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미술사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미술사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19/10/13

사물들의 미술사 1 : 액자 - 이지은 : 별점 3.5점

사물들의 미술사 1 : 액자 - 8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부르조아의 유쾌한 사생활" 등의 빼어난 미술사, 미시사 저작물로 친숙한 이지은의 신작입니다. 제목 그대로 그림 보호, 장식용 테두리가 아닌 '액자' 그 자체에 집중하는 책으로 모두 여섯 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앞의 세가지 - 겐트 제단화,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 브와트 아 포트레 - 는 특정 작품이 주제이며, 뒤의 세 가지 - 19세기 액자, 반 고흐의 액자, 드가와 카몽도 - 에서는 각 시대별 액자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주제별로 소개해 주고요.

앞의 세 가지 이야기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정말로 '액자' 에 대한 고찰이라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루벤스가 루이 13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를 그린 작품의 경우, 발표 당시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마르 드 메디시스가 사는 뤽상부르 궁전의 특별한 갤러리에 전시되던 작품들이었다는건 조금 기억에 남기는 합니다.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는 이 작품들은 원래 의도대로 온전히 감상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거지요. 이런 작품들은 앞으로 VR을 활용하여 원래 의도대로의 감상이 가능하도록 구현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구현되면 구태여 책으로 읽을 내용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다 심도깊은 연구와 미술사학적 의미가 뒷받침되고 있는 뒷 부분 이야기가 더 좋았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그 액자는 그림과 동시에 태어나지 않았다"입니다. 19세기 박물관, 미술관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비로서 액자의 수요가 폭발하여 전형적인 액자가 생겨났다는 내용이지요. 우리가 보는 명화들의 액자는 모두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심지어 '모나리자'의 액자도 '모나리자' 제작 당시 통용되던 액자이기는 하지만, 다 빈치의 아틀리에를 떠났을 때 '모나리자'와 함께 했던 액자는 아닙니다. 미술사학적으로도 자료가 거의 없어서 연구가 어렵다고 하니 이런게 조연의 설움이겠지요.

그 다음 "반 고흐의 상상의 액자"는 반 고흐 생전 편지 기록을 토대로 반 고흐가 자신의 작품에 모두 특정한 액자를 고려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내용도 아주 흥미롭지만 반 고흐가 언급한대로 해당 작품을 가상의 액자 속에 넣어 보여주는 도판도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또 이를 통해 반 고흐가 얼마나 색채에 깊이 탐닉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액자와 그림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보색의 개념이 반 고흐가 작품에서 추구했던 색채의 효과들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지요. 왜 반 고흐가 '색채의 화가'라고 불리우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고흐의 작품 뿐 아니라 고흐가 이렇게 액자와의 관계를 연구하게 된 계기인 인상파 화가들의 액자들도 함께 소개되어 더욱 만족스럽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19세기의 전형이었던 장대한 액자가 아니라 흰색의, 그림과 비슷한 높낮이의 평평한 액자를 선택했다고 하네요. 기존 액자는 그림이 가상임을 알려주도록 도와주었다면, 인상파의 액자는 그림을 현실과 융화시키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침실" 등 다량의 제라늄 빨간색을 사용한 고흐의 작품들은 모두 빨간색이 다 날아가서 당대의 색채를 구현하지 못한다는데 이 부분에서도 앞서 말씀드린 현대 기술을 좀 빌려보는게 어떨까 싶었어요.

그러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모더니즘을 향한 한 걸음, 드가"는 재미있기는 한데 주제와는 조금 동떨어져서 아쉽습니다. 직접 액자를 디자인하며 액자에 집착했던 드가의 노력이 소개되기는 하는데, 핵심은 드가 작품을 주로 수집했던 거부 카몽도 백작 가문이 유대인이었기에 당했던 비극과 아이러니였던 탓입니다. 드가가 심각한 성차별주의자에 유대인을 미워했던, 인성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인물이라는걸 알게된 건 수확이지만, 좋은 책의 마무리를 담당하기에 적합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카몽도 백작이 온갖 차별과 서러움을 이겨내고 정신 승리를 위해 루브르에 자신의 컬렉션을 기부한 것도 별로 와 닿지 않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이야기는 5점을 주어도 충분하지만 다른 이야기들은 그 만큼은 아니라 조금씩 감점합니다. 그래도 작가 특유의 깊이있는, 발로 뛴 연구와 노력이 어우러진 수작입니다. '액자'에 대해 무언가 고민이라도 해 보았던 컨텐츠는 그동안 "갤러리 페이크"의 한 에피소드 밖에는 접해보지 못했는데 특정 작품이나마 이렇게 분석하고 고민한 결과를 접하니 너무나도 반갑네요.
액자 외 다른 인류 문명, 문화사의 조연들도 하루 빨리 조명받아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받게 되기를, 그리고 이지은 작가의 다음 작품도 지적 흥분과 재미 모두를 가져다 주는 책이기를 바랍니다.

2023/01/07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이소영 : 별점 3점

 

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 6점
이소영 지음/모요사

미술사를 바꾼 여러 가지 그림 도구 및 각종 계기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책. 모두 14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제목에서처럼 도구들이 설명되고 있지만 화가의 직업병을 다룬 '백내장' 같은 챕터와 같이 다른 분야도 폭넓게 소개해줍니다.
특히 이런 도구와 각종 계기들이 미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캔버스의 도입처럼요. 이동이 용이한 캔버스 덕분에 그림이 더 이상 교회와 건물에 붙박이 장식으로 활용되지 않고, 보다 폭넓게 유행하게 되었다니 대단한 혁신을 이룬 셈입니다. 나무 패널에서 캔버스로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르네상스 시기, 베네치아가 바다에 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했습니다. 습하고 소금기가 많은 대기는 프레스코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뿐더러, 베네치아에서는 나무는 배를 만들기 위한 중요 자재였기 때문이었다니까요. 그래서 해양강국답게, 돛을 만들던 기술을 활용한 캔버스가 대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캔버스의 질감을 그림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 소개도 좋았어요.
이런 캔버스만큼, 아니 더 큰 미술사의 혁명을 불러온 재료가 있는데 그건 바로 아크릴 물감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미술은 현실 세계에 없는 입체감 없는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라는 사조가 등장했는데 이는 경쾌하고 선명한 색감, 빠른 건조에 어디에나 그릴 수 있는 등의 장점을 갖춘 아크릴 물감의 등장으로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아크릴 물감 챕터에서는 이렇게 아크릴 물감이 현대 미술을 그야말로 '접수'한 신소재라는걸 여러가지 작가들의 작품들을 예를 들어가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기술과 결합된 현대미술의 큰 이바지를 한 빌리 클뤼버, 그리고 그가 주축이 된 창작집단 E.A.T 소개도 좋았습니다. 당연히 미술가들이 기계적인 작품을 혼자서 만들지 못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기술자들과 만나서 작업을 진행했는지는 몰랐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어떻게 서로 다른 두 분야 사람들이 만나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과물을 탄생시켰는지를 어느정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협의 기간이 오래 걸렸고, 심지어는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지 못할 때 다른 기술을 제시하여 전혀 다른 결과물을 창조해내는데 일조했던 작품도 있었다니 - 앤디 워홀의 <<은색 구름>> - 이 정도면 함께 창작을 진행한 동료라고 보아도 무방할것 같아요. 더 이상 기술의 도움없는 예술은 없는 시대이기도 하니까요.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습니다. 템페라화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템페라화는 유화가 유행한 뒤에는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초중반에 나름 인기를 끌었다고 하더군요. 약간 몽환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질감과 색감이 현대 미술의 어떤 분야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라나요. 게다가 21세기에는 공장에서 제조된 물감의 유해성이 알려지며 템페라 물감이 또다시 유행한다고 합니다. 자연친화적인 재료니까요. 또 달걀 노른자를 사용한 템페라처럼 부엌 재료들이 일찍이 물감 재료로 활용되었다는 내용도 재미있었어요. 렘브란트의 그림에 밀가루가 사용되었던 식인데, 확실히 화가들도 계속 연구와 고민을 계속하는 사람들이라는걸 잘 알려주는 일화가 아닐까 싶네요.
'종이'에서는 터너의 수채화의 독특한 질감과 효과는 모두 그가 사용했던 종이 덕분이었다는 내용을 알려줍니다. 종이에 상처를 낸 뒤 물을 붓고 거기에 물감을 떨어뜨려 무늬와 명암을 얻는 터너의 기법은 현재의 종이로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종이 원료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지 회사에서 전문가용으로 '터너풍 수채화 종이'를 개발해서 판매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팔레트'는 미술 도구로서의 팔레트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이상 팔레트는 필요없는 그림의 시대가 열리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화가들이 팔레트에 뿌린 물감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팔레트에는 대체로 열 개 정도의 물감만 쓰였고, 전통적인 팔레트는 혼색을 위해 사용되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은 혼색 대신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비비고 흩뿌려 작업했다고 합니다. 즉 인상주의의 탄생은 튜브형 물감의 도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는 팔레트도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튜브형 물감과 같은 합성 물감도 한 항목을 할애하여 설명해주는데, 일전에 다른 다른 책에서 읽었던 고흐의 독특한 노란색이 시간이 흐르며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백내장'은 독특하게도 화가들의 직업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 질환을 앓은 화가들이 많았다는데, 드가가 거의 완전 실명에 이르른 탓에 유화를 그리지 못해 파스텔화와 조각으로 작품 세계를 이어갔다는건 몰랐었습니다. 유별나게 인상파 화가들에게 백내장 등의 질병이 많았던건 여러가지 물감들에 포함된 납 성분, 야외에서의 작품 활동을 즐긴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 방식 등이 이유였겠지요. 이를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상파 화가 메리 커셋의 작품이 초기의 세밀하고 부드러웠던 그림에서 거친 파스텔 화로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백내장에 걸린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컴퓨터에서 재현하면 드가와 모네의 화풍과 비슷하다는 도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림과 미술사, 각종 재료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내용이 가득한 책입니다. 확실히 미술사 전문 출판사 모요사의 책 답게 재미와 가치를 동시에 잡고 있어요. 도판이 너무 작다는 점, 그리고 소개되는 모든 작품의 도판을 수록하고 있지 못한 점은 좀 아쉬우며, 전문가적인 이야기에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이 다소 많이 섞여 있는 것도 옥의 티라 할 수 있지만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2/03/19

기억의 의자 - 이지은 : 별점 3.5점

기억의 의자 - 8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이전에 <<액자>>를 읽고 꼭 구입하기로 했던 사물들의 미술사 두 번째 책. 제목대로 의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자는 제품 디자인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재라서, 의자 디자인에 대해 다룬 책은 저도 그동안 많이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역사 속 의미있는 의자에 대해 다룬 미술사 책이라기보다는, 특정 의자를 주제로 하여 그 의자가 있었을 때의 사회상을 조망하는 문화사에 가까운 책입니다. 의자의 디자인은 상세하게 소개되지만, 의자가 주인공은 아니에요.
책에서 의자와 함께 다루고 있는 시대는 다섯 개입니다. 첫 번째는 중세 시대입니다. 대성당의 의자 스탈의 안장을 접으면 나오는 미제리코드 조각으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설명해줍니다. 두 번째는 루이 14세의 옥좌에서 시작해서 '위대한 은공예품'과 당시 아유타와 왕국 사절단 이야기 등으로 루이 14세가 통치하던 17세기 후반 프랑스에 대해 알려주고요. 세 번째는 등받이가 없는 스툴 형식 의자 '타부레'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이 따로 있었다는, 이른바 '타부레' 권한을 통해 부르봉 왕조 시기 프랑스의 귀족 서열과 예법들을 상세하고 알기쉽게 설명해 줍니다. 네 번째는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의 주문으로 만드는 루이 들라누아의 의자 제작 과정으로 18세기 가구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고, 마지막은 전통적인 가구 제작 방식을 뛰어넘어 대량 생산으로 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만든 18세기 후반의 토머스 치펀데일에 대한 소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잘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도 많았고, 재미도 있어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요. 우선 '미제리코드'가 무엇인지는 처음 알았네요. 엄격한 종교 기반의 사회였지만, 대성당 안 의자 속 미제리코드는 통제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각이 가능했다는 것도요.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갑니다. 도판도 풍부해서 자유분방했던 당시 목수의 솜씨도 충분히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루이 14세 옥좌에서 시작되지만, 이는 '은'이라는 소재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게 특징입니다. 위대한 은제품과 왕의 권위 과시가 반드시 필요했던 시대를 다루기 위해서였지요. '위대한 은' 세공품들이 지금도 남아있더라면 아주 좋았을텐데요. 그래도 이런저런 도판과 기록을 통해서라도 이렇게 알게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도 '타부레'는 당시 왕실 서열과 예법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왕의 친척인 친왕들조차 함부로 의자에 앉지도 못했던 태양왕 루이 14세 시절의 베르사이유 궁전 모습이 아주 재미있더군요. 이를 둘러싸고 왕의 정부와 왕의 제수씨의 기싸움 등 세세한 볼거리가 가득했던 덕분입니다. 당시를 다루었던 수많은 컨텐츠들에서 미처 접하지 못했던 디테일이기도 했고요. 저자도 당시 그림에서 이 예법을 지키지 않은 등장인물을 알려주고 있는데, 저도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찾아보면서 고증을 되짚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절대 왕권의 대명사같은 루이 14세와는 사뭇 달랐던 루이 16세 시대에는 14세 때 만큼이나 엄격하지는 않았겠지만요.
네 번째 이야기는 폴란드 왕이 루이 들라누와에게 의자를 주문하는 과정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그 디테일이 압권입니다. 의자 디자인을 어떻게 고르는지와 같은 고객 입장에서의 디테일은 물론, 장인이 되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여러가지 비용들, 장인간 협력 관계 등 장인 입장에서의 정보들도 살뜰히 챙겨 알려주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모든게 실제 사료 기반이라는 것도 대단하고요.
마지막 치펀데일 이야기는 그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설명의 핵심은 치펀데일의 카탈로그였고요. 고객들은 조립식 가구 처럼 카탈로그를 보며 다양한 조합을 고를 수 있었고, 치펀데일도 유행하는 스타일을 모두 갖춰 제공했다는데 정말 시대를 앞서갔던 마케팅이었다고 생각되네요. 책에서 말해준 대로 18세기의 이케아였던 거지요.

이렇게 새롭고, 재미난 내용이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미제리코드 부분은 관련 사진 설명 뿐이라 좀 지루했습니다. 종교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지만, 그걸 입증할 근거도 애매했어요. 그렇게까지 도발적인 풍자가 많은 것도 아니었고요.
'의자' 보다는 관련된 역사, 문화적 배경을 고찰한다는 책 컨셉도 마음에 들고 재미있게 읽었지만, 의자는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도 약간 아쉬웠던 점이었어요. 두 번째 이야기는 의자를 억지로 엮은 느낌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책의 판형입니다. 작은 판형은 저자의 의도였다고는 합니다. 들고 다니기 편하고 쉽게 볼 수 있도록요. 그러나 도판이 너무 작게 들어가서 식별이 어렵다는 문제가 생겨버렸어요. 그림 속에 있는 의자를 설명하는 도판들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해당 부분만 확대해 주거나, 접이식으로 크게 삽입했어야 했습니다. 나름 비싼 책이고, 도판 수준도 우수한데 이런 세세한 고려가 뒷받침 되지 않은건 너무 아쉽네요.

그래도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문화사,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9/07/14

미술관에 간 화학자 1 - 전창림 : 별점 2점

미술관에 간 화학자 1 - 4점
전창림 지음/어바웃어북

화학 박사인 저자가 다양한 미술 작품에 사용된 화학에 대해 설명해주는 내용... 으로 알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초반부는 생각대로더군요. 특히 첫번째 장인 '마리아의 파란색 치마를 그린 물감'은 근거를 토대로 추리하는 맛까지 살아있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그리스도의 매장"은 미완성인데, 오른쪽 하단은 뭘 그리려고 했는지? 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내용이거든요.
저자는 성모 마리아를 그리려다 만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최후의 심판"에서처럼 성모 마리아의 치마는 울트라 마린으로 칠하려 했지만, 울트라 마린은 당시에 비싸고 귀한 재료라 칠하지 못했던 거라면서요. 그래서 더 싼 파란색 염료인 아주라이트로 막달라 마리아를 칠했는데, 아주라이트는 안정성이 떨어지는 탓에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어 칙칙해져 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매장"의 사진을 통해 막달라 마리아 옷 색은 칙칙한 갈색이라는걸 보여주며 마무리합니다.

유화의 성분 (불포화지방산)을 알려주며 유화가 어떻게 단단한 도막을 형성하는지를 알려주는 '유화를 탄생시킨 불포화지방산'도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항상 수백년 된 유화가 어떻게 이렇게 잘 보존되는지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풀렸거든요. 유화의 아마인유 (불포화지방산) 작용을 달걀노른자로 대신한 템페라, 석고 위에 수성 물감을 스미게 한 프레스코 모두 색감과 묘사에 있어 유화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에 유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설명도 좋았고요.

'화학에는 문외한이었던 천재 예술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주인공입니다. 세계적인 천재로 알려진 그가 화학에는 문외한이었던 탓에, 납이나 구리를 함유한 흰색이나 녹색과 황을 함유한 버밀리온이나 울트라마린을 함께 사용해서 두 물질이 반응을 일으켜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답니다. 그 외에도 화학을 몰라 저지른 실수가 많던데 미켈란젤로가 일찍 유화를 시작하지 않은게 전 인류의 손실인 듯 해서 많이 안타깝습니다.
이런 물감의 변화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게 '화학 반응으로 바뀐 그림의 제목' 입니다. 렘브란트의 "야경"은 원래 밤을 그린 어두운 그림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후 그림 보존을 위해 바니시를 발랐을 때의 실수, 그리고 납을 포함한 안료를 사용한 탓으로 그림이 검게 변한 겁니다. 이 안료는 황과 만나면 흑변하는데, 19세기 산업 혁명으로 도시 공해가 심해졌을 때 대기 중의 황산화물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렇게 납이 들어간 색 중 연백 (lead white)를 즐겨 사용한 화가 휘슬러는 납 중독으로 죽었다니 무섭기도 합니다.
연금술에 관련된 그림을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연금술의 죽음'은 과연 화학자가 썼구나 싶었습니다. "인을 발견한 연금술사"라는 잘 알지도 못했던 그림까지 찾아내어 소개하는 등 열정도 대단하고요.

화학 외에 미술에 대해 전문적으로 풀어낸 내용도 재미있는게 많았습니다.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 그림을 구석구석 상세하게 분석하여 어떤 사물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식의 설명이 특히 좋았어요. 이런 류의 설명은 '연금술의 죽음'에서 "프로크리스의 죽음", '밀랍과 수은'에서 "이카루스의 추락", 홀바인의 "대사들" 등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그림 설명도 설명인데 프랑스 혁명 당시 상황까지도 상세하게 알려주는 소개가 무척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인상파 작가들이 물감을 직접 섞으면 탁해지기 때문에 한정된 밝은 색 물감만 짧은 붓터치를 사용해서 사람의 눈에 섞여서 보이게끔 했다는게 아주아주 기억에 남습니다. 전혀 몰랐네요. 쇠라의 그림도 그렇다면 확실히 의미가 있겠지요. 실물을 꼭 한 번 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뒤로 갈 수록 화학, 과학보다는 점점 평범한 미술사 관련 책이 되어 버리는건 좀 아쉬웠습니다. 미술에 대한 설명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기대했던 내용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게다가 과학을 그림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억지스러운 것도 있습니다. 마티스의 그림과 색의 주기율 R.G.B를 연결시키는건 나쁘지는 않지만 딱 들어맞는다고 하기는 어려웠고, 마찬가지로 마티스의 그림이 색으로 입체를 표현했다는 설명도 그렇게 와 닿지 않습니다.
그 외에 인상파 관련된 글이 많은 점과 해부에 대한 그림, 과학 기기가 등장하는 그림에 챕터 하나를 할애하는 설명들도 앞 부분에 비하면 그닥이었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미술사 관련 서적으로 부족함은 없지만 기대한 내용은 아니라 감점합니다.화학 관련된 이야기가 더 많았어야 하니까요. 후속권이 있는 듯 한데 이대로라면 찾아서 읽어 볼 생각은 없습니다.

2012/04/19

수상한 미술관 - 이은 : 별점 2점

수상한 미술관 - 4점
이은 지음/노블마인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술평론가 김이오가 아내의 생명을 걸고 정체불명의 괴한과 미술 퀴즈 게임을 벌인다는 내용의 작품. 물만두님 리뷰집을 통해 정보를 접하고 읽게 되었네요.

전화로만 이루어지는 시간 제한이 있는 퀴즈. 어디서 많이 들어봤죠? 바로 "다이하드 3"의 판박이죠. 미술에 대한 퀴즈라는 점으로 차별화하고 있기는 한데, 차별화에 그다지 성공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다이하드 3"의 관객을 몰입시키는 퀴즈와 비교한다면, 순수한 미술 평론, 그것도 패러디라는 항목에 집중된 퀴즈들인 탓입니다. 퀴즈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의 반전, 그리고 진상은 어처구니가 없네요. 일단 범행과 전개에 대한 설득력이 전무합니다. 기껏 공들인 복수극으로 전개되다가 갑자기 명화 도난으로 이어지고, 진상은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위한 의적질이라니 참 뭐라 말해야 할지도 난감하네요. 이 작전이 국가를 상대하기에는 많이 부실해 보인다는 것도 큰 약점이고요. 김이오의 모든 것을 캔다면 충분히 흑막을 밝혀낼 수 있다 생각되거든요.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공정함"입니다. 추리 - 스릴러물이라면 최소한 독자와의 두뇌게임을 벌일 수 있는 전개에서 공정한 단서 제공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러한 부분이 없습니다. 어차피 다 짜놓은 것이라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초반부 김이오에 대한 심리 묘사와 전개는 모조리 연극, 또는 가공의 것이었다는 것인가요?
게다가 공정함을 가장하여 억지스럽게 수상한 범인 역을 등장시킨 선택은 최악이었어요. 우연히 마주친 한미라가 가명, 가짜 신분, 불륜남의 핸드폰이라는 요소들로 포장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작위적인 독자 기만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무런 설명이 없다가 뜬금없이 "진상은 사실 이러했다"는 식인데 저는 납득할 수 없었어요. 이래서야 "이런저런 사건이 발생하고 이런저런 위기가 닥쳤는데 눈을 떠보니 부왘 꿈이었지롱~" 하는 이야기하고 다를 게  없지요.

마지막으로, 전개 내내 패러디에 대한 궤변으로 독자를 설득시키는 이유가 결국 이 작품이 "다이하드 3"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패러디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는 점도 황당한 점이었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놓고 주장하는 패기에는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지적 아트 스릴러를 표방한 점, 그에 걸맞게 충실한 설명과 도판이 곁들여진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차라리 추리나 스릴러물보다 미술사 측면에서 패러디의 역사와 현재, 개념을 설명해주는 학습서로 만드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패러디에 대해서는 저도 많이 배운 것 같으니까요. 정통 추리 - 스릴러물을 기대하시면 안 되고, 그냥 독특한 미술 교양서적으로 접근하는 게 더 나은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2026/06/05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 - 최지혜 : 별점 2.5점

서울 종로구 행촌동에 있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지어진 서양식 주택 "딜쿠샤"의 역사와 복원 과정을 다룬 인문학, 미시사, 근대미술사 서적입니다.

책은 우선 "딜쿠샤"의 역사부터 짚습니다. 테일러 부부가 이 집을 지은 과정, 화재 이후 다시 보수한 과정, 그 뒤 누가 이 집에 살았고 누가 이곳에서 일했는지를 차례로 알려주거든요. "딜쿠샤"는 이른바 문화 주택 열풍의 출발점처럼 볼 수 있는 집으로, 이 집의 건축 과정 소개를 통해 당시 조선에 방갈로를 비롯한 서양식 주택이 어떻게 들어오고 퍼졌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책의 핵심인 복원 과정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당시 촬영된 사진을 기준으로 실내의 세부 요소를 하나씩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재현하는 과정이 자세하게 소개됩니다. 전등이 몇 개였는지 같은 고증은 물론, 복원에 필요한 물품을 어떻게 구입했는지, 구할 수 없는 물건은 어떻게 제작했는지도 설명됩니다. 이를 통해 복원이라는 일이 단순히 낡은 건물을 고치는 수준에 그치는게 아니라는걸 알 수 있습니다. 사진과 온갖 자료들을 조사하여 물건의 쓰임을 확인하고, 없어진 것은 다시 만드는 굉장히 치밀한 작업이더군요. 그 정성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어요.

그리고 복원 과정에서 구하거나 만든 여러 소품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좋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아래와 같습니다.

비연호는 코담뱃가루를 담는 작은 병입니다. 청나라 때부터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청에서는 담배는 금지했지만, 코로 흡입하는 코담배는 감기, 두통, 위장병 같은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약으로 허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코담뱃가루는 습기에 약했기 때문에, 공기에 덜 닿도록 입구가 작은 병을 만들었고요. 그 병이 비연호입니다.

딜쿠샤 벽난로 옆에 놓인 둥근 그릇은 히바치로 일본 전통 화로입니다. 나무, 도자기, 동으로 만들었는데, 특징이라면 난방용으로만 쓰인건 아니라는 점 입니다. 방 안에서 차나 국을 데우거나, 김을 굽고, 찰떡을 구워 먹고, 깨를 볶는 데에도 썼다고 하네요.

2층 거실 탁자는 상판과 다리까지 조각 장식으로 뒤덮여 있는데, 이건 일본의 닛코보리 탁자입니다. 닛코보리는 일본 닛코 지역의 공예품입니다. 1643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닛코의 도쇼구를 크게 고치면서 많은 조각 장인들이 모였고, 공사가 끝난 뒤 이들이 그 지역에 정착해 방문객을 대상으로 쟁반과 가구 같은 기념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유래라고 합니다.

서양인의 서양식 주택이지만, 당시 조선의 가구와 소품들도 갖추어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확실합니다. 조선의 돈궤를 서양인들이 캐시박스라고 불렀고, 우리나라 전통 가구 중 장은 분리되지 않지만 농은 층층이 분리되는걸 의미하며, 당시 서양인들에게 삼층장은 조선 가구의 대표였는데 1920~30년대 조선을 찾은 미국인들은 화려한 것을 좋아해서, 번쩍거리는 장식이 많이 붙은 삼층장을 선호했다는 등의 정보가 가득한 덕분입니다. 

이런 정보들과 함께하는 도판도 좋습니다. "딜쿠샤" 복원에 관련된 소품과 세부 디테일 사진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소품과 관련된 도판, 당시 분위기를 알려주는 사진도 충실합니다. 이런 책은 글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 사진 자료가 많아서 읽기 편했습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특히 문장이 아쉽습니다. 이런 저런 명언과 미학 이론을 들먹이며 이야기를 멋스럽게 쓰려는 표현이 많은 탓입니다. 책의 소재 자체가 이미 충분히 재미있는 만큼 오래된 사진을 보고, 사라진 물건을 찾고, 공간을 다시 만드는 과정만 담백하게 쓰는게 좋았을 것입니다. 괜히 문장을 꾸미려는 부분이 오히려 정보 전달을 방해한다고 느껴집니다.

또 다른 단점은 일부 정보의 근거가 약하다는 점입니다. 저자의 전문분야인 건축, 미술, 복원 외의 생활문화 부분은 다소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인들이 홍차를 좋아한 이유를 영국 물의 미네랄 함유량이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차 문화는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닙니다. 역사, 무역, 계급, 식민지, 기호품 소비 등 여러 요소가 얽혀 있으니까요. 이 책에서처럼 한, 두 페이지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2/05/25

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장우진 : 별점 2.5점

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6점
장우진 지음/미술문화

"아르누보" 그 자체였던 미술가 무하의 일생을 상세한 도판과 함께 설명하는 책. 일종의 전기이자 미술사, 미시사 책입니다. 무하에 대해서는 아르누보 예술가로 몇몇 포스터와 보석 디자인밖에는 몰랐었는데, 책이 예쁘게 생겨서 반쯤은 충동구매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건질 게 많더군요. 우선, 무하라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습니다. 장식미술가로서의 디테일한 작품과 일생에서부터 굉장한 애국자로 고국 체코에 대작 "슬라브 서사시"를 남기는 것이 평생의 목적이었다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도 수록된 도판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보아도 낡아 보이지 않는 섬세하고 세련된, 처음 보았을 때만큼의 시각적인 충격과 재미를 항상 가져다주는 무하의 작품은 물론이고, 당시 벨에포크 시대의 파리와 유럽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그림, 일러스트, 사진과 각종 자료들이 압도적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많이 실려 있거든요.

도판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인쇄와 편집도 훌륭하고요. 가격이 좀 비싼 감이 있기는 하나 아르누보, 아르누보 스타일 일러스트와 장식미술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20/03/13

앙코르와트 - 후지하라 사다오 / 임경택 : 별점 2.5점

앙코르와트 - 6점
후지하라 사다오 지음, 임경택 옮김/동아시아

주석, 인용, 참고 문헌 포함하여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앙코르와트의 '발견', '발굴', 그리고 '연구와 관리' 에 대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미시사 서적입니다.

방대한 분량만큼 담고 있는 정보는 알찹니다. 책은 19세기 후반, 앙코르와트의 문물을 프랑스에 소개한 들라포르트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일종의 보물 탐사와 같은 느낌으로 유적의 문물을 반출한 인물입니다. 식민지의 주인인 프랑스가 유적을 보호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 약탈꾼에 불과하지만, 앙코르 유적의 미적 가치가 높다는걸 서구 사회에 알린 공적은 있습니다. 직접 쓴 저서와 삽화는 물론, 평면도 등을 바탕으로 유적의 조화로운 구조를 잘 알린 덕분이지요. 또 발굴되거나 발견된 조각을 가지고 상상하여 그가 그려낸 바이욘 사원의 복원도는 공상에 불과하지만, 당시 고고학 수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연구였다는 점에서 노력만큼은 인정해 줄 만 해요. 만국 박람회에서 유적의 복제품을 전시하는 등 이 유적을 알리는데 온갖 수단과 방법을 전부 동원했다는 것도 그의 노력을 증명하는 사례이고요.

들라포르트 사후 소개되는 내용은 주로 '극동학원'의 활약상입니다. 앙코르 유적의 연구를 주도적으로 행한 단체로, 유적의 총 책임자가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이 된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이는 프랑스가 고고학을 인도차이나 반도의 과거를 소생시키고, 중국과의 정치적 교섭에 활용하기 위해서 활용했기 대문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할 때, 한반도와 중국 북부에 걸쳐 대규모의 고고학 조사를 진행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극동학원 초기 프랑스인의 태반은 고고학자도, 미술사가도, 학자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군인이나 관리와 건축가가 식민지 고고학에 매료되어 경력을 쌓아나갔다고 하는게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네요. 이 뒤로부터 세데스, 골루베프 등 주요 인물들과 반테아이 스레이 유적 등에 대한 연구 결과 등 극동 학원에 관련된 대한 수백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설명이 이어지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 이후, 일본이 잠시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했을 때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이어지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책에 따르면 극동학원의 연구는 묻혔던 유적을 새로이 발굴하고, 폐허를 보수하는 등 유적 보존 등에 나름 기여한 긍정적 결과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앙코르 유적에서 나온 유물을 관광객 등에게 공공연하게 판매하는 등의 도굴과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는 점에서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네요. 정치적 목적에 따른 상납이라던가, 일본과의 고미술품 교환을 통한 미술품 확보까지 행하였고, 심지어 유명 작가인 앙드레 말로조차도 1923년 23세의 나이로 인도차이나를 방문하여 유적에서 몰래 부조물을 잘라내어 밀반출하려다 실패했다는 일화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몰염치와 야만에 치가 떨릴 뿐입니다. 말로가 체포되어 재판에서 패소한 이유는 극동 학원의 독점적 지위를 훼손했기 때문일 뿐, 그 행위 자체가 비난받은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죠. 이런 비판적인 시각을 조선 등을 식민지로 지배하여 비슷한 원죄가 있는 일본의 학자가 견지하여 책을 썼다는게 조금은 신기했습니다.

이렇게 발견과 발굴,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들라포르트 이야기는 모험탐험 이야기와 별 다를게 없고, 연구를 거듭해가며 새로이 정체를 드러내는 앙코르 유적의 여러가지 정보들과 새롭게 발견된 멋진 유물들, 이들을 활용한 다양한 전시 등 볼거리가 많은 덕분이지요. 사료와 도판 역시 최고 수준이고요.

허나 제목만 보고 '앙코르와트'에 대한 역사서겠구나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책이었습니다. 저는 앙코르와트라는 유적 자체의 역사가 궁금해서 구입했지, 앙코르 유적의 연구사가 궁금해서 구입한건 아니란 말이죠. 35,000원에 육박하는 가격도 부담스럽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앙코르와트 연구사에 관심이 있으실 분들 외 저같이 앙코르와트 유적 자체에 관심 가지신 분들은 실망하실 가능성이 높다는 점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2022/04/10

오늘의 의자 - 이지은 : 별점 2.5점

오늘의 의자 - 6점
이지은 지음/모요사

사물들의 미술사 3권. 전 권에 이어 의자를 통한 당대 사회, 문화를 다루는 인문학 서적.

그러나 전 권보다는 의자가 주인공인 이야기들이 훨씬 많아서, 주로 의자 자체의 의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토네트 14번 의자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혁신적인 디자인과 설계, 생산 및 운송으로 대량 생산될 수 있었기 때문에, 당대 문화 아이콘이 될 수 있었다는 내용으로 산업이 유행과 문화를 이끌게 되었다는건 알려주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어지는 바실리 체어, 파이미오 암체어, 임스 플라스틱 체어는 각각 금속, 합판, 플라스틱으로 의자 재료가 진화해나갔던 과정이 중심입니다. 이 역시 기대했던대로, 의자를 통해 당대 문화와 사회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바실리 체어는 바우하우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디자인의 태동을, 임스 플라스틱 체어는 전후 대폭발한 미국 중산층의 삶과 플라스틱의 인기를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 중심에서는 빗겨나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명백히 의자였으니까요. 바실리 체어의 초기형 디자인이라던가, 임스가 공모전에 제출했었던 원형 임스 체어라던가 초기 모델에 대한 도판 등 몇몇 자료는 흥미로왔지만 책이 지향하는 바와는 좀 거리가 많았어요.

제가 기대했던, 의자보다는 그 의자가 등장했던 시대와 장소에 대한 설명이 더욱 상세한 이야기도 없지는 않습니다. 바그너의 포스트슈파르카세 의자 이야기처럼요. 이 이야기에서는 의자는 당시 최첨단, 모던의 상징이 되었던 소재들 중 하나에 불과한걸로 소개되며, 내용 거의 전부는 세기말 최첨단 유행의 도시였던 빈의 당시 분위기를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러웠어요. 명품 의자의 디자인적인, 그리고 디자인사에서의 의미를 다룬 책은 그동안 숱하게 읽어 왔던 탓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내용이 많지도 않았고요. 분류도 '역사'가 아니라 '디자인' 쪽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2010/07/22

아이거 빙벽 - 트레바니언 / 이수경 : 별점 2.5점

아이거 빙벽 - 6점 트레바니언 지음, 이수경 옮김/황금가지

동명 영화의 원작입니다. 영화는 아주 오래전 TV에서 재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및 주연을 맡았던 작품이었지요. 영화를 통해 진상과 핵심 반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손이 쉽게 가지 않았었는데, 작가 트레베니안이 이쪽 바닥에서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날짜별로 진행되는 이야기의 큰 줄기는 아래와 같습니다.
  1. 헴록에 대한 캐릭터 설명과 첫번째 타겟 살해
  2. 이후 손을 떼고자 한 헴록을 끌어들이기 위한 SS의 리더 드래곤의 음모 - 제마이아의 등장
  3. 결국 마지막이라는 조건으로 의뢰를 수락한 헴록은 등반 훈련을 위해 옛 친구 벤을 찾아감
  4. 벤의 등산학교에서 만난 옛 원수 마일즈에 대한 복수
  5. 암살을 위한 아이거 빙벽 등반 시작
  6. 등반 실패 이후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의뢰를 완수. 하지만 의외의 진상을 알게 됨
이렇게 "암살"을 다룬 암살 스릴러물입니다. "자칼의 날"이나 "피닉스"처럼요. 그러나 "자칼의 날"과 "피닉스"와의 차이점은 크게 두가지, 하나는 킬러의 캐릭터에 촛점을 맞추었다는 점과 또 하나는 정치적인 목적의 암살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 두가지 차이점 모두가 작품에 나쁜 영향만 끼친다는 것입니다.
특히 캐릭터가 문제입니다. 자칼이나 피닉스와 같이 정체불명의 암살자라면 모를까,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암살자인 비밀조직 CII의 부서 "수색-처형국" 소속의 요원 조나단 헴록은 남성들의 판타지를 집대성한, 상상 이상으로 유치한 캐릭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37세의 미술사 교수로 미술품 감정의 권위자이며, 학교에서도 최고 인기인데다가 다국어에 능통하고 유명한 산악인이기도 합니다. 별로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스쳐지나가는 여자들은 모두 그와 같이 자지 못해서 안달이고요. 게다가 헴록 스스로는 포르노배우하면 떼돈 벌 수 있는, 사정을 조절할 수 있는 절륜한 정력까지 가지고 있다고 하고요. 유치하기 그지 없지요.
또 암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아이거 빙벽 등반과 암살' 이 현실적이지 못해 당황스럽습니다. 조나단 헴록이 등산의 권위자라 등산대에 속한 타겟을 살해하기 쉽다는 것인데 어처구니를 상실한 설정입니다. 그냥 땅 위에 있을때 죽이면 되지... 다른 타겟들은 총으로 쏴서 잘만 죽이면서 이 타겟만 등산 중 사고사로 위장할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게다가 사건의 발단이 마일즈가 헴록에게 빚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설정은, 나중에 마일즈가 헴록 살해를 시도하는 모습으로 볼때 그냥 가서 죽이면 되는 것이여서 역시나 비합리적이고(스포일러이기 때문에 글자를 가립니다) 등산대원 중 타겟이 없고 타겟은 따로 있었다는 결말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등산대원이 전멸한 뒤 드래곤이 의뢰를 완수했다고 헴록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으로 볼 때 드래곤과 CII도 타겟이 누구인지 몰랐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애시당초 왜 암살을 의뢰하고 진행했는지도 모르겠거든요. 이래서야 원래의 목적인 "확실한 복수"를 상대편에게 인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한데 말이죠
이 정도로 문제가 심각한 탓에, 정치적 목적이 수반된 암살이 아니라 동-서 냉전 시대의 비밀 생화학 무기를 둘러싼 복수극이기에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것은 단점이라고 부를 수도 없네요.

그래도 초유명작가의 베스트셀러답게 건질만한 부분도 있긴 합니다. 과거 동료이자 원수인 마일즈에 대한 복수극은 괜찮았고, 아이거 빙벽 등반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정말이지 손에 땀을 쥐게 하거든요. 단지 이 묘사를 위하여 앞부분의 말도 안되는 설정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정말이지 힘이 팍팍 느껴지는 재미를 안겨다 줍니다. 방대한 자료조사도 돋보이는데 예를 들자면 "비박"이라는 용어가 '비부악'이라는 외래어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전 "대충 덮고 잔다" 라는 의미의 한자인줄 알고 있었어요...
마지막 반전도 뜬금없지만 계속된 복선으로 이어져온 단서를 통하여 밝혀지는 것이기에 과정만큼은 그런대로 괜찮았고요. 단 저는 영화를 먼저 봤기 때문에 반전을 이미 알고 있어서 썩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지만 말이죠.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릴러보다는 무협지에 가까운, 남성을 위한 전형적인 마초 판타지물입니다. 때문에 암살자가 등장하는 암살 스릴러물을 기대한 저로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기둥 줄기로 따지면, 1~3번 항목은 1.5점, 4번 3점, 5번 4점, 6번 3점 정도입니다. 평균내자면 별점은 2.5점이네요. 킬링타임용으로는 괜찮은 편이니, 간단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합니다. 빙벽 등반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는 더운 여름에 딱 맞는 작품이네요.
덧붙이자면, 영화가 훨씬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전에 본 것이라 확인을 위해서라도 영화를 한번 더 봐야겠습니다.

2012/10/03

토로스 & 토르소 - 크레이그 맥도널드 / 황규영 : 별점 2.5점

토로스 & 토르소 - 6점
크레이그 맥도널드 지음, 황규영 옮김/북폴리오

실제 인간을 토르소(torso, 목과 팔이 없는 조각 작품)처럼 만드는 엽기적인 살인극이 1935년부터 1961년까지 30여년의 긴 세월 동안 펼쳐진다. 이 살인극에는 인기 범죄소설 작가 헥터 라시터가 깊숙히 개입해 있는데...

국내 최대의 추리 애호가 커뮤니티 하우미의 이벤트를 통해 읽게 된 작품입니다.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먼저 감사 인사 드립니다.

범죄 소설가 헥터 라시터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 스릴러입니다. 크게 1935년 플로리다의 키웨스트, 1937년의 스페인, 1947년의 헐리우드, 1959년의 쿠바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단락별로 아직까지 육상에서의 중심기압 기록을 가지고 있는 1935년의 태풍 상륙, 1937년의 스페인에서의 프랑코에 대항한 내전, 1947년의 "블랙 달리아" 사건이라는 큰 실제 사건들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초현실주의 토르소 연쇄살인사건과 엮여서 진행됩니다.
굵직한 실제 사건들이 배경인데다가 헤밍웨이와 오손 웰즈, 리타 헤이워드 등 당대 실존인물들이 등장해서 한몫 단단히 하기 때문에 팩션 느낌도 강하게 전해줍니다. 이를 엄청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묘사로 그려내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들 정도였어요. 미술사적인 시점에서의 그림 묘사들도 디자인 전공자로 반가운 부분이었고요.

그러나 팩션적인 재미 외의 범죄 소설로의 재미는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블랙 달리아" 사건에서 작가가 상상한, 이른바 "초현실주의 연쇄 살인사건"의 설득력이 너무 떨어지는 탓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초반의 살인사건은 범인이 현장까지 엄청난 무게의 기계장치들을 옮기고, 나머지 잔해들을 처리하기 위해 굉장한 체력과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거라고 말하는데, 정작 방법은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건 너무 부실하죠.
게다가 "블랙 달리아" 사건은 팩션치고는 각색이 너무 심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쇼트가 배우를 꿈꾸는 화가 아르바이트였다니, 좀 지나쳤어요. 레이첼 - 알바의 1인 2역 트릭도 뻔해서 점수를 주기 힘들었고요.

마지막으로 엄청나게 많은 유명한 초현대미술 작품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도판이 거의 없는 책의 구성도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헥터 라시터의 활약도 문제입니다. 권총에 수류탄까지 휘두르는 잘나가는 베스트셀러 터프가이 작가라니, 이 자체가 초현실주의가 아닐까요? 또한 현대미술 작가들을 진보주의자에서 최소한 좌파(빨갱이?), 변태에 연쇄살인마 집단으로 묘사한 점과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된 것으로 보이는 헥터 라시터가 FBI의 끄나풀 역할도 하면서 이런 집단을 응징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 마초이즘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꼬시려고 협잡질도 마다하지 않는 헥터의 모습은 후반부 현대미술가들의 난교 파티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모습과 부합하지 않아서 어색했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귀경길에 한시간이나 비행기가 늦어지는 상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정도로 재미는 넘치지만 크라임 미스터리, 범죄소설로는 애매해서 감점합니다. 조금은 시대착오적인 터프가이 모험극 느낌도 강했고요. 그래도 읽는 재미 만큼은 확실한 만큼 킬링 타임용으로 추천합니다.

2019/06/30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 마틴 베일리 / 박찬원 : 별점 3점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 6점
마틴 베일리 지음, 박찬원 옮김/아트북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일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들의 탄생과 미술계에서의 위치, 그리고 현재 작품들의 상황이 어떠한지까지만을 집중해서 상세하게 알려주는 미술사, 미시사 서적입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는 유명하지만 그 작품들이 도대체 몇 점이나 되는지,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지, 그리고 작품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저 역시 비록 미술 대학을 졸업하여 디자인 쪽 업무를 하고 있지만, 창피하게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해바라기"라는 작품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주석 빼고 270여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거의 모두를 "해바라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책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생은 거의 비중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해바라기"를 창작하는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며, "해바라기" 창작 이후 자살까지는 몇 페이지로 끝날 뿐입니다.

그만큼 "해바라기"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단순히 정물화가 아니라 반 고흐가 굉장한 창작열과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그려냈고 본인 스스로도 살아 생전 엄청나게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해바라기"의 창작 과정에 고갱이 깊숙히 개입했다는 등이 그러합니다. 해바라기 연작의 창작과 그 과정에서의 고갱의 역할은 아래와 같습니다. 

  1. 당대 인기 작가였던 고갱이 "해바라기"의 초기작인 "해바라기 두송이"를 보고 작품에 매료되었다.
  2. 이를 계기로 고갱은 고흐의 초대를 받아들여 아를의 '노란집'에서 몇 달간의 공동 창작 진행을 약속한다.
  3. 고흐는 고갱을 위해서 '노란집'을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는 '데코라시옹' (장식 계획)을 세우고 무려 네 점의 해바라기를 순식간에 그려낸다. 즉, 이건 고갱을 환영하기 위한 장식 용도였던 셈입니다. 
  4. 둘의 관계는 파국에 이르지만 그래도 고갱이 "해바라기"를 탐낸 탓에 고흐는 원래의 작품을 자가 복제하여 두 점의 카피까지 그린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고흐가 고갱을 위해 그린"해바라기"는 모두 일곱 개가 됩니다. "해바라기 세 송이", "해바라기 여섯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 열네 송이 (카피)",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카피 1)",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카피 2)" 순이죠. 고갱이 없었다면 이렇게나 많은 해바라기가 그려지지는 않았을테니, 고갱이 큰 역할을 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책에 따르면 고흐를 그냥 미친 사람 취급했고, 고흐가 그에게 준 작품들은 그냥 돈으로만 본 것 같긴 하지만 최소한 작품 보는 눈 하나만큼은 확실했네요.

또 왜 이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지도 조금은 알 수 있었습니다. 당대에서는 그야말로 처음 보는 엄청나게 화려한 색깔과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라는데, 가끔 접하는 '광인들의 그림'을 보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당대 기준으로 보면 흑백 사진들 속에 혼자 컬러 사진이 놓여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까요? 게다가 사이즈도 높이가 90cm가 넘는 대작인데다가 임파스토라는 반 고흐 특유의 울퉁불퉁한 질감들도 이질적이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더해 주었을 테고요. 아, 이런 글을 읽을 때 마다 정말 당시 기준으로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금 반 고흐가 썼던 화려한 노란색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는데 당시 색깔로 감상한다면 그 충격은 훨씬 더할테니까요. 이런 점에서 디지털로 당시 색감을 구현한 이미지가 제공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흐가 죽은 직후부터 "해바라기"를 비롯한 작품들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입니다 그가 죽은 뒤 고작 10여년 뒤에 유명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작품을 구입할 정도였다니까요. 이러한 구매 과정을 거쳐 "해바라기" 들이 현재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후일담도 재미있습니다. 온갖 유명 인사들과 사건들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 때 히틀러와 괴링이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그래도 지금 다른 작품들은 전부 남아있어서 볼 수 있는데 딱 한 작품, "해바라기 여섯 송이"는 일본의 야마모토 코야타가 구매했지만 2차대전 공습으로 소실되었다니 아쉽습니다. "갤러리 페이크"에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죠. 버블 경제 시절 일본 야스다 보험사가 무려 2,500만 파운드 (한화 약 400억)나 지불하고 구입한 "해바라기 열 다섯송이 (카피)"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야기고요. 위작 논란까지 있었기에 솔직히 미친 가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작품 전시 관람 수익만해도 구입 가격 이상일 뿐 아니라 지금 가치는 천억이 넘는다니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또 거의 대부분의 작품을 동생 테오, 그리고 테오가 빈센트 사후 얼마 뒤 사망하여 미망인 요하나가 소장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해바라기"중 "해바라기 열다섯송이 (카피)"만 남기고 판 이유가 무엇인지는 궁금해지네요. 개인적으로는 카피의 경우, 지나치게 도식화되어 있는 느낌이라 오리지널이 더 나은데 그녀는 왜 카피를 남겼을까요? 단순히 개인 취향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걸까요? 굉장히 궁금하지 않나요? 이를 소재로 픽션이 하나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래도 그녀가 해바라기를 한 폭 남기고, 그 외 많은 작품들을 남겨서 그 덕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에 주요 작품들이 소장, 전시될 수 있었다니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다행인 셈이겠죠.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바라기"에 대해 모든 걸 알 수 있는, "해바라기" 바이블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책입니다. 책의 완성도도 높아요. 전체 풀컬러에 도판도 완벽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실되었다는 "해바라기 여섯 송이" 컬러 이미지가 첫 수록된 책이기도 하고요. 재미는 물론 천재와 미술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책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3/04/16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6. 비스크 인형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6. 비스크 인형
어두운 마을에서 마와리 가의 한 귀퉁이만 희미한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담벼락에 세워진 몇 개의 화환이 희미한 흰 그림자처럼 보였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몇 대의 차들.
문이 열리고, 검은 옷을 입은 일행이 역으로 향하는 길로 사라졌다. 토시오는 문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손에는 마사오의 긴 가방을 들고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고, 양쪽에 하얀 연등이 노란 빛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정면에 흰 나무 제단이 놓여 있고, 검은색 액자 속에는 토모히로의 얼굴이 있었다. 어제 마이코가 보여줬던 사진과는 느낌이 달랐다. 웃지 않는 토모히로는 흑백이라서 그런지 훨씬 더 우울해 보였다.
흰 천이 걸린 관 앞에서 스님이 경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뒷모습은 야위었지만, 목소리는 힘찼다.
"안녕하세요, 또 뵙게 되었군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마이코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옅은 색의 안경을 쓴 소우지였다. 마이코는 깜짝 놀란 듯이 소우지를 바라보았다.
"....당신, 누구죠?"
마이코는 생각하는 척했다.
"싫은데요. 벌써 잊어버리셨나요. 어제 만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요."
소우지는 마이코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제…….?"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보세요, 샹보르관 앞에서 나를 지나쳤잖아요."
마이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소우지는 토시오를 살짝 쳐다보았다,
"당신은 젊은 남자와 함께 있었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하지만 당신의 얼굴은 한 번 본다면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과 꼬 닮았으니까."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
어제 마이코를 본 소우지가 같은 말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실례지만, 당신의 얼굴은 내가 좋아하는 인형과 꼭 닮았어요.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나요?"
"아니요, 하지만 주모우라는 이름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어요. 인형이라고 하니까 기억이 났어요. 프랑스의 인형 제조사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이거 참 반갑네요. 내가 만난 여성 중 주모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에요"
"그런데 비스크 인형이 뭐지요?"
"19세기에는 고급 패션 인형이 활발하게 만들어졌어요. 비스크 인형은 주모우 사가 1840년대에 개발한 인형이에요. 인형의 목이 아름다운 도자기로 만들어졌지요. 라틴어로 비스는 두 번이라는 뜻이고, 큐이는 구운다는 뜻입니다. 즉, 두 번 구웠다는 뜻이죠. 고온으로 구운 초벌구이 목에 색을 입히고 다시 저온으로 구우면 지금까지 없던 아름다운 피부색이 만들어져요. 피에르 주모우의 인형은 모두 당신과 같은 매력적인 얼굴로 만들어졌어요."
"고마워요. 비스크 인형이군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피에르의 아들인 에밀 주모우는 인형의 기능적인 면에서도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용수철 장치로 인형이 움직여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마술을 부리기도 하죠. 오르골이 달린 것도 있고, 소리 내어 말하는 인형도 만들어졌어요. 저도 몇 점 가지고 있는데, 당신에게 보여드리고 싶군요."
"꼭 보고 싶네요."
"당시는 고체, 슈미트, 스테넬 등 인형 제작자들의 군웅할거 시대라 할 수 있는데, 나는 왜인지 주모우의 비스크 인형에 가장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자의 마음도 빼앗으려는 거겠지요."
소우지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토모히로와 아는 사이인가요?"
"아니요."
마이코는 토시오가 들고 있는 가방을 가리켰다.
"저거 마사오 씨의 가방 아닌가요?"
"네, 어제 마사오 씨를 차에 태워 드렸어요. 그 때 가방을 잊어버리셔서 가져다 드리러 왔어요."
소우지는 안경 너머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럼 당신들이 마사오 씨의 생명의 은인이었군요."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토모히로는 안타깝만, 마사오 씨가 경미한 부상으로 끝난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독경도 끝났을 테니 나중에 옆방으로 오세요."
"하지만 마사오 씨와는 어제 만났을 뿐입니다."
"사양하지 마세요. 방금 전에 회사 사람들이 방문했던 탓에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라, 마사오 씨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소우지는 토시오에게서 가방을 받아 들고 방으로 올라가 두 사람을 초대했다.
국화 생화 한 가운데에 마사오가 앉아 있었다. 원래의 하얀 얼굴은 상복의 검은색에 싸여서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가느다란 어깨는 그대로 슬픔의 선이었다.
마사오 옆에 작게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은 마사오의 어머니로 생각되었다. 눈빛이 마사오를 닮았다. 어제 대문 앞에 서서 마사오와 토모히로를 배웅하던 노파였다. 작은 무릎 위에는 낯익은 소년이 앉아 있었다. 도망치려 하는 아이를 노파는 계속 달래고 있었다.
마사오 앞에는 대머리 노인이 앉아 있었다. 토모히로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었다. 토시오는 마와리 데츠바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독수리 같은 눈빛과 한 줄로 굳게 다문 입이 굳은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데츠바는 쪼그리고 앉아서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다. 뚱뚱한 몸을 구겨 앉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데츠바 옆에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토시오는 이 여성의 존재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마이코의 입에서 단 한 번도 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는 스물다섯, 여섯 살, 빨간 머리, 입술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밝은 느낌의 미인이지만 검은색 옷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사오는 토시오의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마사오의 목소리는 토시오의 귀에 닿기도 전에 경을 읽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마이코는 두 손을 모아 염주를 쥐고 있었다. 토시오는 마이코를 옆에서 바라보며 향에 불을 붙였다.
소우지가 나와서 두 사람을 옆방으로 안내했다. 해바라기 공예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두 사람에게 차를 끓여주었다.
잠시 후 경을 읽는 소리가 끊겼다. 스님이 다른 방으로 간 것 같았다.
"잠깐만요, 마사오 씨"
소우지가 불렀다. 마사오가 방으로 들어오자 소우지는 가방을 내밀었다.
"이분들이 전해주셨어요. 고맙다는 말을 해야지."
마사오는 깜짝 놀라며 가방을 쳐다보았다.
"없어진 줄로만 알았어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토시오는 마사오의 눈빛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팔에서 떨어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서 제가 떼어낸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마사오는 가방을 소중히 받았다.
"내용물을 확인해보는게 좋겠어."
소우지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런 무례한 짓을..."
마사오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토시오는 무거운 공기로부터 벗어난 것 같았다.
"상처는? 아프지 않습니까?"
마사오는 고개를 돌려 반대편 뺨을 바라보았다. 뺨에는 검붉은 흉터가 남아있었다. 토시오는 상처의 흔적보다 구부러진 하얀 목덜미에 시선이 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다리는?"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걱정 끼쳐 드렸네요."
데츠바가 와서 앉자 소우지가 두 사람을 소개했다. 데츠바는 말없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이, 주모우.......실례지만,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군요."
마이코는 명함을 꺼냈다. 소우지는 마이코의 명함을 보고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넣었다.
데츠바 옆에 앉아있던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은 소우지의 여동생이었다. 소지는 마사오를 구해줬을 때의 토시오의 행동을 보고 온 듯이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녀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오리(香尾里)였다.
"카오리, 너도 그렇게 영웅에게 구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쥰키치가 알게 된다면 화내지 않을까?"
소우지가 말했다.
"오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세요."
카오리는 정말 화가 난 것 같았다.
"카오리는 쥰키치와 내년에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시마키 쥰키치 군은 해바라기 공예의 유능한 개발부원이랍니다."
카오리는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우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는 카오리의 손을 뿌리치고 테이블을 가로질러 걸어가더니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토우이치군, 엄마한테 혼날 거야. 또 이빨이 상할지도 몰라."
카오리가 말했다.
"정말 단 것을 좋아한다니까."
마사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소우지는 두 사람을 비교하며 말했다,
"아빠가 너무 엄격했던 것 같아. 본인이 단 것을 싫어했으니까. 아이는 금지하면 더 많이 먹고 싶어하는 법인데 말이지."
소우지의 비판적인 말투에 카오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아빠는 토우이치를 정말 귀여워 해 주었어요. 치과에 데리고 간 적도 있었죠."
마사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보니 양손 사이에는 하얀 손수건이 비벼져 있었다. 토우이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어머니의 슬픔을 감지한 듯 마사오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봉제 곰 인형을 들고 왔다.
"자, 토우짱, 이제 자러 가자. 곰 인형을 들고 ......"
"엄마, 부탁해요"
마사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토우이치를 맡기려 했다. 토우이치는 봉제 곰 인형을 내던졌다.
"오, 오랜만인데."
소우지는 곰을 집어 들었다.
"토우이치는 곰 인형을 가지고 자나요?"
"그게 없으면 잠을 잘 못 자요."
마사오가 말했다.
소우지가 계속 곰 인형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이상하네. 안 움직여."
곰의 목에 달린 스위치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움직이는 장난감이에요?"
마사오가 들여다보았다.
"마사오 씨는 장난감에 대해 잘 모르시나 봐요. 배터리가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배터리가 있다면 제대로 걸을 수 있을 텐데........"
소우지는 곰 인형의 등을 열어 보았다.
"야, 배터리가 없구나. 다음에 건전지를 사서 아저씨가 움직여 주도록 하지. 이 장난감은 누가 사 준거죠?"
"토모히로요."
소우지는 나쁜 말을 들은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토우이치는 소우지의 손에서 곰 인형을 빼앗았다. 마사오의 어머니는 그제서야 토우이치를 안고 방을 나갔다.
"항상 혼자 자요?" 
소우지가 물었다.
"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마사오는 토우이치의 흐트러진 옷깃을 고쳐주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좋은 습관이네."
"토모히로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소우지는 입을 다물었다. 마사오는 일부러 계속 토모히로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 같았다.
마침 옷을 갈아입은 스님이 검은색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남색 도포 차림의 스님은 바쁜 정치인 느낌으로, 말도 많았다. 어느새 자신이 젊은 시절 유학했던 유럽의 풍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형이 일찍 죽어서 가업을 잇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서양미술로 가문을 일으켰을 텐데 말이죠."
그는 물 한 잔을 마시며 말했다.
마사오가 부드럽게 토시오와 마이코의 곁으로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토모히로가 부탁한 것이 있었군요."
마이코 일행이 토모히로의 차를 뒤쫓고 있는 것을 택시 기사가 눈치챘던 모양이다.
"그래, 하지만 이제 끝났습니다."
마이코도 주변을 피하듯 말했다.
"비밀이었나요?"
"글쎄요......"
"저는 토모히로의 아내입니다. 그 조사 내용을 알려주시겠어요?"
마이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 거래할 회사의 신용조사였어요. 해바라기 공예에는 비밀로 해달라는 조건으로요."
"새로운 거래 ....... 그 조사는 끝났나요?"
"이제 보고서 작성만 남았어요."
"그 보고서를 저한테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에게? 읽고 어떻게 하실 건가요?"
"......토모히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남편이 당신한테 숨기고 있는 것이라도 있나요?"
"어제 러더퍼드 데이비스 씨에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토모히로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요."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격렬한 명령을 떠올렸다. 토모히로가 왜 있지도 않은 약속을 위해 마사오를 이용하려 했던 것일까?
"나는 최근 들어 토모히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어요. 나는 토모히로의…."
마사오는 말끝을 흐렸다. 스님이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았다. 소우지가 부탁한 택시가 아직 오지 않았다. 소우지는 택시 회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이코는 자신의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했다. 소우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미녀에게 호송을 받다니, 고마운 일이군."
스님이 말했다.
"그 대신에, 승차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 사고 현장에 있었던게 당신들이었나요?"
마이코와 스님이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절이 있는 곳은 데츠바의 집과 같은 오노와였다. 토시오는 처음 가는 오노와라는 곳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맞습니다. 순간적으로 폭발이 일어난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게 설마 운석일 줄은 몰랐네요."
"구약성경에 있잖아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큰 돌을 내려 원수를 죽였다는 말이요. 이 큰 돌이라는 것은 운석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운석비였다고 볼 수도 있을테고."
"운석비? 비처럼 운석이 떨어지는 게 있나요?"
"거대하고 부서지기 쉬운 성질의 운석은 지구 대기에 뛰어들면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운석비죠."
"거의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요?"
"아니, 얼마 전에도 보도된 적이 있었어요. 1976년 중국 동북부 길림성 지역에 떨어진 운석비는 그 범위가 무려 오백 평방킬로미터에 이르렀다고 하더군요. 수집된 운석은 백 개 이상, 최대 1,770Km의 운석이 떨어진 자리에는 직경 2m의 분화구가 생겼다고 합니다."
"도시에라도 떨어지면 대재앙을 피할 수 없었겠군요"
"떨어진 곳이 어디냐에 따라 다르겠죠. 하여튼, 토모히로 씨도 불운한 일을 당했어요."
"데츠바 씨도 낙담했을 것 같네요."
"글쎄요, 고집센 녀석답게 별로 티는 내지 않더군요. 물론 마음속으로는 그렇지야 않았겠지만….."
"그렇게 고집많은 분으로 보이지는 않던데요."
"당신은 처음 봤겠지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데츠바를 압니다. 꽤나 대단한 녀석이에요. 첫째, 그 나이가 되어도 의사에게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건강해서 그런게 아닐까요."
"그럴리가, 나야 건강하지만 데츠바는 얼마 전에 가벼운 뇌출혈로 쓰러진 적도 있어요."
"그런데도 병원에 가지 않으셨다고요?"
"아니, 그때는 갔죠. 그런데 약을 먹자마자 이번에는 혈압이 너무 내려가서 2주일 동안 머리가 아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온 의사를 돌려보내고 말았죠. 그런데 데츠바의 의사 혐오증은 이 때 시작된 것이 아니에요. 그의 아내가 죽은 이유가 의사의 오진 때문이었거든요. 장폐색을 잘못 진단했었지요. 데츠바의 동생 류키치, 그는 토모히로의 아버지인데, 류키치의 죽음도 의사 탓으로 믿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마사오 씨에게 혈압을 재도록 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가?"
“그녀는 원래 큰 종합병원의 간호사였어요. 혈압 강하제도 마사오 씨가 구해 온 것만 마십니다. 매일 아침 한 알씩, 캡슐에 든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사가 그런 식이에요. 그 고집스러움은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데츠바의 아버지는 어른스러운 분이셨지만…..."
"데츠바의 할아버지라고 하면 해바라기 공예를 만들었던 호도라는 분인가요?"
"맞아요. 호도씨는 내가 어렸을 때 두세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데츠바를 꼭 닮았어요. 다만 스케일은 더 컸지요. 메이지의 낭만도 가지고 있었고요. 어쨌든 저 이상한 나사 저택을 지은 사람이었으니까."
"나사 저택... 이름만 들어봤어요."
"마침 절로 가는 길에 나사 저택 앞을 지날 거예요. 한밤중의 나사 저택은 또 다른 묘한 분위기를 풍기죠."
"오싹한 건물인가요?"
"지금은 낡아서 그래요. 새 건물이었을 때는 묘하게 활기차고 유머러스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데츠바 씨는 지금도 그 집에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네, 아들 소우지, 딸 카오리와 함께요. 살기 불편할 것 같지만, 소우지는 일종의 호사가고, 카오리는 화가 지망생이니 그 집에 잘 어울립니다."
"언제쯤 지었습니까?"
"다이쇼 초기, 아직 서양 건축이 드물었던 시대. 정석적인 건축법에 맞지 않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화제가 되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슈발의 궁전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을 겁니다."
"슈발의 궁전?"
"프랑스 남부 드롬주 오트리브 마을에 세상에 보기 드문 건축물이 있습니다. 소문을 듣고 프랑스에 갔을 때 관람료를 내고 구경해 본 적이 있지요. 돌과 시멘트로 마구잡이로 만든 궁전입니다. 궁전이라고는 해도 인도 사원을 연상시키는 건물이 있는가 하면, 옆은 페르시아풍으로 되어 있기도 합니다. 벽면에는 여기저기 기괴한 짐승과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요. 마치 아이가 종이 한 장에 생각나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유자재로 성을 그려나간 것처럼 슈바르의 궁전에도 온갖 상상력이 쏟아 부어졌습니다. 단 한 사람의 손길 하나로요."
"단 한 사람의?"
"네, 우편배달부 페르디난트 슈발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돌을 주워와서 짓기 시작했고, 완성될 때까지 무려 34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네요."
"그러고 보니 조개껍데기를 주워다가 집을 지은 사람, 빈 병으로 건축을 한 사람 등의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한가하면 이상한 것을 만들고 싶어하는 동물입니다. 돈이 없어도 그러한데, 돈과 권력이 있으면 오죽하겠습니까. 엄청난 건물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다이묘들은 더욱더 큰 성을 짓고 싶어했지만, 절반은 도락이라고 할까, 취미라고 할까, 장난 같은 부분이 있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천수각과 같은 아름다움은 만들 수 없죠"
"아름다움 못지않게 기묘한 동물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장난감이었습니다. 고대로부터 신전이나 궁전에는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장치가 있었습니다. 크로커다로폴리스의 미궁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아니요."
"고대 이집트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미궁인데 열두 개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고, 삼천 개의 방이 있었다고 해요. 그 기술과 규모는 피라미드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미로였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궁전 안에는 여러 가지 큰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문을 열면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방. 한 발자국만 들어서면 강렬한 빛이 쏟아져 눈부시게 빛나는 방. 바닥이 파도처럼 움직이는 방……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은 이 미궁의 수수께끼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그 미궁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미궁에는 왕과 신성한 악어가 조용히 묻혀 있었습니다. 미궁이라고 하면 테세우스가 잠입했다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미궁도 유명하죠. 테세우스는 아름다운 아리아드네가 준 비단실을 풀면서 미궁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시심을 자극하지요. 아무래도, 미녀가 등장하니까요. 미녀는 어디에 곁들여도 좋지요"
"그건 그렇겠죠."
마이코는 여유롭게 웃었다.
"로마 시대에는 시빌의 신전이 유명한데요. 이 신전에 있는 제단에 불을 붙이면 저절로 안쪽의 성소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이 속임수는 잘 먹혔던 모양이에요. 후대에 이르러서는 여기저기서 같은 장치를 갖춘 신전이 만들어졌다니까요. 속임수를 모르는 신도들은 상당히 놀라고 두려워했다죠. 옛날에는 신기한 작용을 하는 사술이 곧 종교와 연결되곤 했습니다. 사실 이 장치는 이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에 달궈진 공기의 팽창하는 힘이 신전 문에 전달되는 것 뿐이니까요. 옛날 사람들은,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예컨데 자동문에는 조금도 놀라지 않는 사람이라도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스님이 장난을 치면 속아넘어가 버릴 겁니다."
"스님도 그런 수법을 사용한 적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그래서 가난합니다. 종교나 돈과 무관하게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이 즐기는 것은 사실 대단한 문화에요. 서양에는 취미로 하는 카라쿠리 집들이 즐비하게 있어요. 실제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일본 영사관이 카라쿠리 저택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집이란 살 수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어요. 사무실에는 책상과 전화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되면 스님 같은 건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스님은 큰 소리로 웃었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하면, 마와리의 나사 저택 정원에는 정교한 라비린토스가 만들어져 있답니다."
"미궁이라고요?"
"미로입니다."
토시오는 스님의 기상천외한, 초현실적인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호랑가시 나무 울타리로 만들어진 미로죠. 호랑가시 나무가 너무 빽빽하게 자라 있어서 건너편은 아예 보이지도 않습니다. 길은 한 사람이 편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인데, 여러 가지 막다른 골목이 만들어져 있어 쉽게 미로의 중심에 도달할 수 없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미로의 중심에는 뭐가 있는 건가요?"
"아무것도 없어요. 중앙은 다다미 10쪽 정도 넓이인데, 그냥 돌로 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에요. 이 미로를 만든 호도는 자주 미로 중앙에 앉아 명상에 잠기곤 했다고 합니다. 미로 안에서는 어떤 방해물도 들어오지 않으니 아주 좋았겠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미로 속을 돌아다니는 호도를 미치광이라고 불렀답니다. 일종의 루드비히 2세 같은 느낌인데 뭐, 서양식 미로는 지금도 드물겠죠."
"서양에서는 정원 안에 미로를 자주 만들지 않나요?"
"미로가 많이 만들어졌던 것은 바로크 시대였을 거예요. 미술사에서 말하는 매너리즘의 전성기였어요. 이상향 '유토피아'로서의 우주를 세련된 모습으로 창조하는 것을 중시했던 시대입니다. 정원에는 반드시 미로와 분수, 카라쿠리와 시계인형이 놓여졌어요. 지하에는 동굴을 파고 물장난으로 움직이는 동물 등을 모아 놓았고요. 17세기 프라하 궁정에는 전 세계의 기괴한 물건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 '스펙타클라 파라독스렘(Spectacula Paradoxa)'이 있었습니다. 황제 루돌프 2세는 알킨볼트라는 예술가를 마음에 들어하며, 그에게 기괴한 그림 '트롱프뢰유'를 그리게 하고, 여러 가지 기괴한 물건을 만들게 했습니다. 황제의 취미의 영향일까요? 17세기 프라하에는 연금술사, 수정술사, 예언가, 마술사, 점성술사, 주술사 등이 우글거렸다고 하네요. 코펠리우스의 모델이 된 기계공 코펠키, 골렘을 만든 레웨 베자렐도 이 시대 사람입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카라쿠리와 금발의 마녀와 같은 움직이는 인형을 제작한 트로이의 오르간 연주자 레잔도 이 시대 사람이었고요. 금발의 마녀는 훗날 존 팬리 경 살해 사건에서 신비한 역할을 맡게 됩니다."
길은 좁아지고 오르막길이었다. 오노는 언덕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 도시의 불빛은 멀리 눈 아래로 사라졌다.
"그 시대는 예술과 과학, 주술과 마법, 속임수, 사술이 혼돈의 미분화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어 헝가리의 켐페른 남작이 만들고 레겐스부르크의 기계학자 레오나르드 멜첼의 손에 의해 유명해진 자동 체스 기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계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인형을 움직이는 물건이었죠. 실제로는 속임수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당시 카라쿠리의 대부분은 이런 속임수를 많이 사용했던 것 같아요. 이는 에도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훈몽감초(訓蒙鑑草)”라는 마술의 수수께끼를 풀이한 책이 1730년에 간행되었는데, 기적적으로 현존하고 있어 당시의 마술을 알 수 있는데, 그 안에 천신기 승려의 차술이라는 속임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열 살 정도의 어린이를 차대 위에 올려놓고 입과 팔다리로 인형을 다양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죠. 중국인 인형 휘파람 불기 장치 속임수도 비슷한 속임수에요. 인형의 휘파람 관이 지하를 통해 대기실로 연결되어 있어서, 다른 사람이 이 관에 숨을 불어넣거나 목소리를 보낼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요. 그런데 66년이 지나 1796년에 출판된 “기교도휘(技巧図彙)”를 보면 그런 속임수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오직 기계적인 장치만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유명한 차 운반 인형을 비롯한 모든 카라쿠리는 지금도 복원이 가능합니다. 하여튼, 이 시기에 기술과 사술은 깨끗하게 분리된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멜첼의 자동 체스기사와 같은 다소 마술적이지만 매력 넘치는 아이디어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동 인형이 진지하게 '진지'해졌다는 것이군요."
"네. 옛날에는 연금술사들도 금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다른 물질을 어떻게 금으로 바꿀 수 있는지에 열중했던 것 같아요. 1780년대에 카리오스트로라는 이름의 연금술사의 실험은 많은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도가니 안에 구리와 마테리야프리마라는 비약을 넣고 봉인합니다. 무게는 정확하게 측정되고, 도가니는 교체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가니가 뜨거워진 뒤 봉인을 풀면 용해물 속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금이 나타났습니다. 다시 모든 무게를 재는데, 실험하기 전의 무게와 실험 후의 무게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고요."
"정말인가요?"
"지금 이대로 실험을 해도 학자라면 속아 넘어갈지도 모르지요. 학자는 마술사가 아니니까."
"그렇다면 속임수가 있는 거군요."
"그렇져. 카리오스트로는 처음에는 도가니를 갈아 끼우는 유치한 방법을 썼는데, 그것이 들통난 뒤, 이 방법을 고안해냈다고 합니다. 자랑할 만한 트릭이에요. 도가니의 바닥에 금을 깔았던 겁니다. 금 위에 아말감으로 만든 얇은 바닥을 만들어 덮었고요. 열을 가하면 저온에서도 녹는 성질이 있는 아말감이 녹으면서 밑에 숨겨져 있던 금이 ......"
그때 갑자기 좌회전하는 차가 앞을 가로막았다. 토시오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토시오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자 스님이 다시 말했다.
"어이쿠, 어디까지 말했더라?"
"나사 저택의 미로 이야기였어요."
마이코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스님의 이야기는 계속 탈선할 것이 뻔했다.
"그랬지. 그 미로는 좀 특이한 형태입니다. 이건 말씀드렸나요?"
"모양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미로는 정오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중앙에 놓여 있는 돌 테이블도 오각형인 거죠. 울타리로 만드는 형식은 햄튼코트의 미로에서 따온 것이겠지만, 역시 호도답게 똑같이 흉내내지 않았더라고요. 호도는 미로를 만들어내는 재미도 알고 있었던 거지요."
"햄튼코트의 미로라고 하면?"
"윌리엄 3세의 햄튼코트 궁전에 만들어진 미로를 말합니다. 이 미로는 부채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요. 나도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파란 눈을 가진 여자와 함께요."
"로맨틱하네요"
"그런데 관광객이 가득 차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죠. 관광객이 가득 차서 빙빙 돌고 있었거든요. 둘만 남게 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간 거지요.. 미로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미로에 들어가면 왼쪽으로 가고, 다음 두 갈림길은 모두 오른쪽으로, 그 다음에는 모두 왼쪽으로 꺾으면 미로의 중앙에 도착할 수 있는게 순서거든요. 미국에서는 1941년 미국 인디애나주의 하모니 미로가 복원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미로는 종교적인 교회 미로죠."
"재미로 만든게 아니라요?"
"애초에 인간의 참된 길과 죄악으로의 길이 뒤섞인 미로는 올바른 참된 길을 걷는 것의 어려움을 상징합니다. 아까 말한 크레타 섬 크노소스에 있는 미노스 왕의 미궁 안에는 소머리의 미노타우로스가 서식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전설 역시 석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종교적 동굴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 같아요. 산 하나를 깎아 만든 오부네의 대동굴도 지금까지 종교적 수행의 도장이 되고 있고요. 또한 로자몬드 궁전의 미로는 헨리 2세가 애첩 로자몬드를 왕비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사람에 따라 미로를 만든 동기도 다양하죠."
"마와리 호도의 경우는 어떨까요. 어떤 사람의 말에 따르면, 호도는 본질적으로 장난감 같은 것을 싫어했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그 사람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할 게 없지요. 벼락부자 시대에는 10엔짜리 지폐의 10을 1로 바꿔서 요정에서 1엔으로 썼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였으니...... 자, 나사 저택이 저기 보이네요."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길 왼쪽은 다소 가파른 경사면에 관목인 관목이 이어져 있다. 오른편 안쪽, 나무들 사이로 달빛에 비춰진 검푸른 덩어리가 보였다. 그  덩어리는 불규칙하게 늘어선 바위처럼 보였다. 토시오는 속도를 줄였다.
나사 저택은 생각보다 큰 건물이 아니었다. 보통으로 지었다면 평범한 2층짜리 양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설계자는 강렬하게 대칭을 기피한 것 같았다. 아메바를 닮은 비대칭 형태가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저 첨탑은 프랑스의 포 성을 모방한 것 같은데, 나사 저택의 탑은 오각형으로 되어 있네요."
탑이라기보다는 건물을 관통하는 창끝처럼 보였다. 건물 중앙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저택의 맞은편은 저지대여서 작지만 연못이 있어요. 바위 사이를 뚫고 물이 솟아나고 있다고 하는데, 크기에 비해 물의 양이 많습니다. 연못 건너편에 예의 오각형 미로가 만들어져 있어요."
물론 차 안에서는 연못도 미로도 볼 수 없었다. 저택 안에는 불빛 하나도 없다. 낡은 대문 기둥에 약한 불빛이 켜져 있을 뿐이다.
차는 곧 나사 저택을 지나쳤다.
5분 정도 더 가니 나사 저택 옆으로 오래된 절이 보였다.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어요."
스님이 마이코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크로커다일폴리스의 미로, 프라하의 궁정, 햄튼코트의 궁전, 나사 저택 ......
토시오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와 좁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눈에 띄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복서로서의 추억이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편함에 엽서가 들어 있었다. 에도 시게오(江藤重雄)가 보낸 것이었다. 토시오와 동일본 신인왕전에 출전하기 직전, 에도의 아버지가 사망했다. 에도는 이 소식을 듣고 슈젠지(修善寺)로 돌아간 뒤 체육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대로 생선가게의 가업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도는 토시오의 패배를 알고 있었다. 놀러 오세요. 엽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것을 읽은 토시오는 차가운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 같은 시각, 마사오의 아들 토우이치(透一)가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토시오는 이 사실을 다음 날이 될 때까지 알지 못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