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생물학 - 한혜연 글 그림/거북이북스 |
10여 년 전 "M. 노엘"이라는 당시 국내에서 보기 드물었던 본격 정통 범죄 추리 수사물을 선보이며 제 눈을 사로잡았던 작가 한혜연의 신작입니다. 작가의 이름만 보고 주저 없이 구입한 책으로, 지난주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서 진통하는 와중에 옆에서 읽었습니다. (크...)
얇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총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풍성한 구성과 더불어 심리 - 호러 분위기가 강한 작품들이라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던 작가의 이력다운, 생물학적 이론이 담뿍 실려 있는 작품들이라는 것도 독특한 재미를 선사해 주고 있고요. 이렇게 전문지식을 특정 장르에 녹여낸 작품은 그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드문데, 한혜연 작가는 전문성과 재미의 경계선상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낸 편입니다. 아울러 확연히 좋아진 그림 역시도 작가의 내공 상승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 역시 큽니다. 먼저, 설정 부분에서 생물학 전공자의 이론을 깊이 집어넣은 점은 인상적이지만, 설정 이외의 전개가 뻔한 작품이 많다는 것이 첫 번째 아쉬움입니다. 억울하게 살해당한 시체가 묻힌 밭의 작물을 먹은 사람들의 행동을 그린 "먹이연쇄"라든가, 기생충의 숙주 역할을 하는 에로배우의 인육 파티 이야기인 "완전변태"를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지금 읽기에는 너무 안일한 전개라 생각됩니다.
또한, 기둥 줄거리 이외의 설명이 굉장히 부족하다는 것이 두 번째 아쉬움입니다. 너무 단편 분량에 얽매인 탓인지 모르겠으나, 전개가 굉장히 불친절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비가 오면 몸이 안 좋아지는 주인공과 물고기의 집단 죽음을 연관시킨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되풀이한다"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주인공과 물고기의 죽음을 연결하는 방식이 단순한 장면의 교차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래서 어쩌라고?" 랄까요.
마지막으로, 생물학 이론을 조금 무리하게 작품에 접목시키려 한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한성유전"의 경우를 보자면, 지극히 한국적인 설정이나 전개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았는데 "한성유전"이라는 설정을 끌어들이고 그 사례를 녹여내기 위한 전개는 억지스러웠습니다. "귀에 털이 많다"라는 이유는 좀 지나치잖아요? 귀 면도기나 잘 쓰면 될 것을 말이죠. 차라리 대머리였다면 모를까...
그래도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의 만화임에는 분명합니다. 실제 있었던 집단 자살 사건을 이론과 접목시키는 발상이 좋았던 "오페론의 유전자",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어 특이한 반전을 보여준 "Butterflies" 두 편만큼은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대단했습니다. 좋았던 작품들처럼 "생물학" 본연의 이론을 실제 사건과 접목시키는 데에 보다 신경을 쏟았더라면, 아니면 너무 생물학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좀 더 일상적인 분위기로 끌고 갔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지만, 현재로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만화라 생각됩니다.
비록 아쉬움이 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만, 척박한 한국 장르 만화 풍토에서 10년 넘게 전문성을 띄고 활동해 온 작가는 당연히 응원해야겠죠. 한국 심리 - 호러물에 관심이 많거나 작가의 팬이라면 일독을 권해 드립니다. 단, 제목처럼 "기묘한" 느낌은 별로 없다는 것은 유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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