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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01

실험부부 (炎の女) - 다카기 아키미쯔 / 홍영의 : 별점 3.5점

정치가 가네꼬 센죠와 시오다 고헤이는 서로 앙숙으로 가문도 원수같이 지내는 상황. 가네꼬의 딸 하츠에와 시오다의 아들 쇼지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헤어져야만 했고 하츠에는 앙갚음의 심정으로 쇼지의 회사 상사 모리 나오키와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한 뒤 모양새만 갖춘 부부로 지내게 된다.

이러한 하츠에를 견디지 못한 모리는 정부 리츠코와 공모하여 알리바이를 만들고 하츠에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나 알리바이를 위해 리츠코가 하츠에로 변장한 직후 화재사고로 화상을 입어 하츠에의 신분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며, 리츠코가 입원한 이후부터 시오다 가문의 주변에 연쇄살인이 발생하고 모든 살인 사건 현장에 하츠에를 암시하는 향수에 적신 손수건이 발견되는데...


다카키 아키미쯔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 제목이 너무나도 황당한데 원제도 "불꽃(같은) 여자"라는 조금은 낡은 듯한 제목이네요. 제목과 너무나도 형편없는 책 디자인에 비해 번역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밀고자" 이후의 작품으로 시리즈의 다섯번째 장편이라고 합니다. 발표년도는 1967년이군요.

전작들처럼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가 여러 단서를 모아 조합하여 추리하는 전개인데, 정통물에 가깝게 모든 정황과 사건에 관한 증거들이 독자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되기 때문에 지적인 만족감을 느끼면서 즐길 수 있는 정교한 작품입니다. 여전히 현실적이고 냉정한, 그리고 평범한 인물에 가까운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라는 캐릭터도 그다지 튀지는 않지만 사건들을 차분히 이해하고 평가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건을 해결하는, 한마디로 해설자와 탐정을 결합한 또다른 형태의 탐정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고요.
그간 읽었던 2편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와는 다르게 4명이나 살해당하는 연쇄살인이 벌어진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연쇄살인극은 사건이 많으므로 단서도 많이 제공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용의자가 점점 줄어들어 막판에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기 쉬워진다는 약점이 존재하나 이 작품은 치밀한 전개와 기발한 트릭으로 이러한 약점을 끝까지 잘 커버하고 있습니다.
또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를 제외하고 주 화자로 등장하는 리츠코의 심리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해서 사건마다 급변하는 주변 상황에서 오는 불안감과 공포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 되면서도 돋보이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작인 "야망의 덫 (밀고자)"와 비슷한 전개라 전작을 읽은 독자라면 약간 (정말 아주 약간~) 식상할 수도 있는 트릭이라는 점, 그리고 결정적인 사건의 해결을 위해서 증거보다는 일종의 함정수사를 펼친다는 점은 반칙으로 느껴졌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결정적인 증거 자체가 없다는 점은 정통파로서는 큰 약점이라 생각되고요.
그리고 범인이 막판에 사건을 "미궁"으로 모는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결정적인 범인역의 희생자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도 천재적 발상의 범죄에 비해 조금 부족해 보여서 아쉬웠어요.

그래도 전작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하게 발전된 구조로 전개되기 때문에 읽기전에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작가의 작품에서도 상당히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의 작품이라 그런지 시대적으로 낡은 티도 적으며 즐길거리도 많거든요. 무엇보다도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와 천재적이고 악마적인 범인과의 두뇌 게임 하나만으로도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범인이 "거의" 성공할 뻔 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죠. 구하실 수 있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05/05/25

야망의 덫 - 다카기 아키미쓰 / 백야성 : 별점 4점

증권회사에서 촉망받는 젊은이로 야망에 불탔던 세가와 시게오는 연이은 실패로 알거지가 된 채 퇴사하고 말았다. 그 뒤 친구 야마구치 가즈미의 소개와 상당한 월급에 끌려 사까이 미끼오라는 사나이가 이끄는 정체불명의 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사까이 미끼오의 정체는 스파이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는 세가와에게 옛 친구 오기노가 상무로 있는 "시찌요오 화학"이 개발 중인 일종의 첨가제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라고 요청했다. 세가와는 큰 돈과 과거 자신의 연인이었던 오기노의 아내 에이꼬에 대한 감정이 얽혀 산업 스파이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밀고를 받은 오기노에게 모욕당하고 쫓겨났는데 그 직후, 오기노가 교살당했다. 세가와를 보호해 주기 위해 가즈미는 둘이서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었지만 가즈미마저 살해되었고, 현장에서 도망치는 세가와를 목격한 목격자까지 등장해서 경찰은 세가와를 범인으로 지목하는데....

풍림출판사에서 출간된 다카키 아키미쓰의 작품입니다. 다카키 아키미쓰 작품은 상당수 번역되어 있지만 구하기 쉽지 않은데, 이 책은 헌책방에서 운좋게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원제는 "밀고자"입니다. "문신 살인사건"의 가미즈 교스케가 아닌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지요. 조사해보니 발표년도는 1965년이군요.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는 이전에 "제로의 밀월"이라는 작품을 읽어본 덕에 그다지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천재형이라기 보다는, 이지적이면서도 냉정하고 객관적인 판단력의 소유자로 평범한 사람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되는 인물입니다.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이 작품은 50여년 전의 일본 작품답지 않게 변격물적인 느낌이 거의 없다는게 특징입니다. 상당히 현실적인 이야기가 전개되어 이후의 사회파 작품들과 유사한 느낌을 전해주거든요. 이전에 읽었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인 "문신 살인사건"같은 당시 일본 작품 특유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아무래도 검사라는 주인공 탐정의 특징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잔혹하지 않은, 어떻게 보면 평범한 2건의 살인이 등장할 뿐이지만 산업스파이와 불륜관계가 상당히 복잡하게 얽히고, 세가와가 진범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독자에게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전개시키는 솜씨는 정말로 탁월합니다. 그야말로 거장이라는 명성에 값한달까요?

또 트릭이 정통본격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등장인물도 적고, 정확한 동기마저 가려져 세가와에게 의심이 집중되는 와중에 극적인 반전이 벌어진다는 점, 그리고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정하게 제공하는 정통물의 미덕까지 갖추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단서가 일종의 "우연"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 결국 범인의 사소한 실수와 방심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구조 등 약간의 단점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변격물을 지나 사회파에 이르는 과도기의 다리 역할을 충실히 하는, 그러면서도 "추리"라는 쟝르의 기본 정신을 잃지 않는 좋은 작품입니다. 다카키 아키미쓰의 거장으로서의 풍모와 시대를 앞서가는 감각을 충분히 전해주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그나저나... 번역이 더욱 좋았더라면 완벽했을텐데 약간 아쉽네요.

2014/06/02

탐정사전 - 김봉석, 윤영천, 장경현 : 별점 1.5점

탐정사전 - 4점
김봉석.윤영천.장경현 지음/프로파간다

제가 어렸을 적, 국내 최고의 추리문학 출판사였던 해문은 "세계의 명탐정 50인"(이후 일본 탐정을 뺀 44인으로 축약 재간)이라는 책을 출간했었습니다. 명탐정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에 명탐정이 등장하는 추리 퀴즈를 한 개 선보이는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었죠. 이런 핵심 내용 외 일러스트, 수록된 여러가지 추리 관련 정보도 인상적이었고요. "스포일러"라는 점에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추리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나가던 추리 키드에게는 정말로 좋은 선물 같은 책이었습니다. "세계의 위인은 명탐정"이라는 동일 구성의 유사 도서가 연이어 출간되었던 걸로 보면 꽤 인기를 끌었던 것 같네요.

이 책 "탐정 사전"의 출간 정보를 들었을 때에는 "세계의 명탐정 50인"의 현대적인 재구성이 될 걸로 예상했습니다. 스포일러 문제 및 저작권 이슈로 추리 퀴즈 부분이 빠지더라도 그만큼 잘 만들어진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을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출간과 거의 동시에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솔직히 실망이 큽니다. 이 책이 대체 누구를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는지 알 수가 없는 탓이 큽니다. 추리 문학 초보자를 위한 책이라면 정말로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엄선하여, 그중 등장한 탐정들을 중심으로 소개했어야 했습니다. 애호가를 위한 책이라면 잘 알려지지 않은 탐정을 소개하거나, 기존에 소개된 탐정이라도 다양한 정보를 충실히 실었어야 하고요. 그런데 이 책은 이도 저도 아닙니다. 뷔페에서 맛이나 코스 구성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얹어놓은 쟁반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일단, 어떤 기준으로 탐정들이 선정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탐정을 담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선정 기준은 막연하게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출판물이라면 판매 부수나 시리즈 권수, 방송물이라면 시청률이나 방영 횟수, 또는 역사적 의의 등의 기준이 있어야 했을 텐데 말이지요. 솔직히 선정 기준은 그냥 저자들의 팬심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IWGP"의 마시마 마코토, "트릭"의 야마다 나오코와 우에다 지로, 니시오 이신의 이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일본의 3대 탐정 중 하나인 가미즈 교스케, 다카기 아키미쓰의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우치다 야스오의 시나노의 콜롬보 다케무라 이와오나 경시청의 오카베 경부, 여정 미스터리의 대가 니시무라 교타로의 도쓰가와 경부 등을 제치고 소개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꼭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수많은 걸작에서 활약했으며 추리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탐정들 중 소개되지 않은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프렌치 경감, 커크릴(콕크릴) 경감, 방코랑은 그렇다쳐도, 대체 뤼뺑은 왜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명 탐정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보기엔, 그 외의 황금기 명탐정은 거의 수록되어 있으니까요.

"차일드 44"의 레오 데미노프와 같은 스탠드얼론 작품의 주인공이 포함된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작품이 추리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레오 데미노프가 전통적인 ‘탐정’ 역할에 충실한 인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소련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평가하고 싶었다면, 시리즈 캐릭터인 아르카디 렌코가 더 타당했을 것입니다. "토로스 & 토르소"의 헥터 라시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리즈라고는 하나 국내에선 한 권만 소개되어 있어 스탠드얼론으로 보이고, 탐정 같지도 않은 인물인데 뤼뺑마저 빠진 명단에 포함되었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탐정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시티헌터"의 사에바 료가 실려 있는 부분은 어이없음의 극치입니다. "지뢰진"의 이이다 쿄야까지는 그러려니 하겠지만요. 굳이 추리만화에서 뽑고 싶었다면 "Nervous Breakdown"의 두 컴비나 "절대미각 식탐정"의 다카노 세이야를 꼽는 게 나았을 겁니다. 완성도를 떠나 최소한 ‘추리 만화’이긴 하니까요. 대중문화적 아이콘으로 넣고 싶었다면 "춤추는 대수사선"의 아오시마가 더 적절했을테고요.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절판본이나 국내 미출간작에 등장한 탐정을 소개한 점도 아쉬웠습니다. 카렐 차페크의 메이즈리크 시리즈를 소개하며 국내 절판이라 언급했는데, 이런 식이면 독자보고 어쩌라는 건가요? 커트 캐넌 시리즈도 한 권만 출간되었는데, 현재 절판입니다. 뒤렌마트의 베르라하(베를락) 경감 시리즈, 모돌이 탐정도요.

캐릭터별 글 수준이 들쭉날쭉한 것도 문제입니다. 말 그대로 사전이라면 구성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캐릭터는 단순히 정보만 나열하는 반면, 어떤 경우는 작품 분석과 작가 소개까지 이어집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정보 이상의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 항목도 많습니다. 반 두젠(밴 듀슨) 교수의 경우, '생각하는 기계'라는 별명과 대표작 "13호 독방의 문제" 언급만으로 그치는데, 이런 내용이라면 하루에도 수십 개 작성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차라리 소개를 하지 않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대부분의 항목에서 주요 작품과 그 속에서의 활약상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에요. 

그 외, 탐정들의 배열도 시대순이나 장르순이 아니라 이름순이라는 점도 의아했으며 실제 캐릭터가 묘사된 일러스트조차 특별함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건질 만한 부분도 없진 않았습니다. 결과물 자체는 아쉬웠지만, 고전 본격물부터 하드보일드, 현대물, 대체역사 판타지, SF, 만화, 드라마까지 아우르는 풍성한 범위는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의 무라노 미로, 하라 료의 사와자키에 대한 소개는 흥미롭게 읽었고, 미야베 미유키의 스가무라 사부로 시리즈, 센도 타카시의 "폐허에 바라다"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로버의 악당들"의 빌 파믈리, 토니 힐러만의 인디언 탐정 조 리프혼과 짐 치처럼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Q.E.D"의 토마 소같이 많이 소개되었지만 의외로 아는 사람이 적은 탐정 소개도 반가왔던 점입니다. "Q.E.D" 소개글은 작품의 매력을 잘 전달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장점보다 단점이 훨씬 크게 느껴졌기에,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괜찮았던 몇몇 항목에 비해 전체적인 만족도가 너무 낮기 때문입니다. 방향성이 없는 기획과 인터넷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정보들이 대다수인 탓이지요. 30여 년 전 읽었던 "세계의 명탐정 50인"과 비교해 특별히 나은 점도 없고요. 가격까지 고려하면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덧붙여 눈에 띈 몇 가지 오류를 정리해봅니다. 엉클 애브너 항목에서 "나보테(나봇)의 포도원"을 "나보프의 포도밭"이라 오기한 부분, "차이나타운" 작가 소개 영역에서 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표기된 점(각본가가 언급되었어야 함), 유불란의 후속작이 없다고 언급한 점 등입니다.

2020/03/08

여태까지 나만의 다카기 아키미쓰 순위

오래전, 30~40년 전 출간된 작품까지 포함해서, 국내 출간작은 어쨌건 모두 읽은 것 같아 정리의 의미에서 포스팅합니다. 모두 아홉편으로, * 표시된 작품은 오래전 절판본들입니다.

1위 : 별점 4점 "야망의 덫"*

2위 : 별점 3.5점 "실험부부"*

공동 3위 : 별점 3점 "문신 살인 사건" "파계 재판" "대낮의 사각"

공동 6위 : 별점 2.5점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유괴" "제로의 밀월"*

별점 1.5점 "법정의 마녀"

절판본 순위가 높기는 하지만, 대체로 평균 이상은 해 준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이 2.8점으로 3점에 육박하니까요. 얼마전 읽었던 "법정의 마녀"가 별점을 많이 깎아 먹었는데, 이 작품만 없었어도 평균 별점이 3점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매 번 안타를 기대해 볼 만한, 명실 상부한 타율왕이라 할 수 있지요.

최근 나온 작품들은 가미즈 교스케 ("문신 살인사건",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와 햐쿠타니 센이치로 ("파계 재판", "유괴", "법정의 마녀") 시리즈가 많고, 기리시마 사부로 ("야망의 덫", "실험부부", "제로의 밀월") 시리즈는 단 한 편도 정식 출간되지 못했는데, 정식으로 출간되기를 바랍니다.

여태까지 나만의 요코미조 세이시 순위 (ver2.0)

2015/05/05

대낮의 사각 1/2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3점

대낮의 사각 1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대낮의 사각 2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도쿄대 역사에 남을 정도의 천재 스미다 고이치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태양 클럽"이라는 조직을 만든 뒤, 전후 혼란기에 거대한 재력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잠깐의 성공 이후 스미다는 폭주한 끝에 자살이라는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의 추종자 중 한명이었던 쓰루오카는 스스로 "사기"라는 범죄로 성공할 생각을 굳히는데...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으로 무려 800여페이지가 넘는 초거대작. 문예춘추 선정 일본 미스터리 100선에도 선정된 (28위)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도착의 사각"이 떠오르는 제목이라 당연히 본격물이라 생각했는데, 작가의 시리즈 캐릭터 가미즈 교스케, 기리시마 사부로, 햐쿠타니 센이치로가 등장하는 정통파 본격 추리소설이 아니라 쓰루오카 시치로라는 천재적인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 소설이라서 조금 의외였습니다.

그래도 재미만큼은 확실합니다. 얼마나 범죄가 치밀하게 그려지는가?가 범죄 소설의 핵심 재미 요소인데, 등장하는 어음 편취 사기의 설득력이 아주 높은 덕분입니다. 어떻게 어음을 손에 넣는지와 그것을 어떻게 현금화 하는지에 대해 재미있으면서도 기발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등장하는 여러 사기 사건 중에서도, 어음을 발행하는 피해자가 홀딱 속아 넘어가도록 일본 조선 주식회사로 위장한 회사 건물 안에서 연극을 연출하듯 모든 상황과 장소를 조작했던 '신요 기선 어음 편취 사건', 그리고 실존하는 공사관을 무대로 대사의 비서와 직접 짜고 벌인 '파세도나 공사관 사기 사건'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외의 사건들도 치밀함은 뒤지지 않습니다. 실제 범죄자와 직접 인터뷰를 한 뒤 쓰여졌다고 하는데, 생생함과 설득력이 정말 대단한 수준이에요. 항상 사기는 당하는 쪽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치밀하면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아울러 주인공이 도쿄대 법대 출신이라는 설정을 대기업 임원과의 술자리 대화를 통해 자금을 편취하는 사기라던가, 경찰 취조를 빠져나가는 부분 등에서 효과적으로 써먹는 것도 괜찮았어요.

또 범죄 소설은 주인공 범죄자의 캐릭터도 무척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뤼팽"은 고전 본격물에 가까워 뺀다 쳐도 "팡토마스", 리처드 스타크의 "악당 파커", 퍼트리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등의 유명 악당 캐릭터는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이 이어지고 있죠. 이 작품 역시 등장인물들 묘사가 아주 그럴듯한데, 그 중에서도 자신의 모든 행동을 분단위로 기록한다는 천재 스미다 고이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초반부에 퇴장하지만 천재이자 광인으로 그 면모를 유감없이 과시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지배한 남자 류비세프의 흑화버젼이랄까요. 참고로, 실존했던 전후 도쿄대 출신 수재들이 벌인 "히카리 클럽" 사건 주역에게서 모티브를 얻어 묘사했다니, 이 역시 생생함이 남다를 수 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주인공들의 입을 빈 전쟁 직후, 이른바 전중 혹은 전후파라 불리우는 세대의 시각도 돋보였습니다. 메이지 세대라 불리우는 전쟁을 일으킨 세대에 대해 맹목적인 분노와 적개심 가득한데 1920년대 생인 작가 본인의 시각일겁니다. 허나 이들 역시도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도 성공은 하고 싶고, 위기에 몰리면 피해자 코스프레에 몰두하는 비겁한 인물들일 뿐입니다. 시대의 대악당을 꿈꾸지만 결국 소인배라는 것이 이채롭네요.

이렇게 소재 및 전개, 캐릭터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재미를 갖추고는 있는데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일단 이야기의 흐름이 하나의 거대 장편이라기 보다는 옴니버스 범죄물처럼 토막나 있어서 하나의 호흡으로는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럴거라면 여러편으로 시리즈를 쪼개던가, 아니면 큰 줄기의 이야기는 넣지 않는게 좋았을겁니다.

주인공 쓰루오카의 캐릭터가 스미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점도 아쉽습니다. 본인 스스로 악인을 자처하는데 인간적인 모습이 계속 엿보이게 만드니 죽도 밥도 안된 느낌이거든요. 차라리 "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다테 구니히코처럼 막 나갔어야 했어요.
그나마 마무리 직전까지는 그런대로 능력있는 악당 느낌을 전해주는데, 마지막의 급작스러운 몰락 탓에 캐릭터 훼손도 심해져 버리고 말았네요. 쓰루오카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후쿠나가 검사에 의해 체포된 뒤, 파세도나 공사관 사건에서 고용했던 하수인 곤잘로의 증언으로 한순간에 끝장난다는 결말인데 고작 이정도밖에 안되나? 싶었던 탓입니다. 좀 더 치밀한 안배, 효과적인 도주가 덧붙여져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묘사가 별로라는 것도 단점입니다. "여자는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도구는 많을 수록 좋다"라는 스미다의 신조가 작품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지만, 다카코의 자살은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그야말로 개죽음이며 극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니까요. 일종의 성녀 이미지를 작품에 집어넣어 쓰루오카의 악을 비교하여 더욱 추악하게 묘사하려는 의도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진부한 캐릭터에 진부한 묘사로 인해 분량만 아까웠습니다.

그리고 이건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사기극들은 만화 "쿠로사기" 등에서 이미 접해본 것들과 비슷해서 신선함이 떨어지기는 하더군요. 작품이 발표된 시기에 읽어보았다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을텐데 지금 읽기에는 낡기도 했고요.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쓸데없는 묘사는 덜어내고 패배를 모르는 냉혹한 악당 쓰루오카의 범죄 행각에 촛점을 맞추었더라면 별점 4점 이상은 너끈했을텐데, 약간의 단점들로 인해 감점합니다. 그래도 천재적인 범죄에 전율하게 만드는 거장의 솜씨는 놀라운 고전 명작임에는 분명한 만큼, 추리소설 애호가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 : 현재까지 국내 출간된 다카기 아키미쓰 작품 8편은 전부 다 읽어보았는데 개인적인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야망의 덫" - "실험부부" - "파계재판" - "문신 살인사건" - "대낮의 사각 (본편)" - "유괴" -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 "제로의 밀월"

작품별 별점 평점이 2.037.., 3점이네요. "타율왕"에 올려도 부족함이 없겠습니다.

참고로, 야망의 덫과 실험부부는 제 추리소설 리뷰 초창기에 읽고 감상을 남긴 것이라 지금 읽으면 점수가 좀 처질 수도 있는 점 양지해 주세요.

2012/02/16

오래된 책들 (1) - 다카기 아키미쓰 시리즈

가족모임 때문에 오랜만에 본가에 찾아갔다가 예전에 구입한 책들을 보았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구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옛 생각도 나서 몇 장 사진을 찍어 소개해 드립니다. 아래의 "야망의 덫", "실험부부", "제로의 밀월"로 구성된 다카키 아키미쓰 3종 세트입니다. 가미즈 교스케가 아니라 다른 캐릭터인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입니다. 정말 헌책방에서 어렵게 한 권 한 권 모았던 기억이 납니다.

척 보기에도 무척 낡아 보이고, 싼티나는 표지 디자인과 "D. 아끼미쯔(쓰)"라는 저자 표기에서 세월이 많이 느껴지죠? 이 작품들에 더하여 동서판 "문신 살인사건"이 포함되면 국내 출간된 다카키 아키미쓰 장편 컬렉션이 완성됩니다. 혹시 제가 모르는 작품 중에 출간된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는 한 이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 쓸데없는 자부심도 아주 살~짝 느끼고 있답니다.

그나저나 좋은 작가인데, 작품들이 좀 더 많이 소개되면 좋겠네요. 제가 가지고 있는 헌책 절판본의 가치가 떨어져도 괜찮습니다!





2014/04/21

파계 재판 - 다카기 아키미쓰 / 김선영 : 별점 3점

파계 재판 - 6점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검은숲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 신극배우였던 무라타는 내연녀와 그의 남편을 살해한 뒤 사체를 유기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는 남편을 살해한 내연녀 야스코를 위해 시체 유기를 도왔다는 혐의는 인정했지만, 나머지 혐의는 모두 부인했다. 검사는 무라타의 유죄를 확신했으나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의 활약으로 서서히 흐름이 바뀌고, 결국 무라타의 비밀까지 밝혀지는데...

누명을 뒤집어 쓴 피고인 무라타 가즈히코의 결백을 밝히고 진범을 밝혀내는 햐쿠타니 센이치로 변호사의 활약이 그려지는 법정 미스터리입니다. 일본 추리작가 다카기 아키미쓰의 대표작 중 한 편이지요. 작가가 후기에서 언급하기로는, 이전 가미즈 교스케 단편을 확장했다고 합니다. 도서출판 검은숲에서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두 번째로 출간되었는데,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에 이어 국내 정식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네요.

장점이라면, 재미 하나는 확실하다는 겁니다. 두 건의 살인사건 자체가 흥미롭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한순간에 드러나는 진범과 그 진상이 매우 인상적인 덕분입니다. 작가가 사법고시 준비 수준으로 조사했다는 법정 묘사는 허언이 아닐 정도로 상세하고요. 증인이 한 명씩 등장해 검사와 변호사가 벌이는 치열한 공방도 매우 긴박감 넘치게 그려집니다.

또한 이 작품은 단순한 법정극을 넘어서는 사회파적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부락민 출신이라 평생 차별에 시달렸다는 설정을 통해, 일본 사회에 내재한 차별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인 "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차별을 그린 동명 작품에서 따왔으며, 부제 역시 "사람이 아닌 자의 이야기"입니다. 검사가 제시하는 무라타의 과거 범죄들이 실은 차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정은 매우 설득력 있습니다. 극단에서의 횡령은 출신을 이용한 협박 때문이었고, 동거녀와의 결별 역시 출신 성분을 알게 된 그녀의 선택 때문이었다는 식으거든요. 특히 그 동거녀가 법정에서 결혼하겠다고 증언하는 장면과, 무라타가 이를 일축하며 "내 돈 때문이지!"라고 외치는 순간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전개 방식도 독특합니다. 전부 법정 안에서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화자인 요네다가 법정출입기자로서 재판 과정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보통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별도 취재나 외부 조사가 동반되는데, 그런 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 덕분에 엽기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들에서 보이던 과장된 묘사 없이 매우 절제되고 날카로운 문체가 돋보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추리적인 요소의 한계입니다. 요네다의 시점만으로 모든 정보가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주는 탓이에요. 법정 미스터리 특성상 상대가 어떤 증언을 준비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이는 이야기 구조를 제한적으로 만듭니다. 또한 정보의 일부가 작위적으로 보인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혈액형에 대한 증언이 위증으로 밝혀지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증인이 정직하게 말했더라면 오히려 사건이 더 애매해졌을거에요. 또한 사라진 천만 엔의 행방에 대해 검사나 경찰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60년대 초반 기준으로도 막대한 액수이며, 자금의 출처를 밝히는 것만으로도 진범 규명의 단서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쓰가와 히로모토와 야스코의 관계 역시 개연성이 부족합니다. 특히 쓰가와가 야스코의 시신을 어떻게 유기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첫 번째 유기에는 무라타의 자가용이 개입되었기에 개연성이 있었지만, 두 번째 범행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또한 진범의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이 작품은 무라타의 재판에서만 끝을 맺습니다. 화자인 요네다를 내세운 만큼 쓰가와 재판 결과까지 다루는 에필로그가 있었더라면 완성도가 더 높아졌을텐데 아쉽습니다. 

배우 이토 교지나 여배우 호시 아키코 같은 인물들도 단순한 미스디렉션으로 사용하기엔 등장 비중이 너무 크다는 느낌을 주고요. 무라타의 무죄를 확신하고 자비까지 들여 조사에 나선 햐쿠타니 변호사의 동기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다는 점도 의문입니다. 상황상 무라타가 범인처럼 보이니까요. 이후 시리즈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캐릭터 설정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카기 아키미쓰의 법정 미스터리는 "기리시마 사부로 검사 시리즈"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작가 역시 변호사보다는 검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렇게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극적 긴장감과 사회파적 메시지를 고루 갖춘 완성도 높은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사법고시 수준의 공부를 했다는 열정이 느껴졌고, 몇몇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재미를 함께 갖춘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덧 : 책의 디자인은 나쁘지 않지만, 표지 일러스트 때문에 책 하단에 오물이 묻은 것처럼 보입니다. 구입 당시에는 띠지로 가려져 있었지만, 이런 디테일은 조금 더 신경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