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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5/07/26

더 킬러 (2023) - 데이빗 핀처 : 별점 3.5점

아래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넷플릭스 전용 장편 영화.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연출만큼은 매우 정교합니다. 특히 파리 호텔에서의 실패 이후 킬러가 탈출하는 장면은 색감, 구도, 리듬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킬러가 스스로의 신분을 감추고 위장하며 타겟을 하나씩 처리하는 과정의 디테일도 빼어납니다. 중개인 호지스를 습격하려고 쓰레기 수거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차량은 물론 옷에 부착하는 패치의 로고를 수작업으로 그려서 신분을 속이며, 문이 자동으로 닫히는 시간을 측정해서 침입하는 타이밍을 잡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완벽한 현실감'을 가져다 주는게 굉장히 좋았어요. 정말 저렇게 하면 침입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니까요.

데이빗 핀처 감독 작품답게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납니다. 킬러 역을 맡은 마이클 패스밴더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섬세하게 내면을 표현해내는데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허술합니다. 암살 실패로 연인이 폭행당하자 복수에 나선다는게 이야기의 전부로 크게 새로울게 없는 킬러 복수극에 불과한 탓입니다. '킬러의 생활'을 따라가는 일종의 킬러 일상계물이라서 행동의 디테일을 좇는 재미는 있지만, 정교한 퍼즐처럼 맞물리는 서사를 기대한 관객으로서는 아쉬웠습니다.
또 암살 중개인이 킬러를 제거하지 않고, 여자친구만 폭행하고 사라진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왜 기다렸다가 킬러를 죽이지 않았을까요? 협박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애매한데 말이지요. 결국 이는 킬러의 복수극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장치일 뿐인데, 수천km를 여행하며 4명이나 살해하는 복수를 하기에도 단순 폭행은 좀 부족해 보여서 별로 와 닿지 않았습니다.

중반부, 킬러가 플로리다로 가서 흑인 청부업자와 벌이는 격투 장면도 아쉽습니다. 상대는 거대한 체격과 잔혹함으로 묘사되지만, 실제 격투는 힘의 압도감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고 길게 늘어지는 인상입니다. 어두운 탓에 액션을 제대로 감상할 수도 없고요. 이럴바에야 킬러의 압도적 강함을 짧게 선보이는게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초반부터 반복되는 킬러의 나레이션은 철학적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후반부엔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핀처 특유의 절제된 미장센과 현실감 있는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집중력 있는 연기로 몰입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화면 자체로 모든 걸 말하는 영화이지요. 별점은 3.5점입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스타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2025/07/25

괴물 나무꾼 (2023) - 미이케 다카시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을 저질러왔던 변호사 아키라는 어느날 '괴물 나무꾼'의 가면을 뒤집어 쓴 괴한에게 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입원한 병원에서 자신의 머리 속에 '칩'이 삽입되어 있다는걸 알게되었다. 칩은 뇌를 건드려 평범한 인간을 사이코패스로 만들었고, 이는 아키라를 과거에 납치했던 토마 부부의 실험에 의한 것이었다.
괴한의 공격으로 칩이 망가진 아키라는 서서히 인간성을 되찾았고, 칩 이식 수술을 받아 사이코패스가 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던 괴물 나무꾼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데...

기괴하고 변태적인 상상력의 영화로 잘 알려진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넷플릭스 전용 영화입니다. 어딘가의 추천을 읽고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흔해빠진 사이코패스물에 변주를 가한 설정은 괜찮습니다. 주인공 아키라 등 어릴 적 토마 부부에게 유괴당했던 아이들은 부부에 의해 모두 뇌에 ‘칩’을 삽입당했고, 칩이 뇌간을 건드려 감정과 공감 능력을 차단했기 때문에 모두 사이코 패스가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토마 부부의 아들이 선천적인 사이코패스였고, 그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사이코패스를 만들었다는 동기도 설득력있습니다. 만들줄 알아야, 부술 수도 있다는 논리인데 그런대로 와 닿았어요.
아키라가 저지른 살인들에 대한 묘사, 사이코패스 아키라에 대한 표현도 좋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영화는 ‘괴물 나무꾼’의 정체를 쫓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정작 추리적인 재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등장인물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범인은 앞서 등장한 인물 중 하나일 수밖에 없고, 결국 켄모치가 범인으로 밝혀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 있는 복선이나 서사적인 개연성은 부족합니다. 사실상 유일한 단서는 켄모치가 이누이 형사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머리를 부딪힌 장면뿐인데, 이로 인해 뇌에 삽입된 칩이 고장나고, 그로 인해 인간성을 되찾았다는건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인간성을 되찾은 그가 자신과 같은 실험체들을 죽인 이유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범행 동기가 모호해서 관객이 범인을 추론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탓에, 후더닛(whodunit) 형식으로서도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켄모치는 죽었지만, 켄모치와 아키라의 사투 중에 아키라가 자기 아버지를 살해한 사이코패스라는걸 알게 된 아키라의 약혼녀가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도 시시하고 허무합니다.

설정상의 허점도 눈에 띕니다. 아키라는 자신이 뇌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왔는데, 아무리 어렸어도 그런 수술을 받았다는건 충분히 기억하거나 인지할 수 있는 나이였습니다. 설득력이 부족해요. 또 켄모치가 왜 하필 ‘괴물 나무꾼’이라는 복장과 설정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도 없고요.
사이코패스인 아키라의 친구 스키타니나 프로파일러인 토시로 란코는 서사에 거의 기여하지 않아서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시나리오의 정교함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사이코패스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설정 자체는 흥미롭고, 살인 장면들이 풍기는 감정의 결핍이나 공허한 분위기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 특유의 연출력이 느껴지긴 합니다. 하지만 스릴러로서도, 미스터리로서도 설득력이 약하고, 연출과 구성도 허술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추리적인 재미를 기대하신다면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2025/07/20

도쿄의 뮤지엄을 어슬렁거리다 - 오타가키 세이코 / 민성원 : 별점 2.5점

만화가 오타가키 세이코가 도쿄 시내뿐 아니라 요코하마, 하코네, 유가와라, 사이타마 등 도쿄 근교를 포함한 다양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직접 방문한 뒤, 그 경험을 일러스트와 함께 풀어낸 에세이집입니다. 저자의 시선과 감상이 담긴 일러스트가 좋아서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느낌을 전해 줍니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곳을 소개해드리자면, 도쿄 국립박물관은 저도 첫 일본 여행 당시 방문했던 기억이 나서 반가왔습니다. 저는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다이얼식 전화기나 모자이크 타일 벽 같은 세세한 디테일이 특히 인상적으로 묘사되는 덕분에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은 파울 클레를 비롯해 히가시야마 가이이 같은 일본 국민 화가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회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장소일 것 같고요.
 요코하마 미술관에서 열렸던 동서양의 교류를 주제로 한 기획전 소개도 좋았습니다. 판화가 하세가와 기요시, 설치미술가 스가 기시오, 그리고 달리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소개되는데, 당시 전시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스미다구의 호쿠사이 미술관에서는 '가나가와오키의 큰 파도' 같은 대표작을 상설 전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미술 애호가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입니다.
도쿄 근교 하코네에 위치한 랄리크 미술관은 아르누보 유리공예의 대가 르네 랄리크의 작품들을 모아 놓은 공간으로, 오리엔트 특급 열차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추리소설 팬이라면 한 번쯤 방문하고 싶어질 만한 장소입니다.
사이타마 국립 현대 미술관의 의자 컬렉션도 흥미로운데, 전시된 의자에 직접 앉아볼 수 있다는 점은 흔치 않은 경험일 것입니다. 입장료가 단돈 200엔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가성비 면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곳입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뮤지엄 공간과 건축의 아름다움을 조명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아사쿠라 조소관은 '동양의 로댕'이라 불리는 아사쿠라 후미오가 설계한 공간으로, 붉은 마노를 갈아 벽에 바르고, 외벽에는 전복 껍질을 가루 내어 덧칠했다는 설명만으로도 그 정성과 고집이 전해집니다. 단게 겐조의 작품이라는 요코하마 미술관, 유서깊은 료칸을 개축했다는 유가와라 미술관, 구로카와 기쇼가 설계한 국립신미술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했다는 국립서양미술관 역시 건축물만 보아도 좋을 것 같고요. 특히 국립서양미술관은 일본의 유명했던 미술품 수집가 마쓰카타가 수집했던 컬렉션 중심인데 밀레, 마네, 모네, 고흐 등 유명 작가 작품이 다수 전시되어있다니 빼 놓기 어렵지요. 이 정도 전시품에 입장료 500엔은 너무 싼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간단한 주위 소개도 볼거리입니다. 예를 들어 도쿄 현대미술관이 있는 기요스미시라카와는 커피 애호가들에게도 잘 알려진 동네라고 합니다. 미술 감상과 함께 거리 산책, 카페 탐방까지 더해진다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될 것입니다.

컵 누들 뮤지엄이나 에비스 맥주 기념관 같은 공간들도 저자 특유의 호기심으로 생동감 있게 그려집니다. 특히 요코하마에 위치한 컵 누들 뮤지엄은 음식에 대한 책을 발간한 경험이 있는 제 입장에서 더더욱 흥미로울 수 밖에 없네요. 마침 관련 책도 읽어본 적이 있고요. 에비스 맥주 기념관도 첫 일본 여행 당시 방문했던 곳인데, 또 가 보고 싶어집니다. 도쿄 스테이션 갤러리처럼 기차역 안에 위치한 미술관도 새로운 발견처럼 다가왔고요.

이렇게 저자의 시선을 따라 읽다 보면, 책 속의 여러 미술관을 메모해 두고 언젠가 직접 방문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반면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일단 책의 상당수가 기획전을 중심으로 소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현 시점에서는 이미 끝났을 전시에 대한 내용은 독자 입장에서 실용성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상설 전시나 소장품 중심의 소개가 더 많았더라면, 아니면 뮤지엄 주변의 관광 정보가 더 곁들여지는게 보다 활용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겁니다. 또한, 박물관들을 지역별로 묶어서 지도와 함께 코스를 소개하는 방식이었더라면 여행자에게 훨씬 더 유익했을 텐데, 저자 주관적인 구성으로 묶여 있는 탓에 실용성이 다소 떨어집니다.

그리고 후반부로 갈수록 다소 흥미도를 찾기 어려운는 뮤지엄들이 등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담배와 소금 박물관, 도라상 기념관 등은 개성은 있으나, 일부 독자에게는 굳이 찾아가야 할지 고민이 되는 공간일 수 밖에 없지요. 또 모든 주석을 책 뒷부분 미주 형식으로 처리한 것도 읽는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였습니다. 본문 하단에 각주를 바로 넣는 방식이었으면 훨씬 읽기 편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쿄 또는 근교 여행을 계획 중인 분이라면, 이 책에서 소개된 뮤지엄 중 한두 곳을 골라 직접 둘러보시는 것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책 속의 어슬렁거림을 실제 여행으로 확장해 보는 것이야말로 이 책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여, 혹시 도쿄에 여행간다면 하루 정도 뮤지엄 둘러보는 코스가 무엇이 좋을지, 제 기억에 남은 뮤지엄 중심으로 ChatGPT에게 물어보았는데 아래 코스를 추천하네요. 우에노 미술관 트리오 코스는 다음 여행에 참고해야겠습니다.1~2년 안에 꼭 가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코스 1: 우에노(Ueno) 미술관 트리오

도쿄 국립 박물관 (Tokyo National Museum) → 국립서양미술관 (National Museum of Western Art) → 도쿄도 현대미술관 (Tokyo Metropolitan Art Museum)

장점: 모두 우에노 공원 내 도보권. 이동 시간 최소화, 하루에 세 곳 방문 가능

코스 흐름: 도쿄 국립 박물관 (추천 관람 2h) – 일본·아시아 전통·불교미술과 국보 컬렉션이 압도적 → 도보 5분 → 국립서양미술관 (추천 관람 1.5h) – 피카소, 고흐, 폴록 등 서양미술 정수 → 도보 5분 → 도쿄도 현대미술관 (추천 관람 1.5h) – 국제전시와 현대미술 대규모 기획전

총 소요 시간: 관람 5h + 이동 10분 + 휴식/점심 포함 약 6시간 → 오전 9시 시작 시 오후 3~4시 일정 종료 가능

코스 2: 도쿄 북·서쪽 모던 아트 여정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 (MOMAT) → 아오야마 네즈 미술관, 또는 스미다구 호쿠사이 미술관

장점: 일본 근대·현대 미술 → 전통 장식 미술 순으로 다양한 감상 가능

코스 흐름: MOMAT (Takebashi 역) – 2~3시간 → 이동: 지하철 도자이선 → 오모테산도역 환승 → 긴자선 → 아오야마 네즈 미술관 (1520분) 관람 1.52시간 또는 지하철 이동 → 스미다구 호쿠사이 미술관 (약 20~30분 이동, 1–1.5시간 관람) 

총 소요: 관람 3.55h + 이동 4060분 → 여유 있게 오후 일정 종료 가능

2025/07/19

이상한 집 2 - 우케쓰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집 2"는 기묘한 평면도를 가지고 기상천외한 추리를 펼쳤던 전작에 이은 우케쓰의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작과는 다르게 연작 단편집으로, 11편의 개별 단편들은 제각기 다른 사건과 인물을 다루지만 이야기 말미에 하나의 결말로 수렴되는 구조를 가집니다. 대부분의 수록작 모두에 기묘한 평면도를 가진 집이 등장하며, 이들 사이에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는게 조금씩 드러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인상적이었던 것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우선, “갈 곳 없는 복도”는 어머니로부터 과보호와 냉대를 동시에 받으며 자란 네기시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가 살던 집에는 막힌 복도가 있었는데, 네기시 씨는 태어날 당시 자신의 쌍둥이 자매가 죽은 탓에 자매 방이 철거되었다는 추리를 제시합니다. 하지만 진상은, 건설 당시 사고로 아이가 사망한 장소가 원래 현관이었던 탓에 현관 위치를 바꿨고 그로 인해 복도가 막혔다는 것으로 드러나지요.

“어둠을 키우는 집”은 가족 살인 사건을 다룹니다. 쓰하라라는 소년이 가족을 살해한 사건인데, 그 원인이 엉터리로 설계된 집 구조 때문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평면도를 통해 그 집이 생활에 적합하지 않고, 쓰하라 소년의 고립을 유발하는 구조였는걸 조목조목 드러내며 공간이 범죄를 유발했을 수도 있다고 추리하는데 아주 그럴듯했어요.

“재생의 성역”은 컬트 종교단체 ‘재생회’의 수행 공간인 '성역'에 잠입한 기자의 리포트입니다. 성역은 나가노 현에 있는데, 수행은 신도들에게 숙면을 취하게 하는 기묘한 것이었습니다. 기자는 신자들이 신성시하는 성모가 왼팔과 오른다리가 없는 신체를 가졌다고 했는데, 나는 그 장소의 평면도를 조합해 ‘재생의 성역’ 건물 자체가 그 성모의 육체를 본뜬 구조임을 밝혀냅니다. 이렇게 평면도를 조합하는건 작가의 전작 "이상한 그림"도 연상되는데, 상당히 충격적이었어요. 이 리포트는 전편만 발표되었고, 세뇌 방식이나 수행의 실체가 담긴 후편은 결국 발표되지 못했다며 수수께끼를 남기는 결말도 좋았고요.

“방을 잇는 실 전화기”는 어린 시절 실 전화기로 아버지와 대화하던 기억을 가진 가사하라 지에의 이야기입니다. 이웃 마쓰에 집 화재 사건 이후 아버지가 떠난 뒤, 지에는 실 전화기의 줄 길이가 이상하게 길고, 실 끝은 아버지 침실이 아니라 예전에 옆집 마쓰에 부인이 분신 자살했던 방으로 이어진다는걸 알게 됩니다. 지에는 그날 밤 아버지가 횡설수설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아버지가 마쓰에 부인을 살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합니다. 실 전화기 길이로 이어지는 추리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달아날 수 없는 연립주택”은 과거 사채 때문에 어린 아들과 함께 조직의 감시 아래 연립주택 ‘오키토’에서 매춘을 강요당했던 아케미 씨의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같은 처지였던 옆 방의 왼팔이 없는 야에코 씨와 친해졌는데, 야에코는 아케미의 아들 미쓰루를 구하려다 교통사고로 오른다리마저 잃고 말았지요.
여기서는 평면도나 주택 구조는 그리 특이할건 없습니다. 그러나 아케미는 당시 한 번의 매춘에 십만 엔을 받았다고 회상했는데, 그 금액은 터무니없는 고액입니다. 2층에 고작 네 명만 거주했고, 1층은 감시조였다는 구조도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기에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시스템이었고요. 여기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11편의 이야기 모두 컬트 종교단체 ‘재생회’와 그 본거지인 ‘재생의 성역’을 중심으로 벌어졌다는게 밝혀집니다. 우선 재생회의 기묘한 수행은 성역 구조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모의 몸을 딴 성역에서 신자들은 자궁 위치에서 숙면을 취합니다. 이는 성모의 몸속에 있는 태아와, 출산을 은유한 과정으로 신자들은 모두 성모의 자식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각 이야기에 등장하는 기이한 집 구조들도 모두 재생회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성역'과 똑같이 개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재생회의 주 수익원도 성역처럼 집을 개축하는 공사였습니다. 이를 가능하게 한 인물은 히쿠라 하우스의 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재생회의 간부이기도 했으니까요. 대표적인건 “딱 한 번 나타난 방”에서 드러난 이루마의 집 구조입니다. 이루마의 부모는 이루마의 죄를 씻기 위해 집을 성역처럼 만든 것입니다. 

이런 흐름은 다른 사건들도 마찬가지에요. 지에의 아버지는 마쓰에 부인과 불륜 관계였습니다. 실 전화기 길이와 방해물이 없어야 하는 특징을 생각하면, 그는 발화 현장이 아니라 부인 침실에서 전화를 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진상은, 지에 아버지는 그날 부인을 살해한게 아니라 사체를 발견했던 겁니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는 유서를 읽는 소리였고요. 부인이 자살했던 이유는 불륜으로 인한 임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쓰에 씨 남편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불륜을 감추기 위해 아내 시신을 벽장 안에 넣고 태웠는데, 이 때 불이 번져 죽고 말았던 것이지요. 지에의 아버지는 이후 죄책감으로 재생회에 들어간 뒤, 또 다른 불륜으로 태어난 미쓰루를 위해 집을 개축까지 했지만, 결국 미쓰루가 학대로 죽자 재생회의 사상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심장 위치 방문을 잠그고 자살했습니다. '성모'의 죽음을 실제로 행동을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재생회 신자들은 대부분 ‘죄를 물려받은 아이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즉, 불륜으로 아이를 낳은 부모들이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네기시 씨 어머니의 냉대와 집 개축 이유도 이해가 됩니다. 네기시 씨는 어머니의 불륜으로 태어났고, 미숙아였기 때문에 출산 당시 혈액형 검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혹시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해 혈액형이 드러날까 봐, 딸이 사고를 당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보호하면서도 동시에 냉정했던 것이고, 집을 성역에 가깝게 개조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방의 배치를 보면, 어머니가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걸로 보이는데 이 역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아울러, ‘물레방앗간’은 기요치카가 딸 오키누를 낳기 위한 장소로 만든 공간이었습니다. 그 안의 움푹 팬 부분은 아이를 숨겨두기 위한 임시 대피소였고, 그 딸이 바로 야에코였습니다. 오랜 시간 그 안에 숨어 있다가 팔이 끼어 괴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미쓰코가 음모로 죽게 만든 인물 역시 야에코였습니다. 야에코가 숨기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의족이었지요.

또한 ‘오키토’의 이야기에서 남겨진 수수께끼를 통해, 실제로 매춘을 했던 사람들은 어머니들이 아니라 그들의 아이들이었다는게 밝혀집니다. 히쿠라 하우스 사장은 야에코의 딸을 매춘 상대로 삼았다가 결국 결혼까지 했던 겁니다. 

결국 이 모든건 야에코의 딸이 어린 시절 자신을 매춘에 내몬 어머니를 증오했으며, 그 복수로 어머니의 신체 결함을 본떠 전국에 같은 구조의 집들을 퍼뜨리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진상으로 마무리됩니다. 히쿠라 하우스 사장은 죄책감 탓에 아내의 요구에 따라 야에코를 ‘성모’로 삼고 재생회를 만들었고, 이후 신도들의 집을 성역처럼 개축하는 등의 행위에도 군말없이 따랐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딸을 조종해 야에코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요

이렇게 각각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며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이 무척 흥미롭고 쉽게 읽힙니다. 무엇보다 집의 평면도를 소재로 이런 서사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특징적인 여성의 몸을 가진 집의 평면도'를 구상한 뒤, 이 설정과 진상에서부터 역순으로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창작 과정이 궁금해 집니다.

단편 하나하나도 추리물로서 수준이 높은 이야기가 제법 되고요. 각 단편마다 추리적으로도 인상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어둠을 키우는 집”에서는 쓰하라 소년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가 엉망으로 설계된 집 구조 때문이라는 설정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평면도만 보고 그런 추리를 이끌어낸 전개도 흥미로웠고, 진상에 대한 제 나름의 해석—소년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할머니를 해치려는 걸 막으려다 우발적인 사고가 벌어졌다는 점—도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소년 혼자 칼에 상처를 입었던 점, 할머니가 어머니의 비명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 등 다양한 단서를 조합하며 추리의 실마리를 만들어낸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숲 속의 물레방앗간”에서는 물레방아가 돌아가면 내벽이 움직이는 구조에 대한 미즈나시 우키의 추리가 기억에 남습니다. 오른쪽 방의 벽에 있던 움푹 팬 공간 쪽으로 벽을 조이게 하여, 안에 있는 사람이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 자세가 되도록 만든 구조였는데, 이는 마치 죄인이 참회하는 자세와 닮아 있었습니다. 실제 그 방향에 사당이 있었다는 점도 설득력을 높였습니다.
“딱 한 번 나타난 방”에서는 비밀방을 찾아가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네 가지 단서—① 갑작스러운 현기증 이후 문이 보였다는 점, ② 문을 열자 작은 방이 나왔다는 점, ③ 그 방의 바닥이 다다미 반 장 크기의 정사각형이었다는 점, ④ 상자 안에 무언가 무서운 것이 있었다는 점—와 함께 이루마 씨 아버지의 직업, 2004년의 지진, 미닫이문의 구조 같은 현실적인 단서들이 함께 제시되면서, 평면도를 기반으로 직접 추리하는 재미가 잘 살아 있었습니다.

다만 11편의 단편들은 전체적인 완성도에서 편차가 있습니다. 일부 이야기는 독립된 단편으로서 완결되지 않고, 결말에서 쓰일 단서 제공에 그치기 때문에 연작 ‘단편집’이라 보기엔 다소 애매한 구성이 됩니다. 물론 결말에서 이 단점이 일정 부분 해소되기는 하지만, 전편이 모두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쥐덫의 집”에서는 히쿠라 하우스 사장의 딸 미쓰코가 하야사카와 억지로 친구가 되어, 할머니 야에코를 죽음으로 이끈 음모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미쓰코와 만화 취향이 전혀 맞지 않았고, 책장이 잠겨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 추리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하야사카를 굳이 끌어들일 이유도 명확하지 않으며, 건설회사 사장의 어머니가 자사 설계로 인해 사고사했다면 그 자체로 큰 스캔들일 텐데도 이런 위험성 큰 일을 벌인다는게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거기 있었던 사고 물건”에서는 물레방앗간에서 발견된 ‘백로’가 사실은 오키누의 시신이었다는 추리가 제시되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래전 일이라고 해도 시체 발견이라는 큰 사건이 지역 신문 기사나 사람들의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는 설정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아저씨의 집”은 학대받다 굶어 죽은 소년의 일기라는 설정인데, 그 일기가 죽기 직전까지 어떻게 쓰였고 어떻게 세상에 나와 발표까지 되었는지 설명이 없습니다. “살인 현장으로 향하는 발소리”에서 아내 사체를 불태운 마쓰이 씨가 왜 미처 도망치지 못했는지도 납득이 어렵고요.

또한 몇몇 단편은 전체 흐름상 불필요하게 느껴집니다. “아저씨의 집”은 “딱 한 번 나타난 방”에서 신도들이 집을 개축하고 감축했다는 정보가 이미 충분히 제시되기 때문에 굳이 추가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기 있었던 사고 물건” 역시 “숲 속의 물레방앗간”에 정보를 보완하는 정도로 대체할 수 있었고, “살인 현장으로 향하는 발소리”도 전편인 “방을 잇는 실 전화기”의 내용을 시점만 바꿔 반복한 것에 가까워 정보의 추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단지 마쓰이 씨에게 30분의 여유가 있었다는 점 외에는 새로운 내용이 없거든요.

몇몇 이야기는 설정이 지나치게 과합니다. "숲 속의 물레방앗간"이 대표적입니다. 지역 유지였던 아즈마 키요치카가 불륜으로 낳은 아이를 숨기기 위해 만들었다는데,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이런 거대하고 수상한 건물을 만든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야에코가 팔을 잃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도 너무 억지스러웠어요. 재생회 신도들이 불륜을 저지른 사람들이라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친 억지였습니다.

무엇보다, 이야기 전체를 이끄는 핵심 인물인 야에코의 딸이 끝까지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그녀의 증오가 이야기의 중심 동기인데도, 구체적인 내면 묘사나 행동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독자가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야에코가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 했던 인물인데, 그런 야에코의 몸을 본떠 건물을 전국에 짓게 만들었다는 것도 그리 와 닿지는 않습니다. 복수가 목적이라고는 하지만 건물 외형만 보고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탓입니다. 치부를 아무도 모르게 전국에 설치했다!는게 과연 복수가 될까요? 잘 모르겠네요.

이렇게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지만, 이야기 하나하나가 흥미롭게 이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평면도를 바탕으로 한 개별 단편의 아이디어와 추리는 충분히 인상적이니까요. 몇몇 이야기는 제법 서늘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추천드립니다.

2025/07/18

나이브스 아웃 : 글래스 어니언 (2022) - 라이언 존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명탐정 브누아 블랑은 코로나 격리 탓에 지루함으로 몸부림치던 중, 대부호 마일즈의 초대를 받고 그리스의 섬으로 떠났다. 마일즈는 섬의 대 저택에서 친구만을 데리고 자기가 만든 추리극을 선보인 뒤, 범인 찾기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초대받은 친구들은 모두 마일즈의 돈과 후원이 절실해서 그 앞에서 쩔쩔맸지만, 앤디는 동업자 마일즈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회사를 쫓겨난 원한이 있어서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명 작가가 만들었다는 추리극을 블랑이 단번에 풀어내어 김이 빠져버린 그날 밤, 파티에서 듀크가 술을 마신 뒤 질식사했고 뒤이어 앤디마저 저격당해 살해당했다. 곧바로 블랑은 남은 사람들 앞에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내기 시작하는데....

넷플릭스 전용 장편 추리 영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편을 재미있게 보아서 관심이 컸었지만, 2시간이 넘는 시간 탓에 그동안은 손이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더위가 몰아친 지난 주말에, 여름에는 추리 영화지!라는 생각으로 보기 시작했네요.

특징이라면 전편도 그랬지만, 고전 본격물의 문법을 현대에 맞춰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잘난 척이 심하고 까칠한 외국인 탐정 브누아 블랑부터 그러합니다. '에르퀼 푸아로'를 현대에 옮겨놓은 듯한 인물이니까요. 괴짜 억만장자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친구들만을 외딴섬의 대저택으로 초대해 추리 게임을 연다는 설정 또한, 고전적인 클로즈드 서클 추리극을 연상시키고요.
그런데 여기 포함된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현 시점을 반영한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주목받는 정치인, 과학자는 그렇다 쳐도, SNS 중독인 패션 모델과 남성 인권에 대해 떠벌이는 유튜버가 대표적입니다. 마일즈는 아무리 봐도 일론 머스크를 떠올리게 했고요.

이야기도 뚜렷하게 4막으로 나뉘어 시원하게 전개되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1막에서는 마일즈가 준비한 추리 게임이 중심이 되며, 2막에서는 듀크의 죽음이 벌어집니다. 이어지는 3막에서는 섬에 도착한 인물이 사실은 앤디가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헬렌이었다는 사실이 회상을 통해 드러나고, 그녀가 언니의 의문사를 밝히기 위해 블랑에게 의뢰했음이 밝혀집니다. 마지막 4막에서 블랑의 추리와 헬렌의 폭주를 통해 이야기는 마무리되고요. 이렇게 구조적으로 큰 흐름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어 몰입하기 쉬웠습니다.

또 다른 장점은 미술입니다. 마일즈의 섬과 '글래스 어니언'으로 상징되는 대저택의 내외부는 시각적으로도 인상 깊습니다. 뱅크시 조각으로 만들어진 부두나 모나리자 등 여러 미술 작품, 초대장이 담긴 퍼즐 상자도 그러합니다. 인물의 성격과 직업을 반영한 의상과 색상 표현도 뛰어나고요. 한 마디로 보는 즐거움은 넘칩니다.

마지막 헬렌의 폭주도 화끈함만큼은 최고였어요. 모든걸 날려버린 뒤, '모나리자'마저 불태우는건 정말 최고의 마무리였습니다. 마일즈의 평소 입버릇과 절묘하게 연결되는 점도 좋았고요.

그러나 기대했던 추리적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주어진 정보를 통해 그럴듯한 추리를 끌어내는 브누아 블랑의 추리쇼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러모로 헛점이 많이 보이는 탓입니다. 듀크가 마일즈의 차에 치일뻔 했다는 대사로 마일즈가 앤디의 집에 먼저 갔고, 그녀를 살해했다는 근거로 삼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발상은 좋지만 근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지요. 마일즈가 멍청이라는 것과 그가 범인이라는건 아무런 관계가 없고요. 최악은 듀크가 마일즈의 잔을 잘못 알고 잡아서 죽은게 아니라, 마일즈가 듀크에게 잔을 전해주었다는 추리입니다. 관객은 모두 해당 장면에서 듀크가 잔을 잘못 잡는걸 봤습니다. 즉, 이건 관객에게 거짓말을 한겁니다. 공정함 측면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마일즈가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겁니다. 앤디의 사망과 관련해 마일즈의 차를 친구들이 목격했다는 사실은 정황일 뿐입니다. 범행의 동기가 되었던 메모도 이미 재판에서 조작된 증거를 기반으로 결론이 난 상태라, 지금 와서 앤디가 다시 제출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메모는 마일즈가 모두 앞에서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남아 있지도 않고요. 앤디가 이미 자살했다고 알려진 상황에서 그의 재력과 사회적 입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명탐정 브누아 블랑을 통해 고소된다 한들 유죄 판결은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친구들마저 편을 들어준다면 더더욱요.
듀크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범행 도구가 독이 아닌 파인애플 주스 알레르기였기 때문에 사망 원인을 사고로 처리할 가능성이 큽니다. 잔을 바꿨다는 점도 증거를 남기기 어려운 부분이라 수사 과정에서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헬렌이 가지고 있던 녹음기를 활용해서 증거를 잡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좀 의외였어요.

그리고 부실한 동기도 문제입니다. 앤디를 살해한 이유가 메모 때문이라지만, 이미 메모를 누가 썼는지에 대한 법적 다툼은 끝난 상태입니다. 앞서 말했듯 지금 앤디가 '메모 원본을 찾았다!'며 들이미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듀크 살해도 넘치는 재력으로 무마하는게 더 손쉬웠을테고, 헬렌을 저격하려 한 마지막 범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일즈는 그녀가 앤디가 아님을 알고 있었고, 메모를 손에 넣은 상황에서 굳이 헬렌을 해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분을 속인걸 밝히며 듀크를 살해한 범인으로 모는게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마일즈의 동기도 이렇게 부실하지만, 다른 친구들과 손님들은 더 합니다. 그들 중 누구도 앤디를 해칠 이유는 없었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메모는 마일즈의 현재 위치에 영향을 끼치기 힘드니까요. 게다가 듀크를 죽일 이유는 더 없습니다. 듀크 때문에 위험을 느낄 인물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아무도 설득력있는 동기가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범행을 억만장자 마일즈가 직접 벌이는게 가장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것도 세계 제일의 명탐정 앞에서 말이지요. 아무리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벌인 범행이라 하더라도 너무 무모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전작보다 규모가 커졌음에도 이야기의 짜임새와 특히 추리적인 완성도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전편만 보셔도 될 듯 합니다.

2025/07/13

기암관의 살인 - 다카노 유시 / 송현정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매니아 프리터인 사토는 아르바이트로 카리브 해의 외딴 섬 저택 '기암관'으로 향했다. 정해진 설정에 따라 연기를 하며 3일간 지내면 100만엔을 준다는 아르바이트였다. 사토에게는 반 년 전 사라진 일용직 친구 도쿠나가를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기암관은 부호 미에이도 하루사다의 저택으로, 사토는 하루사다의 친구로 방문했다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여러 명이 방문한 기암관에서의 첫 날 밤, 쾌활했던 손님 텐가와가 밀실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이 모든 건 부자들의 유희를 위해 벌이는 진짜 살인 게임이었고, 사토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되는데...

고전적인 제목이 마음에 들어 집어든 작품입니다. 

특징이라면 '폐쇄형 게임 미스터리'물의 설정을 작품의 핵심 소재로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실제 살인을 포함한 추리 게임을 유료 서비스로 제공하는 회사가 있다는 설정입니다. 추리를 즐기고 싶어 하는 부유한 클라이언트가 거액을 지불하고 사건을 의뢰하면, 회사는 추리 소설가가 만든 각본을 준비하고 배우를 모집해 실제 살인을 연출합니다. 이 회사는 전 세계에 지사가 있고요.

이야기는 영문도 모른 채 이러한 추리 게임에 참여한 뒤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사토와, 회사측 운영 담당으로 도서 추리소설처럼 모든 범행을 지휘하며 예기치 못한 사고를 수습하는 고엔마의 시선이 교차하며 전개됩니다.

사토는 평범한 프리터로, 3일에 100만엔이라는 고액 아르바이트로 고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설정된 조연 역할만 수행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사람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부터는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다행히 '추리 매니아'인 덕분에 여러 위기를 추리를 통해 해결하면서요. 여기서 생기는 딜레마도 재미있습니다. 직접 사건을 해결하면 고액을 지불한 클라이언트 탐정의 등장이 무의미해지는 탓에 살해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딜레마지요. 때문에 조수 역할에 머무르며 단서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마지막 날 밤에는 모두 함께 밤을 보내자는 현실적인 대응도 시도합니다.
반면 고엔마는 이 게임을 기획한 회사 직원이자 운영 총괄로, 작가가 쓴 각본에 따라 전체 사건을 총괄하며 참가자들의 돌발 행동과 예기치 못한 사고를 수습해 나갑니다. 클라이언트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하며, 기획된 시나리오에서 벗어나는 변수는 가능한 한 배제하고요. 그래서 사토가 무대의 흐름을 바꾸려는 조짐을 보일 때마다 이를 조용히 차단하려 합니다.
이러한 두 인물의 시점을 오가며 둘의 입장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대립도 선명하게 만드는 전개는 인상적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일종의 암호를 통해 예고되는 살인과 선보이는 트릭들은 만화적이지만 재미있기는 하거든요. 텐가와가 사망한 밀실 트릭은 '인간 의자'를 응용한 방식이며, 시즈쿠 사건에서는 목각상 머리를 활용해 밀실을 구성하는데 다소 과장되어 있지만, '사체의 목을 잘라낸' 분위기와는 잘 어울립니다. 여러 고전 추리를 패러디하면서 어떻게든 범행을 대본에 어울리게끔 저지르는 악전고투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재미를 더해주고요.
사토가 기암관에서 벌어진 사건의 구조적 문제를 간파하고, 회사 관계자들 앞에서 그 허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결말도 볼거리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납득할 만한 주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작품 안에서 가장 논리적인 추리가 펼쳐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기획된 시나리오가 실제 사건의 변수에 따라 계속 수정되며 혼선이 생기는 부분은 블랙 코미디같습니다. 원래 탐정 역할이었던 텐가와가 또 다른 클라이언트의 의뢰로 살해당하고, 범인 역할로 설정된 시라이가 예기치 않게 죽자 급하게 고사카를 새로운 범인으로 설정하는 식인데, 특히 고사카가 법의학자 출신이었다는 설정이 갑작스레 등장하는 장면은 제법 웃깁니다.

하지만 완성도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만화적인 설정에 더해 인물들이 전형적이고, 감정적으로 설득력 있는 묘사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토가 마지막에 갑자기 천재 추리 작가로 변신하는 결말은 뜬금없고 어색합니다. 살인극이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중계되고 있었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요. 이렇게 후반부에 억지스러운 장치들이 겹치는 탓에 몰입도가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시라이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고, 선장이 언급만 되고 등장하지 않는 점 역시 이야기의 완성도를 저해합니다.

사토라는 인물도 영 별로입니다. 그는 이전 일용직 동료인 사토나가의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이 아르바이트에 참여했고, 히로인 시즈쿠에 대해서도 동경의 감정을 품는걸로 표시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죽음을 알고난 이후에 특별한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습니다. 복수심이나 애도는 거의 언급되지 않아요. 오히려 회사의 전속 작가가 되기 위한 포부를 밝히는 데 집중합니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기에는 설명이 너무 부족했어요. 사토보다는 차라리 고엔마가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교차 시점 구성과 일부 트릭은 인상적이지만, 인물의 설득력 부족과 과도한 작위적 설정은 큰 감점 요소입니다.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07/12

올드 가드 2 (2025) - 빅토리아 마호니 : 별점 1.5점

앤디 일행은 무기를 밀매하는 조작을 소탕했지만, 흑막이 여전하다는 사실에 고민했다. 하지만 이전에 추방했던 부커를 통해, 500년 전 앤디의 동료였던 '꾸인'이 돌아왔고 이 모든건 최초의 불사자 '디스코드'의 음모라는걸 알게 되었다.

원자력 발전소를 점거한 디스코드와 꾸인을 막기위해 일행은 출동했고, 불사의 해제 조건을 알게 된 부커에 의해 앤디는 불사의 능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디스코드의 목표는 테러가 아니라 일행의 납치였고 앤디를 제외한 모든 일행은 납치되고 말았다. 

전편에 이어서 곧바로 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입니다. 

이번 편은 1편에서 제시된 ‘불사의 끝’이라는 설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1편에서 나일이 앤디와 격투 중 칼로 찌른 장면이 있었는데, 나일이 상처를 입힌 불사자는 그 힘을 잃는다는 설정이지요. 뒤이어 이를 알게된 부커가 의도적으로 나일에게 상처를 입고, 자신의 불사의 시간을 끝내며 앤디에게 불사의 힘을 돌려주는 전개로 무리 없이 이어지고요. 최초의 불사자인 디스코드가 힘을 되찾기 위해 나일을 이용하려 한다는 음모 역시 이 설정을 바탕으로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아무래도 불사자인 디스코드와 꾸인, 그리고 앤디 일행의 대결이라 전편보다는 "아인"스럽게 불사자들을 사로잡을 계획이 펼쳐지는 점도 볼거리입니다. 디스코드는 액체질소를 이용한 냉각 후 진공 포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더군요. 

하지만 이외에 건질건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영화가 독립된 이야기로 완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후반부는 다음 편을 예고하는 형태로 마무리되는 탓입니다. 하나의 작품으로서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설정의 일관성도 떨어집니다. 1편에서는 나일에게 찔린 앤디의 상처는 회복되었고, 불사의 힘을 잃은 시점은 그보다 훨씬 나중이었습니다. 반면 2편에서는 부커와 꾸인이 나일에게 찔리자마자 곧바로 힘을 잃습니다. 같은 조건임에도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디스코드가 나일을 이용해 힘을 되찾으려는 계획도 논리적 연결이 부족합니다. 불사의 힘을 잃게되는 당사자가 자발적으로 수락해야 이전된다는 설정인데, 앤디 일행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으니까요.

인물 간 감정선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꾸인의 분노와 앤디와의 관계 회복은 배우들의 연기에 의존할 뿐, 이야기 내에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부커가 죽음을 택하는 장면도 개연성이 약하고, 극적인 효과 외에는 큰 의미를 남기지 못합니다. 솔직히 개죽음이었습니다.

액션의 완성도도 낮은 편입니다. 여성들간 격투가 주로 벌어지는데, 아무래도 속도감과 임팩트가 부족합니다. 특히 꾸인과 앤디의 격투는 많이 실망스러웠어요. 여러모로 장르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설정을 이어가는 몇몇 장치는 흥미로웠지만, 전체적으로 완결된 이야기로 보기 어렵고, 후속편을 위한 연결에 그친 영화였습니다. 온전히 이 영화만으로 평가하는건 무리입니다. 3편은 어쩔 수 없이 보기야 보겠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네요. 샤를리즈 테론의 경력이 아깝습니다. 

2025/07/11

올드 가드 (2020) - 지나 프린스-바이스우드 : 별점 2점

앤디가 이끄는 용병단은 코플리의 의뢰를 받고 납치된 아이들을 구하러 갔다. 그러나 이는 함정이었다. 매복 중이던 군인들의 공격으로 전원이 사망했지만, 곧바로 되살아나 군인들을 전멸시키고 현장을 떠났다. 이들은 모두 고대부터 살아온 불사의 존재들이었고, 이들을 노리는건 제약회사 CEO 메릭이었다. 불사의 유전자를 이용한 생체 실험 및 신약 개발이 목표였다. 

한편, 새롭게 불사의 능력을 각성한 미 해병 나일이 등장했고, 앤디는 그녀를 데리고 프랑스에 있는 은신처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습격을 받아 조와 니키가 붙잡혔다. 조와 니키를 구하려는 과정에서 동료 부커가 배신했고, 앤디 또한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후 나일이 나서서 모두를 구해냈고, 앤디는 불사의 능력을 잃은 상태에서도 메릭을 처단하는 데 성공했다.

죽지 않는 불사의 존재들이 팀을 이뤄 현대 사회에서 은밀히 활동한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한 액션 판타지 영화입니다. 2020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작품이지요. 원작은 그레그 루카와 레안드로 페르난데스가 만든 그래픽 노블입니다.

영화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주연 배우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입니다. 고대부터 살아온 전사 안드로마케(앤디) 역을 맡아, 강인한 여성 캐릭터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의 퓨리오사를 떠올리게 하는데, 단순한 액션 연기뿐 아니라 오랜 시간 살아온 이의 내면까지도 설득력 있게 표현해냅니다. '미중년 액션물'의 여성 버젼에 그야말로 딱 들어맞는 외모와 연기였어요. 강한 중년 여성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시는 분들께는 이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야기도 익숙하지만, 생각보다는 안정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불사의 존재들이 정의를 실현한다’는 슈퍼히어로물의 틀에 현대 밀리터리물의 분위기를 결합한 형태인데, 과장된 판타지보다 현실적인 액션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고대부터 살아온 불멸의 전사가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정은 "하이랜더"를, 불사의 존재들이 현대 밀리터리 액션을 펼친다는 설정과 제약 회사의 생체 실험 설정은 "아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뤄낸 편입니다. 특히 이들이 수세기 동안 사람들을 구해왔고, 그 구한 사람들이 역사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식의 설정은 생각보다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작품이 항상 던지는, '불사의 존재가 세상에 남기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나름의 해답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전개도 빠른 편이라, 별 생각 없이 보기 좋은 팝콘 무비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이야기의 깊이나 감정선보다는 액션과 설정 위주로 흘러가며, 복잡한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라 부담 없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이야기 속 설정과 인물들의 행동 사이에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띕니다. 예를 들어, 나일은 초반에 사람을 죽이기 싫다며 작전 참여를 거부하지만, 이후에는 주저 없이 총을 쏘며 메릭 본사에 난입해 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이러한 심리 변화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개연성이 떨어집니다.
메릭의 사주를 받아 앤디 일행을 납치하는 주역인 코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가며 납치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앤디 일행의 일생을 조사하다가 그들의 사명을 깨달았다며 한편이 되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럴거라면 진작에 메릭의 손을 잡지 말았어야죠.
부커가 동료들을 배신하는 이유 역시 설득력이 약합니다. 죽고 싶어서 제약회사에 협조했다는 설정인데, 그럴 거라면 본인이 직접 연구 대상으로 나서면 될 일이지, 함께한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릴 이유는 없으니까요. 아들의 죽음을 동기의 배경으로 제시하지만, 오래전 일이라 그리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배신자를 용서할 수 없었던 동료들이 100년동안 만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장면도 이상해요. 자기들을 팔아넘긴 핵심 인물은 코플리는 바로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으니까요. 물론 부커와의 인연은 수백년 이어져왔기에 더 큰 배신감을 느꼈겠지만, 설명이 부족하기는 했습니다.

액션 장면의 완성도 역시 기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장면 구성이 다소 단조롭고, 최근 액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동선이나 창의적인 무기 활용도 부족한 편입니다. 샤를리즈 테론의 매력 외에는 팀 전체의 조화나 전략적 액션에서 오는 시너지는 크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적들이 불사의 존재들을 상대로 단순 총격으로만 대응하는 부분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취탄을 쓰건, 되살아나기 전까지 계속 죽이면서 포획하건, 생각해볼만한 작전이 많은데 너무 단순하게 들이받다가 죽어나가서 시시했고, 긴장감을 느끼기도 어려웠습니다.

불사 설정도 "아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더 설명이 있어야 했습니다. 목을 자르면 어디서부터 재생되는 걸까요? 산산이 부서지면 재생이 가능한걸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완성도 높은 액션 영화나 탄탄한 드라마를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 수 있지만, 큰 기대 없이 시간 보내기용으로는 그럭저럭 즐길만 합니다. 무겁지 않고 쉽게 볼 수 있는 넷플릭스 전용 영화로는 무난했어요.

그렇지만 이 정도 완성도의 영화가 넷플릭스 최대 히트작 중 하나라는걸 보니, 확실히 짧고 강렬한 자극에 주력하며 이야기가 점점 부실해지는게 트렌드인것 같습니다.

2025/07/06

그리고 유리코는 혼자가 되었다 - 기도 소타 / 부윤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문 유리가하라 고등학교에는 '유리코 님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유리코’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 중 마지막으로 남는 유리코는 ‘유리코 님’이라 불리며 학교에서 모든걸 뜻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마쓰자와 유리코’가 옥상에서 추락해 사망했고, 그 뒤 다른 유리코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나' 야사카 유리코는 자신도 이 전설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 속에서, 친구 미즈키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일본 작가 기도 소타의 데뷰작인 학원 미스터리입니다. 유서 깊은 명문 여학교 ‘유리가하라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괴담, 본격 추리, 인물 간 심리전이 어우러지는 작품입니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유리코 님 전설’이라는 설정입니다. 단순한 학교 괴담처럼 보이지만 '이름'이 주요 매개체로 결국 학교에 유리코는 딱 한 명만 남게 된다는 독특한 아이디어가 작품 속 사건들의 설득력을 높여주는 주요한 장치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설에 따른 일종의 초자연적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트릭이 사용되었으며,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돋보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 추락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마쓰자와 유리코가 떨어진 옥상은 밀실이었습니다. 최소한 범인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요. 미즈키는 불탄 교복과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항상 열려있다는걸 근거로 범인이 교복을 이어 로프를 만든 뒤 아래층 '흰 백합 모임' 방을 통해 탈출했다는 추리를 내 놓습니다. 탈출 후 방법을 숨기기 위해 교복을 불태웠던 겁니다.

이외에도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에 담긴 위화감을 단서로 삼아, 실제로는 그 일기가 1970년대에 쓰인 것이 아니라 1998년 이후에 작성되었으며 초대 유리코 님이 사실은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부분은 서술 트릭물의 묘미를 잘 살리고 있습니다. 일기 속 세세한 부분에서 드러나는 모순을 독자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잘 배치해 둔 덕분입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지는 과정도 논리적입니다. 흰 백합 모임 방 창문이 열려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인물이어야 하고, 해당 방의 열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유리코 님으로 변장할 수 있을 만큼 체구가 작아야 했다는 조건들을 하나씩 밝혀내며 결국 ‘유리 선배’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범인이 교복을 불태운 뒤 어떻게 옷을 챙겨입고 도주했는지도 이 추리를 통해 설명됩니다. 여자 교복 밑에 원래의 남자 교복을 입고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지요. 성정체성이 여성인 유리가 '유리코'들을 모두 죽이고 유리코 님이 되려고 했다는 동기도 유리코 님 전설 및 일기를 통한 서술 트릭과 잘 맞물려 있고요. 이를 학원제 연극 후 일종의 추리쇼처럼 밝히는 과정도 볼만 했으며, 다카미자와 선생이 과거 ‘초대 유리코 님’의 일기를 남긴 인물이며, 유리코 님 전설에 오랫동안 개입해 왔다는 반전 역시 꽤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핵심 트릭인 교복을 로프로 만들어 탈출했다는건 그리 좋은 트릭은 아닙니다. 유치할 뿐더러, 아래에서 로프 교복을 불태웠다고 깔끔하게 흔적이 사라졌다는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발상입니다. 옷이 옥상에 아무 흔적도 남지 않고 타버린다는건 현실적으로 보기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마쓰자와 유리코 사건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전반적으로 단순하며, 추리의 여지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는 문제도 큽니다. 범인이 범행에 성공한건 단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사건이 점점 확대되는데 학교나 경찰 차원의 진지한 대응이 없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최소한 '유리코' 들에 대한 보호는 진행했어야 해요.
다카미자와의 정체에 대한 반전까지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흑막으로 사건을 조종했다는 추리는 다소 억지스러웠고요.  

하지만 이런 단점은 사소합니다. 에필로그에 비교하면요. 에필로그에서 밝혀지는, 미즈키가 친구 야사카를 ‘유리코 님’으로 만들고 진짜 학교의 지배자가 되려 했다는 진상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입니다.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만 보이고, 빼어난 활약을 보였던 명탐정 미즈키 캐릭터와도 잘 어울리지 않는 탓입니다. 학교의 지배자가 된다고 해도 특별한 뭔가가 있는건 전혀 아닙니다. 게다가 미즈키는 유리가 유리코들을 살해하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어쩔 생각이었던걸까요? 직접 다른 유리코들을 죽였을까요? 왜 이런 비상식적인 에필로그를 집어넣어 이야기를 망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미즈키의 계획이 흰 백합 모임의 유리코 선배에게 간파당해 미즈키가 살해당한다는 결말도 엉망입니다. 차라리 미츠다 신조 스타일로 야사코 유리코가 인지를 벗어난 '유리코 님'으로 거듭나며 괴담이 진짜가 된다는 식의 결말이 더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기발한 설정, 본격 추리 요소는 매력적이었는데 에필로그가 다 말아먹었습니다. 에필로그만 없었어도 별점 2.5점은 줄 수 있었는데 조금은 아쉽습니다.

2025/07/05

미치도록 잡고 싶다 - 정락인 : 별점 3점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미제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범죄 전문 칼럼니스트로 잘 알려진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미제 사건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사건의 흐름은 물론 왜 지금까지 범인을 잡지 못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들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1년에 발생한 "'그놈 목소리' 이형호 군 유괴 살인 사건"의 경우, 저자는 이 사건이 장기 미제가 된 가장 큰 원인을 초동 수사 실패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사건 초기 세 번이나 범인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거든요. 첫 번째는 범인이 돈을 전달하려 할 때 접근했던 수상한 남성을 놓친 것이고, 두 번째는 경찰이 다른 장소에 잠복하느라 범인이 돈을 챙겨 유유히 사라지게 만든 점, 세 번째는 범인이 은행에 돈을 찾으러 왔지만 현장에서 놓친 경우입니다. 오늘날 CCTV 등의 수사 인프라를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논리적인 추리입니다. 앞서의 "그놈 목소리" 사건의 경우, 저자는 범인이 최소 세 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합니다. 범인의 언행, 범행 방식, 통화 기록 등을 종합한 분석이 그 근거입니다. 또한 사건의 최신 수사 현황도 책에 충실히 담겨 있습니다. 이형호 군의 외가 친척인 이 모 씨의 성문이 범인과 완벽하게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명확해 체포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언급됩니다. 그런데 만약 범인이 여럿이라면, 알리바이의 의미가 상대적으로 희석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지금이라도 체포해서 수사할 수는 없는지 독자로서 궁금해지네요. 
"남양주 아파트 밀실 살인사건"에서도 실제로 추리 소설의 소재로 활용될만한 추리가 선보입니다. 14층 피해자의 집까지 찾아가려면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엘리베이터 CCTV에 범인은 찍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면 마찬가지로 비디오폰에 촬영되고요. 그러나 두 카메라 모두에 범인이 찍히지 않았고, 아파트 문을 억지로 열지 않았으며, 범인이 화장실까지 이용했다는 점에서 범인은 피해자와 친분이 있는 아파트 내부자로,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는게 저자의 추리입니다. 현관 비디오폰 촬영은 노크를 해서 피했고요. 이 정도면 어느정도 범인을 특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만 책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대부분 워낙 유명한 사건들이라, 이미 방송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여러 차례 다뤄진 내용이 많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다가옵니다. '엽기토끼'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신정동 연쇄 납치 살인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평소 저자의 '사건 속으로'라는 이름의 칼럼을 꾸준히 읽어온 저에게는 책에 담긴 정보 중 상당 부분이 이미 접했던 것이었고요. 이런 점 때문에 새로운 정보나 미공개 기록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기대에 값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몇몇 사건은 설명이 부족합니다. "홍해 토막 살인 사건"은 남편의 혐의가 짙은 정도가 아니라 명백해 보이는데도 왜 체포하지 못하는지 모르겠거든요. 그리고 "김해, 부산 부녀자 연쇄 실종 사건"은 유력한 용의자가 있지만 사체를 찾지 못해 살인 혐의를 적용하지 못했다는데, 최근에는 '시체없는 살인 사건'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최신 판례와 수사 기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면 좋았을 겁니다.
미제 사건과 무관한, 저자의 기자로서의 활약과 소회를 담은 컬럼인 "정락인의 사건 추적"은 책의 성격과 많이 다른 탓에 차라리 추가되지 않는게 좋겠다 싶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미제 사건 자체의 흥미와 저자의 분석력은 충분히 인상적이었지만, 이미 알려진 사건 중심의 구성과 정보의 신선도 부족이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그래도 "완전범죄"보다는 깊이있는 정보가 많고, "표창원의 사건 추적"보다는 추리와 분석 측면으로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서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2025/07/04

더러운 돈에 손대지 마라 (2024) - 김민수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명득 형사와 이동혁 형사는 부패 경찰로 담당 구역에서 돈을 갈취해 왔다. 김명득 형사는 딸아이 수술비 마련을 위해서, 이동혁 형사는 도박에 빠져 거액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두 형사는 중국인 조직이 현금을 옮기는 정보를 우연히 입수했고, 김명득 형사는 이동혁 형사를 설득해 돈 강탈에 나서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이동혁 형사의 지인 박정훈 순경도 끌어들였다.

조직이 운반하던 돈은 손에 넣었지만, 총격전이 벌어져 중국인 조직원들과 박정훈 순경, 그리고 광수대 형사가 죽은 탓에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되었고, 두 부패 형사가 꾸민 일이라는게 중국 조직원과 광수대 팀장 모두에게 알려지고 마는데...

넷플릭스에서 한동안 1위를 하던 한국 영화입니다. 나름 기대감을 가지고 관람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눈에 띄었습니다. 거칠고 냉소적인 부패 형사 김명득 역을 맡은 정우는 외형과 분위기 모두 잘 어울렸고, 김대명은 자신의 선한 인상을 잘 살려서 조금 어리숙하면서도 적당히 타락한 이동혁을 입체감있게 그려냅니다. 

하지만 이야기와 연출은 모두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전개가 식상하고 허술한 탓이 큽니다. 중국 조직의 검은 돈을 노리는 부패 형사 컴비의 범죄 계획이 영화의 중심축인데 이를 위한 치밀한 두뇌 싸움이나 전략적인 모습은 거의 그려지지 못하거든요. 범죄 장면은 계획이라기보다 단순한 강탈에 가깝고, 그마저도 긴장감이나 디테일이 부족해서 장르적인 재미를 거의 느낄 수 없습니다. 이래서야 케이퍼 무비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건 수사 과정도 매우 단순합니다. 두 형사가 사건을 맡게 된 상황이라서, 조여오는 수사망 속에서 자기들의 범행을 숨기며 탈출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그런 부분은 전무한 탓입니다. 중국인 조직과 광수대가 두 형사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전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과 운에 의지할 뿐이니까요. 그래서 극적인 긴장감을 느낄 여지도 없습니다. 액션도 눈에 띄게 부족해서 범죄물에서 기대할만한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거의 없습니다.
광수대 팀장 오승찬도 이 돈을 노리고 있었다는 반전도 수많은 작품에서 반복되어온 장치라 신선함이 부족합니다. "범죄도시 2"와도 별로 다를게 없지요. 김명득이 오승찬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는 이유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고요.

클라이막스에서 돈을 숨겨둔 비닐하우스에 중국 조직과 사건의 흑막인 광수대 팀장이 모두 출동해 모두를 일망타진한다는 결말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뻔합니다. 특히 범행에 총이 사용되었음에도, 중국인 조직원들이 형사들에게 총이 있을거라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등 허술한 부분도 많고요. 김명득은 죽고, 살아남은 이동혁이 김명득의 딸을 데리고 호주로 가서 새 인생을 산다는 마무리도 별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김명득이 부패하게 된 이유가 아내와 딸의 병원비와 수술비 때문이라는 설정은 최악입니다. 신파적일 뿐 아니라 낡아 빠져서 21세기에 볼 만한 설정은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30여년 전 "투캅스"에서처럼 순수하게 '돈이 좋아서'라고 풀어내는게 더 그럴듯했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도, 인상적인 이야기 전개도 없었고, 전반적으로 구성이 허술해 아쉬움만 남습니다. 코로나 시기 촬영 완료 후 창고행이었다가 작년 극장 개봉하여 폭망했다고 알고 있는데, 창고행과 흥행 실패 모두 납득이 가는 졸작입니다.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