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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해벅 (HAVOC) (2025) - 개러스 에반스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참 형사 워커는 삼합회 보스의 아들 추이가 살해당한 사건을 수사하다가, 시장의 아들 찰리가 연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워커는 시장에게 찰리를 무사히 데려올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 찰리를 노리던 삼합회는 시장을 납치했고, 찰리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려는 부패 경찰들마저 나서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고 마는데... 

"레이드" 시리즈로 잘 알려진 개러스 에반스 감독의 범죄 액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가장 큰 강점은 역시나 액션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이 액션씬으로 볼거리는 많은 편이에요. 시작과 동시에 터지는 자동차 추격전은 박진감 넘치고, 찰리의 애인 미아를 만나기로 했다가 말려든 클럽에서의 혼전은 삼합회와 부패 경찰들, 주인공 일행이 좌충우돌하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오두막에서의 총격과 난투는 감독 특유의 속도감과 무게감을 살려내고 있고요. 적어도 액션만큼은 시원시원하게 즐길 만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워커가 동료 부패 경찰들과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시장에게 왜 약점을 잡혔는지, 찰리와 미아가 어떻게 사건에 휘말렸는지, 삼합회가 시장을 납치한 이유는 무엇인지, 부패 경찰들은 왜 찰리와 미아를 노리는지 등 대부분의 설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야기의 맥락을 제대로 쌓지 않은 채 장면들을 끊어 붙이며 액션으로 넘어가지요. 티격태격하는 고참 마초와 신참 여성 형사 콤비에서 시작되는 기본 설정들마저 진부하기 짝이 없고요.

파워 밸런스와 액션 씬의 설득력도 엉망입니다. 초반에는 삼합회가 경찰을 손쉽게 학살하고 시장까지 납치하는 초월적 조직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주인공 일행과 맞서면 허무하게 쓸려나갑니다. 워커는 산전수전 겪은 형사라 쳐도, 찰리는 부상자에 미아는 여성 아마추어 범죄자일 뿐인데 말이지요. 정점은 오두막 액션입니다. 삼합회 악당들이 은폐와 엄폐도 없이 총격전 한복판으로 돌진하다 죽는 모습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중국인은 멍청하다는걸 드러내려는 인종차별 의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결말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삼합회 보스가 '너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겠어!' 어쩌구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부패 경찰들을 체포한 워커의 파트너 청이 갑자기 나타난 뒤 총을 빼앗겨 산통이 다 깨집니다. 마지막은 워커, 청과 찰리와 미아 커플을 제외한 모두가 죽고 워커가 파트너에게 자기를 체포하라며 끝나고요. 대체 워커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엉망진창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액션 장면은 시원하지만, 이야기 전개와 캐릭터 구성, 악당들의 존재감은 지나칠 정도로 허술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덧붙이자면 삼합회의 출연이라던가 범죄에 엮인 연인들의 서사, 암흑가의 암투 등이 여러모로 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만큼의 이야기 완성도만 갖추어 주었더라면 좀 더 볼만했을 듯 합니다. 예를 들자면 시장의 아들이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삐뚤어진 찰리가 삼합회 일을 돕는 범죄자 미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보스 아들 죽음에 연루되어 함께 도주하게 되고, 정의로운 경찰 워커가 삼합회 수사에 나섰다가 우연찮게 그들의 도주에 합류하여 셋이서 삼합회에 맞선다! 부패 경찰 이야기는 빼고요. 

2025/08/30

아르테미스 - 앤디 위어 / 남명성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즈 바샤라는 월면 도시 아르테미스 빈민가에서 밀수까지 행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중, 거래상대 트론으로부터 거액을 줄테니 암석 수확기를 고장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트론이 알루미늄 공장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거액에 넘어간 재즈는 여러가지 장비를 준비해 수확기 파괴에 나섰지만 들통나서 계획은 실패했다. 죽을 뻔한 위기도 넘기고 겨우 아르테미스로 돌아온 재즈는 트론이 살해당했고, 자신도 표적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조사에 나선 재즈는 ZAFO라는 이름의 혁신적 광섬유 생산을 노린 음모가 배후에 있다는걸 밝혀내는데...

"마션"으로 유명한 앤디 위어가 2017년에 발표한 장편 SF 소설입니다. 가장 큰 장점은 과학적인 이론에 기반을 둔 치밀한 설정입니다. 월면 도시 설정이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아르테미스는 기압이 지구의 20%라 순수산소를 사용하고, 물은 61도에서 끓어서 커피가 맛이 없다, 경찰과 병원이 없고 보안부가 범죄자를 직접 처벌하며 심각한 범죄에는 추방을 적용한다, 법과 도덕 기준은 느슨하고, 낮은 중력 덕분에 관광객들이 색다른 경험을 위해 매춘을 찾는 경우도 있다. 산소는 알루미늄 제련 과정에서 남아돌아서 알루미늄 제련 공장은 이를 공급하는 대가로 전기료를 면제받는 계약을 맺고 있다, 화재는 가장 위험한 사고로 꼽히며, 모든 시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설계되어 있다...' 처럼 바탕이 되는 세세한 세계관 묘사는 실로 대단한 수준입니다.

이 설정들은 사건 전개에도 적극 활용됩니다. '고가의 소재 ZAFO는 중력이 낮은 곳에서만 만들 수 있다, 아르테미스의 통화인 슬러그는 규제를 받지 않고 추적도 불가능하다'는게 핵심이거든요. 즉, 마피아는 슬러그를 이용해 돈 세탁을 하려고 별로 이익도 나지 않는 알루미늄 공장을 월면에서 운영하고 있었는데, 트론은 ZAFO 생산을 위해 원료가 되는 유리, 규석을 만들 수 있는 이 공장이 필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수확기 파괴를 지시한 것이지요. 수확기가 파괴되어 공장 가동이 멈추면, 공장과 아르테미스 간 산소와 전기를 교환하는 계약이 끝날테고, 그 때 자신이 몰래 확보한 산소를 공급해서 그 자리를 차지할 속셈이었습니다.
이렇게 트론이 마피아 소유인걸 알면서도 알루미늄 회사를 노린 이유를 재즈가 추적하여 진상을 밝히는 과정은 작가의 전작과 다르게 잘 짜여진 범죄 스릴러 느낌도 전해주는데, 설득력 높은 이유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용광로 폭발로 대량의 산소와 메탄이 반응해 클로로폼이 생성 및 아르테미스로 유입되어 주민들이 기절하는 위기도 과학적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르테미스에는 차량이 없어 큰 사고는 없었고, 낮은 중력 덕분에 갑자기 쓰러져도 부상자가 적었다는 결과도 월면 도시 설정을 잘 활용한 것이고요. 

작가 특유의 모험물적인 분위기도 잘 살아 있습니다. 재즈가 수확기 파괴에 나섰다가 들통나서 실패한 뒤 길드로부터 도주해 다시 아르테미스에 잠입하는 과정, 범죄 조직의 추격을 피해 도주하면서도 진상을 알아내는 과정, 결국 도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공기를 순환시키려는 과정이 속도감 있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이 과정이 여러가지 과학적인 설정과 함께라는 점도 큰 장점이에요.  

하지만 이야기는 허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우선, 공장 용광로를 파괴한 후 트론의 딸 레네가 공장을 차지하게 만든다는 마지막 계획은 무리가 있어요. ZAFO가 그렇게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신소재라면, 전기를 공짜로 공급받지 않아도 공장을 유지하는게 당연히 유리하니까요. 마피아 조직이 선선히 공장을 넘겨주고 손을 뗄 이유가 없습니다. 거대한 폭발 후 공장이 멀쩡할 가능성도 낮고요.
용광로 옆의 대량의 산소와 메탄이 있다는걸 미리 알고도 무시하는 전개, 재즈가 아버지 작업장을 날려버린 일을 속죄하기 위해 돈을 벌었다는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결말은 정말 영 아니었어요. 재즈가 평범한 밀수꾼이아니라 실은 아르테미스의 밀수품을 전부 관리하는 우두머리였다는 건데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한 도시 밀수 조직의 우두머리가 돈 몇 푼 벌려고 아둥바둥한다는 앞 부분 설정은 대관절 뭔지 모르겠어요. 경쟁자를 어떻게 제거했는지도 설명이 없고요. 밀수품을 잘 관리하겠다는걸 약속하여 행정관과 거래해 추방을 면한다는 것 역시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묘사와 모험적인 전개 덕분에 읽는 재미는 충분하지만, 완성도는 전작에 비해 떨어집니다. 심심할 때 가볍게 읽기에는 무난하지만, 작가의 다른 작품만큼은 아닙니다.

2025/08/29

네버 라이 - 프리다 맥파든 / 이민희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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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샤와 남편 이선은 둘러보기 위해 방문했던 교외의 외딴 저택에 고립되었다. 눈보라 탓이었다. 저택은 원래 2년 전 실종된 유명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언 헤일의 소유였다. 머무는 동안 트리샤는 누군가 숨어 있다고 의심했지만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고, 대신 에이드리언이 환자 상담을 몰래 녹음해 보관한 비밀방을 발견했다. 테이프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던 트리샤는 또 다른 숨겨진 지하실을 찾아냈는데, 그 안에 부패한 사체가 놓여 있었다... 

2년 전, 유명 정신과의사 에이드리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차량 타이어를 훼손했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찍은 환자 EJ의 협박이 시작됐고, 그녀는 연인인 컴퓨터 전문가 루크의 도움으로 영상을 삭제하려 했지만 EJ는 이 장면마저 촬영해 협박 수위를 높였다. 결국 에이드리언은 EJ 살해를 결심하는데...

프리다 맥파든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장편 소설입니다. 최근 너무 일본 작품만 읽은 듯 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편식은 좋지 않으니까요.

이 작품은 2년 전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언 헤일의 시점과 2년 후 현재 트리샤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다가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전개 방식 자체는 특별히 독창적이지 않지만, 이 과정을 통해 트리샤가 에이드리언의 환자 PL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PL이라는 이름은 패트리샤에서 비롯된 것이고, 트리샤는 (패)트리샤였던 겁니다.

PL은 원래 약혼자와 친구들과 캠핑을 갔다가 의문의 연쇄살인마에게 습격당해 혼자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혼자와 친구의 불륜을 알게 된 뒤 두 사람을 살해하고, 이후 살인마에게 습격당한 것처럼 꾸며온 것이 진상이었습니다. 에이드리언은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를 위해 찾아온 PL과의 상담 과정에서 이 사실을 간파했고, 자신을 협박하던 EJ를 제거하기 위해 트리샤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진 트리샤는 오히려 에이드리언을 살해하고 시체를 감췄지요. 

한편, 에이드리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된 시체는 에이드리언이 아니라 EJ였는데, 이는 에이드리언이 EJ를 감금해서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루크가 지하실에서 발견한 사체를 보고도 에이드리언이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시체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이런 디테일은 확실히 여성 작가스러워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진상, 반전에 이르는 과정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트리샤는 에이드리언을 살해한 범인인데, 마지막 반전이 드러날 때 까지 트리샤 시점 전개에서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심약한 임산부로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3인칭도 아니고 1인칭 시점이며, 다중인격도 아닌데요. 이건 반칙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설정과 묘사도 많습니다. 트리샤가 굳이 비밀리에 테이프를 듣는게 대표적입니다. 트리샤는 EJ를 죽인건 에이드리언이고 루크가 범인이 아니라는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둘의 상담 테이프를 들을 이유는 없어요.
트리샤가 이선이 어머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고, 그런 그에게 자기 범행을 고백한 뒤 부부가 함께 입을 막기 위해 루크를 살해하고 사체를 파묻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선의 범행은 지금 와서는 제대로 증명할 수도 없고, 그나마 증거라는 테이프도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트리샤의 범행은 잔혹함과 규모에서 이선의 범행과는 수준이 달라요. 아무리 부창부수라지만 이선이 선뜻 트리샤의 손을 잡는다는건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합니다. 트리샤가 에이드리언을 왜 살해했을까요? 트리샤는 EJ를 납치하는 자기가 CCTV같은데 찍혔을지도 모른다며 에이드리언을 살해했는데,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에이드리언을 죽인다고 CCTV 데이터가 사라지는게 아니니까요. 스스로 EJ의 사체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억지입니다. 사체가 발견되면 가장 문제가 될 건 에이드리언이니, 그녀가 알아서 잘 숨겼다고 믿는게 당연합니다. 되려 시체만 하나 더 늘렸고, 유명인사 에이드리언의 실종을 초래하여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수사 당시 경찰이 저택 비밀 공간들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건 순전히 운이었고요. 
저택에 누군가 침입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선이 지나치게 태평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 루크가 저택에 침입한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말도 별로입니다. 환자를 돈으로만 대했고, 특별히 좋은 치료를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환자를 살해하기 까지 한 에이드리언 헤일은 죽어도 쌉니다. 트리샤, 이선 급으로 나쁜 악당이니까요. 그러나 엄청나게 순수했고, 진심으로 에이드리언을 사랑했을 뿐인 루크를 마지막에 부부에게 개죽음당하게 만든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부부의 행복한 생활과 트리샤가 이선마저 죽일 수 있다는 에필로그보다는 루크의 죽음이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거라는 식으로 그리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처럼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반전은 흥미롭지만 반전을 반들기 위한 의도적인 가짜 서술 트릭물이라서 감점합니다. 억지와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그다지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8/24

스펜서 컨피덴셜 (2020) - 피터 버그 : 별점 1점

경찰 스펜서는 부패한 상관 보일런을 폭행했다가 5년 동안 수감되고 말았다. 스펜서의 출소 직후 보일런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선량한 경찰 테렌스가 누명을 썼다는걸 알게 된 스펜서는 룸메이트 호크와 함께 잔상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부패한 경찰들이 범죄 조직과 함께 대량의 마약을 유통한 자금으로 카지노 '원더랜드'를 개장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걸 알아내는데...

로버트 B. 파커가 창조한 보스턴 사립탐정 ‘스펜서’ 시리즈 중 하나인 에이스 앳킨스(로버트 B.파커 사후 원작을 이어서 쓰고 있는 작가)의 "원더랜드"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장편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액션물로 범죄 스릴러, 액션, 버디 코미디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어느 쪽에서도 두드러지 못합니다.

특히 기대했던 범죄 스릴러, 수사물로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일단,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수사는 전개상 거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결정적인 단서들은 스펜서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우연히 제공해 주니까요. 예를 들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는 도청 파일을 피해자 테렌스의 아내가 스펜서에게 직접 전해주는 식으로요.
스펜서의 옛 파트너 드리스콜이 악당이라는 사실도 너무 쉽게 밝혀집니다. 초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이쑤시개 조각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수준이라 긴장감 있는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부패한 옛 파트너, 마약 조직, 조직 내부의 은폐 구조 등 설정들도 지나치게 전형적이고요.

전개 또한 뻔하고 치밀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간 보스급인 벤트우드에게 쳐들어가서 물고문을 통해 마약 운송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럴 거라면 은밀한 수사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지요. 게다가 정보를 털어놓았다면 악당들도 운송 시간을 바꾸는건 당연한데, 예정대로 운송하다가 마약 트럭을 스펜서에게 탈취당하는건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스펜서 캐릭터도 원작 붕괴 수준입니다. 원작에서는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시니컬한 말투, 심리 묘사 측면에서 복잡한 면을 보여주는데, 영화에서는 그냥 말빨(?)좋은 전형적인 마초 헐리우드 경찰, 형사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액션에서라도 화끈했어야 했는데, 작중 대부분 장면에서는 적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장면만 반복될 뿐입니다. 이럴거라면 권투에 일가견이 있다는 설정은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어요. 마크 월버그도 그리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니고요.

액션은 다른 부분에서도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격투 장면들 모두 속도감이나 위력이 느껴지지 않는 탓에 맨손 액션의 쾌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호크가 덩치를 활용해 마지막에 잠깐 활약하긴 하지만, 이 역시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워 액션적 재미는 떨어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절정부입니다. 부패 경찰과 범죄 조직이 결탁한 악의 무리와 대단한 결전을 벌여야 할텐데, 스펜서가 트럭을 몰고 악당 본거지에 돌진한 뒤 호크가 몇 명을 때려눕히는 걸로 결전은 대체로 마무리됩니다. 스펜서와 드리스콜의 1:1 맞짱은 너무 작위적이라 어이가 없더군요. 부패 경찰들 때문에 보도도 못하고 사건이 은폐되었었는데, 스펜서와 호크의 활약 이후 사건이 대대적으로 폭로된다는 결말도 이해가 안되고요.

그래도 너무 바보같아서 아무 생각없이 볼 수 있다는건 오히려 장점이기는 하네요. 몇몇 유머 코드는 피식 웃게 해 주기는 하고요. 거인 호크, 조력자 헨리 캐릭터는 캐스팅이 좋습니다. 완전한 권선징악 마무리도 후련했고요.

다만 이 정도 장점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보완해주기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범죄물로서도, 수사극으로서도, 액션 영화로서도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원작인 탐정 스펜서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있는 쓰레기로 에필로그에서 후속작, 시리즈의 여운을 남기는데 어림도 없지요. 소리없이 망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2025/08/23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이진아 : 별점 1.5점

미치오, 교코 부부는 아들 가나타를 무차별 살인범에게 잃고 삶이 무너졌다. 껍데기처럼 살아가던 교코는 ‘영원의 소리’라는 종교단체에 가입한 뒤 활기를 되찾고, 딸 가온도 엄마를 따라 단체를 드나들게 되었다. 이를 사이비로 확신한 미치오는 막으려 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미치오 역시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단체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이후 4년여 동안 종교 활동에 매달린 가온은 사회와 멀어졌고, 단체를 믿지 않는 이리에 슌타로와 교제를 시작한 뒤 믿음도 흔들렸다. 그런 가온이 교단 내부 인물 모가미의 범죄를 신고하여 교코는 배신감에 절규했다. 그러나 교코도 모가미가 집에 난입해 난동을 피우자 가온을 구해냈고, 이를 통해 다시 가족은 하나가 될 기회를 잡는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이후 사이비 종교에 깊이 빠져드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장편 소설입니다. 

가나타가 초등학생 연쇄 살인범에게 습격당하는 도입부, 미치오 시점으로 아내 교코의 극심한 변화가 그려지는 서두, 그리고 교코 시점에서 세뇌된 상태를 그린 중반부까지는 꽤 인상적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이비 종교의 무서움을 한껏 느낄 수 있거든요.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 찾아온 공허와 슬픔이 얼마나 쉽게 종교적 위안으로 변질되는지와, 이를 통해 그들의 얄팍하고 보잘것없는 주장과 세뇌가 얼마나 피해자들에게 파고드는지, 가족을 어떻게 망쳐버리는지를 잘 그려낸 덕분입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삶이 무너진 뒤 사이비 종교로 위안을 찾는 엄마, 그 엄마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종교 단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딸, 그리고 가족을 지키려다 결국 종교 활동에 동참하게 되는 아빠라는 조합도 절묘해요. 이 조합과 설정은 사이비 종교의 전파력과 생명력을 보여주는데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실망이 더 큽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기대했던 추리, 스릴러적인 요소가 거의 없는 탓입니다. 가나타 사건에 의외의 진상이 있지도 않고, ‘영원의 소리’가 행하는 세뇌, 사기와 같은 범죄 방식도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특히 사이비 종교는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변화시키는 배경 장치일 뿐입니다. 모가미의 범죄도 단편적인 사건으로 그치고요. 종교 단체가 악의 실체라는걸 드러내지도 못하고, 극적 반전도 없으니 독자가 단서를 따라가는 추리적 재미도 찾을 수 없는건 당연합니다.

미치오 시점, 교코 시점에서 가온 시점으로 이어지는 전개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서로의 시점이 교차되며 시너지를 내는게 아니라, 아예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분명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미치오가 시점 변화를 통해 가족에게 냉담하고, 대화도 거의 없는 이기적인 꼰대남으로 돌변하는 것도 어이가 없었습니다. 범죄 피해자 가족을 돕는 이노우에 변호사와 자원봉사자 마코토와의 에피소드도 불필요했고요. 이럴 바에야 미치오, 교코 시점을 대폭 줄이고 그냥 가온 시점의 성장기로만 다루는게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상실과 불안이 어떻게 왜곡된 믿음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심리 드라마, 가족 심리극이자 가온의 성장기로는 볼 만한 구석이 있지만 범죄·스릴러 장르로서의 매력은 전무하여 대폭 감점합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솔직히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에요.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2025/08/22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 세스지 / 전선영 : 별점 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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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핫한 모큐멘터리 형식의 호러 장편입니다. 과거 기사와 취재 기록, 독자 투고, 인터뷰, 인터넷 게시글 등 서로 결이 다른 텍스트를 이어 붙여 실존하는 괴이 현상을 추적한다는 실감을 한껏 느끼게 해 줍니다. 한마디로 다큐멘터리와 괴담집이 섞인 느낌이에요.

여러 형식으로 펼쳐지는 작품 속 괴담들은 짧지만 강렬한게 많습니다. 저주받은 아파트에 살던 어머니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다린건 ‘누군가가 투신하는 순간’이었다는 고백, 그리고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가 점프를 반복하는 이유가 밝혀지는 대목이 특히 섬뜩합니다. 빨간 여자는 자살한 아키라의 어머니였는데, 생전에 나무에 목을 맨 아들을 내려달라며 펄쩍 뛰던 모습이 그대로 남았다는 설명이지요.
묘사도 발군입니다. 특히 ‘저주 스티커’는 굉장합니다. 기괴한 디자인과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저기에 붙이고 다니는 이상 행동이 그야말로 섬찟함을 자아내는 덕분입니다.

여러가지 형식으로 괴담과 괴이현상이 소개되기 때문에 신선한 발상도 많습니다. 동영상 때문에 귀신에 씌운 대학원생의 에피소드에서의 공포물 반응을 실험하려고 여러 공포 체험 영상을 짜깁기했다는 설정처럼요. 공포물에 익숙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구분되는 실험 결과도 재미있었어요. 인터넷 실황으로 심령 스팟 돌입을 생중계하는 등 새로운 형식도 선보이고요. 이런 독특한 형식은 이야기에 현실감을 불어넣어 더 소름돋게 만들어 줍니다. 확실히 영화화 되는게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부분이 제법 많아요. 

이렇게 호러물로서 충분한 완성도를 지닌 개별 괴담들이 기사, 인터뷰, 인터넷 글, 독자 투고 등 서로 다른 형식으로 선보이다가, 이야기 전체가 하나로 묶여 완결에 이르는 과정도 꽤 깔끔합니다. 괴담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끝내버리는(원래 있었던 괴이 취급을 하며) 미쓰다 신조 스타일과는 다르게, 어쨌건 괴담, 괴이 현상의 정체는 결말에서 밝혀주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제가 파악한 정체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긴키 지방 산속에서 여성을 꾀는 존재 : 과거 노총각 마사루의 원념입니다. 노모를 모시느라 결혼도 못 한 채 인형과 감을 애지중지하던 그는 한 여성을 돌로 때려죽인 뒤 스스로 그 돌에 머리를 박고 죽었습니다. 그 뒤 여자들에 돌에 머리를 박고 죽는 사건이 반복되자 돌은 신사에 모셔졌습니다. 사람들은 인형과 감을 공양했지요. 그런데 세월이 흘러 잊혀져버리자, 다시 나쁜 짓 - 여자를 꾀어 데려오는 - 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 빨간 코트의 여자 : 아키라의 어머니입니다. 아키라는 마사루의 원념이 원하던 ‘여자’의 대역으로 희생되었었지요.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뒤 마사루의 돌을 훔쳐 아들을 닮은 무언가를 되살렸습니다. 아울러 아이 유령 목이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건, 목을 메다가 부러졌기 때문이겠지요...
  3. 저주 스티커 : 아키라의 어머니가 아들의 ‘먹이’를 찾기 위해 퍼뜨린 장치였습니다. 스티커를 통해 저주에 걸린 사람의 혼은 아키라의 먹이가 되고, 남은 껍데기는 자살처럼 위장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 때문에 긴키 지방의 아파트와 댐에서는 자살 사건이 잇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단점도 있습니다. 몇몇 괴담은 반복 패턴이라 신선도가 떨어지고, 서로 다른 형식이 뒤섞인 서술은 때로는 산만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괴담과 괴이 현상의 핵심 정체는 밝혀주지만, 상세한 모든걸 밝혀주지는 않습니다. 편집자는 어디로 실종되었는지, 저주에 씌워진 희생자들이 외우는 기묘한 주문은 무엇인지, 스티커의 의미와 스티커를 눈에 띄는 전면에 붙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궁금한게 많은데 모두 그냥 '저주'로 퉁치고 마는 탓입니다.

무엇보다도 너무 급작스러웠던 마지막 진상 고백은 다소 아쉽습니다. 앞서의 이야기에서 쌓아올렸던 장치들과 무관한, 빨간 코트의 여자 독백 한, 두페이지로 끝나버리는 탓입니다. 이는 이야기의 완성도를 다소 떨어트립니다. 비유하자면 "링"의 사다코가 TV에서 기어나와 자신의 원한을 한, 두 페이지 독백으로 마무리하는 결말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매체 텍스트들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내는 방식이 능숙하고, 섬찟함을 유지하는 기술도 좋습니다. 호러 소설, 그중에서도 괴담을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즐기실 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다만 서사적 완결성보다는 순간순간 장면의 섬뜩함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2025/08/17

신비한 건물 탐방기 - 노노하라 / 김재훈 : 별점 2점

일러스트레이터 노노하라가 그려낸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세계를 담은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입니다. 이야기가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여행기록으로, 돼지 수인인 주인공 포터가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만난 건물들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포터는 도시를 출발점으로 삼아 나무 마을과 협곡, 고산 지대를 차례로 방문하고, 각 지역의 고유한 환경과 그에 어울리는 건축물을 탐방합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그림입니다. 노노하라의 섬세한 일러스트로 그려진 건물들은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현실감 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각 건물 내외부는 물론, 주변 환경과 수인들의 생활 모습까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어 그림만으로도 충분한 즐거움을 줍니다. 이렇게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수인들이 등장하는 세계관이라는 점은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떠오르게 만드는데, 일러스트의 퀄리티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게 거의 없고, 지역은 바뀌지만 등장하는 설정이 반복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뒤로 갈수록 지루해진다는건 아쉽습니다. 건물과 환경이 바뀐다고는 하나, 전체적인 분위기와 기본 구성은 하나의 세계관 아래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설정과 구성, 내용 모두 "이야기의 집"과 거의  동일한데, "이야기의 집"만큼 다양한 건물과 설정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디테일도 "이야기의 집"에는 미치지 못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건축 일러스트나 세계관 설정에 관심이 많은 분들께는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단점도 커서 추천드리지는 않습니다.

2025/08/16

스턴트맨 (2024) - 데이빗 리치 : 별점 3점

슈퍼스타 톰 라이더 대역 전문 스턴트맨 콜트 시버스는 촬영 중 크게 다친 뒤 자신감을 잃고 은둔했다. 하지만 영화 제작자 게일의 전화를 받고 옛 연인 조디가 첫 감독을 맡은 작품 "메가스톰" 촬영장으로 향했다. 조디가 그를 찾는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건 게일의 거짓말이었다. 게일은 콜트에게 실종된 톰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콜트는 톰을 찾다가 톰의 새로운 대역 스턴트맨의 시체를 발견했고, 모든건 톰이 살인을 저지른걸 그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음모였다는걸 알아채는데... 

"데드풀 2", "불릿 트레인"의 데이빗 리치 감독 작품으로 액션과 로맨틱 코미디를 결합한 영화입니다. 생각없이 볼 수 있는 단순한 영화지만 장점이 많습니다. 우선, 전개가 매끄럽고 안정적이라 편하게 볼 수 있어요. 웃길 때 확실히 웃기고, 화끈하게 달려줄 때에는 화끈합니다. 영화 속 영화 "스페이스 카우보이"의 인물 관계를 본편과 교차시키는 솜씨도 좋습니다. 마지막에 '혹시 콜트가 주인공을?'이라는 기대를 깨부수는 제이슨 모모아의 깜짝 출연장면은 정말 빵 터졌어요.

음악도 아주 훌륭합니다. 거의 주제곡이라고 해도 무방할 KISS의 "I Was Made for Lovin' You"는 물론, 테일러 스위프트의 "All Too Well"과 필 콜린스의 "Against All Odds (Take a Look at Me Now)"의 가사와 멜로디 모두 장면 분위기와 잘 어울립니다.

액션 볼거리도 충분합니다. 자동차 추격, 보트 추격, 폭발 장면이 시원합니다. 스턴트맨이 제목이자 주인공답게 크레딧에서 실제 스턴트 촬영을 보여주는 구성도 좋았습니다. 전성기 성룡 영화가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격투 액션씬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굼뜨고 느린 탓입니다. 특히 쓰레기차 안에서의 격투는 지루했습니다. 오래 전, "FX"라는 영화에서는 특수효과맨이 자신의 기술을 활용해서 악당들을 공격했었는데, 스턴트맨다운 전문 기술을 활용하는 장면이 많았더라면 좋았을겁니다. 톰의 집에서 습격한 악당들과 싸우다가 미리 옮겨둔 쇼파 위로 떨어지는 장면처럼요,

그리고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결말은 확실히 좀 허무했어요. 딥 페이크라고는 하지만 실제 살해 장면 영상까지 공개된 상황에서 톰 라이더의 녹음이 그렇게 큰 증거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거든요.

그래도 킬링타임용으로는 두말할 나위 없는 영화입니다.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5/08/15

리버스 - 미나토 가나에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대학을 졸업했지만 작은 사무용품 회사에 근무하는 후카세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하나 있었다. 10년 전, 대학 친구들 - 아사미, 다니하라, 무라이, 히로사와 - 과 떠났던 여행에서 술을 마신 친구 히로사와가 운전대를 잡게 하여 죽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취미인 커피와 연인 미호코 덕분에 안정을 찾은 후카세에게 ‘후카세는 살인자다’라는 의문의 편지가 배달되었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똑같은 메시지가 공개적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들었다.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낀 후카세는 휴가를 얻어 범인을 찾는 대신, 죽은 히로사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고백"으로 잘 알려진 미나토 가나에의 중편 소설입니다. 이전, 한 유튜버의 '결말이 충격적인 미스터리 5편'에 선정되었길래 관심을 갖고 있다가, 여름 휴가를 맞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후카세가 히로사와의 옛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히로사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탐색해 나가는 과정이 중심입니다. 때문에 정통 추리물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열등감으로 가득찬 후카세가 탐색을 통해 성장한다는 점에서 성장기로 볼 수도 있고요.
이 과정에서 모두가 의지했던 말이 없고 묵묵한 히로사와가 — "뽀로로"의 포비가 떠오르는 — 오히려 후카세나 후루카와처럼 존재감 없는 친구들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게 밝혀지는건 신선했습니다. 꽤 묵직한 여운을 남기기도 하고요.

이러한 드라마 외에도 10년 전 사건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낸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수께끼도 흥미롭고, 히로사와의 과거를 되짚는 여정도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전개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인자라는 메시지를 보낸게 미호코라는 진상은 좀 아쉽습니다. 운과 우연에 의지한 측면이 많기 때문입니다. 후카세가 여자친구 사진을 친구들에게 공개했더라면 금방 들통났을테지요. 졸업 앨범을 통해 아사미의 동료 기다가 히로사와의 동창이라는걸 알아냈더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히로사와의 연인이었던 미호코가 히로사와 사망 이후 후카세와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이외에도, 미호코가 유독 후카세에게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고발장을 보낸 이유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후카세가 진상 - 그들이 히로사와가 운전대를 잡게끔 만들었다 - 을 술술 털어놓은 것도 역시 잘 납득이 되지 않네요.

무엇보다도 미호코가 메시지를 보낸 동기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게 문제입니다. 메시지를 보낸게 자기라는게 드러나면 형사 처벌 대상이 될겁니다. 심지어 다니하라는 기차에서 밀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10년 전 죽은, 잠깐 사귀었던 연인을 위해 증명도 하지 못할 범죄를 고발하려 한다? 전혀 와 닿지 않아요.

히로사와가 메밀 알레르기가 있었기 때문에 술이 아니라 후카세 만들어 준 메밀꽃 벌꿀 커피가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었다는 반전도 과합니다. 솔직히 나올 필요가 없었어요. 불운한 사고를 딛고 후카세가 한 뼘 성장해 가는 흐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마무리가 가능했으니까요.
아울러 벌꿀을 넣은 커피, 지역 특산물 벌꿀 등의 언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히로사와의 알레르기 설정이 반전 직전에야 언급된다는 점에서 치밀함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급작스럽기만 했어요.
한마디로, '결말이 충격적인'게 아니라 '충격적인 결말'을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강박에 가까운 반전일 뿐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인간 드라마에 가까운 작품으로, 미스터리적 재미보다는 인간 관계와 내면 심리에 집중한 구성이 돋보입니다. 흥미롭고 빠르게 읽히는 장점도 크고요. 다소 과했던 반전만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겁니다.

덧붙이자면, 벌꿀을 넣은 커피는 한 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으로 등장하는데,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후속 권이 나온다면 소개해드리고 싶네요.

2025/08/10

추리 소설 1,300번째 리뷰 등록을 지나쳤네요...

추리소설 리뷰는 2003년 2월 23일 "빙설의 살인"부터 올리기 시작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21년 뒤인 2025년 6월 8일에 1,300번째 리뷰글을 올리게 되었네요. 1,300번째 리뷰작은 긴다이치 시리즈인 "미로장의 참극"입니다. 

리뷰가 많아지고, 재독한 책과 분권된 책들을 따로 올린 리뷰도 있어서 오류가 계속 생겼는데, ChatGPT의 도움을 얻어 다시 정리해보니 이전 1,200번째 리뷰 글은 "하쿠바 산장 살인사건"이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2023년 12월 3일에 올렸던 리뷰이니 100편의 리뷰를 추가하는데 총 553일이 걸린 겁니다. 한달에 5.5권 정도의 페이스라는건 이전과 같고요. 목표인 2,000개의 추리 소설 리뷰까지 700개가 남았으니, 2035년 9월 말 정도에는 달성 가능해 보입니다. 그날까지 계속 블로그를 할지, 하더라도 추리 소설 리뷰를 계속 올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계속해 봐야겠지요. 

그림은 11년 전 이글루스 유저셨던 EST님이 보내주셨던 '블로그 6주년 축전'을 이용한 것인데, EST님께는 특히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ChatGPT의 도움을 얻어 다시 카운트한 결과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전에도 분석했던 적이 있는데, 300번째부터 오류가 났었군요.

100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200 여류 조각가

300 아카쿠치바 전설

400 고백

500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

600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700 클래식 미스터리 걸작선

800 해가 저문 이후

900 아무도 문밖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1000 목사관의 살인

1100 샴 쌍둥이 미스터리

1200 하쿠바 산장 살인사건

1300 미로장의 참극

2025/08/09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구수영 : 별점 3.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격 단편의 고수라는 작가의 단편집, 제74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만장일치로 수상했으며, 제21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까지 수상하며 2관왕의 영예를 누린 책입니다. 

"매미 돌아오다"부터 "서브사하라의 파리"까지 총 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곤충을 관찰하며 다니는 에리사와 센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단편별로 특정 곤충이 주요 소재가 되는 일상계 추리 연작물입니다. 곤충과 생물학, 생태학과 같은 과학 지식이 추리와 결합된게 특징으로, 사건의 단서 배치나 해결 방식도 정교합니다.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가 제시되고요. 

"반딧불이 계획"이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과학 지식과 결합된 추리의 완성도가 뛰어나며 결말의 반전도 좋기 때문입니다 . "염낭거미"는 현실적인 일상계 미스터리로 완성도가 높고, "매미 돌아오다"는 매미라는 소재와 함께 잔잔하게 풀어나가는 전개가 인상적이고요. "저 너머의 딱정벌레"와 "서브사하라의 파리"도 나쁘지는 않은데, 앞선 세 작품보다는 전개나 결말이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2관왕을 괜히 탄건 아니네요.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한 작품을 찾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매미 돌아오다

헤치마는 16년 전 자원봉사 활동을 위해 방문했던 산골 마을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쓰루미야 교수와 에리사와 신에게 16년전 과거 자신이 목격했던 유령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16년 전 목격한 유령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풀어내는 전형적인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당시 헤치마가 보았던 유령은 사실 실종된 소녀 오에 미키의 친구였습니다. 미키는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신의 연못’에서 수영을 한 뒤 실종되었고, 이를 부추겼던 친구가 죄책감 때문에 여성 출입이 금지된 신사에 몰래 들어갔던 겁니다. 자기를 대신 벌해달라고 하기 위해서요. 헤치마가 본 건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사에서 노숙 중이던 자원봉사자 이와쿠라가 사정을 눈치채고 그녀를 숨겨주고, 도망치게 해 준 덕분에 일종의 유령처럼 기억에 남게 되었던 것이지요.
쓰루미야 교수의 글을 통해 그녀가 '유령' 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에리사와의 추리가 맞았음이 확인되며 인상 깊은 마무리로 이어집니다..

핵심 인물들이 16년이 지난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다시 모인다는 설정은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장소에 과거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능력을 지닌 에리사와가 우연히 함께 있었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죽은 이를 기리는 ‘매미 공양’이라는 마을 풍습과 매미를 먹기 위해 숲을 찾은 쓰루미야 교수의 행위, 그리고 그날이 오에 미키의 17주기라는 상황이 잘 맞물려 있어서 설득력을 높여주는 덕분입니다.

일상계답게 트릭이나 수수께끼 풀이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추리는 합리적이고 과거 사건과 현재의 연결이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매미라는 소재도 적절히 사용되고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잔잔하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미스터리를 선호하신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염낭거미

중학생 다이라 마치코는 교통사고로 중태에 빠졌다. 사고는 어머니가 집에서 쓰러져 구급차가 출동한 직후에 일어났다. 그런데 마치코가 하교 후 곧장 집에 왔다면, 쓰러진 어머니를 보고도 20분 넘게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사고가 난 방향도 이상했다. 마치코가 그쪽으로 달려갈 이유가 없었다. 마치코가 어머니를 쓰러트리고 도주하다가 사고가 났던 것일까?

주어진 상황만 놓고 본다면, 마치코가 어머니를 쓰러뜨리고 죄책감에 도망치다 사고를 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상은 그 반대입니다. 어머니가 남자를 집에 들이고 있어서, 마치코는 하교 후 집에 곧장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뒤 어머니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본 마치코는, 어머니와 함께 있던 남자가 범인인게 분명하기에 그 남자의 차를 막기 위해 도로로 뛰어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던 겁니다.

마치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건처럼 느껴지는 설득력 있는 구성이 돋보입니다. 일상 속 사건을 다룬 본격 추리물로서 손색없는 작품이었습니다. 앞서 구급차가 도로 공사 때문에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등 단서들은 모두 독자에게 공정하게 제공되기도 하고요. 

다만, 제목에 등장하는 ‘염낭거미’와 작품 중에 언급되는 ‘고추잠자리’는 이야기와 별 관계는 없습니다. 연작 설정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가져온 느낌이에요. 에리사와가 사건 해결자로 등장하는 설정도 다소 작위적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연작 중 한 편이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본격물 스타일의 구성은 좋은 만큼,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읽어볼 만합니다.


저 너머의 딱정벌레

에리사와는 지인 마루에가 운영하는 펜션에 초대받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랍인 투숙객 와그디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바로 다음 날 아침 와그디가 절벽 아래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에리사와는 와그디의 신앙과 유품을 단서로 진상을 추리해낸다.

와그디는 태양신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기도하기 위해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을 알아야 했기 때문에, 스카라베 장식 속에 숨겨진 나침반을 지니고 있었고요. 그런데 발견된 유품의 나침반은 고장 나 있었습니다. 와그디가 나침반을 몸에서 뗀 건 단 두 번, 목욕을 할 때와 낮에 급류타기를 했을 때 뿐입니다. 그런데 나침반이 고장 난 시점은 기도 전이었습니다. 즉, 범인은 급류타기 담당 직원인 가키모토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지요. 가키모토는 와그디에 대한 인종적 편견으로 장난을 쳤는데, 이를 알고 분노한 와그디가 다툼 끝에 가키모토를 죽인 줄 알고 자살을 선택한게 사건의 진상입니다.

그리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추리 전개는 잘 짜여져 있습니다. 가키모토의 편견을 아르바이트생 사에키의 입을 통해 드러내며, 독자가 사에키를 진범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흐름도 나쁘지 않고요.

그러나 여러모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무엇보다도 가키모토가 스카라베 안에 나침반이 들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가 도저히 설명되지 않아요. 경찰조차 몰랐던 정보인데 말이지요. 또 나침반을 고장 내는 방법이 간단하다고는 하지만, 일반인 입장에서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인종적 편견으로 실행하기에는 손도 많이가고 어리석은 장난이라 생각되고요. 스카라베가 쇠똥구리라면서 이야기 속에 곤충을 끌어들이는 방식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 중 가장 처집니다.

반딧불이 계획

과학잡지 아피에의 편집장 사이토는 5년 전 연락이 끊긴 기고자 가이코에 대한 편지를 받고 홋카이도로 향했다. 가이코를 따르던 학생 밧타의 도움으로, 사이토는 가이코가 그곳에서 '반딧불이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실종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반딧불이 계획'은 논에서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던 마을 풍경을 되살리는 계획이었다. 사이토는 가이코 집에서 숨겨진 네거티브 필름을 찾아 인화했고, 사진에서 최근 사망한 도토 이과대학 오사카베 교수를 확인했다.

에리사와 신 대신 사이토의 취재(?) 및 추리가 펼쳐집니다. 사이토는 남겨진 단서들을 통해 오사카베 교수가 유전자 조작으로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물고기를 만들었다는걸 알아냅니다. 이 사실이 가이코에게 발각되었고, 교수는 책임감과 압박 끝에 자살을 택했으며 가이코는 교수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상은 달랐습니다. 교수는 자살 직전 가이코를 살해했고, 그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위령비 아래에 시신을 묻었고요. 죽기 전 유언처럼 “유령비에 묻어 달라”고 했던건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이토도 이 진상을 추리해냈지만 앞서의 이야기를 꾸며낸건 가이코를 아버지처럼 따랐던 밧타를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밧타 역시 빼어난 추리력으로 진상을 깨닫고 이 사실을 사이토에게 알리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밧타가 어린 시절의 에리사와 센이였다는게 밝혀지며 또다른 놀라움을 독자에게 안겨주고요.

놀라운 진상과 반전이 이어지는 추리적인 구조도 좋지만, 과학적인 소재도 이야기에 잘 녹아들고 있다는게 아주 인상적입니다. 원래 교수가 만든 물고기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루시페린이라는 발광물질을 외부에서 받아들여야 빛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논으로 흘러든 물고기들은 빛을 냈지요. 이건 논에 루시페린을 지닌 생물이 살고 있었고, 물고기가 그것을 섭취해 빛을 내게 되었다는 뜻이며, 가이코가 추진한 ‘반딧불이 계획’이 성공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학 설정과 플롯이 정교하게 연결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연작물로서의 설정과 생물학적, 과학적 소재에 추리가 잘 결합된 수작입니다.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영상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물고기가 빛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고 싶네요.

서브사하라의 파리

대학 동창인 의사 에구치와 오랜만에 만난 에리사와는, 에구치가 체체 파리 번데기를 일본으로 반입한 이유를 추리해내는데... 

체체 파리 수면병은 아프리카에서만 발생하는 풍토병입니다. 문제는 전염병이 아니라 감염된 파리를 통해서만 퍼집니다. 그래서 체체 파리가 서식하지 않는 선진국은 치료법 개발에 관심조차 갖지 않지요. 그런데 에구치가 사랑했던 아야나가 수면병에 걸려 죽자, 에구치는 이에 분노해서 체체 파리의 번데기를 일본으로 들여왔습니다. 그런데 체체 파리의 번데기, 유충에는 수면병을 일으키는 기생충이 없습니다. 성충이 감염자의 피를 빨아야만 기생충을 얻어서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기발한 트릭은 에구치가 수면병에 걸린 상태로 귀국했다는 겁니다. 에구치는 번데기를 부화시킨 후, 자신의 피를 빨게하여 일본에 수면병을 퍼뜨리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지요. 

이렇게 생물학을 이용한 테러 계획은 설득력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에리사와에 계획을 접는 결말은 다소 허무했습니다. 제 아무리 테러를 벌였다 한들, 겨울이 있는 일본에서 수면병이 고착화되는건 불가능했다는 점 등 계획도 상세하게 뜯어보면 어설픈 점이 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강한 동기와 설정은 좋았지만, 마무리는 약했습니다.

2025/08/08

알라딘 26주년 기념 당신의 기록 영수증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26주년을 맞아 작년과 마찬가지로 영수증 형태로 이용 기록을 보여주는 서비스를 제공했습니다. 7월에 진행했는데 포스팅이 늦었네요.

거의 알라딘 오픈 시점부터(정확하게는 알라딘 서비스 시작 1년 후 부터) 주력 인터넷 서점으로 이용했던터라 저에게는 의미있는 정보가 많아서 좋았습니다. 처음 구입했던 책, 여태까지 산 책, 결제했던 총 금액 등 모두가 의미가 있으니까요. 작년과 비교해보니, 1년 사이에 300권을 넘게 더 구입했는데 제 자신이 참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요.

하여튼, 앞으로도 장수하여 꾸준히 이런 서비스를 제공해주기를 바랍니다.

2025/08/03

베이비 드라이버 (2017) - 에드가 라이트 : 별점 2.5점

베이비는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 박사가 계획한 범죄 계획에 전용 드라이버로 고용되어 왔다. 오래전 박사의 차를 훔쳤던 탓에 빚을 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빚을 다 갚고, 사랑하게 된 데보라와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는데 박사의 협박으로 새로운 범죄 계획에 합류하면서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베이비는 작전을 망쳐버리고 마는데...

음악과 액션이 정교하게 맞물리는 몇 년 전 흥행작이지요. 에드가 라이트 감독 작품입니다.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음악과 화면의 완벽한 싱크에 있습니다. 베이비가 일종의 장애(귀울음)이 있어서 항상 음악을 들으며 생활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거의 모든 장면이 특정 곡의 리듬에 맞춰 편집되어 있습니다. 총격전, 도주 장면, 걷는 동작 하나하나까지도 음악에 맞춰 조율되어 있으며, 립싱크 장면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액션 영화임에도 마치 뮤지컬처럼 느껴질 만큼, 연출과 편집의 밀도가 높습니다.

제목에 걸맞게 수차례 등장하는 카 체이스 장면들도 일품입니다. 특히 시작과 동시에 펼쳐지는 카 체이스가 압권이에요. 도심을 질주하며 헬기까지 동원한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는 과정을 생생함과 유쾌함, 그리고 약간의 치밀함이 곁들여진 리듬감있는 연출로 잘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청춘 영화적인 감성도 좋습니다. 베이비와 웨이트리스 데보라 사이의 관계를 풋풋하면서도 선명하게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둘이 현실을 박차고 함께 떠나는 미래를 꿈꾸는 구조는 전형적인 청춘 로드무비 구성이고요. 마지막 장면에서 수감 중인 베이비가 데보라의 편지를 받은 뒤 석방되어 데보라와 키스를 나누고 떠난다는 씬은 이런 장르 판타지의 결정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25년형을 선고받은 뒤 최소 10년에서 15년 정도를 복역해야 가석방이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장면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가까우며, 그래서 더 아련합니다.

다만 전체적인 서사는 아쉬움이 큽니다. 베이비가 범죄에서 손을 떼려다 계획이 틀어지고, 결국 조직원들과 충돌한 뒤 모두 죽고 베이비만 체포되는게 줄거리의 거의 전부인 탓입니다. 그래도 범죄가 성공하고 베이비와 데보라의 관계도 잘 이루어지는 중반부까지는 유쾌해서 좋았는데,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급작스럽게 진지하고 무거운 범죄극으로 돌변할 뿐더러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베이비와 버디의 대결도 단순한 육체적 충돌에 불과한 탓입니다. 별다른 전략이나 반전은 등장하지 않아요. 청춘 로맨스와 액션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트루 로맨스"가 떠올랐고, 최소한 그 정도의 드라마나 두뇌 게임을 기대했는데 실망했습니다. 최소한 베이비가 모든 말을 녹음한다는 설정이라도 잘 써먹어 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인물 구성도 단조롭습니다. 베이비와 데보라는 그냥 '아이들'이고, 배츠는 단순무식한 폭력적인 악역이거든요. 버디 정도만 베이비를 따뜻하게 대하는 등 약간 입체적으로 보였는데, 그마저도 애인 모니카의 죽음 이후에는 복수심만으로 움직이는 전형적인 악역으로 퇴화해 버리고 맙니다. 유일하게 제대로 된 어른(?)이자 흑막으로 묘사되는 박사만 개성있게 등장하지만, 마지막에 베이비를 돕고 죽는건 급작스러우며 일관성을 해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청춘 감성과 감각적인 연출은 뛰어나지만, 이야기와 인물 구성은 아쉽습니다. 그래도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합니다.

2025/08/02

미각의 번역 : 요리가 주는 영감에 대하여 - 도리스 되리 / 함미라 : 별점 2.5점

독일 여성 영화 감독 도리스 되리의 요리 관련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접한 음식과 사람들, 그 안에서 느낀 단상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순한 요리 소개나 맛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음식과 문화, 기억, 철학이 뒤섞인 글들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 많아서 일기같다는 느낌도 많이 들고요.

놀랐던건 저자의 방대한 식견입니다. 김치에 대한 언급이 대표적이에요. 한국의 김장을 단순한 발효 기술이 아니라 ‘인간적인 정을 만드는 레시피’라고 표현하는데, 외국인이 쓴 글에서 김치가 아니라 김장을 이 정도로 이해하고 언급했다는게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우유에 대한 글에서 부처가 고행으로 쇠약해졌을 때 젊은 여인이 건넨 우유로 생명을 구했다는 불교 일화를 인용하고, 두부를 이야기할 때 일본 선종의 도겐 젠지의 말을 함께 소개하는 부분을 보면 독일 사람이 이런 정보를 대체 어디서 얻었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글 사이사이에 동물이 급격한 변태를 겪는 이유가 ‘더 많은 먹이를 먹기 위해서’라는 과학계 이론같은 여러 정보들이 등장하는 것도 볼거리입니다. 예를 들자면 바움쿠헨이 일본에 전해진 과정은 의외로 전쟁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하네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서 제빵사로 일하던 독일인 유흐하임이 전쟁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이송된 뒤 굽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뉴욕의 대표 음식으로 언급된 ‘루스 앤 도터스’의 비알리와 베이글 이야기도 재미있었어요. 이 가게는 1907년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조엘 루스가 세 딸과 함께 1935년 창업한 곳이라는 군요.

간단한 레시피도 몇 가지 소개됩니다. 독일에서 품종 보호 정책으로 사라졌다는 ‘린다’ 감자를 활용한 감자샐러드는 감자를 껍질째 삶아 얇게 썰고, 여기에 양파, 식초, 설탕, 식용유를 넣어 만듭니다. 한 번 도전해보고 싶네요.
연두부 반쪽과 아보카도 반쪽을 함께 갈아 얼굴에 바르라는 피부 관리용 레시피도 새로왔고요. 아보카도가 저렇게 쓰기에는 좀 고가라 도전은 꺼려집니다만..

이외에도, 커피 유행에 대한 단상처럼 공감할 만한 일상적 시선도 있어서 좋았고, 책의 만듦새도 깔끔합니다. 선명한 일러스트, 판형, 종이질과 인쇄 및 장정 모두 빼어나거든요. 어른들을 위한 선물용 책으로도 괜찮겠다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글루텐 프리나 환경오염, 미세 플라스틱 같은 주제를 다룬 글들은 다소 단조롭고 설명 위주로 흘러가는 탓에 흥미가 떨어집니다. 전체적으로 정보는 많지만 글마다 담고있는 내용, 수준의 편차도 있는 편이고요. 그리고 '요리'나  '식문화', '음식', '미식' 등의 내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일상적인 요리 이야기보다는, 음식에 얽힌 문화나 개인적 사유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5/08/01

동트기 힘든 긴 밤 - 쓰진천 / 최정숙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살해당한 남자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옮기던 남자가 체포되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 장차오로, 피해자 장양과 금전 관계로 다투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경찰의 권위에 눌려 허위 증언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함과 더불어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에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경찰은 장차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 천재인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0여년 전 있었던 허우구이핑 변사 사건 및 초등학생 아이 성상납이라는 추악한 범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서서히 드러난다...

중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폭력, 권력형 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초등학생을 성상납하는 추악한 범죄가 이루어졌음에도, 대기업 회장과 고위 정치인이 결탁하여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며, 주요 수사 관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이 20여 년 전인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이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쑨훙원의 비서 후이랑과 공안 리젠궈가 결탁하여 허우구이핑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유력한 증인이었던 딩춘메이도 살해하며, 딩춘메이를 살해한 왕하이쥔마저 죽이면서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는 과정은 범죄, 수사물로 충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전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입니다. 이처럼 극심한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수사를 이어가는 장양과 주웨이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요.

결국 사건이 영원히 은폐되나 싶었지만, 장양, 주웨이, 천민장, 장차오가 힘을 합쳐 거짓 살인 사건을 만들어 이를 공론화하는 전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양이 자살한 뒤, 그 시간에 알리바이를 만든 장차오가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목을 끈 다음, 시체를 드러내는 도입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동 성매매를 했던 고위 정치인 샤리핑의 친자 검사를 비밀리에 진행해, 그가 피해자에게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 절정 부분의 쾌감도 강렬하고요.
샤리핑이 최종 악역이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흑막이 존재해서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고, 장양의 조력자들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축인 허우구이핑 사건을 다시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양과 주웨이, 천민장의 우정과 의리, 정의감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사파가 지배하는 무림을 정의롭게 되돌리기 위해 나서는 영웅호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느껴졌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이 곳곳에 보입니다. 시한부 인생인 주인공이 자살했지만, 이를 살인 사건으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아요. 심지어 자살 방법과 동영상으로 자살했다는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유사하다는건 아쉽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집행이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에 맞는 설정이라서 와 닿는데, 장양이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할 이유는 솔직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지는 못합니다. 왜 샤리핑 사진과 사건 진상을 그냥 인터넷에 뿌리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과거 허우구이핑 사건 조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는 너무 뻔해서 뒤로 갈수록 식상합니다. 장양과 주웨이 등이 그들의 덫에 쉽게 걸리는 등의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리젠궈가 어떤 식으로든 훼방놓을게 뻔한데, 계속 리젠궈의 방해에 걸려 좌절하는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허술합니다. 장차오가 갑자기 등장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이유부터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허우구이핑의 연인이었던 리징과 결혼한 게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낄 일인지 의문이에요. 장차오 때문에 허우구이핑이 죽은게 아니니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허우구이핑의 사인이 잘못되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들, 그 당시에 장차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장양을 돕기 위해 갑자기 나타나는 전개가 더 어색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장양에게 사건에 뛰어들기를 강요했던 연인 우아이커와의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우아이커의 비중을 초반에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수학 천재 옌량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큽니다. 옌량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 강렬함만큼은 놀랍고, 한번 잡으면 손 떼기 힘든 재미를 갖추고 있는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