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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30

위철리가의 여인 - 로스 맥도날드 / 이원경 : 별점 3점

위철리가의 여인 - 6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원경 옮김/시작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석유개발회사의 사장 호머 위철리는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뒤, 자신의 딸 피비가 실종된걸 알고 사립탐정 루 아처에게 딸을 찾아줄 것을 의뢰했다. 루 아처는 실종이 호머의 전처 캐서린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호머는 캐서린이 수사에 개입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이에 아처는 피비의 남자친구 보비, 캐서린 등을 차례로 만나 사건의 전모를 서서히 알아가는데...

대실 해밋, 레이몬드 챈들러와 함께 하드보일드의 삼두마차 중 한 명인 하드보일드의 서정시인 로스 맥도날드(왜 맥도널드가 아닐까요?)의 루 아처 시리즈 장편입니다. 이전에 다른 버전으로 여러 번 읽어보았던 작품입니다. 새로운 번역이 어떨까 궁금하여 읽어보게 되었네요. 마침 리뷰도 그동안은 남기지 않았었으니까요.

그런데 읽고 나니 좀 의외였습니다. 상당한 걸작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건이 쉽게 연결되고, 지나치게 작위적인 부분이 눈에 많이 뜨이는 탓입니다. 사건 수사도 일사천리로 진행되고요. 예를 들면 캐서린, 피비를 협박하던 협박범 메리먼을 알게 된 건 캐서린이 집을 내놓은 부동산 업자이기 때문이며, 그와 컴비를 이룬 악당 스탠리는 벤의 처남이자 캐서린-피비가 잠시 머문 아파트 옆집에 거주했다는 식입니다. 덕분에 빠르고 쉽게 전개되긴 하지만 정교한 느낌은 받기 힘듭니다. 등장인물들은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게임의 NPC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메리먼과 스탠리가 처음에 캐서린을 협박하게 된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단점도 크게 다가옵니다. 캐서린의 놀이 상대였을 수도 있다는 정도의 정보로는 부족했습니다.

또 제목의 "여인"의 원제가 복수인 women이 아니라 단수 woman이라는 점에서 강하게 시사하는, 위철리 가의 여인은 딱 한 명밖에 없다는 비교적 괜찮은 서술 트릭도 루 아처가 직접 그녀를 만나보았음에도 어색하거나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묘사 때문에 설득력이 많이 떨어집니다.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엄마와 딸인데 아무리 화장을 떡칠하고 피곤과 스트레스로 엉망이 되었다 하더라도 못 알아보았다? 루 아처의 직업적인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점 때문에 루 아처가 그렇게 뛰어난 탐정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동기 역시도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트레버의 마음가짐이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못한 탓이 큽니다. 무려 이십여 년을 참고 지냈을 뿐더러 나이도 먹고 병도 있다면 어떤 협박이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초월할 것 같은데 말이지요. 이 정도면 아예 자포자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랬다면 애초에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겠죠?

또 "소름"과 유사하다고 느껴진 점도 아쉽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소름"보다 먼저 발표된 작품이기는 하지만 '가족의 현재 위치를 뒤집는 설정'이 핵심이라는게 똑같으니까요. 그런데 "소름"만큼의 충격을 가져다주지 못해서 "소름" 대비 여러모로 2%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피비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칼 트레버였다던가 정도의 충격은 전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래도 평가절하하기는 어려운 고전이라는 것도 분명합니다. 순문학에 가까운 미려한 문체는 여전한 볼거리예요. 일어 중역본에서 느끼지 못했던 명문들도 가득하고 루 아처의 캐릭터도 명확하게 드러나는 편이니까요. 특히 "연민"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 루 아처의 심리 묘사를 통해 당대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개성도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일견 복잡해 보이지만 결국 순수한 욕망의 몸부림으로 시작해 살인으로 끝난다는 칼 트레버의 고백이 내용의 전부라는 심플한 구성도 마음에 듭니다. 대부분의 하드보일드가 그러하지만 "돈"보다는 "욕망"이라는 포인트가 괜찮았어요.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과 가진 것을 지켜야 하는 욕망이 교차하는 동기는 언제나 설득력 있기 마련이죠.
피비가 호머 위철리가 아니라 칼 트레버의 딸이었다는 반전도 캐서린이 죽으면서 남긴 다잉 메시지를 잘 설명해주면서도 칼 트레버가 왜 이렇게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여 고뇌하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고요. 주변 남성들을 모두 파멸로 몰고 가는 독특한 팜므파탈 캐서린 위철리의 존재감도 대단하며, 작품 내에서 단 한 번도 살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과거형으로 묘사하는 방식도 신기하고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시대를 초월한 걸작은 아니지만 하드보일드 거장의 솜씨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가작입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처럼 좋은 추억만을 간직할 것을 괜시레 다시 읽었다가 평점만 깎은 것 같아 내심 미안하기도 하군요. 제 올타임 베스트 중 한 편인 "소름"도 지금 다시 읽으면 별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드는데, 시간 나면 한번 뒤적여 봐야겠습니다.

2022/03/09

블랙 머니 - 로스 맥도날드 / 박미영 : 별점 2점

블랙 머니 - 4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내용, 진상, 범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촌 몬테비스타를 찾은 루 아처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로 수상쩍은 남자 프란시스 마텔의 조사에 착수했다. 피터의 약혼녀였던 지니가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다. 조사 결과, 마텔의 정체는 몬테비스타 테니스 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했던 가난뱅이 불법 체류자 펠릭스 세르반테스였다. 그는 7년 전, 지니 아버지 로이가 자살한 직후 파리 유학을 떠난 뒤 출세해서 첫 눈에 반했던 지니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유학은 라스베가스 도박사 케첨 (레오 스필먼)의 도움 덕분이었고, 마텔이 가지고 있던 현금 십만여달러 역시 레오 스필먼의 돈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과거를 더듬어 가는 와중에 지니의 어머니 마리에타, 마텔이 차례로 살해당하는데...

하드보일드 3대장 중 한 명인 로스 맥도날드의 루 아처 시리즈 장편. 제목의 블랙 머니는 라스베가스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레오 스필먼이 탈세로 빼돌린 돈을 의미합니다. 카지노에서 큰 돈을 잃은 사람들을 찾아가, 할인된 금액으로 수금을 하는 식으로 빼돌렸던 거지요.

거장의 작품답게 읽는 재미는 상당합니다. 별 것 아닌 듯한 의뢰가 점점 커져가고, 이 와중에 등장인물들이 서로 더럽게 얽히고 섥힌 관계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스릴러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완급 조절과 흥미를 돋우는 묘사와 전개로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솜씨가 빼어난 덕분입니다.

그러나 완성도는 그닥입니다.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등장하는 사건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풀어보지요.

  1. 7년 전, 레오 스필먼은 도박 빚 대신 딸을 상납하기로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로이 파블론을 구타했습니다.
  2. 혼절한 로이 파블론을 태블론 교수가 수영장 속에 밀어 넣어 살해했습니다.
  3. 펠릭스 세르반테스는 레오 스필먼을 협박해서 유학을 떠납니다.
  4. 펠릭스는 유학 후 프란시스 마텔이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한 뒤, 파나마 영사관에서 일하게 됩니다.
  5. 마텔은 영사관 직원 신분을 이용하여 레오 스필먼의 블랙머니 세탁을 돕습니다.
  6. 7년이 후, 레오 스필먼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프란시스 마텔은 모든 블랙머니를 들고 달아닙니다.
  7. 마텔은 몬테비스타를 찾아 첫 눈에 반했던 버지니아 (지니) 파블론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합니다.
  8. 지니는 태블론 교수와 불륜 관계로 단지 돈이 필요해서 마텔과 결혼했습니다. 곧바로 이혼하고 위자료를 챙길 셈이었고요.
여기까지가 이야기에서는 후반부에 드러나지만, 전체 시간 순서상으로는 사건의 도입부인 셈인데, 인간들이 서로 엮이게 된 동기가 명확하고 나름 말은 됩니다.

그런데 이 뒤, 현재 시점에서 벌어지게 되는 태블론의 범행들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순서대로 써 보자면,

  1. 지니는 마텔과 결혼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2. 이 때 마리에타는 지니로부터 남편 로이 죽음의 진상을 듣게 됩니다.
  3. 마리에타가 무언가 언급하려 하자, 태블론은 그녀를 살해합니다.
  4. 뒤이어 태블론은 마텔을 살해하고 돈을 갖고 도망칩니다.
인데, 우선 태블론은 마리에타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마리에타가 로이의 범행을 폭로할걸 우려했다? 마리에타도 지니에게서 이야기를 들은게 전부일 뿐입니다. 아무런 증거가 없어요. 경찰도 모두 자살이라고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몰락한 알콜중독자 아줌마의 하소연을 누가 제대로 귀담아 들어주었을리도 없습니다.

지니가 7년이 지나서야 태플론의 범행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은 까닭도 모르겠어요. 마텔로부터 진상을 들었다 한 들, 그걸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요. 마텔을 죽이고 현금을 가지고 도망친 이유 역시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텔이 블랙머니를 빼돌려 쫓기고 있었다는건 태블론이 알 턱이 없었으니 이를 위장해 살해한다는건 불가능했으니까요. 로이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마텔을 죽이고, 마리에타를 죽인 범죄를 마텔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였을 수 있긴 합니다. 문제는 그랬다면 마텔의 시체를 숨겼어야 했습니다. 지니의 도움을 받았으면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살인 하나를 덮기 위해 또다른 살인을 저지르고 바로 발각된다는건 바보나 할 범행이지요. 아울러 죄를 뒤집어 씌울 의도였다 한들, 마텔은 이미 지니와 결혼해서 집을 떠났으니 마리에타를 죽일 하등의 동기가 없습니다. 경찰을 속이기는 힘들었을 거에요. 차라리 지니와 함께 도피하기 위한 자금 마련 목적이었다면 말이 되었겠지만, 미적거리며 집에 머물고 있었으니 이 역시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

루 아처가 태블론이 진범이라는걸 깨닫는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추리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태블론이 베스와 결혼한 이야기를 들은 정도로 그가 지니와 깊은 관계였다는걸 깨닫기는 불가능한 까닭입니다. 게다가 지니도 단지 돈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했고, 베스는 루 아처를 노골적으로 유혹하며, 레오 스필먼은 남의 아내 키티를 빼앗아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고, 실베스터 의사의 아내 오드리는 로이 파블론과 불륜 관계인 등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문란하기 때문에, 이를 태블론만의 문제로 돌릴 이유도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전형적이라는 문제도 큽니다. 등장인물들이 너무 비밀을 숨긴 탓에 사건이 커져버린다는 뻔한 전개를 답습하는 탓입니다. 예컨데 지니가 태블론과의 관계만 일찍 밝혔어도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겠지요. 지니가 어머니가 살해된 이후에도 태블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건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어머니보다 태블론을 훨씬 더 사랑했다는걸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탓도 커요. 

탐정이 들쑤시고 다녀서, 모두에게 지옥문이 열렸다는 결말도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과 차이를 보이지 못합니다. 루 아처가 없었다면, 마텔의 죽음은 블랙 머니를 둘러 싼 악당들의 복수극으로 마무리 되었을 수도 있었을겁니다. 태블론은 10만 달러로 가정의 평화와 불륜을 이어갈 수 있었을테고요. 피터 제이머슨의 의뢰는 마텔의 죽음으로 끝난 상황이라서, 루 아처가 사건에 계속 개입할 명분도 없는데 왜 진실을 밝히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캐릭터 설정도 진부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남자들은 도박과 여자 때문에 파멸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미모 때문에 파멸한다는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지요. 미모를 제대로 활용한 여자가 단 한 명도 없다는건 조금 독특하기는 했지만요. 또 첫 사랑을 되찾기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거액을 모은 뒤 살해당하고 마는 프란시스 마텔은 "위대한 개츠비" 설정과 너무 똑같아서 더 실망스러웠습니다.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 따르면 하드보일드 범죄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는데, 이 작품만큼은 전통에만 기대고 있을 뿐 변화된 시대에 걸맞는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비교적 후기작인데, 확실히 초기작들보다는 많이 처지네요. 코엔 형제가 영화화한다고 몇 년 전 언급했던데, 영화 버젼이 차라리 더 기대가 됩니다. 무엇보다도 감독이 코엔 형제니 기본 이상은 해 줄거라 확신합니다.

2015/09/03

소름 - 로스 맥도널드 / 김명남 : 별점 4점

소름 - 8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김명남 옮김/엘릭시르

"소름" - 로스 맥도널드 / 강영길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삼대장의 한 명인 로스 맥도널드의 걸작입니다. 이미 십년도 더 전에 동서문화사 동서추리문고 출간본으로 읽어보았지만, 이번에 엘릭시르에서 재출간되었기에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별점 4.5점을 주었는데, 다시 읽어도 흥미롭더군요. 확실히 걸작은 걸작이에요. 범인과 진상을 알고 읽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색다른 재미가 느껴졌습니다. 루 아처가 단서를 하나씩 짚어나가며 20년 전과 10년 전 사건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사가 마지막에 어떻게 범인으로 연결되는지 더 집중하며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읽는 터라 단점도 제법 눈에 띄었습니다. 우선 범인이 피해자들에게 경고 전화를 하고 방문해 살해한다는 설정이 그렇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행위인데, 정작 이유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헬렌과 로라 서덜랜드에게만 한 것도 이상해요. 콘스탄스에게는 왜 하지 않았을까요?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이라 체포되기 딱 좋은 마지막 순간에 굳이 "내가 너 죽이러 갈게"라고 전화를 한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전화를 제외하더라도 범행이 지나치게 운에 의지한 부분이 많다는 약점도 있습니다. 헬렌 사건만 해도 루 아처가 그곳에 남아있지 않았던 건 우연이고, 저드슨 폴리가 조금만 빨리 방문했어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요.

또한 범인 티시가 로라 서덜랜드를 어느 시점에서든 살해했다면 사건은 사실상 거기서 끝입니다. 헬렌이 살아있었다면 진상을 폭로했을 것이고, 먼저 죽었다 하더라도 티시가 빠져나가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경찰 수사가 제대로 시작되면 로라 서덜랜드 살인 동기는 브래드쇼 부인에게 있다는 점이 밝혀졌을 테니 이야기는 끝이죠. 주요 용의자인 돌리, 맥기 모두 구류 상태였으니까요. 헬렌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맥기를 범인으로 몰기는 어려웠고, 아처가 수사기관에 저드슨에 대한 정보만 제공했어도 그를 옭아매어 헬렌이 누군가를 협박했음을 끌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여간, 사립탐정들은 공권력의 적이에요.
하여튼,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아처가 티시의 정체를 깨닫는 반전의 힘은 강하지만, 사건 해결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이미 사건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그 외에도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묘사나 설정이 분량을 제법 차지하는 점이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헬렌이 창녀와 다름없었다는 증언이 대표적입니다. 과거 사건으로 아버지에게 심한 말을 한 것도 그때뿐이었고, 결국 그녀가 로이 브래드쇼 협박범이 되었다는 점은 씁쓸합니다. 팜므파탈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닌 어정쩡한 포지션으로 캐릭터가 애매해지고 말았어요. 차라리 돌리처럼 어린 시절 겪었던 덜로니 사건의 트라우마를 간직한 인물로 설정하는 편이 더 좋았을겁니다.

마지막으로 덜로니 부인이 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산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로이 브래드쇼의 재산은 결국 부인의 재산이고, 합리적으로 재산이 이동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있었을 텐데 이를 전혀 모를 수는 없지요. 또 사건을 덮기 위해 능력을 동원한 덜로니 부인이 동생 티시의 사망증명서를 미리 떼어놓은 것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덜로니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었으니 조작할 이유가 없고, 오히려 사망증명서는 재혼을 계획하는 로이 브래드쇼에게만 좋은 일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쓰다 보니 단점만 잔뜩 언급하게 되었지만, 걸작인 것은 분명합니다. 서정적이면서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다는 점에서는 독보적입니다. 맥기를 감옥의 무게에 짓눌린 성자로 묘사한다든가, 협박범에 불과한 헬렌에 대해 가엾음을 느끼는 아처의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남자는 첫 결혼에 신중해야 하고, 여자가 더 빨리 늙는다는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기게 해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단지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는 정도입니다.

언제 읽어도 여전한 흥분과 재미를 주는, 제 All-time best 10에 늘 포함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 아직 읽지 않으신 분은 꼭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번역도 좋습니다.

2004/11/26

지하인간 - 로스 맥도널드 / 강영길 : 별점 3점

지하인간 - 8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루 아처는 우연히 6살짜리 소년 로니를 알게 된다. 로니의 부모는 이혼 직전으로 로니의 아버지 스탠리 브로더스트는 아들과 미인 여대생 수전 크란돌을 대리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브로더스트의 산장으로 여행을 떠난다.
산장 근처에서 산불이 나자, 로니의 어머니 진은 루 아처에게 로니를 데려와 줄 것을 의뢰하지만 산장 근처에서 스탠리의 시체가 발견된다. 스탠리가 평소 15년전에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아버지 리오의 행방을 쫓고 있었다는 것과 이 아버지의 행방이 사건의 중요한 단서가 됨을 깨달은 아처는 로니와 함께 사라진 수전의 행방을 뒤쫓으며 사건의 과거를 파고들어 진상을 알게 된다.


국내에 출간된 루 아처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말년인 1971년에 발표된 작품. 발표 당시의 평도 무척 좋았죠. 그동안 계속 벼르다가 형이 생일선물로 구입해 주어서 이제야 읽게 되었네요. 아래와 같은 전형적인 패턴의 루 아처 시리즈입니다.

루 아처 패턴 :
1. 우연히 루 아처가 사소해 보이는 사건을 의뢰받는다.
2. 루 아처가 사건 조사 중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3. 관계자들을 조사하니 서로 복잡한 과거의 사건에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4. 결국 진실이 밝혀지며 관계자 반 정도는 죽거나 다친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여성들이 약하고 보호를 원할 뿐더러 원치않는 사건에 휩쓸려 자신을 잃게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연민을 표현하는 특유의 여성관과 정신 분석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 역시도 시리즈 다른 작품들과 유사했고요.
또 루 아처 시리즈의 장점인 인간의 야비하고 무서운 속성에서 발생하는 비극을 스릴과 서스펜스 속에 잘 녹이고, 사건 자체에 대한 진상과 맥락을 치밀하게 정리하여 나름의 추리적인 만족감을 전해주는 점도 잘 살아 있습니다. 얼핏 보면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살인사건과 등장 인물들간의 연관성이 과거의 '한 사건'에 맞춰지며 그에 따라 모든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복선을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죠. 항상 가정은 파탄나고 결딴다는 루 아처 시리즈 중에서는 유별나게도 나름의 안정(?)을 찾는 크란돌 가족이 그려지는 것은 좀 이색적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아미스테드 부부와 제리 킬패트릭 같이 이야기 전개에 별 도움 안되는 불필요한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이 등장해서 혼란스럽다는 점과 단서보다 정황에 의한 추리가 많다는 약점까지 전작과 비슷한 것은 좀 아쉽네요. 보다 단순화해도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미국 사회에 있는 일종의 정신적 공황과 부도덕, 범죄를 추리소설로 묘사하며 나름의 문학적 수준까지 끌어올린 루 아처 시리즈는 평균 이상의 재미를 항상 보장하는, 언제 읽어도 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PS : 비슷한 풍의 제임스 옐로이의 하드보일드와 비교하면 이 당시만 해도 참 순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무서워지기까지 합니다.......

2004/09/22

움직이는 표적 - 로스 맥도널드 / 이가형 : 별점 3.5점

움직이는 표적 - 8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이가형 옮김/해문출판사

루 아처는 백만장자 랠프 샘프슨 실종 사건 의뢰를 받았다. 단서는 랠프의 양복 주머니에 들어있는 여배우의 사진 한 장 뿐이었다. 루 아처는 사진 속 여배우 페이에게 접근해 단서를 캐 나가며 여러 인물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몸값 10만 달러를 요구하는 협박장이 샘프슨의 집에 도착했고, 아처와 변호사, 검사, 보안관은 돈을 지불한 뒤 일당을 일망타진하려는 작전을 펼쳤지만 아처의 앞에서 돈을 가지고 도주하던 유괴범은 죽고 돈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이윽고 아처는 살해당한 유괴범의 정체와 정보를 알게된 후 진정한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게 되는데...

"소름"의 기억이 살아있던 차에 다시 집어들어 읽게 된 루 아처 시리즈입니다. 기념할만한 데뷰작이지요.
데뷰작답게 작가가 오랜 시간 준비한 티가 물씬 납니다. 상당히 복잡한 플롯이지만 굉장히 치밀하고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행방불명된 백만장자가 약간 미쳤다'는 근거로 쓰인 한 광신자에게 준 사당과 사원이 사실은 백만장자의 사업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 중반부에 잠깐 나오는 바다로 향해 날아가는 검은 원반의 정체 등 인물 하나 하나, 장면 하나 하나가 결과적으로 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소름" 처럼 나름의 한방, 반전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반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표현으로 여타 작품들보다 수준 높은 품격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황금 만능 주의 사회에 울리는 경고의 메시지도 좀 담겼달까요? 이런 비슷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는 부분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네요.
제목 "움직이는 표적"도 작중에서는 효과적으로 쓰이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인상적인 대사로 인용되며 루 아처라는 캐릭터를 부각 시키는데 유용한 장치였다고 생각됩니다. 또 일단 굉장히 멋지잖아요?

하드보일드의 전통이 잘 살아 있으면서도 루 아처만의 매력을 풍기는 시리즈의 특징 그대로 루 아처의 활약도 여전합니다. 액션이면 액션, 추리면 추리, 배짱이면 배짱 모든면에서 충분히 인상적이며 자신만의 존재를 잘 어필하고 있거든요. 또한 악역이던 선역이던 여성들을 대하는 시각에서 감성적인 부분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과 차별화되는데 저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한마디로 거의 모든면에서 완벽한 데뷰작입니다. 루 아처라는 탐정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보는데는 모자람 없는 작품이었고 미국 하드보일드의 계보를 짚는데도 중요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문제는 너무 복잡해서 한번에 읽지 않거나 캐릭터들 상관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읽기가 약간 까다롭기도 하다는 점이지만 약간의 어려움만 감수한다면 일급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진수를 느끼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덧 : 분명 영화화가 되었으리라 생각해서 조사해 봤더니 "영국"영화로 1966년도에 제작되었더군요. 제목은 "Harper!" 명배우 폴 뉴먼과 로렌 바콜이 나오는데 주인공 이름이 "루 하퍼" 입니다. 이름을 바꾼 이유인 즉슨 폴 뉴먼이 H로 시작하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영화 성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프로듀서의 의견 때문이었다군요. 허 참...

덧 2 : 읽으실 때 도움되실 캐릭터 일람 추가드립니다~

  • 루 아처 : 사립 탐정, 주인공
  • 랠프 샘프슨 : 괴짜 백만장자. 점성술과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으며 최근 실종됨.
  • 샘프슨 부인 : 랠프 샘프슨의 부인으로 사건 의뢰자. 승마하다가 낙마한 이후 다리가 부자연 스럽다.
  • 미란다 샘프슨 : 샘프슨의 딸. 앨런 태거크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압력으로 앨버트 그레이브스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중인 천방지축 아가씨.
  • 앨버트 그레이브스 : 샘프슨의 고문 변호사. 이전 아처의 상관인 지방검사였다
  • 앨런 태거트 : 랠프 샘프슨의 자가용 비행기 조종사. 2차대전 당시의 전쟁 영웅 출신으로 굉장히 핸섬한 젊은이
  • 드와이트 트로이 : 지저분한 갱. 술집 "미치광이 피아노"의 주인.
  • 페이 이스터브룩 : 왕년의 영화 스타. 랠프의 친구로 점성술에 관심이 많다.
  • 베티 프레일리 : "미치광이 피아노"의 재즈 가수. 마약 중독자.
  • 퍼들러 : "미치광이 피아노"의 보디가드. 트로이의 오른팔.
  • 클로드 : 샘프슨이 산과 수도원을 기증한 사이비 종교 교주.
  • 에디 레시터 : 샘프슨 납치범 중 한명.
  • 피터 콜튼 : FBI 수석 검사관. 과거 아처의 상사.
  • 스패너 : 보안관.
  • 험프리스 : 지방검사.

2004/09/01

소름 - 로스 맥도널드 / 강영길 : 별점 4.5점


소름 - 10점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사립탐정 루 아처는 갓 결혼한 아내가 실종되었다는 청년 알렉스 킨케이드의 의뢰를 받고 행방불명된 신부 도로시의 행적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도로시가 피투성이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발견된다. 원인은 친구이자 지도교수였던 헬렌 헤거티의 시체를 발견한 것. 보안관 사무실에서는 도로시를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하게 된다.
아처는 도로시의 실종은 호텔에 방문한 의문의 사나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의문의 사나이 책 베그리의 정체를 추적, 그는 10여년전 어린 소녀였던 도로시 매기의 법정 증언때문에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로 10여년 복역한 도로시의 아버지 토머스 매기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 과거의 죽음과 현재의 살인, 그리고 또 다른 제 3의 살인이 서로 관련되어 있으리라 짐작한 아처는 헬렌 해거티와 도로시(달리)가 다녔던 대학의 지도 부장 로이 브래드쇼와 그 어머니 미세스 브래드쇼, 헬렌의 친구 설리 버크와 그 남동생 등 수많은 인물들의 실타래를 풀며 사고로만 알려졌던 과거의 루크 딜로니 사건이 사실은 살인사건이었다는 점과 이 세개의 살인사건의 연관성을 파악하게 된다....

"움직이는 표적"과 "위철리 여자", 단편 "미드나잇 블루" 이후 읽은 루 아처 시리즈입니다. 워낙 평이 좋아서 꼭 읽고 싶었는데 얼마전 알라딘 할인행사로 구입하여 읽게 되었네요.

"주의! 아래 리뷰에는 진범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다수 들어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다른 하드보일드와 거의 다름 없는 형태로 진행됩니다. 우연히 사소한 사건을 맡게 된 사립탐정이 그 사소한 사건에서 파생되는 살인사건을 접하게 되고 그 살인사건이 과거의 다른 사건과 연관됨을 눈치챔으로써 결국 진정한 진상을 깨닫게 된다는 전개인데 다른 하드보일드와 거의 대동소이하죠. (몰타의 매..는 제외할 만 하겠네요) 작품답게 수많은 인물들이 스쳐지나가며 각각의 인물들이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지라 한번에 읽지 않으면 조금 힘들다는 것도 유사하고요.

그러나 루 아처라는 건조하고 관찰력 뛰어난 캐릭터는 그만의 우울함과 고독함을 유별나게 강조한 덕에, 터프함과 마쵸스러움을 과시하면서도 일종의 기사도 정신을 보여주며 시니컬한 유머를 내뱉는 여타 하드보일드 탐정 캐릭터와 확실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다른 여러 캐릭터들도 굉장히 독특하고 성격들이 강해서 각자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것이 좋았고요. 또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최소한 알렉스 부부의 행복은 지켜진다는 점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겠네요. 전체적으로 심리학과 시적 정서가 감싸고 있는 듯한 독특한 분위기는 이 작품만의 매력이고요.

이러한 다른 장점들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핵심이자 중요한 요소인 사건의 진상, 마지막 3페이지에 걸쳐 나오는 진상이야말로 모든 인물관계와 사건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릴 뿐더러 다른 하드보일드와 비교하여 이 작품을 비교 우위에 서게 하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이 브래드쇼와 미세스 브래드쇼라는 모자간으로 알았던 둘만의 비밀스러운 결혼 생활과 아내이자 어머니 역이였던 미세스 브래드쇼 (티시)의 상상 이상의 질투와 증오..... 아무도 예상 못했지만 오히려 20여년 동안 관계를 숨겨왔다는 그 비현실성과 부조리 때문에 광적인 한 인간의 잔인성과 비 인간성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다 주는 것 같습니다. 정말 생각치 못했던 이 마지막 3페이지 만으로도 이 작품은 추리 역사에 기억될 것입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은 이 진상 때문에 알렉스가 의뢰를 중도에 잠깐 포기하였을 때 사건을 계속 뒤쫓고 있던 아처가 미세스 브래드쇼에게 대신 사건을 맡아달라고 의뢰하는 장면이 어색해진다는 것입니다. 결말과 연관시켜 보면 아처가 사실 살해당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으로 보여지거든요. 범인에게 "내가 당신 사건을 당신 돈으로 조사하고 싶다"고 말하는 탐정이라니.... 물론 이 전개로 인해 이 부인과 지속적인 연결고리를 가져가게 되는 부분은 있지만 그래봤자 전화 몇 통화 뿐이라 설득력이 약해요.

그러나 단점은 사소할 뿐, 하드보일드 3대 거장 중 한명의 대표작다운 품격과 재미를 갖춘 걸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챈들러와 해미트 보다 국내에서의 대중적인 지명도는 어떻게 보면 약하지만 (아마 영화화가 적게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결코 그들에 뒤지지 않는 작품이에요. 동서 추리문고에서 건진 또다른 수확이라 생각되며, 이 대단한 작품을 실버 대거에 머물게 한 해당 년도의 골드 대거 수상작도 꼭 읽어 보고 싶습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PS : 솔직히 이 마지막 반전은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는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트릭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세스 브래드쇼라는 노부인의 외모와 행동을 그 나이와 현실보다도 과장되게 묘사하고 브래드쇼 교수를 보기보다 "젊게" 묘사하며 교수의 생활을 극단적으로 젊음이 가득한 곳으로 설정하여 상대적으로 그 차이를 보다 심하게 독자가 느낄 수 있게 한 고도의 트릭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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