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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03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2015) - 드니 빌뇌브 : 별점 3.5점

FBI 요원 케이트는 CIA 작전 참여를 명령받고 책임자 맷과 정체불명의 남자 알레한드로를 만났다. 그녀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맷과 알레한드로의 수사에 위협을 느꼈지만, 사명감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선을 넘은 소노라 카르텔을 응징하는게 아니라, 그 세력을 메데인 카르텔에게 귀속시키는게 목적이었다는걸 알게 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2015년작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명성만 익히 듣고 그동안 보지 않았었는데, 와 정말 잘 만든 영화더군요. 특히 연출이 압도적입니다. 특수 효과나 과도한 액션 없이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솜씨가 대단한 덕분입니다. 절묘한 구도 및 빛과 그림자를 이용한 미장센, 배우들의 의상, 절정부 터널 진입 씬에서의 야시경 등 모든 디테일이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며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고요. 그야말로 '삭막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건조한 멕시코 국경 지대 풍광 묘사도 좋습니다. 

맷과 알레한드로의 진짜 목적을 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알레한드로의 복수심을 설득력있게 전개한 각본도 좋습니다. 정의롭지만 힘이 없고 방관자에 머무는 케이트, 강한 힘으로 불법이면서 강요된 정의를 행하는 맷, 힘을 이용하여 복수를 달성하는 알레한드로라는 등장인물별 설정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습니다. 케이트 역의 에밀리 블런트는 임무에 충실하면서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의로운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로서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강한 마초 미국'을 상징하는 맷 역의 조시 브롤린도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요. 무엇보다도 정의를 넘어선, 치외법권의 '시카리오(암살자)'인 알레한드로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는 복수심과 고독함, 그리고 전략가로서의 냉철함과 충분한 무력을 동시에 갖춘 인물을 강렬하게 표현합니다. 
알레한드로가 카르텔 보스 일가족을 모두 죽인 뒤, 케이트에게 나타나 모든게 정당했다는 서류의 서명을 강요하는 장면에서 두 명배우의 불꽃튀는 연기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액션 쪽은 다소 심심합니다. 총격전이나 대규모 액션보다는 심리적으로 긴장하게 만드는 전개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액션도 '상상력'에 의존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고요. 주인공 케이트가 관찰자이자 이용당하는 인물로 머무는 탓도 큽니다. 그녀의 능동적인 활약은 거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때문에 액션에서 느껴지는 쾌감이나 재미는 전무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맷과 알레한드로가 케이트에게 작전 내용을 숨긴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작전이 불법이라서 숨겼다? 하지만 이 작전은 대통령급의 결정이라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현장 요원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 설정은 말이 안됩니다. 결국 마지막에 반 협박으로 불법이 아니었다는 서류에 서명하게 만들기까지 했다면 더더욱요. 말 잘 듣는 FBI 요원에게 작전에 협력하라고 설득하는게 훨씬 쉬운 방법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임에도 예술성을 갖춘 보기드문 수작입니다. 마약 카르텔 소탕 작전이라는 뻔한 소재를 통해서 국가의 폭력성과 목적의 정당성을 묻는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데 놀라게 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22/03/04

시크릿 스파이 - 헤더 베센트 외 / 박지영 : 별점 2점

시크릿 스파이 - 4점
헤더 베센트 외 지음, 박지영 옮김/시그마북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첩보 활동의 역사를 정리해서 알려주는 책으로, 시대 순으로 유명 스파이와 첩보 활동, 주요 활약상 및 스파이들이 사용했던 장치, 암호 등을 소개해 줍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250여 페이지의 분량을 풀 컬러로 가득 채운, 화려한 도판입니다. 모든 주제를 한 장 안에 도판과 함께 담고 있어서 읽기 쉽다는 점도 장점이고요. 흥미로운 주제를 짤막하게 요약하여, 다양한 도판과 함께 담았다는 점에서 '카드 뉴스'를 연상케 합니다.

역사 속 유명 스파이, 첩보 활동 중 몰랐던 내용도 많았습니다. 남북전쟁 때, 노예해방론자들과 흑인 노예들은 남부 연합 안에서 정보원 활동을 했었고, 반대로 노예제를 지지했던 사교계 인사 로즈 오닐 그린하우는 북부에서 정보를 수집해 전달했다는 이야기처럼요.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네요. 영국이 인도 지형을 조사할 때 고용했던 현지인들 중 가장 유명했던 '1번' 나인 싱 라와트도 보다 상세하게 조사해 보고 싶어졌고요. 

1차 대전 시기부터는 친숙한, 고전적인 스파이 활동 이야기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는, 약간 낭만적이기까지도 한 그런 이야기들 말이지요. 외다리였던 몸을 이용하여 측량 기계를 의족을 숨긴 채 독일의 알프스 지역 요양원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다녔던 미국인 하워드 버넘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건강 악화로 죽을 때 유언마저도 '독일군은 알프스 산맥에 전선을 구축할 계획이 없다' 였다니, 죽음마저도 고전전이네요. 프랑스에서는 평범한 주부였던 루이즈드 베티니가 첩보망을 조직, 운영하였고, 벨기에에서는 '하얀 여인' 첩보방을 전화 기술자 발테르 드베가 운영했다는 등의 일반인 영웅들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부유한 사회 지도층 아마츄어들 - 백만장자 빈센트 에스터, 루스벨트 주니어 - 이 뭉쳐서 '더 룸' 이라는 명칭으로 첩보 활동을 했다니 확실히 미국적이다 싶군요. 당시 미국인이 머나먼 유럽 등을 정탐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했을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또 러시아에서 활약했다는 영국의 에이스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는 사실 별 활약 없이 1925년, 볼셰비키 타도를 목적으로 러시아에 재입국하다가 체포되어 총살되었다는 등의 팩트 체크도 볼거리였고, 치머만 전보의 암호 해독처럼 실제로 전쟁에 큰 역할을 했던 놀라운 성과들도 눈에 뜨였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는 막강해진 국가별 정보 기관들과 고위층 스파이 '두더지' 들, 상대편 스파이들을 속여서 체포하고, 내부 스파이들을 솎아낸 뒤 처형하거나 변절자로 만드는 (더블 크로스 시스템) 등 현대적인 스파이 작전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이 중에서는 독일 해외방첩청 아프베어의 수장이었던 빌헬름 카나리스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반나치 정책을 나름대로 펼친 끝에, 종전 직전 사형당했다는데 과연 살아있는채로 종전을 맞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조금 궁금합니다. 아무리 반나치 주의자였다 한들, 방첩조직의 우두머리였다면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런데 미드웨이에서의 일본군 패배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는 모두 정보가 미리 유출되었기 때문이며, 영국이 에니그마를 해독한게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내용은 좀 과장된 것 같습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물론 독일 침공을 사전에 첩보원들이 파악하여 제보했지만, 이를 무시했던 스탈린의 사례를 볼 때, 첩보 활동 자체가 중요하다는건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탈린이 이렇게 그를 위해 일했던 첩보원들을 전쟁 후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는 후일담이 더 인상적이기는 했습니다만.... 

독일 최고의 스파이로 중립국 터키의 영국 대사 휴 내치불휴게슨의 부하였던 바즈나의 활약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코드네임이 오버로드라는 등의 고급 정보를 넘기는 활약을 했지만, 독일은 그 정보의 진가를 몰라봤다지요. 심지어 그에게 준 30만 파운드의 거액도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 찍어내었던 위조지폐였다고 하고요. 기승전결이 완벽한, 한 편의 영화같은 일화였습니다.

냉전부터는 음모와 배신이 판치는 존 스마일리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로젠버그 부부 이야기 등 익히 잘 알려진 사건들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 중에서는 M16의 수장으로 KGB 스파이였던 킴 필비와 그의 동료들이었던 이른바 케임브리지 5인조와 이스라엘이 시리아 고위층에 침투시켰던 스파이 엘리 코헨의 흥망성쇠가 흥미로왔습니다. IBM과 히타치의 분쟁 등 산업 스파이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는데, F1 레이스에도 산업 스파이가 개입했었다는건 처음 알았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자동차 디자인과 설계가 성공의 필수적인 요소이니까요. 페라리의 정비사 나이절 스테프니가 멕라렌에게 정보를 넘겼던 사건인데, 스테프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마무리되어버려 조금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사이언톨로지교가 자기들의 면세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백설 공주 작전'이라는걸 벌였다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국세청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연방 검사 사무실까지 뒤졌다니 종교의 힘이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나라도 힘 있는 사이비 종교들이 최근 많아진 듯 한데, 항상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첩보 활동 외. 첩보 기술에 대한 설명들도 볼만했습니다. 동독의 '로미오 스파이' 작전처럼요. 25~35살 사이의 교육을 잘 받은, 잘 생기고 매너 좋은 남자들을 이용하여 서독 여성들을 포섭했다지요. 러시아의 여성 해외 정보 요원 '스패로'는 이와 반대로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받았다는데, "레드 스패로"라는 영화가 나올 정도로 흥미로운 소재인건 분명해 보입니다. 두 작전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 조금 궁금하기는 합니다. 

카메라, 통신 장비, 암살 장비 등의 소개는 비밀 무기류에 사족을 못 쓰는 제 동심을 자극해 주었습니다. 독침 우산과 청산가리 가스총이 언급되는데, 이 둘을 합친 장비가 "마스터 키튼"에도 등장했었지요. 고양이 몸 속에 배터리, 안테나, 마이크를 장착하여 도청하려는 '어쿠스틱 키티' 계획도 황당하지만 멋졌고요. "쉬리"가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였는지 새삼 감탄하게 만드네요. 1984년 미국 모스크바 대사관, 레닌그라드 영사관의 타자기에 설치되었다는 키 자동 기록기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결합한 기묘한 레트로함이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타자기 내부에 설치되어 활자 뭉치가 회전하며 일으키는 자기장 교란을 측정하여 입력되었을 법한 글자를 추측한 뒤, 전파를 터트려 도청자에게 수집한 정보를 보내는 장치였다는데, 당시 기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하이테크 기기였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왔던 이야기도 많지만,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주제를 한 장으로 요약한 탓에 깊이가 없으며, 스파이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도 많다는 점입니다. 특히 고대 시대 이야기는 너무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가 스파이 덕분인 것 처럼 써 놓았을 정도로요. 실제 내용을 보면 스파이가 아니라, 단순히 사전 염탐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지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패배 역시 정찰이 부족한 탓이었을 수 있겠지만, 이 역시 스파이 활동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패권이 무함마드가 스파이 활동에 통달한 덕분이었다는 언급도 어처구니 없었고요. 

이런 류의 과장은 뒤에도 계속됩니다. 나폴레옹이 아우스테를리츠에서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게 스파이 카를 슐마이스터가 거짓 정보를 뿌려 오스트리아 군이 속았기 때문이라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남북 전쟁 당시, 영국에 사무소를 두고 남부 목화 판매 댓가로 전쟁 물자를 구입했던 제임스 불럭을 스파이라고 부르는 것도 억지였고요. 이건 단순한 통상 업무에 지나지 않잖아요? 암살과 테러범들 이야기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별로 와 닿지는 않았어요. 심지어 고급 창부였던 '크리스틴 킬러' 마저도 한 챕터를 차지한다는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또 암호에 대한 소개가 적지 않은데, 9세기 학자 야쿱 이븐 이스하크 알 킨디가 암호학을 발전시켰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어떤 글자가 다른 글자보다 많이 사용된다는 원리인 빈도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라는 등 볼거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관련된 도판도 충실했고요. 그러나 이런 류의 책은 이미 "암호의 과학" 등에서 많이 보아와서 별로 새롭지 않았고, 책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으나, 가격에 비하면 별로 깊이가 없어서 감점합니다. 이 책 보다는 특정 스파이 활동과 작전, 혹은 암호 등에 촛점을 맞춘 다른 전문 서적을 읽어보는게 훨씬 낫겠습니다.

2021/02/13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레너드 카수토 / 김재성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10점
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뮤진트리

부제는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사"입니다. 말 그대로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의 역사적 변곡점,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고 있는 문학사 서적이지요.

간단하게 정리해본다면, 하드보일드의 통로 역할을 한 작품으로 소개된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입니다. 가족과 신앙이 도덕적 삶의 기초이고 중심이었던 19세기 모델에서 산업화, 도시화로 급변한 20세기 초 지극히 미국적인 범죄 행위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 전통적 가족 모델이 서서히 해체되는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 대쉴 해밋"몰타의 매"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신뢰의 결핍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기업화와 함께 찾아온 사회 경제적 변화 때문이지요. 당시 석유 회사에서 시작된 '트러스트' 체제 등장으로 가족 메타포가 기업 세계로 편입되었고, 기업 관행이 모든걸 지배했던 세계입니다. 그 결과, 전통적 가족 관계는 붕괴하고 이기적 개인들이 가족 유대 관계와 의무에서 벗어나 공감따위는 저버리고 돈만 쫓아 날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돈과 신뢰가 위험한 세상에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고, 샘 스페이드가 매로 상징되는 '투기'를 거부하는 모습은 1929년 주식 시장 폭락을 반영하며, 매 조각상이 가짜라는건 투기 역시 환상이라는걸 의미합니다. 광란의 투기 경제에 대한 해밋의 비판적 시각을 잘 알 수 있지요. 또 주목할만한건 '진짜 남자'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쉴 해밋은 남자를 남자로 만드는건 정당한 보수를 받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페이드는 직업을 잃을 어떤 모험도 하지 않고요. 반대로 부자들은 무르고 기괴하게 여성적입니다. 돈 많은 악당들을 여성화하여 폄하한 겁니다.

그리고 대공황 시대를 잘 드러내는 작품은 제임스 M 케인의 "밀드레드 피어스"입니다. 하드보일드와 감상주의가 결합된 작품이지요. 밀드레드는 감상주의에 빠져 완벽한 가족을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 딸과의 관계가 파괴된 후 술에서 위안을 찾는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결말로 가정사는 더 이상 여성 공동체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걸 알려줍니다.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으로 급작스럽게 모든게 변한 탓입니다. 뉴딜은 현대 복지 국가라는 개념으로 가족이 수행했던 보호 관리 역할을 정부가 맡아 수행했기 때문에 공감과 감성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여성은 뒤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 하드보일드 소설은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 관료주의가 가정과 사회의 도덕적 중심이라는 자리를 차지했고요.

대공황 이후 가족은 위협받고, 남성은 남성상의 기본 토대인 가족 부양자로서의 정체성이 몰락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탄생한게 완벽한 남자 필립 말로입니다. 위협받던 남성상과 파편화된 가족을 구하는 영웅으로, 배트맨과 슈퍼맨 탄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말로는 무너진 의뢰인이나 관계자들 가족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감상적이고 선한 영웅이거든요. 이는 구시대 하드보일드 태동기의 냉혹한 회의주의와는 정 반대 모습이에요. 가정이 중심이 되며,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1950년대에 접어들면, 말로는 더 깊숙이 사건에 개입하고, 더 정서적으로 엮이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기나긴 이별"로 말로는 일이 아니라 일의 수혜자에게도 충성합니다. 이거야말로 감성적인 부분이지요. 이렇게 1950년대에 과도한 남성상을 지닌 폭력적인 마초가 부드럽고 감상적인 영웅으로 변한건 냉전 시기, 강한 미국과 안정된 가정이라는걸 유지하려는 분위기 탓으로 설명됩니다. 가장 끔찍했던건 사회 질서의 붕괴를 뜻하는 여성의 일탈이었고요. 그 덕분에 이 때 진정한 의미의 '요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순위를 매기자면, 일하고 능력있는 여성도 나쁘지만, 동성애자는 전통적 가족의 대립항이라 훨씬 더 나빴고, 무엇보다도 잠재적 어머니 역할을 고의로 방기하는 여성 동성애자는 최악 중 최악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짐 톰슨은 풍요 속 공포와 우려를 표현했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고향에서 뿌리를 잃은 도덕적 불안을 작품에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두 작가 작품 속 주인공들 모두 피해자들에 대한 감상주의적 공감이 최대의 능력으로 묘사되며, 감상주의를 중산층에서 분리해서 상류층에 국한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주의가 위험하다는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특기할 만 합니다.

1960년대 들어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더욱 친절해지고, 범인들은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탐정들은 가정을 중시하는 감상주의자에 심지어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페미니스트이기도 할 정도로요. 이 시기, 로스 맥도널드는 무너지는 가족 관계를 그렸는데, 모자간 결합의 단절을 통해 부모들의 책임 회피와 피해자는 아이들이라는걸 나타내었습니다. 이는 반항하는 자녀와 무력한 부모라는 1960년대 세대간 갈등을 극명하게 투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젊은이들의 신뢰를 받고 파괴된 가족을 복원해주는건, 연민, 공동체적 결속과 공감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폭력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는 사립 탐정이고요. 이렇게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립 탐정 속성의 변화는 여성 탐정들을 등장시킵니다. 반면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이 된 범인들은 결국 연쇄 살인범으로 진화하였습니다. "레드 드래곤"이 연쇄 살인범 소설의 교과서적 캐릭터와 기본 플롯을 제공한 뒤, 포화상태를 넘어서 공급 과잉상태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20세기 후반 미국 정부의 정신질환 정책과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신질환자가 공감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괴물로 변한 뒤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으며, 연쇄 살인범은 이 대상화 작업에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현대 연쇄 살인범 소설까지 큰 흐름을 일람하고 있으며, 흑인 범죄 소설과 같은 특이점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미국 근대사와 범죄 소설의 흐름이 절묘하게 일치하는게 신기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대표작에 대한 소개도 상세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문제라면 저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던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이나 탐정 스펜서 시리즈에 대한 호평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책에서 소개하는, 제가 읽지 못한 다른 작품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할 수 밖에 없지요. 60년대 이후 범죄 소설의 흐름에 대한 소개는 별로 자세하지 않다는 점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장르에 대한 문학사이자 비평서로서 재미와 가치 모두를 충족시키는 좋은 책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와 범죄 소설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리뷰를 쓰기 어려웠어요.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삼아 읽기 시작했던게 문제였습니다. 약간은 공부하듯 분석하고 정리해야 내용 요약이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리뷰로 이 책을 잘 소개하지 못한건 다 제 공부가 부족한 탓입니다....

2020/05/08

할로 저택의 비극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3) - 애거서 크리스티 / 원은주 : 별점 1.5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3 (완전판) - 4점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에서 걸작이라고 추천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저에게는 걸작이 아니었습니다. "완전 공략"의 기준과 제 기준이 다르다는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작품은 그 차이가 너무 심해서 놀랄 정도에요. "완전 공략"에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살인'에 다다르기까지의 드라마의 정점이며, 등장하는 여성들이 매력적이면서도 무척 슬픈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데, 뭐 하나 동의할게 없습니다.

특히 시작부터 약 80여 페이지에 이르는 초반 분량은 짜증 그 자체입니다. 루시 앵커텔을 비롯하여 존과 헨리에타, 게르다 등이 등장하여 각자의 푸념을 늘어놓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 극에 달한 이기주의자들로 각자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존 크리스토는 그 중에서도 최고봉이고요. 지구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제 옆에 있다면 한 대 때려 주었을겁니다.
베로니카 역시 존 못지 않은 이기주의자에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을 갖춘 인물이며, 루시 앵커텔 역시 존 크리스토가 죽고나서 바로 헨리에타와 에드워드를 이어줄 생각을 하는 등, 자기 가문만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별로 다르지 않고요. 솔직히 존이 살해당하는 순간,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죽어도 싼 놈이 죽은 기분이라서요. 이게 슬픈 이야기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존 크리스토와 베로니카, 루시 앵커텔이 그나마 이 작품에서 가장 생동감넘치고 살아있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다른 인물들은 그들의 숭배자거나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는 딱 한명, 여주인공 헨리에타만 비교적 공평한 시각에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인물로 묘사될 뿐입니다.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의 이기주의자들과 그의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이야기가 재미있을리 없지요.

추리적으로도 별볼일 없습니다.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도 않고, 사건이 미궁에 빠진건 단지 운이 좋았으며 우연찮게 주요 등장인물들이 범인 게르다를 감싸주었기 때문이니까요. 특히나 앵커텔 가문의 정점에 있는 루시 앵커텔이 작정하고 도와준 덕분에, 게르다가 당장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게 사건의 전부입니다.

또한 동기도 문제가 많아요. 게르다가 남편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동안의 숭배의 감정이 배신으로 일그러졌다는 것 자체는 말은 됩니다. 그러나 존은 이전에도 바람을 피운걸로 묘사됩니다. 이전의 불륜, 바람은 참고 넘어갔는데 눈 앞의 불륜을 참지 못하고 살의에 휩싸여 계획적인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작 중에서도 이전에 불륜을 저지른 적이 있지만, 별 일 없었기에 게르다는 범인이 아닐거라는 식으로 묘사할 정도인데 말이죠. 이 이유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으니, 제대로 된 동기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살의 역시 게르다 시점으로는 한 번도 묘사되지 않아서, "공략"에서 이야기한대로 '살인'에 다다르기까지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이러한 주변 시점의 묘사는 동기를 감추고, 게르다 말고 다른 범인역을 내세우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합리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요. 용의자도 뻔해서 이렇게 다른 범인역을 내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피해자 존을 비롯, 헨리, 에드워드, 데이비드라는 지나가는 행인스러운 이름의 남성들은 모두 주변인이고 곁가지이며, 미지는 존이 죽어버리면 헨리에타가 에드워드와 결혼할 수도 있으니 범행을 저지를 리 없어요.
즉 루시 앵커텔, 헨리에타, 베로니카, 게르다가 유력한 용의자인데 앞서 이야기했듯, 루시와 베로니카는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운명과 인생을 스스로 리드해가는 여성들입니다. 헨리에타 역시 마찬가지고요. 이들이 타인 때문에 자신의 위험을 감수한다는게 와 닿을리 없지요.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보자면, 우선 루시의 동기라면 앵커텔 가문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입니다. 에드워드가 헨리에타를 좋아하니, 둘이 결혼하면 만사형통인데 헨리에타가 존과의 관계 때문에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지요. 그러나 에드워드의 헨리에타를 향한 마음이 영원할거라 믿는 건 억지스럽습니다. 실제로 사건 이후 에드워드는 미지와 결혼하죠. 설령 당장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에드워드의 다음 세대인 데이비드가 건재하니 가문 걱정은 너무 이릅니다.
그렇다면 여배우 베로니카가 범인일까요? 그러나 세계적인 여배우인 그녀가 15년만에 만난 존에 대한 질투심을 폭발시켜 살인까지 저지른다는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베로니카와 존의 다툼은 널리 알려졌으니 그녀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 이유도 없고요.
그나마 헨리에타가 용의자로는 유력한 편입니다. 그녀는 존이 베로니카와 하룻밤을 보낸걸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불륜녀가 불륜남의 또다른 연인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 이 역시 현실적이지 않은건 마찬가지입니다. 여사님의 묘사도 중반까지는 루시 앵커텔을 독자에게 범인역 먹잇감으로 던져주는걸 보면 현실적으로 헨라에타를 범인으로 몰고가는건 어렵다는걸 알았던게 분명합니다.

아울러 주요 인물들이 모두 게르다를 도와준 이유는 아예 설명되지도 않는 점, 게르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당장은 빠져나갔다손 치더라도 영원히 은폐가 가능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포함하면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할로 저택의 총을 쓴 이상, 외부에서의 침입자 가능성은 없으니 누군가는 죄를 뒤집어 썼을게 뻔하거든요. 과연 다른 누군가가 혐의를 받는데도 루시가 잠자코 있었을까요? 언제가 되었든 진범, 혹은 범인역을 내세웠어야 했을겁니다. 그럴거라면 가문의 사람이나 지인보다는 베로니카를 내세우는게 손쉬웠을텐데, 그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건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여기에 푸아로가 정말로 하는게 아무것도 없다는걸 더하면 이 작품이 정말로 추리 소설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푸아로가 진상을 알아챈건, 루시와 헨리에타 들보다도 훨씬 뒤이며,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아요. 푸아로의 유일한 활약이라면 마지막에 게르다와 헨리에타가 만나는 자리를 찾아와 헨리에타가 독살당하는걸 막고 게르다가 죽게 만드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등장인물이 다 모인 자리에서의 추리쇼는 이거에 비하면 극사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게르다가 실제로 멍청하지는 않고 '멍청한 척' 했다는걸 초반부에 드러낸다던가, 헨리에타가 사건에 사용된 총을 조각상 안에 감춘다던가 하는 디테일은 나쁘지 않지만,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리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기주의자들의 장광설을 참고 볼 만큼 추리적으로나 다른 면에서 가치가 있지 않습니다. 

제가 보는 시각이 "완전 공략"과 다르다는걸 뼈저리게 깨달았으니, 이제 더 이상은 "완전 공략"에 의지하지 않고, 다른 기준으로 책을 골라봐야겠습니다.

2020/03/22

희망장 - 미야베 미유키 / 김소연 : 별점 3.5점

희망장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미야베 미유키의 시리즈 탐정 중 하나인 스기무라 사부로가 등장하는 단편집입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유명세에 비하면 제가 많이 읽은 작가는 아닙니다. "화차"는 제 올타임 베스트 10에 언제나 꼽을 수 있는 걸작이고, 다른 작품들도 대체로 평균 이상이지만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지는 않더라고요. 가장 큰 이유는 500페이지는 훌쩍 넘기는 대장편이 많은 탓입니다. 두께만 봐도 먼저 질리는 느낌이거든요. 에도 시대물은 재미있긴 했지만 별로 취향이 아니었고요.
이 책 역시 거의 500페이지에 이르는 두께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부 활동이 극히 적어진 요즈음, 이런 책이 집에서 진득하게 읽기에는 오히려 좋겠다 싶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고 괜찮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재미의 핵심 요소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탐정과 일반인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있으며, 추리력과 더불어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관찰력을 선보이는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는 "탐정 사전"을 통해 존재를 알게된 뒤,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만 해 왔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더욱 감개무량하네요. 평상시 흠모하던 스타와 우연히 동석하여 식사를 했는데, 스타가 밥값까지 내 준 격이랄까요. 두 번째는 평균 이상되는 추리물로서의 완성도고요.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평균 이상의 좋은 작품들이었습니다. 전부 평균한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전작을 꼭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은 참고 부탁드립니다.

"성역"

이혼한 독신남으로 사립 탐정업과 조사로 먹고 사는 38살의 스기무라 사부로에게 기념할 만한 첫 손님이 찾아왔다. 이웃 맨션 파스텔 다케나카에 사는 독신 여성 모리타였다. 그녀의 의뢰 내용은 유령의 정체를 밝혀달라는 것으로, 그녀의 아래층에 살다가 사망한 할머니 미쿠모 가쓰에를 꼭 닮은 사람을 보았는데 가난에 허덕이던 미쿠모 할머니와는 다르게 그녀는 유복해 보였다고 했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조사의 의뢰비는 착수금 5천엔과, 2년 동안의 쓰레기장 청소 당번 대행이었다.

조사 시작과 거의 동시에, 스기무라는 곧 죽을거라는 전화만을 남기고 사라진 미쿠모 할머니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남겨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이루어진 죽지 않은 그녀가 지금 유복해보이는건 뭔가 인생 역전의 계기가 있었다고 추리하고, 옛 주소지에서 연을 끊다시피한 딸 역시 행방불명이라는걸 알아내 둘 사이에 뭔가 연결 고리가 있다는걸 알아내지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복권 당첨에 당첨된 할머니가, 딸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둘이 새로운 삶을 찾아 과거를 모두 버리고 떠났다는 결말까지 차분히 이어집니다.
이를 위한 중간중간의 디테일들도 꼼꼼합니다. 38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그런데 작중 배경인 2010년에 38살이면, 저와 동갑이네요. 호감도가 더욱 증가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배려를 소중히 여기는 스기무라 사부로도 무척이나 호감가게 그려지고요.

조금 특이했던건, 불쌍한 할머니를 염려하는 동네 주민의 의뢰와 조사 중 자상한 동네 주민들의 도움을 받는 따뜻한 분위기와 딸인 지독한 이기주의자 미쿠모 사나에의 표독스러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사이비 종교집단으로 보였던 스타차일드 멤버들마저도 알고보니 착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라는게 밝혀집니다. 이들에 비하면 사나에는 그야말로 자기만 아는 압도적인 악역이에요. 문제는 사나에같은 인물이 우리 주위에서 더욱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겠죠. 할머니의 무사는 축하할 일이지만 이런 딸과 함께 산다면, 결말은 안 봐도 뻔할 거라는게 무섭게 다가옵니다.

스타차일드 멤버인 벨과 사나에의 악연, 그로부터 비롯된 가노쿠라 풍아당과의 관계는 사족이었다 생각되지만, 이 정도면 아주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희망장"

세상을 떠난 무토 간지는 죽기 전, 양로원 관계자와 아들에게 과거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고 고백했고 아들 아이자와는 스기무라에게 이 사실의 진위여부를 밝혀줄 것을 부탁했다. 주변인들을 통해 밝혀진건, 간지 씨가 쇼와 50년 8월, 젊은 여성이 습격당해 살해된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것이었다.

아이자와의 말에 따르면, 무토 간지는 데릴사위로 들어간 아이자와 가문으로부터 절연당한 뒤 어렵게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외도 탓으로, 그가 특정 여성에게 발끈하여 살해했을 수도 있다는건 충분히 가능했을거라고 설명되지요. 하지만 스기무라의 조사로, 그가 '사람을 죽였다'고 직접 표현한 적은 없다는게 곧바로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진상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밝혀내기 위해 성실하게 발품을 팔아 단서를 찾는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 활동은 정겹습니다. 오래전, 35년 전 거주했던 흔적을 찾아 거리를 헤메는데, 나름의 노하우가 눈에 띕니다. 음식점, 이발소, 미용실, 세탁소나 술가게 등 배달도 하는 업종의 가게 등을 돌아다니지만, 바나 스낵에는 기대지 않는다는 겁니다. 바둑 모임이나 장기 살롱은 있으면 좋은 정보원이지만 마작이나 파친코는 그 반대이고, 편의점은 별로 도움이 안되지만 학원은 도움이 된다던가, 파출소에는 들르지 말아야 한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류의 조사를 한다면 참고할 만한 정보네요.

하여튼, 이러한 스기무라 사부로의 조사로 35년 전 강간 살해 사건의 범인과 무토 간지가 같은 아파트 '희망장'에 살았다는게 밝혀집니다. 처음 방문했던 술가게에서 정보를 얻었더라면 이후의 조사는 별로 필요가 없었지만, 이런 시행착오가 오히려 현실감을 더해줍니다. 또 이 과정에서 탐정은 아무리 일상계라도 비정할 수 밖에 없다는걸 전해주는 부분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에게, 차가운 질문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인데, 굉장히 와 닿더라고요.

그리고 이어지는 스기무라의 추리에 따른 가설도 그럴듯합니다. 35년 전 사건의 진범이 무토 간지였거나, 진범 가야노 지로의 아주 친한 지인이었을거다라는 가설이지요. 당연히 35년전이라고 해도, 경찰을 우습게 보면 안되니 두 번째 가설이 정답이고요.
그렇다면 왜 무토 간지가 죽기 전 양로원에서 이상한 말을 했느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는 스기무라가 양로원 청소 스태프가 청소할 때 스포츠 타월을 접어 바닥에 까는 걸 보고 알아채게 됩니다. 무토 간지는 살인범을 본 적이 있어서, 그가 어떤 변화를 보이는지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양로원 청소 스태프 하자키가 살인을 저질렀다는걸 알고 그걸 은밀히 드러내려 했다는게 진상입니다.
최근에 일어났던 성폭행 미수 살인사건과, 35년전인 쇼와 50년 8월 사건 두가지가 마지막에 맞물리는 전개가 정말 멋집니다. 일평생 고독하지만, 정직하고 한결같이 살아온 무토 간지의 매력도 빛을 발하고요.

하지만 욕심이 조금은 지나친 느낌입니다. 35년전 피해자 다나카 유미코의 동생을 이야기에 포함시킬 필요는 없었어요. "그녀는 원래부터 재였다. 사람의 모습을 한 재다."와 같은 멋드러진 묘사에 비하면 등장해서 하는게 없고, 묘사도 담담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담아내기에는 지나친 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4.5점입니다! 지금도 좋은 작품이지만 불필요한 요소를 들어내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아니면 다나카 유미코 사건도 더 깊숙히 파고들어 더 긴 호흡의 이야기로 전개하던가요. 그랬다면 별점 5점도 충분했을텐데, 약간 아쉽습니다.

"모래 남자"

스기무라의 이혼 후 야마나시에서의 삶, 가키가라 스바루를 만나 조사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 등이 차분히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호토 가게 '이오리'의 주인 마키타 히로키가 이노우에 다카미와 불륜 끝에 사랑의 도피를 한 사건의 조사와 추리와 함께 진행되지요.

남편 마키타 히로키는 과거 문제아로 아버지에게 절연당했다, 지금 그의 사진은 남아있는게 없다, 사진을 확인조차 못했다는 이야기에서 당연히 과거 문제아 가가와 히로키는 지금의 마키타 히로키와는 다른 인물이라는건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다카미가 문제아 시절 과거를 노리코와의 친분 덕분에 알게 되었고, 돈이 궁해진 지금에 와서 그 정보를 협박의 도구로 썼으리라는 추리도 역시나 상상력 범주 안에 있고요.
하지만 이를 마키타 집에서 풍겨온 염소 냄새, 집 근처에 묘지가 있다는 상황 등과 연결하여 풀어나가는 전개는 오싹합니다. 협박을 '공포'의 문제로 풀어나가는 감각, 섬세한 심리 묘사를 통해 피해자들의 공포, 후회를 드러내는 솜씨도 실로 발군입니다.

하지만 이노우에 다카미가 살아있었으며, 이 모든건 히로키의 부탁으로 벌인 연극이었다는 진상 이후부터는 시시해집니다. 히로키가 지나치게 착한 탓에 벌어진 일이라서 마음이 무겁기도 했고요. 한 번 희생양은 영원히 그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느껴졌거든요.
같은 이유로 진짜 히로키로부터 위협받던 가짜가 진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건 의외이기는 했지만 와 닿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모든걸 알게 된 다카미가 어머니와 함께 사과했다는 후일담은, 결국 히로키의 연극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결말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카미의 철없는 악의가 결국 모든 걸 망쳐버렸다는 뜻이니까요. 게다가 본인은 잘못을 느끼지 못하며, 잘못을 깨닫고도 결국 민폐만 끼치고 말았다는 점에서 아예 사악함을 뿜어냈던 "성역"의 사나에보다도 더 질이 나빠요.

결론내리자면, 사건보다는 스기무라의 과거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던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도플갱어"

후쿠시마 사태를 일으킨 도호쿠 대지진을 소재로 한 작품.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태가 일본인에게 얼마나 공포였는지가 작품에서 은근하게 표현되는게 이채로왔습니다. 스기무라 사부로의 입을 통해 '일본은 키를 잃고 폭주할 것이다, 우리는 망망대해를 절망 속에서 떠돌 것이다'라는 비관적인 예측이 대표적이지요. 소시민과 상대적인 약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미야베 미유키의 특성이 잘 드러난 말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핵심 사건인 유타카 실종 사건의 추리는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지진으로 실종된 줄 알았지만 사실은 살해되었다는건 좀 뻔한 이야기죠. "브라운 신부"에서도 시체를 숨기려면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래도 동기가 그의 결혼 결심이었다는건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어요. 결혼을 결심하면 프로포즈를 해야 하고, 프로포즈를 위해 고가의 반지를 구입했으며 이를 범인이 유타카를 살해하고 빼돌렸다는 진상은 충분히 합리적이니까요.

그러나 전반적으로 작위적인 전개가 눈에 거슬립니다. 애초에 아스나가 스기무라에게 실종 조사를 의뢰한 것 부터가 작위적이에요. 스기무라가 그 의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조사를 한 것도 석연치는 않고요. 작 중 묘사되듯 '자원 봉사'로 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런 실종은 전문 단체에 의뢰하는게 맞는 상황이니까요.
마쓰나가가 유타카를 살해한 직후, 대형 재해가 때마침 벌어진 것 역시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재해가 일어난 후, 유타카가 프로포즈를 결심하고 , 그 탓에 마쓰나가와 트러블이 일어났다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또 사부로가 결정적인 단서를 잡게 된 계기인 아스나를 괴롭히는 나쁜 친구들이 사건에 엮인 과정도 설득력이 약합니다. 단서를 끄집어 내기 위해,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위한 억지스러운 느낌이 강했어요. 이 친구들이 등장하느니, 마쓰나가가 아스나에게 직접 연락하여 사귀자고 한 뒤, 그 징표로 비싼 반지를 선물한다는 식으로 풀어나갔더라면 더 어땠을까 싶네요.

명백한 살인 사건을 스기무라 사부로가 해결하는 정통 추리물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본격물에 가까운 작품이지만 그만큼 본격물이 현대 사회에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경찰도 아니고, 정식 탐정도 아닌 스기무라 사부로 수준에서는 더욱 한계가 느껴질 수 밖에 없지요.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집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0/02/01

유리 열쇠 - 대실 해밋 / 김우열 : 별점 3점

유리 열쇠 - 6점
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황금가지

네드 보몬트는 도시의 거물 폴 매드빅을 보좌하는 동생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네드는 폴이 친분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헨리 의원의 아들 테일러 헨리의 살해된 시체를 발견했다. 폴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 잔챙이 버니 데스테인이 도주하자, 개인적인 금전 문제도 있어서 그를 쫓은 뒤 헨리의 모자를 이용한 조작으로 버니를 궁지에 몰아 넣는데 성공했다.
그러던 중 폴과 관련된 팀 아이번스의 주요 증인도 살해당했고, 이 모든건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폴 매드빅을 음해하려는 적대 세력의 음모가 아닐가 생각하게 되는데....

대실 해밋 전집의 네 번째 권입니다. 해밋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이런저런 리스트 들에서 순위권에 꼽히는 대표작이지요. 그동안 눈여겨 보고 있다가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드보일드 범죄물로 주인공 네드 보몬트가 완벽한 안티 히어로라는게 특징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한다는건 하드보일드 주인공같은데, 네드는 탐정도 아니고 정의를 위해 싸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범죄에 연루된게 분명한 폴 매드빅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갖 더러운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악당에 더 가깝습니다. 당연히 여자들에게도 잔인하고 냉정하며, 뉴욕에서 이름모를 촌동네로 흘러들어온지 3개월만에 그 도시 최고의 실력자의 친동생 급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능력자이기도 하고요. 작 중에서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 중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갖추고 있거든요. 오히려 완력 면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다는게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도시에서 두 개의 파벌이 경쟁하는 와중에 주인공이 나타나 분란을 일으킨다는 "붉은 수확" 류의 전개 속에서, 네드 보몬트는 충심을 다해 폴 매드빅을 돕고 진짜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네드의 폴 매드빅을 위한 충심은 변함이 없고,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의리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같은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안티 히어로의 활약을 그린 하드 보일드 추리물이지만, 나름 정의로운 활극이기도 합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고조 할아버지 쯤 되는 이야기랄까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작위적이고 평이합니다. 버니 데스테인을 엮기 위한 모자 작전 정도만 그럴싸할 뿐이에요. 다른 네드 보몬트의 행동은 모두 즉흥적인데도 불구하고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작위적이에요.
아버지가 헨리를 살해했다고 굳게 믿는 오팔 매드빅이 기자에게 털어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네드는 그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신문사 편집장 매튜스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 때 벌어지는 상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그곳에는 오팔의 고백을 이용하려던 폴의 라이벌인 섀드 일당이 있었고, 또 섀드 일당과 남편의 기묘한 행동거지를 짜증내하던 매튜스의 아내 엘로이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엘로이스의 유혹으로 네드가 넘어간 척을 하자 매튜스는 자살해 버리고 맙니다. 마침 이용하기 좋은 유언장을 남기고요. 그래서 네드는 폴에게 연락하여 신문에 오팔의 고백이 발표되지 않게 막게 됩니다. 그냥 봐도 너무 편의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느낌이지요?
폴의 자백을 지방 검사에게 증언한 뒤, 헨리 의원이 진범임을 증명하는 결말도 억지스럽습니다. 헨리 의원이 자백을 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증거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폴이 뒤집어 쓰기로 결정한 이상, 이를 뒤집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네드가 폴의 결백을 확신한다는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못하니까요. 아들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아들 모자가 아버지 집에 있는게 증거가 될리 없죠. 지팡이 역시 원래 그의 물건이니 집에 있는게 당연하고요. 이 마지막 반전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설정과 전개에 전형적인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안티 히어로이기는 하지만 네드 보몬트의 심리 묘사와 행동은 다른 하드보일드 속 탐정들의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습니다. 지방검사마저도 두려워하는 폴에게도 서슴없이 직언을 날리며, 주먹질은 물론 총질도 두려워하지 않는 상남자라는 점에서요. 이는 그 누구도 네드를 우습게 보거나, 등쳐먹을 수 없으며 돈보다는 자존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으로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들과 다를게 없습니다. 네드와 정말로 우연하게 만난 제프가 섀드를 죽이는 등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악당들이 서로 싸움으로 붕괴하고 마는 전개도 전형적이라 구태의연하고 식상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추리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범인이라고 폴이 고백하기는 하지만, 흉기로 사용한 지팡이는 이미 태워버렸다는 증언이 헨리 의원의 딸 재닛에 의해 곧바로 부정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헨리 의원이 진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게 다 맞아 떨어지니까요. 실제로 진상도 그러했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아무런 증거도 없어서 그다지 정교한 이야기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확실하고, 문체도 수려하고 멋집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다운 위트있는 명대사도 많고요. 병문안을 온 재닛에게 모진 소리를 한 뒤, 그녀가 떠나는걸 본 간호사가 그녀가 울음을 꾹 참으면서 가더라는 말을 듣고. 네드가 "내 수완이 약해지는 게 틀림없군. 예전 같으면 울렸을 텐데."라고 말하는 식인데, 완전 제 취향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하드보일드 작품 중 최고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장점도 많고 좋은 작품임에도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이자면, 유리열쇠는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썩은 동아줄"을 의미하는 듯 싶네요. 재닛의 꿈 속에서 그녀와 네드가 뱀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사용하지만, 유리라서 부서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문을 잠그지 못해 뱀 때에게 죽고 말지요. 그런데 이게 그녀가 오빠 살인범으로 폴을 지목하여 음해하고, 소문을 퍼트린 행위를 뜻하는지, 아니면 진범이 아버지 헨리 의원이라는걸 알게 된 후 네드와 떠나기로 결심한 행동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꿈에서는 네드와 함께 죽는데, 꿈과 같은 결과라면 같이 떠나는 행동이 가장 위험해 보입니다. 물론 네드는 상남자답게 같이 떠나기로 결심하지만요.

2019/09/22

진실의 10미터 앞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 별점 3점

진실의 10미터 앞 - 6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엘릭시르

프리랜서 기자인 다치아라이 마치가 등장하는 단편들을 수록한 요네자와 호노부의 단편집입니다. 

다치아라이 마치는 '고전부'나 '소시민' 등 다른 시리즈 캐릭터에 비하면 지명도가 낮은 편입니다. 등장 작품이 "안녕 요정", "왕과 서커스" 두 편 뿐이며 그나마도 "안녕 요정"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하기 힘든 탓입니다.

작품 특징이라면 웃음기를 쫙 빼고 서술되고 있으며 살인이나 자살과 같은 강력 사건들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수록된 여섯 편의 단편 모두요. 대부분 비극이거나 씁쓸한 뒷 맛을 남긴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이야기에 '기자' 라는 직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조금씩 다른 해석으로 실려있는 것도 눈에 뜨입니다. 이야기 속 다치아라이의 취재는 대다수 독자를 위해 진실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극소수의 독자를 위해 눈에 보이는 진실이 아닌 그 이면을 들춰내어 밝혀내고,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입게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를 화자인 '나'가 다치아라이 마치인 "진실의 10미터 앞"에서 시작해서 '나'가 범인인 "정의로운 사나이", 다른 기자가 화자인 "고이가사네 정사", 3인칭 전지적 관찰자 시점인 "이름을 새기는 죽음", 그리고 취재에 동행한 제 3자가 화자인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와 사건의 주요 관계자가 화자인 "줄타기 성공 사례"와 같이 다양한 시점 변화를 통해 강조하는 솜씨도 인상적입니다.
이러한 묵직한 내용과 현란한 기교는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 스스로 고교생 일상계에서 벗어나 진지한 주제를 다루고 싶었던 욕심에서 비롯된게 아닐까 싶네요.

작가의 이름값에 걸맞게 추리적으로도 꽤 괜찮습니다. 사소한 단서에서 진실을 끌어내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은 덕분입니다. 실제로 있음직한, 생활감 넘치는 단서와 전개는 작가의 특기인 일상계 추리물을 연상케 하고요. 전화 통화 내용만 가지고 자신이 찾는 인물의 소재를 밝혀내는 과정을 그린 "진실의 10미터 앞", 자살을 각오한 고교생 연인의 노트에 쓰여진 '살려줘'라는 글귀, 그리고 함께 죽지 않은 기묘한 현장에서 다른 사건과의 관련성을 눈치챈다는 "고이가사네 정사", 한 노인의 고독사 이면에 있는 진상을 그린 "이름을 새기는 죽음"이 특히 괜찮았습니다.

조금 억지스러운 이야기도 없지는 않고, 기자 의식을 무리하게 집어넣은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도 있기는 합니다. 일본 전국을 누비지만 기묘할 정도로 여정 미스터리 느낌이 나지 않는것도 단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약간 아쉽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전체적으로 완성도 높은 수작 단편집이라 생각되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팬이시라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제나처럼 작품별로 상세하게 소개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진실의 10미터 앞"

나 다치아라이 마치는 사진기자 후지사와 요시나리와 함께 야나마시로 향했다. 도산한 벤처 기업 퓨처스테어 홍보 담당인 하야사카 마리가 실종되었는데, 그녀의 행방을 찾을만한 단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서는 그녀가 여동생과 통화한 통화 기록 뿐으로, 다치아라이는 통화 기록을 토대로 야마나시의 명물 호토를 파는 가게 중 한 곳을 특정하여 그녀를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통화 기록 속에 숨겨진 몇 가지 단서를 통해 하야사카 마리의 행적을 밝혀내는 추리가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타이어 문제로 움직일 수 없다'에서 눈이 내린 지역을, '우동 같은 음식'으로 야마나시 명물 '호토'를, 술에 취했다는 말을 통해 호토와 술을 함께 밤 늦게까지 파는 가게를 찾고 '말도 잘하는 멋진 남자'에서 마지막 목격자인 외국인 가게 종업원을 찾아내는 이야기로 모두 이치에 합당하고 설득력이 높습니다. 추리만으로도 별점 3점은 충분한 좋은 작품이지요.

하지만 숨은 그림 찾기같은 추리 외의 이야기 자체로는 별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하야사카 마리는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고, 관련된 기사도 쓰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같은 주제 의식을 드러내기에는 좀 부족해서 아쉽습니다.

"정의로운 사나이"

막 투신 자살 사고가 일어난 지하철 플랫폼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초래하는 짜증나는 여기자를 발견하는데... 

20여페이지 남짓한 소품인데 플랫폼 끝이 아니라 중간 지점에서 투신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 아닐까 생각한 다치아라이의 재치는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민폐를 끼치는 인물에 대한 불쾌감'이라는 동기도 현대 사회에서는 충분히 있음직 하고요.

그러나 그 외의 내용은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범인이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다치아라이를 관찰한다던가, 다치아라이의 행동을 민폐로 여기고 불쾌해한다던가 하는 설정과 전개 모두요. 기자 의식을 다룬 부분도 짤막하게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중요한 내용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사건을 만나 기쁘다는게 진심인지 아닌지는 결국 밝혀지지도 않고요. 한마디로 가벼운 소품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고이가사네 정사"

미에 현에서 고교생 2 명, 구와오카 다카노부와 가미조 마리의 동반 자살 사건이 일어났다. "주간 심층"의 기자 쓰루는 현지 취재를 나서서 코디네이터 다치아라이와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유언장에 남겨져 있던 '살려줘'라는 글귀와 고교 선생님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다치아라이는 이 사건이 의원 폭탄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내고 이 정보를 쓰루와 공유하는데...

가족을 통해 성폭행을 당해 임신한 여고생과 그녀를 돕지못해 좌절한 남고생이 함께 자살한다는 정사 사건 속 또다른 진상을 밝혀낸다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죽기를 원했던 둘이었는데, 왜 마리만 칼에 찔려 죽고 다카노부는 물에 빠져 교각에 걸린 사체로 발견되었는지?와 유언장에 남겨진 글귀, 그리고 현장에 남겨져 있던 와인 속 맹독인 '황린'을 통해 진상에 이르는 과정이 합리적이면서도 깔끔합니다. 그나마 믿을만하다 생각했던 '선생'이 사실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 쓰레기로 둘의 죽음을 자신의 범행 은닉에 이용했다는 진상과 결말은 굉장히 씁쓸하면서도 잔혹하고요.

다치아라이가 주변인처럼 그려지며 그녀가 취재하는 의원 폭탄 사건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왜 시모타키 선생이 의원들에게 발화 폭탄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요. 그래도 추리와 이야기 전개 모두 빼어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이름을 새기는 죽음"

중학생 히노하라 교스케는 이웃집 노인 다가미 료조가 고독사한걸 최초로 발견했다. 얼마 뒤 프리랜서 기자 다치아라이 마치가 그를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고, 교스케는 그녀의 취재에 동행하는데...

다가미 료조가 지역 신문에 투고한 글과 다른 사람의 투고글, 그리고 다가미 료조의 집에 남겨져 있던 엽서 필적을 통해 피해자의 아들 다가미 우노스케가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진상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다가미 료조가 '직함'에 연연하여 '이름을 새기겠다'는 사명감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정이 돋보입니다. 기묘하지만 아주 그럴싸하거든요. 실제로 직함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많은게 사실이기도 하니까요. 이를 노인 고독사와 연결하여 전개한 솜씨도 아주 일품이에요. 

아울러 다가미 우노스케가 쓰레기지만 그의 입을 빌어 다가미 료조 역시 나쁜 사람이라고 다치아라이가 결론내리는 마지막 장면은 그녀의 기자로서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멋졌어요. 진실도 좋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와 닿기도 했으니까요. 덕분에 교스케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고 한 발자욱 더 나아갈 수 있었을테지요.

실제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상 속 사건과 독특한 아이디어가 잘 결합한 좋은 작품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 최고 작품으로 꼽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나이프를 잃은 추억 속에"

'나'는 오래전 여동생의 친구였던 다치아라이 마치를 만나기 위해 시골 소도시 하마쿠라를 찾았다. 그리고 다치아라이가 취재하는 유아 살인사건 취재에 동행하며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가는데...

"안녕 요정"의 핵심 인물이었던 유고슬라비아 유학생 마야의 오빠가 등장합니다.
그는 다치아라이가 취재하는 마쓰야마 가린 살인 사건 취재에 동행하여, 그 과정에서 다치아라이와 같은 기자에 대한 실망감과 환멸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여주는 '눈' 역할이 아니라 사실을 가공하여 미력하나마 피해자를 구해주려고 노력하는 다치아라이의 진면목을 취재 동행을 통해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건보다는 다치아라이가 어떤 기자인지를 알려주는게 목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는 범인으로 지목된 마쓰야마 가린의 삼촌 마쓰야마 요시카즈의 수기가 일종의 암호라는 암호 트릭물인데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극 중 다치아라이의 말대로 추후 요시카즈가 사실을 고백하고 경찰이 수사에 집중한다면 밝혀낼 수 있는 수준의 사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다치아라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추리물로는 부족해서 감점합니다.

"줄타기 성공 사례"

나가노 현 남부를 덮친 수해 현장에서 일흔이 넘은 도나미 부부가 극적으로 구출된다. 부부는 사흘 동안 콘플레이크를 먹으며 버틸 수 있었다. 현장 근처에서 가업을 이어 가게를 운영하는 오바에게 다치아라이가 찾아와 도나미 부부에 대해 물어보는데...

한 여름에 콘플레이크를 무엇에 타서 먹었는지? 가 수수께끼로 등장하는데 이게 왜 수수께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콘플레이크는 꼭 우유에 타 먹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식품이잖아요? 게다가 그게 문제가 된다는 상황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노부부가 전기, 가스가 모두 끊긴 집에 고립된 상황에서 매몰된 이웃집에서 가동되는 냉장고를 사용한게 죄가 될까요? 그 집 음식을 전부 가져다 먹어도 괜찮았을텐데 말이지요. 이런 점을 굉장한 민폐로 여기고 미안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오열하는 노부부의 모습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바는 '행방불명된 사람의 집에 들어가 목숨을 연명한 부부는 비난받을거다' 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야기가 성립된다고 생각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줄 수는 없네요. 추리적으로도 별다른 내용이 없고요. 이 단편집의 워스트 단편으로 꼽겠습니다.

2017/03/08

대포와 스탬프 1,2 - 하야미 라센진 : 별점 2점

대포와 스탬프 2 - 4점
하야미 라센진 지음/미우(대원씨아이)

하야미 라센진의 밀리터리 판타지 신작으로, "육해공 대작전" 비슷한,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선보입니다. 대공국, 제국 연합군과 공화국 간 전쟁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2차대전 비슷한 문명 수준과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 중 주역인 대공국군은 이름 - 마야코프스카야 (마르티나) 소위, 키릴 대위, 보이코 상사, 아네티카 병장 등등 - 이라던가, 무식해보이는 장비들, 보드카가 중요하게 (?) 등장하는 등 여러 면에서 러시아 느낌이 물씬 나고요. "군화와 전선"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작가가 2차대전 당시 소련군 팬이 확실한가 봅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느낌의 공화국도 상당히 이색적이고요.
이런 2차대전스러운 분위기는 작가의 전작들과 유사한데, 전투요원이나 전쟁을 중심으로 가져가는게 아니라 '병참부대원'을 주인공으로 하여 보급과 행정 업무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차이점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재미는 부족합니다. 보급물자를 빼돌리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지루하고, 그림과 어울리지 않게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가는 심각한 분위기 탓도 큽니다. 기자단이 싸그리 죽어 나가는 것도 모자라서, 2권 뒷부분에 등장하는 이이다코 고지 사령관 파파에프 대위는 폭격으로 팔만 발견될 정도에요.
주인공인 마르티나가 꽉 막힌 원리원칙주의자로 매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재미를 떨어트리는 요소입니다. 주인공을 괴롭히거나 힘들게하는 조연 상사 역할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네요. 마르티나보다는 명문가 아들이지만 후방에서 대충대충 일하면서 SF 소설을 쓰는 키릴 대위나, 헤프고 글도 못 읽지만 용감무쌍한 아네티카 병장 쪽이 더 주인공에 가깝습니다. 2권에서 키릴 대위의 동생인 코스챠, 이중스파이 시난 중위와 같은 새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는걸 보면,작가도 마르티나 중심으로 드라마를 만드는게 힘들었던 것으로 보이네요.
덧붙이자면 족제비 '스탬프'도 귀엽고 아주 약간 활약이 있긴 하나 왜 나오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최소한 제목에 등장할 비중은 절대 아닙니다. 물론 제목의 스탬프에는 '서류 작업'을 뜻하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긴 합니다만...

아울러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인 그럴듯한 장비들, 병기들 묘사는 여전히 빼어나지만, 작품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부수적 소재에 그친다는 점도 아쉽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중장갑전함 '평화호' 외에는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육해공 대작전" 만큼 참신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팬으로서는 제법 만족스럽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많이 처집니다. 다음 권도 사 보겠지만 오래 이어질 것 같지는 않네요.

덧붙이자면, 출판사가 이미지 프레임에서 미우 (대원)으로 바뀐 것도 긍정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판형이 달라진 것도 짜증나지만, 등장하는 장비, 병기를 에피소드가 끝나면 그대로 확대해서 양면 페이지로 수록한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네요. 잉크와 종이 낭비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2014/07/18

수리부엉이 - 얀 / 로맹 위고 : 별점 3점

수리부엉이 - 6점
얀 지음, 로맹 위고 그림/이미지프레임(길찾기)

2차대전 당시 독소 항공전을 그린 프랑스 만화로 에이스이지만 반나치주의자인 아돌프 볼프, 복엽기를 운용하는 "밤의 마녀" 부대 조종사에서 각종 활약을 통해 소련의 영웅 칭호를 받는 에이스로 올라서는 릴리아라는 두 명의 주인공을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제목의 "수리부엉이"는 독일군의 야간전투기 He-219의 별칭이고요.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유럽 장인이 연상될 정도의 디테일한 작화입니다. 나무위키 등에서 치밀한 고증에 대해 칭찬이 자자한데, 제가 고증까지는 잘 몰라 언급하긴 어렵지만 컷 하나하나가 일반 회화나 일러스트 수준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인물, 장비, 배경 모두 경지에 올라선 디테일과 작화를 보여주며,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였다’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돌프와 릴리아의 관계 외의 여러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관계와 심리를 묘사하기에는 분량이 부족했습니다. 이만한 작화로 이야기를 길게 끌어가는 데 부담이 있었던 탓일까요? 예를 들어 아돌프와 릴리아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의사소통 등 다양한 장애 요소를 설명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제시되고 전개됩니다. 릴리아에게는 발렌틴이라는 애인(?)이 있기도 해서, 이런 전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서사가 과연 잘 어울렸는지도 솔직히 의문입니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늑대의 포성"에서의 하겐과 고로도크처럼 양 진영 에이스의 1:1 대결 구도로 전개되는게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아울러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쥐새끼 막스의 결말이 그려지지 않은 점도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그래도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내용에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워낙에 작화가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가격과 내용면에서 모두에게 추천드리긴 어렵지만, 2차대전 관련 역사물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립니다. 마침 현재는 15%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으니까요.

2010/05/31

과학을 훔친 29가지 이야기 - 하인리히 찬클 / 박소연 : 별점 3점

과학을 훔친 29가지 이야기 - 6점 하인리히 찬클 지음, 박소연 옮김/말글빛냄

"과학의 사기꾼"의 저자 하인리히 창클의 최신작으로 이번에는 과학사에 유명한 허위 논문과 이론, 장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내용이 아주 쉽고 재미있게 쓰여진 것이 가장 큰 장점인 책이죠. 아무래도 반 이상이 악의없는 장난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용이 유쾌한 탓이 큰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런 것이 먹혔을까?싶은 터무니없는 것들에 대한 학계의 진지한 반응이 더욱 웃기네요. 물론 장난치고는 굉장히 공을 많이 들이기도 했습니다만.

몇가지 이야기, 특히 필트다운인과 카티프의 거인 이야기는 책의 주제와 좀 동떨어지긴 했지만 이외의 내용도 대체로 재미있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과학과 유머, 개그에 모두 관심이 있으시다면 추천드립니다.

몇가지 인상적인 “장난”을 소개해드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파이pi” 전쟁 - 원주율에 대한 공격"

파이는 누구나 3.14…. 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을 성경에 나오는데로 “3”이라고 규정해야 한다는 이론이죠. 성경 열왕기에 ‘그릇의 지름이 10엘레면 30엘레의 끈으로 둘러쌀 수 있다’라는게 근거라고 하네요.

"인텔리전트 디자인? - 창조설에 대한 풍자"

파이 이야기에도 등장한 성경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또다른 장난입니다. 창조론에 대한 현대적 형태를 “인텔리전트 디자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패러디해서 “인텔리전트 폴링”, 즉 중력이 신의 의지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발전된 것이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널리 알려진 FSM, 즉 플라잉 스파게티 몬스터라고 하네요. 아울러 이 FSM도 지금 종파가 분열 중이라니 양덕들의 패러디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궁금해집니다. 

* 덧붙이자면, FSM의 아멘과 같은 기도 용어는? Ramen입니다!

"위험한 화학물질 - 디하이드로젠모노옥사이드와 에탄올의 정체"

유명한 농담일 수도 있는 ‘디하이드로젠모노옥사이드’, 즉 DHMO 소동을 다루고 있습니다. 모든 음료수에 이것이 들어갔다고 해서 논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의 정체는?... 물이라고 하네요. 

똑같은 이야기로 사람들의 출입이 잦아 지저분한 분수에 "주의! 이 분수의 물에는 하이드로제늄이 다량 함유되어 있음!"이라는 표지판을 걸었더니 사람들 출입이 딱 끊겼다라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하이드로제늄은?... 수소이고요. 

마지막 "에탄올" 역시 독일에서 맥주에 에탄올이 들어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어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에탄올은?... 맥주에 포함되어 있는 알코올입니다. 만우절 농담치고는 너무 학술적이죠?

"모두가 열망하는 프로그램 - 출판을 위해 발명된 글 생성기"

MIT 공대생들이 만든 SCIgem, 그러니까 학술 논문 생성기에 대한 이야기에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을 통해 뭔가 있어보이는 논문을 만들어준다는 프로그램인데 굉장히 유용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도 도입이 시급해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왠지 한국 SF의 명작인 “창작기계”가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네요.

"유명한 코 동물 - 비행류의 삶과 죽음"

"비행류"는 저도 오래 전에 과학잡지(아마도 Newton?)에서 읽었었지요. 거꾸로 서서 코로 걷는다는 환상의 동물! 이런 류의 책에서는 빠지지 않는 사례인가봐요. 제가 처음 접했을 때는 초등학생이었을땐데 그때는 진짜 있는 생명체인줄 알았더랬죠.^^

2009/11/03

디스트릭트9 - 네일 블롬캠프 : 별점 3점


인터넷상의 엄청난 호평 때문에 보게된 영화입니다.

그런데 넘치는 대단한 호평이 개인적으로 썩 납득이 가지는 않더군요. 서로 다른 종족(?), 그것도 주종족에게 굉장히 천대받는 종족을 박해하는 최일선에 서 있는 인물이 서서히 천대받는 종족으로 변해가며 자기 자신도 변해간다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쎄고 쎈 이야기라 생각되거든요.
탈출한 안드로이드를 잡아죽이는 킬러가 스스로가 안드로이드임을 알게되고 안드로이드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라던가, 게이를 박해하던 마초가 스스로의 성 정체성에 눈뜨며 자기 자신이 게이임을 알게된 후 다른 마초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다는 이야기라던가, 흑인을 박해하던 인종차별주의자가 자기 자신의 핏줄에 흑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게되는 이야기라던가... 경성탐정록 식으로 변주하면 조선인을 박해하던 일본인 지주의 젊은 아들이 자기가 조선인 하녀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을 알게된다고 바꿀 수도 있겠네요.
어쨌건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이지 흔하디흔한 이야기가 아닌가 보여집니다.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새롭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쉬워요.

물론 마지막 외계인 크리스토퍼가 탈출하며 과연 돌아올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라는 문제와 외계인으로 변한 비커스가 사랑을 잃지 않는다는 여운의 결말은 충분히 인상적이며, 극단적 이기주의자에 가까운 비커스가 막판에 거의 "히어로" 급으로 거듭나게 되는 극적인 장면과 더불어 펼쳐지는 액션은 굉장히 화려해서 볼거리가 많은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특히 이 마지막 액션씬에서 펼쳐지는 헐리우드영화에서 보기 드문 파워드 슈츠(?)액션과 고어에 가까운 폭죽쇼는 확실히 재미있었어요. 헐리우드스럽지 않은 전개와 촬영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죠.

때문에 결론적으로 재미만 놓고 따진다면 별점 3점은 충분한 영화로 만족스럽게 관람하긴 했습니다. 뭐 이 영화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다 제 나이 탓이겠죠... 이제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 같네요. 쩝.

2009/05/22

요리장이 너무 많다 - 렉스 스타우트 / 김우탁 : 별점 3점

요리장이 너무 많다 - 6점
렉스 스타우트 지음, 김우탁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국내에 소개된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 시리즈는 딱 3편이 있습니다. "독사", "챔피언 시저의 죽음", 그리고 이 "요리장이 너무 많다"죠. 예전에 읽었었지만 옛 기억을 되살릴 겸 다시 손에 들고 읽게 된 작품입니다.

스토리는 무척 간단합니다. "전설의 요리사 15명"이 주최하는 모임에 네로 울프가 옛 친구인 요리사 마르코 뷰크식에 의해 초대되어 "카노와 수퍼"라는 휴양지 (여긴 대체 어디?)로 짧은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5년마다 열리는 이 정기모임에서 요리사 13명 (2명은 사망하여 공석인 상태) 은 2명의 새로운 멤버도 선발하고 서로간의 친목을 다지는 그런 행사가 될 예정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사건이 일어납니다! 요리사 중 한명인 필립 래스지오가 살해된 것이죠!
이 래스지오라는 인물은 경쟁자의 제자를 빼앗고, 아내를 빼앗고, 직장을 빼앗은 요리계의 무법자? 공적? 뭐 하여간 그런 존재였기 때문에 죽어 마땅한 그런 작자로, 앞서 말한 강력한 동기를 지닌 3명의 요리사 중 한명인 헬로메 벨린이 유력한 용의자로 곧바로 체포됩니다. 그 다음에 이기주의자 네로 울프가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건 수사에 뛰어든다는 이야기 되겠습니다.

그러나.... 네로 울프 시리즈의 대표작이긴 한데 추리적으로 높이 평가하기는 좀 어려운 작품이긴 합니다. 일단 사건이 딱 하나뿐이라 3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끌어나가는데에는 좀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기도 하고요. 또한 중간에 몇개의 증언을 통해 유력한 용의자들의 혐의가 거의 대부분 벗겨질 뿐 아니라, 실제 범인을 확정하는 마지막의 추리쇼도 결국 "추리"가 아니라 "수사에 의한 단서"를 통해 범인을 잡아내기 때문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범인의 정체가 아주 비합리적인건 아니지만 조금 반칙으로 보였던 것도 아쉬웠고요.
즉, 단서의 제공은 공정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 자체는 드러나지 않기에 정당한 트릭물로 보기에는 어려운 작품이라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야말로 네로 울프의 독무대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재미가 넘칩니다. 이기적인 모습은 물론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지구가 자기를 위해 돈다고 믿는 네로 울프의 캐릭터가 곳곳에서 작렬하니까요. 헬로메 벨린의 걸작 요리인 "소시스 미뉴이"의 레시피를 탐내는 네로 울프의 모습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결과까지 이어지는 과정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네로 울프의 모습은 정말이지 굉장히 웃깁니다. 또한 조수인 아치 굿윈의 톡톡튀는 재담과 둘 사이의 만담과 같은 네로 울프 시리즈를 관통하는 유쾌하고 재미있는 전개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읽을수 있습니다. 왓슨 역의 신기원을 이룬 뻰질뺀질하고 느물느물한 조수 아치 굿윈의 캐릭터는 정말이지 읽을때마다 재미있단 말이죠^^

그리고 수사과정과 증언이 중요하게 쓰이는 전개, 팜므파탈과 같은 여인이 등장한다는 것 등이 하드보일드를 많이 연상시키는데, 주인공이 안락의자 탐정의 대명사인 네로 울프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기발한 맛이 느껴졌습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어울리는 것이 마음에 들더라고요. 블랙 코미디같은 매력도 더 잘 살아나는 것 같고요.

앞서 이야기한 단점이 약간 있지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기에 개인적인 별점은 3점입니다. "독사" 보다는 낫고, "챔피언 시저의 죽음" 보다는 못한데, "독사"의 경우는 번역 문제가 더 큰 만큼 평균적인 재미는 보장한다고 할 수 있겠죠.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 특히 네로 울프의 매력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추천합니다.

덧붙여, 요리사와 요리가 굉장히 중요한 소재로 쓰이기에 미식가인 네로 울프의 모습이 굉장히 잘 드러날 뿐 아니라 요리에 관한 디테일한 묘사도 수준급이라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네요. 혹 요리를 직접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레시피 소스의 "네로 울프 식 요리들" 을 한번 참고해 보셔도 좋겠네요. 저는 포기했습니다.... 미식가인 네로 울프가 절찬하여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궁금한 "소시스 미뉴이" 레시피가 없는 것이 안타깝네요....^^;; 원서와 렉스 스타우트의 요리책에는 조리법이 나와있다는데 아직 못찾았습니다. "소시스 미뉴이"의 스펠링이 뭘까요?

PS : 네로 울프에 대해 궁금하시면 여기를 참조하셔도 좋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