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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2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 시미즈 기요시 / 문승준 : 별점 4점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 8점
시미즈 기요시 지음, 문승준 옮김/내친구의서재

모두 5명의 어린 여자 아이들이 유괴된 후 살해되거나 실종된 북관동 연쇄 아동 납치 살인 사건에 대해 파고든 탐사 보도 논픽션입니다. 미제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취재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는 "그것이 알고 싶다"가 떠오릅니다. 이런 류의 컨텐츠에 관심이 많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추천작입니다. 재미 측면만으로도 나무랄데 없는 덕분입니다. 전체적으로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5건의 사건 중 1건의 사건에 대해 유죄로 판결받아 무기 징역을 선고받고 17년 반 동안 투옥되었던 스가야가 진범이 아님을 증명하여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게 만드는, 400여 페이지 분량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야기부터 그러해요.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증거였던 DNA 감정의 오류를 취재를 통해 밝혀내는 과정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얻어낼 정도로 탄탄한 논리와 함께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스가야가 자전거로 피해자 마미를 유괴했다는 거짓 자백이 17년 후 만난 마미 어머니에 의해 마미는 유아용 안장에만 탄다는 게 밝혀지며 부정되는 장면, 스가야가 무죄이기에 곧 풀려날 것으로 믿고 미납한 세금을 내려고 했다는 등의 디테일과 누명을 쓴 피해자의 구명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루팡 3세"를 닮았다 하여 "루팡"이라 부르는 실제 범인은 누구인지?에 대해 조사하는 과정 역시 추리 소설을 연상케 합니다. 이미 알려져 있거나 아니면 이 책에서 언급되듯 "기자라도 제대로 조사할 수 있었던 것" 들만 제대로 조사하여 얻은 정보를 토대로 범인의 조건 - 지리에 밝고, 담배를 피우고, 휴일에 파친고를 다닌다는 등 - 에 맞는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은 그야말로 추리 소설 그 자체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스가야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시미즈 기자가 이 사건을 파헤치며 경찰의 한심한 작태를 고발하기 위해 예를 든 "오케가와 사건", 잘못된 DNA 형 감정이 주요 증거로 사용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된 "이이즈카 사건" 에 대한 취재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중에서도 "이이즈카 사건" 에 대한 비중이 높은데 스가야 씨가 누명을 쓴 과정처럼 모순된 DNA 감정, 잘못된 목격 증언 등 경찰이 입맛대로 고른 증거만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집행되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이즈카 사건"은 DNA 형 감정 결과는 주요 증거의 하나일 뿐 다른 증거도 많아서 사형된 구마 씨가 진범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시미즈 기자가 다른 증거들 - 자동차 목격 증언 들 - 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잘못된 증거라는 걸 밝혀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에요. 경찰이 이런 정도의 검증도 하지 않고 증언 만으로 범인임을 확정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경찰이 스가야를 범인으로 이미 확정한 후, 신발 밑창의 무늬를 기억하고 그리라고 하면서 따라 그리라고 샘플을 전해 주었다는 식으로 증거들을 그에 맞춰 조작하거나 날조했다는게 밝혀지는 과정과도 일맥상통하기도 하고요. 일본 경찰은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런 취재를 접해 보면 과연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약촌 오거리 사건' 같은 사건이 있으니 남의 이야기라 할 수도 없네요.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경찰이 마음을 먹고 범인으로 몰면 빠져나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 싶습니다. 무섭군요.

이렇게 재미를 안겨다 주지만 결말은 조금 아쉽습니다. 스가야 씨의 무죄는 증명했지만 경찰과 검찰의 제대로 된 사과는 별로 이끌어 내지도 못했고, 모순 투성이의 DNA 형 감정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진범 체포 노력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현실을 그리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조금씩 세상은 바뀌고 있고 바뀔 것이라는 나름의 희망섞인 메시지는 전해지지만 아직까지는 많이 부족한게 사실인 듯 합니다.
또 진범을 찾아내기는 했지만 실체는 여러가지 이유로 공개하고 있지 않은 것도 아쉽습니다. 일개 기자의 취재 결과로 특정인을 범인이라고 지목하기는 무리일테고, 이미 경찰에 그 존재는 알린 만큼 더 이상 기자의 일은 없겠지만 후일담이 무척 궁금한데 말이지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책 자체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재미 뿐 아니라 생각해 볼만 한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와 같은 미제 사건을 다룬 컨텐츠를 좋아하신다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만화 버젼도 있다고 하는데 꼭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2019/12/28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 사노 신이치 / 류순미 : 별점 2.5점

도쿄전력 OL 살인사건 - 6점
사노 신이치 지음, 류순미 옮김/글항아리

1997년 3월 19일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 도쿄 전력 여직원 야스코 살인 사건의 배경과 재판 과정, 후일담까지를 거의 500여 페이지 분량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논픽션입니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 일본 사회에 굉장한 충격을 안겨 주었고, 이런저런 콘텐츠에서 인용되었던 유명 사건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여자 친구"입니다. 작품 속 피해자인 마키코는 명문 대학 법대생으로 재학 중 이미 사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지만 전락하여 매춘을 반복했다는 설정인데, 이 사건과 거의 같습니다.
평소 관심 있던 차에 국내 출간이 되었길래 기쁜 마음으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크리스마스 직전에 완독했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리뷰를 조금 늦췄습니다.

특징이라면 살인 사건 재판을 다루고 있지만, 진범이 누구냐를 탐구하는 법정 미스터리 속성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네팔인 불법 체류자 고빈다를 범인으로 모는 경찰과 검찰의 비상식적이고 비정한 태도와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을 뒤집으려는 화자인 취재 기자의 취재와 추리를 3년여에 걸친 1심 공판 과정과 후일담 속에 담아낸 것이 내용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검경 합동의 환장할 누명 씌우기는 볼 만합니다. 일단 검찰은 고빈다가 피해자 야스코와 만난 시간부터 제대로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고빈다가 근무지인 식당에서 퇴근 후 10시 7분 열차를 타고 시부야역에 11시 20분에 도착했을 거라고 주장하지만, 취재 결과로는 10시 22분 열차를 탔다는 쪽이 타당하다고 증명되거든요. 설령 검찰의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건 마찬가지고요.

검찰이 유력한 증거라고 내민 범행 장소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정액이 들어 있는 콘돔 역시 살인의 증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고빈다가 매춘을 하던 피해자의 손님으로 범행 장소에서 이전에 관계를 가졌던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현장에서는 피해자와 고빈다의 것이 아닌 음모 등 다른 증거도 발견되었고, 범인이 돈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잡아당기다 피해자의 숄더백에 묻힌 피부 조각 역시 고빈다의 것이 아니기도 했고요.
그 외 세세한 억지 주장에 대한 반론은 셀 수도 없으며, 고빈다의 무죄를 강하게 짐작하게 하는 증언과 증거가 마지막까지 드러나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렇게 검찰과 경찰이 네팔인을 범인으로 몰려는 의도도 여러 가지 증거와 온갖 비인간적 행각의 폭로를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체가 발견된 3월 19일 이후, 고빈다를 출입국 위반으로 취조할 때 이미 타액을 채취했으며, 고빈다는 물론 그의 룸메이트들에게도 고문과 강압 수사로 억지 자백을 받아낸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까지 조작했는데도 결정적 증거를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고 억지 주장만 되풀이한 검찰의 무능함도 돋보입니다.

또 고빈다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 장면에서 끝나지만, 에필로그에서 검찰 항소로 열린 2심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십수 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후일담은 기가 막힙니다. 1심 판사가 좌천되기까지 했다니, 어디까지 썩어 문드러진 건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다행히 재심으로 누명을 벗고 무죄 선고를 받았다지만, 십수 년의 세월은 보상받기 어렵죠. 게다가 이 사건을 진두지휘했던 전 경시청 간부 히라다가 ‘무죄 판결은 사법부가 여론을 의식한 결과이며 고빈다가 진범’이라고 우기며 극우 단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는 내용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화자인 취재 기자 사노 신이치의 꼼꼼한 취재도 인상적입니다. 고빈다의 고향을 방문하여 가족과 추방된 당시 룸메이트들의 결정적 증언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재판에 출두한 거의 모든 증인을 후속 취재하여 피해자 야스코가 살해되기까지의 동선을 자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각종 증거들도 상세한 보충 설명을 통해 독자의 이해를 돕습니다.

사노 신이치의 추리력이 빛나는 장면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야스코의 지갑에서 발견된 이오카드의 존재에 대한 추리입니다. 검찰은 이 카드의 잔액으로 야스코가 특정 장소, 그러니까 정기권을 버리기 위한 장소로 이동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구두쇠였던 그녀가 돈을 써 가며 정기권을 버릴 이유는 없죠. 사노 신이치는 그래서 야스코가 이 이오카드를 주웠을 것으로 추리합니다. 비용이 남아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사실은 현금을 보태 표를 구입했기에 잔액이 0원이었고, 잔액을 몰랐던 야스코는 뒤의 잔액 기록만 보고 나중에 쓸 요량으로 챙겼다는 것입니다. 아주 합리적이에요.
야스코의 정기권을 아무런 접점이 없는 스가모 주택가에 버린 범인의 심리에 대한 변호인단의 추리도 볼 만합니다. 시체가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자 범인의 의심이 커져 범행을 드러낼 요량으로 대낮 주택가에 정기권을 버렸다는 것인데, 이 역시 그럴듯했어요.

무엇보다도 가장 궁금했던, “왜 게이오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 도쿄 전력의 간부로 근무하며 연봉이 천만 엔이 넘었던 야스코가 수년간 밑바닥에서 매춘을 했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이 등장하는 것도 반가웠습니다. 속이 다 후련하더군요.
도화선은 그녀가 성스러운 존재로까지 여겼던 아버지가 사망한 것입니다. 그 뒤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고 도쿄 전력 내 라이벌과의 승부에서도 패배하며, 스스로 좌천당했다고 여긴 인사 발령을 받고 아버지가 ‘징벌적 초자아’에 빙의하여 그녀에게 벌을 내립니다. 아버지보다 못한 나를 못나게, 더럽게 만들어야 된다는 이유로요.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사회의 밑바닥, 구렁텅이로 떨어뜨리고 만 것입니다.
그 수준은 가히 참혹해서 2천 엔에도 여러 명의 외국인에게 길거리에서 몸을 팔고, 노상 방뇨 등을 서슴없이 저지를 정도였죠. 아, 무섭습니다. 확실히 현실이 픽션보다도 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자극적인 사건과 극적인 재판 과정을 다루고 있기에 아주 흥미로운 독서였습니다. 여러모로 별점 4점을 주었었던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와 비교됩니다. 핵심 용의자가 유죄를 선고받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무죄로 풀려난다는 재판 과정도 동일할 뿐 아니라, 잘못된 경찰과 검찰의 주장을 밝혀내기 위한 상세하면서도 방대한 취재가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점도 같으니까요.
그러나 이 책은 별점 4점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저자인 사노 신이치가 이 사건을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이라든가 일본 사회의 어둠 등과 엮어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문학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네팔에서의 여정을 장황하게 소개하는 부분이라든가 야스코의 무덤을 찾은 감상 등이 그러한데, 전부 쓸데없을 뿐더러 그 양도 너무 많았어요. 그냥 사카구치 안고의 "타락론"과 연계하여 작금의 일본 사회를 드러내는 정도에 그쳤다면 좋았을 겁니다.

게다가 이러한 개인적 감상을 무리하게 사건 취재와 엮은 부분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예요. 대표적인 게 사건 당일 야스코를 목격한 증인 중 한 명인 샌드위치맨 하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험난했던 인생사와 야스코 사건을 엮고, 이를 내면의 어둠 운운하면서 비극적으로 포장하는데 솔직히 전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하토는 16년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지만 아내의 사망 이후 스스로 술독에 빠져 인생이 망가진 것이라, 이를 딱히 내면의 어둠이나 운명의 장난으로 포장할 이유는 없죠.

또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는 저자 스스로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취재를 통해 범인상을 그려내지만, 이 책에서는 그냥 뜨내기 손님이었을 거라는 일반적인 예상 외에 그 어떤 정보도 추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아쉬웠습니다. 현실만 취재해서 문제만 드러냈을 뿐, 그 이상의 진실은 담아내지 못했다는 이야기니까요. 같은 이유로 법정 미스터리를 방불케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그러한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배분도 적절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고빈다의 억울한 재판이 9, 야스코의 삶과 죽음이 1 정도의 비중인데, 이 책을 구입한 독자라면 야스코의 삶에 대한 관심도 높은 건 당연합니다. 왜 그녀가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의사 한 명과의 인터뷰가 전부라 취재의 양과 깊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의사의 견해도 증명된 것은 아니고요.
또 고빈다 재판에서 사건 당일 야스코와 고빈다의 행적도 너무 많이 반복됩니다. 이런 부분만 정리했더라도 분량은 대폭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고 내용도 흥미롭지만, 말씀드린 단점들 때문에 감점합니다. 지금보다 군살을 덜어내고 더 논픽션답게 썼더라면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했을 겁니다. "오컴의 면도날"이 떠오르는 그런 책이네요.

2018/12/31

2018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17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15차, 열 다섯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8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40 (52)권, 기타 장르문학 3 (3)권, 역사서 9 (1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8 (9)권, 기타 도서 21 (20)권으로 모두 91 (101)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 작년보다는 독서에 소홀했지만 그래도 한달에 7~8권 수준이면 뭐 나쁘지는 않네요.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8년 베스트 추리소설 :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올해 추리 분야 도서 중 유일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소설이 아니라는게 유일한 단점입니다. 재미 뿐 아니라 생각해 볼만 한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에요.

2018년 워스트 추리소설 : "유령탑" 

사실 모리 히로시의 사이카와 모에 시리즈 중 한 권인 "지금은 더 이상 없다"도 올해 별점 1점을 받은 망작이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과 그림을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고 팔아먹었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빠 단독 워스트로 선정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과 설명을 제외하면 건질만한 부분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디 다른 분들은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8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딱 3권, 그 중에서도 두 권만이 정식 출간된 책이라 따로 선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마음의 지배자" 모두 좋았어요. 두 작품 모두 단편집인데 별점 4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말이죠. 장르 문학에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8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원더랜드"

역사 관련 서적을 10권 이하로 읽은건 오랫만이네요. 다행히 별점 4점짜리 책은 언제나처럼 존재합니다. 유희와 놀거리에 대해 심도깊게 고찰한 이 책입니다. 제 리뷰로는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취미와 오락, 유희 관련 문화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8년 워스트 역사 도서 : "만물의 유래사" 

미시사 서적과 백과 사전류를 좋아해서 충동 구매한 책인데 프랑스인이 프랑스를 위해 만든 시대 착오적인 결과물입니다. 확실히 백과 사전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2018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늑대를 요리하는 법"

올 한해 제법 많이 읽었는데 별점 4점짜리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도판과 번역만 충실했더라도 별점 4점은 충분했을터라 베스트 도서로 선정합니다. 재미도 있고 여러모로 참고가 될 내용도 많은 좋은 책이에요.

2018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소주 이야기"

미시사 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두서가 없고, 소주 자체에 대한 고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저자 스스로 석달 자료 조사를 거쳐 열흘 만에 쓴 책이라고 하는 말 만큼이나 내용이 두서없는 졸작입니다. 저렴한 가격만이 장점입니다.

2018년 베스트 기타 도서 :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이번 해에 기타 도서의 베스트는 별점 4.5점에 빛나는 이 책입니다. "깃털",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아주 오래된 서점"의 별점 4점 트리오는 조금 아깝네요.

2018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올해 기타 도서는 별점 2점 아래가 없어서 워스트는 딱히 꼽지 않겠습니다. 별점 2점으로 워스트가 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까요.

결산평 : 15년 째라니... 강산이 변해도 이제 한번 반이 변했네요. 올 한 해 무탈하게 보냈다는게 너무나 기쁩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24/06/09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곽재식 : 별점 2.5점

대한민국 미스터리 사건 수첩 - 6점
곽재식 지음/인물과사상사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의 시기 중,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괴사건 15개를 소개하는 범죄 논픽션. 곽재식 작가의 '미스테리아" 연재물에서 추려냈다고 합니다. 연재된 글들을 재미있게 읽어왔기에, 출간되었을 때 부터 관심있게 지켜보았는데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네요.

범죄를 다룬 논픽션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의 계보"처럼 당시 사건을 재구성하여 거의 그대로 전해주는 글, 그리고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처럼 여러가지 정보를 짜 맞추어서 의미있는 새로운 추리를 들려주는 글로요. 
이 책은 전자 스타일입니다. 신문 기사와 유사한 글이지요. 기사 스타일로 범죄, 사건 자체는 물론 사건의 배경이라던가 당대 시대상 등 이해를 돕는 상세한 설명이 명확한 근거를 통해 제공됩니다. 
당대 한 시점만 촛점을 맞추지 않는 점도 좋았습니다. 한 사건의 후일담을 10년 이상 지난 다른 신문의 다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도록 연결해서 소개해주는 덕분입니다. "소매치기 전성시대"를 예로 들자면, 혼자서 범행하는 소매치기는 '특공대'의 일본식 발음인 '독고다이'로, 여러 명이 움직이는 팀은 '회사'라고 불렀다, 교통이 발달하자 소매치기 회사는 대중교통수단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등의 당시 소매치기 수법에 대한 소개는 1975년 동아일보 기사를 토대하고 있으며, 헌병으로 변장하여 범행을 저질렀던 소매치기였던 '꼬마' 문씨에 대해서 1955년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그리고 10년도 더 지난 1966년 경향신문, 또 10년이 지난 1975년 6월의 다른 기사를 통해 알려주는 식입니다. 한 범죄자의 20여년의 행적을 - 본인인지는 명확하지 않아도 - 어느정도 알 수 있는 셈이지요. 문씨가 "순교자" 영화 제작에 거액을 투자했다는 등 재미있는 정보도 굉장히 많았고요.

당대 시대상과 관련된 사건들도 재미있었습니다. 1959년 남대문 권총강도의 범행 동기가 '영어학원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였다던가, 1967년 나일론 백이라고 속인 쓰레기를 운반하던 워싱턴 메일호 사건은 '수출보국' 분위기에서 해외 수출 실적을 가짜라 남기기 위해 저질러진 것이었다는 것처럼요. 해방 직전, 일본인들이 명동 어딘가에 전재산을 바꾼 보석을 묻어놓았다는 '명동의 보물을 찾아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은 연재 당시에도 재미있게 읽었었지요. 마곡사 5층 석탑 꼭대기 구조물의 재료라는, 황금보다 더 귀한 금속이라는 '풍마동'에 대해서는 처음 알았고요.
이런 재미있는 사건들 외에도 어린이 3명이 백주대낮에 실종 후 처참한 모습의 사체로 발견되었던 1960년대 초의 사건, 마을 왈패들이 공공연하게 노리던 젊은 처녀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1956년의 '보호받지 못한 피해자' 사건같은 끔찍한 사건도 소개됩니다. 참으로 무참했던 시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요.

하지만 소개된 모든 사건이 인상적이거나 재미있는건 아닙니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면 다소 흥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진상이 명확하게 밝혀진 사건들과는 다르게, 미제 사건은 아무래도 답답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특별한 보강 취재나 조사도 없고, 당시 기사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는 탓입니다. 이런 사건은 관련된 기사를 시간과 관계없이 모아서 의미있는 내용으로 전달해주는 , "소매치기 전성시대"와 같은 구성이 필요했는데 아쉬웠어요. 그러기에는 분량이 부족했으려나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잘 알려지지 못했던 오래 전 우리 나라 사건들을 전해준다는 의도와 취지는 마음에 드는데, 몇몇 사건의 경우는, 분량을 더 늘리더라도 보다 깊이있는 취재와 정보가 덧붙여지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연재가 앞으로도 쭈~욱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2021/12/24

끝없는 살인 - 니시자와 야스히코 / 주자덕 : 별점 2점

끝없는 살인 - 4점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투고 매니아 이치로이 고즈에는 귀가하다가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습격을 받고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반격 끝에 겨우 살아난 그녀가 범인의 수첩을 끄집어 낸 덕분에, 범인의 정체가 구츠와 기미히코라는건 비교적 일찍 드러났다. 또한 수첩 속 기록으로 그가 일련의 연쇄 살인을 일으킨 범인이라는 것도 밝혀졌지만, 구츠와가 실종된 탓에 범행 동기는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나 범죄 전반의 권위자가 모이는 모임 '연미회'에서 비밀리에 이 사건을 논의하기로 하여, 고즈에도 모임에 참석했다. 연미회 멤버인 추리작가, 탐정 회사 경영자, 범죄 심리학자 등 참석자 5인은 각자 추리를 펼쳐 보이는데....

"맥주 별장의 모험" 등으로 잘 알려진 일본 추리작가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정통 본격 추리물입니다. 여러 명의 탐정이 하나의 사건을 놓고 각자의 추리를 펼친다는건 "독 초콜릿 사건"의 구성을 그대로 따왔습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본격물 팬은 즐길거리가 많아요. 다양한 추리가 폭넓게 펼쳐지고, 동기와 트릭에 대한 추리도 여러가지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치로이 고즈에가 살해당했을 뻔한 상황부터가 그러해요. 처음에는 범인 구츠와 기미히코가 살인 미수로 도주했다고 생각되었지만, 연미회에서의 추리 배틀(?)을 통해서 현장은 일종의 밀실이었다는게 드러나거든요. 뒤이어 사전 조사로 맨션 106호에 살던 고즈에의 이웃집이 비어있다는걸 안 범인이 도주할 때 그곳에 숨었다던가, 사건 직후 비명을 듣고 복도로 나와있던 102호 거주자 모미야마 케이이치가 범인의 조력자이자 진범이었다던가 하는 식으로 관련된 추리가 이어집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추리는 경찰 나루토모가 당시 수사를 통해 그렇지 않다는게 밝혀졌다고 말해서 부정됩니다. 경찰이 그렇게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작중 고즈에의 말대로 어떻게든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는건 칭찬받아 마땅해요. 현장은 밀실이 아니라 피해자가 피해자인 척 조작했던 일종의 시간차 밀실 트릭도 꽤 그럴듯하게 사용되고 있고요. 추리 소설가나 전문가들이 탐정으로 나오기 때문에, 범인 구츠와 기미히코의 동기를 설명할 때 '미싱 링크'라면서 여러가지 추리물 고전을 들먹이는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또 단순히 추리 배틀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야기 도입부에 벌어진, 고즈에 살인 미수 장면이 사실은 더 이전 시점에 있었던 (구츠와 기미히코가 사라진 2월 15일) 사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이 있는 덕분입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이 쓰인 셈인데, 깜빡 속았네요. 뻔했던 고전적 설정에 이런 아이디어를 더해 현대적인 감성이 느껴지게 한 건 마음에 듭니다. 반전도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이야기 중에 고즈에가 잠깐 집을 떠나 살았던 곳에 대한 언급 등 관련 정보가 제공됨은 물론, 고즈에가 이전에 4층에 살았는데 살해당할 뻔 한 뒤 이사간 곳이 1층이라는건 이상하다는 나루토모의 착안이 핵심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사건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단서가 초반에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가장 큽니다. 고즈에가 예전에 받았던 협박장과 협박 전화, 시가타의 이상했던 사고사는 초반에 이야기되었어야 했어요. 고즈에가 '연미회'에 이 사건을 의뢰한건, 구츠와 기미히코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이유를 밝히기 위한 목적이 가장 컸지요. 하지만 범인이 가출했을 때를 즈음하여 고즈에에게 협박 전화와 협박장이 보내졌고, 그녀와 친했던 남자가 사고로 죽었다면 당연히 이를 범인과 연결하는건 당연합니다. 고즈에의 의문도 여기서부터 출발했어야 하는게 당연하고요. 이걸 아예 깨닫지도 못하다가 연미회 자리에서 알아채는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4년간 범인의 동기에 대해 고민했다는 그녀의 절실함도 설득력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추리들도 어떤건 재미있지만, 어떤건 비약과 억측이 심했어요. 고즈에의 말대로 '억지로 가져다 붙이려면 뭐든지 가능하다'는걸 증명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고즈에가 연쇄 살인범이며, 자기가 습격당했던건 조작이었다는 진상이 드러난 이후 설명은 최악이에요. 고즈에가 구츠와 기미히코를 죽인 후,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도움을 청했던 시가타가 경찰에 신고하려고 해서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것까지는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구츠와를 살해한건 당연히 정당방위인데 왜 경찰에 바로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고, 깊게 사귀지도 않았던 남자가 부모보다도 더 믿고 의지할 만 했을지는 잘 설명되고 있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그 뒤, 구츠와 기미히코 수첩에 적혀있던 하시타니 코지로를 찾아가 구츠와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물어본 것부터는 완전 억지에요. 하사타니는 그녀가 구츠와 기미히코를 죽였다는걸 눈치챘고, 사체 처리를 도운 뒤 그걸로 고즈에를 협박해 성 노리개로 삼았다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구츠와를 죽였다는 진상을 곧바로 눈치챘다는건 비약이 심할 뿐더러, 하시타니가 사체 처리에 협조한 이상 그 역시 빠져나갈 수 없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고즈에를 협박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해요. 차라리 고즈에가 하시타니를 공범으로 신고하겠다며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게 더 말이 되었을 겁니다.

사건 동기를 알아내기 위해 고즈에가 구츠와 기미히코 수첩에 적혔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다 죽일 필요도 없이 자기와 관련이 깊었던 하시타니만 죽이고, 현장에 수첩을 떨어트려 놓는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수첩에 적혔던 이름이 있으니 나머지는 경찰이 수사하면 되니까요. 오히려 초등학생의 경우는, 구츠와와 엮일 이유가 많지 않은 만큼 살아 있는 상태로 증언을 하게 하는게 훨씬 진상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이렇게 했다면 구태여 토네리 히로미 페이지를 뜯어낼 필요도 없었어요. 시점적으로 토네리 히로미가 먼저 죽은게 분명하니까요. 하시타니가 토네리 히로미라는 여성(가명을 쓴 고즈에)과 방을 빌렸다는게 드러났어도, 이는 구츠와와 피해자들이 어떻게든 엮여 있다는걸 강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범인이 초반에 누구인지 드러난 탓에, 후더닛이 아니라 와이더닛 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쪽 부분으로도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독자 투고는 처음부터 중요하게 언급되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모두 독자 투고에 관련되어 있을 거라는건 연미회 멤버들은 몰라도 독자들은 쉽게 집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토네리 히로미를 살해하려고 했던 구츠와가 진짜 목적을 숨기기 위해 다른 피해자들도 죽일 생각을 했고, 그 연결고리가 독자 투고였다는건 연미회의 슈타라가 초반에 언급했 듯 다소 뻔한 설정입니다. 무엇보다도 범인 구츠와와 살인 목록에서 직접적으로 연관된 피해자는 토네리밖에 없으니, 범인과 목록만 있다면 범인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추리쇼따위는 불필요했어요. 게다가 주인공인 고즈에가 '무작위로 선정된 가짜 목표' 였었다는걸 알게된 후, 구츠와가 토네리에게 살의를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구츠와의 동급생 여학우들을 모조리 죽일 결심을 한다는 결말은 제가 뭘 읽었나 싶게 만들더군요. 이기던 게임 종료 직전 자살골을 넣은 선수의 심정이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그나마 좋던 결과물을 다 망쳤다는 점에서는 똑같으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추리적인 부분은 재미가 없지는 않습니다. 여러 트릭을 잘 사용한 전개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본격 추리물에서 가장 중요할 '공정성' 측면에서 큰 단점이 있고, 살인을 가볍게 여기고 희화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점합니다. 차라리 만화였다면, 아무래도 허구성이 강조되는 만큼 이런 단점이 좀 가려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2020/02/01

유리 열쇠 - 대실 해밋 / 김우열 : 별점 3점

유리 열쇠 - 6점
대실 해밋 지음, 김우열 옮김/황금가지

네드 보몬트는 도시의 거물 폴 매드빅을 보좌하는 동생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네드는 폴이 친분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하는 헨리 의원의 아들 테일러 헨리의 살해된 시체를 발견했다. 폴의 죽음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 잔챙이 버니 데스테인이 도주하자, 개인적인 금전 문제도 있어서 그를 쫓은 뒤 헨리의 모자를 이용한 조작으로 버니를 궁지에 몰아 넣는데 성공했다.
그러던 중 폴과 관련된 팀 아이번스의 주요 증인도 살해당했고, 이 모든건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폴 매드빅을 음해하려는 적대 세력의 음모가 아닐가 생각하게 되는데....

대실 해밋 전집의 네 번째 권입니다. 해밋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이런저런 리스트 들에서 순위권에 꼽히는 대표작이지요. 그동안 눈여겨 보고 있다가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드보일드 범죄물로 주인공 네드 보몬트가 완벽한 안티 히어로라는게 특징입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한다는건 하드보일드 주인공같은데, 네드는 탐정도 아니고 정의를 위해 싸우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범죄에 연루된게 분명한 폴 매드빅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온갖 더러운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악당에 더 가깝습니다. 당연히 여자들에게도 잔인하고 냉정하며, 뉴욕에서 이름모를 촌동네로 흘러들어온지 3개월만에 그 도시 최고의 실력자의 친동생 급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능력자이기도 하고요. 작 중에서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 중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갖추고 있거든요. 오히려 완력 면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다는게 독특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도시에서 두 개의 파벌이 경쟁하는 와중에 주인공이 나타나 분란을 일으킨다는 "붉은 수확" 류의 전개 속에서, 네드 보몬트는 충심을 다해 폴 매드빅을 돕고 진짜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네드의 폴 매드빅을 위한 충심은 변함이 없고, 배신을 하지 않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의리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같은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아요. 이런 점에서 안티 히어로의 활약을 그린 하드 보일드 추리물이지만, 나름 정의로운 활극이기도 합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고조 할아버지 쯤 되는 이야기랄까요.

하지만 이야기 전개는 작위적이고 평이합니다. 버니 데스테인을 엮기 위한 모자 작전 정도만 그럴싸할 뿐이에요. 다른 네드 보몬트의 행동은 모두 즉흥적인데도 불구하고 아귀가 딱딱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작위적이에요.
아버지가 헨리를 살해했다고 굳게 믿는 오팔 매드빅이 기자에게 털어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네드는 그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신문사 편집장 매튜스의 집을 찾아가는데, 그 때 벌어지는 상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그곳에는 오팔의 고백을 이용하려던 폴의 라이벌인 섀드 일당이 있었고, 또 섀드 일당과 남편의 기묘한 행동거지를 짜증내하던 매튜스의 아내 엘로이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엘로이스의 유혹으로 네드가 넘어간 척을 하자 매튜스는 자살해 버리고 맙니다. 마침 이용하기 좋은 유언장을 남기고요. 그래서 네드는 폴에게 연락하여 신문에 오팔의 고백이 발표되지 않게 막게 됩니다. 그냥 봐도 너무 편의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느낌이지요?
폴의 자백을 지방 검사에게 증언한 뒤, 헨리 의원이 진범임을 증명하는 결말도 억지스럽습니다. 헨리 의원이 자백을 할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증거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폴이 뒤집어 쓰기로 결정한 이상, 이를 뒤집는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네드가 폴의 결백을 확신한다는건 아무런 증거도 되지 못하니까요. 아들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아들 모자가 아버지 집에 있는게 증거가 될리 없죠. 지팡이 역시 원래 그의 물건이니 집에 있는게 당연하고요. 이 마지막 반전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설정과 전개에 전형적인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안티 히어로이기는 하지만 네드 보몬트의 심리 묘사와 행동은 다른 하드보일드 속 탐정들의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습니다. 지방검사마저도 두려워하는 폴에게도 서슴없이 직언을 날리며, 주먹질은 물론 총질도 두려워하지 않는 상남자라는 점에서요. 이는 그 누구도 네드를 우습게 보거나, 등쳐먹을 수 없으며 돈보다는 자존감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으로 다른 하드보일드 탐정들과 다를게 없습니다. 네드와 정말로 우연하게 만난 제프가 섀드를 죽이는 등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악당들이 서로 싸움으로 붕괴하고 마는 전개도 전형적이라 구태의연하고 식상하게 느껴집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단점은 추리물로는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범인이라고 폴이 고백하기는 하지만, 흉기로 사용한 지팡이는 이미 태워버렸다는 증언이 헨리 의원의 딸 재닛에 의해 곧바로 부정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헨리 의원이 진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되면 모든게 다 맞아 떨어지니까요. 실제로 진상도 그러했고요. 앞서 말씀드렸듯, 아무런 증거도 없어서 그다지 정교한 이야기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만큼은 확실하고, 문체도 수려하고 멋집니다. 하드보일드 작품다운 위트있는 명대사도 많고요. 병문안을 온 재닛에게 모진 소리를 한 뒤, 그녀가 떠나는걸 본 간호사가 그녀가 울음을 꾹 참으면서 가더라는 말을 듣고. 네드가 "내 수완이 약해지는 게 틀림없군. 예전 같으면 울렸을 텐데."라고 말하는 식인데, 완전 제 취향이었어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하드보일드 작품 중 최고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장점도 많고 좋은 작품임에도 분명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이자면, 유리열쇠는 우리나라 식으로 표현하자면 "썩은 동아줄"을 의미하는 듯 싶네요. 재닛의 꿈 속에서 그녀와 네드가 뱀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는데 사용하지만, 유리라서 부서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문을 잠그지 못해 뱀 때에게 죽고 말지요. 그런데 이게 그녀가 오빠 살인범으로 폴을 지목하여 음해하고, 소문을 퍼트린 행위를 뜻하는지, 아니면 진범이 아버지 헨리 의원이라는걸 알게 된 후 네드와 떠나기로 결심한 행동을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꿈에서는 네드와 함께 죽는데, 꿈과 같은 결과라면 같이 떠나는 행동이 가장 위험해 보입니다. 물론 네드는 상남자답게 같이 떠나기로 결심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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