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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07

워 머신 : 전쟁 기계 (2026) - 패트릭 휴즈 : 별점 2점

미육군 최강 부대 레인저 부대원이 되기 위한 8주간 훈련에 도전한 81번 훈련병은 우여곡절 끝에 최후의 시험인 '죽음의 행진'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훈련병들은 예정된 훈련 대신 외계에서 온 전투 기계를 만나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가는데...

넷플릭스 최신 영화입니다. 주말 맞이로 감상했습니다.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 초반부의 지루했던 배경 설명이 끝난 뒤, 핵심 이야기인 레인저 훈련생들이 벌이는 외계에서 온 로봇 상대 생존기는 어마어마한 몰입감을 선사해 줍니다.

미약한 희생자들이 도주하면서 생존하려 노력하는, 거대 크리처 호러물 장르물로의 가장 중요한 재미 요소인 '긴장감'을 잘 살린 덕입니다. 나침반 등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등으로 로봇 등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식으로요. 망가진 무전기,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 고장난 장갑차 등의 여러 제약 사항들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도 긴장감과 재미를 더해주고요.

크리처 호러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 크리처의 강력함 역시 훈련병들을 압도하며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들로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우리 편이 다 죽는 영화는 정말 오랫만에 봅니다. 최소한 여군은 살릴 줄 알았는데 말이지요.

'레인저 훈련병'이라는 미 육군 최강 군인들이 희생양 역으로 설정된 점도 좋습니다. 절벽에서의 레펠 기동을 비롯한 생존을 위해 벌이는 인간 이상의 활약이 꽤 설득력있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활약의 핵심인 주인공이 '잭 리처' 앨런 리치슨이라는 캐스팅도 딱 맞아 떨어지는 점입니다. 캐스팅이라면, 추억의 배우 데니스 퀘이드의 노병 연기도 반가왔어요.
아울러 주인공이 공병 출신이라서 로봇의 약점을 눈치채고 해치운다는 마지막 장면의 설득력도 꽤 높은 편입니다. 맨 앞의 차량 정비 장면과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군인들이 강력한 외계 크리쳐와 싸워 극히 일부만 겨우 살아남는다는건 "에일리언(2)"과 비슷하고, 이 마지막 장면 전까지는 엇비슷한 재미를 주지만 마지막 10여분이 영화를 완전히 망쳐버려서 아쉽습니다. 외계 로봇의 습격이라는 전 지구적인 재앙이 닥쳤는데 레인저가 되는 결승 라인에 도달하는게 지상 목표라는 주인공의 모습부터 황당했는데(최소한 부상자는 의무병에게 바로 인계했어야지요),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미국식 영웅 만들기는 도대체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게다가 막 복귀해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다시 전우들과 출동한다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비유하자면 "에일리언"의 리플리가 살아서 귀환한 뒤, 군인들 앞에서 일장 연설하고 선봉에 서서 에일리언을 박살낸다는 에필로그가 이어지는 셈입니다. 

이 마지막 10여분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거만 없었어도 별점 3점 이상도 충분한데 아깝네요.
그래도 앨런 리치슨이라는 배우의 액션은 믿을만하다는 확신이 생기기는 합니다. 다른 작품도 찾아보고 싶군요.

2025/06/06

노인의 전쟁 - 존 스칼지 / 이수현 : 별점 2점

“맹세코 그놈을 때려눕히려고 했다니까. 월드시리즈 우승도 한번 못하고 200년이 지났으니 컵스는 마이너리그로 강등 시켜야 한다지 뭔가."

75세를 맞은 존 페리는 사랑했던 아내 캐시와 사별한 뒤, 미련을 버리고 '젊은 육체'를 준다는 우주개척연맹(CDF)에 입대했다. CDF는 외계 생명체로부터 우주 식민지를 보호하는 군대로, 외계에서 구한 최신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젊고 강화된 육체를 갖게 된 존 페리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 방위군에 복무하게 되었고, 특유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통해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데...

SF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있을 유명작입니다. 미국 작가 존 스칼지의 데뷔작으로, 읽은지 제법 되었는데 리뷰가 늦었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75세 이상의 노인들이 입대하면 최신의 젊고 강하며 잘생긴 육체로 바꾸어준다는 설정의 참신함입니다. 고령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늙어가고 있는 저 자신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설득력 역시 무척 강하게 느껴졌어요. 물론 최전선에서 외계인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데 제대가 가능한 10년 뒤의 생존율이 25%에 불과하고, 두 번 다시 지구 땅을 밟을 수 없다는 조건이 붙지만, 어차피 더 잃을 게 없다면 충분히 걸어볼 만한 도박이니까요. 아마 저도 가족에 대한 미련만 없다면 입대했을거에요.

젊은 군인으로 거듭난 존 페리가 같이 입대한 전우들과 훈련을 받는 장면도 생생합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악덕 상사 루이즈의 입담이 돋보였는데, 특히 젊었을 때 광고 문구를 썼던 존 페리와 루이즈 상사 간의 추억담 티키타카가 백미였습니다. 왜 상사들은 이렇게 입담이 좋은걸까요? 사뭇 궁금합니다.

훈련 후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외계 종족과의 전투도 흥미롭습니다. 지구인보다 앞선 과학 문명을 지녔지만 독특한 종교관으로 인해 전면 전쟁을 벌이지 않는 콘수 종족의 설정은 이렇게 소비되기에는 아까울 정도였어요. 3부 마지막 코랄 행성 전투에서, 어떻게 코랄인들이 도약 추진한 전함의 위치를 파악해 타격했는지에 대한 수수께끼와 대응안도 재미있게 읽은 부분이고요. 콘수인이 관련 기술을 전해 주었지만 협상을 통해 기기 한 대만 전달된 것이 확인되어, 이를 파괴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는 전개가 기승전결이 완벽하여 몰입도를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단점 또한 분명합니다. 우선, 젊어져서 훈련을 받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전형적인 SF 밀리터리물에 불과해져 버리고 맙니다. "스타쉽 트루퍼스"가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이 과정에서 노인이었던 전생의 경험과 기억이 뭔가 역할을 해 준다면 독특함을 이어갈 수 있었을텐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이는 존 페리가 전쟁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비현실성을 높이는 데에도 한 몫 단단히 합니다. 한 번 죽을 뻔했지만, 그 외에는 영웅이 되기까지 탄탄대로인데, 이를 설득력 있게 만들려면 지구에서의 전생이 관련되어야 했습니다. 다른 군인들도 모두 노인이었던건 마찬가지니, 정말 독특한 경험과 기억이 있었다는 설정이었다면 좋았겠지요. 예를 들어 프로 바둑 기사라서 전략적으로 대국을 볼 줄 알았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전개도 후반부로 가면 처집니다. 여러 행성에서 벌어진 전투가 단편 에피소드처럼 나열되는 탓입니다. 게다가 사별했던 아내 캐시가 ‘제인’이라는 클론으로 되살아났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지구의 그 누구라도 클론으로 되살릴 수 있다면 굳이 노인들을 징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시체를 수거해 육체를 복제하면 될 일입니다. 같은 이유로 초반부에 젊어지는 시술을 받기 직전 지병으로 사망한 존 페리의 룸메이트 디크는 왜 되살려 클론으로 만들지 않은걸까요? 그냥 존 페리의 러브라인과 해피엔딩을 위한 사족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초반 설정은 흥미롭고 몰입도도 높았지만, 이후의 전개가 전형적이고 개연성에서도 아쉬움이 커서 감점합니다. 후속권이 있던데 더 읽어보지는 않을 듯 합니다.

2025/05/11

화산전생 - 정준, 토마씨 : 별점 1.5점

화산의 장로였던 주서천은 죽은 뒤, 과거로 회귀했다. 주서천의 시대에서 암천회와 무림의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영웅들이 죽었던 탓에, 주서천은 영웅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암천회의 음모 좌절에 새로운 생을 걸었다.

인기 웹소설의 웹툰화 작품입니다. 인기가 많다기에 이번 연휴에 몰아서 완결까지 보았습니다. 

뻔한 회귀물이지만 인기작답게 나름대로 독특한 점은 있네요. 단순한 무공 대결보다는 전략과 정보전이 강조된다는 점이 대표적입니다. 암천회는 소문과 거짓 정보를 활용해 무림 인물들을 현혹시키고, 9파 1방에 속하지 않은 이들의 질투심과 자격지심을 교묘히 자극해 세력으로 끌어들이는데 꽤 설득력 있습니다. 마지막 무림맹과 암천회의 결전은 수천의 병력이 각자 군사의 지휘 하에 지형과 다양한 작전을 활용해 전투를 벌이기 때문에 무협지보다는 말 그대로 '전쟁'을 그려내고 있고요.

전통적인 무협의 틀을 벗어나, 기관 전문가와 상인이라는 인물을 주력 조력자로 배치한 점도 특이합니다. 기룡 제갈승계는 초반에는 단순한 기관 돌파 전문가 정도의 역할이지만, 중반 이후부터는 다양한 병기와 기관으로 암천회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참호전 당시 첫 등장했던 기관총을 연상케 하는 그의 활약은 열세인 무림맹의 승리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작 중 대립 상대인 '암천회'의 설정도 괜찮습니다. 비록 숙청당할까봐 두려워 숨어지냈지만, 황실과 관련이 있다는 설정은 암천의 다양한 재보, 자금과 군대까지 엮을 수 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보통 무협물은 황실과 거리를 두는게 보통인데, 이를 적극적으로 설정에 녹여낸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처음 보았습니다. 

또한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명쾌해서 고구마스럽거나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점도 장점 중 하나입니다. 주서천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인간 관계를 - 심지어 여자 관계까지! - 칼같이 정리하는 덕입니다. 주변 인물들도 불필요한 감정선 없이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는건 마찬가지에요. 선악의 구도도 명확하고, 악인은 반드시 최후를 맞이하는 단순하지만 시원한 구성도 이야기를 더욱 속도감 있게 만듭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대단한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회귀물을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전개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반복되어온 구조이며, 과거의 기억으로 모든 정보를 꿰뚫고 최강자가 되는 설정은 지극히 뻔했던 탓이 큽니다. '기연이 있는 장소를 미리 알고 찾아서 확보한다'가 거의 전부거든요. 별 탈 없이 레벨(?)을 올린 주인공이 상대방을 모두 해치우며 결말까지 이어지는 전개는 새로움을 느끼기 어려웠어요.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무협이라는 장르의 틀을 벗어나 전형적인 판타지물처럼 변모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혈마가 강시를 만들고 시신을 활용해 몸을 바꿔치기하며, 인어와 이무기, 현무, 말하는 독거미 등 이종족(북해빙궁은 엘프더군요)과 몬스터에 이상한 주술까지 등장하는데 무협물이 아니라 혼합 장르물 혹은 마법 판타지로 느껴집니다. 등장인물들의 강함을 일종의 레벨처럼 표현하고, 최강자들의 필살기(심상구현이라 부르는)는 각자 독특한 무공이 한 개씩 있다는 것 역시 전형적인 만화 판타지 세계관으로 보이고요. 뒤로 가면 이게 무협물일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그나마도 무공이라면 모를까 주서천이 마지막 암천회주와의 결전에서 시간을 되돌리는건 어이가 없었습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도 아니고... 주서천의 심상구현인 모든 상처를 치료해주는 '회귀'로 주서천이 치명상을 입은 줄 알고 방심하고 있던 암천회주에게 한 방을 먹이는 정도가 적당했습니다. 

그 외 전개에서 이상하게 늘어지며 억지스러운 부분도 적지 않아요. 대표적인게 무림맹주 남궁위무의 퇴장입니다. 암천회와의 결전 직전에 무림맹 내부의 다툼으로 처형된다는 전개보다는, 백의종군하여 마지막 대결에 참여하게 했더라면 훨씬 개연성이 있었을 것입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비급과 보물이 과도하게 등장하는 점도 몰입을 방해했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이 없지는 않으나, 전형적인 판타지 회귀물과 별다를게 없고 작화가 심하게 좋지 않아서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덧붙이자면, '별호'가 이렇게 별로인 무협지는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검 좀 쓰면 검성, 검신, 검선, 검마로 돌려막는 식이거든요. 제가 만든 챗봇으로 화산파 장문인 검선 우일문의 별호를 만들어보니 '매영검옹(梅影劍翁)'을 추천하는데, 검선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나 싶습니다.

2025/03/30

전쟁과 군복의 역사 - 쓰지모토 요시후미 / 김효진 : 별점 3점

전쟁과 군복의 역사 - 6점
쓰지모토 요시후미 지음, 쓰지모토 레이코 그림, 김효진 옮김/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AK 트리비아 북 시리즈입니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군사사 전문가인 쓰지모토 요시후미가 집필한 책으로, 전쟁과 군복이 어떻게 함께 진화해왔는지를 방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조명합니다. 인류 최초로 군복 개념이 등장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를 시작으로,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군복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건 시대별, 지역별 군복의 변화를 다루면서도, 단순한 복식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최초로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와 독일의 효웅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격돌,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제국의 결전에서 대활약했던 폴란드 왕 얀 3세의 유익 기병대 '후사리아(윙드 후사르)' 이야기, 군인왕 프리드리히의 생애 등 군복과 불가분한 주요 전사 및 영웅들의 활약상을 병행해 설명해 주는 덕분입니다. 

당연히 복식에 대한 설명도 상세합니다. 폴란드 중장기병 후사리아의 복장 묘사처럼요. 등에 장착한 거대한 스크시드워(천사의 날개 모양 장식)부터, 장창 코피아, 휘어진 군도 사블라, 2미터 장검 콘체슈, 권총 반돌레트, 동양풍 투구 시샤크, 어깨에 걸친 표범 가죽까지 장비 일체를 착용 이유와 이후 발전 상황 등까지 모두 알려줍니다. 아래와 같이 도판도 함께 제시되고요.

복식으로서의 군복에 대한 정보도 흥미롭습니다. 군복이 화려한 원색으로 구성되었던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당시 화약은 짙은 연기를 발생시켰기 때문에 전장의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총기의 명중률도 낮아 병사들이 적의 사격을 피하는 것보다 아군의 위치를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원색과 금·은 자수, 매듭 장식이 선호되었다고 하네요. 또, 화려한 군복은 군대의 상징이자 국가 권위의 표상으로 기능해서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이 이를 의도적으로 장려했다는 설명은 군복이 단순한 실용품이 아닌 국가 전략의 일부였음을 보여주고요. 또한 병사들에게 눈에 띄는 군복을 입히면 탈영을 어렵게 만든다는 설명도 그럴듯한 해석이었습니다.

프랑스 총사대의 복장, 이른바 '타바드'에 대한 고증 또한 세밀합니다. 대부분 대중매체에서 보아온 파란색 상의는 실은 루이 14세 시대의 것이며, 루이 13세나 리슐리외 추기경 시대에는 다른 복장이었다고 하네요. '늑골복'이라 불린 헝가리계 경기병의 복장이 오스만 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1848년 무렵, 재인도 영국군의 선도 군단(Corps of Guides)을 이끈 해리 버넷 럼스덴 중위(후에 중장. 1821~1896 년)가 고안한 진흙으로 염색한 군복을 페르시아어에서 유래된 우르두어에 카키 (Khaki, 진흙 색)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카키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전장에서의 위장 효과를 의식한 군복이라던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 세계 최강의 패권국은 대영제국으로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영국 육군이 전 세계에 유행시킨 세 가지 아이템은 승마 바지와 승마 부츠의 조합, 어깨에 두르는 샘 브라운 벨트, 오늘날 일반 신사복으로 널리 정착한 '트렌치코트' 이고, 세계 최초의 위장복은 2차대전 독일 친위대가 도입했다는 등의 재미난 정보가 가득합니다.

다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다루다보니 다소 산만하고 두서없이 전개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천 년의 역사를 다루고는 있지만, 주로 근대 유럽에 치우쳤다는 비중 문제도 있고요. 또한 소개된 내용들의 출처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아, 학술적 깊이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이라는 독특한 주제를 '전사(戰史)'와 함께 입체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전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책입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12/07

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 김희주 : 별점 4점

사악한 소년 - 8점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네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4/01/17

바후발리 2: 더 컨클루전 (2017) - S.S. 라자몰리 : 별점 3.5점

아마렌드라 바후발리는 마히쉬마티의 여왕 시바가미의 뒤를 이을 왕으로 낙점된 국가적 영웅이었지만, 이복동생 발랄라데바의 흉계에 빠져 궁에서 쫓겨난 뒤 죽음을 맞았다. 발랄라데바는 바후발리의 아내 데바세나를 사로잡고, 둘 사이의 아들 마헨드라까지 죽이려했다. 다행히 시바가미의 목숨과 바꿔 살아난 마헨드라는 장성한 뒤, 아버지의 나라를 되찾고 복수를 하기 위해 발랄라데바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 발랄라데바와 일기토를 벌여 결국 그를 무찌르는데 성공한다.

넷플릭스로 감상한 인도 영화. 거액의 제작비와 기록적인 흥행도 유명하지만, 아래의 움짤을 비롯한 장면들이 국내에 퍼지면서 유명세를 탔죠.
하지만 움짤처럼 황당무계하기만 한 코믹 영화는 전혀 아닙니다. 인도 역사 속 영웅담을 영화화한 웅장하고 스케일 큰 작품이에요.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여러가지 고대 신화, 영웅담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왕의 핏줄이 사악한 친척 탓에 숨어 살다가, 복수와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굉장히 뻔한 이야기이라는 약점은 있지만, 거액의 제작비 덕분에 시각적 쾌감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웅장한 배경을 과시하는 촬영도 그렇지만, 바후발리의 놀라운 무공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그야말로 기가 막힙니다. 이는 단순히 화끈한데서 그치지 않고, 필요할 때는 필요 이상의 '멋짐'도 엄청나게 뿜어내는 덕입니다. 아마렌드라 바후발리가 아내 데바세나가 성추행을 하려던 자의 손가락을 자른 죄로 법정에 섰을 때, 아내가 잘못했다며 "목을 잘랐어야지!"라는 말과 함께 성추행범의 목을 베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죽을 때의 모습도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끝까지 나라를 생각하며 무릎을 꿇지 않고 왕의 모습으로 죽거든요.
특유의 음악과 춤도 적절히 삽입되어 흥겨움을 더해줍니다. 음악도 좋아요!



이전에 감상했던 "RRR"과 이 영화의 장, 단점은 굉장히 비슷한데 이런걸 보면 인도 영화가 무엇인지 좀 알 것 같습니다. 화끈한 액션, 흥겨운 음악, 확실한 권선징악 이야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엔터테인먼트' 그 자체인 것이지요. 2시간이 훨씬 넘는 긴 상영시간도 관객들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주기 위한 필수 요소로 보이네요.
개연성 측면에서는 문제가 많지만, 이렇게 '엔터테인먼트' 정의에는 굉장히 충실하기에 추천작입니다. 2시간 넘는 상영 시간을 오롯이 즐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께는 유치할 수 있겠지만, 저한테는 완전히 취향 저격이기도 했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다만 1, 2부 구성의 작품이 넷플릭스에는 2부만 올라와있는건 많이 아쉽습니다. 내용을 이해하는데에는 별 지장 없었으나, 온전히 영화를 감상했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거든요. 1부까지 봤다면 4점 이상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모쪼록 1부도 빨리 올라오기를 바랍니다.

2023/06/17

설원의 독수리 - 마이클 모퍼고 / 보탬 : 별점 2점

설원의 독수리 - 4점
마이클 모퍼고 지음, 마이클 포맨 그림, 보탬 옮김/내인생의책

바니는 독일군 폭격으로 집을 잃고 어머니와 함께 이모가 살고 있는 콘월로 향하던 중, 기차 안에서 공습 감시원으로 활약했던 1차대전 참전 용사 아저씨를 만났다. 
기차가 독일군 공격을 피해 터널 안으로 숨어든 사이, 아저씨는 겁에 질린 바니를 달래기 위해 1차대전 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저씨의 친구 빌리는 전쟁 영웅으로 빅토리아 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빌리가 마지막 전투에서 살려주었던 독일 병사가 아돌프 히틀러였다! 빌리는 자신이 구해주었던 고아 소녀 크리스틴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보냈으나, 나중에 자기가 히틀러를 살려주었다는걸 알고 죄책감때문에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고 실패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저씨가 이야기를 마친 뒤, 어두운 터널 안에서 모자는 잠이 들었다. 그런데 기차가 다시 출발하고 난 뒤, 아저씨는 사라졌다. 기차 차장에게 물어보았으나 아저씨는 처음부터 없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바니는 나중에 이모로부터 아저씨가 빌리였고, 그는 멀베리 공습 때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전쟁 영웅 헨리 텐디의, '아돌프 히틀러를 살려준 병사'라는 유명한 실화를 각색해서 만든 작품. "나와 마빈 가든"처럼 아이의 토론 수업 교재입니다. 
전쟁에 대한 참상, 그리고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릴 수 있는지와 한 사람이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알려줍니다. 

나쁘지는 않지만, 아동용 소설이라 어른이 읽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했습니다. 인간 드라마로 보기에는 빌리의 고뇌 등이 제대로 그려지지 못했고. 드라마 부분도 약한 탓입니다. 빌리가 히틀러를 살려주었다는 과거는 주변과의 갈등을 일으키지 못해서 극적 긴장감도 부족하고요. 전쟁물로는 디테일이 떨어지며, 암살물로는 정교함과 치밀함이 턱도 없습니다. 아무리 전 전쟁 영웅이라도, 히틀러라는 인물 암살을 이렇게 쉽게 시도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요? 
빌리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는 결말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편의적인 발상이었어요. 이미 죽었다면, 아마 암살 시도가 실패했을 때 죽었겠죠. 폭격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3/11

흑뢰성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흑뢰성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내용 및 트릭 등 주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리오카 성의 성주이자 셋슈 지방의 영주 아라키 무라시게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구로다 간베에는 이를 막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리오카 성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고, 아라키 군과 오다 군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라시게 믿었던 모리 군의 참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초반에는 잘 버텼던 무라시게 군의 기강도 나날이 해이해져 갔다. 그 와중에 아리오카 성 내에서는 여러가지 기묘한 사건들이 일어났고, 아라키는 사건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구로다 간베에의 도움을 청하는데....


요네자와 호노부에게 나오키 상을 안긴 대작 연작 장편 소설. 발간된지는 꽤 되었지만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전국시대 아리오카 성 전투를 배경으로 전투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그리고 있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대망>>같은 전국시대 군웅물로 보아도 무색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 대하 역사극 서사를 잘 그려내고 있거든요. 아리오카 성을 기반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은 아라키 무라시게와 그의 군대가 오다 군에게 포위당하고 1년여간 서서히 무너져가는 과정이 치밀하게 그려져있는데 기가 막힙니다. 원래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등학생들이 등장하는 청춘물을 주로 쓰던 작가가 대하 서사물을 이런 수준으로 발표했다는데는 탄복할 수 밖에 없네요.
군웅물 대하 역사극답게 등장인물들 모두 관련된 배경 설명도 충실하며 캐릭터들이 확실하게 잡혀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문무를 겸비한 인재인 주인공 아라키 무라시게를 비롯하여 직속 수하들인 호위대 오본창, 철없는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 호전적인 노무라 단고, 냉정한 규자에몬, 이케다 이즈미 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특히 애송이 나카니시 신파치로가 처음에는 아라키 무라시게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다가, 1년여가 흐르면 적장과 주군 몰래 교류를 하는 묘사 등으로 인물 설정과 배경 묘사를 통해 아라키 군의 해이와 패망의 전조를 알리는 잘 짜여진 구성은 매력적이었어요.
구로다 간베에가 아리오카 성 전투 당시 지하 감옥에 갇혔었다, 아라키 무라시게는 리큐의 진전을 받은 다도인으로 천하가 흠모하는 명품 다기 "도라사루'를 가지고 있었다,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는 과거 나가시마에서 겪었던, 일향종 신도들의 떼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체험을 겪었다는 실제 사실을 이야기에 녹여내는건 팩션 느낌을 전해주며, 호위대 오본창과 사이카 병사 등이 각자 지니고 있는 힘, 창, 검, 총포 등의 특기, 그리고 남만종을 믿는 다카야마 다료의 입장 등이 이야기와 맞물린다는건 설정 하나하나를 깊게 고민한 티도 물씬 났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합니다. 수록된 네 편의 이야기 중에서 두 편은 본격적인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 본격물이기도 하거든요. 첫 번째는 <<설야등롱>>에서 인질 아베 지넨이 죽은 사건입니다. 아베 지넨은 복도 양쪽을 충실한 호위대가 지키고, 장지문 앞 마당으로는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맞고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화살마저 사라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요. 핵심 단서는 마당 가운데에 서 있던 석등이었습니다. 석등 안쪽에서 핏자욱이 발견되었거든요. 즉, 벽을 따라 순찰하던 호위대원 모리 가헤에가 창 두개를 이어붙인 긴 봉 끝에 화살촉을 매단 뒤, 석등을 통과시켜 아베 지넨을 죽인 일종의 원격 살인 트릭이었던거지요. 봉이 너무 길어서 가운데 받침대가 필요했던겁니다. 모리 가헤에가 호위대 오본창에서도 특히나 창의 명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범행이지요.
세 번째 작품 <<원뢰염불>>에서는 무라시게가 밀정으로 쓰던 행각승 무헨과 그를 호위하던 오본창 아키오카 시로노스케가 살해됩니다. 무헨이 머물던 암자는 호위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범인은 어떻게 둘을 살해하고 깜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범인은 승려 행색을 하고 다니던 장수 노토 뉴도였습니다. 그는 호위대가 도착하기 전 무헨을 찾아갔다가 살해한 뒤, 무헨의 삿갓과 지팡이, 고리짝을 훔쳐 무헨으로 위장한 뒤 호위대 아키오카를 살해하고 도주했습니다. 변장을 통해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및 순간 이동 트릭을 선보인 셈입니다. 이를 무헨 (으로 위장했던 노토 뉴도) 스님이 기묘한 진언을 읆었고 평소와 다르게 일꾼을 험하게 대했다던가, 고리짝을 훔쳐간 이유 등으로 독자에게도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본격 후더닛물로 손색없는 수준이었고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대단한 작품이냐? 라고 물으면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야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본격 추리물을 결합한 독특함과 그 완성도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을거라 생각되는데, 국내독자가 이 부분에 대해 평가할 여지는 많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호적수이자 일종의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구로다 간베에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적이지만 그 두뇌를 인정하여 죽이지는 않고, 필요할 때 가서 조언을 구한다는 핵심 설정은 유사한 캐릭터, 설정을 많이 모방한 탓입니다. 대표적인게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지요. 구로다 간베에도 한니발 렉터 못지 않게 아라키 무라시게의 마음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요. 이 설정 때문에 괜찮은 팩션이 그냥 가공의 픽션으로 바뀌어버린 느낌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아라키 무라시게에 비하면 구로다 간베에는 그야말로 전국구 인기 무장이라 이렇게라도 끼워 넣은 작가 의도는 대충 알겠습니다만, 구로다 간베에의 등장 없이 아라키 무라시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어도 이야기 전개에는 무리가 없었을겁니다.
무라시게가 일세의 영웅처럼 묘사되지만 갈수록 설득력이 떨어지는 문제도 두드러집니다. 모리가 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는걸 진작에 알아챘는데도 불구하고,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오다 노부나가와의 화의를 신청하는 밀사를 보내는 것 외에는 딱히 하는게 없거든요. 이것도 밀사 무헨의 죽음 뒤로는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도라사루에 대한 애착만 드러내며 끝난다는 점에서는 도대체 뭘하는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별다른 계획도 없이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질 시간만 질질 끌 뿐입니다. 심지어 유력 가문 무장 노토 뉴도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드러난 상황에서도요. 그러니 무라시게에게 전국에 대해 동등하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건 자신밖에 없다고 일갈하는 간베에의 모습도 아첨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닥친 위기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는데 무슨 전국에 대해 논한단 말입니까? 대학 입시도 치루지 않은 학생에게 대기업 입사 시험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과 다를게 없어요. 오히려 자기 혼자 살겠다가 홀로 도망치는걸 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승리하리라! 는 결심으로 포장하는건 헛웃음마저 났습니다. 그럴거면 원군을 진작 보냈겠죠. 다 진 싸움에 누가 원군을 보낸답니까.

추리적으로도 다른 두 편은 그리 대단한 트릭이나 내용이 있는게 아니라서 전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베 지넨을 죽게 만들고, 적장의 수급을 흉상으로 만들고, 노토 뉴도를 쏘아 죽이려고 했던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단순한 소거법이라서 추리라고 하기도 어렵고요.
트릭도 디테일은 다소 부족합니다. <<설야등롱>>에서 범인 모리 가헤에가 아베 지넨을 살해한 동기, 그리고 트릭을 떠올린 방법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지 않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모리 가헤에는 지적인 면은 다소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기에 이런 복잡한 트릭을 떠올린다는건 현실적이지 않거든요. 게다가 호위대 오본창으로 아라키 무라시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갖추고 있기에, 주군 명에 반하는 범행을 저지른 동기도 석연치 않고요. 무라시게의 아내 지요호가 부처의 벌을 가장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지요호가 트릭을 가헤에에게 알려주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트릭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도 썩 납득이 가지는 않을 뿐더러, 전국시대 호위대 무사가 주군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종교, 그리고 주군 아내의 뜻을 따른다는게 말이 되는건지 잘 모르겠네요. 다카야마 다료의 말처럼 종교는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용할? 도구 정도에 그치는게 당시 현실이었을텐데 말이죠. <<원뢰염불>>에서 노토 뉴도가 벼락에 맞아 죽는다는건 솔직히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 그래도 명성에 걸맞는 재미만큼은 충분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소 단점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소합니다. 전국시대 군웅물 팬이시라면, 혹은 <<노부나가의 야망>>과 같은 게임을 즐겨 하신다면 엄청나게 몰입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겁니다.

2022/03/04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 박지영 : 별점 2점

시크릿 스파이 - 4점
헤더 베센트 외 지음, 박지영 옮김/시그마북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첩보 활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으로, 시대 순으로 유명 스파이와 첩보 활동, 주요 활약상 및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장치, 암호 등을 소개해 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250여 페이지의 분량을 풀 컬러로 가득 채운, 화려한 도판입니다. 모든 주제를 한 장 안에 도판과 함께 담고 있어서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짤막하게 요약하여, 다양한 도판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카드 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 속 유명 스파이, 첩보 활동 중 몰랐던 내용도 많았습니다. 남북전쟁 때, 노예해방론자들과 흑인 노예들은 남부 연합 안에서 정보원 활동을 했었고, 반대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사교계 인사 로즈 오닐 그린하우는 북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는 이야기처럼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네요. 영국이 인도 지형을 조사할 때 고용했던 현지인들 중 가장 유명했던 '1번' 나인 싱 라와트도 보다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졌고요. 

1차 대전 시기부터는 친숙한, 고전적인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는, 약간 낭만적이기까지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외다리였던 몸을 이용하여 측량 기계를 의족을 숨긴 채 독일의 알프스 지역 요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다녔던 미국인 하워드 버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강 악화로 죽을 때 유언마저도 '독일군은 알프스 산맥에 전선을 구축할 계획이 없다' 였다니, 죽음마저도 고전전이네요. 프랑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루이즈드 베티니가 첩보망을 조직, 운영하였고, 벨기에에서는 '하얀 여인' 첩보방을 전화 기술자 발테르 드베가 운영했다는 등의 일반인 영웅들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회 지도층 아마츄어들 - 백만장자 빈센트 에스터, 루스벨트 주니어 - 이 뭉쳐서 '더 룸' 이라는 명칭으로 첩보 활동을 했다니 확실히 미국적이다 싶군요. 당시 미국인이 머나먼 유럽 등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 러시아에서 활약했다는 영국의 에이스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는 사실 별 활약 없이 1925년, 볼셰비키 타도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는 등의 팩트 체크도 볼거리였고, 치머만 전보의 암호 해독처럼 실제로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놀라운 성과들도 눈에 뜨였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는 막강해진 국가별 정보 기관들과 고위층 스파이 '두더지' 들, 상대편 스파이들을 속여서 체포하고, 내부 스파이들을 솎아낸 뒤 처형하거나 변절자로 만드는 (더블 크로스 시스템) 등 현대적인 스파이 작전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이 중에서는 독일 해외방첩청 아프베어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나리스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반나치 정책을 나름대로 펼친 끝에, 종전 직전 사형당했다는데 과연 살아있는채로 종전을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아무리 반나치 주의자였다 한들, 방첩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는 모두 정보가 미리 유출되었기 때문이며,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한게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독일 침공을 사전에 첩보원들이 파악하여 제보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스탈린의 사례를 볼 때, 첩보 활동 자체가 중요하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이 이렇게 그를 위해 일했던 첩보원들을 전쟁 후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후일담이 더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독일 최고의 스파이로 중립국 터키의 영국 대사 휴 내치불휴게슨의 부하였던 바즈나의 활약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네임이 오버로드라는 등의 고급 정보를 넘기는 활약을 했지만, 독일은 그 정보의 진가를 몰라봤다지요. 심지어 그에게 준 30만 파운드의 거액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찍어내었던 위조지폐였다고 하고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영화같은 일화였습니다.

냉전부터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존 스마일리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 등 익히 잘 알려진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M16의 수장으로 KGB 스파이였던 킴 필비와 그의 동료들이었던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와 이스라엘이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켰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흥망성쇠가 흥미로왔습니다. IBM과 히타치의 분쟁 등 산업 스파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F1 레이스에도 산업 스파이가 개입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니까요. 페라리의 정비사 나이절 스테프니가 멕라렌에게 정보를 넘겼던 사건인데, 스테프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버려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교가 자기들의 면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백설 공주 작전'이라는걸 벌였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국세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방 검사 사무실까지 뒤졌다니 종교의 힘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힘 있는 사이비 종교들이 최근 많아진 듯 한데,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 외. 첩보 기술에 대한 설명들도 볼만했습니다. 동독의 '로미오 스파이' 작전처럼요. 25~35살 사이의 교육을 잘 받은,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이용하여 서독 여성들을 포섭했다지요. 러시아의 여성 해외 정보 요원 '스패로'는 이와 반대로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다는데, "레드 스패로"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건 분명해 보입니다. 두 작전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카메라, 통신 장비, 암살 장비 등의 소개는 비밀 무기류에 사족을 못 쓰는 제 동심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독침 우산과 청산가리 가스총이 언급되는데, 이 둘을 합친 장비가 "마스터 키튼"에도 등장했었지요. 고양이 몸 속에 배터리, 안테나, 마이크를 장착하여 도청하려는 '어쿠스틱 키티' 계획도 황당하지만 멋졌고요. "쉬리"가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드네요. 1984년 미국 모스크바 대사관, 레닌그라드 영사관의 타자기에 설치되었다는 키 자동 기록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기묘한 레트로함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타자기 내부에 설치되어 활자 뭉치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자기장 교란을 측정하여 입력되었을 법한 글자를 추측한 뒤, 전파를 터트려 도청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내는 장치였다는데, 당시 기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이테크 기기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왔던 이야기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주제를 한 장으로 요약한 탓에 깊이가 없으며, 스파이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대 시대 이야기는 너무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가 스파이 덕분인 것 처럼 써 놓았을 정도로요. 실제 내용을 보면 스파이가 아니라, 단순히 사전 염탐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패배 역시 정찰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스파이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패권이 무함마드가 스파이 활동에 통달한 덕분이었다는 언급도 어처구니 없었고요. 

이런 류의 과장은 뒤에도 계속됩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게 스파이 카를 슐마이스터가 거짓 정보를 뿌려 오스트리아 군이 속았기 때문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남부 목화 판매 댓가로 전쟁 물자를 구입했던 제임스 불럭을 스파이라고 부르는 것도 억지였고요. 이건 단순한 통상 업무에 지나지 않잖아요? 암살과 테러범들 이야기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급 창부였던 '크리스틴 킬러' 마저도 한 챕터를 차지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암호에 대한 소개가 적지 않은데, 9세기 학자 야쿱 이븐 이스하크 알 킨디가 암호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떤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많이 사용된다는 원리인 빈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등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도판도 충실했고요.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암호의 과학" 등에서 많이 보아와서 별로 새롭지 않았고, 책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가격에 비하면 별로 깊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이 책 보다는 특정 스파이 활동과 작전, 혹은 암호 등에 촛점을 맞춘 다른 전문 서적을 읽어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

2021/09/25

좀비 연대기 - 로버트 E. 하워드 외 / 정진영 : 별점 2.5점

좀비 연대기 - 6점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책세상

근대 시기 유명 장르 소설가의 좀비 관련 중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작가들의 명성과 장르 문학치고는 고전급에 속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 성격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낡은 느낌이 강했던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과는 다르게, "지옥에서 온 비둘기"라던가 "좀비 감염 지대"같은 시대 초월 명작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최초로 '좀비'라는 말을 만들고, 아이티 부두교 좀비 설정을 확립했다는 "마법의 섬"과 같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작품도 눈여겨 볼 만 하고요. 크리쳐 호러물 외에도 저주받은 저택, 호러 모험 액션, 판타지에 SF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장르 스펙트럼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열 두편의 수록작 중 수준 이하 졸작도 제법 됩니다. 발표된지 100여년이 다 되어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요. 그리고 제목에서 기대했던, 우리가 지금 '좀비'라고 하면 떠올릴 몬스터가 등장하는 작품도 없습니다. 아이티 등 열대 섬나라에서 부두교 주술 등으로 죽은 사람을 되살려 노예처럼 부렸다는 초기 좀비 전설에 기반한 이야기가 대부분이거든요. 물론 이게 단점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설정을 그대로 반복한 판박이같은 작품이 많다는거지요.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가 그러합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5점입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으나, 클래식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그런 앤솔러지였습니다. 좀비라는 크리쳐의 창작 초기 설정과 이야기들이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옥에서 온 비둘기" 

그리스웰과 존 브래너는 비둘기 떼가 날아가버린 폐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게 되었다. 밤중에 공포스러운 휘파람 소리에 잠을 깬 그리스웰은 2층으로 올라간 뒤, 도끼에 맞아죽은 브래너가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도망쳤다. 도망치던 그리스웰을 구해준 보안관 버크너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수수께끼와 브래너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자 늙은 부두교 주술사를 찾아갔지만, 주술사도 뱀에 물려 죽었다. 사건을 매듭짓기 위해 버크너와 그리스웰은 흉가에서 하룻 밤을 보내지만, 그날 밤 그리스웰은 악령에게 홀려 2층으로 향하는데...

좀비물이라기 보다는, 저주받은 저택 장르물로 보는게 타당합니다. 죽은 브래너의 습격, 마찬가지로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실비아 블래슨빌 모두 시체가 되살아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복수를 위해 부두교 주술로 저주한게 원인이고, 사람을 잡아먹지도 않으니, 저주물에 더 가깝고요.

저주받은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가 악령에게 습격받는 초반부 묘사는 지금 읽기에는 다소 진부하고 심심했지만, 버크너 보안관 등장 이후부터는 아주 재미있었어요. 특히 버크너가 브래너의 시체를 발견한 뒤의 전개는 추리 소설을 떠올리게 해서 독특했습니다. 상황은 그리스웰이 범인일 수 밖에 없어요. 둘만 있던 흉가에서 한 명이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으니까요. 그러나 버크너는 그리스웰의 옷에 피가 전혀 튀지 않았던 점, 그리고 그리스웰이 범인이라면 죽은 버크너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주장을 했을리 없다는 이유로 추가 조사를 벌입니다. 그리고 핏자욱을 따라 2층의 사건 발생 현장으로 이동한 뒤, 무언가 이상한 존재가 얽혀있다는걸 알게 되지요. 단서를 통한 추리,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수사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밀 방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3명의 가족이 목을 메고 죽어 있었다는, 흉가 블래슨빌 저택에 얽힌 진상도 오싹했습니다. 사람들을 습격해 죽였던 괴물 '주벰비'가 실비아 블래슨빌을 원망했던 혼혈 하녀 조안이 아니라, 실비아 블래슨빌이었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었고요. 조안은 주벰비가 되는 검은 술을 자기가 먹지 않고 주인에게 몰래 먹였던 겁니다. 이거야말로 진짜 복수네요.

믿음직하고 용감한 보안관 버크너와 겁 많은 애송이 그리스웰의 조합도 반 헬싱 교수와 조나단 하커 관계와 좀 비슷한데, 전형적이지만 이런 류의 이야기에 딱 맞는 조합이더군요. 무서움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겁쟁이와 사건을 해결하고 악령을 응징하는 용감한 보안관이 조합되니, 두려움과 공포, 액션과 정의의 응징을 다 얻을 수 있잖아요!

그러나 딱 한 가지, 너무 옛스럽게 쓰여졌다는 건 좀 아쉽습니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여러모로 부족한 묘사가 특히 거슬렸어요. 오래된 폐가, 몰락한 가문, 뱀으로 상징되는 저주의 주술,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령, 도망쳤던 생존자가 남긴 일기 등 모든 면에서 미쓰다 신조의 "흉가"가 떠오르는데, 공포를 자아내는 묘사와 전개는 전혀 미치지 못했거든요. 미쓰다 신조가 같은 작품을 썼다면 훨씬 무섭게 쓸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차라리 지금 방식으로 영상화하면 훨씬 대단한 작품이 될 것이라 생각되네요.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검은 카난" 

커비 버크너는 고향 카난에서의 긴급 호출을 받고 귀향하다가 혼혈인 마녀의 유혹을 받았다. 최면에 걸렸던 버크너는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습격한 거구의 흑인 세 명을 물리쳤다. 마을에 도착한 버크너는 마을 흑인들이 모두 도망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조사를 통해 늪지대에 사는 괴인 솔 스타크가 배후에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러나 조사 중 버크너는 마녀의 최면에 걸려 솔 스타크의 본거지로 본의 아니게 끌려가게 되었고, 친구 브랙스턴이 그를 돕기 위해 따라가는데....

부두교 주술사가 카난이라는 마을을 장악하려 하지만, 마을 지도자 버크너가 이를 물리친다는 호러 액션 활극입니다. 마녀의 최면, 주술로 만든 물고기 인간같은 공포스러운 요소가 등장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습니다. 버크너 시점의 심리 묘사만 있는 탓이 큽니다. 버크너 캐릭터는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쾌남 영웅 스타일이라 공포를 크게 느끼지 않거든요. 공포에 사로잡힌 묘사도 잘 와 닿지 않더군요. 마녀와 괴물들이 총에 맞으면 죽는다는 것과, 최면술말고는 주인공을 크게 위협하지 못한다는 것도 작품이 무섭지 않은 이유이고요.

그래도 모험 활극으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주인공 버크너는 전작의 버크너 보안관의 선조, 혹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싶은데, 버크너 유니버스도 한 번 제대로 소개되면 좋겠네요.

"천 번의 죽음"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건 아버지와 그 부하들이었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나도 물에 빠져 죽었었지만 아버지의 연구 덕분에 살아났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죽이고 되살리는 식으로 연구를 계속하는데....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등장하는 SF 호러 범죄물을 잭 런던이 썼다는건 특이했지만, 내용은 평이합나다.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는건 "프랑켄슈타인" 에서부터 내려온 고전적인 설정이니까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섬에 틀어박혀 생체 실험을 한다는건 "닥터 모로의 섬"과 똑같고요. 물론 생체 실험의 대상이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로, 그가 반복적인 죽음과 소생을 거듭한다는 설정으로 확실히 차별화되기는 합니다. '폭력에 의하지 않고, 신체 장기에 아무런 훼손이 없는 죽음은 단지 생명의 보류 상태'라며 죽음과 소생을 보다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점도 독특했어요.

하지만 차별화 요소를 잘 살렸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독약, 질식 등으로 수차례 죽음을 맞는 고통이 잘 그려내지 못한 탓입입니다. 생체 실험의 고통을 극명하게 그려냈다면 호러물로 충분히 값했을텐데 말이지요. 과학적인 설명도 그럴듯해 보일 뿐, 실상 알맹이 없는 서술에 불과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갖은 노력 끝에 물질을 원소 상태로 되돌리는 장치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아버지와 그 부하들을 없애고 탈출한다는 결말은 최악이네요. 아버지의 흑인 부하들이 자기 방으로 한 명씩 차례로 들어올 때 마다 없애고, 마지막에는 방에 들어선 아버지를 없앴다는데, 이럴 바에야 그냥 방에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칼로 찌르는게 빨랐을겁니다. 특별한 장치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롭고, 피해자들도 한 명씩 들어와 사라질 정도로 감시가 느슨했는데 왜 진작에 탈출하지 않은건지도 이유를 모르겠고요. SF스럽게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엄청난 매드 사이언티스트로 보였던 아버지의 최후라기에는 너무 허무했고요.

유사한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화되는 요소가 있는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호러물로는 공포를 자극하는 요소가 부족했고,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노예에게 소금은 금물"

나는 아이티 호텔에서 머물다가, 호텔에서 일하는 노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지역 주민들과 호텔 직원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과거 아이티 독립 전쟁 당시 '소금을 먹지 마라'는 금기를 어겼다가 시체가 된 연인 트레생에 대해 말해 주는데...

뒤에 수록된 "좀비와 함께 걷다"를 읽어야 설정이 이해가 되는 작품입니다. "좀비와 함께 걷다"에 따르면, 좀비는 소금을 먹으면 자신이 죽었다는걸 깨닫고, 무덤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합니다. 이대로라면, 트래생은 물론 마리도 진작에 죽었던 좀비였다는 뜻이고요. 트래생이 흑인 해방 등의 의식을 가질 정도로 똑똑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지만 노예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였다니, 다른 좀비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랐다고 보면 되겠지요.

문제는 이 설정 외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는 겁니다. 마리도 좀비였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고요. 죽었다는걸 깨달은 좀비들이 무덤으로 폭주하는 장면 묘사 정도만 괜찮았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귀환자들의 마을" 

좀비 전설이 있는 열대 섬마을에 어느날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유혹당한 파파는 절벽에서 떨어져 죽게 된다...

괴담 소설로 유명한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인데 굉장히 실망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좀비와 다른, 열대 섬나라 좀비에 대한 설명과 파파가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별개로 진행되어 혼란스럽고, 별다른 내용도 없는 탓입니다. 섬마을의 여러 풍광에 대한 관능적이면서도 상세한 묘사를 걷어내고 '이야기'에만 집중하면 한, 두페이지로도 충분했을 이야기입니다. 수록작 중 최악으로 별점은 1점입니다.

"나트에서의 마법" 

조티크 대륙의 절반이 사막인 나라 지라의 왕자 아다르는 노예 상인 샤라그에게 납치된 약혼녀 달리리를 찾아 여러 왕국을 헤멨다. 그러다 그녀가 향했다는 요로스 왕국으로 가는 상선에 탑승했지만 항해 중 폭풍에 휘말렸고, 상선은 사악한 섬 나트로 표류하다가 침몰했다. 달릴리의 구조로 홀로 살아남은 아다르는 나트의 마법사 우두머리 바카른을 만나, 그녀는 바카른이 되살려낸 익사자라는 걸 알게 되는데....

"코난 더 바바리안"을 연상케 하는 작품. 존재하지 않는 고대 왕국을 무대로 마법사와 영웅이 등장해서 대결을 펼치는 고대 판타지라는 점에서요. 그런데 결말이 예상 외라 놀랐습니다. 영웅 포지션인 아다르가 권력과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바카른의 두 아들 음모에 가담하여 바카른을 죽이려다고 되려 찔려 죽고 말거든요. 그리고 바카른의 아들에 의해 되살아나 좀비가 된다는게 끝입니다. 달릴리와 뭔가 관계가 이루어진다던가, 정의가 이루어진다던가 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간에 등장하던 족제비 괴물은 어떻게 되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런 이유로 방대한 설정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물의 일부만 수록된 느낌입니다. 최소한 아다르와 달릴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었어야 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 

아이티 공화국 헌법에 좀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는 말에서 시작해서, 아이티에 진짜 좀비가 있다는 다양한 증언들이 이어지는 작품. 페이크 다큐멘터리 방식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같은, 페이크 논픽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고, 좀비가 소금 맛을 보면 죽었다는걸 깨닫고 열일 제쳐놓고 죽을 자리를 찾기 위해 무덤으로 향한다는 설정에 기반한 경험담이 이어질 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화이트 좀비" 

아프리카 엔스와지 지방의 행정관 제프리 에일럿은, 어느날부터 느껴지는 악취 탓에 겁에 질렸다. 안개 자욱한 어느날, 결국 에일럿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돌봐준 신부는 과거 에일럿과 함께 했던 전우 싱클레어의 미망인이 수상하다고 말했고, 에일럿은 탐문과 잠복 끝에 그녀가 부두교 주술로 시체들을 조종하는 현장을 목격하는데...

서인도 제도가 아니라 아프리카를 부대로 부두교 주술이 등장하는 이색작입니다. 서술은 장황하지만, 정작 내용은 에일럿이 잠복해서 부두교 좀비 축제? 현장을 목격하고, 거기서 싱클레어의 모습을 확인한 뒤 부두교 주술솨를 쏴 죽인다는게 전부입니다. 악취라던가 불길한 안개 등의 설정은 왜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신부의 존재도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좀비 사건의 원인, 결과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싱클레어 부인이 부두교 주술에 빠져 시체를 되살렸는지는 아프리카의 심장 운운하며 농장 관리 목적이었다고 소개되지만 명확하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싱클레어를 되살릴 이유도 없었고요. 에일럿이 악취를 느낀 이유 역시 밝혀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딱히 아프리카일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묘사만으로 작 중 무대가 아프리카처럼 느껴지지도 못했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할로 맨" 

한 남자가 아프리카로부터 15년만에 영국으로 찾아왔다. 그는 부두 거리를 헤메다 모모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모모는 자신이 15년 전에 죽여 매장했던 고팍이 자기 식당으로 들어오는걸 보고 경악했다. 고팍은 표범 인간이 자신을 깨웠다며, 자기를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모모가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라면서. 식당에 고팍이 머문 뒤, 식당은 서서히 망해갔고, 딸 버블스마저 고팍에게 홀려 생기를 빼앗기자 모모는 고팍을 또 다시 한 번 죽일 결심을 하게 되는데....

죽은 자가 돌아왔다가, 다시 죽음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찾는다는 내용의 작품. 그렇게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무서울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무서운 포인트를 제대로 묘사하고 있지 못하는 탓입니다. 일단 모모 시점의 심리 묘사가 부족해요. 과거에 저지른 죄로, 손을 씻고 가족과 열심히, 단란하게 살아가던 소시민에게 지옥문이 열린 상황인데, 고팍의 존재를 너무나 쉽게 인정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묘사에서는 절박함이나 어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내용도 불분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왜 표범 인간이 고팍을 되살렸는지, 고팍이 영국에는 어떻게 왔는지 등이 모두 드러나지 않아요. 버블스의 생기를 빼았는다는 것도 대충대충 넘어가고요. 결말도 허무합니다. 결국 고팍은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걸로 마무리되는데, 이럴 거였다면 왜 진작에 없애지 않았는지 의문이에요.

여러모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만 물씬 났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는 시체들" 

나는 농부 폴리니스로부터 아이티 지역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들었다. 다른건 유럽과 흡사했지만, 이 지역에만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좀비였다. 나는 좀비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좀비"라는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작품으로 아이티에서 사람들이 단단한 대리석 무덤에 묻히고 싶어하고, 자기 집 마당에 묘를 만들고, 사람들 왕래가 많은 길가나 도로변에 무덤이 많은 이유로 좀비를 설명하는 등, 좀비를 실존하는 것 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여러 장치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아이티 형법을 증거로 내미는 장면도 그런 장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폴리니스가 해 준 늙은 추장 조제프가 데려온 좀비 이야기는 이 책에 앞서 수록되어 있는 다른 아이티 좀비 이야기들과 똑같습니다. 좀비가 소금기를 접한 뒤 다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최후까지요. 좀비가 되었던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조제프에게 복수를 했다는 결말 정도만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원조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발표 당시에는 굉장히 새롭고, 무서운 이야기였을 거라는 확신이 들 정도로 잘 짜여져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 작품을 다른 유사 작품들보다 앞서 수록하지 않은 이 책의 문제가 너무 커 보입니다. 지금 책의 구성은, 후대의 아류작으로 원조의 가치가 퇴색되는 셈이거든요.

하여튼, 원조라는 역사적 가치를 더해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투셀의 창백한 신부" 

흑인 부자 마티외 투셀은 스무살은 어린 혼혈 아가씨 카미유와 결혼했다.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기념일에 투셀은 카미유를 시체와 함께 하는 파티에 초대했고, 카미유는 미쳐버리는데....

화자가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 형태로, 화자의 말대로 '흐지부지되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작품입니다. 결말이 없거든요. 투셀이 도망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투셀이 파티가 연 의도가 무엇인지, 시체들은 누구였는지, 아내에게 1년간 비밀을 지키다가 갑자기 시체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밝혀지지 않아요. 그렇다고 딱히 무섭지도 않았고요.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는 문제가 많았던 소품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비" 

그랜빌리 씨는 1차 대전에서 폐를 다친 뒤, 서인도 제도 세인트크로이 섬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섬에서 친해진 제프리 다 실바와 럼주 칵테일을 함께 하던 어느날, 그랜빌리 씨는 '점비'에 대해 물었고 다 실바는 자기가 젊었을 때 목격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나온 집사 출신이라는 작가 이력이 특이했던 작품. 이런 이력이라면 좀비가 실제 있는 것 처럼 묘사되는 작품은 쓰면 안되는거 아닌가요?

그러나 작품은 작가 이력만큼 특이하지는 않습니다. 다 실바가 친구 이베르센이 죽은 날, 이베르센의 유령을 만나고, 밤길에서 공중에 떠 있는 점비를 목격하고, 이베르센 집에서 개 인간을 만났다는 체험담이 이어질 뿐으로, "내가 했던 무서운 체험" 류의 기승전결없는 괴담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점비'나 개인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도 없고요. 이래서야 좋은 점수를 줄 래야 줄 수가 없지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좀비 감염 지대" 

고든 파넘 박사는 아발론 섬에서 불사에 관련된 연구를 하다가, 죽은 시체를 되살리는 혈청을 개발했다. 마침 섬에 닥친 화산 폭발로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자, 박사는 혈청을 이용하여 그들을 되살릴 생각을 하는데...

부두교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가 아닌, 과학의 힘으로 되살린 좀비가 등장하는SF 호러물입니다. 앞서 잭 런던의 단편과 비슷한 소재이지만, 되살리는 과정을 나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게 큰 차이점이자 볼거리입니다. 특히 인체는 기계와 같다는 등의 고든 파넘 박사의 생명에 대한 이론이 아주 재미있고 풍성했어요. 이 이론과 박사가 여러 동물로 진행하는 실험으로 이야기 여러 개는 충분히 뽑아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요. 예를 들어 '불멸성을 부여받은 실험체들이 번식을 통해 불멸성 유전을 증명했지만, 태어난 실험체들이 태어난 상태를 유지할 뿐이었다'는 이야기는 별도의 단편으로 꾸며도 재미있겠더라고요.

시체가 되살아나지만, 영혼과 두뇌가 없이 본능만 남은 상태라 야수로 돌변한다는 발상도 아주 좋았어요. 이들이 죽지 않는 상태로 군대, 경찰을 휩쓸어버리고, 잘려진 손발이 꿈틀대며 잘린 조각들이 엉망으로 붙어 괴물이 되어버리는 묘사도 일품이었고요. 절대 죽지 않는 존재를 없애기 위해 화산 폭발을 이용하여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린다는 아이디어도 신선합니다. 스케일이 정말 남달라요.

물론 화산 폭발을 사람이 제어한다는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들기에,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품에서 이 정도 허풍은 충분히 허용범위 안쪽이라 생각됩니다. 오히려 시대를 앞서간, 아니 시대를 초월한 끔찍한 아비규환을 그려낸 SF 좀비물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영화로 나와도 아주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1/05/23

사이코패스 :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 - 나카노 노부코 / 박진희 : 별점 3.5점

사이코패스: 정상의 가면을 쓴 사람들 - 8점
나카노 노부코 지음, 박진희 옮김/호메로스

제목 그대로, 사이코패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심리학, 과학, 인문학 교양서입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그 존재 이유 및 특징, 문제점과 대처 방안, 치료 방법 등 거의 모든 관련 항목을 알게 도와주는데 분량도 부담이 없고, 설명도 쉬운 편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접했던 정보들이 아주 많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사이코패스의 신체적 특징으로 얼굴이 긴 남성보다는 얼굴 폭이 있고 완고한 인상의 남성이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의 농도가 높을수록 얼굴이 옆으로 넓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많으면 경쟁심과 공격성이 높아지니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설입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좋은 정보 같습니다. 단, 여성의 경우 얼굴 폭은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답니다.
그리고 심박수가 낮고 잘 높아지지 않는 사람일 수록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기 쉽다는건 당연합니다. 무언가 사건을 저지른 뒤 심박수가 높아지지 않으면 행동에 브레이크가 잘 걸리지 않을테니까요. 그런데 이게 남성이 여성보다 폭력성, 반사회성이 높은 근거가 될 수 있다는건 재미있었어요. 남성이 여성보다 심박이 1분간 약 6회 정도 늦은 탓일 수도 있다고 하거든요. 청중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이나 법정에서의 변론 등에서 긴장하지 않고, 냉정하게 행동하는 경영자나 변호사에게 사이코패스가 많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박수가 낮아야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이코패스는 보통 'IQ 높은 천재 범죄자'로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설명도 인상적입니다. 이런 착각이 생긴건 사이코패스가 사회 통념상 할 수 없는 일을 거리낌없이 해 버려서, 특별해 보인 것 뿐입니다. 한마디로 '돌아이'와 '천재'를 착각한 것에 불과한 거지요. 이는 사이코패스가 불안에 강한 특징 덕분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이면 불안을 느끼는 강도가 높아 위축되고, 상황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불안의 강도가 낮아 대범해지는 반면, 사이코패스는 불안의 강도가 높은 상황에서도 적극적인 행동으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덕분에 검거하기 쉬운 사이코패스가 생겨난건 다행입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지 않아 위험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래서 회피가 힘들어지게 된다고 하네요. 

그리고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스스로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타인의 심리를 읽어내는 재능이 뛰어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공정성은 낮지만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과 권위의 존중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등이 소개됩니다. 허언증이 있을 경우도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고요. 거짓말에 죄의식이 없다, 타인의 아픔을 무시한 채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점은 사이코패스의 특징 그 자체지요. 사이코패스가 상대방의 신뢰를 잘 얻는건 이런 거짓말 능력도 한 몫 단단히 할 테고요. 실제로 허언증이 있던 사이코패스 사례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가지 특징을 본다면, 사이코패스는 프로 도박사가 가장 적합한 직업이 아닐까 싶어요. 불안을 느끼지 않고, 위험한 순간에도 주도권을 쥐려고 노력하며, 거짓말을 잘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읽으면서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니 말이지요. 이런 특징들에 더해 조직에 충성한다는 점에서는 킬러도 잘 어울릴 것 같네요.

그동안 궁금했었던,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차이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과학자들의 시각이냐, 사회학과 교육학자의 시각이냐의 차이더라고요. 이런 존재를 심리학, 생물학, 유전학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라는 명칭을 선호하고, 이 존재가 사회의 영향력이나 유년기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니, 결국은 명칭의 차이일 뿐 큰 차이는 없는 셈입니다. 이 책을 통해 이 양쪽 모두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걸 알 수 있고요. 유전적인 이유에 어린 시절의 환경, 교육 등이 결합해야 사이코패스가 탄생한다는걸 여러가지 실험 결과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전에 읽었던 "n분의 1의 함정"에 등장했던 '최후 통첩 게임'을 사이코패스를 찾아내는데 사용하는 실험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정해진 돈을 나눌 때, 분배자가 정한 비율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거부하는 사람 보다는,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 사이코패시 성향이 높다는군요. 복수하듯 거절하기 보다, 단 돈 1엔이라도 받는게 이득이라고 냉철하게 판단하기 때문이라는데 그럴듯했습니다. 입사 면접에서 한 번 해볼만한 테스트가 아닐까 싶네요. 

사이코패스는 보통 사람과 뇌의 특정 부분의 문제와 차이점이 있다는 연구 결과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뇌의 전두전피질 가운데 안와전두피질과 내측전두전피질의 양쪽 기능이 저하되어 있으면 반사회적 행동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사이코패스는, 편도체와 안와전두피질 혹은 내측전두전피질과의 연결성이 약하다고 알려져 있다." 등인데, 앞으로는 이를 통해 사이코패스의 구분이 의학적으로 가능해 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을 판별하는데 중요한 척도로 쓰이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 책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유전의 영향이 어느정도 있다고 하니, 의학적인 결과와 혈통적인 계보가 결합하면 그 완성도는 더욱 높아질테니까요. 그런 세상이 좋은 세상일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또 각종 문헌을 통해, 사이코패스는 오래전부터 세계 각지에 있어왔다는 내용도 신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알래스카 북서부의 소수민족 유픽 (이른바 이누이트) 의 'kunlangeta'가 그러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것을 하지 않는다’= ‘반복해서 거짓말을 하며 속이거나 훔치는 남자’를 의미하는데, 500명에 한 명꼴로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리들과 사냥에 나가지 않고 다른 남자들이 마을을 나서면 많은 여자들에게 섹스를 강요하며. 비난을 받아도 개의치 않으며, 장로의 앞에 끌려가 벌을 받아도 몸가짐을 고치지 못해서 결국 누군가 죽여버리고 만다는군요. '선천적이므로 고칠 수 없다'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지요. 아울러 승리자 그룹에 속하는 사이코패스도 많다며 오다 노부나가, 모택동, 표토르 대제 및 여러 미국 대통령들을 예로 들어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해주는데, 그럴 듯 했습니다. 이 중 가장 놀라왔던건 성녀 마더 테레사도 사이코패스일거라는 주장이었어요. 그녀가 보살폈던 아이들과 측근들에게 냉담했다는 여러 기록이 근거라네요. '박애주의자'는 특정 소수의 인간에게 깊은 애착을 가지지 못하므로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성립되는데, 좀 무서워지는군요.

그렇다면 전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에서 사이코패스가 계속 나타나고 일정 비율로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이코패스가 생존에 유리했다면 그 수가 늘어났을 테고, 생존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면 자손을 남기지 못하여 도태되고 말았을텐데 말이지요. 이 책에서는 사이코패스와 같은 개체가 일정 수 존재하는게 거시적인 시점에서 집단 생존에 유리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와 개척자도 사이코패스였을테고, 전쟁에서 아군의 피해에 눈 하나 깜짝않고 적을 죽이는 전쟁 영웅도 사이코패스였을테니까요. 이렇게 사이코패스가 필요한 상황이 많아서, 사이코패스 유전자가 소실되지 않았다는 해석이지요. 필요에 더해, 사이코패스는 집단에서 배척당하고, 제거될 가능성이 높기도 하지만 반대로 집단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하여 도리어 살아남기 용이했고, 복수의 이성을 홀려 유전자를 남겼을 가능성이 높았을 거라는 추론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이코패스 존재 이유를 설명하면서 소개된, "여성들이 나쁜 남자에게 빠지는 이유는?"에 대한 고찰도 재미있었습니다. 남성의 경우 인기있는 타입은 육아에 노력을 분배, 할애할 것 같은 남성과 사이코패스의 두 가지 타입이라고 합니다.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 하고, 강함을 어필하여 번식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문명화된 현대에서는 육아를 도와줄 남성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생리 주기에 의해 호르몬 밸런스가 원시적으로 변화할 경우 - 여성 호르몬과 세로토닌의 농도가 내려가는 배란기 전후 3일과 생리 전 일주일 - 사이코패스 성향이 높은 남성이 선택될 수 있다고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사이코패스의 삶도 소개됩니다. 스티브 잡스가 사이코패스인 이유부터 상세히 설명된 이 장에서 가장 주목할만했던건, 면접을 중시한 채용 시험, 그리고 배심원 참여 재판의 문제입니다. 사이코패스는 거짓말을 잘하고, 항상 당당하며 불안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면접을 통과하거나, 배심원들을 설득해서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악덕 고용인, 악플러, 서클 크러셔 등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사이코패스 및 이들의 먹잇감이 되는 추종자들에 대한 설명도 흥미로왔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아나키"같은 여러 비합리적인 커뮤니티 멤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이 책에 따르면 추종자들은 속았다는걸 알게 되더라도 '믿는 편이 기분이 좋기 때문에' 계속 추종자로 남게 된다는군요. 인지부하, 즉 스스로 판단하는건 부담스럽기에, 뇌의 부담을 덜기 위해 무언가를 믿는 쪽을 택하는 거지요. 종교와 별 다를게 없는 셈입니다. 

 마지막 장은 사이코패스 진단법과 분류, 그리고 치료 방법입니다. 치료를 위해서 사이코패스에게는 벌이 아닌 보상을 규칙으로 학습시킬 수 밖에 없다는 실험 결과가 기억에 남네요.

이렇게 사이코패스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목차가 다소 두서가 없다는 점, 그리고 반복되는 내용이 많다는 점 등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빼어난 책이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사이코패스에 대해 궁금하셨던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21/02/19

빵의 역사 - 하인리히 야콥 / 곽명단, 임지원 : 별점 3.5점

빵의 역사 - 8점 하인리히 야콥 지음, 곽명단.임지원 옮김/우물이있는집

이전 올렸던 "빵의 지구사" 리뷰에 댓글로 홍차도둑님이 추천해 주셔서 읽게 된 세계사, 식문화 서적입니다. 새로 복간된 버젼은 아니고 예전에 절판되었던 버젼입니다. 

그런데 '빵의 역사'라는 제목과는 담고 있는 내용이 달라서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사'와 '농부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희생되고 숨겨진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쓰여진 2차대전 이후까지 주요 문명별로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무척 깊고 넓어서 간략한 리뷰로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역작입니다만 저자 주장의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보자면, 일단 처음 '빵'(효모로 부풀리는)과 '오븐'이 태어난 이집트는 모든게 신성화된 왕의 소유였습니다. 그래서 관료가 엄청 많을 수 밖에 없어서 농업에 기반을 둔 농업 국가였음에도, 모든 영광은 관료들이 차지했습니다. 농민들은 농노에 가까왔지만 신성화된 왕에게 소유됨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서 문명은 잘 유지되었지요.

반면 그리스 문명은 토지 특징 상 농업이 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곡물은 주로 수입에 의존했어요. 저자는 '황금 양털 가죽'을 찾아 모험을 떠난 이아손과 영웅들은 곡물상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신 목축이 주였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나 서사시에서 소유한 가축의 양과 질로 부유한지 아닌지가 결정되었다는걸로 알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하룻만에 아우게이아스의 마굿간을 청소한 신화도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다는걸 의미한다네요. 농부였다면 소중한 퇴비의 재료가 되는 마굿간 퇴적물을 물로 씻어 버렸을리가 없다는 이유인데,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솔론의 개혁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그 덕분에 농민들이 아테네를 다스리게 됩니다. 사유지 확장을 금하고, 정해진 이상의 개인 토지를 몰수한 이 법은 소농들 권한을 강화시켜 아테네를 농업 민주 국가로 변모시켰고, 농민 신분도 상승했습니다. 대지와 곡식, 그리고 '빵'의 여신 데메테르를 숭배하는 엘레우시스교가 아테네의 국교가 될 정도로요. 엘레우시스교는 뒤이은 로마에서도 나름 건재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이 토지를 점차 장악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농지 분배를 받지 못한 뒤 로마 토지는 이윤이 많이 남는 축산업에 활용되고, 곡물은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아프리카 정복지를 통해 수입되었죠. 그러나 반달족 습격으로 아프리카를 잃고, 유대 지방 곡물의 수탈이 시작되자, '농업인' 예수가 세력을 넓히지만 로마에 의해 살해당하게 됩니다.

로마가 식량 부족으로 동과 서로 나뉜 뒤, 북방 민족이 로마 제국 영지를 차지합니다. 목축 중심이었던 그들의 경제 활동이 농사로 바뀐 건 필연이었어요. 6인 가족의 중앙 아시아 유목민이 보통 환경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축 300마리가 필요하다니,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했겠지요. 그러나 농사를 싫어하는 민족 특성으로 로마식 노예 제도가 이 때부터 뿌리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중세 초기에는 지주는 농노를 잘 보살폈습니다. 일을 잘 하게 만들기 위함으로, 자유민들도 군복무를 하지 않고 안전을 얻기 위해 자발적으로 농노가 되었고요. 

농민들이 그나마 살 만 했던건 이 시기까지였습니다. 곧바로 가진자들의 수탈이 시작됐거든요. 도시 문명이 발달하며 도시민, 상인, 그리고 길드 소속 장인들 권리는 신장되었지만 농민들의 노동은 홀대받았습니다. 이는 '농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저질러 낙원에서 쫓겨난 탓에 어쩔 수 없이 종사해야 했던 원죄'라는 기독교적 사고 방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탓으로 설명됩니다. 결국 13세기, 농민들에 의한 봉기가 일어났지요.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건 당시 종교 개혁이 이 농민 봉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토지 수탈을 비판하던 종교 개혁가들이 농민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군요. 그러나 놀랍게도 종교 개혁의 핵심 인물 루터가 배신(?)한 탓에 봉기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교회도 수탈로 토지를 확보했을 뿐더러, 루터가 책임 전가를 겁내어 자기를 추종했던 농민 전쟁 참가자들을 배신했던 걸로 보입니다. 봉기 실패 이후 농민들은 더 가혹한 삶을 강요받게 되었고요.

저자는 농민들의 미대륙 이주를 이러한 처절한 삶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즉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주와 농민 세력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요. 다른 국가들의 군대는 농민이 아니었지만 미국 독립군은 사실상 농민군으로, 전쟁에서 질 경우 모든걸 잃고 다시 도망쳐 나왔던 대토지 소유 제도 하에서 고통받아야 했기 때문에, 승리할 수 박에 없었다는 해석이지요. 이 해석이라면 13세기 농민 봉기가 실패한 이유가 잘 설명되지는 않지만, 꽤 그럴싸했습니다. 농민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 미국은 광대한 땅에서 농사를 효율적으로 짓기 위해 여러가지 참신한 시도로 세계 최대의 농업 생산국이 되었고, 결국 빵이 풍부해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는게 저자의 결론입니다.

유럽 정국이 요동치고, 그들이 패권을 잃은 과정 역시 저자에 따르면 농민 세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 농민을 포함한 민중이 이런저런 인쇄물과 매체를 통해 여러가지 '생각'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듭니다. 그러나 일부 중농주의자들을 제외한 왕의 측근들이 농업보다는 상공업이 국가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탓에, 기근과 가뭄이 닥쳐 방앗간에서 밀가루 생산이 멈추자 시민들이 빵을 달라며 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마찬가지로 공업을 신봉한 탓에 무너졌습니다. 그는 백성과 군대가 잘 먹어야 한다는 현실 자체는 인지했지만,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곡물 수입이 막히자 패망한 거지요.

러시아 혁명은 노동자들이 일으켰다는 차이가 있지만, 노동자들은 농민들과 타협했습니다. 1921년 농민들은 농작물 세금만 납부하면 남은건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지요. 스탈린이 러시아를 공업 국가로 만들기 위해 모든 토지를 국영화하고 농민들을 집단 농장 소속 농부로 만들었지만, 이는 스탈린이 그만큼 막강한 권력을 지닌 독재자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농민들보다 강했던 파시즘이 유럽을 휩쓸었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이렇게 세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농민들의 존재와 그들의 사회적 위치를 통해 풀어내는게 아주 신선했습니다.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각이었으니까요. 각 시기별로 주요한 에피소드, 인물, 콘텐츠를 인용하여 설득력도 높이고요. 

그러나 유럽 중심의 역사만 다룬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한계와 약점이 느껴집니다. "빵"이 아니라 농민 중심으로 흘러간 문명사를 쓰려는게 의도였다면 당연히 중국 역사도 포함시켰어야 했습니다. "고문진보"만 보아도 농부의 노고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노래한 고시 - “봄에 곡식 한 알 뿌리면, 가을엔 만 알의 곡식 거두네. 천하에 놀리는 밭이 없는데, 농부들은 굶어 죽는다네 (春種一拉東, 秋收萬顆子, 四海無閑田, 農夫餓死)." - 가 등장하는데 말이지요.

또 농민들의 존재, 그들의 위치로 큰 세계사 흐름을 설명하려다 보니 억지스러운 점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미국 남북 전쟁은 북부가 곡물 생산량이 높아서 승리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해석이에요. 유럽 역사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유대 민족에 대한 비중이 높다는 점도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저자가 유대인인 탓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리고 엘레우시스교 축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같이 지루한 이야기나 주제이기는 동떨어진 이야기 비중도 만만치 않다는 단점도 큽니다. 성찬 의식에 대한 견해 차이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이 좋은 예입니다. 몰랐던 내용이라 신기하긴 했으나, 이 책 주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생각되네요.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발표 시기가 오래된 탓에 최신 정보를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약점이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사를 바라보게 해 주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추천해주신 홍차도둑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빵의 지구사 - 윌리엄 루벨 / 이인선 : 별점 2.5점

2020/10/0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 신예용 : 별점 2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4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지음, 신예용 옮김, 박광규 기획.해설/코너스톤

1890년대 후반에서부터 1940년대 까지, 추리소설의 여명기와 황금기까지의 시기에 발표된 여러가지 단편들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이런 류의 앤솔러지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이 접해보았지만, 국내에 비교적 소개되지 않았던 유명 시리즈 작품들 위주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퀸의 정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 외의 다른 가치를 느끼기는 함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전 작품인 탓입니다. 여러모로 설득력도 떨어졌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초창기 추리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저같은 사람이 많이 없는지 재정가로 가격이 3000원 수준으로 떨어져서 가격도 착하거든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터들리 농장의 공포" 

의사인 나에게 스터들리 부인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스터들리 농장으로 찾아가 준남작과 만났는데, 준남작은 자신이 밤마다 유령을 보는 탓에 공포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준남작과 방을 바꾸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는데...

코난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며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즈 단편 연재를 중단했을 때, '스트랜드 매거진'이 구멍을 메꾸고자 투입한게 바로 이 작품이 포함된 '어느 의사의 일기 시리즈' 였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의사'인 핼리팩스 박사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로 '퀸의 정원' 에서는 최초의 '의학 미스터리'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아쉽게도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작품 발표 계기, 그리고 연재 시점을 보면 정통 본격물의 시조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추리 소설의 여명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완성도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스터들리 준남작과 부인의 방은 옷장의 비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저승길 동행을 위해 준남작에게 밤마다 유령쇼를 펼쳤다는게 진상인데, '나' (핼리팩스 박사)가 침실을 바꾸고 유령을 목격한 뒤, 유령이 나타난 옷장을 수색한 것 외에는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가 변장만 하고 추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이를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스터들리 부인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부인은 '나'가 준남작에게 두뇌 질환으로 환영을 보는 걸로 이야기해줄걸 기대했다는데,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가 유령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거라 생각한건 영 납득이 가지 않네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울러 '의학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전무해서 아쉬웠습니다.

본격 추리 소설 초창기 단편 중 한 편을 만나 보았다는 기쁨, 그리고 오스틴 프리먼손다이크 박사 이전에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 탐정이 있었다는 사료적 가치, 마지막으로 스터들리 부인이 유령을 만들어낸 장치가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이라는 상당한 하이테크 제품이라는 점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금고실의 다이아몬드" 

헤드와 친구 두프라이어는 둘의 세계적인 악녀 마담 콜루치가 다이아몬드 상인 칼튼의 파티에 초대된 걸 알고 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담 콜루치는 칼튼 부인의 전남편이 살아있다며 그녀를 협박하는 것과 동시에, 칼튼 부인을 시켜 빼돌린 로체빌 다이아몬드를 칼튼의 철벽 그곳에서 훔쳐낼 계획이었다....

L.T. 미드와 로버트 유스터스가 합작하여 1890년대 후반 발표되었던 연작 단편집 "일곱왕 연맹" 수록작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악녀로 비밀 범죄 조직 '일곱 왕 연맹'의 총수인 마담 콜루치와 과학자이자 탐정 노먼 헤드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시리즈라고 하네요.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역시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이해가 갑니다. 특히 이 단편은 그 수준이 아주 미흡해요. 내용부터 딱히 건질게 없거든요. 헤드와 마담 콜루치와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큽니다. 헤드의 활약이라고는 고작해야 칼튼 부인을 설득해서 전 남편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거든요. 그나마도 실패하고요.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놓쳐버리기 때문에 이래서야 명탐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못하는게 없는 희대의 악녀인 마담 콜루치 캐릭터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됩니다. 또 열쇠를 돌리면 비상벨이 울리는데, 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칼튼의 열쇠를 조작해서 열쇠의 머리 부분만 헛돌게 만든 거지요. 즉, 열쇠를 돌려도 잠기지 않은거고, 당연히 다시 열어도 벨이 울리지 않은 것입니다. 열쇠를 돌릴 때의 저항감, 소리, 마지막으로 금고가 정말 잠겼는지 확인을 왜 안했는지 등 딴지를 걸자면 끝도 없지만, 열쇠 하나의 조작으로 모든걸 일이루어 낸, 대담한 발상의 트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연작 단편을 이어서 다 읽는다면 모를까,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점수를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더욱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 스페이드" 

맥스 블리스가 협박 받고 있다는 전화를 스페이드에게 남긴 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샘 스페이드는 아는 형사 던디 등이 수사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실 해밋이 쓴 샘 스페이드 단편입니다. 묵직하고 거친 사나이 매력을 담뿍 풍기는 이야기이며, 피해자의 딸이 몰래 만나던 불륜남, 광신도이면서 못생긴 가정부 에피 부인이 묘하게 엮여서 사건이 복잡해 지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과 다를게 없는데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다는게 놀랍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피해자의 동생 시어도어가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며, 시체에 놓여져 있던 '새 넥타이' 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 등은 본격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피해자는 옷을 벗던 중 살해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럴 경우 매고 있던 넥타이가 아니라 새 넥타이가 놓여져 있는건 이상하다는 이유입니다. 이를 발견한 스페이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요. 

샘 스페이드는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4시 5분전 쯤 받았는데, 시어도어는 4시에 법정에서 결혼을 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에 대한 트릭도 간단하고 깔끔합니다. 시어도어는 3시 30분 쯤 피해자를 죽이고 법원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전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고 전화를 걸은 겁니다.

물론 스페이드가 한 추리의 증거가 범인 시어도어 손에 난 상처 뿐이라는건 빈약합니다. 상처가 났다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가정부 에피 부인도 손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특이한 상처도 아니고요. 손의 상처보다는, 법원에서 전화를 건 기록을 찾아서 시간을 대입해 보는 식으로 풀어갔더라면 더 깔끔했을 겁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시어도어에게 협박?의 댓가로 지불한 돈은 2만 5천불일텐데 2'억'으로 기입된 오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와 본격 추리와의 결합에 성공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퀸의 정원'에 소개된 "샘 스페이드의 모험" 수록작으로 이 책은 역사적 중요성, 희소성은 물론 퀄리티까지 인정받고 있네요. 당연합니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시계"

8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로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수록작과 동일합니다. 

당시에는 혹평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점도 많았습니다. 자브라스키 박사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과정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 덕분입니다. 흥분한 자브라스키 박사가 '층을 착각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우연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고요. 번역의 차이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우연에 의한 작위적인 범죄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는 물씬 납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별점 1.5점을 줄 작품은 아니에요. 다시 매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총알"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사장'에게 고용되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립 탐정 바이올렛과, 부유하고 젊은 사교계의 꽃 바이올렛이라는 설정이 재미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해먼드 씨가 자신의 아기와 함께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맞았으며, 아기는 죽은 해먼드 씨의 손에 눌려 질식사했지요. 해먼드 씨 가슴의 총알은 그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근접 거리에서 손 총격은 아니었고, 해먼드 부인인 열린 창문을 통해 누군가 해먼드 씨를 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해먼드 씨 몸 속 총알과 함께 해먼드 씨가 쏜 총알도 발견되었어야 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이 두 번째 총알이 어디있는지 추리해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해먼드 씨 몸속 총알은 해먼드 씨의 총에서 발사된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과학의 수준은 많이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앞서 거의 단언하다시피한 정황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총알을 아기가 삼켰고, 그것 때문에 질식한 것이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해먼드 씨가 아니라 총알이 후두를 막은게 질식사의 원인이 된 거지요. 어디론가 사라진 총알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손 꼽을만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이 진상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참고로, '퀸의 정원'에서는 A.K 그린 (애나 캐서린 그린)의 "미스터리의 걸작들" 이라는 단편집을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성'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아닌 듯 하네요. 가치가 크게 다를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급행열차 안 객실에서 르웰린 부부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권총이 사라진 탓에 자살은 아니었는데, 객실 문은 1인치 정도 열린 채 쐐기로 고정되어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남아 있던 승무원과 승객의 신분도 모두 확실했으며, 그들이 범인일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열차를 떠났을 텐데, 객차의 앞 쪽 침대칸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뒷 쪽 3등칸에는 아이가 울어 달래러 나온 부부가 있었다. 객실 문 옆 승객이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열차를 어떻게 떠났을까?

고전 본격물의 걸작 "통"과 '프렌치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운 내용을 F.W. 크로포츠 본인이 오랜 철도업 종사자라 쓸 수 있었을 상세한 기차 구조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열차의 구조와 얼마나 불가능한 범행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탓입니다. 이런 기차 여행이 흔했던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기차를 별로 타지도 않는 지금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더욱이 역부족이었어요. 차라리 만화라던가, 최소한 삽화 등으로 트릭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범행이 밝혀지는건 추리의 결과가 아니라 범인의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추리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친구 르웰린에게 연인을 빼앗기자 복수심에 저지른 치정 범죄라 트릭은 알 수 없어도 동기만 확인되면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찰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던 작품이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퀸의 정원'에도 소개되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와서 읽을 가치는 별로 없겠지요. "통"이나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살인자" 

서밋 이라는 도시에 찾아온 맥스와 알은 식당에서 식사를 시킨 뒤, 사장 조지와 요리사, 그리고 손님 닉을 협박하며 그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올레 앤더슨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올레 앤더슨은 식당 단골로, 킬러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미국 현대 문학 거장인 헤밍웨이의 작품인데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느낌이 나는 드라마거든요. 킬러가 등장해서 식당 관계자들을 협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추리 애호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운과 죽음을 의인화하여 드라마로 풀어낸 짤막한 꽁트라 생각됩니다. 2인조 킬러는 식당 관계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나기와 다를게 없는 불운, 올레 앤더슨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닉은 불운과 죽음 모두를 맛 본 뒤, 서밋이라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는걸 보면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지요.

짤막하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닥없는 우물" 

전쟁 영웅인 노장 헤이스팅스 경이 고대 아랍 전설이 얽혀있는 오래된 바닥없는 우물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함께 있었던 보일 대위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과 불륜 관계였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체스터튼의 단편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연작 단편 중 한 편으로, 시리즈 제목 그대로인 '너무 많이 아는 남자' 혼 피셔가 주인공입니다. 중동 어딘가에 있는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지요.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던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영국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영국 정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게 인상적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아니라 식민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해 보였어요.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용서와 화해를 권했을테니, 이런 류의 독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을테지요.

추리적으로도 작가의 명성에 값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일 대위가 범인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게 진상인데, 그 이유와 방법이 설득력있게 설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헤이스팅스 경이 먼저 보일 대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가로 산책을 제의했다는게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게 좋았어요. 보일이 죽으면 시체를 우물로 던져넣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보일은 범인이 아니기에 시체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요.
범인이 독을 마신건 순전히 회전식 책꽂이 때문에 찻잔이 뒤바뀌어 일어난 사고라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 물론 충동적인 범행에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고라는건 합리적인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한 솜씨는 과연 거장의 그것이었어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시카고의 여성 상속인" 

롬니 프링글은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이상한 남자가 공들여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본 뒤, 그의 편지 압지를 빼돌렸다. 암호와 같은 압지 문구 해독을 통해 '실링하머'라 자칭하는 남자가 런디 후작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손다이크 박사'로 잘 알려진, R.A. 오스틴 프리먼의 롬니 프링글 시리즈 단편입니다. '퀸의 정원' 분류에 따르면 엄청난 희귀본이라고 하네요. 롬니 프링글은 도둑이자 사기꾼인 안티 히어로인데, 이 작품에서는 협박자 실링하머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이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링하머가 후작을 협박하는게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신문 기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범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당연히 런디 후작이 형들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줄 알았는데, 단지 그들이 '자살'했다는 진상도 협박거리가 될 걸로 보이지 않았고요.

롬니 프링글의 작전 역시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실링하머에게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마지막에 경찰을 자칭하여 그를 잡아서 돈 지갑을 빼앗는 것도 여러모로 어설퍼보였거든요. 압지의 글귀 해독도 논리가 뒷받침 되어있는 암호 해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요.
경찰을 자칭하고 후작을 찾아가, 협박자에게는 현금을 주는게 낫겠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만 조금 그럴듯 했을 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역서적 가치', '희소성'에 '퀄리티' 가치까지 부여받은 3관왕인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