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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6

대실 해밋 - 대실 해밋 / 변용란 : 별점 2.5점

대실 해밋 - 6점
대실 해밋 지음, 변용란 옮김/현대문학

하드보일드의 거장 대실 해밋이 쓴,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 단편집입니다. 작가 인생 초기작들로 유명한 컨티넨털 탐정사 탐정이 등장합니다. 

대체로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우며,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과도기적인 느낌을 전해줍니다. 몇몇 작품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배신의 거미줄" 

외과의사 에스텝 박사가 죽고 부인이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다. 박사가 숨겨왔던 첫 번째 부인이 찾아온 직후 사건이 일어났던 탓이었다. 변호사 리치먼드의 의뢰로 탐정은 의사가 죽기 전 보냈다는 편지를 찾아 나섰다. 첫 번째 부인을 미행한 끝에 탐정은 사건 배후에 사기꾼 제이콥 레드위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제이콥을 미행하는 또 다른 인물의 존재를 알아챘는데...

"의심이 든다면 미행해라"라는 말 처럼 미행을 통한 단서 찾기와 그 외 탐정 사무소를 통한 조사 및 다른 탐정들과의 분담과 협력 등 탐정의 진짜 업무가 어떠한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탐정으로 일했던 대실 해밋의 생생한 경험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행 과정을 통해 당대 샌프란시스코의 여러 거리와 풍경들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좋았고요. 이 때부터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는건 처음 알았네요.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종의 "바꿔치기"트릭이 사용된 덕분입니다. 에스텝 박사는 가짜로, 진짜 에스텝 박사의 의사 면허를 제이콥에게서 구입하여 의사 행세를 해 왔던 겁니다. 첫 번째 부인이라며 나타났던건 진짜 에스텝 박사의 부인이었고요. 제이콥은 에스텝 박사를 수십년 동안 뜯어먹다가, 크게 한 탕 저지를 생각으로 사건을 꾸몄던겁니다. 

제이콥의 계획도 괜찮았어요. 그는 거액을 요구하면, 박사가 자살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부인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그는 유산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의도는 아니었지만, 현 부인이 남편을 살해했다고 인정된다면 유산 전부를요!

그러나 계획을 밝혀내는데 있어서는 추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탐정이 제이콥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단서를 잡은 뒤, 협박해서 그의 입으로부터 진상을 듣는게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행과 감시로 진상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허나 제이콥이 탐정에게 진상을 술술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는게 문제에요. 증거품인 에스텝 박사의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순순히 내 준 것도 납득하기 어렵고요. 탐정과 제이콥 모두 살인 혐의를 입증하기 힘들다는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제이콥이 이렇게까지 설설 길 이유는 없잖아요? 도주하던 제이콥이 오가르 경위에게 사살당한다는 마지막 장면도 허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탄 얼굴"

탐정은 밴브룩의 두 딸 가출 사건 조사 중 잠깐 만났던 코렐 부인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둘째딸 루스 밴브룩마저 시체로 발견되었고 탐정은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을거라 확신했다. 탐정과 팻 형사의 조사 결과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유사했던 여성들이 자살했던 사건들이 여러 건 있었고, 모두 레이먼드 엘우드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는데....

실종되고, 자살했던 여성들 사건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관계된 사건을 모두 조사해 보겠다는 수사 방침에 대한 아이디어는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하드보일드라기 보다는, 액션 모험 활극에 가까운 탓입니다. 탐정과 팻 형사가 레이먼드 엘우드가 자주 방문했던 저택에 침입한 이후부터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저택에서 사이비 종교와 마약에 빠진 여자들이 난교 파티를 벌이던 사진을 찍어서 협박해 왔다는 진상도 허무하며, 탐정이 팻을 설득해서 주요 증거물인 사진을 모두 소각한다는 결말도 낭만적인 모험 활극과 다를게 없습니다. 팻의 백만장자 아내도 사진에 찍혀있었다는 약간의 반전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기 때문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중국 여인들의 죽음"

릴리언 샨은 하녀 한 명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취소하고 급작스럽게 귀가했던 날, 낯선 중국인 청년에게 습격당했다. 릴리언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하녀는 죽고 말았고,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은 지하실에서 요리사 완란의 시체도 발견하였다. 탐정은 사건을 의뢰받은 뒤 정보를 캐내다가 사건 배후에 어빙턴 호텔 소유주 코니어스와 차아니타운의 실력자 창리칭이 관계되어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차이나타운을 무대로 하는데 단지 이국적인 배경에 그치는 건 아닙니다. 중국을 배신하고 한 몫 단단히 잡은 이민자의 딸이 주인공 중 한명이며,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중국인 독립운동가의 무기 밀수에 편승해서 악당들이 한 몫 잡으려고 했었다는 이야기의 핵심 설정과 전개 모두가 설득력있게 활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릴리언의 저택은 해변과 맞닿아 있었는데, 밀수를 위해서는 해변과 맞닿아 있는 저택이 필요했다는 진상도 그럴듯했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습니다. 탐정이 정말로 하는게 별로 없고 전개는 우연과 억지에 의한게 많은 탓입니다. 탐정이 조사원 중 한명이었던 마약중독자 얼이 수상하다는걸 깨닫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걸 알아챈건 순전히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하니까요. 동공? 눈빛? 모두 설득력이 약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필요할 때마다 만나서, 필요한 증언을 얻는다는 전개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휘슬러가 일본군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조작했던 사진을 결정적 순간에 주머니에서 꺼내는 장면처럼요. 탐정이 이 사진을 가지고 다닐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의뢰인인 릴리언을 무사히 사건에서 빼내고 휘슬러를 포함한 악당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결말은 전혀 하드보일드스럽지 않더군요. 릴리언은 선량했고 선의에 가득찬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구해주는 기사가 활약하는 영웅담이자 낭만적인 모험물에 더욱 가깝습니다. 아울러 당시 중국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판타지를 반영한 듯한 창리칭 저택의 복잡한 구조와 기묘한 보디가드들, 은밀하면서도 잔혹한 공격과 미모의 노예 소녀 슈슈에 대한 묘사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책을 계속 읽어야 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지루했던 졸작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쿠피냘 섬의 약탈" 

탐정은 결혼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쿠피냘 섬에서 열린 헨드릭슨 가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날 밤, 폭풍우와 함께 강도단이 섬의 은행과 보석상을 습격했다. 결혼식 하객 중 한명이었던 러시아 공주로부터 이 사건 소식을 들은 탐정은, 선물을 지키는 임무를 헨드릭슨 저택 집사와 운전수에게 맡기고 현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강도단의 도주를 막는데는 실패했고, 헨드릭슨 저택으 복귀 후에 집사와 운전사가 살해당했으며, 결혼 선물은 도난당했다는게 밝혀지는데....

오래 전에 읽었었던 작품인데 내용 자체를 잊어버려서 처음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초, 중반부까지는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완전 무장한 강도단과 맞서 싸우는 탐정의 활약을 그린 영웅담으로 보였는데, 실제로는 정통파 추리물과 하드보일드가 잘 결합되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말이지요. 

특히 합리적인 추리가 볼만합니다. 탐정은 강도들이 외부에서 왔다면 일당과 무기 운반을 위해 자동차나 배가 필요했을텐데, 섬 주민의 자동차와 배를 탈취했던 상황에 주목합니다. 그 외의 여러가지 단서를 조합하여 러시아 장군과 공주 일행이 강도라는걸 알아내고 맙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망명한 후,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공주 일당의 범행 동기도 시대를 감안해보면 충분히 그럴듯했고요. 이런 추리를 일종의 추리쇼를 통해 선보이는 장면은 정통파 고전 본격 추리물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리고 추리쇼에서 이어지는, 돈 보다 범죄를 해결하는게 더 재미있다며 뱀 같은 공주의 유혹은 무시하고, 심지어 여자를 쏘지 않을거라 믿으며 도망가려는 공주 다리를 쏘아 맞추는 탐정의 모습은 고전 본격 추리물을 넘어선, 하드보일드 장르의 도래를 알리는 명장면이었다 생각됩니다. "난 장애인한테서도 목발을 훔쳤던 사람 아닌가?"라는 말도 희대의 명대사였고요. 구 시대의 화려했던 부르주아들은 모두 현실에 몰락해 버렸고, 이들을 악전고투끝에 살아남은 플로레탈리아가 짓밟는 구성은 시대가 변했음을 잘 느끼게 해 주네요. 마지막에 우연히 사건에 휘말렸던 잔챙이 범죄자 플리포를 탐정과 공주가 서로 자기 편으로 만들려 설득하는 클라이막스도 재미있었습니다. 작위적이라는건 부인하기 어렵지만요.

물론 공주가 탐정을 살려둔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큰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가장 위협이 될 인물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한데 말이지요.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 여명기, 장르의 초석을 다졌을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크게 한탕"

탐정은 어느날 밤 술집에 패디 더 맥스, 블루포인트 밴스, 해피 짐 해커, 빅 버드 레드 오리어리 등 유명한 범죄자들이 모여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맨스 은행이 습격당할거라는 정보를 전해 준 정보원 비노가 살해당한 다음날 아침, 시맨스 내셔널 은행과 골든게이트 신탁회사가 약탈당했다. 무려 150여명의 프로 범죄자들이 도로를 봉쇄하고 20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현금 수백만달러를 훔쳤고, 경찰 포함 30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던 대참사였다. 그런데 강도 일당 수십 명의 시신이 차례로 발견되기 시작했고, 현장에서 죽은 강도 중 한 명이 '빅 플로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생존자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쫓던 탐정은 밴스를 비롯한 다른 강도들의 습격에서 그를 데리고 겨우 탈출했다. 부상당했던 레드 오리어리가 탐정을 이끈 곳은 빅 플로라가 몸을 숨기고 있는 은신처였다....

백명이 넘는 강도단, 수백만 달러의 강탈, 수십명의 죽음 등 어처구니없는 스케일을 보여주는 범죄물. 은신처에 있던 연약해 보였던 노인이 사건의 흑막 파파도풀로스였으며, 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기에 무사 탈출을 위해 탐정을 이용했다는 반전은 괜찮았습니다. 탐정사무소 소장인 '영감'이 사건 배후에는 굉장히 머리 좋은 인물이 있을거라고 말했었고, 빅 플로라가 탐정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 등 이런저런 복선이 잘 배치되어 있던 덕분입니다.

하지만 설정에 비하면 내용은 비교적 수수한 편입니다. 탐정도 레드 오리어리를 찾아내 뒤를 쫓는 것 말고는 하는게 없어요. 빅 플로라의 은신처에서 벌이는 목숨을 건 연극도 유치했고요. 빅 플로라가 노인을 하인 대하듯 하는 장면같은 억지도 눈에 거슬렸습니다. 빅 플로라가 우두머리이며 노인은 거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유능한 탐정마저도 속아넘어간 것에 대해 변명거리를 만들 속셈이었을텐데,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였어요. 이런 점에서 하드보일드 추리물로 건질만했던건 별로 없었던 작품입니다. 단순 화끈한 마쵸 모험 액션물에 가까운 이야기였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이자면 거액을 강탈한 뒤, 공모자들을 죽이고 독차지하려고 했던 계획을 망쳐버린 사랑꾼 빅 레드 오리어리를 징벌하지 않은 이유를 잘 모르겠네요. 파파도풀로스 입장에서는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피 묻은 포상금 106,000달러" 

탐정에게 패디 더 멕스의 동생 톰-톰 캐리가 찾아와 파파도풀로스에게 걸려있는 거액의 현상금에 대해 물어보았다. 몇 건의 살인과 습격이 이어진 끝에, 탐정들과 캐리는 백만장자 뉴홀 저택에 은신하고 있던 파파도풀로스를 잡는데 성공하는데...

시원치않았던 전편에서 이어지는 후편인데, 이 작품은 아주 좋았습니다. 탐정의 냉혈한스러운 면모가 빛나거든요. 탐정은 신참 탐정 잭이 파파도풀로스의 꼬임에 넘어가 한 패가 되었다는걸 진작에 눈치챘습니다. 아마도 그리스인 거주지 습격 사건 때 눈치챘겠지요. 그래서 마지막 습격 때 잭을 일부러 대동한 뒤, 모든 진상을 까발려서 잭은 캐리의 손에 의해, 캐리는 다른 탐정이 사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배신자를 징벌하고 탐정 사무소의 평판을 지켜내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 거지요. 이 와중에 탐정 사무소 다른 탐정들을 동원하고, 잭에게 뒤통수를 맞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안배를 하는 꼼꼼함도 볼만했고요. 

잭이 배신하게 된 계기가 빅 레드 오리어리의 연인 낸시가 사실 백만장자 뉴홀의 딸이었다는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반전도 상당한 놀라움을 가져다 준 좋은 설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끝판왕격인 파파도풀로스의 허무했던 최후는 다소 아쉬웠습니다. 탐정이 잭의 배신을 언제 눈치챘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것도 설명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거에요. 낸시의 이상했던 시선, 잭의 이상했던 눈빛은 증거가 될 수 없었는데 말이지요. 잭이 별다른 증거도 없는데 스스로 자포자기해서 자백을 한 것도 다소 편의적인 전개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정교함과 냉혹함이 잘 살아있는 하드보일드 여명기를 대표할만한 수작이라 생각되네요.

"메인의 죽음" 

메인이 출장을 다녀온 날 새벽, 2인조 강도가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지갑 안의 2만 달러를 강탈해 사라졌다. 현장 근처에서는 흉기인 권총과, 여성 손수건이 들어있는 지갑이 발견되었다. 메인의 보스 군겐에게 고용된 탐정은 손수건이 군겐의 젊은 아내 것이며, 아내의 하녀가 범죄자와 어울린다는걸 알아낸 뒤, 아내로부터 사건 진상을 고백받았다. 그녀와 메인은 불륜 관계였으며, 2만 달러는 불륜을 저지르던 당일 오후에 강탈당했던 것이었다. 범인은 하녀의 애인이었다.

젊은 아내를 옭아맬 속셈으로 사건 수사를 의뢰한 군겐,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보스의 아내까지 건드리다 파멸한 메인,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당당한 젊은 아내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묘사는 재미있었습니다. 이들이 얽히고 섥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든 건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마음에 들었고요. 불륜 남녀가 돈을 빼앗긴걸 쉽게 털어놓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던 범인들의 잔꾀도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하지만 범인 일당의 부주의한 행동이 미행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진상을 고백받은 형태로 제공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탐정 수사' 물인데, 미행으로 진범이 누구인지 바로 밝혀내는건 너무 쉬운 전개였습니다. 메인이 좌절한 나머지 자살했고, 보험금 때문에 메인의 아내가 이를 강도 사건으로 꾸몄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보스에게 사실대로 고백하는게 훨씬 낫다는 점에서,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메인을 죽이고 강도 살해 당한 것 처럼 꾸몄다는게 더 타당해 보이는데, 왜 이렇게 마무리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메인의 아내를 비롯, 군겐의 아내까지 사건에 관련 여성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일종의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던걸까요? 여튼,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그래도 수사물로는 괜찮았던 깔끔한 소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국왕 놀음" 

탐정은 미국인 청년 라이오넬 그랜덤을 찾아 유럽의 소국 모리비아로 향했다. 성인이 되자마자 어머니의 과보호로부터 탈출한 그는, 유럽에서 무려 3백만달러나 되는 돈을 현금화했다. 탐정은 라이오넬이 군대를 장악한 실력자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모리비아에 혁명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3백만 달러는 혁명을 위한 군자금이었다.

유럽 소국 모리비아를 무대로 한 일종의 군웅물이랄까, 여튼 왕이 되려는 사람들의 활약을 그리고 있는 작품. 설정은 기발했고, 왕위를 놓고 여러 세력이 벌이는 암투가 짤막한 분량안에서 잘 그려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았어요. 일단 에이나르손 대령이 왜 미국인을 끌어들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요. 군대를 장악했고, 인기도 많았다면 스스로 혁명을 일으켜서 왕이 되면 그만이었을텐데 말이지요. 3백만 달러는 분명 거액이지만, 일국의 왕이 된다면 그 정도 돈이 문제가 될까요? 

대통령 비서 마흐무드가 에이나르손 대령과 함께 혁명을 모의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현 대통령의 통치를 못마땅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한들, 절대 권력을 가진 대통령 비서가 이를 쉽게 포기하고 혁명에 바로 몸을 맡기고 급작스럽게 에이나르손을 암살하려고 한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에이나르손이 군대를 장악하여 기껏 혁명을 성공시켰지만, 탐정의 총에 굴복해서 순순히 라이오넬의 대관식을 치룬 것도 그의 야망과 노력을 생각하면 많이 허무합니다. 최후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낭만적인 중세 시대 모험 활극이라면 모를까, 20세기를 무대로 한 이야기에는 여러모로 설득력이 떨어지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파리잡는 끈끈이" 

뉴욕의 명문가 햄블턴 가문의 막내딸 수는 범죄자와 도망친 후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1년 후, 돈 1,000달러를 요구하는 전보가 날라왔고 탐정은 돈을 가지고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이는 사기꾼 홀리 조의 계획으로 수는 가짜였었다. 

홀리 조로부터 캐낸 수와 베이브의 거처를 찾은 탐정은 그곳에서 수의 시체를 발견했다. 부검 결과 수는 만성 비소 중독으로 죽었다는게 밝혀졌다. 비소는 파리잡는 끈끈이에서 추출한 것이었다. 다시 협잡꾼 홀리 조를 심문해서, 그가 수와 도주할 계획이었다는 이야기를 듣지만 갑자기 나타난 베이브가 홀리 조를 사살하고 달아나는데....

부잣집 철부지 딸의 비참한 죽음, 얽히고 섥혀 서로를 죽이고 마는 애증 관계가 그려진 정통 하드보일드 작품입니다. 

그런데 탐정이 베이브를 추격해서 사로잡는 부분은 액션 활극 느낌도 강하지만, "누가 수를 죽였나?"라는 후더닛 측면에서도 볼만한 추리물입니다. 일단 홀리 조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마찬가지인 수를 죽일리 없었어요. 수와 도망칠 계획이었으니까요. 베이브도 오랫동안 비소를 수에게 먹여 죽일만한 인물은 아니었고요. 그렇다고 수가 자살했다고 하기에는, 만성 비소 중독은 여러모로 이치에 맞지 않지요. 그렇다면 진상은? 수는 비소를 오랫동안 조금씩 먹어 내성을 키운 뒤, 한번에 많은 양의 비소를 함께 먹어 베이브를 해치울 생각이었던겁니다. "맹독"에도 나오는 트릭이지요.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 소장 영감이 이건 체질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비웃는 장면, 그리고 파리잡는 끈끈이가 숨겨져 있던 "몽테크리스토 백작"에 이 방법이 나와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전개가 아주 매끄럽지는 않아요. 베이브가 마침 탐정이 심문하던 도중에 나타나 홀리 조를 사살했다는 것도 부자연스러웠고, 애초에 수와 조가 베이브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깔끔하게 사살하는게 나았을겁니다. 비소 내성을 키워 독살하려 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범행을 저지른다고 살인죄가 덮이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추리적인 부분에서 볼만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합니다. 이전 리뷰에서도 그 부분을 좋게 언급했었지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1/02/14

이름없는 사나이 (결정적 증거 중) - 로드리게스 오토렌기 (1895)

 <<1>>

사무실에 있던 번스 씨에게 심부름꾼 소년이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성함은?"

"없는데요!"

"그럴리가. 그건 이름을 대지 않았다는 얘기잖아. 이름은 있기 마련이지. 하여튼, 들어오시라고 해."

곧바로 손님이 들어왔다. 그는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말했다.

"탐정 번스 님 맞으시죠?"

"네, 제가 번스입니다."

탐정은 대답했다.

"성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 그러고 싶습니다만..."

손님은 계속했다.

"그게 생각이 나지 않아요."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번스 씨의 눈이 반짝였다. 재미있을 듯한 사건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제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제가 누군지 알아내려고요. 다 큰 어른이니 직업이나 가족 등 과거가 있을텐데, 기억이 텅 비어 버렸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렇게 되었더라고요."

"저런."

"그래도 다행히 머리는 또렷한 편이라서요, 명탐정에게 의견을 묻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모로 수소문한 끝에 당신을 찾아오게 된 겁니다."

"매우 재미있군요. 아, 이건 제 관점입니다. 당신에게는 불행한 사건이지요. 하지만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사건들은 이미 많이 기록되어 있거든요. 일단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조만간 기억은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올 거에요. 그래도 수수께끼는 빨리 풀어 버리는 게 좋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좀 폐를 끼치겠습니다. 몇 가지 질문에 대답 부탁드립니다."

"네, 뭐든지 괜찮습니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대답하겠습니다."

"우선, 당신은 뉴욕에 살고 계십니까?

"전혀 모르겠어요."

"저를 찾아 가라는 말은, 누구로부터 들으셨나요?"

"월도프 호텔의 종업원입니다. 어젯밤에 거기에 묵었거든요."

"제 주소도 호텔 종업원에게 들었겠군요. 여기까지 어떻게 갈 수 있는지, 방법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나요?"

"아, 아니요. 신기하네요. 확실히 여기까지 어렵지않게 왔네요. 이건 중요한 사실이지요, 번스 씨?"

"그렇지요. 뉴욕에 대해 잘 안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곳에 살고 계신지 아닌지가 더욱 중요하겠지요. 호텔 숙박부에는 뭐라고 쓰셨었나요?"

"M.J.G, 레밍턴, 시티."

"그렇다면 레밍턴이 당신 이름이겠군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식사가 끝나고 종업원이 두 번이나 그 이름으로 불렀는데, 저는 로비를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어떤 남자분 한 명이 어깨를 두드리더니 종업원이 부르고 있다고 알려주었죠."

"그냥 지나쳤다...."

"네, '레밍턴'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 이름이 아닌 것 같아서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종업원에게 '왜 레밍턴이라고 부르는 거지?'라고 물어보았습니다만, 종업원은 '그렇게 쓰여 있어서요.'라고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 뒤 종업원이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보길래, 대충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지요."

"호텔에 짐은 없었나요?"

"하나도요. 가방도 없었습니다."

"주머니에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습니까? 편지 같은?"

"찾아보았는데 아무것도 못 없었습니다. 그나마 지갑은 있더군요."

"돈은요?"

"500달러 정도."

번스 씨는 테이블로 돌아앉더니 종잇조각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러는 사이 의뢰인은 금으로 된 회중시계를 꺼내 자판을 힐끔 쳐다본 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그 찰나 번스 씨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멋진 시계군요. 그런데 좀 특이하게 생겼네요. 제가 오래된 회중시계에 관심이 많거든요."

의뢰인은 순간 어리둥절해 했지만, 회중시계를 넣으며 답했다.

"별로 특이한 건 아닙니다. 평범한 유품일 뿐입니다. 제가 지금 가진 것 중 가장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제 사건 말입니다. 번스 씨, 언제쯤 제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름도 모른채 이렇게 사는 건 정말이지 별로거든요."

"물론 그렇겠지요."

탐정은 말했다.

"최선은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단서가 전혀 없네요. 결과가 어떻게 하면 될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48시간이면 충분할 겁니다. 그때 쯤이면 뭔가 발견했을 것 같거든요. 모레, 열두 시 정각에 다시 방문해 주시겠어요?"

"상관없습니다. 그때 제가 누군지만 알려준다면요. 그리고 제가 누군지 알려준다면, 당신은 말 그대로 명탐정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는 일어서서 떠나려 했다. 그 순간 번스 씨는 발로 테이블 아래 단추를 눌렀다. 부하에게 의뢰인을 몰래 미행시키기 위한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었다. 번스 씨는 미행 준비가 갖추어지도록 의뢰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실 건가요, 레밍턴 씨? 진짜 이름을 찾을 때까지는 이렇게 불러도 되겠죠?"

"네, 그렇게 하시죠. 48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그래, 관광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네요. 산책하기 딱 좋은 날이니까요. 센트럴 파크를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관광 같은 게 좋지요. 기억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다른 어떤 일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 당연히 직업을 얻거나, 장사 같은 걸 할 수야 없겠죠."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상품을 주문했다고 칩시다. 레밍턴이라는 이름으로요. 그렇다면 나중에 진짜 신원이 돌아왔을 때, 사기꾼으로 체포될 수도 있어요."

"오, 그런 건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제 입장은 생각보다 심각하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틀 동안 관광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확실히 가장 안전하겠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약속한 날에 뵙지요. 행운을 빕니다. 혹시라도 빨리 당신 신원을 확인한다면, 호텔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는 인사말과 함께 번스 씨는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의뢰인이 방을 나설 때까지, 책상 위 종이 조각에 정신이 팔린 척했다. 하지만 의뢰인이 떠나자 곧바로 서랍 속에서 벨이 울렸다. 의뢰인이 건물 밖으로 나갔다는 뜻이었다. 번스 씨는 서둘러 다른 옷으로 갈아 입었다. 머리 색깔도 바꿔서 번스 씨임을 알아보려면 한참을 바라 보아야 할 정도였다.

번스 씨가 거리에 나왔을 때, 의뢰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번스 씨는 건너편 건물 현관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파란 펜으로 '북쪽'이라고 쓰여 있었다. 번스 씨는 북쪽으로 향한 뒤, 다음 모퉁이 현관을 조사했다. 그곳에는 '오른쪽'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의뢰인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려 주는 표시였다. 번스 씨가 미행에 나설 때 도움이 되도록, 부하에게 미리 알려 놓은 방법이었다. 번스 씨가 두 번째 표시에 도착할 때쯤이면, 부하가 근처에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역시 예상대로였다. 번스 씨는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두 블록 정도 나아간 뒤, 쉽게 부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직접 의뢰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미행하기 시작했다.

의뢰인은 번스 씨와 이야기를 나눈 대로, 관광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센트럴파크에 도착한 뒤, 5번가 쪽 문으로 들어가 동물원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원숭이 산을 관람하는 인파에 섞여 원숭이들을 바라보았다. 번스 씨는 몰래 의뢰인 뒤로 다가가 그의 웃옷 옷자락에서 손수건을 재치 있게 뽑아낸 뒤, 재빠르게 자신의 손수건과 바꿔치기 하였다.

<<2>>

다음날 정오 전, 번스 씨는 서둘러 5번가 호텔 열람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쪽에 훌륭한 마호가니로 만들어진 작은 별실 세 개가 있었다. 별실은 윗부분에 유리가 끼워진 이중문으로 입실할 수 있었다. 유리는 노란 비단 장막으로 장식되었고, 중간에 방 번호가 쓰여 있었다. 보통 별실은 전화실로 사용되곤 했다. 사용자가 원하면 문을 꼭 닫고 외부 소음과 차단된 채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번스씨는 담당자에게 이야기하고 5번 방으로 향했다.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리로이 미첼 씨가 열람실로 들어 왔다. 그는 바쁜 표정으로 서류, 쪽지를 훑어보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 뒤, 1이라고 적힌 별실에 들어 갔다. 10분쯤 지나 별실에서 나온 리로이 미첼 씨는 요금을 지불하고 호텔을 나섰다. 번스 씨도 뒤따라 별실에서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번스 씨는 미첼 씨를 뒤쫓는 대신, 열람실 옆문을 통해 23번가로 나왔다. 그곳에서 고가 역을 지나 중심가로 향한 번스 씨는, 20분 뒤 미첼 씨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하인이 나와 주인은 부재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점심 때에는 귀가하시겠지?"

탐정은 물었다.

"그렇습니다."

"미첼 부인은 집에 계신가?"

"안 계십니다."

"로즈 양은?"

"계십니다."

"아! 그럼 기다리지. 명함을 전해 주지 않겠나?"

번스 씨는 호화로운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잠시 뒤 미첼 씨의 양녀 로즈 양이 응접실에 나타났다.

"아빠가 없어서 죄송해요, 번스 씨"

소녀가 말했다.

"그래도 기다리시면 점심 식사에 맞춰 돌아오실 거에요."

"고마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생겨서 로즈 양 아버지를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요."

"재미있는 사건인가요, 번스 씨?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 유감스럽게도 이야기해 드릴 만한게 아닙니다. 며칠 전에 로즈 양 아버지가 자전거를 사고 싶다고 말씀하신 것 때문에 찾아 왔습니다. 어제 우연히 최신형 자전거를 봤는데,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에 최고라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아직 미첼 씨가 자전거를 사지 않으셨다면,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 알려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아쉽지만, 너무 늦었네요. 아빠는 벌써 자전거를 사버렸거든요."

"정말입니까? 어떤 디자인의 제품인가요?"

"전혀 모르겠지만, 보고 싶으시다면 아래 홀로 가시면 돼요. 거기 놓여 있어요."

"아닙니다. 별 의미가 없네요. 미첼 씨가 갖고 싶은 자전거를 발견하고 사셨다면, 제가 구태여 다른 자전거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요. 구매를 후회하게 되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럴까요?"

"아, 그래도 홀로 내려는가 보고 싶군요. 식당으로 안내해주시겠어요? 미첼 씨가 사냥했다고 자랑한 사슴 박제를 보고 싶어졌거든요. 박제사로부터 돌려받으셨죠?"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쪽으로 가시면 돼요."

두 사람은 식당으로 내려갔다. 번스 씨는 사슴 박제와 미첼 씨의 사격 솜씨를 칭찬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홀에 놓여 있는 자전거를 관찰했다. 그 사이 로즈는 식당의 블라인드를 열고 있었다. 그 뒤 두 사람은 응접실로 돌아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미첼 씨가 돌아오지 않은 탓에, 번스 씨는 더 기다릴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떠나면서 로즈 양에게 말했다.

"미첼 씨에게 내일 정오에 제 사무실에서 보자고 전해 주십시오. 꼭이요."

<<3>>

다음 날, 약속 시각에 맞춰 레밍턴 씨는 번스 씨의 사무실에 찾아왔다. 탐정은 사무실에 있었다. 리로이 미첼 씨는 몇 분 전 막 도착한 참이었다.

"레밍턴 씨에게 들어 오시라고 말해줘."

번스씨가 심부름꾼 소년에게 말했다. 의뢰인이 사무실에 들어왔다. 그가 미첼 씨를 보고 놀라기 전에, 번스 씨가 말했다.

"미첼 씨, 이쪽은 당신을 만나고 싶어했던 신사분입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모티머 J. 골디 씨입니다! 스포츠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G.J. 모티머로 알려진 단거리 자전거 경주 챔피언이지요. 바로 최근 400m 트랙에서 1분 56초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1마일을 완주했습니다."

번스 씨는 두 손님을 향해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첼 씨는 몹시 흥분했으며, 의뢰인은 진짜로 놀라 어안이 벙벙하며 번스 씨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의뢰인은 의자에 쓰러지듯 앉으며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내셨나요?"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탐정은 대답했다.

"당신의 과거도 자세히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내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기억이 돌아왔다면요."

번스 씨는 미첼 씨를 향해 무언가 짐작된다는 듯 윙크했다. 미첼 씨는 한바탕 폭소를 터트린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게 좋겠어, 골디. 번스 씨는 우리 힘으로는 어림도 없군."

"하지만 어떻게 알아내셨는지는 꼭 알고 싶네요."

골디 씨가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꾸민 수수께끼를 이렇게나 빨리 해결할 수 있었나요?"

"기꺼이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번스 씨가 말했다.

"제일 먼저, 이쪽 신사 레밍턴 씨가 이틀 전에 저를 찾아와서 기억을 잃었다고 말했지요. 저는 듣자마자 의심했습니다. 그래도 레밍턴 씨가 제 의심을 깨닫지 못하도록 노력했어요. 이런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식으로요. 이건 당신이 한 말을 제가 믿는 것 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름 마저 잊어버린 사람이 잊어버린걸 이해한다? 이건 믿기 힘들죠. 저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이름까지 모두 잊어버리는 일은 있겠지만요."

"대단하군, 번스 씨."

미첼 씨가 말했다.

"그렇게 빨리 속임수를 의심하다니, 확실히 매우 날카롭네."

"뭐 그 때는 수상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한 건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을 뿐이지요. 그래서 그 후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곧 자기가 누군지는 잊어버렸는데, 뉴욕을 기억하고 있다는걸 알아챘습니다. 별다른 안내 없이 이곳에 왔다고 시인했거든요. 이 역시 간과할 수 없었지요."

"기억납니다."

골디 씨가 답했다.

"네, 뉴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죠? 제가 이걸 확신한 건, 센트럴 파크에서 하루를 보낸다고 말한 뒤, 이곳을 나가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센트럴 파크로 향하는 걸 보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저를 미행했다는 말인가요? 뒤에 아무도 없었는데요."

"네, 미행했습니다."

번즈 씨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처음에 당신 뒤를 쫓은 건 제 부하입니다. 센트럴 파크에서는 제가 미행했지만요. 그리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저의 추리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호텔 명부에 M.J.G. 레밍턴이라고 쓰셨다고 하셨지요. 이게 가장 큰 단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잠시 뒤, 당신은 회중시계를 꺼냈었지요. 저는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책상 거울을 통해 회중시계 뚜껑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걸 알아차렸습니다. 제가 뒤돌아보면서 시계에 관해 물었는데, 당신은 부랴부랴 주머니에 다시 넣으며 그냥 평범한, 낡은 유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요?" 

"저런, 골디, 완전히 실수했구먼."

미첼 씨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바보 같은 실수였네요."

골디 씨도 웃었다.

"자 이렇게,"

번스씨가 계속했다.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추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에 또 두 가지를 알아챘습니다. 첫 번째는 조끼에 붙어 있는 자전거 배지였습니다. 미국 자전거 연맹 기장이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지요."

"오!"

미첼 씨가 외쳤다.

"이럴 수가, 골디, 이건 정말이지 완전한 실수라고!"

"배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골디가 말했다.

"하지만"

탐정은 계속했다.

"다리를 꼬고 있을 때, 신발 밑창이 움푹 파인 걸 보았기 때문에 배지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당신이 자전거 선수라는걸 추리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겁니다. 그럼 이제 이름과 그 의미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정말로 당신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면, 호텔 명부에 쓴 이름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는건 불가능했을 거에요. 그러나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에는, 선택한 이름 역시 의도가 있다고 추리했지요."

"오! 재미있는 곳에 접어들었는걸"

미첼 씨가 말했다.

"선택한 이름은 아무리 보아도 묘했어요. M.J.G라고 이니셜 3개를 쓴 게 특히 이상했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남자가 그렇게 많은 이니셜을 선택했으리라 생각되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세 가지 이니셜은 어떤 이유로 선택했을까? 이 세 개의 이니셜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번스 씨가 계속 말했다.

"가명은 보통 본명을 재정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이니셜은 분명히 본명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레밍턴이라는 마지막 이름은? 레밍턴사는 총, 재봉틀, 타자기와 함께 자전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여기에 앞서의 배지, 그리고 신발 밑창에서 알아낸 정보를 더해 당신이 자전거 선수라는걸 확신했습니다. 가명의 이니셜로 본명을 택했다면, 이름의 레밍텅도 그만큼 친숙한 단어를 선택한 거지요. 혹시 레밍턴 사 자전거 판매상일 수도 있어서 대화 중에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사지 말라고 조언해 보았는데, 아무것도 사지 않겠다고 곧바로 말씀하시더군요. 그렇다면 확실히 판매상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원에서 손수건을 훔친 끝에 당신의 정체를 확신했습니다. 손수건의 이니셜도 M.J.G였었거든요."

"이런, 자기 이니셜을 손수건에 새겨 놓다니!"

미첼 씨가 외쳤다.

"너무 바보 같잖아! 교활한 범죄자는 될 수 없겠군, 골디."

"아마 그럴 거예요! 물론 슬프지는 않습니다만."

"이쯤에서 저는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번스씨가 계속했다.

"그런데 다음 단계에서 좌절했어요. 미국 자전거 연맹 명단에는 딱 맞는 이름이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이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한마디로 말해 재료가 너무 많아 국물이 엉망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던 셈입니다. 손수건이 없었다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거예요. 하여튼, 다음으로 레밍턴 카탈로그를 구해서 공인 대리인 명단을 찾아보았는데 이것 역시 실패했어요. 하지만 사무실에 돌아와서 부하의 보고를 받고 난 뒤 길이 열렸습니다. 골디 씨의 연기는 좋았지만 공중전화에 들어가 누군가를 호출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부하가 전화 교환수에게 뇌물을 주고 정보를 얻어내었습니다. 그런데 5번가 호텔의 별실의 누군가와 통화했다는 것밖에는 알아낼 수 없었어요. 부하는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골디 씨가 사전에 전화 상대방과 약속한 시각, 약속한 장소에 전화를 걸어 의논하는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간이 정오였기 때문에 다음날, 즉 어제입니다만, 저는 같은 시간 조금 전에 5번가 호텔의 별실로 가서 숨어있었습니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내용을 엿듣고자 했지만 그건 무리더군요. 별실이 워낙 잘 만들어져 있어서 방음이 완벽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미첼 씨가 룸에 있는 건 확인할 수 있어서 만족했습니다."

"왜?"

"왜냐고요? 당연히 미첼 씨를 보자마자 이 모든 계획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재능을 시험하려고, 기분 전환으로 조작한 사건이라는 걸요. 이를 알아채자마자, 미첼 씨가 치과에 있다는 걸 알았기에 곧바로 진상을 파헤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집을 바로 찾아갔던 것이지요. 로즈 양과 수다를 떨려고요. 정보를 캐내기에는 딱 좋더군요."

"아이고, 빌어먹을! 번스 씨"

미첼 씨가 말했다.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이용하다니, 염치도 없구먼!"

"부끄러울 건 없었습니다. 아무튼 잘 됐어요. 현관에서 골디 씨의 자전거를 발견했는데, 짐작대로 레밍턴이더라고요. 번호를 적어서 대리점을 찾아가니 누구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고요. 586번은 정규 레이싱 팀의 일원인 G.J. 모티머가 타는 자전거더군요. 그리고 여기서 모티머의 본명이 모티머 J. 골디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가명에 대한 추리가 맞았기에 이 역시 반가운 정보였습니다. 자전거를 탈 때는 레이싱 네임으로 성을 바꿔서 사용했기 때문에 아까의 명단에서는 찾아낼 수 없었던 겁니다."

번스 씨가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슬쩍 실례했던 손수건이 없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저는 미국 자전거 연맹 명단에서 G만 찾았었거든요. 손수건만 없었다면 G는 물론, J, M도 찾았을텐데 말이지요. 그렇다면 곧바로 G.J 모티머를 찾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잘했어, 번스 씨"

미첼이 말했다.

"한동안 이름 없는 남자를 연기해 달라고 골디에게 부탁한건 나라네. 자네를 한 방 먹여 주고 싶었거든. 그런데 번스 씨가 우리에게 한 방 먹인 것 같구먼. 하지만 만약 내가 주연을 맡았다면, 아무리 자네라도 이렇게 빨리 정체를 간파하지 못했을 걸세."

"어! 글쎄요"

번스씨는 말했다.

"다음에 한 번 시도해 보시지요"

"그래, 다음에 자네에게 함정을 팔 때는 나를 주역으로 발탁할걸세."

"그거 기대되는군요"

번스 씨가 말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그나저나, 이번 게임에서 지셨으니 최소한 저녁은 사셔야겠습니다."

"기꺼이 한턱내겠네"

미첼 씨가 말했다. 골디 씨가 거들었다.

"아닙니다. 진 건 제가 실수했기 때문이에요. 제가 내겠습니다."

"둘이서 함께 내세요"

번스 씨가 외쳤다.

"그보다 빨리 가시죠. 배가 고파졌어요!"

그들은 곧장 델모니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덧 : 아주 오래전 읽었던 단편입니다. 모처럼 시간이 나서 번역을 진행해 보았습니다. 언제나처럼 의역 가득한 엉망인 번역입니다.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시면 좋겠네요.

2014/01/20

몰타의 매 - 대실 해밋 / 김우열 : 별점 4점

몰타의 매 - 8점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열린책들

샘 스페이드의 탐정 사무소로 원덜리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 서스비라는 남자와 도주했기 때문에, 서스비를 찾아내 여동생을 되찾고 싶다는 의뢰였다. 동료 탐정인 아처가 의뢰를 맡고 서스비를 미행하지만, 밤사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더군다나 그가 미행하던 서스비까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상황. 경찰은 용의자로 스페이드를 지목하고, 그는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책소개에서 인용)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전 하드보일드 추리 장편. 1930년 발표되어, 하드보일드의 전형을 구축한 작품입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충분한 가치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지니고 있는 명성이 쉽게 이해가 될 정도에요.

이 작품의 가장 큰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시대를 앞서간 주인공 샘 스페이드입니다. 마초이자 상남자에다가 나쁜 남자이기까지 하거든요. 파트너의 아내를 유혹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쿨함이라고는 전혀없는 돈귀신으로 도움을 얻으려고 찾아온 여자에게서도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500달러를 악착같이 받아냅니다. 거기에 더해 총으로 위협하는 악당들도 맨손으로 제압하는 완력, 경찰에게도 굴하지 않고 농담과 비야냥으로 받아치는 반골정신도 겸한, 그야말로 안티 히어로의 표본같은 인물이에요. 샘 스페이드를 설명하는 묘사도 탁월합니다. 얼굴에 여러개의 V가 표시된다는 첫 등장 시의 묘사부터 독자를 사로잡지요.
등장 이후 단 한번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팜므파탈 오쇼네시 역시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악녀로, 스페이드와 함께 완벽한 컴비플레이를 보여줍니다. 

역사적 유물인 "몰타의 매"을 소재로 녹여낸 참신함, 그리고 "몰타의 매"를 찾는 보물찾기라는 내용은 이후의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보기 드물었기에 오히려 돋보입니다. 몰타의 매의 유래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나름 그럴듯 하기도 했고요.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 같이 명대사가 난무하는, 그런 문학적 향취는 별로 없지만 깔끔하고 간결한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이야기 중간에 스페이드가 이야기한 일화 - 한 사내가 우연히 죽을뻔한 뒤 아예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종적을 감춘다 - 는 뭔가 울림을 전해주기까지 합니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만한 내공은 확실히 느껴졌어요. 

하지만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좀 애매하다는건 단점입니다. 하드보일드 추리물이 별다른 트릭이 없는 장르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트릭이고 뭐고 정말 전혀 없는 탓입니다. 유일한 수수께끼는 서스비가 매 조각상을 어디에 감추었는지? 뿐인데, 이건 오쇼네시의 뒤를 쫓는다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고 설명되기 때문에 스페이드가 활약할 여지가 없어요. 실제로 거트먼과 카이로는 스페이드의 도움 없이 매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했지요. 

전개도 속도감있고 빨라 독자를 몰입시키지만, 세세한 부분에서의 설득력은 부족합니다. 카이로가 스페이드를 찾아온 이유, 거트먼이 스페이드를 고용하려는 이유 등 스페이드가 사건에 엮이는 과정 모두가 그러합니다. 오쇼네시가 스페이드를 고용했더라도, 생판 관계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느니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그녀를 미행만 해도 충분했을테니까요. 하긴 오쇼네시가 서스비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스페이드를 끌어들인것 부터 설득력이 없으니... 아처를 쏴버린 것처럼 그녀 스스로 서스비를 쏴버리는게 제일 깔끔했을텐데 왜 이렇게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요? 어차피 경찰도 그녀의 존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서스비가 과거 도박조직에 연루된 원한으로 살해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는데 말이죠.
마지막에 스페이드가 경찰에 오쇼네시를 넘기는 것도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스페이드가 그녀를 넘기지 않으면 바로 체포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희생양은 거트먼 일당으로 충분했을것 같은데, 한명 죽이나 두명 죽이나....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추천작. 단점은 조금 있으나 사소할 뿐 이 바닥의 영원한 고전, 원전으로서의 가치와 재미를 유지하고 있는 보기드문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읽지 못하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덧 1 : 오쇼네시에게 교수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전기의자를 쓰지 않았었나요? 이 당시 하드보일드에서 흔히 이야기되는건 "싱싱 (형무소)"과 "전기의자" 인데 이 작품은 예외적이라 의아했습니다.

덧 2 : 샘 스페이드의 파트너가 마일스 "아처"라는 것이 좀 특이했습니다. 하드보일드 3대 탐정 중 한명인 "루 아처"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묘한 인연인데 로스 맥도널드가 루 아처 창작 시 이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 좀 궁금하네요.

2016/11/18

천사들의 탐정 - 하라 료 / 권일영 : 별점 3점

천사들의 탐정 - 6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 작가 중 한명인 하라 료의(현재까지는) 유일한 단편집입니다.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인 골초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하드보일드의 거장답게 수록작 모두가 정통 하드보일드의 문법을 충실히 따릅니다. 찾아 온 의뢰인으로부터 사건을 의뢰받지만, 또 다른 의외의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휘말린 탐정이 진상을 파악하여 해결한다는 전형적 전개로만 이루어져 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재미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답게 추리적으로 정교하거나 놀라운 부분은 많지 않으나, 몇몇 작품의 경우는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이라 추리 애호가를 기쁘게 해 주고요. 작가 특유의 빼어난 묘사와 문체, 캐릭터들도 기대에 값합니다. 전형적인 하드보일드물인데도 발표 당시(1990년) 일본 상황에 꼭 들어맞게끔 쓰여져 있다는 점도 실로 대단합니다.

아울러 후기 이후 작가의 말을 또 다른 짤막한 단편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선택받은 남자"의 슌이치가 몇년 후 사와자키를 찾아와 탐정이 되고 싶다고 부탁하는 내용인데, 이 작품 한편으로의 완성도는 낮지만 단편집을 마무리하기에는 아주 적절했어요. 단편집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노력으로 보이며, 이러한 노력에는 찬사를 보낼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언제나 믿고 보는 하라 료 작품다운 수준의 좋은 단편집이었어요. 하라 료의 팬이 아니더라도 하드 보일드를 좋아하신다면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소년이 본 남자"

어느 비오는 날, 우연히 한 여성의 청부 살해 음모를 전해 들었다는 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사와자키를 찾아왔다. 그녀를 보호해 달라는 소년의 의뢰를 마지못해 맡은 사와자키는 소년이 말한 여성의 미행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은행장이 개인 권총으로 은행 강도를 쏘아 죽이고, 본인도 중상을 입는 대형 은행 강도 사건에 휩쓸리고 마는데...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미행하던 여성 니시다 사치코가 은행장 무토 에이지의 아내이며, 의뢰한 소년이 무토와 니시다 부부의 아들이라는게 순차적으로 밝혀지는 과정은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할 것으로 여겨 보디가드를 부탁했고, 이유는 '총이 사라진 것(공범인 은행 강도를 죽이기 위해)' 때문이라는 진상이 너무 쉽게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래도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진상의 설득력은 높습니다. 결국 소년의 의뢰가 아버지를 옭아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결말도 여운을 남깁니다.

아울러 초등학생 소년이 사건을 의뢰한다는 도입부가 흥미롭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우며, 여성에 대한 청부 살인 의뢰가 은행 강도 사건으로 바뀌는 과정 역시 절묘합니다. 상대가 누구건간에 정식 의뢰인으로 대하는 사와자키의 캐릭터 역시 인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5점입니다. 어딘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사와자키 시리즈를 말할 때 빼놓지 않고 언급해야 할 수작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잃은 남자"

자기 공포를 혼자서 이겨낼 줄 모르면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이라고 할 수 없다. - 사와자키가 들이닥쳤을 때 두려움을 보이는 협박범 아소 사다유키를 보고 사와자키가 하는 생각.

유명 음악가 최정희가 사와자키를 찾았다. 딸이 당한 뺑소니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별 소득없이 돌아간 다음 날, 그는 사와자키를 다시 찾아 사건을 의뢰했다. 오래 전, 옛 연인에게 보냈던 연애 편지를 사라는 협박 사건 거래 현장에 함께 가자는 의뢰였다....

주역인 최정희가 사실은 한국의 정보원이었다는 설정은 한국인으로서 아주 흥미롭습니다. 박정희를 위해 일하다가 민주 세력쪽으로 전향한 인물로, 그의 핵심 임무 중 하나가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 사건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신인 야당 지도자가 납치되었다!)이었다 디테일은 상당히 자세하게 우리나라를 조사해서 썼구나 싶어 감탄스러웠어요. 아울러 최정희 협박 사건은 뺑소니와 아무 관련 없으며, 꽃뱀과 야쿠자가 얽힌 일종의 사기극이었다는 진상도 좋았습니다. 설득력도 높고요.

그러나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섯살 먹은 딸의 사고사에 옛 애인이 낳은 아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까지는 아주 그럴듯한데, 그 이후 과정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탓입니다. 협박범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라는 막장 드라마스러운 설정도 마음에 들지 않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한국인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특별한 점 없는 평작입니다.

"240호실의 남자"

카페 체인 사장 니시오는 사와자키에게 딸의 조사를 의뢰했다. 사와자키는 조사 후, 그의 딸이 니시오가 바람피우는 현장을 따라다녔다는 결과를 알려주었다. 니시오는 다시는 여자와 그런 짓 않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다. 그러나 며칠 뒤 니시오가 언제나 투숙하던 러브호텔 240호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고, 사와자키는 관련자로 사건에 연루되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 중 가장 추리적인 요소가 높은 작품입니다. 작 중 등장하는 증언들에 의한 추리라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가 제공되는 덕분에 본격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에요. 니시오의 아내 미유키의 자백을 듣고, 그 자백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찾아내어 다시 딸 후미코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과정,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의 자백이 이어짐에도 사소한 증언의 실수를 찾아내어 진범을 마지막에 밝혀내는 사와자키의 추리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고요. 니시오 후미코가 왜 아버지를 미행했는지와 같은 디테일, 거기서 이어지는 일종의 근친상간과 그에 따른 배신감을 암시하는 묘사도 상당히 극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허나 긴자의 빨간머리 호스티스의 협박이라던가 니시오의 변태적인 성욕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니시오가 문란했다 정도였어도 충분했을거에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한 성적 묘사는 부담스럽지만 하드보일드 추리물로는 수작입니다.

"이니셜이 'M'인 남자"

새벽 1시,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벋은 사와자키에게 한 여성이 자기가 곧 자살할 것이라 말하는데...

유명 아이돌 아사부키 유미 자살 사건을 다룬 소품입니다. 소재면에서는 실존했던 오카다 유키코 사건을 연상케 합니다. 당대(80년대 후반~) 아이돌들의 실명이 살짝 등장하는건 반가왔어요.

하지만 사와자키에게 걸려온 전화가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 마쓰누마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와 공모한 간단한 알리바이 트릭일 뿐' 이라는건 명백한 단점입니다. 너무 작위적인 탓입니다. 그런 전화 한통 받았다고 사와자키가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것도 설득력이 낮고요.

그리고 스타의 성장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데이터로 남긴다는 마쓰누마 교수의 계획은 기발하지만, 이것이 아사부키 유미의 자살과 연결되는 과정의 설득력은 낮습니다. 이러한 묘한 설정과는 무관하게 마쓰누마와 결혼하지 못하여 홧김에 자살한, 쉽게 이야기하자면 단순한 치정 문제에 의한 자살일 뿐이니까요.
매니저 미즈타니 세쓰코가 유미의 죽음 이후 용돈 벌이를 하는 과정을 무언가 있는 것처럼 그려낸 것 역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이것을 밝혀내는 탐문 수사가 내용의 대부분인데, 별 것도 아닌 이야기에 지나치게 긴 분량이 할애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아무리 사와자키라도 연예계와 얽히면 평작 정도의 가치도 발휘하기 어렵네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연예계 무대 장편 "또다시 붉은 악몽"이 망작인 것과 같은 이치랄까요?

"육교의 남자"

사와자키에게 동종업계 종사자 나루시마가 찾아와 후시미씨의 의뢰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녀가 찾는 손자는 흉악한 범죄자로, 그 사실을 알면 후시미 노부인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사와자키는 후시미 부인에게 사건을 의뢰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이유인지를 밝히려 나섰다. 그러던 와중에 나루시마가 육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데...

사와자키에게 나루시마가 찾아온 이유는, 후시미 노부인이 탐정 사무소 건물로 들어왔던걸 멋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마음에 듭니다. 박제 가게 등 탐정 사무소 건물에 있는 기묘한 가게들에 대한 묘사도 흥미롭고요.

그러나 후시미 가족에게서 사건을 의뢰받아 조사하고 있던 나루시마가 후시미 부인의 시동생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동생 후지오가 이 건물에서 우표상회를 하고 있다는걸 몰랐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후시미가의 재산을 둘러싼 뭔가 있어보이는 설정 역시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팬 서비스같은 느낌의 소품입니다.

"선택받은 남자"

사와자키는 가시와기 에미코로부터 살인 사건에 휘말렸다는 아들 슌이치를 찾아서 도와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한 청소년 선도위원 구사나기 이치로와 함께 소년과 사건의 진범을 찾아 나서는데...

의뢰를 받은 후 사건 관계자를 찾고, 피해자 구보야마 준키의 거처를 찾고,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다니는 전형적인 탐문 수사가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청소년들을 위해 분투하는 선도위원 구사나기가 마음에 드네요. 하드보일드에서 보기드문 '끝까지 잘되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라는 점도 특이했고요. 보통 하드보일드에서는 이런 인물은 죽거나, 아니면 범인이나 흑막인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추리적으로도 대단치는 않지만, 구사나기가 구보야마 살해범으로 몰리는 마지막 위기에서 사와자키가 피해자 가족과의 만남을 떠올리며 경찰에게 진범을 깨닫게 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습니다. 티셔츠 프린팅이라는 나름 최신 수법이 등장해서 신선했고, 이야기의 앞 뒤도 잘 맞아 떨어지는 덕분입니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는 점도 괜찮았어요. 이런 점에서는 작가의 가치관이 변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세상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세지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직하게 발로 뛰는 수사로 모든 진상이 쉽게 밝혀지는 전개는 조금 시시합니다. 슌이치의 거처가 친구의 증언으로 쉽게 밝혀지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우연도 많아서 작위적이라 느껴지고요.
그리고 티셔츠에 프린팅 된 사진보다는 원본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의외로 사진 원본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조금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간의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이후 작품이 어떻게 발전할지 궁금해집니다.

2022/09/18

조커게임 - 야나기 코지 / 한성례 : 별점 2점

조커게임 - 4점
야나기 코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어딘가의 랭킹에서 트릭이 뛰어난 작품이라며 추천하고 있어서 구해 읽었습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과 전혀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랭킹 탓에 특별한 게임과 관련된 본격 미스터리 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구 일본 제국 시대를 무대로 한 스파이물인데다가 심지어 단편 시리즈였기 때문입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몇가지 트릭은 분명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 상황을 잘 살리고 있는 덕분입니다. <<조커 게임>>에서 헌병대가 외국 스파이의 집을 철저하게 뒤졌지만 마이크로 필름을 찾지 못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스파이는 마이크로 필름을 천황의 사진 뒤에 숨겨 놓았던 것이지요. 일본 헌병대는 불경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사진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겁니다.
<<로빈슨>>에서 완벽하게 암호를 전달했지만 본국이 가짜라는걸 알아채게 만든 트릭은 일정 간격으로 오타를 입력해야 되는 것이었고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저 정도의 트릭으로 '빼어나다' 고 말하기는 힘들고요. 무엇보다도 작품 속 특수 정보 기관인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유치하고 진부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마왕' 유키 중령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모든 D기관원들 모두가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슈퍼 스파이 - 스파이 패밀리 같은 - 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만화 속 등장인물에 가까와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애니메이션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데, 여러모로 애니메이션으로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그만큼 만화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후속작을 따로 책으로 읽어볼 계획은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커 게임>>
육군에 유키 대령 지휘 하에 스파이 양성 학교가 세워졌다. 훈련생들이 군인이 아닌 일반 대학 졸업생이었고, 전통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무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이 학교와 조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육군은 사쿠마 중위를 파견했다. 사쿠마 중위의 임무는 유키 대령 조직의 실수와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쿠마는 학교 훈련생들의 기상천외한 입학 시험과 훈련 과정, 그리고 천황제를 부정하는 듯한 사고 방식에 경악하던 차에, 미국인 기술자 고든의 스파이 행위 증거를 찾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데...

표제작이자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사쿠마 중위의 시점으로 첩보 기관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마왕' 유키 대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게 제목이기도 한 '조커 게임' 입니다. D 기관 훈련생들이 식당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포커 게임으로 보이지만, 사실 식당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스파이 게임이지요. 누구나 누군가의 카드를 보고 정보를 줄 수 있는데, 그 정보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규칙입니다.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고,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는 D 기관의 룰을 잘 드러내는 게임이에요.

이러한 D 기관 설명이 중심이고, 고든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물을 찾는 과정은 곁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과정에 약간의 트릭이 사용되고 있으며, D 기관원들이 천황제 부정 발언을 했던게 트릭과 연결되고 있어서 전개 구조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쿠마가 주도한 수색 자체가 육군의 음모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초 수색을 지시했던 무토 중령은 필름을 발견하지 못했고, 고든의 부당한 수사에 대한 항의로 궁지에 몰렸던 상태였지요. 그래서 D 기관을 시켜 두 번째 수사에 나선 것입니다. D 기관도 수색에 실패하면 모든걸 뒤집어씌워 조.직을 와해시키고, 자기 실수를 덮으려는 목적으로요. 사쿠마는 무토 중령의 음모를 위한 버림돌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반전이 드러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헛점도 많습니다. 무토 중령이 술집 게이샤에게 용의자 집 수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고든 본인이 사쿠마 중위에게 지금이 두 번째 수사라고 말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지 모르겠거든요. 유키 중령이 변장하고 무토 중령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등 작위적인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작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령>>
영국 총영사 그레이엄은 일본인 양복점 점원 가모와 체스로 친해졌다. 그러나 가모는 D 기관 조직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폭탄 테러 계획의 유력한 용의자 그레이엄 총영사에 대한 혐의를 확정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가모는 체스를 통해 총영사는 심증으로는 죄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총영사 관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종이가 테러범 접선 장소에서 발견되었기에, 결정적 증거를 잡고자 철저히 미행했지만 별다른걸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새벽에 영사관에 잡입하게 되는데....


영사는 지령문을 옮기는 수단에 불과했다는게 진상입니다. 테러 조직은 영사의 우산 속 빈 공간을 활용해서 접선 장소에서 몰래 지령문을 전달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영사가 테러 조직의 접선 장소와 동선이 겹쳤고요.

발상의 전환이기는 한데, 구태여 영사를 이용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D 기관원 가모가 영어에 능통하고, 체스는 물론 미행과 잠입, 그리고 금고 털기에도 숙달된 슈퍼 스파이라는 묘사도 과장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가모가 영사가 소싯적 저질렀던 악행을 고백한 일기를 읽은 뒤, 이걸로 영사를 협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악이었습니다. 촬영도 않고 다른 증거도 없는데, 단지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는걸로 영사를 협박하는게 가능했을까요? 심지어 상대는 적국의 스파이인데 말이지요. 이게 통하려면 뭔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가모가 신분을 세탁하여 영사와 친분을 맺는 과정, 그리고 가모가 미행할 때 영사가 팁을 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정보 교환 방법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 정도는 볼 만 했는데, 그 외에는 건질게 별로 없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로빈슨>>
D 기관원 이자와는 영국 런던에 잠입했지만 영국 첩보기관에 체포되었고, 자백 유도제를 맞아 비밀 암호 등을 털어놓고 말았다. 영국은 유키 대령에게 배반당했다는 이자와를 이용하여, 일본에 가짜 정보를 전달하여 혼란을 주려 했지만 이자와는 의식의심층 구조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비밀은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래서 D 기관은 이자와의 정보가 가짜라는걸 알아채는데...

앞서 소개해드렸던 , 암호가 가짜라는걸 알게된 이유는 꽤 괜찮았습니다. 스파이는 일본 남아의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 무조건 살아남아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유키 대령의 사고 방식도 스파이다워서 좋았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과장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특히 자백제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방법이 말이 안됩니다. 의식의 표층과 심층을 구분하여 표층 정보만 입에 올리도록 훈련했다는데, 전혀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지 못했습니다. 훈련 과정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긴, 자백제라는 비과학적인 약도 마찬가지긴 하네요.
이자와 탈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라이데이'의 존재도 이전에 설명 한 번 없어서 뜬금없었습니다. 이자와가 임무를 떠날 때 유키 대령이 <<로빈슨 크루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위기에 처했던 이자와가 동그라미에 십자가 기호가 그려진 암호를 보고 프라이데이의 존재를 깨닫는다는건 솔직히 가관이었습니다. 이 암호는 연금술에서 '미의 여신'을 뜻하고, 미의 여신 비너스는 천문학에서는 금성이며, 이는 일주일 중 제 6일, 즉 '프라이데이'를 가리킨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국가 정보 기관들의 두뇌 싸움은 볼 만 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마의 도시>>
상하이에 파견된 헌병 중사 혼마 에이지는 상사 오이카와 대위로부터 헌병대 내부 내통자 색출을 지시 받는다. 헌병대의 미야타 중사가 살해당했기 때문이어다.
그 직후, 오이카와 대위의 자택이 폭탄 테러를 당했고 혼마는 본국 '특고' 시절 안면을 텄던 신문기자 시오즈카로부터 제보를 전달받았다. 옛 동급생이자 D 기관원인 대학 동창 구사나기를 상하이에서 목격했다는 제보였다....


D 기관원이나 기관의 작전이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이색작. 헌병대 중사 혼마의 수사와 추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탓입니다.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가 돋보였습니다. 오이카와 대위는 아편을 빼돌리다가 미야타 중사에게 들켰고, 그래서 중사를 살해한 뒤 증거 은폐 목적으로 자택을 테러로 위장해 폭발시켰던 겁니다. D 기관은 시오즈카로 변장시킨 조직원을 시켜 혼마가 이 수사를 하게끔 유도했고요.

하지만 혼마의 추리는 증거가 없다는 문제가 큽니다. 오이카와가 도박장을 드나들었고, 빚이 있었다는 정도로 미야타 중사 살인사건 및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몰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이카와가 혼마의 질책 정도로 패배를 쉽게 수긍하는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뒤 요시노 상병에게 총을 맞고 죽는 장면도 뜬금없었습니다. 요시노 상병은 오이카와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이다가 폭발 때 죽고 만 게이 소년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인데, 설명이 부족했어요.

혼란스러웠던 상하이 분위기와 이런저런 묘사는 그럴싸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결말이 별로였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더블 크로스>>
독일인 카를 슈나이더가 소련과 독일 양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D 기관은 졸업 시험을 겸해 도비사키에게 임무를 맡겼다. 도비사키는 슈나이더가 어떻게 암호를 발송했는지 등을 밝혀냈고, 신병을 확보하기 직전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애인의 집에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은 사건 현장을 발견했던 슈나이더의 애인 노가미 유리코였습니다.
사건 당일 그녀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습니다. 수 km 떨어진 극단 연습장에서 한창 연극 리허설 중이었고 그녀는 주역이라 연습장을 5분 이상 비우는건 불가능했는데, 차로 집을 왕복하는데는 최소 10분은 걸리는데다가, 슈나이더에게 유서를 쓰게하고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하는데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알리바이 트릭물 처럼 보였던 설정과 전개에 비해 진상은 보잘것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미리 독을 넣어둔 와인을 마시고 죽었던 겁니다. 바로 직전에 읽고 소개해드렸던 <<흑마술의 여자>> 트릭과 똑같네요. 유서는 전화를 통해 연극 대사로 위장해 쓰게 했다는, 추리 퀴즈 수준의 트릭이었고요. 노가미 유리코가 자택에 설치해두었던 전화 대신, 사람을 시켜 경찰을 부른 이유 - 유서를 옮겨 놓으려고 - 정도에 대해서만 약간의 추리가 등장할 뿐입니다.
유서(?)에 작게 쓰여져 있던 '더블 크로스'도 슈나이더의 즉흥적인 낙서에 불과하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했습니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의미였다는데, 그냥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오히려 본편 사건보다는 도비사키의 과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등을 버리며 홀로 살아가는 스파이가 될 수 없다는 도비사키의 결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급작스럽게 등장합니다. 이 작품이 장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노가미 유리코를 심문하면서 애정이 싹텄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다면 괜찮았을텐데 중간 과정 없이 결심만 등장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수록작 중 워스트로 추리물, 스파이물 양쪽 모두 별 가치가 없는 작품입니다.

2021/11/14

Q.E.D Iff 증명종료 16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1.5점

Q.E.D Iff 증명종료 16 - 4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의 두 번째 시즌이라고 할 수 있는 iff도 16권 째입니다. 그런데 수록된 두 편의 이야기 모두 억지스러운 설정과 전개로 점철된, 수준 이하의 작품들이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인 "시계탑"은 그나마 추리적으로 약간 볼만합니다만 현실성이 부족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또 두 편 모두 Q.E.D 시리즈일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도 감점 요소에요. 토마와 가나가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탓입니다. 내용만 보면 '지나가던 명탐정이 수수께끼의 괴사건을 해결한 뒤, 제 갈 길을 간다'는 이야기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시리즈의 오랜 팬으로 애정을 담아서 이 정도이지, 팬이 아니었다면 그 이하 별점도 가능했을 졸작이었어요. 읽다가 힘이 다 빠질 정도였는데, 후속권에서는 부디 만회해주기만을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두 편 모두 스포일러가 그렇게 의미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시계탑"

시계탑이 있는 건물에 저렴한 애프터눈 티 세트를 파는 카페가 생겼다. 가나들은 열광했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기업가 데마키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로 바뀌었다. 게스트 하우스는 큰 적자를 보던 끝에, 데마키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투자자 다이바가 실종되고 데마키가 도망가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사해보니, 시계탑이 있는 건물에서 지난 60년간 2건의 살인 사건, 3건의 실종 사건이 있었다는게 밝혀지는데....

이전에도 등장했던 타나바타 형사가 재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사건은 원래 시계탑 건물에 거주했던 화가 오키 실종이 원인이었습니다. 오키는 시계탑 주인 하토야 가문의 딸 하라코와 사랑에 빠졌었는데, 이를 반대하던 하라코의 오빠 히카루와 만난 후 사라졌었지요. 당시 비명 소리를 들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경찰이 수색을 진행했지만 시체는 발견하지 못했고, 사건은 오빠가 말한대로 오키가 돈을 받고 떠난 걸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믿지 못했던 하라코는 시체를 찾기 위해 시계탑을 자기 소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샅샅이 뒤진 끝에도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자, 살인 사건을 저지를만한 사람에게 건물을 빌려줬습니다. 그들이 살인 사건 후 시체를 숨긴 곳에 오키의 시체도 있을거라 생각해서요. 즉, 일종의 집단지성?에 기댄 셈입니다.

하지만 너무 어설픈 설정입니다. 건물을 빌리려는 사람 중 누가 살인을 저지를지를 어떻게 예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건물에서 살인이 일어나게 만든 뒤 범인들이 숨긴 시체 실종 사건으로 처리된 시체들)를 따로 가져다 버리는 것보다, 돈을 써서 전문가에게 시체 찾기를 요청하는게 더 상식적일 겁니다. 애초에 범인이 시체를 숨길만한 곳을 조사 하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요. 

오키의 시체가 시계의 동력 역할을 하는 돌 주머니를 이용하여 감추어졌다는 진상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시계탑 기둥을 조사하지 않았을리가 없으니까요. 설령 사건 직후에는 못했다 하더라도, 시계가 작품에서처럼 동작 이상을 일으켰다면 시체는 당연히 발견되었을겁니다. 그러나 토마가 나설 때 까지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시계를 정기적으로 관리했다는 언급까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아울러 주머니에 감추어진 시체가 백골이 될 때까지 들통나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졌어요. 거주자도 있었고, 이런저런 가게가 있었는데 아무런 냄새나 흔적 없이 시체가 자연스럽게 백골이 될 리가 없잖아요. 하긴, 시체가 수십년간 돌 주머니 줄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 자체가 완전 억지입니다. 사건이 대충 무마된 후에, 살인을 저질렀던 히카루가 직접 시체를 없애는게 당연하니까요. 하라코 본인이 건물 안에 범인들이 숨겨놓은 시체를 그대로 놔 두지 않고 따로 처리해 버렸던 것처럼요. 오빠 히카루가 오키의 시체를 진작에 처리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어요.

토마와 가나가 사건에 휘말린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며, Q.E.D 특유의 학습 만화스러운 부분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어서 Q.E.D 시리즈가 맞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의미있는 정보는 게스트 하우스 사업이 실패한 원인 - 외국인 여행객들은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역이 가까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식사도 쉽고 싸게 할 수 있게 편의점이 가까와야 한다, 목욕탕에 문제가 있다는 클레임을 무시하면 안된다 - 을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읆조리는 정도만 눈에 뜨였을 뿐입니다.

그나마 소소한 추리, 시계탑 건물에 관련된 나쁜 소문을 없애기 위해 자기 소유 회사가 운영하는 가게를 오픈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을 끌어들이려 했다면, 왜 계속 그런 방법을 쓰지 않고 다른 사업자에게 임대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괜찮았습니다. 다이바 실종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무거운 우물 뚜껑에 시체를 묶어 놓았다는 시체 은닉 트릭도 기발했어요. 경찰도 뚜껑이 너무 무거워서 내려 놓지 않고, 옆으로 살짝 옮겨 놓고 우물 속을 조사해서 들키지 않았다는건데, 상황만 놓고 보면 꽤 그럴듯했으니까요. 출동한 경찰조차 무거워서 완전히 내려 놓지 않은 뚜껑을 짧은 시간 동안 혼자서 내려놓고, 시체를 위에서는 안 보이도록 묶은 뒤 다시 혼자서 올려 놓았다는건 여러모로 무리라고 생각되긴 합니다만.

하여튼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준 이하의 이야기였습니다.

"마드무아젤 클루조" 

파리 프루니에 미술관에서 "달과 거북이"가 도난당했다. 프루니에 관장의 요청으로 실수투성이 마리안느 클루조 경부가 사건을 맡게 되었다. 범인이 요구했던 50만 유로는 전달 과정에서 사라졌지만, 다행히 그림은 그림 애호가 루이 오규스트의 도움으로 미술관에 무사히 반환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널리 보도된 탓에 프루니에 미술관은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클루조 경부 혼자의 원맨, 아니 원우먼쇼가 펼쳐지는 작품으로 오규스트가 수상하다는걸 눈치챈 뒤 그를 미행하여 그가 원래는 배우였다는걸 알아낸다던가, 돈이 든 가방에 일부러 홍차를 쏟아서 나중에 가방이 바뀌치기된게 아니라는걸 증명한다는 식으로 사건 해결은 모두 그녀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냅니다. 때문에 이 작품은 Q.E.D 시리즈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토마가 하는 일은 전무하다시피하며, 가나가 우연히 크루소 경부와 엮여서 수사에 동행한다는 것도 억지스럽기만 하니까요. 프랑스 경찰이 생면부지의 일본인 관광객?과 수사를 벌인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추리적으로도 눈여겨볼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그림 도난과 그림값을 빼돌리는 두 건의 범행이 벌어지는데, 두 개 다 추리가 필요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림 도난 사건은 인기없는 미술관에 손님을 끌기 위한 프루니에의 계획이라는게 처음부터 공개되거든요. 오규스트의 정체는 추리가 아니라 미행으로 알아내고요. 배우라는 오규스트의 정체는 미행이 아니었어도 경찰 조사로 쉽게 알아낼 수 있었겠지만요.

'경부는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실수 투성이인 클루조 경부 캐릭터도 추리 소설에서는 너무나 흔해빠진 설정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왜 새 캐릭터를 등장시켰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름부터 당대 서스펜스 스릴러의 거장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에서 따온 듯 싶은데, 뭔가의 콜라보레이션 기획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점. 미술품 도난에 대한 짤막한 정보가 공유되는 것 외에는 건질게 하나도 없는, 전작은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형편없는 졸작입니다.

2023/03/25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3 톱니바퀴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3 톱니바퀴

토모히로의 집 앞에 고급 택시가 멈춰 섰다. 토모히로가 자신의 집에 들어선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운전기사가 대문 차임벨을 누르자 바로 토모히로가 나타났다. 그는 남색 바지와 코트를 입고 한 손에는 큰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토모히로의 뒤를 이어 마사오의 모습이 보였다. 트위드 소재의 하얀색 코트에 크림색 가방을 들고 있다. 마사오는 머리를 다시 묶고 있었다. 익숙한 은색 머리 장식이 보였다.

잘 단장한 마사오의 얼굴 윤곽이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화장을 한 모양이었다. 운전기사가 토모히로의 가방과 마사오의 여행 가방을 뒤쪽 트렁크에 실어주었다.

"어떻게 봐도 여행 가는 모습이군. 그것도 꽤 긴 여행같은데........"

마이코가 혼잣말을 했다.

토모히로의 집에서 두세 살짜리 어린아이를 안은 노인이 나왔다. 얼굴이 마사오를 닮았다. 마사오는 노인에게서 옆으로 긴 검은색 가방을 받아든 뒤 아이의 뺨을 살짝 찔렀다. 아이가 입을 열었다. 충치가 보였다.

토모히로와 마사오는 차에 올라탔다. 노인과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차는 마이코의 에그를 지나갔다. 잠시 후, 토시오는 조용히 시동을 걸었다.

"미행하고 있는걸 알아채도 상관없어. 어차피 의뢰인의 차니까."

토시오는 마이코의 에그로 어떻게 택시를 놓치지 않고 미행할 수 있을지 걱정했었지만, 마이코의 말 한마디에 택시 뒤에 꼭 붙어 가기로 결심했다.

도로의 혼란은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고, 택시의 운전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사이에 두세 대의 차량이 끼어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토시오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그랬다. 토모히로의 가방은 국내 여행치고는 너무 과했다. 마사오가 아침부터 소우지를 만난 것은 당분간 두 사람의 밀회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고속도로에 들어가면 계속 쫓아갈 자신이 없어요."

마이코는 시계를 보았다.

"걱정할 것 없어. 공항까지는 외길이니까. 그런데 만약 해외로 출국하는 거라면, 그 전에 내가 토모히로를 붙잡고 이야기하게 될 수도 있어."

고속도로 앞에서 큰 탱크로리 차량이 끼어들면서 마이코의 에그를 억지로 밀어붙였다. 정지 신호에서 마이코의 차는 유조차의 배기가스를 정통으로 맞았다. 오른쪽 도로변에는 '개와 고양이 병원' 간판이 큼지막하게 서 있다. 마이코는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자조적으로 말했다.

"정말 개 같은 일이네."

이것으로 이 일도 끝이겠구나, 라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였다. 토시오는 하늘에서 기괴한 물체를 목격했다. 색깔도 모양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 전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유리창이 날아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토시오는 직감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의 탱크로리 차량에도 빨간 불이 들어왔다. 타원형 탱크가 눈에 띄게 커 보였다. 토시오는 뒤따라오는 차를 신경 쓰며 계속 브레이크를 밟았다.

에그가 멈추자 토시오는 반사적으로 차도로 뛰쳐나왔다. 서너 대 앞의 차가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토모히로와 마사오가 타고 있던 택시였다. 택시 뒤에는 또 다른 차량이 달려오고 있었다.

탱크로리 차의 문이 열리고 운전자가 튀어나왔다.

"도망쳐!"

누군가가 소리쳤다.

차도 위에서 하얀 코트가 날아갈 것 처럼 흩날렸다. 토시오는 코트로 뛰어들었다. 일어나보니 마사오는 피를 흘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토시오는 정신없이 마사오를 끌어안았다. 작은 신발 한 켤레가 옆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중에 생각해보아도 그때의 행동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토시오는 한 손으로 그 신발을 집어 들었다. 곧이어 신발 옆까지 불길이 다가왔다.

"엎드려!"

미친 듯이 외쳤다.

두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두 번째 차에 불이 붙은 것이다.

토시오는 에그에 마사오의 몸을 밀어 넣었다. 마이코의 모습은 차 안에 없었다. 마사오의 옆에 긴 가방 끈이 팔에 달라붙어 있었다. 토시오는 가방을 풀어 놓으려고 했다. 그때 마사오의 가슴에 손이 닿았다. 가슴의 부드러움에 토시오는 깜짝 놀랐다. 토시오는 가방을 뒷좌석에 던져 넣고 문을 닫자마자 U턴을 했다. 차체가 탱크로리 차량에 부딪힌 것 같았다.

반대편 차선의 차량이 멈춰 섰다. 뒤돌아보니 두 대의 차량이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마사오의 이마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눈과 입을 굳게 다물고, 피부에 피가 묻어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병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몇 분 전에 보았던 '개와 고양이 병원' 간판을 떠올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토시오는 동물 병원 앞에 차를 세웠다. 보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멀리 보이는 검은 연기를 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토시오는 차도로 내려와 차를 돌려 반대편 문을 열었다. 마사오는 반 쯤 쓰러진 채였다. 토시오는 조용히 마사오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사오는 곧 의식을 되찾았다.

".....나는........"

"사고를 당했어요. 곧바로 피신을 한게 다행입니다. 어디 아프신데는 없나요?"

마사오는 놀란 듯 온몸을 훑어보았다.

"병원 앞입니다. 상처를 확인하면 좋겠어요."

"사고를 당했나요 ......?"

토시오는 처음으로 마사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약간 코를 찌르는 듯한 목소리로 들렸다.

토시오는 에그에서 사고 현장에서 주운 신발을 꺼내 마사오의 발에 놓았다.

"당신은..."

마사오는 토시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차, 서너 대 뒤에서 달리고 있었어요."

"도와주셨군요."

토시오는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이제 괜찮습니다."

마사오는 신발을 신고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팔에 쓰러졌다.

"무리하면 안 돼요."

마사오의 머리카락이 눈앞에 있었다. 향수와는 다른, 기억에 남는 미묘한 향이 느껴졌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팔에 기대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때 멀리서 세 번째 폭발음이 들렸다. 마사오는 깜짝 놀라며 쥐고있던 토시오의 팔에 힘을 주었다.

뒤를 돌아보니 엄청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연기와 불길은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유조차에 불이 났네요."

마사오는 갑자기 토시오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토시오는 놓아주지 않았다.

"남편이 있어요.......남편이 ......"

"남편?"

"저, 남편과 함께 그 차에 타고 있었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몸이 무언가에 부딪힌 것 같더니 눈 앞에 불이 났어요. 운전자가 밖으로 굴러가는 것이 보였어요. 남편이 문을 열고 저를 밖으로 내쫓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달려갔을 때 좌석에 불이 붙지 않았어요. 대피할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마사오의 다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당신의 상처가 더 걱정스럽습니다."

토시오는 억지로 마사오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대기실에 있던 두세 사람이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한 여자는 가슴에 작은 개를 안고 있었다.

"급한 환자에요. 근처에서 사고가 났어요."

토시오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소방차와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진료실에 들어서자 개가 짖어댔다. 일반 병실과는 다른 소독액 냄새가 났다.

의사는 온화한 얼굴의 노인이었다. 외투를 벗겨보니 안감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의사는 스타킹에 가위를 집어넣고 벗겨내어 상처 부위를 살폈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간호사는 재빠르게 수액을 놓았다.

"다른 통증은 없습니까?"

마사오는 고개를 저었다.

"머리를 맞았나요?"

"글쎄요."

의사는 마사오의 눈과 입안을 살폈다.

"다리의 상처는 출혈에 비하면 얕은 것 같군요. 나중에 반드시 전문의에게 뇌파를 검사받아야 합니다."

또 여러 대의 사이렌 소리가 지나갔다. 마사오의 침착함이 사라졌다.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남편에게 데려다 주세요."

"남편이 함께 있었나요?"

의사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토시오를 남편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맞습니다. 같은 차에 타고 있었어요."

"잠시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저는 이제 괜찮아요. 남편이 걱정돼요."

마사오는 절망에 빠졌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간호사가 수화기를 들고 응대하다가 곧바로 토시오에게로 향했다.

"카츠 씨, 계십니까?"

"네."

토시오는 전화를 받았다.

"이, 이봐요!"

마이코가 소리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디로 사라져 버리다니. 마사오는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큰 부상이야?"

"아니요,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걸을 수 있겠지?"

"네."

"토모히로가 더 큰일이야. 빨리 마사오를 데리고 와. 키타노 제일의원 외과. 알았지? 도로는 교통이 통제되어 있어. 멀리 돌아서 와야 해. 바로 와."

"잘도 여기가 어딘지 알았군요."

"방금 전 '개와 고양이' 병원 간판을 봤었고, 차가 달리는 방향이 그쪽이었으니까. 네가 생각한 것 정도는 알 수 있어."

마이코는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남편이, 뭐라구요......."

마사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타노 제일의원이라는 곳으로 이송된 것 같습니다."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마사오는 피 묻은 외투에 손을 넣었다.

"내 차에 타세요."

토시오는 의사에게 키타노 제일의원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밖으로 나오니 구경꾼들이 인도로 가득 차 있었다. 소방차의 사이렌과 교통을 통제하는 경찰관의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 헬리콥터 소리.

연기의 세기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가끔씩 주황색 불꽃이 연기 속에서 되살아났다.

멍하니 서 있는 마사오를 바라보며 토시오는 에그에 들어가 시동을 걸었다.

"카츠 씨라고 말씀하셨죠?"

마사오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보면서 말했다.

"네, 카츠 토시오라고 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정말 큰 도움을 주셨네요. 저는 마와리라고 합니다."

"마와리……"

토시오는 그 이름을 감탄하듯 반복했다. 하지만 마사오는 다르게 해석한 것 같았다. 토시오의 얼굴을 보니,

"이름은 마사오입니다."

라고 말했다. 마사오는 남자다운 호칭에 대해 변명도 설명도 하지 않았다.

"카츠 씨의 주소를 알려주시겠습니까? 감사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

"감사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런건 싫습니다."

거절하려던 말이 어느새 강한 어조로 변해버렸다. 마사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위안이 될 만한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조급해지면서 좋은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에그는 그대로 키타노 제일의원 현관에 도착했다.

하얀색 2층짜리 병원이지만 안쪽은 훨씬 더 깊었다. 마사오는 현관 계단을 오를 때 다친 다리를 끌며 올라갔다.

접수처에서 이름을 말하자, 안내를 맡은 간호사가 두 사람을 2층으로 안내했다.

"무슨 일인가요?"

토시오가 물었다. 간호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2층 복도 의자에 마이코가 앉아 있었다.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고 일어섰다.

"수혈이 필요하다면 내 피를........"

마사오는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흐트러져 있었다.

마이코는 토시오에게 다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토시오는 못 본 척하며 걸어갔다. 간호사는 마사오의 다리를 보고 시선을 멈췄지만 걸음걸이를 늦추려고 하지 않았다.

이윽고 간호사는 2층의 긴 복도 끝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이 뒤따라오는 것을 본 뒤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리고 하얀 마스크를 쓴 의사가 나왔다.

"가족분들입니다."

간호사가 짧게 말했다. 의사는 마스크를 벗었다. 토시오는 부상자의 아내라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아까부터 아내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는데….  제 때에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의사는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마사오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이성이 승리한 것일까.

토모히로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약간 튀어나온 코에 산소 흡입용 마스크를 씌우고 있었다. 수혈병에는 거품이 일고 있었다. 거꾸로 된 A라는 글자가 보였다.

"당신……"

마사오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토모히로는 팔을 뻗으려 했지만 수혈을 위해 팔이 고정되어 있었다.

토모히로는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나는.......괜찮아."

고개를 움직여 입으로 마스크를 밀어내려고 했다.

"당신, 힘들겠지만, 힘내세요....... ......"

"나는, 괜찮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마사오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뺨을 문지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 당장 출발해 ...... 지금이라면 아직 ...... 비행기에….. 늦지 않아 ......"

"하지만--"

토모히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일 ...... 예정대로 호놀룰루에 있는 러더퍼드 데이비스 씨를 만나 ...... 마도죠를 ...... 건네줘."

"쓸데없는 일에 신경을 쓰지 마세요."

"쓸데없는 일 아니야 ...... 당장 출발해 ...... 마도죠를 ...... 반드시 ...... 내일 ......

"알았어."

마사오는 아이를 달래듯 토모히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 말대로 할게요. 안심해라. 그러니 조용히--"

"당장 출발해"

토모히로는 빨리 떠나라는 말을 반복했다.

마지막에는 눈을 감고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마사오는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토모히로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의사가 토모히로의 죽음을 알린 것은 그로부터 십오 분이 지난 후였다.


마이코는 2층 복도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불쾌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언제까지 멍청한 짓을 할거야?"

토시오의 얼굴을 보자마자 말했다.

"토모히로가 죽었어요."

"알아. 아까 토모히로의 병실에서 산소호흡기가 꺼져 있는 걸 봤어. 내가 어려울 때 죽고 말았지 뭐야."

마이코는 토모히로의 죽음에 대해 매우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고, 넌 생각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군."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할 정도로 배웠어요"

"그렇구나.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해서는 안돼."

토시오는 신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게, 도무지 모르겠어. 사고 직전에 여러 사람이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더군요."

"-그건 저도 봤어요."

"불덩어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연기가 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던데….. 토시오 군, 토시오 군이 본건 뭐였어?"

"제 생각에는 하얀 연기 같았어요."

"어쨌든, 토모히로의 차에 낙하물이 부딪힌 것만은 확실한 것 같군."

"토모히로가 그렇게 큰 부상을 입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요."

그것이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렇겠지. 택시 운전사도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채 도망칠 수 있었으니까. 택시와 부딛혔던 차의 사람들도 자기 차에 불이 나기 전에 피난할 수 있었고."

"그럼?"

"차에서 뛰어내린 후, 토모히로가 취한 행동이 문제였지. 그건 자살행위였어."

"우다이 씨는 그걸 보셨나요?"

"응, 똑똑히 봤어. 토모히로가 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반쯤 열린 차 트렁크에서 자신의 가방을 꺼내려고 했어."

"가방을?"

"응, 가방도 가죽이 찢어져 안의 물건이 튀어나온 상태였어. 그래도 토모히로는 가방을 꺼내려고 애썼지. 그러던 중 급속도로 택시가 불길에 휩싸여 버렸어. 결국 토모히로는 가방을 꺼내기는 했지만 도로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고. 다리가 엉켜서가 아니면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일거야. 그리고 그 순간, 토모히로는 삽시간에 불덩어리가 되고 말았어."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불덩어리가 될 수 있나요?"

"그냥은 힘들지. 뭔가에 불이 붙었다는 느낌이 들었어. 내 생각에 그 가방 안에는 뭔가 인화성 액체가 담긴 병이 들어있었던 것 같아. 넘어지는 바람에 병이 깨지면서 토모히로는 그 안에 있던 액체를 뒤집어 썼고, 그 액체에 불이 옮겨붙었던게 아닐까."

"그 가방에는 꽤나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겠군요."

"그렇겠지. 하지만 그 가방도 다 타버렸어."

하지만 해외여행을 갈 때 기름병 등을 가지고 다닐 수 있을까? 그래, 아직 마이코에게 해외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다이 씨 말이 맞았어요. 두 사람은 호놀룰루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마사오가 말했구나."

"두 사람은 하와이에서 로스엔젤레스, 플로리다를 거쳐 2주 후에 보스턴에 도착할 예정이었다고 했어요."

마이코는 가만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 맞아, 생각났어. 보스턴에서 11월에 '국제 장난감 박람회'가 열릴 예정이야. 각국의 참가업체가 백 수십 개, 전 세계 바이어와 업계 관계자가 1만 명 이상 모일 것이라고 신문에 나와 있었어."

"두 사람은 그 국제 완구 박람회에 참가할 예정이었을까요?"

"그래, 아직은 좀 이르지만, 마사오 말대로 세계여행도 겸해서였겠지"

"해바라기 공예에서는 수출도 하고 있나요?"

"일본 장난감 생산액의 3분의 2 이상은 수출하고 있어."

마이코는 장난스럽게 토시오를 바라본다,

"장난감 수출액 1위는 어느 나라라고 생각해?"

토시오는 조금 당황했다.

"일본이야. 이것도 후쿠나가 씨가 가르쳐 준 건데, 수출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됐어. 메이지 초기에 이미 요코하마에 있는 외국 상관을 통해 장난감 수출이 시작되었어. 세계대전 이전에는 일본 전체 무역액의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수출품이었다고 하더라고. 일본 장난감의 인기 비결은 정교한 기술과 아이디어의 재미,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렴한 가격이었고. 종전 이후에 장난감은 빠르게 부활했어. 인간에게 장난감은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인 것 같아. 주둔군이 버린 빈 깡통을 두드려서 만든 재료로 업체는 장난감 자동차를 만들어냈을 정도였다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수출 회복도 빨랐어. 마찰 장난감의 개량을 계기로 일본 장난감은 다시 수출의 선두에 서게 되었어."

"마찰 장난감?"

"스프링을 사용하지 않고도 달리는 자동차를 말하지. 봐, 바퀴를 몇 번 돌리고 손을 놓으면 의외로 멀리 가는 자동차가 있을 거야. 이는 자동차 내부에 플라이휠이라는 무거운 톱니바퀴가 들어있기 때문이지. 자동차의 바퀴를 바닥에서 마찰시키면 플라이휠이 빠르게 회전하도록 되어 있어. 이 플라이휠의 관성으로 놀이기구는 꽤 멀리까지 달릴 수 있고. 원형은 메이지 초기에 하숙집 장인이 고안했다고 하더군. 이 마찰물을 시작으로 수출은 순조롭게 성장했어. 1951년에는 수출액이 3백억에 육박하며 세계 1위로 성장했고."

"해바라기 공예에서는 어떤 장난감을 수출하고 있나요?"

"아까 보여주었던 달그락달그락 새가 달러박스인 것 같아. 나머지는 비슷한 소품 장난감. 하지만 더 큰 시장을 노린 해바라기 공예는 스페이스 레이스에서 실패하고 말았지."

토모히로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사오에게 끈질기게 '마도죠'라는 것을 어떤 외국인에게 건네주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마도죠라는 것은 장난감의 상품명이 아니었을까.

"국제 박람회에선 여러 가지 신제품이 출품되겠지요?"

"물론이지. 바이어들은 눈을 부릅뜨고 좋은 제품을 찾아낼 거야. 국제 박람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 회사도 큰 수익을 올릴 수 있겠지."

토시오는 마이코에게 토모히로의 임종을 이야기했다.

"마도죠란 뭐야?"

"모르겠어요. 가방 안에 들어있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마이코는 다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형사가 너랑 얘기하고 싶다고 했어"

"형사가?"

"에노키초 경찰서 교통과 형사야. 사고 경위를 듣고 싶다고 했어."

"우다이 씨는?"

"나는 싫어. 그 차에 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해 주면 좋겠어. 얼굴만 내밀고 오면 돼. 금방 끝나겠지."

그때 마사오가 복도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이코가 알아차렸다,

"나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마."

라고 말하면서 토시오의 곁을 슬그머니 떠났다.

마사오는 홀을 둘러보다가 토시오의 모습을 보고는 옆으로 다가왔다. 한쪽 다리는 여전히 끌고 다니고 있었다. 마사오는 토시오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하루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럴 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평범하게 유감스럽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서둘러 글씨를 써서 찢어서 마사오에게 건네주었다.

"제 주소입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예의를 차리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곤란합니다."

"절대 그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싫으시다면........"

마사오는 종이 조각을 소중히 받았다.

"호놀룰루로 떠나실 건가요?"

"아니요."

마사오는 분명하게 말했다. 마이코가 뒤를 돌아보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남편의 부탁이 굉장히 강했는데도요?"

"평소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분명 의식이 정상적이지 않았겠지요. 데이비스 씨에게 회사에서 전화를 걸도록 하겠습니다."

마사오에게 아직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우연히 마사오를 구해서 차에 태워준, 지나가던 사람이 알고 싶어할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부인도 ...... 몸조심하세요"

"고마워요."

마사오는 무심코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가는 마사오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토시오는 허탈한 표정으로 마사오를 배웅했다.

"불행이란 것은 한순간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구나."

어느새 마이코도 마사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히로가 죽으면 마사오는 소우지와 함께 할 수 있을까?"

마이코의 말은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하는 말이라서 부도덕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소우지를 사랑하지는 않을 거예요."

"호오.......그렇구나."

마이코는 토시오의 눈빛에 놀란 듯했다.

"마와리 가문에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어. 토시오 군이 마사오와 친분을 쌓은 것은 다행이야. 좀 더 편하게 대해 주었으면 좋겠어. ….. 사랑에 빠진 척 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토시오는 마지막 말을 못 들은 척했다.

토시오의 운전으로 두 사람은 에노키초 경찰서에 도착했다. 토시오만 에그에서 내렸고, 차는 마이코가 운전하며 멀어져 갔다. 토시오는 마이코의 차를 배웅하면서 마사오의 긴 가방이 뒷좌석에 놓여있던 것을 떠올렸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2 스페이스 레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