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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

2026/08/14

카리브 해적 살인 사건 - 요시무라 다쓰야: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작가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는 신잡지 창간 기획으로 세계 타이틀 도전을 앞둔 프로복서 카를로스 산토와의 대담을 위해 바하마를 찾았다. '카리브의 해적'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는 카를로스 산토는 해적 복장과 오른쪽 눈의 안대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며 연승을 이어 가던 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대담 직전에 산토는 호텔 객실에서 망치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불화가 쌓일대로 쌓인 산토의 아내 리카코, 산토와 불륜 관계였던 사진작가 하야카와 미즈키, 그리고 곧 계약이 해제될 예정이었던 프로모터 키사라기 하야토까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술을 먹지도, 자고 있지도 않았던 세계 정상급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제압할 수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시신이 평소와 달리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뿐인데...

일본 작가 요시무라 다쓰야가 '하룻밤 동안 펼쳐지는 극한의 타임 리밋 스릴러'를 콘셉트로 기획한 시리즈인 '원 나이트 미스터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미나이가 추천하길래 원서로 읽어 보았습니다. 콘셉트에 걸맞게 짤막한 중편 분량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탐정 역할인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가 주고받는 유쾌한 티키타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가볍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요.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 이런 살인이 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하우더닛물인데 트릭도 단순하면서도 깔끔합니다. 키사라기는 안대를 어느 쪽 눈에 착용하는 것이 더 보기 좋은지 시험해 보자며 산토에게 양쪽 눈에 번갈아 안대를 착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 눈을 모두 가린 뒤 정면에서 망치로 가격해 살해했고요. 이후 안대 하나를 회수했지만, 자주 쓰던 쪽인 오른쪽 눈 안대를 나중에 씌웠기 때문에 왼쪽 눈에 안대가 남겨졌던 겁니다. 아사히나는 이를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발상이라고 설명하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이 지나치게 급작스럽습니다. 시합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프로모터가 직접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빈약하며, 범행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결국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살해할 수 없다'는 추리 퀴즈를 성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한 사건 구조상 범행 시각에 아사히나와 함께 있던 리카코, 산토를 살해할 동기가 없던 미즈키는 사실상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이며 카를로스 산토와 아내의 불화, 미즈키와의 불륜 설정도 너무 진부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빠른 전개와 신선한 트릭은 좋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인 졸작입니다. 구태여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2026/07/25

아이 윌 파인드 유(I Will Find You) (2026) - 로버트 헐 : 별점 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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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버로우스는 아들 매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5년째 복역 중이었다. 그러나 처제 레이철이 매슈가 살아있을지 모른다는 증거 사진을 보여준 뒤 탈옥하여 아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누군가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버로우스를 옭아맸고, 버로우스는 수차례 체포와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도 점점 사건의 흑막과 진상에 접근해 나가는데...

"숲"의 작가 할런 코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입니다. 넷플릭스에서 흥행하고 있길래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처제 레이철이 가져온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매슈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발견한 뒤 생명의 위협을 받다가 탈옥을 선택하는 이야기 도입부는 아주 강렬합니다. 설정도 흥미롭지만 탈옥 과정의 디테일도 좋고, 이후 도주 과정도 설득력있게 선보이는 덕분입니다. 

버로우스가 인간관계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과정도 흥미롭습니다. TV 드라마답게 매회 반전과 새로운 의문을 던지면서 시청자가 다음 화를 보게 만드는 솜씨도 제법이고요.

하지만 반전이 많은게 좋게만은 작용하지 않습니다. 애덤 맥켄지가 사실 악당 니키 피셔의 끄나풀이었다는 반전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자신의 직업까지 걸면서 버로우스의 탈옥을 돕고, 매슈의 관까지 파헤칠 정도로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배신자로 바뀌는 전개는 그동안의 행동과 쉽게 연결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니키 피셔가 최종 흑막조차 아니라는 사실이 비교적 쉽게 드러나면서 이러한 반전이 왜 필요했는지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진범이 헤이든이었다는 진상은 최악입니다. 헤이든은 매슈가 자신의 친아들이라고 믿어서 매슈를 데려갔던 겁니다. 그런데 왜 헤이든이 버로우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줄까요? 심지어 좋아하는 레이철이 함께 있지 않는 상황에서 버로우스를 경찰에 넘기거나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버로우스가 매슈를 끝까지 찾으려 하니, 없애버리는게 당연하지요. 하지만 헤이든은 후반부까지 충실하게 버로우스를 도와줄 뿐입니다. 

애초에 사건의 시작부터가 말이 안됩니다. 버로우스를 매슈의 살인범으로 조작할 정도의 재력과 영향력이 있다면, 매슈만 빼돌린 뒤 버로우스 가족이 사고로 사망한 것처럼 꾸미는 편이 훨씬 간단했을테니까요. 막대한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버로우스가 친아들을 살해한 것처럼 꾸민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설명되지 않는건 많아요. 예를 들자면, 니키 피셔는 버로우스의 아버지가 흉기인 야구 배트를 숨겼다는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니키 피셔가 부하를 시켜 증인을 죽이고, FBI를 공격할 이유도 없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초반부의 압도적인 몰입감만큼은 최고지만, 진범과 진상을 끝까지 숨기려는 데 지나치게 집중해서 이야기를 다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추천드리기 어려운 졸작입니다. 드라마가 아니라 복선과 심리 묘사를 충분히 쌓을 수 있는 소설이 더 어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2026/07/19

퍼즐(만화) 1~2 - 원작 야마다 유스케 / 작화 산베 케이 : 별점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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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유스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산베 케이가 만화화한 작품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원작을 따르지만, 각색을 통해 원작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보완했습니다. 우선 원작에서는 테러범들이 학교를 점거하고 학생들에게 퍼즐 게임을 강요하는 이유가 다소 불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만화판에서는 미토메가 연인 카와모토가 임신 후 동급생들에 의해 자살로 내몰린 복수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정을 추가해서 동기에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퍼즐 게임의 의미도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원작에서는 퍼즐 조각을 학교 곳곳에 숨긴건 그냥 게임이었을 뿐이지만, 만화판에서는 카와모토가 괴롭힘을 당했던 장소들에 조각을 숨겼다는 설정으로 자연스럽게 보완하고 있는 덕분입니다. 퍼즐을 완성하면 카와모토의 얼굴이 드러나고, 학생들은 그녀의 죽음과 자신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되니까요. 

학교에 테러범들이 폭탄을 설치했고, 보다 강하게 학생들을 통제한다는 설정 역시 경찰이 권총 한 정 뿐인 테러범들을 쉽게 제압하지 못하고 48시간을 흘려 보낸다는 원작보다는 더 낫습니다. 

산베 케이의 그림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여성으로 변경된 야스다 선생을 적극 활용해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던 특유의 육감적이면서 성적인 분위기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성적인 연출이 너무 과하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주인공 유아사까지 여성으로 변경할 필요가 있었을지도 의문이고요. 

그리고 원작 각색도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 학생의 임신 후 죽음과 그에 관련된 복수는 "동급생" 등 여러 작품에서 활용된 다소 진부한 설정이니까요. 또 원작의 핵심 주제였던 입시와 성적만을 중시하는 학교에 대한 비판도 희석되어 버린건 아쉽습니다. 야스다 선생이 성적 향상을 미끼로 남학생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설정만 기억에 남을 뿐이에요. 

2권이라는 짧은 분량 탓에 미토메 일당이 총과 폭탄을 얻은 방법 등 주요한 설정 설명이 부족하며 전개가 지나치게 빠른 것도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전개가 빠른 만큼 쉽게 페이지가 넘어간다는 장점은 분명합니다. 설정, 전개 모두 원작보다는 나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원작과 비교하며 각색 과정과 차이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으니 원작을 읽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합니다.

2026/07/10

퍼즐 - 야마다 유스케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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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사립 도쿠메이칸 고등학교가 테러범들에게 점거당했다. 최우수 학급인 3-A 반의 담임 야스다와 전학갔던 이전 동급생 미토메가 인질로 잡혔다. 테러범들은 인질들의 목숨을 댓가로 3-A 반 학생들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48시간 내에, 학교에 숨겨져 있는 2,000개의 퍼즐 조각을 찾아 맞추는 게임이었다.  

일본 작가 야마다 유스케의 장편 소설입니다. 만화, 드라마, 영화에 심지어 게임까지 제작되었던 인기작인데 국내에는 아직 정식 소개되지는 않았습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특징이라면 전형적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 장르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폐쇄된 곳은 학교, 게임은 학교 안에 숨겨진 2,000개의 퍼즐 조각을 48시간 안에 찾아서 맞추는 것. 게임의 보상은 인질의 목숨이니까요.

하지만 다른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와 비교해 보면, '게임'이 장점입니다. 학교 곳곳에 작은 퍼즐 조각이 숨겨져 있는데, 이를 찾아내서 맞춰야 한다는 현실성도 좋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퍼즐 조각을 발견하는 묘사도 흥미를 자아내는 덕분입니다. 그리고 퍼즐 조각을 찾아서 맞추기 위해 열 세 명의 학생들이 역할을 분담하는 과정, 이 때 서로 각자가 가진 심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묘사도 재미 요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조각을 끝내 발견하지 못해서 게임은 실패하는데, 여기서 테러범들의 정체로 이어지는 결말도 그럴싸 합니다. 마지막 한 조각이 미토메의 얼굴이었고, 퍼즐의 원본 그림이 3-A반 학생들의 입학식 사진이라는 단서도 충실하고요. 테러범들은 입학은 같이 했지만 성적 하락으로 낙오하여 전학갔던 동급생들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입시 학원처럼 변한 학교 비판도 담고 있어서, 약간 사회파스러운 느낌도 전해줍니다. 초반에 이탈했던 이케타의 어머니가 다른 애들이 갇혀 있을 때 공부를 따라잡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게임 외 설정은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테러범들이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경찰이 48시간 동안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학생 두 명이 초반에 돌아가는 등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고요. 또 학생들이 왜 계속 게임에 참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불충분합니다.야스다 선생은 학생들을 성적과 입시 기준으로 대하던 교사입니다. 과거에 낙오한 학생 미토메가 누구인지도 대부분 몰랐고요. 그런데 학생들이 야스다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부자연스럽습니다. 

테러범들의 목적도 불분명합니다. 이들이 낙오한 가장 큰 이유가 야스다 선생 때문이라면, 복수의 대상은 야스다로 한정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학교를 점령하고 학생들에게 퍼즐 게임을 시킨 이유는?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퍼즐을 찾는 과정과 학생들의 심리 묘사를 통한 긴장감은 제법이지만, 설정과 동기 등의 측면에서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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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5/29

어려운 문제가 가득한 레스토랑 - 유키 신이치로 / 김은모 : 별점 2.5점

"#진상을 말씀드립니다"의 작가 유키 신이치로의 공유 주방을 배경으로 한 연작 단편집입니다. 다양한 음식점 수십 개를 등록해 우버 이츠로부터 배달 주문을 받는 공유 주방의 점장이, 외부 활동을 하는 배달원들이 모아온 정보를 바탕으로 추리를 펼치는 안락의자 탐정물입니다.

설정은 꽤 좋습니다. 점장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미남이지만, 정의감 넘치는 명탐정이라기보다는 적절한 가격에 추리 결과를 제공하는 냉정한 장사꾼에 가깝습니다. 의뢰인만 알고 지불할 수 있는 거액의 요리를 시스템에 등록해 거래하는 방식도 합리적이고요. 배달 앱과 공유 주방이라는 현대적인 시스템을 추리소설의 장치로 활용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스템에 대한 깊은 연구도 돋보이고요.

사건 역시 일상계에 가까운 이야기부터 묵직한 살인까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앞부분 수록작들은 설정도 좋고, 추리적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은 이 시리즈가 가진 장점을 잘 보여줍니다. 배달원이 사건 현장에서 직접 뛰어다니고, 점장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구조도 안정적입니다.

다만 뒤로 갈수록 설정이 애매해지고, 추리적으로도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특히 후반부에서 점장의 정체를 실체적으로 밝혀내려는 시도가 등장하는 점은 영 별로였습니다. 이런 인물은 판타지로 남아 있을 때 더 매력적입니다. 굳이 현실적인 설명을 붙이려는 순간, 앞에서 쌓아둔 쿨하고 냉정한 분위기가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최소한 앞의 수록작 두 편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작가의 전작이 영 아니어서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자기만의 무언가를 보여주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작가로서 성장했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체 완성도가 아주 뛰어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공유 주방과 배달 앱을 결합한 안락의자 탐정물이라는 설정, 그리고 앞부분 수록작들의 추리적 재미만으로도 읽어볼 가치는 있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진상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넘어져도 빈손으로는 일어서지 않는 완두콩 싹 달걀 수프 사건

맨션에서 화재 사건이 벌어졌다. 화재가 일어난 방의 입주민이었던 대학생 가지와라 료마는 팬티 바람으로 입주민들을 깨워 도망치게 하여 대참사를 막았다. 그러나 전소한 료마의 방에서 료마의 전 여자친구 유즈키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경찰은 자살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유즈키가 헐렁한 옷을 입고 화재 현장에 나타나 ‘당해봐라’라는 복수에 가까운 말을 내뱉은 뒤, 불길이 치솟는 건물 안에 자기 발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실연에 따른 극단적 선택처럼 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점장의 추리는 다릅니다. 료마는 유즈키를 미리 죽여 자기 방에 놓아둔 뒤, 불을 지르고 유즈키의 옷을 입고 나와 유즈키인 척했습니다. 그리고 밖에 있다가 다시 화재 현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유즈키가 스스로 불길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꾸몄던 겁니다.

근거는 배달원의 조사입니다. 료마가 여성스러운 외모와 체구의 소유자이며, 심한 근시라 잘 때는 렌즈를 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료마는 팬티 바람으로 밖에 나와 있을 때 현장에 있던 현재 여자친구를 알아봤습니다. 이 증언을 통해 점장은 료마가 렌즈를 끼고 있었고, 따라서 자다가 급히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깨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합니다.

시리즈의 설정과 분위기를 알려주는 첫 작품으로는 꽤 좋습니다. 사건 자체도 나쁘지 않고, 여장 트릭과 시력 단서를 결합한 추리도 깔끔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결말입니다. 사건을 의뢰해던 료마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진상을 알고 싶어 한게 아닙니다. 그 진상을 가지고 아내를 협박하려 했지요. 점장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추리를 들려줍니다. 점장은 음식점의 셰프로서 고객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면 충분하다는 식이거든요. 정의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 추리가 진짜라고 보장하지도 않고요. 이 부분에서 의뢰와 돈에만 충실한 추리를 펼친다는, 이 시리즈만의 독특함이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첫 작품으로서 세계관 소개도 잘하고, 추리적으로도 준수합니다. 무엇보다 점장의 냉정한 캐릭터가 확실하게 각인된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잉꼬부부의 갈릭 버터 치킨 수프 사건

남편 다이시로가 교통사고로 죽은 뒤, 아내는 처음으로 남편의 왼손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이시로는 왜 손가락이 절단된 것을 숨겼을까? 그리고 아내는 왜 몇 개월 동안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는가?

설정부터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손가락이 절단된 남편, 그 사실을 몇 개월 동안이나 모른 아내라는 출발점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게다가 이 사건은 배달을 맡은 배달원의 가정사와 연결되며 부부 사이의 애정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는데, 이 드라마가 특히 좋습니다. 배달원은 자기 손가락이 잘렸을 경우, 아내가 그걸 알아챌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 불안과 의심이 마지막 식사 장면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이고요. 사건의 수수께끼와 배달원의 개인사가 따로 놀지 않고, 부부라는 공통된 주제 안에서 자연스럽게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의 소통 부족이라는 사회파스러운 문제 제기까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깔끔합니다. 남편의 아내가 엄청난 악처로, 결혼반지에 대해 히스테리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는 증언이 핵심 단서입니다. 점장은 결혼반지를 잃어버린 남편이 그것을 숨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을 절단했다고 추리합니다. 극단적인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이는 앞서 쌓아온 부부 관계의 드라마와 맞물리면서 충분한 설득력을 얻습니다. 추리에 대한 근거 - 구급차 대신 택시를 탔고, 절단된 손가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도 합리적이고요.

반지를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한 추리도 좋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호스티스 리리카를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아내의 이름을 말했을 리 없지요. 그런데 리리카는 아내 요리코의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혼반지 안쪽에 부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반지를 가져간 사람은 리리카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단순하지만 논리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는 추리였습니다.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악처의 잔소리가 싫었다 하더라도 손가락을 절단한다는건 너무 극단적이지요. 베란다에 대한 조사 역시 조금 과하게 작위적입니다. 그러나 단점들은 사소합니다. 설정과 전개, 드라마, 추리가 모두 잘 맞물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수록작 중 최고작입니다.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의 양파 토마토 수프 사건

나는 전직 패션모델 출신 싱글맘으로 아들 하루토와 함께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유일한 위안은 수시로 X에 올리는 글에 대한 반응이었다.

배달원의 일상이 사건과 연결된다는 전개 방식은 직전 작품과 같습니다. 이번에는 배달원이 SNS, 정확히는 X에 중독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폐해를 직접 알거나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건 역시 같은 상황에서 비롯되고요.

수수께끼는 빈집털이범의 기묘한 행동입니다. 범인은 빈집을 털러 들어왔는데, 그 안에서 무언가에 놀란 듯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붙잡혔습니다. 도대체 그는 왜 빈집 안에서 갑자기 핸드폰을 확인했을까요?

정답은 빈집털이범이 집을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빈집털이범은 배달원으로 일하며 배달품 안에 집집마다 다른 감사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감사 메시지를 받은 사람이 X에 글을 올리면, 범인은 어느 집인지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X에 집을 비운다는 글을 남기면 그때 빈집을 터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범인은 그 집을 유명 인플루언서 마루미 짱의 집으로 착각했습니다. 이는 모두 마루미 짱의 계획이었습니다. 마루미 짱은 자기 고교 동창이자 친구인 고토미의 집을 털게 하려고 일부러 고토미의 집에 놀러 가서 배달을 시킨 뒤, X에 감사 메시지를 올렸지요. 이유는 자신에게 악플을 달던 악플러의 정체가 고토미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고요. 복수하려 한 것이지요.

동기는 좋고, 추리도 깔끔합니다. SNS를 활용하는 범죄 수법도 재미있습니다. X에 중독된 배달원이 X 때문에 개인 사생활이 드러나고, 대중의 관심을 얻으려 할수록 오히려 가족에게서 멀어지는 과정을 사건과 결합한 부분도 괜찮아요. 소재와 주제가 잘 맞물린 편입니다.

하지만 약점도 분명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감사 메시지를 보낸 배달원이 반드시 빈집털이범이라는 전제가 없다는 점입니다. 마루미 짱은 빈집털이범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고토미 집에 놀러 가서 배달을 시킬 생각이었을까요? 이 부분은 뭔가 설득력 있는 설정이 추가로 필요했습니다. 마루미 짱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는 점장의 추리는 재미있지만, 지금의 내용만으로는 범행 계획이 지나치게 우연에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 하나 불만이었던 건 점장의 태도입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점장은 사건의 진상이 몰고 올 파장과 무관하게 순수히 돈과 주문에만 추구했습니다. 그게 특징이자 멋있는 점이었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배달원에게 훈계하는 듯한 말을 남겨서 점장만의 카리스마가 깨져버립니다. 때문에 캐릭터의 일관성이 이어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SNS와 배달 시스템을 이용한 범죄라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사건의 설득력과 점장 캐릭터 운용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수치가 이상한 수준의 건더기 가득한 육개장 수프 사건

작가인 배달원이 점장에게 수수께끼를 가져왔다. 한 여성에게 열 번이나 똑같은 배달원이 음식을 배달했고, 마지막 배달 때에는 밀봉된 배달 음식 봉투 안에 머플러가 들어 있었다는 사건이었다. 마침 그녀가 머플러를 잃어버린 직후였기 때문에,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이상한 상황인데...

점장은 음식을 가져다준 사람이 배달원이 아니라, 잘못 배달된 음식을 받은 다른 건물 입주민이었다고 추리합니다. 오래된 맨션의 1호와 2호가 나란히 서 있어서 배달원이 착각했고, 그 잘못 배달된 음식을 받은 남자가 다시 여성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것이지요. 마침 그는 여성에게 호감이 있었고, 여성을 관찰하다가 머플러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게 된 뒤 선물로 머플러를 넣었습니다. 이는 가게 포장지가 기성품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배달 온 포장을 뜯은 뒤, 기성 포장지로 머플러와 함께 다시 포장해서 배달품을 가져다준 겁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더 좋았던 건 이 표면상의 추리가 아닙니다. 실제로는 작가가 점장의 정체를 캐내려고 이런 사건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추리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점장은 작가에게 실제 배달 경로로 배달을 시킨 뒤, 그 동선을 확인해서 오배송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밝혀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점장의 정체를 캐내려는 작가 설정은 영 별로였습니다. 물론 이런 수수께끼의 가게와 점장에 대해 궁금해하고, 어떻게든 그 실체를 밝혀내려고 애쓰는 인물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너무 어설프다는 겁니다. 미행도 그렇고, 사건을 의뢰하는 방식도 와 닿지 않습니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한다고 해서 점장의 정체에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는지도 애매하고요.

게다가 작가가 점장의 손에 의해 죽고 만다는 결말은 완전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점장은 만화적이고 판타지 같은 인물이지만, 배달원이 현실을 붙잡고 있는 덕분에 그럭저럭 실감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판타지 속 인물처럼 보였던 점장이 현실에 있는 배달원에게 직접 손을 대는 순간, 그 실감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맙니다.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아 있어야 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사건과 추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점장의 정체를 파고드는 방향과 결말시리즈의 매력을 깎아먹었기에 감점합니다.

악령 퇴치 닭봉 삼계탕풍 수프 사건

분명히 비어 있는 이웃집에 계속해서 물건 배달이 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달라는 의뢰가 접수되었다. 

진상은 빈집의 옆집 여자, 정확히는 의뢰인 집 기준으로 옆옆집에 사는 여자가 벌인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허술한 맨션 방범 체계를 개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어 있는 집 앞으로 계속 물건이 배달되는 상황을 만들면, 관리인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CCTV를 설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건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비어 있는 집으로 계속 배달이 온다는 수수께끼는 일상계 미스터리지만 나름대로 기묘함을 전해줍니다. 다른 수록작들보다 범죄의 무게가 덜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하지만 진상은 영 와 닿지 않았습니다. 맨션의 방범을 강화하고 싶었다면 이런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직접 CCTV를 사서 맨션 주인에게 가져다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만두 배달만 한가득 시켰는데, 최소한 몇십만 원은 들었을 테니까요. 그 돈과 수고를 생각하면 범행 동기가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맨션 관리인이 진상 주민을 내쫓기 위해 다른 층에서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는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다른 층에서는 장기 출장 간 집 앞으로 배달이 계속되어 그 이웃집 진상이 이사를 갔다고 하는데, 정작 기분 나쁜 건 배달이 온 집 주민이지 이웃집 주민은 아닐 겁니다. 유명한 진상 세입자가 이 정도 일로 꿈쩍이나 할까 싶기도 하고요.

시리즈의 매력인 배달원의 일상과 사건의 연계도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번 배달원은 인기 없는 개그맨입니다. 그런데 이 수수께끼를 자기 개그 소재로 쓰는 것이 전부이고, 본인의 드라마와 사건이 깊게 엮이지는 않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배달원의 개인사가 사건의 주제와 맞물렸던 것과 비교하면 확실히 약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수께끼의 출발점은 괜찮았지만, 진상과 동기, 배달원 캐릭터 활용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모르는 게 약인 완탕 고추장 수프 사건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나(가지와라)’는 죽기 전에 범인의 정체를 확신했다...

첫 번째 사건의 배달원이 점장에게 인간 소실 사건 해결을 의뢰했다. 첫 번째 사건의 의뢰인이었던 가지와라 씨가 실종되고, 그의 자택에서는 강한 루미놀 반응이 발견된 사건이었다.

마지막 수록작인데 연작 단편집의 마무리로는 괜찮은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앞선 단편들의 배달원들이 모두 등장하고, 첫 번째 사건 의뢰인과 관련된 사건을 해결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작품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마지막 작품으로 돌아오는 방식은 일종의 수미쌍관으로, 확실히 연작 단편집이구나!라는 재미를 전해줍니다.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부분이 있습니다. 가지와라가 배달을 시켰을 때, 범인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배달원보다 먼저 찾아가 살해했는지가 핵심입니다. 진상은 특정 상품을 주문하면 안건 상담 비용을 할인해준다는 쿠폰에 있었습니다. 범인은 가지와라에게 그 쿠폰을 전달해두었고, 가지와라가 특정 상품을 주문하자 상담 의뢰가 들어온 것을 알고 배달원보다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를 살해한 뒤, 큰 우버 이츠 가방에 시체를 넣어 옮겼던 겁니다. 이는 특정 상품이 상담과 관련되어 있다는 앞선 설정과도 잘 연결되고, 쿠폰 전달 같은 소소한 정보도 비교적 공정하게 제공되어 마음에 듭니다. 

배달 앱과 공유 주방 시스템을 이용한 시리즈 특유의 장치도 마지막까지 살아 있고, 모든 추리는 결국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점장의 철학도 잘 드러나서 시리즈 작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장이 범인이었다는 결말은 뜬금없었습니다. 가지와라의 전처, 그러니까 가지와라 료마의 어머니로부터 암살 의뢰를 받았다고 해서 실제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전개는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앞선 작품들에서 쌓아온 세계관을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로 직접적인 살인 실행까지 가는 것은 과했습니다.

배달원들이 합심해서 진상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는 설정도 생각만큼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연작의 마무리로 여러 인물을 다시 모으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인물들의 감정이나 관계가 충분히 쌓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마지막에 점장의 추리 철학에 대한 설명이 너무 긴 것도 단점입니다.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 자체는 이 시리즈와 잘 맞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 철학을 길게 풀어 설명하다 보니, 사건의 긴장감보다 작가의 설명 의식이 더 강하게 느껴진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26/03/28

미명의 집 : 건축탐정 사쿠라이 교스케의 사건부 - 시노다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축 대학원생 사쿠라이 교스케와 아오, 미하루 일행은 할아버지 아스마 와타루가 지은 이즈의 별장 “여명장”에 대한 아스마 리오의 조사 의뢰로 여명장을 찾았다. 여명장은 스페인풍 별장이지만 집 중심의 파티오가 주변 방과 바로 이어지지 않고, 심지어 창문조차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건물이었다.
알고보니 와타루는 1년 전 그 집에서 머리를 다쳐 죽었는데 경찰은 사고사로 처리했으며, 얼마 뒤 아들(리오의 부친) 아스마 나다오도 같은 집에서 칼에 찔렸지만 자살 미수라고 주장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교스케 일행은 와타루가 여명장 어딘가에 거대한 블루 사파이어를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던 중 부동산업자 사메가이 하루오가 여명장 파티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고, 사건 해결을 위해 아스마 가 사람들을 여명장에 불러모았지만 교스케마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다치고 말았다.

아오는 자신의 절대 기억을 통해 여명장에서 고야의 판화에 남겨진 흔적을 보고, 와타루가 죽기 직전 와인으로 “NADA”에 원 하나를 더해 “NADA-O”, 즉 “나다오”라는 이름을 남겼음을 알아냈다. 즉, 와타루를 죽인 범인은 나다오였다. 레키가 나다오에게 스페인어 “NADA”, 곧 “허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을 준 게 동기였다. 나다오는 평생 아버지에게 존재를 부정당했다고 생각해 왔었다.
나다오는 자신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자살하려 했지만, 사메가이는 리오의 여동생 산고가 죽였다는게 진상이었고 
교스케는 뒤이은 추리쇼를 통해 아스마 와타루의 인생을 재구성하고, 사파이어의 위치를 밝혔다. 특이한 파티오의 구조와 레키가 남긴 글이 열쇠였다. 마지막으로 레키가 남긴 “NADA-O”는 단순히 아들을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허무, 혹은 그 반대”라는 뜻으로, 자신의 삶이 완전히 허무만은 아니었음을 전하려 한 흔적이었음을 알려주었다.

시노다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건축 탐정 사쿠라이 교스케' 시리즈 1작으로 원서로 감상하였습니다. 분량도 길고, 전문 용어도 많아서 완독까지 오래 걸렸네요. 

철거 위기에 놓인 이즈의 별장 "여명장"을 둘러싼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처음에는 오래된 별장의 보존 문제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스마 와타루의 죽음, 아스마 나다오의 자살 미수, 사메가이 하루오의 죽음,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블루 사파이어까지 여러 갈래의 수수께끼가 한꺼번에 얽혀 있습니다. 분량은 적지 않지만 이렇게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덕분에 읽는 내내 호기심을 유지시켜 줍니다.

무대가 되는 "여명장"이 사건의 핵심이라는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건축 탐정' 시리즈답게요. 스페인풍으로 만들어진 이 별장은 중앙의 파티오가 방과의 연결이 단절되어 있고, 동선도 어딘가 비정상적인 기묘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교스케는 여명장의 배치와 채광, 파티오의 위치, 벽의 막힌 구조 같은 기묘한 요소들을 건축 전문가의 시선으로 분석하여 아스마 와타루의 일생을 재구성하는 추리에 활용합니다.
영국에 유학을 갔던 와타루가 굳이 스페인으로 건너가 마술馬術을 배웠다는 점, 스페인풍 별장에 유난할 정도의 애착을 보였다는 점, 새벽과 바다를 피하면서도 그 공간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집 안에 남겨진 미술적·건축적 흔적들을 합치고 미학 및 역사적인 지식까지 동원한 교스케의 추리는, 와타루는 안달루시아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귀족 여성 루나와의 기억을 평생 함께 했으며 여명장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그 기억을 일본 땅에 재현한 장소였다는 겁니다. 이러한 추리의 과정은 건축학에 미학, 역사까지 결합되어 있어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당연히 여명장에 대한 묘사도 치밀하고요.

고야의 판화 "전쟁의 참화" 69번(아래 그림)이 사건의 핵심 단서로 사용되는 미술적인 장치도 좋습니다.

그림 속 'NADA'라는 말이 단순한 문구나 다이잉 메시지가 아니라, 동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다오는 자신의 이름이 스페인어로 "허무"를 뜻하는 "NADA"에서 왔다고 여기며, 아버지가 평생 자신을 부정했다고 생각해서 와타루에 대해 증오와 살의를 품게 되었다는데 현학적이면서도 작품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마지막에 'NADA'에 'O'가 더해져 의미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결말도 마찬가지로입니다. 여러모로 작가가 건축 뿐 아니라 미술, 그리고 언어의 상징성을 세심하게 설계했다는 인상을 전해주거든요. 마무리로도 최고였다 생각되고요.

다만 추리소설로서 보면 아쉬움도 큽니다. 가장 먼저 걸리는 것은 인물 설정입니다. 주인공 사쿠라이 교스케는 물론이고, 동반자 아오와 친구 미하루까지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만화적인 분위기를 띱니다. 교스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외모를 지녔으면서 유난히 아침잠이 많고, 아오는 순간 기억력에 가까운 특수한 능력을 갖춘 인물로 그려지는 식인데, 깊이있는 전문가적 분석이 중요한 작품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상학 탐정 야부키 가케루 정도 수준이 적당했어요. 

추리도 그렇게 치밀하지는 않습니다. 고야 화집의 다이잉 메시지로 나다오의 동기가 드러나면, 아스마 와타루 사건의 범인은 사실상 나다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그를 누가 도왔느냐로 좁혀지는데, 리오가 아니라면 당시 슈젠지에 나다오와 함께 있던 산고 뿐입니다. 나다오 자살 미수 사건에 이르면 이 점은 더 분명해집니다. 나다오의 공범(?)으로 비밀을 함께 했던 사람이 범인일 테니까요. 운전을 할 수 있고, 리오로 오인될 만한 외모를 가진 인물 역시 산고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수수께끼에 비해 추리는 다소 빈약합니다.
또한 나다오가 범인이라는건 추리라기 보다는 남겨진 다이잉 메시지와 나다오의 자백(?)으로 밝혀지기 때문에 추리적인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애초에 다이잉 메시지가 쓰여진 화집을 폐기하지 않은 이유도 불분명하고요.

산고가 블루 사파이어에 집착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는 동기도 가족 안에서의 소외감 등으로 잘 설명하고 있기는 한데, 사메가이가 죽게 되는 과정은 우연과 억지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문제는 큽니다. 와타루가 리오에게 남긴 말 조각상 가운데 유서 같은 쪽지가 들어 있던 걸 산고가 훔쳤던 것, 그것을 깨트려 내용물을 발견했던 것, 쪽지를 가지고 여명장에 갔다가 사메가이를 만난 것 모두 우연이라는건 너무 작위적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해요.

블루 사파이어가 숨겨진 곳이 파티오 안의 샹들리에였다는 마지막 장면도 극적이기는 하지만 여러모로 억지스럽습니다. 한줄기 빛이 들어와 사파이어를 비추는 장면은 만화같은 아이디어였고요. 그리고 여기 숨겼다면 산고의 상세한 조사 때 발견되지 않았을 까닭이 없고, 발견하지 못했어도 원래 계획대로 여명장을 철거했다면 발견할 수 있었을테니 대단한 추리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건축과 미술을 사건 해결의 핵심에 놓은 발상, "NADA"와 "O"를 둘러싼 상징, 그리고 아스마 와타루의 삶을 복원하는 마지막 추리는 볼 만했지만, 기대보다는 못했어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읽었다는 보람 외에는 특별히 건질게 없습니다. 문고본 기준 47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구태여 번역까지 해 가면서 읽을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3/06

소녀 A의 살인 - 이마무라 아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디오 DJ 신타니 카나는 심야방송에서 ‘F여학원 1학년 소녀 A’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양어머니가 죽은 뒤 양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고, 밤마다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으며 더는 버티지 못하면 자살하거나 양아버지를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방송 후, 신타니 카나는 고교 동창 와키사카에게 연락했다. 후요 여학원 교사인 와키사카에게 편지 속 내용이 진짜인지 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와키사카의 조사 결과, 조건에 맞는 학생은 세 명 - 물리 교사 다카스기의 양녀 다카스기 이즈미, 의사의 딸 마쓰노 아이, 경찰의 양녀 스와 준코 - 이었다. 

카나는 세 명을 직접 접촉해 ‘소녀 A’를 찾으려고 연락처도 받았지만, 곧바로 다카스기 히사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강도 사건, 혹은 소녀 A가 이즈미이며 그녀의 복수가 아닐까 생각되었지만 다카스기가 마쓰노 의사를 협박하고 있었다는게 드러나 마쓰노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조사를 받던 마쓰노가 “집에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고, 같은 전화를 받았던 스와 경부는 수사를 통해 모든게 신타니 카나와 연결된다는걸 알아내는데...

국내에는 소개된 적 없는 이마무라 아야의 장편 추리소설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은 다카스기 히사오 살인 사건을 쫓는 본편의 이야기와, 한 ‘소녀’의 독백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독백하는 소녀가 본편 등장인물 중 의외의 인물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서술 트릭에 의한 반전이 재미의 핵심이고요.
지금 시점에서 이런 교차 서술을 통한 화자를 오해하게 만드는 서술 트릭은 제법 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1995년에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발표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했을 겁니다. 지금 읽어도 웬만한 재미는 선사해 줄 정도니까요.

단지 서술 트릭 뿐 아니라, 카나가 협박범의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소녀 A’의 편지를 날조한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소녀의 성폭행 피해에 대한 고백을 방송에서 소개한 뒤, 동창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와키사카에로부터 소녀의 주소를 알아내는 계획으로 DJ라는 직업이 갖는 파급력,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양부의 성범죄라는 소재가 결합되면서 ‘개인정보 확인’이라는 위험한 행위가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덕분입니다.

얼핏 사소해 보였던 마쓰노의 주장, 즉 집에 있을 때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이 사건 해결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등, 앞 뒤가 잘 맞아 떨어지며 막힘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쉽게 읽히며,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니까요.

다만 후반부는 지나치게 뻔합니다. 이즈미의 “알토 목소리”였다는 증언으로 신타니 카나가 전화를 걸었다는게 특정되고 나면, 그녀가 범인이라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다카스기는 이전에도 협박범이었으니 카나를 협박한게 범행 동기가 되었을테고, 협박의 원인은 과거 카나가 ‘소녀’일 때 저질렀던 양부 살해일 것, 즉 카나가 '소녀'였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고요. 양부 사체를 고향집에 숨겨두었을 거라는 정황도 뻔하디 뻔합니다.
초반에 소녀가 “혹시 이즈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 끌고 갔더라면 그나마 이런 뻔한 추정이 조금이나마 완화되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이즈미 방의 자물쇠나 전날의 수면제 복용은 경찰 조사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이즈미가 소녀일 가능성’은 배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소녀들’은 그녀들이 다카스기를 죽일 이유가 희박하니 애초에 대상이 될 수도 없고요. 즉, 반전의 폭을 초반부터 줄여놓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범죄에 대한 여러 설정들도 설득력이 부족하고 거슬립니다. 대표적인게 신타니 카나에게 ‘운이 너무 없었다’는 설정입니다. 

  • 후요 학원에 모친 없이 양부와만 사는 1학년 여학생이 무려 3명이나 있었다
  • 아내가 유키에인지를 확인하는 전화를, 대상자인 다카스기에게 맨 마지막에 걸었다
  • 전화들을 사건의 핵심 용의자 마쓰노와 수사 담당자 스와, 그리고 피해자의 딸 이즈미가 각각 받았다

는 건데, 대상자가 딱 한 명이었거나, 이즈미가 처음 전화를 받았거나 했다면 사건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거에요. 이렇게 악운이 겹치는건, 불운으로 사건을 억지로 진행시킨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습니다.
카나의 범행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구 금액이 얼마였든, 2년만 버티면 공소시효가 성립되어 협박이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는 계산을 생각하면 굳이 위험한 선택을 했어야 했나 싶거든요.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듯한 다카스기가 협박에 맛을 들여 계속 협박했다는 설정도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스와 경부가 공무집행 중 사망하게 만든 범인의 딸을 양녀로 키운다는 설정은 독자의 감정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독자가 분노할 만한 범죄를 이야기 안에 꽤 자연스럽게 녹여냈고, 그 사건을 둘러싼 여성의 심리 묘사가 설득력 있게 이어진다는 점은 좋습니다. 서술 트릭을 잘 활용했다는 분명한 장점도 있고요.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하다는 단점을 극복하기는 어려워 감점합니다만, 번역 출간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은 합니다.

2026/02/01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2025) : 별점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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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호주 국빈 만찬이 열리던 밤, 백악관 관리 총책임자 A.B. 윈터가 시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측근 해리 홀린저 등은 자살로 무마하려 했지만, 워싱턴 경찰 국장이 수사를 위해 부른 명탐정 코델리아 컵은 살인 사건이라며 백악관을 폐쇄하고 모든 관계자와 초대 손님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여러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되었으나, 국회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세 번째 남자)이 밝혀져 다시 코델리아 컵이 소환되는데...

넷플릭스에서 감상한 추리 드라마입니다. 총 8회 에피소드, 시간으로는 약 8시간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장편 영상 추리물을 본 건 처음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안락의자형 추리물을 영상화한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컵 탐정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전개의 대부분인데, 이를 단순히 나열했더라면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언 장면과 컵 탐정이 추리한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왜곡된 증언과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범인 릴리 슈마커가 대통령의 배우자 엘리엇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건 발생 당시 2층을 비우고, 이후 사건 현장은 옐로우 룸을 드나드는 문을 폐쇄하는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핵심 단서인데, 릴리가 인터뷰 중 실제로 엘리엇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이런 장면은 소설로는 구현하기 힘든, 영상물이기에 가능했던 연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단서들, 예를 들어 백악관 내부 그림의 이동으로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 등도 모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정 코델리아 컵도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마을과 인간 관계의 전문가인 미스 마플처럼, 자신이 지닌 "탐조"라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던 덕입니다. 
스스로를 천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무능을 드러내며 면박을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 또한 인상 깊습니다. 고전 본격물의 "잘난 척하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백악관 관계자들의 무능과 거짓이 워낙에 강하게 드러나는 덕분에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추리의 절정에서 선보이는 추리쇼도 명탐정답게 화려합니다. 릴리가 범인임을 밝혀내고, 핵심 증거인 시계를 찾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카일리 미노그의 깜짝 카메오 등장도 재미요소였어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악관 내부 묘사입니다. 지나치게 희화화되어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조직이 이렇게 무능하게 묘사된다는 건 과장이 지나치지요. 백악관의 전통과 규범은 무시한 채, 개인의 아집으로 만찬을 망친 요리사 실라와 파티셰 디디에, 알코올중독 집사, 그리고 불청객과 정체 불명의 게스트까지 들여보낸 경호원들 모두 다음 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게이라는 설정 역시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풀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인 릴리가 퍼스트 레이디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테고요. 여러모로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였습니다.

추리적인 면에서도 억지가 있습니다. 릴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대통령 동생 트립, 엔지니어 브루스, 파티셰 디디에 등이 우연히 개입한 탓입니다. 거의 동시에 사건 현장에 모였던 여러 인물이 벌인 우발적 행동으로 인해 사건이 꼬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건이 호주 국빈 만찬 중에 벌어졌고, 국빈들을 감금했다는 설정도 무리입니다. 백악관 직원을, 백악관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점은 이미 코델리아 컵에 의해 밝혀졌던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국빈들은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의 감금을 유지하더라도요.

후더닛물답게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는 있지만, 정작 범인 릴리의 동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점도 아쉽습니다. 릴리는 재벌가 출신으로 애초에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희박합니다. 실라나 엘시처럼 직접적인 "해고"라는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횡령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의 딸인 릴리가 이 정도 이유로 해고되거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합니다. 설정의 과도함과 동기의 빈약함 같은 단점은 분명하지만,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볼 만합니다.

2025/11/29

내 시체를 찾아주세요 - 호시즈키 와타루 / 최수영 : 별점 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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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작가 아사미는 개인 블로그에 불치병에 걸려 자살할 생각이니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글을 올리고 사라졌다. 뒤이어 블로그에 예약 갱신으로 시어머니의 치부와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벌였던 동반 자살극에 대한 진상을 그린 소설을 차례로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아사미의 남편 마사타카와 아사미의 편집자 사오리는 자신들의 불륜이 드러나지 않을까, 그리고 아사미가 다른 무언가를 고백할까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블로그 패스워드를 찾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마지막 갱신글로 동반 자살극의 진상과 사오리의 치부가 드러났다. 모든걸 잃은 사오리는 마지막 글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마사타카가 은거하는 별장으로 향하는데...

유명 작가의 자살과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블로그 글로 시작되는 구성이 인상적인 장편 범죄 복수 스릴러입니다. 

블로그 글, 마사타카, 아사미 시점을 오가면서 아사미가 정말로 자살한 것인지? 시체는 어디에 있는지? 라는 의문과 아사미 고교 시절 동반 자살극에 대한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전개는 흡입력이 뛰어납니다.
편집자 사오리가 마지막 블로그 글의 용어 선택이 평소와 다르다는 점을 알아채고 진상을 눈치챈 장면은 '편집자'라는 직업의 전문 지식을 활용한 추리라는 점에서 괜찮았고요.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는 낮습니다. 우선 주요 인물들의 설정부터 비현실적이에요. 모리바야시 아사미는 극단적인 학대를 겪은 뒤 고아로 자라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남편 마사타카는 데이트 강간을 일삼고 아사미에게 질투심을 품은 채 얹혀 사는 인간 말종입니다. 사오리 역시 아사미에게 집착한 나머지 마사타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설정이고요. 이렇게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과장되거나 극단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은 복수극으로 '아사미는 자살한게 아니라, 복수를 위해서 마사타카를 일부러 자극해 살인에 이르게 만들었다'인데, 복수로 보기에는 애매하고 부족합니다. 마사타카가 살인을 저지른 후의 계획이 전무한 탓입니다. 살인범으로 만든 뒤 파멸시키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범행을 덮어주기 위해 자살로 가장한 블로그 글을 올리기까지 하니까요. 이렇게 되면 마사타카는 뻔뻔하게 아사미 증쇄본 수익, 그리고 실종 신고 7년 후에는 남은 유산으로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데 이걸 복수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살해당하는 것만 목표였고 그 뒤는 상관없다’고 유서에 쓰여있는 걸로 퉁치고 끝내는데, 허무하기 짝이 없네요. 이보다는 정교하거나 복잡한 추가적인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아사미가 불러낸 사기꾼에게 속아 전 재산을 날린 마사타카의 어머니가 유산을 노리고 아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아사미가 실종 중에는 마사타카에게 유산이 상속될 수 없으니, 아들을 죽여봤자 헛짓거리였다!는게 밝혀지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물론 마사타카가 자살하기는 했지만, 이는 계획된게 아니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아사미가 사라진 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책은 큰 화제를 얻었고, 그에 따라 인세 수입도 늘어날 상황에서 마사타카같은 쓰레기가 극단적 선택을 한다는 것도 영 와닿지 않고요. 앞서 그의 내면을 묘사할 때 죄책감이 큰 인물로 그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중 마사타카가 아사미를 살해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의 작품 혹평에 대한 분노와 증오인데, 그게 사람을 죽일 정도의 결정적인 트리거라는 것 역시 잘 설명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소설 속 소설인 "하얀 새장 이야기"도 중반까지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흥미를 이끌지만, 결말은 결국 동반 자살로 귀결될 뿐이라 추리적 가치는 없고, 아사미의 성격이나 내면을 깊이 있게 드러내지도 못해서 왜 삽입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들 이야기 설정도 새로운게 없어서 시시하니까요.

그 외에도, 마사타카가 블로그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알아챈 방법도 대충이고, 사오리가 멍청하게 혼자 마사타카를 찾아가 살해당한 것도 비현실적이며, 아사미야 그렇다 쳐도 사오리 실종 이후에 경찰 수사가 시작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등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눈에 많이 띕니다. 사체 은닉도 그냥 잘게 나누어(?) 버렸다 정도로 넘어가는건 아니다 싶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흡입력 있는 출발과 일부 매력적인 장치는 있지만, 여러모로 비현실적이고 복수극으로도 미흡하여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11/16

고독한 용의자 - 찬호께이 / 허유영 : 별점 2.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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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오다가 자살한 셰바이천의 방 옷장 안에서 수십 개의 표본병에 토막난 채 담긴 두 구의 남녀 사체가 발견되었다. 쉬유이 경위는 수사를 진행하며 바이천의 이웃이자 친구 칸즈위안을 의심했지만, 칸즈위안은 바이천의 외삼촌 셰자오후가 진범이라 주장하며 경찰에 협력을 제안했다. 유명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의 추리대로 셰자오후가 범인일 수 있다는 증거가 하나 둘 씩 드러나지만, 경찰 고위 층은 진범은 바이천이라며 사건을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추리작가 찬호께이의 신작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의 쉬유이가 주인공이지만, 전작과의 연결고리는 거의 없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이번에도 작가 특유의 촘촘한 트릭과 복선, 마지막의 반전까지 추리소설 팬이라면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특히 ‘은둔자 살인마’ 셰바이천이 실제 범인이 아니라는 가정 아래 수수께끼가 하나둘씩 풀려나가는 전개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는 덕이 큽니다.

셰바이천은 은둔형 외톨이로 방 안에서만 생활하던 인물인데, 그의 방 옷장에서 다수의 표본병이 발견되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경찰은 당연히 셰바이천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칸즈위안이 셰자오후가 범인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때부터 하나씩 드러나는 단서들과 그 단서들을 조합해 수수께끼를 풀고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묘미이지요.

첫 번째 수수께끼는 셰바이천이 방 안에만 머무르는 은둔자인데, 어떻게 셰자오후가 수십 개의 표본병을 셰바이천 몰래 옷장 안에 넣을 수 있었냐는 겁니다. 수사 결과, 그 날 어머니 메이펑은 외출했습니다. 식사권을 선물받고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나갔었지요. 그런데 이 식사권을 선물한 사람이 셰자오후였습니다. 그는 누나 메이펑이 나간 틈에 셰바이천의 저녁 식사에 수면제를 타 재운 뒤, 몰래 표본병을 옷장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평소처럼 그릇을 씻지 않고 그대로 방 문 앞에 내 놓았던 점이 증거입니다.
두 번째 수수께끼는, 셰바이천이 오랜 시간 동안 옷장 속의 사체를 왜 몰랐느냐는 것인데, 셰바이천은 은둔형 외톨이라 옷을 갈아입을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옷장을 열 일이 없었고요.

그리고 밝혀지는 셰자오후의 범행 동기도 놀랍습니다. 그는 과거부터 어린 궈쯔닝을 노려서, 먼저 궈타오안을 살해한 뒤 그의 아내 쑨수칭의 동거남이자 기둥서방이 됩니다. 이후 궈쯔닝을 장기간 성폭행했는데, 궈쯔닝이 집을 가출한 뒤 만나지 못하다가 우연히 다시 발견하여 살해했습니다. 증거는 궈쯔닝 사체에 남겨졌던 담배로 지진 흔적들입니다. 셰자오후가 운행하는 택시에도 혈흔과 머리카락 등의 증거가 남았고요.
이후 셰자오후는 궈타오안과 궈쯔닝 사체를 버리면 범행이 들통날까봐 두려워 작은 병에 담아 토막 보관했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자 새 거처인 레지던스로는 사체를 옮길 수 없어서 셰바이천의 방에 숨겼던게 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셰자오후가 범인이라는걸 밝혀내는 칸즈위안의 관찰력과 추리력도 볼거리입니다. 쑨수칭의 기둥서방일 때 찍혔던 사진 속 손목시계가 무엇인지 알아채고, 당시 상황을 추리해내는게 대표적입니다. 회사에서 범죄 혐의로 해고당하고 빚더미에 올랐던 셰자오후가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는 건, 쑨수칭의 수입이 좋았다는걸 의미하며 쑨수칭이 셰자오후를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있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며, 이는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훌륭한 스릴러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셰자오후를 체포한 이후 충격적인, 진짜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반전이 펼쳐지거든요. 바로 옷장에서 발견된 사체가 셰바이천이었다!는 반전입니다. 바이천은 이미 20년 전 뇌종양으로 사망했고, 친구 칸즈위안이 사체를 숨기고 어머니 메이펑을 위해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왔던 겁니다. 은둔형 외톨이였던 덕분에 외부와 접촉이 거의 없었고, 이를 이용해 오랫동안 존재를 숨길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자살한 남성은? 그는 칸즈위안의 동거인이자 또 다른 은둔자인 ‘더듬이’였습니다. 온라인 게임을 통해 궈쯔닝과 친구가 된 그는, 궈쯔닝이 자살한 뒤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되어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셰자오후를 덫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을 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셰자오후는 살인은 저질렀지만, 토막 살인의 진범은 아니었던 겁니다. 모든 것은 더듬이와 칸즈위안이 함께 짠 복수극이었습니다.
이 반전을 셰바이천과 더듬이 시점의 교묘한 전개로 독자를 속이고 있어서 일종의 서술 트릭물로 볼 수도 있고요.

이렇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데,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분량이 지나치게 긴 편이고, 경찰의 수사가 비현실적으로 무능하게 묘사되는 탓입니다. 칸즈위안을 의심해 미행하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누가 보아도 셰바이천이 범인임이 명백한데, 구태여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경찰의 유치한 복수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반전도 드라마틱한 힘에 비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설계는 조금 약합니다. 어머니가 더듬이의 시신을 아들이라고 착각한다거나, 같은 아파트에 은둔자가 둘이나 살았는데 누구도 더듬이의 존재를 몰랐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20년 전 죽은 셰바이천의 사체가 보관 상태가 좋았음에도, 그 정체를 끝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20년 동안 은둔자였다면, 20년 전의 사진이나 기록을 찾아보는게 당연합니다. 때문에 사체의 정체가 경찰 수사에서 드러나지 못한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인간 관계 부분의 작위적인 설정도 거슬립니다. 은둔형 외톨이 더듬이는 궈쯔닝과 온라인 게임 친구가 되었다가 그녀를 자기 방에서 돌봐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이 궈쯔닝을 어린 시절 성폭행했던 셰자오후의 외조카 셰바이천의 집이었고, 조카집을 방문한 셰바이천을 목격한 궈쯔닝이 자신의 거처가 드러났다 여겨 자살했습니다. 아무리 홍콩이 좁아도 그렇지, 주요 인물들이 이렇게까지 밀접하게 엮인다는건 억지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찬호께이 특유의 기획력과 구성력은 좋고 추리와 반전 모두 괜찮은 편입니다. 단점도 명확해서 감점도 약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평균 이상의 재미는 보장해 줍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표지 디자인은 정말 최악이네요. 최근 출간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에요...

2025/10/11

정체 (2024) - 후지이 미치히토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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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가족 살해로 사형 선고를 받은 카부라기는 자해 후 병원 이송 중 탈옥에 성공했다. 형사 마타누키는 카부라기를 집요하게 추적했지만, 카부라기는 계속 도주하다가 결국 '아오바 요양원'에서 발견되었다. 카부라기는 출동한 경찰들에 포위되자 요양원 동료 마이를 인질로 삼았다. 피해자 유족 요시코로부터 증언을 얻을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형수가 탈옥한 뒤 수백일간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주하는 과정을 그린 범죄 스릴러 드라마입니다. 소메이 타메히토의 소설이 원작이네요.

이야기의 중심은 사형수 카부라기의 도주극입니다. 카부라기가 이송 중 구급차에서 도주한 뒤, 일본 각지를 전전하며 체포의 위기를 피하는 과정이 아주 상세합니다. 변장과 마스크를 이용해 사람들 속에 섞여드는 모습도 설득력 있게 표현되고요. 또 도주 과정에서 카부라기가 인연을 맺은 여러 사람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도 큰 울림을 줍니다.
드라마적으로도 잘 구성되어 있으며,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연출도 안정적이어서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습니다.

하지만 기대와는 좀 달랐습니다. 보통 이런 류의 억울한 누명을 쓴 희생자의 도주극은 진범을 밝혀내는 부분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중반 이후에 또다른 일가족 연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체포되면서 카부라기가 누명을 썼다는 진상이 드러납니다. 반전도 없어서 관객 입장에서는 맥이 빠집니다. 요시코의 증언만으로 누명을 벗는다는 점도 시시했고요. 
때문에 초반의 스릴러적 긴장감은 뒤로 갈 수록 느슨해지고, 드라마적 색채가 강해집니다. 이는 요시코의 행방을 알아내고 증언을 이끌어내기 위한 카부라기의 노력이 그리 잘 묘사되지 못한 탓도 큽니다. 솔직히 마지막 증언 요구 장면은 '강요'로 보여서 영 별로였어요.

카부라기가 마지막 체포되는 모습은 앞서의 도주극과는 다르게 허술합니다. 오사카 공사장이나 사야카의 집에서 도주 후 변장할 때는 관객도 깜짝 놀랄 정도로 다른 사람처럼 보였는데, 요양원에서는 마이가 잠깐 찍어 올린 SNS로 덜미가 잡힐 정도로 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탓입니다. 주연 요코하마 류세이 문제도 커요. 정체를 숨기고 도주를 이어가기에는 너무 잘 생겼으니까요. 보다 평범한 외모의 배우를 기용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또 카부라기를 돕는 주변 인물들의 동기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나마 마이는 자기 부친도 누명을 썼다는 이유라도 있지, 오사카 공사장에서 만났던 카즈야(점프)는 카부라기를 경찰에 신고했었고, 사야카는 그냥 카부라기 얼굴에 반했을 뿐인데 왜 끝까지 믿고 따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나름대로 성장했다는 장면은 완전히 사족이었고요. 이들보다는 상부의 명령에 의심을 품은 채 카부라기를 추적하는 마타누키 형사의 내적 갈등을 더 잘 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촬영과 연기 모두 뛰어난, 잘 만든 영화이지만 추리극으로서의 재미는 다소 부족합니다. 기대와 달리 드라마적인 무게가 강했어요. 이런 드라마를 좋아하신다면 모를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2025/09/06

로드워크 - 스티븐 킹 / 공보경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0세인 블루 리본 세탁 공장 관리자 조지 바튼 도스는 부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속도로 확장 공사 때문에 조지는 물론, 이웃들과 공장이 이전해야 할 상황에 놓이자, 조지는 모든 걸 내려 놓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회사에서도 쫓겨나고 아내마저 떠난 조지는 철거일에 더티 해리의 매그넘과 강력한 라이플, 그리고 다이너마이트의 60배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폭탄으로 무장하고 경찰과 대결을 펼치기 시작했다...

스티븐 킹이 필명 리처드 버크먼으로 발표했던 작품입니다. 특징이라면 호러나 초자연적 요소가 전혀 없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는 겁니다. 평범한 40대 가장이 점차 정신을 놓고 폭주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집요하게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스티븐 킹 특유의 치밀한 묘사는 돋보입니다. 특히 조지가 분노의 이유도 모르면서 도로 때문에 극으로 치닫는 과정의 상황과 심리 묘사, 그러면서 내뱉는 대사들은 압권이에요. TV 구입과 시청이 한 남자의 좌절과 상실감을 이렇게까지 그리는 소재로 활용된다는건 놀랍습니다.

조지가 공사 장비를 화염병으로 불태우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결국 집을 폭파시키는 장면은 충분히 화끈합니다. 특히 끝내 자폭하고 마는건 기묘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닳고 닳은 기성세대가 앞장서서 공권력과 제도를 파괴한다는게 아이러니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무대가 된 1973~74년 겨울은 베트남 전 실패와 석유 파동으로 미국에서 침체와 절망이 확산되어가던 시대였는데, 이 시대에 읽었더라면 아마 더 와 닿지 않았을까 싶네요. 

당시 시대를 잘 드러내는 여러 소재들도 볼거리입니다. 식당 주크박스에서 엘튼 존의 "Goodbye Yellow Brick Road"가 흘러나오고, 뉴스에서 워터게이트 사건 이야기가 나오고, 마지막에 집과 함께 자폭하는 장면에서 롤링 스톤스의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가 흘러나오는 등의 장면들처럼요(심지어 최후에 듣는 가사는 '그래도 노력한다면 가끔은 당신한테 필요한 걸 갖게 될 거에요.').

그러나 걸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점이 훨씬 더 두드러지거든요. 고속도로 확장 공사라는 사소한 사건 때문에 멀쩡한 가장이 모든 걸 버리고 폭주한다는걸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도 못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묘사는 좋지만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특정 사건을 계기로 한 남자가 미쳐간다는 설정, 사회와 단절된 남자가 분노와 허무 속에서 파괴로 치닫는 서사는 장르 전반에 걸쳐 너무 이미 너무 흔한데, 이 작품만의 독창성도 거의 느껴지지 않고요.
조지가 폭주 과정에서 만나는 21세 히치하이커 올리비아, 암흑가 거간꾼 매글리오리 등과 가까워지는 전개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미쳐가는 중년 남자에게 마약에 찌든 젊은 여성이 호감을 느낀다?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인 발상이에요. 

마지막으로, 소설 속에서 40세를 그저 청춘이 끝나고 저물어가는 나이로만 묘사한 것도 100세 시대인 2025년에는 적절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솔직히 40세밖에 안 된 주제에 인생 다 산 것처럼 올리비아에게 이제 인생은 달릴 수 없는 공회전 상태이다 운운하는건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60세는 되어야 하는게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이름에서 기대되는 호러나 스릴러 요소는 별로 없는데다가, 설정과 전개가 뻔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25/09/05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 - 시모무라 아쓰시 / 남소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카가와에서 만든 전기 자전거의 결함으로 사람이 죽은 뒤, 회사에는 비난이 폭주했다. 그 때문인지 시카가와 사장이 목을 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사장과 관계가 있는 일곱 명의 남녀가 한 폐쇄 공간에 갇혔다. 그들을 가둔 '게임 마스터'는 그들 중 시카가와 사장을 죽인 범인만 살려주겠다며 48시간을 주었다. 사고를 기사화하며 시카가와를 비난했던 기자 카미사와, 피해자 대표 유메코, 사장의 아내 카나에, 시카가와의 부장 린도와 과장 이시와다, 사장의 운전사 쿠라모치와 청소부 하야시의 일곱 명은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며 지은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가 시모무라 아쓰시의 장편입니다. 

닫힌 공간, 클로즈드 써클에서 범인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는건  "방주"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이라는 제목의 상황을 잘 구현했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거리의 상황에 놓인 탓에, 일곱 명의 시카가와 사장 관계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백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보도, 증거 날조, 거짓 증언 등으로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서 사장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자연스럽게 사장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이 살해했다는 자백으로 이어지지요. 즉 모두가 '범인'입니다. 그러나 자백한 사람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 자백에 허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자백을 격파하여, 자연스럽게 탐정 역할을 분담하게 됩니다. 즉, 모두가 '탐정'인 거지요. 마지막에는 한 명만 살아남고 전부 죽음으로써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추리적인 부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시카가와 사장의 사망은 그의 사무실에서 발생했고, 이 사무실은 항상 CCTV로 감시되고 있었기에 자살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범인이 되기 위해서는 밀실 살인을 일으켰어야 했기 때문에, 이 밀실 살인의 트릭을 파헤쳐나가게 됩니다. 처음에 CCTV를 피해 사무실에 들어간 트릭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사장을 살해했고, 어떻게 나왔는지를 다른 사람의 자백을 들은 뒤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은 더 정교한 트릭을 구성해서 '내가 진짜 범인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요. 여러 명의 추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독 초콜릿 사건"도 떠오르네요.
진범이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트릭도 단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아 만족스럽습니다. 사장실 문을 열면 CCTV가 가려져 사각지대가 생기고, 탈출할 때는 녹화를 약 30초간 멈춘 뒤 재개되도록 설정(여러 시간 동안 동일한 장면만 촬영한터라, 조사하는 사람도 배속 재생해서 보기 때문에 30초는 눈치채기 어렵다)해서 그 사이에 탈출했다는 트릭입니다. 두 개 모두 기술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외의 자백에서도 유메코가 주장한 '냉장고에 숨어 있었다'는 트릭은 기발했습니다.

아울러 유일하게 실질적인 죄를 짓지 않은 카미사와(과장되게 비난했고, 정보 제공자 쿠라모치에게 금품을 건넨 실수는 했지만 보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므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어서 죽었다는 결말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러웠다는 점에서 고전 추리 소설에 대한 오마쥬 느낌도 전해줍니다. 작가의 전작도 다른 작품의 영향이 짙게 느껴졌는데, 이런 스타일의 작법을 즐겨 하나 보네요.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탓입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성인들이 선뜻 폐쇄 공간에 모여 무려 이틀 동안이나 목숨을 건 추리 게임을 펼친다는게 과연 현대 사회에서 가능할지 의문이에요. 핸드폰 전파 신호가 닿지 않는다는 것 부터가 억지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중간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의 난입, 현재 진행 중인 게임이 알고보니 경찰이 탐정들을 고용해 만든 '연극 무대'라는 설정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고 불필요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가상가족놀이"와 흡사한 설정인데 그만큼의 동기나 반전이 있지도 않습니다. 연극이라는 장치는 빼고 진짜 게임으로 밀고 가는게 훨씬 더 긴장감 넘쳤을 겁니다.
게다가 연극 속에서 등장한 카미시마가 사실 진짜 사장이었고, 사망한 인물은 사장의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결말은 억지의 화룡점정입니다. 경찰 수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닌가요? 카미시마가 다른 피해자들을 단검으로 살해해서 살아남았는데, 이를 린도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진상도 불필요한건 마찬가지고요.  

설명도 부족합니다. 일곱 명이 시카가와 사장이 무고하게 비난받게 된 원흉이라는걸 시카가와 사장이 알아낸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내의 불륜, 회사 과장 이시와다의 거짓 증언, 운전사 쿠라모치의 증거 조작은 알 수 있었다고 해도, 하야시의 경우는 실제로 크게 드러난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대표 유메코의 아버지가 실제로는 자전거 결함으로 죽은게 아니었다는 것, 카나에의 불륜 상대가 린도였다는 것 역시 알아내기 어렵고요.
작 중에서는 그들을 가둔 건물을 사장실 구조로 만든게 아니라, 그 건물 구조로 사장실을 리모델링했다고 설명되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을 들여 몰래 이런 계획을 구체화했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한참 회사가 비난받고 있는 와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의 구조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전체적인 전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결말은 억지스러운 반전이 도드라집니다. 흥미는 있지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작가 작품은 다시 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2025/08/30

아르테미스 - 앤디 위어 / 남명성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즈 바샤라는 월면 도시 아르테미스 빈민가에서 밀수까지 행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중, 거래상대 트론으로부터 거액을 줄테니 암석 수확기를 고장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트론이 알루미늄 공장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거액에 넘어간 재즈는 여러가지 장비를 준비해 수확기 파괴에 나섰지만 들통나서 계획은 실패했다.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고 겨우 아르테미스로 돌아온 재즈는 트론이 살해당했고, 자신도 표적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조사에 나선 재즈는 ZAFO라는 이름의 혁신적 광섬유 생산을 노린 음모가 배후에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마션"으로 유명한 앤디 위어가 2017년에 발표한 장편 SF 소설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과학적인 이론에 기반을 둔 치밀한 설정입니다. 월면 도시 설정이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아르테미스는 기압이 지구의 20%라 순수산소를 사용하고, 물은 61도에서 끓어서 커피가 맛이 없다, 경찰과 병원이 없고 보안부가 범죄자를 직접 처벌하며 심각한 범죄에는 추방을 적용한다, 법과 도덕 기준은 느슨하고, 낮은 중력 덕분에 관광객들이 색다른 경험을 위해 매춘을 찾는 경우도 있다. 산소는 알루미늄 제련 과정에서 남아돌아서 알루미늄 제련 공장은 이를 공급하는 대가로 전기료를 면제받는 계약을 맺고 있다, 화재는 가장 위험한 사고로 꼽히며, 모든 시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 처럼 바탕이 되는 세세한 세계관 묘사는 실로 대단한 수준입니다.

이 설정들은 사건 전개에도 적극 활용됩니다. '고가의 소재 ZAFO는 중력이 낮은 곳에서만 만들 수 있다, 아르테미스의 통화인 슬러그는 규제를 받지 않고 추적도 불가능하다'는게 핵심이거든요. 즉, 마피아는 슬러그를 이용해 돈 세탁을 하려고 별로 이익도 나지 않는 알루미늄 공장을 월면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트론은 ZAFO 생산을 위해 원료가 되는 유리, 규석을 만들 수 있는 이 공장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수확기 파괴를 지시한 것이지요. 수확기가 파괴되어 공장 가동이 멈추면, 공장과 아르테미스 간 산소와 전기를 교환하는 계약이 끝날테고, 그 때 자신이 몰래 확보한 산소를 공급해서 그 자리를 차지할 속셈이었습니다.
이렇게 트론이 마피아 소유인걸 알면서도 알루미늄 회사를 노린 이유를 재즈가 추적하여 진상을 밝히는 과정은 작가의 전작과 다르게 잘 짜여진 범죄 스릴러 느낌도 전해주는데, 설득력 높은 이유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용광로 폭발로 대량의 산소와 메탄이 반응해 클로로폼이 생성 및 아르테미스로 유입되어 주민들이 기절하는 위기도 과학적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르테미스에는 차량이 없어 큰 사고는 없었고, 낮은 중력 덕분에 갑자기 쓰러져도 부상자가 적었다는 결과도 월면 도시 설정을 잘 활용한 것이고요. 

작가 특유의 모험물적인 분위기도 잘 살아 있습니다. 재즈가 수확기 파괴에 나섰다가 들통나서 실패한 뒤 길드로부터 도주해 다시 아르테미스에 잠입하는 과정, 범죄 조직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면서도 진상을 알아내는 과정, 결국 도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공기를 순환시키려는 과정이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이 과정이 여러가지 과학적인 설정과 함께라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하지만 이야기는 허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공장 용광로를 파괴한 후 트론의 딸 레네가 공장을 차지하게 만든다는 마지막 계획은 무리가 있어요. ZAFO가 그렇게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신소재라면, 전기를 공짜로 공급받지 않아도 공장을 유지하는게 당연히 유리하니까요. 마피아 조직이 선선히 공장을 넘겨주고 손을 뗄 이유가 없습니다. 거대한 폭발 후 공장이 멀쩡할 가능성도 낮고요.
용광로 옆의 대량의 산소와 메탄이 있다는걸 미리 알고도 무시하는 전개, 재즈가 아버지 작업장을 날려버린 일을 속죄하기 위해 돈을 벌었다는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결말은 정말 영 아니었어요. 재즈가 평범한 밀수꾼이아니라 실은 아르테미스의 밀수품을 전부 관리하는 우두머리였다는 건데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한 도시 밀수 조직의 우두머리가 돈 몇 푼 벌려고 아둥바둥한다는 앞 부분 설정은 대관절 뭔지 모르겠어요. 경쟁자를 어떻게 제거했는지도 설명이 없고요. 밀수품을 잘 관리하겠다는걸 약속하여 행정관과 거래해 추방을 면한다는 것 역시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묘사와 모험적인 전개 덕분에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완성도는 전작에 비해 떨어집니다. 심심할 때 가볍게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만큼은 아닙니다.

2025/08/29

네버 라이 - 프리다 맥파든 / 이민희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트리샤와 남편 이선은 둘러보기 위해 방문했던 교외의 외딴 저택에 고립되었다. 눈보라 탓이었다. 저택은 원래 2년 전 실종된 유명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언 헤일의 소유였다. 머무는 동안 트리샤는 누군가 숨어 있다고 의심했지만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고, 대신 에이드리언이 환자 상담을 몰래 녹음해 보관한 비밀방을 발견했다. 테이프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던 트리샤는 또 다른 숨겨진 지하실을 찾아냈는데, 그 안에 부패한 사체가 놓여 있었다... 

2년 전, 유명 정신과의사 에이드리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차량 타이어를 훼손했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찍은 환자 EJ의 협박이 시작됐고, 그녀는 연인인 컴퓨터 전문가 루크의 도움으로 영상을 삭제하려 했지만 EJ는 이 장면마저 촬영해 협박 수위를 높였다. 결국 에이드리언은 EJ 살해를 결심하는데...

프리다 맥파든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장편 소설입니다. 최근 너무 일본 작품만 읽은 듯 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편식은 좋지 않으니까요.

이 작품은 2년 전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언 헤일의 시점과 2년 후 현재 트리샤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다가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전개 방식 자체는 특별히 독창적이지 않지만, 이 과정을 통해 트리샤가 에이드리언의 환자 PL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PL이라는 이름은 패트리샤에서 비롯된 것이고, 트리샤는 (패)트리샤였던 겁니다.

PL은 원래 약혼자와 친구들과 캠핑을 갔다가 의문의 연쇄살인마에게 습격당해 혼자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혼자와 친구의 불륜을 알게 된 뒤 두 사람을 살해하고, 이후 살인마에게 습격당한 것처럼 꾸며온 것이 진상이었습니다. 에이드리언은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를 위해 찾아온 PL과의 상담 과정에서 이 사실을 간파했고, 자신을 협박하던 EJ를 제거하기 위해 트리샤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진 트리샤는 오히려 에이드리언을 살해하고 시체를 감췄지요. 

한편, 에이드리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된 시체는 에이드리언이 아니라 EJ였는데, 이는 에이드리언이 EJ를 감금해서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루크가 지하실에서 발견한 사체를 보고도 에이드리언이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시체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이런 디테일은 확실히 여성 작가스러워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진상, 반전에 이르는 과정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트리샤는 에이드리언을 살해한 범인인데, 마지막 반전이 드러날 때 까지 트리샤 시점 전개에서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심약한 임산부로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3인칭도 아니고 1인칭 시점이며, 다중인격도 아닌데요. 이건 반칙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설정과 묘사도 많습니다. 트리샤가 굳이 비밀리에 테이프를 듣는게 대표적입니다. 트리샤는 EJ를 죽인건 에이드리언이고 루크가 범인이 아니라는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둘의 상담 테이프를 들을 이유는 없어요.
트리샤가 이선이 어머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고, 그런 그에게 자기 범행을 고백한 뒤 부부가 함께 입을 막기 위해 루크를 살해하고 사체를 파묻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선의 범행은 지금 와서는 제대로 증명할 수도 없고, 그나마 증거라는 테이프도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트리샤의 범행은 잔혹함과 규모에서 이선의 범행과는 수준이 달라요. 아무리 부창부수라지만 이선이 선뜻 트리샤의 손을 잡는다는건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합니다. 트리샤가 에이드리언을 왜 살해했을까요? 트리샤는 EJ를 납치하는 자기가 CCTV같은데 찍혔을지도 모른다며 에이드리언을 살해했는데,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에이드리언을 죽인다고 CCTV 데이터가 사라지는게 아니니까요. 스스로 EJ의 사체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억지입니다. 사체가 발견되면 가장 문제가 될 건 에이드리언이니, 그녀가 알아서 잘 숨겼다고 믿는게 당연합니다. 되려 시체만 하나 더 늘렸고, 유명인사 에이드리언의 실종을 초래하여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수사 당시 경찰이 저택 비밀 공간들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건 순전히 운이었고요. 
저택에 누군가 침입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선이 지나치게 태평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 루크가 저택에 침입한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말도 별로입니다. 환자를 돈으로만 대했고, 특별히 좋은 치료를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환자를 살해하기 까지 한 에이드리언 헤일은 죽어도 쌉니다. 트리샤, 이선 급으로 나쁜 악당이니까요. 그러나 엄청나게 순수했고, 진심으로 에이드리언을 사랑했을 뿐인 루크를 마지막에 부부에게 개죽음당하게 만든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부부의 행복한 생활과 트리샤가 이선마저 죽일 수 있다는 에필로그보다는 루크의 죽음이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거라는 식으로 그리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처럼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반전은 흥미롭지만 반전을 반들기 위한 의도적인 가짜 서술 트릭물이라서 감점합니다. 억지와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그다지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8/01

동트기 힘든 긴 밤 - 쓰진천 / 최정숙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살해당한 남자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옮기던 남자가 체포되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 장차오로, 피해자 장양과 금전 관계로 다투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경찰의 권위에 눌려 허위 증언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함과 더불어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에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경찰은 장차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 천재인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0여년 전 있었던 허우구이핑 변사 사건 및 초등학생 아이 성상납이라는 추악한 범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서서히 드러난다...

중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폭력, 권력형 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초등학생을 성상납하는 추악한 범죄가 이루어졌음에도, 대기업 회장과 고위 정치인이 결탁하여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며, 주요 수사 관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이 20여 년 전인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이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쑨훙원의 비서 후이랑과 공안 리젠궈가 결탁하여 허우구이핑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유력한 증인이었던 딩춘메이도 살해하며, 딩춘메이를 살해한 왕하이쥔마저 죽이면서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는 과정은 범죄, 수사물로 충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전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입니다. 이처럼 극심한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수사를 이어가는 장양과 주웨이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요.

결국 사건이 영원히 은폐되나 싶었지만, 장양, 주웨이, 천민장, 장차오가 힘을 합쳐 거짓 살인 사건을 만들어 이를 공론화하는 전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양이 자살한 뒤, 그 시간에 알리바이를 만든 장차오가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목을 끈 다음, 시체를 드러내는 도입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동 성매매를 했던 고위 정치인 샤리핑의 친자 검사를 비밀리에 진행해, 그가 피해자에게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 절정 부분의 쾌감도 강렬하고요.
샤리핑이 최종 악역이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흑막이 존재해서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고, 장양의 조력자들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축인 허우구이핑 사건을 다시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양과 주웨이, 천민장의 우정과 의리, 정의감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사파가 지배하는 무림을 정의롭게 되돌리기 위해 나서는 영웅호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느껴졌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이 곳곳에 보입니다. 시한부 인생인 주인공이 자살했지만, 이를 살인 사건으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아요. 심지어 자살 방법과 동영상으로 자살했다는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유사하다는건 아쉽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집행이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에 맞는 설정이라서 와 닿는데, 장양이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할 이유는 솔직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지는 못합니다. 왜 샤리핑 사진과 사건 진상을 그냥 인터넷에 뿌리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과거 허우구이핑 사건 조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는 너무 뻔해서 뒤로 갈수록 식상합니다. 장양과 주웨이 등이 그들의 덫에 쉽게 걸리는 등의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리젠궈가 어떤 식으로든 훼방놓을게 뻔한데, 계속 리젠궈의 방해에 걸려 좌절하는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허술합니다. 장차오가 갑자기 등장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이유부터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허우구이핑의 연인이었던 리징과 결혼한 게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낄 일인지 의문이에요. 장차오 때문에 허우구이핑이 죽은게 아니니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허우구이핑의 사인이 잘못되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들, 그 당시에 장차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장양을 돕기 위해 갑자기 나타나는 전개가 더 어색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장양에게 사건에 뛰어들기를 강요했던 연인 우아이커와의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우아이커의 비중을 초반에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수학 천재 옌량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큽니다. 옌량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 강렬함만큼은 놀랍고, 한번 잡으면 손 떼기 힘든 재미를 갖추고 있는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7/05

미치도록 잡고 싶다 - 정락인 : 별점 3점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범죄 전문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진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미제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사건의 흐름은 물론 왜 지금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들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1년에 발생한 "'그놈 목소리'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 저자는 이 사건이 장기 미제가 된 가장 큰 원인을 초동 수사 실패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사건 초기 세 번이나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거든요. 첫 번째는 범인이 돈을 전달하려 할 때 접근했던 수상한 남성을 놓친 것이고, 두 번째는 경찰이 다른 장소에 잠복하느라 범인이 돈을 챙겨 유유히 사라지게 만든 점, 세 번째는 범인이 은행에 돈을 찾으러 왔지만 현장에서 놓친 경우입니다. 오늘날 CCTV 등의 수사 인프라를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논리적인 추리입니다. 앞서의 "그놈 목소리" 사건의 경우, 저자는 범인이 최소 세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합니다. 범인의 언행, 범행 방식, 통화 기록 등을 종합한 분석이 그 근거입니다. 또한 사건의 최신 수사 현황도 책에 충실히 담겨 있습니다. 이형호 군의 외가 친척인 이 모 씨의 성문이 범인과 완벽하게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명확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언급됩니다. 그런데 만약 범인이 여럿이라면, 알리바이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희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지금이라도 체포해서 수사할 수는 없는지 독자로서 궁금해지네요. 
"남양주 아파트 밀실 살인사건"에서도 실제로 추리 소설의 소재로 활용될만한 추리가 선보입니다. 14층 피해자의 집까지 찾아가려면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CCTV에 범인은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면 마찬가지로 비디오폰에 촬영되고요. 그러나 두 카메라 모두에 범인이 찍히지 않았고, 아파트 문을 억지로 열지 않았으며, 범인이 화장실까지 이용했다는 점에서 범인은 피해자와 친분이 있는 아파트 내부자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게 저자의 추리입니다. 현관 비디오폰 촬영은 노크를 해서 피했고요. 이 정도면 어느정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대부분 워낙 유명한 사건들이라, 이미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여러 차례 다뤄진 내용이 많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엽기토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정동 연쇄 납치 살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평소 저자의 '사건 속으로'라는 이름의 칼럼을 꾸준히 읽어온 저에게는 책에 담긴 정보 중 상당 부분이 이미 접했던 것이었고요. 이런 점 때문에 새로운 정보나 미공개 기록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몇몇 사건은 설명이 부족합니다. "홍해 토막 살인 사건"은 남편의 혐의가 짙은 정도가 아니라 명백해 보이는데도 왜 체포하지 못하는지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김해, 부산 부녀자 연쇄 실종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가 있지만 사체를 찾지 못해 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는데, 최근에는 '시체없는 살인 사건'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최신 판례와 수사 기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면 좋았을 겁니다.
미제 사건과 무관한, 저자의 기자로서의 활약과 소회를 담은 컬럼인 "정락인의 사건 추적"은 책의 성격과 많이 다른 탓에 차라리 추가되지 않는게 좋겠다 싶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제 사건 자체의 흥미와 저자의 분석력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이미 알려진 사건 중심의 구성과 정보의 신선도 부족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래도 "완전범죄"보다는 깊이있는 정보가 많고, "표창원의 사건 추적"보다는 추리와 분석 측면으로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