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은폐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은폐에 대한 글을 날짜를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관련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26/03/01

그리고 문이 닫혔다(そして扉が閉ざされた) - 오카지마 후타리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키코의 죽음 이후, 사키코의 어머니 미타 마사요가 사건 당시 함께 있었던 일행 4명(유이치·아유미·타다시·치즈루)을 집으로 불러 수면제가 든 주스를 먹인 뒤 지하 셸터에 감금했다. 셸터 안 화장실에는 “너희가 죽였다”라는 문구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이들은 사키코의 죽음이 “정말 사고였는지”를 두고 서로를 의심하며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사고’로 보였던 사건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사키코가 셸터 안에서 아이스픽에 찔려 죽었고, 그 뒤 누군가가 사고로 위장했다는 진상이 드러난다...

"클라인의 항아리"로 유명한 일본의 본격 추리 작가 오카지마 후타리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약 20년 동안의 일본 미스터리 베스트 100에 포함될 정도로요. 원서로 읽었습니다. 

특정 사건의 유력 용의자 네 명을 폐쇄 공간인 핵 셸터에 가둔 뒤, 그들끼리 생존 게임을 이어 가며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게 만든다는 내용으로, 1987년이라는 발표 시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류의(예를 들어 이런 작품) 원조인 듯 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본격 추리 작가의 작품답게 논리적으로, 발견되는 단서와 증언들에 의해 단계적으로 치밀하게 전개됩니다. 이 과정을 밟아 나가기 위한 단서의 제시도 공정하고요. 작품 속 추리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처음에는 사키코의 죽음을 모두 사고사라고 믿습니다.
  2. 사진 속 자동차 운전석 시트 위치를 근거로, 사키코가 혼자 운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운전석 시트가 ‘추락 충격으로 움직였다고 보기 어려운 방향’이라서, 사키코보다 체격이 큰 누군가가 운전했을 가능성이 떠오르지요.
  3. 셸터 화장실 바닥에서 수건에 싸인 아이스픽이 발견됩니다. “왜 셸터 화장실 바닥에 있었는가?”라는 의문과 함께 사키코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논의됩니다. 이후 네 사람은 서로의 알리바이를 교차하며 검증합니다.
  4. 곧이어 셸터에서 사키코의 귀걸이가 발견되면서, 셸터 자체가 살인 현장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5. 사키코의 알파로메오가 나갈 당시 치즈루와 아유미는 별장 2층에 있었고, 차가 나가기 30분 전 유이치는 디지에서 별장으로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성립합니다. 따라서 알파로메오를 운전할 수 있는 인물은 타다시뿐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타다시는 절벽에서 돌아올 때 탈 오토바이도 알파로메오에 싣고 갔던 겁니다.
  6. 그러나 이후 치즈루와 아유미가 절벽에서 알파로메오를 발견했을 때, 차 안에 사키코의 사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차가 절벽에서 떨어진 시점은 그들이 차를 본 이후의 새벽이며, 당시 세 사람은 함께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차를 떨어뜨릴 수 있는 인물은 유이치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7. 그러나 타다시가 사키코의 사체만 먼저 절벽 아래로 던진 뒤, 얼음을 쐐기처럼 가공해 장치하여 차가 새벽에 자동으로 떨어지도록 만든 것으로 밝혀집니다. 아이스박스 뚜껑이 열려 얼음이 물로 변해 있던 점 등이 그 증거로 제시됩니다.

타다시의 사체 은닉 이후 밝혀지는 진상 또한 나름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최초의 언쟁에서 유이치가 밀친 탓에 실수로 사키코가 죽었고, 유이치를 사랑하는 아유미가 이를 숨기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묘사된 유이치와 아유미의 통화를 통해 미리 암시되기에, 치밀하며 공정하다는 느낌도 전해줍니다.

아울러 네 명만 등장하는 폐쇄 공간 미스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셸터의 묘사(아래의 ChatGPT 이미지 참고하세요)와 그곳을 탈출하려는 여러 시도들도 긴박감 넘칩니다. 소규모 무대극으로 각색해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아직 영상화가 되지 않은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다만 단점도 분명합니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던 화자 유이치의 실수로 사키코가 죽었다는 진상은 다소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타다시의 사체 은닉 방식 역시 허술합니다. 사체를 단순히 바다에 던졌다면 언제든 발견될 수 있고, 그 경우 사고사가 아니라는 점이 곧바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사체가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아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습니다. 왜 사체에 돌을 묶는 등의 추가 조치를 하지 않았는지도 의문입니다.

그리고 사키코의 모친이 사고사를 의심해 당시 별장에 있던 네 명을 셸터에 가둔 이유, 그리고 유이치와 그리 오래 함께 하지 않았던(별장에서의 3일 정도 뿐) 아유미가 유이치를 위해서 사키코의 죽음을 은폐할 정도로 깊이 빠져 있었다는건 설명이 부족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구멍이 있습니다. 유이치가 화자인 상황에서는, 유이치가 별장을 떠난 뒤 남아 있던 세 명이 사키코를 살해하고 차와 함께 절벽으로 떨어뜨렸다는게 가장 논리적인 추리이기 때문입니다. 사키코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해 아이스픽을 챙겼다면, 그 대상은 연인을 빼앗아 간 아유미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유미가 반격해 사키코가 사망했고, 아유미의 약혼자 타다시가 사체 은닉을 도왔다고 보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애초에 타다시는 동기도 가장 부족하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도 이런 가능성이 아예 제시되지 않는건 이상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이런 폐쇄 공간 미스터리의 원조격이라는 의미 외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구태여 번역까지 해 가며 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추천드릴 만한 작품은 아니네요.

2026/01/04

루드비히, 퍼즐로 푸는 진실 (2024) : 별점 4.5점

유명 퍼즐작가로 필명이 '루드비히'인 존 테일러에게 형수이자 소꼽친구 루시로부터 경찰인 쌍둥이 형 제임스가 실종되었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여러 정황은 제임스가 모종의 이유로 스스로 몸을 감추었다는걸 알려주었다. 루시는 존에게 제임스인척 경찰서로 출근해서 존 실종에 대한 단서를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출근한 존 앞에 여러 불가능 범죄가 잇달아 펼쳐지는데....

영국 BBC에서 제작한 총 6화 구성의 추리 드라마 첫 번째 시즌입니다. 

가장 큰 매력은 독특한 설정입니다. 퍼즐 천재인 '루드비히' 존을 주인공 탐정역으로, 범죄 속 트릭들을 퍼즐의 일종처럼 선보이거든요. 존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하나의 ‘퍼즐’로 인식하며 본격적으로 해결에 나서고요. 마술사 탐정까지는 봤었는데, 퍼즐 전문가 탐정은 처음 보네요.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입니다. 퍼즐 제작에만 몰두하며 사회성과 현실 감각이 부족한 존이 갑작스럽게 경찰 역할을 맡아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코믹하면서도 묘하게 현실감 있게 그려집니다. 형수 루시와 조카 헨리도 제임스 실종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고요. 그러고보니 존과 제임스 형제에 아들 이름은 헨리라니, 가족 자체가 영국적이군요. 
카터를 비롯한 경찰 동료들, 다른 등장인물들도 진지한 상황 속에서 영국식 유머를 자연스럽게 섞어내어 극을 재미있게 만들어 줍니다. 가족과 동료애가 끝까지 이어지는 것도 요사이 보기드문 미덕이라 할 수 있고요.

추리적으로도 빼어납니다. 1화에서는 여러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교차 분석해 논리적으로 범인일 수밖에 없는 인물을 드러냅니다. 시청자에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서 추리에 직접 참여하기는 어렵지만, 퍼즐 전문가의 해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

2화에서는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 퍼즐 트릭이 사용됩니다. 존은 사진을 통해 벽지가 미세하게 이동한 점을 알아채고, 벽지 뒤 벽을 뚫어 숨겨진 시체를 찾아낸 뒤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요. 피해자 사기꾼에게 사기당한 일행들이 단체로 범행을 저지르고 은폐했던건데, 앞서 등장한 여러가지 단서들로 설득력있게 설명됩니다.

3화는 두 개의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는 ‘병렬 퍼즐’이 등장합니다. 관광 가이드 살인은 갑작스럽게 행해진 것으로 추리하고, 그 이유를 관광 코스를 직접 도는 방법으로 발품을 팔아 증명해내는데 수사와 진상 모두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4화는 체스말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범은 장치 트릭을 활용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다섯 명의 동료들 작업 위치가 순차적으로 바뀌도록 유도해서, 피해자가 원했던 위치에 가도록 만든 뒤 장치를 통해 추락사하게 만든거지요. 존은 이를 '역행 제스' 퍼즐로 풀어냅니다. 이 퍼즐 자체가 루드비히' 존이 처음 만들었다고 소개되는데, 현재의 체스판 상태를 보고 이전 수를 맞추는 퍼즐이에요. 즉, 이전 수를 맞춰가면서 최초에 수를 둔 사람을 알아내 범인을 밝혀냅니다. 
퍼즐을 활용한 추리도 깔끔하지만, 피해자를 발전기가 있는 위치로 이동시킨 뒤 쇼트가 나가도록 배선을 망치고, 발전기를 가동하면 피해자가 감전되어 추락사하게 만든 장치 트릭도 합리적입니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범인이 원하는 흐름대로 움직였던 것도 이전부터 자주 그래왔다는 설정이라 설득력있고요.
마지막에 발전기에 물을 뿌려 놓은 탓에 범인의 DNA가 묻은 물통을 확보했지만, 범인이 “자기는 1층에서 버렸다”고 주장하자 5층 현장에서만 쓰레기 수거장 안으로 투입 가능하다는 점을 추리쇼처럼 밝혀내는 장면도 볼만합니다.
한마디로 추리적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에피소드입니다.

5화는 '밀실 살인' 트릭이 등장하는데, 꽤 그럴듯합니다. 주말 내내 잠겨있던 교장실에서 교장이 살해된채 발견되는 사건인데, 존은 범인이 밀실 안에 계속 있었다!는 대담한 추리를 내 놓습니다. 이를 발견하는 단서가 교장실 쓰레기통에 있던 '변색되지 않은 사과 조각'이라는 디테일도 인상적입니다. 누군가 교장실에 최근까지 있었다는 증거인데, 영상물에 잘 어울리는 디테일이었습니다. 존의 학창 시절 과거, 그리고 노인이라도 쓸모없는게 아니라는 메시지도 좋았고요.

6화는 루시의 살인 누명을 벗기고 진범을 잡는 이야기인데, '루시가 집에서 가져간 칼로 사망한 피해자'라는 결정적 증거를 뒤집는 추리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범인이 막 피해자 폴라를 칼로 찔렀을 때 루시가 자기 칼을 들고 그 집에 들어섰습니다. 범인은 입구에서 보이지 않는 식탁 뒤로 숨었고, 루시가 쓰러진 폴라를 보고 자기 칼을 내려 놓은 뒤 그녀에게 다가가자 범인은 루시에게 보이지 않는 사각으로 빠져나가면서 칼을 바꿔치기 했던 겁니다.
정통 본격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싶을 멋진 트릭이며, 증거도 확실하게 제시됩니다. 범인은 바꿔치기한 루시의 칼을 폴라 부엌 칼꽂이에 꽂아두었는데, 이 칼에서 루시나 존의 지문이 나오면 바꿔치기했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이러한 각각의 사건들과 함께 제임스 실종 사건에 대한 조사와 추리도 계속 이어집니다. 결국 존은 제임스가 남긴, 누구나 들으면 스스로 떠났다고 생각할 메시지에서 암호 해독 키를 찾아내어 암호를 풀어내어 단서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체가 드러났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경찰의 고문역으로 일하며 형을 계속 추적할 존의 모습으로 총 6화의 시즌 1은 마무리 됩니다. 

1화와 2화, 3화 사건은 경찰 수사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을 듯 싶고, 경찰이 너무 무능하게 그려진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제임스와 폴라, 싱클레어 등이 관련된 진짜 음모도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고요. 제임스가 암호로 창고 위치를 남긴 이유와 사라진 이유를 창고에 남기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재미와 추리 모두 빼어난 좋은 드라마였습니다. '루드비히'라는 주인공 필명에 어울리는, 베토벤 음악의 적절한 활용과 촬영도 좋고요. 시즌 2가 빨리 나오면 좋겠습니다. 제 별점은 4.5점입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25/08/31

해벅 (HAVOC) (2025) - 개러스 에반스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참 형사 워커는 삼합회 보스의 아들 추이가 살해당한 사건을 수사하다가, 시장의 아들 찰리가 연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워커는 시장에게 찰리를 무사히 데려올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 찰리를 노리던 삼합회는 시장을 납치했고, 찰리의 입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려는 부패 경찰들마저 나서서 대규모 총격전이 벌어지고 마는데... 

"레이드" 시리즈로 잘 알려진 개러스 에반스 감독의 범죄 액션 영화입니다. 넷플릭스로 감상했습니다.  

가장 큰 강점은 역시나 액션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이 액션씬으로 볼거리는 많은 편이에요. 시작과 동시에 터지는 자동차 추격전은 박진감 넘치고, 찰리의 애인 미아를 만나기로 했다가 말려든 클럽에서의 혼전은 삼합회와 부패 경찰들, 주인공 일행이 좌충우돌하며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오두막에서의 총격과 난투는 감독 특유의 속도감과 무게감을 살려내고 있고요. 적어도 액션만큼은 시원시원하게 즐길 만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설명이 부족한 탓입니다. 워커가 동료 부패 경찰들과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시장에게 왜 약점을 잡혔는지, 찰리와 미아가 어떻게 사건에 휘말렸는지, 삼합회가 시장을 납치한 이유는 무엇인지, 부패 경찰들은 왜 찰리와 미아를 노리는지 등 대부분의 설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야기의 맥락을 제대로 쌓지 않은 채 장면들을 끊어 붙이며 액션으로 넘어가지요. 티격태격하는 고참 마초와 신참 여성 형사 콤비에서 시작되는 기본 설정들마저 진부하기 짝이 없고요.

파워 밸런스와 액션 씬의 설득력도 엉망입니다. 초반에는 삼합회가 경찰을 손쉽게 학살하고 시장까지 납치하는 초월적 조직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주인공 일행과 맞서면 허무하게 쓸려나갑니다. 워커는 산전수전 겪은 형사라 쳐도, 찰리는 부상자에 미아는 여성 아마추어 범죄자일 뿐인데 말이지요. 정점은 오두막 액션입니다. 삼합회 악당들이 은폐와 엄폐도 없이 총격전 한복판으로 돌진하다 죽는 모습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중국인은 멍청하다는걸 드러내려는 인종차별 의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결말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에요. 삼합회 보스가 '너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겠어!' 어쩌구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부패 경찰들을 체포한 워커의 파트너 청이 갑자기 나타난 뒤 총을 빼앗겨 산통이 다 깨집니다. 마지막은 워커, 청과 찰리와 미아 커플을 제외한 모두가 죽고 워커가 파트너에게 자기를 체포하라며 끝나고요. 대체 워커가 무슨 죄를 지었단 말입니까? 엉망진창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액션 장면은 시원하지만, 이야기 전개와 캐릭터 구성, 악당들의 존재감은 지나칠 정도로 허술해서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네요.

덧붙이자면 삼합회의 출연이라던가 범죄에 엮인 연인들의 서사, 암흑가의 암투 등이 여러모로 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만큼의 이야기 완성도만 갖추어 주었더라면 좀 더 볼만했을 듯 합니다. 예를 들자면 시장의 아들이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삐뚤어진 찰리가 삼합회 일을 돕는 범죄자 미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보스 아들 죽음에 연루되어 함께 도주하게 되고, 정의로운 경찰 워커가 삼합회 수사에 나섰다가 우연찮게 그들의 도주에 합류하여 셋이서 삼합회에 맞선다! 부패 경찰 이야기는 빼고요. 

2025/08/24

스펜서 컨피덴셜 (2020) - 피터 버그 : 별점 1점

경찰 스펜서는 부패한 상관 보일런을 폭행했다가 5년 동안 수감되고 말았다. 스펜서의 출소 직후 보일런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고, 선량한 경찰 테렌스가 누명을 썼다는걸 알게 된 스펜서는 룸메이트 호크와 함께 잔상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부패한 경찰들이 범죄 조직과 함께 대량의 마약을 유통한 자금으로 카지노 '원더랜드'를 개장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걸 알아내는데...

로버트 B. 파커가 창조한 보스턴 사립탐정 ‘스펜서’ 시리즈 중 하나인 에이스 앳킨스(로버트 B.파커 사후 원작을 이어서 쓰고 있는 작가)의 "원더랜드"를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장편 범죄 스릴러 영화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한 액션물로 범죄 스릴러, 액션, 버디 코미디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나, 어느 쪽에서도 두드러지 못합니다.

특히 기대했던 범죄 스릴러, 수사물로는 최악에 가깝습니다. 일단,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수사는 전개상 거의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결정적인 단서들은 스펜서가 찾아낸 것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우연히 제공해 주니까요. 예를 들어, 사건 해결의 열쇠가 되는 도청 파일을 피해자 테렌스의 아내가 스펜서에게 직접 전해주는 식으로요.
스펜서의 옛 파트너 드리스콜이 악당이라는 사실도 너무 쉽게 밝혀집니다. 초반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이쑤시개 조각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수준이라 긴장감 있는 반전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부패한 옛 파트너, 마약 조직, 조직 내부의 은폐 구조 등 설정들도 지나치게 전형적이고요.

전개 또한 뻔하고 치밀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중간 보스급인 벤트우드에게 쳐들어가서 물고문을 통해 마약 운송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게 대표적입니다. 이럴 거라면 은밀한 수사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았지요. 게다가 정보를 털어놓았다면 악당들도 운송 시간을 바꾸는건 당연한데, 예정대로 운송하다가 마약 트럭을 스펜서에게 탈취당하는건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스펜서 캐릭터도 원작 붕괴 수준입니다. 원작에서는 문학에 조예가 깊어서 시니컬한 말투, 심리 묘사 측면에서 복잡한 면을 보여주는데, 영화에서는 그냥 말빨(?)좋은 전형적인 마초 헐리우드 경찰, 형사 캐릭터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액션에서라도 화끈했어야 했는데, 작중 대부분 장면에서는 적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는 장면만 반복될 뿐입니다. 이럴거라면 권투에 일가견이 있다는 설정은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어요. 마크 월버그도 그리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니고요.

액션은 다른 부분에서도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격투 장면들 모두 속도감이나 위력이 느껴지지 않는 탓에 맨손 액션의 쾌감을 기대하기 어려운 탓입니다. 호크가 덩치를 활용해 마지막에 잠깐 활약하긴 하지만, 이 역시 일방적인 구타에 가까워 액션적 재미는 떨어집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절정부입니다. 부패 경찰과 범죄 조직이 결탁한 악의 무리와 대단한 결전을 벌여야 할텐데, 스펜서가 트럭을 몰고 악당 본거지에 돌진한 뒤 호크가 몇 명을 때려눕히는 걸로 결전은 대체로 마무리됩니다. 스펜서와 드리스콜의 1:1 맞짱은 너무 작위적이라 어이가 없더군요. 부패 경찰들 때문에 보도도 못하고 사건이 은폐되었었는데, 스펜서와 호크의 활약 이후 사건이 대대적으로 폭로된다는 결말도 이해가 안되고요.

그래도 너무 바보같아서 아무 생각없이 볼 수 있다는건 오히려 장점이기는 하네요. 몇몇 유머 코드는 피식 웃게 해 주기는 하고요. 거인 호크, 조력자 헨리 캐릭터는 캐스팅이 좋습니다. 완전한 권선징악 마무리도 후련했고요.

다만 이 정도 장점은 이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를 보완해주기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범죄물로서도, 수사극으로서도, 액션 영화로서도 건질게 없는 졸작입니다. 원작인 탐정 스펜서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있는 쓰레기로 에필로그에서 후속작, 시리즈의 여운을 남기는데 어림도 없지요. 소리없이 망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2025/08/01

동트기 힘든 긴 밤 - 쓰진천 / 최정숙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살해당한 남자가 들어있는 캐리어를 옮기던 남자가 체포되었다. 그는 유명한 변호사 장차오로, 피해자 장양과 금전 관계로 다투다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는 경찰의 권위에 눌려 허위 증언을 했다며 범행을 부인함과 더불어 결정적 알리바이를 제출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때문에 사건은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경찰은 장차오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지 알아내기 위해 수학 천재인 옌량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0여년 전 있었던 허우구이핑 변사 사건 및 초등학생 아이 성상납이라는 추악한 범죄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게 서서히 드러난다...

중국 사회의 구조적 부패와 폭력, 권력형 범죄를 정면으로 다룬 사회파 추리 소설입니다. 초등학생을 성상납하는 추악한 범죄가 이루어졌음에도, 대기업 회장과 고위 정치인이 결탁하여 수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증거를 인멸하며, 주요 수사 관계자에게 누명을 씌워 파멸시키는 과정을 거침없이 보여줍니다. 이 모든 일이 20여 년 전인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으며, 이런 내용을 담은 작품이 중국에서 정상적으로 발매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작품은 단순한 사회 고발에 그치지 않습니다. 쑨훙원의 비서 후이랑과 공안 리젠궈가 결탁하여 허우구이핑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유력한 증인이었던 딩춘메이도 살해하며, 딩춘메이를 살해한 왕하이쥔마저 죽이면서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는 과정은 범죄, 수사물로 충분한 재미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으며, 전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입니다. 이처럼 극심한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수사를 이어가는 장양과 주웨이의 모습은 감동을 불러일으키고요.

결국 사건이 영원히 은폐되나 싶었지만, 장양, 주웨이, 천민장, 장차오가 힘을 합쳐 거짓 살인 사건을 만들어 이를 공론화하는 전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장양이 자살한 뒤, 그 시간에 알리바이를 만든 장차오가 지하철에서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주목을 끈 다음, 시체를 드러내는 도입부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단순히 여론을 환기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동 성매매를 했던 고위 정치인 샤리핑의 친자 검사를 비밀리에 진행해, 그가 피해자에게 출산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이야기 절정 부분의 쾌감도 강렬하고요.
샤리핑이 최종 악역이 아니라, 그 위에 더 큰 흑막이 존재해서 사건에 관여했던 인물들은 모두 자살하거나 사고사로 죽고, 장양의 조력자들도 감옥에 가게 되는 결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핵심 축인 허우구이핑 사건을 다시 수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장양과 주웨이, 천민장의 우정과 의리, 정의감은 사나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듭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악에 맞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사파가 지배하는 무림을 정의롭게 되돌리기 위해 나서는 영웅호걸들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단점도 분명합니다. 작가의 전작에서도 느껴졌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듯한 설정이 곳곳에 보입니다. 시한부 인생인 주인공이 자살했지만, 이를 살인 사건으로 꾸며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설정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과 똑같아요. 심지어 자살 방법과 동영상으로 자살했다는 진상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유사하다는건 아쉽습니다. 게다가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집행이 과연 옳은가?라는 주제에 맞는 설정이라서 와 닿는데, 장양이 이런 기묘한 방식으로 여론을 환기할 이유는 솔직히 설득력있게 설명되지는 못합니다. 왜 샤리핑 사진과 사건 진상을 그냥 인터넷에 뿌리지 않았을까요?

아울러 과거 허우구이핑 사건 조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후이랑과 리젠궈의 방해는 너무 뻔해서 뒤로 갈수록 식상합니다. 장양과 주웨이 등이 그들의 덫에 쉽게 걸리는 등의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리젠궈가 어떤 식으로든 훼방놓을게 뻔한데, 계속 리젠궈의 방해에 걸려 좌절하는건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어요.  

인물 설정과 묘사도 허술합니다. 장차오가 갑자기 등장해서 정의감을 불태우는 이유부터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허우구이핑의 연인이었던 리징과 결혼한 게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낄 일인지 의문이에요. 장차오 때문에 허우구이핑이 죽은게 아니니 연인의 자리를 차지한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허우구이핑의 사인이 잘못되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한들, 그 당시에 장차오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장양을 돕기 위해 갑자기 나타나는 전개가 더 어색했습니다.
반대로, 처음에 장양에게 사건에 뛰어들기를 강요했던 연인 우아이커와의 이별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됩니다. 그렇게 헤어질 거였다면 우아이커의 비중을 초반에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리즈의 주인공격인 수학 천재 옌량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는 큽니다. 옌량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민낯을 드러낸 강렬함만큼은 놀랍고, 한번 잡으면 손 떼기 힘든 재미를 갖추고 있는건 분명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사회파 추리 소설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5/05/23

여왕국의 성 1,2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2.5점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이토 대학 추리소설 연구회 EMC 회원인 모치즈키, 오다, 아리스가와, 마리아 네 명은 렌트카로 가미쿠라로 향했다. 가미쿠라에 위치한, 외계인을 믿는다는 신흥종교집단 '인류협회' 본거지로 떠났던 에가미 선배의 연락이 끊긴 탓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에가미 선배를 만나는데 성공했지만, 그들은 인류협회의 '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말았다. 하지만 인류협회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감금하였고, 에가미 선배와 일행은 성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사건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시마다 소지의 계보를 잇는 일본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이지요. 국내에도 많은 작품들이 소개되었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유명 시리즈 중 하나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또 다른 시리즈는 명탐정 히무라 히데오가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 장편입니다. 신흥 종교집단의 본거지인 ‘성’을 배경으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는데, 1권과 2권을 합쳐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자랑합니다. 완독에 1주일 정도 걸렸네요.

명성답게 추리적으로는 상당히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2008년 '주간분슌 선정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위", '제 8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했다는게 이해가 될 정도로요.
우선, 공정한 단서 제공이 단연 돋보입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제공해 줍니다. 마지막 추리쇼 직전에는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고요. 전통적인 본격 추리물 애호가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구성이지요.

사건과 트릭, 추리도 나쁘지 않습니다. 11년 전 총기 실종 사건 트릭은 단순하면서도 현실적인 조건을 이용하고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어요. 밀실인 현장에서 자살한 피해자의 총기를 가져간 범인은 어린아이로, 아이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쓰러져있던 사체 뒤에 숨어 창 밖에서 바라보던 쓰바키 등 목격자 시야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문 뒤에 숨었고요. 그리고 쓰바키가 경찰이 올 때 까지 정문 앞을 지킬 때 총을 가지고 뒷문으로 탈출했던 겁니다. 복잡한 장치를 활용한 트릭이 아니라, 상황과 조건을 정교하게 활용한 현실적인 트릭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고, 어린 아이라는 범인 특징과도 잘 어울렸습니다.

현재 시점의 연쇄 살인 사건은 전형적인 후더닛 추리인데, 아래 의문이 핵심입니다. 

  • 첫째, 총기는 어떻게 삼엄한 보안이 이뤄진 인류협회 본부로 반입되었는가? 
  • 둘째, 어떻게 총기가 11년전 사라졌던 그 총일 수가 있었는가? 

이에 대한 추리는 아래와 같고요.

  • 첫째, 총기는 성스러운 동굴 안에 숨겨져 있었는데, 인류협회 쪽이 아닌 마을에서 들어오는 입구는 좁아서 어린 아이만 들어올 수 있었다. 즉, 총기를 숨긴건 어린 아이였다. 
  • 둘째, 총기가 11년 전 사건의 흉기였던 권총이기 때문에, 범인은 11년 전 사건에서 총기를 훔쳤던 사람이다. 

이렇게 범인은 11년 전 마을에 살고 있던 어린 아이라는게 밝혀집니다. 현재 인류 협회 소속 인원 중에서 이에 해당되면서, 사건 당시에 알라바이가 없는건 아오타밖에 없고요. 즉 아오타가 범인입니다!

이런 추리적 요소와 더불어 사건들이 벌어지는 배경인 인류협회의 설정도 흥미롭습니다.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다는 다소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내부의 교리, 협회의 구성, 생활 방식과 본거지 '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부여합니다. 교주 노사키 기미코가 유괴당해서 에가미 일행이 감금될 수 밖에 없었다는 진상 역시 그럴듯했어요.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와 팀워크도 돋보입니다. EMC 멤버인 모치츠키, 오다, 아리스, 마리아 모두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중반부에 '성'에서 탈출하려는 모험도 풋풋하고 귀엽게 그려지고 있는 덕분입니다. "아르키메데스는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보다는 이 작품 쪽이 더 "청춘 미스터리"의 범주에 들어맞는게 아닌가 싶네요. 버블 경제 몰락 직전의 분위기에 대한 언급, 그리고 멤버들을 통해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에 대한 인용도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카프카의 "성"을 이렇게 읽어보고 싶게 만들게끔 소개한 글은 정말이지 처음 봅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전체 분량이 과합니다. 거의 900페이지 분량 중 인류협회와 '성'에 대한 설명에 많은 분량이 할애되는데 이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었습니다. 특히 '성'의 경우, 내부 구조도까지 곁들인 상세한 묘사로 과다한 정보를 주지만 이는 실제 사건과 거의 관계가 없어서 허무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이야기 중간에 마리아의 시점으로 전환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점 변경이 새로운 정보나 심리적 깊이를 제공하기보다는 서사 전개의 리듬을 끊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지루함도 가중시키고요.

그리고 사건 해결의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장면에서 지나치게 절묘한 우연이 개입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번역자도 후기를 통해 언급한 문제인데, 범인이 5시 경에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이를 살해한 뒤 곧바로 동굴에 들어가 총기를 꺼냈다면, 지즈루와 일정 시간 동굴 내부에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인기척이나 이상한 낌새를 느꼈어야 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범인이 마주친 지즈루마저 살해하여 사체를 숨겼다가 발각된 후, 지즈루가 동굴 안에 있던 시간을 여러가지 증거(깨진 시계라던가, 할아버지 증언이라던가...)로 알아내어 범인을 특정한다는 이야기가 추리적으로는 더 나았을 겁니다. 잔혹하긴 하지만요.

아울러 에가미의 추리도 돌이켜 생각해보면 문제가 많습니다. '어린아이만 동굴을 통과할 수 있다'는 전제 조건이 특히 그러합니다. 입구 측에서 총을 종이와 비닐 등으로 공 모양으로 감싸 던진 뒤 출구 쪽('성'의 동굴)에서 회수하거나, 개에 묶어서 들여보내는 등 여러가지 대안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 권총을 흉기로 써서 꼬리를 밟힐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인류협회에 대한 원한으로 예언을 망치기 위해 살인을 저지렀다는 동기부터 비현실적이지만, 정말로 이게 목적이었다면 둔기나 칼을 사용해도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아오타가 사체 강직을 이용해 총을 쏘게 만든 이상한 알리바이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앞서의 동기가 진짜라면, 에가미의 말대로 자기가 범행을 저질렀다며 세상에 진상을 드러내는게 더 좋은 방법입니다. 알리바이 트릭을 써 가며 은폐를 기도할 이유는 없어요. 심지어 제대로 동작할지도 모르는 애매한 방식의 트릭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정통 본격 추리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면서도, 현대적인 감성과 설정을 조화롭게 결합한 신본격 추리 소설이 뭔지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일단 재미는 있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본격 추리물 애호가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겁니다.

2024/06/05

Q.E.D. iff 증명종료 23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5점

Q.E.D Iff 증명종료 23 - 8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전통의 시리즈. 오랫만의 수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동화"
가나는 캐스터네츠를 돌려주기 위해 플라멩코 댄서 지망생 타케다 사키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한달 쯤 전 사라졌다. 애인 유키토 때문에 엮인 뒤 친해진 부잣집 딸 마츠자와 리카의 별장 파티 직후였다. 리카는 사키에게 매료되어 절친이 되었지만, 강하고 폭력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 인물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은폐를 한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받던 리카는 가나에게, 자신에게 동화된 사키를 위해 거금을 주어 그녀가 스페인으로 유학가도록 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토마는 사키 방에 있던 수상한 인형, 사키가 리카를 협박했던 증거가 담겨있는 스마트폰을 회수하지 않은 것, 유키토에게 더 이상 사키와 리카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협박한 것, 사키가 스페인으로 간 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마지막으로 캐스터네츠를 누군가 훔쳐간 것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 낸다.


리카가 아니라 사키가 범행을 저질렀고, 범행 이후 리카로 살아가게 되었다는건 누구나 예측 가능한 진상입니다. 앞서 둘이 닮았다는 묘사도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이를 위한 단서와 설명은 부족했습니다. 유키토만이 둘 모두를 사귀었어서 둘을 구분할 수 있을터라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것 부터가 비현실적이에요. 친한 사람이 그 외에 없었을까요? 리카에게는 부하는 물론 가족도 있었습니다. 모아서 파티를 열 정도로 친구도 많았고요. 이들 눈을 모두 속이는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사키 자신이 스페인으로 떠난 것으로 소문내고 꾸몄다면 모든게 깔끔했습니다. 구태여 자신이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여지 - 침실에 있던 인형과 현장에 남겨진 스마트폰 - 를 남겨둘 필요는 없었어요. 수사가 시작된다 하더라도 단순 실종과 살인 사건은 그 수준이 다르잖아요?
가나가 캐스터네츠를 보여주었을 때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플라멩코 방식으로 캐스터네츠를 사용한게 중요한 단서라는 것 역시 설득력이 약해요. 리카는 사키의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으니, 캐스터네츠 사용법은 당연히 알 수 있었을테니까요.

그래도 캐스터네츠에 지문이 남겨졌기 때문에 그걸 훔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착안은 좋았고, 마지막에 현장에서 발견한 사키의 핸드폰을 리카(로 변장한 사키)가 지문인식 해제하도록 만들어 리카가 사키라는걸 밝혀내는 장면은 아주 괜찮았습니다. 스마트폰 시대에 잘 어울리는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덕분에 별점은 3점입니다. 앞서의 전개만 좀 더 타당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별점 4점 이상도 충분했을텐데 아쉽네요.

"형식적 진실"
우마오이 토비나가의 사후, 유산이 네 형제와 집사에게 고르게 분배되었다. 그러나 막내는 불륜으로 입적한 탓에, 형과 누나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유산 분배 현장에서까지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현장을 목격한 토마와 가나는 막내 쇼료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장남, 차남은 피해자가 먼저 화장실에서 폭행을 저질러서 방어한 것이라 주장했다. 가나가 반격했지만, 형제가 다시 입을 맞추고, 증인이 될 수 있는 집사 코바도 사건 이후 행방불명 상태라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합의금을 지불할 수 밖에 없었다.

민사의 '형식적 진실주의'가 무엇인지를 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주는 작품. '형식적 진실주의'는 쌍방 서로 다툼이 없이 합의한 부분은 진실로 다루는 민사재판의 원칙입니다. 반면 형사 사건은 합의에 그치는게 아니라 다각적으로 사실을 분석, 검증하는 '실체적 진실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작 중 쇼료는 피해자임에도 형들의 위세에 눌려 합의하고 말았습니다. 아를 통해 형들이 먼저 화장실에 들어갔다는게 '형식적 진실주의"에 따라 법률적으로 입증되었고요. 하지만 이는 쇼료의 큰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형들과 집사 코바에 의해 살해당했다는걸 알아챈 뒤, 복수에 나섰던 겁니다. 먼저 화장실에서 코바를 살해하고, 형들에게 자연스럽게 폭행 당하도록 설계했지요. 이후 코바의 시체가 발견되고, 형사 사건 수사를 통해 화장실이 범행 현장이라는게 밝혀집니다. 그리고 앞서의 민사 소송 합의 내용을 통해, 쇼료는 알리바이가 생겨나고 형제가 범인이 되어 버립니다. 화장실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범인일 수 밖에 없거든요. 아무리 민사지만, 다른 증거가 없으니 경찰도 이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토마도 형제가 이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완벽한 계획입니다!
쇼료의 어머니를 살해한 트릭도 '폭포'라는 현장을 잘 이용하고 있고요.

형제가 화장실에서 쇼료에게 반드시 시비를 걸었으리라는 보장이 부족하다는건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만, 학습 만화로서도 우수한 Q.E.D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도 추리적으로도 빼어난 오랫만에 보는 수작이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24/06/02

절벽의 밤 - 미치오 슈스케 / 김은모 : 별점 2점

절벽의 밤 - 4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청미래

미치오 슈스케의 연작 소설집. 마지막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각 단편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된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단편의 사건과 등장인물이 연결고리를 가지며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구조이지요. 마지막 단편은 총 정리하는 결론에 가깝습니다.
단편별로 여러가지 트릭이 사용되며 추리도 많이 펼쳐집니다. 의외의 반전도 있고요.

하지만 불필요한 아이디어가 너무 많습니다. 전개가 억지스러울 뿐 아니라, 자연스럽게 전개에 포함되었어야 할 내용을 마지막 사진으로 퉁친건 '실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편의에 따른 '반칙'에 가까왔습니다. 그나마 사진이 효과적으로 사용된건 마지막 단편 뿐이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유미나게 절벽을 보아서는 안 된다"
구니오는 자살 명소 유미나게 절벽 옆 터널에서 사고를 당했다. 불법 유턴을 하던 차 탓이었다. 사고를 유발한 차 운전자 나오는 구니오를 구해주기는 커녕 현금을 빼앗은 뒤 살해했다.
구니오의 아내 유미코의 옛 연인인 형사 구마지마는 전력으로 사건 수사에 나섰지만, 나오가 살해당했고 동승자였던 히로도 실종되고 말았다. 구마지마는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냈지만, 유미코를 또다른 동승자 마사가 노린다는걸 알고 황급히 유미코의 맨션으로 항했다....


구니오가 사고 당시 죽지 않고 실명했으며, 죽은건 조수석에 있던 네 살배기 아들 나오야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범인 일당이 사건 당시 현금을 훔치려고 지갑을 확인했기 때문에 구니오의 집을 알아챌 수 있었다는 추리, 그리고 구니오가 집에 찾아온 히로를 손쉽게 살해한 방법 - 궁도부였던 아내 유미코의 화살을 이용 - 과 범행을 은폐하는 과정도 깔끔하게 진행됩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사이비 종교 '십왕환명회'도 작품 내에서 단순히 들러리가 아닌 제 역할 - 히로 사건 은폐를 위한 즉흥적인 거짓말, 마지막의 사고 등 - 을 충실히 해 주고 있고요.

하지만 구니오가 살아있다는걸 숨기는 방식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리 잘 만들어진 서술 트릭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구니오가 복수를 위해 나오의 차 깜빡이 커버와 동일한 걸 구해 사건 현장 근처에 놓아두고 잠복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입니다. 어두운 터널에서, 최소 몇십Km로 달리는 차 안에서 밖의 깜빡이 커버를 알아챈다? 대단히 큰 덩어리도 아니고 부서진 조각인데? 이건 불가능합니다. 설령 나오가 알아채고 차를 세운 뒤 커버를 회수했다 한들, 때마침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는 등 범행에 딱 맞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이 정도 억지가 필요하다면 실명한 구니오가 나오를 명확하게 인지하여 살해할 수 있었던 것 정도는 별 문제도 아니겠지요. 하늘이 나오보고 살해당하라고 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이런 설득력없는 내용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중국에서 건너온 초등학생 커는 학교에서의 따돌림, 부모님의 방치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환영을 볼 정도였다. 환영 퇴치를 위해 문방구를 찾은 커는 기묘한걸 목격했다. 젊은 남자의 묘한 모습, 안쪽 방 고타쓰 앞에 쓰러지듯 놓여진 발, 뒤섞인 문구류, 얼핏 보인 바닥 얼룩.... 커는 남자가 주인 할머니를 살해했다고 추리했다. 하지만 다시 찾아간 문방구의 주인 할머니는 멀쩡했고, 추리를 털어놓은 친구 야마우치도 실망한 듯 했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서 문방구 할머니의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이 손이 닿는 곳에 어른 문구가, 아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어린이 문구가 놓여진 상황에서 출발하는 커의 추리는 깔끔합니다. 뉴스를 통해 진짜 피해자가 밝혀지고 범인인 조카와 할머니가 커를 납치하는 과정도 흥미롭고요.
하지만 야마우치가 자동차 안에 숨어 있다가 커를 구해준다는 결말에 대한 설명은 부족합니다. 야마우치가 왜 이렇게까지 해서 -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 커를 구해주는지도 설명이 없는건 마찬가지고요. 차 안에 숨었다는 것도 마지막에 삽입된 사진으로 살짝 알려주기는 하는데, 본 편에 녹여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반칙으로 보일 뿐이에요. 커가 보아왔던 환영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도 설명되지 않는데, 커가 환영을 본다는 설정보다는 커와 야마우치와의 관계를 더 상세하게 그려내는게 나았을 겁니다. 커 주변을 야마우치가 항상 멤돌았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서는 안 된다"
십왕환명회의 간부 미야시타 시호가 자택에서 목을 멘 사체로 발견되었다. 신참 형사 미즈모토는 또다른 간부 모리야 다쿠미가 그녀를 살해했고, 이를 알아챈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마저 죽였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시호를 죽이고 자살로 위장했는지를 알아내지 못해 고민했다. 그러나 미즈모토는 파트너이자 선배 다케나시와 술을 먹다가 트릭을 간파해내는데...

밀실 살인 사건을 그린 작품. 미야시타 시호의 방은 제대로 잠겨진 밀실이 아니라 자석으로 '스마트록'을 붙여 임시로 만들어진 밀실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부동산 회사 사장 앞에서 잠겼다는걸 보여준 뒤, 열쇠로 문을 열 때 록을 해제하고, 들어가면서 회수했던 것이지요. 방법 자체는 현실적이에요. 문제는 눈에 뜨이지 않고 록을 회수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실제로 현장에 함께 있던 부동산 회사 사장 나카가와 도루에게 곧바로 들통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야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또 모리야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설명되지 않아서 좋은 후더닛, 와이더닛 물이라기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나카가와 도루의 수첩을 조작해서 사건을 미궁에 빠트렸고, 진상을 알아챈 미즈모토마저 살해했다는 결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였다는 단서를 제공해 주기는 합니다만.... 너무 막 나가는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수첩 조작도 마지막에 사진으로 설명해줄 뿐, 앞선 본문에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이해하기 어려웠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거리의 평화를 믿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고 자살하려던 구니오는 옛 제자를 만난 뒤 다시 삶의 의지를 찾는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마지막 작품. 짤막한 에필로그에 가까우며, 이 작품만 단독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앞서 단편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에필로그. 결말답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경찰 내 협조자가 누구인지? 사고를 당한건 누구인지? 히로의 사체는 어떻게 처리했는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의 진상은?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사건을 조작한건 누구인지? 미즈모토를 누가 살해했는지? 등 모든 떡밥을 회수하고 있습니다. 다케나시가 십왕환명회 신도라서 첫 사건에서 구마지마의 사고사를 거짓 증언했고, 세 번째 작품 사건에서의 은폐와 미즈모토 살해를 저질렀다는 고백을 선보이는게 핵심이지요.
에필로그라 추리적으로는 별게 없지만, 시력을 상실해서 아내 유미코에게 사건 진상 고백문을 쓰게 했지만, 알고보니 백지였다는걸 마지막 사진 한 장으로 밝히는 반전은 강렬했어요.
 
그러나 다케나시, 그리고 세 번째 사건의 진범 모리야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고 마무리되는건 문제에요. 깔끔하게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이 한 편 만으로는 온전한 작품이 아니라서 별점을 주기도 어렵네요. 구태여 준다면 2.5점? 반전만 좋았습니다.

2023/12/27

데시벨 (2022) - 황인호 : 별점 2점

림팩 훈련 후 귀환하던 잠수함 한라함이 좌초해서 승조원 절반을 잃은 1년 후, 생환했던 한라함 부함장 강도영에게 의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알고보니 폭탄 테러를 알리는 전화로, 테러범은 강도영에게 다음 폭탄 테러 장소인 축구 경기장, 워터 파크 등 온갖 장소로 강도영을 유도했다. 안보지원사령부에서는 강도영을 범인으로 의심했지만 범인으로 드러난건 한라함의 무장장이었던 전태성이었다. 우리 군의 실수로 한라함이 좌초했고, 구조 때까지 산소를 유지하기 위해 승조원 절반을 투표로 죽음으로 몰고갔던걸 은폐했던 군과 강도영에 대한 복수가 동기였다.
강도영의 아내와 딸마저 인질로 잡고 강도영과 격투를 벌이던 전태성은 안보사령부 부장 차영한에게 살해당했고, 강도영은 아내와 딸을 구한 뒤 모든 진실을 밝혔다.


넷플릭스로 감상한 영화. 가족과 함께 볼만한 영화를 찾다가 보게 되었네요.
테러범이 폭탄이 설치된 장소를 알려줘가며 주인공과 대결하는 설정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다이하드 3"가 떠오르네요), 깔끔, 명쾌하고 속도감있는 전개에 적당한 긴장감도 가져다 주어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감초 역할을 하는 기자 오대오의 개그씬도 평은 별로 좋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축구 시합을 지연시키기 위해 일반 관객이 할 수 있는 행동이 뭐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차피 한 개 뿐인 탓에 별로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하지만 결말 부분은 조금 지루했습니다. 한라함 승조원들이 투표로 생사를 가르는 부분 분량이 다소 길고, 신파조로 흘러간 탓이 큽니다. 마지막에 생존 승조원들이 정복을 입고 찾아와 경례하는건 사족 중의 사족이었고요.
개연성도 부족합니다. 일단 범인이 '소리를 활용하여 기동시키는 폭탄'을 만든 이유에 대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온갖 소음과 교차 편집하여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적인 역할 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그냥 시한 폭탄과 차이가 없으니까요. 뒤로 가면 일반 시한 폭탄이 사용되는걸 보면, 감독(각본도 맡으셨더군요) 스스로도 영화를 위한 단순 소재에 불과했다는걸 자인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리'를 활용한 폭탄을 만든 이유는, 좌초 사건의 원인이 잠수함 내 소음이 탐지되어 타격되었기 때문에 생긴 강박증 때문이었다고 설명하는게 어땠을까 싶네요. 소리를 차단하며, 소음의 원인을 없애려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더라면 설득력이 조금 있지 않았을까요? 갑자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의 "썰물에 죽다" (아래)가 떠오릅니다. 


혼자서 이런 폭탄을 자작한 뒤 여러 군데에 설치해서 원하는대로 폭파시켰다는 것도 - 심지어 국방장관 등 VIP가 탑승한 자동차까지 - 현실적이지 못하며, 테러의 목적도 잘 모르겠습니다. 강도영을 괴롭히는게 목적인지, 강도영 가족을 죽이는게 목적인지, 진실을 밝히는게 목적인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요. 강도영에게 지옥을 선사하려면 가족을 납치한 뒤 눈 앞에서 폭사시키는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텐데 말이지요. 승조원 중에서 용의자는 전태성밖에 없는데 강도영이 범인을 바로 알아채지 못한 이유, 일면식도 없었던 오대오가 강도영의 딸 설영이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도 설명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킬링 타임용 영화였습니다. 머리를 비우고 볼 만 합니다.

2023/09/17

전래 미스터리 - 홍정기 : 별점 1점

전래 미스터리 - 2점
홍정기 지음/몽실북스

DC인사이드의 추리소설 갤러리에서 괜찮은 한국 추리 소설이라고 누군가 소개하길래 읽어보게 된 작품.

결론부터 말하면, 대실망이었습니다. 완성도가 지나치게 낮은 탓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수준 이하에요. 전래 동화가 바탕이 된 이야기에서 '변태 스토커', '알리바이', '스위치' 라는 말이 나온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고증은 둘째치고서라도 문체, 묘사라도 고전처럼 가져갔어야 했습니다. 잔인하고 자극적인 묘사가 쓸데없이 많은 것도 불쾌했으며, 추리적으로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어요. 
고전을 모티브로 잔혹함을 버무렸다는 점에서 한 때 유행했던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 시리즈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조선 후기를 무대의 괴담물인 <<삼개주막 기담회>>와 비교해도 그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고요. <<삼개주막 기담회>>는 이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에 비하면 노벨문학상 감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아마츄어가 어딘가 커뮤니티에 올렸던 반 장난스러운 글이 출판된 걸로 보여지는데, 결과물 수준에 대해서는 출판 담당자의 책임도 커 보입니다. 최소한 어느정도 완성된 글로는 보이게끔 방향을 알려줬어야 했어요. 뭐 지금 말해봤자 별 의미는 없겠지만요. 앞으로 이 작가, 이 출판사 책을 두 번 다시 읽어볼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콩쥐 살인사건>>
콩쥐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팥쥐가 원님과 결혼하기 위해 발목을 스스로 자른다던가, 원님의 칼에 언년이 머리가 토막난다단가, 마지막에 팥쥐 목이 배달(?)되어 오는 등 쓸데없이 잔인한 묘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별로입니다. 급작스럽게 언년이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트릭도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핵심 트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팥쥐가 도깨비 감투를 쓰고 방을 몰래 빠져나갔다는 트릭, 또 하나는 쥐가 언년이의 손톱을 먹은 뒤 언년이로 변신했다는 트릭이지요. 그러나 도깨비 감투 트릭은 창문이 작아서 어차피 성립할 수 없었고, 쥐가 언년이를 대신한 알리바이 트릭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쥐를 변신시킨게 아니라, 마침 쥐가 변신한걸 보고 즉흥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말이 안됩니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니까요.
단서 제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콩쥐가 죽은 어머니로부터 기이한 보물을 물려받았고, 그 덕분에 계모가 시킨 말도 안되는 임무를 완수했다는 정도만 앞에서 설명될 뿐입니다. 이런걸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는건 말도 안됩니다.

고전 설화 속 설정을 트릭으로 써먹는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과물은 아쉽기만 합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나무꾼의 대위기>>
사슴과 사냥꾼이 짜고 선녀 날개옷을 훔치도록 유도했다는 설정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극적인 반전도 생기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도저히 점수를 줄 부분이 없습니다.
 
일단 선녀와 나무꾼에서 나무꾼이 관음증 환자일 수 있다는 설정은 워낙에 흔해서 새로울게 없었습니다. 금도끼 은도끼 신령이 갑자기 나오고, 탐정역으로 토끼가 나오는 등의 뜬금없는 전개는 황당했고요. 탐정역인 토끼는 이 모든게 나무꾼을 범인으로 몰기 위한 산신령까지 포함된 음모의 결과라는데, 그 때문에 산신령이 범인 선녀, 나무꾼, 사슴을 참살하는 결말도 영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옥황상제 앞에서의 공식 재판도 아니었으니, 그냥 나무꾼을 죽이고 거짓말로 고해 바치면 되는게 아니었을까요? 이런 연극을 꾸밀 이유가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굶주린 사냥꾼이 토끼를 잡아먹는다는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마찬가지입니다. 배가 고팠다면 애초에 사슴을 죽여서 잡아먹었어야 하잖아요?

추리적으로도 엉망입니다. 범인 선녀가 물 속에서 죽은 선녀 다리를 끌고 움직이는 척 해서 옮긴 뒤, 온천의 뜨거운 열로 시체가 사후 강직이 풀리는걸 이용하여 스스로 주저 앉는것처럼 꾸몄다는 트릭인데, 만화에서도 써먹기 힘들겁니다. 뜨거운 물 속에 숨느라 갈대를 입에 물었다는 디테일도 유치하기 짝이 없고요. 애초에 사슴이 말하고, 선녀가 날아다니는 세계관에서 이런 어처구니 없는 트릭을 쓴다는게 설득력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해와 달>>
떡장수 아주머니가 식인범에게 사로잡혀 산채로 먹히는 장면은 잘 그려냈습니다. 식인범의 설정도 꽤 탄탄하고 무서웠고요. 마츠모토 세이초의 <<전골을 먹는 여자>>를 떠오르게 만드는데, 그만큼 설득력 느껴지는 좋은 이야기였어요. 식인범이 어미의 머릿가죽을 뒤집어쓰고  찾아와 딸을 속이려 하는 장면, 그 뒤 정체가 탄로난 식인범이 딸과 사투를 벌이는 부분도 괜찮았습니다. 리처드 매드슨의 크리처물인 <<사냥감>>이 떠오르는 박진감넘치는 묘사와 전개가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러나 해와 달이 쌍둥이고, 해는 타고난 살인마였다는 진상은 영 아니었습니다. 시간대별로 풀어가는 전개도 불필요했고요. 착한 남매가 기지를 발휘하여 식인범을 없애는 식으로 - 썩은 동아줄을 활용한다면 더 좋고 -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나마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연쇄 도살마>>
보름이 될 때마다 집의 가축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고, 큰 아들 일남은 막내 미호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먹었다고 하는데...

여우가 가축의 생간을 뽑아 먹는다는 이야기를 추리적으로 풀어낸 이야기. 
알고보니 일남이 진범이었다는 반전은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문제 투성이입니다. 우선, 가축들을 차례로 죽이고, 나중에 부모 형제까지 죽였다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한 번에 다 죽이면 되잖아요? 뭐하러 땅을 파고 몸을 숨겨가면서까지 범행을 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미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울 이유도 없어요.
미호의 짓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미호의 신발을 신고 발자욱을 남긴건 괜찮았지만, 미호 시체를 소의 항문을 통해 쑤셔 넣어 은폐했다는건 어이를 상실케 합니다. 
추리물 흉내를 조금 내기는 했지만 설득력 떨어지는 전개로 일관하는 졸작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스위치>>
나는 백정의 아들로 파란눈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눈을 누군가 나뭇조각을 댓가로 가져갔다. 나는 나뭇조각이 타인의 신체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 능력이 마을 주민들을 기괴한 모습으로 죽게 만든 연쇄 살인극의 진상이었다.

스위치라는 표현을 천연덕스럽게 쓴다는 것부터 황당했던 이야기. '혹부리 영감'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 신체 전환(?) 설정은 그래도 볼 만 했지만, 나이가 들어서 죽기 전에 뇌를 바꿨는데, 갓난 아이가 되어서 실패했다는 황당한 결말로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한 10살 정도 되는 아이하고 뇌를 바꿨으면 될 것을 왜 갓난아이랑 바꿨는지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당연한걸 모를리 없을 정도로 능력을 계속 써 왔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초반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의 연쇄 살인극도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나간게 아닌가 싶은 이야기입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2023/04/08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5. 오뚜기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5. 오뚜기

마이코가 사무실에 나타나자 정체된 방의 공기가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마이코는 검은색 정장에 빨간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검은색 옷은 몸매를 날씬해 보이게 했고, 빨간 스카프가 잘 어울렸다. 마이코는 토시오에게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신문을 읽고 있는 후쿠나가에게 말을 걸었다.

"도대체 운석이 차에 부딪히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 사고는 이미 여러 방면에서 보도되고 있었다. 사고 조사에는 많은 과학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그 결과, 토모히로의 차를 불태운 것은 틀림없이 운석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현장에서는 무게 13kg, 지름 20cm 정도의 석철 운석이 수습됐다.

"운석이란 유성이 타다 남은 찌꺼기잖아요?"

"유성이 타는 것은 아닙니다."

후쿠나가는 신문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말했다.

"태양계에는 무수히 많은 고체 물질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구에 닿으면 지구의 인력으로 끌어당겨지죠. 물질의 기세가 거세져 초속 수십 킬로미터의 속도로 공기 중으로 돌진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수천 도의 마찰열이 가해져 갑자기 기체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이를 증발이라고 합니다. 이 고온의 가스가 빛을 내는 겁니다. 불이 타오르는 것과는 다르죠."

"시골에 가면 맑은 밤하늘에 유성을 자주 볼 수 있잖아요."

"우다이 씨, 유성은 하루에 몇 개나 떨어진다고 생각하세요?"

"한 시간에 두세 개 정도일까요?"

"육안으로 볼 수 있는건 그 정도겠죠. 하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유성을 포함하면 하루에 지구로 날아오는 별은 대략 수십억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수십억 개라고요?"

토시오도 그 숫자에 조금 놀랐다.

"네. 그런 유성은 그냥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먼지처럼 지상에 떨어지죠. 그래서 지구의 질량은 매년 4백만 톤씩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가 탄생한 이래로 떨어진 유성 먼지의 양은 지표면 3미터를 덮는다고 계산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운석이 되어 지상에 떨어지는 별도 꽤 많다는 얘기군요."

"그런데 또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유성이 되는 물질은 대부분 쌀알 정도, 설탕 한 알 정도 큰 것들만 떨어지거든요. 이건 아까 말했듯이 공기 중에 들어가면 금방 증발해버립니다. 드물게는 큰 물질이 운석이 되어 지상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 수는 극히 적습니다. 한 해에 오백 개 정도라고 하네요."

"그래도 오백 개나?"

"지구의 3분의 2가 바다니까, 지상에 떨어지는 건 백 오십 개 정도일겁니다. 확인된 숫자로 따지면 그보다 더 적고요."

"그중에는 꽤 큰 것도 있겠군요."

"그렇죠. 가장 큰 운석은 서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바 운석. 69톤이나 된다고 하니 대단하지요. 일본에서는 1885년 오쓰(大津)시에서 발견된 다카미(田上)운석이  가장 컸어요. 최근에는 1975년 오후 7시에 보름달의 몇 배나 되는 불덩어리가 세토나이카이로 떨어지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지요. 발견되면 1톤급 운석으로, 다카미시마 앞바다에 떨어져서 다카미시마 오키(高見島沖)운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상태로 현재 조사 중이에요."

"그런 것이 도시에 떨어지면 큰 재앙이 되겠군요"

"석유 공업 단지나 신칸센 열차에 떨어진다면 큰 사고가 나겠죠. 하지만 다행히 지금까지는 그런 대형사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닙니다. 예전에 이탈리아의 한 신부가 운석의 직격탄을 맞고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954년 미국 앨라배마주에 떨어진 운석은 사람의 집 지붕을 관통해 그 집에 있던 여성이 부상을 입었고요. 기후에 떨어진 가사마쓰 운석도 사람의 집 지붕을 뚫고 들어갔었어요. 이번 사고도 그렇고, 어쨌든 정말 재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운석에 맞은 사람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한 걸까요?"

후쿠나가는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사고를 당한 사람의 회사, 해바라기 공예는 어떤 회사일까요?"

마이코가 물었다. 후쿠나가는 조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장난감 제조업이요. 저는 예전에 장난감 업계 신문사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장난감 업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어요."

"후쿠나가 씨는 어떤 업계든 잘 아는군요."

마이코가 칭찬한다.

"글쎄,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해바라기 공예는 그렇게 큰 회사는 아니지만 역사는 꽤 오래됐어요. 뭐, 전통 있는 노포 부류죠. 마와리 가문이 요코하마로 이주해 와서 농사를 짓는 한편 부부가 작은 인형 제작을 시작한 것이 가에이 말기였는데, 마와리 사쿠조(馬割作蔵)라는 남자였습니다. 아내는 요코하마 출신이지만, 사쿠조는 어디 출신인지 알 수 없어요. 마와리 가문에서 출생을 철저히 숨긴 느낌입니다. 나는 업계 인명록을 편집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는데, 해바라기 공예를 창립한 사람은 사쿠조의 아들인 도키치(東吉)였습니다. 나중에 그는 호도(蓬堂)라는 이름을 쓰게 되지요. 하지만 그 전에 아버지 사쿠조가 츠루슈도(鶴寿堂)라는 작은 장난감 가게를 운영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해바라기 공예에서 선대인 츠루슈도는 소개하고 있지 않나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잘 모르는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사쿠조 자신과 그의 아들 호도는 사쿠조를 은폐하려 했던 것 같지만요. 내 생각에 사쿠조는 어느 번(藩)의 하급 무사로, 어떤 잘못으로 번에서 쫓겨나서 아내의 생가로 이주한 것 같아요. 그 원인이 뭔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을테고요. 그래서 숨긴 것이겠죠? 사쿠조는 아내의 땅으로 오자마자 아내의 생가 근처에서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무사가 장난감을?"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무사와 장난감의 인연은 생각보다 깊어요. 센다이의 향토 장난감에 츠츠미 인형이라는 것이 있어요. 알고 있나요?"

"아니요."

"도호쿠의 대표적인 도자기입니다. 동북 지방의 풍토를 반영하는 애잔한 아름다움으로 인형 애호가들이 애지중지하고 있지요. 이 인형의 기원은 발꾼의 부업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다테라는 땅은 리쿠우(陸羽) 가도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지요. 다테 가문에서는 이곳에 하급무사들의 집을 배치했는데, 봉록이 적었던 탓에 부업을 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도공들과 함께 만든 것이 츠츠미 인형이라고 하고요. 이런 사례는 이 밖에도 있었어요. 메이지 유신을 맞이하여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면서 더 많은 궁핍한 무사들이 생겨났고요. 메이지 초년, 이미 무사들이 가진 물건을 팔기 시작했죠.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판다고 하면 뭘 내놓겠습니까?"

"사치품이겠죠."

"그렇죠, 무사의 아내의 혼수품, 값비싼 히나(ひな)인형 등이 거리의 대로변에 진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사치품이라도 있으면 다행이었습니다. 봉록이 적었던 하급무사들은 팔아먹을 물건도 없었으니까요. 결국 스스로의 손으로 장난감을 만들게 된거지요. 나고야에는 나고야 토인형이라는 향토 장난감이 있어요."

"그것도 무사들이 만들기 시작한 건가요?"

"네. 오와리 도쿠가와번의 무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교토의 후시미 인형 기술을 배웠다는군요. 히나인형과 연극용 인형, 장식용 말과 토종 방울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어요. 메이지 말기에는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최근에는 만드는 사람이 줄어들었다고 하네요. 관동지방의 인형으로는 사이타마현 이와쓰키(岩槻)의 이와쓰키가 유명하고요."

"알고 있어요. 히나 인형의 대부분은 이와쓰키에서 생산된 것이지요."

"이와츠키의 인형이 현재처럼 번영하고 있는 것은 메이지 유신 때문이기도 해요. 오쿠라 류지로라는 원래 무사였던 사람이 가문을 버리고 에도에 와서 인형에 손을 대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메이지 유신 때 관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와쓰키에 피신했는데, 이미 이와쓰키에는 인형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이 땅은 닛코 가도의 길목에 있어 닛코 도쇼구(日光東照宮) 건설을 마친 장인들이 이와쓰키에 정착해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하는데, 오쿠라 류지로(大倉留次郎)는 그 곳에서 인형의 옷 입는 기술을 가르쳤고, 오늘날에는 이와쓰키 인형의 공로자로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시대의 변혁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장난감을 만들어내는군요."

"재미있는건 이번 전쟁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와쓰키에 피난을 오게 된 수많은 장인들이 이와츠키 사람들과 함께 군수 공장에 징용되어 일했는데, 이는 이와츠키의 인형계에는 행운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장인들은 본업으로 돌아갔지만, 이와츠키의 인형 기술은 여기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거든요."

"역사라는 것은 반복되는 것이군요."

"낙오된 무사들이 만들게 된 장난감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로 킨스케마리(金助毬, 금방울)가 있네요. 큰 공이 되면 6, 70센티미터나 되죠. 물론 손으로 잡고 노는 것은 아닙니다. 3월 3일 히나의 날 장식용으로 만들어졌어요. 홍백색 비단으로 꿰매고, 모란에 당사자, 마차, 송죽매 등을 금실과 은실로 수놓습니다. 실로 만든 공 중에서도 가장 호화로운 것 중 하나입니다. 이 금방울은 가고시마번 하급 무사 부녀자들의 수공예품이기도 하지요. 절기가 다가오면 그녀들은 보라색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금방울을 팔러 다녔고, 이것이 명물이 되었어요."

"연극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네요."

"그림이 되지요. 어느 날, 부인이 불쑥 상대의 얼굴을 봅니다. 젊은 날의 연인으로 지금은 가게의 주인이 되었구나. 억지로 시집갔지만 남편은 폐번으로 인해 봉록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 길거리로 나가 공을 팔아야만 하는 신세. 세상의 이치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황당한 이 만남 ......"

"무사들이 만들기 시작한 장난감이 아직 남아 있나요?"

마이코가 말문을 막았다. 후쿠나가가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네, 아직 있어요. 야마가타의 이타지시(板獅子)는 쇼나이(庄内)번의 무사들이 만들기 시작했지요. 시코쿠의 다카마쓰하리코는 다카마쓰번의 가신인 카지가와 마사요시가 창시했고요. 마쓰에 번에서는 아네사마, 도야마 번에서는 흙인형......"

"그래서, 마와리 사쿠조는?"

"아, 그렇죠. 가에이 말기, 오노와에 정착한 사쿠조는 농사를 짓는 한편 작은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쿠조는 금세공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가자시(假裝師)의 하청으로 가쿠라스즈(神楽鈴)와 철제 비야봉 등을 만들었어요."

"비야봉이 뭐예요?"

"10센티미터 정도의 철제 장난감이지요. 머리는 고리 모양이고, 두 개의 다리가 나와 있습니다. 고리를 입에 물고 발을 손가락으로 튕기면 비야봉이라는 소리가 납니다. 분세이 연간에 유행해서 아이도 어른도 모두 비야봉을 가지고 놀았어요. 어른들을 위해서는 은으로 만든 고급품도 등장해 한동안 금지된 적도 있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에도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만들어졌어요."

"옛날에는 신기한 장난감이 많았군요"

"네, 그런 장난감은 요코하마의 외국인들의 눈에 들어왔죠. 이국적이고 정교한 일본 장난감은 특히 외국 업체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장난감의 수출은 이렇게 해서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죠. 죽방울, 수중화, 작은 우산 등이 수출 1호였다고 합니다. 사쿠조도 이런 와중에 '츠루슈도'라는 가게를 만들었습니다. 기우카아가, 코보시, 장난감 기츠키, 판카라쿠리 등이 주요 상품이었습니다. 일부는 해바라기 공예에 그대로 옮겨져 지금도 생산되고 있습니다. 츠루슈도의 장난감은 모두 소품이지만, 고급스러운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기츠키는 용수철 스프링을 사용했고, 도금 기술을 장난감에 도입한 것도 츠루슈도가 가장 빨랐던 것 같아요. 해바라기 공예는 지금도 도금 공장을 가지고 있지요."

"기츠키? 지금도 달그락달그락 새라는 장난감이 팔리고 있어요."

"그건 기츠키를 개량한 거지요. 원래는 모래 같은 건 안 쓰고 그냥 스프링으로만 만들었어요. 이 장난감은 지금의 해바라기 공예 사장인 마와리 데츠바가 아이디어를 더해 부활시킨 거라고 하네요."

"마와리 데츠바는 호도의 손자죠?"

"맞아요, 그 전에 사쿠조의 아이, 도키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순서겠지요. 도키치가 해바라기 공예의 창시자이기 때문입니다. 아까 말했듯 도키치는 훗날 호도(蓬堂)라는 호를 쓰게 됩니다. 호도는 일대의 기인이어서 수많은 기행이 남아있습니다. 호도는 장난감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네요.”

"장난감 장사가 장난감을 싫어하면 곤란하잖아요."

"호도는 원래 장난감을 싫어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아버지가 한쪽 팔로 낑낑대며 장난감을 만드는걸 보아왔기에, 그에게 장난감은 고통의 상징이 되어버린거지요. 그런 경험이 있기에 본질적으로 장난감을 싫어하게 된 마음도 이해할 수 있어요."

"본업에 열중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 대신에, 돈 장사에 손을 대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돈 장사?"

"당시 멕시코에서 주조된 은화는 품질이 좋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막부에서는 대항 차원에서 양은과 동질의 안세이일분은(安政一分銀)을 주조했습니다. 이 질이 좋지 않은 은을 '도로은(ドロ銀)'이라고 불렀지요. 도로의 시세는 요코하마에서 형성되었는데, 호도는 이 도로 시세꾼으로서의 재주가 뛰어났답니다. 그래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군요. 호도의 기행 중 하나로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텐포센 (천보전)으로 바꾸어 항아리 속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텐포센이라고 하면 그, 놋쇠로 만든 돈을 말하죠?"

"네, 덴포 6년(1895년)에 처음 주조된 텐포 통보를 말합니다. 가치는 백문으로 당백전이라고도 불렸지만, 실제로는 그 액면 가치는 전혀 없어서 메이지 신통화 체계로는 8리로만 통용되었습니다. 한 푼에 2리 부족하다는 뜻에서 조금 모자란 사람을 텐포센이라고 부르기도 했었죠. 그런 가치없는 텐포센을 실제로 모았을리는 없으니, 저축했다기 보다는 텐포센이라고 불릴 만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던게 와전된게 아닌가 싶어요. 그 중 하나로 호도는 오와노 땅에 우스꽝스러운 집을 지었습니다. 서양식도 아니고 일본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닌, 형용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는 나쁜 취향을 가진 건물로, 현지 사람들은 나사 저택이라고 부르지요."

"나사 저택이라니........"

"호도는 어둠의 영역에서는 네지베에(ねじ兵衛 / 나사 아저씨)라고도 불렸기 때문입니다. 네지베에가 만든 뒤틀린 건축물이니 나사 저택인거지요. 현재도 오노와에 남아있고, 데츠바가 살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장난감 사업이 호도에게 적합했다고도 볼 수도 있어요. 즉, 전후의 훌라후프나 닥종이 인형 등의 광기 어린 유행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장난감 업계는 상당히 투기적인 성격이 강하죠. 호도는 그 투기성을 잘 포착할 수 있었어요. 다이쇼(大正)시대에는 도르래를 이용한 장난감이 기록적인 수출을 기록하기도 했고요. 판매 가격이 1달러로 속칭 '원달러 물건'이라 불리며 수출의 꽃이었던 셈입니다. 유명한 독일 라이오넬의 기관차는 당시 가치로 한 대에 천엔이었다고 하니 일본 장난감이 얼마나 저렴했는지 알 수 있을거에요. 호도는 그 흐름을 잘 올라탔죠.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도로은 시세에 정통했다 한들 나사 저택과 같은 자유분방한 집을 지을 수는 없었을거에요."

"호도에게 자식은 있었나요?"

"쇼이치로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해바라기 공예를 물려받았지만, 호도처럼 될 수는 없었어요. 어쨌든 해바라기 공예는 호도 혼자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호도가 죽으면 쇼이치로가 감당할 수 없었을겁니다. 한편 장난감 업계는 쇼와(昭和)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호황을 누렸고, 양초를 응용한 폼폼마루, 용수철로 걷는 펭귄, 뒤집히는 쥐, 깡충깡충 뛰는 병아리 등 걸작이 속속 등장해 구미의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카니발용으로 활발히 수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해바라기 공예는 한 시대 전의 장난감을 세밀하게 만들어내는 방식을 택했죠. 쇼이치로는 일찌감치 일에서 손을 떼고, 젊은 두 아들이 해바라기 공예를 이어받게 되는데 그게 바로 마와리 데츠바(馬割鉄馬)와 류키치(龍吉) 형제였습니다."

"지금 사장님이신 거군요."

"네, 두 사람은 능력도 있고 일도 잘했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어요. 그중에서도 쇼와 13년, 구리, 황동, 철강을 사용한 내수용 완구 제조가 금지된 것이 큰 타격이었지요. 수출액도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참담한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결국 백깨비도 도자기로 대체되고, 셀로판 풍선은 종이로, 고무공마저도 결국 사라졌으며, 두 사람은 군수 공장에 징용되어 종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장난감은 부흥했을텐데..."

"그렇죠, 하지만 수출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환율 변동과 불량 완구 등의 문제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해바라기 공예의 첫 번째 히트작은 달가닥달가닥 새인데, 데츠바의 아이디어라고 합니다. 그 전후로 동생 류키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류키치의 하나뿐인 외아들이 이번에 기적과 조우한 토모히로죠"

"후쿠나가 씨의 지식에 놀랐어요. 데츠바를 많이 찾아뵈었나 봅니다."

후쿠나가 씨는 겨우 웃었다.

"아니요, 그 할아버지는 고집불통이라서 좀처럼 인터뷰에 응해주지 않아요. 그래서 뭔가 구멍이라도 찾아볼까 해서 연구 좀 했죠."

"구멍이 있었나요?"

"아니요, 완패입니다. 구멍은 커녕 티끌만한 허점 하나 조차 찾기 힘들었습니다."


마이코는 토시오를 우다이 경제연구회의 모회사로 데려갔다. 차로 30여 분 거리에 있는 상가 건물로, 1층은 중국 음식점이었다. 건물의 크기는 니시키 빌딩과 거의 비슷한 크기인데, 다이토 흥신소는 4층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네, 다섯 명의 남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이코는 책상을 돌며 한 명 한 명에게 토시오를 소개했다. 모두 50~60대였다. 마이코는 마지막으로 층 안쪽에 앉아 있는 백발의 남자 앞에 토시오를 데리고 갔다. 다이토 흥신소의 요코누마 소장이었다.

요코누마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지?"

토시오는 그저께까지의 일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복서였어."

마이코가 대신 말했다.

"호오......."

요코누마는 다시 한 번 토시오를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 이상의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어느 쪽이 더 강할까?"

요코누마는 두 사람을 비교했다.

"설마."

마이코가 웃었다.

"마이코는 유도 3단이었지?"

"그만해. 이런 곳에서."

"그런데, 어제 교통과 교도 형사가 전화가 왔다고 하지 않았어? 무슨 일이야?"

"내가 마와리 토모히로를 미행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 사고와는 상관없겠지?"

"그래. 하지만 교도 씨는 변함없이 끈질긴 사람이야.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고 하니 앞으로 한번 들러볼 생각이야."

"그래. 만나면 잘 부탁해."

대동흥신소를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마이코는 밥을 먹자며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카레라이스, 어때?"

어제 다방에서와 같은 분위기다. 토시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이코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말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으면 안돼."

토시오는 웃으며 카츠동 덮밥이 좋다고 다시 말했다.

"그럼 됐어."

마이코는 큰 소리로 주문한 뒤 가방을 열고 작은 인형을 꺼냈다.

"마사오의 가방에 들어 있었어."

"그 사람의 가방을 열어 보았어요?"

토시오는 마이코의 행동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그래. 마사오는 동네 약국에서 수면제를 살 수 있는 처방전도 가지고 있었어. 나머지는 흔한 물건들이었는데, 이 인형이 특이하더군. 그래서 가져왔어. '마도죠'라는 장난감은 아무래도 이것인 것 같거든."

마이코는 인형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마사오의 물건을 손에 넣는 것이 꺼려졌지만, 마도죠라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

15센티미터 남짓한 여자아이 인형이다. 눈이 크고 뺨이 부풀어 올라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양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빨간 드레스, 빨간 신발. 보기에는 어디서든 볼 수 있을 것 같은 인형이었다. 토시오가 의기소침한 얼굴로 인형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마이코가 말했다.

"등에 단추가 달려 있어. 그것을 눌러봐."

토시오는 인형의 등을 살폈다. 마이코의 말대로, 등짝의 옷감 아래에 작은 돌기가 느껴졌다. 토시오는 그 버튼에 힘을 주었다.

'딸깍'하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인형의 목이 빙글빙글 돌면서 뒤쪽을 향했다. 인형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싫다 싫다를 하는 인형이 있었다. 그런 종류일까. 그러기에는 뒤쪽을 향한 모양이 기괴했다. 토시오는 다시 한 번 등쪽의 버튼을 눌러 보았다. 그러자 인형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 얼굴을 보고, 무심코 인형을 떨어뜨릴 뻔했다. 토시오는 소스라치게 놀라 변해버린 인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이 귀까지 찢어지고 긴 독한 붉은 혀가 떨고 있었다. 두 눈이 2센티미터나 튀어나왔고, 게다가 한쪽은 빨갛고 한쪽은 흰 눈이었다. 머리는 대머리, 회색 두개골에 거미줄처럼 생긴 혈관이 거미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토시오가 버튼을 눌렀다. 인형이 다시 뒤로 돌아갔다. 계속 버튼을 누르자 원래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위로 향했다.

"악취미같은 장난감이야."

마이코가 비판했다.

"이 인형은 하나의 목에 두 개의 얼굴이 새겨져 있어. 하나는 소녀의 얼굴이고 하나는 해골의 얼굴이야. 해골의 얼굴은 목 밑부분에 아래쪽으로 숨겨져 있고. 처음 버튼을 누르면 소녀의 목이 뒤로 젖혀지지. 다음 버튼을 누르면 목이 위로 올라가고 숨겨져 있던 해골의 얼굴이 위로 향하게 돼. 동시에 여자아이의 얼굴은 아래쪽을 향하게 되어 숨겨져 버리고. 목은 인형의 몸통에서 지지대가 나와서 양 귀에 붙어있는데, 머리카락으로 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어 있어."

"마도죠라는 것은 ‘마도녀’를 말했던거군요."

토시오는 인형을 마이코에게 돌려주었다.

"이런 인형, 팔릴 것 같아?" 

"안 팔릴 것 같아요. 모양부터가 보기 싫잖아요. 여자애들이 보면 울음을 터뜨릴 거예요. 기계적으로도 그렇게 잘 만들어진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요."

"토모히로가 죽기 직전까지 이 인형에 대해 말한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아요.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인형의 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을지도…. 인형의 몸 안에 뭔가 소중한 물건이 숨겨져 있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요."

"재보의 행방을 기록한 고문서 같은거?"

마이코는 놀란 표정으로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재미있겠는데."


에노키마치서에 도착한 마이코는 마치 내 집에 온 듯이 편안한 발걸음으로 교도 형사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교도 형사는 삐뚤빼뚤한 입을 크게 벌리고 마이코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이코가 없어진 후로 외로웠다고."

마이코는 여기저기서 경찰관들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나한테 반했나 봐."

"뭐야. 그냥 싸움이 부족해졌을 뿐이야. 요코누마 씨는 어떻게 지내?"

"변함없어. 교도 씨를 만나다고 했더니 안부인사 전해달라고 하더군. 어제는 카츠군을 잘 돌봐주었지? 고마와."

"그거 말이야."

교도 형사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쪽에서 얘기하자"

그는 일어서서 계단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2층으로 올라가서 한 작은 방 문을 열었다.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허름한 방이었다. 교도 형사는 접이식 의자를 펴서 두 사람에게 권했다.

"마이코는 왜 마와리 토모히로를 쫓아다녔지? 일 때문인가?"

"그런 것도 있지. 하지만 진짜 목적은 그 사건을 명백히 밝히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 사건... 마이코가 그만두게 된 그 사건 말인가?"

"그래, 내 뇌물 사건"

교도는 괜찮냐는 듯이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이 사람한테도 이야기해주면 좋겠어."

"알겠어, 그 사건은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어. 에노키마치에서 마이코가 교통법규를 위반한 차를 세웠었지. 그러자 차 안에 있던 남자는 갑자기 너에게 돈을 주고 달아났어. 마이코가 그 돈을 주머니에 넣는 것을 목격한 남자가 소란을 피우며 경찰차를 불렀었고."

"그래, 확실히 나는 돈을 주머니에 넣었어. 남편의 일이 마음에 걸렸던게 사실이었거든."

"우다이 군이 과격파의 돌팔매질로 다리에 부상을 입은 직후였으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었어. 망설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거야. 하지만 그 차를 놓칠 생각은 절대 없었어."

"그런데 지나가던 한 남자가 마이코에게 돈을 요구했다며 욕설을 퍼부었지. 마이코는 그 남자와 철저히 맞서 싸웠어야 했어."

"다들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한순간이라도 마음이 흔들린 나 자신에 대한 애정이 사라졌어. 나는 그 자리에서 사표를 썼고."

"마이코는 원래 생각하기 전에 행동으로 옮기는 여자였으니까."

"지금은 달라졌어."

마이코는 토시오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아직 고생이 뭔지 몰랐군, 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지나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 상태로 두면 안 되겠더라고."

"우다이 군을 위해서도 말이야."

"그래, 왜 그때는 그걸 몰랐을까? 나는 경찰을 불러 신고했던 남자를 만났어. 그 남자가 얼마 전에 교통법규 위반 때문에 벌금을 많이 낸 직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정말인가? 분풀이로 그런 증언을 한 거로군."

"그리고 최근에 우연히도 나에게 돈을 준 남자를 찾았어."

"그거 참 대단한데! 두 사람의 새로운 증언이라면 마이코의 억울한 누명도 깨끗이 벗겨질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되게 생겼어. 그 남자가 바로 마와리 토모히로였거든."

"......"

"대동흥신소에서 온 일 중에 토모히로가 의뢰한 신용조사가 있었어. 첫눈에 토모히로가 돈을 주었던 그 남자였다는걸 바로 알아보았지. 에노키마치도 해바라기 공예와 오노와를 잇는 길이었고. 나는 토모히로에게 칼을 들이댈 날만 기다리고 있었어. 조사 보고서를 전달한 후 추궁할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토모히로는 마사오를 데리고 갑자기 떠나려고 했어. 나는 깜짝 놀랐고, 어쨌든 비행장에서 그를 붙잡아 말만이라도 남겨두려고 했지. 그 여행길에 토모히로가 죽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채."

"벌금형에 처해진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불안한데."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구. 사실 다른 증인이 한명 더 있어."

"다른 증인?"

"토모히로의 차 뒷좌석에 한 노인이 타고 있던걸 봤어. 그 노인은 토모히로의 삼촌인 마와리 데츠바가 틀림없다고 생각해."

"노인이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할까?"

"기억하게 만들거야. 몇 번이든 찾아가서라도."

"호오, 오뚜기같군."

"내가 오뚜기라고?"

"이봐,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가나자와의 오뚜기는 미인이야. 그렇게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나는 다시 복직해서 교도 씨와 맞붙을 생각이니까. 각오하라고."

"월급은 싸다구."

"알아. 지금 하는 일도 계속할 생각이야."

교도 형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마이코를 바라보았다.

"조금 만나지 않은 틈에 빈틈없는 여자가 되었네. 그나저나, 어제 사고는 신문에서 읽었어. 그 사고였구나."

"그래."

"오늘 밤이 토모히로의 철야네."

형사는 마이코의 검은 옷을 보았다.

"데츠바를 만나러 가는거야?"

"만날 거야. 하지만 철야 상황에서는 그 사건 이야기를 꺼내진 못하겠지. 그냥 얼굴을 보고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곤란한 일이 있으면 말해줘."

"교도 씨, 조금 만나지 않은 틈에 인간적인 대사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