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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지금은 더 이상 없다 - 모리 히로시 / 이연승 : 별점 1점

지금은 더 이상 없다 - 2점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하시즈메의 별장에 약혼녀 마리코와 함께 방문하여 휴가를 보내던 공무원 사사키는 우연히 만난 니시노소노 양에게 푹 빠졌다. 마침 니시노소노 양은 가출 상태로 사에키에게 가까운 역까지 이동을 부탁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폭풍우 탓에 니시노소노 양도 별장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는데, 마침 그날 밤 밀실인 오락실-영사실에서 아사미 자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모리 히로시의 대표작인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8편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사키라는 인물의 1인칭 수기 형태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완벽한 졸작입니다! 이유는 추리적으로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는 탓입니다. 거의 500여 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쌓아 올린 이야기와 설정을 모두 뭉개고 설득력이 전혀 없는 이야기를 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생을 살해한 언니가 자살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칩시다. 그렇지만 구태여 좁은 창을 빠져나가면서 현장을 밀실로 만든 이유, 그리고 아사미 유키코가 동생 아스코에게 가발을 씌우고 옷도 바꿔 입힌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른 가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들이 정작 진상에서는 유키코가 흥분 상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흘러가니 황당할 뿐입니다. 이에 비교하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등장하는, 방을 밀실인 척 할 수 있는 사사키가 범인이다! 라는 추리 퀴즈 수준의 가설들이 진상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또 사사키의 수기 속에 등장하는 니시노소노가 모에가 아니라 모에의 고모 무쓰코였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과 반전도 사기에 가깝습니다. 보통의 서술 트릭물은 앞부분에서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를 던져주는데, 이 작품 속에는 휴대폰이 없고 HAM을 취미로 한다는 정도의 설정 밖에는 없고, 오히려 이름이 "모에" 라는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리는 등 독자를 속이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강해서 괘씸하기 짝이 없네요.

사실 중간까지는 제법 읽을 만 했기에 더욱 아쉬움이 큽니다. 사에키 1인칭 시점의 모에 홀릭 서술 트릭은 도대체 사이카와는 어떻게 된거지? 라는 독자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폭풍우가 밀어닥쳐 고립된 산 속 별장의 밀실 살인이라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설정도 나쁘지는 않거든요. 또 "둥글둥글해졌다" 는 말은 약한 부분이 없어지고 강한 부분만 남은 강한 형태다, 트럼프나 타로는 자신의 미래를 트집잡으며 기뻐하는 자학적 게임이다는 식의 모리 히로시다운 조금 삐뚤어진 사고 방식이 엿보이는 묘사들도 나쁘지는 않고요. 그러나 이런 요소는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거나 재미를 주지는 못하며, 약혼녀와 여행 온 주제에 18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어떻게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사사키라는 인간 쓰레기 시점에서 이런 묘사가 많은 탓에 사사키의 비호감도만 상승할 뿐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본격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에다가 서술 트릭물로 보기에는 트릭이라는 게 없는 사기극이라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작가 스스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건 추리 소설이 아니라 연애 소설이다, 사사키는 글재주가 없어서 이야기가 완전 별로다, 운운하는 마지막 대단원의 작가 변명은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읽은 독자를 더욱 허탈하게 만듭니다. 연애 소설이지만 추리 소설로도 완벽한 작품들을 쏟아낸 여사님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몇몇 설정은 시리즈 독자라면 그런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이 작품만 놓고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기에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단연코 제가 읽은 이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2018/12/31

2018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2017 내 블로그 리뷰 총 결산

15차, 열 다섯번째!를 맞는 블로그 결산입니다. 숫자부터 정리해보면, 2018년 읽은 책 중 리뷰를 남긴 책은 추리 / 호러 장르문학 40 (52)권, 기타 장르문학 3 (3)권, 역사서 9 (15)권, Food 및 구루메 관련 도서 18 (9)권, 기타 도서 21 (20)권으로 모두 91 (101)권입니다(괄호는 작년).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 작년보다는 독서에 소홀했지만 그래도 한달에 7~8권 수준이면 뭐 나쁘지는 않네요. 각 항목별 베스트 - 워스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올해 발표된 작품 기준이 아니라 제가 올 한해 보고 읽은 것들 기준입니다.

2018년 베스트 추리소설 : "살인범은 그곳에 있다" 

올해 추리 분야 도서 중 유일한 별점 4점짜리 책입니다. 소설이 아니라는게 유일한 단점입니다. 재미 뿐 아니라 생각해 볼만 한 메시지를 함께 전해주는 좋은 작품이에요.

2018년 워스트 추리소설 : "유령탑" 

사실 모리 히로시의 사이카와 모에 시리즈 중 한 권인 "지금은 더 이상 없다"도 올해 별점 1점을 받은 망작이기는 합니다만,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름과 그림을 전면에 내세워 홍보하고 팔아먹었다는 점에서 죄질이 더 나빠 단독 워스트로 선정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과 설명을 제외하면 건질만한 부분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디 다른 분들은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2018년 베스트 / 워스트 기타 장르문학 : 올해 기타 장르문학은 딱 3권, 그 중에서도 두 권만이 정식 출간된 책이라 따로 선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양이 발 살인사건"과 "마음의 지배자" 모두 좋았어요. 두 작품 모두 단편집인데 별점 4점, 5점짜리 작품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말이죠. 장르 문학에 관심있으신 모든 분들께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2018년 베스트 역사 도서 : "원더랜드"

역사 관련 서적을 10권 이하로 읽은건 오랫만이네요. 다행히 별점 4점짜리 책은 언제나처럼 존재합니다. 유희와 놀거리에 대해 심도깊게 고찰한 이 책입니다. 제 리뷰로는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취미와 오락, 유희 관련 문화에 대해 관심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18년 워스트 역사 도서 : "만물의 유래사" 

미시사 서적과 백과 사전류를 좋아해서 충동 구매한 책인데 프랑스인이 프랑스를 위해 만든 시대 착오적인 결과물입니다. 확실히 백과 사전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2018년 베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늑대를 요리하는 법"

올 한해 제법 많이 읽었는데 별점 4점짜리 책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도판과 번역만 충실했더라도 별점 4점은 충분했을터라 베스트 도서로 선정합니다. 재미도 있고 여러모로 참고가 될 내용도 많은 좋은 책이에요.

2018년 워스트 Food / 구루메 도서 : "소주 이야기"

미시사 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두서가 없고, 소주 자체에 대한 고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저자 스스로 석달 자료 조사를 거쳐 열흘 만에 쓴 책이라고 하는 말 만큼이나 내용이 두서없는 졸작입니다. 저렴한 가격만이 장점입니다.

2018년 베스트 기타 도서 : "범죄 과학, 그날의 진실을 밝혀라"

이번 해에 기타 도서의 베스트는 별점 4.5점에 빛나는 이 책입니다. "깃털", "클래식 음반세계의 끝", "아주 오래된 서점"의 별점 4점 트리오는 조금 아깝네요.

2018년 워스트 기타 도서 : 올해 기타 도서는 별점 2점 아래가 없어서 워스트는 딱히 꼽지 않겠습니다. 별점 2점으로 워스트가 되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까요.

결산평 : 15년 째라니... 강산이 변해도 이제 한번 반이 변했네요. 올 한 해 무탈하게 보냈다는게 너무나 기쁩니다.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 원하시는 일 다들 이루시는 그런 한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말씀드렸지만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이라면 남들이 관심갖지 않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시는, 정말로 세심한 분임이 분명할테니 내년에는 더욱 잘 되실거에요. 사랑합니다~!

2018/02/16

패러독스의 세계 - 다무라 사부로 : 별점 2.5점

패러독스의 세계 - 6점
다무라 사부로/전파과학사

오래전 사랑했던 추억의 전파과학사 문고가 저렴한 가격의 ebook 대여 행사를 하길래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행사가 끝났네요.

이 책에는 연인의 사고사 후 자살하려던 천애고아 미다 타로가 우연히 외계인 퀴리그인에게 납치된 후, 퀴리그 별에서 가정교사 및 기술자로 일하며 여러가지 수학 논리를 설명해 주었던 과거에 대한 일종의 수기와 "웃지 말 것 - 웃음과 패러독스", "읽지 말 것 - 수학과 패러독스" 라는 두 개의 챕터로 여러가지 패러독스 상황을 관련된 이야기들로 설명해 주는 전혀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미다 타로의 수기 부분은 솔직히 왜 이런 기묘한 설정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구태여 외계 행성 설정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설명 가능한 부분이었거든요. 그래도 초-중학생 수준의 외계인 아이들에게 수학과 논리를 가르친다는 설정 덕분에, 수학에 기반을 둔 내용이 많음에도 아주 어렵고 심오하지 않아서 이해가 쉽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들이 제목 그대로 "패러독스" 관련된 역설 이야기가 많아서 퍼즐을 푸는 듯한 재미도 넘치고요. 각종 공작이나 퍼즐, 심지어 미다 타로가 외계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요술' 관련된 도판까지 도판이 생각 외로 많은데 이 역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단순한 즐거움 외에도 현학적인,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는 기쁨 역시 컸습니다. "12 척의 배를 가진 부자가 장남에게는 1/2을, 차남에게는 1/4을, 막내에게는 1/6을 주기로 했는데 1척이 침몰해버렸다. 그런데 이웃에서 배를 빌려와서 장남에게 12척의 1/2인 6척, 차남에게는 1/4인 3척, 막내에게는 1/6인 2척을 주니 모두 11척이라 이웃에게 배를 돌려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라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지만 답을 몰랐던 수학 문제의 답을 알게 된 것 처럼요. 정답은 애초부터 잘못된 유언이라는 것입니다! 1/2 + 1/4 + 1/6 이 "1" 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명이 여관에 숙박비로 1인당 1만원 씩 지불했다. 그런데 여관 주인이 서비스로 5천원을 깎아 주었다. 그러나 이를 돌려주던 종업원이 2천원을 슬쩍하고 3천원만 돌려주었다. 각자 1만원 씩 냈는데 1천원씩 돌려 받았으니 1인당 낸 돈은 9천원이고, 3명이서 2만 7천원을 내었다. 여자 종업원이 2천원을 슬쩍한걸 더하면 2만 9천원. 1천원은 어디로 갔을까?" 라는 문제도 이 책 덕분에 속 시원하게 정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관 주인이 받은 돈은 2만 5천원이고, 종업원이 가로챈건 2천원이라 이는 손님 세 명이 지불한 돈과 일치합니다. 여기에 깎아준 3천원을 더하면 처음의 3만원이 됩니다. 이 돈에 또 슬쩍한 돈 2천원을 억지로 더해서 발생하는 오류지요.

이러한 퍼즐같은 이야기 외에도 정통 수학에 기반을 둔 이야기도 흥미로왔습니다. '앞의 두개의 수의 합이 다음 수가 되는 피보나치 수열의 이웃한 3개의 수는 항상 한가운데 수의 제곱과 양 끝 두 수의 곱은 언제나 1만큼 다르다' 라는 사실 등 새롭게 알게 된 이론도 많고요.
'큰 원의 원 둘레와 작은 원의 원 둘레가 1:1로 대응하더라도 길이는 똑같다고 할 수 없다' 는 이유 등 몰랐던 수학 이론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좋았습니다. "1/3 + 1/3 + 1/3 은 1인데 1/3은 0.333333333..... 이라 1/3을 더하면 완벽한 1이 되지 않는데?"라는 문제에 대한 답도 미력하나마 깨우칠 수 있었고요.

수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논리 퍼즐도 대미를 장식할 만 합니다. 아주 인상적이었기 상세하게 소개해 드릴께요. 일단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두 개의 문이 있는 방이 있다. 한 방은 정답, 다른 방은 오답이다. 방에는 언제나 사실을 말하는 정직 족, 언제나 거짓말을 하는 거짓말쟁이 족으로 이루어진 별에서 온 두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이 어느 부족인지는 모른다. 이 두 사람 중 한 명에게 한번만 질문할 수 있다. 그들의 답은 "팔" 또는 "다아" 중 하나이다. 이 "팔"과 "다아" 중 어느 쪽이 yes이고 어느 쪽이 No 인지는 알 수 없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하고, 답은 어떻게 되는가?" 입니다. 논리 퍼즐로 한참 고민해도 됨직한 멋진 이야기죠?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이를 수학 공식화하여 설명해 줍니다! 내용 중 "동치" 개념과 교환율, 간략화 공식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공식으로 "왼쪽의 문이 정답입니까? 라고 질문을 받으면 당신이라면 "팔" 이라고 대답합니까?" 라는 답이 도출되는 과정은 놀라왔습니다. 수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지요. 여러분들도 이 답이 맞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미타 타로의 수기와 비교한다면 이어지는 "웃지 말 것 - 웃음과 패러독스" 부분은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습니다. 여러가지 패러독스를 다양한 글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라쿠고나 잡지의 유머 등을 인용하여 이해를 돕는건 좋지만 너무 장황한 탓입니다.
물론 유머, 우스개 들에서 패러독스 이론을 끄집어 내는건 대단했고, 유머만 소개되는게 아니라 체스터턴의 단편과 "라쇼몽"이 인용되는 등 볼거리가 많긴 합니다. 그래도 글 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도판이나 다른 보조 장치가 필요했어요. 거짓말 관련된 패러독스가 내용의 대부분이라는 점도 아쉬웠고요. 마지막의 "읽지 말 것 - 수학과 패러독스"에 제목처럼 수학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 그 비중이 높지 않습니다. 도입부에서 칸토어의 정리를 쉬운 집합 형태로 바꾸어 설명하는 부분은 재미있었지만, 이외에는 패러독스를 수학으로 설명하기 위한 여러가지 이론 설명 비중이 더 크거든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재미있고 읽을만한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책의 가치를 번역이 반 이상 깎아먹고 있는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수학 이야기인데 어떤 항목은 번역된 글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책 자체는 별점을 3점 이상 주고 싶어도 번역 때문에 도저히 2.5점 이상은 주기 힘드네요.
수학을 공부하는 중학생 정도라면 쉽게 이해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라 생각되어 수학을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리고 싶은데, 번역 때문에 선뜻 권해드리기 어렵군요. 조금 현대적으로 각색해서 새롭게 번역되어 출간된다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2014/02/27

반전 - 아이작 아시모프 외 / 박준형 : 별점 2.5점

지금은 절판된 앤솔러지입니다. 하우미스터리의 벼룩시장을 통해 구입하였습니다.

약 20여년 전 출간되었는데, 편저자가 여러 단편집을 읽은 뒤 멋진 반전이 있는 작품만 엄선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저작권 개념은 없이 출간되었으리라 생각되는데, 모두 1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 노래하는 종
  • 황금알을 낳는 거위
  • 반중력 당구공
프레데릭 포사이스

  • 제왕
  • 면책특권
  • 완전한 죽음

제프리 아처

  • 뉴욕에서의 하룻밤
  • 구식 사랑
  • 깨어진 습관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

  • 이 집에 축복 있으라
  • 메리 고 라운드
  • 너무나 선량한 남자
  • 살인 게임

소개 작가의 면면만 보아도 화려하죠? 작품들도 반전을 테마로 한 앤솔러지답게 "기묘한 맛" 류의 작품들이 많은데 모두 기본 이상은 해 줍니다.
아시모프의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영국작가의 작품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극히 영국적인 사고방식(지나칠 정도의 계급의식과 체면치레)이 작품에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도 독특했어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미 다른 앤솔러지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8편입니다... 결국 딱 5편만을 위해 구입한 셈이죠. 그런데 그 5편 중 가장 기대가 컸던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의 작품 4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수록작들의 가치만 놓고 보면 별점 3점 이상은 충분하겠지만, 읽지 않은 5편만의 평균 별점은 2.3점.. 조금 올려도 2.5점밖에는 못 주겠네요. 어렵게 구한 고서당 류 책인데,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덧붙이자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는데 선정된 단편이 모두 가장 우수하고 뛰어난 반전을 가진 작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프레데릭 포사이스, 제프리 아처의 작품은 작품의 수준을 떠나 반전만 놓고보면 여기 수록작보다 뛰어난 작품이 많거든요.

때문에 혹 관심있으신 분들께는 여기 수록된 작품들이 전부 수록된 작가별 단편집 쪽을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물론 이 책이나 원래 단편집이나 절판된 것은 마찬가지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니까요.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노래하는 종"

이미 다른 앤솔러지에서 접했던 유명 단편.

"달과 지구의 중력 차이는 몸이 기억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다"는 과학 상식에 바탕을 둔 추리가 돋보이는 SF 추리물입니다. 1954년에 발표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에요.
또 외계환경공학자이지만 우주선도 타지 못하는 천재인 웬델 어스 박사 캐릭터가 인상적이라 찾아보니 역시나 시리즈가 있더군요! 다른 웬델 어스 시리즈도 읽고 싶은데 과연 언제나 가능할지...

"황금알을 낳는 거위"

역시나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읽었었던 작품.

그런데 반전은 없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대한 과학적인 고찰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단편집 성격과는 거리가 멉니다. 별로 재미있게 느껴지지도 않았고요. 어려운 과학 이론을 소설처럼 쉽게 쓰는 작가의 능력은 잘 보여주지만, 보편적으로 인기를 끌 작품은 아닙니다.

"반중력 당구공"

프리스와 브룸이라는 앙숙이 등장하여 "반중력"을 구현하는 쇼장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룬 작품. 반중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과학적 고찰이 뛰어나고 그곳에 들어간 당구공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설득력이 넘칩니다.

무엇보다도 반전이 앤솔러지 취지에 부합할만큼 괜찮아서 마음에 드네요. 결국 브룸의 거의 모든것을 차지하게 된 프리스 박사의 순간적 기지가 그것인데 과학적일 뿐더러 복선에도 충실하고 나름 여운도 남기니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프레데릭 포사이스 작품들"

단편집 "마지막 에이스"를 통해 접했던 작품들. "황홀한 죽음"이 "완전한 죽음"으로 제목이 바뀐 것 말고는 동일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에이스"에 수록된 작품들 중 최고작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제왕"만큼은 다시 읽어보니 11년전에 읽었을 때와 다르게 상당히 흥미롭더군요. 당시는 제가 결혼 전이고 지금은 결혼 후이기 때문이겠죠. 왠지 저도 모리셔스로 떠나고 싶어집니다.

"제프리 아처 작품들"

역시나 단편집 "포기하기 힘든 유혹"을 통해 접했던 작품들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작품이 실려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구식 사랑"에는 반전은 등장하지도 않고요. 여기 수록된 작품들보다는 "포기하기 힘든 유혹"을 권해드립니다.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크리스티나 브랜드)"

"이 집에 축복 있으라"

자기 집에 어느날 찾아온 부부, 그리고 그날 밤 낳은 부부의 아들이 "예수"라고 확신하는 노부인에 대한 이야기. 평범한 일상 속 광기와 광기가 충돌한다는 설정의 "기묘한 맛" 류 단편으로 서늘한 느낌은 확실히 전해줍니다.

그러나 죠셉, 마를린 부부의 사고방식은 좀 이해가 안되네요. 메이스 부인과 본 부인을 처치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요? 단지 시점의 문제지... 아기가 있다고 집을 얻기 힘들다는 것도 너무 오버가 심한 것 같고 말이죠.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메리 고 라운드"

포르노 사진을 둘러싼 스캔들과 살인을 다룬 작품. 협박자가 협박하던 재료 (포르노 사진)가 협박자를 살해한 범인을 통해 다시 협박에 사용된다는, 약간 윤회와 같은 구성이 독특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부모들의 범죄를 알고 있었다라는 결말은 좀 약했어요. "그때문에 언젠가 이득을 볼지도 모른다"라는 구절을 조금 더 강조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너무나 선량한 남자"

기묘한 정신병을 가진 남자를 그린 짤막한 소품.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병적, 범죄적으로 비튼 작품이랄까요? 솔직히 이해도 잘 안되고 공감도 안되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1.5점.

"살인 게임"

범죄자와 범죄 피해자의 아이들을 돌봐온 인격자 재미니 변호사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수수께끼와 같은 절규 -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사라졌어! 긴 팔!" - 를 남겼다. 곧바로 출동한 경찰은 방문이 잠긴 재미니의 5층 사무실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창문은 막 깨진 듯 흔들리고, 칼에 찔린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나고 있었지만 범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뒤이어 비슷한 전화를 남긴 경찰 한 명이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어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지게 되는데...

기묘한 밀실트릭이 등장하는 본격물. 초, 중반부에 유력한 용의자를 한명씩 등장시킨 뒤, 용의자가 가능했을 범죄의 방식을 논하는 문답식 전개 방식이 독특했습니다. 한니발 렉터를 연상케하는 탐정역의 노인도 인상적이었고요. 마무리에서 노인이 쟈일스의 할아버지일 것이라는 여운을 짙게 남기는 것도 작위적이기는 하나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쳤다 보기 어렵습니다. 트릭이 너무 별로이기 때문이죠. 우선, 전화 목소리가 피해자를 가장한 범인의 목소리였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경찰들이 같이 출동한 동료가 누구인지 몰랐을거라 단정하는건 경찰을 너무 물로 보는 느낌이고요. 작위적이고 우연에 의지한 전개(갑작스러운 비에 레인코트를 입지 않은 것을 목격하고 알리바이에 이용한다던가)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이름값이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많이 처지는데, "크리스티아나 브랜드" 라는 명성은 장편에서만 유효한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2020/04/03

[번역] 2DK 개미지옥 - 아토다 다카시

일전에 졸역한 'A 사이즈 살인사건'을 올리며, 반응이 괜찮으면 다음 편도 번역하겠다고 약조한 바 있습니다. 너무나도 엉망인 번역 탓에 송구스럽지만, 즐겨주신 분이 계신 듯 하여 다음 편인 '2DK 개미지옥'도 소개해 드립니다. 의역으로 가득찬 졸역이지만, 추리적으로는 전작보다 훨씬 나은 작품이라 생각되니, 사회적 거리두기로 한창 심심하신 분들께 위안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관리 측면에서 좀 길지만 한 편으로 올리는 점, 참고 부탁드려요.

도요코 선의 N 역에서 하차하여 서쪽의 개찰구로 나오면, 길고 완만한 오르막 언덕이 나타난다.
"아저씨, 비켜비켜! 비켜요!"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두 명의 아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위험하잖아!"
사무라 에이스케는 다급하게 보도 옆으로 몸을 피했다.
"고맙습니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 옆을 지나갔다.
언덕의 길이는 50여 미터, 경사는 78도. 확실히 스케이트보드를 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학교에서는 분명히 도로에서 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시키고 있겠지만, 개구쟁이 아이들이 귀담아들을 리가 없다.
"뭐, 다른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사무라는 석양빛으로 길게 드러워진 아이들의 그림자를 뒤로 한 채, 다시 서둘러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을 오르면 바로 묘법사다. 절에는 산호(山呼)와 사호(寺呼)가 있는 법이니, 묘법사도 정식으로는 어딘가산 묘법사라고 불러야겠지만, 사무라도 산호까지는 모른다. 똑같이 시체를 취급하는 장사라도, 수사 1과의 형사가 산호까지 알 정도로 절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 리는 없다.
산호가 있는 건 절이 분명 산 위에 있기 때문이다. 묘법사 정문까지 긴 고갯길이 이어진 것에서도 그러한 산호의 유래를 느낄 수 있다. 예전에는 이곳 주변도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벚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한적한 산길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회색 빌딩과 콘크리트 포장길이 무표정하게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가운데 묘법사만 홀로 고집을 부리듯 화려하게 자연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었다.
안채로 가는 쪽문을 빠져나와 마당 쪽으로 고개를 내밀자, 형형색색의 튤립이 피어 있는데, 툇마루를 따라 화려한 와인잔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
사무라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툇마루 쪽을 향해 말했다.
"여어. 기다렸다고."
감색 티셔츠를 입은 주지 스님이 사무라를 알아채고 고개를 까닥였다. 스님 앞에는 몇 년 전 은거한 노사가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주지 스님은 노사의 머리를 면도하는 중이었다. 노사는 치매가 시작된 후에는 좀처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은 탓이겠지. 사무라와 친한, 현재의 주지 스님은 데릴사위로 노사는 그의 장인이다. 주지 스님이 수행승이던 시절부터 장인의 머리를 깎는 일은 그의 몫이었을 거다. 그 습관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으로, 평소엔 멍한 얼굴을 하는 노사도 오늘만큼은 위엄을 떨치듯 고개를 바짝 세우고 있었으며, 그 뒤에서 티셔츠를 입은 스님이 얌전히 면도하는 모습은 시간이 십수 년 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곧 끝나니까. 2층에서 기다리게."
지켜보던 사무라에게 주지 스님이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푹 쉬고 있으라고."
사무라는 현관으로 돌아 나온 뒤, 젊은 수행승의 안내로 언제나의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는 아니나 다를까 벌써 바둑판과 방석이 갖추어져 있었다. 오월의 바람이 어디선가 꽃향기를 날라와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살인사건 얘기를 꺼내기가 민망할 지경이다. 이렇게 상쾌한 봄날 저녁 스님을 상대로 한가롭게 바둑을 두고 지내고 싶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
스님이 큼직한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들어왔다. 사무라 에이스케는 살인 담당 형사로는 아직 신출내기로 쉰을 넘은 주지 스님과는 부모 자식만큼이나 나이 차이가 났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이 잘 맞았다. 바둑 솜씨는 서로가 상대보다 조금 강하다고 생각하는 정도. 세상에 이렇게 멋진 적수는 없다.
"자, 시작할까?"
스님은 바둑판 덮개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럼 제가 잡을게요'
사무라가 선을 잡았다.
"정선."
"네."
잡은 돌을 세어보니 열한 개였다. 흑을 잡은 사무라는 가벼운 묵례 후, 우상귀에 돌을 두었다. 돌은 고급품으로, 1.5cm 정도의 두께였다. 내려놓은 돌이 바둑판 위에서 살짝 떨렸다.
"오늘은 그쪽부터 두는건가?"
"우선 이쪽 집을 벌어 놓으려고요."
"그렇군."
번갈아 열 수 정도 둔 뒤, 사무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혼잣말하듯 사건을 입에 올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는데 시체가 마중을 나왔답니다."
돌을 집어 든 스님의 손이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이런, 벌써 교란 전술 시작인가?"
"천만에요. 이건 진짜 사건이에요. 지난주 시모키타자와에서 일어난 정말 기묘한 사건이지요."
스님은 사무라의 공격을 살짝 피하며 물었다.
"부처님은 남자였나? 아니면 여자였나?"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수행승이 술과 안주를 가져왔다.
"아직 식사하기에는 좀 이르지? 술이나 한잔하자고."
'항상 죄송합니다.'
안주는 죽순조림과 참치 초무침이었다. 닳고 닳은 스님 같으니라고. 술은 흠뻑 취할 정도로 마시고, 남의 살도 매우 좋아한다. 먹을거리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정말로 밝다. 살아가는 도중에 우연히 묘법사의 사위가 되어 스님이 된 것 같은데, 스님이 되기 전에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사무라도 아직 물어본 적이 없다.
수행승이 나가자 사무라가 말했다.
"부처님은 남자입니다."
"그렇군. 그럼, 부처님은 새 신부의 옛날 애인쯤이려나."
"아니, 아무래도 그건 아닌 듯합니다."
"그럼 신랑의 친구였나?"
"그렇지도 않고요."
"호오. 그럼 신랑, 신부, 그 누구와도 관계가 없다고?"
"본인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 남자가 부부의 2DK 아파트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죽었는데 말이죠."
* 2DK : 방 2개 + Dining Room (식당) + Kitchen (부엌) 으로 이루어진 집
"아이고 부처님, 알몸으로? 그런데 이 돌은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나저나 알몸으로 죽으면 안 되지."
스님은 이렇게 말하면서 구석진 돌을 공격해 들어갔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화요일, 5월 9일의 일입니다. 시모키타자와의 그린 아파트에 사는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날이죠. 스즈미 코지와 스즈미 료코 부부로...."
"잠깐만. 아파트에 살던 젊은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아닐까?"
".….…?"
"그렇지만 맞잖아.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아직 부부가 아니었으니까."
"아하하하. 스님의 억지는 당할 수 없네요.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두 사람이 결혼한 건 5월 3일입니다. 아파트를 빌린 것은 4월 중순이고요. 남자가 결혼식까지 혼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뒤 일주일간 규슈를 돌아보았고......."
"그리고 돌아와 보니 세상에나! 벌거벗은 남자가 죽어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 이건 안 돼. 방심하면 안 되지. 엄청난 실수를 할 뻔했군."
스님은 입을 삐죽이며 사무라를 노려보았다. 오른쪽 구석에서 사무라의 흑과 대치 중인 백의 생사가 불안했다. 스님은 얼굴을 바둑판에 묻고 그 돌 무리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무라는 어려운 사건을 맡을 때마다, 고양이가 다래나무에 이끌리듯 묘법사를 찾는다. 그래서 스님은 웃으면서 '자네는 뭔가 풀 수 없는 사건을 만나면 절에 발길을 옮기는군'이라고 말하곤 했다.
오늘의 방문도 마찬가지 목적이다. 이번 사건은 정말로 기묘했다. 스님에게 이야기한 대로 사건이 신고된 날은 5월 9일 화요일이었다. 그날, 시모키타자와의 번화가로부터 조금 뒷골목에 들어간 3층짜리 아파트에 스즈미 코우지, 료코 두 사람이 돌아왔다. 코우지는 굵은 체크 재킷에 밤색 바지, 료코는 꽃무늬 투피스에 연지색 모자를 차려입었다. 낡은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모습이었지만,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막 신혼여행을 끝낸 뒤, 걸음걸이도 가볍게 둘만의 스위트 홈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신랑이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두 사람은 아무도 기다릴 리 없는 방을 향해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인기척이 없는 실내에 공기가 축축하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신부가 이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은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결혼식 전에 짐을 나르고 청소를 하거나, 혹은 내친김에 미래의 배우자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이러쿵저러쿵 몇 번이나 이 아파트를 찾았었다. 그러나 정식 거주자로서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시각은 오후 4시가 넘었다. 실내는 밝았다.
"나올 때 커튼 치는 걸 깜빡 한거야?"
며칠 전 신랑은 이 방에서 결혼식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음, 그랬었나?"
코우지는 자신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료코는 시원시원하게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켰다. 그런 다음 오늘부터 자신이 지배하게 될 땅을 점검하듯 부엌을 살펴본 뒤, 욕실 문을 열었다. 순간 숨을 삼키는 듯한 기색이 흐르고, "꺄악!"이라는 비명과 함께 료코가 도망치듯 튀어나왔다.
"왜 그래?"
"사, 사, 사람이......"
료코는 남편에게 매달려 욕실 쪽을 가리켰다. 코우지는 옆에 매달아 놓은 프라이팬을 손에 들고 조심조심 욕실로 향했다. 프라이팬을 든 것은 무의식중에서도 무기가 될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기는 필요 없었다.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욕실 좁은 욕조 속에서 한 남자가 목을 늘어뜨린 채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죽었어."
"정말?"
"틀림없어……. 가스가 새고 있어."
확실히 욕실에 발을 들여놓자, 날카로운 가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스즈미 코우지는 서둘러 욕실 창문을 열고 가스 욕조의 밸브를 잠갔다.
"누구야? 이 사람은?"
료코가 코를 막으며 물었다.
"모르겠어. 난 몰라, 이런 남자."
코우지는 숨을 멈춘 뒤, 다시 한번 욕실로 돌아가 시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34, 5살쯤 되어 보이네."
시체는 섬뜩했지만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야. 도대체 누굴까..... 너는 어때?"
새신랑은 "너"라는 호칭을 약간은 어색하게 사용하며 아내에게 말했다. 료코는 두려움을 억누르려는 듯 가슴을 두 손으로 누르며 욕실을 들여다보았다.
"몰라, 이런 사람."
"그래도 모르니까, 잘 봐."
"잘 보라니......몰라."
"좋아. 어쨌든 경찰에 전화하자."
"으....."
축복받아야 할 새로운 삶의 첫걸음은, 낯선 노출광에 의해서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죽은 남자의 신원은 알아냈나?"
묘법사의 주지 스님은 천천히 고개를 위, 아래로 움직여 바둑의 형세를 가늠하며 물었다. 바둑은 중반의 접전을 끝내고 종반전에 진입한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전황은 사무라가 우세했다. 스님은 형세를 단번에 만회할 수단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이제 둘 곳도 없는 곳들을 상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둘 데가 없을걸요? 그 근처는."
"응. 없는 것 같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심야 방송을 들으면서 공부하는 게 효과적이라는데, 스님의 두뇌도 그런 구조인 것 같다. 바둑을 두면서 동시에 사건을 추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둑이 별로일 때에는 아직 추리 쪽도 정리되지 못한, 암중모색의 단계이다. 아까부터 변변한 수가 없는 걸 보면 스님의 추리는 아직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한 듯 싶었다. 사무라는 이 상태에서는 적당히 스님의 비위를 맞추며 질문에 대답하는 게 제일 좋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피해자의 신원을 파악했느냐 하면……."
사무라는 흑돌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걸 모르면 이야기가……. 안 되지...."
팟! 하고 스님의 흰 돌이 응전해왔다.
"우리 경찰은 우수합니다. 당연히 밝혀냈죠."
"그렇군."
"미나토구의, 가전 제조업체 경리부에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이름은 코이즈미 노부히코, 나이는 37세. 가족으로는 아내와 자식은 두 명…….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와 유치원 다니는 남자아이입니다. 세타가야의 공단 주택에 살고 있고, 월급은 20 수만엔 정도. 잔업 수당은 부인에게 주지 않고 모두 용돈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듯한 평범한 직장인이고, 취미는......"
"골프와 마작."
"그것도 추리인가요? 하지만 틀렸습니다. 골프도 못 치고, 마작도 못 한다네요. 취미는 산책과 사교댄스, 그리고 패션이었답니다. 멋 내기를 좋아했다는군요."
"술은?"
"조금."
"유흥 업소는 다녔던가?
"스님이 그걸 물어볼 거로 생각해서 회사 동료에게 물어봤죠."
"잘했네. "
"직장인이라 가보긴 했지만, 부지런히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는군요. 구태여 말하자면 적당하였달까요?"
"흥, 흥......"
스님은 갑자기 화제를 바둑으로 돌렸다.
"어, 거기 그런 수가 있었나?"
"이쪽 돌은 덕을 좀 본 것 같죠?"
"이미 대세에 영향은 없나."
"그런 셈이죠."
"확실히, 여기서 끝났구먼."
"그런 것 같네요."
"유감이군. 이번에는 내가 졌네. 잠시 모습을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늘었는걸? 수사는 대충 하고 바둑책을 읽으면서 공부한 거 아냐? 덕분에 범인은 전부 다 놓치고 말이야."
"와, 엄청난 말씀이시네요. 스님 쪽이야말로 틈나는 대로 비밀로 전해진 전설의 두루마리를 숙독하면서 공부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아니, 환절기에는 부처님이 되는 사람이 많아서 절도 꽤 바쁘다고."
"그래요?"
계가해 본 결과, 흑집은 마흔 둘, 백집은 스물셋으로 덤을 빼도 무려 열네 집 반의 승리였다.
"아이고 망신스러워. 이건 대패야 대패."
스님은 갑자기 생각난 듯 손을 두드려 술을 추가 주문했다.
"그러면 다시 한 판 더?"
"네, 네."
첫판에서 사무라가 이기면 스님은 분해서 꼭 다음에는 이기려고 한다. 착수도 날카로워졌고, 그 영향으로 추리 쪽도 좋아진다. 사무라에게는 더 바랄 나위 없는 결과였다. 사무라는 따끈하게 데운 술을 목구멍에 흘려 넣고, 맛있게 버무린 초무침을 한 입 깨물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흑으로 시작하지."
"네."
바둑돌을 치운 뒤, 두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스님은 흑 1, 3, 5로 시작하는, 슈사쿠 명인의 포석으로 두기 시작했다.
사무라가 손을 잠깐 멈춘 사이,
"그 살해당한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하고 스님 쪽에서 교란 전술을 써왔다.
"고이즈미 노부히코입니다."
"그래그래. 그 고이즈미와 신혼부부의 관계는?"
"그게 아무래도 확실치 않아요."
"호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남편은, 이런 남자는 전에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아내 역시 이런 사람 알 리가 없다고 경찰에서 줄곧 증언하고 있거든요."
"그럼 왜 그 남자가 아파트에 있었지?"
바둑은 포석이 끝나고, 한 수, 한 수 둘 때마다 심사숙고가 필요한 중반의 공방전에 돌입하였다. 사건의 추리도 조금씩 조금씩, 까다롭고 어려운 부분을 향하였다.
"그게 문제라고요. 아파트 관리인이나 이웃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그런 남자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 고이즈미 누군가가 전에 그 아파트에 살았던 건 아니겠지?"
"맞아요. 그 부분은 정말로 아주 상세하게 수사를 진행했는데, 고이즈미 노부히코와 그린 아파트를 연결하는 것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아, 깜빡했네!
스님은 정석대로 흑돌을 놓으며 외쳤다.
"뭘요?"
"살인사건이 맞나?, 애초에, 욕실에는 가스 냄새가 났었잖아? 사고사 가능성은 없나?"
이번 한 수로 흑이 형성한 빗살 모양 세력이 백의 중요한 지점을 단절시켰다. 스님의 수는 두면 둘수록 점점 날카로워졌다.
"사고사 가능성도 있습니다. 목욕탕의 가스 욕조는 뚜껑을 닫으면 불이 꺼지도록 만들어진 물건인데, 고무관을 연결한 부분이 느슨하더군요. 그 부분에 가스 누출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하죠."
"하지만 자네 말로는 신혼부부는 아파트로 돌아가서 한동안 가스 냄새를 눈치채지 못했잖아? 작은 아파트 목욕탕에서 사람이 죽을 정도로 가스가 샜는데, 거실 다다미방에서 알아채지 못한다는게 말이 되나?"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부부에게 물어보니 남편은 현관을 열자마자 약간 가스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했다 하고, 부인은 욕실 문을 열었을 때 너무 놀라서 냄새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도대체 욕실에 얼마나 가스가 차 있었는지도 정확히는 알 수 없고요.".
"나중에 테스트 해봤을 거잖아. 같은 욕조로."
"물론이죠. "
"어땠나?"
"어느 쪽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전문가는 꽤 오랜 시간, 대략 한 시간 정도 가스가 누출된다면 모르고 목욕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응, 응. 그렇지. 가스 중독은 먼저 운동 중추를 마비시키니까. 뭐지? 몸이 이상한데?라고 깨달았을 때는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거지"
"스님은 부처님 만드는 법도 잘 아시네요."
"그런 거북한 소리 말라고. 그것보다도 구석의 이 대마 말이야, 이 녀석도 부처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아무리 스님이라도 좀 힘들어 보이는데요?"
"그래, 그래."
스님은 다시 바둑판으로 몸을 기울였다. 사무라는 화제를 되돌렸다.
"그래서 욕실 정황만으로는 뭐라 말할 수 없어요. 목욕탕에서 가스가 누출되어 일어난 사고사는 도내에도 매년 몇 건씩 신고되니까요."
"그럼 고이즈미 누군가 씨도 사고사라고 하는 게 어때? 경찰도 바쁠 거잖아."
"가능하다면 그렇게 처리해버리고 싶기는 합니다. 위에서도 그럴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사인도 마침 일산화탄소 중독이니까요. 하지만 피해자가 어째서 생면부지의 집에서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게 문제에요. 그것 때문에 최소한 저는 그렇게 간단하게 사고사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자랑스러운 국민의 경찰, 민중의 지팡이로서 말이죠."
"고맙군그려."
탁! 소리가 났다. 바둑판 위의 돌이 흔들렸다. 두 번째 판은 스님의 우세로 흘러가고 있다.

시신이 발견된 그린 아파트는 콘크리트 3층 건물로 문제의 방은 306호실, 계단을 올라 안쪽에서 두 번째 방이다. 현관을 들어서면 다다미 넉 장 반쯤 되는 식당 부엌이 있고, 오른쪽 안쪽으로 가스대와 싱크대가, 왼쪽에 좁은 널빤지를 세워놓은 듯한 욕실 미닫이문이 있다. 식당 겸 부엌의 안쪽은 다다미 6장짜리 방, 그 안쪽으로 다다미 8장짜리 방이 있는데 신혼부부는 이곳을 침실로 삼으려 했는지 큰 더블베드, 그리고 막상막하로 큰 옷장이 놓여 있다. 사체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각은 발견된 시간으로부터 40시간에서 45시간 전, 즉 전전날 저녁 8시부터 자정까지의 사이이다. 사인은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질식사. 사체에 외상은 전혀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약물의 흔적도 없었다.
"자물쇠는 구석구석까지 채워져 있었겠군."
바둑은 세 번째 판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판은 스님의 압승. 사무라는 도중에 돌을 던졌다.
"맞아요. 그리고 혹시 창문이 잠겨있지 않았었더라도 방은 3층이고 창문 밑은 절벽입니다. 현관 말고는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어요."
"현관문은 확실히 잠겨 있었나?"
"남편인 스즈미 코우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누군가의 옷과 신발은?
"있었어요. 욕실 미닫이문 위에 선반이 있는데, 거기에 놓인 의상 바구니 안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군."
세 번째 판은 중반까지 느긋하게 진행되었다.
"팬티, 셔츠, 양말, 이름이 새겨진 와이셔츠, 영국제 양복 상, 하의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습니다. 주머니에는 명함, 던힐 라이터, 테크노 시계 등. 신발은 구찌 제품으로 신발장 안에......"
"고급품뿐이네. 누군가의 지문은?"
"선명한 것은 침실에서 두 개, 다다미 6장짜리 방 하나, 부엌에서 목욕탕까지 일곱 개 정도."
"기묘하군."
스님이 과장되게 팔짱을 꼈다. 뭔가 복잡한 생각이 뇌리에 오가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는 팟! 사무라의 흑집 안에 백돌을 놓았다. 세력을 새롭게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신발에 붙어있는 흙은 아파트 부근의 것이었습니다."
"그렇군."
"뭔가 아시겠어요?"
"아니, 아직 아무것도……. 신혼부부 사이는?
"좋은 것 같아요. 뭐, 신혼부부는 대체로 사이가 좋지만....... 신랑 선배의 권유로 맞선을 보고 6개월의 교제 끝에 결혼. 당사자들은 물론 양가 부모님들 모두 좋은 인연이라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둘이 죽은 남자를 모른다는 게 정말이겠지?"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정성 들여 수사했지만, 고이즈미와 부부, 구리고 그린 아파트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저도 부부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합니다."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확실하겠지."
"이거 참, 송구스럽네요."
"죽은 고이즈미는 어떤 사람인가?"
"평범한 직장인인데, 여자관계는 깔끔하지 못한 편입니다. 4년에 한 번꼴로 부인을 울렸거든요."
"올림픽 같은 남자잖아."
스님은 자신의 농담을 즐기듯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바둑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정말 별난 사건이구먼."
"예, 뭐......"
"죽은 남자의 회사는 그래, 경기는 괜찮았다던가?
"최근 몇 년 동안의 불경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사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요."
"그래?"
스님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사건을 생각하고 있는지 바둑을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사무라 쪽도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좋다.
"좋아."
생각을 마친 스님은 굳은 결심을 한 듯, 사무라의 흑 세력을 비집고 장렬하게 돌을 내려놓았다. 묘수였다. 백에게도 위험한 수였지만, 흑으로서는 도무지 뾰족하게 응대할 방법이 없는 멋진 수였다. 무리해서 장렬한 싸움을 시작하더라도, 결과는 흑의 패배임이 눈에 보이듯 뻔했다.
"아! 굉장한 묘수네요. 완전히 당했습니다."
"아니야, 이쪽도 약점이 있어."
그러나 스님이 승리를 확신했다는건 말투로도 잘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스님의 추리도 막바지에 이른 게 틀림없다.
"사무라"
"네."
"자네, 피아노 칠 줄 아나?"
"아뇨, 음악은 전혀 재능이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자네 아파트에서는 피아노를 쳐도 되나?"
"예, 일단은요. 피아노를 치든, 방망이를 두드리든 뭘 해도 상관없습니다. 해 본 적은 없지만요."
"그럼 그린 아파트는 어떨까?"
"글쎄요......"
"그린 아파트에서 피아노를 쳐도 되는지,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되는지, 이 점을 조사해 주게."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 기묘한 질문이 사건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무라는 검은 수첩을 꺼내 스님의 질문을 적었다.
"아무래도 바둑은 이것으로 끝이군요."
스님의 한수로 반상 위의 모든 싸움은 끝났다. 계가해보니 백의 일곱 집 반 승. 종반전에서 스님의 수가 절묘했던 덕분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사무라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니, 아니. 정말 운이 좋았다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건 쪽 말인데...."
"네, 네."
스님은 뒤섞여 있는 돌들을 색깔별로 골라낸 뒤, 손끝으로 좌우로 나누며 말했다.
"신혼부부 아파트 침실......"
"예......?"
"거기 옷장 서랍......"
"네?"
"거기에 자석에 달라붙는 게 몇 개나 들어 있을까?"
"그걸 조사해야 하는 거군요."
"맞아. 내친김에 죽은 고이즈미 누군가 씨. 이 사람은 텔레비전 영화 따위를 보면서 자주 졸지 않았는지, 부처님 부인에게 물어봐 달라고. 그리고 사건이 있었던 306호실, 베란다에 러닝머신이 놓여 있었는지, 커다란 화분은 없었는지......"
"글쎄요. 그건 분명히......"
"일단 알아봐 달라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그린 아파트 306호실에 살았던 여자 중에서는 누가 수학을 제일 잘했을 것 같은지......"
"네? 그런 거 물어본다고 알아낼 수 있을까요?"
"뭐, 괜찮아. 아무튼 물어보라고."
"관리인이나 이웃을 만나서 어떻게든 대답을 모아보겠습니다."
"그렇지. 그렇게 해서 수학을 제일 잘할 것 같은 여자를 알아내면, 그녀를 만나서 수학을 제일 잘하는 여자를 만나서 개미를 좋아하는지 물어봐 줘."
"개미라니……. 그……. 저…. 설탕에 꼬이는 그거요?"
"그렇고말고."
"점점 모르겠네요"
"그렇게 불평하지 말고 한번 해 보라고."
"물론 물어보고말고요. 다른 건 없나요?"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오늘은 그 정도로......"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알아낼 수 있겠나?"
"글쎄요."
사무라는 여태까지의 이야기를 적은 수첩을 쳐다보았다.
"모레, 이틀 후 점심때까진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그거 딱 좋군그래. 나는 그날 2시 즈음까지는 잠깐 본업 쪽 일이 있어서 외출하지만, 3시 이후에는 완전히 비어 있거든. 또 바둑을 두러 오라고. 오늘은 내가 이겼지만, 모레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저는 항상 살인사건을 떠안고 다니기 때문에 바둑에 집중하는 건 어렵단 말입니다."
"천만에. 나야말로 자네가 힘든 숙제를 가져오기 때문에 여러모로 힘들다고."
"그럼, 이번의 숙제는 모레 무사히 해결될까요?
"글쎄, 그건 모르지."
지금 여기서 스님의 추리를 물어봤자 말해줄 리가 없다. 모든 것은 모레의 즐거움. 사무라는 그때까지 스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탐문과 조사를 해 올 수밖에 없다.
"정말 귀찮게 해드렸습니다."
"조금만 더 붙잡고 싶긴 하지만, 자네도 바쁘잖은가."
"그럼 실례했습니다."
현관을 나서자 부드러운 바람이 또 어디선가 농밀한 꽃향기를 실어 온다. 사무라는 향긋한 냄새를 가슴 가득히 담으며 긴 고갯길을 내려갔다.

이틀이 지나고, 스님에게 부탁받은 조사를 모두 마친 사무라는 약속한 3시에 맞춰 묘법사로 이어지는 언덕을 올라갔다.
"아저씨, 위험해요!"
그저께와 같은 개구쟁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언덕을 내려왔다. 사무라는 아이와 지나쳐 절의 입구를 통과했다.
"실례합니다."
"시간을 딱 맞췄군."
스님이 감색 줄무늬 옷을 입은 채 현관으로 나왔다. 지금 외출에서 막 돌아온 것 같았다.
"모처럼이니까 한 판"
"네."
사무라는 한시라도 빨리 스님의 입에서 범인으로 점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듣고 싶었지만, 묘법사 주지 스님의 두뇌는 언제나 바둑돌의 움직임과 함께 활동을 개시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바둑을 두지 않으면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자, 오늘은 기껏해야 한 판이겠네."
스님이 선을 잡은 결과, 사무라가 흑이었다.
"글쎄요. 과연 어떨지....."
"어때, 부탁한 조사 쪽은?"
"네, 다 조사를 마쳤습니다. 만족하실지 어떨지는 자신이 없습니다만."
"아니, 아니, 천만에."
"우선 피아노는 말이죠."
"그래."
"치는 건 금지입니다. 뻐드렁니에 쭈글쭈글한 아줌마로 엄청나게 짜증나는 스타일인 아파트 관리인이 신경질적으로 답하더군요. 벽이 얇아서 이웃에 폐를 끼치니까 악기류는 절대 사절! 이라고요."
"개,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금지지?"
"아, 그렇습니다. 잘 아시네요."
"왠지 그런 느낌이 드네."
"그리고 다음에는......"
사무라는 주머니의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맞아, 맞아. 양복장 서랍에 자석에 달라붙는 게 몇 개 들어 있는지......"
"맞네 "
"스님의 목적은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조사해 왔습니다. 손톱깎이, 가위, 양복장 열쇠, 부서진 시계, 클립, 회사 배지, 금속 빗, 안전핀, 샤프펜슬의 이상 아홉 개가 자석에 붙었습니다. 샤프펜슬은 플라스틱이지만 연결 부분이 쇠로 되어 있어서 붙더라고요. 대충 이 정도입니다."
"수고 많았어."
"그다음에 죽은 고이즈미 노부히코가 TV를 보면서 자주 졸았는지 여부였죠? 이건 부인에게 물어봤어요."
"아, 4년마다 눈물을 쏟았다는 올림픽 부인?"
"맞아요. TV를 보면서 선잠 자는 건 항상 자기였으며, 남편은 졸지 않는 쪽이었다고 대답하더군요. 하지만 곧바로 이런 질문이 수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따가운 눈총과 함께 쏘아붙여서 혼났습니다."
"그건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럼 다음에 조사한 건……."
"이봐, 자네 차례야."
"아, 고맙습니다."
사무라는 스님만큼 편리한 이중구조식 두뇌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바둑 쪽에는 집중할 수가 없게 된다.
"다음은 베란다에 러닝머신과 화분이 있는지였죠?"
"그래. 맞아."
"스님에게 그걸 들었을 때, 나도, 어라? 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 조사해 봤습니다. 그런데....."
"베란다가 없었어?"
"맞아요. 아예 베란다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베란다에 러닝머신이든 화분이든 놓을 방법도 없죠. 창밖에 있을 수 있는 건 공기와 유령뿐입니다."
"그럴 줄 알았어."
"정말이에요? 바둑처럼 억지 부리시기 없습니다."
"바둑 쪽도 억지 따위는 부리지 않는다고. 어차피 요즘은 이기기만 하니까 억지 부릴 기회조차 없잖은가?"
"어, 그랬나요?"
"이론보다 증거. 이 수는 어떤가?"
스님이 둔 수에, 사무라 오른쪽 세력이 갑자기 약해졌다. 묘수였다.
"이건......"
"괜찮았지?"
"음....."
절묘한 수를 보니, 스님의 뇌세포는 최고조로 향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조사 중에서 제일 어려웠던 건, 예상대로 지금까지 306호실에 살았던 여자 중에 누가 가장 산수를 잘하는지였습니다."
"산수가 아니야. 수학이라고."
"아, 맞네요. 하여튼 이웃 등을 조사한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3년 정도 전에 이사 간 미야오 씨라는 젊은 부인이 가장 잘하는 거로 결론났습니다. 이분은 약사 면허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이과 전공이라면, 당연히 제일 수학을 잘했을 거라는 이유죠."
"그러면 그 젊은 부인에게, 개미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았는가?"
"네, 찾아가 물었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권투 선수 말인가요? 라고 되묻더군요."
"무하마드 알리와 착각했군."
* 일본어로 개미는 '아리'
"네, 그래서 권투 선수가 아니라, 곤충인 개미 이야기라고 했더니, 갑자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라고요."
"그 여자는 매력적인 외모에, 두 살쯤 된 아기가 하나......"
"세상에, 맞아요! 스님,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팟! 스님이 돌을 한층 더 강하게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그 여자가 범인이니까"
"정말요?"
사무라는 아연실색하며 스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아셨습니까? 동기는? 어떻게 살해한 거죠?"
"본좌는 억지를 잘 부려잖나.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는 없지."
"억지는 농담이었습니다만... 빨리 알려주세요."
"자네 말을 하나씩 하나씩 듣다 보면, 이쯤에 범인이 숨어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
"자 보라고. 죽은 남자에게는 아무런 외상이 없고, 구두에는 아파트 부근의 흙이 묻어 있다고 했지?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고, 죽은 누군가 씨는 덩치가 상당히 큰 데다가 306호실은 후미진 곳에 있고 창문은 높아. 이런 걸 종합해보면, 누군가 씨는 자신의 두 발로 걸어서 306호실에 왔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해."
"그 점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사교댄스를 좋아하고, 패션을 좋아하는 멋쟁이고, 여자 문제로 4년에 한 번꼴로 아내를 울리는 남자가 한밤중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아파트를 방문했다는 것은……. 소모산 (作生)!"
스님이 웃으며 선문답의 표어를 외쳤다.
"즉, 여자겠죠."
사무라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306호실의 실제 거주자들은 한창 신혼여행 중. 그렇다면, 이 방에 들어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유력한 건 관리인이겠지. 하지만 관리인은 고이즈미 누군가 씨가 도저히 관심을 가질 수 없는, 짜증나는 쭈글쭈글 아줌마였어. 맞지?"
"네."
"그렇다면 그다음 후보는 306호실의 이전 거주자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이사할 때 방 열쇠는 관리인에게 돌려주지만, 그 이전에 여러 가지 이유로 여벌 열쇠를 만드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그건 그렇죠."
"그린 아파트는 피아노를 쳐도 안 되고, 개나 고양이를 키워도 안 된다. 그렇다면 이런 아파트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이사를 할 수밖에 없어."
"그렇군요."
"그렇다면, 306호실에는 지금까지 몇 명의 젊은 부인이 살았으며, 그 부인들이 아이를 낳은 뒤 어디론가 이사를 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해. 또 요즘 젊은 부인들이 남편 몰래 남자 친구를 만들고 있을 확률은 약 8%라고 하지."
"정말입니까?"
"아하하하. 주간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어. 매력적인 부인이라면 좀 더 비율이 높을지도 몰라."
"음, 확실히 그 젊은 부인, 미야오 유키에 씨라고 합니다만,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경찰이 이상한 관심 가지지 말라고."
"아이고, 이거 참, 잘 알고 있다고요."
"그 젊은 부인은 예전에 어딘가에서 고이즈미 누군가 씨를 알게 되어 불장난을 시작했던게 아닐까? 사교댄스를 추는 댄스홀에서 만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고이즈미 누군가는 별로 좋은 남자는 아니었어. 대단한 악당은 아니지만, 남의 약점을 잡은 뒤 협박하여 용돈을 갈취하는 정도의 범죄는 저질렀을 거야. 목욕탕 선반에 놓인 영국제 양복, 신발장의 신발은 경기가 별로인 회사에 다니는 월급이 20수만 엔인 월급쟁이에게는 사치스러우니까. 미야오 유키에 씨도 이 남자에게 협박을 당했겠지."
"그게 살인의 동기였을까요?"
"아마도. 마지막까지 몰린 나머지 살의를 품은 거야. 3년 전에 살고 있던 아파트의 열쇠를 이용할 생각을 한 뒤, 간단한 조사를 통해 지금 사는 사람들이 신혼여행을 떠나 일주일 동안 집을 비운다는 걸 알아내고는 범행에 이용한걸세. 결혼과 신혼여행은 널리 알리는 경사이니만큼, 이웃에게 물으면 곧바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그 틈을 타서 남자를 유인해서 죽인 거야."
"그랬군요."
"남의 아파트를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속이고는, 남편이 출장을 갔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만나고 싶다는 정도만 말해도 플레이보이 고이즈미 누군가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 조심을 거듭하여 몰래 숨어들어왔을 테지."
"그리고 그곳에서 목욕을 시키다가......"
"그건 아니야. 가스 목욕 중에 사고로 죽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계획적으로 그런 상황을 만드는 건 어려워. 일단 가스가 새는 상태에서 욕조 안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죽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나 자네 조사에 따르면 피해자에게는 조는 버릇이 없었어. 욕조에서 자는 사람은 상당히 선잠을 좋아하는 사람일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하잖은가. 설령 졸았다 해도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약물 흔적도 없고."
"과연, 일리 있네요."
"게다가 범인으로서는, 혹시라도 이웃들이 가스 냄새를 눈치채면 큰일이란 말이지. 그런 위험한 짓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럼 어떻게...?"
사무라는 남은 돌을 바둑판 위에 떨어트리며 말했다.
"어라? 돌을 던지는 건가?"
"네, 도저히 승부가 안 되네요."
"음, 그렇겠지, 그렇겠지. 그러면 사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고이즈미 누군가가 살해된 건 목욕탕이 아니었어. 확실히 죽이기 위해서는 더 좁고 밀폐된 곳이 필요했어. 바로 침실 옷장이지. 옷장 열쇠는 서랍 속에 있었지? 자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말이야."
"자석에 달라붙는 게 뭔지는 그래서 조사를 시키신 거군요. 그런데 남자는 옷장 안에 왜 들어간 거죠?"
"여자가 시켜서 옷을 벗고 목욕탕에 들어가려는 찰나! 여자가 남편이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겠지. 방은 3층이고, 창문 밑은 절벽이야. 도저히 도망칠 방법이 없어. 숨을만한 베란다도 없는 데다가 알몸이고. 그 상황에서 고이즈미 누군가가 아닌 그 누구라도, 여자가 빨리 옷장으로 들어가요! 라고 말하면 들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지. 그 뒤 옷장 문을 밖에서 잠가야만 열 수 없다는 설명을 들으면,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 버려도 수상하다고 느끼지 않았을 테고."
"스님, 보고 오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아하하, 그럴 리가. 하지만 이 추리는 대충 맞을 거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건 미야오 유키에 씨에게 자네가 개미 좋아하느냐고 물어봤기 때문이지. 그때 그녀가 새파랗게 질렸다고 했잖은가. 그 말을 듣고 나는 내 추리가 맞다는걸 롹신했다네."
사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개미를 좋아하면 어떻다는 것일까. 스님은 즐거운 듯이 웃고 있다.
"도시가스 냄새는 강하니까. 수면제라도 먹이지 않는 한 그렇게 쉽게 큰 남자를 죽일 수는 없어. 옷장 안에 숨어 있어도 가스 냄새가 나면 남자는 난리가 날 테고. 그래서 범인은 냄새가 없는, 순수한 일산화탄소를 맡게 할 생각을 한 거야. 그 뒤 사고사로 수습되기를 꿈꾸며 시체를 욕조에 집어넣은걸세. 잘만 됐더라면, 뭔가 이상한 사고사로 대충 마무리되었을 수도 있었겠지."
"........."
"그런 걸 생각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실행까지 하려면 확실히 화학에 대해 지식이 필요해. 그래서 수학을 잘하는 여자라는 힌트로 찾아보라고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약사님이 등장하시더구먼."
"예"
"실험실에서 일산화탄소를 만들려면, 황산과 개미산을 혼합하면 된다네. 옷장 뒤에 구멍을 뚫어 튜브라도 꽂아두면, 쉽게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 있어. 형사에게 갑자기 개미를 좋아하느냐는 말을 듣고 그 부인이 새파래진 것은 그 탓이야. 그녀는 개미라는 말을 들으면, 개미산이라는 특별한 약품을 떠올릴 수밖에 없거든. 범행이 인상 깊게 남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여자가 범인이라는 걸 확신한거야. 뭐, 일부 세세한 점은 내 추리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욕실에서 가스 중독을 시키는 건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뒤, 내 추리는 이렇게 진행되었다네...."
스님은 여전히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건 신식 개미지옥이네요."
"그거 딱 어울리는 말이구먼. 이제부터 그린 아파트로 가서 옷장 뒤에 구멍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그다음에는 그 여자, 미야오 유키에 씨를 다시 한 번 방문한 뒤, 옷장 뒤에 개미구멍이 있었다고 말해 주라고. 매력적인 여성분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몹시 기대되는구먼."
놀랍게도, 스님의 추리는 이번에도 적중했다.

2023/04/29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8. 만화경

亂れからくり (創元推理文庫) (文庫) - 8점 泡坂 妻夫/東京創元社

8. 만화경

저녁이 가까워지자 니시키 빌딩의 사무실이 붐비기 시작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임차인들이 사무실에 들러 연락 사항을 확인하기 때문이었다. 전화 사용도 많아져 통화 소리와 담배 연기가 좁은 방에 가득 찼다. 비가 내린 탓에 사무실 사람들은 모두 젖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토모히로의 고별식 다음 날,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데츠바가 마이코를 만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날짜는 토모히로의 초칠일 전인 토요일로 정했고, 시간은 추후에 알려주겠다고했다. 카오리는 전화를 끊으면서 내 생일을 잊지 않았겠지요, 라고 상기시켰었다.

그래서 시간 확인차 카오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런데 아침부터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마와리 집안의 가정부였는데, 꼼꼼한 성격 탓인지 카오리가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사무실 전화번호를 꼼꼼히 물어보았다.

토우이치는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토시오는 토모히로의 장례식 이후 마사오를 만나지 못했다.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새벽녘에는 마사오의 꿈을 꾸었다. 마사오는 죽은 줄 알았던 토모히로와 팔짱을 끼고 그의 곁을 지나갔다. 마사오는 샹보르관을 나왔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토시오는 가슴이 먹먹해져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꿈의 맛은 이상하게 달콤했고, 아침에도 좀처럼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9만 파운드짜리 자동 음악 기계인가 ......"

아까부터 신문을 읽고 있던 후쿠나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동 음악 기계?"

마이코가 되물었다. 요즘 장난감이라고 하는 것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술품 경매입니다. 영국 버크셔 백작의 성, 멘트모어 타워스가 경매에 나왔다고 하네요."

"백작님도 돈에 쪼들리는건 마찬가지인가 보네요."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세금 문제지요. 7대째가 막대한 상속세를 물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이 사람은 달마니라는 성을 하나 더 가지고 있긴 하지만요. 눈에 띄는 미술품은 전부 그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건 극히 일부라고 합니다."

"일부라도 대단한 재산인가 보군요."

"그렇죠. 세계 각국에서 3만 명의 바이어가 사전 답사를 마치고 경매는 열흘 동안 계속된다고 합니다. 멘트모어 타워스는 18세기부터 백 년 동안 수집한 프랑스 그림과 가구, 도자기, 시계 등이 가득한 보물창고라니까요요. 예를 들어 루이 14세의 책상이 5만1천 파운드, 방금 말한 두 마리의 새가 조각된 루이 15세의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 루이 16세 시대의 자카드 로스가 만든 필사 인형 같은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필사 인형이라고 하면 글씨를 쓰는 인형인가요?"

"그렇겠지요."

"설마 인형 안에 아이 같은 걸 넣는 장치는 아니겠죠?" 

"하하하, 우다이 씨가 말씀하신건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인데요, 그런 트릭도 물론 있었지만  18세기에는 이미 카라쿠리 인형의 기술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습니다. 트릭이 아니라 실제로 기계만의 힘으로 노래하고 춤추고 글씨를 쓰는 인형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지루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렇군요. 그 사람은 그만큼 트릭을 좋아하나 봅니다. 물론, 장난으로 불가능한 부분을 트릭으로 보충하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부터 마술은 기계공에서 마술사의 손으로 넘어갔고, 기계공은 기계의 가능성만을 추구하게 되었어요. 프랑스 궁정에서는 유명한 자크 드 보캉송이 활약했습니다. 보캉송은 클레오파트라의 뱀, 파우누스 신의 옆구리 피리 부는 사람 등 많은 카라쿠리을 만들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오리였습니다. 이 오리는 살아 있는 오리처럼 헤엄을 치고, 소리를 내고, 물을 마시는데다가 먹이를 던져주면 목을 쭉 뻗어 쪼아먹고, 음식물을 소화하고 배설까지 했다고 하네요. 이 오리는 훗날 마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베르 우당(Robert Wodan)의 손에 의해 수리되었고, 동시에 모든 메커니즘이 밝혀졌다고 하고요."

"마술사가 인형을 고쳤다고요?"

"그 당시 우당은 아직 시계 장인이었습니다. 그 후 우당은 오리를 보고 영감을 받아 스스로 다양한 카라쿠리를 만들었지요. 줄타기하는 인형, 기계 없이 움직이는 시계, 컵과 구슬의 기예를 하는 인형까지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마술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으로, 나중에는 마술사로 변신해 마술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지요. 오리가 생각나는데, 내가 어렸을 때 셀룰로이드로 만들어진 수영하는 오리를 팔던 장사치가 있었어요."

"저는 몰라요."

"뭐 오래 전 이야기니, 그렇겠죠. 이 오리는 더러운 통 안에 떠서 신기하게도 스스로 헤엄쳐 다녔어요. 그리고 가끔은 먹이를 잡기 위해 부리를 물속으로 집어넣기도 하고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요."

"기계 장치인가요?" 

"아니요. 보캉송의 오리도 저렇게 생물처럼 움직이지는 않았을 거에요. 생물의 움직임에는 기계에는 없는 불규칙한 부분이 있는 법인데, 노점상 오리는 그것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어요."

"어떻게요?"

"그 오리를 사면 어디서든 팔고 있는 평범한 셀룰로이드 오리를 줍니다. 다만, 한 장의 종이가 붙어있어요. 그리고 그 종이에는 오리를 움직이는 비결이 적혀있었죠."

"네?"

"<오리의 목에 실을 달고 그 끝에 살아있는 미꾸라지를 매달아 두어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거, 사기 아닌가요?"

마이코는 입을 열었다.

"사기는 아닙니다. 속임수죠. 에도 시대부터 있던 장난감이에요. 원래 이름은 '부동새'였어요. 가마우지를 본뜬 장난감이었지요. 분세이 말기, 우에노야마시타 부근에서 처음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셀룰로이드 오리는 장사치들 사이에서는 '즌부리코'라고 불렸습니다. ......반대되는 트릭도 있었어요. 이것은 만든 시체 인형을 살아있는 까마귀가 쪼아댄다는 것이었죠."

"시체 인형?"

"네, 막부 말기에는 기괴한 구경거리가 활발하게 등장합니다. 이른바 시체 세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익사체를 모방한 인형으로, 물벼락에 맞은 얼굴 등이 사실적으로 만들어진데다가 시체를 진짜 까마귀가 쪼아댔다고 하더군요."

"알겠어요! 그 시체에는 미꾸라지가 숨겨져 있었군요."

토시오는 무심코 몸을 떨었다.

"역시 우다이 씨네요. 맞아요. 재미있는 것은 미꾸라지를 너무 많이 먹은 까마귀가 쓰러졌다는 흔적까지 남아있다는 것이에요. 즌부리코도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은데 이 근처에서 팔면 돈벌이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지금 사람이라면 화를 낼 것 같네요"

"그게 문제에요. 옛날 사람들도 화를 냈어요. 하지만 아이디어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다면, 싼 거지요. 저런 걸작은 아무렇게나 나오는 게 아니니까. 백화점 같은 데서 파는게 나을거에요. 아이디어를 존중하는 교육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될 테고요. 아이디어라고 하면, 1870년대에 유행했던 미국의 메카니컬 뱅크도 아이디어만으로 팔렸죠."

"메카니컬 뱅크? 들어본 적 없는데요?"

"기발한 구조의 저금통이었는데요. 주물로 만든 견고한 구조로 동전을 넣는 상자 위에 사람이나 동물의 장난감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이 중에 ‘조련사’라는 저금통을 한 번 알아볼까요? 동전을 조련사의 손에 들고 상자에 달린 레버를 누르면 옆에 있던 개가 뛰어올라 조련사의 동전을 물고 저금통 안으로 떨어트립니다. ‘광대’는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레버를 누르면 입이 열리고 손이 움직여 동전을 입에 집어넣고요. 가장 걸작은 '정치가'라는 저금통입니다. 큰 의자에 꼿꼿이 앉은 정치가의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무게에 의해 팔이 움직여 주머니에 만들어진 동전 넣는 구멍에 동전을 쏙쏙 집어넣습니다. 정치가의 무표정한 얼굴이 참 웃기죠. 그 외에도 마술사, 펀치 앤 주디, 엉클톰, 링컨 등 200여 종의 제품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금통 위에 동전을 올려놓으면 모터가 움직이면서 상자 안에서 해골 손이 나와서 동전을 잡고 상자 속으로 사라지는 장난감을 본 적이 있어요."

"그래요, 그런 게 메카니컬 뱅크, 즉 기계식 저금통입니다. 처음 개발되었던 당시에는 모터 같은 건 사용하지 않았지만요. 오히려 그런 소박한 점이 좋았어요.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라쿠고(落語) 속에만 남아 있지만, 히다리 진고로(ひだりじんごろう)가 만들었다는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 마네키네코(招き猫)가 그것이에요. 손바닥 위에 정해진 수의 동전을 올려놓으면 사라져 버리는 장치인데, 이것도 메카니컬 뱅크, 기계식 은행의 일종이었을 것 같네요."

"히다리 진고로는 장난에 관련된 전설이 많네요."

"맞아요. 카라쿠리에는 전설이 많이 붙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카라쿠리를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현존하는 물건은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나무와 종이로 만든 집에 살았고, 도시의 역사는 큰 화재의 반복이었으니까요."

"외국에는 오래된 장난감이 많이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야 많죠. 물론 중요한 멜첼의 자동 체스 인형은 필라델피아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었어요. 하지만 런던 박물관에 가면 17세기 마스켈라인의 카라쿠리을 볼 수 있습니다. 조라든가 사이코라든가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네요. 메카니컬 뱅크도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전시회가 열렸을 때 취재한 적이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이고요. 뉴욕의 사미엘 F 프라이어 씨가 수집한 것으로 주모우의 카라쿠리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어요."

"주모우라고 하면 비스크 인형이네요."

"우다이 씨, 잘 알고 계시네요."

"저를 비스크 인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렇군요.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 닮았네요. 주모우의 작품은 카라쿠리이 아니더라도 지금도 애호가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 같아요."

"자동 음악 기계가 9만 파운드나 한다니까요…."

소우지 씨는 주모우의 인형을 몇 점 갖고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골동품 가치가 있는 자동 기계 인형을 가지고 있다면 상당한 재산이 되지 않을까.

이야기 도중에 카오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하지만 카츠 씨 회사, 정말 바쁘신가 봐요. 몇 번을 전화해도 통화 중이었어요."

"미안해요." 

카오리는 시간을 지정했다. 내일 1시에 나사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우다이 씨와 함께 오라고 했다.

"카오리 씨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토시오가 물었다.

“네, 카네이션이 좋아요. 연홍색으로, 아셨죠?"

카오리는 그렇게 말했다.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연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이 뭔지 알아?"

다음 날, 나사 저택으로 향하는 에그 안에서 마이코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렇겠지. 꽃말은 열애야."

"...... 그러나 그녀가 지정한 겁니다."

"놀리는 걸까, 아니면 의외로 진심인걸까?"

"카오리 씨에게는 슌키치라는 약혼자가 있어요."

"해바라기 공예의 직원이지?"

"맞습니다."

"그럼 오늘은 못 올거야. 크리스마스와 설날을 앞둔, 장난감 회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기니깐. 토요일이라고 해도 정시에 퇴근하는 건 불가능해. 특히 젊은 평사원은 말이야."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어. 괜찮아. 정 어려우면 카오리의 억지에 당한 척 하라고."

어제 내린 비는 완전히 그쳤고, 오랜만에 하늘이 맑게 개었다. 시내를 벗어나 언덕을 오르니 씻겨 내려간 단풍의 색이 한층 더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나사 저택의 중앙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서 바라본 인상보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는, 저택 건물의 비틀림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벽은 원래는 선명한 주홍색으로 빛났을 터였지만 지금은 기괴한 검붉은 색이었고, 벽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담쟁이 덩굴이 겹겹이 쌓인 모양은 마치 거대한 뱀의 비늘을 연상케 했다. 당나라 풍의 기와에서 튀어 나와있는 푸른 오각뿔 모양의 탑은 기괴한 조합으로 보였다.

흙담은 곳곳이 무너져 무질서하게 관목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당초 문양의 철책문은 열린 채였다. 토시오는 문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정원 한가운데에 고풍스러운 클래식 자동차가 놓여 있다. 소우지의 애마(愛車)일까? 토시오는 그 옆에 차를 세웠다.

황량한 정원이었다. 저택 맞은편은 낮게 경사져 있고, 내려다보이는 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연못 왼쪽의 기하학적인 녹색 면이 이야기로 들었던 미로인 것 같다. 연못과 미로 건너편에는 녹나무, 소나무 등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카오리는 빨간 양복을 입고 나타났다. 검은 옷을 입은 카오리만 알고 있던 토시오에게 카오리의 모습은 신선한 놀라움이었다.

"어서 오세요. 기다렸어요."

카오리는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표정이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가슴이 풍만하게 솟아오른 모습은 지금까지의 카오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토시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카오리의 뺨에 금방이라도 수줍은 홍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방으로 안내할게요."

카오리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현관에 들어서자 탑 아래가 홀이었다.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바로 카오리의 방이었다. 계단, 난간, 문짝의 나무는 모두 세월의 흔적이 묻어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방 안은 지금까지의 건물 인상과는 달리 밝은 색채로 가득했다. 창문이 두 개 있는데, 한 쪽 창문을 통해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이 아래가 오빠 방, 그 앞이 아버지 방이에요."

카오리 씨가 설명했다. 그 안쪽이 조리실이고, 가사 도우미의 작은 방이 있다고 한다. 2층은 카오리가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아틀리에라고 했다.

"그런데 아틀리에로 마사오 씨가 이사를 올지도 몰라요."

"마사오 씨가?"

토시오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두 사람이나 되는 가족을 한꺼번에 잃고 너무 쓸쓸해 보여서요. 제가 권하고 있어요."

"마사오 씨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결정하지는 못햇어요. 방금 전에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마사오 씨는 이 집에 계신가요?"

"그래요."

카오리는 하얀 화병에 카네이션을 꽂아놓고 연신 모양을 다듬었다.

"뜻밖의 선물 ......"

카오리는 꽃병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꽃병 옆에는 길쭉한 화장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카오리는 마사오와 소우지와의 관계를 모르는 것 같다고 토시오는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사오를 불러들이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카오리는 잠시 시계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이거, 전부 카오리 씨의 작품인가요?"

마이코는 아까부터 벽에 걸려 있는 여러 그림을 보고 있었다.

카오리의 방에 화사한 색감이 넘쳐나는 것은 밝은 색감의 그림들 덕분이었다. 대부분의 그림은 추상적인 면과 선의 교집합이 선명한 색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조금 과장된, 시제품 같은 느낌이에요."

카오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 만족스러운 듯 했다.

마이코는 그 중 한 장의 그림에 마음이 꽂힌 듯 했다. 중앙에 패턴이 있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로 퍼져나가는 그림이었다.

"만화경을 보는 것 같네요......"

마이코는 이렇게 평했다.

"훌륭해요."

카오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바로 만화경이라는 제목이에요. 언젠가 만화경을 보다가 그 그림의 주제가 떠올랐어요. 만화경의 빙글빙글 도는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애를 썼어요."

토시오는 만화경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만화경이라고 하면, 장난감?"

"그래요, 만화경. 카츠 씨도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지금은 어른들이 보기에도 좋은 멋진 만화경들이 많이 팔리고 있어요."

카오리는 일어서서 유리장 문을 열고 예쁘게 채색된 원통 몇 개를 꺼냈다. 그 중 하나를 토시오에게 건넸다. 원통은 미세한 체크 무늬가 있고 한쪽에 작은 렌즈가 달려 있었다.

"만화경의 원형은 영국의 데이비드 브루스터라는 물리학자가 만들었다고 해요. 원형은 통 안에 들어 있는 색종이를 사방의 거울에 비춰서 다른 쪽의 구멍을 통해 보는 것인데, 이 만화경에는 그 종이가 없죠. 파타노스코프라고 해요."

토시오는 원통에 눈을 돌렸다. 원통 안쪽에서 마이코의 얼굴이 여러 개로 분해되어 겹쳐 보였다. 그 기형적인 이미지에 숨을 죽였다.

"색종이 조각이 아니라 실제 풍경을 기하학적으로 바꾸어 버리는 거죠. 망원경과 만화경을 합친 거죠."

파타노스코프는 마이코에게 넘어갔다. 마이코도 신기하다는 듯이 방 이곳저곳을 들여다보았다.

"이것도 파생품 중 하나인데, 작은 조각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지만 통을 움직이면 안쪽의 거울이 움직여요."

그 작은 조각은 불규칙한 색종이 등이 아니라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통을 움직이면 인물이 요염하게 얽히고 설키며 갈라졌다.

"통이 아닌 만화경도 있어요. 스피아로스코프라는 것은 두 장의 맞닿은 거울 아래에서 무늬가 있는 원반을 돌려서 그림을 변화시키는 거죠. 그리고 가장 이상한 건 이거예요. 안티스코프예요."

카오리는 또 다른 검은색 통을 토시오에게 건넸다.

"내 얼굴 좀 보세요."

그것은 기괴한 모습이었다. 카오리의 얼굴이 삐뚤빼뚤하게 휘어져 있었다. 시점을 바꾸면 크고 작은 눈알이 흔들거렸다. 코만 거품처럼 날아와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만화경의 어떤 파생품에서도 기본은 변하지 않아요. 그것은 어떤 불규칙한 형태도 순식간에 규칙적인 대칭으로 바꿔버리는 거울의 마술이죠. 그런데 안티스코프는 어떤 질서정연한 대칭도 비틀어 버리고 말아요. 원통 안의 거울을 구부러뜨린 것이겠지요. 이걸로 보면 인간의 형상은 모두 벨마이어의 인형처럼 변해버리게 되지요. 이 ‘반’ 만화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의 매력은 정돈된 형태가 순식간에 그로테스크하게 변하는 기괴함이에요."

토시오는 안티스코프로 카오리가 그린 만화경을 보았다. 색채가 뒤틀리고 흐르고 기묘하게 뒤섞여 마치 썩어가는 고기 덩어리처럼 보였다.

"만화경에 열광하는 나를 보고 오빠가 만화경을 준 적이 있었어요. 작은 평범한 만화경이었어요. 한참을 들여다 본 나에게 오빠가 이상하다며 거울을 건네줬어요. 거울로 보니, 내 눈 주위에 동그랗게 먹물이 칠해져 있었어. 만화경 눈과 맞닿는 부분에 먹물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정말 장난이 심하지 않아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정부가 들어왔다.

"......어르신께서 손님을 모셔다 달라고 하십니다."

마이코와 카오리가 방을 나갔다.

토시오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택 바로 앞은 화단이었을 것이다. 잡초 사이로 기하학적인 흔적이 보인다. 왼쪽에 연못 쪽으로 튀어나온 석가산이 있고, 그 위에 기울어진 작은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에 서면 정원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자 앞은 가파른 경사면으로, 경사면 끝자락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에는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물줄기는 연못에서 시작되는 것 같았다. 연못 왼쪽 안쪽에 있는 미로에 눈이 갔을 때였다. 나무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볼품없죠?"

정신을 차려보니 카오리가 옆에 서 있었다.

"이런 정원도 운치가 있지요."

토시오의 말에 카오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츠 씨, 아첨을 잘 못하시네요."

카오리는 토시오와 함께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저 하늘 저 멀리."

카오리가 중얼거렸다. 쳐다보니 카오리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히로 씨가 그런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마사오 씨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있었을 텐데...."

젊은 여성과 단둘이 있는 방에서, 그것도 여성이 감상에 젖어 있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카오리는 토시오를 잠시 쳐다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우다이 씨 이야기란, 무슨 이야기인가요?"

모처럼의 배려이긴 하지만 마이코에 대해 이야기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뭔가 어려워 보이던데요."

"맞습니다 ......."

토시오는 뭔가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아첨을 잘 못한다는 말을 듣고 위축되어 버린 것 같았다. 대답은 당연히 무미건조한 것이 되었다.

"연분홍색 카네이션의 꽃말을 아시나요?"

카오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요. 열애일 거에요."

"알고서 주셨군요."

"카오리 씨의 희망이었으니까요. 슌키치씨가 오늘은 오지 않을 줄 알기도 했고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으니 회사가 바쁘겠죠."

카오리는 토시오를 바라보았다.

"당신, 대단해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안돼요. 좀 더 센스 있는 대사를 쓰지 않으면 안 돼요. 이런 건 어때요?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나는 여심의 미로를 잘 알고 있어."

토시오는 카오리의 말을 반복하면서 자신이 광대 같다고 생각했다.

"시도해 보지 않겠어요? 사실은, 진짜 미로가 있어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제 미로에 관한 책도 조금 읽었죠."

"그럼 잘 알고 있겠군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카오리는 토시오의 손을 잡았다.

복도로 나와 현관을 등지고 정원에 면한 문을 열었다. 문은 무거운 기척을 내며 열렸다. 화단으로 나가는 돌계단을 내려가서 화단을 지나면,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로 굽이굽이 연못을 향하고 있었다. 연못은 예상외로 물이 맑고 깨끗했다. 카오리의 모습을 발견한 새하얀 오리 서너 마리가 헤엄쳐 왔다.

"샘이 의외로 풍부해요."

카오리는 한 마리씩 오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연못을 따라 왼편으로 가니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 나왔다. 광장 중앙에 높은 담장 같은 울타리가 보였다.

카오리는 울타리 앞에 섰다. 그곳은 울타리가 끊어지고 안쪽으로 길이 이어져 있었다.

"여기가 입구인데, 자신 있어요?"

"있습니다."

토시오가 대답했다.

"그럼 안내해주세요."

"카오리 씨는 미로 길을 모르시나요?" 

"몰라요. 어렸을 때는 오빠랑 자주 놀았는데, 그 때는 작은 나뭇가지의 조합이나 길의 느낌으로 절대 길을 잃은 적이 없었어요. 아이는 그런 직감이 예민하잖아요. 카드 뒷면의 작은 얼룩을 기억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안 돼요. 미로에 계속 들어가지도 않았고, 감도 둔해졌을 거예요."

"그럼, 제 손을 잡고 가시죠."

토시오는 울타리 사이로 들어갔다. 카오리는 토시오의 오른손을 잡았다. 토시오는 미로에 들어가자마자 왼손을 뻗어 울타리 왼쪽에 댔다.

"뭐하는 거에요?"

"미로 책에 나온 방법이에요. 이 왼손은 절대로 울타리에서 떼지 말고 걸어야 해요. 나머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도 왼손을 떼지 않으면 빠져나올 수 있어요. 다만, 조금 돌아갈 수는 있지만요."

"좋아요, 재미있을 것 같네요."

길은 쾌적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울타리 덤불이 길을 좁게 만들고, 나뭇잎에는 어제 내린 비가 아직 묻어 있었다. 서너 번 모퉁이를 돌자, 더 이상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왼손만이 의지할 수 있는 길잡이였다.

한참을 걷다 보니 길가에 타원형의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뭐죠?"

"의자요. 길을 잃은 사람이 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돌의 중앙에는 빗물을 통과시키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토시오는 의자 앞을 지나쳤다.

꽤나 긴 길처럼 보였다. 그리고 어느 모퉁이를 돌았을 때 갑자기 시야가 트였다.

"도착했나요?"

하지만 그것은 둘이 들어왔던 원래의 입구였다.

"실패했네요."

"아닙니다. 자, 아직 손이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았죠. 책에 보면 미로를 한 번 빠져나와서 바깥쪽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고 나와 있었어요."

"융통성 없는 방법이네요, 뭐, 괜찮아요."

두 사람은 미로의 바깥쪽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서 이 미로가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골인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뒤에서 카오리가 말했다.

"내기할까요?"

"무엇에요?"

"만약 카츠 씨가 골인하지 못하면 모두가 모였을 때 노래를 부르세요."

"노래는 잘못하는데요."

"하지만 미로에는 자신이 있지요?" 

"네, 있어요."

"있어요. 그럼 내가 골인 지점에 도착하면?"

"카츠 씨에게 키스를 할게요."

카오리는 진지하게 말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왠지 모르게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모퉁이를 돌자 다시 입구로 나왔다.

"내가 이겼네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토시오는 카오리의 손을 놓았다. 손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내가 읽은 책에 따르면 미로에는 단연결 미로와 복연결 미로 두 가지가 있어요. 단연결 미로라면 지금의 방법으로도 골인할 수 있어요. 따라서 이 미로는 복연결 미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연결이 뭐예요?"

"이 미로의 울타리를 모두 끈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지금 끈의 한쪽 끝을 잡고 공중에 매달아 놓았다고 생각하면, 단연결 미로라면 모든 끈이 다 들어올려질 수 있어요. 하지만 복연결 미로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땅 위에 남겨진 밧줄이 생기게 됩니다. 햄튼 코트의 미로 역시 복연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복연결 미로에서도 골인 지점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뭐라고요?"

"예를 들어 백묵 등으로 길의 왼쪽에 선을 긋고 가는 거죠. 모퉁이를 돌면 원하는 방향으로 꺾어가는 거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양쪽에 두 줄로 체크된 길을 만날 때가 있어요. 양쪽에 두 개의 선이 있다는 것은 이미 한 번 갔다가 다시 돌아온 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이 길은 피해서 지나가야죠.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목표 지점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최단거리의 길을 찾을 수 있고요. 즉, 표시된 길 하나만 따라가면 되니까요."

"좋은 방법이네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잠입한 테세우스는 미녀 아리아드네스로부터 받은 비단실 구슬을 풀면서 나아갔다고 하죠. 테세우스도 분명 같은 생각이었겠지요. 비단실을 가져올까요?"

"백묵을 준비해 왔어요."

토시오는 주머니에서 백묵의 작은 상자를 꺼내 보여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왼손으로 벽을 쓰다듬으면서 갈 수는 없겠지요."

"그럼 나는 잠시 볼일을 보고 다시 올게요."

카오리는 시계를 보았다. 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내기는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알아요.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약속이 있어요."

카오리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 최단 거리를 찾아줘요."

라고 말하고는 빙글 돌아서서 달려갔다.


미로를 백묵으로 체크하며 진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땅은 어둡고, 백묵은 쉽게 끊어졌다. 땅에 웅크리고 선을 긋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탓에 토시오는 몇 번이고 일어나서 허리를 크게 펴야 했다. 카오리는 현명하게도 이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작업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을까. 나중에 경찰 수사관에게 끈질기게 추궁을 당하게 되지만, 십오 분, 삼십 분 정도인 것 같았다.

갑자기 날카로운 폭발음이 들렸다.

토시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뻐근하게 아팠다.

폭발음은 한 번 뿐이었다. 토시오는 귀를 쫑긋 세웠다. 다시 돌아온 고요함은 이전보다 더 깊게 느껴졌다. 그 고요함 속에서 작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쿵'하고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에 이어 물이 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폭발음으로 인해 청력이 예민해져 있지 않았다면 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소리는 금세 작아졌고, 곧 사라졌다.

토시오는 무언가 모를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느다란 백묵의 선을 따라 미로처럼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달렸다. 폭발음의 방향은 물론이고 방향도 알 수 없다.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마음은 급했지만 미로는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도 길을 잘 살펴본 덕에 막다른 골목에 빠지는 것만은 면했다.

미로를 벗어나자마자 연못 쪽으로 돌아갔다. 길은 그 길밖에 몰랐기 때문이었다. 언덕길을 화단 쪽으로 올라가려다 마주오던 마이코와 부딪혔다.

"무슨 소리야?"

마이코가 큰 소리로 외쳤다.

"모르겠어요. 미로 속에 있었으니까요."

"연못 쪽에서 소리가 들렸어."

"연못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로 안에서도 소리는 들리지 않아요."

"그럼 전망대 정자 쪽으로 가보자."

마이코는 방금 왔던 화단 길을 되돌아갔다. 저택 앞에 소우지가 서 있었다.

"오, 비스크, 아니, 우다이 씨였군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모르겠어요. 소우지 씨는?"

"제 방에 있었어요. 왠지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나와 보았습니다."

"정자 쪽으로 가 보시죠."

세 사람은 일단 저택 앞을 나와 주차장이 되어 있는 공터 앞을 지나 정자로 향하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따라갔다.

정자에 도착하기 전,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붉은 옷이 보였다. 그 옆에는 마사오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부인, 무슨 일입니까?"

마사오는 입을 열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카오리는 연못을 바라보며 마사오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토시오는 카오리를 일으켜 세웠다. 토시오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카오리의 얼굴 밑에 고인 피였다.

카오리의 얼굴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왼쪽 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알이 부서지고 찢어진 붉은 살덩어리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매캐한 피 냄새 속에서 토시오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카오리를 안고 있던 팔의 힘이 사라지고 주위가 하얗게 변했다. 그는 자신이 기절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亂れからくり 복잡한 기계장치 : 1 달그락달그락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