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친일파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친일파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1/04/03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정운현 : 별점 5점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 10점
정운현 지음/개마고원

친일파를 조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서론 이후,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지 않았던 친일파들을 발굴하여 그들의 친일 행각과 후일담까지 소개해주는 인물사 서적입니다. 크게 관리, 경제인 (갑부), 지식인, 언론인, 작가 및 예술가, 종교인, 직업적 친일분자라는 7개 분류로 소개됩니다.

서론에서 소개되는, 타국 친일파 처벌 사례와는 다르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국립묘지에 안장되거나 3.1 문화상을 수상한 친일파가 있을 뿐더러 심지어 친일파의 이름을 딴 상까지 있다는 우리나라의 실태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뒤이은 친일파들의 매국 행각도 화려하기 짝이 없더군요. 이 친일파 당사자는 물론, 그들의 선대의 재산에 힘입어 해방 이후 한 자리씩 차지했던 후손들의 이름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부분 반성은 커녕 친일 재산을 되찾으려는 등 뻔뻔함으로 일관했으니까요. 최소한 '친일을 해서 잘 살고, 독립 운동을 해서 못 사는' 나라가 아님을 지금이라도 증명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반대로, 친일 행각을 반성했던 소수는 이 점을 감안해서 대접해야 햘 테고요. 윤서인같은 인간들이 망발을 내뱉는 사회가 된 건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역사는 바로잡고 바로 세워야 할 겁니다.

그럼 몇 명의 인상적이었던 친일파를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김대우입니다. 3.1 의거에 참여할 정도로 애국 청년이었지만 감옥살이 이후 변절하여 일제하 도지사를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던 친일파이지요. 반민특위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는데, 1960년 총선에 출마했다는 뻔뻔함이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이끌며 수백명의 독립군을 체포, 사살하는데 기여했던 김창영이 반민특위에서 고작 '공민권 정지 3년'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당연히 능지처참을 해도 마땅한 악질 친일파인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김창영이 다른 친일파들과는 다르게 해방 이후 권력에서 멀어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죗값을 치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김희선은 원래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을 정도로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지만, 알고보니 변절자로 상하이 임시정부 밀정 노릇을 했다니 기가 찹니다. 

유명했던 친일경찰 노덕술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독립 운동 사건만 취급했던 악질 고등 경찰 출신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될 당시, 무려 34만 1천원이라는 도피 자금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선인의 고혈을 빨아먹은 악질이었지요. 게다가 친일파에 의한 반민특위 테러 음모에도 가담하고 있었다니, 이 정도면 바로 사형을 시켰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호 등으로 수감 후 얼마 되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네요. 그 뒤 제 1사단 헌병대장을 지낼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6.25 때 김창룡 특무대장에 의해 구속된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조금 늦었지만 제대로 된 응징을 받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조선 제일 갑부의 한 명이었던 공주 갑부 김갑순 이야기도 볼 만 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관직에 있으며 개발 정보를 빼돌려 땅 투기하여 치부한 인물이거든요. 단순 치부였다면 모를까, 재산 증식 및 인맥 확보를 위해 친일파들과 적극적으로 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본인 스스로도 일본 밀정 노릇을 하기까지 했다네요. 그나마 그 많던 재산은 해방 이후 다 날리고, 제실도 흉가가 되었다니 조금 위안이 됩니다. 이런 정보로 치부한 공직자들도 모두 패가망신하면 좋겠네요. 

영덕 갑부 문명기도 친일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늘리기에 골몰했던 친일파인데, 1935년에 일제에 10만원을 헌납해 비행기를 기증했다는 일화가 재미있었습니다. 사진을 보니 복엽기!더라고요. 일제에서 누군가 문명기 돈을 빼돌린 모양인데, 전쟁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았을거라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문제는 문명기의 손자 문태준이죠. 국회의원을 비롯한 이런저런 공직에 종사하며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하니까요. 연좌제처럼 공직을 박탈할 필요야 없지만, 할아버지 재산이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소송을 냈던 할아버지 못지않은 파렴치한이라는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민족운동가로 알려졌던 이선근은 열렬한 친일파였던건 물론이고 박정희 시절 유신 독재 찬양에 전두환까지 찬양했던, 그야말로 아부의 달인이더군요. 국립묘지 안장에 아들과 손녀들이 모두 떵떵거리며 산다니, 지금이라도 국립묘지 파묘는 물론 그의 정체와 후손들 모두 널리 알리는게 당연합니다.

조선에 있었던 신사에서 신직, 즉 신관으로 일했던 조선인 이산연 이야기는 신기했습니다. 아무리 할 게 없어도 그렇지.... 덕분에 이산연은 일제 치하에서는 일본인처럼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해방 후 행방불명된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는 것 하나만 위안거리네요. 

조선 불교 총 본산 조계종이 일제 강점기 때 생겼으며, 이를 주도했던 첫 종무총장 (총무원장) 이었던 불교계 거두 이종욱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방 후 국회의원 등을 지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을 뿐더러 그 아들은 동국대 대학원장까지 지냈기 때문입니다. 친일해서 후손이 잘 사는 세상을 더 이상 만들지는 말아야 하잖아요. 

1급 친일파 조병상 이야기는 좀 놀라왔어요. 직업이 아예 친일이었는데, 학병 출정을 독려하며 자기 아들도 5명 중 3명이나 출병시켰다니 그 충정이 대단합니다. 아들들이 다 생환해서 모두 출세했다는게 좀 쓰린데, 조병상 본인은 6.25때 실종된 걸로 추정된다는게 위안입니다.

친일파 정보는 물론, 일제하 공직자 관등과 같은 볼만한 자료도 많습니다. 최상급은 일왕이 친히 임명하는 친임관으로 조선 내에는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두 명 뿐이고 그 다음이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순서입니다. 주임관 이상이 고등관이고요. 지금의 5급 공무원 이상에 해당하는 직위며, 군수는 판임관에서 승진하거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현재의 행정고시) 합격자가 임용되었다고 합니다. 즉, 군수는 5급 공무원 수준이니 이 정도면 친일파로 보는게 타당하겠죠. 당시 군수는 일선 행정기관의 실질적 책임자로 지금보다 권한과 재량이 더 많았고, 어려운 시험을 거쳐 자발적으로 그 자리에 앉았다면 당연합니다.

좌옹 윤치호의 친일 논리도 곱씹어볼만했습니다. 윤치호가 친일파가 된 건, 미국 유학시절 겪었던 인종차별, 그리고 개화기부터 잠재되어 있던 민족패배주의와 현실적으로 일본 통치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대세순응주의, 그리고 105인 사건 때 겪었던 가혹한 고문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군요. 이후 윤치호는 '황인족 담합론'과 강자에게 약자가 순종해야 평화의 기틀이 마련된다, 일본의 스코틀랜드가 되는게 조선이 살 길이라는 등의 등의 사상적 기반과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이렇게까지 변명거리를 만들어 낸게 더 웃깁니다.

민족대표였던 최린은 변절하여 친일을 한 이유를 '늙은 노모에게 불효를 할 수 없어서 망명도, 자살도 못하고 일본에 항복했다'고 고백했는데, 차라리 이게 더 합리적이지요. 최린은 반민특위 법정에서 진솔하게 반성과 후회를 보였다니, 같은 친일파라도 인간적으로는 더 나은 인물이었다 생각됩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을 도운 친일파 1호 김인승, 여자 밀정 배정자 같은 경우는 친일의 이유가 나름 합당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좀 애매했습니다. 김인승은 조선 말기, 지역 수령과 의견충돌 끝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탈주했던 인물이거든요. 공권력과 싸워서 패배하여 도망친 뒤, 자신을 버린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손을 잡은 셈입니다. 따지고 보면 조선판 오자서인 셈이지요.
배정자의 일생은 더 기구합니다. 아버지가 대원군 실각 때 한 패로 몰려 처형된 뒤 유랑생활을 하다가 관기로 팔렸고, 그 뒤 중이 되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김옥균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거든요. 조선에 대해 증오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고, 일본에 충성을 바친 이유도 타당해서 친일파라고 매도해야 할 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고요. 결과야 친일인데, 그 이유는 수긍할 만 하니....

이렇게 친일에 대해 여러가지를 깨닫게 된 좋은 독서였습니다. 박흥식, 김활란 등 익히 잘 알려진 친일파가 함께 소개된다거나, 그 외 인터넷으로 쉽게 찾을 수 있는 친일파들이 많은건 조금 아쉽지만, 책의 취지 상 쉽게 빼지는 못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빠진 친일파가 세간에서 잊혀질까 두렵네요. 역사 바로세우기 측면에서 모든 분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제가 읽은 구판은 절판되었지만, 아래의 책으로 재간되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친일파의 한국 현대사 - 정운현 지음/인문서원

2008/10/17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이철 : 별점 5점!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10점
이철 지음/다산초당(다산북스)

이 책은 전에 읽었던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과 같은 시리즈로 제목 그대로 일제 강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당시 조선의 스캔들(?) 11개를 풀어놓은 책입니다. 그야말로 "경성스캔들" 이죠. "조선을 뒤흔든 16가지 살인사건"은 읽고나서 실망이 컸지만 이 책은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두 책의 차이점은 정말로 "충격적이고 몰랐던" 역사를 얼마나 디테일하게 설명하면서도 쉽고 이해하기 쉽게 묘사했는지의 여부입니다. "조선을..."은 일단 읽는 것 자체가 힘들 뿐더러, 너무 주제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아서 실망스러웠는데 이 책은 최소한 재미만큼은 확실합니다. 물론 이 책도 제목과는 다르게 당대에 그다지 충격을 전해주지 않은 스캔들도 몇 건 다루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도 드라마틱하다는 점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모든 에피소드가 기대했던 것 만큼의 충분한 재미는 전해 줍니다.

또한 11개의 스캔들 중 익히 알고 있었던 사건이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른바 "사의 찬미" 사건이나 여류화가 나혜석의 사건 두가지 밖에 없었다는 것도 책의 가치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아울러 이 두 사건 역시 알고 있는 내용보다 훨씬 자세하게, 당시의 자료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지루한 맛은 전혀 없었다는 것도 탁월하고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사건은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기생 강명화의 정사 사건이었습니다. 친일파 대부호의 아들과 기생이라는, 그야말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신분, 재력의 차이로 비극으로 끝난 너무나 순정 만화같고 일일 드라마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정파적이고 비극적인 로맨스가 1920년대에 존재했었다는데 놀랐네요. 여러 권의 소설과 영화로도 가공되었을 정도로 당시에 큰 충격을 준 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이렇게 유명한 이야기가 지금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이유도 조금 궁금해 지기는 했습니다. 아마도 해방 후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던 장병천 아버지의 형제인 장택상씨의 권세로 사건을 은폐한게 아닌가 싶은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친일파들의 행각은 씁쓸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당대 매스컴들과 이른바 "지식인" 들의 편견과 비뚤어진 시각을 보여주는 김명순 사건과 독살미인 김정필 사건도 흥미로왔으며, 유명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이 다수 등장하는 대하 서사시와도 같은 "제4부 - 경성을 붉은색으로 물들인 혁명적 연애 사건"의 이야기들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불꽃같은 삶과 격동의 시대가 잘 표현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그야말로 조선과 중국, 소련, 해방 후 북한을 넘나드는 거대한 스케일에 정말로 조선 해방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그들의 삶, 체포와 탈옥, 탈출, 고문 등의 고난의 세월 및 해방 후 공산주의자로 남한에서는 매도되었다는 점과 북한에서는 대부분 숙청되었다는 비극적 종말까지 모두 갖춘 극적인 이야기라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당시의 여러 정사사건, 자유 연애주의자들과 신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동성애자 자살 사건 등 흥미로운 주제가 한 가득입니다. 목차만 읽어도 읽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로 말이죠.

역시나 "경성탐정록" 자료로서 구입한 책이었지만 의외의 재미와 새로운 역사를 알게되는 재미가 쏠쏠하여 횡재한 기분까지 드는 책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재미와 더불어 당대의 여러 사료와 문헌을 다수 인용하고 있기에 자료적 가치까지 충분했으니까요. 일제 강점기 시대의 또다른 역사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2019/11/02

대한제국 황실 비사 - 곤도 시로스케 / 이언숙 (신명호) : 별점 3점

대한제국 황실 비사 - 6점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언숙 옮김, 신명호 감수/이마고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궁내부 사무관으로 특채되어 이왕궁에 입궁한 뒤 각종 궁내 대소사의 실무자로 일했던 곤도 시로스케의 회고록입니다. 일본인 시각에서 한일 병합과 이왕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지요. 대한제국의 황제가 이왕가로 격하되며 겪게 된 온갖 수모가 일본인 시각에서 담담하게, 하지만 굉장히 상세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망국의 왕가로서 당연히 짊어질 수 밖에 없는 수모겠지만, 이를 '대일본제국' 신민의 시각으로 바라본 글을 읽자니 굉장히 기분이 묘해집니다.

심지어 저자 곤도는 일본인이지만 이왕가에 대한 충심도 갖춘 인물이라는 점에서 내용이 무척 기묘한데, 곤도의 이러한 성격 덕분에 진짜 매국노가 누구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을사5적 중에서도 최고의 악질이자 매국노의 대명사로 이완용을 기억하고 있는데 곤도의 시각에 따르면 한일병합의 1등 공신은 윤덕영입니다. 병합 외에도 매국노 역할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인물로 설명됩니다. 특히 순종의 도쿄 방문에 대한 이야기는 곤도 마저도 '자작의 잔혹하고 악랄한 수단'이며 '극도의 모욕을 준 것'이라고 표현할 정도에요. 나라를 침략한 일본인이 나쁜 놈이라고 욕하는 조선 매국노라니! 정말이지 할 말이 없습니다.
또 이완용 후작보다는 송병준 백작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여론을 환기시키고 움직이는 능력이 출중하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더러운 친일파들이기는 마찬가지만 이래서야 이완용 혼자 너무 독박을 쓰고 있지 않나 싶더군요. 앞으로 친일파를 욕하는 자리가 있다면 윤덕영과 송병준의 이름도 꼭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한일 병합에 따라 겪는 치욕적인 역사 한 가운데에서 당시 곤도가 직접 진두지휘하고 겪었던 일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압권입니다. 대표적인게 윤덕영의 활약(?)으로 성사된 순종이 일본 천황을 만나는 과정입니다. 경성에서 부산까지 특별 열차로 이동하고, 부산에서 군함을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하고, 시모노세키에서 나고야를 거쳐 도쿄에 도착하여 천황을 만난 뒤 교토, 미야지마, 시모노세키를 거쳐 돌아오는 여정의 일정별, 장소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영친왕의 일본 유학과 생활에 관련된 이야기, 대조전 화재와 그에 따른 대조전 중건, 고종 사망과 뒤따라 벌어진 만세 운동, 고종의 능묘를 선정하는 문제 등 소개되는 이야기들 모두 실무 책임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디테일이 가득합니다.
이 중 만세 운동은 고종 황제의 국장을 일본 예법 형식을 강조해서 촉발된 것이며, 무저항주의 민중운동이라고 정확히 서술하는 등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것도 눈에 뜨이는 점입니다. 가장 큰 이유가 한일 병합이라는 점을 간과하고는 있다는 문제는 있지만요.

또 잘 몰랐던 새로운 사실도 제법 많습니다. 조선에서 '목마 사업'을 운영했었다는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수원역 근처에 목장을 조성하여 운영하였으며, 데라우치 총독이 특히나 관심을 가지고 원조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무척 새로왔어요. 궁내부 운영의 여러가지 디테일도 재미있었는데 특히 매달 왕에게 5,000원, 왕비에게 2,500원을 친용금으로 전달했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 밖에도 정기적인 용돈이 6만원 이상, 임시 용돈이 2만원 이상이었다니 상당한 금액이지요. 1927년 1원의 가치는 2010년대 기준으로 3만원 ~ 6만원 사이라고 하니, 중간값인 4만 5천원이라고 해도 매월 2억이 넘는 금액을 수령한 셈입니다. 왕비까지 합치면 3억이 넘고요. 나라는 망했어도 호의호식은 했겠구나 싶네요.

시간 순서에 가깝기는 하나 이야기 전개에 두서가 없고, 과연 이런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문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꽤 인상적인 독서였습니다. 한일 병합, 일제 강점기 초창기에 대해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 외의 다른 사실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생각되거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0/08/29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 | 필적은 말한다 - 구본진 : 별점 3점

필적은 말한다 - 6점
구본진 지음/중앙books(중앙북스)

유명인사의 글씨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인 법조인 저자가 자신의 수집품인 항일 - 친일인사들의 글씨를 분석하여 확연한 차이를 도출하여 설명하는 책입니다. 전문적인 필적감정서는 아니지만 필적이라는 것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설명 역시 같이 실려 있어서 이해를 돕네요. 풍부한 도판 역시 잘 갖추어져 있고요.

책에 실려있는 항일 - 친일파의 확연한 필적 차이를 요약하자면,
  • 항일 운동가 : 글씨의 크기가 작고 모양이 정사각형으로 균형잡혀 있으며, 대체로 각진 글씨가 많다. 글자 간격은 좁으면서도 행 간격은 넓다.
  • 친일파 : 글씨 크기가 크며 모양도 좁고 긴 형태이다. 유연한 형태가 많고 글자 간격은 넓은 반면 행 간격이 좁다
는 식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물론 저자도 말하듯 무조건 맞는다고 일반화할 수 없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재미있었어요.

그러고보니 제가 좋아하는 만화 "거침없이 한 획!"과 유사한 부분도 있네요. 유도소녀 모치즈키는 크고 호방한 글씨를 좋아하고, 내성적인 귀국자녀 유카리는 가늘고 작은 글씨가 장기라는 것에서 글씨는 성격을 반영한다는 점은 일맥상통하니까요. 이론에 따르면 둘의 장점을 합친 것 - 느리지만 힘이 넘치고 확실하게 쓰는 것 - 이 항일투사 서체 바로 그 자체이기도 해서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쏠쏠하네요..

또한 뒷부분에는 항일 운동가의 옥중 서신 등의 자료로 당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른바 '통문'이라는 의병을 일으킬 것을 촉구한 문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같은 자료를 비롯하여, 만주투사 이종혁의 옥중 편지를 통해 책같은 것을 요청할 수 있었다는 소소한 내용까지 의외로 참고가 될 만한게 많더라고요.

자신의 취미를 직업적인 전문분야와 결합시켜 만들어낸 괜찮은 참고도서로 별점은 3점입니다. 전문적인 필적 감정서도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2016/05/31

박물관 보는 법 - 황윤 : 별점 3점

박물관 보는 법 - 6점
황윤 지음, 손광산 그림/유유

부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감상자의 안목"입니다. 간략한 책 소개와 부제를 보고, 다양한 박물관에 대해 어떤걸 관람하면 좋을지를 알려주는 실용서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내용은 제 생각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우리나라 박물관과 유물 수집가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미시사 서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을 정도로요.

책은 을사늑약 이후 일본의 도굴꾼이 창궐했다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의 기사에서 시작합니다. 다행히 1908년 왕립 이왕가 박물관이 세워진 이후, 시장에 나도는 유물들을 웃돈을 얹어 구매함으로써 유물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1908~1917년까지 왕실이 수집한 유물의 규모는 무려 1만 122점, 구입비만 21만원이었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1원이 5만원 정도라고 한다면 100억원 정도 쓴 거니까요. 특히나 국립 중앙 박물관의 핵심 유물인 "금동반가사유상"을 1912년 2,600원이라는 거금에 구입한 것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판매자 일본인 고미술상은 경주 남산 기슭에 있는 어느 절에서 찾아낸 이 유물을 40원이라는 금액에 사들였다고 하니 정말 남는 장사 했네요. 천벌이나 받아라! 여튼 이왕가 박물관 덕에 해외로 유출되지 않았으며 지금 보험 평가액만 500억원 수준이라는게 다행일 뿐입니다.

다음에 설립된 것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입니다. 식민 통치의 일환인데 총독부의 권력을 앞세워 1930년대 말에는 1만 4천점이 넘는 막대한 전시품을 유치했다고 합니다. 이때 일본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본국 총리로 임명되어 귀국할 때 자신이 수집한 유물을 기증했는데 여기 포함된 것이 또 다른 금동반가사유상이었습니다! 본인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그나마 좋은 일을 해 준 것은 고맙네요.

그 뒤에는 유물 수집가와 그들이 수집한 유물들 이야기입니다. 간송 전형필 이야기는 너무 많이 접해보아서 조금은 식상했습니다만, 이외의 인물들도 소상하게 소개해 줍니다. 악명 높은 유물 반출범 오구라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 중 조선 최상류층의 친일파 의사 박창훈과 서민을 위한 봉사의 삶을 산 성모 병원을 세운 박병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박창훈은 치부의 대상으로 유물을 수집했고, 1940~41년 사이 소장품 전부를 경성미술구락부에 모두 팔았습니다. 거의 600점 가까운 소장품을 4000~7000원 사이의 고액에 매각했다니 어마어마한 돈이죠.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했다는 후일담은 입맛을 씁쓸하게 만드네요. 반면 박병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백자 중심의 수집을 이어간 뒤 후일 소장품 전부를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가서 유물 카드에 '수정 (박병래의 호)'가 적힌 유물은 관심 있게 봐 두어야겠어요.

또한 출신 대학이 아니라면 쉽게 가보지 못할 대학 박물관에 대한 상세한 정리도 눈길을 끕니다. 친일파로 유명한 김활란이 이화여대 박물관을 위해서는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는 일화가 특히 재미납니다. 박물관의 상징인 국보 백화철화포도문 항아리를 1960년대 1,500만원 (현재 시세로 30억 이상)에 구입한 것이 그것인데, 이 항아리는 장택상의 소유로 그가 야당 지도자로 활동할 때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내놓았다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이어서 사립 박물관과 사립 미술관이 소개됩니다. 미국의 게티 미술관을 소개하며 진정한 문화재단의 역할을 알려주는데, 한국 기업 휘하의 박물관과 미술관에서는 아무래도 요원한 일이겠죠. 그나마 우리나라에서는 호림 박물관이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제 공부가 부족한 탓에 호림 박물관은 가본 적이 없는데 근시일 내에 꼭 한번 가 봐야겠습니다.

마지막은 근대 미술 및 천안의 씨킴과 아라리오 프로젝트, 아라리오 뮤지엄 소개로 마무리됩니다. 이 부분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는데 한눈에, 책 한 권을 통해 읽게 되니 뭔가 통사적인 흐름이 느껴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네요.

이러한 미시사적 이야기는 물론, 박물관별로 주요 소장품도 함께 소개됩니다. 주요 소장품이야말로 관람할 때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테니 소개되는건 당연합니다. 이 부분은 책에 대해 가졌던 원래의 제 생각과 비슷하네요. 부록으로 국립 중앙박물관의 경우, 간략한 약도와 최적의 동선도 수록되어 있고요.

책의 저자인 역사학자 황윤에 대해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박물관과 유물에 대한 애정만큼은 깊이 느껴지는 글들도 좋았습니다. 230여 페이지라는 적절한 분량, 책날개도 없는 오래전 문고본 형태의 심플한 디자인에 적절히 삽입된 정밀한 일러스트도 마음에 들고요.

단 불필요한 장식, 군더더기를 덜어내어(심지어 표지조차 2도 인쇄에 불과합니다) 보급형 책을 만들겠다는 의지와는 다르게, 9,000원이라는 정가가 적합한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더 저렴하던가, 아니면 조금만 가격을 올려서 표지 정도라도 딴딴하게 (?) 만드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박물관을 좋아하시고 우리 유물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꼭 한번 보실 만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책에 실린 박물관별 꼭 보아야 할 유물 목록을 요약하며 글을 마칩니다.

  • 국립 중앙 박물관 - 금동반가사유상, 2층 기증 전시실의 수정 박병래가 기증한 백자들
  •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
  • 호암미술관 - 15~16세기 초기 청화백자, "수월관음도" 등
  • 플라토 미술관 - 로댕의 "지옥의 문", "깔레의 시민"
  • 부암동 서울 미술관 - 이중섭의 "황소" 외 근현대 작품

2023/04/29

영어 조선을 깨우다 2 - 김영철 : 별점 3점

영어 조선을 깨우다 2 - 6점
김영철 지음/일리

1권에 이어 2권은 친미파의 형성에서 시작합니다. 갑신정변 후 미국에 상주 외교사절 파견이 시도되었습니다. 청의 내정간섭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지요. 그래서 미국에 전권공사 박정양 일행이 파건됩니다. 일행 중 참찬관 이완용이 눈에 뜨이네요.
갓과 도포 차림으로 미국에 간 일행은 여러가지 에피소드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청의 분노로 박정양은 귀국하게 됩니다. 약속을 어기고 자주외교를 시도했던 탓이었지요. 그래서 외교적으로 딱히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영어 열풍에 일조를 하기는 했습니다. 그건 일행 중 이하영의 존재 덕분입니다. 이하영은 조선 미국 공사관 근무자 알렌과 함께 일하며 3년간 일상 영어를 배운 이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일행 중 그나마 영어를 할 수 있어서 미국 적응애도 성공했으며, 심지어 이하영은 미국으로부터 200만 달러 차관을 얻어오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무려 16만 5천 달러를 로비 비용으로 쓰며 미국 사교계를 주름잡기까지 했습니다.귀국 후 일제 강점기에는 고무신 회사 대륙 고무 사장으로 거부가 되었고요. 원래는 찹쌀떡 장수였던 이하영이 성공을 이룬건 영어 하나 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성공에 목마른 젊은이들이 영어에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또한 주미공사 일행들이 귀국 후 조선 정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것도 외국어로서의 영어의 지위를 탄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갑오개혁의 요직이 이들로 채워지게 되니까요. 삼국간섭 후에는 내각 모든 자리를 영어파가 차지했고요.
친미파, 친러파가 뭉쳐 일본에 대항하는 세력 구도였는데, 을미사변 직후 친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지만, 아관파천 성공으로 친일내각은 붕괴하고 그 자리는 다시 친미파, 영어파가 맡게 되고요.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에 있으니 당연히 친러파도 득세하는데, 친러파는 친미파처럼 영어를 배운 사람보다는 러시아 통역 김홍륙이 실세가 되었다는게 재미있네요. 친미와 친러파가 세력 다툼은 친러파 승리로 끝나고, 대한제국 성립과 패망까지 친미, 영어파가 세력을 회복하는 일은 없었는데 벼슬아치 중 누구라도 러시아어 전문가가 있었다면 이후 정국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도 궁금합니다.

친미파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영어 보급은 더 확대됩니다. 앞서 이하영의 출세담이 세간에 널리 회자되기도 했고, 고종도 미국에 남다른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황태자도 영어 교육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또 갑오개혁 때 영어파가 권력을 잡고 학교 계혁을 주도한 것도 큰 이유가 아니었나 싶어요. 영어 학교는 지원금만해도 일어 학교의 3배나 될 정도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거든요. 성적이 저조하면 가차없이 낙급시키고, 학업 부진으로 쫓겨나면 관보 게제 및 다른 학교 입학과 관공서 업무를 하는게 배제될 정도로 혹독하게 교육을 시켰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규정에도 불고하고 1897년부터 16년간 거의 1,000에 가까운 입학생 중 졸업생은 79명에 불과했다니, 영어가 많이 어려웠긴 했나 봅니다만. (그래서 제가 영어를 못하는 듯....)
학교 외에도 외국인이 근무하던 제중원, 그리고 개인 교습이나 YMCA 등을 통한 영어 교육이 이루어져 점차 영어에 익숙한 인물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 활동했던 499명의 외국인 선교사들, 고용 외국인들도 어학 보급은 물론 외국 문화 보급에 큰 역할을 했고요.
이런 영어 보급 와중에 독립 신문 등 초창기 신문들이 영어 판이나 영어 기사를 정기적으로 발행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서재필이 미국 시민이라서 미국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는건 문제였지만요. 예를 들어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이 넘어간걸 최선의 정책이라고 했다니, 독립과 애국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지요. 게다가 기독교에 대한 찬양도 도가 지나쳤고요. 오히려 독립문을 세울 때 이완용이 했다는 연설 - 미국같이 독립이 되어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폴란드같이 망하든지 사람 하기에 다르겠지만,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 이 더 애국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후 유럽과의 외교를 위한 노력도 치열하게 이루어졌고, 공사들은 당연히 영어 능력자들이었습니다. 허나 외교적인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가쓰라 태프트 밀약, 러일 전쟁 등으로 조선은 패망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친미파 윤치호는 반미로 돌아서는데 그 이유는 루스벨트가 일본 침략을 옹호했기 때문이라네요. 침략을 옹호했다고 침략자에 붙어먹는건 뭐하는 짓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을사늑약 후 영어 수업은 대폭 축소됩니다. 그러나 미국 유학의 인기가 높아지고, 독립을 위해서는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는 등 영어의 위상은 되려 높아만 갑니다. 무엇보다도 입시의 핵심 과목이 되어 영어는 출세를 위해서는 꼭 배워야 하는 학문이 되고 맙니다. 경성 제국 대학의 시험 과목이 국어, 영어, 수학이었던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2차대전 와중에는 영어가 잠시 금지된 적도 있었지만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들어서며 다시 영어 인기는 치솟게 됩니다. 고등교육 이수 및 유학 등의 경험이 있는 친일파들이 중용된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반공을 내세운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건 통탄할 일이지요.

이런 영어를 중심으로 한 당대 조선의 역사적 흐름에 더해, 영어 교육 방법에 대한 소개도 상세합니다. 회화 중심의 초기 단계를 벗어난 이후에는 읽기, 쓰기 위주의 교육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서당식 교육 방법을 답습했다는 설도 있지만, 일본식 영어 교육이 이식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는군요. 전근대적으로 보였던 서당식 암기 위주 영어 교육은 오히려 단기간에 수천개의 단어를 암기하는 식으로 영어 구사능력을 높이는데 좋았다니 놀랍습니다. 오히려 독해 위주이며, 시험에서 점수를 따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일제 강점기 시대 변질된 영어 교육이 조선 - 그리고 독립 후 한국 - 의 영어 구사 능력에 발목을 잡은겁니다. 일제강점기이후 회화가 아닌, 문법 규칙에만 얽메이는 시대가 되었거든요. 결국 시험 시장은 크게 성장하지만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영어는 퇴화해 버리고 맙니다. 이런 방식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지요. 하여간, 일본은 뭐 하나 도움이 안되네요.

이외에도 영어와 함께 보급된 외국 문화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커피나 사진관, 손탁 호텔 등입니다. 하지만 다른 책에서 이미 접했던 이야기라 실망했습니다. 아예 이런 항목만 다룬 미시사 서적 - 커피, 사진, 호텔 - 도 따로 있으며, 영어 전파와 그렇게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려워서 구태여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지 의문입니다.
물론 단발성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인상적인게 없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영국 여행가 비숍의 식견입니다. 그녀는 조선인의 게으름의 원인이 관리들의 착취 때문임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최소한의 의식주 이상의 물건은 빼앗기니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면서요. 즉 조선의 패망은 수탈을 자행한 지배층의 문제로 귀결되는 셈입니다. 지금 MZ와 알파 세대라 불리우는 청춘들을 위해서, 반드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주는 건전한 사회로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소 불만이 없지는 않으나, 영어를 토대로 조선 후기 ~ 근대에 이르는 조선 정부의 난맥상과 사회 분위기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미시사 서적임에는 분명합니다. 이런저런 생각할거리도 많이 주었고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10/05/25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 손성진 : 별점 3점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 6점
손성진 지음/추수밭(청림출판)

근현대의 잊혀져가는 풍속을 25가지의 키워드로 나누어 서술한 풍속 - 미시사 서적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유래를 모르는 것, 예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해 다루고 있죠. 호떡, 풀빵, 떡볶이의 유래, 여러가지 골목길 놀이들, 운동회나 채변 검사 등 제 세대에서도 친숙했던 것들은 물론, 통기타 시대의 대학 문화를 다룬 이야기 등 반가운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또한 일제 강점기의 근대 풍속사 역시 재미는 물론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자료적인 가치가 높습니다. 1929년에 민형식 남작의 아들 민병림이 모르핀 중독으로 가산을 탕진한 끝에 절도죄로 5번이나 투옥되었다던가, 을사오적 중 1명이었던 이지용이 도박 중독자로 화투 도박 등을 통해 가산을 탕진했다는 등의 친일파들이 망하는 이야기는 가슴을 아주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고요. 몇몇 자료들은 창작 활동에도 유용할 것 같네요.

그 외에도 라면과 조미료, 고무신과 운동화, 양말의 역사, 양복점, 이발소, 대중목욕탕의 역사 등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1935년 광주지역 유지 12명이 독립 운동 기금 마련을 위하여 설립한 "무등 양말 공업사"가 국내 양말 업체의 효시로 지금도 "무등 양말" 이라는 이름으로 건재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는데 앞으로 양말 한 켤레를 사더라도 무등 양말 것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데이 서울"을 특별히 한 꼭지를 할애하여 소개한 것도 대박이에요. 제 청소년기는 "건강 다이제스트"와 고등학교 때 막 창간했던 "핫 윈드"의 시대였지만 선데이 서울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잡지임에는 분명하죠. 이 책을 읽어보니 옐로우 페이퍼라기 보다는 나름의 편집 의식을 갖추고 괜찮은 기획 기사도 많이 선보였던 그야말로 대중지라 할 수 있는 잡지던데, 네이버의 옛날 신문같은 아카이브 형태 서비스로 구현하여 제공하면 참 좋을 것 같네요. 정말이지 유용하면서도 재미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 같거든요.

재미와 함께 자료적 가치까지 있는 책이라 별점은 3점입니다. 한국 근 - 현대 풍속이나 미시사에 관심 있으시다면 꼭 한번 읽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3/12/30

서울의 봄 (2023) - 김성수 : 별점 4점

23년 대미를 장식한 영화. 천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이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전두환의 쿠데타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거의 실제 상황을 따라가고 있지만, 영화적 각색이 잘 되어 있어서 충분히 재미를 느끼면서 몰입하여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과연 흥행작이구나 싶었어요.
신군부 세력에 대한 고발 의미로도 가치가 높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 보다 사리사욕을 추구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행태가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덕분입니다. 그냥 보아도 혈압이 상승할 지경인데, 실존인물들을 맡은 배우들의 호연은 분노를 더욱 끓어오르게 만듭니다. 특히 전두광 역을 맡은 황정민의 엄청난 연기가 압권이었어요. 이 영화가 일찍 나왔다면 전두환이 사면받을 일은 없었을거라 생각될 정도로요.

다만 소소하게 흐름을 깨는 요소가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국방장관 및 '똥별'이라 불리운 장군들의 얼빠지고 무능력한 행태, 이태신 소장이 전화를 거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다가 (물론, 그의 활약이 있었다면 전두환 따위가 대통령이 되는 일은 없었겠지만...) 마지막에 전두광과 극적으로 대치한 뒤 체포된다는 마무리는 뻔하고 식상했고요.
등장하는 장군들 대부분이 지나치게 젊어 보였던건 분장과 캐스팅 실수로 보였습니다. 김성균이 맡은 김준엽 준장이 특히 심했어요. 찾아보니 실존인물 김진기 준장은 전두환과 동갑인데, 영화의 김준엽 준장은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한 편입니다. 한마디로 잘 만든 영화로,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보시지 않으신 분들은 꼭 한 번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도 딸아이가 조금 더 크면, 온 가족이 한번 더 감상할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영화를 보고 나니 씁쓸해집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비판받아 마땅한 이유로 전두환 일당이 사면받은 것도 모자라, 추징금도 제대로 추징하지 못한 채 그 자식들이 호의호식하고 있다는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에요.
아픈 과거를 털어내기 위해서는 친일파 후손들부터 단죄해야겠지만, 이미 백년 가까이 지난 과거사를 추궁하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클 겁니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들은 아직 생존자도 남아 있는 등 현재 진행형이니 만큼 이들의 단죄부터라도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추징금부터 이자까지 쳐서 모조리 환수해야 될테죠 . 전두환을 기린다는 '일해 공원'같은 어처구니 없는 명칭도 빨리 없애버리고요. 
아울러 지금 대한민국 사회 지도층에서 전두환을 비호하거나 옹호하는 인간들, 그리고 권력을 사유화 및 사조직화 하는 인간들도 빨리 퇴출시키는게 역사와 정의를 바로세우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이 영화에 대해 남자 많아 숨막힌다며 혹평한 글을 잠깐 읽었는데.... 실제 있었던 군부 쿠데타를 다룬 영화에 남자가 가득한건 당연한거 아닌가요? 여자가 등장할 여지가 대관절 어디에 있는지.... 이런 사람도 평론이랍시고 글을 쓴다는게 황당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2009/10/10

경성탐정록 -무가-

 http://navercast.naver.com/literature/genre/1248

네이버캐스트에 실렸습니다.
투기꾼 신타로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설홍주의 이야기입니다. "탐정소설"이라고 올라왔네요? 흠.... 고전적이라 좋긴 하지만...

여튼, 이 이야기는 처음의 제 시놉에서 뽑아낸 단편적인 아이디어를 제외하고는 저희 형이 거진 다 써서 별로 할 말이 없네요. 원래는 설렁탕 국밥 국물이 주요 단서가 되는 정통 추리물 비스무레한 시놉이었습니다만 저희 형 취향대로 약간 하드보일드 느낌이 강해진 듯 싶기도 하고요. 어쨌건 좋은 작품이니만큼 즐겁게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경성 어느 골목길에서 자수성가한 부호 조선인 "신타로"의 타살체가 발견된다.
신타로는 빈한한 머슴 출신으로 학교도 가지 못한채 일자무식으로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다가 대한제국 말기인 12살에 가출, 그 뒤 인천의 일본인 상인 밑에서 일하다 눈에 띄어 양자와 같이 입적된 뒤 미두시장에서 단번에 거금을 벌어들인 입지전적인 인물. 또한 그는 대표적인 친일파이기도 하여 식민지 정부의 일부 인사와도 신망이 두터운 사업가로 통하고 있었다. 그러한 신타로가 사업차 인천에서 경성으로 상경, 그 뒤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약속시간까지 동행과 헤어져 산책을 나간 뒤 행방이 묘연하였다가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신타로의 사건 당일의 행적은 사업차 도쿄에서 돌아온 뒤 저녁에 예정되어 있던 약속시간까지 동행과 떨어져 산책을 나간다고 한 뒤 밝혀진 것이 없으며 신타로의 사인은 두부 골절상으로 둔기에 얻어맞은 것이 치명상. 사건 현장은 경성의 으슥한 빈민가 골목으로 의복은 대체로 깔끔했고 유일한 단서는 지갑속 지폐 뭉치 중 맨 앞에 있는 피묻은 지문이 찍혀있는 1원.

레이시치 경부는 피묻은 1원권은 비국민 범죄단체의 서명과 같은 것이라 단언하고, 비열한 비국민 무리가 의로운 천황의 신민을 살해하고 떠벌이려는 작태라 단정짓고 수사에 착수한다. 그러나 피해자와 원한관계에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수사에 난항을 겪으며 결정적으로 명확한 동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 피묻은 지폐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결국 수사는 미궁에 빠진다.

사건을 의뢰받은 설홍주는 사건 현장을 탐방하고 사건 자료를 요청하여 열람한다. 이미 사건이 발생하고 시일이 지난지라 현장 조사를 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몇장의 문서와 그림, 그리고 피해자가 남긴 유류품으로 사건을 추리할 수 밖에 없는 상태...

2017/09/03

미스테리아 13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5점

미스테리아 13호 - 6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미스테리 장르문학 전문잡지 미스테리아 최신간입니다. 창간 2주년 기념호라 그런지 특별 보급가이기도 하고, 항상 관심있게 찾아보던 주제인 "경성"을 특집으로 하고 있어서 구입했습니다.

특집인 "경성" 관련 기사들은 기대에 값합니다. 1930년대 경성이 어떤 곳이었는지를 '장르 문학'과 관련된 시각으로 설명해주는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던 덕분입니다. "별건곤"에 실렸다는 경성 7대 특수촌이나 5대 마굴에 대한 탐사기는 충분히 하나의 작품 소재가 될 만큼 재미있었어요.
경성을 탐정 소설의 배경으로 바라보고 분석한 기사들도 좋았습니다. 예를 들면 "염마"에 등장하는 서광옥의 X별장은 "체신국 뒤로 해서 개천을 메워가지고 새로 낸 큰길을 단 후 누상동 큰거리에서 언덕 위에 지은 큰집을 찾았다"라는 묘사를 통해 '아방궁'이라 불렸던 친일파 윤덕영의 저택을 모델로 했다고 알려주는 식입니다.
여기에 더해 남촌과 북촌의 특수성과 같은 사회적인 부분, 아편굴과 같은 특수 장소와 같은 당대 경성에 대한 갖가지 디테일이 가득하여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박태원의 "최후의 억만장자"는 예전에 읽어봤던 작품으로 내용은 별 볼일 없지만, 삽화를 맡았던 월북 화가 정현웅의 그림은 마음에 들었어요. 목판화 스타일의 삽화는 지금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수준의 완성도니까요.

물론 이런저런 한국 추리 소설 역사서에 실려있는 내용에서 불과한 기사들도 제법 됩니다. 김동인의 "수평선을 넘어서"에 대한 기사가 대표적이에요. 얼마전 읽었던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3 : 추리물"에 수록된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아요. 주제에 맞춰 "경성"이라는 공간, 배경에 집중하지 않고, 당시 사회적 배경을 통틀어 설명하고 있는 탓입니다. 이렇게 풀어내면 다른 유사한 컨텐츠와 변별력을 가지기 힘들지요.

그러나 특집 외의 기사들은 기대 이하의 결과물이 많습니다. 홍보 문구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8인에게 가상 표지를 제안했다는 "세상에 아직 없던 책"은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박철희의 "환상의 여인" 정도만 괜찮을 뿐, 그외 표지들은 실제 책이 출간되더라도 구매 욕구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엉망이에요. 요새 대학생들 과제도 이것보다는 나을 듯 한데, 차라리 왠만한 미술 대학 디자인 학과와 연계하여 결과물을 수록하는게 좋았을 겁니다.

"미스테리아"의 핵심 컨텐츠인 리뷰 형태의 새 책 소개도 이번에는 그냥저냥입니다. 그닥 끌리는 책이 없더군요. 게다가 리뷰어 중 한 분은 직업이 "인형사, 자유기고가"라고 되어 있어서, 대체 이 리뷰가 무슨 기준인지도 헛갈립니다. 꼭 전문가가 좋은 리뷰를 쓴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는 컨텐츠가 아니라, 비용을 들여 구입한 책의 리뷰라면 그만큼의 전문성은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미스터리 애호가라면 최소한 인터넷을 통해 잘 알려진 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잠깐 인터넷을 찾아보았는데 당쵀 뭐하시는 분인지 모르겠더군요. 이 분이 소개하는 기타무라 가오루,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도 구태여 리뷰가 필요한지도 의문입니다(심지어 요네자와 호노부 작품은 '소시민'시리즈 최신간!). 이 잡지를 구해 읽어볼 정도의 독자라면, 이 두 작품은 딱히 리뷰가 필요없을테니까요. 새책 소개는 다른 곳에서는 잘 소개되지 않는 독특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뒤 이은 영화 "불한당"의 감독 인터뷰 역시 개인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감독이 SNS를 통해 실수했던 이력만 기억에 남을 뿐으로 이런 인물을 지면을 할애해가며 인터뷰를 한 이유를 모르겠거든요. "불한당"이 국내 범죄, 느와르 영화에서 특기할 만한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서 일까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별로 그랬을 것 같지도 않네요.

특집 외 기사들 중에서는 미스테리 속 음식에 대해 파헤치는 정은지 작가의 컬럼과 3편의 논픽션 정도만이 그나마 괜찮은 편입니다. 정은지의 컬럼에는 국내에는 소개된 적이 없는 형사 몬탈바노 시리즈를 소개하며, 작 중 등장하는 다양한 이탈리아 요리들의 소개가 곁들여지고 있는데 재미도 있고 신선했습니다. 제가 준비 중인 '장르 문학 속 음식 이야기'라는 컬럼과 비교되어 자극도 되었고요.
3편의 논픽션은 법의학자가 분석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 미국에서 화제가 되었던 살인 매뉴얼, 한강변에서 발견된 시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중 마지막 이야기가 가장 강렬합니다. 범인을 조작하려는 경찰의 노력에, 무고한 용의자가 겨우 혐의를 벗는 과정, 그리고 결국 미제 사건으로 범인은 커녕 피해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라는 결말까지 모두 충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이전 호들과는 다르게 수준 이하의 작품이 더 많네요. 우선 로스 맥도널드의 "사라진 여인"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루 아처 시리즈라는 점을 제외하면 특기할 만한 점이 전무한 소품입니다. 루 아처가 묶은 모텔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루 아처가 진상을 파헤친다는 내용인데 루 아처가 하나씩 손에 넣은 단서를 되짚어가면 진상이 드러나는 전개라 추리의 여지도 없고 이야기도 원사이드하게 흘러갑니다. 선택지가 하나 뿐인 미션을 수행하는 느낌이랄까요? 딱히 반전이 있는 진상도 아니고요. 이 정도면 평범 이하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국내작가 차무진의 "비형도"는 전개는 흥미로우나 좋은 작품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런 단서나 복선도 없이 귀신들 사이에 어울린다는 결말이 영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물론 조상병이 살의를 품은 순간, 그 장소에 있던 귀신들 속으로 들어가 귀신들의 역할극이 벌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되기는 합니다만... 개연성도 없는 역할극이 전체 분량의 90%에 달하는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죠. 생각한대로 현실이 바뀌는 "열린 우주"라는 핵심 설정 및 이를 통해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은 아주 재미있었는데 아쉽네요. 하기사 좋았던 부분들도 여러모로 애매하긴 합니다. 사건의 시작은 학예사의 뿔테 안경이 아니라 "껌"이었어야 할 것 같고, 학예사가 목을 메다는 장면은 이게 뭔가 싶으니까요. 여튼, 이 역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피터 러브시의 "오이스터 브라운이 저지른 범죄"는 아주 괜찮습니다. 펄, 오이스터 자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트리거의 의심을 독자에게 공유하게 만드는 전개는 정말로 일품이에요. 분명 언니가 사라졌는데 애써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오이스터의 행동의 이유는?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퇴비화 속도가 빨라지는 발효 촉진제를 산 이유는? 집에 아무도 들이지 않는 이유는? 이런 질문들은 가장 설득력 있는 추리, 즉 "펄은 죽었고 오이스터가 그녀를 자체적으로 처리하려 한다"로 이어지니까요.
하지만 진상은 정말로 터무니없었고 황당하다는 점에서 독자의 뒷통수를 칩니다. 거장다운 장난스러운, 그렇지만 또 서늘한 결말도 매력적이에요. 트리거가 어디로 갔는지 정말 아무도 몰랐을지, 그리고 트리거의 차가 집 앞에 있으므로 완벽한 인멸은 불가능 했으리라는 점에서 조금 감점하여 별점은 3.5점입니다만, 거장의 실력만큼은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렇듯 다양한 기사, 읽을 거리로 가득차 있는데 특집과 정말로 몇 안되는 기사, 한 편의 단편만이 기대에 값하기에 전체 별점은 2.5점입니다. 가격이 저렴하지 않았다면 2점 이상 주기는 힘들었을거에요. 식민지 경성, 그리고 그 공간을 무대로 한 장르 문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셔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2005/06/15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 서중석 : 별점 4점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 8점
서중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웅진지식하우스

한국 현대사에 대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색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는 역사서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때만 해도 현대사에 대한 비중은 엄청 작았었고, 그나마도 독재정권하에서 대폭 손을 본 교과서였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읽으니 무척 신선하면서도 재미있어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조작된(?) 정보와 교육하에서 살아왔는지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일단 해방 이후부터 전두환 정권까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고 그 이후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권에 대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습니다. 최근의 역사는 더 시일이 지난 뒤에 평가하겠다는 이야기일까요?

제일 앞머리는 해방 직후의 좌익, 특히 여운형의 활약에서부터 이승만의 과오와 6.25 전쟁, 그리고 4.19 까지를 조명하고 있는데 좌익과 우익을 어느정도 냉정하고 공평하게 보고 있는 시각이 돋보입니다. 자유당 정권의 수많은 부패와 과오가 눈에 띄네요. 그 이후는 장면 내각에 대한 냉정한 비판 뒤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비교적 공평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는 역사서로 냉정하게 평가 / 접근하고 있지만 역시나 박정희는 독재와 부정부패 말고는 별로 잘 한 것이 없군요. 우익이 찬양해 마지않는 경제성장은 미국의 자본을 들여와서 시녀노릇만 한 ("경제저격수의 고백"처럼) 것일뿐이죠. 그리고는 전두환 시대로 이어집니다. 전두환 역시 사리사욕을 위해 정권을 찬탈한 독재자라는 명확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특히 이 두 군사정부 시기에 집중하여 암울했던 국내 민주주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정부에 대한 짤막한 설명으로 끝납니다.
단순히 그 정권하에서의 행위만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사회현상과 민주화 운동에 관한 에피소드, 사건들도 제목대로 사진과 그림을 동원해서 디테일하게 접근하여 알려주는 방식도 마음에 드네요. 무엇보다도 그동안 보아왔던 다른 역사서들과 다른 공평한 시각이 눈에 띕니다.

책을 읽고나니 우리나라 근 현대사의 가장 불행했던 요소는 역시나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처벌이 없었다는 점(친일파- 이른바 혁명세력 등)과 여러 질곡의 시기에서 미국의 개입이 너무나 심했다는 점, 극단적 반공체제로 극우보수로 흘러갔던 정치 상황, 그리고 박정희 시대부터 커지게 된 이른바 지역감정인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박정희와 전두환을 "前"대통령 취급하고 있는 역사관 자체가 잘못된 것이겠죠.

저야 그나마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고 나서야 철이 든 셈이니 제가 무언가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겠지만 이러한 과오와 문제를 해결하는 몫은 결국 우리 세대로 이어지는 것 같네요. 앞으로 작은 것 부터라도 조금씩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가면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울러 자신이 보수우익이라고 자처하는 지지자들도 한쪽 방향으로 편중된 역사의식만 가질 것이 아니라 이런 책도 접하면서 보다 공평한 시각을 가졌으면 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06/08/10

경성기담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살인사건과 스캔들 - 전봉관 : 별점 4점

경성기담 - 8점
전봉관 지음/살림

 조선말에서 일제 강점기 사이에 있었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괴사건들을 모아서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역사와 추리를 모두 좋아하는 저로서는 흥미가 안갈래야 안갈 수 없는 책이었는데 마침 형이 구입해서 고마운 마음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쌩유!)

책은 크게 2개의 주제로 나뉘어 구성되고 있는데 첫번째가 "1부 - 근대 조선을 뒤흔든 미스터리 살인사건"이고 두번째가 "2부 - 근대 조선을 뒤흔든 스캔들"입니다. 두가지 주제 모두 흥미롭고 제목만 보아도 읽고 싶어 지지만 역시 저같은 미스터리 팬에게는 첫번째 주제가 더 와 닿더군요.

1부에는 총 4개의 사건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첫번째 사건인 "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은 대낮 경성거리에서 발견된 아이 머리를 둘러싼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이고 두번째 사건"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사건"은 안동에서 피살되어 발견된 일본인 순사 가와카미와 용의자로 붙잡힌 조선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 세번째 사건은 "부산 마리아 참살사건"으로 부산의 조선인 하녀 마리아가 주인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사건을 다루고 있고 네번째 사건은 "살인마교 백백교 사건"으로 지금도 유명한 사교집단 백백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단순히 흥미거리위주로 수록된 사건들이라기 보다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역학관계를 논할만한 주제가 많아 의미 있는 선정이었다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안동 가와카미 순사 살해사건"의 용의자인 조선 청년들의 억울함과 "부산 마리아 참살사건"의 주요 용의자인 다카하시 부인에 대한 수사와 처우, 처벌이 너무나 달라서 한번쯤 비교해 보며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거든요. 특히 고문과 폭행으로 자백을 이끌어낸 순사 살해사건의 경우는 그 수사의 방법이 너무 원시적이고 황당해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쩐지 영화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기도 해서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용의자 동생의 증언인 "형이 목을 졸라 죽이고 어디론가 가는 것을 봤지만 그 다음은 졸려서 잤기때문에 모른다"라는 증언은 폭소 그 자체였습니다. 조선 남아들은 형이 살인해도 졸리면 잔다는 이야긴지 원...

또한"죽첨정 단두 유아 사건"은 "문둥이가 아기 간을 먹으면 낫는다"라는 토속적인 주술적 사고방식을 드러내고 있어서 역시 인상적이었고 법의학자로 경성제대 교수까지 등장하는 등 당시 수사 방식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어서 자료적 가치도 상당합니다. 사건의 엽기성과 내용에서 최근 유명한 "프랑스 영아 유기 사건"을 떠올리게도 하더군요. (이 주술적 믿음을 소재로 퇴마록의 이우혁씨가 쓴 괜찮은 단편이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1부의 마지막 사건인 백백교 사건은 다른 매체에서 많이 접해서 크게 새롭거나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역시 "역사적" 측면에서 선정한 것이겠죠? 이만한 대형 사건은 정말 드물테니 말이죠. 뭐 뻔한 내용이지만 그런대로 도판과 자세한 재판과정의 수록이 있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2부는 "스캔들"이라는 주제를 다룬 만큼 내용적으로나 사건 측면으로나 1부에 비하면 아무래도 임팩트가 떨어지긴 하지만 역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전부 6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첫번째인 "중앙보육학교 박희도 교장의 여제자 정조유린 사건"은 3.1 운동때 민족대표 중 한명이었던 교육자 박희도의 여제자 성추행(?)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두번째인 "채무왕 윤택영 후작의 부채 수난기"는 순종의 장인으로 매국노였던 윤택영 후작의 어마어마한 빚과 그 최후를 상세하게 그리고 있고요. 세번째 "이인용 남작 집안 부부싸움"은 역시나 매국노였던 이인용 남작 부부의 재산을 둘러싼 의미없는, 허무한 싸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이화여전 안기영 교수의 애정도피행각"으로 조선 제일의 테너로 불렸다는 음악가 안기영 교수가 제자와 사랑의 도피(?)를 한 이야기, 다섯번째는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 사건"으로 당시 국내 제일의 신여성이었던 박인덕의 이혼에 관련된 이야기, 마지막 여섯번째는"조선 최초의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로 최영숙이라는 스웨덴 유학생의 비참한 최후를 서술한 내용입니다.

제가 제일 흥미롭게 읽은 것은 매국노들 대부분이 가산을 탕진하여 외려 총독부에 구걸(?)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다룬 두편의 이야기인 "채무왕 윤택영 후작" 이야기와 "이인용 남작 부부싸움" 이야기였습니다. 친일파들이 다 떵떵거리면서 한자리 차지하고 살아온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대부분 당대에 가산을 탕진했다는 통쾌한(!) 이야기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지들끼리 싸우는 이야기도 신났고요. 특히 저자의 덧붙인 코멘트, 요사이 매국노들의 후손이 땅 반환 소송을 한다는데 과연 그들에게 남은 재산이 있었는지 부터 조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가장 와 닿았습니다.

그 외의 남녀간의 문제를 다룬 이야기는 요사이 연예면에 나올만한 소재의 이야기들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펼쳐져 역시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여성과 전형적 조선 남자와의 결혼이 "돈"에서 비롯되었다는 "조선의 노라 박인덕 이혼사건"은 읽다보니 요사이 모 아나운서 결혼 이야기와 맞물리는 부분이 있는것 같아 재미있더군요.

마지막 이야기인 "스웨덴 경제학사 최영숙 애사"는 당시 조선에서의 여자의 존재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으로 안타까움이 컸습니다. 지금 수준으로 보아도 5개국어에 능통한 수재 여성이 국내에서 대접도 제대로 못받고 콩나물 장사나 하다가 혼혈아를 낙태한 것 때문에 외려 탕녀 취급이나 받다니....저자가 하인스워드의 예를 들어 설명한 것과 같이 지금도 변한 것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에 더더욱 안타깝네요.

기획만으로도 무척 특이한 역사-인문 서적이지만 읽는 재미도 충분히 전해주는 책이었습니다. 현재 30대 중반의 나이로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는 저자의 글 답게 고루한 역사관을 논하는 것이 아닌, 요사이의 시사적인 문제를 한번쯤 생각하게 하는 새롭고 신선하면서도 재미난 내용이라 시간가는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거든요. 저 스스로도 반성하고 한번 생각해 볼만한 주제도 많았고요.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의 또 다른 측면을 한번 더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아울러 구상중인 일제 강점기 배경의 추리 소설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서 기쁨 두배였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단 가격이 12,000원이라는 것은 확실히 문제네요. 책의 내용은 재미있고 가치도 있지만 사진도 거의 없고 그다지 많은 분량의 이야기도 아닌데 솔직히 너무 비쌉니다! 한 8000원 정도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그날 까지 팍팍 밀어줄만 한 책인데 가격이 좀 많이 걸리네요.

2017/06/17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김경민 : 별점 3점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6점
김경민 지음/이마

일제 강점기 시절, 폭발적으로 경성 인구가 증가하던 때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저지하고 조선인들을 위한 거리와 가옥을 만들어 공급했다는 건축왕 기농 정세권에 대한 책입니다. 

책은 크게 경성을 개발한 부동산왕, 이 책 표현에 따르면 '디벨로퍼'로서의 정세권을 그린 전반부와 조선 물산 장려운동, 조선어학회 활동을 통한 민족 운동가로서의 정세권을 그리는 후반부로 구분됩니다. 

일단 용비어천가 같은 위인전스러운 소개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당시 경성 상황과 부동산 개발에 대해 현 시점에서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논리로 설명해 주는 덕이 큽니다. 정세권이 부동산 대폭락 상황에서 살아남아 재기할 수 있었던걸 '부동산 부실자산의 즉각적 손절매'라는 현 시점 경제 이론으로 설명해 준다던가, 1930년대 후반 심한 주택난에도 건축 재료 등의 폭등으로 이전과 같은 마진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때 '임대 주택 시장 진출'이라는 큰 의사 결정을 한 이유를 현대의 민간 주택 임대 사업과 연결하여 설명해 주는 식으로요.
한옥을 개량하여 근대 한옥, 지금의 '북촌 한옥 마을' 주택들의 모태가 된 건양사의 건양 주택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한옥의 개량이 어떤 생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건양 주택이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로 구성된 근대 단독 주택의 모태가 되었다는데, 이렇게 건축의 역사를 일람해 보아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정세권이 왕십리에 주목했다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1930년대 정세권의 왕십리 토지 매입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토지를 매입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일제의 경성 도시 계획을 이해하고 뉴타운 개발이 시작된다는걸 예측한 선견지명이었다는 해석이거든요. 용산과 왕십리를 연결하는 남산 주회 도로 건설, 더 나아가 여기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동부축'의 건설을 내다 본 것이지요. 역시 부동산왕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가 봅니다. 

일본이 일본인 경성 이주를 위해 현 일본인 거주지의 도시 미화 운동과 지금의 뉴타운 정책과 같은 빈 공간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두 가지 전략을 썼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1937년의 대경성 중심 100년 계획이 그것으로, 경성 인구 성장 억제를 위해 수원, 인천, 김포, 개성, 의정부, 춘천, 이천, 김량장 등 경성 주변 8개 도시를 신도시로 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고 하네요. 경성과 이 도시들을 남대문 등 6개 문에서부터 방사형 도로로 연결하고 완상형 도로로 각 도시를 서로 연결시킨다는, 지금 바라보아도 엄청난 스케일이라 눈길이 절로 갑니다. 큰 스케일 탓에 결국 실현 되지 못했지만 꽤나 그럴듯해요. 지금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도 크고 말이죠.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와 '교통' 이라는 것이니까요.

후반부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한 기록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친일을 하면 3대가 잘 살고,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인데 이미 당대 조선에서는 탑 클래스의 기업가가 적극적으로 민족 운동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선각자가 독립 운동으로 막대한 재산과 건강까지 잃었음에도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금의 현실은 정말이지 개탄을 금하기 어렵군요. 조선어학회 활동으로 일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이 때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 씨의 덕분으로 치료될 수 있었다는건 나름 귀중한 에피소드라 생각됩니다.

이어서 정세권의 말년 등을 다룬 일종의 에필로그 형태로 마무리되는데, 말년에는 일종의 '주택협동조합' 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가족수는 줄어들며, 월급쟁이로 살면서 생활비와 식비가 많이 들 터라 주택은 적정 크기여야 하고 대지에서 소출을 얻어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는 발상인데, 지금은 상식이 된 흐름을 미리 읽어내었다는 점은 과연 부동산 왕 답습니다. 자급자족에 대한 이론도 단지 농경이 아니라 태양광 발전 등 현대 기술을 접목하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니까요.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실패했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할 뿐입니다. 성공했더라면 잃었던 재산을 복구하고 다시 대한민국의 부동산 왕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지요.

이렇게 좋은 내용들인데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격에 비하면 양이 부실한 탓이 큽니다. 정세권의 부동산 왕으로서의 행적과 독립 운동이라는 두 가지 축만 다룰 뿐, 정작 출생부터 출세할 때 까지는 대충 넘기기도 하고요. 이런 부분까지 보충했더라면 전형적인 위인전이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출생 및 성장 과정이 궁금한데 아쉽습니다.

하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정세권의 일대기가 드라마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기네요. 

덧붙이자면, 앞으로는 독립 운동한 분들이 대접받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소한 친일파보다는 잘 살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