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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3

피가 흐르는 곳에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5점

피가 흐르는 곳에 - 6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브 킹의 중편집. 세 편의 중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빌 호지스 3부작' 시리즈 후속편이 수록되어 있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를 제외한 두 편은 순문학에 가깝습니다. 순문학 성향이 두드러지는 스티븐 킹의 말년 작품답네요. 말년 작품이라도 왕년의 화끈함, 끔찍한,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을 보여준 작품들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런 느낌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고, 완성도도 높습니다. 다만 '호러의 제왕'이라는 이름값에 걸맞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
초등학생 크레이그는 똑똑했던 덕분에 마을 굴지의 대부호 헤리건 씨에게 책을 읽어 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 때마다 헤리건 씨에게 복권을 선물받았다. 마침 선물받은 복권이 당첨된 어느 해,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에게 아이폰을 사 주었다. 해리건 씨는 평소 이런 제품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금새 아이폰에 푹 빠졌다. 그리고 헤리건 씨가 노환으로 사망한 뒤,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 관에 아이폰을 몰래 넣어 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끊어지지 않았다. 크레이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케니 얀코에 대해 헤리건 씨의 전화기에 넋두리를 늘어놓은 날, 케니 얀코가 자살했다는걸 알게 되는데...

스마트폰이 처음 도입되었던, 아이폰이 첫 출시되었던 시대에서 시작되는 작품. 
핵심은 해리건 씨입니다. 나이는 많지만 똑똑하고,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지만 자기 사람에게는 굉장히 따뜻한 괴팍한 노인을 생생하게 잘 그리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에 대한 헤리건 씨의 탁월한 식견 등은 그를 단순한 노인 이상으로 구체화합니다. 여러모로 "재벌집 막내아들"이 떠올랐습니다. 주인공은 크레이그(진도준)이지만, 해리건 씨(진양철 회장)에게 눈길이 더 간다는 점과, 현재 시각으로 과거 - 여기서는 스마트폰 도입 - 의 경제 효과를 예측하고 있다는 점이 비슷합니다. 실제로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이런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큰 돈을 벌었겠지지요. 스티븐 킹이 과연 애플과 아마존 주식을 샀을지 궁금하네요.
조숙하고 똑똑한 크레이그, 그리고 크레이그의 아버지라던가 케니 얀코, 하긴슨 선생님 등 주변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크레이그가 초등학생에서 시작하여 대학 졸업 후 직장인이 될 때까지 겪는 성장기로도 볼 만 했고요.

그러나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습니다. 크레이그와 해리건 씨의 우정(?)과 크레이그의 성장기를 제외하고는 무덤 속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거는게 거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건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설명되지 않아요. 이래서야 단순한 저주나 주술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매개체가 밀짚인형이나 생닭같은게 아니라 아이폰이라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작가 후기를 보면 '관에 휴대폰이 들어갔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데, 그 아이디어를 잘 살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네요.
크레이그가 옛 은사를 위한 복수를 마치고 전화기를 버리는 결말도 시시했습니다. 옛날 스티븐 킹이라면 좀 더 화끈하게 달려주었을텐데 말이지요. 스티븐 킹도 나이가 들면서 문학적이면서도 은근하고, 다소 애매한 결말을 즐기는데 이 작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글솜씨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 일가를 이루었다 싶은 생각은 듭니다. 다만 기대했던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척의 일생"
3막 : 고마왔어요, 척!
자연재해로 미국은 서서히 멸망해가고 있었다. 마틴을 비롯한 주민들 눈 앞에는 찰스 크란츠의 은퇴를 알리는 광고만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최후가 다가왔다....

2막 : 길거리 공연
길거리 드럼 연주가 제러드 프랑크의 연주에 맞춰 시작된 척의 춤은 구경꾼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제니스도 합류하여 대단한 공연을 마쳤고, 척은 호텔로 가면서 왜 춤을 추기 시작했는지를 떠올렸다.

1막 :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척의 할아버지는 다락방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본 그대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세상을 뜬 다음에, 척은 잠겨진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는 환영을 보았다. 하지만 척은 그를 없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을 결심했다. '내 안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3막이자 맨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마틴과 주민들이 사는 곳은 척의 인생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척이 죽어 가자, 그가 은퇴한다는(죽는다는) 광고가 계속 표시되었고 숨을 거두자 세계가 멸망하게 된 겁니다. 척의 안에 담겨있는 '무수히 많은 것들'은 바로 이 세계였다고 해도 되겠지요. 사실 뻔한 설정이기는 하지만 워낙 글을 잘 써서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3막에서 서서히 세계가 멸망해가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지만, 일상 속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한 때를 묘사한 2막이 가장 좋았어요. 후기를 보면 크리스토퍼 워켄의 팻 보이 슬림 뮤직비디오를 보고 영감을 얻은 듯 한데, 저는 "패리스 뷸러의 해방"의 거리 퍼레이드 장면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척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해 주는 2막, 그리고 척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1막은 문학적인 성취와는 별도로 사족에 가깝습니다. 3막만으로도 이야기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1막은 킹 스스로가 후기에서 1년 뒤에 덧붙였다고 하니 사족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이럴 바에야 3막의 이야기에 가필하여 짧지만 반전이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게 더 나았을겁니다. 독특한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마틴의 눈 앞에 척의 광고만 떠오르는 묘사는 나름 공포스러웠는데, 이를 잘 살리지 못한 느낌이거든요. 설명도 많이 부족했고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잘 살리고, 척 내면 세계라는걸 짧지만 강렬하게 드러내는 식으로 쓰는게 좋았을 것 같네요.
현재의 결과물은 장르 문학보다는 순문학에 가까와서 평가하기 어려운데,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피가 흐르는 곳에"
파인더스 키퍼스의 탐정 홀리 기브니는 뉴스를 보다가 캐스터 채트 온도스키가 테러를 저지른 범인이라는걸 알아챘다. 홀리는 전직 경찰 벨 씨와 벨 씨 손자의 협조로 온도스키가 모습을 바꿔가며 저질렀던 오래전부터의 사건들 증거를 확보했다. 온도스키를 만나 살해할 계획을 세운 홀리는 파인더스 키퍼스 사무실에서 대결을 준비했지만, 제롬과 바버라의 등장으로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미스터 메르세데스" 시리즈 후속작 중편. 빌 호지스 사후 파인더스 키퍼스를 운영하게 된 홀리 기브니가 주인공입니다. 제롬과 바버라 등 전작의 주요 등장인물도 건재합니다.
수록작 중 유일한 범죄 호러 스릴러물로 체트 온도스키의 정체를 파헤치는 과정은 흥미진진한 수사물로 손색이 없으며, 그가 마음대로 모습을 바꿔가며 오랫동안 살아온 '괴물'이라는 설정은 일종의 크리쳐 호러물을 연상케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언급되는, 사람의 얼굴은 몇 가지 타입밖에 없다는 이론도 재미있었습니다. 홀리의 조력자 벨 씨가 탁월한 그림 실력을 갖춘 전직 경찰 몽타주 작성 전문가였고, 그의 손자는 음악 전문가로 성문 분석이 가능하다는 설정도 좋았고요. 온도스키가 과거부터 모습을 바꿔가며 암약했다라는 걸 과학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장치였어요. 호러와 과학 수사가 절묘하게 결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습도 바꿀 수 있고, 빠른 속도를 지닌 온도스키가 고작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진 정도로 죽어 버렸다는 결말은 맥빠집니다. 홀리가 이를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고는해도, 이러한 괴물 상대로는 약해보였기 때문입니다.제롬과 바버라가 사건에 휩쓸리는 전개도 좀 억지스러웠고요. 그래서 읽는 재미는 좋지만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영문학과 교수 드류는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장편 소설을 완성하고자 아버지의 오두막 집에 틀어박혔다. 집필 중 심한 감기에 걸린 상태에서 폭풍이 몰아쳐 오두막집에 고립된 드류는, 자신이 구해준 쥐가 소설 완성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쥐는 소설 완성과 동시에 드류의 멘토 앨이 죽을거라고 말했고, 드류는 거래에 응했다...

소설을 완성하는데 작가들이 문장과 단어 하나 가지고 얼마나 머리를 싸매는지를 재미있으면서도 실감나게 풀어낸 작품. 드류가 태풍으로 오두막집에 고립되었는데, 아프기까지 해서 위기에 처하는 상황도 그럴듯 했습니다.

그러나 환상인지 모를 쥐(악마)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한다는 건 다소 뻔했습니다. 특히 그 거래가 일종의 사기성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런 류 작품들은 보통 비슷한 설정을 가지고 있는 탓입니다. 제 졸작 "계약은 충실하게"도 같은 이야기였지요.
앨이 죽은 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인지, 그래도 소설 완성의 기쁨이 더 큰 것인지 잘 모를 다소 애매한 결말도 아쉬웠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최근 킹의 스타일이긴 하지만, 악마와의 거래가 나오는 이야기에서는 좀 더 화끈한 맛이나 반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6/11/20

별도 없는 한밤에 - 스티븐 킹 / 장성주 : 별점 3점

별도 없는 한밤에 - 6점
스티븐 킹 지음, 장성주 옮김/황금가지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의 중단편집입니다. "사계"처럼 4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 모두 어디선가 봤던 설정들이 대부분인 탓에 아이디어는 대단치 않습니다. 대단한 복선이나 극적인 반전이 있지도 않고요. 그러나 독자를 몰입시키는 능력은 정말이지 극에 달해 있습니다. 읽으면서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600쪽 가까운 분량을 하루에 읽을 정도로 말이죠.

한마디로 왜 제왕이 제왕인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하는 단편집입니다. 스티븐 킹과 장르 소설 애호가분들 모두에게 추천드립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합니다.

1922

1922년, 네브래스카 주 헤밍퍼드홈에 사는 윌프리드 릴런드 제임스는 아들 행크와 함께 아내 알렛을 살해했다. 이유는 그녀가 땅을 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뒤, 그의 삶은 지옥으로 변해갔다. 시체를 은닉하던 중, 쥐떼에 뜯어먹히던 처참한 아내의 시체를 목격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서서히 정신적으로 붕괴되어 가던 아들 행크는 이웃집 딸 섀넌을 임신시켰지만, 섀넌의 아버지가 둘을 갈라놓자 가출했다. 그리고 섀넌을 되찾기 위해 강도가 되고 말았다. 결국 섀넌을 만나 도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연인 강도단'으로 연이어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둘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쥐에 물린 상처로 사경을 헤매이던 중, 아내의 유령과 함께 행크의 최후를 실시간으로 바라본 제임스는 이후 팔 하나와 그렇게까지 지키려 했던 땅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가기 싫어했던 오마하로 가 홀로 8년을 버티다가 자살했다....

"자살한 사람과 살인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 그렇다면 길을 못 찾아서 헤멜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 8년간 나는 그곳에서 살았으니까."

아들과 함께 아내를 죽인 뒤, 파멸해 가는 남자를 1인칭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내용은 별게 없습니다. 아내를 죽인 뒤 죄책감과 공포로 인해 서서히 붕괴해가는 주인공, 마찬가지로 비정상이 되어가는 아들 행크, 그리고 그 둘의 삶에 휩쓸려 무너져가는 이웃들을 그려내는 적나라한 묘사가 전부입니다. 이렇게 범죄, 살인 이후 무너져가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야 "죄와 벌"을 비롯해서 차고 넘칠 정도로 많지요.

그러나 이런 뻔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제왕의 필력이 너무나 압도적인 덕분에 읽는 내내 손에서 떼기 힘듭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 펼쳐지거든요. 2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중편인데 거의 모든 페이지에 공포와 혐오, 증오가 가득차 있습니다.

단순히 죄책감에서 비롯된 심리 묘사뿐 아니라 제왕다운 고어한 묘사도 대단합니다. 그 중에서도 누구나 혐오스러워하는 '쥐'를 매개체로 한 일련의 묘사는 정말 최고에요. 아내의 시체는 물론 자살한 아들 시체까지 쥐에게 파먹히고, 본인 스스로는 환각을 보고 자기 자신을 씹어먹어 죽는다는 결말에 이르는 과정까지의 묘사는 흡사 크리쳐물을 읽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생지옥에 대한 고어스러운 묘사만 반복적으로 펼쳐졌다면 조금은 둔감해질 수도 있었을텐데, 순수했던 아들 행크가 변해가는 과정과 천사와 다름없었던 희생자 섀넌과 같은 피해자들에 대한 묘사로 극적인 효과를 배가시킵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러니라면 알렛이 한 말대로 했더라면, 이 가족은 최소한 지옥을 겪지 않았으리라는 점입니다. 특히나 만취한 알렛의 주정을 통해 행크가 어머니 살해를 결심하게 만든 "임신은 시키지 마. 원 없이 훑어도 좋아, 네 물건이 만족해서 토할 때까지. 하지만 안에다 토하면 절대 안 돼. 그랬다간 엄마랑 아빠처럼 평생 한 집에 갇혀 살게 될 테니까"라는 말은 정말로 진실이었어요. 최소한 행크가 임신만이라도 시키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역시 어른들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네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상황부터가 문제이긴 해요. 아무리 아내를 'bitch'로 묘사했더라도 아내를 살해하는데 아들을 끌어들인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인지라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누가 보아도 인간 이하의 범죄니까요.

또 흔한 설정만큼 캐릭터들도 진부합니다. 책을 좋아하며 소들에게 여신들 이름을 붙여주는 주인공 제임스도 기시감이 많이 들지만, 행크와 섀넌이 강도가 되어 극으로 달리는 부분은 '보니 앤 클라이드' 그 자체입니다. 여기서 보니와 클라이드는 범죄에 중독된 것이라 하더라도, 행크가 섀넌을 만난 이후 강도행각을 계속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건 문제에요. 아울러 장점이라고는 했지만 행크와 섀넌을 다룬 부분은 약간 신파 멜로물같을 정도로 지나치게 감성적이라 호불호가 조금은 갈리지 않을까 생각되고요. 주인공이 결국 땅을 잃는 과정도 뻔하고 작위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류의 작품 초심자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섬찟한 작품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 이 책을 읽으시려는 분들께는 당연히 칭찬이겠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5점. 장점, 단점이 명확한데 읽는 내내 눈길을 떼기 힘든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빅 드라이버

'뜨개질 클럽 시리즈'라는 코지 미스터리 시리즈를 쓰는 추리작가 테스는 강연회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 남자를 만나 강간당해 버려졌다. 시체가 쌓여있던 현장에서 겨우 도망쳐 나온 후, 그녀는 스스로 복수할 것을 결심하고 단서를 찾아 나서는데...

전작과 마찬가지로 설정은 뻔합니다. 성폭행 피해자가 스스로 범인을 단죄한다는 복수극은 널리고 널렸죠. 영화 쪽으로는 "네 무덤에 피를 뱉어라"라던가, 본 작에서도 언급된 "왼편 마지막 집" 등등이 떠오르네요.

하지만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은 전편 못지 않습니다. 특히 한편의 범죄 스릴러로 손색 없는 디테일이 아주 좋아요. 테스가 강간범의 모습을 떠올리고, 범행의 강연회를 주선한 라모나 노빌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그녀의 주변을 캐고 범인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 확인하여 복수를 위해 벌이는 과정이 생생하며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복수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돌발상황, 예를 들어 라모나 노빌이 진짜 사건에 연루된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 라모나에게 총을 빼앗기는 상황, 그리고 처음 죽인 남자가 범인인 동생이 아니라 큰 형 빅 드라이버였다 등의 상황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것도 읽는 내내 흥미를 더해 주고요.

아울러 코지 미스터리 작가인 주인공 테스도 마음에 듭니다. 성격적으로 아주 개성이 넘친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코지 미스터리 작가가 하드보일드스러운 응징을 계획하고 수행한다는 이질적인 매력에 더해 애완동물이나 네비게이션 등과 대화하면서 디테일을 잡아나간다는 묘사, 작품을 위해 권총을 사고 사격 연습을 받았다는 식으로 그녀의 작가적 능력 몇 가지가 이야기에 도움을 준다는 아이디어가 괜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 자신에게 닥칠 상황을 상상하고 신고 대신 복수를 선택하는 장면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피해자가 또다른 피해를 우려하여 신고를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참 여러모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네요.

하지만 "1922"에 비해서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범죄물로서 괜찮은 연결고리를 갖추었다고는 했지만, 라모나 노빌 - 레스터 스트렐키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너무 뚜렷해서 딱히 추리의 여지가 없는 탓이 큽니다. 대놓고 '내가 범인입니다' 라는 식인데 그런 것 치고는 연쇄 강간-살인이 너무 오래 지속된 거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테스가 실종되었다면 마지막 강연 의뢰인인 라모나에게 경찰 수사가 미쳤으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데, 테스의 귀걸이를 라모나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습니다. 팔기도 뭐하고, 잘못 들통나기라도 하면 명백한 증거가 될 텐데 너무 부자연스러워요.

마지막으로 빅 드라이버를 죽인 후 자살을 기도하던 테스의 죄책감이 사라질 만큼 빅 드라이버 역시 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과정, 유일한 증인이 될 수 있는 벳시 닐이 마찬가지로 성폭행 피해자로 범행을 눈감아 준다는 결말은 지나칠 정도로 작위적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딸자식 가진 부모로서 분노를 가지고 몰입해서 읽기는 했지만 명확한 단점으로 감점합니다.

덧붙이자면, 2014년 TV용 영화로 영상화가 되었더군요. 그런데 예고편을 보니 작중 애완동물, 네비게이션과 1:1로 나누는 대화 부분을 테스의 인기 시리즈 '뜨개질 클럽' 주인공 할머니가 가상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살짝 각색이 된 듯 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 중 하난데 이렇게 각색을 하다니... 여러모로 딱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공정한 거래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던 스트리터는 우연히 만난 노점상 엘비드와 거래했다. 그의 수명을 늘리려면 누군가에게 그것을 옮겨야 했고, 스트리터는 불알친구 톰을 미워한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씨발놈이 내 여자를 뺏어 갔다고요!"

악마와 거래한다는 내용의 작품 역시 쎄고 쎘죠. 굳이 예를 들자면 졸문 "계약은 충실하게"가 있고요.

그래도 노점상이 악마라는 것에서 시작하여, 시한부 인생 대신 15년 이상의 수명을 약속하고 이후 받게 될 수익의 15%를 요구한다는 등의 디테일은 독특했습니다.
또 거래 후 톰에게 닥치는 불행의 연쇄반응 역시 스티븐 킹답더군요. 과정이 정말 끔찍하기 그지 없거든요. 1인칭으로 그리면 1922가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죠. 아울러 스트리터와 톰의 행복 - 불행의 지수가 한쪽에 쏠리는 일종의 '행복 질량 보존 법칙' 같은, 흡사 동양의 윤회 사상 비스무레한 전개도 볼 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지긴 합니다. 악마와의 거래 후에는 일방적인 행복 - 불행의 과정만 나열될 뿐 딱히 반전도 없고 결말도 애매한 탓입니다. 스트리터가 톰이 가졌던 행운까지 차지하고 만다는 결말은 영 와 닿지 않았어요. 악마와의 거래가 이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날 리가 없는데 말이지요.

하긴, 애초에 스트리터가 톰을 팔아넘긴 것도 딱히 설득력이 없습니다. 여자를 빼앗긴 남자는 그게 수십 년이 지나더라도 복수한다는 교훈을 주려고 했던 걸까요? 저는 솔직히 스트리터가 가공할 정도로 찌질하고 속이 좁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다른 악마와의 거래 소재 작품에 비하면 딱히 쳐줄 부분이 없는 소품입니다. 딱히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

다아시는 1982년에 만난 회계사 밥 앤더슨과 결혼하여 27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오던 중, 우연히 밥이 유명한 연쇄살인마 '비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이 출장간 어느 날 리모컨 건전지를 찾기 위해 차고를 뒤지다가 밥의 비밀 창고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뭐 이 역시 소재는 뻔합니다. 아내, 혹은 남편에게 자신의 정체를 비밀로 한 배우자, 혹은 다른 가족을 다룬 작품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수많은 슈퍼 히어로물이 대체로 그러하고, "트루 라이즈" 같은 작품 역시 마찬가지겠죠. 이 작품처럼 배우자가 범죄자라는 설정 역시 많고요.

이런 류의 작품은 보통 배우자의 정체를 눈치챈 순간부터 극적 긴장감이 생기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결말 두 가지, 즉 '배우자의 은밀한 생활에 동참하거나', '그만두게 하거나' 중 '그만두게 하는' 쪽으로 흘러가는 것 역시 예상대로에요. 보통의 드라마가 부부 동반으로 비밀 정보원이 되거나 슈퍼 히어로가 된다면, 살인마 이야기는 함께 하는 쪽보다는 그만두게 하는게 정상이니 당연하지요. 결국 다아시가 밥을 죽인다는 결말도 솔직히 너무 뻔했어요.

하지만 거장의 솜씨가 작품을 살립니다. 우선은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묘사가 대박입니다. 다아시가 밥의 비밀 창고를 발견하는 과정과 정체를 알아가는 과정의 묘사, 이후 자신의 정체를 아내가 알았다는 것을 눈치챈 밥이 다아시에게 찾아가 이야기하는 장면 묘사 등에서 서늘함과 긴장감이 잘 살아 있는 덕분입니다. 아들과 딸을 생각하여 경찰에 신고하지 못하는 다아시의 딜레마 역시 설득력 있어서 뻔한 전개에 충분한 긴장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결말도 뻔하지만 노형사 홀트가 등장하여 깔끔하게 마무리하는건 마음에 들었습니다. 밥의 잔인한 범행을 경찰 입으로 밝혀주면서 응징의 정당성을 높여주면서, 결국 다아시가 밥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체포되었을 것이라는 말로 다아시의 죄책감을 줄이는 좋은 선택이었다 생각되거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뻔한 소재로도 볼만한 이야기를 뽑아내는 거장의 솜씨를 볼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래저래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과연 비슷한 소재로 쓸 때 저라면 어떻게 쓸지, 한번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2016/01/19

아자젤 - 아이작 아시모프 / 최용준 : 별점 2점

아자젤 - 4점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집인데 SF 장르물은 아닙니다. 악마가 등장하기 때문에 일종의 판타지, 환상 동화류입니다. 모두 13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아시모프의 지인 조지가 주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거나 문제점을 해결해 주기 위해 2cm 악마 '아자젤'을 불러 원하는 것을 이루지만, 예상하지 못한 문제로 불행이 닥친다는 내용이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악마에게 소원을 빈 뒤 수렁에 빠지는 류의 설정부터가 흔하기 때문에, 악마와의 거래에서 밀리지 않는 치밀한 두뇌 싸움이 펼쳐져야 했습니다. 허나 이 작품에서 조지가 아자젤에게 부탁하는 소원들은 일부러 문제가 생기게끔 안배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추상적이거나 문제의 본질과는 떨어져 있는 탓입니다. 겨울 동안 신세를 지기 위해, 눈을 싫어해서 겨울에 별장을 폐쇄하는 지인이 “눈 위에서는 가벼워지도록” 부탁한다는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같은 식으로요. 그래서 억지스럽고 지루합니다.

그나마 세련된 부탁도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길거라는게 뻔해서 이야기의 의외성도 높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여자에게 인기 없는 지인에게 인기가 생기도록 만들었지만, 무시무시한 여자가 그에게 반하고, 그녀의 무시무시한 가족들의 협박으로 결혼하게 된다는 "승자에게"가 대표적입니다.
그냥 의외성이 없다면 모를까, 그다지 웃기지 않은 성인 대상 농담이 많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대학에서 왕따당하는 친구 아들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상대에게서 회피하도록’ 부탁하는 "봄날에 벌이는 싸움"에서는 미녀를 얻는 데는 성공하나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자를 평생 안을 수 없게 되었지요.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 대녀를 위해 그 조각상을 ‘단단하지 않고 부드럽게’ 만들어 달라고 한 "갈라테아"에서는 조각상이 ‘단단해지지 않아’ 문제가 생기고요.

물론 볼만한 이야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재능 없는 농구 선수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그가 골을 무조건 성공하도록 아자젤에게 부탁한다는 "2센티미터짜리 악마", 1년 시한부 인생이 예상되는 지인이 ‘지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를 입지 않도록’ 부탁한다는 "천지간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네"는 꽤 의외성이 있었으니까요.

유머러스한 분위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그야말로 민폐 덩어리이자 쓸데없이 자존감만 높은 조지와 아시모프의 티격태격하는 말싸움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주로 조지의 입을 빌어 묘사되는데 “그건 선생의 부족하디 부족한 지능 덕인 듯합니다.” “좋은 클럽이라면 선생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선생과 이야기하는 건 끈적끈적한 당밀 속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습니다. 노력에 비해 그 대가가 너무 적어요.” 등인데, 아시모프의 자학 개그라 할 수 있겠네요.

허나 비슷한 류의 이야기들에 비하면 재미라든가 독특한 차별점을 찾기 어렵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덧붙여 비슷한 설정이라면, 감히 이야기하자면 제가 쓴 "계약은 충실하게"가 더 낫네요. 소원도 의외성이 있고 결말 역시 그러하다는 점에서 말이죠.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0/12/28

2010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2009 내 블로그 리뷰 총결산

일곱 번째 결산 보고입니다. 12월은 아직 남아있지만 남은 기간 동안 책을 더 읽을 일은 없을 것 같아 포스팅 올립니다.

올해는 만화와 잡지류 제외하고 총 166권을 읽었습니다. 분포로 따지자면 1월 13권 / 2월 8권 / 3월 12권 / 4월 18권 / 5월 25권 / 6월 15권 / 7월 14권 / 8월 18권 / 9월 14권 / 10월 11권 / 11월 12권 / 12월 6권입니다. 장르별로는 추리 / 호러 관련 독서가 95권. 장르문학 전부 합치면 107권이고요.

전체적으로 굉장히 책을 많이 읽은 한 해였어요. 산본으로 이사 온 뒤 근처 도서관을 애용한 덕분이죠. 이사 오길 정말 잘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남들에게 취미가 독서라고 이야기해도 부끄럽지 않은 숫자를 읽은 것 같아 왠지 뿌듯하네요.

그럼 결산 들어갑니다~ 언제나처럼 제 블로그에 올린 리뷰들 중에서만 선정했습니다.

2010년 베스트 추리소설 :
"유다의 창"
단평 : 고전으로서의 묵직함, 트릭이 빛나는 본격 추리소설의 참맛, 그리고 기타 다양한 재미까지 선사해주는 걸작.

올해는 많이 읽은 만큼 별점 4점짜리 후보작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후보작은 아래의 8편이었습니다.

이 중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팬심이 반영되었기에 아깝게 탈락, 그리고 "7퍼센트 용액"은 셜록키언으로서의 애정이 포함되어 있어서 역시 아깝게 탈락. 그리고 "셜록 홈스의 과학"과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는 추리소설로 보기는 조금 어려운 책이라 제외해서 남은 3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유다의 창"을 꼽습니다.

2010년 워스트 추리소설 :
별점 1.5점의 "금요일 밤의 미스터리 클럽"
단평 : 차라리 요리책이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2010년 베스트 장르 문학 :

덧붙여 2010년 베스트 장르문학 단편으로 "계약은 충실하게"를 꼽겠습니다. 이유는 여기서 확인해 주세요!

2010년 워스트 장르 문학 :
별점 1점짜리 두 편 선정합니다.

  • "하노이의 탑"
    단평 : 수학자가 쓴 수학자가 세상을 구한다는 자뻑 판타지로 소설로서의 가치는 전무.
  • "인간 동물원"
    단평 : 읽으면서 내내 불쾌하기만 했던 쓰레기.

결산평 :
일단 추리소설 쪽에서는 많은 고전과 명작들이 많이 소개되어 참으로 풍부한 한 해가 아니었나 싶네요. 하지만 널리 알려진 고전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작품 자체는 그닥인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 좀 의외였달까요? 그래도 추리소설 독자로는 무척이나 즐거운 한 해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기타 다른 도서들은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새롭게 접한 작가들의 좋은 책이 많았던 것 같네요.

내년에도 많은 책들과 함께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상으로 올해 결산을 마칩니다~

2010/12/03

계약은 충실하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206&category_type=series

제 짤막한 단편이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실렸습니다. 

'등단' 이라고 부를 수준도 아니고 약간 창피하기도 하지만 제 이름으로 발표되는 것은 처음이라 굉장히 기쁘네요. 제 이름과 사진이 네이버 메인에 뜬다는 것도 놀라운 경험이고요.

관심있으시면 읽어주시고 의견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악플만은 제발 달지 말아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