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김경민 지음/이마 |
일제 강점기 시절, 폭발적으로 경성 인구가 증가하던 때 일본인들의 북촌 진출을 저지하고 조선인들을 위한 거리와 가옥을 만들어 공급한 건축왕 기농 정세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책은 크게 두 항목으로 구분됩니다. 전반부는 경성을 개발한 부동산왕, 이 책 표현에 따르면 '디벨로퍼'로서의 정세권을 그리고 있으며, 후반부는 조선 물산 장려운동, 조선어학회 활동을 통한 민족 운동가로서의 정세권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단 용비어천가 같은 위인전스러운 소개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당시 경성 상황과 부동산 개발에 대해 현 시점에서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논리로 설명해 주고 있거든요. 정세권이 부동산 대폭락 상황에서 살아남아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을 '부동산 부실자산의 즉각적 손절매'라는 현 시점 경제 이론으로 설명해 준다던가, 1930년대 후반 심한 주택난에도 건축 재료 등의 폭등으로 이전과 같은 마진을 기대하기 어려웠을 때 '임대 주택 시장 진출'이라는 큰 의사 결정을 한 이유를 현대의 민간 주택 임대 사업과 연결하여 설명해 주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옥을 개량하여 근대 한옥, 지금의 '북촌 한옥 마을' 주택들의 모태가 된 건양사의 건양 주택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한옥의 개량이 어떤 생각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어요. 건양 주택이 결국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 형태로 구성된 근대 단독 주택의 모태가 된 것인데 이런 식으로 건축의 역사를 일람해 보아도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정세권이 왕십리에 주목했다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1930년대 정세권의 왕십리 토지 매입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별볼일 없는 토지를 매입하는 것이지만 이는 일제의 경성 도시 계획을 이해하고 뉴타운 개발이 시작될 것이라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라는 해석이거든요. 용산과 왕십리를 연결하는 남산 주회 도로 건설, 더 나아가 여기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동부축'의 건설을 내다 본 것이죠. 역시 부동산왕은 아무나 하는게 아닌가 봅니다.
그 외 일본이 일본인 경성 이주를 위해 현 일본인 거주지의 도시 미화 운동과 지금의 뉴타운 정책과 같은 빈 공간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두가지 전략을 썼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된 내용입니다 1937년의 대경성 중심 100년 계획이 그것으로, 경성 인구 성장 억제를 위해 수원, 인천, 김포, 개성, 의정부, 춘천, 이천, 김량장 등 경성 주변 8개 도시를 신도시로 개발한다는 계획이었다고 하네요. 경성과 이 도시들을 남대문 등 6개 문에서부터 방사형 도로로 연결하고 완상형 도로로 각 도시를 서로 연걸시키는 엄청난 스케일이라 눈길이 절로 갑니다. 큰 스케일 탓에 결국 실현 되지 못했지만 꽤나 그럴듯하네요. 지금 시점에서 시사하는 바도 크고 말이죠. 부동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와 '교통' 이라는 것이니까요.
후반부 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어학회 활동에 대한 기록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친일을 하면 3대가 잘 살고,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인데 이미 당대 조선에서는 탑 클래스의 기업가가 적극적으로 민족 운동을 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런 선각자가 독립 운동으로 막대한 재산과 건강까지 잃었음에도 지금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현실은 정말이지 개탄을 금하기 어렵군요.
조선어학회 활동으로 일제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이 때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 씨의 덕분으로 치료될 수 있었다는 것은 나름 귀중한 에피소드라 생각되고요.
이어서 정세권의 말년 등을 다룬 일종의 에필로그 형태로 마무리되는데, 말년에는 일종의 '주택협동조합' 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가족수가 줄 것을 내다본 것, 월급쟁이로 살면서 생활비와 식비가 많이 들 것이라 주택은 적정 크기여야 하고 대지에서 소출을 얻어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는 발상으로 지금은 상식이 된 흐름을 미리 읽어내었다는 점은 과연 부동산 왕 답습니다. 자급자족에 대한 이론도 단지 농경이 아니라 태양광 발전 등 현대 기술을 접목하면 아주 틀린말도 아니니까요. 너무 시대를 앞서가서 실패했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할 뿐입니다. 성공했더라면 잃었던 재산을 복구하고 다시 대한민국의 부동산 왕으로 남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죠.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격에 비하면 양이 부실하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정세권이라는 인물의 부동산 왕으로서의 행적과 독립 운동이라는 두가지 축만 다루지 정작 출생부터 출세할 때 까지는 대충 넘기는 탓이 큽니다. 이런 부분까지 보충했더라면 전형적인 위인전이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출생 및 성장 과정이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하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앞으로는 독립 운동한 분들이 대접받고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최소한 친일파보다는 잘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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