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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8

해가 저문 이후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해가 저문 이후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최신 단편집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이후 6년만이라고 하네요. 모두 13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록 작품 수 부터가 남다른데, 내용도 확실히 최신 작품답습니다.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실히 궤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작품은 거의 없고, 심리나 특정 상황에 대한 묘사에 기대는 작품이 대부분이거든요. 심지어 특정 몇몇 작품은 아예 공포라는 감정보다는 그냥 인간에 대한 묘사, 환상에 대한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기묘한 '강박'을 다루고 있다는 것도 눈여겨 볼 만 해요. '강박'을 주제로 한 앤솔로지 수록작이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전부터도 느낀 것이지만 음악을 전면에 드러내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작품이 많다는 점도 눈에 뜨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N"에서 환자 N이 괴물을 보고 달아나면서 차에서 라디오를 켰을 때 록 음악이 터져나오는 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더 후의 노래가 끝나고 흘러나온건 도어스의 "세상의 이면으로 건너오라"였는데 참으로 절묘했어요. 오싹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저는 직접적인 공포가 드러난 작품을 좋아하는 탓에, 이런 변화가 좋게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작가의 연륜이 쌓이고, 내면의 성찰이 깊어졌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는 작품들이지만 이런 류의 작품을 스티븐 킹이 쓸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탓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사후세계를 환상적으로 묘사한 "윌라", 홀로 헬스 자전거 운동을 하다가 강박적인 상황에 빠져든다는 "헬스 자전거", 9.11 테러 때 회사를 땡땡이 쳐서 운 좋게 살아남은 스콧에게 죽은 동료들을 상징하는 물건이 갑자기 찾아온다는 "그들이 남긴 것들" 입니다. 사후세계 등 초자연 현상을 다루고 있지만 단지 소재일 뿐, 내용과 전개는 인간 관계나 강박적인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 관계가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고, 딱히 반전도 존재하지 않으며, 기묘한 현상에 대한 설명도 없고, 심지어 무섭지도 않아서 지루하기만 했다는 겁니다. 스티븐 킹만의 문체와 묘사로 환상 세계를 그린 묘사는 나쁘지 않지만 이 역시 새롭다기보다는 변주에 불과해 보이기도 하고요.

이는 남편이 꾼 꿈을 통해 공포가 실체화 된다는 "하비의 꿈"과 비행기 사고로 죽은 남편의 전화를 받는다는 "뉴욕 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핵폭탄이 투하된 순간을 그린 초단편 "졸업식 오후" 역시나 지극히 익숙한 소재임에는 분명하고요.

다행히 과연 스티븐 킹이구나! 싶은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전체 별점은 2.5점. 아래 소개해드릴 4편이 바로 그것입니다. 짤막하게 소개해 드리며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진저브래드 걸"

에이미는 아이가 죽은 후 강박적인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웃에 사는 연쇄 살인마 피커링의 살인 현장을 목격했고, 그에게 쫓기게 되는데...

피커링에게 사로잡힌 에이미가 살아남기 위해 탈출하는 과정의 서스펜스가 어마무시한 작품입니다. 묘사가 장난이 아닌 덕분입니다. 아이가 죽은 후 슬픔을 잊기 위해 에이미가 달리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함으로써, 이후 탈출에 대한 설득력을 부여해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최후의 순간에 피커링이 수영을 못 한다는 설정을 갑자기 드러낸 것은 약간 반칙 같고, 어떻게보면 조금 뻔하다는 단점은 있지만 강박증과 추격전이라는 두 개의 테마 만큼은 잘 그려낸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N"

저명한 정신과 의사 조니 본세인트가 자살하고, 그가 남긴 원고는 여동생에 의해 오랜 친구 찰리 킨에게 보내졌다.
원고는 1년 전, 조니에게 N.이라는 강박증 환자가 찾아온 날부터 시작되었다. N.은 충동에 의해 찾아간 한 장소에서 태고의 무시무시한 존재의 봉인이 풀리려는 것을 발견했고, 그것을 막기 위한 사명을 갖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엄청난 강박증에 시달렸던 환자였다...

대부분 1인칭으로 쓰여진 의사의 원고와 서간문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작품입니다. 고대로부터 유래된 절대자, 봉인, 심연, 심지어 크쑨이라는 이름까지는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케하지만, 환자 N.이 이야기하는 그의 과거, 즉 그가 애커먼 들판에서 '크쑨'이 처음 나오려는 것을 발견한 후 그것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의 설득력이 실로 대단하며, 이 과정을 모든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고 배열하려고 하는 강박증과 잘 연결시켰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또 유일한 증거는 N.의 증언밖에 없지만 그것을 단계별로 정신과 의사가 기록했다는 식으로 설득력을 보장함은 물론, 일종의 주간 드라마 같은 방식(환자가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므로) 독자의 흥미를 지속시키는 전개 방식도 아주 빼어났어요.
이에 설득당한 조니 본세인트, 그리고 그의 여동생 셰리아가 자살하고 이 사명을 찰리 킨이 받게 된다는 "링" 스타일의 저주의 연쇄 역시 볼만했고요.

그러나 N.이 이야기한대로 이 사명을 가진 자가 그냥 죽어버리면 '크쑨'의 봉인이 풀릴리 없다는 법칙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던가, 여러명이 크쑨을 바라보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는 등 디테일은 조금 아쉽습니다. 혼자서 그렇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누군가와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리고 "링" 수준 만큼은 아니더라도 뭔가 연결고리, 법칙을 부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예를 들면 N.이 조니 본세인트를 찾아온 이유와 조니의 동생으로 이어지는 관계에 이름의 이니셜이 이어진다던가 하는 식으로 법칙을 넣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요.

그래도 러브크래프트의 진전을 이어받기도 했고,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님을 보여주기도 하는 재미와 공포에 있어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벙어리"

영업사원 모네트는 성당에서의 고해 성사에서, 영업 출장 중 태웠던 벙어리 히치하이커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모네트는 히치하이커에게 아내 바브가 직장에서 거액을 횡령한 뒤, '카우보이 밥'이라고 부르는 애인과 흥청망청 쓴 후 도망가 버렸다고 했는데...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 벙어리 스탠리 두세트

그게 누구건 선의를 베풀면 보답을 받는다는 전래 동화같은 이야기입니다. 고해성사를 하면서 아내 바브와 그에 얽힌 범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모네트의 입담도 볼거리고요. 보답이 불륜과 범죄를 저지른 아내와 정부를 때려 죽이는 거라는건 스티븐 킹 다왔습니다. 실제 뉴스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창작 비화 역시 인상적이었고요.

결말이 좀 뻔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아주 비좁은 것"

이웃 그룬왈드와 땅, 그리고 애견의 죽음에 얽힌 송사에 휘말린 주식 거래인 커티스는 어느 날 그룬왈드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모든 요구를 수용할테니 이 모든 것을 끝내자는 제안이었다. 이후 커티스는 홀로 그룬왈드를 만나러 폐허처럼 버려진 공사 현장으로 찾아갔다가 권총으로 협박당한 후, 공사 현장 화장실에 갖히고 말았다...

묘사력으로는 수록작 중 최고로 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야말로 거장의 글 솜씨가 제대로 발휘되어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읽었던 "별도 없는 한밤에"의 첫번째 작품 "1922"<1922>가 떠오를 정도로 읽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든요. "1922"<1922>가 생지옥, 그리고 쥐에 대한 묘사로 독자를 미치게 만든다면, 이 작품은 화장실과 오물에 대한 묘사가읽는게 힘들 정도로 생생합니다.

또 화장실에서 커티스가 죽게되더라도 일종의 사고사로 보이게 된다는 정황 묘사도 그럴싸 하며, 그룬왈드가 사업에 실패한 뒤 아내가 도망갔고, 심지어 암까지 걸린걸 커티스 탓으로 돌리는 범행 동기 역시 설득력이 높습니다. 특히나 범행 방법은 완전 범죄를 그린 범죄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잘 짜여져 있습니다.
아울러 화장실을 탈출하기 위한 커티스의 노력도 흥미진진합니다. 커티스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 애견 벳시의 인식표 덕분이라는 소소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나 딱 한가지, 커티스가 탈출 이후 보여준 행동과 그룬왈드의 자살은 석연치 않습니다. 특히 그룬왈드가 어차피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면 커티스를 다시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닐텐데, 왜 포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 같으면 자살하기 전에 커티스에게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복수했을텐데 말이지요.

그래도 별점은 3.5점입니다. 두번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악취미이긴 한데 재미만큼은 명불허전입니다.

2020/12/25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루스 렌들 / 홍성영 : 별점 3점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6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루스 렌델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중심의 단편집입니다.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몰입, 집착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상은 열쇠, 시계, 저택과 같은 사물도 있고, 여장이나 동물로 변장하는 등의 독특한 취미도 있지요. 주인공들은 결국 그 때문에 파국을 맞게 되는데, 파국을 맞는 장면이 마지막 몇 줄로 정리되는 반전 묘미가 빼어난 작품이 많습니다. 등골 서늘한 반전을 짤막한 문장으로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기묘한 맛' 장르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정교하게 계획된 범죄가 등장하는 "휘파람 부는 남자"와 "늪지 저택, 펜 홀"은 등장 인물들 심리와 주변 배경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에 조금 뒤처진 느낌도 들고, 반전도 뻔한 작품들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대표적인게 표제작인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겠지요. "헤어가 살던 집", "아버지의 날" 등도 예상하기 쉬운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뻔하더라도 독자를 몰입시키는 구성과 전개, 묘사가 빼어나서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닌 거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남성 공포증이 있는 여자와 장난삼아 여장을 즐긴 남자가 겪는 파국을 그린 작품.

원제는 The New Girlfriend인데, 영화 때문에 제목이 바뀐걸가요? 여튼 여장한 데이빗을 진짜 여자로 생각하는 크리스틴의 심리 묘사가 볼거리였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데이빗이 크리스틴과 함께 하기(?) 위해 남자로 돌아오자,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크리스틴이 남편 외 남성에 대해 갖는 혐오가 앞서서 상세하게 설명된 탓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찾아보니 영화는 기본 설정만 따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각색했더군요. 저는 영화 결말보다는 원작 결말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푸른 히아신스 향기" 

아내 캐서린이 불륜 뒤 임신하자 이혼하고 40년간 해외를 떠돌던 남자가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캐서린을 찾아 나섰고, 결국 그녀를 만났지만 그녀는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남자는 다시 그녀를 찾아가 총으로 쏴 죽였다. 그러나 그가 죽인건 알고보니 그녀의 딸이었다.

남자가 캐서린에게 집착하는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일품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살의와 살인이라는 직접적 행위가 설명되고요. 죽인 여자가 캐서린이 아니라 그녀의 딸이었다는 반전 역시 대단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과수원 울타리"

나는 공습을 피해 엘라 이모가 사는 인치필드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엘라 이모가 남편이 징집된 틈에 병가를 받고 돌아온 조종사 데니스 클리프턴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걸 알아챘다.
밤에 총 소리를 들은 어느 날 아침, 나는 나무에 매달린 허수아비를 데니스 클리프턴의 시체로 오인해 소동을 일으킨 뒤 런던으로 쫓겨났다. 엘라 이모도 아이를 낳다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그곳에서 머리에 산탄총을 맞은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 작품도 '나'의 심리 묘사가 빼어난 작품입니다. 또 어린 시절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려내는 영국 시골 풍경에 대한 묘사도 좋고요.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불륜으로 긴장감을 싹 틔우고, 이를 목 매달린 시체 (허수아비)로 터트리는 전개도 거장답습니다.

그런데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마지막 반전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발견된 유골은 데니스 클리프턴일겁니다. 그렇지만 데니스 클리프턴은 전시에 병가 중인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실종된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불륜을 알고 입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전시라는 상황이면 문제가 되었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헤어가 살던 집" 

살인 사건이 일어난 탓에 싸게 나온 집을 구입한 노먼은 아내 리타와 함께 이사왔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계속 신경을 쓰던 노먼과 리타는 욕실 창문이 자꾸 열리는걸 가지고 다툼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타를 거의 죽일 뻔 한 노먼은 다시 이사를 마음먹은 뒤, 헤어 사건이 알고보니 자기와 같이 욕실 창문이 열린 탓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스트레스와 긴장이 쌓이면 사소한 일로 살의가 폭발하는 심리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일상 속 이야기처럼 그려내었다는게 특징입니다. 살의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네요. 일상 속 사소한 문제로 폭발한 살의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했습니다. 별다른 반전도 없고요. 창문 문제가 살의를 촉발할 수 있다는걸 이웃은 알고 있던걸로 보이는데, 이웃에 대해서 반전 형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뇌물과 부패" 

니컬러스는 여자에게 홀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엄청난 덤터기를 쓸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아버지를 해고했던 아버지 회사의 보스 소렌슨이 식사비를 대신 지불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렌슨이 아내가 아닌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걸 목격했던 탓으로 여긴 니컬러스는 식사비를 돌려주기 위해 다음날 소렌슨을 찾아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니컬러스를 협박범, 그리고 바보 취급을 할 뿐이었다.

며칠 뒤, 소렌슨의 아내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소렌슨은 식당에서 그를 목격했던 니컬러스만이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상황에 처하는데....

소심한 소시민이지만 자존심만큼은 갖춘 니컬러스가 펼치는, 자신을 무시했던 소렌슨에 대한 복수극입니다. 독자가 니컬러스에게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니컬러스가 울분을 쌓아가는 과정을 차분히 그려낸 전개가 돋보입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빌드업'이 완벽해요. 이러한 빌드업을 완성하는 마지막 니컬러스의 한 마디, "보지 못했습니다. 절대로요."가 작품의 백미고요. 소시민의 잔혹 복수극이자 일상계라는 독특한 작품의 정체성도 인상적입니다.

식당에서 소렌슨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조금은 작위적인 설정은 아쉽지만, 그 외에는 단점을 찾아보기 힘든 수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휘파람 부는 남자"

매뉴얼 밑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는 제레미는 영국인 불법 체류자이자 좀도둑으로, 일하던 중 모르는 집 열쇠를 줍게 되었다. 이 집을 털어서 인생 역전을 꿈꾼 제레미는 집 열쇠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은 매뉴얼의 본가였고, 잽싸게 도망치던 제레미는 이 모든게 매뉴얼의 복수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매뉴얼이 결혼할 여자인 루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허술해 보이는 쿠바 이민자가 영국인 좀도둑을 가지고 놀면서 제대로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몇 줄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완성되는, 오 헨리 스타일의 반전물이기도 하고요. 반전을 통해 매뉴얼이 이상하게 돈이 많았다는 복선도 회수되지요. 

개인적으로는 호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낄 수 없는 영국인 제레미가 죗값을 치룬다는 권선징악적인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만큼 밉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묘사력은 정말이지 부럽네요.

그런데 제레미가 집을 터는 동안, 제레미 짐 속에 마약을 숨긴 뒤 세관에서 걸리게 만든것 자체는 엄청난 복수이기는 합니다만 너무 복잡하고 거창한 복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레미가 집을 털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집 주소를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물론 매뉴얼은 다른 복수를 준비했겠지만, 여러모로 손이 너무 많이 가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나팔꽃 시계" 

트릭시는 데본셔에 사는 친구 시빌에게 놀러갔다가 그곳 갤러리인 아티팩트에서 충동적으로 나팔꽃 시계를 훔쳤다. 시계는 그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고, 시계를 알아본 친구 미비마저 사고를 위장해 살해했다. 시계를 몰래 돌려 놓으려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트릭시는 순간적 광기로 시계를 부숴버리는데....

특정 물건에 대한 충동적인 집착이 파국을 불러온다는 심리 드라마입니다. 주인공이 노인이며, 시계 때문에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파국이 일상 속에서 전개되는 일상계 속성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마지막에 쓰러진 트릭시가 "똑딱똑딱, 나팔꽃 시계 소리"라고 말하는 장면도 대단했어요. 그녀 정신이 붕괴했다는걸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하다는 단점은 어쩔 수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탈" 

'나'는 임박한 결혼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연극에 쓰는 늑대탈을 쓰면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걸 알아챘다. 같은 취미를 숨기고 살던 어머니와 함께 하게 되자, 늑대탈을 쓰는 행위와 늑대가 될 때 야생으로 깊이 들어가던 행위는 점점 폭주하게 되었다. 마침내 약혼녀 모이라가 양가죽 외투를 입고 찾아온 날, 야생동물 두 마리가 양을 덮치고 만다....

두 마리의 야생 동물이 바닥에 쓰러진 양을 덮쳤다는 것이다. 는 마지막 문구는 섬뜩했습니다. 전형적인 '기묘한 맛' 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모이라를 먹은 건지도 살짝 궁금해지고요.

그러나 정신병자가 쓰는 글이라는걸 계속 알려주고, 늑대탈을 쓰면 늑대가 된다는 행동 묘사가 상세해서 반전의 묘미는 약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 어딘가에서 읽었던 작품이라 신선함도 부족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늪지 저택, 펜 홀" 

프링글과 친구들은 아버지 친구 리던 씨가 사는 늪지 저택 펜 홀 근처로 캠핑 여행을 떠났다. 리던 씨는 저택 관리를 위해 모든걸 걸었지만 돈과 인력,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리던 씨 아내 플로라는 저택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물건에만 집착했다. 때문에 저택 내부는 쓰레기장같아 보였다.
태풍이 불어 포퓰러 나무가 쓰러진 다음날, 나무 구덩이에서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좋아하는 플로라는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리던 씨가 해체하던 쓰러진 나무가 구덩이로 떨어져 그녀는 깔려 죽고 마는데...

서로 다른걸 원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당연히 남편이 사고처럼 위장해서 저지른 범행이고요. 이렇게 내용은 굉장히 뻔합니다. 하지만 이를 어린 아이인 프링글 시점에서 은근히 드러내는 묘사만큼은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직접적으로 죽이는걸 본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묘사하는 식이거든요. 

그리고 본 편 이야기보다도 오히려 늪지 저택 펜 홀과 숲에 대한 묘사가 훨씬 굉장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작나무 줄기는 은색, 너도밤나무는 백랍색, 플라타너스는 회색과 노란색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굉장히 상세하면서도 맛깔나는 묘사였어요.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버지의 날" 

테디는 처제 가족과 그리스 섬으로 여행왔다. 처제의 남편 마이클은 아내 린다가 아이들과 함께 자신을 떠나는걸 두려워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이클이 아내를 처치하고 아이들을 독차지한다는 이야기인데, 절벽에 떨어질뻔했던 테디와 아내 앤의 사고를 묘사하여 이어지는 사고와 연결시키는 전개는 너무 뻔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뻔한 이야기였달까요.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지만 이혼이 만연한 세상에 두려워하는 마이클의 강박증 설정은 괜찮았지만, 테디 시점에서 묘사해서 그렇게 극적으로 묘사되지는 못한 것도 아쉽고요. 더 광적인 에너지가 느껴졌으면 했는데, 지금의 작품은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본 탓에 조금 무미건조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케판다로 가는 초록길" 

나는 인기없는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 아서 케스트렐과 친구였다. 그러나 그가 발표했던 15권에 달하는 '칼리나스 연대기'는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아내 엘리자베스만 읽었을 뿐이었다. 아서는 어느날 '나'에게 런던 외곽선이 폐쇄되고 생긴 아름다운 산책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산책을 나섰지만, 그가 이야기한 풍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서는 혹독한 비평이 신문에 실린 뒤 자살을 택했다. 바로 그 날, '나'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아서를 찾아왔다가 귀가하던 중 아서가 이야기했던 산책로를 발견하는데...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작가들이 꿈 꿔볼만한 일종의 판타지 작품. 장르 문학을 쓰는 작가에 대한 세간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쓴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서가 만들어낸 산책로의 아름다운 묘사가 빼어납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비교할 때 극적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특별한 반전도 없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5/14

더블, 더블 - 엘러리 퀸 / 이제중 : 별점 2점

더블, 더블 - 4점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4월 1일, 만우절에 엘러리 퀸에게 신문기사가 담긴 편지가 도착했다. 라이츠빌에서 일어났던 루크 매캐비의 죽음, 루크의 유산 4백만 달러가 주치의 세바스티안 도드에게 상속된 것, 유산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던 하트 방적 공장 사장 존 스펜서 하트가 자신이 유용한 루크의 돈 때문에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4월 7일에는 마을에서 구걸을 했던 술꾼 톰 앤더슨이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담긴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엘러리 퀸에게 톰 앤더슨의 딸 리마가 찾아와 아버지는 죽었을 거라며 사건 해결을 의뢰했고, 엘러리 퀸은 리마와 함께 십여년 만에 다시 라이츠빌로 향하는데...

엘러리 퀸 장편 중에서는 수작들이 많이 모여있는 '라이츠빌 시리즈'입니다. 

고전 본격 추리물이었던 국명 시리즈에 반해, 라이츠빌 시리즈는 범죄 드라마 성격이 강하다는게 특징이지만, 이 작품은 기존 라이츠빌 시리즈와는 조금 다릅니다.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범죄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부자, 가난뱅이, 거지, 도둑, 의사, 변호사가 차례로 죽는다'는 마더 구스 동요 중 한 편의 내용대로 살인 사건이 벌어지거든요.

그러나 확실히 라이츠빌 시리즈는 라이츠빌 시리즈에요. 이야기 자체는 전혀 본격물처럼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건은 우발적인 사고로 여겨진 탓에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도 않는 탓입니다. 경찰이 방관하는 동안, 탐정인 엘러리 퀸 역시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낸다던가 하는 최소한의 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답게 인간 관계와 동기에 집중합니다.

덕분에 왜 동요가 사건과 연결되는지? 왜 범인이 엘러리에게 편지를 보냈는지?에 대한, 와이더닛물로는 꽤 흥미로운 편입니다. 특히 동요와 사건과 연결되는 이유가 참신했어요. 범인 케네스는 죽음에 대한 강박증이 있어서 유언장 쓰기를 미루던 도드 의사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으면 순순히 유언장을 쓸 것이라 생각하고 모든 사건을 꾸몄습니다. 그래서 두 건의 사망 사고의 피해자 직업에서 착안하여 톰 앤더슨을 죽이고, 니콜 자카르도 사고를 위장하여 살해한 뒤 이 모든게 마더구스 동요 법칙에 따른 죽음으로 다음 차례가 도드 의사인걸 명심하게 만든 것이지요.
도드 의사가 오래 앓아온 신경증 탓에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한다는게 전개와 묘사에서 계속 드러나서 설득력도 넘칩니다. 우발적인 죽음이 목표한 살인의 연결고리로 이용된다는 트릭은 제법 많이 보아 왔지만, 이 작품에서의 동기만큼은 신선하면서 설득력 높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허나 후더닛물로는 좋은 작품은 못됩니다. 범인은 케네스 아니면 리마일게 너무 뻔했으니까요. 그런데 리마의 경우, 어린 시절에는 몰랐던 바깥 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아버지를 죽였을 수는 있습니다. 속박에서 풀려나기 위해서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을 죽일 동기는 없습니다. 때문에 범인은 케네스인 거지요. 도드 박사의 유산 4백만 달러는 동기로 차고 넘치잖아요. 세 번째 사건인 니콜 자카르 사살 사건은 어쨌건 케네스가 총으로 쏘아 죽이기도 했고요. 

물론 도드 박사의 유언장이 공개된 뒤, 거의 모든 유산은 종합 병원에 기부되기 때문에 케네스의 동기는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도드 박사 뒤에 살해된 변호사 홀더필드, 양복장이 월더 형제 사건에서는 동기가 아예 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도드 박사 살해까지는 케네스가, 그 뒤 범행은 리마가 저질렀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은 도드 박사가 죽은 뒤 결혼했으니 뭔가 동기를 공유했을거라고 본 것이지요. 사실 뒷 부분은 여러모로 리마인게 더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동요 순서대로 '대장'이 마지막에 죽는다면, 이는 앞서 엘러리가 리마에게 말했듯 엘러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결말은 결국 케네스가 진범이라서 조금 맥이 빠졌습니다. 케네스의 자백 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점, 그리고 그가 엘러리가 꾸민 리마 체포 쇼를 보고 자백했다는 결말도 좋은 후더닛 본격물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요.

국명 시리즈로 대표되는 엘러리 퀸 본격물처럼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단점도 큽니다. 동요와 사건을 무리하게 엮은 탓입니다. 동요 순서대로 변호사와 장사꾼 (양복장이)가 죽는 상황은 순전히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도드 박사가 유언장을 두 번 남겼다는 것도 우연이고, 이를 진작에 데이비드 월도가 밝히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변호사 비서 플로스가 때마침 라이츠빌을 떠났다는 것도 동요에 끼워 맟추기 위한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합니다. 비서 플로스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게 그나마 말이 되었을 겁니다. 

엘러리 퀸에게 케네스가 편지를 보냈다는 설정은 억지의 정점입니다. 엘러리 퀸의 입으로 도드 박사에게 '죽음을 선고'하기 위해서라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케네스는 그냥 신문에 투고만 했어도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살인범이 탐정을 불러서 피해자가 죽는걸 예언하게 만들다니, 억지도 정도껏 해야죠.

캐릭터들도 현실적이지 않은, 만화같은 캐릭터들 뿐이에요. 아버지와 함께 산 속 움막에 살던 청순한 소녀 리마가 대표적입니다. 도드 의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경증 증상을 보인다는건 사건 동기 설명을 위해 필요했던 묘사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점치기를 시도한다는 설정 등 다른 캐릭터들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고요. 엘러리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이던 리마가 케네스와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묵직한 라이츠빌 시리즈라면 아예 리마와 알콩달콩 사랑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게 맞았을테고, 이왕 등장한거라면 팬들에게는 리마가 엘러리와 연결되는 결말이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나이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예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라이츠빌 시리즈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라이츠빌 시리즈의 장점보다는 기존 엘러리 퀸 시리즈의 단점이 더 불거진 망작입니다. 역시나, 유명하지 않은 작품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2019/03/24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웬디 워커 / 김선형 : 별점 2점

너의 기억을 지워줄게 - 4점
웬디 워커 지음, 김선형 옮김/북로그컴퍼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잔인하게 강간당한 제니를 위해 부모는 망각 요법으로 당시의 기억을 없앴다. 그러나 오히려 제니는 자살을 기도했고, 새로 제니를 맡게 된 정신과 의사 앨런은 제니의 기억을 복구하여 치료에 나섰다. 하지만 제니의 기억이 차례로 돌아오면서 제니가 표백제 냄새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자, 앨런은 자신의 수영 선수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표백제, 그리고 강간범은 몸에 털이 없었으며 빨간 새가 그려진 파란색 후드티를 입었다는 증언 모두 제이슨에게 해당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앨런은 제니의 아버지 톰에게 들은, 톰의 직장 상사 밥이 딸 뻘인 비서 라일라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말을 이용하여 밥을 범인으로 조작하려 결심했다. 약간의 조작으로 수사 선상에 오르게 된 밥은 알리바이도 없으며 과거 성범죄 경력이 있었다는게 밝혀져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밥은 어쩔 수 없이 제니 강간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친구의 딸 라일라와 성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누명을 벗지만, 분노한 라일라의 아빠에 의해 살해당하는데...

"권능을 행사하려면 엄청난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러러면 자아가 아주 강인해야 한다."
"우리가 낳은 자식을 보호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담한 불행이다."

심리 범죄 스릴러물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는데, 망각 요법과 트라우마 치료에 대한 안내서에 가까와 의외였던 작품입니다. 제니와 앨런, 숀, 톰, 샬럿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강박증을 이겨내는게 주요 내용인 탓입니다. 범죄물의 분위기를 풍기는건, 아들 제이슨이 범인이 아닐까 생각한 앨런이 제니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 뿐이고요. 

물론 설득력은 높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다운 디테일아 살아있는 덕분입니다. 샬럿에게 들은 밥과의 성관계 묘사와 TV 광고, 경찰과의 통화를 활용하여 제니의 마음 속에 밥이 범인이라는 생각을 심어놓는 과정이 아주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밥이 왜 알리바이를 대지 못하는지에 대한 설명도 그럴듯하며, 알리바이를 밝힌 후 처단받는다는 결말도 나쁘지 않았어요. 조금 꼬아놓기는 했지만 초반의 유력한 용의자였던 마약 판매상 더마코와 제이슨, 그리고 진범 셸비가 그곳에 있었던 이유도 합리적이라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건질건 없습니다. 일단 범죄 스릴러, 추리물이 아니까요. 범죄물로서 제대로 기능하려면 제니를 강간한 범인이 누구인지가 이야기의 핵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진범의 정체 역시 뜬금없고요. 몇 번 반복해서 소개된, 앨런이 구하지 못한 유일한 환자라는 셸비가 진범인데 그 전 까지는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다가 결말에서 급작스럽게 정체가 밝혀져서 영 와 닿지 않습니다. 셸비가 앨런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아들 제이슨을 스토킹하여 강간하려고 했다는 목적 정도만 납득이 갈 뿐입니다. 이럴거면 범인은 누구라도 괜찮았던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충 마무리한 느낌이 들 정도에요.
셸비가 오래전 앨런도 강간한 적이 있었다는 설정도 황당합니다. 앨런도 다른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이며, 제니의 치료와 함께 스스로도 치유되었다는 결말을 위한 억지 설정인데 이게 대체 뭔가 싶더라고요. 또 셸비가 진범이라는걸 진작 알고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는 제이슨에게 혐의가 가지 않도록 동분서주하던 앞부분 모습과 상당히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진범이 누구인지를 경찰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극에 달한 앨런 1인칭 시점의 묘사 역시 그닥입니다. 주변 묘사 없이 앨런의 심리 묘사와 등장 인물간의 대화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소설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나 인터뷰를 읽는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몰입하기 힘들었어요.
또 어느새 톰과 샬럿의 과거와 현재 비밀까지 공유하며 그들을 치료하게 되는 전개도 이상합니다. 분명 제니의 치료, 기억 복원이 목적인데 왜 부부의 심리 치료까지 하는건지 전혀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이를 위해 등장인물들이 모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심지어 샬럿은 과거 의붓아버지와의 성관계를 숨겼을 뿐 아니라 남편 톰의 직장 상사 밥과 불륜 관계라는 설정인데 이건 너무 지나칩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성폭행 피해자인 제니가 아닌 샬럿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역시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샬럿은 밥과의 관계를 깨고, 자신이 잃었던 것이 무엇이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면으로 직시하면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톰 역시 그런 샬럿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다시 사랑하게 되고요. 그런데 제니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고통을 떠올린 후 치유가 되었다는게 전부입니다. 샬럿과 톰이 뭘 어떻게 하건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냥 막장 드라마와 같은 재미를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등장 인물들과의 대사로 이야기 전개가 이루어져 숀같은 인물의 비중이 기묘하게 높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숀은 제니의 심리를 전달해주기 위해 투입되어 비중도 커진 도구에 불과해 보이거든요. 제니 사건과는 관계가 없어서 등장하지 않아도 무방한데 말이죠.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졌다면 더 간결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도 없고 묘사도 지루하며 장황할 분 아니라 범죄 스릴러도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로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인터넷 상의 그럴듯한 소개에 낚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2008/07/17

가타부츠 - 사와무라 린 / 김소영 : 별점 3점

가타부츠 - 6점
사와무라 린 지음, 김소영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이 작품은 총 6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단편집입니다. 제목의 사전적 의미로는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네요. 작가의 의도는 소박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싶어서 쓴 것이라고 하는데, 제목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 소박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지만 뭔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성격의 소유자들이 등장합니다. 주인공들의 고지식함에 관련된 내용은 비록 소설이지만 일반 소시민이 가질 법한 집착이나 생각들이라는 것이 흥미롭기도 했고요. 소박한 이야기답게 이야기의 스케일도 작아서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추리 단편집인줄 알고 구입했는데 추리하고는 거리가 좀 있지만, 구입을 후회되지 않을 만큼 재미있고 신선한 이야기들이었다 생각되네요. 별 3개는 충분한 책입니다.

총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작품별로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첫번째 단편인 “맥이 꾼 꿈”은 유부남 유부녀가 우연찮게 만나 사랑에 빠져 불륜관계가 되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자살을 결심하는 이야기입니다.
불륜 관계의 남녀가 남겨지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자살을 결심한다는 전개와 그들의 심리묘사가 소박하면서도 드라마틱 합니다. 각자 자살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도 흥미진진했고요. 그러나 진부한 멜로드라마적인 설정과 마지막의 급작스러운 해피엔딩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제일 첫 작품이 제일 처지는 작품이라는 것이 좀 의아했네요.

두번째 단편 “주머니 속의 캥거루”는 쌍둥이 여동생 아코의 뒷치닥거리 때문에 일상이 꼬이는 주인공 다카모리의 이야기입니다. 최후의 순간에 여자친구와 아코 둘 중 한명을 선택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제목이 의미하는 난폭한 캥거루를 제압하기 위해 캥거루에 주머니를 씌우듯, 아코를 돌봐주려 하지만 외려 그녀가 족쇄가 되어 자유의지를 잃는 과정이 담담하고 디테일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소박하지만 희한한 집착. 이 단편집의 명제를 잘 드러내 줍니다.

세번째 작품 “역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역 개찰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취미인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이상적인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 한 여자, 그리고 그녀가 기다린 남자였지만 그녀를 외면해 버린 남자에게 급작스런 살의를 품게 된다는 전개인데요. 독특한 취미가 인상적이고 이 취미를 통해 한 평범한 남자가 살의를 품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표현된 작품입니다. 평범함 속에 비일상적인 설정을 끌어들이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인 작품이기도 하고요. 가장 비일상적이고 어떻게 보면 가장 끔찍한 이야기지만, 이런 이야기마저도 소박하게 전개하는 솜씨가 참 대단하다 생각됩니다.

네번째 작품 “유사시”는 아들에게 갑자기 닥쳐올 사고에 대한 강박증에 빠진 한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강박신경증에 대한 묘사도 세밀하지만 그러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반전이 인상적인 소품입니다. 정말로 소박하고 일상적인 이야기인데 디테일한 심리묘사로 반전까지 이르는 과정이 마음에 들더군요.

다섯번째 작품인 “매리지 블루 마린 그레이”는 사고로 인해 3년전 이틀의 기억이 없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여자친구의 고향을 찾는데 그 고향 바닷가의 풍경이 기억 나지만 왜 기억이 나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 수 없고, 3년 전 그 기억이 없는 날 그 장소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뒤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30년도 아니고 3년도 아니고 딱 3일의 기억상실. 정말 소박하다 못해 눈물날 정도인 설정입니다. 3일의 기억 상실로도 사람이 극단적으로 끌려갈 수도 있다라는 것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어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반전도 마음에 들었고요.

여섯번째 작품인 “무언의 전화 저편”은 한 연립주택 앞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당시 피해자 옆집에 살던 다루미 간토라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비명소리와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을 무시하고 나와보지도 않은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현대 사회의 매정한 세태를 그리는 듯 하지만 우리 옆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와닿는 점이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중간중간의 복선을 통해 마무리되는 결말도 깔끔하고요.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습니다.

2009/11/28

시미가의 붕괴 - 기타무라 가오루 / 김해용 : 별점 3점

시미가의 붕괴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김해용 옮김/황매(푸른바람)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작품이 굉장히 유명한, 그래서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추리 독자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기타무라 가오루의 작품입니다. 사실 대표작도 아니고 해서 이 작품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워낙 컸던 탓에 구입하게 되었네요.

일단 이 작품집은 크게 3가지 성향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추리를 기반으로 한 블랙코미디적인 작품, 그리고 일상의 소소함을 디테일하게 추리와 결합시키는 (하지만 추리물은 아닌) 일상계 추리분위기 소품, 마지막으로 인간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린 드라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블랙코미디 류(類)로는 표제작이기도 한 "시미가의 붕괴"와 "죽음과 밀실", 그리고 "옛날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 수 있을테고 두번째 일상계 소품은 "하얀 아침"과 "주사위, 데굴데굴", "오니기리, 꾹꾹"이 해당되며, 마지막 심리드라마는 "녹아간다"와 "나비", "나의 자리" 가 해당된다 생각됩니다. 이중 개인적으로는 일상계 소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계 미스터리로 유명한 작가답다고나 할까요? 추리적인 요소가 녹아있으면서도 그것이 그야말로 일상과 밀결합되어 있고 내용과 캐릭터들도 너무 귀여워서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거든요.

물론 그 외의 대부분의 작품들 역시 추리적인 성향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포함되어 있기에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 류의 작품군은 조금 더 절제했더라면 동화적인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추리물로 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설정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약간은 아쉽더군요.

그래도 국내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작가의 작품집이고 작가 특유의 센스가 충분히 느껴지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정통 추리물들도 아니고 작가의 대표작도 아니긴 해도 가볍게 즐기기에 좋아서 추리소설에 거부감을 느끼실 수 있는 초심자분들에게 추천할만 하다 생각되네요. 특히 여성분들이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아울러 이 단편집을 계기로 추후 일상계 소품으로만 묶인 (대표작인 "하늘을 나는 말" 시리즈면 더욱 좋고요) 단편집이 나와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PS : 최근 너무 바빠서 좀 격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읽은 책이 쌓여가는데 포스팅할 시간이 없네요...
녹아간다
평범한 회사원 미사키의 정신 붕괴과정을 "만화"라는 독특한 매개체를 통해 표현한 심리 드라마입니다. 치밀한 묘사는 볼거리이지만 정신 붕괴, 즉 미쳐가는 과정에 대한 이유가 합리적이지 않아서 결과물만 놓고 본다면 평범한 수준이라 생각되네요.

시미가家의 붕괴
천재탐정과 그의 조수가 탐정의 친구인 장서수집가 시미가를 방문했다가 시미의 아내 가즈코가 밀실에서 살해된 것을 발견한다.
과장된 동화같은 설정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추리물입니다. 일단 서두의 등장인물 소개가 너무 장황하고 허무맹랑해서 당황스럽더군요. 그냥 천재탐정과 조수였어도 충분했을텐데 조수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탐정의 천재성도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채워놓고 있거든요. 하지만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밀실 살인과 다이잉 메시지트릭을 적절하게 사용한 덕에 그나마 황당한 이야기안에 추리적인 이야기가 깔끔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 대한 책 소갯글이 더 예술적입니다. 별거없는 반은 장난같은 이야기를 흡사 고전 전통 트릭 미스터리와 고딕 호러의 결합물 처럼 소개해 놓았더군요.
(탐정에게 사건이란 이미 읽은 책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을 파헤치는 천재 탐정의 놀라운 활약!
완벽히 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수집 강박증.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의 경계를 넘어선 그것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치명적인 욕망으로 자라나 목숨마저 위협한다. 책 수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장서가 부부에게 어느 날 찾아온 죽음이라는 손님. 책에 대한 무모한 집착이 부른 재앙 앞에서 탐정은 진실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 나가는데…….
아무리 채워도 꽉 차지 않는 서가의 구석에서 발견된 부인의 다잉 메세지. 남편의 가장 깊은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시미가는 마치 꿈처럼 아스라이 붕괴하고 만다.)


죽음과 밀실
노인 추리작가들이 모여사는 공동체 "환상의 정원"에 정말이지 완벽한 밀실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시미가의 붕괴와 연결되는 천재탐정과 조수 이야기로 추리소설의 이상적인 형태를 냉소적으로 비웃는듯한 작품입니다. 추리소설로 보기는 어려운, 추리애호가들을 위한 블랙코미디에 더 가까웠달까요?

하얀 아침
주인공이 과거 소녀였을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청춘드라마같은 깜찍한 사랑이야기가 나름의 추리적 요소 (누가 왜 아버지 차 백미러 성에를 닦아놓았을까?)와 잘 결합된 일상계 소품입니다. 여성작가다운 특유의 세밀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과연 일상계 미스터리의 거장이구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야기에서 추리적인 전개를 이끌어내는 것이 놀라운 작품이죠.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 중 한편으로 추리물에 대해 별로 내켜하지 않는 지인들에게 따로 권해주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한 이야기였습니다.

주사위, 데굴데굴
출판사 신입사원 치하루씨는 우연하게 한 남자가 떨어트린 십면체 주사위에 관심을 갖는데...
5페이지짜리 이야기로 이정도면 소품이라기 보다도 꽁트라 해도 무방한 분량이죠. 하지만 이야기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아주 일상스럽지만 귀여운 발상의 트릭이 깜짝 등장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여간.. 아이들 머리는 정말이지 못 당하겠어요^^

오니기리, 꾹꾹
치하루씨는 회사 선배 미즈마치와 함께 이와테로 현장조사를 나간다...
전편과 같은 주인공 치하루씨 시리즈로 이번엔 분량이 약간 기네요. 하지만 역시나 귀여운 소품답게 이와테로 무대가 옮겨갔어도 여전히 일상스럽고 밝은 이야기입니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착하디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추리의 요소는 두가지로 한가지는 버린 깡통이 어떻게 멀리 있는 계곡까지 굴러가는지와 제목의 오니기리를 만든 결과물에 대한 추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다한 트릭이나 추리는 아니지만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은 역시나 마음에 들었어요.

나비
한 여성의 술자리 잡담이랄까... 심리묘사는 좋은데 두서도 없고 이야기도 없는 단상만 모아놓은 짧은 잡문이랄까요. 언급할게 별로 없네요....

나의 자리
주인공이 평상시와 다른 일상을 통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았는다는 설정도 굉장히 독특하지만 이러한 자신이 느낀 일상속의 불편함이 결국 자기자신과 연결된다는 결과가 굉장히 서늘해서 "기묘한 맛" 류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반전으로 이르는 전개와 묘사도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필력과 센스를 잘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두번째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옛날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일본의 전래동화 "카치카치야마" 이야기 (할아버지가 밭일을 하다가 잡아온 너구리로 너구리죽을 만드려 하는데 너구리가 외려 기지를 발휘해서 풀려난 뒤 할머니죽을 만든다는 엽기 이야기?)를 추리물 형식으로 꾸민 내용으로 서두에 지극히 개인적인듯한 느낌의 장황한 옛날 이야기 해석에 대한 이론이 묘사되는 등 작가 스스로의 생각을 대화하듯이 써내려간 형식이 무척 이채로웠던 작품이었습니다. 뭐 달리 이야기하자면 좀 쭉쭉 써내려간 느낌도 들긴 하네요. 왠지 좀 장난스러움이 많이 묻어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어차피 모티브가 된 전래동화가 내용을 잘 모르는 일본 전래동화이기 때문에 몰입하기 힘든 탓도 크겠죠.

하지만 워낙 개인적인 단상이 많은 글이다보니 실제 기타무라 가오루라는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게된 것 같아 흐뭇한 느낌도 들고 추리적으로도 이야기를 잘 구성해 놓아서 감탄했습니다. 전래동화를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추리물로 각색할 생각을 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결과물도 상당한 수준이니 놀라울 따름이죠.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것 같은 작품인데 저에게는 무난한 평작 수준으로 생각되네요.

2023/12/27

데시벨 (2022) - 황인호 : 별점 2점

림팩 훈련 후 귀환하던 잠수함 한라함이 좌초해서 승조원 절반을 잃은 1년 후, 생환했던 한라함 부함장 강도영에게 의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알고보니 폭탄 테러를 알리는 전화로, 테러범은 강도영에게 다음 폭탄 테러 장소인 축구 경기장, 워터 파크 등 온갖 장소로 강도영을 유도했다. 안보지원사령부에서는 강도영을 범인으로 의심했지만 범인으로 드러난건 한라함의 무장장이었던 전태성이었다. 우리 군의 실수로 한라함이 좌초했고, 구조 때까지 산소를 유지하기 위해 승조원 절반을 투표로 죽음으로 몰고갔던걸 은폐했던 군과 강도영에 대한 복수가 동기였다.
강도영의 아내와 딸마저 인질로 잡고 강도영과 격투를 벌이던 전태성은 안보사령부 부장 차영한에게 살해당했고, 강도영은 아내와 딸을 구한 뒤 모든 진실을 밝혔다.


넷플릭스로 감상한 영화. 가족과 함께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보게 되었네요.
테러범이 폭탄이 설치된 장소를 알려줘가며 주인공과 대결하는 설정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다이하드 3"가 떠오르네요), 깔끔, 명쾌하고 속도감있는 전개에 적당한 긴장감도 가져다 주어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감초 역할을 하는 기자 오대오의 개그씬도 평은 별로 좋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축구 시합을 지연시키기 위해 일반 관객이 할 수 있는 행동이 뭐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차피 한 개 뿐인 탓에 별로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결말 부분은 조금 지루했습니다. 한라함 승조원들이 투표로 생사를 가르는 부분 분량이 다소 길고, 신파조로 흘러간 탓이 큽니다. 마지막에 생존 승조원들이 정복을 입고 찾아와 경례하는건 사족 중의 사족이었고요.
개연성도 부족합니다. 일단 범인이 '소리를 활용하여 기동시키는 폭탄'을 만든 이유에 대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온갖 소음과 교차 편집하여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적인 역할 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그냥 시한 폭탄과 차이가 없으니까요. 뒤로 가면 일반 시한 폭탄이 사용되는걸 보면, 감독(각본도 맡으셨더군요) 스스로도 영화를 위한 단순 소재에 불과했다는걸 자인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리'를 활용한 폭탄을 만든 이유는, 좌초 사건의 원인이 잠수함 내 소음이 탐지되어 타격되었기 때문에 생긴 강박증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는게 어땠을까 싶네요. 소리를 차단하며, 소음의 원인을 없애려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더라면 설득력이 조금 있지 않았을까요? 갑자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의 "썰물에 죽다" (아래)가 떠오릅니다. 


혼자서 이런 폭탄을 자작한 뒤 여러 군데에 설치해서 원하는대로 폭파시켰다는 것도 - 심지어 국방장관 등 VIP가 탑승한 자동차까지 - 현실적이지 못하며, 테러의 목적도 잘 모르겠습니다. 강도영을 괴롭히는게 목적인지, 강도영 가족을 죽이는게 목적인지, 진실을 밝히는게 목적인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요. 강도영에게 지옥을 선사하려면 가족을 납치한 뒤 눈 앞에서 폭사시키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텐데 말이지요. 승조원 중에서 용의자는 전태성밖에 없는데 강도영이 범인을 바로 알아채지 못한 이유, 일면식도 없었던 오대오가 강도영의 딸 설영이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도 설명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킬링 타임용 영화였습니다. 머리를 비우고 볼 만 합니다.

2021/02/27

나는 언제나 옳다 - 길리언 플린 / 김희숙 : 별점 4점

나는 언제나 옳다 - 8점
길리언 플린 지음, 김희숙 옮김/푸른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성스러운 종려나무(Spiritual Palms)'라는 호텔에서 일하는 매춘부이다. 손목에 문제가 생겨 남성 고객들 사이에서 평판이 자자하던 수음 테크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호텔 앞으로 자리를 옮겨 점을 보며 사람들의 기운을 읽는다. 물론 실제로는 신기(神氣)와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익힌 요령으로 손님들의 상황을 짐작해 마음을 읽어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수전 버크가 찾아온다. 그녀는 카터후트 메이너 가문의 낡은 저택을 처리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낡은 저택은 그녀의 문제투성이 의붓아들, 열다섯 마일즈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는 퇴마사를 자처하며 귀신이 나온다는 저택을 정화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직접 본 저택과 마일즈의 상태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벽마다 기괴한 핏자국이 나타나고, 마일즈는 나를 볼 때마다 이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저택에 관해 조사하던 나는 100년 전 카터후크 가문이 이 저택에서 큰아들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진으로 본 큰아들은 마일즈와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다. 마일즈와 수전 모두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나를 찾아줘"를 쓴 길리언 플린의 단편입니다. 단편 한 편만으로 책이 출간되는 경우는 우리나라에서 드물지요.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단독 출판되었는지 궁금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대박이에요. 저주받은 저택이라는 고딕 호러로 시작해서 사악한 소시오패스와의 두뇌, 심리 게임으로 이어지는 얼개가 탄탄하고, 단계별로 잘 짜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나'가 봉으로 보였던 수전 버크를 속여서 이득을 취하려는 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부터 기묘하게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 저택의 등장, 그리고 저택으로 이사온 뒤 부쩍 더 의붓아들 마일즈와 불화가 심해졌다는 수전 버크의 강박증으로 고딕 호러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하고요.
세 번째 단계에서는 저택에서 과거 잔혹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범인은 마일즈와 똑같이 생긴 큰 아들이었다는게 드러나며 고딕 호러로의 진면목을 선보입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마일즈가 '나'에게, 이 모든건 남편이 '나'에게 수음을 받았단걸 복수하려는 수전의 음모라며 같이 도망쳐야 한다고 주장하며 멋진 완전 범죄 스릴러로 전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일즈가 자기가 '나'를 속였다며 철저하게 '나'를 옭아매고 조종하는 마지막 단계인 심리 스릴러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각 단계 모두 개별적인 장르물로 높은 완성도를 보일 뿐 아니라, 항상 앞선 단계를 뒤집는 반전이 등장해서 흥미를 자아냅니다. 자세한 묘사와 여러가지 복선으로 설득력도 높아요. '나'가 버크 가 가장의 사진을 마지막에 발견하고, 그가 자기 수음 서비스 단골이라는걸 알게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덕분에 마일즈의 거짓말이 설득력을 가지며 '나'가 속아넘어가는 네 번째 단계가 진행되게 되니까요.
위험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자칭하던 '나'가 마지막에 마일즈에게서 '봄 냄새'를 맡는다는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닳고 닳은 '나'와 악마를 구체화한 마일즈라는 주요 캐릭터 묘사도 아주 훌륭하며, 단편인 덕분에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에서 마지막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은 되짚어 생각하면 문제이기는 합니다. 마일즈가 '나'를 속여서 함께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그 이전 단계에서 '나'의 가방에 토를 하는 등으로 도발할 필요는 없었거든요. '나'가 저택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공포라는 감정도 설명되지 않는 작위적인 요소였고요.
또 결말에서 '나'가 마일즈의 어머니로 자처하며 사람들에게서 사기를 쳐 거액을 얻는 꿈을 꾸는 장면은 비현실적이었어요. 수전의 보석과 마일즈 유괴를 모두 뒤집어 쓸 수 있어서 '나'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니까요. 마일즈가 수전에게 전화했다고는 하는데, 내용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고요. 이래서야 수전은 경찰에 신고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조금은 애매한 열린 결말은 호불호가 갈릴 영역이 아닐까 싶어요. 스티븐 킹이라면 '나'가 자는 방으로 마일즈가 침입해서, 저택 살인 사건 내용처럼 난도질하면서 끝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말에서 다시 유추해서 떠올린 결과일 뿐, 읽는 내내 긴장감 넘쳤던 좋은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단편이 갖는 힘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요. 별점은 4점입니다. 영상화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2009/09/11

절벽 - 현재훈 : 별점 3.5점

거의 백만년만의 추리소설 포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새 너무 독서가 뜸했네요. 개인적으로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보니 책을 지긋이 읽는 것 자체가 좀 무리더군요.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이번에는 단편집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이 책은 저도 잘 몰랐던 한국 작가 현재훈님의 단편집입니다. 우연찮게 검색을 통해 알게된 작가인데, 이렇게 새로운 작가분들을 알게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합니다. 척박한 국내 추리 문단에서 작품을 발표해 왔다는게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쨌건 책 소개를 하자면, 이 책에는 "절벽", "곰팡이", "낙화", "검은 반점", "기만자", "부녀", "모래성", "흑무", "복제인간", "잠꼬대", "목소리", "족적" 이라는 총 12편의 작품이 실려있습니다. 몇몇 작품은 20여페이지 내외의 꽁트 분량이지만 양적으로는 풍성합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일본 사회파적인 느낌이 물씬 납니다. 그러나 암울했던 독재시대인 80년대 당시의 분위기를 작품과 캐릭터, 설정에 드러내면서 이야기와 연관시키는 본격적인 사회파 작품은 아닙니다("검은 반점"에서 노동운동이 약간 표현되는 정도입니다). 분위기만 따라갈 뿐이지요. 그래도 황금만능주의를 주요 테마로 하여, 범행의 동기와 수사의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부분은 정통 사회파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또한 "낙화"나 "검은 반점"의 트릭은 작품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기대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 주며, "부녀"나 "모래성"에서의 경찰 수사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한국 추리문학에 이런 작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을 심리묘사 중심으로 끌고나가는 문장력도 빼어납니다. 순수문학가 출신다운 내공을 유감없이 보여주네요. 한국적인 특색을 살린 몇몇 묘사들도 굉장히 반가웠고요. 그야말로 숨겨졌던 한국 추리문학의 재발견에 가까운 작품이랄까요.

그러나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추리소설"로 보기에는 부족하다는 단점이 큽니다. 수록작 대부분은 '"A"가 저지른 사건에는 "B"과 관련되어 있고 "A"와 "B"가 티격태격하다가 전혀 엉뚱한 "C"에 의해 사건이 밝혀진다.'는, 반전도 아닌 깜짝쇼에 의존한다던가, 결국 범인이 자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이 너무 많습니다. 사실상 독자가 추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어요.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들과 설정 등에서 지나칠 정도로 유사성을 보이는 점도 거슬렸던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표제작인 "절벽"의 예를 들 수 있겠죠. 이 작품은 마츠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상권에 수록된 "수사권외의 조건"의 설정을 많이 따라했거든요. 사실 백영호라는 인물이 복수를 위해 "8년"의 세월을 기다리며 자신을 감추는 과정과 범행에 대한 디테일(상상이지만)은 거의 똑같습니다. 작품 내에서도 "소설"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정도니까요.
"잠꼬대"라는 작품에서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과 주요 트릭을 언급하고 있으며, "곰팡이"는 "제로의 촛점"과 캐릭터 면에서 유사한 등 많은 부분이 겹칩니다.

그리고 작품마다 여러 고전과 명대사, 명언등이 언급되고 철학적 주제를 논하기까지 하는데 영 별로였습니다.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탓입니다. 이런 쓸데없는 묘사를 들어내면 작품이 더 깔끔해졌을텐데 아쉽네요. "추리소설"이 그다지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70~80년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아주 색다른 작품들이었고 좋은 독서였습니다. 비록 많이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한국 추리문학을 논할때 빼놓으면 안되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작품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인 의미도 크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85년도에 출간된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정보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야속합니다. 구하실 수 있다면 한번 찾아서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절벽

이승준은 과거 가난했지만 사장의 딸 홍정아와 결혼하여 출세했다. 그러나 과거의 첫사랑과 우연히 조우하여 불륜을 저지르고, 과거 부하 백영호의 아내와도 불륜관계였다가 그 아내를 사망케하고 도주한 과거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백영호는 때를 기다린다...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출세하고 싶었던 가난뱅이 청년과 황금만능주의는 "아메리카의 비극" 등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테마죠. 하지만 이 작품이 특이한 것은 출세를 위해 과거 교제했거나 임신한 여인을 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출세하고 난 뒤에 불륜이 시작된다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한국적인 전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지나치게 통속적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래도 공범자가 있다는 트릭과 주인공들의 심리묘사가 잘 어우러져서 상당한 수준의 사회파 추리물로 만들어 졌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백영호"라는 인물의 설정을 앞서 말했듯 마츠모토 세이초 작품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따왔다는 점입니다. 좀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곰팡이"

부유한 저명인사 허진영은 그녀의 과거가 양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김학수라는 인물에게 협박을 당하는데.... 

6.25 동란때의 숨겨야 하는 과거와 현재가 밀결합되고 있는 점, 그리고 과거에서 파생된 범죄가 범죄를 낳는 점 등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따르고 있는 작품입니다. 나름의 트릭과 사건 전개, 그리고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요.

그러나 마츠모토 세이초의 "제로의 촛점"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협박자와 내연의 관계에 있어 같이 살해당한 여인을 쫓아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탐정역의 박상호라는 인물이 별로 와닿지 않는다는 단점이 아쉽습니다.

"낙화"

화가인 내가 작품 활동을 위해 머무는 산장에 친구 박희주 부부가 찾아와 머물게 되었다. 박군은 아내 문영과의 사이가 멀어진 뒤 처제 난영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문영이 산장 베란다 밑 절벽으로 떨어져 죽었다. 방은 밀실상태였고 문영의 손에는 박희주의 양복단추가 쥐어져 있던 상태였다. 

밀실 + 심리 트릭이 돋보이는 잘 짜여진 정통 추리물입니다. 지나칠정도로 치정극으로 치우쳐져서 통속적으로 흐를 수 밖에 없는 인물 설정과 상황 묘사들로 추리적인 매력이 많이 희석된게 아쉽지만 나름대로의 동기와 트릭, 범행방법 모두 납득할만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결말부분에서 너무 "끝"을 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튀었다는 것인데 그래도 작품에 흠집을 낼 정도는 아닙니다.

"검은 반점" 

신혼여행 중 신부 한미숙이 바닷가에서 실종된 후, 위도라는 섬에서 청산가리를 음독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시체가 입고있던 실내의가 바닷물에 오염되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바닷물로 흘러간 상태는 아니었지만, 구역내의 어떠한 배도 위도로 여자를 실어다 준 배는 단 한척도 없었다. 

시체가 어떻게 그 섬에 있을 수 있었을까? 라는 순간 이동 트릭을 테마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꿔치기 트릭도 등장하는 등 추리적으로는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가 바탕이 된 듯한 디테일도 마음에 들었고요.

하지만 범인이 시체를 은닉하거나 자연스럽게 유기하지 않고 부자연스러운 상태로 만든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과 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맥없이 범인의 자백으로 작품을 마무리 지은 것 때문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좀 힘드네요.

"기만자" 

주인공의 독백만으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작품입니다. 과연 아내 희숙을 죽인것은 또는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경선을 죽게 만든 것은 누구인지, C군은 어떻게 된 것인지가 뒤엉켜서 흘러가는 복잡한 작품이기는 한데 썩 재미는 없더군요. 참신한 시도는 눈여겨 볼 만 하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습니다.

"부녀" 

진아물산 사장 김인호의 큰딸이 밀실에서 청산가리에 의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녀가 자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형사 김익수는 치밀한 수사 끝에 여러 정황증거를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게 되는데... 

과거의 사건에 의한 범죄라는 테마는 사회파 추리소설에 흔히 나오는 것이죠. 이 작품은 과거의 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현재에 다시 범행을 저지른다는 줄거리와 더불어 현재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경찰의 치밀한 수사가 디테일하게 그려진 전형적 사회파 추리소설입니다.

작중에 경찰 스스로의 입으로 밝히듯 결정적 증거가 없다!라는 추리소설로서는 사실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결말도 범인의 자백으로 끝나는 등 "추리" 적인 요소로만 본다면 조금 부족하긴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전개는 지금 읽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수작입니다. 디테일한 수사와 여러 단서를 통해 유추해내는 추리가 무척이나 설득력 넘치는 덕분입니다.

"모래성"

H부동산의 회장 신병호가 자신의 저택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수사관 한정수는 제한된 단서와 증언을 토대로 서서히 범인을 추적해 나가는데... 

여러 용의자, 복잡하게 꼬인 단서들과 서로 다른 증언들이 교차되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수사 추리물입니다.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범행을 하기 전 똥을 누면 운이 좋다"와 같은 속설까지 작품에 끌어들일 정도로 세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소설 속 불가능 범죄가 아닌 현실의 실제 있는 강도사건을 보는 듯한 자세한 상황 및 배경 묘사가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발자국이나 침투경로, 새벽에 들은 소리, 왜 비상벨을 누르지 않았는지 등의 다양한 단서들을 필요할 때 마다 하나씩 던져주는 등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하지만 신병호의 과거와 현재, 강남 복부인들과의 관계라던가 실제 사건에서의 몇몇 미심쩍은 단서 등 벌려놓은 소재를 미처 수습하지 못하고 서둘러 끝맺은 마무리 부분이 너무나 아쉽네요. 보다 긴 중편 이상 길이의 본격 사회파 추리소설로 전개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추리문학의 고전으로 길이 남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말이 매끄럽지 못해서 평작에 머무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시 읽어봄직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흑무"

문학교수 김용석은 학문에서 좌절하고 부인 이지영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여 술로 고독을 삼키던 중,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한 여인에게 끌려 그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복수극이긴 한데 치밀한 맛이 떨어지는 소품입니다. 주인공의 단골 술집에서 접근한 여인, 그에게 원한이 있는 범인 등 한번 수사를 한다고 치면 걸려들 내용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범죄로 가장하기에는 너무 미흡하지 않나 싶더군요. 작가의 순문학에 대한 강박관념이 느껴질정도로 토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문학적인 이론과 평가가 난무하는 것은 내용에 혼란만 더하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복제인간 

2015년 서울 교외의 아파트촌에서 주미리여사가 살해당했다. 사건과 더불어 복제인간 유아 성추행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근미래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흉기가 총이라는 것과 복제인간 아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SF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게 특이합니다. 사실상 복제인간 아이라는 것도 "쌍둥이"라는 설정을 위해 가져온 것이니 만큼 별다른 것이 없어서 왜 근미래를 무대로 묘사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이야기 자체는 평이하고 예상대로 전개되기에 딱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소품 수준의 평작입니다.

"잠꼬대" 

최건호는 아내 은영의 불륜을 의심하여 여러가지로 그녀를 시험해본다. 그러던 중 은영이 독극물에 중독되어 숨지고, 사건은 자살로 판명되는 듯 하지만.... 

한마디로 "의처증"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집요하고 수법이 잔인한 편이라 좀 놀랍더군요. 시대를 앞서간 듯한 강박증에 대한 심리묘사도 대단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의처증 이외의 사건 전개는 너무 막 나가기에 좋은 평가를 하기 어려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건이 주요 전개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끝나버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의처증 증세의 진상이 폭로되는, 즉 최건호는 의처증으로 의심받아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앞부분에서는 결백한 듯 했던 은영이 실제로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는 식의 전개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목소리" 

박찬식은 사업과 연애의 라이벌이었던 정진호를 제거하고 그의 아내 미경과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미경이 살해되고 모든 정황이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자 박찬식은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자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도청과 가명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피력되는 복수극입니다. 하지만 "도청" 방법 이외의 추리적인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엔 무리가 있네요. 경찰의 수사로 인해 끝나는 결말 역시 많이 허무한 편입니다.

"족적" 

조숙경이 살해된다. 제1용의자는 불륜관계였던 화가 김기오. 그러나 김기오는 스스로 누명에 빠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 연상되는 이색단편입니다. 화자이기도 한 주인공이 스스로의 진술을 사기친다는 설정이 동일하거든요. 하지만 이야기가 정교하지 않으며 별로 공평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아서 굉장히 무리가 많습니다. 그 외에도 경찰이 확실한 정황증거가 있음에도 기소하지 않는 황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여러모로 평균 이하인 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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