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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28

2025 블로그 리뷰 결산 (스물 두 번째!)

안녕하세요. 어제의 "어차피 곧 죽을텐데"로 올해 블로그 업로드는 마무리하고, 올해 결산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참고로, 요새 이런저런 플랫폼에서 유행하는 리캡에 편승한건 아닙니다. 제 블로그 연말 결산은 이번이 스물 두 번째이니까요. 

간략한 블로그 통계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2025년 독서 결산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올 한 해 읽은 총 책 권수는 82권입니다.

  • 추리 / 호러: 48권
  • 기타: 14권
  • 역사서: 9권
  • 디자인/스터디 : 1권
  • 기타 장르문학: 5권
  • Food / 구루메: 5권

독서량이 작년(110권)에 비하면 30% 가까이 대폭 줄었는데, 영화나 애니메이션 감상이 늘은 탓입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아무래도 쉽게 볼 수 있는걸 선택하게 되네요. 추리 소설은 왠만한 작품으로는 신선함이나 재미를 찾기도 좀 어려웠고요. 그동안 너무 많이 읽었던 탓이지요.

그래도 1년에 100권은 읽어야 책 좀 읽는다고 할 수 있으니, 내년에는 좀 더 힘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는 카테고리별 베스트, 워스트입니다.


1. 추리 / 호러

베스트: 매미 돌아오다 - 사쿠라다 도모야 : 별점 3.5
- 곤충과 과학, 일상 추리를 결합한 독특함이 인상적이다.

올해 별점 3.5점을 줬던 작품은 이 작품 외에도 오가와 사토시의 "신의 퀴즈"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더 정통 본격 추리물에 가깝고, 수록 단편 중 "반딧불이 계획"은 별점 4.5점의 걸작이라서 올해 베스트로 꼽습니다. 

워스트: 신곡 - 가와무라 겐키 : 별점 1.5
- 범죄 스릴러로의 매력은 전무하다.

올해 별점 1.5점의 망작은 모두 여섯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망작들은 추리물이기는 합니다. 이 작품은 애초에 추리물이 아니에요. '밀리의 서재'에서 '추리, 스릴러' 카테고리로 분류하지만 않았어도 워스트로 꼽지는 않았을텐데, 뒷통수를 맞은 듯한 배신감이 너무 컸네요.

2. 기타

베스트: 그거 사전 - 홍성윤 : 별점 3
- 가볍지만 의미도 있다.

읽은 책 중 절반에 가까운 여섯 권이 별점 3점을 받아서 한 권을 꼽기가 애매하지만, 재미와 정보 모두 좋았던 이 책을 꼽아 봅니다.

워스트: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별점 1.5
- 2025년에 읽기에는 낡고 지루했던, 재미와 가치 모두 압도적인 워스트. 

3. 역사서

베스트: 미친 항해 - 마이크 대쉬 : 별점 4.0
- 충격적인 실화를 방대한 자료로 치밀하게 재구성한 뛰어난 논픽션. 난파 관련 논픽션은 항상 기대 이상!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4. 디자인 / 스터디

베스트: 일상 감각 연구소 - 찰스 스펜스 : 별점 3.0
- 일상 감각을 해킹하는 여러가지 팁이 가득.

이 분야는 올해 한 권만 읽어서 워스트는 없습니다.

5. 기타 장르문학

베스트: 거짓과 정전 - 오가와 사토시 : 별점 4.0
- 독특한 세계관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SF와 만나 신선한 재미를 선사한다!

워스트: 별점 1점대가 없어서 올해는 선정하지 않습니다. 다 별점 2점이네요.

6. Food / 구루메

베스트: 전쟁은 일본인의 밥상을 어떻게 바꿨나 - 사이토 미나코 : 별점 3.5
- 상세하게 알 수 있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식생활.

워스트: 초콜릿어 사전 - Dolcerica 가가와 리카코 : 별점 1.5
- 방향성과 완성도 모두 기대 이해.

2025/12/27

어차피 곧 죽을 텐데 - 고사카 마구로 / 송태욱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탐정 나나쿠마 스바루와 조수 야쿠인 리쓰는 시한부 생명의 환자들만 모인 '하루살이 회' 정기 모임 초대를 받아 모임 회장 자야마 교이치의 외딴 별장으로 향했다. 미스터리 애호가인 회원들에게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회원인 자야마, 지로마루, 롯폰마쓰, 가모, 하시모토, 하루나와 함께 즐거운 저녁을 보낸 다음 날, 홀 벽에 걸린 하루나의 그림이 훼손되었고 가모가 사망했다. 의사인 자야마와 지로마루의 검안으로 병사로 추정되었지만, 야쿠인은 타살일 수 있다 여기고 나나쿠마와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날 나나쿠마마저도 죽은 채 발견되었다...

제 23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의 문고 그랑프리 수상작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이기도 하고요.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 되어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징이라면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정통 본격 미스터리의 ‘클로즈드 서클’ 형식을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외딴 별장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 기묘한 참석자들, 밀실이라는 공간적 설정 등은 전형적이지만,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되지 않았고 피해자가 자연사(병사)로 보이도록 꾸며서 과학 수사나 경찰의 개입이 일시적으로 미치지 않는다는 설정이거든요. 작중 표현 그대로 ‘어정쩡한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아요. 

나나쿠마 사건은 별게 없지만, 가모 사건은 정통 본격물다운 트릭이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사체 발견 당시, 인슐린을 이용한 저혈당성 쇼크 살인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이는 나나쿠마의 조사로 곧바로 반박됩니다. 가모가 부착하고 있던 혈당 측정기 데이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쿠라코는 나나쿠마가 죽은 뒤, 데이터는 가모 것이 아니라 나나쿠마의 것이었다고 추리합니다. 그녀의 측정기가 가모와 동일 기종이었거든요. 가모는 나나쿠마에 의해 인슐린 쇼크로 살해당했고, 이를 나나쿠마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조작된 데이터를 보여주었다는 추리이지요. 밀실은 데이터를 보여주려고 가모의 짐을 뒤질 때(측정기를 찾기 위해서) 몰래 가지고 있던 가모 방 열쇠를 가방 안에 있었던 양 꺼내 들었던 것이고요. 현실적이라서 그럴싸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두 살인 사건 모두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을 왜 살해했나"라는 기묘한 상황에 더해, 사실은 가모와 나나쿠마가 모두 죽은 척 했었고 이는 대충인 검안과 사체 이동 등에서 드러난다는 등 진상 부분에서도 본격물적인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외에도 나나쿠마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였고 야쿠인은 그녀의 손자라는 점이 드러나는 장면은 서술 트릭의 맛을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사쿠라코의 추리를 한 번 더 꼬아서 만든 반전과 진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무엇보다 핵심이 되는 가모 게이타 사건의 진상이 이상합니다. 나나쿠마가 살해한게 아니라 야쿠인이 인슐린을 투약해 죽이려 했던게 진상인데, 그렇다면 혈당 측정기 데이터가 변하지 않았다는 설명과 충돌합니다. 혈당이 실제로 떨어졌다면 데이터가 변했어야 하고, 변하지 않았다면 야쿠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으니까요. 의대생 출신이라는 설정까지 고려하면 당연합니다. 자신의 인슐린 투약이 효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 병사로 믿고, 다음 날 나나쿠마 살해까지 저지른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밀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쿠인이 가모에게 인슐린을 투약한 뒤, 가모가 스스로 방을 잠갔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주사에 이상함을 느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방을 잠글 이유가 있을까요? 인슐린이 가짜라는걸 나나쿠마가 미리 알려주어서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건 알았더라도, 문을 잠그면 밀실이 되는데 혹시라도 죽으면 자연사로 보일 수 있으니 잠그지 않는게 당연합니다.

가모 사건 때 하루나의 그림을 훼손한 부분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미 나나쿠마가 그림을 본 상황에서, 그리고 모델인 사쿠라코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림만 훼손한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나나쿠마를 어차피 살해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가모와 나나쿠마를 '병사'처럼 보이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그림을 훼손하는 실질적인 범행을 저지른 건 자칫 경찰 수사의 꼬투리가 될 수도 있으니 하면 안되는 짓이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이 지로마루가 손녀의 죽음 진상을 밝히기 위해 꾸민 연극이었다는 설정도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자야마의 ‘하루살이 회’는 실재했던 것일까요? 자야마는 수년 전부터 블로그 활동을 해 왔던 인물인데, 그 모든 게 연극이었다는 설정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큰 연극을 벌이는 상황에서 정작 가모의 방에 CCTV를 장치해 야쿠인의 범행을 찍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래서야 무엇을 위한 연극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설정도 썩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나나쿠마 1인칭이 섞이는 묘사는 전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나쿠마와 사쿠라코의 말투도 의도된 유머일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무례하게 느껴졌고 몰입을 방해합니다. 마지막에 하루나가 야쿠인을 독살하는 듯한 묘사 역시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동기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림을 훼손했기 때문에? 하루나 본인 스스로 습작에 불과해 미련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이유가 될 수 없지요.

정통 본격물을 현대 무대의 클로즈드 서클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고, 몇몇 볼만한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한참 모자랍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수상작은 기대에 미쳤던게 없었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네요. 앞으로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5/12/26

자백의 대가 1~12 (2025) - 이정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꽤 인기를 끈 넷플릭스 드라마입니다.
남편 이기대 살인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구속된 안윤수에게, 유명한 살인마 모윤이 “내가 대신 죄를 뒤집어쓸 테니 부탁 하나를 들어 달라”는 거래를 제안하는 초반부만큼은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안윤수가 돌봐야 할 어린 딸이 있는 상황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도 높고요.
남편을 죽이지 않았지만 모윤과의 거래 조건으로 풀려난 대신 진짜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에 처한 안윤수의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진짜 이기대 살인범에 대한 조사, 수상한 인물의 등장, 모윤과의 밀땅 등 이후 전개도 재미있어요. 

범죄물답게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눈길을 끈 건 진범이 최수연이라는걸 증명하는 단서입니다. 이기대가 남긴 판화에 찍힌 최수연의 지문이지요. 이는 판화가인 이기대라는 직업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도, 원판과 유일한 프린트를 진영인·최수연이 훼손했지만 테스트 프린트가 남아 있었다는 반전까지 깔끔하게 이어집니다.

김고은의 연기도 돋보입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짧게 깎은 머리로 복수심에 사로잡힌 서늘한 악녀를 설득력 있게 그려 냈습니다. 전도연의 연기도 안정적이에요. 50세가 넘었는데도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동안도 놀랍고요. 그리고 존댓말을 쓰는 싸이코패스 살인마 커플인 진영인·최수연의 연기도 섬찟합니다. 

하지만 범죄극으로서의 치밀함은 크게 부족합니다. 우선 진영인·최수연 부부가 안윤수 남편 이기대를 살해한 후, 범행 은폐가 성공해 안윤수가 죄를 뒤집어쓰는 과정이 지나치게 대충입니다.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잘 풀렸다는게 잘 납득이 되지 않아요.

이후 모윤이 지시한 고세훈 사건은 더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안윤수는 살해한 척 사진만 찍었지만 이후 진영인이 실제로 고세훈을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왜 굳이 죽였는지 이유가 불명확합니다. 고세훈이 살아 있다면 모윤이 거래를 철회하고, 다시 안윤수가 이기대를 죽인 진범으로 재판받게 될 겁니다. 이미 백동훈 검사도 모윤과 안윤수의 거래를 눈치채고 있는 상황이니까요. 즉, 어차피 안윤수는 이기대 살인범으로 구속될테니 진영인·최수연은 고세훈을 죽이는 위험을 무릅쓸 까닭이 전혀 없습니다. 고세훈을 죽인 누명까지 안윤수에게 뒤집어 씌우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잖아요?

이야기 전개와 설정도 억지 투성이입니다. 모윤 주변에 사건 관련 인물들이 모이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필 모윤(강소해)와 같은 감방에 동생 자살의 원인을 제공했던 P양이 함께 수감되어 있고, 또 하필 P양의 남자친구가 고세훈의 지인으로 고세훈 살해 당시 CCTV 동영상 데이터를 보관하고 있다는건 비현실적입니다.
피해자 이기대의 통화 목록에서 진영인과의 연결고리를 검찰과 경찰이 찾아내지 못하고, 안윤수가 전자발찌 훼손 후 장기간 도주하는데 이를 허용하며, 모윤은 병원에서 이탈했다가 칼에 찔려 죽을 뻔 했고 나중에는 탈옥까지 저지르지만 이런걸 미연에 막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찰과 경찰을 아무리 우습게 봤어도 그렇지,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 외에도 납득이 되지 않는 설정은 많습니다. 진영인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모윤의 변호를 자처했다는 설정처럼요. 모윤이 안윤수 범행을 대신 자백한 뒤 기존 변호사가 변호를 포기했기 때문에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애초에 변호를 맡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의문입니다. 안윤수 딸의 잦은 유괴, 모윤의 기이할 정도로 충실한 조력자 네트워크, 안윤수와 진영인이 만나던 순간의 미술관 CCTV를 진영인이 지웠다는 설명들도 개연성을 깎아 먹는 요소들이고요.
모윤(강소해)의 동기인 성폭행에 따른 동생 자살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표현도 부족할 정도로 뻔하며, 범인 진영인의 자백 비슷한 행각으로 마무리 되는 결말도 유치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들은, 본래라면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에피소드 한두 편 분량으로 정리될 이야기를 12화로 길게 늘렸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음모와 억지 설정이 과하게 붙고 말았어요. 모윤이 이기대를 죽였다고 자백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서, 백동훈 검사가 둘의 거래를 쫓고 안윤수는 모윤에게 압박받으면서도 남편 살인범을 찾아내려 노력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면 훨씬 좋았을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인 백동훈 검사와 장정구 변호사의 연기는 별로입니다. 백동훈 검사는 '안윤수가 진범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딜레마 표현을 실패했고, 장정구는 반대로 '안윤수가 진범일 수 있다'는 딜레마를 그려내지 못했거든요. 백동훈 검사는 그냥 항상 화가 난 표정으로만, 그리고 장정구 변호사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선한 인물로만 등장하는 탓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짧은 분량으로 압축되었다면 모를까, 흥미로운 설정에만 기댈 뿐 범죄 스릴러로서의 완성도는 부족합니다.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덧붙이자면, "자백의 대가"라는 제목만 봤을 때에는 티에리 크루벨리에의 논픽션을 생각하고 그냥 자백을 잘 끌어내는 사람이 주인공인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습니다. 이런 경우 "자백의 댓가"라고 표기하는게 맞을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2025/12/21

카우보이 비밥 TV Serires (1998~1999) - 와타나베 신이치로 : 별점 2.5점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만화에만 집중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거의 보지 않았지요. 이동이 잦았던 취준생, 직장인이었던 탓입니다. 이동하면서 보는건 꿈도 못 꿀 시대였거든요. 당시는 구하기도 힘들었고요. 그래서 "에반게리온"을 필두로, 당시 유명했던 작품은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이 작품 역시 1990년대 후반, 세기말을 대표하는 작품이지만 당시에는 감상하지 못했고 2025년 올해, 처음으로 전 시즌을 감상하였습니다. 

설정과 줄거리는 워낙에 유명하니 소개는 생략합니다만, 확실히 '잘 만든' 작품인건 맞네요. 특히 작화와 연출이 뛰어납니다. 카메라 워크와 속도감은 지금 보아도 괜찮고요. 재즈와 블루스, 록 등 여러 장르를 활용한 음악도 에피소드별로 분위기에 잘 맞도록 연출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도 매력적입니다. 스파이크, 제트, 페이의 외모와 대사, 액션은 물론 인물별 개별 서사가 이야기에 잘 결합되어 있는 덕분입니다. 에피소드별로 등장인물들의 '기억'과 '현실', '꿈'에 대한 여러 단서들을 하나 둘 씩 보여주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만들다가, 마지막 대단원에서 한번에 정리하는 구조도 좋습니다.

하지만 단점 역시 분명합니다. 우선 설명이 너무 부족해요. 스파이크의 과거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에피소드의 절반 이상은 물론 본편에 해당하는 이야기조차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비셔스는 조직을 차지했는데 왜 스파이크를 못 죽여서 안달일까요? 그냥 분위기와 스타일에 의존한 채 이야기를 흘려보낼 뿐입니다. 게다가 본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쥴리아, 비셔스와 스파이크의 이야기는 너무 뻔하고 재미없었습니다. 보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2인자 이야기 그대로니까요. 그냥 현상금 사냥꾼 일을 하면서 펼치던 소소한 추격과 범죄극이 훨씬 나았어요. 문제는 경쾌한 SF 활극 측면에서는 "우주해적 코브라"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액션도 양과 질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그리고 여러모로 "루팡 3세"의 설정과 구조에 SF와 진지한 느와르 색채를 덧씌운 설정이라서 크게 신선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언제나 단벌 양복을 입는 유쾌한 더벅머리 스파이크는 루팡이고, 진중한 연장자 역할의 제트는 지겐이지요. 페이는 주인공 일당이지만 같은 편이라 보기 어려운 팜므파탈 후지코 그 자체고요. 그나마도 잘 따라하지 못했습니다. 비밥호 멤버 중에서 에드는 "루팡 3세" 계열이 아니니까요. 특히 에드는 이야기에 기여하는 바도 거의 없으며, 등장할 때마다 산만함과 짜증만 유발해서 아무리 보아도 작품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뛰어난 작화와 연출, 매력넘치는 등장인물들이라는 강점은 분명하지만, 서사적 완성도와 이야기 구조는 솔직히 기대 이하였어요.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는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2025/12/20

세계문학단편선 39 윌키 콜린스 (꿈 속의 여인 외 9편) - 윌키 콜린스 / 박산호 : 별점 1.5점

근대 미스터리, 추리 소설의 초창기 거장 중 한 명인 윌키 콜린스의 단편집입니다. 저자의 단편은 이전에 몇 편 읽어보았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스럽습니다. 빅토리아 시대 감성 그대로의, 낡고 지루한 내용이 가득한 탓입니다. 이야기는 모두 예상대로이며 신선함이나 새로움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물론 거장의 편린이 엿보이는 작품이 없지는 않습니다. 우선 "쌍둥이 자매"는 첫 눈에 반한 여성 제인과 결혼하게 된 스트릿필드가 결혼식 날, 자신이 반했던 여자는 제인이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클라라는걸 깨닫는다는 상황 설정이 기가 막힙니다.

"페루지노 포츠 씨의 인생길"은 영국 신사임을 자처하는 속물 포츠 씨가 거구의 이탈리아 여성에게 속박당하는 수난의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묘사합니다. 이른바 영국식 유머 소설 느낌인데, 포츠 씨 일기라는 형태의 1인칭 시점으로 화끈하고 깨는 맛을 더해주는게 좋습니다. 이런 작품도 잘 쓰는 작가라는건 처음 알았네요.

"아주 기묘한 침대"는 10여년 전에 읽었던 단편인데 여전히 재미있었어요. 침대가 서서히 내려오는 묘사는 그야말로 압권이고요.

제미나이로 그려본 아주 기묘한 침대가 놓여진 방

하지만 예전보다는 장황함이 지나치게 느껴졌는데, 빅토리아 시대 원전에 충실한 번역 탓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덕분에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의 "내 방 여행하는 법"을 언급하며 방을 꼼꼼히 살핀게 '나'가 생명을 구한 이유가 되었다는걸 알게 되었지만, 예전만큼 '걸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좋은 작품이기는 합니다.

"죽은 자의 손"에서의, 경마 시즌이라 빈 방이 없던 탓에 여관 주인의 '말없고 조용한 동숙인'이라는 말에 속아 시체와 하룻밤을 보내게 된 아서 홀리데이의 상황만큼은 기발합니다. 시체를 바라보다가 시체가 움직인걸 알아챈 순간의 묘사 - 이제 거길 보자 침대 옆으로 축 늘어진 길고 흰 손이 보였다. 그 손은 시체의 머리 쪽과 발치를 가린 두 장의 커튼이 만나는 곳에 꼼짝도 않고 늘어져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모든 것을 감춘 채 길고 흰 손만 보여 주었다. - 도 일품이고요.

하지만 이외 작품들은 모두 지루하며, 눈여겨 볼 부분도 거의 없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고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은 볼거리이기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착오적입니다. "얼어붙은 땅"에서 연적과 표류하게 된 리처드처럼요. 그는 목숨걸고 연적 프랭크를 옛 연인에게 데려다 주고 죽고 맙니다. 순애보도 아니고, 그에게는 일종의 '임무'였기 때문이라는데, 참 낡아빠진 발상이지요.

좋았다고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도 일부 상황 설정이 재미있을 뿐, 낡고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의 손"이 대표적이에요. 시체와 함께 있는 두려운 상황을 한껏 고조시켜 가다가, 죽은게 아니라 살아있었는 사람이었고 그는 아서 홀리데이의 의붓형일지도 모른다?는 황당한 결말입니다. 이런 식의 작위적인 전개가 대부분의 작품에 가득하다는 문제도 크고요.

기대했던 범죄, 추리 계열 작품도 없다시피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구태여 찾아 읽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2025/12/19

오무라이스 잼잼 15 - 조경규 : 별점 2점

이전 권 리뷰에서 더 구입하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형에게서 생일 선물로 받아 읽게 되었습니다. 책 가격이 2만원을 돌파했네요.

특유의 정감 있는 그림체와 따뜻한 분위기는 여전하고, 다양한 음식에 얽힌 이야기와 정보들은 여전히 흥미롭습니다. 따로 국밥은 6.25 때 밥이 미리 말아져 있는 국밥을 양반들이 체면 때문에 거부해서 생겨났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투움바 파스타는 미국 아웃백에서 만들어진 메뉴다라는 등 음식 유래들에 대한 설명이 특히 좋습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정통 알프레도 파스타에는 크림이 들어가지 않고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와 버터만 들어간다는 등 처음 알게 된 정보들도 많고요. 

그리고 레시피도 꽤 볼 만 합니다. 무엇보다 초코파이 라테 레시피가 가장 눈길을 끌었습니다. 초코파이를 전자레인지에 6초간 데운 뒤, 에스프레소와 우유를 뿌리고 부숴서 먹는 디저트라는데, 이건 꼭 한 번 만들어 보고 싶네요. "연유처럼 끈적이고 달콤한 삶" 편에서 연유의 유래와 함께 소개되는 홍콩의 '버터 돼지'(딱딱한 롤빵에 연유와 버터를 넣은 간식)를 한국 가정에서 만들려면 빵을 플레인 베이글로 대체하면 된다는 등의 꿀팁들도 눈길을 끕니다. 

하지만 이전 권에서도 언급했듯 가족 이야기의 비중이 높아졌다는건 단점입니다. 더 이상 음식과 요리 만화가 아니라 가족 일상툰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에요. 가족끼리 어디 놀러가서 뭘 먹었다는 류의 에피소드 반복은 식상하다는 말도 사치라 느껴질 정도로 뻔하고요.

이미 웹툰으로 읽은 독자가 책을 구입할만한 요소도 여전히 부족합니다. 독자가 뽑은 오무라이스 잼잼 명대사라던가 팬아트 모음은 솔직히 페이지 낭비입니다. 맛집 탐방 및 소개 역시 인터넷 컨텐츠 대비한 장점을 찾기 어려웠어요. 이래서야 가격 인상에 걸맞는 내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원래 이 시리즈의 장점이었던 음식 중심의 이야기와 정보성이 점점 희석되어 가는데, 다음 권을 구입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대로라면 구입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네요.

2025/12/14

포즈랑의 투자 이야기 - 포즈랑 : 별점 2점

전업 투자자로 활동하며, 13년 동안 70배 넘는 수익을 거두었다는 포즈랑 님의 생생한 투자 경험담과 실전 노하우를 담은 재테크 서적입니다.
저자가 실제로 시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실패와 성공 사례, 그 과정에서 깨달은 원칙과 노하우를 차분하게 기록하여 알려줍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가치 투자'는 상승 가능성이 큰 기업을 사전에 분석해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방법으로, 이를 위해 투자자로서 가져야 할 태도와 투자 요령, 그리고 실제 사례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습니다. 

저자의 몇몇 원칙은 참고할 만 합니다. 종목을 결정하면 포트폴리오 내에서 얼마의 비중을 채울지를 정하고, 주가와 상관없이 다음 날 장 마감 전까지 절반을 매수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이후 주가가 오르면 속도 조절, 떨어지면 더 빨리 채우고, 다 채웠는데도 더 떨어진다면 아이디어가 유효하다면 비중을 더 늘린다는 식입니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종목을 고를 때부터 확신을 가지고 판단해야 가능한 전략이지요. 저도 지정가를 낮게 잡아서 매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확신이 있다면 이렇게 매수해 봐야겠어요.

매도 시점에 대한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한 수익 구간까지는 기다리고 버틴다는게 원칙인데, 이 역시 종목을 골랐을 때 수익에 대한 목표도 명확히 해두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이 외에도 현실적인 투자 조언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PBR은 보지 말고 PER만 간단하게 보라, 장기적으로 상승 여력이 크다고 판단한 종목은 비중을 10% 이내로 묵혀두어라, 어느 정도 성과가 나면 일부 수익을 실현해 다른 종목으로 분산하라, 인생이 바뀔 만큼 주식을 많이 사면 위험하다, 주가가 떨어질 때 추가 매수를 할 수 없는 종목이라면 애초에 매수하지 말라, 시장이 모두 하락할 땐 함께 빠지지만 상승장은 각자 오른다 등 실전에 적용할 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특히 “유튜브 주식 방송 좀 그만 보고 공부의 양을 늘려라”는 말은 완전히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펀드매니저와 개인 투자자의 차이를 짚으며, 개인은 잘못된 결정 몇 번으로 자산을 잃고 나락으로 갈 수 있으므로 추천이나 루머에 휩쓸리지 말고 반드시 본인이 정보를 확인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도 투자 초보자에게는 인상 깊을 조언이고요. 그 외에도 심리를 다스리는 법 등 유용한 조언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핵심은 저자가 실제로 가치 투자를 할 때 기업을 분석하고 발표한 방식입니다. 재무제표, 10년간 손익과 최근 분기 실적, 사업 모델, 투자 아이디어, 리스크, 결론 순으로 정리된 자료의 목차는 실제 발표 예시와 함께 소개되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매우 유익합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공부해야 진짜 ‘투자’라고 할 수 있다는 말도 인상 깊었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전업 투자자 기준에서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용하지만, 일반 직장인 투자자가 그대로 따라 하기에는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저자도 분명히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하면 일반 직장인은 차라리 액티브 ETF 같은 상품을 이용하는게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 전체의 구성도 조금 아쉬웠습니다. 목차와 편집 방식이 마치 개인 투자 일지를 그대로 옮긴 듯한 인상이어서, 읽는 동안 조금 산만하게 느껴졌습니다. 중요한 내용들이 중간중간 섞여 있지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아서, 정보 전달력 측면에서도 아쉽고요.

생생한 투자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도 있었지만, 재테크 서적으로서는 유용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저자의 투자 접근 방식과 일반 투자자로서의 입장 차이가 큰 탓입니다. 직접 투자를 고민하고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2/12

전지적 독자 시점 (2025) - 김병우 : 별점 2점

"나 혼자만 레벨업"과 쌍벽의 인기를 누리는 판타지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 블록버스터 판타지 영화입니다. 세계가 갑자기 '성좌'들의 관전용 무대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라는 소설 속 현실로 탈바꿈한 상황에서, 소설의 유일한 독자였던 김독자가 소설 속 내용을 미리 알고 있다는 설정의 작품이지요. 미래를 미리 알고 있는 기존 회귀물, 전생물과는 약간 차별화되면서 독특한 재미를 준 설정입니다. 지난 주에 넷플릭스에 업데이트 되었길래 감상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만 놓고 보면 그런대로 재미있습니다. 액션 판타지 장르로서 킬링 타임용으로는 무난한 편이에요. 안효섭(김독자 역), 이민호(유중혁 역) 두 주연 배우의 캐스팅도 잘 어울립니다. 두 사람의 호흡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잘 알겠더라고요. 단점이 뚜렷하게 느껴졌거든요. 우선 CG가 전반적으로 부족합니다. 게임 동영상이나 철지난 중국 무협 영화를 보는 듯해서 몰입을 방해하는데, 그 중에서도 절정부인 최종 화룡과의 결전 장면이 가장 실망스럽습니다. 몬스터들의 디자인 역시 현실감 없이 게임에서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라 위협감도, 설득력도 떨어지고요.
액션도 특별히 합이 잘 맞는다던가, 서로의 특성을 살려 위기를 극복하는 식으로 그려져 있지 못합니다. 유중호의 이기어검술(?) 등 여러 스킬들은 모두 중국 무협 영화 그대로라서 새로움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야기 구성도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단순한 게임 스타일로, 이를 극복하면서 나오는 반전이나 복선은 거의 없습니다. 김독자가 소설 내용을 알고 있다는게 별로 효과적으로 사용되지도 않고요. 오히려 금호역에서 천인호를 쫓다가 결계에 갇혀 죽기 직전, 갑자기 난입한 이지혜가 구해주는 식으로 우연과 운에 의지한 전개를 보이는 설정 구멍만 더 크게 느껴집니다.
마지막 화룡과의 결전에서 유중호가 죽는 장면도 뜬금없습니다. 유중호가 죽은 것 외에는 김독자의 작전대로 흘러간 건데,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 실망하고 감정선을 무겁게 끌고 가는 건 납득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추가 아이템을 얻어 칼을 완성해서 화룡을 물리치는데, 그럼 그 전의 작전은 어쩔 셈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여러모로 이야기의 완성도가 부족합니다.

부족한건 이야기 완성도 뿐만이 아닙니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현재 상황이 어떤 구조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설명이 부족합니다. '성좌'의 무대라는 전제는 나오지만, 코인, 아이템, 스킬 같은 기본 설정조차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게임적인 설정이라서 그냥 넘어갔다면, 이 영화를 과연 대중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원작과 다른 설정도 문제입니다. 특히 김독자와 작가가 일종의 '게임'을 하는 듯한 설정은 최악입니다. 작가가 이야기에 개입할 수 있다면, 김독자의 전능한 예지 능력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서는 안되는 부분이었어요. 여성 캐릭터들도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여성 인물들이 캐릭터성을 갖지 못한 뻔한 설정인데다가, 이지혜는 왜 등장했는지조차 불분명할 정도입니다. 연기도 어색한 부분이 많고요.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출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길영이가 코피를 쏟으며 사마귀를 조종하고, 그 장면을 본 이현성이 각성하는 장면은 지나치게 전형적이고 유치합니다. 

결론적으로 킬링 타임용으로는 그럭저럭 볼 만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원작의 팬이라면 실망할 수 있고, 원작을 모른다면 초반 설정부터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또한 CG 퀄리티, 각색 방향, 연출 등 여러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추천하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2025/12/11

샘터 무기한 휴간

샘터 무기한 휴간

1970년부터 간행되었던 장수잡지 샘터의 무기한 휴간 뉴스를 접했습니다. 

쇼츠와 SNS 등으로 컨텐츠 중심축이 옮겨간 탓에, 지지 독자가 확고하지 못한 일반 종이 잡지가 버티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여러모로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노래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겠지요? 저에게 좋은 추억을 안겨다 주었던 것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호가 될 26년 1월호만큼은 꼭 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2025/12/07

단 3개의 미국 ETF로 은퇴하라 - 김지훈(포메뽀꼬) : 별점 1.5점

네이버 경제 전문 블로거 포메뽀꼬의 ETF 투자 안내서입니다. 최근 재테크에 관심이 생겨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은퇴 자금은 9억 원(연 생활비의 25배)이 필요합니다.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자산을 보호하려면 금융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6% 이상의 투자 수익을 창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평균 5~6%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매년 4% 정도를 생활비로 인출해도 자금은 감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 투자 방법들은 별다른게 없습니다. S&P500에 장기간 복리 투자하라는 조언은 유튜브나 블로그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니까요. S&P500 외에도 투자 수익률을 위한 QQQ, 배당을 위한 SCHD에 투자하라는 조언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장기간 투자가 어려운 4050 세대를 위해 고배당주 투자를 권하는건 조금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커버드콜' 상품의 경우 많은 전문가들이 꺼리는 상품인데, 이 책에서는 꽤 강하게 추천하고 있더군요.
또한 S&P500, SCHD 외에도 저자가 실제 투자 중인 종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환율을 활용한 투자법이나 레버리지 투자 전략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습니다. 예를 들어 저자가 IRP 계좌로 투자하고 있는 ETF는 아래와 같은데, 참고가 되네요.

  1. ACE 미국나스닥100채권혼합 액티브
  2. TIGER 미국테크TOP10채권혼합 액티브
  3. SOL 미국배당미국국채혼합50

노동력과 무관한 금융 소득을 따로 모아 일정 금액이 되면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방식도 인상적입니다. 매일 소수점 매수하는 적립식 투자의 성과가 좋다는 이야기도요. 뭐니뭐니해도 꾸준함이 제일 중요하다는 의미겠지요.
그리고 저와는 관련 없지만, 신혼부부 재테크 전략이나 대출과 투자의 비중 조정에 대한 조언은 해당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어 보입니다.

다만 워낙 보편적으로 알려진 내용이 많아서, 이 책만의 차별적인 '비결'이 있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제목처럼 단 3개의 ETF만을 콕 집어 집중 소개하지도 않고요. 유튜브나 다른 재테크 블로그를 살펴봐도 이 정도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닙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25/12/06

희생양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인으로 프랑스 역사 교수인 존은 프랑스 여행 중 자신과 똑같이 생긴 프랑스 시골 귀족 장 드게와 만났다. 장은 다음 날 존의 옷과 짐, 차를 가지고 몰래 떠나면서, 존이 자신(장)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에 빠지게 만들었다.

마지못해 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 존은 장의 가족과 영지 마을에 가득한 갈등과 증오에 치이다가, 장의 아내 프랑수아즈의 비참한 죽음 이후 각성하여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정상 궤도로 되돌리는 데 성공했지만, 장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는데...

"레베카"의 작가 대프니 듀 모리에가 1957년에 발표한 장편 소설입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남자가 우연히 만난 뒤 벌어진 한 남자의 일주일간 대역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흥미로워서 쭉쭉 읽힙니다. 일주일간의 대역극 이야기가 생각보다 단단하게 짜여 있는 덕분입니다. 주인공 존이 보내야 하는 장 드게의 삶이 가족 간의 냉랭한 분위기와 갈등, 복잡하게 얽힌 과거사 등으로 다양한 드라마를 품고 있기도 하고요.

존이 장인 척하며 과거사와 갈등의 원인을 하나씩 밝혀가는 과정이 특히 볼 만합니다. 차례대로 단서가 제공되면서 결국 진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추리 소설을 방불케 합니다. 이 중 장 드게가 2차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가, 누나 블랑슈의 약혼자였던 모리스 듀발을 부역자로 몰아 직접 총살했다는 진실이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질투 때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랬고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이념 충돌이 불러왔던 비극도 떠올리게 했습니다.

존이 감정적으로 가족과 얽히며, 프랑수아즈의 죽음을 계기로 가족을 각자의 자리로 되돌려 놓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존이 이 가족을 위해 계획한 '역할 분배' — 동생 폴 부부에게는 공장 경영에서 손을 떼고 해외 연수와 영업 기회를 주고, 공장은 원래 모리스의 연인이었던 블랑슈에게 맡겨 혁신을 이끌게 하고, 어머니는 모르핀을 끊고 다시 가문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며, 마을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직업을 주는 등 — 는 급작스럽지만, 앞부분에서부터 가족 각자의 사연과 불만을 충실히 쌓아온 덕분에 충분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원인을 명확히 밝히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추리 소설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야기 전개의 또 하나 재미 요소는, 존이 어떻게든 장 드게인 척하려 애쓰는 장면들입니다. 대표적인 게 사냥 장면입니다. 총을 쏴 본 적 없는 존이 사냥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부러 손에 화상을 입어 빠져나가지만, 키우던 사냥개가 말을 듣지 않거나 말실수를 하면서 점차 수렁에 빠지는 과정이 아주 실감납니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전형적이지만, 장 드게의 딸 마리노엘만큼은 독특한 매력을 뽐냅니다. 아직 어린 천사 같은 소녀인데, 그녀가 악의 없이 행한 행동들이 상황을 수렁에 빠트리기 때문입니다. 고의는 아니지만 장 드게의 선물을 가족 앞에서 풀어보게끔 유도하여 가족 간 불화를 키우고, 건강하다는 걸 과시하려다가 프랑수아즈가 아끼던 도자기를 깨서 히스테리를 유발하고, 폴과 르네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걸 지적해서 화를 돋우며, 고행을 자처해 실종된 바람에 홀로 남게 된 프랑수아즈가 사고를 당하고 마는 식입니다. 이런 류의 캐릭터는 지금은 흔하지만, 1957년이라는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굉장히 선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점도 큽니다. 우선 지금 읽기에는 설득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전혀 다른 배경의 두 남자가 얼굴이 똑같고, 그중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삶을 일주일간 대신 살아가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설정부터 말이 안 됩니다. 대가족이 사는 저택과 작은 시골 마을 영지에서 일주일을 보냈는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건 무리가 있지요. 가족 간의 갈등과 거리감이 크다는 설정으로 어느 정도 합리화하려 하지만,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보다 더 큰 단점은 결말이 굉장히 싱겁다는 겁니다. 프랑수아즈의 죽음으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 장 드게가 돌아오자, 존이 아무런 저항 없이 조용히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끝입니다! 이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삶의 변화를 만들어 냈는데도 불구하고요. 살의를 품기는 했지만, 결국 존이 마지막에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모습은 여러모로 허무하고 시시했습니다. 특히 장 드게는 영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인간 말종 쓰레기에 가까워서 제대로 처단되었으면 했는데, 그런 인물이 돈과 존 덕분에 정상 궤도에 오른 가족을 모두 손에 넣는다는 결말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작품이라면 보다 치밀한 심리극이나 범죄극으로 마무리했어야 했습니다. 가족과 사랑에 빠진 존이 장을 어떻게든 죽이고 시신을 잘 숨겼지만, 모종의 이유로 다가올 미래에 시신이 드러나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죠.
프랑수아즈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창틀에 떨어진 로켓을 주우려다 추락사했다는 진상은 너무 평범했습니다. 마리노엘의 악의 없던 장난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었다거나, 장 드게가 선물한 로켓에 뭔가 장치가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런 반전은 없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짙게 깔린 종교적 색채도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쉽게 읽게 만드는 몰입감은 뛰어나지만, 이야기 전체를 지탱해야 할 중심 설정이 설득력이 부족하고 결말이 시시한 탓에 아쉬움이 더 큽니다. 기대했던 범죄극이 아니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묵직한 심리극과 가족 드라마를 선호하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겠습니다만, 범죄극이나 추리물 애호가 분들께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5/12/05

귀멸의 칼날 1~23권 - 고토게 코요하루 : 별점 2.5점

최근 극장가를 강타한 인기 애니메이션 원작 만화입니다.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는데, 딸 아이가 친구 영향으로 빠져들었길래 어떤 만환가 싶어 보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인기가 있을만 하더군요. 가장 눈에 띄는 미덕은 장편 서사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서도 불필요하게 늘리지 않고 완전히 정리했다는 점입니다. 인기 때문에 전개를 비틀거나 후반부에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억지로 끼워 넣지 않고, 주요 인물 모두에게 적당한 마무리를 주면서 이야기가 긴 기-승-전-결로 깔끔하게 마무리됩니다. 길이도 적당한 편이고요.
덕분에 지나친 파워 인플레도 없고, 세계관 최강인 빌런 보스 무잔을 없애기 위한 귀살대의 처절한 노력도 설득력있게 묘사됩니다. 귀살대 전원이 공격해도 정면승부로 이기는건 불가능했고, 온갖 독약을 때려 넣어야 겨우 이길 수 있었다는 전개는 아주 좋았어요. 

전투 작화도 괜찮습니다. 귀살대 대원들의 특기 호흡마다 성격이 뚜렷하고, 오니의 능력도 각기 달라 보는 맛이 충분합니다. 오니 디자인도 과하지 않은 편이고요.

주인공 탄지로는 평면적이지만 네즈코, 이누시치, 젠이츠가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설정과, 악역들 역시 단순한 악인으로 처리하지 않고 각기 다른 사연을 부여했다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이들을 중심로 한 짧은 개그나 SD 컷도 적절하게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엄청난 인기를 얻을만한 작품인가?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습니다. 신선함이 없다시피한 탓입니다. 동족(부하)을 늘릴 수 있는 빌런 보스의 유일한 약점은 햇빛이라는 기본 소재부터 흡혈귀물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오니가 되었지만 다른 방법(잠)으로 인육에 대한 욕구를 잠재우고 낮에도 활동할 수 있는 네즈코 역시 "블레이드"의 데이 워커 설정과 똑같고요.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니가 된 악역들의 개인적인 상처나 사연도 뻔하지만 이를 중심으로 한 연출은 "오니키리마루"를 떠오르게 하고, 주인공 파티의 구성과 성장 단계가 단계별로 등장하는 강적과 함께 표현되는 방식은 "타이의 대모험"이나 "바람의 검심" 같은 왕도 점프식 전개의 익숙한 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는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엄청난 인기는 원작보다는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의 덕이 컸다고 생각되네요.

그래도 완결까지의 흐름이 깔끔하고, 기본기가 탄탄하며, 왕도 만화의 재미를 잃지 않는다는 장점은 확실하기는 합니다. 원작도 나름의 가치는 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다만 시대를 넘어서서 회자가 될 정도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