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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무뢰한의 죽음 - M.C. 비턴 / 전행선 : 별점 2점

무뢰한의 죽음 - 4점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리실라가 약혼자인 극작가 헨리 위더링을 로흐두로 데려와 약혼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초대 손님 중 피터 바틀릿 대위는 파티 손님들 사이에서 온갖 문제를 일으켰던 유명한 사교계의 무뢰한이었다. 약혼 파티에서도 여지없이 사고를 치고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아침 총에 맞아 죽은채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사고사로 생각되었지만, 해미시 순경이 몇 가지 단서로 살해되었다는걸 밝혀낸 뒤 동기가 명확한 파티 손님들을 대상으로 한 수사가 시작되었다. 은행가 프레디 포브스그랜트가 체포된 다음 날, 프레디의 아내 비라마저도 독살당했고 사건은 결국 미궁에 빠지는데...

M.C. 비턴의 해미시 순경 시리즈 2작입니다. 1작이 마음에 들었기에 곧바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시리즈답게 전작에서 이어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많은건 즐겁습니다. 특히 해미시 순경 설정이 더 풍성해 졌어요. 사냥은 그를 미워하는 할버턴스마이스 대령까지 인정할 정도로의 전문가이며, 달리기, 사격, 낚시, 심지어 체스 대회까지 나가면 우승하는 다양한 능력에다가 전작에서도 등장했던, 미스 마플스러운 "시골 마을 인간 관계를 사건에 대입하여 사건 관계자에 대해 명료하게 꿰뚫어보는 능력"을 통한 심리 분석, 게다가 '속기'까지 가능한 슈퍼맨으로 묘사되거든요. "홍반장"의 추리 소설 버젼이라고해도 무방합니다. 다른 전작에서 이어지는 캐릭터들도 반갑습니다. 이름만 등장했던(하지만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밀렵꾼 앵거스 맥그리거가 직접 등장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고루하면서 부패하고, 그리고 난잡한 부르조아들에 대한 고전적인 묘사도 여전합니다. 작가가 부르조아에 대한 묘사를 너무나 하고 싶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질만큼 애정도 묻어나고요. 부르조아인 '무뢰한' 바틀렛이 알고보니 나름 능력자이며, 그를 죽인 평민 헨리 위더링은 '속물'에 불과했다는 진상만 보아도 작가가 부르조아들을 동경하고 있다는게 뻔히 보입니다.

단, 이러한 점들이 장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전작에서 이어지는 인물 중 블레어 경감은 전형적인 악덕 경찰 상사라서 너무 뻔합니다. 분명 전작 마지막 부분에서 서로 마음을 터 놓았다 싶었는데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고요. 블레어가 성공을 독차지하는 결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고전스러운 묘사도 정도가 지나칩니다. 특히 밀땅 중에도 스스로의 주제를 파악하고 프리실라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는 해미시의 행동, 부모님이 좋아하는 약혼자가 있지만 해미시를 향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는 프리실라 두 명 모두 현대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답답합니다. 한국 근대를 연상케 하는, "장남"의 가족 부양 의무가 중요하다고 소개되는 등의 기본 설정부터가 고전적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만, 전작에서의 현대적인 캐릭터들의 모습이 약해진 듯 하여 아쉽네요.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죄다 별로인 추리적인 부분에 비하면 사소합니다. 물론 범인의 의외성,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설득력있는 동기만큼은 괜찮습니다. 범인이 정말로 뜬금없기는 해도 동기만큼은 파티에서 비롯되었으며, 충분히 살인을 저지를만한 동기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거든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다는 것도 전작보다는 나아진 점이고요.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추리의 과정은 엉망입니다. 우선, 보다 공정한 전개를 위해서 파티에서 푸루니(푸루넬러)의 말로 헨리의 히트작이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바틀릿 대위가 알았다는 부분은 좀 더 보강했어야 합니다. '파티 후반부에 바틀렛이 푸루니를 유혹하여 끌고간 후, 연극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았다'는, 뒷 부분에 프리실라와 푸루니가 당시 상황을 이야기하는 장면에 덧붙였더라면 아주 좋았을거에요. 아니면 최소한 해미시가 "공작 부인의 연인"을 관람하다가 진상을 알게 되었다! 정도로라도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대령의 과거 사생활을 이전에 여러 채널로 알고 있었는데, 당시 스캔들 중 하나가 연극의 핵심 내용이더라는 정도로요. 

해미시 스스로 이 사건의 범인은 익숙한 사냥꾼일 것이다, 이유는 총알을 바꿔넣을 정도로 충분한 여분의 탄환을 가지고 갔기 때문이라고 추리했던걸 스스로 뒤엎는 결말도 아쉽습니다. 독자의 헛다리를 유도해 놓고 그냥 발을 빼버린 셈이니까요. 별다른 설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울러 비라를 살해한 범행의 동기, 방식과 과정 모두 운과 우연에 의지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동기부터 이야기하면, 바틀렛이 함께 밤을 보낸 3명의 여성 중 비라에게만 연극에 대해 이야기했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범행 도구인 쥐약도 우연히 입수했으며, 비라가 단 것에 사족을 못 쓴다는 약간의 복선 정도로는 그녀가 독이 든 케이크를 먹어치운다는걸 보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를 설명하려면 저녁을 못 먹는 비상사태가 일어난다는 정도의 묘사는 필요했어요.
여튼, 이 시리즈는 두 편 밖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살인이 너무 쉽게 일어나는 것 같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장점, 단점 모두 전작과 비슷합니다. 추리적으로 조금만 괜찮았어도 계속 읽어볼텐데 애매하네요. 다음 권을 읽어봐야 할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 겠습니다.

2015/07/08

영국식 살인 - 시릴 헤어 / 이경아 : 별점 3점

영국식 살인 - 6점 시릴 헤어 지음, 이경아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약한 워벡경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지들을 초대했다. 초대된 사람들은 아들인 로버트, 가까운 친척이자 재무장관인 줄리어스 워벡, 로버트와 연인이었던 백작가의 딸 레이디 커밀라, 오래된 지인 카스테어스 부인, 그리고 워벡홀에서 사료를 연구하던 보트윙크 박사가 함께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 차이, 로버트의 무례함 등 여러 이유로 참석자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던 중, 크리스마스 자정에 로버트가 모두의 앞에서 독살당하고 마는데...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누누이 이야기한 대로 저는 정통 고전물의 팬입니다. 허나 고전 퍼즐 미스터리의 팬일 뿐, 이른바 "영국식" 스타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신사 숙녀라 불리는 귀족과 부르조아들이 등장하여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유머로 예법이다 뭐다 하며 장황하게 기이한 가식과 가증을 떠는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잘난척이 보기 싫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피터경 시리즈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제가 싫어하는 정통파 영국식 스타일의 종합 선물 세트입니다. 무대부터 전통 있는 워벡 가문의 오래된 저택이고, 정통 영국식 추리소설답게 눈으로 고립된 클로즈드 서클 상황에 놓이거든요. 범행 현장에 있던 인물도 워벡 가문의 후계자, 가문의 친척인 재무장관, 오래된 친구인 정치가의 아내이자 부유한 숙녀, 후계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백작 가문의 딸, 충직한 집사, 마지막으로 가문에 연구차 방문해 있던 보트윙크 박사라는 구성입니다. 귀족, 신사, 숙녀, 하인에 손님까지 정말 완벽한 구성이지요. 게다가 하나같이 영국식 귀족, 부르조아 예법에 쩔어 있는 건 물론이고요. 덕분에 첫 피해자로 로버트가 독살당했을 때에는 쾌재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재수 없고 짜증나는 극우 파시스트 귀족 떨거지였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러한 정통 영국식 스타일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재미있다는 겁니다. 영국식 스타일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의 핵심 장치로 사용된 덕분입니다. 예를 들자면 집사 브리그스가 자신의 딸과 로버트의 결혼 사실, 손자의 출생을 손님들에게 철저하게 비밀로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브리그스의 함구는 정통 영국식 부르조아 예법 덕분에 완벽한 설득력을 갖추었고, 사건의 동기, 전개, 결말이자 파국을 만드는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 탐정역인 보트윙크 박사가 외국인이자 역사학자라는 설정도 뛰어납니다.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영국식 관습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좌충우돌하며 깨닫는 과정과 사건의 핵심 동기가 과거 영국에 실존했던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을 간파해 내는 것에 높은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별다른 단서나 증거가 있는건 아니라서 대단한 추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윌리엄 피트라는 실존 인물이 관련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서 역사 추리물 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동기 역시 정말로 "영국식"이라는 점에서 장르적 기대를 충족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문제도 분명합니다. 카스테어스 부인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와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독약병이 워벡 저택에 있었던 물건이라는 점에서 보면 범행은 즉흥적인 결심으로 보이는데, 재무장관이 경호 차원에서 형사까지 대동한 상황에서 독살을 결심하고 실행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지어 저택이 고립된 상황이라, 방 안에 있는 누군가가 범인인 게 분명하고 누가 득을 보게 될지가 명확하다면 빠져나가는건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유일하게 배신이라는 동기가 있는 레이디 커밀라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을 수도 있으나, 범행 시점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줄리어스를 설득해 자살로 몰아가려는 시도 역시 작중 묘사대로라면 잘 되지 않았을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작위를 이용한 복잡한 상황을 연출하기보다는 줄리어스를 직접적으로 독살하고 정치적으로 날선 대립을 보인 파시스트 로버트에게 뒤집어씌우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심리겠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영국식 설정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솜씨가 탁월하여 무척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작품이기는 하나, 상기 단점도 분명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영국식"이라는 설정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고전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이시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15/11/28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 - 미야모토 미치코, 나가사와 마코토 / 고세현 : 별점 2점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 - 4점
미야모토 미치코 지음, 고세현 옮김, 나가사와 마코토 그림/라임북

일본의 작가 미야모토 미치코가 남편 나가사와와 함께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몇 개월의 일상을 기록한 에세이집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토스카나의 우아한 식탁"이 아니라 "부르조아의 우아한 식탁"으로 바꾸었어야 합니다. 1990년대 초반, 거품경제가 무너지고 난 직후에 이런 생활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데다가 돈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전원 생활을 위해 잠깐 머무는 곳이 백작가의 빌라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곳곳에 드러나는 저자의 부자 친구들 — 귀족 딸인 친구 줄리아나, 뉴욕 시절 친구로 화상으로 거부가 된 토마조와 네루 커플 등 — 에 대한 일화들 때문입니다. 친구 토마가 광대한 산과 땅을 산 뒤 그곳의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는 것 처럼요. 그냥 대자연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손을 댈 만큼 댔다는 스케일부터가 남달라 어리둥절할 정도예요.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설탕을 먹지 않는 등의 까탈스러운 식습관도 그렇고요.
하기사 저자의 여행 비결은 시간과 몸이 여유롭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한다는건데 이거야말로 큰돈이 드는 여행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물론 아주 건질 게 없는 건 아닙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건 함께 실려 있는 저자의 남편 나가사와 마코토의 그림들입니다. 스케치와 간단한 수채화인데 그야말로 최고더라고요. 저도 이런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또 등장하는 음식들에 대한 묘사 역시 기가 막힙니다. 소개된 것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1. 전원생활을 즐기면서 먹는 자가제 피자 — 그중에서도 도우에 루꼴라만 얹고 올리브유만 더한 단순한 것
  2. 간단하지만 풍성한 샐러드 — 올리브유, 레몬, 발사믹 식초, 소금, 후추 등을 입맛대로 뿌려 먹음
  3. 그롤라 커피 — 원두를 갈아 만든 에스프레소 커피를 주둥이가 여섯 개 나 있는 토기처럼 생긴 물건에 붓고, 커피에 설탕과 그라파를 넣어서 오래 휘저은 후 성냥불을 붙여 그라파의 알코올 성분을 태운 뒤 주둥이에 각자 입을 대고 먹는다
  4. 간단한 파스타들, 그중에서도 친구 네루가 저자를 위해 만든 페스토 소스 — 잘게 썬 바질과 마늘, 파르미자노 레자노 가루와 최고급 올리브유와 소금을 한데 섞는다. 생크림은 저자의 바람으로 넣지 않고 대신 버터를 넣어 만든다 — 로 만든 트로피에테(뇨키의 일종)

아, 정말이지 한 번 먹어보고 싶은 것들이에요! 저자 말대로의 토스카나 요리의 3대 특징 — 복잡하게는 하지 않는다 / 너무 열중하지 않는다 / 별로 미묘하지 않게 한다 — 에 기반한, 신선한 재료에 기대어 대충 만든다는 요리법도 와 닿고요.
아울러 귀족이 사는 곳이라 그렇지 별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목 그대로 전원 생활이기는 해서 거부감이 좀 덜하긴 했습니다. 특히 백작가의 사위 필리포의 삶은 부르조아보다는 아라카와 히로무의 "백성 귀족"이 떠올랐습니다.

허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으며, 특히 부르조아 사상에 기반한 내용들은 영 거북하기만 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토스카나에서 우아한 생활을 즐기려면 부자여야 한다는 씁쓸한 결론만 남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7/08/25

험담꾼의 죽음 - M.C.비턴 / 지여울 : 별점 2.5점

험담꾼의 죽음 - 6점
M. C. 비턴 지음, 지여울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어와 송어 낚시 전문 로흐두 낚시 교실'에 낚시를 배우기 위해 8명의 수강생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 중 '레이디 제인'은 엄청난 재앙 덩어리로, 그녀의 특기는 낚시 교실 참가자들을 뒷조사해서 약점을 잡고 흔드는 것이었다. 다른 수강생들은 물론 낚시 교실 운영자 존과 헤더 부부마저 그녀에게 진절머리를 내며 하루하루가 흘러가던 중, 4일 째 되는날 레이디 제인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는데....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로흐두의 순경 해미시 맥베시 시리즈 제 1작입니다. 눈에 띄는건 정통 영국 미스터리, 그 중에서도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님의 스타일을 쏙 빼닮았다는 겁니다. 시골 촌 마을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점, 부르조아들과 계급 문화 등 바탕이 되는 설정이 굉장히 영국적이라는 점, 시골 촌 마을의 인간 관계가 여러 사건 관계자들의 경우와 맞아 떨어져 추리의 바탕이 된다는 점,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이고 싶어한 험담꾼 레이디 제인의 설정과 그녀의 협박 재료들 모두 그야말로 여사님의 재림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문제는, 지금 읽기에는 좀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입니다. 묘사부터가 빅토리아 시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에요. 1985년 작품이라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요. 부유한 상류층과 일반인들이 어우러져 각각의 속셈으로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 소집단이라는 설정부터가 별로 현대적이지 않잖아요?
게다가 로맨스 관련 이야기들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진부합니다. 이야기의 주역 중 하나인 앨리스는 20세기 아가씨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순진해 빠졌고, 해미시 순경과 지역 유지의 딸 프리실라의 로맨스 역시 고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형적인 부자집 망나니 제레미도 켸켸묵은 설정인 것은 마찬가지고요.

물론 현대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캐릭터들이 나름 적극적이고 입체적이기는 합니다. 레이디 제인이 좋은 예입니다. 은근하게 사람들을 상처주던 여사님 작품 속 할머니나 부르조아 귀부인과는 다르게, 직접적인 짜증 유발자로 잘 묘사되고 있거든요. 작중 등장인물 뿐 아니라 독자마저도 분노케 만들 정도로요. 최근 작품들 중에서 이렇게 누구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등장인물은 오랫만에 봅니다.
앨리스가 제레미에게 넘어가 밤을 같이 보내는 묘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여사님 작품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나름 현대적인 부분입니다.

해미시 순경 역시 멍청한 바보가 아니라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할 말 다 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신선합니다. 레이디 제인이나 찰리 백스터의 어머니에게 일갈하는 장면은 개중 백미입니다. 여성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여성에게 조리있게,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만큼 할 말 다 하는 정말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를 굉장히 잘 그려냈습니다.
탐정 역할로도 괜찮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미스 마플 스타일의 인간 관계를 바탕으로 한 추리력에 더해 "누가 범인인지 알고 싶다면 말을 걸고 질문을 던지고 대답에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라는 지론도 인상적입니다. 

로흐두라는 마을과 주변 묘사의 디테일도 상당한 수준이며, 이야기의 큰 축인 낚시 교실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져서 여정 미스터리의 느낌도 전해줍니다.

그러나 해미시 순경 등 멋드러진 캐릭터만으로는 역부족이네요. 여러모로 원조 여사님 작품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적으로는 실망스러운 탓이 큽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소소한 시골 마을의 일상과 에피소드를 사건에 접목하는 추리 방식이라던가 마지막에 해미시 순경이 사건 관계자들을 모아놓고 추리쇼를 벌이는 등의 추리 과정만큼은 고전 스타일인데, 실제 '추리'는 전혀 고전 본격물스럽지 않아요.
일단 공정하지가 않습니다. 핵심 단서인 "BUY BRIT...", 그리고 스트리퍼 에이미에 대해 순경이 알아낸 정보를 독자에게 공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독자도 에이미 로스가 "레드훅"이라고 말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순경이 인맥을 통해 전화를 걸어 알아낸 정보를 독자가 끌어낸다는건 불가능하니까요.
게다가 이 핵심 단서도 헛점이 너무나 많습니다. 스트리퍼가 성공해서도 과거 예명을 계속 사용한 이유, 술잔이 비었을 때 호텔이라면 마땅히 종업원이 있어야 하지만 에이미가 모두에게 술을 따라준 이유 등이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그나마의 사진도 '증거'라고 밀어붙이기는 영 부족하고요.
무엇보다도 밀렵꾼에게 목격되었다는 말로 자백을 유도한 것은 최악이었습니다. 정통 본격물이라면 상상하기도 힘든, 탐정의 야바위 짓이잖아요. 살해 동기도 영 시원치 않고요. 이럴거라면 차라리 소거법으로 근거를 보강했어야 합니다.

  • 어린아이인 찰리 백스터는 거구의 레이디 제인을 살해해 옮기기 어려우니 제외.
  • 앨리스는 과거의 치부를 이미 제러미에게 밝혔기에 드러난다고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니 제외.
  • 제러미와 프레임 소령의 비밀은 아는 사람은 다 알 뿐더러 알려면 누구나 알 수 있고, 게다가 알려진다고 해도 본인이 창피할 뿐 해가 될 일은 당장 없기에 제외.
  • 대프니의 과거 정신병 이력이야말로 드러난다고 해도 무엇 하나 해로울 게 없기에 제외.
  • 존과 헤더 부부가 살해했다면 최소한 존의 낚시에 시체가 걸려 끌려 나오도록 처리하지는 않았을터이니 제외.

그러면 결국 정계 진출을 노리고 있지만 과거가 드러나면 위태로울 수 있는 마빈 로스와 에이미 로스 부부만이 남게 되지요.
여기서부터 해미시의 조사 결과와 추리를 이어가면 그런대로 괜찮았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내용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적당한 내용, 묘사, 분량이라 쉽게 읽힌다는 장점만큼은 확실하며 현대적인 캐릭터들도 볼거리이기는 합니다. 비록 추리적으로는 꽝이더라도 현대물에 여사님의 작풍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텍스트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해미시 순경이 마음에 들었기에, 후속권도 읽어볼 생각입니다. '코지 미스터리'라고 분류하고 연애질이나 해 대는 여타 작품들에 비하면 추리적인 부분도 적절하고, 책도 예쁘게 잘 나온 편이니까요.

2005/04/18

삼나무 관 - 애거서 크리스티 / 신용태 : 별점 3점

삼나무 관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용태 옮김/해문출판사

엘리노어 캘리슬은 부유한 친척인 로라 고모가 별채의 딸 메리 제러드에게 유산을 물려줄 지도 모른다는 괴문서를 받고, 서둘러 약혼자인 로디와 함께 고모가 있는 헌터버리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로라 고모가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켜 급사했고, 엘리노어가 전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그러나 약혼자 로디가 메리에게 반해 약혼이 취소되자, 엘리노어는 헌터버리 저택을 팔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지막으로 짐정리를 위해 방문한 엘리노어는 마침 찾아온 메리와 메리와 친했던 고모의 전 간호부 홉킨스 양에게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대접했는데, 메리가 그것을 먹고 죽자 독살범으로 몰려 체포되고 말았다.

그녀의 무죄를 확신한 로라 고모의 주치의 피터 로드는 포와로에게 사건해결을 의뢰하여 포와로가 사건에 뛰어드는데....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중후반기 장편. 포와로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엘리노어 캘리슬 중심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엘리노어의 심리 상태가 1인칭으로 묘사되는게 독특했어요.
중반부까지는 엘리노어를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지는 전개이며, 후반부는 주로 포와로의 활약이 묘사되는데, 이러한 방식은 앞부분에 모든 사건이 서술되고 포와로는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 하나 없이 오로지 독자와 똑같은 공평한 조건에서 추리를 시작하므로 본격 추리물에 딱 맞는 방식이라 생각됩니다.
게다가 종반부에서는 실제 법정에서 배심원들을 상대로 역전극을 펼치기 때문에 포와로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법정 드라마" 적인 요소까지 등장하는 등 이래저래 독특한 느낌을 많이 전해 주는 작품입니다. 

추리적인 부분도 마음에 듭니다. 작은 단서만을 가지고 진상을 꿰뚫어보는 포와로의 추리가 빛을 발하기 때문이죠. 특히 법정물답게 모든 증거가 제출된 뒤 그것을 뒤집는 증거들도 이론적으로 제시되어 이해가 쉬우면서도 합리적이라는 것이 좋았어요. 진상과 진범이 밝혀지는 마지막 부분에서의 임팩트도 상당하고요.

하지만 포와로가 "외국에 있는 많은 친구" 들의 도움을 받아 단서를 모으는 부분은 현실성이 조금 떨어져 보였다는 점. 그리고 전형적인 여사님 특유의 부르조아 숙녀인 엘리노어 캘리슬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반면, 착하고 근면한 메리 제러드가 더 취향이었는데 메리가 피해자가 된다는 점은 좀 아쉬웠습니다. 여사님 작품은 재미도 있고 좋아하지만 부르조아 - 귀족 중심의 편향적인 사고 방식이 자주 옅보이는 것이 시대적인 격차를 느끼게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게 별로 좋지 못한 쪽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추천작입니다. 분위기도 묵직할 뿐더러 여러 서술이나 묘사, 전개방식이 다 독특하고 짜임새 있어서 진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거든요. 지금 읽어도 추리적인 가치는 여전히 높고 말이죠. 별점은 3점입니다.

2005/09/13

부머랭 살인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 신용태 : 별점 3점

부머랭 살인사건 - 6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용태 옮김/해문출판사

영국 웨일즈 지방의 작은 해안도시 마치볼트. 그곳 교구 목사의 아들 바비 존스는 골프를 치던 중에 한 사내의 죽음을 목격한다. 사내가 죽어가며 남긴 말은 "왜 그들은 에반스를 부르지 않았을까?"
바비는 검시심문에서 죽은 남자 알렉스 프리처드의 여동생을 만나 몇가지 정보를 주고 사건을 잊어버리지만 그 직후 바비에게는 이상한 일들이 연달아 발생한다. 급기야는 죽을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된 후 그는 생명을 지키고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마을 제일 귀족의 딸 레이드 프랜시스 더웨트 - 프랭키 와 같이 사나이의 죽음과 관련된 위험 속으로 뛰어들게 되는데...

애거서 여사의 모험소설(?). 두 남녀의 유쾌한 이야기가 시종일관 지루하지 않게 펼쳐져서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다른 정통 추리물에 비한다면 추리적인 내용은 좀 약하지만 사건의 인과관계가 확실하고 복선도 잘 짜여져 있고요. 확실히 여사님이 거장이구나 싶은 느낌이에요.
또 캐릭터들이 굉장히 생생하다는 것이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사악하고 치밀하며 유머스러운 악당 로저의 캐릭터가 정말 대단해요! 독특할 뿐더러 개성이 넘쳐 이 악당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들 정도에요.
프랭키는 제가 싫어하는 여사의 부르조아틱한 취향을 반영한 귀족 딸이라는 설정이지만 그다지 귀족 답지 않은, 오히려 왈가닥 아가씨의 전형처럼 그려져 있어서 부담이 덜하고 목사의 아들 바비와 연결되는 엔딩이 꽤 그럴 듯 하다는 것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여사님이 소일거리삼아 쉽게 쓴 느낌이 강합니다. 마지막 대 위기의 상황에서 바비의 친구 배저가 난데없이 등장해서 상황을 역전시키는 장면이 대표적이죠. 복선이고 뭐고 없이 우연에 의지할 뿐이라 많이 황당했어요.

그래도 짤막하게 킬링 타임용으로 읽기에는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토미-터펜스 부부류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 역시 즐길 요소가 많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원제대로 "왜 그들은 에반스를 부르지 않았을까?"로 출판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전혀 상관없는 "부머랭"이 갑자기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제대로 출판된 다른 출판사 책도 있긴 하지만 해문판이 마음에 드는데, 이런 것들은 앞으로라도 좀 신경써 주었으면 하네요.

2019/10/13

사물들의 미술사 1 : 액자 - 이지은 : 별점 3.5점

사물들의 미술사 1 : 액자 - 8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부르조아의 유쾌한 사생활" 등의 빼어난 미술사, 미시사 저작물로 친숙한 이지은의 신작입니다. 제목 그대로 그림 보호, 장식용 테두리가 아닌 '액자' 그 자체에 집중하는 책으로 모두 여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앞의 세가지 - 겐트 제단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브와트 아 포트레 - 는 특정 작품이 주제이며, 뒤의 세 가지 - 19세기 액자, 반 고흐의 액자, 드가와 카몽도 - 에서는 각 시대별 액자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주제별로 소개해 주고요.

앞의 세 가지 이야기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액자' 에 대한 고찰이라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루벤스가 루이 13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를 그린 작품의 경우, 발표 당시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마르 드 메디시스가 사는 뤽상부르 궁전의 특별한 갤러리에 전시되던 작품들이었다는건 조금 기억에 남기는 합니다.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들은 원래 의도대로 온전히 감상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작품들은 앞으로 VR을 활용하여 원래 의도대로의 감상이 가능하도록 구현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구현되면 구태여 책으로 읽을 내용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다 심도깊은 연구와 미술사학적 의미가 뒷받침되고 있는 뒷 부분 이야기가 더 좋았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그 액자는 그림과 동시에 태어나지 않았다"입니다. 19세기 박물관, 미술관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비로서 액자의 수요가 폭발하여 전형적인 액자가 생겨났다는 내용이지요. 우리가 보는 명화들의 액자는 모두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모나리자'의 액자도 '모나리자' 제작 당시 통용되던 액자이기는 하지만, 다 빈치의 아틀리에를 떠났을 때 '모나리자'와 함께 했던 액자는 아닙니다. 미술사학적으로도 자료가 거의 없어서 연구가 어렵다고 하니 이런게 조연의 설움이겠지요.

그 다음 "반 고흐의 상상의 액자"는 반 고흐 생전 편지 기록을 토대로 반 고흐가 자신의 작품에 모두 특정한 액자를 고려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내용도 아주 흥미롭지만 반 고흐가 언급한대로 해당 작품을 가상의 액자 속에 넣어 보여주는 도판도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또 이를 통해 반 고흐가 얼마나 색채에 깊이 탐닉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액자와 그림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보색의 개념이 반 고흐가 작품에서 추구했던 색채의 효과들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지요. 왜 반 고흐가 '색채의 화가'라고 불리우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고흐의 작품 뿐 아니라 고흐가 이렇게 액자와의 관계를 연구하게 된 계기인 인상파 화가들의 액자들도 함께 소개되어 더욱 만족스럽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19세기의 전형이었던 장대한 액자가 아니라 흰색의, 그림과 비슷한 높낮이의 평평한 액자를 선택했다고 하네요. 기존 액자는 그림이 가상임을 알려주도록 도와주었다면, 인상파의 액자는 그림을 현실과 융화시키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침실" 등 다량의 제라늄 빨간색을 사용한 고흐의 작품들은 모두 빨간색이 다 날아가서 당대의 색채를 구현하지 못한다는데 이 부분에서도 앞서 말씀드린 현대 기술을 좀 빌려보는게 어떨까 싶었어요.

그러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모더니즘을 향한 한 걸음, 드가"는 재미있기는 한데 주제와는 조금 동떨어져서 아쉽습니다. 직접 액자를 디자인하며 액자에 집착했던 드가의 노력이 소개되기는 하는데, 핵심은 드가 작품을 주로 수집했던 거부 카몽도 백작 가문이 유대인이었기에 당했던 비극과 아이러니였던 탓입니다. 드가가 심각한 성차별주의자에 유대인을 미워했던, 인성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인물이라는걸 알게된 건 수확이지만, 좋은 책의 마무리를 담당하기에 적합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카몽도 백작이 온갖 차별과 서러움을 이겨내고 정신 승리를 위해 루브르에 자신의 컬렉션을 기부한 것도 별로 와 닿지 않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는 5점을 주어도 충분하지만 다른 이야기들은 그 만큼은 아니라 조금씩 감점합니다. 그래도 작가 특유의 깊이있는, 발로 뛴 연구와 노력이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액자'에 대해 무언가 고민이라도 해 보았던 컨텐츠는 그동안 "갤러리 페이크"의 한 에피소드 밖에는 접해보지 못했는데 특정 작품이나마 이렇게 분석하고 고민한 결과를 접하니 너무나도 반갑네요.
액자 외 다른 인류 문명, 문화사의 조연들도 하루 빨리 조명받아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받게 되기를, 그리고 이지은 작가의 다음 작품도 지적 흥분과 재미 모두를 가져다 주는 책이기를 바랍니다.

2005/11/15

포기하기 힘든 유혹 - 제프리 아처 / 유진화 : 별점 3점

포기하기 힘든 유혹 - 6점
제프리 아처 지음/하늘출판사
"카인과 아벨"로 알려진 영국 작가 제프리 아처의 단편집으로 전부 12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작가의 단편집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는데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바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 작품들 대부분이 반전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인데 이러한 반전에서 오는 재치와 유머,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이야기 구성은 단편의 교과서를 보는 듯 하더군요. 작품들마다 탁월한 묘사와 설정으로 캐릭터들을 돋보이게 하는 점도 좋았고요.
또 주로 상류 사회를 다루고 있으며, 이야기가 반전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는 오 헨리의 작품을 연상케 하지만 그야말로 미국적인 오 헨리와 비교해 보았을 때 확실히 "영국적"임을 느낄 수 있는 소재와 설정들로 차별화되고 있습니다. 그 외의 작품들도 역사물이나 이국적인 곳을 무대로 한 단편들이라 확실히 소재면에서는 보다 깊이가 느껴지기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오 헨리 최고의 작품 들과 충분히 비교될 만한 작품들이라 생각되네요.

대부분의 단편이 반전의 맛과 여운이 느껴지는 괜찮은 작품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른바 "내가 산 쿠키를 먹는 낯선 인물에게 대항하기 위해 쿠키를 더 빠른 속도로 가루까지 털어먹고 일어섰는데 알고보니 내 쿠키는 내 주머니에 있더라..."라는 유명한 이야기의 원조격 작품인 "깨진 습관" 과 그야말로 "영국적"인데다가 신사의 조건을 웅변하는 "완전한 신사", 독특한 역사물로 괜찮은 상상력을 발휘한 "기적 체험", 예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꽤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으로 반전이 멋졌던 "중국 조각상" 이 괜찮았습니다. 

작가가 영국 명문교 출신으로 본인 스스로 하이 클래스 계층이었던 탓인지 작품들 전체의 소재와 설정이 지나칠 정도로 부르조아 취향이라 좀 거슬렸으며 너무 영국적이라는 점도 감점 요인이기는 하나 독특함, 재미 모두 빼놓을 수 없는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제목대로 "포기하기 힘든 유혹"같은 책이니 주위에서 구하실 수 있다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04/12/15

대열차 강도 - 마이클 크라이튼 : 별점 3.5점

대열차 강도 - 8점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명지사

대열차강도

상류 계급의 신사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에드워드 피어스의 정체는 사실은 범죄자이다. 그는 신사 생활의 친구인 은행 지배인 헨리 파울러를 통해 얻은 정보 등을 종합하여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한 영국 군인들의 봉급으로 지불되는 금괴 1만 4천 파운드를 훔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계획의 성공을 위해 기관지가 좋지 않은, 하지만 뛰어난 열쇠 위조공인 에이거를 끌어들이며 금고의 열쇠 4개중 2개의 복제를 위해 "스네이크스맨" 클린 윌리를 탈옥시켜 합류시킨다. 
충직하며 잔인한 마부 바로우와 피어스의 정부이자 미인이며 뛰어난 배우인 여인 미리엄 등으로 이루어진 일당은 열쇠를 모두 복제하고 완벽한 계획을 세우지만, 다른 도난 사건으로 열차의 경비가 강화되게 되자 피어스는 스스로 위험을 짊어지고 모든 난관을 뚫고 계획을 성공시킨다. 하지만 윌리의 배신으로 결국 검거되게 되는데....

마이클 클라이튼의 초기작으로 실제 영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고 합니다.
흡사 영국 신사의 전형으로 보이는 주인공 에드워드 피어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필리어스 포그가 생각나기도 하더군요) 의 치밀한 계획, 그리고 발생하는 여러 난관을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뚫고 나가는 담대함은 클라이튼의 흡입력 있는 구성으로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매력적인 작품이에요.

재미에 더해 빅토리아 왕조 시절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도 압권입니다. 철도 전성시대에 대한 자세한 해설 및 당대 최대의 도시였던 런던에 대한 묘사, 부르조아 계급 및 하층 계급에 대한 설명, 거기에 여러 세부적이고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지식까지 자연스럽게 집어넣고 있으며 (ex : 매독에 걸리면 숫처녀와 사랑을 하면 낫는다는 당시의 사고방식 등) 당시 크리미아 전쟁 및 인도 세포이 여단의 반란 같은 당대 대 사건들도 적절히 인용하고 있습니다. 당대에 쓰여진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에요. 이러한 묘사와 해설 덕분에 지적 만족감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좋은 점이고요.

하지만 거의 후반부까지 이르는 피어스 일당의 치밀한 계획 및 그 성공에 비해 체포 자체는 "제보"에 의한 것이 약간 시시했으며 검거 후 변호 활동이나 탈옥을 위한 노력은 별로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은 아쉬웠습니다. 주인공 피어스의 재치와 위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거든요.
그래도 결과적으로 주인공이 승리하는 구도로 그려지는 결말은 만족스럽습니다. 유사한 구성으로 주인공의 범죄 계획에서 실행에 옮기는 단계까지를 숨가쁘게 그린 "앤더슨의 테이프"는 주인공이 결국 실패한다는 결말이 개인적으로 석연치 않았고 뭔가 아쉬웠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당이긴 하지만 집요한 노력의 성과 덕분에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은 나름의 해피엔딩이라 생각되네요. 피어스는 이 계획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 탁월한 스토리텔러로서의 마이클 크라이튼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최근 SF쪽으로 많이 치우치고 있지만 범죄 스릴러에도 탁월한 만큼 앞으로는 이쪽 분야의 걸작도 계속 써 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