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6/04/27

토르: 다크 월드 (2013) - 앨런 테일러 : 별점 2.5점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phase 2에 속한 슈퍼 히어로물. 그러나 마블의 슈퍼 히어로물이라기보다 독특한 설정의 판타지 SF로 봐도 됨직한 작품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감상했는데 이제서야 리뷰를 올리네요. <시빌워> 때문은 아닙니다만...

여튼, 장점이라면 우선 1편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기계화된 신화 느낌의 아스가르드 묘사를 들고 싶습니다. 헐리우드 대형 자본으로 상당히 그럴듯하게 꾸며놓았더라고요.
그리고 각본도 괜찮습니다. 토르의 어머니와 로키(?)가 죽는 등 무거운 내용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심각하지만은 않게, 나름 유머를 가미하여 풀어내었을 뿐더러 로키의 매력이 제대로 폭발한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네요.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아주 기가 막히더군요.

하지만 메인 악당이 약해도 너무 약해서 끝이 너무 허무한건 단점입니다. 액션도 중반부까지는 돈을 팍팍 쓴 느낌을 확실히 주는데 클라이막스는 일기토로 끝나버려 더 허무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단점이 없지는 않지만 전작보다 재미있는건 분명합니다. 동급 마블 영화 수준의 재미는 전해준달까요. 후속작이 기대되네요.

2016/04/24

다방과 카페, 모던보이의 아지트 - 장유정 : 별점 2점


살림지식총서 342. 제목 그대로 근대 경성다방카페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미시사 서적. 경성을 무대로 한 소설을 창작하고 있기에 자료삼아 구입하게 되었네요.

처음 생겨난 이후 속속 개업한 다양한 다방과 카페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좋았습니다. 카페 여급의 월 수입이라던가 여급들의 전직(?), 그녀들의 생각 등도 확인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모호했던 다방과 카페의 명확한 차이에 대해 알게된 것도 수확입니다. 다방은 문화인들의 문화 공간으로의 기능이 강했고, 카페는 여급과 술을 마시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환락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상세한 사료와 함께 설명해 주고 있거든요.

하지만 '교수님'이 썼기 때문일까요? 발터 벤야민 등을 인용하며 시대를 분석하는 것은 좀 오버였습니다. 당대 다방과 카페에 대한 사료적 접근만으로 충분했는데 말이죠. 10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으로는 깊이있는 분석도 무리였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가격이 워낙 저렴하니 아주 안좋다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2016/04/22

수족관의 살인 - 아오사키 유고 / 이연승 : 별점 2점

수족관의 살인 - 4점 아오사키 유고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제가오카 고등학교 신문부 부원들은 교내 신문 취재를 위해 '요코하마 마루미 수족관'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곳에서 레몬 상어 수조에 사육사가 떨어져 잡아 먹히는 사건이 벌어진다.
출동한 현경 수사1과의 센도와 하카마다 형사는 모든 용의자들이 확고한 알리바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어쩔 수 없이 우라조메 덴마에게 사건 해결을 요청하게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려면 그만한 댓가를 지불하셔야죠 - 우라조메 덴마


아오사키 유고의 고교생 오타쿠 명탐정 우라조메 덴마 시리즈 두번째 작품. 전편 이후 맞은 여름 방학, 수족관에서 벌어진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
시리즈답게 전작과 동일한 본격물이지만 전작보다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기대했던 추리적 측면에서 트릭이나 별다른 복선, 반전이 없어서 정교함 면에서 많이 부족한 탓입니다. 이렇게까지 길게 쓸 이야기였나 의문이 생기기까지 합니다. 첫 현장 상황이 추리 근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 없으니까요. 
물론 우라조메 덴마가 중반에 수의사 미도리카와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등 추리를 펼치기는 합니다. 허나 별로 중요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독자가 이해하기는 어려워요. 상세한 현장 묘사로 충분했을 정보 제공을 분량을 늘려 제공한 것에 불과하달까요.
또한 비교적 초반에 밝혀지는 두루마리 휴지를 활용한 시한 장치 알리바이 조작 트릭 역시 유치하고 설득력이 낮아서 실망스럽습니다. 이 정도 트릭을 경찰이 알아내지 못한 것은 거의 직무 유기에 가까운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잡하며, 실제로 잘 되었을지도 의문이거든요. 그리고 이 트릭으로 범행 시각을 몇분 옮겨 놓는 것에 의해 모든 용의자들이 알리바이가 존재하게 됩니다. 즉, 범인에게 있어서는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시간 낭비였을 뿐이며 독자에게도 이 트릭의 유무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뭐 뒷부분에 화장실 휴지를 바꿔치기하는 시간을 특정하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긴 합니다만 그냥 참고 수준이고요.

아울러 기존의 단점, 즉 사건이 비현실적이라는 한계 역시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동기는 최악으로 전편보다도 말이 더 안돼요. 전편도 동기가 어설프긴 했으나 그래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범행을 저지른 것인데 반해, 이번에는 단지 '돌고래'를 위해서라니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수족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살짝 묘사함으로써 동기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려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하죠.
게다가 아메미야를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레몬 상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는 동기를 좀 더 파고들지 못한 것도 아쉽습니다. 경찰 수사의 기본은 동기가 무엇인지를 조사하는 것이 아닐까요? 용의자들이 수족관 안에 있었던 사람들로 확정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부분이 소홀하게 넘어간 것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사람을 죽이느니 두루마리 휴지를 이용한 장치를 만들어서 수조에 독을 타는게 나았을 텐데 왜 이런 범행을 저질렀는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요. 아울러 레몬 상어가 피해자를 먹어버린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슬쩍 엿보이는 우라조메 덴마의 개인사도 솔직히 아무런 관심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회 부적응자 오타쿠보다는 건강미 넘치는 유노가 훨씬 마음에 드는데 말이죠. 유노 이야기나 좀 더 펼쳐줄 것이지.

그래도 '명탐정'의 '추리' 자체는 괜찮은 편이기는 합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다운 본격 추리물적인 요소는 분명히 살아있어요. 독자에게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할 뿐더러, 주어진 정보를 통해 마지막 추리쇼에서 범인을 밝히는 카타르시스만큼은 제대로거든요. 사건 현장에 있던 모든 단서들을 활용하는 추리의 과정 역시 기가 막힙니다. '수돗가 옆 피가 잔뜩 묻은 대걸레 모양 혈흔과 범인이 들고가던 양동이 속 핏물은 모순이다. (대걸레를 양동이에 넣고 씻었다면 혈흔이 이렇게나 짙게 남았을리 없다!) 이유는 무언가 피가 묻은 것을 양동이에 넣고 빨은 것이며 그것은 바로 수건이다. 즉, 범인은 수건을 들고 다니는 사육사 중 한명이다'라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공개된 단서를 통해 설명되기 때문에 설득력이 아주 높아요.
그러나 이 추리는 단지 용의자를 사육사로 특정하는 것 뿐이며, 정작 진범을 밝혀내는 것은 아메미야의 사체에서 발견된 손목시계가 핵심 단서가 되죠. 발상은 재미있지만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아메미야의 시계는 방수 기능이 있는 특제라 범인이 자신의 것과 바꿔쳤을 것이라는 건데 말도 안되죠.... 저 같으면 시계를 푼 채로 나 뒀을 겁니다. 뭐하러 자기 것과 바꿔치기를 해서 증거를 남긴답니까?
마지막으로, 현장의 정보를 토대로 추리를 펼친다는 이야기를 '글'로 읽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양동이 속 핏물이 흘렀다와 같은 정보를 독자가 주의깊게 인지하는건 무리니까요. 추리 만화로 따지면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같은 느낌인데, 이런 점에서는 소설보다는 영상물에 더 적합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현대를 무대로 한 정통 본격 추리물이라는 점, 그리고 경쾌하고 즐거워 읽기에는 편했습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여주인공 유노의 상큼함과 발랄함도 기분 좋고요.  허나 이만한 길이의 장편으로 만들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추리적으로도 그닥이고요. 전편의 팬이시라면 읽어보실만 하겠지만 단순히 이 작품만의 가치는 낮으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길. 저 역시 이후 소설로 계속 읽을지 여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 영상물로 제작된다면 볼 용의는 있긴 합니다만...

2016/04/20

맛없어? - 고이즈미 다케오 / 박현석 : 별점 2점

맛없어? - 4점 고이즈미 다케오 지음, 박현석 옮김/사과나무

'저명한 발효학자이자 음식 탐험가인 저자가 직접 겪은 맛없는 음식들에 대해 ‘맛없음’이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과학적, 인문학적으로 분석해 유쾌하게 풀어낸 책'이라는 소갯글에 혹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목차는 아래 네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1장 세상의 모든 맛없는 음식
  • 2장 여행자를 위한 식사
  • 3장 날아라! 미각인 비행물체
  • 4장 요리하는 마음

이 중 소갯글처럼 저자가 생경한 음식에 도전하는, 이른바 '음식 탐험'을 벌이는 이야기는 1장에 담겨 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습니다. 쉽게 접할 수 없는 기묘한 음식에 도전하는 저자의 정신력이 놀라웠던 덕분입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청어 통조림 수르스트뢰밍이 가장 정상적인 음식일 정도였으니까요. 이후 등장하는 요리들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장 압권은 애벌레 요리였습니다. 벌레 요리는 예전에 읽었던 "수상한 취재를 다녀왔습니다"에도 등장했는데, 그쪽은 작가 일행이 돈 때문에 억지로 먹는 설정이었고 이 책의 저자 고이즈미 다케오는 직접 요리를 해 먹을 정도로 적극적이라는 차이가 있지요. '노린재 유충을 볶아 간장을 한두 방울 쳐서 먹는 순간, 이빨 사이에서 ‘톡’ 하고 터지며 끈적한 내용물이 흘러나왔고, 첫맛은 달았지만 곧 노린재 성충의 고약한 냄새가 밀려왔다'는 것 처럼 경험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생생한 묘사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산적 다이어리"에서 호평했던 까마귀 고기에 대한 적나라한 평도 흥미로웠습니다. 불단의 향 같은 지독한 냄새 때문에 먹기 어렵다고 하네요. 이런걸 보면 아무래도 "산적 다이어리"의 주인공 오카모토는 웬만하면 다 맛있게 먹는 미각 음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의 홍어를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음식으로 꼽은 것도 기억에 남고요.

하지만 2장부터는 평범한 식당에서 파는 음식 중 맛없는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되며 처음의 흥미를 이어가지 못합니다. 물론 저자의 배경에 걸맞은 과학적 분석이 곁들여지기는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짜고 딱딱했던 대구 토막은 냉동 과정에서 소금을 뿌려 탈수된 탓, 돼지고기 조각이 서로 달라붙은 것은 단백질 구조 변화 때문, 싸고 맛없던 야키니쿠 정식 소고기는 거세하지 않은 씨수소의 냄새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식이지요.

허나 이러한 전문성을 제외하면 평범한 맛집 블로그의 '맛없던 식사' 리뷰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맛없는 이유를 밝힌다 한들 이야기 자체에 드라마틱한 흐름을 더하지도 못하고요. 주인에게 항의하거나 새로운 조리법을 찾아내는 등의 전개는 전혀 없는 탓입니다. 요리에 대한 마음가짐을 강조한 4장 역시 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1장은 흥미진진했지만 이후에는 평범한 맛집 블로거의 포스트와 다르지 않아 점수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괴식만 찾아 먹는 이야기로 이어졌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2016/04/18

클로저 이상용 - 최훈 : 별점 3점

클로저 이상용 9 - 6점 최훈 지음/알에이치코리아(RHK)

최훈 작가를 개인적으로 좋아합니다. "하대리"부터 팬이 되었었지요. 독특한 개그 센스에 더해 하루하루 완결되는 이야기를 이어서 하나의 거대한 장편을 만들어 낸 아이디어가 정말 참신했기 때문입니다. 4컷 만화들이 이어져 하나의 긴 이야기가 되는 작품은 일본에서는 이전부터 있었지만("아즈망가 대왕"), 국내에서는 처음 보는 형식이었고 완성도도 높았습니다. 이어진 "MLB 카툰"에서부터는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덕력과 패러디 센스가 제대로 폭발했고요.

하지만 이후 연재작들로 팬심은 많이 떠났습니다. 완결짓지 못한 이야기가 많은 탓이 큽니다. 한 편, 한 편으로 완결되는 프로야구 카툰 같은 작품은 언제 연재가 중단되어도 괜찮지만, 장편 연재물이었던 "하대리" 3부(였나요?), 팝과 록의 역사를 다룬 "록커두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전직 여자 농구 선수들이 나오는 농구 만화 등은 아무런 언급 없이 연재가 중단되었지요.

그나마 완결된 작품도 흐지부지 끝나서 더 욕을 먹었는데, 대표적인게 바로 "GM"입니다. 국내 최초로 스카우터, 단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팀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그려내어 큰 인기를 끌었지만, 작중에 흩뿌린 떡밥을 회수하지 못한 채 갑자기 끝나 버렸습니다. 스토브리그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시즌 개막도 맞지 못하고 끝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삼국전투기"의 경우 마감일을 지키지 못해 큰 비난을 사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런저런 작품들을 모두 끝내 버린 덕분인지, 최근의 행보는 다행스럽습니다. "삼국전투기"는 공명 사후 이야기를 유사 콘텐츠를 압도할 정도의 디테일로 다루며 박수를 받으며 마무리되었고, 이 작품 "클로저 이상용" 역시 정상적으로 완결에 이르렀으니까요.

"클로저 이상용"은 야구 만화인데, 2군에서 올라온 이상용과 진승남 배터리가 패배주의, 개인주의, 세력 다툼으로 엉망이 된 게이터스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며 여러 상대팀을 제압해 결국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내용입니다. 전작 "GM"과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는게 특징이기도 합니다. 전작의 캐릭터(하민우 등)가 감초 역할로 등장해 팬으로서 무척 반가웠어요.

단지 스핀오프에 그치지 않고, 독립적인 작품으로의 재미 요소도 확실합니다. 가장 큰 재미 요소는 이상용이 라이벌들과 펼치는 두뇌 게임심리전이고요. 두 가지 요소 모두 이 분야의 본좌 "원 아웃"과 비교할 만한 수준으로 펼쳐집니다. 토쿠치 토야와 이상용 모두 구위가 아닌 심리전을 통해 타자를 제압하는 기교파 투수이기 때문이지요.

주인공이 적당한 구위를 가지고 현실적인 야구를 한다는 점에서는 "그라제니"의 본타와도 살짝 겹치는데, 단순한 설정 차용은 아닙니다. 이상용은 철저한 분석과 데이터 기반의 야구를 하고, 확실한 주무기 (체인지업)을 갖춘 데다 안 되는 타자는 철저히 거르는 식으로 비겁하게 이겨 나간다는 차이가 있거든요. 마지막 장면에서 어깨가 망가진 상태로 승부하면서도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는 모습은 클라이맥스로서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최훈 작가 본인이 상당한 수준의 야구 팬이기에 가능한 디테일들도 큰 장점입니다. "GM"에서도 선보였던 데이터 위주의 선수 설정들, 옷주름으로 구질을 파악한다는(쿠세) 이야기, 이상용의 독특한 작전으로 만든 병살 플레이, 외국인 투수와 통역의 대화 같은 깨알 개그, 작가 특유의 패러디들까지 풍성했습니다. KBO 팀을 연상케 하는 구단들의 설정은 물론, 실존 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 역시 야구팬이라면 놓치기 어려운 재미 요소고요. 게이터스가 LG 트윈스를 떠올리게 하는 설정이라 LG 팬에게는 더더욱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다만 성적 때문에 불편했을지도요?).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작품 역시 던진 떡밥을 모두 회수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상용을 둘러싼 삼각관계, 라이벌 선수들과의 관계가 대표적입니다. 선데빌스의 김성욱에게 함정을 심어두었다는 설정, 이헌과 여자를 두고 얽힐 것 같던 전개 모두 마무리되지 않고 끝나 버렸습니다. 일본 연재물처럼 한 편 한 편이 완결성을 갖추고 이어졌다면 해결할 수 있었겠지만, 신문 연재 특성상 그게 어려웠던 것 같네요.

또한 이상용이 만년 2군을 전전하다가 체인지업을 완성해 최고의 마무리가 된다는 설정에서 출발했는데, 마지막에 커브까지 갖춘 완전체 투수로 업그레이드되는 전개는 원래의 취지와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결말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속 시원한 느낌은 받지 못했습니다. 고교 야구 만화로 치면 지구 예선을 통과해 갑자원에 진출하면서 ‘1부 완결’로 끝나는 느낌이랄까요.
아울러 정인권과의 최후의 승부는 명장면이었지만 설득력 면에서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이미 직구와 체인지업의 구위가 떨어진 상태에서 그립 변화만으로 삼진을 잡는 것은 다소 억지스러웠으니까요. 오히려 직구 승부인데 어깨가 망가져 체인지업의 속도로 들어온다는 설정이 더 그럴듯했을 것 같습니다.

후일담 역시 너무 간략합니다. 게이터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우승은 실패했고, 부상당한 이상용은 수술과 재활 끝에 1년 만에 방출되었다가 램스에 입단해 선발 투수로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서사를 단 한 편으로 마무리한건 여러모로 부족했어요.

이렇듯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야구팬이라면 충분히 즐길 만한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후속작이 시작된다면 부족했던 부분을 잘 보완해 주었으면 합니다.

2016/04/16

도련님의 시대 - 다니구치 지로, 세키카와 나쓰오 / 오주원 : 별점 3점

『도련님』의 시대 1 - 6점 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키카와 나쓰오 글, 오주원 옮김/세미콜론

나츠메 소세키와 그가 맥주집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 같은 유치장에서 신세를 진 인연으로 알게 된 협객 호리 시로, 노동운동가이자 시인인 아라하타 간손, 학생 모리타 요네마쓰, 학생 오타 주자부로 네 명과 함께하는 격변의 메이지 시대를 그린 작품입니다. 나츠메 소세키가 "도련님"이라는 작품을 쓰려고 한다는 것을 네 명에게 밝힌 후, 소세키의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하나씩 구체화되는데, 마침 그 이야기가 소세키가 바라보는 현실과 교차되어 전개되는 구조이지요.

메이지 38년, 즉 1905년 급속히 서구화되는 일본에서 지식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한다는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허황된 픽션이나 if물이 아니라 실제로 이렇지 않았을까 싶은데, 다니구치 지로의 그림으로 표현된 덕에 그 위력이 배가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등장인물과 배경의 디테일 모두 뛰어나서, 쉽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와 닿습니다.

실존 인물을 대거 등장시켜 작품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것도 장점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중요한 비중으로 등장할 정도니까요. 그 외에도 모리 오가이, 라프카디오 헌, 시마자키 도손, 도조 히데키(!) 같은 수많은 메이지 시대 유명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엮어내는 솜씨는 감탄이 나옵니다. 특히 모리 오가이와 라프카디오 헌의 에피소드는 작품의 핵심을 제대로 짚기도 하고요.

아울러 존경해 마지않는 블로그 이웃이신 대산초어님의 번역 역시 빼어납니다. 주석도 충실하게 달려 있습니다.

다만 몇몇 역사적 실존 인물들이 병풍에 가까운 배경으로만 그려진 점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주요 네 명 중에서도 실존 인물인 아라하타와 모리타는 이야기의 현실성을 더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였고, 핵심 인물은 작가의 창작으로 보이는 구 아이즈 번사 출신의 협객 호리와 대학생 오타 주자부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류의 작품들이 대부분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뚜렷한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문예 만화’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는 지적인 작품입니다. 메이지 시대와 문학을 사랑하시는 분들, 그리고 다니구치 지로의 팬이라면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다 읽고 나서야 알았는데 이 작품은 전 5권이더군요. 1권만으로도 완결성 있는 이야기라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다음 권도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물론 "도련님"도 반드시 읽어야 할 테고요.

2016/04/14

로산진의 요리왕국 - 기타오지 로산진 / 안은미 : 별점 2.5점

로산진의 요리왕국 - 6점 기타오지 로산진 지음, 안은미 옮김/정은문고

전설적인 "미식가" 로산진이 단코신샤에 연재했던 글들을 중심으로 엮은 에세이입니다. 로산진의 요리 및 미식 철학에 대해 역설하는 전반부, 그리고 식재료와 여러 요리들에 대해 설명하는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에세이, 그 중에서도 딱히 ‘요리’가 아니라 그 어떤 분야에도 통용될 수 있는 확실한 원칙과 철학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틀에 박혀 배운 것은 올바를 수는 있어도 반드시 재미있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반면 개성있는 것은 재미와 아름다움, 그리고 존엄이 있다. 그런데 몇 차례 실패를 겪으며 스스로 다다른 곳은 틀에 박힌 곳이기 십상이다.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올바름이다. 개성있는 요리에는 틀, 모양, 규칙뿐만 아니라 저절로 배어 나온 맛과 힘이 있다. 틀부터 시작해도 나쁘지 않지만, 스스로 틀 안에 들어가 만족할까봐 걱정스럽다. 틀을 벗고 뛰어넘어야 한다." 같은 글귀가 대표적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의 사고방식은 확실히 자신만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재료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요리 맛의 9할은 재료다.", "모든 재료는 본맛이 있고 그 맛은 다른 재료로 대체할 수 없다. 요리란 결국 재료의 본맛을 살리는 일이다."라든가, 설탕에 대한 문제를 거의 한 세기 전에 이미 짚은 "설탕만 넣으면 맛있다고 믿는 오늘날 요리는 미각의 저하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질 떨어지는 식품을 속여 넘기는 잔꾀를 설탕은 품고 있다." 같은 문장도 인상적이고요.

"삼시 세끼는 맛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사람의 가치는 자신이 만들고 먹는 것에 드러나기 마련이다."라는 말은 브리아 샤바랭을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로산진 정도가 되어야 할 수 있는 말이겠지요.

또 제가 즐겨 읽었던 만화 "맛의 달인"의 우미하라(가이바라) 유우잔의 모델이 확실히 기타로 로산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는 하지만, "맛의 달인"에서 중요하게 등장했던 몇몇 에피소드가 로산진의 글로 등장하니 상당히 반가웠어요.
예를 들어 조리법에 있어 가쓰오부시는 대패로 최대한 얇게 갈아야 하고, 다시마는 잠시 담갔다 빼는 정도로만 해야 한다는건 까다로운 손님이 우미하라인 것을 모르고 지로가 최고의 다시 국물을 내어 요리를 만드는 에피소드에 등장했었지요. 프랑스에서 오리 요리를 먹을 때 소스 없이 지참했던 간장과 고추냉이(와사비)로 소스를 만들어 찍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맛의 달인"에서는 오리 고기를 간장에 찍어 먹는 행동을 비판하거나, 은어 최고의 산지를 이야기하다가 ‘고향의 은어가 최고다’라는 독특한 발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부분도 있기에 ‘표절’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요.

그러나 후반부 식재료 관련 이야기는 별반 재미도 가치도 없어 다소 아쉬웠습니다. 그가 조선을 여행했을 때 먹었던 도미가 최고였다는 등 우리 땅과 관련된 이야기는 눈길이 갔지만, 그 외에는 딱히 건질 만한 부분이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일본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거슬리기도 했고 (일본 재료가 최고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거장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은 분명 장점이지만 지금 읽기에는 낡고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많아 감점합니다. 하지만 요리와 미식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괜찮은 책입니다.

2016/04/11

가면무도회 1,2 - 요코미조 세이시 / 정명원 : 별점 3점

가면무도회 1 - 6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가면무도회 2 - 6점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배우 지요코는 네 번 결혼, 네 번 이혼이라는 화려한 남성편력으로 유명했다. 그녀의 다섯 번째 연인인 다다히로는 재계의 거물이자 공작가의 후손으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지요코의 첫 번째, 두 번째 남편의 죽음에 대해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마침 첫 번째 남편의 1주기가 마련된 휴양지에서 태풍이 휘몰아치던 밤, 근처에 있던 지요코의 세 번째 남편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리고 네 번째 남편마저 모습을 감추었다. 아스카 다다히로의 요청으로 사건에 뛰어든 긴다이치 코스케는 현지 경찰 히비노 경부보 등과 함께 사건을 수사해 나가면서 충격적인 진상을 알게 되는데... 

1974년에 발표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대장편으로, 요코미조 세이시의 작가 인생 끝자락에 위치하는 작품입니다. 저보다 나이 어린 작품은 처음이네요. 사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후기작은 대부분 별로였고, 1, 2권 합쳐 7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이라 그리 땡기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전작을 거의 다 읽었기에 숙제하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생각보다는 아주 괜찮았습니다. 장점이 명확했던 덕분입니다. 첫 번째 장점은 700여 페이지를 넘는 분량이지만 쉽게 읽힐 정도로 재미있다는 겁니다. 도입부는 조금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만, 오도리 지요코의 전남편들이 연쇄적으로 죽어나가면서부터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조금 지루할 만하면 사건이 터지는 전형적인 연속극 구조인데, 고전적이지만 거장답게 적절히 잘 전개하고 있어서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이자 최고의 장점은 놀라운 진상, 그중에서도 "후에노코지 야스히사가 사망 전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는데 그녀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정말 엄지 척이에요. 충격과 놀라움의 정도로 비교하자면 "소름"에 버금간다 생각될 정도였어요. 또 이 진상이 지요코의 돈을 긁어내기 위한, 애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후에노코지 아쓰코의 음모였다는 것에서 전전 구세대 집권층에 대한 작가의 날선 비난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 장점은 가루이자와라는 무대와 재벌 가문들이 얽혀 있는 뻔한 설정을 묘하게 현대적으로 선보인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막장 설정이 아니에요. 결혼과 이혼 좀 자주하면 어떻습니까?(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모델로 한 듯싶은데 작품 발표 시점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이혼 경력은 2번밖에 없으니 조금 애매하긴 합니다) 물론 억지스러운 기괴한 묘사에서는(미사의 변모에 대한 것 등) 특유의 고전 변격물 성향도 엿보이지만, 그래도 거장이 자신의 스타일을 변주하여 어떻게든 현대 추리소설의 흐름에 동참하려 한 노력은 높이 평가하고 싶어요. 과거 프랑스에서 장 뤽 고다르 등이 주체가 되어 "누벨바그"라는 새로운 영화 흐름을 이끌 때 과거의 거장 르네 클레망이 "그럼 내가 진짜 새로운 영화를 보여주지!"라면서 "태양은 가득히"를 발표했다는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대적인 분위기에 더해 경찰 수사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점에서 당시 일본을 주름잡았던 사회파의 영향력이 살짝 엿보이고요. 여러모로 현대 트렌드에 많이 맞춘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없지는 않습니다.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마키 교고의 시체가 기묘한 성냥개비 퍼즐(색맹의 유전 법칙)과 함께 발견되는 부분은 전통적인 고전 본격 추리물의 향취가 느껴지기는 했고, 쓰무라 신지가 마키 교고의 시체를 유기한 후 지쳐서 집에 있는 위스키를 마셨는데 그 안에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다는 식의 전개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많이 부족해요.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요.

단순하게 생각해도 첫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첫 번째 남편 후에노코지 야스히사 사건의 경우, 그가 죽기 전 전화를 통해 말한 것이 핵심 동기인 것은 분명합니다. 즉, 그가 오도리 지요코를 협박할 비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오도리 지요코 스스로가 경찰에 직접 말한 시점에서 그녀는 이 비밀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녀는 모르는 그녀의 비밀이라면 결국 딸 미사에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경찰에게 도전하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아무도 모를 전화 통화 이야기를 직접 꺼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그녀가 몰랐던 미사의 비밀은 혈액형에 대한 것, 그리고 가즈히코에 의해 색맹이라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폭로됩니다. 이쯤 되면 과연 지요코가 불륜을 저질러 낳은 딸이고, 딸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진범인지에 대한 선택지만 남게 됩니다. 이 정도면, 그리고 명탐정 긴다이치라면 미사가 모습을 감추기 전에 그녀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텐데 너무 질질 끈 느낌이에요. 긴다이치는 2권 초반에 이미 색맹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미사에 대해 너무 일찍 밝혀버리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렸던 놀라운 진상의 충격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예요. "소름"의 경우 마지막 페이지에서 진상을 밝힘으로써 충격을 극대화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맛이 많이 부족하네요.

진범이 밝혀지는건 모두 오도리 지요코의 두 번째 남편인 아쿠쓰 겐조의 전처 후지무라 나쓰에의 목격 증언 덕이었다는 점도 제대로 된 추리물이라고 보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녀가 경찰에 가서 증언하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요.

또 등장인물도 최근 읽은 작품 중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많다는 것 역시 단점입니다. 몰입해서 읽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어요. 전남편만 해도 4명에다가, 현재 교제하고 있는 건 재계의 거물인 아스카 다다히로, 지요코의 딸 후에노코지 미사와 할머니 후에노코지 아쓰코, 아스카 다다히로의 딸 히로코와 사위 데쓰오, 그가 총애하는 젊은이 무라카미 가즈히코와 고고학자 마토바 히데아키…. 이렇게나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유는 보통이라면 유력한 용의자를 헛갈리게 하기 위함이겠지만, 너무 많아서 혼란만 가중되고 등장 인물 중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인물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성공한 전략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아스카 다다히로를 노리거나 오도리 지요코를 노렸다면야 명확한 동기가 있는 인물이 드러났을 텐데, 오도리 지요코의 ‘전남편’들이 범행 대상이라면 동기가 없다시피 하니까요. 그나마 아스카 다다히로가 전남편들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정도만 동기 비스무레하지만, 설득력은 크게 떨어집니다. 아무래도 분량 늘리기 목적으로 보이네요.

마지막으로 설득력 없고 개연성 없는 전개도 옥에 티입니다. 대표적인 것은 왜 다시로 신키치가 아스카 다다히로를 저격했는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점입니다. 미사가 야스히사를 죽인 이유와, 죽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셈이었을지도 묘사되지 않고요. 진상과 반전은 놀랍지만 이를 포장하는 전개와 묘사, 설득력 모두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도 제 생각, 기대보다는 훨씬 좋은 작품입니다. 기대치가 낮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거장이 말년에 힘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추천할 만하지만, 읽으시기 전 긴다이치의 명추리가 거의 없다는 것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2016/04/09

그들이 본 임진왜란 - 김시덕 : 별점 2점

그들이 본 임진왜란 - 4점 김시덕 지음/학고재

17~19세기 일본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였다는 오제 호안의 "다이코기", 하야시 라잔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호리 교안의 "조선정벌기", 그리고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유행한 장편 역사 소설 "에혼 다이코기"를 통해 당시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주제가 흥미로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임진왜란을 일으켰는지부터 시작하여, 전쟁의 전초기지인 나고야성 건립,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한 전쟁 서사, 명나라 원군의 출정과 화의 시도, 정유재란과 히데요시의 죽음, 그리고 전쟁의 종결까지를 순차적으로 설명해 주는데,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아 특별히 새로운 정보는 없었습니다. 시각의 차이는 존재해도, 역사적 사실 자체는 크게 다르게 다루어지지는 않은 탓입니다.

그래도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통역에 대한 설명이 가장 흥미로웠습니다. 전쟁 중이니만큼 통역은 필수였고, 쓰시마번의 소 요시토시가 보유한 통역뿐 아니라 점령지에서 확보한 인력도 활용했다고 합니다. 그 중 가장 놀라웠던 것은 "고려말에 대하여"라는 한국어 회화집이 존재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이 길인가", "곧이 이르라", "나이 몇이고", "자식 있는가" 같은 질문형 문장부터, "피리 부는가", "장인인가", "글 하는가"처럼 포로 중 유능한 인물을 식별하기 위한 문장들, "잘 씻으라", "술 덥혀라", "이거 가지고 있어라" 등 포로를 부리기 위한 표현, 그리고 "사람 많이 죽였다", "네 목 벨 것이야"처럼 위협적인 문장까지 수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실전 상황에서 상당히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씁쓸했던건 여성을 성폭행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고운 각시 더불어 오라", "옷을 벗으라" 같은 문장이 회화집에 있었다는 설명은 읽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로 진출하여 '오란카이'라는 말을 듣고 '오랑캐'를 상대하겠다며 여진족 지역을 침공했다는 이야기도 기억에 남고, 당시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한극함을 공격해 승리한 전투가 문헌상에 "세루토스"라는 거인을 이긴 전투로 묘사되는데 '세루토스'는 절도사를 의미하는 표현이었다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일본 측 문헌이긴 하지만, 조선군 인물의 활약도 일부 언급됩니다. 유극량을 비롯해 송상현, 류성룡, 신각, 곽준, 곽재우 등이 기록되어 있고, 이순신은 아예 '영웅'으로 칭해집니다. 물론 이러한 서술은 일본군의 우수함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그럼에도 조선 인물의 언급 자체는 반가웠습니다. 행주산성 전투에 이가 지역의 닌자가 투입되었다는 기록도 꽤 신선하게 느껴졌고요.

다만 이 책에서 묘사된 전쟁은 삼국지의 장면처럼 과장되고 영웅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영웅으로 이상화된 반면,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에도 시대 가치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한 고니시가 할복하지 않고 처형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당시의 유교적 가치와 충돌했다는 해석이 붙습니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사료적 가치 측면에서는 그리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깊이 있는 내용도 부족하고,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다고 하기에는 다소 평이해서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 책 보다는 "징비록" 정도만 읽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6/04/07

세한도 - 박철상 : 별점 3점

세한도 - 6점 박철상 지음/문학동네

아마 대한민국 국민 중 "세한도"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대단한 그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림의 완성도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은 탓입니다. 이 책은 저 같은 무식자를 위한 책입니다. 왜 "세한도"가 대단한 그림인지를 설명해 주거든요.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세한도"라는 작품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작품의 창작 배경을 이해시키기 위해 김정희의 일생과 그의 성취를 조명하는 부분으로요. 때문에 이 책은 예술, 문화서적이면서 동시에 미시사 서적이기도 합니다.

그중 김정희의 일생은 정확하게 말하면 생애 전체는 아니고, 문과에 급제한 이후 중국 연행길에 올라 당대의 지식인들(특히 스승으로 모신 옹방강)과 교류하며 벼슬을 이어가다가 귀양을 가서 "세한도"를 그리게 될 때까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의 분량이 약 100여 페이지인데, 그간 깊이 알지 못했던 만큼 새로운 지식을 접하는 재미가 컸습니다. 귀양을 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이유가 안동 김씨 세도 정치 때문이었다는 점은 처음 알게 되었고, 또 윤상도의 상소로 촉발된 국문 과정이 소상하게 묘사된 부분은 마치 대하 사극을 보는 듯한 흥미를 준 덕분입니다.

이어지는 "세한도"라는 작품에 대한 해설 역시 마찬가지로 흥미로웠습니다. 처음 알게 된 내용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한도"가 왜 뛰어난지에 대한 이유 중 첫 번째는, 이 그림이 문인화의 정점으로, 이른바 ‘선비의 기상이 나타나는’ 그림이라는 겁니다. 묘사력보다는 품격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언급된 ‘구방고’ 고사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내면을 볼 수 있다면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는 고사인데, 이런 고사를 자연스럽게 인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내공이 느껴졌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추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쌓은 공부의 깊이가 엄청나며, 그 공부의 결실이 바로 "세한도"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추사의 편지들과 그가 소장했던 책들을 통해 설득력 있게 설명됩니다. 또한 "세한도"가 귀양 시절 자신을 위해 여러 책을 보내준 역관 이상적에게 감사의 뜻으로 그려진 작품이라는 점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책은 "세한도"에 대한 감상으로 마무리됩니다. 문인화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수련을 거듭한 거친 터치(적묵법, 초묵법)에 대한 설명도 좋았지만, 특히 그림의 구도와 인장의 관계를 분석하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림, 그림에 쓰인 글, 그리고 인장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새로운 감상법은 기존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시각을 열어주었고요.

이렇듯 이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깊이 알지 못했던 주제를 상세하고도 깊이 있게 조명해 주는, 거의 리뷰에 가까운 연구서입니다. 재미와 자료적 가치 모두 뛰어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도판이 생각만큼 충실하지 못하다는 점인데, 책의 판형과 가격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공부가 많이 되었고 느낀 점도 많았지만, "세한도"가 정말 그렇게까지 뛰어난 그림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글씨를 제외한 그림만 놓고 본다면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아직도 어렵고, 선비의 기상이라는 것도 특별히 느껴지지는 않으니까요. 아울러 추사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는 점이 작품의 완성도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내공의 깊이와 작품의 결과물이 비례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2016/04/05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노버트 데이비스 / 임재서 : 별점 3점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6점 노버트 데이비스 지음, 임재서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개 카스테어스와 함께 하는 탐정 도앤은 다른 관광객들과 멕시코의 관광지 로스알토스로 버스 여행을 떠났다. 미국인 앨드리지를 찾아 모종의 행동을 하기 위해서였다(처음에는 부패 정치인들에게 고용되어 앨드리지가 미국에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후에 앨드리지를 미국에 데려가기 위해 온 것으로 밝혀짐).

그러나 도앤이 앨드리지를 만나는 순간 로스알토스에 대지진이 덮쳐 앨드리지를 포함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중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재벌 상속녀 패트리셔가 살해되었다는게 밝혀진 뒤, 범죄자 보티스트 보노파일을 체포하기 위해 마을을 감시하던 군인 페로나 대위가 마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다른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마포 김사장으로 유명한 북스피어 김홍민씨의 홍보글을 통해 알게 된 책입니다. 김사장의 홍보력이야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에 대한 소개가 유독 다른 책들보다도 호기심을 자극했던 덕분입니다. "하드보일드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도 노버트 데이비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노버트 데이비스의 열렬한 팬이었다."라고 소개했는데, 하드보일드의 큰 형님이자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는 무게 있는 작품같이 느껴져서 도저히 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나 실상은 정 반대입니다. 기대와 예상을 이렇게까지 뒤집은 작품은 기억에도 몇 개 없지 싶을 정도로 말이죠. 예상했던 묵직함과는 몇만 광년 떨어져 있는 작품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유쾌하고 시끌벅적합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극단적이기 짝이 없고요. "스쿠비 두"가 연상되는, 거대한 그레이트 데인 카스테어스를 끌고 다니는 탐정 도앤부터가 그러합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고문서를 통해 과거 개척시대 영웅 페로나 부관에게 푹 빠진 재닛은 한류 스타에 빠진 일본 아줌마와 다를 게 없고요. 여기에 파리 끈끈이를 발명한 부자의 상속녀 패트리셔 밴 오스델 일행,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덩어리 아들 모티머를 중심으로 한 배관 업자 헨쇼 가족, 근거 없는 엘리트 의식과 자신감에 절어있는 멕시코 군인 페로나 대위(개척시대 영웅의 직계 후손!) 등 모든 캐릭터가 좋게 말하면 한 개성하고, 나쁘게 말하면 만화적이라고 할 정도로 화려합니다.

이러한 과장된 캐릭터들이 멕시코 휴양지 로스알토스에서 대지진, 반군과 엮인 범죄자와 은닉 무기 등의 스케일 큰 사건에 휩쓸려 좌충우돌 소동을 벌인다는 내용은 옛날 코미디 영화 시리즈 "무슨무슨 대소동", 아니면 주성치 영화를 떠오르게도 합니다. J.M. 메르의 "개를 돌봐줘"와도 좀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사건이 얽혀 있는 블랙 코미디라는 점에서는요.

그러나 단순한 블랙 코미디에 그치지도 않습니다. 일어나는 사건들 모두 이치에 합당할 뿐더러 앞뒤도 잘 맞고, 복선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재닛이 탐독한 페로나 부관의 일기와 마을의 은닉처가 연결된다는 설정이 좋은 예입니다. 김사장의 소갯글이 아주 허언은 아닌 셈입니다.
그러고보니 무언가에 푹 빠져 있는 오타쿠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사건 해결에 기여하게 된다!는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다른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추리적으로 상당한 수준이며, 탐정 도앤 역시 만만치 않는 명탐정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대지진의 와중에 상속녀 패트리샤가 사망한 사건이 사실은 살인 사건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밝혀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을 적절히 이용한 것도 좋지만, 순식간에 확인한 현장의 유류물을 나중에 진상을 밝힐 때 적절히 써먹기도 하니까요. (그녀의 가방은 어디로 간 걸까요?) 
유력한 용의자 그렉의 시체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단순한 부자의 변덕으로 보인 패트리샤의 방문 목적을 셜록 홈즈 식으로 해석해 내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관광객들 모두 화가 프레딜립 때문에 로스알토스를 찾지만 패트리샤만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게 이유인데, 꽤나 그럴듯 했습니다.
복잡한 사건을 한방에 해결하는 능력 역시 탁월합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지만 결국 보티스트 보노파일을 죽이고, 그를 돌봐주던 흑막이 카야오 대령이라는 것도 밝히고, 패트리샤 살인사건의 진범과 실종된 그렉의 행방까지 한방에 해결해 버리니까요. 명탐정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추리쇼도 한껏 펼쳐 보이면서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작품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확실한 하드보일드이기도 합니다. 하드보일드의 핵심이 탐정이라면 이 작품 역시 경쟁작들에 뒤질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요. 제목처럼 진실은 말한 적도 없고 – "탐정은 그럴 수만 있다면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노상 거짓말만 늘어놓습니다. 비즈니스죠." – 모든 것을 돈으로 바라보는 나쁜 놈인데다가 명탐정이라는 점에서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 죽이는 것 역시 서슴치 않기까지 합니다. 작중 어맨다 트레이시의 말을 빌자면 "이자는 교활하거든. 아가리 침 뱉는 것보다 쉽게 죽일 사람이야."인 거죠. 아, 당연히 말발도 아주 좋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에 에이스 벤츄라를 섞은 느낌이랄까요... (아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오버스러운 설정, 작위적인 요소 때문에 조금 감점하기는 하지만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유쾌하며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덕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비트겐슈타인이 좋아한 이유는 킬링 타임용으로 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은 넓고, 모르는 작가도 많고, 재미있는 작품도 아직 이렇게나 많다니 너무나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신선한 작품이 많이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묵직한 고전 하드보일드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실망할 수 있다는 점 꼭 참고하세요.

2016/04/03

세인트 메리의 리본 - 이나미 이쓰라 / 신정원 : 별점 2.5점

세인트 메리의 리본 - 6점 이나미 이쓰라 지음, 신정원 옮김/손안의책

이나미 이쓰라의 단편집으로 표제작 외 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손안의 책과 국내 최고의 미스터리 동호인 커뮤니티인 하우미의 콜라보레이션 기획물인 '하우미 컬렉션'의 첫 번째 작품입니다. 하우미에서 기획을 담당했다기에 하우미 회원으로 안 읽을 수가 없더군요. 아니, 외려 읽는 게 늦었다 싶네요. 

작품들 수준은 편차가 있지만 재미있는 편입니다. 주인공들이 모두 '진짜 사나이'들인, 묵직한 남자 소설이라는 기존에 읽어왔던 일본 추리물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장점도 명확하고요. 남자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작품들은 많았지만 보통은 남자의 탈을 쓴 폭력 성향 가득한 마초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작품들 속 남자들은 배려할 줄 알고 심지가 굳은 진짜 사나이들이거든요. 그들에 대한 묘사 역시 정말 매력적입니다. 작가가 이런 남자를 그리고 싶었다는 게 문장 하나하나에서 느껴질 정도에요.

이렇게 작가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구나! 싶은 부분은 또 있습니다. 바로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 장면, 상황에 집중한다는 것으로 "모닥불"과 "종착역"이라는 작품이 그러합니다. 어떤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핵심 장면만 뽑아내서 작품을 쓴다는 발상은 정말 기발하네요. 단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긴 합니다. 긴 이야기의 일부만 읽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읽고나니, 하우미 컬렉션이라는 기획물 의도에 적합한지도 잘 모르겠더군요. '추리물'이라고 부를만한 작품은 딱 하나밖에 없는 탓입니다. 사실 "세인트 메리의 리본" 역시 주인공이 탐정일 뿐,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무리고요.

그래도 전체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장점은 확실하니까요.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모닥불"

남의 여자와 도망치던 남자는 여자가 죽은 후에도 계속 쫓기다가 한 노인의 오두막까지 오게 된다...

도주하는 남자가 주인공이지만 핵심은 노인입니다. 개의 행동과 밭을 밟지 않으려는 남자의 행동을 보고 그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간파하는 장면에서는 깊은 식견을, 남자를 쫓는 조직원들을 한방에 제압하는 장면에서는 고수의 풍모와 함께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다 주거든요. 짧지만 화끈한 액션에 더해 총에 대한 묘사도 아주 탁월했어요. 주머니에서 방아쇠를 당길 셈이라면 리볼버를 써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냥 나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지요.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는다는 단점은 큽니다. 남자가 도주하게 된 자세한 사정이라던가, 이후 남자가 어떻게 되고 노인이 어떻게 되는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탓입니다. 무대가 어디인지, 누가 선인지 악인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그래도 몇몇 장면만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묵직한 남자 소설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하나미가와의 요새"

지바의 알려지지 않은 강 주변에서 우연히 전쟁 당시의 토치카를 발견한 사진작가 마쓰무라는 토치카에 머무는 포 할머니와 하라다와 만난 후, 시공을 초월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진작가 마쓰무라가 전쟁 당시 극적인 비밀 계획을 목격한다는 일종의 타임 슬립물입니다.

패망한 일본군 수뇌부가 옮기던 재물을 빼돌리려는 하라다 조장의 작전과 맞물려 진행되는, 동물원 동물 탈주 계획이 핵심일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의외로 이 작품에서 탈주 계획은 거의 언급만 되는 수준입니다. 오히려 증기 기관차의 질주와 질주하는 열차 주변에서 벌어지는 활극에 집중하거든요. 이 부분의 묘사는 정말이지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그러나 단점은 전작과 동일합니다. 전작보다야 이야기로의 완결성은 있기는 하지만 타임 슬립의 이유가 무엇인지, 포 할머니의 정체가 무엇인지, 빼돌린 재물과 탈주한 동물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하라다 조장은 무사한지 등 상세한 설정은 뭐 하나 설명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탓입니다. 이래서야 솔직히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죠. 조금 더 길게 쓰더라도 떡밥은 모두 회수하는 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보리밭 미션"

영국 뉴베리에 있는 농장주의 남편인 제임스는 B-17F 폭격기 진 할로호의 기장이기도 했다. 목숨을 건 작전은 성공리에 끝났지만, 볼 터렛의 입구가 고장나 사수 제프 가르시아가 갇혔다. 착륙 직전 바퀴의 이상을 알아차리고 동체 착륙 시 제프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제임스는 폭격기 기수를 농장으로 돌렸다. 그리고 농장 가운데 수로 '마시의 리본'에 기체를 포개어 볼 터렛을 으스러뜨리지 않고 착륙하려 하는데...

"파일럿이 되고 싶다면, 되려무나. 남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걸 하면 되는 거야." - 제임스. 아들 리처드가 농장주가 아니라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하자 하는 말.

2차대전의 독일 본토 폭격전을 그린 밀리터리 항공물입니다. 앞부분 제임스와 리처드 부자가 농장에서 보내는 목가적인 그림과 폭격에 관련된 화약 냄새 물씬나는 화끈한 묘사가 묘한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지요.

매력 포인트는 사고뭉치 제프를 구하기 위해 승무원 모두가 목숨을 거는 "전우애", 즉 "싸나이 의리"가 아주 매력적으로 묘사되었다는 겁니다. 이거야말로 밀리터리물의 로망이죠. 결말도 해피엔딩이고요.
2차대전, 항공물, 목숨을 건 작전, 전우애와 해피엔딩이라는 점에서는 오래전 영화 "멤피스벨"이 떠오르는데, 좀 뻔하기는 하지만 전 이런 이야기 아주 좋아합니다.

멋진 드라마에 더해 수록작 중 유이한, 이야기의 완결성이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별점을 더 얹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종착역"

도쿄역 아카보(철도 역내에서 승객의 화물 등을 대합실이나 차량 같은 데에 운반하는 사람)의 우두머리인 라이조는 고향 산림에 펜션과 양로원을 짓겠다는 꿈이 있다. 그러나 억 단위의 돈이 필요한 현실 앞에 좌절하고 있던 중, 야쿠자가 운반하는 현금의 존재를 우연찮게 알게되고 그 돈을 몰래 빼돌리는데...

도쿄역에 대한 세밀한 묘사,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사나이 라이조에 대한 묘사 등에서 작가의 글 솜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러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의 디테일 외에 라이조가 계획에 성공했는지, 야쿠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등이 설명되지 않는 미완성 작품입니다. 본격적인 장편이라면 첫머리에 불과한 이야기에요. 이러한 점에서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세인트 메리의 리본"

노세 지역의 땅 3만 5천 평을 소유한 류몬 다쿠. 그는 맥주를 좋아하는 애견 조와 함께 잃어버린 사냥개를 찾는 것이 주업인 사냥개 탐정이다. 그런 그에게 이치쿠라 가문의 외동딸이 잃어버린 '맹도견'을 찾는 의뢰가 들어오는데...

표제작. 이 작품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죠. 1993년 일본모험소설협회대상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하고 1994년 '고노미스'에서 3위를 차지한 작품이거든요.

하지만 탐정이 나올 뿐, 추리소설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유사 설정의 작품(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탐정으로 등장하는)"트랙커 토우마"라는 추리 만화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보다도 추리적으로 별로에요. "트랙커 토우마"는 정말로 알려지지 못한 작품이라 안 읽어보신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이보다 못하다면 정말 심각한 수준입니다. 사건 해결 후 계화가 경위를 듣고 싶어하지만 류몬 다쿠가 거절하는 장면의 묘사, '나는 "기업 비밀입니다"라고만 대답했다. 자랑할 만큼 대단한 추리를 한 것도 아니었고, 모험도 없었을 따름이다.'라는 말 그대로일 정도거든요.
작 중에서 류몬 다쿠가 하는 일이라곤 운 좋게 사건 현장 거의 대부분이 찍힌 비디오에서 수상한 트럭을 발견한 뒤, 트럭을 쫓아 집을 알아내고 개에게 냄새를 확인시키는 게 전부입니다. 다른 탐정 일 역시 마찬가지, 개 '조'의 후각에 의존하거나 친구로부터 들은 정보로 잠복하여 확인한다 밖에는 없어요.

물론 이런 수사가 현실적인 탐정의 수사 방법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쓰려면 억지스럽게 하드보일드 탐정을 엮지는 말았어야 해요. 애초에 류몬 다쿠는 거액의 재산가이기 때문에 사건에 목숨을 걸고 일희일비하는 하드보일드 탐정하고는 어울리지도 않고요. 그래서인지 조직 폭력배와 얽히는 전개로 끌고가는데 이 역시 무리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류몬의 땅을 노리는 센추리 흥업과 하나비시 구미의 수작질은 CCTV 설치로 충분히 막을 수 있고, 광역 폭력단 효도구미의 김계화와 엮이는 건 완전 억지였던 탓입니다.

게다가 마지막에 메리를 하나에게 선물한다는 결말은 지나칠 정도로 편의적이라 영 마음에 들지 않네요. 수임료보다 비싼 개를 턱하니 선물할 정도의 재산가가 하드보일드 탐정일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낭만적인 자선사업가 산사나이이죠. "캔디캔디"의 윌리엄 아저씨와 다를 게 하나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냥개 탐정이라는 직업과 자연 속에서 생활하는 모습만큼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류몬의 말투와 행동 하나하나 모두 멋진 사나이를 표방해서 마음에 듭니다. 억지로 하드보일드 탐정물로 엮은게 문제이지요. 그냥 산사나이의 인간 드라마로 그리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겁니다.

2016/04/01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 코넬 울리치 / 이은경 : 별점 2.5점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 6점
코넬 울리치 지음, 이은경 옮김/단숨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찰 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미모의 여인을 구했다. 그녀 진 레이드는 아버지 할란 레이드가 기묘한 예지 능력자 톰킨스에게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삶이 지옥에 빠진 탓에 자살하려 했다고 털어놓았다.
숀은 그녀를 돕기 위해 상관 맥마너스에게 사건을 보고했고, 맥마너스는 여러 부하들을 선발해 사건의 뒤에 숨은 진상을 밝혀내려 하는데....

우리 모두 혼자야. 우리들 모두 각자라고. - 톰킨스. 아버지의 삶이 3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예언을 들은 진이 아버지가 혼자여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자 하는 말.

윌리엄 아이리쉬라는 필명으로도 유명한 코넬 울리히(울리치)의 대표작 중 한 편입니다. 전통적인 하드보일드와는 거리를 둔, 그야말로 "느와르"라고 할만한 작품입니다.

대표작에 걸맞게 작가의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 1차원적인 폭력적인 묘사는 거의 전무하며, 감성을 자극하는 특유의 묘사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섬찟하게 만드는 심리 서스펜스 중심이라는 점에서요. 특히 어둠에 대한 공포심을 그리는 묘사가 압권입니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제목이 좋은 예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눈에 비유하여, 밤을 두려워하는 여인의 심리를 묘사했는데 정말 멋드러진 글이라 생각됩니다.

시대를 앞서간 오컬트 설정, 즉 톰킨스가 정말로 예지 능력자였다는 것도 볼거리에요. 초반에 진과 레이드 부녀가 그의 기묘한 예언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톰킨스는 부녀에게 기묘한 예언 - "무릎에 다이아몬드 시계를 찬 저녁 만찬 손님들에게, 주식 중개인에게, 그리고 주식 매입을 위해 어서 돌아가시오. 그리고 가는 길에 어떤 여자아이를 부딪쳐 쓰러뜨리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 을 남기는데 그 예언이 하나씩 사실로 판명되죠. 아주 놀라우면서도 독자를 사로잡는 부분이었어요. 무릎에 다이아몬드 시계를 찬 이유는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그리고 2부에서 예언을 사건으로 처리하려 하는 맥마너스의 지시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의 활약과 이에 따른 전개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당신은 사자의 아가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요."라는 레이드의 죽음에 대한 예언을 토대로 사자에 대해 조사할 것을 부하 한명에게 지시하는데, 실제로 서커스 사자가 탈주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식이거든요. 심지어 이 사건은 한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살해하려 한 범죄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고요!

사건이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레이드의 재산을 노린 음모가 얽혀 있다는 점도 좋았습니다. 톰킨스 집 근처에 잠복한 두 명의 형사에 의해 밝혀지는데, 이렇게 예언에 관련된 사건의 또 다른 진상이 밝혀지는건 정통 수사물을 보는 맛도 제법 느껴졌습니다. 그만큼 잘 짜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오래된 탓일텐데 지금 읽기에는 묘사가 너무 장황하고 지루한 감이 크다는 단점은 큽니다. 맛있는 것도 너무 많이 먹으면 물리듯 아무리 좋은 묘사라도 끝도 없이 이어지니 지루했습니다. 이런 장황한 묘사에 대한 설득력도 부족합니다. 예를 들자면 진이 밤을 두려워한다는 설정을 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갈 것을 두려워하기에 하루하루, 일분일분이 소중할 수는 있지만 딱히 밤이 두려울 이유는 없으니까요. 시간이 지나는 건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잖아요? 차라리 시계를 무섭다고 하던가. 이런 설정과 묘사는 다소 공허함을 남깁니다.
그리고 2부의 내용 대부분은 몇 시간 남지 않은 삶으로 괴로워하는 레이드, 그리고 그를 보며 괴로워하는 진과 숀에 대한 묘사로 채우는데, 이렇게까지 절대적으로 절망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날의 기묘한 저녁 만찬과 룰렛 도박은 뜬금없기 그지없었고요. 그야말로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가 팍팍 났달까요?

무엇보다 마지막은 정말 최악입니다. 자정이 되자 레이드가 착란을 일으켜 사자가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에 뛰어들어 자살을 한다는건 너무 편의주의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의 기억상실 설정이 떠오를 정도였어요. 저택 입구의 사자상이나 스테인드글라스를 써먹어 레이드를 죽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대충 마무리할거라곤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최소한 외부에서의 공격, 예를 들어 음모를 꾸민 월터 마이어스가 톰킨스와의 만남 이후 저택에 침입하여 레이드를 살해하려 한다는 정도의 장치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군요.

덧붙여,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톰킨스의 예지 능력이 사실이었다는 설정은 조금 허무했습니다. 예지한 것들이 인간의 힘으로 조작하기 어려운 것들이 존재하기에 (대표적인 것이 무릎에 다이아몬드 시계를 차는 것이겠죠) 당연했지만, 이 탓에 서스펜스 스릴러라기보다는 오컬트 호러에 가까와 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가 마이어스에게 휘둘린다는 것도 말도 안되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거장의 대표작으로 "느와르"가 무엇인지 한껏 느낄 수 있긴 합니다만 지금 읽기에 지루한 부분이 많기에 감점합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