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를 사랑한 스파이 - ![]() 이언 플레밍 지음, 권도희 옮김/뿔(웅진) |
세계적으로 유명한 007 시리즈의 한 권입니다. 어린 시절 조악한 번역본으로 읽었던 "닥터 노" 이후 처음 읽는 오리지널 007 시리즈네요. 정식 번역 출간본입니다.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말해 실망스럽기 그지 없네요. 아니, 최악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이유는 이 책은 작중 비브의 말 그대로 용에게 죽기 직전의 공주를 구해주는 기사의 무용담을 현대화하여, 약간의 소프트코어 포르노를 끼얹어 그려낸 어른들을 위한 할리퀸 로맨스에 불과한 탓입니다.
전체 분량의 거의 절반을 화자인 23살의 캐나다 아가씨 비비안 미셸의 짧지만 고역이었던 인생 역전 - 영국 유학 중 만난 첫사랑 데릭에게 순결을 잃는 과정, 두번째 남자 쿠르트의 아이를 가졌다가 낙태 종용과 함께 차이는 과정 - 에 할애하는데, 우리나라 60~70년대 영화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들 정도로 전형적이고 식상한 내용입니다. 정말 내가 '007" 시리즈를 읽고 있는게 맞는지도 혼란스러웠고요.
다행히 우리나라 영화와는 다르게 순정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혼자서 세상에 대항해보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그래봤자 혼자 여행을 떠나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베스파 스쿠터를 타고 미대륙을 횡단하려는 무모한 계획이고요. 솔직히 비브가 모텔에서 위험에 직면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호되게 당했을 겁니다.
하여튼, 이러한 책 분량 절반에 걸친 비브에 대한 장황한 묘사 후 2인조 악당이 모텔에 쳐들어오면서부터 겨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나마도 비브의 짤막한 저항이 한바탕 펼쳐지고 나서야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니, 분량으로 따지면 3/5 정도 지점부터네요. 그 뒤 본드가 악당들을 물리치고 여자를 구해주는건 전체 분량에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악당들이 아무리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 요원과 상대가 될리가 없으니 긴장감을 느낄 여지는 없습니다. 본드의 활약도 솔직히 가관이에요. 처음부터 총으로 제압하면 되는데, 놈들이 마각을 드러낼 때까지 뜸을 들이는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불을 지르기 전에 놈들을 잡았다면, 모텔 주인 상기네티의 재산을 지켜준 것에 불과해서 끝까지 기다렸다는데 이는 모순입니다. 불을 지르기 전에 놈들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아내는건 불가능했으니까요. 이 부분을 설득력있게 설명하려면 놈들의 방화에 대한 단서를 어느 정도는 제공해 주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은 전무합니다.
비브에게 악당들 몸을 수색해서 총을 꺼내라고 시킨 후 위기에 빠지는 장면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자아내고, 비브가 본드에게 반하는거야 당연한 수순이라고 쳐도 여기서 비브의 묘사는 정말이지 최악입니다. "여자들은 반쯤 강제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여자들은 빼앗기는 것을 좋아한다"라니, 어처구니가 없네요
아울러 모텔 주인 상기네티가 보험금을 받기 위해 모텔을 전소시키려고 한다는 범행 동기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당시 법과학이 테르밋 등 가연성 물질을 동원한 방화와 사고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낙후된 수준이었을지도 의문이며, 사람도 한 명 죽이고 네 명이나 되는 관계자를 만들면서까지 일을 벌일 보험금인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멋드러진 책 표지, 첫 정식 완역본이라는 가치는 있지만 재미와 수준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한 졸작입니다. 읽으실 기회가 있더라도 피해가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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