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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4

죽은 자의 윤무(死者の輪舞) - 아와사카 쓰마오: 별점 3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수 범죄 수사과 형사 신스케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살해당한 사체와 접촉하면서 연쇄 살인극 수사에 빠져들었다. 신스케의 파트너인 고참 형사 우미카타는 연쇄 살인극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추리해 내었고, 모든 피해자들이 사망한 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이 자신이 주도하여 벌인 일이라는걸 고백한 유서가 발견되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우미카타가 신스케, 그리고 원장 조카인 야나기다와 함께 한 자리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자 야나기다는 우미카타와 신스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하는데...

아와사카 쓰마오의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최근 이 작가 작품만 읽고 있네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무려 여덟 명의 죽음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순환 구조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래서 제목에도 '윤무가 들어간거 같네요.

탐정역 형사 우미카타도 신선합니다. 경력이 많아 형사부장조차 어려워하는 인물로, 게으르고 거만한 데다 도박까지 좋아하는 평소 행동만 보면 좋은 형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사건을 대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나다는 설정 덕분입니다. 빼어난 관찰력과 비상한 추리력을 갖추고 있으며, 명품 브랜드와 미식에도 이상할 정도로 해박하여 수사에 큰 도움을 주거든요. 문제 많은 비호감 인물이지만 형사로서는 유능하다는 상반된 설정을 잘 결합했습니다. 호색한에 기묘한 취미(?)가 있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급 형사 명탐정이라는 점에서 모스 경감이 연상되기도 하네요.

비상한 추리력은 쓰쓰미 준의 사체가 발견된 집을 조사할 때부터 드러납니다. 집에서 광고지가 발견되었는데, 살림집이 아니라서 신문도 구독하지 않고 광고지에는 접힌 흔적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신문에 끼워져 배달되거나 우편함에 꽂혀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영업사원이 직접 집을 방문해 건넨 것이라고 추리하지요.

쓰쓰미 준의 방에서 인기 없는 만담가 다쓰다 이치엔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증언 처리 방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 조사 결과 당시 어떤 방송에서도 이치엔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우미카타는 곧바로 이치엔 본인이 방 안에 있었다고 판단하거든요.
피해자의 벨트가 채워진 모양을 보고 경찰의가 왼손잡이라고 판단한 것과 달리, 여러 정황을 통해 오른손잡이인 다른 사람이 피해자에게 옷을 입히고 벨트를 채웠다고 알아내는 장면도 좋고요.

추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가쓰하타 병원 원장은 유서를 통해 여덟 명의 죽음이 서로 이어진 연쇄 살인이자 자살극이었다고 밝힙니다. 이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완벽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우미카타는 유서의 내용과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을 비교하면서 여러 모순을 찾아낸 뒤 유서에 적힌 진상이 조작되었다고 추리합니다. 모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우미카타와 신스케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 원장은 D호실에 입원했던 환자들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렸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들의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유서가 사실이라면 원장이 처음부터 그 원칙을 스스로 어겼다는 이야기이므로 이는 모순이다.
  • 오쿠 후사의 집 문손잡이에 남아 있던 지문은 이상하다. 다섯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남아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문을 열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야나기다는 앞선 탐문 수사에서는 만담가 이치엔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신스케가 다쓰다 이치엔이라는 이름의 환자를 찾았을 때는 그런 환자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는 야나기다가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미 등장했던 여러 단서들, 증언의 모순을 근거로 진범을 추리해내는건 굉장히 본격 추리물 스러워서 마음에 듭니다. 마지막에 야나기다 앞에서 펼치는 추리는 고전적인 추리쇼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고요. D호실이라는 연결고리와 유서의 오류, 야나기다의 말실수까지 포함한 정보 모두 사전에 제공된다는 점도 본격 추리물로서의 가치를 높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대표적인건 다쓰다 이치엔의 죽음입니다. 그는 매가 물고 가다가 떨어뜨린 식칼에 찔려 죽는데,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작위적입니다. 이치엔이 죽지 않고 경찰에 체포되었다면 사건의 진상이 훨씬 일찍 밝혀졌을 테니 작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퇴장시킬 필요가 있었겠지만, 굳이 이렇게 우연에 의존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여덟 명이 얽힌 연쇄 살인과 자살극도 아이디어에 비해 조금 길게 느껴집니다. 특히 동반 자살까지 시도했던 후나미즈와 고노 아유미 커플은 빠졌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신스케와 사오리의 관계도 불필요하게 느껴졌고요. 마지막에 우니카타와 신스케가 야나기다에게 죽을 뻔 하지만, 로쿠야마가 설치한 장치에 의해 야나기다가 죽고 만다는 결말도 뻔했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여덟 명의 연쇄살인을 피해자와 가해자가 계속 뒤바뀌는 순환 구조로 만든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이들을 가쓰하타 병원 외과 D호실이라는 하나의 접점으로 묶으면서 제공되는 단서들도 모두 공정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현대 경찰 수사물과 본격 추리물이 잘 결합되어 있는 추천작입니다.

2026/08/16

채권추심원(2026) - 수라퐁 플런상: 별점 2점

눔은 과거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의 채권 추심원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나 채권 추심 중 벌어진 살인 사건으로 10년 동안 복역했고, 출소 후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조용히 살아가던 눔이 알고 지내던 노점상인 할머니와 손녀가 사채업자 포에게 잔혹하게 당한 뒤 눔은 포를 죽일 결심을 하는데...

넷플릭스로 감상한 태국산 액션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뻔합니다. "아저씨"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잘 알지도 못했던 소녀를 위해 남자가 목숨을 걸고 복수한다는 이야기의 변주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물론 익숙한 이야기를 사용했다는걸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뻔한 이야기라도 복수의 과정과 액션을 얼마나 멋지고 처절하게 보여주느냐가 더 중요하니까요.

문제는 정작 그 액션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좋게 보면 실제 싸움에 가까운 실전 액션이지만, 나쁘게 보면 동네 막싸움처럼 보여서 영 폼이 나지 않습니다. 눔이 전문 킬러나 특수부대 출신이 아니라 전직 채권 추심원인 만큼 엄청난 전투 능력을 보여줄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복수극의 핵심 볼거리라고 할 만한 장면은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현실적인 액션을 추구했다고 해도 영화적인 쾌감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었어요.

악당 포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눔과 마지막까지 맞서야 하는 인물인데 무력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고, 비주얼에서도 위압감이 부족합니다. 주인공의 복수가 강렬하게 느껴지려면 그만큼 상대하는 악당도 강력해야 하는데, 최종 보스라고 하기에는 기생 오래비 느낌이라서 여러모로 격이 떨어집니다. 눔의 액션과 포의 존재감이 모두 약하다 보니 절정부의 액션도 시시하고요.

불필요한 설정도 많습니다. 눔이 뇌종양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눔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경찰인 콩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콩은 그냥 정의로운 경찰로 설정하고, 상관의 비밀 지령을 받아 수사하다가 그 상관이 실제로는 악당 포의 끄나풀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정도로 이야기를 끌고 갔어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여러 사정을 추가하다 보니 인물은 복잡해졌지만 그만큼 이야기가 풍성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래도 처음 접해 본 태국 영화인데 생각보다 굉장히 만듦새가 좋다는 점에는 크게 놀랐습니다. 연출은 물론 촬영과 편집, 음악까지 어느 하나 크게 빠지는 부분이 없는 웰메이드 영화더라고요.

하지만 여러모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체적인 만듦새는 좋지만 액션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까지 뻔한데 액션의 쾌감도 부족하다 보니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26/08/14

카리브 해적 살인 사건 - 요시무라 다쓰야: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작가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는 신잡지 창간 기획으로 세계 타이틀 도전을 앞둔 프로복서 카를로스 산토와의 대담을 위해 바하마를 찾았다. '카리브의 해적'이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는 카를로스 산토는 해적 복장과 오른쪽 눈의 안대를 트레이드 마크로 삼으며 연승을 이어 가던 유망한 선수였다. 

그러나 대담 직전에 산토는 호텔 객실에서 망치에 맞아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불화가 쌓일대로 쌓인 산토의 아내 리카코, 산토와 불륜 관계였던 사진작가 하야카와 미즈키, 그리고 곧 계약이 해제될 예정이었던 프로모터 키사라기 하야토까지 세 명 뿐이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술을 먹지도, 자고 있지도 않았던 세계 정상급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제압할 수 없었다. 유일한 단서는 시신이 평소와 달리 왼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는 것 뿐인데...

일본 작가 요시무라 다쓰야가 '하룻밤 동안 펼쳐지는 극한의 타임 리밋 스릴러'를 콘셉트로 기획한 시리즈인 '원 나이트 미스터리'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미나이가 추천하길래 원서로 읽어 보았습니다. 콘셉트에 걸맞게 짤막한 중편 분량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어요. 탐정 역할인 아사히나 고사쿠와 편집자 다카기 요스케가 주고받는 유쾌한 티키타카 역시 작품의 분위기를 한층 가볍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고요.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어떻게 이런 살인이 가능했는가'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인 하우더닛물인데 트릭도 단순하면서도 깔끔합니다. 키사라기는 안대를 어느 쪽 눈에 착용하는 것이 더 보기 좋은지 시험해 보자며 산토에게 양쪽 눈에 번갈아 안대를 착용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양쪽 눈을 모두 가린 뒤 정면에서 망치로 가격해 살해했고요. 이후 안대 하나를 회수했지만, 자주 쓰던 쪽인 오른쪽 눈 안대를 나중에 씌웠기 때문에 왼쪽 눈에 안대가 남겨졌던 겁니다. 아사히나는 이를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은 발상이라고 설명하며 사건을 해결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이 지나치게 급작스럽습니다. 시합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서 프로모터가 직접 살인을 저지를 이유가 빈약하며, 범행 이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현실성이 떨어집니다. 결국 '프로복서를 정면에서 망치로 살해할 수 없다'는 추리 퀴즈를 성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또한 사건 구조상 범행 시각에 아사히나와 함께 있던 리카코, 산토를 살해할 동기가 없던 미즈키는 사실상 용의선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이며 카를로스 산토와 아내의 불화, 미즈키와의 불륜 설정도 너무 진부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빠른 전개와 신선한 트릭은 좋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인 졸작입니다. 구태여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2026/06/26

1888 잭 더 리퍼 (一八八八 切り裂きジャック) - 핫토리 마유미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국비 유학생 가시와기 가오루는 '엘리펀트 맨' 연구를 위해 찾은 런던에서, 먼저 와 있던 도쿄대 동창 다카하라 고레미쓰와 함께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다카하라가 스코틀랜드 야드 근무를 하던 탓에, 가오루는 그해 막 시작된 '잭 더 리퍼' 사건에 휩쓸렸다. 그러면서 앨버트 에드워드 전하를 비롯한 다양한 명사들 - 황태자비, 황태손,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와 리처드 버튼, 버너드 쇼, 신지학 영매 마담 블라바츠키 등 - 과 어울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함께 찾아 나가게 된다.

일본 작가 핫토리 마유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1888년 런던 묘사입니다. 화이트채플을 비롯한 여러 장소가 실제로 발로 뛰어 쓴 것처럼 생생하고 안개와 거리의 분위기가 좋습니다. 다카하라와 가오루가 머무는 하숙집도 방의 구조와 가구, 집주인 보몬트 부인의 관리와 접대까지 생활감 있게 그려져 있고요. 일본 작가가 썼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이방인인 일본인이 영국에 압도당하는 묘사도 좋습니다. 가오루는 당대 최대 선진국인 영국을 바라보며 감탄하면서도 위축되는데, 그 심정이 굉장히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동시에 일본의 현실도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원래 백성이었던 자들이 영국을 흉내 내어 공작이니 백작이니 하며 으스댄다는 식인데 꽤 통렬합니다. 소설가가 되기를 결심하기까지의 가시와기 가오루의 심리 묘사도 설득력 넘치고요.

팩션답게 많은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데 - 앨버트 에드워드 황태자, 앨버트 빅터 황태손, "동굴의 여왕"의 작가 에드거 라이더 해거드, 신지학 마담 블라바츠키, "아라비안 나이트"의 소개자 리처드 버튼, 잭 더 리퍼 후보이기도 했던 변호사 몬터규 존 드루잇에 심지어 어린 시절의 버지니아 울프까지! - 이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중 옆 집 6살 소녀인 버지니아와 성공하고 싶어 하는, 자기 과시욕이 강한 가난한 아일랜드인으로 그려지는 버너드 쇼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실제로 잭 더 리퍼로 오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잘 어울렸어요. 핵심 인물 중 하나인 "엘리펀트 맨" 조지프 케리 메릭에 대한 묘사도 좋습니다. 과거의 ‘공연’은 그 자신도 감수했던 행동이었고, 현재의 안락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가오루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그의 심성이 아주 인상적이거든요.

잭 더 리퍼가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묘사도 강렬합니다.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작품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낙서를 지운 이유와 그 낙서의 의미를 풀어내는 부분처럼 익히 알려져 있는 설도 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고 있고요. 수사를 맡았던 경찰 조직과 지휘 체계, 수사 방식에 대한 묘사도 상세해서 재미를 더합니다. 마지막 피해자 메리 켈리와 가오루가 이전부터 안면이 있었다는 설정도 좋습니다. 가오루가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고 메리 켈리를 사랑한 존 드루잇과 가오루 사이의 접점도 더해지기 때문에, 그녀의 최후가 더 끔찍하게 다가오니까요. 잭 더 리퍼 사건을 바라보는 런던 시민들의 태도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내세운 범인은 트리브스 의사인데, 트리브스는 화이트채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므로 매춘부들이 경계하지 않았고, 피투성이가 되어도 의심받지 않았으며, 병원에서 물을 마음대로 써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인데 꽤 그럴듯 합니다. 트리브스가 보호하는 '엘리펀트 맨' 조지프 메릭이 얽혀있다는 추리도 괜찮습니다. 트리브스는 메릭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밤중에 병원으로 들어올 때 메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리이지요. 단서는 메릭이 몸을 씻을 때 보였던 핏자국입니다. 메릭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므로, 그 피는 다른 곳에서 비롯된 것일 테니까요. 메릭이 입을 다문 이유도 앞서 가오루가 눈치챈, 지금의 안락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심정 때문이고요. 

가오루가 첫 눈에 반했던 비토리아는 드루잇의 여장 모습이었고, 드루잇은 스티븐과 여장을 하는 동반자였는데 드루잇이 메리 켈리와 사랑에 빠져서 일어난 사건도 재미있습니다. 드루잇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스티븐이 잭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비밀방에 감금해 버리고 말았거든요. 버지니아가 스티븐의 사무실에서 들었던 '유령 소리'도 여기서 복선처럼 사용됩니다. 스티븐이 여장할 때 사용하던 옷장 속 비밀 방에서 난 소리였던 겁니다.

범행 도구로 보이는 메스가 가오루에게 전해진 메릭이 만든 이별 선물 안에 있었다는 일종의 반전도 나쁘지 않고, 그 외 시기와 잘 맞춰 사용된 사건과 소품들도 볼거리에요. 수시니의 비너스, 자전거, 베르티용 측정법과 지문, 맹장염 수술법, 빌헬름 1세의 죽음과 마지막의 관동 대지진까지 모두 적재적소에 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 소설로 보기는 무리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진범이라는 추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탓입니다. 황태손이 범인이고 왕실 주치의가 은닉을 도왔다는 식의 다른 잭 더 리퍼 관련 추론보다 더 설득력 있다고 보기 어려워요.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리브스 의사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증거도 없고 동기도 부족해서, 후더닛과 와이더닛 양쪽 모두에서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황태자 연회에서 펼쳐지는 다카하라의 추리쇼도 어처구니 없습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지문을 확보했다며 연회에 참석한 상류 계급 의사들을 대상으로 협막을 하는게 말이나 됩니까. 지문이 일반적이지도 않은 시대인데도 말이지요. 트리브스가 범인이라는걸 황태자에게 설득하는데 성공했다면, 이런 추리쇼보다는 몰래 트리브스 의사를 사고로 위장해 죽이는 쪽이 더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분량도 문제입니다. 78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 가시와기 가오루의 갈팡질팡하는 혼란스러운 심리 묘사, 연회와 만찬 장면, 주변 인물 묘사가 너무 많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미남으로 황태자를 비롯한 온갖 상류층과 깊은 교분을 쌓은 다카하라 캐릭터 설정도 영 별로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잭 더 리퍼 사건과 실존 인물들을 활용한 팩션으로는 볼 만 하지만 추리 소설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국내 소개가 될지 잘 모르겠지만, 구태여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6/05/01

잃어버린 얼굴 - 사쿠라다 도모야 / 최고은 : 별점 3.5점

얼굴이 훼손되고 손목마저 절단된 상태의 신원 불명 사체가 발견되었다. 다행히 피해자의 정체는 전직 탐정이었던 야기 다쓰오라는게 곧바로 드러났다. 고마네에서 벌어진 다른 살인 사건과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건 수사에 나선 수사계장 히노 유키히코는 이 사건이 10년 전 실종된 오누마 겐, 그리고 지역 신문에 실린 경찰의 부실 대응을 고발하는 투서와 연결되어 있다는걸 알아냈고 탁월한 추리력을 발휘하여 진상을 밝혀낸다...

"매미 돌아오다"로 좋은 인상을 심어준 사쿠라다 도모야의 장편 추리 수사물입니다. 

굉장히 정통적인 경찰 수사 추리물인데, 복선 회수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앞부분에 툭툭 던져놓은 것처럼 보였던 지역 신문 투고, 부부 싸움 끝에 벌어진 살인 사건, 표백제를 구입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 같은 요소들이 나중에는 모두 본 사건과 직접 맞물리기 때문입니다. 읽다 보면 정말 하나도 허투루 사용된 설정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이런 복선들과 이어지는 추리, 진상의 몇 가지 예는 아래와 같습니다.

  • 경찰의 부실 수사에 대한 투서 + 수상한 남자가 다이야라는 소년에게 접근했던 사건 + 투서 전 지방지에 실렸던 하야토의 시 + 다이야는 하야토의 친구였다 + 그날, 다이야는 하야토의 집에서 놀다가 나왔다 → 수상한 사람은 하야토의 존재를 시를 통해 알았고, 다이야를 하야토로 착각했다.
  • 시라카와 현장을 발견한 고다 미쓰코가 들고있던 다루마 위스키 병 + 죽은 야기가 구속 전 단골 바 바텐더에게 술을 보관해달라고 부탁 + 야기가 협박에 사용했던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 야기는 USB를 다루마 병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 오누마 겐이 횡령을 저질렀다 + 오누마 겐은 사채도 쓰고 있었다 + 야기에게 불륜 조사를 의뢰한 사람 중 하나가 쓰지였다 + 쓰지의 아내 가나는 오누마 겐의 직장 동료였다 → 오누마 겐은 가나와 불륜을 저지르다가 야기에게 협박당했고, 쓰지를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사소해 보이는 흩어져 있는 정보들이 진상으로 정리되는 과정은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수사계장 히노가 펼치는 추리의 짜임새도 좋습니다. 사소한 지점에서 이상함을 포착한 뒤, 그걸 기발한 방향으로 연결해 나가는 방식인데 신선하고 재미있어요. 대표적인게 시라카와가 살해되었을 당시 문고리가 걸려 있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하는 추리입니다. 살인까지 저지른 사람이 그렇게 허술했을 리 없으니 이는 임시 상황이었고 누군가 곧 돌아올 예정이었다고 추리를 전개하는데 설득력이 높습니다. 이는 앞서 나온, 수상한 여자가 표백제를 구입했다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범인이 '부부' 였다는걸 드러내게 되지요.
그 외에도 고다 미쓰코가 빼돌리려고 했던 USB가 숨겨진 장소를 밝혀내는 추리 등 히노의 명추리는 볼만한게 많습니다. 

오누마가 10년 전 쓰지를 살해한 뒤 그의 신분으로 바꿔치기해서 살아왔다는 반전도 괜찮습니다. 오누마로 의심되지만 혈액형이 달랐던 신원불명의 사체 등 관련된 정보도 충실히 제공됩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극적인 장치보다는 탐문과 방문 조사, 그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증언을 통해 진상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묘사도 꼼꼼하여 수사물로서의 재미도 잘 살아 있고요.

다만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운과 우연이 과하게 작용하는 편입니다. 사건의 발단부터가 그러합니다. 오누마를 야기가 '우연히' 발견하고 뒤를 쫓았던게 시작이었으니까요. 오누마가 '아들일지도 모르는' 초등학생의 시를 지방지에서 읽은 것, 우에무라 교코가 오누마의 접근에 대해 투서를 보낸 것, 시라카와가 걸쇠가 걸리지 않은 야기의 집에 들어가 살해당한 것도 모두 우연입니다. 이런 부분은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요.

그리고 경찰도 예전 사진을 통해서는 바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모가 많이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야기가 십여 년 전에 조사했던 상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뭐 이건 전직 탐정의 실력이라고 쳐도, 오누마가 쓰지를 살해한 뒤에도 사건 현장 근처에서 계속 살았다는건 정말이지 말도 안됩니다. 작품 안에서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애쓰지만 솔직히 잘 와 닿지는 않습니다. 무리한 설정이었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주인공 히노의 성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오누마 구미에 대한 취조 과정 등에서 엿보이는데 너무 인간적인 탓입니다. 오지랖도 너무 넓어요. 쓰레기를 쌓아두는 폭력적인 사타케의 부친 이야기는 본 줄거리와 큰 관련이 없는데 굳이 이렇게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인간미를 부각하기 위한 장치로 보이는데, 하드보일드스러운 사건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별로였어요. 차라리 좀 더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보는 형사 쪽이 더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잘 짜여진 작품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제 별점은 3.5점입니다. 추리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6/03/27

어둠이 돌아오라 부를 때 - 찰리 돈리 / 안은주 : 별점 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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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재구성 전문가 로리 무어는 변호사인 아버지 프랭크 무어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아버지의 고객이었던 장기 복역수의 가석방 절차를 인계받아 진행하게 되었다. 그는 '도적'이라는 별명으로 40년 전 유명했던 연쇄 살인범 토머스 미첼이었다. 그러나 토머스 미첼이 죽였다는 피해자의 시신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찰리 돈리의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작품은 현재 시점의 로리와 과거 시점의 앤절라 미첼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데, 앤절라 미첼 시점에서 ‘도적(The Thief)’이라 불린 연쇄 살인범의 정체를 쫓는 과정이 더 볼만 합니다. 앤절라가 주변 인물들을 의심하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하는 흐름이, 앤절라의 자폐로 인한 강박적인 심리묘사와 함께 펼쳐져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덕분입니다. 앤절라가 헛다리 - 남편 회사의 새 고용인이 범인이다, 친구 남편이 범인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 를 짚어 나가다가 범인이 남편 토머스라는걸 깨닫는 장면까지의 빌드업도 좋습니다.

로리의 아버지 프랭크와 토머스 미첼의 관계도 흥미롭습니다. 토머스 미첼이 60년 형을 선고받은 결정적 이유는 아내 앤절라 미첼의 실종 때문이었습니다. 도적이 저지른 연쇄 살인은 시체를 찾지 못해 혐의를 입증하는데 실패했거든요. 선고 후 토머스는 아내를 찾아 달라며 프랭크를 개인적으로 고용했습니다. 자신이 죽이지 않은 앤절라의 생존이 확인되면 자신은 풀려날 수 있으니까요.
프랭크도 처음에는 의뢰인인 토머스를 믿고 앤절라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프랭크는 토머스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 그리고 앤절라는 토머스에게 살해된 것이 아니라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는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앤절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갓 태어난 아이를 입양함과 동시에 토머스를 속여 가며 가석방을 늦춰 왔던겁니다.
이는 현재 시점의 화자인 로리가 바로 토머스와 앤절라의 딸이었다는 그럴싸한 반전으로 이어지며,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게 만들고요.

하지만 절대로! 좋은 작품은 아닙니다. 연쇄 살인마와 맞서 싸우는, 다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여성 화자를 중심으로 한 흔해빠진 양산형 범죄 스릴러에 불과한 탓입니다.
특히 주요 화자인 로리와 앤절라의 자폐 성향이나 강박과 같은 심리적인 문제 묘사는 과할 뿐더러, 최근 범죄 스릴러에서 자주 보이는 캐릭터 유형을 그대로 반복하여 식상합니다. 친절하고 다정해 보였던 남편이 사실은 연쇄 살인마였다는 설정 역시 뻔하고요.

수사 과정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토머스가 증거를 완벽하게 지웠다고 해도 거의 십 년 동안 여성들을 수십 명이나 살해했는데 경찰과 검찰이 아무런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설정, 그리고 토머스를 체포하는 근거가 되었던 실종 여성의 신분증과 목걸이는 분명한 물증인데 이걸 단순한 정황 증거처럼 취급했던 재판 과정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토머스의 후반부 행동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는 40년 동안 복역한 뒤 가석방되자마자 곧바로 앤절라를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방해가 되는 캐서린과 그레타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무리한 행동을 해야 할 이유가 작품 안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토머스가 시한부라든가 하는 설정이 있었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설명은 없어요.
범행 과정 역시 허술합니다. 그레타를 살해하면서 방명록에 서명을 남기는 등 명확한 증거를 남기는데, 이런 방식은 40년 전 이야기라면 모를까 2020년대에서는 빠져나가기 힘들 겁니다. CCTV도 있을테고요.
마지막 전개도 억지스럽습니다. 진상을 눈치챈 로리가 토머스의 집을 혼자 찾아가는 행동부터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토머스가 언제나처럼 희생자를 매단 교수대를 만들어 변태적인 놀이를 즐기다가, 숨어 있던 로리의 기습을 받고 죽는 결말은 허무함의 극치였고요.

불필요한 묘사도 많습니다. 앞서 말했듯 주인공들의 심리적 문제를 강조하는 묘사는 과할 정도로 반복되고, 캐스트너 인형 복원이나 플로이즈 다크로드 맥주 같은 이상한 취미와 집착도 이야기 전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카밀 버드 관련 설정은 차라리 나오지 않는 편이 나았고, 로리의 연인인 레인의 존재 역시 작품 전개에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앤절라가 출산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을 가능성은 비교적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범죄 전문가라는 로리가 이를 지나치게 늦게 눈치챈다는 점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답답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전형적인 킬링타임용 범죄 스릴러에 불과합니다. 흥미로운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지탱할 만큼의 독특함은 없어요. 구태여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6/03/06

소녀 A의 살인 - 이마무라 아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디오 DJ 신타니 카나는 심야방송에서 ‘F여학원 1학년 소녀 A’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양어머니가 죽은 뒤 양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고, 밤마다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으며 더는 버티지 못하면 자살하거나 양아버지를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방송 후, 신타니 카나는 고교 동창 와키사카에게 연락했다. 후요 여학원 교사인 와키사카에게 편지 속 내용이 진짜인지 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와키사카의 조사 결과, 조건에 맞는 학생은 세 명 - 물리 교사 다카스기의 양녀 다카스기 이즈미, 의사의 딸 마쓰노 아이, 경찰의 양녀 스와 준코 - 이었다. 

카나는 세 명을 직접 접촉해 ‘소녀 A’를 찾으려고 연락처도 받았지만, 곧바로 다카스기 히사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강도 사건, 혹은 소녀 A가 이즈미이며 그녀의 복수가 아닐까 생각되었지만 다카스기가 마쓰노 의사를 협박하고 있었다는게 드러나 마쓰노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조사를 받던 마쓰노가 “집에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고, 같은 전화를 받았던 스와 경부는 수사를 통해 모든게 신타니 카나와 연결된다는걸 알아내는데...

국내에는 소개된 적 없는 이마무라 아야의 장편 추리소설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은 다카스기 히사오 살인 사건을 쫓는 본편의 이야기와, 한 ‘소녀’의 독백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독백하는 소녀가 본편 등장인물 중 의외의 인물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서술 트릭에 의한 반전이 재미의 핵심이고요.
지금 시점에서 이런 교차 서술을 통한 화자를 오해하게 만드는 서술 트릭은 제법 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1995년에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발표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했을 겁니다. 지금 읽어도 웬만한 재미는 선사해 줄 정도니까요.

단지 서술 트릭 뿐 아니라, 카나가 협박범의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소녀 A’의 편지를 날조한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소녀의 성폭행 피해에 대한 고백을 방송에서 소개한 뒤, 동창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와키사카에로부터 소녀의 주소를 알아내는 계획으로 DJ라는 직업이 갖는 파급력,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양부의 성범죄라는 소재가 결합되면서 ‘개인정보 확인’이라는 위험한 행위가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덕분입니다.

얼핏 사소해 보였던 마쓰노의 주장, 즉 집에 있을 때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이 사건 해결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등, 앞 뒤가 잘 맞아 떨어지며 막힘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쉽게 읽히며,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니까요.

다만 후반부는 지나치게 뻔합니다. 이즈미의 “알토 목소리”였다는 증언으로 신타니 카나가 전화를 걸었다는게 특정되고 나면, 그녀가 범인이라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다카스기는 이전에도 협박범이었으니 카나를 협박한게 범행 동기가 되었을테고, 협박의 원인은 과거 카나가 ‘소녀’일 때 저질렀던 양부 살해일 것, 즉 카나가 '소녀'였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고요. 양부 사체를 고향집에 숨겨두었을 거라는 정황도 뻔하디 뻔합니다.
초반에 소녀가 “혹시 이즈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 끌고 갔더라면 그나마 이런 뻔한 추정이 조금이나마 완화되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이즈미 방의 자물쇠나 전날의 수면제 복용은 경찰 조사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이즈미가 소녀일 가능성’은 배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소녀들’은 그녀들이 다카스기를 죽일 이유가 희박하니 애초에 대상이 될 수도 없고요. 즉, 반전의 폭을 초반부터 줄여놓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범죄에 대한 여러 설정들도 설득력이 부족하고 거슬립니다. 대표적인게 신타니 카나에게 ‘운이 너무 없었다’는 설정입니다. 

  • 후요 학원에 모친 없이 양부와만 사는 1학년 여학생이 무려 3명이나 있었다
  • 아내가 유키에인지를 확인하는 전화를, 대상자인 다카스기에게 맨 마지막에 걸었다
  • 전화들을 사건의 핵심 용의자 마쓰노와 수사 담당자 스와, 그리고 피해자의 딸 이즈미가 각각 받았다

는 건데, 대상자가 딱 한 명이었거나, 이즈미가 처음 전화를 받았거나 했다면 사건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거에요. 이렇게 악운이 겹치는건, 불운으로 사건을 억지로 진행시킨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습니다.
카나의 범행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구 금액이 얼마였든, 2년만 버티면 공소시효가 성립되어 협박이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는 계산을 생각하면 굳이 위험한 선택을 했어야 했나 싶거든요.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듯한 다카스기가 협박에 맛을 들여 계속 협박했다는 설정도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스와 경부가 공무집행 중 사망하게 만든 범인의 딸을 양녀로 키운다는 설정은 독자의 감정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독자가 분노할 만한 범죄를 이야기 안에 꽤 자연스럽게 녹여냈고, 그 사건을 둘러싼 여성의 심리 묘사가 설득력 있게 이어진다는 점은 좋습니다. 서술 트릭을 잘 활용했다는 분명한 장점도 있고요.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하다는 단점을 극복하기는 어려워 감점합니다만, 번역 출간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은 합니다.

2026/02/27

성모 - 아키요시 리카코 / 이연승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착실하고 성실한 고등학생 마코토는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동들을 없애는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범죄자로 두 명의 아이들을 살해하고 유기했다. 뛰어난 머리로 검도 호구 가방을 쓰는 등의 작전으로 알리바이도 만들었지만, 경찰도 무능하지 않은 탓에 수사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한편, 어린 딸 가오루 때문에 연쇄 아동 살해범을 강하게 의식하던 호나미는 근처에 사는 다테시나가 수상하다는걸 알아차리고 경찰에 신고하는데...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게 된 장편 범죄물로 이야기는 크게 범인인 마코토의 시점, 어린 딸 가오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엄마 호나미의 시점,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사카쿠치-다니자키 형사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마코토는 검도부 소속이자 방과 후 검도 선생님으로, 호구와 장비를 넣는 큰 가방을 범행에 이용해서 아이를 가방에 넣어 옮긴 뒤 살해했습니다. 형사들은 가방에 아이들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마코토에게 혐의를 두기 시작하고요.
한편 호나미는 과거 성폭행범으로 실형을 살았던 다테나시를 의심해 신고했지만 다테나시의 알리바이가 확실해 풀려나자, 다테나시의 열쇠를 몰래 복제해 그의 집에 잠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오루의 사진과 성폭행 관련 증거들을 발견하자 그를 범인이라 확신한 뒤 결국 그를 죽이고 맙니다.

뒤이어 결말이자 반전이 등장하는데 마코토는 여자였고, 가오루는 마코토의 딸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호나미는 마코토의 엄마였고요. 즉, 호나미가 ‘딸’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은 가오루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코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나미는 마코토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테나시에게 뒤집어씌운 뒤 그를 죽인거지요.
마코토가 여자였다는 점, 가오루의 친엄마라는 점, 그리고 마코토의 엄마가 호나미라는 설정은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어 반전을 극대화합니다.

이처럼 서술 트릭과 반전은 그럴듯한 편인데,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마코토가 과거 다테나시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고, 그로 인해 가오루를 낳으며 남성 공포증과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탓이 큽니다. 아이들이 가오루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것은 정도를 한참 벗어난 일입니다. 범행 수법 또한 지나치게 잔혹해 읽는 내내 불쾌감을 줍니다. 사카구치 형사가 사체의 상태를 보고 ‘상냥하다’고 표현하는 부분 역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범행 묘사만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서술 트릭의 걸작이라 하더라도 "살육에 이르는 병"을 추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나마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 자체를 굉장히 잘 쓴, 선구자적 작품이라는 의미라도 있지만 이 작품의 서술 트릭은 독자를 속이겠다는 의도에만 치중한 듯한 인상이 강해 별로입니다. 독자가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가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마코토의 초반부 묘사처럼요.

또한 경찰 수사가 다테나시를 범인으로 단정한 채 종결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다테나시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호나미가 반복적으로 그를 의심하며 신고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마코토 역시 수상한 정황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에 마코토가 호나미의 진심을 알고 죄책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지는 묘사가 나오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경찰이 이 두 개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수사한다면 진상을 밝혀낼 지도 모르는데요. 성모랍시고 모성애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통곡"같이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마코토는 단죄받는다는 결말이 더 깔끔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보다는 서술 트릭을 활용한 다른 유명 작품들을 읽는 편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2026/02/13

존재의 모든 것을 - 시오타 다케시 / 이현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했던 형사 나카자와의 유지를 받아, 다이니치 신문 지국장 몬덴 지로는 30년 전 유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나이토 료라는 아이가 유괴되고 2년 후 조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조사를 통해 피해자 료가 사실화로 유명한 화가 기사라기 슈와 동일인물이며, 수사선상에 떠올랐던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남동생인 화가 노모토 다카유키와 같은 같은 화랑에 속해있다는게 드러났고, 몬덴은 노모토 다카유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2023년 경, 여러 리스트에서 꽤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유괴 소재의 범죄 스럴러 드라마입니다.

초반의 아이가 유괴된 상황에서 경찰과 피해자 가족이 중심이 되는 몸값 전달 과정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면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범인과의 전화 통화, 그리고 여러 장소를 거쳐 이동하며 피해 아동 료의 조부 기지마가 탈진하는 장면이 아주 박진감 넘칩니다. 또한 유괴범들이 경찰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본래 목적이었던 유괴에 앞서 다른 유괴를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유괴범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한 뒤 사라졌던 피해 소년 료가 2년 후 조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전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30년 뒤, 기자 몬덴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구성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신문기자 출신으로, 그래서인지 몬덴 지로의 취재 과정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한 덕분입니다.

몬덴이 료를 보호했던 화가 노모토 다카히코 가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도쿄, 시가현 비와호, 홋카이도 등을 순례하듯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여정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고, 지역의 풍광이나 명소들을 노모토의 ‘사실화’ 화풍과 연결 지어 서술하는 방식도 잘 어울렸습니다. 

사진과 다르게 모든 곳에 촛점이 맞고 추격해 오는 듯한 박력이 느껴진다는 사실화에 대한 설명도 발군입니다.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하이퍼 리얼리즘' 장르와 같다고 생각되는데, 몇 작품 찾아보니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사진과는 다르게 생성형 AI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기는 하네요. 이건 화가들이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겠지만요.

이렇게 묘사는 남다른 데가 있는데, 문제는 초반 유괴극의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 스릴러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가로 성공한 현재의 료를 과거에 돌봤던 인물이 유력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동생인 사실화가 노모토 다카유키라는 사실이 너무 일찍 밝혀지는 탓이 큽니다. 이후 전개는 노모토 다카유키의 과거를 추적하는 흐름일 뿐이며, 그가 아내 유미와 함께 료를 정성껏 보살폈다는 점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는 스릴러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범죄라는 행위가 없으니 당연하지요. 유괴극도 몸값을 받아내는데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 맥이 빠지고요.

몬덴의 추적극도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발로 뛰는 정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과정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노모토의 그림을 본 뒤 부터는 더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노모토는 자신이 도주하며 머물렀던 곳을 사실화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진 속 장소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료가 스스로 과거를 밝히면 충분한 이야기인데, 왜 이처럼 기자의 조사가 필요했는냐는 문제도 큽니다.  공소시효도 이미 지났고, 료는 명백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몬덴에게 추적을 맡기고 사건을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성껏 길러준 노모토 부부를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동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화가로서의 노모토를 위해서라도요.
몬덴 역시 왜 이 사건을 추적하는지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하지만, 기사화해서 화제를 일으키고 돈을 벌겠다는게 핵심일터라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노모토 이야기를 통해 일본 화단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별로입니다. 약간 사회파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노모토가 화단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형의 유괴 사건에 우연히 연루되어 도주한 것이라서 이러한 고발과는 연결하기가 애매합니다. 작중 언급도 되듯이 작가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인 듯 한데, 그냥 어설픈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렇게까지 큰 비중을 가질 내용도 아니었고요.
비중으로 친다면 료의 고등학교 동창인 리호의 등장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녀는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리호는 그저 료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약간의 화단과 백화점 관련 사회 고발 메시지를 언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녀없이 몬덴의 추적극으로만 진행되었어도 충분했을 이야기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괴극을 다룬 범죄물로서는 초반을 제외하면 다른 유괴물 대비 장점을 찾기 어렵고, 이후의 전개도 추리나 스릴러의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진상이 너무 일찍 밝혀지고, 이야기도 잘 짜여졌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탓입니다. 별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02/01

그렇게 사건 현장이 되어 버렸다(2025)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호주 국빈 만찬이 열리던 밤, 백악관 관리 총책임자 A.B. 윈터가 시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측근 해리 홀린저 등은 자살로 무마하려 했지만, 워싱턴 경찰 국장이 수사를 위해 부른 명탐정 코델리아 컵은 살인 사건이라며 백악관을 폐쇄하고 모든 관계자와 초대 손님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와 여러 수사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하여 사건은 자살로 마무리되었으나, 국회 청문회에서 새로운 사실(세 번째 남자)이 밝혀져 다시 코델리아 컵이 소환되는데...

넷플릭스에서 감상한 추리 드라마입니다. 총 8회 에피소드, 시간으로는 약 8시간에 이르는 대장편입니다. 이렇게 긴 호흡의 장편 영상 추리물을 본 건 처음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안락의자형 추리물을 영상화한다면 이렇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회 청문회에서의 증언과 컵 탐정이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는 장면이 전개의 대부분인데, 이를 단순히 나열했더라면 매우 지루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증언 장면과 컵 탐정이 추리한 실제 상황을 교차 편집하여, 왜곡된 증언과 진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연출이 매우 훌륭합니다.

단서 제공도 공정한 편입니다. 범인 릴리 슈마커가 대통령의 배우자 엘리엇의 목소리를 흉내 내 사건 발생 당시 2층을 비우고, 이후 사건 현장은 옐로우 룸을 드나드는 문을 폐쇄하는 공사를 진행한 것이 핵심 단서인데, 릴리가 인터뷰 중 실제로 엘리엇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니까요. 이런 장면은 소설로는 구현하기 힘든, 영상물이기에 가능했던 연출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의 단서들, 예를 들어 백악관 내부 그림의 이동으로 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면 등도 모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탐정 코델리아 컵도 매력적인 인물입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명탐정이기도 하지만, 세인트 메리 미드라는 마을과 인간 관계의 전문가인 미스 마플처럼, 자신이 지닌 "탐조"라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흥미로웠던 덕입니다. 
스스로를 천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무능을 드러내며 면박을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는 태도 또한 인상 깊습니다. 고전 본격물의 "잘난 척하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이지만, 백악관 관계자들의 무능과 거짓이 워낙에 강하게 드러나는 덕분에 오히려 통쾌함을 안겨줍니다.
추리의 절정에서 선보이는 추리쇼도 명탐정답게 화려합니다. 릴리가 범인임을 밝혀내고, 핵심 증거인 시계를 찾아내는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배우들의 캐스팅도 적절합니다. 모두 자신에게 딱 맞는 배역을 맡아 열연을 펼칩니다. 카일리 미노그의 깜짝 카메오 등장도 재미요소였어요. 

그러나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백악관 내부 묘사입니다. 지나치게 희화화되어 도무지 현실감이 들지 않습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좌하는 조직이 이렇게 무능하게 묘사된다는 건 과장이 지나치지요. 백악관의 전통과 규범은 무시한 채, 개인의 아집으로 만찬을 망친 요리사 실라와 파티셰 디디에, 알코올중독 집사, 그리고 불청객과 정체 불명의 게스트까지 들여보낸 경호원들 모두 다음 날 해고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들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게이라는 설정 역시 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야기 전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차라리 더 자연스럽게 풀어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성인 릴리가 퍼스트 레이디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테고요. 여러모로 불필요한 설정처럼 보였습니다.

추리적인 면에서도 억지가 있습니다. 릴리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살인을 저질렀고, 이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대통령 동생 트립, 엔지니어 브루스, 파티셰 디디에 등이 우연히 개입한 탓입니다. 거의 동시에 사건 현장에 모였던 여러 인물이 벌인 우발적 행동으로 인해 사건이 꼬였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사건이 호주 국빈 만찬 중에 벌어졌고, 국빈들을 감금했다는 설정도 무리입니다. 백악관 직원을, 백악관 내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점은 이미 코델리아 컵에 의해 밝혀졌던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국빈들은 바로 풀어주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관계자들의 감금을 유지하더라도요.

후더닛물답게 의심스러운 용의자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는 있지만, 정작 범인 릴리의 동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점도 아쉽습니다. 릴리는 재벌가 출신으로 애초에 살인을 저지를 만한 동기가 희박합니다. 실라나 엘시처럼 직접적인 "해고"라는 동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횡령이라는 설정을 덧붙이고는 있지만, 명확히 설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통령의 가장 큰 후원자의 딸인 릴리가 이 정도 이유로 해고되거나 커리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는 설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물로서 잘 만들어진 작품이긴 합니다. 설정의 과도함과 동기의 빈약함 같은 단점은 분명하지만, 추리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감상해 볼 만합니다.

2026/01/04

루드비히, 퍼즐로 푸는 진실 (2024) : 별점 4.5점

유명 퍼즐작가로 필명이 '루드비히'인 존 테일러에게 형수이자 소꼽친구 루시로부터 경찰인 쌍둥이 형 제임스가 실종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러 정황은 제임스가 모종의 이유로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는걸 알려주었다. 루시는 존에게 제임스인척 경찰서로 출근해서 존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출근한 존 앞에 여러 불가능 범죄가 잇달아 펼쳐지는데....

영국 BBC에서 제작한 총 6화 구성의 추리 드라마 첫 번째 시즌입니다. 

가장 큰 매력은 독특한 설정입니다. 퍼즐 천재인 '루드비히' 존을 주인공 탐정역으로, 범죄 속 트릭들을 퍼즐의 일종처럼 선보이거든요. 존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하나의 ‘퍼즐’로 인식하며 본격적으로 해결에 나서고요. 마술사 탐정까지는 봤었는데, 퍼즐 전문가 탐정은 처음 보네요.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입니다. 퍼즐 제작에만 몰두하며 사회성과 현실 감각이 부족한 존이 갑작스럽게 경찰 역할을 맡아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코믹하면서도 묘하게 현실감 있게 그려집니다. 형수 루시와 조카 헨리도 제임스 실종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요. 그러고보니 존과 제임스 형제에 아들 이름은 헨리라니, 가족 자체가 영국적이군요. 
카터를 비롯한 경찰 동료들, 다른 등장인물들도 진지한 상황 속에서 영국식 유머를 자연스럽게 섞어내어 극을 재미있게 만들어 줍니다. 가족과 동료애가 끝까지 이어지는 것도 요사이 보기드문 미덕이라 할 수 있고요.

추리적으로도 빼어납니다. 1화에서는 여러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교차 분석해 논리적으로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인물을 드러냅니다. 시청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서 추리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렵지만, 퍼즐 전문가의 해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2화에서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퍼즐 트릭이 사용됩니다. 존은 사진을 통해 벽지가 미세하게 이동한 점을 알아채고, 벽지 뒤 벽을 뚫어 숨겨진 시체를 찾아낸 뒤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요. 피해자 사기꾼에게 사기당한 일행들이 단체로 범행을 저지르고 은폐했던건데, 앞서 등장한 여러가지 단서들로 설득력있게 설명됩니다.

3화는 두 개의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는 ‘병렬 퍼즐’이 등장합니다. 관광 가이드 살인은 갑작스럽게 행해진 것으로 추리하고, 그 이유를 관광 코스를 직접 도는 방법으로 발품을 팔아 증명해내는데 수사와 진상 모두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4화는 체스말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범은 장치 트릭을 활용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다섯 명의 동료들 작업 위치가 순차적으로 바뀌도록 유도해서, 피해자가 원했던 위치에 가도록 만든 뒤 장치를 통해 추락사하게 만든거지요. 존은 이를 '역행 제스' 퍼즐로 풀어냅니다. 이 퍼즐 자체가 루드비히' 존이 처음 만들었다고 소개되는데, 현재의 체스판 상태를 보고 이전 수를 맞추는 퍼즐이에요. 즉, 이전 수를 맞춰가면서 최초에 수를 둔 사람을 알아내 범인을 밝혀냅니다. 
퍼즐을 활용한 추리도 깔끔하지만, 피해자를 발전기가 있는 위치로 이동시킨 뒤 쇼트가 나가도록 배선을 망치고, 발전기를 가동하면 피해자가 감전되어 추락사하게 만든 장치 트릭도 합리적입니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범인이 원하는 흐름대로 움직였던 것도 이전부터 자주 그래왔다는 설정이라 설득력있고요.
마지막에 발전기에 물을 뿌려 놓은 탓에 범인의 DNA가 묻은 물통을 확보했지만, 범인이 “자기는 1층에서 버렸다”고 주장하자 5층 현장에서만 쓰레기 수거장 안으로 투입 가능하다는 점을 추리쇼처럼 밝혀내는 장면도 볼만합니다.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에피소드입니다.

5화는 '밀실 살인' 트릭이 등장하는데, 꽤 그럴듯합니다. 주말 내내 잠겨있던 교장실에서 교장이 살해된채 발견되는 사건인데, 존은 범인이 밀실 안에 계속 있었다!는 대담한 추리를 내 놓습니다. 이를 발견하는 단서가 교장실 쓰레기통에 있던 '변색되지 않은 사과 조각'이라는 디테일도 인상적입니다. 누군가 교장실에 최근까지 있었다는 증거인데, 영상물에 잘 어울리는 디테일이었습니다. 존의 학창 시절 과거, 그리고 노인이라도 쓸모없는게 아니라는 메시지도 좋았고요.

6화는 루시의 살인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잡는 이야기인데, '루시가 집에서 가져간 칼로 사망한 피해자'라는 결정적 증거를 뒤집는 추리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범인이 막 피해자 폴라를 칼로 찔렀을 때 루시가 자기 칼을 들고 그 집에 들어섰습니다. 범인은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식탁 뒤로 숨었고, 루시가 쓰러진 폴라를 보고 자기 칼을 내려 놓은 뒤 그녀에게 다가가자 범인은 루시에게 보이지 않는 사각으로 빠져나가면서 칼을 바꿔치기 했던 겁니다.
정통 본격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싶을 멋진 트릭이며, 증거도 확실하게 제시됩니다. 범인은 바꿔치기한 루시의 칼을 폴라 부엌 칼꽂이에 꽂아두었는데, 이 칼에서 루시나 존의 지문이 나오면 바꿔치기했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이러한 각각의 사건들과 함께 제임스 실종 사건에 대한 조사와 추리도 계속 이어집니다. 결국 존은 제임스가 남긴, 누구나 들으면 스스로 떠났다고 생각할 메시지에서 암호 해독 키를 찾아내어 암호를 풀어내어 단서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체가 드러났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경찰의 고문역으로 일하며 형을 계속 추적할 존의 모습으로 총 6화의 시즌 1은 마무리 됩니다. 

1화와 2화, 3화 사건은 경찰 수사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듯 싶고, 경찰이 너무 무능하게 그려진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제임스와 폴라, 싱클레어 등이 관련된 진짜 음모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고요. 제임스가 암호로 창고 위치를 남긴 이유와 사라진 이유를 창고에 남기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재미와 추리 모두 빼어난 좋은 드라마였습니다. '루드비히'라는 주인공 필명에 어울리는, 베토벤 음악의 적절한 활용과 촬영도 좋고요. 시즌 2가 빨리 나오면 좋겠습니다.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2025/12/27

어차피 곧 죽을 텐데 - 고사카 마구로 / 송태욱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탐정 나나쿠마 스바루와 조수 야쿠인 리쓰는 시한부 생명의 환자들만 모인 '하루살이 회' 정기 모임 초대를 받아 모임 회장 자야마 교이치의 외딴 별장으로 향했다. 미스터리 애호가인 회원들에게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회원인 자야마, 지로마루, 롯폰마쓰, 가모, 하시모토, 하루나와 함께 즐거운 저녁을 보낸 다음 날, 홀 벽에 걸린 하루나의 그림이 훼손되었고 가모가 사망했다. 의사인 자야마와 지로마루의 검안으로 병사로 추정되었지만, 야쿠인은 타살일 수 있다 여기고 나나쿠마와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날 나나쿠마마저도 죽은 채 발견되었다...

제 23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의 문고 그랑프리 수상작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이기도 하고요.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 되어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징이라면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정통 본격 미스터리의 ‘클로즈드 서클’ 형식을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외딴 별장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 기묘한 참석자들, 밀실이라는 공간적 설정 등은 전형적이지만,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되지 않았고 피해자가 자연사(병사)로 보이도록 꾸며서 과학 수사나 경찰의 개입이 일시적으로 미치지 않는다는 설정이거든요. 작중 표현 그대로 ‘어정쩡한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아요. 

나나쿠마 사건은 별게 없지만, 가모 사건은 정통 본격물다운 트릭이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사체 발견 당시, 인슐린을 이용한 저혈당성 쇼크 살인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이는 나나쿠마의 조사로 곧바로 반박됩니다. 가모가 부착하고 있던 혈당 측정기 데이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쿠라코는 나나쿠마가 죽은 뒤, 데이터는 가모 것이 아니라 나나쿠마의 것이었다고 추리합니다. 그녀의 측정기가 가모와 동일 기종이었거든요. 가모는 나나쿠마에 의해 인슐린 쇼크로 살해당했고, 이를 나나쿠마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조작된 데이터를 보여주었다는 추리이지요. 밀실은 데이터를 보여주려고 가모의 짐을 뒤질 때(측정기를 찾기 위해서) 몰래 가지고 있던 가모 방 열쇠를 가방 안에 있었던 양 꺼내 들었던 것이고요. 현실적이라서 그럴싸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두 살인 사건 모두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을 왜 살해했나"라는 기묘한 상황에 더해, 사실은 가모와 나나쿠마가 모두 죽은 척 했었고 이는 대충인 검안과 사체 이동 등에서 드러난다는 등 진상 부분에서도 본격물적인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외에도 나나쿠마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였고 야쿠인은 그녀의 손자라는 점이 드러나는 장면은 서술 트릭의 맛을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사쿠라코의 추리를 한 번 더 꼬아서 만든 반전과 진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무엇보다 핵심이 되는 가모 게이타 사건의 진상이 이상합니다. 나나쿠마가 살해한게 아니라 야쿠인이 인슐린을 투약해 죽이려 했던게 진상인데, 그렇다면 혈당 측정기 데이터가 변하지 않았다는 설명과 충돌합니다. 혈당이 실제로 떨어졌다면 데이터가 변했어야 하고, 변하지 않았다면 야쿠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으니까요. 의대생 출신이라는 설정까지 고려하면 당연합니다. 자신의 인슐린 투약이 효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 병사로 믿고, 다음 날 나나쿠마 살해까지 저지른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밀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쿠인이 가모에게 인슐린을 투약한 뒤, 가모가 스스로 방을 잠갔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주사에 이상함을 느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방을 잠글 이유가 있을까요? 인슐린이 가짜라는걸 나나쿠마가 미리 알려주어서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건 알았더라도, 문을 잠그면 밀실이 되는데 혹시라도 죽으면 자연사로 보일 수 있으니 잠그지 않는게 당연합니다.

가모 사건 때 하루나의 그림을 훼손한 부분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미 나나쿠마가 그림을 본 상황에서, 그리고 모델인 사쿠라코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림만 훼손한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나나쿠마를 어차피 살해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가모와 나나쿠마를 '병사'처럼 보이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그림을 훼손하는 실질적인 범행을 저지른 건 자칫 경찰 수사의 꼬투리가 될 수도 있으니 하면 안되는 짓이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이 지로마루가 손녀의 죽음 진상을 밝히기 위해 꾸민 연극이었다는 설정도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자야마의 ‘하루살이 회’는 실재했던 것일까요? 자야마는 수년 전부터 블로그 활동을 해 왔던 인물인데, 그 모든 게 연극이었다는 설정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큰 연극을 벌이는 상황에서 정작 가모의 방에 CCTV를 장치해 야쿠인의 범행을 찍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래서야 무엇을 위한 연극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설정도 썩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나나쿠마 1인칭이 섞이는 묘사는 전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나쿠마와 사쿠라코의 말투도 의도된 유머일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무례하게 느껴졌고 몰입을 방해합니다. 마지막에 하루나가 야쿠인을 독살하는 듯한 묘사 역시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동기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림을 훼손했기 때문에? 하루나 본인 스스로 습작에 불과해 미련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이유가 될 수 없지요.

정통 본격물을 현대 무대의 클로즈드 서클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고, 몇몇 볼만한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한참 모자랍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수상작은 기대에 미쳤던게 없었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네요. 앞으로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5/11/29

내 시체를 찾아주세요 - 호시즈키 와타루 / 최수영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스터리 작가 아사미는 개인 블로그에 불치병에 걸려 자살할 생각이니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글을 올리고 사라졌다. 뒤이어 블로그에 예약 갱신으로 시어머니의 치부와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벌였던 동반 자살극에 대한 진상을 그린 소설을 차례로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아사미의 남편 마사타카와 아사미의 편집자 사오리는 자신들의 불륜이 드러나지 않을까, 그리고 아사미가 다른 무언가를 고백할까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블로그 패스워드를 찾았지만 실패했고, 결국 마지막 갱신글로 동반 자살극의 진상과 사오리의 치부가 드러났다. 모든걸 잃은 사오리는 마지막 글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마사타카가 은거하는 별장으로 향하는데...

유명 작가의 자살과 자신의 시체를 찾아달라는 블로그 글로 시작되는 구성이 인상적인 장편 범죄 복수 스릴러입니다. 

블로그 글, 마사타카, 아사미 시점을 오가면서 아사미가 정말로 자살한 것인지? 시체는 어디에 있는지? 라는 의문과 아사미 고교 시절 동반 자살극에 대한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는 전개는 흡입력이 뛰어납니다.
편집자 사오리가 마지막 블로그 글의 용어 선택이 평소와 다르다는 점을 알아채고 진상을 눈치챈 장면은 '편집자'라는 직업의 전문 지식을 활용한 추리라는 점에서 괜찮았고요.

그러나 전체적인 완성도는 낮습니다. 우선 주요 인물들의 설정부터 비현실적이에요. 모리바야시 아사미는 극단적인 학대를 겪은 뒤 고아로 자라 정상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남편 마사타카는 데이트 강간을 일삼고 아사미에게 질투심을 품은 채 얹혀 사는 인간 말종입니다. 사오리 역시 아사미에게 집착한 나머지 마사타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설정이고요. 이렇게 주요 등장인물 대부분이 과장되거나 극단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은 복수극으로 '아사미는 자살한게 아니라, 복수를 위해서 마사타카를 일부러 자극해 살인에 이르게 만들었다'인데, 복수로 보기에는 애매하고 부족합니다. 마사타카가 살인을 저지른 후의 계획이 전무한 탓입니다. 살인범으로 만든 뒤 파멸시키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범행을 덮어주기 위해 자살로 가장한 블로그 글을 올리기까지 하니까요. 이렇게 되면 마사타카는 뻔뻔하게 아사미 증쇄본 수익, 그리고 실종 신고 7년 후에는 남은 유산으로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데 이걸 복수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살해당하는 것만 목표였고 그 뒤는 상관없다’고 유서에 쓰여있는 걸로 퉁치고 끝내는데, 허무하기 짝이 없네요. 이보다는 정교하거나 복잡한 추가적인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아사미가 불러낸 사기꾼에게 속아 전 재산을 날린 마사타카의 어머니가 유산을 노리고 아들을 죽였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아사미가 실종 중에는 마사타카에게 유산이 상속될 수 없으니, 아들을 죽여봤자 헛짓거리였다!는게 밝혀지면 괜찮지 않았을까요?

물론 마사타카가 자살하기는 했지만, 이는 계획된게 아니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아사미가 사라진 뒤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책은 큰 화제를 얻었고, 그에 따라 인세 수입도 늘어날 상황에서 마사타카같은 쓰레기가 극단적 선택을 한다는 것도 영 와닿지 않고요. 앞서 그의 내면을 묘사할 때 죄책감이 큰 인물로 그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작중 마사타카가 아사미를 살해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의 작품 혹평에 대한 분노와 증오인데, 그게 사람을 죽일 정도의 결정적인 트리거라는 것 역시 잘 설명되지 못했습니다. 

또한 소설 속 소설인 "하얀 새장 이야기"도 중반까지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로 흥미를 이끌지만, 결말은 결국 동반 자살로 귀결될 뿐이라 추리적 가치는 없고, 아사미의 성격이나 내면을 깊이 있게 드러내지도 못해서 왜 삽입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친구들 이야기 설정도 새로운게 없어서 시시하니까요.

그 외에도, 마사타카가 블로그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알아챈 방법도 대충이고, 사오리가 멍청하게 혼자 마사타카를 찾아가 살해당한 것도 비현실적이며, 아사미야 그렇다 쳐도 사오리 실종 이후에 경찰 수사가 시작되지 않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등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눈에 많이 띕니다. 사체 은닉도 그냥 잘게 나누어(?) 버렸다 정도로 넘어가는건 아니다 싶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흡입력 있는 출발과 일부 매력적인 장치는 있지만, 여러모로 비현실적이고 복수극으로도 미흡하여 완성도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25/11/16

고독한 용의자 - 찬호께이 / 허유영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년간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오다가 자살한 셰바이천의 방 옷장 안에서 수십 개의 표본병에 토막난 채 담긴 두 구의 남녀 사체가 발견되었다. 쉬유이 경위는 수사를 진행하며 바이천의 이웃이자 친구 칸즈위안을 의심했지만, 칸즈위안은 바이천의 외삼촌 셰자오후가 진범이라 주장하며 경찰에 협력을 제안했다. 유명 추리소설가인 칸즈위안의 추리대로 셰자오후가 범인일 수 있다는 증거가 하나 둘 씩 드러나지만, 경찰 고위 층은 진범은 바이천이라며 사건을 마무리하라고 지시했다....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추리작가 찬호께이의 신작 장편 범죄 스릴러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감상했습니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의 쉬유이가 주인공이지만, 전작과의 연결고리는 거의 없는 독립적인 작품으로 이번에도 작가 특유의 촘촘한 트릭과 복선, 마지막의 반전까지 추리소설 팬이라면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특히 ‘은둔자 살인마’ 셰바이천이 실제 범인이 아니라는 가정 아래 수수께끼가 하나둘씩 풀려나가는 전개가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는 덕이 큽니다.

셰바이천은 은둔형 외톨이로 방 안에서만 생활하던 인물인데, 그의 방 옷장에서 다수의 표본병이 발견되면서 사건이 시작됩니다. 경찰은 당연히 셰바이천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칸즈위안이 셰자오후가 범인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하며 수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때부터 하나씩 드러나는 단서들과 그 단서들을 조합해 수수께끼를 풀고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묘미이지요.

첫 번째 수수께끼는 셰바이천이 방 안에만 머무르는 은둔자인데, 어떻게 셰자오후가 수십 개의 표본병을 셰바이천 몰래 옷장 안에 넣을 수 있었냐는 겁니다. 수사 결과, 그 날 어머니 메이펑은 외출했습니다. 식사권을 선물받고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나갔었지요. 그런데 이 식사권을 선물한 사람이 셰자오후였습니다. 그는 누나 메이펑이 나간 틈에 셰바이천의 저녁 식사에 수면제를 타 재운 뒤, 몰래 표본병을 옷장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평소처럼 그릇을 씻지 않고 그대로 방 문 앞에 내 놓았던 점이 증거입니다.
두 번째 수수께끼는, 셰바이천이 오랜 시간 동안 옷장 속의 사체를 왜 몰랐느냐는 것인데, 셰바이천은 은둔형 외톨이라 옷을 갈아입을 일이 거의 없었던 탓에 옷장을 열 일이 없었고요.

그리고 밝혀지는 셰자오후의 범행 동기도 놀랍습니다. 그는 과거부터 어린 궈쯔닝을 노려서, 먼저 궈타오안을 살해한 뒤 그의 아내 쑨수칭의 동거남이자 기둥서방이 됩니다. 이후 궈쯔닝을 장기간 성폭행했는데, 궈쯔닝이 집을 가출한 뒤 만나지 못하다가 우연히 다시 발견하여 살해했습니다. 증거는 궈쯔닝 사체에 남겨졌던 담배로 지진 흔적들입니다. 셰자오후가 운행하는 택시에도 혈흔과 머리카락 등의 증거가 남았고요.
이후 셰자오후는 궈타오안과 궈쯔닝 사체를 버리면 범행이 들통날까봐 두려워 작은 병에 담아 토막 보관했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자 새 거처인 레지던스로는 사체를 옮길 수 없어서 셰바이천의 방에 숨겼던게 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셰자오후가 범인이라는걸 밝혀내는 칸즈위안의 관찰력과 추리력도 볼거리입니다. 쑨수칭의 기둥서방일 때 찍혔던 사진 속 손목시계가 무엇인지 알아채고, 당시 상황을 추리해내는게 대표적입니다. 회사에서 범죄 혐의로 해고당하고 빚더미에 올랐던 셰자오후가 명품 시계를 차고 있었다는 건, 쑨수칭의 수입이 좋았다는걸 의미하며 쑨수칭이 셰자오후를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있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며, 이는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이 정도만으로도 훌륭한 스릴러지만, 작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셰자오후를 체포한 이후 충격적인, 진짜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반전이 펼쳐지거든요. 바로 옷장에서 발견된 사체가 셰바이천이었다!는 반전입니다. 바이천은 이미 20년 전 뇌종양으로 사망했고, 친구 칸즈위안이 사체를 숨기고 어머니 메이펑을 위해 살아 있는 것처럼 꾸며왔던 겁니다. 은둔형 외톨이였던 덕분에 외부와 접촉이 거의 없었고, 이를 이용해 오랫동안 존재를 숨길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자살한 남성은? 그는 칸즈위안의 동거인이자 또 다른 은둔자인 ‘더듬이’였습니다. 온라인 게임을 통해 궈쯔닝과 친구가 된 그는, 궈쯔닝이 자살한 뒤 그녀의 과거를 알게 되어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셰자오후를 덫에 빠뜨리기 위한 계획을 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셰자오후는 살인은 저질렀지만, 토막 살인의 진범은 아니었던 겁니다. 모든 것은 더듬이와 칸즈위안이 함께 짠 복수극이었습니다.
이 반전을 셰바이천과 더듬이 시점의 교묘한 전개로 독자를 속이고 있어서 일종의 서술 트릭물로 볼 수도 있고요.

이렇게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데, 아쉬움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분량이 지나치게 긴 편이고, 경찰의 수사가 비현실적으로 무능하게 묘사되는 탓입니다. 칸즈위안을 의심해 미행하는 장면이 대표적이에요. 누가 보아도 셰바이천이 범인임이 명백한데, 구태여 다른 사람에게 혐의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경찰의 유치한 복수심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 반전도 드라마틱한 힘에 비하면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설계는 조금 약합니다. 어머니가 더듬이의 시신을 아들이라고 착각한다거나, 같은 아파트에 은둔자가 둘이나 살았는데 누구도 더듬이의 존재를 몰랐다는 설정 때문입니다. 20년 전 죽은 셰바이천의 사체가 보관 상태가 좋았음에도, 그 정체를 끝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20년 동안 은둔자였다면, 20년 전의 사진이나 기록을 찾아보는게 당연합니다. 때문에 사체의 정체가 경찰 수사에서 드러나지 못한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인간 관계 부분의 작위적인 설정도 거슬립니다. 은둔형 외톨이 더듬이는 궈쯔닝과 온라인 게임 친구가 되었다가 그녀를 자기 방에서 돌봐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이 궈쯔닝을 어린 시절 성폭행했던 셰자오후의 외조카 셰바이천의 집이었고, 조카집을 방문한 셰바이천을 목격한 궈쯔닝이 자신의 거처가 드러났다 여겨 자살했습니다. 아무리 홍콩이 좁아도 그렇지, 주요 인물들이 이렇게까지 밀접하게 엮인다는건 억지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찬호께이 특유의 기획력과 구성력은 좋고 추리와 반전 모두 괜찮은 편입니다. 단점도 명확해서 감점도 약간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평균 이상의 재미는 보장해 줍니다.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표지 디자인은 정말 최악이네요. 최근 출간작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에요...

2025/09/19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도 부부 자택에 화재가 일어난 후, 도의원인 남편 도도 야스유키의 사체는 거실 소파에서 전소된 채, 전 여배우인 아내 도도 에리코 사체는 욕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살한 걸로 보였지만, 수사를 통해 위장된 자살임이 금세 드러났다. 경찰은 원한 관계를 축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해 나갔고, 고다이, 야마오 컴비는 진술을 통해 도도 야스유키의 태블릿이 사라졌다는걸 알아냈다. 그 직후, 범인이라는 인물이 협박 편지를 보내어 태블릿 속 정보를 거래하자고 제안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장편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갈릴레오 유가와'나 '가가 형사'가 아닌, 새롭게 시작된 고다이 쓰토무 형사 시리즈이지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치밀한 수사 과정 묘사입니다. 주변 진술을 통해 태블릿의 존재를 확인하고, 태블릿 전원이 켜진 위치 데이터와 수상쩍은 언행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유력 용의자로 포착하고, 과거 조사를 통해 야마오 경부보가 도도 부부와 고등학교 때 부터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내고, 현금 인출책의 결정적 증언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체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철저하게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역시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입니다. 도도 에리코는 귀한 손님에게만 티파니 찻잔을 낸다는데, 사건 현장 식기 세척기에서 그 찻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티파니 찻잔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야마오는 사건 당일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최소한 야마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티파니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귀한 손님, 또는 손님(범인)이 떠난 뒤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찻잔을 현장에서 치웠던 것이지요. 

결국 수사를 통해 도도 야스유키가 살해당한 아내를 집에 있던 도구로 자살로 위장한 뒤,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미사키가 범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진상 외에도, 수사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 증언을 통한 의문들 - 예를 들어, 도도 야스유키는 체력이 좋았는데 어떻게 범인에게 간단히 살해당했는지 - 까지 모두 수사로 밝혀지는 등, 수사의 디테일은 최고 수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고다이의 예리한 관찰력도 빛납니다. 범인은 도도 저택에서 에리코를 목매달 끈을 조달했는데 왜 그런 준비를 사전에 하지 않았을까? 전기밥솥도 마찬가지, 왜 예약을 해제하지 않았을까? 즉 범인은 간단히 간파당할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우발적이면서도 어설픈 위장 공작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관찰을 통해 제시하거든요.

그리고 야스유키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신의 결의도 합쳐 미사키를 숨겨주기 위한 야마오 경부보의 범죄 계획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는 일부러 단서를 흘려 체포되었던 겁니다. 제목 그대로 '가공범'인 셈이지요. 하지만 야마오는 몇 달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며, 그 시점이면 증거도 많이 사라져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고다이의 끈질긴 수사로 진범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다이는 도도 에리코의 과거를 뒤져 고교 졸업 직후 숙모 집에 머물던 시기 임신했다는 정황을 잡고, 숨겨진 딸이 있으며 그녀가 도도 집을 드나들던 미사키였다는걸 밝혀냅니다. 도도 에리코의 임신을 밝혀내는건 수사 팀의 인해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수사물이라는걸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요.

야마오가 이런 계획을 진행한 동기인 40여년 전인 1985년 고등학생 시절의 야마오, 도도 부부가 엮인 연애와 욕망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팜므 파탈을 넘어서는 매력의 소유자 에리코의 존재감이 압권이었어요. 이런 설정에서는 일반적인, 학생과 관계를 가진 교사 도도 야스유키는 알고보니 굉장한 인격자에 선한 인물이라는 반전 설정도 신선했고요.
세 명의 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짝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 - "경솔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잃게 되는 거에요. 짝사랑이라면 상처 입는 일도, 상처 주는 일도 없잖아요." - 도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미사키의 범행 동기는 ‘버림받음’과 ‘비교에서 비롯된 분노’로 제시되는데, 이미 친모가 에리코라는걸 안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자기 딸이 비행을 저질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인으로 폭발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단순 폭행도 아니고 살인인데 말이지요.

가공범 설정도 지금 보기에는 다소 뻔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행을 떠안는 모습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별다를게 없으니까요. 너무 빠르게 야마오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고요.

핵심 동기인 도도 에리코의 출산과 아이 유기도 배경 설명이 빈약합니다. 아이는 야마오의 아이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낳을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묘사된 둘의 관계로 보면요. 힘들게 낳는 선택을 했다면, 왜 곧바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 부분은 낙태가 금기시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에리코의 개인사 같은게 추가적으로 보강되었어야 납득이 되었을 겁니다. 

진범이 밝혀진 뒤 사회적 파장이나 여론의 반응이 거의 다뤄지지 않아 결말의 현실감이 약하고, 나가마의 죽음은 결국 자살이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인 등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고다이 형사도 작가의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옅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성실함, 눈썰미 외에는 캐릭터적 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치밀한 수사와 ‘가공범’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경찰 수사물로는 우수한 수준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경찰 수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제일 불쌍한건 도도 야스유키네요. 자기 딸이라고 착각한 남의 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2025/09/05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 - 시모무라 아쓰시 / 남소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카가와에서 만든 전기 자전거의 결함으로 사람이 죽은 뒤, 회사에는 비난이 폭주했다. 그 때문인지 시카가와 사장이 목을 매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사장과 관계가 있는 일곱 명의 남녀가 한 폐쇄 공간에 갇혔다. 그들을 가둔 '게임 마스터'는 그들 중 시카가와 사장을 죽인 범인만 살려주겠다며 48시간을 주었다. 사고를 기사화하며 시카가와를 비난했던 기자 카미사와, 피해자 대표 유메코, 사장의 아내 카나에, 시카가와의 부장 린도와 과장 이시와다, 사장의 운전사 쿠라모치와 청소부 하야시의 일곱 명은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며 지은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가 시모무라 아쓰시의 장편입니다. 

닫힌 공간, 클로즈드 써클에서 범인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는건  "방주"와 비슷한데, 이 작품은 "전원 범인, 하지만 피해자, 게다가 탐정"이라는 제목의 상황을 잘 구현했다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줄거리의 상황에 놓인 탓에, 일곱 명의 시카가와 사장 관계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백을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보도, 증거 날조, 거짓 증언 등으로 '심리적인 압박'을 주어서 사장을 자살하게 만들었다고 했지만, 자연스럽게 사장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자신이 살해했다는 자백으로 이어지지요. 즉 모두가 '범인'입니다. 그러나 자백한 사람 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 자백에 허점이 있다고 지적하며 자백을 격파하여, 자연스럽게 탐정 역할을 분담하게 됩니다. 즉, 모두가 '탐정'인 거지요. 마지막에는 한 명만 살아남고 전부 죽음으로써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추리적인 부분도 흥미를 자아냅니다. 시카가와 사장의 사망은 그의 사무실에서 발생했고, 이 사무실은 항상 CCTV로 감시되고 있었기에 자살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등장인물들이 범인이 되기 위해서는 밀실 살인을 일으켰어야 했기 때문에, 이 밀실 살인의 트릭을 파헤쳐나가게 됩니다. 처음에 CCTV를 피해 사무실에 들어간 트릭에서 시작해서, 어떻게 사장을 살해했고, 어떻게 나왔는지를 다른 사람의 자백을 들은 뒤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신은 더 정교한 트릭을 구성해서 '내가 진짜 범인이다'라고 주장하는 방식으로요. 여러 명의 추리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독 초콜릿 사건"도 떠오르네요.
진범이 사용했다고 여겨지는 트릭도 단순하면서 실현 가능성이 높아 만족스럽습니다. 사장실 문을 열면 CCTV가 가려져 사각지대가 생기고, 탈출할 때는 녹화를 약 30초간 멈춘 뒤 재개되도록 설정(여러 시간 동안 동일한 장면만 촬영한터라, 조사하는 사람도 배속 재생해서 보기 때문에 30초는 눈치채기 어렵다)해서 그 사이에 탈출했다는 트릭입니다. 두 개 모두 기술적으로 과하지 않으면서도 실제로 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외의 자백에서도 유메코가 주장한 '냉장고에 숨어 있었다'는 트릭은 기발했습니다.

아울러 유일하게 실질적인 죄를 짓지 않은 카미사와(과장되게 비난했고, 정보 제공자 쿠라모치에게 금품을 건넨 실수는 했지만 보도가 잘못된 것은 아니므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죄를 지어서 죽었다는 결말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스러웠다는 점에서 고전 추리 소설에 대한 오마쥬 느낌도 전해줍니다. 작가의 전작도 다른 작품의 영향이 짙게 느껴졌는데, 이런 스타일의 작법을 즐겨 하나 보네요.

하지만 이야기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인 탓입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성인들이 선뜻 폐쇄 공간에 모여 무려 이틀 동안이나 목숨을 건 추리 게임을 펼친다는게 과연 현대 사회에서 가능할지 의문이에요. 핸드폰 전파 신호가 닿지 않는다는 것 부터가 억지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중간에 등장하는 어린아이의 난입, 현재 진행 중인 게임이 알고보니 경찰이 탐정들을 고용해 만든 '연극 무대'라는 설정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고 불필요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가상가족놀이"와 흡사한 설정인데 그만큼의 동기나 반전이 있지도 않습니다. 연극이라는 장치는 빼고 진짜 게임으로 밀고 가는게 훨씬 더 긴장감 넘쳤을 겁니다.
게다가 연극 속에서 등장한 카미시마가 사실 진짜 사장이었고, 사망한 인물은 사장의 쌍둥이 동생이었다는 결말은 억지의 화룡점정입니다. 경찰 수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닌가요? 카미시마가 다른 피해자들을 단검으로 살해해서 살아남았는데, 이를 린도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진상도 불필요한건 마찬가지고요.  

설명도 부족합니다. 일곱 명이 시카가와 사장이 무고하게 비난받게 된 원흉이라는걸 시카가와 사장이 알아낸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내의 불륜, 회사 과장 이시와다의 거짓 증언, 운전사 쿠라모치의 증거 조작은 알 수 있었다고 해도, 하야시의 경우는 실제로 크게 드러난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해자 대표 유메코의 아버지가 실제로는 자전거 결함으로 죽은게 아니었다는 것, 카나에의 불륜 상대가 린도였다는 것 역시 알아내기 어렵고요.
작 중에서는 그들을 가둔 건물을 사장실 구조로 만든게 아니라, 그 건물 구조로 사장실을 리모델링했다고 설명되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을 들여 몰래 이런 계획을 구체화했다는 것도 말이 안됩니다. 한참 회사가 비난받고 있는 와중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의 구조나 설정은 흥미롭지만, 전체적인 전개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며, 결말은 억지스러운 반전이 도드라집니다. 흥미는 있지만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작가 작품은 다시 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2025/08/31

해벅 (HAVOC) (2025) - 개러스 에반스 : 별점 1.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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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참 형사 워커는 삼합회 보스의 아들 추이가 살해당한 사건을 수사하다가, 시장의 아들 찰리가 연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워커는 시장에게 찰리를 무사히 데려올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 찰리를 노리던 삼합회는 시장을 납치했고, 찰리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려는 부패 경찰들마저 나서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고 마는데... 

"레이드" 시리즈로 잘 알려진 개러스 에반스 감독의 범죄 액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가장 큰 강점은 역시나 액션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이 액션씬으로 볼거리는 많은 편이에요. 시작과 동시에 터지는 자동차 추격전은 박진감 넘치고, 찰리의 애인 미아를 만나기로 했다가 말려든 클럽에서의 혼전은 삼합회와 부패 경찰들, 주인공 일행이 좌충우돌하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오두막에서의 총격과 난투는 감독 특유의 속도감과 무게감을 살려내고 있고요. 적어도 액션만큼은 시원시원하게 즐길 만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워커가 동료 부패 경찰들과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시장에게 왜 약점을 잡혔는지, 찰리와 미아가 어떻게 사건에 휘말렸는지, 삼합회가 시장을 납치한 이유는 무엇인지, 부패 경찰들은 왜 찰리와 미아를 노리는지 등 대부분의 설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야기의 맥락을 제대로 쌓지 않은 채 장면들을 끊어 붙이며 액션으로 넘어가지요. 티격태격하는 고참 마초와 신참 여성 형사 콤비에서 시작되는 기본 설정들마저 진부하기 짝이 없고요.

파워 밸런스와 액션 씬의 설득력도 엉망입니다. 초반에는 삼합회가 경찰을 손쉽게 학살하고 시장까지 납치하는 초월적 조직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주인공 일행과 맞서면 허무하게 쓸려나갑니다. 워커는 산전수전 겪은 형사라 쳐도, 찰리는 부상자에 미아는 여성 아마추어 범죄자일 뿐인데 말이지요. 정점은 오두막 액션입니다. 삼합회 악당들이 은폐와 엄폐도 없이 총격전 한복판으로 돌진하다 죽는 모습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중국인은 멍청하다는걸 드러내려는 인종차별 의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결말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삼합회 보스가 '너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겠어!' 어쩌구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부패 경찰들을 체포한 워커의 파트너 청이 갑자기 나타난 뒤 총을 빼앗겨 산통이 다 깨집니다. 마지막은 워커, 청과 찰리와 미아 커플을 제외한 모두가 죽고 워커가 파트너에게 자기를 체포하라며 끝나고요. 대체 워커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엉망진창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액션 장면은 시원하지만, 이야기 전개와 캐릭터 구성, 악당들의 존재감은 지나칠 정도로 허술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덧붙이자면 삼합회의 출연이라던가 범죄에 엮인 연인들의 서사, 암흑가의 암투 등이 여러모로 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만큼의 이야기 완성도만 갖추어 주었더라면 좀 더 볼만했을 듯 합니다. 예를 들자면 시장의 아들이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삐뚤어진 찰리가 삼합회 일을 돕는 범죄자 미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보스 아들 죽음에 연루되어 함께 도주하게 되고, 정의로운 경찰 워커가 삼합회 수사에 나섰다가 우연찮게 그들의 도주에 합류하여 셋이서 삼합회에 맞선다! 부패 경찰 이야기는 빼고요. 

2025/08/29

네버 라이 - 프리다 맥파든 / 이민희 : 별점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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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샤와 남편 이선은 둘러보기 위해 방문했던 교외의 외딴 저택에 고립되었다. 눈보라 탓이었다. 저택은 원래 2년 전 실종된 유명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언 헤일의 소유였다. 머무는 동안 트리샤는 누군가 숨어 있다고 의심했지만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고, 대신 에이드리언이 환자 상담을 몰래 녹음해 보관한 비밀방을 발견했다. 테이프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던 트리샤는 또 다른 숨겨진 지하실을 찾아냈는데, 그 안에 부패한 사체가 놓여 있었다... 

2년 전, 유명 정신과의사 에이드리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차량 타이어를 훼손했었다. 그런데 그 장면을 찍은 환자 EJ의 협박이 시작됐고, 그녀는 연인인 컴퓨터 전문가 루크의 도움으로 영상을 삭제하려 했지만 EJ는 이 장면마저 촬영해 협박 수위를 높였다. 결국 에이드리언은 EJ 살해를 결심하는데...

프리다 맥파든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장편 소설입니다. 최근 너무 일본 작품만 읽은 듯 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편식은 좋지 않으니까요.

이 작품은 2년 전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언 헤일의 시점과 2년 후 현재 트리샤의 시점이 번갈아 전개되다가 결국 두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전개 방식 자체는 특별히 독창적이지 않지만, 이 과정을 통해 트리샤가 에이드리언의 환자 PL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반전은 인상적입니다. PL이라는 이름은 패트리샤에서 비롯된 것이고, 트리샤는 (패)트리샤였던 겁니다.

PL은 원래 약혼자와 친구들과 캠핑을 갔다가 의문의 연쇄살인마에게 습격당해 혼자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혼자와 친구의 불륜을 알게 된 뒤 두 사람을 살해하고, 이후 살인마에게 습격당한 것처럼 꾸며온 것이 진상이었습니다. 에이드리언은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를 위해 찾아온 PL과의 상담 과정에서 이 사실을 간파했고, 자신을 협박하던 EJ를 제거하기 위해 트리샤를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드러날까 두려워진 트리샤는 오히려 에이드리언을 살해하고 시체를 감췄지요. 

한편, 에이드리언의 집 지하실에서 발견된 시체는 에이드리언이 아니라 EJ였는데, 이는 에이드리언이 EJ를 감금해서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루크가 지하실에서 발견한 사체를 보고도 에이드리언이 아니라고 확신한 이유 역시 흥미로웠습니다. 시체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여성의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이런 디테일은 확실히 여성 작가스러워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진상, 반전에 이르는 과정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습니다. 트리샤는 에이드리언을 살해한 범인인데, 마지막 반전이 드러날 때 까지 트리샤 시점 전개에서 그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심약한 임산부로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3인칭도 아니고 1인칭 시점이며, 다중인격도 아닌데요. 이건 반칙입니다.

억지스럽고 작위적인 설정과 묘사도 많습니다. 트리샤가 굳이 비밀리에 테이프를 듣는게 대표적입니다. 트리샤는 EJ를 죽인건 에이드리언이고 루크가 범인이 아니라는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 둘의 상담 테이프를 들을 이유는 없어요.
트리샤가 이선이 어머니를 살해했다는걸 알고, 그런 그에게 자기 범행을 고백한 뒤 부부가 함께 입을 막기 위해 루크를 살해하고 사체를 파묻는다는 결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선의 범행은 지금 와서는 제대로 증명할 수도 없고, 그나마 증거라는 테이프도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트리샤의 범행은 잔혹함과 규모에서 이선의 범행과는 수준이 달라요. 아무리 부창부수라지만 이선이 선뜻 트리샤의 손을 잡는다는건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합니다. 트리샤가 에이드리언을 왜 살해했을까요? 트리샤는 EJ를 납치하는 자기가 CCTV같은데 찍혔을지도 모른다며 에이드리언을 살해했는데, 전혀 와 닿지 않습니다. 에이드리언을 죽인다고 CCTV 데이터가 사라지는게 아니니까요. 스스로 EJ의 사체를 없애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억지입니다. 사체가 발견되면 가장 문제가 될 건 에이드리언이니, 그녀가 알아서 잘 숨겼다고 믿는게 당연합니다. 되려 시체만 하나 더 늘렸고, 유명인사 에이드리언의 실종을 초래하여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수사 당시 경찰이 저택 비밀 공간들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한건 순전히 운이었고요. 
저택에 누군가 침입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이선이 지나치게 태평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 루크가 저택에 침입한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결말도 별로입니다. 환자를 돈으로만 대했고, 특별히 좋은 치료를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환자를 살해하기 까지 한 에이드리언 헤일은 죽어도 쌉니다. 트리샤, 이선 급으로 나쁜 악당이니까요. 그러나 엄청나게 순수했고, 진심으로 에이드리언을 사랑했을 뿐인 루크를 마지막에 부부에게 개죽음당하게 만든 결말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부부의 행복한 생활과 트리샤가 이선마저 죽일 수 있다는 에필로그보다는 루크의 죽음이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거라는 식으로 그리는게 훨씬 좋았을겁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처럼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반전은 흥미롭지만 반전을 반들기 위한 의도적인 가짜 서술 트릭물이라서 감점합니다. 억지와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렸고요. 그다지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8/24

스펜서 컨피덴셜 (2020) - 피터 버그 : 별점 1점

경찰 스펜서는 부패한 상관 보일런을 폭행했다가 5년 동안 수감되고 말았다. 스펜서의 출소 직후 보일런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선량한 경찰 테렌스가 누명을 썼다는걸 알게 된 스펜서는 룸메이트 호크와 함께 잔상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부패한 경찰들이 범죄 조직과 함께 대량의 마약을 유통한 자금으로 카지노 '원더랜드'를 개장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걸 알아내는데...

로버트 B. 파커가 창조한 보스턴 사립탐정 ‘스펜서’ 시리즈 중 하나인 에이스 앳킨스(로버트 B.파커 사후 원작을 이어서 쓰고 있는 작가)의 "원더랜드"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장편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액션물로 범죄 스릴러, 액션, 버디 코미디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어느 쪽에서도 두드러지 못합니다.

특히 기대했던 범죄 스릴러, 수사물로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일단,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수사는 전개상 거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결정적인 단서들은 스펜서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우연히 제공해 주니까요. 예를 들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는 도청 파일을 피해자 테렌스의 아내가 스펜서에게 직접 전해주는 식으로요.
스펜서의 옛 파트너 드리스콜이 악당이라는 사실도 너무 쉽게 밝혀집니다. 초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이쑤시개 조각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수준이라 긴장감 있는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부패한 옛 파트너, 마약 조직, 조직 내부의 은폐 구조 등 설정들도 지나치게 전형적이고요.

전개 또한 뻔하고 치밀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간 보스급인 벤트우드에게 쳐들어가서 물고문을 통해 마약 운송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럴 거라면 은밀한 수사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지요. 게다가 정보를 털어놓았다면 악당들도 운송 시간을 바꾸는건 당연한데, 예정대로 운송하다가 마약 트럭을 스펜서에게 탈취당하는건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스펜서 캐릭터도 원작 붕괴 수준입니다. 원작에서는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시니컬한 말투, 심리 묘사 측면에서 복잡한 면을 보여주는데, 영화에서는 그냥 말빨(?)좋은 전형적인 마초 헐리우드 경찰, 형사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액션에서라도 화끈했어야 했는데, 작중 대부분 장면에서는 적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장면만 반복될 뿐입니다. 이럴거라면 권투에 일가견이 있다는 설정은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어요. 마크 월버그도 그리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니고요.

액션은 다른 부분에서도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격투 장면들 모두 속도감이나 위력이 느껴지지 않는 탓에 맨손 액션의 쾌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호크가 덩치를 활용해 마지막에 잠깐 활약하긴 하지만, 이 역시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워 액션적 재미는 떨어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절정부입니다. 부패 경찰과 범죄 조직이 결탁한 악의 무리와 대단한 결전을 벌여야 할텐데, 스펜서가 트럭을 몰고 악당 본거지에 돌진한 뒤 호크가 몇 명을 때려눕히는 걸로 결전은 대체로 마무리됩니다. 스펜서와 드리스콜의 1:1 맞짱은 너무 작위적이라 어이가 없더군요. 부패 경찰들 때문에 보도도 못하고 사건이 은폐되었었는데, 스펜서와 호크의 활약 이후 사건이 대대적으로 폭로된다는 결말도 이해가 안되고요.

그래도 너무 바보같아서 아무 생각없이 볼 수 있다는건 오히려 장점이기는 하네요. 몇몇 유머 코드는 피식 웃게 해 주기는 하고요. 거인 호크, 조력자 헨리 캐릭터는 캐스팅이 좋습니다. 완전한 권선징악 마무리도 후련했고요.

다만 이 정도 장점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보완해주기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범죄물로서도, 수사극으로서도, 액션 영화로서도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원작인 탐정 스펜서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있는 쓰레기로 에필로그에서 후속작, 시리즈의 여운을 남기는데 어림도 없지요. 소리없이 망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2025/08/01

동트기 힘든 긴 밤 - 쓰진천 / 최정숙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살해당한 남자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옮기던 남자가 체포되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 장차오로, 피해자 장양과 금전 관계로 다투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경찰의 권위에 눌려 허위 증언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함과 더불어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에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경찰은 장차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 천재인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0여년 전 있었던 허우구이핑 변사 사건 및 초등학생 아이 성상납이라는 추악한 범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서서히 드러난다...

중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폭력, 권력형 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초등학생을 성상납하는 추악한 범죄가 이루어졌음에도, 대기업 회장과 고위 정치인이 결탁하여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며, 주요 수사 관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이 20여 년 전인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이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쑨훙원의 비서 후이랑과 공안 리젠궈가 결탁하여 허우구이핑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유력한 증인이었던 딩춘메이도 살해하며, 딩춘메이를 살해한 왕하이쥔마저 죽이면서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는 과정은 범죄, 수사물로 충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전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입니다. 이처럼 극심한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수사를 이어가는 장양과 주웨이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요.

결국 사건이 영원히 은폐되나 싶었지만, 장양, 주웨이, 천민장, 장차오가 힘을 합쳐 거짓 살인 사건을 만들어 이를 공론화하는 전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양이 자살한 뒤, 그 시간에 알리바이를 만든 장차오가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목을 끈 다음, 시체를 드러내는 도입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동 성매매를 했던 고위 정치인 샤리핑의 친자 검사를 비밀리에 진행해, 그가 피해자에게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 절정 부분의 쾌감도 강렬하고요.
샤리핑이 최종 악역이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흑막이 존재해서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고, 장양의 조력자들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축인 허우구이핑 사건을 다시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양과 주웨이, 천민장의 우정과 의리, 정의감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사파가 지배하는 무림을 정의롭게 되돌리기 위해 나서는 영웅호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느껴졌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이 곳곳에 보입니다. 시한부 인생인 주인공이 자살했지만, 이를 살인 사건으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아요. 심지어 자살 방법과 동영상으로 자살했다는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유사하다는건 아쉽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집행이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에 맞는 설정이라서 와 닿는데, 장양이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할 이유는 솔직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지는 못합니다. 왜 샤리핑 사진과 사건 진상을 그냥 인터넷에 뿌리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과거 허우구이핑 사건 조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는 너무 뻔해서 뒤로 갈수록 식상합니다. 장양과 주웨이 등이 그들의 덫에 쉽게 걸리는 등의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리젠궈가 어떤 식으로든 훼방놓을게 뻔한데, 계속 리젠궈의 방해에 걸려 좌절하는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허술합니다. 장차오가 갑자기 등장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이유부터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허우구이핑의 연인이었던 리징과 결혼한 게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낄 일인지 의문이에요. 장차오 때문에 허우구이핑이 죽은게 아니니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허우구이핑의 사인이 잘못되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들, 그 당시에 장차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장양을 돕기 위해 갑자기 나타나는 전개가 더 어색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장양에게 사건에 뛰어들기를 강요했던 연인 우아이커와의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우아이커의 비중을 초반에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수학 천재 옌량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큽니다. 옌량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 강렬함만큼은 놀랍고, 한번 잡으면 손 떼기 힘든 재미를 갖추고 있는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