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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9

완전연애 - 마키 사쓰지 / 김선영 : 별점 2.5점

완전연애 - 6점
마키 사쓰지 지음, 김선영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 마키 사쓰지의 작품으로 (굉장히 낯선 작가인데 꽤나 평이 좋아서 읽게 되었네요. 프로필을 보니 오랜 경력을 지닌 작가라서 좀 놀랐습니다) 일본 서양화의 거장 나기라 다다스 화백, 본명 혼조 기와무를 주인공으로 하여 2차대전 직후, 쇼와 43년(1968), 쇼와 61년(1986) 세 건의 사건을 펼쳐 그리는 대하 장편 추리 연애 드라마입니다. 크게 연애물과 추리물,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는 작품이죠.

먼저 연애물 속성부터 살펴보지요. 사랑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사건을 저지르고, 복수한다는 설정의 작품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러나 혼조의 사랑은 약 칠십여 년에 걸친 그의 일생과 함께 다루어질 정도로 장대하기 때문에 스케일 면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득력 부분에서 별로 와닿지 않아서 좋다고만은 말할 수 없어도, 최소한 유사 작품들과 차별화는 됩니다. 그리고 제가 연애 소설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딱 한 번의 관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또 다른 주변인의 존재 등은 "노르웨이의 숲" 느낌도 전해주는 등 연애물로서는 제법 괜찮은 수준이 아닌가 싶었어요.
마지막의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마스코가 등장할 것은 예상했지만 KIWAMU => MIWAKU라는 애너그램을 이용한 이름이라는 장치가 꽤 그럴싸했고, 혼조 임종 시의 마지막 말과 그에 얽힌 마스코의 상념은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결국 진상이 혼조 혼자만의 착각으로 한 여자만 바라본 것이라는 허무한 결말입니다. 이거 참... 무려 세 건의 범죄가 얽힌 한 대화백의 일대기가 고작 장대한 짝사랑 이야기라니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도모네의 밀당에 넘어간 희생자로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여자가 제일 무서운 것 같습니다.

또 낡아 보이는 여러 장치들이 좀 거슬리더군요. 평생 단 한 번 가진 하룻밤 관계로 아이가 덜컥 생겼다는 설정이 대표적이겠죠. 무슨 정자왕도 아니고.... 그 외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케 하는 관계 설정도 진부했고요.

추리적 속성도 첫 번째 사건은 혼조 기와무의 시선이라서 사건과 동시에 진상이 밝혀지지만, 이후 두 건은 혼조의 제자 미와쿠의 시선이라 마지막 부분에서 진상이 밝혀지는 독특한 전개 방식은 매력적입니다. 첫 번째 사건의 경우, 식칼로 첫 번째 상처를 위장한다는 트릭과 대나무 조릿대 등의 디테일한 소품 및 미 군정 당시 시대 상황, 피해자의 도착증적인 성벽에 대한 증언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가 잘 맞물리는게 굉장히 좋았고요. 이 사건 하나만큼은 별 네 개가 충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말이죠. 

그러나 극한의 밀실이라는 두 번째 사건, 순간이동 알리바이 트릭이 사용된 세 번째 사건은 솔직히 기대 이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진상을 너무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제가 추리 애호가로 쌓아온 나름의 덕력도 있겠지만, 트릭이 너무 쉽고 의외성이 별로 없어요. 시공을 초월한 단도에 의한 살인과 발자국 하나 없는 밀실이라는 만화 같은 상황 자체가 자살을 반증하는 요소잖아요? 솔직히 경찰 수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게 더 의외입니다. 별명에 대한 진상 등 디테일한 부분의 장치가 몇 개 눈에 뜨이기는 하나 딱히 특출난 수준도 아니고요.

세 번째 사건은 범인의 오랜 고민과 노력이 투입된 나름 거대한 장치가 사용되었고, 해결에는 여러 관계자 - 미와쿠, 오세키에다가 탐정 마키 사쓰지까지 - 머리를 맞대는 노력이 필요했다는 점에서 가장 공을 들인 트릭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기부터 문제입니다. 외도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사실을 진짜 남편이 깨달았다고 살의를 품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게다가 트릭을 만들기 위한 억지도 지나쳤습니다. 용의가 갈 수 없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내어 피해자를 유인한다는 발상, 알리바이 트릭을 위해 샴쌍둥이까지 등장시킨 설정은 어이를 상실케 했거든요. "쌍둥이를 등장시키면 안 된다"라는 녹스의 규칙을 딱히 예로 들지 않더라도, 집 가정부에게 증언을 시키기 위한 트릭에 들인 공치고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공정성도 떨어져서, 어렸을 적 자는 모습에 대한 술회라든가 가슴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독자가 정보를 얻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장치였어요. 게다가 3억 엔 사건까지 녹여내려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였습니다.

그래도 혼조라는 인물의 일편단심, 변치 않는 애정을 그리는 장대한 드라마가 당시 일본의 사회상과 얽혀 현실적으로, 그리고 지루하지 않게 그려져 사백여 페이지가 넘어가는 대장편임에도 쉽게 읽히는건 분명합니다. 여러 호평에는 수긍이 가네요. "회귀천 정사"처럼 첫 번째 사건까지만 잘 정리된 중편이었다면 훨씬 좋았겠지만, 현재의 모습으로도 드라마와 추리 모두 평작 수준은 충분히 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딘가 긴 여행을 떠나실 때 적절한 선택이 될 것 같습니다.

2012/05/25

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장우진 : 별점 2.5점

무하 : 세기말의 보헤미안 - 6점
장우진 지음/미술문화

"아르누보" 그 자체였던 미술가 무하의 일생을 상세한 도판과 함께 설명하는 책. 일종의 전기이자 미술사, 미시사 책입니다. 무하에 대해서는 아르누보 예술가로 몇몇 포스터와 보석 디자인밖에는 몰랐었는데, 책이 예쁘게 생겨서 반쯤은 충동구매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건질 게 많더군요. 우선, 무하라는 인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점이 많습니다. 장식미술가로서의 디테일한 작품과 일생에서부터 굉장한 애국자로 고국 체코에 대작 "슬라브 서사시"를 남기는 것이 평생의 목적이었다는 것 등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도 수록된 도판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보아도 낡아 보이지 않는 섬세하고 세련된, 처음 보았을 때만큼의 시각적인 충격과 재미를 항상 가져다주는 무하의 작품은 물론이고, 당시 벨에포크 시대의 파리와 유럽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그림, 일러스트, 사진과 각종 자료들이 압도적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많이 실려 있거든요.

도판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인쇄와 편집도 훌륭하고요. 가격이 좀 비싼 감이 있기는 하나 아르누보, 아르누보 스타일 일러스트와 장식미술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2/05/22

우리딸 빨리 낫기를

간만에 일상 소식입니다.

딸아이가 아파서 입원했다가 퇴원했는데 깔끔하게 낫지를 않네요. 폐렴이었는데 폐렴은 없어졌다고 하나 기침과 콧물이 그대로에요... 병원을 옮겨봐도 진단과 약 처방이 똑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우리 귀요미 빨랑 완쾌해서 건강해졌으면 하는 마음에 몇자 적습니다. 같이 응원해 주시길.

우리딸! 화이팅!

2012/05/19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 소래섭 : 별점 3점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 6점
소래섭 지음/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명랑화"라는 말이 시작된 1930년대 일제강점기 시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명랑"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에서부터 시작하여 당시 "명랑"이라는 말이 쓰인 다양한 텍스트를 찾아내어 여러 가지 당대의 모습을 소개하는 책. 인문학서이기도 하고 미시사를 다룬 역사서이기도 한데 "명랑"이라는 주제도 특이하고, 소개되는 내용도 새로운 것이 많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고교생의 당구장 출입을 금하는 등 당구장이 퇴폐적인 공간으로 인식된 계기가 1930년대의 당구장 유행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 "영어"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1930년대부터라는 것(일본 유학생은 이미 차고 넘쳐서 영어를 쓸 일이 없었음에도 큰 인기였다고 합니다), 당대 화장 전문가 오숙근의 화장법 컬럼이 지금 못지않게 외래어가 다양하게 섞인 글이었다는 것 - "여름 양장에는 선의 미 백 퍼센트의 팔과 다리의 서늘한 '리즘'을 맛보게 됩니다. 얼굴에서 '센티멘탈'한 입체미를 찾을 수 있다면, 팔과 다리에서는 밋칠한 '스트림 라인'의 충동을 받을 것입니다...." - 등등등.

그중에서도 1930년대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활빙광"이라 불린 피겨의 개척자 이일에 대한 일화라든가(1927년에 "피겨스케이팅 구락부"를 조직하여 보급에 나섰다니 정말 역사가 유구한 스포츠네요),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당대 일본인까지 모조리 제압하며 국가대표로 동계올림픽까지 출전하게 된 김정연과 펭귄구락부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 1930년대 조선에서 요요가 유행했다는 놀라운 사실까지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했거든요. "요요의 노래"까지 유행했다니 정말 말 다했죠.

재미와 함께 자료적 가치도 높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명랑"이라는 주제로 찾은 당대의 일화들이 다른 유사한 경성 관련 자료 도서와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경성 관련 자료를 찾으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12/05/16

음식전쟁 문화전쟁 - 주영하 : 별점 2점

음식전쟁 문화전쟁 - 4점
주영하 지음/사계절출판사

문화인류학적인 시각에서 음식의 문화적, 사회적 의미를 분석했다는 책으로 도서관에서 충동 대여해서 읽어보았습니다. 먹거리 관련 책으로 잘 알려진 주영하 씨의 책이더군요. 저자의 책은 아직 "차폰 잔폰 짬뽕""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두 권밖에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구태여 비교하자면 "차폰 잔폰 짬뽕"과 좀 비슷합니다. 음식에 대해 문화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 음식보다는 다른 부분에서의 문제 제기가 많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하지만 주제 하나만큼은 명확했던 "차폰 잔폰 짬뽕"보다 훨씬 많은, 다양한 음식들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이야기가 많이 혼란스럽고, 주제가 명확하다기보다는 희석되는 측면이 많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물론 "맛의 달인"에도 등장했었던 희석식 소주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 한국인의 폭음은 막걸리를 마시듯 소주를 마셨기 때문에 생겼다는 문화적인 이유가 크다는 점 같이 재미난 이야기도 많이 실려있긴 합니다. (소수민족 롤로족이 도수 4~5%의 옥수수술을 마시다가 중국에 병합된 후 도수 50%에 육박하는 저렴한 바이쥐우로 술이 대체되었으나, 여전히 바이쥐우를 옥수수술 마시듯 하는 사례 소개)
요릿집의 역사와 유명 요릿집 태화관에서 벌어진 "독립선언서 낭독", 식도원에서의 "조선 공산당 결성식"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이나 요정에 대해 소개한 부분도 나쁘지는 않았고요.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우리 음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문화적 측면에서의 고찰이라는 점에서는 건질 게 있기는 한데, 저는 "음식" 그 자체에 좀 더 집중된 책이 더 좋은 것 같네요.

2012/05/12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 기 도이처 / 윤영삼 : 별점 4점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 8점
기 도이처 지음, 윤영삼 옮김/21세기북스(북이십일)

언어와 인식 (넓게 보면 문화)의 인과관계를 역사적인 이론들을 통해 해명해 나가는 책. 자주 찾는 블로그인 zariski님 블로그에서 멋진 리뷰를 읽고 호기심이 가서 바로 찾아서 읽게 되었습니다.

핵심은 언어가 인식, 인지 능력에 영향을 미치느냐라는 것인데, 크게 색깔에 대한 이론이 펼쳐지는 1부, 방향과 성별에 대한 특징 분석이 이루어지는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주제별로 역사적, 지역별 언어의 특징 분석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제목이기도 한, 왜 호메로스는 소와 바다를 와인 빛깔이라고 묘사했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고민, 거기서 파생된 인간과 색깔 인지 능력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시대순으로 설명됩니다. 색깔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발달이 뒤따라야 한다는 당연한 결론이지만,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통한 최초의 발상에서부터 다양한 고전을 거쳐 여러 가지 이론이 펼쳐지는 과정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2부는 급진적인 사피어 - 워프 가설에서 시작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구구이미티르족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설명됩니다. 이 부족은 동-서-남-북의 절대 좌표로 공간을 인지하고 말한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네 발앞에 개미가 있어"가 아니라 "네 발 동쪽에 개미가 있어"라고 하는 식이라죠. 이렇게 절대 좌표로 공간을 인지하는 것이 몸에 배면, 어떻게든 방향 감각이 생긴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부족하기는 하나 괜찮았습니다. 과연 언어 때문에 초능력(?)까지 생기는 것일까요? 어쨌건 몰랐던 내용이라 신선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구구이미티르어와 같이 역사적이고 사멸해가는 특수한 언어 말고도 현대어로 특징을 비교 분석한 성별 단락도 재미있었습니다. 하이네의 시를 통한 영어, 독일어의 차이에서 시작하는데 여러모로 되새겨 생각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덧붙이자면 2부에서는 그 유명한 캥거루 어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원주민들 언어에 "캥거루"가 사실은 없고, 쿡 선장이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을 원주민에게 물어보자 "나는 모른다"라는 말로 "캥거루"라고 했다는 전설 말이죠. 사실은 구구이미티르족의 언어에 회색 캥거루의 특별한 유형을 "강구루"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렇듯 어려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예제들이 모두 쉽고 글 자체가 재미있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옵니다. 지식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보기 드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죠. 무엇보다도 다양한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책인데, 국내 번역이 충실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이 책에 나온 다양한 예제들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글이 그만큼 좋은 언어라는 뜻도 되겠죠. 별점은 4점입니다.

언어와 인식 (문화)의 인과관계와 상관관계가 궁금하신 몇 안 되는 특정 독자분들에게는 필독서이며, 단지 지적인 흥분과 인문학적 즐거움을 얻고자 하시는 분들에게도 추천드립니다.

2012/05/11

펭귄 북디자인 1935-2005 - 필 베인스 / 김형진 : 별점 5점

펭귄 북디자인 1935-2005 - 10점
필 베인스 지음, 김형진 옮김/북노마드

클래식 문고본 시리즈로 유명한 펭귄 출판사의 출판물들을 다섯 가지 시대로 구분하여 정리한, 일종의 디자인 역사서입니다. 크게 보면 미시사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자주 찾아가는 이요님 블로그에서 리뷰를 읽고 관심이 가서 구입했는데, 손에 잡고 완독하기까지 몇 시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몰입하여 읽었습니다. 한때 출판사를 하나 차리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펭귄북스라는 전설적 출판사의 시작과 다양한 출판물들의 아이디어와 결과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가 없을리가 없으니까요. 화려한 도판으로 시대별로 다양하게 선보이는 서적들의 디자인을 보는 재미도 엄청났고요.

전부 유익하고 재미있는 내용이지만, 펭귄의 역사로 보자면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탄생한 다양한 임프린트에 대한 내용이 특히 와닿았습니다. 디자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것은 1961년 도입된 로멕 마버의 "마버 그리드"였고요. 전자는 "돈 버는 재주가 있었다"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발상이 돋보였고, 후자는 얀 치홀트의 전설적 세로 그리드를 벗어나 현대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다양한 장르의 출판물에 적용 가능한, 그야말로 만능 그리드라는 점에서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그리드와 더불어 폰트와 정렬 방식 모두가 완벽해서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더라고요. 솔직히 너무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을 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러한 클래식한 디자인을 지금도 유지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마음에 들었어요. 물론 디자이너 입장에서 시각적으로 강한 펭귄 심볼의 사용은 탐탁지 않았겠지만, 그것을 이겨내는 진짜 디자인이 아쉽습니다.

비록 지금 하는 일은 다르지만 디자인과를 졸업했기에 더더욱 관심이 가고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만약 이 책을 제가 학부생 때 읽었더라면 제 인생이 혹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드는군요. 학부 때에는 전혀 관심 두지 않았던 편집 디자인의 매력을 새롭게 알게 되었으니까요. 제 학부 시절 이런 서적들이 별다르게 없었던 것이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출판 분야 종사자나 최소한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는 분들, 특히 예비 편집 디자이너에게는 필독서라 생각됩니다. 저처럼 뒤늦게 후회하는 우를 범하지 마시고 꼭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12/05/08

내 안의 야수 - 마거릿 밀러 / 조한나 : 별점 3점

내 안의 야수 - 6점 마거릿 밀러 지음, 조한나 옮김/영림카디널

헬렌 클라보는 아버지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혼자서 싸구려 호텔에서 살아가는 기이한 노처녀. 그녀에게 어느 날 에블린이라는 여성에게서 이상한 협박 전화가 걸려왔다. 겁에 질린 헬렌은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알고 있는 블랙쉬어에게 에블린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명성은 쟁쟁했으나 작품을 접할 길이 없던 서스펜스의 여왕 마거릿 밀러의 대표작. 작가의 명성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물로, 정체 모를 협박자와 처음에는 장난스러웠지만 점점 치명적으로 변해가는 협박의 과정이 잘 표현된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평범한 사람 마음속에 숨어있는 야수라는 주제는 특별한 것은 아니죠. 루스 렌들의 "내 눈에 비친 악마"나 "유니스의 비밀"이라는 좋은 예가 있으니까요. 또 피해자와 협박자의 시점을 오가며 서스펜스를 고조시키는 전개 방법은 코넬 울리치 (윌리엄 아이리쉬)"상복의 랑데뷰"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광녀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작품을 수도 없이 꼽을 수 있을 테고 말이죠.

그러나 단순한 아류작은 아닙니다. 발표 시기를 볼 때 위와 같은 유사한 작품들의 원전 격이라는 점이 명백하기도 하지만, 독특한 반전과 더불어 자신만의 개성을 뽐내는 작품이기 때문이에요. 오히려 시기를 감안한다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박감이 넘치고 현대적이기까지 합니다. 무엇보다도 서스펜스의 여왕에 걸맞게 독자의 심리를 살짝살짝 조이는 맛이 특히 일품이라 과연 걸작이라는 평이 아깝지 않네요. 유사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독특한 반전도 좋았고요. 앞부분의 복선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서술 트릭의 선구자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협박의 동기가 전혀 밝혀지지도 않고, 협박의 재료를 어떻게 알아냈는지(최소한 더글러스의 성 정체성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불분명하며, 과연 전화 목소리를 베르나가 못 알아들었을까 하는 문제 등 전개 면에서 허점이 여러 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서도 결국 마지막까지 에블린의 인격이 분열하는 계기가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점은 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아버지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가 살짝 보여지기는 하나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거든요. 과거의 일화 말고 현재 시점에서 뭔가 방아쇠를 당기는 계기는 독자를 위해 짤막하게나마 설명해 주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지금 읽기에는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어쩔 수 없는 약점도 필연적으로 존재합니다. 이건 작품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요...

때문에 약간 감점해서 별점은 3점입니다. 허나 지금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심리 서스펜스의 교과서적인 작품으로 한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고전 추리 - 서스펜스 스릴러 애호가분들께 원전 격인 재미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추천드립니다.

2012/05/05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 이순우 : 별점 2.5점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 - 6점
이순우 지음/하늘재

일제강점기 시대 장소나 사람, 사건에 대한 이야기. '일그러진 근대 역사의 흔적 찾기' 두 번째 편이라고 하며, 전부 31개의 주제로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은 목차와는 달리 글 자체가 좀 재미없게 쓰여졌습니다. 특히 역사 속 오류, 일제강점기 시대 사람과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1~3부까지의 내용은 심할 정도로 지루했어요. 너무 학술적인 접근 위주였거든요.

그래도 일제강점기 시대 풍속을 보여주는 4부는 괜찮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행운의 편지"가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 천하의 진미였다는 금강의 종어는 무슨 물고기였는지, 하늘의 안창남과 동급이었던 자전거 영웅 엄복동의 인생과 장물아비로 전락한 추한 말로 등 미처 알지 못했던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상록수"에서도 언급되었다는 거인 '김부귀'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키가 2m35cm였다면 정말이지 대단한 거인이었겠죠. 지금의 최홍만과 같은 명성을 충분히 누렸을 것 같아요. 해방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와 같은 후일담까지 나와주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그거 하나는 좀 아쉽더군요.

전체적으로 본다면 목차를 처음 훑어보았을 때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도판도 꽤 충실하여 자료적 가치도 높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지식을 탐구하시고자 한다면 추천드립니다.

2012/05/02

라가도 : 연옥의 교실 - 모로즈미 다케히코 / 김소영 : 별점 1.5점

라가도 : 연옥의 교실 - 4점
모로즈미 다케히코 지음, 김소영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명문 사립 세오중학교 교실에서 충격적이고 참혹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가해자는 자살한 학생 리나의 아버지 히가키였고, 피해자는 학급 안에서 가장 이해심 많았던 학생 후지무라 아야였다. 만취 상태였던 히가키가 사건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탓에, 경찰은 모형 세트를 만들어 사건을 재구성해 보려 하는데...

중학교 교실 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룬 작품. '이게 진상이 아닐까' 싶었던 이야기가 이어지는 증언과 증거들로 인해 뒤집히고 변경되며, 의외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내용입니다. 카구라님의 리뷰를 통해 정보를 접한 뒤 관심이 생겨 읽어보게 되었네요.

일단 카구라님의 리뷰대로 중후반부까지는 긴장감 넘칩니다. 충격적인 사건에서부터 시작해서 히가키 리나의 자살과 이 사건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히가키 리나를 누가 괴롭혔는지, "세오 지배"의 실체는 무엇인지... 등으로 계속 이어지는 중반부까지는 상당히 흡입력 있기 때문입니다. 푸른 사슴 이론도 섬찟한 맛은 일품이었고요.

그러나... 결말이 영 아니었습니다. 반전에 너무 목을 맨 탓일까요? 줄기차게 주장되어온 "세오 지배"에 따른 결과라는 게 차라리 더 나아 보일 정도로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또 작가 스스로 벌여놓은 떡밥을 회수하지 못한 것도 많고(대체 후지무라 아야의 능력이 무엇이며 그 능력으로 반을 어떻게 조종하려 했는지, 전학생이 뭐라고 불렸는지 등), 초국가적인 정보 수집 기관의 등장과 사건과는 관계가 없는 인물이 흑막이라는 것도 큰 단점이라 생각됩니다. 뜬금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그 외에도 아무리 봐도 악역에 가까운 탐욕스러운 미디어 업계 종사자 고다와 썩어빠진 재벌가문의 하수인 이자와 등 주요 등장 인물들도 문제였고, 복잡한 배치도의 반복도 노력은 가상하나 별다른 장치로 기능하지 않아서 감점 요소일 뿐입니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읽는 데 시간만 낭비하게 되네요.

차라리 라가도니 뭐니 하는 잡다한 설정을 싹 빼고, 무리한 장편으로 만들기보다는 중·단편 정도로 썼더라면, 그리고 결말은 리나의 자살 원인과 후지무라 아야의 정체, 시마즈 선생의 개인적 원한이 밝혀지는 정도로 끝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이런 작품에 쓰는 말이겠죠. 별점은 1.5점입니다.

2012/05/01

나는 세계 일주로 경제를 배웠다 - 코너 우드먼 / 홍선영 : 별점 2.5점

나는 세계 일주로 경제를 배웠다 - 6점
코너 우드먼 지음, 홍선영 옮김/갤리온

잘나가는 금융맨이 회사를 그만둔 뒤 세계일주를 시작하는데, 이왕 하는 거 여행 중에 다양한 상품 거래를 통해 자본금 오천만 원을 두 배로 만든다는 내용의 논픽션. 영국 히트 다큐멘터리 "80일간의 거래일주"의 원작이라고 하네요. 일단 아이디어는 좋아요. 진짜 실물경제를 알기 위해 몸으로 세계 상인들과 부딪히면서 소통하고 돈까지 벌어온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첫 시도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 모로코 카펫 거래는 관광객 대상의 마케팅 결과물일 뿐이었으며, 괜찮은 수익을 가져다 준 잠비아 커피, 남아공 와인은 본인 스스로가 외국에 구매처를 알아봐 주겠다는 이유로 저렴하게 구입하게 된 것이 수익의 가장 큰 요인이기에 이게 정말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실물경제인가 하는 데에는 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사실 다큐를 위한 모종의 촬영 등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았다면 저러한 거래가 쉽게 성사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렵기도 하고요.

게다가 진짜 몸으로 부딪힌 승부인 낙타 거래나 말 거래에서는 참담한 실패를 맛보는 등 실패가 너무 많고, 고가의 찻잎이나 옥을 구입하는 등의 투기적이며 충동적인 거래도 여러 건 눈에 띄는 것, 게다가 결국 자본금을 두 배로 뻥튀기는 목표는 브라질산 친환경 목재를 본국인 영국으로 들여오는 마지막 거래로 달성한다는 점 - 결국 승부는 영국 본토에서 이루어진 점에서 반칙 같았어요 - 등도 실물경제를 익힌다는 원래 의도와는 잘 맞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몇 건의 협상 장면이나 중국에서 구입한 서핑보드와 같이 꽤 그럴듯한 비즈니스도 제법 눈에 띄기는 하지만, 제게는 그냥 호사가의 취미 활동으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젊은 청춘의 독특한 여행기로 재미는 있지만, 제목과 서두에서 주장한 바가 별로 와닿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네요. 이런 젊음과 도전 정신은 부럽고 제가 여행기를 좋아하기는 하나 이제는 너무 나이가 들고 지켜야 할 것(?)이 많다는 점에서 저와는 애시당초 맞지 않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유치한 일러스트도 감점 요소예요. 중학생들이 보는 책으로 착각할 정도로 별로였습니다. 다큐멘터리가 있다면 관련된 영상 이미지를 그냥 쓰는 게 더 좋았을 텐데 왜 어울리지도 않는 일러스트를 넣었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