 별다른 암시가 없던 하루미와 쇼헤이에게 갑작스레 연애 감정을 부여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도, 쇼헤이는 어떻게 하루미가 어디 있는지 알았을까요? 그것도 경찰보다 먼저요?

상황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와츠지 미치히코는 요시에만 잘 회유해서 입을 다물게 한 뒤, 마코의 단독 범행으로 계속 끌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진범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전혀 없고, 진상을 아는 사람도 요시에와 마코뿐이니까요. 버티기만 했다면 그의 승리는 거의 확실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미를 납치해 살해하려 하다니, 어처구니없습니다.

요시에가 쇼헤이를 유혹하려는 시도 역시 전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하루미)가 엿듣고 있다는 전제에서나 성립하는 작전이기 때문입니다. 마코의 뒤에 있는 인물이 미치히코나 요시에밖에 없다는 점에서 독자의 시선을 요시에 쪽으로 강제로 돌리려는 장치라는 건 알겠지만, 좀 더 설득력 있는 방법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핵심 설정만큼은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 있는 멋진 아이디어지만, 전개가 뻔하고 마무리도 작위적이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예전의 호평에는 절판본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다는 개인적 감상이 많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예전에 읽었던 모 단편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일족이 모인 파티에서 유이한 두 외부인 중 한 명이 살해당하자, 일족은 다른 한 명을 범인으로 만들려 한다는 서늘한 작품이었지요. 이 작품처럼 제가 와츠지 일족의 일원으로 현장에 있었다면, 이치조 하루미를 범인으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와츠지 요헤가 여자를 밝힌다는 소문을 듣고 유혹하려 했다가, 요헤의 모욕적인 거절에 격분해 살해했다. 하지만 요헤의 반격에 함께 죽게 됐다는 시나리오, 제법 그럴듯하지 않나요?

2015/11/20

내가 그를 죽였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내가 그를 죽였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예 시인 간바야시 미와코와 유명 작가 호타카 마코토의 결혼식에서 호타카가 독살당했다. 호타카에게 버림받은 동물병원 조수 나미오카 준코도 음독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동반 자살을 위해 호타카가 먹는 비염약에 독을 섞은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 결과, 그녀가 호타카의 비염약을 바꿔치기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와코는 약을 바꿔치기할 수 있었던 용의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내려 하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로,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 이어 범인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실험적인 시도를 한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일단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보다는 추리적으로 훨씬 낫습니다. 특히 ‘필케이스에 전혀 다른 인물의 지문이 찍혀 있었다’는게 스루가 나오유키의 범행을 증명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탁월합니다.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고 그것 자체를 바꿔치기한 것이라면, 당연히 호타카와 접점이 없는 다카히로는 용의자에서 제외됩니다. 남은 두 명인 스루가와 유키자사 중에서 스루가가 '호타카 전처의 짐을 맡았다'고 말했으니 범인은 스루가라는 결론이 도출되고요. 이 정도면 독자에게 충분히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본격 추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물론 미와코가 다카히로에게 케이스를 넘겨주었을 가능성도 있고, 유키자사 가오리가 호타카와 관계가 있었을 때 케이스를 확보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경찰에서 수사를 보강할 필요는 있겠지만, 독자는 넘어가도 무방할 듯 합니다.).

그 외에도 나미오카 준코가 사망한 장소를 밝혀나가는 디테일—상품 전단지에 쓴 유서, 머리에 묻은 잔디, 샌들에 묻은 흙, 짝이 맞지 않는 휴대폰 충전기 등—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실험적인 시도 때문인지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제법 많습니다. 우선 캡슐의 개수에 대한 지루한 공방이 그렇습니다. 자살 시체가 놓인 상황에서 과연 캡슐이 몇 개였는지를 세고 있을 정신이 있을까요? 스루가는 시간이 좀 있었으니까 혹시 몰라도, 방에 잠깐 숨어 있던 유키자사 가오리의 눈에 캡슐 개수가 들어왔다는건 영 설득력이 없습니다. 저만 해도 매일 먹는 알약이 지금 몇 개 남았는지 모르니까요. 게다가 그녀가 ‘여섯 개 있었다’라고 증언해봤자, 그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건 핵심 증거(필케이스)에서 독자의 시선을 빼앗기 위한 억지 설정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워요.

또한 준코가 캡슐을 구한 시점이 금요일 오후였기 때문에 약통에 독을 집어넣을 틈이 없었다는 주장은, 뒷 부분에서 다카히로 혼자 1층에 있을 때 그녀가 필케이스에 독약을 넣었다는게 밝혀지면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누군가 집에 있을 때도 독약을 넣는 게 가능했다면, 밤에도 넣는 것이 가능했을 테니까요. 왜 이런 부분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더해 마지막 추리 쇼는 작위적이라는 단점의 절정입니다. 가가가 수집한 증거라면, 이런 비공식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 대신 스루가를 바로 연행해 취조하는 게 더 합리적이니까요. 캡슐에 집착하면서 용의자들을 몰아붙이는 장면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이런 연출이 있어야 소설로서 성립되니 트집 잡긴 애매하지만, 가가의 말처럼 애거서 크리스티의 세계에 가까운 소설같은 이야기라는건 분명합니다.

용의자인 스루가 나오유키, 유키자사 가오리, 간바야시 다카히로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는 구성도 흥미로우나 이들 중 한 명이 범인이기에 전개 역시 객관적이지 않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최근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대부분이 이런 방식인데, 개인적으로는 썩 마음에 들지 않네요. 범인 시점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야기를 가공한다는 점에서는 "악의"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악의"는 애초에 수기 형식을 빌린 서술 트릭물에 가까운 작품이니 비교 자체가 어렵지요.

또 호타카를 누구나 죽이고 싶을 정도로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다고 묘사하여 용의자들의 동기를 그리고 있는데, 지나치게 주관적인 심리 묘사 탓에 오히려 감정선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에요. 특히 스루가의 속내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용의자들이 모두 자기 변호에만 급급하다 보니 오히려 간바야시 다카히로가 가장 수상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스루가는 흠모하던 여인이 죽었고, 유키자사는 낙태를 한 바 있어 ‘죽음’과 연결되지만, 간바야시는 여동생에 대한 그릇된 애정을 제외하면 호타카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동기 면에서는 가장 부실함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설령 동기가 있다 해도 여동생의 결혼식을 망칠 인물 같지는 않습니다. 동기를 드러내려면 본인의 시선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키자사가 아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설정을 다른 인물의 시선을 통해 묘사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와 재미 모두 전작보다는 낫지만, 다양한 단점이 뚜렷한 범작이라 생각됩니다. 무엇보다도 개인적으로는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마찬가지로 정답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추리소설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품을 마무리한 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좋은 점수를 주긴 어렵습니다.

2015/11/17

잠자는 숲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1.5점

잠자는 숲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카야나기 발레단 사무실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화가 가자마 도시유키였다. 몰래 침입한 가자마를 발레단원 하루코가 살해한 것으로, 정당방위로 보였다. 그러나 가자마가 발레단에 침입한 이유를 알지 못해 고민하던 경찰들을 농락하듯, 발레 마스터 가지타도 연습 중 살해당했다. 두 개의 사건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가가는 발레리나 미오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도 사건의 진상에 점점 접근해 나가는데...

"졸업"에서의 연인 사토코와 헤어진 뒤 경찰이 된 가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가 형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추리’라는 요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건의 발단이 되는 가자마의 죽음은 별다른 트릭이나 장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고사에 가까운 탓입니다. 물론 맨 마지막에 범인은 하루코가 아니었다는 진상이 밝혀지긴 합니다만, 독자가 주어진 정보로 진상을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맥락상 하루코가 죽였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가지타 살인 사건에는 트릭이 사용되었지만, 가지타가 살해당한 방법이 뭔가에 찔렸기 때문이고 윗 옷 안에 모종의 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는건 현장 검증 만으로 초기에 밝혀집니다. 때문에 특별히 대단한 트릭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범인인 야스코가 이런 장치 트릭까지 사용해가며 범행을 저지를 이유가 없다는 단점도 큽니다. 경찰 수사가 집중되는 와중에 공연 연습 중 살해한다는 무모한 짓 덕분에 용의자는 발레단 사람으로 좁혀지고, 다른 사람을 시켜 자켓에 물을 묻히는 알리바이 공작을 통해 빠져나가려 한 시도는 작중 언급되듯 공범, 혹은 우연으로 해석될 수 있는 유치한 공작에 불과해서 결국 용의선상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니까요. 한마디로 "쓸모 없고 무모하고 현실성 없는 바보 같은 짓거리"였습니다.
그리고 가지타가 자기 등을 뭔가가 찌르는데도 자리에 앉아 공연 감독을 계속했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도 의문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벌떡 일어나서 등에 뭐가 있나 확인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의자에 주사기를 붙여 놓는 식으로 흉기가 드러나도 상관없도록 만드는 게 나았을 겁니다. 흔해빠진 주사기는 구입 경로를 파악하기 어렵고, 공연 연습 중 수시로 단원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용의자를 만들기도 더 쉬웠을 테니까요.

4년 전 배신의 복수라는 동기도 빈약합니다. 자신을 치정 사건의 당사자로 몰았다는 것인데, 4년 전 사실이 밝혀졌다는 이유로 급작스러운 살의를 품었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 뭐가 그리 큰 문제였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마지막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초기작에서 자주 보이는 조금 억지스러운 전개도 아쉬웠습니다. 특히 미오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정작 미오가 범인이라는건 독자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독자를 교묘하게 속이는 고도의 서술 트릭물과는 거리가 멀고, 대놓고 사기 치는 것에 불과해요.

덧붙여 단점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가가와 발레리나 미오의 달착지근한 연애 감정이 가득하고, 가가 교이치로가 사랑에 죽는 쾌남 형사로 묘사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후속작들에서 보여주는 묵직한 매력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래서야 주인공 말고는 '가가 형사' 시리즈라고 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상, 즉 4년 전 야스코와 아키코가 얽힌 치정 사건이 두 사건의 동기임을 밝히는 부분은 추리라고 부를만 합니다. 그중에서도 치정 사건을 일으킨 발레리나는 사실 아키코였다는 것이, 그녀의 연인이었던 화가 아오키가 남긴 그림을 통해 밝혀지는 부분만큼은 인상적이었어요. 4년 전 당시 야스코는 아직 필사의 다이어트 이전이라 그림의 모델일 리 없다는 것이 단서인데,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등 추리 소설의 미덕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미오의 빈혈에 대한 추리 역시 일상 미스터리스러운 느낌을 전해 주는 부분으로 나쁘지 않았고, 벽에 부딪힌 가가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도 괜찮았습니다. "졸업"에서도 그랬지만, 가가의 아버지를 궁극의 탐정 역할로 설정하려는 계획이 있었던게 아닌가 싶네요. 마치 "맥가이버"의 할아버지처럼 말이죠. 세 번째 작품부터는 왜 이런 설정이 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또 발레단에 대한 자료 조사가 충실한 점도 좋았습니다. 발레단의 분위기와 연습, 공연 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작품의 설득력을 높여 주었고, 발레단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과 독침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을 연결시킨 설정도 약간 억지스럽지만 괜찮았어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엘러리 퀸의 작품"을 언급하는 장면도 눈에 띄었습니다. 저 역시 엘러리 퀸 작품의 트릭이 그렇게나 잘 먹혔을 것 같지 않다는 데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별로이고, 점수를 줄 만한 부분도 적습니다. "졸업"에 비하면 트릭마저도 별 볼일 없으니까요. 확실히 초기작이라는 티가 팍팍 나는, 가가 형사 시리즈의 팬이라도 딱히 구해 읽어볼 필요없는 망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5/11/16

고양이 낸시 - 엘렌 심 : 별점 2.5점

쥐들 사회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 낸시의 성장기를 통해 다름을 알고 포용한다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 동화같은 만화. 

모두가 행복해지는 따뜻한 내용은 좋았습니다. 그림도 예쁘고요. 하지만 다름이 포용되기 위해서는 귀여움이 필요하다는 점은 씁쓸합니다. 낸시가 고양이가 아니라 박쥐였다면 죽거나 최소한 내쫓김을 당했을 테니까요. "배트맨 리턴즈"에서 악당이 되어버린 펭귄 오스왈드가 떠오르더군요. 어른의 시각으로 바라봐서 그런걸까요? 

하여튼, 속편하게만 보기는 어려웠던데다가 어른이 보기에는 너무 짧고 별 내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격도 내용과 분량에 비하면 비싼 편이라 권해드리기는 어렵네요. 낸시가 지미 등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혹 후속권이 나오더라도 구입해볼 생각은 없습니다.

2015/11/15

책으로 가는 문 - 미야자키 하야오 / 송태욱 : 별점 2점

책으로 가는 문 - 4점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현암사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와나미 소년문고 (岩波少年文庫) 중 50편의 작품을 선정하여 소개하는 책.

50편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하는 전반부와 책을 선정한 기준, 이유, 그리고 자신이 뽑은 책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하는 일종의 인터뷰가 실려 있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이 제대로 된 번역으로 오래전부터 출간되었다는 것이 부럽기만 하더군요. 우리의 에이브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우리나라도 요새는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요.
하여튼, 우리 딸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작품이 있을까 싶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면 이쪽 바닥에서는 꽤나 믿을 만한 브랜드(?)이기도 하니 나름의 공신력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되었고요.

그러나 저의 목적과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이 책만 읽고는 해당 작품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추천사, 의견이 대부분으로 줄거리 소개도 없고 극도로 짤막해서 고르는 데 참고가 될 것 같지 않은 탓입니다.

선정 기준도 애매해서 이와나미 문고가 아닌 다른 곳 (교과서)에서 읽은 작품을 선정한다던가, 이번에 처음으로 읽은 작품을 선정한다던가, 심지어 자신이 읽지도 않았지만 아내가 추천했다고 선정한 ("노르웨이의 농장") 작품도 있을 정도에요. 이래서 거장이 평생 관심을 가져왔던 그의 작품의 원형! 이라고 말하기에는 여러모로 무리입니다.

아울러 선정 기준이 명확한 작품의 경우도 그림에 대한 코멘트가 많은데,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좋아하는 그림 그대로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 있다는 점도 아쉬웠던 부분이고요.

그래도 어린이 문학에 대한 신념 — 어린이 문학은 기본적으로 응원이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는. 아이들에게 절망을 말하지 마라 — 만큼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긴 합니다. 이런 신념을 가진 사람이 허술하게 작품을 고르지야 않았겠지요.

그래도 별점은 2점입니다. 흥미로운 책 몇 권을 건졌다는 점에서 소기의 성과는 달성했으나 여러모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해서 감점합니다. 읽기 편하고, 분량도 짧아서 쉽게 읽을 수 있으니 간단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지만 분량에 비해서는 가격도 센 편이라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덧붙여, 소개된 작품 중 딸을 위해 (혹은 저를 위해) 고른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치폴리노 - 모험의 토마토 기사"

그림이 좋다고 극찬하고 있는 작품. 인터넷 서점을 통한 간략한 줄거리 소개만 봐도 꽤나 재미있겠더라고요. 그런데 한국어 판은 이와나미 문고와는 그림이 다른 듯 싶고 현재 절판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겠죠.

2. "독수리 군기를 찾아."

에이브에 수록되었던 "횃불을 들고"로 친숙한 로즈마리 서트클리프 작품. 왠지 기대가 됩니다.

3.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는 작품인데 국내 출간된 버전도 이와나미 문고와 동일한 어니스트 하워드 셰퍼드의 그림이더군요. 꼭 구입해 봐야겠습니다.

4. "우리 이웃 이야기"

애니메이터로 일할 때 녹초가 되어 돌아와 이불 속에서 읽고 문학이란 정말 굉장하구나를 느꼈다는 작품. 짧은 작품 안에 세계가 그려져 있다는데 대체 어떤 작품일지....

5. "하늘을 나는 교실"

"에밀과 탐정들", 두 명의 로테로 유명한 에리히 케스트너의 작품. 어린 시절 읽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래도 기본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5. "한국 민화 모음집"

한국인이라 관심이 간 작품. 삽화도 한국인 김의환 씨더군요. 미야자키 하야오가 "파를 심은 사람"이 아주 인상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인터넷으로 찾아 읽어보니, 음... 정말 인상적이긴 했습니다. 애한테 권해주기는 좀 애매합니다만.

6. "클로디아의 비밀"

어딘가 소녀가 숨어 산다는 이야기? 그것도 미술관? 설정만으로도 흥미롭습니다.

7. "작은 백마"

거장이 예순아홉에 읽고 "반짝반짝 빛나는 단단한 알맹이를 품은 책"이라고 극찬을 하다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잖아요. 영화 "문 프린세스"의 원작이라고도 하는데 저부터 한 번 읽어봐야겠습니다.

그 외에도 기억에 남는 작품과 코멘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삼총사" — 모험 활극 그 자체! 맞는 말이죠. 

"셜록 홈즈의 모험" — "명작이다.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어도 봐서는 안 되고 먼저 꼭 책으로 읽어야 한다." 라고 썼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네요.

그 외의 "바보 이반", "보물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저에게 최고의 어린이책 일러스트는 "짐 크노프", "왕도둑 호첸플로츠", "꼬마 니꼴라", "돈 까밀로와 빼뽀네", "무밍"시리즈입니다. "돈 까밀로와 빼뽀네"는 아동용이라고 하기는 어려울려나요?

2015/11/13

엿듣는 벽 - 마거릿 밀러 / 박현주 : 별점 2점

엿듣는 벽 - 4점 마거릿 밀러 지음, 박현주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멕시코로 여행을 떠난 절친 윌마와 에이미가 건달 조와 함께 바에서 술을 마신 뒤, 윌마는 호텔 방에서 추락사했고 에이미는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에이미의 남편 루퍼트가 그녀를 돌보기 위해 멕시코로 향했지만 에이미는 급작스럽게 사라졌다. 그녀의 행방에 의심을 품은 오빠 길은 사립탐정 도드를 고용하여 사건의 진상을 캐기 시작하는데....

서스펜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3대 여성 서스펜스 스릴러 작가 중 한 명인 범죄 소설가 마거릿 (마가렛) 밀러의 장편소설. 하드보일드 3대 거장 중 한 명인 로스 맥도널드의 부인이기도 하죠. 그녀에 대한 상세 정보는 여기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대표작이라는 "내 안의 야수"는 이전에 읽어보았는데 지금 읽기에 조금 낡은 설정이기는 했지만 서스펜스만큼은 명성에 걸맞는 수준이었지요.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전개는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무언가 범죄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라는 의문이 루퍼트에 대한 기묘하고 의심스러운 묘사—집에 찾아온 버턴 양에게 화를 내고 그녀를 멀리한다든가, 가정부 겔더의 취직을 알선하는 척 하며 가짜 전화를 건다든가, 윌마의 유품인 은상자를 몰래 버린다든가 등—, 사립탐정 도드의 끈질긴 조사, 그리고 버턴 양과 길, 헐린 등 주변 인물 시점의 묘사가 합쳐지면서 서서히 윌마 살인 사건이라는 범죄로 구체화 되어가며 서스펜스가 커지는 전개는 일품입니다. 최후의 그 순간까지 에이미가 어떻게 되었는지 밝히지 않으면서 독자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도 효과적이었고요. 작품을 마무리하는 에이미가 남기는 "내가 윌마를 죽였다는 사실"이라는 대사도 인상적입니다. 서늘한 느낌을 제대로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멋진 전개에 비하면 아쉬움 점도 적지 않습니다. 아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만으로 진상을 숨겨가며 마지막에 연극까지 벌인다는 것부터가 문제점 투성이지요. 마거릿 밀러 여사가 자신만을 맹목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궁극의 남편상을 소설에서라도 구현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유야 어찌되었건 작품 속 상황을 요약하자면 "미국인 부자가 불쌍한 멕시코인 객실 담당 하녀를 돈으로 매수하려다가 실패한 후, 마지막에는 연극까지 펼쳐 진상을 왜곡하게 만든 사기극"에 불과합니다. 자기 여자에게만 따뜻하면 범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건가? 여튼 미국이 멕시코를 바라보는 시선이 이런 수준으로 보여서 마음이 영 편치 않더군요.

게다가 조를 살해한 것을 루퍼트가 버젓이 아는데 고향으로 돌아와 옛 직장에 복귀까지 한 콘수엘라의 행동 역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휴게소에서처럼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는 게 상식적이죠. 아니면 이왕 한 명 죽인 거 루퍼트까지 죽이던가요. 루퍼트의 집에서 조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뿐더러, 루퍼트가 아내를 죽이고 정부와 도망치는 것으로 알려진 상황이었으니만큼 성공만 했더라면 영구 미제 사건으로도 남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물론 콘수엘라는 그런 사실을 모르긴 했습니다만...).

하긴 애당초 콘수엘라가 조를 살해한 이유도 석연치 않은 것은 마찬가지로, 소악당이자 사기꾼인 조가 그 돈을 받는 게 뭐가 그리 위험하다고 발을 빼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껏 결혼까지 했는데 다툼이 좀 있었다고 바로 칼질을 한다는건 납득하기 어려워요. 콘수엘라가 조를 죽였다는 것도 루퍼트의 증언만이 유일한 증거인데, 이래서야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던 조의 입을 막고 콘수엘라를 함정에 빠뜨리는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고요. 아내를 위해서 사기극을 저지르는 놈인데 알게 뭡니까.

이렇게 끝낼 바에야 에이미가 루퍼트 말대로 뉴욕으로 여행 중이었던 게 사실이고, 의심증에 사로잡힌(그리고 경제적으로 막다른 상황에 놓인) 길이 루퍼트를 살해한다는 식의 결말이 더 나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서스펜스는 훌륭하고 읽는 재미도 충분하나 마지막 연극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감점합니다. 거장의 고전이기는 하나 구태여 찾아 읽을 필요까지는 없겠습니다.

2015/11/12

수수께끼 그녀 X - 우에시바 리이치 : 별점 3점

수수께끼 그녀 X 12 - 6점 우에시바 리이치 지음/학산문화사(만화)

"가면 속의 수수께끼", "꿈의 사도"의 작가 우에시바 리이치의 만화. 전 12권으로 완결된 작품입니다. 2014년 11월에 완결되었으니 비교적 최신작이죠. 우연찮게 읽기 시작했는데 꽤나 재미있어서 한 번에 읽어버렸네요.

1화는 이전 작들과 비슷했습니다. 타액을 이용하여 감정과 몸 상태를 공유한다는 등의 기묘한 설정, 너는 누구와 첫 섹스를 하게 될 것이다와 같은 충격 발언이 연이어 그려지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뒤로 갈수록 평범한 학원 러브 코미디로 변모해 버립니다! 둘의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에 아이돌 가수의 난입, 학교 축제 등과 같은 대형 에피소드가 끼어드는 전형적인 스타일로요. 물론 작가가 작가이니만큼 아주 평범하지만은 않습니다. 에피소드별로 여전히 일상 속 비일상스러운 기묘함이 계속 감돌거든요. 서로 타액을 공유한다는 설정이 계속 사용되는 식으로요.
게다가 타액을 공유한다는 설정의 러브 코미디임에도 불구하고, 두 커플이 끝까지 키스를 하지 않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합니다. 이런 플라토닉한 러브스토리라니! 12권으로 깔끔하게 완결하면서 우라베의 입을 빌어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밝혀준 결말도 아주 좋았고요.

또 히로인 우라베 미코토의 매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완벽한 외모에 운동신경 발군으로 온갖 체육 활동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는 슈퍼우먼인데다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관계자)에게만 따뜻한 나만의 여신이지요. 개인적 견해로 남성 판타지 궁극 히로인의 양대 산맥 - "오렌지로드"의 아유카와 마도카, "오! 나의 여신님"의 베르단디 - 중 아유카와 마도카의 적통 계승자로서 21세기에도 죽지 않는 생생한 매력을 뽐냅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슈퍼우먼은 아니지만 말이죠. 하긴 우라베 미코토도 항상 가위를 팬티 옆에 끼워 가지고 다니면서 무언가를 자르고 파괴하는 데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는 만화 같은 설정이 있으려니 동급이려나?

그리고 무색무취, 유유부단의 대명사 카스카 쿄우스케보다 남자답고 확실한 츠바키 아키라도 꽤 호감이 갑니다. 전형적인 하렘 루트를 타지 않고 우라베 일직선, 그러면서도 지킬 것은 멋진 녀석이거든요. 학교 동급생들 앞에서 "코이즈미 마이 러브"를 외치는 단순 일직선 바보와는 다르게 우라베가 입을 댔던 음료수를 마신 뒤 생긴 변화를 눈치채고 달려가 사과하는 섬세함도 돋보이고요.

그 외의 다른 캐릭터들, 안경 로리 거유 오카와 우에노, 스와노 등에게도 이야기를 할애해가며 조연으로의 역할을 주는 디테일도 좋았어요. 특히 오카와 우에노가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말로 있음직해 보이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이에 더해 화풍도 청춘 러브 코미디 스타일로 서서히 바뀐 덕분에 여성 캐릭터들의 작화가 아주 매력적이라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전작들에서는 좀 어리거나 빈약(빈유)했던 캐릭터들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여성을 예쁘게 그리는 건 만화가로서 상당히 중요한데 그야말로 포텐이 제대로 터진 느낌입니다. 청춘 러브 코미디답게 전작 스타일의 집요한 디테일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 등 작가의 스타일 자체가 변한 것은 호불호가 갈릴 듯하나, 저는 여성 캐릭터의 매력이 더 중요한 성격의 작품이라 생각하기에 "호"입니다.

딱 한 가지 문제라면 타액을 공유하는 설정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겠죠. 우라베와 츠바키 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설정으로 아, 여긴 원래 그런 세계구나... 싶은 정도로 넘어가기는 하는데 좀 대충대충인 감이 없잖아 있어요. 카자미다이 고교 축제에서 상영된 영화 "수수께끼의 그녀 Y"처럼 이유를 대략이라도 밝혀주고 끝을 내는 게 어땠을까 - 영화 속 설정은 이 모든 건 주인공의 착각으로 사실 지구는 멸망한 것이었다는 것 - 싶은 생각도 들긴 합니다.

그래도 별점은 3점입니다. 청춘 러브 코미디라는 정말이지 흔하디 흔한 장르에서 약간의 독특한 설정만으로 이만큼의 변주를 끌어낸 점은 정말이지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앞서 말했듯 근본적으로 "플라토닉"한 이야기라는 발상의 전환도 놀랍고 말이죠. 특히나 우라베 미코토의 존재만으로도 러브 코미디 계에서 일정 지분을 차지할 자격은 충분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되는지 애니메이션까지 제작되었더군요. 이 역시 차분히 감상해봐야겠습니다.

2015/11/11

마술은 속삭인다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1.5점

마술은 속삭인다 - 4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마모루는 공무원이었지만 거금을 횡령하고 사라진 아버지 때문에 고향에서 갖은 수모를 당하고 살아왔다. 어머니 사후 이모댁에 얹혀 살며 잠시 평화로운 시기롤 보냈지만, 택시 운전을 하던 이모부가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하고 말았다. 이모 가족을 돕기 위해 특기인 열쇠 따기 기술로 피해자 요코의 방에 잠입한 마모루는 그녀의 죽음에 수상한 흑막이 있음을 눈치채는데....

미야베 미유키의 1989년작 장편소설. 도입부부터 중반 전개까지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젊은 여성들의 연쇄적인 자살 사건이 벌어지고, 그녀들의 연결고리가 무엇인지 파헤쳐 나가는 과정이 재미나거든요. 특히나 책 뒤 해설에서도 잠깐 언급되듯, 마모루가 이 사건에 얽히게 되는 계기가 마모루가 얹혀 사는 이모부의 택시에 요코가 추돌한 사고사라는 것이 아주 괜찮았어요. 자연스럽게 두 사건이 만나 마모루가 사건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될 뿐더러, 이 추돌사고로 마모루의 뒤를 봐 주는 요시타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니까요.

그러나 중반부까지의 흡입력 있던 전개는 뒤로 가면 갈수록 힘을 잃고 맙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핵심 트릭이 하라사와 노인이 구사하는 최면술인 탓입니다. 간단한 암시만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말 몇 마디 걸어서 최면을 걸게 만들다니! 누가 봐도 수상합니다. 더군다나 쫓기는 입장이거나 뒤가 켕긴다면 더더욱 말려들지 않으려 할 텐데 당치도 않지요. 어떻게 죽은 여자들에게 최면을 걸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아울러 작중 꽤나 중요하게 언급되는 암시에 의한 서브리미널 효과도 최근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고 밝혀졌습니다. 아니, 뭐 효과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작품 속 내용처럼 뒤가 켕기는 사람들이 삽입된 영상을 보고 폭주할 정도는 아닐 겁니다.
한마디로 - 본 작품의 영상물을 감상하셨다는 각시수련님 말을 빌어 - 요약하자면 "트릭을 양념으로 치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은, 안이하기 짝이 없는 작품"입니다. 이 정도 최면술이면 이미 추리가 아니라 SF라 생각됩니다.

전개 역시도 마모루 시점이라 약점이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요코의 죽음 이후, 왜 그녀의 가족은 응답 메시지 테이프를 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한 번 듣고 평범한 중학생이 사건의 진상을 꿰뚫어 보았으니, 가족들 역시 간단하게 그녀가 어떤 범죄에 연루되었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요?
게다가 이렇게까지 치밀하고 간단하게 원격 조종 살인을 범할 수 있는 능력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구태여 남긴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최면술사일 뿐인 하라사와가 다카기 가즈코가 숨은 곳을 알아낸 방법도 설명되지 않는 등, 여러모로 대충 쓴 느낌이에요.

또 진짜 사건의 원흉인 다카기 가즈코가 살아남은 뒤 구원을 얻는다는 결말도 석연치 않으며, 마모루의 열쇠 따기 능력이 몇몇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기는 합니다만 필살기가 아닌 잔재주 정도에 그치는 것도 아쉽습니다. 마술사와의 한판 승부에서 큰 역할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개인기 정도에 그치니까요.

아울러 마모루의 아버지가 공금을 횡령하고 바람을 피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자수를 했느냐, 도망을 쳤느냐가 가정에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다 주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과 기다림이 헛되었다는 것 때문에 마모루가 분노했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만, 매장당해도 싼 인물이이라서 딱히 인생이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게다가 어떻게든 마모루를 돌봐주려는 요시타케와 비교하면, 요시타케를 매도하는 하라사와 노인이야말로 사악한 연쇄 살인마인데 뭐 잘났다고 훈계를 늘어놓는지도 도무지 모르겠어요. 복수해야 할 대상인 다카기 가즈코가 아니라 다른 여성들과 취재를 한 것에 불과한 하시모토까지 죽인, 용서의 여지가 없는 악당이잖아요? 그가 말하는 정의나 마모루에 대한 충고 모두가 와닿을 리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모루와 미야시타 요이치의 왕따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고 전형적이라 할 말이 없습니다. 성장기 스타일의 일본 소설들은 왕따 이야기를 빼면 쓸 수가 없는걸까요? 이 정도 시련을 겪지 못하면 어른이 못 된다는 뜻인가? 여튼, 성장기로 보기에도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초중반부 전개는 나쁘지 않고 흡입력도 제법입니다. 그러나 엉성한 설정 탓에 잘 짜여진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최면 이론을 가지고 너무 진지하게 작품을 쓴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에테르 세계관 시절에 쓰여진 SF가 떠오르고요.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대단한 팬이 아니라면 피하시길 바랍니다.
1989년 일본 추리 서스펜스 대상 수상작인데, 최면술에 대해서 무지했던 시대였나봅니다.

2015/11/09

붉은 손가락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5점

붉은 손가락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년 가장 아키오는 어느날, 아내 야에코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고 서둘러 귀가했다. 그리고 정원에서 어린 소녀의 시체를 발견했다. 범인은 중학생인 아들 나오미였다. 다급히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아키오는 시체를 버렸지만 곧바로 들통났다. 거듭되는 수사에 큰 압박을 느낀 아키오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범인으로 내세우는 폐륜을 저지르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 최근 가가 형사 시리즈를 주로 읽는 이유는 도서관 탓입니다. 회사 근처에 생겨 자주 이용하게 된 도서관이 소설류는 책장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자료는 빈약한데, 가가 형사 시리즈만 이상하게도 전권이 있더라고요. 사서분 취향이겠죠. 덕분에 몰아서 읽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리즈 중에서 비교적 최신작으로 2007년도 고노미스 9위를 차지 했었습니다. 300페이지가 안 되는 분량으로 장편보다는 중편에 가깝습니다. 원래 단편으로 발표된 작품을 개작했다고 하는군요.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일본 현대 사회 문제점을 대변하는 마츠우라 집안에 대한 묘사입니다. 고부간의 갈등과 가사, 가정 교육 모두를 아내에게 맡기고 바람까지 피우는 무신경한 아버지, 시가에 애정을 전혀 보이지 않는 어머니, 왕따를 당한 뒤 극도의 이기적 성향을 보이는 아들, 거기에 치매에 걸린 할머니까지! 겉보기에만 정상일 뿐 썩을 대로 썩은, 더 이상 가정이라고 부를 수 없는 가정 묘사가 정말이지 아주 빼어나요.
아울러 콩가루 집안 묘사는 극도의 개인화를, 치매 노인을 모시고 사는 문제는 노령화를, 그리고 어머니의 치매를 이용하여 아들의 범행을 덮으려 하나 정작 어머니는 치매가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세대 간 단절을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반전은 정말 대단합니다. 몇 년간 함께 산 가족이 어머니의 치매 여부도 모르다니! 정말 생각도 못했습니다. 덕분에 막장 패륜 범죄 드라마가 더 그럴싸한 얼개와 완성도를 갖추게 되었네요.

이렇듯 현대 일본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발하고 있는 병폐가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선이라는 점에서 더 무섭더군요.

그리고 아들 나오미 캐릭터가 상상 초월의 비호감이라 읽는 내내 짜증남과 동시에 소년범에 대해서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확신이 또다시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놈이 커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될 것 같지도 않거든요. 끽해야 여든살 아버지를 살해한 쉰살 (실제로는 49) 히키코모리처럼 살게 될 테니 차라리 감방 속에서 사회생활이라도 익히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놈이 마지막에 가가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나와 체포되는 장면은 아주 좋았습니다. 멱살이 아니라 쌍욕을 하면서 작살을 내 버렸어야 하는 건데 말이지요.

여튼, 이렇게 장점이 많은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추리적으로 별로라는 겁니다. 그간의 가가 형사 시리즈는 트릭 측면에서, 아니면 와이더닛 계열로 추리적인 완성도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최초 범행을 근처 주택 거주자로 특정하고 용의자를 짚어낸 가가의 추리는 볼 만하고, 범인이 먼저 밝혀진 뒤 여러 가지 범인의 계획을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는 식으로 도서 추리물 형식을 띤 건 나쁘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했던 반전도 대단하고요.

그러나 피해자가 확인한 e-mail을 추적했다면 진범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니 마츠우라의 계획은 그냥 약간의 시간 벌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전혀 드라마가 될 수 없죠. 또 어머니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결정적 증거인 "붉은 손가락" 역시 별 의미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본인 스스로 아들이 계속 자신을 범인으로 몰면 진상을 고백할 심산이었으니까요.

어머니가 치매가 아니었다는 것을 가가가 알게 된 것이 "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등, 극적 반전과 관련해서는 독자에게 제공하는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도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너무 무거워서 읽기 편한 작품도 아니고 추리적으로 별로라 감점합니다만 사회파 미스터리로 기본은 해 주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이렇게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긴 하니까요. 제 경우에는 외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가 얼마 전 돌아가셨기에 더더욱 남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요양원에 모시긴 했지만 그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에서 뭔가 해결책이 나와야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딸은 정말 잘 키워야겠다는 다짐을 다시금 해 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가가 형사에 대한 묘사도 꽤나 상세하게 등장합니다. 가가의 아버지를 지극히 생각하는 사촌동생 마츠미야가 등장해서 가가와 컴비를 이루어 수사를 펼치고, 가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등 꽤나 굵직한 개인사가 펼쳐지죠.

그런데 가가의 아버지가 가가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는 말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어머니는 찾아올 사람이 찾지 못해 홀로 죽어갔지만, 찾아올 사람이 있는데도 오지 말라고 하는 건 그것 때문에 자식이 먹을 욕을 생각하지 않은 자기 욕심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의 유언 대신이라면 저도 따르기야 하겠지만 이런 억지 외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습니다. 게다가 아들은 안 되는데 마츠미야는 된다? 무슨 기준인건지 모르겠네요.

2015/11/07

악의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3점

악의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가 히다카 구니히코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발견자 중 한 명인 노노구치 오사무는 히다카의 오랜 친구인 아동 소설가이자 전직은 교사였다. 마침 사건을 맡은 형사인 가가 교이치로의 교사 시절 동료이기도 했다. 노노구치는 자신의 직업을 살려 사건에 대한 견해를 일종의 수기로 작성했고, 가가는 이 수기를 빌려 읽으면서 진범이 누구인지를 추리해 내는데....

가가 형사 시리즈입니다. 1996년 발표된 작품이네요.

범인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와 가가 형사의 기록이 교차 편집되는 전개 방식과, 진범과 알리바이 조작 트릭이 앞부분 1/3 지점에서 밝혀진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이렇게 진범이 빨리 밝혀지는 전개는 작품을 완벽한 와이더닛 계열로 만들고요.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실제로 작품의 나머지 2/3는 온전히 노노구치의 동기와 숨겨진 진상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왜?"가 정말로 대박입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노노구치가 교묘하게 수기와 증언을 조작해서 수사의 방향을 의도한 대로 흐르게 만드는 솜씨가 정말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제일 첫 부분의 고양이 죽이기에서부터 히다카의 캐릭터 형성이 자연스럽게 시작된다는게 좋은 예입니다.

또 노노구치가 고스트 라이터가 아니며 그의 증언이 모두 거짓이라는건 눈치채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히다카의 작품은 사실 자신이 쓴 것이다!라는 명예욕이 아니라, 오래전 중학생 때 있었던 여학생 성폭행 사건과 왕따 사건이 진짜 동기라는 결말은 상당히 놀라웠어요. 이 동기를 밝히는 데 가가가 수집하는 여러 가지 증언들이 토대가 되는 식으로 등장하는 장치와 단서들이 교묘하게 짜여져 있고요. 결정적 단서가 나이든 폭죽 장인의 증언이었다는 것 처럼요.
진범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숨기는 노노구치의 수기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작품 전체가 거대한 서술 트릭이라는 것도 비슷하네요. 여튼, 한 편의 추리물로의 완성도가 아주 높은 편입니다.

아울러 가가가 고등학교 교사를 2년 했는데 그만두게 된 계기가 왕따 사건이었으며, 그 왕따 사건이 본편 이야기와 슬쩍 엮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졸업"에서는 분명히 교사를 지망했었는데, 왜 갑자기 형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린 거죠. 개인적으로는 왕따로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을 억지로 등교시킨 가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기에 역시나 선생에는 맞지 않는 캐릭터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나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일단 계획이 지나치게 노노구치의 시점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례로 히다카 하츠미의 사진을 경찰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렇지 않고 경찰이 멍청해서 노노구치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의 대비책이 없거든요.

또 베껴 쓴 노트만 가지고 자신이 작품을 썼다고 주장하는건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래 활동한 프로 작가가 아무런 증거나 데이터 없이 작품을 쓰지는 않았을 테고, 그만큼 많은 작품이라면 충분히 히다카가 썼다는 증거나 관련해서 증언할 인물은 여럿 있을 테니까요. 실제로도 히다카 리에가 그렇게 증언하기도 했죠. 아내라는 것 때문에 증언의 가치가 폄하된 감이 없잖아 있는데 이런 증언 몇 개만 모여도 노노구치의 급조한(?) 데이터 정도는 눌러버릴 힘은 충분했을겁니다.

마지막으로 노노구치의 수기에 오류가 많다는 것을 독자에게 공정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 점도 아쉬웠던 부분입니다. 물론 이 점은 이 작품이 후더닛 계열의 정통 본격물이 아닌 만큼 큰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그 외로, 가장 큰 동기인 "악의"라는 것에 대한 설명이 좀 부족하긴 합니다. 노노구치의 속내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탓이 큰데 독자가 읽은 그의 속내, 즉 수기는 모두 거짓이라 딱히 와닿을 수가 없거든요. 오랜 시절 쌓아온 열등감과 거기에서 비롯된 악의라는 게 아주 설득력 없지는 않지만 본인이 아닌 남의 입으로 듣는 정보일 뿐이니까요. 또 아무리 "악의"가 쌓였다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가 아닐까요? 어차피 자신이 시한부 인생으로 얼마 살지 못하면 과거 사건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 이렇게 복잡한 계획을 짤 필요도 없었을 테고 말이죠.

물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이유는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니 딱히 단점은 아닙니다. 시티헌터 사에바 료의 아버지이자 유니온 데오페의 총수도 사랑과 증오는 종이 한 장 차이, 어차피 이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라고 했었죠 (아마도.... ).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 말해드린 노노구치의 계획에 지나치게 의존한 플롯에 약간 감점합니다만 여태까지 읽었던 가가 형사 시리즈, 아니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 수준의 재미와 깊이가 있는 작품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모든 추리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이런 걸 보면 어린 시절 나쁜 놈은 커서도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는군요. 어린 시절 자신을 괴롭힌 놈을 옛 동창이자 친구였기 때문에 다시 받아준 히다카의 말로를 보면 역시나, 확실히 사람은 가려서 사귀어야 할 것 같습니다.

2015/11/05

더 스크랩 - 무라카미 하루키 / 권남희 : 별점 2.5점

더 스크랩 - 6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비채

무라카미 하루키가 외국 잡지에서 읽은 인상적인 기사를 자신의 감상과 함께 소개하는 짤막한 칼럼 모음집입니다. 뒹굴거리며 잡지 페이지를 넘기다가, 재미있을 법한 기사가 있으면 스크랩해서 일본어로 정리하여 원고를 쓰면 끝이지요. 솔직히 말해 정말로 거저먹기였다... 라고 머릿말에 작가 스스로 밝힐 만큼 거저먹는 기획물입니다. 기획부터가 풍요의 80년대다와요.

그래도 글 자체는 꽤나 재미있습니다. 특유의 고즈넉하고 여유로우면서도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여전히 독자에게 푸근함과 편안함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단 몇 줄, 심지어는 딱 한 줄이라도 본인의 감상을 적는 것에서 촌철살인의 묘미가 살아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80년대를 추억하고 자극할 만한 내용들이 제법 있어서 반가왔습니다. 제가 8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80년대 키드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재미있어 보이는 물건 광고까지 소개해주고 있으니까요.
물론 저의 기억 속 80년대는 본 조비, 안전지대가 동급이었던, 그리고 "오렌지로드"가 현역이었던 80년대 후반에 가깝지만 "록키 3", "쿠조", "소피의 선택", "크리스틴" 같은 영화들이라든가 카렌 카펜터와 말론 브란도, 마리웰 헤밍웨이, 레지 잭슨, 빌 머레이, 휴이 루이스, 아놀드 슈와제네거와 같은 유명인들, 스타워즈의 츄바카와 스크래블 게임과 같은 당대의 아이콘 등 제 기억에도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들은 읽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뒤에 실려 있는 도쿄 디즈니랜드가 오픈했을 때 방문했던 탐방기나 올림픽과 전혀 상관없는 올림픽 일기는 완전 부록, 사족 느낌이기는 하나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돈 주고 구입해서 읽기에는 아깝지만 잡지에서 한 꼭지 읽기에는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재미있는 글 모음집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콘셉트에 제대로 부합하는 글들이랄까요? 쉽게, 짤막하게 읽을 수 있는 글들로 저와 같이 80년대를 추억하실 수 있는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2015/11/03

졸업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졸업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T대학생인 가가와 친구들 - 사토코, 나미카, 도도와 쇼코, 와코와 하나에 -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쇼코가 원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황상 자살로 보였으나 옆방 학생에 의해 외부에서의 침입이 의심되는 등 살해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들의 고교 은사 미나미사와와 함께 한 다도회에서 나미카마저 음독하여 죽고 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리즈 캐릭터인 가가 형사 시리즈 제 1작. 1986년 발표된 작품으로 초기작입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고전 본격 퍼즐 미스터리물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 두 개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니까요.

  1. 완벽한 밀실에 가까운 쇼코의 원룸에 어떻게 침입하여 살해하고 빠져나갔는지?
  2. 설월화 게임 중 어떻게 나미카를 특정하여 독을 먹일 수 있었는지?

그러나 초기작이라 그런걸까요?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일단 트릭이 영 아닙니다. 특히 형상기억합금으로 문 자물쇠를 가공했다는 첫 번째 트릭은 정말 별로에요. 겨울날 닫힌 창문 밖에서 라이터 불로 지지는 정도로 변형이 가능할 정도로 형상기억합금의 변형력이 좋을리 없으니까요. 또 담배를 피워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라이터로 뭔가를 가열하는 행위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첨단이었을 소재를 활용한 과학 트릭이기는 했지만, "탐정 갈릴레오"만큼의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트릭, 즉 설월화 게임에서 타깃을 나미카로 정하게 만든 트릭은 좀 낫습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복잡하지만, 여러 그림들을 사용하여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쉬웠고요. 다도에서 따왔다는 설월화 게임의 룰 자체가 친숙하지 않은 만큼, 이런 배려는 아주 고맙더군요. 트릭도 뻔할 수는 있지만 확실한 방법일 뿐더러, 이를 밝혀냄으로써 "공범"이자 "진범"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괜찮았습니다.

허나 트릭이 작품 내용과 따로 논다는건 문제입니다. 나미카가 쇼코의 자살 사건과 별개로 벌인 조사가 그녀의 검도 결승전 의혹과 관련되어 있어서 설월화 게임 사건이 일어났다는 동기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나미카가 검도에 얼마나 진지했는지를 작중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탓에, 그녀가 설월화 게임으로 자신의 우승을 방해한 친구를 응징하려 했다는건 납득가는 설정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무리 검도가 중요하다 해도, 자기가 이상한 약을 먹어서 시합에서 졌다고 해도 친구한테 비소를 먹일 생각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쇼코의 죽음에 대한 징벌보다 자신의 검도 시합을 망친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범인(으로 의심되는)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게임을 벌인다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와코와 하나에에게 테니스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 설명되지 않아서 이런 복수가 무슨 의미인지 알기도 힘들었고요.

또 도도가 나미카를 살해해서 얻는 게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쇼코의 죽음은 어쨌든 그녀의 자살 시도로 말미암은 것이고, 도도가 그것을 방조했다 치더라도 그건 큰 범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나미카를 죽인 것은 자살로 덮기에는 무리수도 많고, 범인이 너무 적은 인물들로 한정되기에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미카 방에서 비소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경찰 수사가 진작 시작되었을 테고, 나미카가 마실 차에 뭔가를 넣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도도와 사토코뿐이었으니 진작에 꼬리를 잡혀을테니까요. 이런 리스크를 짊어지느니 차라리 형상기억합금을 이용해 다시 침입하여 원룸에서 자살로 위장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리고 도도는 나미카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트릭을 만든 뒤 억지로 가져다 붙인 동기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쇼코의 죽음은 친구들이 입을 모아 그녀가 자살할 리 없다고 말하는데, 마지막에 도도의 편지로 사실은 자살이었다고 밝히는건 반칙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명성에 걸맞은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트릭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이야기와 전혀 어우러지지 못한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설월화 게임 트릭과 그것 때문에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 정도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초기에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15/11/01

삼국지 스피리츠 1 - 아라카와 히로무, 토코 준 / 김동욱 : 별점 2.5점

삼국지 스피리츠 1 - 6점
아라카와 히로무, 토코 준 지음, 김동욱 옮김/애니북스

삼국지 연의 120회의 각 회별 내용 및 주요 정보 요약에 "강철의 연금술사"로 일세를 풍미했던 아라카와 히로무가 삼국지 매니아로 유명한 만화가 토코 준과 함께 수다떤 내용, 마지막으로 아라카와 히로무의 4컷만화 두 개씩을 실어놓은 기획 만화입니다. 1권에는 전부 60회까지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사실 만화라고 하기에는 대담의 비중이 높고, 대담집이라고 하기에는 팬이나 매니아 관점에서의 수다 수준이라 이래저래 애매한 부분이 많습니다(저의 분류로는 "역사책"입니다!).

허나 삼국지 팬으로서 즐길거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연의 120회를 회차별로 요약 소개하는 구성이 일단 괜찮아요. 주요 등장인물, 퇴장인물이라던가 주요 용어에 대한 소개도 적절할 뿐더러, 정사도 적절히 인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듭니다. 대담도 단순한 팬보다는 더 깊숙한, 매니아 수준의 지식이 뒷받침되어 있고 나름대로 신선한 시각도 즐길 수 있고요. 글이 좀 많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정작 기대했던 만화의 재미가 무척이나 낮은 게 아쉽습니다. 황개의 고육지계, 노숙에 대한 소개, 손권이 동생을 유비와 결혼시키는 장면 등 피식할 만한 것들도 몇 개 있긴 한데 성에 차지는 않네요.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삼국지 팬이라면 한번쯤 볼 만합니다. 단, 만화를 기대하시면 안 되고 좀 색다른 삼국지 정보(?) 서적을 읽는다고 생각하시는게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15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에 9,000원이라는 가격은 너무 쎕니다. 2권을 구입할지는 좀 고민해 봐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