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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0

책장의 정석 - 나루케 마코토 / 최미혜 : 별점 2.5점

책장의 정석 - 6점
나루케 마코토 지음, 최미혜 옮김/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일본 유명 독서가 나루케 마코토의 책장 관리법을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4개의 단락 - 책장에 대한 정의, 그리고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책장과 책 관리법, 저자가 생각하는 책 선택법과 독서법, 그리고 마지막 부록으로 웹에서 호평받는 서평 쓰는 법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저자 나루케 마코토는 저자는 1955년 생으로 1991년 일본 마이크로 소프트 법인 사장으로 취임하여 2000년까지 역임했으며, 이후 투자 컨설팅 회사를 설립한 비즈니스 맨입니다. "honz"라는 서평 사이트의 개설자로 마음에 드는 책을 무조건 사고, 1년에 200권도 넘는 책을 읽는다는 독서가이기도 하고요. '시마 사장'이 떠오르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독서가답게 글도 잘 쓰고 나름의 철학도 분명히 있는 사람이더군요.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독서관이 명확하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런 저자의 책장 관리법을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보기 편할 것', '20퍼센트의 여백이 있을 것'과 '승부수가 될 책만 둘 것', '다양성은 갖되 위화감을 없앨 것', '언제나 변화할 것' 입니다. 보기 편한 것과 여백은 그렇다 치고, 승부수가 될 책만 둔다는게 독특했습니다. 소설이나 만화는 일절 꽂지 않고 오로지 논픽션 중심으로만 책장을 관리한다는 의미로, 소설과 만화는 이미 완성되어 있어서 정보의 업데이트가 필요 없어서 책장에 계속 남아있게 되기 때문에 결국 공간을 차지하게 되어 나중에는 버리게 되는 탓이라고 합니다.
다양성은 테마를 정해 두는 것입니다. 저자의 테마는 '남들이 읽지 않는 재미있는 책' 이며, 테마는 약 5년 정도? 주기로 바꾸면 좋다는군요.
그리고 마지막 '언제나 변화하는 책장'이 바로 책장 관리의 핵심입니다. 우선 앞으로 읽을 책,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두는 공간인 "신선한 책장" (장소는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며 편안한 곳에, 책을 눕힌 채로 놓고 책등의 제목이 보이게 쌓는, 즉 서점의 '평대' 느낌)이 있습니다. "신선한 책장"에서 다 읽은 책은 "메인 책장"으로 옮깁니다. "메인 책장"에 넣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자의 기준은 '1. 재미있는가 2. 새로운가 3. 정보가 많은가'이고요. 그리고 앞서 말한 20퍼센트의 여백과 같은 공간 관리에 신경쓰며 주, 혹은 한 달에 한 번 "메인 책장"을 정리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책장이 꽉 차면 결국 책을 처분해야 하지만 나름 선별한 것이라 버리기 어려우면, 시간을 두고 고민할 수 있게 따로 공간을 만들어 관리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관리하면 역사 관련 서적은 어떻게 하는지 좀 궁금해집니다. 역사는 정보가 새롭게 바뀔 여지가 아무래도 적잖아요? 이미 정해진 과학, 수학 쪽 논픽션도 마찬가지일테고요. 또 정말로 '소장하고' 싶은 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물어보고 싶네요. 1년에 1~2권만 건진다고 해도 수십년이면 엄청 많아질텐데 말이죠.

이러한 책장 관리법 외에 저자가 추천하는 좋은 책을 고르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아 딱히 언급할 건 없습니다. 하지만 독서법에서 포스트 잇을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것은 괜찮더군요. 요건 바로 따라해봐야 겠어요.

마지막 서평 쓰는 법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좋은 책만 서평을 쓴다는 점에서 저와 차이는 있지만 같이 서평, 독서 감상문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참고될만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작법 측면에서 '1) 책 제목은 반드시 겹화살괄호로 쓸 것 2) 어미는 통일 할 것 3) 수식어와 피수식어를 너무 떨어뜨리지 말 것 4) 같은 표현을 반복하지 말 것'을 강조하는데 2번과 4번은 저도 항상 쓰면서 고민하는 부분이라 확실히 이해가 되더군요. 참고로, 1번도 따라해보려고 했는데 html 태그 오류가 잦아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글의 구성에 대한 설명도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총괄 1,2 - 에피소드 1,2 - 감상 - 저자 - 일러스트나 장정 - 대상 독자 - 정리의 순으로 적는다'는게 핵심입니다.
우선 총괄 1에서 그 책이 어떤 식으로 재미있는지를 분명하게 소개하고(이것만 따로 잘라 내도 서평으로 구성될 수 있는 참신한 핵심 내용), 총괄 2는 총괄 1에서 다 말하지 못한 재미를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1이 '재미있다'라면 2는 '정말로 재미있다'라고 재 확인하는 것이지요. 에피소드 1에서는 재미를 구체적으로 쓰고, 2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쓰고요, 감상은 에피소드들이 어떻게 재미있었는지를, 다음은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소개하고 일러스트와 장정 등 글 이외의 요소 언급하며 예상되는 독자층에 대해 쓰고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정리와 총괄의 차이는 서평을 읽은 사람에게 책에 대해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인데 확실히 예비 독자들에게 꽤 유용하겠다 싶네요. 실제로 이렇게 쓴 서평 예문도 괜찮았으니까요. 지금 쓰고 있는 이 서평도 이러한 이론에 기초해서 쓴 것인데, 앞으로도 많이 써먹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앞서 말씀드렸듯 책장 정리에 대한 욕심이 솟구치게 만드는 책입니다. 확실히 고수의 책장 관리와 독서법은 남다른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별거 아닌 거 같은데 확실한 자신만의 철학으로 관리한다는 것은 놀랍기도 했고요. 자신이 독서가라고 생각되신다면, 그리고 집에 쌓이는 책 정리에 고심하고 계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 역시 이사가게 되면 책장에 여유를 좀 두고 자주 정리해서 안 읽게 된 책은 정리해야 겠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마지막으로 저자가 추천하는 책 중 국내에 소개된 책들만 따로 모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2016.05 기준).

  • 만지트 쿠마르, 이덕환 "양자혁명 : 양자물리학 100년사" 까치 글방
  • 크리스틴 바넷, 이경아 "제이콥, 안녕? 자폐증 천재 아들의 꿈을 되찾아 준 엄마의 희망 수업" 알에이치코리아
  • 다니엘 T 맥스, 강병철 "살인단백질 이야기 : 식인풍습과 광우병,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저주받은 가족" 김영사
  • 오코우치 나오히코, 윤혜원 "얼음의 나이 : 자연의 온도계에서 찾아낸 기후 변화의 메커니즘" 계단
  • 구메 구니타케, 정애영 "특명전권대사 미구회람실기 1~5" 소명출판
  • 궁리출판편집부 "세계만물 그림사전" 궁리
  • 마크 레빈슨, 김동미 "더 박스 : 컨테이너 역사를 통해 본 세계 경제학" 21세기 북스
  • 빌 로스, 이지민 "철도, 역사를 바꾸다" 예경

2016/12/01

장서의 괴로움 - 오카자키 다케시 / 정수윤 : 별점 3점

장서의 괴로움 - 6점
오카자키 다케시 지음, 정수윤 옮김/정은문고

유명한 장서가로 수 만권(2~3만 권 정도?)의 책을 보유한 저자가 장서 보유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은 책입니다. 개인 경험담과 이런저런 생각을 펼쳐보이는 에세이지만, 장서 구입과 관리 등 다양한 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는 실용 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책의 성격만 보면 얼마 전 읽은 "책장의 정석"과 비교됩니다. 차이점이라면 "책장의 정석"은 가지고 있는 책을 '관리'하는 팁을 제공한다면(심지어 관리할 수 있는 분량만 보유하도록 적절한 처분법마저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이 책은 '관리'가 불가능한 수준의 장서가를 위한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관리'를 위해 책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지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저자 스스로 '책이 너무 많이 쌓이면 지적 생산의 유통이 정체된다. 사람 몸으로 치면 혈액순환이 나빠진다. 피가 막힘없이 흐르도록 하려면 현재 자신에게 있어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은 일단 손에서 놓는 편이 낫다'고 하는데, 이는 "책장의 정석"과 일치합니다.

다양한 일화가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개인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들은 당연히 아주 실감나고요. 헌책방, 고서를 찾거나 구입하는 것에 얽힌 본인의 경험담, 그리고 책을 정리하는 방법과 팁 등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 합니다.

다른 장서가들과의 인터뷰라던가 그들만의 책 보관 방법, 장서가가 등장하는 여러 가지 영화와 콘텐츠 등 장서에 얽힌 굉장히 다양한 이야기들도 가득합니다. 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책이 사는 집"을 지은 장서가 네기시 씨의 인터뷰였습니다. 이유는 너무 부러웠기 때문이죠.

책을 줄이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소개하면서도, 결국 주체하지 못하고 책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도서관을 잘 활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에 관련된 원고를 쓰다가 어쩌다 보니 도서관에 대한 책을 구입하게 되었다는데, 정말이지 저자는 어쩔 수 없는 장서가인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자가 소개하는 이 분야의 베스트는 오다 미쓰오의 "도서관 산책"입니다.

그리고 책을 줄이는데 제일 효과적일 수 있는 전자 서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눈에 띕니다. 책은 단순히 내용물로만 구성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동의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앞으로 전자 서적의 발전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아울러 장서가답게 이런저런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이 역시 눈여겨볼 만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책 정리법(책이 너무 많으면 안 된다)을 송나라 학자 구양수의 시필에 나온 '명창정궤'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햇빛 잘 드는 창 아래 깨끗한 책상, 그 위에 책 한 권이면 충분하지 않냐는건데, 이를 12세기 일본의 가인 가모노 조메이의 움막과 연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걸 보면 학식이 참으로 대단하다! 싶어요. 책을 많이 읽으면 저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인용과 연결이 가능할지 궁금해지네요.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인용이 많습니다. 몇 가지 소개해드리자면 우선 문필가 요시다 겐이치의 말인 "책장에 책이 5백 권쯤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라는 말입니다. 하루에 세 권씩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참으로 와 닿습니다.
유명한 장서가 다니자와의 명서 감정술도 비슷합니다. "명저라는 홍보에 넘어가 샀던 책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류 이하 책을 이것저것 찾아 읽지 않았다면 초일류를 초일류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인데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당연하지만 이런저런 책들도 제법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영화 속 서점과 도서관이라는, 영화 속에 책이나 책장이 나오는 영화를 엮어놓은 책이 가장 끌립니다. 영화 언젠가 책 읽는 날의 후일담을 엮은 동명의 책에서 영화 속 주인공인 독서가 미나코가 좋아한 10권의 책 목록도 마찬가지예요. 아는 책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하늘을 나는 교실"과 앤 모로우 린드버그의 "바다로부터의 선물"밖에는 없는데, 저자 역시 극찬하고 있는 "티보 가의 사람들"은 굉장히 방대한 분량이지만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책은 실물 크기 일러스트에 의한 "낙엽도감"이지만요. 수집가로서의 장서가를 다룬 '남자는 수집하는 동물' 챕터에서 소개된 "소년소녀 쇼와 미스터리미술관"이라는 책도 꼭 읽어보고 싶고요.

이렇게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일본' 기준이라는 점입니다. 앞서 이런저런 유용한 팁이 많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한국의 거주 문화와 책에 대한 일반적인 경우를 놓고 보면 그렇게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정말로 책을 좋아한다면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보장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본인이 장서가시라면 한 번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저 역시 500권도 안 되는, 장서라고 하기는 초라한 수준의 책만 갖추고 있지만 책을 좋아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더 늘리면 안 될 것 같긴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덧붙입니다. 미나코가 좋아한 10권의 책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티보 가의 사람들 - 마르탱 뒤 가르 (국내 출간)

안녕, 콜럼버스 - 필립 로스 (국내 출간, 굿바이 콜럼버스)

아름다운 여름 - 체사레 파베세 (국내 출간)

바다로부터의 선물 - 앤 모로우 린드버그 (국내 출간)

실물 크기 일러스트에 의한 낙엽도감 - 요시야마 히로시 / 이시카와 미에코

여자 - 카터 브라운

미국의 송어낚시 - 리처드 브라우티건 (국내 출간)

열두 달 반찬 - 고지마 신페이

하늘을 나는 교실 - 에리히 케스트너 (국내 출간)

사이좋은 부부 - 오다 사쿠노스케

2019/04/20

살인단백질 이야기 - D.T. 맥스 / 강병철 : 별점 5점!

살인단백질 이야기 - 10점
D. T. 맥스 지음, 강병철 옮김/김영사

"책장의 정석" 에서 소개되어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절판되어 아쉽던 차에, 중고를 저렴하게 구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책 제목인 "살인단백질", 즉 프리온은 광우병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 이 책은 프리온 연구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현재 어떤 상황인지를 상세하고 재미있게 소개해 줍니다. 기묘한 병의 원인이 프리온이라는걸 밝혀내는 과정 자체도 한 편의 추리 소설을 방불케하고요.

책은 이탈리아의 한 가족에게 대물림되는 치명적가족성불면증(FFI)이라는 유전성 프리온 질환 소개로 시작됩니다. 18세기 중엽 베네치아에서 한 의사의 사망으로 시작된 FFI의 유전이 이어지는 과정, 그리고 마찬가지로 18세기 영국에서 축산업자 베이크웰이 동종교배로 탄생시킨 거대양 디쉴리 레스터 종이 치명적인 스크래피의 유행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는 이야기가 병렬로 전개되다가 20세기 초반, 이탈리아 베네토에서 전쟁의 혼란 와중에 피에트로가 FFI로 사망하고, 뉴기니 원주민 포레이족이 '쿠루'라고 불리우는 이상한 유행병으로 죽어갈 때 젊은 학자이자 의사 칼턴 가이듀색이 현지에 뛰어들어 쿠루병이 유전병이 아니라 감염병이라는걸 밝혀내어 노벨상을 받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다음은 1970년대로 넘어가서 피에트로의 딸, 아들들이 FFI로 사망하며 본격적으로 병의 정체에 대해 연구가 벌어지고, 가이듀색의 라이벌 프루시너가 쿠루병과 스크래피 등이 '프리온' 이라고 명명한 단백질 탓에 발병하는 병이라는걸 증명하며 결국 이탈리아 가문의 유전병 역시 프리온 질병이라는게 밝혀집니다. 이 이탈리아 가족들의 데이터로 프리온이 감염병을 일으키고, 다른 종류의 프리온은 각각 뚜렷하게 구별되는 다른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이런 연구들로 프루시너 역시 노벨상을 수상합니다.

그리고 1986년 영국 광우병 사태가 등장합니다. 광우병이 일어난 원인을 찾아내는 과정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도 축산업 붕괴를 막기 위해 정치가들이 소고기가 안전하다고 홍보하다가 사람에게 감염되는게 밝혀지는 내용은 굉장히 무섭고 끔찍해서 인상적이었어요. 동종교배, 소에게 소를 먹이는 행위와 같은 축산업에 존재하는 잔혹함이 광우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고요.
동종접합 유전자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쉽게 전염되기에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으며, 최근에는 여러가지 연구로 치료법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는 결말은 조금 다행입니다. 물론 치료약인 퀴나크린은 간 손상 등을 일으켜 결국 환자들은 모두 사망했으며, 또다른 약인 펜토산은 치료가 아니라 현상 유지에 그치고 있어서 큰 효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가는 치료약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만드네요.

이렇게 재미와 정보, 가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게 만든 좋은 책입니다. 단점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기에 별점도 5점입니다. 이전 "책장의 정석"에서 소개받아 구입했던 "얼음의 나이"는 솔직히 지루했는데 이 책은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그런 책입니다. 의학, 광우병, 프리온 등에 궁금하시다면 필독서이며,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으시더라도 순수한 재미 측면에서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어보니 미국산 소고기가 찜찜하게 느껴지는데, 앞으로는 저렴하게 먹더라도 호주산을 먹어야겠다는 결심이 섭니다. 아직까지 호주,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광우병 청정 구역이라고 하며 동양인은 동종접합 유전자를 지닌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다고도 하니 조심해서 나쁠건 없겠죠.

2019/03/17

얼음의 나이 - 오코우치 나오히코 / 윤혜원 : 별점 3점

얼음의 나이 - 6점
오코우치 나오히코 지음, 윤혜원 옮김, 홍성민 감수/계단

기후 변화에 대한 연구를 연대순으로 소개하며 기후 변화가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를 상세하게 알려주는 과학 서적입니다. 전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관심이 없던 분야인데 이전에 읽었던 "책장의 정석"에서 강하게 추천한 탓에 구입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기후 연구에 대해서는 최고라 할 만 합니다. 바이블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요. 그만큼 내용이 압도적입니다.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해저 퇴적물 산소동위원소비를 연구하여 당대 수온을 알아내고, 산호초 방사선 탄소 연대를 측정하여 해수면 변동의 역사를 복원하고, 지구의 공전궤도와 자전축 변동에 따른 일사량 변화로 지구 기후가 변동되었다는 밀란코비치 효과 검증을 통해 빙하기 발생 원인을 밝혀내고, 빙하 코어 채굴 후 이산화탄소와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대기 화석 분석 등으로 기후 변화를 연대순으로 그려내는 등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소개되는 덕분입니다. 연구에 관련된 다양한 그래프 등 도판도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늦으면 왜 빙하기가 시작되는지에 대해 이유에 대해 알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었어요. 심층수 순환 때문이라는데 전혀 몰랐네요. 당연히 따뜻해져서 얼음이 녹으면 더 따뜻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원리는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저위도 지역의 바닷물은 밀도가 낮아진다.→ 따뜻한 저위도 지역의 바닷물은 햇빛에 의해 가열되고, 강수로 인해 염분이 낮아지기 때문에 밀도가 낮아진다.

2. 고위도 지역의 바닷물은 밀도가 높아진다.→ 고위도 지역은 온도가 낮고, 염분이 상대적으로 높아 바닷물의 밀도가 커진다.

3. 밀도 차이에 의해 심층수 순환이 발생한다.→ 저위도와 고위도의 바닷물 밀도 차이로 인해 심층수 순환(대규모 해양 순환)이 일어난다.

4. 심층수 순환을 통해 열 에너지가 북쪽으로 이동한다.→ 순환에 의해 저위도에서 발생한 따뜻한 열 에너지가 북쪽(고위도 지역)으로 전달된다.

5. 빙하가 녹으면 고위도 지역의 바닷물 밀도가 낮아진다.→ 빙하가 녹아 담수가 유입되면, 고위도 지역의 바닷물 염분이 낮아져 밀도가 떨어진다.

6. 밀도 저하로 심층수 순환이 약화되거나 멈춘다.→ 고위도 바닷물의 밀도가 충분히 높지 않으면, 바닷물이 심층으로 가라앉지 못해 순환이 약화되거나 중단된다.

7. 열 에너지 공급이 차단된다.→ 순환이 멈추면 저위도에서 북쪽으로의 열 에너지 이동이 차단된다.

8. 멕시코 만류의 해수가 그린란드 해로 이동해 가라앉는다.→ 현재 심층수가 형성되는 지역은 그린란드 해이며, 여기에 유입되는 멕시코 만류의 수온은 약 섭씨 10도이다.

9. 해수가 심층으로 가라앉으며 온도가 섭씨 2도까지 떨어진다.→ 이 과정에서 바닷물의 온도는 약 8도 정도 낮아진다.

10. 이 열 차이만큼의 에너지가 대기로 방출된다.→ 약 8도에 해당하는 열 에너지가 바다에서 대기로 방출된다.

11. 북대서양 북부 지역은 급격한 한랭화를 겪게 된다.→ 열 에너지 공급이 끊기면서 북대서양 북부 지역은 혹독한 추위에 직면하게 된다.

굉장히 깔끔한 빙하기 전개네요. 무섭습니다... 그래도 최근의 1만년 동안은 그나마 기후가 안정화를 찾고 있는 시대라고 합니다. 물론 15세기부터 19세기 후반까지의 약 400년간을 소빙하기라고는 하는데 기온은 이전 시대에 비해 고작 0.2도 낮은 정도라는군요. 이 정도로도 소빙하기라고 불리울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니 기후의 영향은 정말 대단합니다. 앞으로의 지구 온난화 시기에는 기온이 1.8~3.4도나 오를 거라고 하니 앞으로가 큰일이지요. 다행이라면 빙하기는 북구, 즉 유럽 쪽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설명되고 있는 점 정도랄까요? 
 그 외에도 빙하기에는 먼지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적도 지역과 극 지방의 온도차가 커쳐서 대기의 남북 방향 순환도 보다 강해지고, 그만큼 육상에서 휘말려오는 먼지가 많아지고 건조 지대가 광범위해지기 때문이었다는 등 기후 변화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솔직히 읽기 쉬운 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학 도서라 어쩔 수 없겠지만 재미로 읽는 책은 절대 아니에요. 재미 따위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듭니다. 대학 때 접했던 교제 수준이에요. 아무리 도판이 많고 설명이 상세해도 머릿 속에 쏙쏙 들어오는 그런 내용은 절대 아닙니다. 문체도 딱딱하고요. 완독하는데 정말 여러 개월 걸렸습니다. 기후 변화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쉽게 손이 가지는 않았던 탓도 크지만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책의 가치는 분명하나 읽는 맛 측면에서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는 않군요.

2019/06/15

The Box - 마크 레빈슨 / 김동미 : 별점 2.5점

The Box - 6점
마크 레빈슨 지음, 김동미 옮김/21세기북스

컨테이너 화물 운송이 얼마나 세계를 바꾸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경제학 서적입니다. "책장의 정석"에서의 소개가 흥미로와서 절판된 책을 어렵게 구했었는데, 제가 구하고 얼마 안되어 복간되었더군요. 좋은 일입니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시작과 진행 과정, 그리고 현재(물론 책이 발표된 시점이겠지만)까지를 다루는데, 그 깊이가 엄청납니다. 색인을 제외하고 420여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 전부를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책의 초반부는 컨테이너 화물 시장을 처음 개척해서 시장을 주도했던 풍운아 말콤 맥린 사장의 일대기와 거의 겹칩니다. 컨테이너 화물 운송 초기에는 말콤 맥린 사장 자체가 시장의 전부이며 또 리더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겠지요. 여튼 초, 중반부는 말콤 맥린 사장이 처음으로 컨테이너와 컨테이너를 나르는 화물선 아이디얼 X호, 그리고 이를 옮기는 크레인을 도입하여 혁신을 일으킨 뒤 맷슨사 등 후발 업체들이 이를 모방하여 속속 컨테이너 화물 사업에 뛰어드는 과정이 상세하게 펼쳐집니다. 기존 대비 얼마나 경제적으로 이익이 일어났는지 등의 데이터들도 확실하게 수록되어 있어서 이해를 돕고요.
그 뒤 컨테이너 운송과 관련되어 마찬가지로 혁신이 일어난 트럭, 철도 운송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각 해운 회사별로 독자적인 컨테이너 운송 사업을 벌이다가 이를 표준화하면서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 등이 소개됩니다. 각 회사별 이해가 상충된 탓에 협의가 잘 진행되지 않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네요.

후반부는 풍운아 말콤 맥린의 실패 - 기름을 엄청 먹는 빠른 배를 도입했지만 오일 쇼크로 치명타, 다음에는 기름을 적게 먹지만 느린 대형 화물선으로 재기를 노렸는데 석유값 폭락과 너무 커서 이용할 수 있는 항구가 제한된 탓에 파산 - 와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현재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조금 신기했던 건 한진의 조선소가 대형 선박을 수주받았다던가, 한국의 부산이 대단한 성과를 거둘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같이 우리나라 관련된 내용이 가끔 등장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소개와 설명으로 컨테이너 화물 운송이 어떻게 세계를 바꾸었는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가끔 직구를 할 때, 특히나 중국에서 구입할 때 이 가격에 어떻게 해외 배송까지 무료로 될까? 궁금했었는데 그 해답이 바로 이것, 컨테이너 화물 운송의 발달 덕분이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운송 비용이 저렴해졌기 때문으로 심지어는 사방이 육지로 가로막혔거나, 항구에서 내륙으로 운송하는 비용이 더 들 정도라는군요. 예를 들어 미국 볼티모어에서 남아프리카 더반으로 컨테이너 화물을 보내는 비용은 2,500달러인데, 더반에서 남아프리카 수도 마세루까지 보내는 비용은 이보다 7,500달러가 더 든다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나라가 반도 국가로 3면이 바다로 인접했다는게 행운이란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외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건 하역을 진행했던 부두 노동자 단체들이 컨테이너 화물 사업 앞에서 어떻게 협상하였고, 어떤 항구들이 컨테이너 운송에 적응하여 살아남았으며 어떤 항구들이 몰락했는지에 대한 부분입니다.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의 거친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은 결국 무의미했다는 건데(영화에서의 노동자들은 항구 노동자들만은 아니었겠지만) 이는 최근 인공지능이 대두되어 곧 없어질 직업군 리스트가 이런 저런 곳에서 회자되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으로 보입니다. 저 역시 빠른 시간 내 도태되지 않으려면 많이 노력해야 할 텐데... 많은걸 생각하게 해 줍니다.

하여튼, 컨테이너 화물 운송에 대해알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경제라던가 산업의 흐름, 발전 방향 등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도 많고요. 제 전문 분야라던가 핵심 관심사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지 않아서 개인적인 만족도는 높지 않았지만 이런 쪽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24/08/02

[번역] 돈돈 다리, 떨어졌다 (4). - 아야츠지 유키토

「돈돈 다리, 떨어지다」의 「문제편」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속으로 살짝 일어난 화를 누르며 U군을 바라보았다. 그는 책장에서 꺼내온 우메즈 가즈오의 만화(『오로치』의 SUNDAY COMICS판, 네 번째 권이다)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아, 다 읽으셨어요?"
내 시선을 느낀 U군은 책을 덮으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우메즈 가즈오는 몇 번을 읽어도 대단하죠. 저는요, 그를 인생의 스승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요."
환하게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우메즈 가즈오가 대단한 것은 나도 전적으로 인정하는 바지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생의 스승"이라고까지 치켜세우는 그의 천진난만함(이라고 할까 뭐라고 할까)이 이때의 나에게는 왠지 몹시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는 "스승"의 책을 정중히 옆에 놓으며 "자, 아야츠지 씨"라고 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떻습니까? 설마 벌써, 풀어버리셨나요?"
"생각하고 있는 중이야. 제한 시간은 얼마나 남았지?"
"그렇네요."
U군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30분 정도 남았군요. 그 정도면 괜찮으세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오늘 세 번째 세븐스타 담배 포장을 뜯었다. 불을 붙이면서, 지금 느끼는 이 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피해자인 악동의 이름이 "유키토"라는 것 때문인가? 그것도 완전히 관계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서는 안 된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학생이다. 악의가 있을 리는 없고, 어설픈 농담이라 웃으며 관대하게 넘겨야 한다.
불만을 제기하자면 오히려 다른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그렇다 치고, 이 M** 마을 주민들의 이름은 대체 무엇인가. "포",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캠프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도 끔찍하다. "반 다이스케"는 반 다인의 패러디인가? "아사노 요우지"에 "사이토 사카에"——웃기지 않는다. 전혀 웃기지 않는다. 미스터리 매니아의 유치함이라면 듣기 좋겠지만, 읽는 내가 얼굴이 붉어질 정도의 이런 이름짓기는 정말 참아주었으면 좋겠다.
게다가 이 인물들, 읽다 보면 전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구별은 가능하지만, 아무리 '범인 맞추기' 단편이라 해도, 소설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이상 조금 더 제대로 된 묘사를 해주었으면 한다. 이럴 바엔 차라리 A, B, C……로 표기하는 것이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동안 점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결국 나는 이렇게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맞아, 바로 이것이다.
목구멍까지 나왔던 그 말(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고)을 간신히 삼키고,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커피라도 마시며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였다. 상대는 열 살이나 어린 아마추어 학생이다. 여기서는 선배답게 그 부분은 눈감아주고, 어쨌든 이 '문제'에 도전해야 한다.
"자, 그럼."
두 잔의 커피를 테이블에 내놓고, 나는 「문제편」의 원고를 다시 한번 대충 넘겼다. "잘 먹겠습니다"라며 컵에 손을 뻗으면서, U군은 내 표정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확실히, 자신작이라고 할 만하군. 꽤 어려운 문제야."
라고 말했다. 사실 나의 진심이었다. 사건의 상황은 이른바 '준밀실'이다. 20미터의 공간으로 격리된 '열린 밀실'에서의 불가능 범죄. 설정과 이야기에서 뭔가 장치가 있을 것 같은 냄새가 풍기지만, 초점은 역시 이 불가능한 상황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20미터의 거리를 극복했는가. 그 트릭을 간파하면 자연스럽게 범인의 정체도 알 수 있는, 그런 타입의 '문제'다. 과연……?
커피를 홀짝이며 잠시 생각한 후, 나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부분부터 파고들어갔다.
"'당했다', '밀쳐졌다', '사……사아……'라는 유키토의 말은, 글 중에 나와 있듯이 '다잉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지?"
"네,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마지막 '사아'는 범인이 누구인지 말하려던 것이라는 거네."
"글쎄요, 그건 어떻게 생각하실지……"
U군은 얼버무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얄미운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사'가 머리에 오는 등장인물은, 이 중에서는 사키와 사카에군. 사카에는 성도 사이토지. 설마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니겠지만.——흠. 달려온 사카에의 목소리를 듣고 '사이토 씨'라고 대답하려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겠군."
"그렇죠. 하지만, 다잉 메시지라는 건 대부분 보조적인 단서일 뿐이잖아요. 아야츠지 씨의 작품에서도, 항상 그렇지 않나요?"
"뭐, 그렇다고 하면 그렇지. 그럼, 이건 나중에 보기로 하고——"
그리고 나는 일단 정석적인 '소거법'을 적용해보기로 했다.
"알리바이 등 데이터를 통해 범위를 좁혀나가는 거야. 먼저, M** 마을 사람들부터——"
범행 시각인 오후 2시 40분에 알리바이가 없는 사람은,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의 네 사람이다. 이 중 카는 중상을 입고 위독한 상태니까, 당연히 제외된다.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체력적으로 생각해도 다리까지 왕복해야 하는 범행은 무리겠지.
엘러리는 어떤가. 가령 어떤 트릭을 써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죽였다고 해도, 그 후 25분 이내——즉 포가 그를 광장에서 본 3시 5분까지——마을로 돌아오려면, 어떻게든 [옆길 B]를 내려와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①의 루트를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파이프 바위에 있던 린타로는 그 시간에 통나무 다리를 건넌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엘러리도 범행은 불가능했다는 결론이다.
남은 사람은 아가사뿐이지만, 그녀의 경우 엘러리와 달리 3시 40분까지의 알리바이가 없으므로, ②의 루트를 통해 돌아왔다고 해도 시간적인 모순은 없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는 그녀가 범행이 가능했는지 생각해보면, 올츠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려야 한다. 어떤 트릭을 썼다 해도, 상대는 20미터의 계곡이니까.
결국 여기서는 네 사람 모두 제외된다. 포가 말하는 X는, 그들 중에는 없는 것이다.
한숨을 쉬며, U군의 반응을 본다. 그는 또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나서 손목시계를 보고,
"10분 남짓 남았습니다."
라고 말했다. 역시 얄미운 얼굴이라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음은 캠프의 네 사람."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나는 소거법을 계속했다.
요우지와 사키는, 오후 2시 40분 시점의 알리바이는 없지만, 다이스케가 돌아온 2시 50분에는 분명히 캠프에 있었다. 범행 후, 10분 안에 다리에서 돌아올 수는 없다. 다이스케가 다시 돌아온 루트도 20분 걸렸으니까. 예를 들어 [옆길 A]로 꺾어 [지류 B]를 따라 올라왔다면,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제외해야겠군.
당연히 다이스케에게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2시 40분에 범행을 저지른 후 되돌아갔다면, 아무리 서둘러도 2시 50분에 캠프에 도착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남는 사람은 사카에인가. 사카에가 빈사 상태의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 — 여기에는 시간이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그는 시간적인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다이스케가 산등성이 길을 되돌아간 것과 엇갈리면서 [옆길 A]에서 산등성이로 올라와 다리까지 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디. 그렇게 범행을 끝낸 후, 강으로 내려갔다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겠지.
물론 사카에가 강가에서 유키토를 발견하는 장면에서는 도저히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문장이 몇 개 있던것 같기는 하다. 때문에 정말로 사카에가 범인이라면, U군이 '페어 플레이의 룰은 엄격히 지켰습니다'라고 호언장담한건 이상하다. 그 부분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걸까.
자, 어쨌건 문제는 그 다음이야—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쨌든 제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알리바이로는 사카에가 범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유키토를 절벽에서 떨어뜨렸을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황당한 트릭이 떠올랐다.
“흠. 굳이 계곡을 건너 유키토 곁까지 갈 필요는 없었겠군.”
“어떻게요?”
“사카에의 배낭에는 이때 낚싯대가 들어 있었어. 여기에 튼튼한 긴 낚싯줄을 달고, 그 끝에 예를 들면, 야구공 정도의 크기의 돌을 묶어서 말이야...”
“휘둘러서, 다리 건너편의 유키토를 맞췄다고요?”
“그런 거야. 무리일까.”
U군은 복잡한 표정으로 “하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군.
“이런 건 어떨까.”
극약을 먹는다는 심정이 되어, 나는 거기서 새로 떠오른 트릭을 말했다.
“남아 있던 한 줄의 로프를 따라 뱀을 보내는 거야. 놀란 유키토는... 아니, 이건 안 되겠군. 유키토는 뱀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이런 건 어떻지. 들쥐의 목에 긴 끈을 묶어 로프를 따라가게 하는 거야. 그리고 구해줄 테니까 그 끈을 잡으라고 명령하는 거지. 멍청한 유키토가 그 말을 믿고 따랐을 때, 힘껏 끈을 당긴다. 균형을 잃은 유키토는...”
점점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애당초 이런 물리적인 트릭을 고안하는 게 별로 능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시는군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나를 보고, U군은 조금 유쾌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틀렸어요. 실행 가능 여부를 떠나서, 그것만으로는 ‘밀쳐져 떨어졌다’는 것이 되지 않으니까요. 유키토는 어디까지나, X의 손에 의해 ‘밀쳐 떨어져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전한 유키토의 죽기 직전의 대사에 ‘거짓’은 없고, 본문에서도 분명히 그렇게 명기되어 있습니다.”
“흐음.”
“유키토는 X의 손에 의해 밀쳐져 떨어졌다. 이것은 즉, 범행이 일어난 2시 40분 시점에서, X는 확실히 돈돈다리 북쪽 돌출 부분에 있었고, 자신의 손으로 유키토를 거기서 밀쳐 떨어뜨린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슬슬 시간 초과네요.”
라는 무정한 선언을 듣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U군은 왼팔을 들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한 뒤, “그럼, 이걸로”라고 말하며 ‘해답편’ 원고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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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답편
○반 다이스케, 아사노 요우지, 아사노 사키, 사이토 사카에 네 명은 시간적 혹은 물리적으로 생각해도 명백히 범행이 불가능하다. 또한, 본문에서 알리바이가 명기된 린타로와 타케마루는 X가 아니다.
○따라서 X는 M** 마을의 엘러리, 아가사, 올츠이, 카 중에 있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 카는 범행 불능. 한 팔이 없는 아가사는 범행 불능. 출산을 앞둔 올츠이는 범행 불능.
○이상으로 X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엘러리 뿐이다.
○엘러리는 다이스케가 도망친 후 돈돈 다리를 건너가 유키토를 공격해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범행 후 다리를 건너 고개 길로 돌아가, [옆길 B]를 내려가 [지류 A]의 나무 다리를 건너는 루트로, 오후 3시 5분에 마을 광장에 돌아왔다.
○동기는 복수. 전날, 아들 카가 '금단의 계곡'에 갔다가 큰 부상을 입은 것은 잔혹한 소년 유키토의 짓이었다. 사키의 바지에 묻은 빨간 손자국은 그때의 피에 의한 것이었다.
[끝]
---

"이게 끝이야?"
순간적으로 아연한 후, 나는 물었다. U군은 씨익 웃으며 "네, 끝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잠깐만, 그건 아니지 않나."
나는 본의 아니게 큰 소리를 냈다. U군은 태연하게,
"왜죠?"
라고 되물었다.
"왜긴 왜야, 이건 전혀 해결이 안 됐잖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역시 조금 불친절했나."
"불친절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테이블에 몸을 기울여 따졌다.
"첫째로 말이지, 다리가 부서진 후 남은 로프는, 작은 초등학생인 유키토의 몸무게조차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구. 지문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어. 그런 로프를, 어떻게 어른인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던 거야? 거리는 20미터나 된다고.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강하고, 로프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어. 가령 엘러리가 난쟁이고, 또 줄타기의 명인이었다 하더라도, 이 로프를 건너는 건 무리였다고 생각하는데."
"음, 확실히. 그런데요…"
"그리고, 범행 후는 ①의 루트를 통해 마을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린타로에게 들켰을 거라고.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쓰여 있었잖아. 그건 거짓말이었던 건가."
"그건 아야츠지 씨의 오해입니다."
U군은 단호히 말했다.
"사실, 린타로는 엘러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로, 도중에 타케마루가 두 번이나 심하게 짖었다고 했죠. 타케마루는 자기들 앞을 지나가는 수상한 자를 알아차린 거예요. 그래서 짖은 겁니다."
"그럼, 역시 범인 이외의 등장인물의 말에 '거짓'이 있는 거잖아."
"아니에요. 왜냐면, 린타로는 이렇게 증언했잖아요. '그 다리를 건넌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엘러리를 보지 못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하?"
대체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U군의 설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혹시 그와 나는 사용하는 언어의 종류가 다른 건 아닐까, 진지하게 의심했다.
"부서진 돈돈다리를 엘러리가 건널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인데요."
U군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아니고 줄타기 명인도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남아 있던 로프 한 줄로 계곡을 건널 수 있었던 겁니다. 아주 쉽게요."
"그런…"
나는 산소를 찾는 물고기처럼 입을 벌렸다.
"설마, M** 마을이 닌자의 숨은 마을이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런건 아닙니다. 안심하세요. 설령 닌자라 하더라도, 미군의 특수 공작 부대라 하더라도, 이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도전'에 주석을 단 대로, 그런 도구는 여기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라고 말했지만, 이어지는 말을 생각해내지 못해, 나는 불안하게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하듯이, U군도 자신의 담배(같은 세븐스타)를 물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는 말했다.
"엘러리는 난쟁이도 줄타기 명인도 닌자도 아니었어요. 그게 아니라, 유키토의 다잉 메시지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에…?"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손을 멈추고, 나는 테이블 구석에 던져진 '문제편' 원고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이 상황에서, 유키토를 자신의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는 것 같은 묘기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해요. 따라서 당연한 논리적 결론으로…"
"…설마"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겨우 하나의 단어(설마)가 떠올랐다. 나는 두려워하며 말했다.
"설마 그 '사…'라는 게, '사루(원숭이)'를 말하려고 한 건가?"
"정답입니다."
U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타케마루가 격하게 짖은 거예요. 옛날부터 개와 사이가 나쁜 동물이라고 하면 정해져 있잖아요. 타케마루와 엘러리는 문자 그대로 견원지간이었던 거죠."
잠시 멍해져서 중얼거리듯 "원숭이, 원숭이…"라고 중얼거리는 나를, U군은 여전히 순진한 미소로 응시하며,
"처음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이 작품은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으로 돌아가 쓴 것'이라고. 본격 미스터리의 원점이라고 하면 당연히,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이죠?"
"—사기다. 불공평해."
겨우 기운을 짜내어, 나는 항의했다. 그러나 U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M** 마을에 사는 일본 원숭이들을 '인간'이라고는,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한 사람'이나 '두 사람' 같은 표현도 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자'라는 한자도 사용하지 않았어요. 인간이 아닌 생물일 가능성을 암시하기 위해 '자'라고 굳이 히라가나로 표기했습니다.
애초에, 아야츠지 씨, 일본 본토의 산속에 포라든가 엘러리라든가 하는 이름의 인간들이 사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덧붙이자면, M** 마을의 M**는 'monkey'를, H** 대학의 H**는 'human'을 각각 암시한 이름입니다."
"원숭이를 '남자'나 '여자'라고 썼잖아."
"남자 = 인간 중, 수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수컷도 지칭.
여자 = 인간 중, 암컷으로서의 성기관·성기능을 가진 쪽. 넓은 의미로는, 동물의 암컷도 지칭.
출처는 산세이도의 '신명해 국어사전'입니다. '코지엔'이나 '다이지린'이어도 상관없어요."
"젊은 여자들이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원숭이가 그런 걸 할 리 없잖아."
"그건 물론 그루밍을 말하는 거예요. 원숭이의 털 손질. 아시죠."
"—더럽다. 비겁해."
"더럽다니요. 나이 많은 포우가 참나무 열매를 깨물고 있거나,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고 있는 등, 그들이 원숭이라는 복선을 몇 가지 깔아놓았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조금 흥분한 나머지, 어조를 강하게 했다.
"하지만 말이야, 원래 원숭이가 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규칙'이라든지 'X'라든지 '복수'라든지......"
그러자, U君은 "어머 어머"라는 듯 얇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건 전부 어디까지나 원숭이의 세계에서의 일이니까요. 인간과 대화를 나누진 않잖아요? 대사도 전부 캠프의 인간들과 구별하기 위해 이중 괄호로 묶여 있죠. 게다가 고금을 통해 소설 속에서는, 고양이부터 도룡뇽까지, 생각하는 동물도 있고 나름의 문화를 가진 동물도 있어요. 인간의 말을 이해하거나, 인간적인 감성으로 행동하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최근의 미스터리에서도 있었죠. 은퇴한 경찰견의 일인칭으로 쓰인 이야기. 미야베 미유키 씨의 '퍼펙트 블루'."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잖아."
"그런가요?"
나는 점점 더 흥분하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야."
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U君은 간단히 "네, 맞아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건 '범인 맞히기'가 아니라 '범원숭이 맞히기'죠. 그래서 그런 언어의 엄밀성을 중시해서, 작품 속에서도 아야츠지 씨와의 대화에서도, 나는 한 마디도 '범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어요. X 같은 진부한 미지수 기호를 끄집어낸 건 고육지책이었어요. '문제편'의 체크, 해 보실래요?"
"........"
"꽤나 고심했어요, 그 부분은. 아야츠지 씨라면 분명 그 고심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불쾌하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래서 아마추어 학생은 곤란하다......라고 마음속으로 독을 품으며, 심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감았다. 한동안 그대로 침묵하고 있자,
"저기, 텔레비전 켜도 될까요?"
조심스럽게 U君이 말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러게."라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이상하게 밝고 씩씩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U君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쩐지 지금 막, 시계의 바늘이 오전 0시를 지난 모양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된 것이다.
브라운관 속에서는, 익숙한 연예인들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축하해, 축하해"라고 말하고 있다. 그 화면의 한쪽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한 마리의 동물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저도 모르게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원숭이잖아."
어째서 U君이 굳이 오늘 밤을 선택해서 나를 찾아왔는지. 하필이면 섣달그믐의 이런 늦은 시간에, 추운 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도 연출("복선"이라고 그는 말할지도 모르겠지만)의 하나였던 것이다. 내가 이 '범원숭이 맞히기'를 다 읽을 즈음에 딱 새해가 밝는, 그런 타이밍을 그는 노렸다. 그래서 그렇게, 몇 번이나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던 것인가.
1992년, 원숭이해의 시작――.
어깨에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 사라져가는 듯한 기분을 나는 맛보았다. 방금 전까지 내가 느끼던 화가 몹시 하찮게 느껴지고, 동시에 그런 나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져서......
나는 U君 쪽을 보았다. 하지만, 소파에는 이미 그의 모습이 없었다. 검은 배낭도 가죽 장갑도, 크림색에 초록색 줄무늬가 들어간 헬멧도, 거기에는 없었다. "돈돈다리, 무너졌다"라고 표지에 크게 적힌 원고만이,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확실히 익숙한 얼굴. 잘 아는 이름. 무엇인지 무척 그립고, 그렇지만 조금 얄밉고, 그 천진난만함이 때로는 이상하게 짜증스럽고......
'아, 그렇구나'라고 나는 그제야 생각해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냈는지, 그건...... 아니, 이제 그만두자. 이 이상은 적지 않기로 하겠다.
남겨진 '돈돈다리, 무너졌다'의 원고에 살짝 손을 뻗으며, 다음에 그가 찾아오는 건 언제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2017/03/24

서평 쓰는 법 - 이원석 : 별점 2점


서평 쓰는 법 - 4점
이원석 지음/유유

제목이 마음에 들었고 평도 괜찮길래 구입했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많이 달랐습니다. 아니, 실망스럽네요. 제목 그대로 서평을 잘 쓰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이 소개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은 탓입니다.
1부 "서평이란 무엇인가?" 부터 그러합니다. 서평을 쓰기 전, 무엇을 쓰는지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서평의 정의를 내리는게 나쁜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거창하게 포장했어요. 자신의 내면을 파악하여 자기 성찰을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요. 전 그냥 책을 읽고 난 감상을 잘 적고 싶을 뿐인데, 자기 성찰이라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그나마 제대로 된 정의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독후감은 정서적이고 서평은 논리적이다. 독후감은 독자가 없어도 되지만 서평은 독자와의 대화다."라고 구태여 독후감과 서평을 구분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고, "평가는 기준이 필요하고, 서평은 다른 책들과 사이에서 관계를 정립하게 해 주는 맥락화의 일환이다"라는 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다른 책들과 비교하여 평가를 해야 하나요? 제 마음 속의 잣대로 기준을 세워 평가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
물론 다른 책들과 연계, 비교하면 근거가 탄탄하여 논리를 뒷받침하는데 용이하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건 학술적인 부분이라면 모를까 창조적인 부분에 적용되기는 힘듭니다. 서태지 첫 데뷰 당시 음악 평가하는 프로그램에서, 기존에 없었던 음악이기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는 일화가 떠오르네요.
이와 같은 이론과 장황한 소개가 실제 '서평을 잘 쓰는 방법'보다 분량이 많은 것도 문제입니다. 서평을 잘 쓰는 방법은 전체 분량의 1/3에 불과합니다. 그나마도 잘 정리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우며, 인용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고요.

아울러 본인 스스로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용에는 어렵고 장황한 말 투성이입니다. 공시적 맥락화, 범박하다, 메타적으로 등등... 읽으면서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말이 많습니다. 저자는 일상적으로 쓰는 말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서평이 '독자와의 대화'라고 정의했다면 자신의 글부터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용어를 쓰는 게 옳은 자세가 아니었을까요? 드레스 코드가 없는 파티라고 해 놓고,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 손님들 앞에 혼자 턱시도를 차려 입고 나타난 주인을 보는 느낌입니다.

다행히 건질 내용도 몇 개 있긴 합니다. 서평은 요약과 평가로 이루어지며 특히 좋은 서평을 위해서는 요약이 중요하다, 자신의 삶과 경험을 비추어 서평을 써라, 하나의 문단에는 하나의 생각이 담겨야 한다는 문단 구성 방법 등은 괜찮았습니다. 공부도 많이 되었고요. 

하지만 제가 원했던 것은 서평을 잘 쓰는 방법론, 설명서였는데 이 책은 서평에 대한 에세이에 가깝기 때문에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이 책에 소개된 대로 보다 명확하게 책의 가치를 정한다면, 서평을 잘 쓰기 위해 읽을 필요는 없는 책입니다. 저와 같이 블로그에 읽은 책에 대한 간단한 감상이 목적이라면 더더욱이요. 이 리뷰가 별로인 것은 이 책에서 그만큼 얻은게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림 하나 없는, 200페이지도 안되는 반양장 책에 만원이라는 과격도 과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서평을 잘 쓰는 방법론은 "책장의 정석"에 짤막하게 소개된 글 쪽이 훠~얼씬 낫네요. 

덧붙이자면, 도서출판 유유에서 나온 책들은 기획은 대체로 마음에 들지만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책이 많은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군요. 가격이 과하다는 단점도 동일하고요. 작은 출판사라 응원해주고 싶기는 한데 또 구해보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2021/03/12

철도, 역사를 바꾸다 - 빌 로스 / 이지민 : 별점 2점

철도, 역사를 바꾸다 - 4점
빌 로스 지음, 이지민 옮김/예경

"책장의 정석"에서 추천했던 책입니다. 제목 그대로 인류 역사에 관여한 주요한 철도를 주로 소개하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언뜻 보기에 책의 완성도는 높습니다. 도판도 좋아 보였고요. 

실제로 담고 있는 내용도 나쁘지 않아요. 교통 수단으로서의 활용을 넘어서서 철도의 보급을 통해 일반인들이 일상에서 벗어난 '여행'을 즐기게 되는 등 사회와 관련 산업이 변화했다는걸 실제 사례를 통해 잘 보여주는 레스터-러프러버 철도 이야기, 인도 철도의 역사를 다루며 영국의 식민지 지배의 흥망성쇠까지 함께 알려주는 대인도 반도 철도 이야기, 크림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군수 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한껏 보여준 그레이트 크리미안 철도 이야기, 초기 미국을 양분하지 않도록 도와준 센트럴퍼시픽 철도 이야기 등 책의 부제인 '인류 문화의 흐름을 바꾼 50가지 철도 이야기'에 잘 들어맞는 이야기들을 소개해 주기 때문입니다.

기차와 관련된 문학 작품과 그림, 컨텐츠 들을 알려주는 파리-르아브르 철도 이야기나 도시 교통망을 재정립한 지하철 탄생을 다룬 메트로폴리탄 철도 이야기,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오리엔트 특급 열차"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소개한 시카고-세인트루이스 철도 이야기처럼 관련된 재미있는 정보도 많습니다. 디젤 엔진을 발명했던 독일의 루돌프 디젤 박사가 런던행 열차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 바다에서 시신이 인양되었다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했습니다! 센트럴퍼시픽 철도를 놓을 때 중국인 노동자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고, 이 철도는 미국 원주민 거주지를 파괴했다는 사실에 대한 냉정한 서술, 그리고 중국 징장 철도와 일본 도카이도 철도와 같이 동양의 유명 철도도 망라하는 등 공평한 시각도 마음에 들었고요. 이 정도면 철덕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좋아할만한 책일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단락에서 동일한 지명도 다르게 쓴다던가, 이야기에서 주요하게 언급하고 있는 지명은 도판으로 수록된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던가, 미시사 서적으로는 중요할 연도 표기에 오류가 있다던가 하는 등의 문제가 많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존재합니다. 전체적인 번역 자체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고요. 쉽게 읽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번역에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주었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았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2016/08/14

시작, 그림책 - 도이 아키후미 / 김민지 : 별점 2점

시작, 그림책 - 4점 도이 아키후미 지음, 김민지 옮김/안그라픽스

제목 그대로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최근 몇 년간 딸아이를 위해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었는데, 그러면서 그림도 좋고 아이디어도 재미난 책들이 많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 쯤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던 차에, 마침 좋은 기회가 되어 읽게 되었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그림책이란 무엇일까 : 제목 그대로 그림책에 대한 정의와 종류, 각 종류별 대표 그림책이 소개됩니다.
  2. 책 만들기의 기본 지식 : 책의 각 부분별 명칭이라든가 종이의 크기, 면지 및 인쇄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3. 실제 그림책 만들기 : 실제로 그림책을 만드는 과정이 상세한 예와 함께 소개됩니다.
  4. 다섯 작가 이야기 : 유명 그림책 작가 5인의 인터뷰
  5. 그림책 워크숍 : 저자가 주관하는 듯한 톰즈박스라는 그림책 워크숍과 그 워크숍을 통해 그림책을 출간한 김민지 씨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6. 그림책 출판 : 실제로 그림책을 출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실무자 관점으로 설명해 줍니다.

이 중 가장 유용하고 재미있던 부분은 3번인 '실제 그림책 만들기'입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알지 못했을 그림책 만드는 방법론이 정말로 자세히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몇몇 실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단계별 — 스토리보드, 러프 스케치, 원화 그리기, 표지 그리기 등 — 로 제대로 보여주거든요.

책에서 소개해주는 여러 가지 그림책들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사사키 마키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괜찮은 듯싶어요. 국내에 몇 작품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문제도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책의 내용이 '일본에서 그림책을 만드는 법'이라는 것이죠. 디테일한 제작 방법이야 국가를 불문하고 동일할 수 있습니다. 허나 출판사와 만난다든가, 작가로 활동을 시작하는 부분은 많이 다르겠지요. 이 부분은 국내 기준의 보충 설명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전무합니다.

또 그림책을 만드는 작가를 위한 그림 그리는 방법론, 글을 쓰는 방법론은 잠깐 건드리고 마는 수준이라는 것도 아쉽습니다. 상세하게 소개되는 그림책 제작 방법론과 비교하면 실망스러운 수준이에요. 물론 방법론이 이 책에서 알려주는 것처럼 '즐거운 마음, 기쁜 마음으로 만들어라, 아이들이 읽는다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정도가 전부라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다면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한 설명은 해 줘야 했습니다.

독자에 대한 고려와 배려도 부족합니다. 소개된 그림책들 모두 일본 출판물 기준인데 국내 출간된 책에 대해 별도로 표기해 주지 않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책장의 정석"과 심히 비교되네요. 책 소개가 병행되는 책들의 경우 대부분 지원해 주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소개된 책과 소개된 페이지에 대한 설명 및 번역이 전무하다는 것 역시 배려의 문제로 보이고요.

문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읽는 듯한, 조금 낮은 연령대를 위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림책 만드는 법에 대해 썼다 하더라도 이 책이 그림책은 아닌데 왜 이렇게 썼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원서가 이런 문체인지 확인하고 싶을 정도예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보기 드문 그림책 저작에 대한 책이라는 독특함은 좋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 감점합니다. 문고본이라면 모를까, 22,000원이나 되는 책으로는 많이 부족했어요. 동화책을 만들기는 정말 어렵구나! 라는 것을 느낀 것이 유일한 수확이랄까요? 그냥 딸아이하고 둘이서만 즐길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와 소소한 그림으로 저는 만족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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