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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9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도 부부 자택에 화재가 일어난 후, 도의원인 남편 도도 야스유키의 사체는 거실 소파에서 전소된 채, 전 여배우인 아내 도도 에리코 사체는 욕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살한 걸로 보였지만, 수사를 통해 위장된 자살임이 금세 드러났다. 경찰은 원한 관계를 축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해 나갔고, 고다이, 야마오 컴비는 진술을 통해 도도 야스유키의 태블릿이 사라졌다는걸 알아냈다. 그 직후, 범인이라는 인물이 협박 편지를 보내어 태블릿 속 정보를 거래하자고 제안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장편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갈릴레오 유가와'나 '가가 형사'가 아닌, 새롭게 시작된 고다이 쓰토무 형사 시리즈이지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치밀한 수사 과정 묘사입니다. 주변 진술을 통해 태블릿의 존재를 확인하고, 태블릿 전원이 켜진 위치 데이터와 수상쩍은 언행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유력 용의자로 포착하고, 과거 조사를 통해 야마오 경부보가 도도 부부와 고등학교 때 부터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내고, 현금 인출책의 결정적 증언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체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철저하게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역시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입니다. 도도 에리코는 귀한 손님에게만 티파니 찻잔을 낸다는데, 사건 현장 식기 세척기에서 그 찻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티파니 찻잔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야마오는 사건 당일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최소한 야마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티파니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귀한 손님, 또는 손님(범인)이 떠난 뒤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찻잔을 현장에서 치웠던 것이지요. 

결국 수사를 통해 도도 야스유키가 살해당한 아내를 집에 있던 도구로 자살로 위장한 뒤,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미사키가 범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진상 외에도, 수사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 증언을 통한 의문들 - 예를 들어, 도도 야스유키는 체력이 좋았는데 어떻게 범인에게 간단히 살해당했는지 - 까지 모두 수사로 밝혀지는 등, 수사의 디테일은 최고 수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고다이의 예리한 관찰력도 빛납니다. 범인은 도도 저택에서 에리코를 목매달 끈을 조달했는데 왜 그런 준비를 사전에 하지 않았을까? 전기밥솥도 마찬가지, 왜 예약을 해제하지 않았을까? 즉 범인은 간단히 간파당할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우발적이면서도 어설픈 위장 공작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관찰을 통해 제시하거든요.

그리고 야스유키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신의 결의도 합쳐 미사키를 숨겨주기 위한 야마오 경부보의 범죄 계획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는 일부러 단서를 흘려 체포되었던 겁니다. 제목 그대로 '가공범'인 셈이지요. 하지만 야마오는 몇 달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며, 그 시점이면 증거도 많이 사라져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고다이의 끈질긴 수사로 진범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다이는 도도 에리코의 과거를 뒤져 고교 졸업 직후 숙모 집에 머물던 시기 임신했다는 정황을 잡고, 숨겨진 딸이 있으며 그녀가 도도 집을 드나들던 미사키였다는걸 밝혀냅니다. 도도 에리코의 임신을 밝혀내는건 수사 팀의 인해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수사물이라는걸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요.

야마오가 이런 계획을 진행한 동기인 40여년 전인 1985년 고등학생 시절의 야마오, 도도 부부가 엮인 연애와 욕망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팜므 파탈을 넘어서는 매력의 소유자 에리코의 존재감이 압권이었어요. 이런 설정에서는 일반적인, 학생과 관계를 가진 교사 도도 야스유키는 알고보니 굉장한 인격자에 선한 인물이라는 반전 설정도 신선했고요.
세 명의 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짝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 - "경솔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잃게 되는 거에요. 짝사랑이라면 상처 입는 일도, 상처 주는 일도 없잖아요." - 도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미사키의 범행 동기는 ‘버림받음’과 ‘비교에서 비롯된 분노’로 제시되는데, 이미 친모가 에리코라는걸 안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자기 딸이 비행을 저질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인으로 폭발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단순 폭행도 아니고 살인인데 말이지요.

가공범 설정도 지금 보기에는 다소 뻔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행을 떠안는 모습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별다를게 없으니까요. 너무 빠르게 야마오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고요.

핵심 동기인 도도 에리코의 출산과 아이 유기도 배경 설명이 빈약합니다. 아이는 야마오의 아이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낳을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묘사된 둘의 관계로 보면요. 힘들게 낳는 선택을 했다면, 왜 곧바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 부분은 낙태가 금기시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에리코의 개인사 같은게 추가적으로 보강되었어야 납득이 되었을 겁니다. 

진범이 밝혀진 뒤 사회적 파장이나 여론의 반응이 거의 다뤄지지 않아 결말의 현실감이 약하고, 나가마의 죽음은 결국 자살이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인 등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고다이 형사도 작가의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옅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성실함, 눈썰미 외에는 캐릭터적 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치밀한 수사와 ‘가공범’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경찰 수사물로는 우수한 수준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경찰 수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제일 불쌍한건 도도 야스유키네요. 자기 딸이라고 착각한 남의 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2023/11/04

허상의 어릿광대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점

허상의 어릿광대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최신작. 모두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가로서 원숙기를 넘어선 달인의 경지에 이른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드라마 전개가 능수능란합니다. 사건에서의 불가능한 현상 조사를 구사나기가 의뢰하는 단순한 패턴에서 벗어나서, 유가와가 사건에 뛰어드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며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끼워넣는 솜씨가 기가 막힐 정도에요. 덕분에 유가와의 조사도 사건과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 - "2장 투시하다", "4장 휘다" - 와, 반대로 유가와가 경찰까지 속여가며 범인의 실수를 유도하는 이야기 - "5장 보내다" - 가 공존하는 등, 변주의 폭도 굉장히 넓습니다. 이렇게 내용을 풍성하게 가져간건 영상화를 염두에 둔 행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었습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과학을 이용한 트릭들이 별로인 탓이 큽니다. 추리의 여지도 많지 않습니다. 유가와의 도움 없이 경찰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는 이야기도 많은데다가, 동기 면에서 설득력이 부족한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에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은 느껴지지만, 정교한 본격 추리물로의 가치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장 현혹하다"
종교단체 구아이회의 교조 렌자키는 "염"을 사람에게 보내는 능력이 있었다. 주간지 기자가 취재차 참석한 자리에서 경리담당 부장 나카가미가 염을 받다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아무도 나카가미에게 손을 대지 않아서 사건은 자살로 굳어져 갔고, 기자도 '염'을 받고 몸이 따뜻해짐을 느낀 뒤 기사를 발표해서 구아이회의 교세는 더 확장되어 갔는데....

상대방의 몸을 따뜻하게 만들고, 경우에 따라 자살까지 유도한 방법이 무엇인지가 핵심 수수께끼입니다. 유가와가 밝혀낸 진상은 일종의 '전자레인지' 효과였습니다. 원격으로 상대방에게 투사하여, 피부 아래를 따뜻하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추리의 여지는 없다시피 합니다. 애초에 교조가 '염'을 보내는건 특별한 방 안에서만 가능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방에 무언가 장치가 되어 있다는건 당연합니다. 경찰이 진작에 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건물을 조사하지 않은게 의아할 뿐입니다. 
또 장치 출력을 강하게 해서 나카가미가 지독한 뜨거움으로부터 도망치려다 자살하도록 유도했다는 진상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상식적으로 나카가미가 조금만 자리를 이동해도 뜨거움으로부터 해방되었어야 하거든요. 방 안의 모든 사람이 '염'을 받으면 안되니 장치는 명확한 조준이 필요했을테고, 그 범위도 그리 넓지 않았을테니까요.
유가와가 대학 노트 사이에 감열지를 숨겨놓아서 트릭을 눈치챘다는 방법도 이상했습니다. 그냥 주머니같은데 넣어 두었어도 똑같았을텐데, 지나치게 멋을 부리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트릭 만큼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부분들은 모두 아쉬웠습니다.

"2장 투시하다"
투시 능력이 있는 호스티스 미카가 살해당했다. 수사 결과 손님이었던 니시하타가 범인이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공금 횡령의 증거를 미카가 투시했던게 동기였다. 그런데 미카는 어떻게 명함과 가방을 투시했을까?

구사나가기 해결하기 어려운 트릭을 밝혀내기 위해 유가와를 찾아가곤 했던 그간 시리즈의 전개 방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구사나기의 수사만으로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사체에 남겨졌던 희귀한 담뱃재가 클럽 손님 중 한 명과 관련이 있었고, 그와 같은 회사에 다녔던 니시하타가 미카와 마지막에 만났던 손님이었다는걸 알아내서 체포로 이어지게 되거든요. 
그래도 유가와도 범인 체포와는 무관하게 미카의 투시가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했다는걸 밝혀내는 활약을 선보입니다. 최신 장비인데 나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밝혀낸 단서가 계모의 진심을 담은 메모를 찍은 사진이었다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나 작 중에서처럼 명함을 읽는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잘 찍힐까?라는 의문은 가시지않았고, 어두운 바나 영화관 같은 공간에서 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을 확인했다면 들통났을 것 - 밝은 액정 화면이 티가 날테니 - 같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경찰이 가택 수사를 했음에도 이 특수한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내지 못한 것도 이상하고요. 무엇보다도 미카와 계모와의 관계를 다룬 신파조의 이야기는 많이 유치했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3장 들리다"
구사나기는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던 환자 가야마를 제압하다가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가야마는 환청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수사해보니 가야마와 같은 회사에 근무했던 영업부장 하야미 다쓰로가 기묘한 단어를 검색한 뒤 자살했었다는게 밝혀졌다.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환청을 들리게 만들었다는건 추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초반에 이명 현상을 겪는 여직원 무쓰미가 등장했고, 가야마가 환청 현상을 겪었다고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어떤 기술을 이용했는지만이 궁금할 뿐인데, 범인이 전자파를 피해자들 머리에 쏴서 소리를 들리게 했다는 진상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작중에서도 소형화가 어렵다는 설명이 될 정도의 장치인데, 이런걸 개인이 개발해서 소지하고 운용한다는건 비현실적이니까요.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남 탓만하는 범인 고나카 설정도 진부했고요.

수사를 구사나기의 경찰학교 동창이자 관할서 형사인 기타하라가 맡도록 해서 수사 1과와 관할서 사이 갈등을 그려낸건 좋았고, 유가와의 논리 정연함을 기타하라와의 대화를 통해 새삼 드러내는 솜씨는 좋았지만 이야기에 별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4장 휘다"
프로야구 선수 야나기사와의 아내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수사를 맡았던 구사나기는 방출 후 트라이아웃을 준비하던 야나기사와가 전성기 때의 폼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데이터 측정을 도와줄 수 있는 유가와를 소개시켜주었다. 그러나 상심에 빠진 야나기사와의 기량은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데...

강도 살인사건 범인은 구사나기에 의해 쉽게 체포됩니다. 이후 야나기사와의 재활과 더불어 피해자 다에코가 가지고 있던 쇼핑백 속 선물이었던 자명종을 누구에게 주려고 했는지?를 밝혀내는 전개로 진행됩니다. 이런 점에서는 강력 사건이 등장하지만 일상계에 가까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에코가 '자명종'을 남편의 현역 생활 연장에 도움이 될 대만 프로야구 관계자에게 선물하려 했고, 중국에서는 시계를 선물하는 행위인 '송종'의 발음이 '임종'과 똑같아 자명종 선물을 받지 않았다는 진상도 일상계스러웠고요. 

다에코가 타고 있던 차에 소화기 분말이 묻었다는걸 알고, 호텔 주차장에서 소화기가 분출된 시간을 알아내서 다에코가 누구를 만났는지를 조사하는건 경찰 구사나기가 아니
었다면 조금 힘들었겠지만, 일상계물로 높은 점수를 줄 만한 수작입니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이번 단편집 수록작들 중에서도 에피소드들이 가장 잘 어우러진다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5점입니다.

"5장 보내다"
하루나는 텔레파시로 쌍둥이 언니 와카나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고 느껴 형부 이소가이에게 연락했다. 서둘러 귀가한 이소가이는 중상을 입은 와카나를 발견했다....

쌍둥이 사이에 텔레파시가 오갈 수 있다는걸 범인도 믿을 수 있게끔 그럴듯하게 설명한 뒤, 범인의 실수 - 친한 지인인 진범을 모른척하고, 진범이 외모를 크게 바꾸는 등 - 를 유도한다는 설정은 좋았습니다. 데이토 대학 교수 유가와가 직접 나서서 텔레파시가 근거가 있는 것 처럼 조사했기 때문에 범인도 깜빡 속아넘어갔던 것이지요. 이 모든걸 안배한 유가와의 추리와 능력이 빛나는 이야기였습니다. 텔레파시는 실체가 없지만, 자매간의 정은 유효하다는 결말도 좋았고요. 

다만 이소가이의 동기가 명확하므로, 경찰 수사로 충분히 범행이 드러나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장 위장하다"
구사나가와 유가와는 시골 읍장이 된 대학 동창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살인 사건 수사를 돕게 되었다. 유가와는 구사나기가 찍은 현장 사진을 보고 현장이 조작되었다는걸 알아내는데....

흔들의자에 앉은채 산탄총에 맞은 시체라는 현장 사진만 보고 조작을 눈치챈 유가와의 추리력은 빛납니다. 운동에너지, 작용과 반작용을 언급하며, 흔들의자에 앉은 사람이 총에 맞으면 반동 때문에 앞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인데 그야말로 물리학자다운 추리였어요. 발견자 다에가 현장을 조작한 이유도 그럴듯했습니다. 원래는 의붓아버지 다케히사가 다에의 친모인 아내를 죽이고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다에의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다에는 유산을 상속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순서가 반대인 것처럼 현장을 조작했던 겁니다.

다만 사건의 동기인 아내의 불륜은 식상했으며 , 다에가 현장을 조작했다는 증거가 거의 없는데 이를 유가와의 말대로 '우수한 일본 경찰'이 현장 조사로 밝혀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7장 연기하다"
극단 '파란 여우'의 연출가 고마이가 칼에 찔려 살해당했다. 유력한 용의자는 전 애인 아쓰코로, 그녀의 알리바이 트릭은 구사나기가 이미 밝혀냈지만,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유가와는 소도구인 칼이 흉기라는건 이상하다는데 주목하여 진상을 추리해낸다.

아쓰코가 고마이를 찌르고 휴대폰을 조작하여 알리바이를 만드는 과정이 맨 처음에 나오는 도서 추리물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그런대로 공들인, 정교한 트릭이라 생각하고 흥미롭게 읽었는데 곧바로 구사나기가 모든걸 꿰뚫어보고 밝혀내서 좀 놀랐습니다. 구사나가도 그리 만만한 친구는 아니네요. 
고마이의 현 애인 구도 사토미가 진범이었다는 반전도 의외였으며, 경찰이 사건 진상을 파헤치기 힘들었던 불꽃놀이 사진은 단순히 유리창 반사에 의한 현상이었다는 디테일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살인범이 되어 경찰에게 쫓기는 심리를 느껴보고 싶었다'는 아쓰코의 동기, 그리고 재봉 가위를 흉기로 사용한 사토미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극단 소도구인 칼을 흉기로 위장한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범인을 극단 사람 내부인으로 한정해버리면 기껏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짜낸 트릭들의 가치도 떨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23/10/20

히가시고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

"'정말 아까운 (못타이나이)' 책방" 이라는 이름의 일본 중고 서점에서 직원이 선정했다는 히가시고 게이고 추천 작품 30선입니다. 2022년 5월에 발표된 기사라서 아주 최신작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래의 작품들입니다. "유성의 인연"은 다른 리스트에서도 높은 순위로 선정되었던데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선정된 작품들이 추리물보다는 드라마 쪽 비중이 높은게 영 불안하기는 합니다만.....

2020/04/05

무증거 범죄 - 쯔진천 / 최정숙 : 별점 2점

무증거 범죄 - 4점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3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는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은 현장에 지문과 ‘날 잡아주세요’란 메시지가 인쇄된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다른 어떤 허점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한 네 번째 특별조사팀마저 성과 없이 해산되자, 경찰은 수학 교수로 일하고 있는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편 한순간의 실수로 불량배를 죽이게 된 청년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증거를 없애줄 테니 범죄를 부인하라며 경찰 대처법을 가르쳐주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수정 인용)

중국 추리 소설찬호께이의 작품 3편 - "13 .67",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 과 원샨의 "역향유괴" 만 읽어보았습니다. 찬호께이의 작품은 대체로 평작 이상이었지만 원샨의 작품은 기대 이하였었는데, 이 작품은 어떨까 싶어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트릭이 존재하는 본격 추리물은 아니며, 범죄자와 탐정두뇌 싸움이 핵심인 범죄 스릴러입니다. 그러나 제목의 '무증거 범죄'가 의미하는 완전범죄에 대해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前 수사전문 요원이었던 뤄원이 깡패 소태보가 살해된 현장을 조작하는 과정의 디테일, 그리고 이 사건이 범죄논리학자 옌량에 의해 하나씩 단서가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이 볼 만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2만 위안이 넘는 큰 돈을 하트 모양으로 작게 접어서 사건 현장에 숨겨 놓는다는 아이디어가 기발했어요. 이 돈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몰려들어 현장이 훼손되게 만드려는 의도였는데, 아주 설득력 넘쳤습니다.
이 사건과 항저우 시에서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모를 남기고 벌어진 연쇄 살인극이 맞물리는 전개도 좋습니다. 뤄원이 자신의 아내와 딸이 실종된 현장에 남겨진 지문의 소유자를 찾기 위해, 그 지문의 소유자가 범인인 살인극을 조작하여 일으켰다는 동기였는데 대담한 아이디어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충분합니다. 이러한 설득력 덕분에,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됩니다. 

옌량이 추리한, 뤄원이 주후이루와 궈위가 저지른 살인 은폐를 도와준 이유도 그럴듯합니다. 뤄윈이 소태보를 애초부터 살해할 목적이었지만, 선수를 빼앗긴 뒤 은폐를 도와주었다는 이유인데,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이 그게 사실이라는걸 암시하니까요. 좀 작위적이기는 해도, 나쁘지는 않았어요. 이외에 익숙치 않은 중국식 묘사들도 흥미로왔습니다. 제목의 '무증거 범죄(완전범죄)'를 비롯하여 상식적이다, 이론적이다라는 말을 '유물론자'라고 표현한다던가, 범인이 경찰 수사에 대해 잘 알고있다는 걸 '역수사 능력' 이라고 표현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으며, 두뇌 싸움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옌랑과 경찰이 뤄원을 잡아 넣을 증거를 찾아내는데 결국 실패하는 탓이 가장 큽니다. 옌량의 활약이 없는건 아니지만, 두뇌 싸움의 결과는 일방적입니다. 게다가 고차방정식 운운하며, 증거가 없으니 범인부터 대입해서 시나리오를 짠다는 옌랑의 방법론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특정 인물을 범인으로 만드는 조작극과 별로 차이가 없어서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이는 뤄원이 "모든 이야기가 들어맞는다고 해서 내가 범인이라곤 할 순 없어. 자네의 시나리오는 아무한테나 죄를 뒤집어씌운 다음 범행 동기를 설명할 수 있지."라고 통렬하게 부정하지요. 옌랑은 마지막에는 감정에 호소해서 어떻게든 자백을 이끌어내는게 전부로, 한 마디로 뤄원한테 완패한 셈입니다. 이래서야 공정한 두뇌 싸움으로 보기는 어렵죠.
또 뤄원이 연쇄 살인극을 벌이는 와중에, 과연 단 한 번도 경찰 수사 물망에 오르지 않을 정도의 완전범죄가 가능했을지?에 대한 설명도 많이 부족합니다. 뤄원이 대단한 전문가라는걸로 퉁치기는 힘들어요. 실제로 공원에서의 범행은 목격자도 있었는데 말이죠. 하긴, 이는 뤄원의 아내와 딸을 살해한 범죄가 완전범죄가 된 것에 비하면 약과이기는 합니다. 우발적으로 급작스럽게 벌인 범행인데도 불구하고, 경찰 최고의 전문가가 사력을 다해 찾았지만 범인이 누군지 밝혀내지 못할 완전 범죄가 성립된걸 단지 운이라고 치부하는게 가능할까요? 작 중에서 뤄원의 능력이 시종일관 대단한걸로 묘사되는 것과는 배치되는 내용이기도 해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옌랑이 뤄원을 수상하다고 여긴 계기가 된 뤄원의 차에 대한 감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뤄원답지 않은 좋은 차는, 범행을 저지르고 용의선상에서 쉽게 빠져나가기 위함이라고 추리하지만, 뤄원이 과거 출원했던 특허로 성공한 부자라고 설명되는 만큼, 좋은 집과 좋은 차는 그 재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의심을 할 이유는 없어요. 또 그게 수상했다면 좋은 집에 사는 건 왜 트집을 잡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들은 사소할 뿐, 가장 큰 문제는 책 뒤 해설에서도 실려 있듯이, "용의자 X의 헌신"과 너무나 비슷한 구조라는 점입니다. 수학, 과학과 관련된 천재들의 두뇌 대결, 순전히 선의에 의해 사건 은폐에 가담한다는건 완전 판박이입니다. 애틋한 사랑을 키워나가던 두 청춘 남녀가 결국 파멸한다는 결말까지도 똑같고요. 작가 스스로도 영향을 받았다는걸 인정했다는데, 그렇다면 오리지널을 뛰어넘는 무언가 새로운게 있었어야 했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요.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요소는 중국이라는 무대의 특성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오리지널 만큼의 수작은 아닙니다. 그나마 캐릭터를 가져오려면 제대로 가져왔어야 했는데, 옌량과 뤄원 모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갈릴레오 유가와 역인 옌량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범죄자와의 승부에서 이기지 못한다는 결정적 단점이 있으며, 뤄원은 아무리 아내와 딸 실종 사건의 진범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잔챙이 범죄자들을 다섯 명이나 살해했기 때문에 동정심을 가질 여지가 없으니까요. "용의자 X의 헌신" 속 이시가미처럼 뤄원이 아내와 딸의 실종 이후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를 독자에게 잘 공감시키지 못하기도 했고요. 이건 작가가 놓쳤다고 밖에는 볼 수 없겠죠. 어설프게 캐릭터를 베끼지 말고, 초반부에 옌량이 똥이 있는 엘리베이터에 갇힌 뒤 벌어지는 사고는 재미있었던 만큼, 이런 식으로 좀 어설픈 인물로 그려가는게 차별화되고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읽는 재미는 나쁘지 않지만, "용의자 X의 헌신"에 비교하자면 한없이 부족하네요. 중국 추리 소설이 궁금하신게 아니라면,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중국 추리 소설은 찬호께이만 믿고 가야겠습니다.

2016/06/21

해상시계 - 데이바 소벨, 윌리엄 앤드류스 / 김진준 : 별점 3점

해상시계 - 6점
데이바 소벨. 윌리엄 앤드류스 지음, 김진준 옮김/생각의나무
경도 이야기 - 6점
데이바 소벨 지음, 김진준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항해 중 현재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경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펼쳤던 다양한 노력들을 설명해주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딱히 관심이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형의 추천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왜 경도 측정이 중요한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대항해 시대, 배의 현재 위치를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경도를 제대로 모르면 엄청난 피해를 입기 십상이었으니까요. 이를 실제 영국 전함들의 난파 등의 사례로 설명해줍니다. 이러한 이유로 통행이 안전한 좁은 항로만 선택해서 특정 장소에서(카리브해?) 해적 선단이 기승을 부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설명을 통해 위도는 모든 항해사들이 낮의 길이나 수평선 위의 태양, 알려진 별의 높이 등을 통해 쉽게 잴 수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건 처음 알았고요.

그래서 1714년 영국에 경도법 발표와 함께 심사원단인 경도 위원회가 생겼습니다. 2만 파운드(현재의 1백만 파운드)의 상금을 걸고요. 명확한 기준을 두고 경도 측정하는 방법에 대해 상금을 수여하려는 목적이었지요. 이 상을 수상한건 시골에서 독학으로 시계 제작법을 배운 영국의 시계 기술자 존 해리슨였습니다. 그의 시계 H1에서 최후의 작품 H5의 개발까지 40여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노력과 투쟁의 결과로요. 책에서는 해리슨의 각 시계별 특징은 물론, 개발에 쏟은 열정과 노력을 상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시계 기술자가 상을 탄 이유도 알 수 있는데, 경도 측정은 시간만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경도 자오선들은 시간에 의해 측정되니까요. 예를 들어 지구가 360도 한바퀴를 도는 데 24시간이 걸리므로, 한 시간은 360도 회전의 1/24인 15도를 가리킵니다. 항해 중인 배와 측정을 시작하는 지점 사이의 매 시간 시각 차이는 동쪽이나 서쪽으로 경도 15도의 차이를 의미하고요. 즉, 바다에서 매일 태양이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할 때 배의 시간을 정오로 맞추고, 본국 항구의 시간을 참고로 하여 매 시간 차이를 계산하면 경도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항해 과정에서 기온의 변화나 지구 인력의 미세한 차이 등으로 시간을 정확히 잴 수 없었던 탓에, 다른 대안들이 등장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은 천문 관측법이었습니다. 16세기 초반 요하네스 베르너가 착안한 달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방법에서 시작하여, 갈릴레오가 시작한 목성의 위성을 관측하는 방법 등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었지요. 이러한 이유로 경도 위원회를 이끄는 천문학자 매스켈린이 해리슨과 그의 성공을 폄하했고요. 완벽한 시계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식한(?) 천문학자 탓에 성과를 인정받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니 눈물이 앞을 가릴 뿐입니다.

물론 매스켈린 역시 그냥 딴지만 건 것은 아닙니다. 정교한 월표의 발표 등을 통해 관측을 통한 경도 측정의 신세계를 연 것은 사실이거든요. 이른바 '달 거리 측정법'으로 항해사가 달까지의 거리를 재고 난 후, 달과 수많은 별 사이의 각거리를 기록한 표를 참고하는 것입니다.
이는 관측자가 사분의, 또는 육분의로 달과 별 사이의 각거리를 관측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각거리란 문자 그대로 관측자를 기준으로 한, 두 물체 사이의 시선 각도를 뜻하고요. 매스켈린의 방대한 관측의 집대성인 월표는 이러한 관측결과 - 예를 들어 관측자가 특정 지점에서 달이 특정 별로부터 30도만큼 떨어져 있는 것을 관측했다고 하면 -를 관측자가 파리나 런던에서 그와 동일한 거리를 유지할 때의 시점과 비교할 때 사용합니다. 관찰자의 관측 시점이 새벽 1시이고 관측 시점과 동일한 각거리가 런던에서는 새벽 4시에 발생한다면, 배의 시간은 런던을 경도 0으로 보았을 때 서쪽으로 45도의 경도상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지요.

이렇듯 두 명의 거인이 각자의 비법을 가지고 진검 승부를 펼쳤다는 점에서는 테슬라와 에디슨의 대결 느낌도 살짝 나네요. 다행히 테슬라와는 다르게, 해리슨은 결국 인정받았지만요. 이유는 달 거리 측정 시 달의 시차 문제 등 여러가지 요인들로 정확한 거리 측정을 위해서는 보정 계산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계산에는 상당한 수학적 능력을 필요로 했다는 점, 해와 달이 근접하면(매달 약 6일 정도) 어떤 방법으로도 달 거리를 측정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기상이 악화되면 관측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매스켈린마저 해리슨의 후계자 중 한명인 언쇼의 해상 시계를 인정하고, 이후 동인도 회사와 영국 해군의 선장들이 크로노미터를 경쟁적으로 구입하며 달 거리 측정법은 사라져 버립니다. 1860년 영국 해군은 2백척이 안되는 군함을 보유했지만, 크로노미터는 무려 8백개 가까이 소유하고 있었다는걸 통해 시계의 시대가 왔음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크로노그래프를 대중화 시킨 해리슨의 후계자들의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지는데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아널드와 언쇼, 두명의 경쟁자가 크로노미터의 주요 부품인 용수철 멈춤쇠 탈진 장치에 대한 특허 싸움을 벌였다는 정도입니다.

이렇게 경도 측정의 역사를 일종의 대결 구도로 풀어낸 내용도 재미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저자 데이바 소벨의 필력도 대단합니다. 딱딱하고 어려울 법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이었어요. 데이바 소벨은 이러한 과학사 관련 서적을 많이 출간한 작가라는데 다른 책도 기대가 됩니다. 200페이지 정도 남짓한 분량도 적절했고요.

단, 제가 읽은 책은 형에게 빌린, 20년전 자작나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절판본입니다. 그래서인지 책의 장정, 디자인 모두 지금 기준으로는 수준 이하입니다. 게다가 해리슨의 독특한 시계들에 대해 설명만 있지 아무런 도판이 없는 것도 아쉬웠고요. 생긴 것 부터 독특하다고 해서 무척이나 궁금했는데 책으로 확인할 길이 없어 난감하더라고요. 심지어 H1의 경우는 저자 스스로 '영화의 성지 헐리우드에서도 최고의 천재들이 온갖 구상을 다 했지만 아직까지 시간 여행을 주제로 한 어떤 화려한 영화도 이것처럼 설득력있는 타임머신을 내놓지 못했다."고 언급할 만큼 기묘하게 생겼다고 하는데 말이죠. 또한 해리슨의 아이디어가 빛난 다양한 부품들 역시 글로는 짐작이 어렵기에 도판이 필요했는데 왜 수록되지 않았는지 영문을 알기 어렵습니다. 위키피디아 등을 통해 찾아보기는 했지만 책으로 자세하게 설명되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지금은 다른 출판사에서 재간되었는데 다른 판본으로는 도판이 충실하게 실려있기를 바랍니다.

그래도 과학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리고 여러가지 다양한 지식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장정 및 도판 등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내용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정도는 아닙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재간된 판본으로도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2016/06/05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 홍성욱 : 별점 2.5점

그림으로 보는 과학의 숨은 역사 - 6점
홍성욱 지음/책세상

제목 그대로 여러 가지 그림을 토대로 과학의 역사와 다양한 과학 이론을 알려주는 독특한 책입니다. 목차는 크게 세 부분 - "제 1부 근대 과학의 탄생, 제 2부 이성과 근대성, 제 3부 오래된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이미지" -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까지의 시대순리녀, 목차별로 다양한 소주제가 포함되어 있고요.

그림을 활용하여 설명해 주는 덕분에, 딱딱한 내용임에도 이해가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르키메데스의 준정다면체와 케플러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받아들여 플라톤의 다면체 다섯 개를 이용한 기하학적 원리를 여섯 개의 행성에 대입하는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부분이 아주 좋았습니다(참고로, 케플러의 이론은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 이러한 수학적 조화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곤 하는군요).그림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나무"를 이용하여 진화론을 설명해주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과학과 예술의 관계를 시대순으로 조목조목 짚어주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본인의 그림 실력을 활용하여 자세한 달 그림을 남겼던 갈릴레오도 이후 서적에서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도형만 사용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메디치 궁정의 철학자가 된 뒤 예술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석하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과학이 예술보다 더 신분이 높다"는건 갓 암흑시대를 벗어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는 뜻이지요.
이 이야기를 갈릴레오가 관측한 달 그림이 로도비코 카르디 다 치콜리의 "성모 마리아" 그림에 활용되었다는 것과 엮어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았어요. 울퉁불퉁한 갈릴레오의 달 해석을 카톨릭 교회는 반대했지만, 달은 "타락의 결점"을 상징하므로 성모가 짓밟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해석되어 무사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정밀한 과학이 기존의 예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예술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술가들의 반격 역시 몇 가지 예로 설명됩니다. 백과전서의 권두화에 대한 항목, 예술가 블레이크가 "예술은 생명의 나무이고, 과학은 죽음의 나무이다"라고 과학을 비판했다는 항목 등으로요.
그런데 백과전서 권두화 이야기는 좀 과잉해석이라 생각되기는 합니다. 저자의 의도와 그림이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의도인지 아니면 그냥 그림을 풍성하게 만들기 위한 일환이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죠. 권두화를 창작한 화가가 이렇게까지 고민해서 만들었을 것 같지도 않고요.

그 외, 볼테르의 연인이었던 샤틀레 부인이 뛰어난 과학자였다, 라부아지에의 아내 역시 만만찮은 능력으로 라부아지에를 충실히 내조했다 등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책의 특성상 도판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이 역시 대체로 우수한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에서 필요한 부분을 "확대" 해서 삽입하여 설명해주는 방식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큰 그림을 접이식으로 수록하는 것보다 훨씬 읽기 편했으니까요. "아테네 학당" 등 유명한 그림들이 사용된 것도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하지만 목차의 세 번째 부분인 "오래된 이야기와 현대 과학의 이미지"는 내용과 분위기 모두 다른 부분과는 분리되어 있는 듯 해서 아쉬웠습니다. 유명한 그림도 등장하지 않고, 과학사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좀 더 복잡한 이론에 치우친 느낌이 강했던 탓입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프리온 이야기는 완전히 생뚱맞은 내용이라 굉장히 실망스러웠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상술한 단점들로 조금 감점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재미있는 과학 도서는 분명하기에, 읽기 편한 과학사 중심의 과학 도서를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과학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과학과 예술 두 분야가 영원히 양립할 수 없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현대의 미디어 아트 같은 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요?

2015/11/03

졸업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졸업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T대학생인 가가와 친구들 - 사토코, 나미카, 도도와 쇼코, 와코와 하나에 -은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쇼코가 원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정황상 자살로 보였으나 옆방 학생에 의해 외부에서의 침입이 의심되는 등 살해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그들의 고교 은사 미나미사와와 함께 한 다도회에서 나미카마저 음독하여 죽고 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리즈 캐릭터인 가가 형사 시리즈 제 1작. 1986년 발표된 작품으로 초기작입니다.

작품은 전형적인 고전 본격 퍼즐 미스터리물입니다. 아래의 수수께끼 두 개를 풀어나가는 이야기니까요.

  1. 완벽한 밀실에 가까운 쇼코의 원룸에 어떻게 침입하여 살해하고 빠져나갔는지?
  2. 설월화 게임 중 어떻게 나미카를 특정하여 독을 먹일 수 있었는지?

그러나 초기작이라 그런걸까요?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일단 트릭이 영 아닙니다. 특히 형상기억합금으로 문 자물쇠를 가공했다는 첫 번째 트릭은 정말 별로에요. 겨울날 닫힌 창문 밖에서 라이터 불로 지지는 정도로 변형이 가능할 정도로 형상기억합금의 변형력이 좋을리 없으니까요. 또 담배를 피워본 사람은 다들 알겠지만 라이터로 뭔가를 가열하는 행위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발표 당시에는 첨단이었을 소재를 활용한 과학 트릭이기는 했지만, "탐정 갈릴레오"만큼의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해서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트릭, 즉 설월화 게임에서 타깃을 나미카로 정하게 만든 트릭은 좀 낫습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복잡하지만, 여러 그림들을 사용하여 설명해주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쉬웠고요. 다도에서 따왔다는 설월화 게임의 룰 자체가 친숙하지 않은 만큼, 이런 배려는 아주 고맙더군요. 트릭도 뻔할 수는 있지만 확실한 방법일 뿐더러, 이를 밝혀냄으로써 "공범"이자 "진범"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괜찮았습니다.

허나 트릭이 작품 내용과 따로 논다는건 문제입니다. 나미카가 쇼코의 자살 사건과 별개로 벌인 조사가 그녀의 검도 결승전 의혹과 관련되어 있어서 설월화 게임 사건이 일어났다는 동기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나미카가 검도에 얼마나 진지했는지를 작중에서 효과적으로 보여주지 못한 탓에, 그녀가 설월화 게임으로 자신의 우승을 방해한 친구를 응징하려 했다는건 납득가는 설정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아무리 검도가 중요하다 해도, 자기가 이상한 약을 먹어서 시합에서 졌다고 해도 친구한테 비소를 먹일 생각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쇼코의 죽음에 대한 징벌보다 자신의 검도 시합을 망친 친구를 응징하기 위해 범인(으로 의심되는)에게 협력을 요청하여 게임을 벌인다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와코와 하나에에게 테니스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조차 설명되지 않아서 이런 복수가 무슨 의미인지 알기도 힘들었고요.

또 도도가 나미카를 살해해서 얻는 게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쇼코의 죽음은 어쨌든 그녀의 자살 시도로 말미암은 것이고, 도도가 그것을 방조했다 치더라도 그건 큰 범죄는 아닙니다. 그런데 나미카를 죽인 것은 자살로 덮기에는 무리수도 많고, 범인이 너무 적은 인물들로 한정되기에 조금이라도 머리가 돌아간다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미카 방에서 비소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경찰 수사가 진작 시작되었을 테고, 나미카가 마실 차에 뭔가를 넣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도도와 사토코뿐이었으니 진작에 꼬리를 잡혀을테니까요. 이런 리스크를 짊어지느니 차라리 형상기억합금을 이용해 다시 침입하여 원룸에서 자살로 위장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리고 도도는 나미카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요? 트릭을 만든 뒤 억지로 가져다 붙인 동기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쇼코의 죽음은 친구들이 입을 모아 그녀가 자살할 리 없다고 말하는데, 마지막에 도도의 편지로 사실은 자살이었다고 밝히는건 반칙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명성에 걸맞은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트릭도 만족스럽지 않았고 이야기와 전혀 어우러지지 못한 작품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은 설월화 게임 트릭과 그것 때문에 범인이 밝혀지는 부분 정도 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도 초기에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2014/06/21

연합함대 - 남창훈, 박재석 : 별점 3점

연합함대 - 6점
남창훈.박재석 지음/가람기획

제목 그대로 일본 연합함대의 시작과 끝을 다룬 전쟁사 서적입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통해 구축된 일본의 연합함대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몰락해가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장점이라면, 그동안의 관련 전쟁사 서적이 서양인이 쓴 탓에 외부인의 시각에서 일본 해군을 바라본 내용이 많았던 반면, 이 책은 일본 연합함대 그 자체를 굉장히 상세하게 들여다보았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일본군의 당시 상황을 더 쉽게 알 수 있었으며, 각종 해전 설명 부분에서는 일본군과 미군의 피해 상황까지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흡사 소설처럼 흥미롭게 이야기를 구성하여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해 준 점도 좋았고요.

또한 각종 무기(항공기)의 제원, 유명 지휘관들의 소개, 몰랐던 전황이나 일화들이 포함된 것도 돋보입니다. 예를 들어, 산소어뢰가 실제로 당시 대단한 신무기였다는 점, 불침함 "유키카제" 이야기, 일본 본토 항공전에서 자살특공이 아닌 엘리트들로 구성된 항공부대가 존재했다는 것 등은 처음 알게 된 내용이었습니다. 본토 엘리트 항공단은 작품에서 비유된 것처럼 아돌프 갈란드와 그의 마지막 전투 비행단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ME262 같은 신무기도 없고, 패전에 임박한 암울한 상황에서 낙후된 장비로 싸운다는 점에서는 지온 잔당(데라즈 말고 사막 애들)과 유사한 조직이었겠지만요.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전쟁사 서적으로서는 치명적인 단점인데, 지도 등 핵심 도판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저것 뒤섞인 편집도 조금 정리가 안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네이버 캐스트에 연재 중인 "전쟁과 평화" 기획물의 태평양 전쟁 관련 기사들로도 대략적인 이해가 가능한 내용들이라서 지금은 자료적 가치가 다소 떨어지기도 합니다.

아울러 특공 비판글과 같은 논조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급강하폭격기에서 거의 음속에 가깝게 떨어지는 폭탄 대비, 폭탄 무게로 느려진 기체가 충돌할 때의 충격이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제시했는데, 무게는 속도와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은 갈릴레오 이후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더 무거운 것이 더 큰 충격을 준다는 건 당연한 사실 아닐까요? 다소 의아한 주장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전쟁사 서적 중 하나로,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은 충족되기에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재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긴 하지만, 네이버 등에서 도판을 추가해 다시 기사화한다면 많은 독자들이 유익하게 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4/01/14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 - 모리 아키마로 / 이기웅 : 별점 2점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 - 4점
모리 아키마로 지음, 이기웅 옮김/포레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려는 건 미적 추리이고, 그에 따라 나타난 진상이 미적이지 않으면 내 관심은 그 시점에서 소멸될 거야."

'미학'이 주요 테마인 일상계 추리 연작 단편집. 제1회 애거서 크리스티 상을 수상하였다고 하네요. 전혀 몰랐던 작품인데, 국내 최고의 추리애호가 사이트인 "하우미스터리"에서 진행 중인 "2013년 올해의 추리소설" 이벤트에서 몇몇 분들이 언급하였길래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미학 전공자인 탐정이 등장하여 "미학 강의"를 이야기의 뼈대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를 다른 무언가와 절묘하게 겹쳐서 진행하는 작품은 일상계 연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미학"이라는 소재는 정말이지 처음 봤습니다.

단지 독특한 수준에 그치지지도 않습니다. 미학 이론을 일상계 추리물 속에 결합하여 잘 녹여내고 있거든요. 화자인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에드거 앨런 포라는 설정이라서 포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미학적 분석과 이론이 등장하는데, 실제 사건이 이러한 이론들과 엮여 나가는 과정이 제법 괜찮습니다. 실제 통하는 이론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 검정고양이의 미학 이론과 논리도 읽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그럴싸하고요. 덕분에 미학 이론에 대한 현학적인 재미만큼은 충분히 전해 줍니다.

아울러 특이한 탐정, 천재 탐정은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지만 "미학"을 전문으로 하는 교수 탐정 역시 이 작품이 처음이었어요. 미학 전공이라는 점 외의 탐정에 대한 설정과 묘사는 천재 학자이자 잘난 척 덩어리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시니컬한 대사로 똘똘 뭉쳐 있는 점에서는 임상 범죄 학자 히무라 히데오나 갈릴레오 유가와가 바로 연상되는 탓에 그렇게 차별화되지는 않지만요. 오히려 설정과 묘사보다는 "검정고양이"라는 별명 외에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화자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게 더 특이했습니다. 추후 서술트릭에 써먹으려는 의도였을까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첫 두 편 이외의 나머지 네 편은 추리적으로나 이야기 전개나 모두 미흡하여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미학 이론과 추리가 제대로 조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이후의 시리즈가 기대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어요. 독특한 설정을 지속적으로 끌어나가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인 느낌입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평균해서 2점입니다. 앞의 두 편은 미학 이론과 추리의 결합이 잘 이루어진 좋은 작품들로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하지만, 뒤의 네 편이 점수를 모두 깎아먹었습니다. 그래도 앞의 두 편만큼은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독특한 일상계 추리물을 찾으신다면 정답일 수도 있으니까요. e-book으로도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만큼은 각 단편별로 별도 구매할 수 있도록 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수록작 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달과 나의 거리"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나"가 어머니의 정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이한 지도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내용입니다. 

"다케토리 이야기"의 원제는 "다케토리옹 이야기" 였는데, 달과 인간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제목이 바뀌었다던가, 나폴레옹 3세가 고용한 오스만 남작이 파리에 가스등을 전면으로 도입하며 '예술의 학살자'임을 자처한 이유는 달을 대체하여 달의 주민을 파리에 살게 하기 위함이었다던가하는 등의 눈이 휭휭 돌아갈 정도로 현학적인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거의 강의에 가깝게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미학 강의가 무척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거기에 더해 지도의 수수께끼도 대단한건 아니지만 지도에 관계된 두 학자의 전공분야가 앞서 자세하게 설명한 이론과 딱 들어맞고, 진상 역시도 합리적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암호로서의 가치가 없는 기이한 지도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징표가 된다는건 별로 와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짜임새와 완성도는 좋았고 무엇보다도 미학이론과 일상계 추리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잘 구현된 작품입니다. 새로운 시리즈의 도입부로는 차고 넘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벽과 모방"

3년전 "나"와 검은고양이가 처음 만나게 되었던 세미나 팀에서 여름 휴가를 계획했다. 장소는 팀원 중 한명인 세키마타의 가루이자와 별장이었다. 그러나 세키마타는 팀원들이 방문한 날 기이한 행동을 보인 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세키마타의 자살 원인을 분석하는 추리와 작품을 관통하는 바그너와 니체의 "벽" 이론이 절묘하게 결합된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일반적이지만 서양에서는 말하는 벽은 공포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 기본 개념의 붕괴- 는 것, "검은 고양이"에서의 벽을 해석하는 이론, "모방"과 "카피"의 차이 - 모방은 정신과 행위에 관한 개념이지만 카피는 완성된 결과만을 지향하는 것 - 를 설명해 주면서 이 개념이 이 사건에 깊게 얽혀있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 등 현학적인 이론 소개는 아주 좋았습니다.

다만 세키마타의 모방 행위는 비정상적이라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미학과 추리를 절묘하게 엮어나간 전개는 기존에 알고있던 추리 소설의 상식을 깨는, 멋진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강의가 지나치게 장황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쉬우며 적절한 길이로 마무리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물의 레토릭"

연인이 동반자살로 의심되는데 여자가 사용한 향수의 향기가 이후에도 떠돈다는 괴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내용의 작품. 

그런데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와 사건을 엮는건 무리수였습니다. 물 - 여성의 시체라는 모티브 외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학강의와 일상계 추리를 엮는다는 설정에 지나치게 얽매인 느낌입니다. 사건도 오해와 잘못된 증언이 결합된 것일 뿐이라서 사건으로 보기도 어렵고요. 우연과 작위에 의한 전개가 많다는 것도 감점요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점수를 줄 만한 부분이 없습니다.

"숨기면 꽃"

검은 고양이가 이전에 알고 있던 여류학자 이구스가 실종되어 그녀의 행방을 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도둑맞은 편지"와 말라르메의 "주사위 던지기"를 주로 강의하는데, 내용에 비하면 너무 거창하네요. 알맹이는 별거 없는데 포장만 요란한 종합선물세트같은 작품이었달까요. 진상도 딱히 설득력이 없어서 전혀 와닿지 않았고요. 머리를 깎았다고 해서 딸을 못 알아볼 부모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눈이 안 좋다고 해도 저같으면 목소리로 알아볼 수 있을거라 자신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두개골 속에서"

5년전 혜성처럼 데뷰했으나 데뷰작 이후 사라져 버린 천재시인 시조 도미아키의 데뷰 5주년 기념 파티에서 그의 신작이 낭독되었다. 그 후 시조와 동일인물이라고 의심받던 영화감독 에즈미가 자살하는데...

"황금충"에서 리그랜드와 황금충이 서로에게 침입했다고 설명하는 미학 강의만큼은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의 이야기들과 같습니다. 이 미학 강의가 시조 도미아키와 에즈미 감독의 죽음을 설명하는데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억지스럽기만 했다는 점입니다. 사디즘 - 마조히즘의 관계처럼 에즈미는 관능 속에서 생을 긍정하는 반면, 시조는 그로테스크한 모티브 속에서 유머러스하게 죽음을 긍정한다는 정 반대의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부연 설명만으로도 이야기 전개는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검은 고양이의 누나 레이카가 제대로 설명만 해 주면 애시당초 사건이 될 수도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역시나 설정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무리수를 두었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보다는 미학강의가 더 좋아서 완벽하게 주객전도된 느낌입니다.

"달과 왕"

한 노교수의 죽음, 그리고 그와 젊은 여류학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단편.

포의 "까마귀"가 그리스 음악적인 시라는 것, 여기서 까마귀의 "Nevermore"는 악기를 의미할 수 있다는 등의 현란한 미학 강의만큼은 여전히 볼거리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그리스 연극 "쫓는 왕"과 작중 사건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전개도 꽤 괜찮았고요.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전혀 건질게 없습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바로 앞의 사람이 소리를 내는데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전혀 납득이 되지 않거든요. "골전도"를 응용한 발성법이라는 설정은 불필요한 사족이었습니다. 어치피 말도 안되는 내용에, 선하나 더 긋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선글라스를 끼면 신호등이 푸른달로 보인다는 마지막 이야기도 지나치게 만화적이라 별로였어요.

그래도 직전의 막장 작품들보다는 낫네요. 내용면에서 설득력도 있고, 결말 부분에서 나와 검정고양이 관계의 진전을 암시하는 달달한 전개도 선보인 덕분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2013/11/08

자물쇠가 잠긴 방 - 기시 유스케 / 김은모 : 별점 2점

자물쇠가 잠긴 방 - 4점
기시 유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북홀릭(bookholic)

"유리망치""도깨비불의 집"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접했던 기시 유스케의 에노모토 - 준코 컴비 단편집. 이전 단편집 "도깨비불의 집"은 다소 실망스러웠지요. 그래도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다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자물쇠 전문가 에노모토 시리즈답게, 밀실 트릭을 다룬 본격 퍼즐 미스터리 4편이 실려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서 있는 남자
  2. 자물쇠가 잠긴 방
  3. 비뚤어진 상자
  4. 밀실 극장

읽고 나서 바로 생각난 것은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갈릴레오 유가와 시리즈입니다. 두 시리즈 모두 과학을 근거로 한 불가능 범죄를 다룬 정통 퍼즐 미스터리로 영상화 되었을 뿐 아니라 탐정역인 유가와 - 에노모토 모두 시니컬하면서도 자신만의 전문 영역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거든요. 대표 장편으로 수작인 "용의자 X의 헌신"과 "유리망치"가 존재하는 점도 동일하고요.

그러나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 쪽이 좀 더 대중적이긴 합니다. 에노모토 시리즈는 트릭에 너무 집중한 탓에 읽는 재미는 떨어지거든요. 범인들의 동기도 너무 확실한 탓에, 밀실 트릭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경찰이 수사로 체포하지 못한다는건 직무유기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고요. 완벽한 알리바이 트릭을 단지 수상하다는 느낌만으로 파헤치던 선배 형사들의 근성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요.

또, 대중적인 인기를 위함이었는지 개그 욕심이 과한데 작품과 잘 맞지 않더군요. 준코야 그렇다 쳐도 에노모토까지 희화화시킨 것은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전체 평균으로 2점. 쉽게 쉽게 읽히고 보기 드문 밀실 집중 본격물이라는 것은 반갑지만 트릭 외의 부분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두 편은 트릭마저 별로라... 팬이시라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딱히 추천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서 있는 남자"

장례업체 사장의 의문의 자살 사건을 다룬 작품. 

밀실 트릭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었던 일종의 "막"과 시체 강직을 이용한 트릭의 아이디어는 돋보입니다.

허나 너무 복잡하고 장치 의존도가 높아서, 과연 생각대로 잘 됐을까는 의문입니다. 글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트릭이라서 만화나 영상물이 더 잘 어울렸을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아울러 마지막 장면처럼 범인을 옭아매는 것은 쉬워 보이지 않았다는 단점도 큽니다. 막에 남은 DNA는 그렇게 유력한 증거로 보이지 않으며, 끝까지 사장이 직접 쓴 유서가 맞다, 자살이 맞다라고 주장하면 결국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유죄 처리하기는 어려웠을 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자물쇠가 잠긴 방"

'섬턴 돌리기'라는 전문적인 털이범의 수법이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이러한 등장인물의 직업을 이용하여 보다 완벽한 알리바이 트릭을 꾸민 범인의 천재적 작전이 빛을 발하는 작품.

갈릴레오 시리즈라고 해도 믿을 만큼 과학적인 트릭이 등장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범인이 과학교사인 덕분인데, 정전기와 기압차를 이용한 밀실 트릭은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실제 구현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간단한 조작으로 가능하다는 장점도 크고요.

그러나 너무나 동기가 확실한데 경찰이 그냥 자살 처리했다는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또 앞선 트릭들에 비해 자물쇠를 잠그기 위한 종이 테이프 트릭은 잘 와닿지 않았어요. 이 부분은 핵심 증거를 위해 추가적인 장치로 들어갔을 수는 있는데, 과연 증거 능력이 있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나중에 만든 거다!"라고 범인이 우기면 해명할 방도가 있던 것인지...

때문에 약간 감점하여 별점은 3점. 그래도 표제작답게 이 단편집의 베스트 작품이기는 합니다.

"비뚤어진 상자"

건축업자 탓으로 신혼집이 망가지자, 예비신랑이 살의를 품는다는 내용입니다. 동기인 부실 건축물을 트릭에 활용하는 아이디어는 괜찮고, 조금은 이색적인 도서 추리물의 형태를 띄고 범인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전개와 묘사도 그럴싸합니다.

그러나 트릭이 너무 작위적입니다. 핵심 설정인 망가진 집이라는 무대가 지나치게 극단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거든요. 게다가 공으로 두들겨도 흔적이 남는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요? 범인이 고교야구 감독이고, 집안에서 테니스공이 발견되었고, 외부와 연결된 적당한 크기의 구멍이 있다라는게 다 드러나버리면 트릭도 풀어내기가 별로 어렵지 않고요.

트릭 중심의 작품에서 트릭이 별로이니 점수를 주기도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밀실 극장"

전편에 등장했던 살인 사건의 배경이 되었던 연극단이 등장합니다. 황당한 연극과 함께 살인사건이 벌어진다는 내용이지요.

분위기는 흥미롭고 웃기기까지 하지만 트릭은 별볼일 없고 사건도 우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 정교함이 떨어지는 등 본격물로 보기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캐릭터들의 개그가 만개하는, 그냥 쉬어가는 느낌의 블랙 코미디였달까요? 단 문제는 별로 웃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기시 유스케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의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10/09/16

성녀의 구제 - 히가시노 게이고 / 김난주 : 별점 2.5점

성녀의 구제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재인
- 이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 

마시바 요시타카가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사인은 아비산 중독.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그의 아내 아야네는 사망 시각 전후에 홋카이도에 있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가 있었다. 여자의 직감으로 아야네의 범행을 확신한 우쓰미는 유가와에게 해결을 요청한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최신작입니다. 작년 말에 출간되었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네요. 이 작품은 장편이긴 하지만, "용의자 X의 헌신"보다는 "탐정 갈릴레오""예지몽" 같은 단편집의 성격이 강합니다. 별다른 복잡한 전개나 구성 없이 '트릭' 하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죠. 특히나 초반부터 용의자는 아야네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후더닛 물이 아니라, '어떻게 범행했나?'에 초점을 맞춘 와이더닛 물로, 이야기는 트릭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갈릴레오"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순수하게 '트릭'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 구조가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편 수준의 이야기를 억지로 장편화하면서, 단편으로서 지닐 수 있었던 장점은 퇴색하고 단점이 더욱 두드러진 것 같아 아쉽네요.

이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은 유가와도 지적한 '비현실적인 트릭'입니다. 단편이라면 충분히 성립하고 독자도 수긍할 만한 괜찮은 트릭이지만, 장편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1년 동안 같은 집에 사는 남편이 정수기 물을 마시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집이 굉장히 넓다는 묘사가 나오고, 아내도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니 남편이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습니다. 또한, 치밀한 트릭이 필요했을 당위성도 충분히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단편을 장편으로 억지로 늘린 듯한 전개도 단점입니다. 단편에서는 유가와가 곧바로 배제해버리는 가설들의 수사와 재현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낭비되고 있고, 구사나기와 우쓰미의 수사도 계속된 탐문과 진술의 반복일 뿐, 이야기의 흐름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또한, 사건의 핵심 중 하나인 마시바의 전 애인에 대한 이야기가 중반 이후에야 등장하는 것도 이야기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한 장치처럼 보였습니다.

아야네를 범인으로 특정하여 전개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도서 추리물의 형식을 취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물론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장점인 고전 미스터리 황금기의 미덕, 즉 천재라 불리는 물리학자 유가와와의 두뇌게임을 독자와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한 점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또한, 샴페인 잔과 주전자의 지문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 보여주는 추리적인 요소도 탁월했습니다. 전작에서 볼 수 없었던 구사나기의 말랑말랑한 심리 묘사도 독특했고요.

그러나 아무래도 단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장편이었던 "용의자 X의 헌신"도 트릭이나 동기 측면에서 비현실적인 요소가 있긴 했지만, 유가와의 라이벌이 등장해 펼쳐지는 불꽃 튀는 두뇌게임, 그리고 시리즈 팬들이 즐길 수 있는 유가와의 학창 시절 묘사 등이 어우러져 장편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장편으로 보기에는 다소 알맹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10/06/29

예지몽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억관 : 별점 3점

예지몽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재인

"용의자 X의 헌신""탐정 갈릴레오"의 물리학자 갈릴레오 유가와 - 형사 구사나기 컴비가 활약하는 단편집입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일반적인 본격 추리물에 가까운 정통파 작품이었죠. 그러나 단편집인 "탐정 갈릴레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괴현상"을 이야기의 핵심 소재로 등장시켜 그 수수께끼를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에피소드가 중심인, 그러니까 괴현상에 이어지는 과학적인 해설이 핵심인 작품집이라 본격 추리적인 맛은 좀 덜했습니다. 과학적 해설도 일상적인 것이 아닌 너무 전문적인 영역을 다루기 때문에 잘 와 닿지도 않았고요.

이 책은 단편집이라 그런지 "탐정 갈릴레오"의 성격에 좀 더 가깝긴 합니다. 그러나 전편의 단점을 확실히 보완했더군요. 과학적인 설명이 지나치지 않고 상식선에서 설명되고 있으며 특별히 심오한 이론이나 소재가 등장하지 않아 내용이 현실적이었거든요. 괴현상도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상황들로 채워져 있고요. 또한 개인적으로 이 작가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말랑말랑한 연애감정 묘사가 전무하다는 것도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전편보다는 훨씬 재미있었습니다. 작품마다 편차가 조금 있기는 한데 개인적인 베스트로는 <영을 보다>를 꼽고 싶네요. 별점은 평균 2.7점인데 반올림하여 3점입니다.

꿈에서 본 소녀
괴기현상 : 일종의 예언
사건 : 모리사카 레이미라는 이름에 얽매여 17년동안 그 이름의 소녀와 결혼할 것을 믿고 살던 청년 사카기가 실존하는 모리사카 레이미라는 여고생 집에 침입하려던 사건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는 것을 믿던 청년에 대한 이야기로 유가와의 물리학적 지식은 사건해결과는 무관한 작품입니다. 좀 아쉬운 것이 "모라시카 레이미"라는 이름이 굉장히 드문 이름이라는 배경 설명이 보강되었어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안다고 해도 그 이름이 흔하다면 트릭이고 뭐고 필요없는 거니까 말이죠.

그러나 이러한 전제조건을 어느정도 알고 있다면 사카기가 그녀에 대한 꿈을 어떻게 꿀 수 있었는지에 대한 추리는 상당히 현실적이면서도 사건과 잘 결합되어 있어서 평균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단서의 제공도 공정한 편이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영을 보다
괴기현상 : 유체이탈
사건 : 기요미라는 호스테스가 살해되던 순간에 다른 곳에 나타난 "영"으로 나타난 사건

역시나 물리학은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영이라는 존재를 현실의 살인사건으로 끌어와 해결하는 유가와의 추리가 아주 일품인 작품입니다. 특히나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실패한 트릭"이 꼬여서 빚어낸 상황이라는 것이었어요. 그 외의 CD플레이어의 잡음과 같은 사소한 단서를 취합하는 능력 역시 고전적이라 좋았습니다. 그야말로 고전 황금기 시절의 단편의 맛이 느껴질 정도로 마음에 쏙 들더군요. 별점은 4점입니다.

떠드는 영혼
괴기현상 : 폴터가이스트 현상
사건 : 실종자를 찾기 위해 용의자의 집에 침입한 구사나기가 폴터가이스트 현상과 맞부닥치게 된다.

사건이 너무 간단해서 추리의 여지가 없는 작품입니다 .때문에 폴터가이스트 현상에 대한 진상규명이 더욱 볼거리였어야 하는데 과학적이기는 하나 재미는 없는 편이었어요. 공진현상이 그렇게 대단하게 일어난다는 것도 크게 와 닿지 않았고 말이죠. 또한 상식적이라면 시체를 파묻은 뒤 괴현상이 일어난 것을 알았을테고, 이 괴현상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시체를 다른 곳에 버리고 원상복구 시키지 않았을까요?
이 단편집의 워스트 단편으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단 이야기 앞부분에서 시체를 숨겨야 한다는 유카와의 의견은 마음에 들더군요. 그러니 갱들이 희생자들 다리에 콘크리트 신발을 신겨 물속에 버리는 것이겠죠.

그녀의 알리바이
괴기현상 : 도깨비불
사건 : 빚에 쪼들리던 영세공장 사장이 교살된 사체로 발견됨

이 작품은 TV 드라마 "갈릴레오"에서 이미 봤던 작품이더군요. 주요 트릭과 내용은 동일했습니다. 도구를 지나칠 정도로 사용하며 결국 공범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러나 드라마 버젼과 결말이 다르다는 점이 특이했어요. 드라마쪽이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있게 각색되어 있는데, 힌트를 드리자면 현실에서는 해피엔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지몽
괴기현상 : 예지몽
사건 : 한 여성의 자살이 목격되는데 그녀의 죽음 이틀전 똑같은 꿈을 꿨다는 소녀가 등장한다!

예지몽이 예지몽이 아닌 현실이었을 것이다는 가정하에 입각하여 추리가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제 트릭이 전문가만 알 수 있는 특정 소재를 이용한 복잡한 장치트릭이라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전기장치 등에 대한 설명도 너무 대충 넘어가고 있고요. 때문에 추리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든 작품입니다.

하지만 워낙에 상황이 재미있고 독특할 뿐 아니라 마지막의 예지몽 소녀 도모카의 다른 예지몽이라는 서늘한 결말은 인상적이었기에 별점은 2.5점 주겠습니다.

2010/01/18

수상한 사람들 - 히가시노 게이고 / 윤성원 : 별점 3점

수상한 사람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집으로 어딘가에서 누군가 강추하기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전에도 몇번 밝혔듯이 별로 좋아하는 작가는 아닙니다. 그래도 "탐정 갈릴레오"와 같은 단편집과 기타 앤솔러지에서 접한 단편들이 괜찮았었기에 실패해도 데미지가 적을 것 같아 구입한 것이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역시나 일정 수준 이상은 된다 보여집니다.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이 책에 실린 총 7편의 단편들 대부분이 전부 "추리"라는 쟝르에 충실하기 때문이죠. 그것도 퍼즐 트릭 중심의 본격물이 많아 추리 애호가로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아무래도 단편이기 때문인지 작가의 그간 싫어했던 가장 큰 단점인 "러브라인"이 부각되는 작품이 몇개 없다는 것도 좋았고요. 독특했던 점이라면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결혼 보고" 이외의 모든 이야기가 1인칭이라는 것으로,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주인공과 세계관으로 연결된 작품이라 생각하고 읽어도 꽤 재미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설정인 두번째 작품 "판정 콜을 다시 한번!"만 빼고요^^) 이게 설마 작가의 의도는 아니겠지만요.^^

하지만 추리물과는 거리가 먼 드라마인 "판정 콜을 다시 한번!"과 말랑말랑한 인간관계가 주요 사건보다도 강하게 부각되는 "달콤해야 하는데" 두편이 좀 이질적이라 아쉽네요. 나머지 다섯편으로는 별점 3.5점은 충분합니다만 요 두편때문에 전체 별점은 3점입니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에 대한 기존의 제 편견을 어느정도 깨 준 작품집임에는 분명합니다. 한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네요.

자고 있던 여자
나는 입사동기 가타오카의 권유로 집 빌려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낯선 여자가 내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와 잔 남자를 찾아내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 우기며 집에 눌러 앉는데...
잭 레몬 주연의 코미디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경쾌한 도시파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전혀 이유를 알 수 없는 황당한 사건에서 결말에 이르는 구조가 깔끔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참 좋은데 이렇게 영화 같은 곳에서 설정을 따 와서 추리소설을 창작해도 재미있겠더군요.
어차피 톨루엔의 행방 추적을 한다면 간단하게 꼬리가 밟혔을 것이라는 점은 약점이지만 일상계니 너무 딱딱하게 따질 필요는 없겠죠. 별점은 3.5점입니다.

판정 콜을 다시 한번!
나는 노보루의 꼬임으로 노부인의 돈을 강탈하는 계획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뒤 쫓기는 신세가 된다.
결단코 추리물은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는 평이한 드라마로 일종의 성장기랄까.. 싶은 작품인데 야구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더군요. 상식적으로는 해당 판정에 대한 설명은 판정콜 이후 바로 선수에게 해 주는게 정상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설득력도 거의 없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죽으면 일도 못해
하야시다 계장이 휴게실에서 문을 걸어잠근채 시체로 발견된다. 나는 직속 부하라 어쩔 수 없이 사건에 관련되게 되는데...
두가지 트릭이 상호 연계되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밀실 트릭"은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등장해 왔던 트릭이긴 합지만 작품과 잘 어울리게 구성되어 마무리되는 전개가 매끈합니다. 경찰 수사로 결국 진상이 밝혀진다는 현실성 높은 결말도 의외로 놀라웠고요.^^
단, 어차피 범행이 밝혀질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인 관계로 완벽한 트릭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약점은 있습니다. 그래도 현실에 기반한 재미있게 읽었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달콤해야 하는데
나는 상처하고 하나뿐인 딸마저 잃은 뒤에 나오미와 결혼하여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이 여행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일상계랄까... 과거 "사고"의 진상을 기억에 의지해 밝혀낸다는 작품입니다.
본격물로 보기에는 정보제공이 공정하지 못해 실망스럽고 이후의 전개도 억지스러워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어차피 제가 싫어하는 러브라인이 주인 작품이기도 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등대에서
나는 소꼽친구 유스케와의 관계에서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홀로 여행을 계획한다. 이 사실을 알은 유스케 역시 동일한 코스를 역순으로 밟아나가는 여행을 떠난다고 선언한다.
의외의 전개가 연속되는 단편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친구간의 다툼 정도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말 생각외였어요.
기발한 발상이 돋보이는 좋은 작품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싶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의표를 찌르는 이런 단편을 써보고 싶네요.

결혼 보고
오래전 소식끊긴 친구 노리코에게서 온 결혼을 알리는 편지. 편지를 받은 도모미는 편지안에 동봉된 사진 속 주인공이 노리코가 아닌 것을 알고 놀라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리코의 고향으로 떠난다.
황당한 시츄에이션이죠? 일반인들은 정말 상상하기 힘든 당황스러운 설정을 토대로 흥미진진하게 전개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우리나라 버젼이라면 "친구가 결혼한다고 해서 갔더니 신부가 내가 알던 그 아가씨가 아니더라" 정도 되겠네요. 물론 이것도 살인을 부르는 설정이긴 하겠죠.^^
하지만 설정에 비해 동기나 시체의 처리 등 범죄에 관련된 내용이 현실적이지 못한 등 아이디어가 매끄럽게 전개된 맛은 약하기에 별점은 3.5점만 주겠습니다.

코스타리카의 비는 차갑다
나는 5년에 걸친 해외근무의 마지막 해를 맞아 아내 유키코와 함께 코스타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2인조 강도에게 습격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국의 풍광 묘사, 주인공들의 배경 묘사가 더 중심인 듯한 이상한 작품. 왜 무대가 코스타리카일까요? 트릭도 구태여 외국이 아니라도 상관없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작가가 코스타리카에 관광갔다가 와서 쓴 글이 아닌가... 하는 의심만 생기네요.
내용에 비하면 쓰잘데 없이 길고 완성도도 그닥이라 별점은 2점입니다.

2009/05/18

용의자 X의 헌신 (2008) - 니시타니 히로시 : 별점 3점

원작소설은 거의 2년전에 읽었던 작품이죠. 그때도 영상물에 더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역시나 영화가 나왔습니다. 일본에서는 대히트 했다죠? 어쨌건 관심이 가던 영화라 감상하게 되었습니다만, 리뷰가 좀 늦었네요...^^;;

사실 이러한 추리물 원작 영화를 원작을 읽은 상태에서 본다면 지루해 질 수 있다는 것은 큰 약점입니다. 범인과 탐정의 불꽃튀는 두뇌대결을 위한 트릭이 중요한 이 작품같은 경우 더욱 그러하겠죠. 그러나 다행히도 영화로 구현했기 때문에 발휘되는 장점도 무척 컸기 때문에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장점은 이시가미가 야스코에게 헌신하는 과정의 설득력이 굉장히 잘 살아났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야스코가 미인이다.. 라는 단순한 이유를 배우들이 눈빛, 그리고 행동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섬세한 감정 묘사를 통해 비쥬얼로 표현해 주기 때문에 절절한 마음이 쉽게 와 닿더군요. 배우들이 캐릭터와 잘 어울렸던 것 역시 감상에 큰 도움을 주었고요. 그 외에도 원작에는 없었던, 추가된 서두의 조금은 독특한 여객선 폭파 사고에 대한 간단한 트릭의 설명도 좋았고 에필로그 형태의 마무리도 깔끔해서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높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상화 과정에서 원작이 지녔던 가장 큰 단점, 즉 "왜 이시가미가 억지로 시체 교환 트릭을 사용했나?" 라는게 너무 두드러진건 아쉽습니다. 그래도 원작에서는 다른 이야기와 디테일에 묻혀 그런대로 설득력있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던 것에 반해, 영화에서는 이 과정을 잘 포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원래의 시체를 잘 숨겨놓았다는 설정이 곁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래서야 트릭을 위해 존재하는 설정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어요. 물론 이렇게 트릭에 매몰되어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은 물론 추리물의 한계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범인이 "천재"로 나오기때문에 더욱 더 신경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의 유가와의 말 한마디 - "최후의 순간까지 대비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 로 퉁치기에는 설득력이 너무 떨어집니다.

아울러 원래 소설에서의 왓슨 역이자 사건을 물어오는 역할인 주인공 유가와의 친구 구사나기의 역할이 축소되고, 여성 형사인 우츠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더군요. 여성 캐릭터가 별로 필요없는 작품인데 괜히 우츠미를 등장시켜 캐릭터성을 부여하는 등의 전개는 사족이라고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합격점을 줄 만 하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잘 만든 추리영화임에는 확실합니다. 제가 감상했던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영화 중에서는 베스트였으니까요. (게@임은 수준 이하였고 "호숫가 살인사건"은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호러-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이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영화 이전에 방영되었다는 TV 시리즈 "탐정 갈릴레오"도 구해보고 싶어지네요.

2008/07/07

탐정 갈릴레오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억관 : 별점 2.5점

탐정 갈릴레오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재인

"용의자 X의 헌신"의 천재 물리학자 유가와가 등장하는 연작 단편집입니다. 전에도 설명했지만 저는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작품은 그래도 단편 연작이고 평도 괜찮아 구입하게 되었네요.

일단 천재 물리학자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걸맞게 과학 수사물로 보일 만큼 과학적, 물리학적 이론에 대한 설명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지식이 실제 사건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냐 하면 꼭 그런것은 아니라는 것이 약점입니다. 때문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좀 부족한 약간은 애매한 성격의 작품집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작품이 대부분이었고 말이죠. 솔직히 소설이라는 쟝르보다는 영상물이나 만화에 더 어울리는 소재라 생각됩니다(Q.E.D 스러운 트릭도 몇개 눈에 띄였고요).  시니컬한 천재 유가와를 다시 보는 재미는 크지만, 이 캐릭터 역시 지나칠 정도로 스테레오 타입이라 지루한 점이 없잖아 있네요. 왓슨 격의 캐릭터 구사나기 역시 뻔하고요.

그래도 이만큼의 다양한 과학적 지식을 조사하여 묘사한 작가의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고,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 해서 후속작도 기대가 되네요. 이정도로 쉽게, 빠르게, 재미있게 읽힌다면 추리물로서의 쾌감이 상대적으로 적긴 하지만 쟝르문학 나름의 가치는 충분하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참고로, 개인적인 베스트는 교과서적인 미스테리 과학 수사물 "이탈하다" 였습니다.

1장 타오르다

거리에서 발생한 석유통의 자연발화사건으로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다쳤다. 경시청 수사 1과의 구사나기는 미궁의 자연 발화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테이토 대학 동기인 물리학자 유가와를 방문하여 사건 해결을 부탁하는데... 

방 바꾸기 트릭이라던가 나름의 서술 트릭은 좋았지만 기본적인 범행 자체의 현실성이 너무 많이 떨어져 보입니다. 주요 소재인 "레이저"라는 장치가 나름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되기는 했지만 그 위험성을 놓고 볼 때 다른 시한장치 쪽이 더욱 안전하고 현실적이지 않았나 싶네요.

2장 옮겨 붙다

중학생들이 쓰레기로 가득찬 저수지에서 발견한 알루미늄 판을 이용하여 만든 데스마스크를 학교 축제에 제출했는데, 그 데스마스크가 실제 실종된 치과의사의 얼굴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저수지에서 치과의사의 시체를 찾아냈지만,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해서 유일한 단서인 알루미늄판으로 만들어진 데스마스크의 생성 과정을 밝혀내기 위해 구사나기는 다시 유가와를 만나는데... 

데스마스크가 주요 소재이긴 하지만 실제 사건을 밝혀내기 위한 가장 큰 단서는 아닙니다. 트릭이 기발한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추리적 재미는 떨어지지만 제목에서도 묘사된 데스마스크의 생성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좀 더 해당 현상이 추리와 유기적으로 결합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3장 썩다 

자린고비 슈퍼마켓 주인이 욕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가슴 근처 조직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괴사한 것 때문에 진상 규명을 위해 구사나기는 다시 유가와를 찾아간다. 

"초음파"를 주요 소재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음파를 범행에 이용했다는 트릭인데, 어차피 증거(조직의 괴사)가 너무 뚜렷이 남는 탓에 당쵀 왜 이러한 도구로 살인을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용의자도 특정이 가능한데 용의자의 알리바이도 애매한 이상, 흉기가 규명되지 않더라도 수사에도 무리가 없어 보이고요. 과학적으로는 재미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추리물로는 빵점 짜리입니다.

4장 폭발하다

쇼난 해안 해수욕장에서 벌어진 폭발 사고로 한 여성이 죽었다. 그 뒤 한 남자가 자기 방에서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었고, 구사나가는 테이토 대학 졸업생이었던 피해자가 테이토 대학 주차장의 사진을 소지하고 있었다는걸 단서로 유가와를 찾아가 탐문하는데... 

두 개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주요 소재인 "나트륨"과 관련된 사건은 폭발 사고고요. 또 다른 살인 사건은 첫 번째 사건과 연관된 부수적인(?) 사건입니다. 

그래도 두 번째 사건을 통해 첫 번째 사건과의 연관성을 밝히고 동기와 범인을 알아내는 전개가 매끄러운 덕분에 단편으로서의 완성도는 높습니다. 과학적 이론이 실제 범행에 실질적으로 응용되는 점도 높이 살 만 하고요. 

그러나 위험 물질에 대한 보관 관리의 문제, 실제 범행 도입 시 행여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너무 축소하여 대충 넘어간 것은 좀 거슬립니다. 그래도 꽤 완성도 높은 단편입니다.

5장 이탈하다

한 살인사건에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보험 영업 사원의 유일한 알리바이는 범행 시간 대에 회사일을 땡땡이치고 인적드문 강변에서 차를 주차시켜 놓은 뒤 낮잠을 잤다는 것이었다. 

목격자는 전무했지만 해당 시간대에 그 강변과 차가 도저히 보일 수 없는 위치의 아파트에서 고열로 아파하던 한 소년이 "유체이탈"로 용의자의 차를 목격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림의 단서 채택 유무를 판단하기 위해 구사나기는 유가와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전 작품을 통틀어 과학적 이론이 범행과 아무 관련없는 유일한 작품으로 억지스러운 트릭보다는 관련된 이상 현상 (여기서는 "유체이탈") 을 과학적으로 밝혀나가는 "미스터리 수사단" 같은 전개를 보여주는데, 꽤 현실성 있고 공정한 단서의 제공으로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빛의 굴절"이라는 꽤 잘 알려진 현상을 통하여 이론적으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타당하고 설득력있어 보였고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