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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18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 - 예니체리 부대의 음모 - 제임스 굿윈 / 한은경 : 별점 3점

환관 탐정 미스터 야심 - 6점
제이슨 굿윈 지음, 한은경 옮김/비채

술탄 마흐무트 2세 치하의 19세기 중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광이 서서히 저물던 시기의 이스탄불에서 제국의 근대적 군대 신위병 장교 4명이 실종되었다. 군대 총사령관 세라스케르는 환관 야심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야심은 이외에도 궁정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수사도 맡는 등, 쉴틈없는 나날을 보냈다. 
신위병 장교 4명은 한명씩 살해된채 발견되었고, 수사를 진행하던 야심은 이 사건의 배후에 10년전 신위병이 끝장낸 구제국의 유물이었던 전투기계집단 "예니체리"가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서서히 사건의 흑막, 본질에 접근하는데....

'19세기 초-중반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무대로 환관 탐정이 활약하는 팩션'이라는 책 소개를 믿고 구입한 책입니다. 제가 추리 소설은 물론 역사물도 좋아하기도 하고, 역사 추리물은 항상 기본은 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그랬고요.

이 책의 장점으로는, 제일 먼저 19세기 초-중반의 이스탄불의 세밀한 묘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책 한권만 읽어도 당시 이스탄불 거리의 정경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수준이거든요. 당시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정치적 상황같은 국제 정세, 술탄과 귀족들, 거리나 지명과 같은 단순한 정보 이외에도 요리나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지는 등 그 깊이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이 모든건 작가가 원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 연구를 계속해 온 학자출신인 덕분입니다. 작가의 애정이 곳곳에서 느껴질만큼 제국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매력적이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추리 소설 역사에 없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환관탐정" 야심의 캐릭터 역시 독특한 맛이 넘칩니다. 성실하고 똑똑하며 요리 역시 뛰어나지만, 환관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는 환관탐정... 멋지지 않나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의 화끈한 친구인 망한 나라 폴란드의 전권대사 팔레브스키 역시 멋졌습니다. 이 친구가 주인공인 스핀오프격 외전이 나와도 재미있겠더라고요.

마지막으로는,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잘 몰랐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황제의 모후 발리데 술탄이라는 인물 같은 경우겠지요. 프랑스 출신의 미녀로 노예시장을 거쳐 술탄을 낳아, 결국 황태후의 자리에 이르르게 된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의 친구이기도 한 여인이라니.. 이 여자 이야기만으로도 소설이 한권이겠어요! 
번역도 깔끔한 편이라 쉽게 쉽게 읽을 수 있고, 책 뒤의 "예니체리" 부대에 대한 자세한 해설 등 책 만듬새도 좋아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소설이라는 측면 이외의 "추리"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술탄의 근대적 개혁 칙령 발표 직전에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중심으로 술탄의 모후인 발리데의 보석 도난 사건, 그리고 하렘에서 일어난 궁녀 교살 사건이라는 사건이 계속 벌어져서 사건 자체는 풍성하지만, 이 모든 사건이 연관되어 있지도 않을 뿐더러 야심의 추리에 의해 해결되는 것 역시 하나도 없습니다. 야심은 충실한 수사관이긴 하지만 그가 수집하여 독자와 공유하는 정보는 대부분 쓰잘데 없는 것들이고, 중요한 정보들은 너무나 작위적인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흑막인 마지막 반전 부분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대로라면 범인이자 흑막은 사건 자체를 일으키면 안되는 상황이거든요. 은밀하고 조용하게 거사를 진행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어처구니 사건을 벌인다니.... 설득력이 떨어져도 너무 떨어져요. 그리고 거사가 실패하는 결말 역시 별로 깔끔하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흑막자체가 너무나 어설펐다!" 라고나 할까요.... 
아울러 당대 오스만투르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어서 실제 역사와 실제 인물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세계의 판타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약점입니다. 실제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픽션인 "팩션"으로 읽히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웠습니다.

결론적으로, 전에 읽었던 "알렉산드로스의 음모" 과 유사합니다. 역사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역사물, 아니 "역사 모험물"에 더 가깝다는 점에서요. 야심부터가 이 작품에서 3번이나 죽을 뻔하고, 스스로도 격투로 사람을 잡고, 죽이고,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등 많은 모험이 담겨 있는데, 이럴 거라면 차라리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저 자신도 추리적인 부분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아서 더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래도 지루한 역사물로 끝나지 않고 많은 모험과 더불어 나름 추리적 요소가 담겨있는건 사실입니다. 당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매력을 아주아주 재미있게 독자에게 전달해 준다는 점도 분명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저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이국적인 매력에 푹 빠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추리 매니아로서는 실망한 점이 분명 있기 때문에 시리즈 작품이 더 있더라도 계속 읽어볼지는 심각하게 고민해봐야겠습니다....

2022/07/17

공주의 죽음 - 리전더 / 최해별 : 별점 2.5점

공주의 죽음 - 6점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프라하

오랫만에 읽어보는 미시사, 문화사 서적입니다. 이야기는 서기 6세기, 유목민족인 선비족 탁발씨가 건립했던 북위 왕조에서 일어났던 한 건의 형사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북위 난릉장공주와 그의 부마 유휘와 관련된 사건이지요.

유휘는 남방에서 도망 온 장군 유창의 손자입니다. 유창은 남조의 황족이었는데 궁정 내부의 권력 다툼에 연루되어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도망친 겁니다. 이 때 휘하의 군대, 많은 인력과 재물을 가져왔던 덕에 북위 조정의 봉작을 받았고요. 손자 유휘가 공주와 혼인할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난릉장공주와 유휘는 대략 서기 500년 전후, 즉 선무제 즉위 초기에 혼인을 하였는데 유씨의 투기로 둘의 관계가 멀어지자, 당시 섭정을 하고 있었던 영태후 유휘의 작위를 빼앗기로 결정하고 이혼을 명령했습니다. 두 사람이 더 이상 부부로 살 이유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이때는 그들이 결혼한 지 대략 10여 년이 흐른 뒤였고요. 그러나 일 년 후 아마도 공주의 청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한 환관과 당시 두 사람의 상황을 조사하고 보고했던 황족의 대신이 함께 영태후에게 공주와 유휘의 재결합을 건의하였습니다. 영태후는 공주의 본성이 바뀌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의 관계가 개선의 여지가 없음을 걱정하여 동의하지 않았지만, 환관과 대신이 여러 차례 건의하자 이를 거절할 수 없어 태후는 결국 그들의 재결합을 허락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친히 공주가 출궁하는 것을 배웅하며 앞으로 조심해서 행동하라고 그녀를 타일렀지요. 그리고 대략 519년을 전후하여 공주는 임신을 했습니다. 문제는 유휘는 평민인 장지수의 여동생 장비와 진경화의 여동생 진혜맹 등과 간통을 했다는 거지요. 공주는 끝내 참지 못하고 유휘와 다시 충돌했습니다. "위서" 기록에 따르면 이 때 분노에 찬 유휘가 공주를 밀어 침대 밑으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주는 다시 유휘에게 배를 차인 탓에 유산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곧바로 장씨, 진씨 남매 네 명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유휘는 도망쳤습니다. 조정은 모반대역죄에 상당하는 현상 액수를 내걸고 유휘를 잡으려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조정은 유휘와 용비, 혜맹 및 그들의 오빠들을 심판하고 처리해야 하는 문제로 한 차례 심각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황권을 옹호하고 공주를 보호하는 황족 세력(영태후)에 대항하여 한인 및 한화된 관료 집단이 가부장적 가족 윤리를 내세워 맞섰던 것이죠. 

이 책은 이 사건을 통해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 윤리의 역사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황족 세력의 주장은 공주 뱃 속 아이도 황족이니, 황족을 죽인 유휘는 모반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관료 집단의 리더인 상서삼공랑중 최찬은 이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자기 자식을 죽인 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어요. 당시 북위의 법률도 "조부모, 부모가 분노하여 병기나 칼로 자손을 죽이면 5년 형, 구타하여 죽이면 4년 형에 처한다" 고 되어있었고요. 

설령 공주의 신분이 아무리 존귀하여 일반 여성과 비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녀가 유휘에게 시집 온 이상, 그녀가 임신한 태아는 유휘의 혈육이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 예법에 따르면 여성은 일단 결혼을 하면 '가족정체성'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법률 역시 기혼 여성은 친정보다는 시댁을 '가족'으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고요. 유휘가 공주를 구타하여 유산에 이르게 한 이 사건에서도 공주는 이미 친정에서 시댁으로 가족정체성이 전환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친정사람의 죄로 연좌될 필요도 없고 친정 사람들도 그녀의 죄로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즉, 공주 뱃속의 태아는 황실의 구성원이 아니며 유휘의 혈육이며 유휘가 범한 죄 역시 대역죄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하늘이요, 남편은 처의 하늘"로 한 사람의 머리 위에 두 개의 하늘을 둘 수 없다면, 여성이 결혼하는 것은 곧 "하늘을 바꾸는 것", 즉 그녀가 지존으로 여겨야 하는 대상이 아버지에게서 남편으로 바뀌는 건 고대 예서의 뜻이라고 하네요.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전에 있었던, '출가외인' 사상하고도 일치하지요.

이 책은 이렇게 난릉 공주 사건에서 시작하여, 한과 당 사이 법률의 유가화(또는 유가 윤리의 법제화라 부를 수도 있겠다) 과정이 어떻게 되는지를 상세하게 안내해 줍니다. 단지 난릉 공주의 죽음과 같이 부부간 폭행 치사 뿐 아니라 간통죄에 대한 처벌, 사건 범인을 숨겨주는 문제, 죄인의 가족을 모두 처벌하는 '연좌'에 있어 법률 적용이 남, 녀 어떻게 달랐는지와 그 달라짐의 역사를 이러저런 사료를 바탕으로 하나씩 소개해 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심지어 구타와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 확인에 대해서 당시 어떤 식으로 조사가 이루어졌는지까지 알려줄 정도입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 난릉 공주 사건 외에도 이 당시가 얼마나 심한 부계화 사회였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동위의 대신 두원의 글이 있습니다. 두원은 "남편은 처의 하늘이고 아버지는 자녀의 하늘이다. 일단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이면 모자 두 사람의 하늘이 동시에 무너지는 것이다. 어머니가 이미 나의 하늘을 무너뜨렸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어머니로 여길 수 없으며, 반드시 그녀를 고발해야 한다. 반대로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했을 경우 '부존처비'와 '부존모비'에 근거해 자식된 이는 자기의 하늘을 고발할 수 없고, 이로써 자식이 아버지의 죄를 숨기는 것은 정상을 참작할 만하다."고 했다네요. 근거로는 의례, 상복의 원칙을 들고 있고요. 

하지만 아무리 '부계화'되었다 하더라도 단지 시집만 간다고 해서 시댁 사람이 되는건 아니라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예를 들어 동한 말기, 한 여성이 혼인 후 남편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 병역을 회피하여 도주했다고 연좌되어 잡혀왔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법상 동뢰와 묘견 등의 예를 아직 행하지 않았기에, 아직 남편 집안 사람이 아니라 하여 죄를 묻지 아니했다고 하네요. 부계 사회였음에도 간통 여성에 대해서 딱히 심하게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도 조금 의외였고요.

이러한 한인과 한화된 관료 집단의 유교적인 논리에 영태후가 맞설 수 있었던 이유도 잘 설명해 줍니다. 선비족은 "계책을 세울 때는 부인을 따르며 오직 전장에서만 스스로 결정한다”는 유품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여성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남쪽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그 활동력은 엄청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측천같은 다른 여성 통치자의 독특한 개혁과 영향력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되고요.

난릉 공주 사건 외 다른 이야기들이 조금 두서없이 소개되는 감은 없잖아 있고,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설명되지 않는 글들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발단이 된 사건도 재미있었을 뿐더러, 역사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남북조 시기의 사회와 문화, 법률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좋은 독서였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유휘는 붙잡혀 판결을 받기는 했지만 집행 전에 사면령이 내려져 목숨을 건졌습니다. 심지어 영태후가 권력을 잃고 효명제가 정권을 잡자, 다시 봉작을 받기까지 했다네요.

2017/08/05

삼국지를 읽다 - 여사면 / 정병윤 : 별점 2점

중국에서는 유명하다는 역사학자 여사면의 책입니다. 출간된지는 비교적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삼국지다시 읽기' 류의 컨텐츠로, 여러가지 삼국지 속 일화에 대해 실제 역사는 어땠는지를 다양한 사료를 통해 해석하여 소개해 줍니다.

간략하게 목차 순서대로 소개하자면, 우선 앞부분의 환관과 외척 항목에는 별다른 새로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환관이 원래는 직급이었다던가, 외척을 등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논파하는 정도만 눈길을 끌 정도에요. 딱히 삼국지 본편 이야기를 재해석하는 내용도 별로 없고요. 동탁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량병이 변란을 일으킨 것을 민족적, 문화적 문제로 해석하는데 딱히 기억에 남는 내용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 뒤부터는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이런 류의 책으로는 처음 접하는 '조조'라는 인물의 재 해석이 우선 눈에 띕니다. 익히 알고 있던대로의 '난세의 간웅'이 아니라 진정 한나라를 위했던 충신이었다는 해석이거든요. 한 왕실의 보위와 천하 평정에 대한 의지로 가득찬 영웅이었다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자신을 접대하려는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킨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사료를 통해 진궁은 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마의야말로 소인배라고 주장하고요.

그 외 인물, 사건, 전투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많습니다. 관우가 죽고 형주를 잃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유장을 서둘러 병합하려는 유비의 조급함 때문이었다는 해석이 대표적입니다. 유비가 유장을 공격하지 않고 부탁대로 장로를 공격했다면, 마초와 한수의 연합과 더불어 조조에게 큰 피해를 안길 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땅 욕심으로 결국 조조가 서량을 평정할 시간을 줘 버렸다는 해석입니다.
또 관우가 죽은 후 일으킨 전쟁은 1년 반이 지난 뒤 일으킨 것으로 감정에 북받혀 일으킨 전쟁이 아니라는 설명도 재미있어요. 조조를 치기에는 부족했지만, 형주를 다시 취하기에는 병력이 충분하다고 여겼던 탓이라고 해석하지요. 제갈량의 북벌 계획도 익주를 통한 관중 공격과 형주에서 남양을 거쳐 낙양을 공격하는 두 가지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해서 형주를 다시 손에 넣는 것은 촉나라 입장에서 필수였고요. 즉, 드라마틱하기는 하지만 '한 날 한 시에 죽기로 한' 약속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하기사, 한 나라의 황제로서 당연한 일이겠지만요.

위연에 대한 재해석도 재미있습니다. 상당한 능력자였는데 제갈량이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죽은 탓에 철군을 주장하던 양의, 비의 등에 의해 모함받아 죽게 되었다고 해석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근거 자료도 탄탄하게 제시합니다. 위연이 실제로 모반을 일으켰다면, 이를 제압한 양의가 중용되지 못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는게 대표적 근거입니다. 그러면서 만약이지만, 제갈량이 죽고 나서 위연이 군권을 장악했더라면 북벌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실제로 당시는 위나라에서 조씨와 사마씨가 분란을 일으킨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연 대신 군권을 잡은게 신중론자 장완과 비의였던 탓에 북벌을 시도하지 못했는데, 가정이지만 재미있는 생각이네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삼국지 재해석의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닙니다. 그냥 실제 역사에 대한 서술이 많아요. 또 삼국 당시 형세를 설명하면서 당시 지명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데 참고할만한 지도가 제대로 수록되지 않은 점도 아쉽고요. 마지막으로 번역도 좋은 편은 아닙니다. 문체를 살리려는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글만 읽으면 나이 드신 노교수님이 어렵게 설명하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유 출판사의 10년 대여 e-book 할인에 힘입어 읽게 되었지만 그나마의 값어치도 안됩니다. 삼국지의 광팬이 아니시라면 딱히 읽어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2013/09/19

전쟁의 재발견 - 김도균 : 별점 2점

전쟁의 재발견 - 4점
김도균 지음/추수밭(청림출판)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전쟁을 몇 개의 테마로 묶어서 엮은 전쟁-미시사 서적.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장. 세계사를 뒤흔든 천재적 조직술_ 군대의 재발견
전장에서 꽃피운 사랑―고대 그리스의 동성애 군대, ‘신성대’
수천 년 이어온 베트남 저항정신의 상징―고대 베트남의 여성 전사, 쯩 자매
오스만튀르크의 전성기를 구가한 ‘병정개미’―술탄의 친위대 예니체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를 향한 열망―미국 최초의 흑인 부대, 54연대
독일군의 밤잠을 설치게 한 ‘밤의 마녀들’―소련 여성 폭격기 연대
붉은 꼬리의 검은 조종사들―아주 특별한 흑인 비행대대, 터스키기 비행대
소련의 보이지 않는 사단―히틀러도 감쪽같이 속은 소련군의 동원 제도
일본의 피를 이어받아 미군을 위해 싸우다―일본계 2세로 편성된 미군의 442연대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죄?―소련의 죄수 부대, 형벌 대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귀신도 울고 가다―미국의 땅굴전 특수부대, ‘터널 래츠’
전사는 죽어서도 전사다―전사자의 여로
힘들고 지친 병사들의 로망, 핀업걸―전장의 엔터테인먼트

2장. 인류의 문명을 비약시킨 천재적 기술_ 무기의 재발견
세계 대변혁을 일으킨 작은 금속 조각―중세 봉건시대를 연 등자
스멀스멀 피어오른 노란 안개의 정체―영혼 없는 한 과학자의 비극과 독가스
대량 살상을 부른 속도에 대한 열정―보병을 참호 속으로 밀어 넣은 기관총
독일군의 오금을 저리게 한 철갑 괴물―지상전의 왕자, 전차의 탄생
‘크기’가 승패를 가른다―대함거포주의의 산물, 드레드노트
소리 없이 다가와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다―해전의 필살 병기, 어뢰
전쟁을 가장 비인도적으로 만든 주인공―숨은 살인자, 지뢰
무인 폭격기, 미사일의 공포―나치 독일의 보복 병기, V-1과 V-2
빗나간 열정이 만든 인류 최대 재앙―현대판 ‘다모클레스의 칼’, 원자폭탄
군견 칩스가 훈장을 빼앗긴 사연―주인을 사랑한 군견의 죄
금강산도 식후경?―군 사기와 직결된 전투 식량의 역사
전장에서는 죽음에도 순서가 있다―야전 의료 시스템의 역사
‘뽕’ 맞은 전사들―전쟁의 우울한 이면, 약물

3장. 극한의 상황에서 꽃피운 천재적 리더십_ 전투의 재발견
한니발, 세계 최강 로마군을 전멸시키다―포위 섬멸전의 교과서, 칸나에전투
포위한 군대가 포위당하다―카이사르의 알레시아 공방전
‘신의 도리깨’, 유럽을 내리치다―유럽인의 황색 공포, 레그니차전투
십자가와 코란, 역사적인 첫 대결을 펼치다―레판토 해전
영국군 역사상 가장 졸렬한 전쟁―무능하기 그지없는 지휘관과 발라클라바전투
아메리카 원주민 최후의 저항―완벽한 승리와 치졸한 복수, 리틀빅혼전투
역사상 가장 값비싼 따귀 한 대―일파만파의 교훈, 타넨베르크전투
외로운 섬을 지켜낸 영국인 ‘최고의 시간’―‘나치 팽창’의 마지막 방어선, 영국전투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승리하다―명절의 허를 찌른 베트남전 구정 공세

4장. 인간을 극한으로 몰고 간 천재적 심리술_ 군가의 재발견
켈트인의 아련한 독립의 꿈―〈스코틀랜드 더 브레이브〉
레드 코트, 줄루 전사들의 창을 꺾다―〈할렉의 사나이들〉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국가―〈라 마르세예즈〉
한 급진주의자의 죽음이 부른 거대한 전쟁―〈존 브라운의 시신〉
파리를 핏빛으로 물들인 코뮌의 슬픈 봄―〈체리가 익을 무렵〉
피어보지도 못한 칠레 민중의 혁명가요―〈벤세레모스〉
영광과 피투성이는 한 끗 차이―〈라이저 위에 피〉
그림자 전사들의 연가―〈발라드 오브 그린베레〉

이렇게 총 4장으로 구분되는데 1장, 2장, 4장이 괜찮았어요.

1장에서는 술탄의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의 흥망성쇠를 그린 이야기는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이,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흑인 부대였던 54연대를 다룬 이야기는 영화 "글로리 - 영광의 깃발"이 떠올라서 더 재미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소련의 형벌부대나 월남전의 미군 땅굴전 특수부대 터널 래츠 등이 인상적이었고요.

2장을 통해 고대 바이킹 전사 베르세르크의 종교 의식에 광대 버섯을 먹인 순록의 오줌이 사용되었다는걸 처음 알았네요. 광대 버섯의 암페타민이 축적되어 환각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는데, 중독자들이 들으면 꽤나 솔깃할 정보로 보입니다.

4장은 "군가"라는 주제부터 굉장히 이색적인데, 해당 군가가 발표된 시기와 이유를 상세하게 그리는 시도가 아주 좋았습니다. 노예해방론자인 광신자 브라운의 이야기를 다룬 "존 브라운의 시신",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의 최후를 그린 "벤세레모스" 등이 그중 마음에 들었고요. "군가"로 보기 힘든 노래가 함께 실려 있다는 점, 그리고 웨일즈의 군가를 다루면서 줄루 전쟁 이야기로 이어지는 "할렉의 사나이들"과 같이 군가와 실제 내용의 연관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가 있다는 약간의 단점은 있지만, 독특한 주제를 다루었기에 양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른 책에서 많이 접했던 유명 전쟁사 내용을 다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3장과 부실한 도판은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도판은 그렇잖아도 부실한데 한 장짜리 이미지를 4장으로 약간의 톤을 조절하여 복사하여 실어놓은 기이한 편집으로 실려 있어서 더 짜증났어요. 딱히 보기 좋은 것도 아니고 디자인적으로 뛰어난 것도 아닌, 그야말로 삽질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며 4장 하나만큼은 다른 곳에서 접하기 힘든 주제이지만, 전반적으로 자료적인 가치는 낮습니다. 내용이 지나치게 간략하고 요약되어 있으며, 도판이 부실한 탓입니다. 진지한 전쟁사를 원하시는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짤막하게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로 적당한 책입니다.

2014/05/06

사형집행인의 딸 - 올리퍼 푀치 / 김승욱 : 별점 3점

사형집행인의 딸 - 6점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문예출판사

18세기 독일을 무대로, 사형집행인이 마녀로 위심받아 화형당할 위기인 산파 마르타의 생명을 구한 뒤 마르타가 죽였다고 의심되는 고아들 사망 원인과 아이들 어깨에 있는 기이한 문양의 정체, 그리고 나병진료소를 파괴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힌다는 역사 추리 소설입니다. 상세한 시대 묘사, 독특한 직업의 탐정이 등장하는 역사 추리 소설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역사 추리 소설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장르입니다. 추리, 역사에 관련된 소재를 모두 좋아하며 그냥 독서가 아니라 뭔가 배우는 느낌이 드는게 좋거든요.
이러한 현학적인 재미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당시 시대상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필수인데, 이 작품은 기대에 충분히 값합니다. 사형집행인 야콥 퀴슬 및 조력자인 젊은 의사 지몬 프론비저 등 등장인물들은 물론 군인들, 짐마차꾼들과 같은 다양한 직업과 숀가우라는 도시 및 작품의 중요한 요소인 마녀 심문 (고문) 절차 등의 행정적 설정과 같은 모든 요소가 현실감있게 제대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이 중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야콥 퀴슬입니다. 전직 군인으로 고문에도 능한 사람 죽이는 명수가 실제로는 의사보다도 뛰어난 학식을 지닌 진짜배기 르네상스맨이라는 설정인데, 아주 독특하고 신선했습니다. 수많은 역사추리물을 읽어봤고, 실존 유명인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직업 - 고대 로마의 포도주 상인, 로마 장군, 수도사, 18세기 영국의 해결사, 터키 환관, 중국 판관 등 - 의 탐정들을 봤지만 사형집행인은 처음 접해보거든요. 단지 직업의 기발함으로 승부하는건 아닙니다. 디테일 역시 장난이 아니에요. 작가 올리퍼 푀치가 실제로 바바리아 주의 사형집행인 집안인 퀴슬가(家)의 후손이기에 가능했던 아이디어와 묘사라 생각됩니다. 덕분에 야콥 퀴슬이 지나치게 먼치킨으로 미화되었다는 단점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러나 다른 역사 추리소설과 동일한 단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추리 소설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복선이 정교하거나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거든요. 괜찮은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요. 그냥 특정 단계를 클리어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식의 전개가 대부분입니다. 비교적 초반부터 진짜 범인인 군인들이 드러나는 등 수수께끼 풀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습니다. 작위적이고 우연에 의지한 전개도 비교적 많고, 악마가 고아들의 은신처를 때맞춰 발견한 경위나 흑막의 정체 등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뜨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마녀의 표식이라는 것이 아이들끼리의 장난이었다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단서가 애들 장난이라니!

또 야콥 퀴슬이 중요한 정보를 항상 한박자 늦게 알아챈다는 전개도 너무 반복되어 식상하며, 결말부에서 법원서기가 모든걸 알고있었다!고 밝히는 장면은 정말로 불필요해 보였습니다. 덕분에 마르타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 동기가 죄다 사라져버린 탓입니다. 흑막을 알고 있었다면 깔끔하게 사건을 정리하는건 일도 아니었을텐데, 사건을 키운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잖아요? 한명 죽인다고 나병진료소나 군인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파괴와 살인이 계속되면 수습이 더욱 어려워질 것은 당연할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은 작가의 데뷰작이라는게 이유라 생각됩니다. 너무 쉽게 써 내려 갔어요.

아울러 야콥 퀴슬 외의 다른 캐릭터들이 주인공만큼의 존재감이 없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젊은 의사 지몬은 처음에는 힘의 야콥 - 지혜의 지몬으로 역할이 분배되나 싶었는데 내용에서는 야콥이 훨씬 뛰어난 학식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기에 별 쓸모가 없습니다. 위기와 문제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에요. 그나마 활약이라면 은신처에서 클라라와 조피를 구해낸 정도밖에 없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사형집행인의 딸 막달레나 역시 지몬과 야콥을 엮어주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고요. 미인에다가 나름 여러가지 능력을 갖춘 것으로 소개되지만, 정작 사건에 있어서는 후반부에서 군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식으로 민폐 역할에만 소비될 뿐입니다. 이래서야 제목이 왜 "사형집행인의 딸"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사형집행인"이거나 "사형집행인과 사윗감"이라면 모를까.

그래도 기본적인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해서 흥미롭고 쑥쑥 읽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독특함은 물론 마녀사냥이라는 당대의 소재를 잘 녹여낸 줄거리는 매력적이고 산파를 고문해서 자백을 받아내야 하는 시간제한이 존재하여 긴박함을 더하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역사추리물이 아니라 역사모험물이라고 하는게 더 어울리겠다 싶더군요. 악인은 모두 응분의 벌을 받고 주인공 일행은 모두 상응하는 보답을 받는다는 완벽한 권선징악 서사를 갖추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고 적나라한 고문과 처형 묘사가 관건인데, 이것만 조금 순화한다면 어린이용 모험소설이 될 수 있어 보입니다. 알렉산드르 뒤마나 쥘 베르느의 역사모험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