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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6

식스웨이크 - 무르 래퍼티 / 신해경 : 별점 2.5점

식스웨이크 - 6점
무르 래퍼티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기 2493년, 4백 년 항해 예정의 항성 간 이민 우주선 승무원인 마리아 아레나는 마른 피로 얼룩진 클론 재생 탱크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런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 마리아는 새로 깨어난 클론이 자기뿐만 아니라 여섯 명 승무원 전원임을 깨닫게 되고, 클론 재생실에는 칼에 찔려 죽은 승무원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외로운 밀실 우주선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게다가 모든 승무원이 죽었다면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책 소갯글에 혹해서 읽게 된 SF 미스터리 장편입니다. 우주선에 탑승한 여섯 명의 승무원이 서로 죽고 죽여서 전멸한 뒤, 사건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클론으로 재생된다는 설정이 아주 매력적이라 읽게 되었습니다. 누가 살인자인지, 동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이 이보다 더 잘 맞아 떨어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기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사건에 대한 추리적인 내용보다는, SF 소설로서의 비중이 훨씬 높거든요. 물론 나쁜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SF 적인 부분은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클론에 대한 세세한 설정이 아주 돋보입니다. 이 세계의 클론은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쳐 철저한 법률에 근거하여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 탄탄한 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클론의 존재에 대해 거대한 다툼과 많은 죽음이 발생한 후 이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됩니다. 이를 통해 복수의 클론은 금지되며, 복수의 클론이 적발될 경우 가장 나중에 복제된 클론 외에는 모두 폐기한다, 마인드맵을 저장한 뒤 클론에 그대로 이식하여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마인드맵을 수정하는 마인드해킹 행위는 엄금한다, 그리고 클론은 생식능력을 제거하며 재산은 그 자신에게 상속된다는 등의 세세한 법안이 제정됩니다.
이는 단지 설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클론에 대한 설정은 승무원들의 과거와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주선 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클론을 증오하는 엔지니어 폴이 모두를 살해한게 진상이니까요. 

또 이 사실이 밝혀지는 승무원들의 과거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특히 클론에게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던 오르만 신부가 반대파에게 납치된 후 클론으로 재생되었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 속 등장인물의 과거 에피소드로만 놓기 아깝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과연 클론에게 영혼이 있을까? 부터가 흥미로울 뿐 아니라, 해커들이 마인드맵을 해킹하여 대상자의 성격을 비롯하여 모든걸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건, 영혼이 숫자로 치환되어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어서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클론에게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복수심을 불태우는 엔지니어 폴이 복수를 완성한 뒤, 정작 그 자신이 클론으로 복제되어 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아주 괜찮았어요.

이외에도 현재 시점에서 아직 선장은 죽지 않고 혼수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클론이 이전 선장을 폐기해야만 하는 딜레마, AI 이안은알고보니 원래 인간이었는데 마리야가 마인드맵을 해킹하여 만들어낸 인공지능으로 약간의 조작을 통해 다시 인간으로 클론 복제할 수 있었다라는 반전 등 재미난 디테일이 많습니다. 클론 복제를 음식을 만들어내는 음식 인쇄기를 통해 진행한다는 결말도 복선을 통해 잘 설명되고 있고요.
주인공들이 탄 우주선 도르미레 호의 설정도 그럴듯합니다. 도르미래호는 아르테미스라는 머나먼 별로 떠난 일종의 이민선입니다. 여섯명의 승무원들은 수천명의 냉동 클론을 무사히 아르테미스까지 운송하는 대신, 그들이 지은 중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승선한 범죄자들이죠. 이렇게 범죄자들이 사면을 조건으로 거대 계획에 종사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나, 이를 SF로 변주한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추리적으로는 그다지 정교하지 못합니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의 실력자 샐리 미뇽이 거대 이민선을 비롯하여 승무원들, 심지어 인공 두뇌까지 관계자들을 투입한 이유부터가 제대로 설명되고 있지 않거든요 '복수'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는 하는데, 샐리 미뇽은 워낙에 실력자라서 구태여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종의 악취미로 단지 승무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붕괴하기를 바랬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 사이에서 사건이 일어나는데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 그리 효율적이라고 볼 수는 없고요.
아울러 협박과 고문 탓이지만 마리아가 볼프강, 히로를 해킹하여 엉망으로 만든건 사실입니다. 이는 충분히 살해 동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볼프강과 히로가 마리아에게 살의를 품는건 말이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원수로 알고 있는 폴이 마리아 외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인다는 진상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클론이라서 다 죽일거였다면 20년 동안 참을 이유도 없고요. 게다가 폴은 볼프강에게 대적할 수 없는 체형과 체력의 소유자라는게 이미 설명되기도 했거든요.
그 외에도 어차피 죽일거라면 마리아만 왜 독미나리로 중독시켰는지, 히로는 대체 왜 자살했는지도 그렇게 납득이 가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중 인격이 된 히로가 폭주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결론적으로 처음에 여섯 명 모두가 죽게된건 단지 우연이었을 뿐이며, 그들이 클론으로 되살아난 것 역시 즉사하지 않은 마리아가 재생 버튼을 눌렀을 뿐이라는 작위적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마리아가 펼치는 추리쇼 형태 느낌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도 딱히 단서가 탄탄하게 뒷받침된게 아니라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복선을 좀 더 치밀하게 짜 두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폴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공정하게 단서를 얻는것 자체가 힘들었던 것도 나쁜 추리물의 전형이고요. 이야기에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 사람이 알고보니 범인! 이라니, 이건 좀 너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도입부와 여러가지 설정 덕분에 몰입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약간은 용두사미 느낌이라 아쉬웠습니다. SF로는 완벽하나 추리적으로는 더 탄탄한 구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래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이런 류의 장르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9/12/16

2001+5 Space Fantasia Anthology - 호시노 유키노부 / 김완 : 별점 1.5점

2001+5 Space Fantasia Anthology - 4점
호시노 유키노부 글 그림, 김완 옮김/애니북스

좋아하는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의 단편집입니다. "요녀전설 1"은 비록 큰 실망을 안겨 주었지만, 이 책은 항상 평균 이상의 작품을 선보였던 SF 단편집이라 기대가 컸습니다. 대걸작 "2001"의 후속작같은 느낌의 제목도 큰 기대에 한 몫 단단히 했고요.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실망입니다. 특히 책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Starship Adventure" 탓이 가장 큽니다. 제대로 완결을 맺지 못하고 중도에 연재가 중단된 미완성 작품이거든요. 연재 잡지가 폐간되었다는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만, 작가 후기에서라도 결말에 대해 전해주지 못하는 완벽한 미완성 작품을 돈을 받고 판다는건 좀 비양심적인 행위였다 생각합니다. 죽은 작가도 아니고, 엄연히 살아있다면 결말은 정리해서 알려줬어야죠!
그렇다고 미완성인 이야기를 억지로 단행본화할 만큼 멋지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호시노 유키노부의 장기인 Hard SF가 아닌 스페이스 오페라같은 가벼운 액션 활극인데, 특징은 명확하지만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에서 기대할만한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내용도 평이하고요. 그나마 "아서월드"라는 소제목처럼, 아서왕 전설을 이야기에 깊숙이 연결시켜 전개하는 아이디어 정도만 눈에 뜨일 뿐입니다. '아발론'이라고 명명한 고대 외계인의 우주선 '엑스칼리버'를 손에 넣은 지구인들이 침략자들에 대항해 싸워나간다는 식이죠. 등장인물들도 팬드래건, 랜슬럿, 갤러해드, 퍼시벌, 거웨인 등 친숙한 이름들이 대거 등장하고요. 솔직히 너무 억지스럽게 가져다 붙인 티가 물씬 나서 딱히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요. 결론적으로 점수를 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 별점은 1점입니다.

이 미완성 작품 외에는 총 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역시나 대체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체 평균 별점을 내자면 1.5점 정도입니다.

"밤의 망망대해에서"

이전 "2001"의 단편과 이어지는 내용으로, 오래전 우주를 탐사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커크의 후일담을 그리고 있습니다. '월-E'와 크게 다르지 않아요. 구형 로켓이 신형과 사랑에 빠져 신세대의 아담과 이브가 된다는 내용이니까요. 대단한 상상력이 발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고생만 한 커크에게 꽤 괜찮은 선물같은 결말이라는 점에서는 그런대로 괜찮았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진노의 그릇"

2001 러시아에서 핵전쟁을 일으킨다는 내용의 짤막한 소품으로 별로 특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냉전시대에 누구나 상상했었을 그런 이야기를 충실하게 그림으로 옮긴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별점은 1.5점입니다.

SPACE FANTASIA Part 1~3

제목처럼 3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2장 분량으로 짤막한 SF 꽁트입니다. 앞장은 기묘한 설정, 뒷장은 그 설정에 대한 반전과 같은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반전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소설로 따지면 '쇼트쇼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소품이라 점수를 주기 애매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포보스 & 데이모스"

화성의 포보스 기지에서 급작스러운 바이러스에 의한 사고가 발생되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작품입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포보스 기지의 바이러스는 포보스 지하에서 채굴한 얼음에서 발생했습니다. 이는 지구에서 튕겨나온 운석에서 비롯된 것이고요. 그리고 운석은 공룡 멸종을 가져온 대폭발 때문에 지구에서 튕겨나온 것으로, 멸종하던 공룡들의 공포를 그 사체와 함께 냉동건조하여 담았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과감한 SF 적인 발상에 여러가지 과학적 설정이 뒷받침되어 꽤 독특한 반전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호시노 유키노부 스타일의 작품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설득력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요. 그래도 그나마 읽을만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안개행성"

행성 화이트 포레스트 2호를 탐사하기 위해 착륙했던 우주선 풀룩스의 통신 두절 후, 구출을 위해 출동한 우주선 카스토르도 행성의 고농도 산소층 때문에 화재를 당해 겨우 착륙에 성공할 수 있었다. 풀룩스의 생존자인 조종사 레크랑을 찾아나선 대원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지만, 이내 기묘한 생물의 습격을 받기 시작했다. 행성의 대기를 흡입한 대원 지나는 에어록을 열어 놓은 채 탈출하고, 모든 대원들이 행성의 대기를 흡입한 뒤 서서히 기억을 잃기 시작하는데...

지적인 동물이 나타나 불을 쓰기 시작하면 산소층이 반응해 신경 가스를 내뿜는 방위 시스템이 움직이고, 이 가스를 맡은 생명체는 기억을 잃고 사고력이 쇠퇴해 문명이 멸망한다는 설정이 아주 인상적인 SF입니다. 행성, 또는 숲이 사라지기 전에 자구책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문명은 발전을 위해 숲을 벌채하기 때문입니다.

설정도 멋지지만, 이야기도 진상을 서서히 드러나게끔 풀어나가고 있어서 굉장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지식과 경험이 없으면 노인은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던 선장의 자살 등 곳곳에 멋진 장면도 많고요. 한마디로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한 부분도 제법 눈에 뜨입니다. 우선 외계 문명이 돌로 건물을 만들 정도였다면 불도 진작에 썼을텐데 그 전에 쇠퇴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홀로 우주선에 복귀하여 탈출하는데 성공한 조종사 이언이 필요없는 기억과 정보부터 잃는다는 설정도 마찬가지고요. 우주선 탈출 방법이라던가 조종법은 기억하지만 다른 동료들과 연인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 너무 편의적인 발상입니다. 특히 동료의 아들 사진을 보며 소중한 무언가를 잊었다는 식으로 끝내는 결말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른 수록작들과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걸작 급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이 작품 하나만큼은 찾아서 읽어볼 만 합니다.

2022/03/27

프로젝트 헤일메리 - 앤디 위어 / 강동혁 : 별점 3점

프로젝트 헤일메리 - 6점
앤디 위어 지음, 강동혁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양의 에너지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타난 페트로바선이 에너지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태양 에너지를 흡수하는 외계 생명체 아스트로파지가 대량증식하여 이산화탄소를 찾아 금성으로 향하며 에너지를 내뿜는게 페트로바선의 정체였다. 아스트로파지의 증식과 감염으로 모든 항성들이 10% 정도의 에너지를 잃었지만 타우세티만 건재하다는걸 알아낸 페트로바 대책위원회는, 그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우주선 헤일메리를 건조했다.

'나'는 기억을 잃고 나는 기억을 잃고 우주선 안에서 홀로 깨어났다. 동료 두 명은 수면 여행 중 사망한 상태였다. 서서히 기억을 되찾은 '나'는, 내가 지구의 운명을 걸고 타우세티로 향한 헤일메리호의 유일한 생존자 라일랜드 그레이스 박사라는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타우세티에서, 같은 목적으로 이 별을 찾아온 외계인 '로키'를 만나게 되는데...


<<마션>>의 원작자가 쓴 장편 SF 소설. 지구를 살리기 위해 용감한 전문직 종사자가 목숨을 건다는 내용의 작품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일단 <<아마게돈>>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날아오는 운석을 파괴하는 수준이 아니라요. 태양 에너지를 빼앗고, 이산화탄소를 향해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증식하는 아스트로파지의 생태에 대한 상세한 설정은 특히 돋보입니다.
뒤 이은, 프로젝트 헤일메리를 위해 전 지구의 의지를 모으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대단합니다. 라일랜드 그레이스가 아스트로파지에 대해 연구하여 그 생태의 비밀을 알아내는 과정, 알아낸 정보를 토대로 일종의 반물질 에너지원같은 아스트로파지를 우주선 연료로 사용하려는 모습 모두 적절한 과학적 이론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굉장한 설득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전혀 개념은 다르지만, 엄청난 효율의 에너지원이기도 한 아스트로파지는 '시즈마 드라이브'가 연상되더군요.

타우세티에 도착한 후, '항성 40 에리다니'에서 온 외계인 로키와 만나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고, 목숨을 건 모험 끝에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는 '타우메바'를 채집하는 장면도 박진감 넘치고 흥미롭습니다. 탄탄한 과학적 배경을 바탕에 둔 건 마찬가지고요. 아스트로파지의 천적 타우메바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스쳐지나가는 듯한 '진화' 관련 담론이 인상적이었어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진화한 로키와 그레이스가 어떻게 같은 주파수 소리를 듣는지에서 시작해서, "왜 같은 속도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는데 답이 아주 그럴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레이스의 가설은 각자 행성을 확실히 지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능을 갖춘 뒤 진화를 멈췄다는 겁니다. 그 기준은 '중력'이고요. 중력이 높아지면 땅과 접촉하는 시간이 늘어나므로, 움직임이 더 빨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과학자 역할의 그레이스, 그리고 뭐든지 만들어내는 엔지니어 로키로 확실히 구분되어 있는 팀 구성도 재미를 더해줍니다. 서로의 언어를 습득하고 진짜 친구가 된 뒤, 그레이스가 죽을걸 알면서도 로키를 구해주러 가는 장면은 뭉클하기까지 했습니다. "가고 있어 친구. 기다려"는 정말 명대사였어요.

전편에 흐르고 있는 유머도 남다릅니다. 프로젝트의 어원부터가 미식축구 등에서 경기 종료 직전에 역전을 노리고 시도하는 성공률이 매우 낮은 작전을 일컫고, 그레이스도 자기 부정 등이 포함된 기묘한 유머 감각으로 상황을 그려낼 뿐더러, 상황 자체가 유머스럽게 그려진게 많거든요. 목숨을 건 임무를 거부했던 그레이스를 속여서 강제로 우주선에 태웠던 프로젝트 헤일메리의 총책임자 에바의 행동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충격적인 반전이기도 한데 솔직히 너무 웃겼습니다.

그러나 편의적인 전개가 너무 많기는 합니다. 그레이스와 로키가 만나고, 서로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한다는 것 부터가 그러합니다. 이게 가능하다면, 아이큐가 80이 넘는다는 돌고래와는 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건지 설명이 안됩니다. 설령 가능했다 한 들, 만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아스트로파지를 없애는 방법을 함께 찾을 정도로 서로의 언어에 숙달하게 되었다는건 억지입니다. 외계인이 언어 체계를 제외하면, 사고 방식 등이 모두 인류와 유사하다는 설정도 지나치게 편의적이었고요.
그 외에도 타우메바의 진화가 쉽게 이루어지는 등 비교적 해결책이 쉽게 도출된다던가, 진화한 타우메바가 제노나이트를 뚫고나와 아스트로파지를 먹어치우는 위기에서 타우메바의 유일한 천적(?)인 질소를 우주 비행사 중 한 명이었던 두보이스가 자살용으로 헤일메리에 실어놓았었다는 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7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과학적인 설명도 가득 담겨있음에도 불구하고 재미까지 있어서 무척 놀라왔던 작품입니다. 별점 3점은 충분하지요. 베스트셀러 작가는 확실히 다르네요.

2005/12/29

SF 대장 - 도리 미키 : 별점 4점


이번 일본 여행에서 발견한 작가인 도리 미키의 작품 중 한권입니다. 이시카와 쥰의 <만화의 시간>에서 <먼 곳으로 가고파>를 추천한 글을 읽고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본 몇몇 작품이 마음에 들어 눈에 띄는 대로 사 모으다 건진 책이죠. 단편 옴니버스 작품집으로 고전 SF의 명작을 차례로 독특한 개그 센스로 어레인지하여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수록 작품은 목차 순서대로

  • "알쟈논을 위한 꽃다발 (Flowers for Algernon)"
  • "해저2만리그"
  • "솔라리스"
  • "타임머신"
  • "모나리자 오버드라이브"
  • "사랑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Time enough for Love)"
  • "타이거 타이거"
  • "지구의 긴 오후 (Hothouse)"
  • "스타트랙"
  • "접속된 소녀 (The Girl who was plugged in)"
  • "쥐와 용의 게임 (The game of Rat & Dragon)"
  • "뱀주인자리 핫라인 (The Ophiuchi Hotline)"
  • "날개의 제니 (The girl who fell into the sky)"
  • "블러드 뮤직"
  • "스타쉽과 하이쿠"
  • "차가운 방정식 (The Cold equation)"
  • "문신의 남자 (The illustrated man)"
  • "링 월드"
  • "타임 패트롤"
  • "스타타이드 라이징"
  • "듄"
  • "닥터 애더"
  • "이 사람을 보라 (Behold the man)"
  • "타임스케이프"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텔레파시스트"
  • "강철도시"
  • "중력의 사명"
  • "레벨 3"
  • "익사한 거인 (The Drowned Giant)"
  • "어둠의 왼손"
  • "구백명의 할머니 (Nine hundred grandmothers)"
  • "유년기의 끝"
  • "우주선 비글호의 모험"
  • "시간은 준보석의 궤적과 같이"
  • "강철의 꿈"
  • "화성인 고 홈"
  • "카에안의 성의"
  • "송 마스터"

입니다.(팔이 아파서 이해 가능할 듯한 작품은 원제를 뺐습니다...) 이외에 2편의 오리지널 단편과 권말의 원작 해설이 첨부되어 있는 구성입니다. (원작 해설을 보니 저 작품들이 다 번역된 일본 현실이 부럽더군요)

꽤 방대하지만 고전 "걸작"들만 소재로 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SF 쪽 작품은 접하지 않은 저도 읽어본 원작이 많은 편이어서 더욱 반가왔고, 또한 작품 하나하나가 원작의 내용을 확실히 이해하고 그 본질을 꿰뚫는 패러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어서 정말 놀랍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네요.

예를 들면 <차가운 방정식 (The Cold Equation)>의 경우, 원작은 톰 고드윈의 고전 SF 걸작 단편으로 한명의 조종사를 목적장소까지 편도로 보내기 위해 극단적으로 제한된 연료와 장비만을 싣고 있는 연락선에 한 소녀가 밀항하게 되어 발생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소녀는 너무나 순진무구한 소녀로 단지 오빠를 만나기 위해 밀항했는데 법으로는 밀항자를 우주선 밖으로 추방해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만화에서는 우주선의 정원이 100명(!) 이라는 설정으로 그들이 밀항자를 찾지 못하여 시간제한 내에 오버한 중량을 줄이기 위해 벌이는 악전고투를 너무나 개그스럽게 패러디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모나리자 오버드라이브"나 "접속된 소녀" 같은 사이버 펑크 물에 대한 작가 나름의 고찰도 재미나고 "뱀주인자리 핫라인"이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같은 원작의 틀을 유지하면서 기발한 발상을 덧붙인 패러디 등 볼만한 작품이 많습니다.

물론 모든 작품이 대단한 발상이나 아이디어를 가지고 접근하고 있지는 않고 쉽게쉽게 그린 것도 있고 내용의 비약이 심한 작품도 있으며 오리지널 에피소드는 유치하고 그림도 취향을 탈 듯한 스타일이라 생각되어 사람마다 편차가 있으리라 생각되긴 합니다.

그래도 저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다지 글자도 많지 않고 각 작품이 거의 다 4페이지 이내로 짤막하게 마무리되어 쉽게 읽을 수 있는 점도 좋고요. 무엇보다도 SF 팬이라면 꼭 한번 볼만한 개그 만화집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2004/01/04

시미즈 레이코 걸작선 9 - Magic

매직 - 8점
시미즈 레이코 지음/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물속의 달 내 손안에는 있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다. 영원히 너를 향한 내 마음을 전할 수 없겠지"

저~ 아래 썼었던 "비밀" 의 작가 시미즈 레이코의 예전 단편집입니다.
시미즈 레이코 걸작선으로 출간되었던 9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죠. 비밀을 읽다가 다시 생각 나기도 했고 오늘 집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다 다시 발견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표제작 "Magic"과 고등학생 범죄물 "Silent"두편이 실려있는데, "Magic"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까 합니다. (Silent도 좋은 작품이지만 평이한 수준이거든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참고를...
14년 전 변두리 행성인 샤샤에서 일어난 우주선 추락사고, 그 우주선에는 은하계 최고의 모델 KANA가 타고 있었는데 결국 KANA의 딸 카나만이 기적적으로 구조됩니다. KANA의 25살이나 연하였던 연인 토르의 딸로 키워진 카나는 14년이 지나, 모델 사진 촬영을 위해 다시 샤샤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자기폭풍으로 인한 우주선 사고가 일어나고 일행은 구조대를 기다리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딸인 샤샤의 토르에 대한 감정은 깊어만 가고 토르도 점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어 집니다. 자기폭풍이 걷히고 구조대가 도착할 때 드디어 파국이 찾아옵니다...

딸로 키우는 "카나"에 대한 2번, 아니 3번에 걸친, 평생에 걸친 토르의 사랑과 행성 "샤샤"의 특수한 조건 -오래 있으면 퇴화된다!- 가 시미즈 레이코의 미려한 그림과 맞물려진 보기 드물게 완성도 높은 SF 순정 러브스토리입니다. 제가 읽었던 SF단편들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라 할 수 있을 정도에요.
특히 딸로 키워왔던 카나가 사실은 14년전에 조난당했었던 "KANA"가 퇴화되어 어려진 것이었다는 반전과, 10년뒤 다시 어려진 카나를 데려다 키우는 토르의 모습이 묘하게 마음을 울리네요.

이 만화는 듣자 하니 국내 한 영화감독(이현승씨였죠 아마..)이 영화화를 시도했다는 소문이 들렸었죠. 미려한 그림으로 구성된 이야기인 만큼 캐스팅이나 비쥬얼이 심히 걱정되었었는데, 다행히(!) 취소 되었나 보더군요.^^

현재 절판되었지만, 많이 팔린 만큼 구하기도 쉬우리라 생각됩니다. 추천작입니다.

2023/08/30

플라네테스 1~4 - 유키무라 마코토 : 별점 2점

[고화질 세트] 플라네테스 (총4권/완결) - 4점
Makoto Yukimura/학산문화사(만화)

한 20여년전 발표 당시에는 애니메이션도 만들어졌던 인기작. 오프닝 곡이었던 "Dive in the Sky"는 좋아해서 당시에 자주 듣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제 기억 속에서는 사라져버린지 오래되었었는데, 오랫만에 본가에 방문하니 형이 발굴해두었다고 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전 4권의 짤막한 분량이라 읽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더군요.

작품은 데브리(우주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을 하는 하치로타가 꿈 - 자신의 우주선을 가지고 우주를 돌아다니는 것 - 을 이루기 위한, 그리고 '왜 우주를 향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핵심은 명성과 거액이 보장되는, 목성으로 향하는 우주선 '폰 브라운' 호의 승무원이 되는 것이고요. 하치로타는 승무원 선발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고군분투, 그리고 승무원이 된 후의 경험들로 결국 '모든 것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걸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꽤 긴 호흡의 이야기를 여러가지 단편 에피소드들과 잘 섞어서 깔끔하게 마무리한게 좋았습니다. 여러가지 우주에 관련된 탄탄한 설정도 읽는 재미를 더해주고요. 특히 데브리가 생성되는 과정이라던가, 선외 활동, 승무원 선발 과정 등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작가가 공부를 많이 했다는걸 새삼 깨닫게 해 줍니다. 이를 표현하는 작화력도 대단했고요.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던가 "사랑이 중요하다"는걸 핵심인 결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고작 이 정도 이야기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하치로타의 입을 빌어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탓에, 오글거리는 80년대 팝송 가사같다는 느낌도 강하게 들고요.
또 이 내용은 하치로타와 아이가 서로 사랑하게 되는 3권에서 이미 마무리 되었습니다. 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4권과 목성 우주선 이야기는 불필요했어요. 우주 방위 전선의 테러는 비중에 비하면 결말이 황당할 정도로 시시했고요. 이런걸 보면 작가가 갈팡질팡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과연 결말이 작가가 원했던게 맞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이럴 바에야 초반부 '토이박스 호' 승무원들과 함께 벌이는 데브리 수거를 중심으로 하는, 일상성 강한 SF 일상 드라마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 4컷 만화처럼 말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찾아보니 e-book으로 다시 출간되었던데, 구태여 찾아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2014/10/01

지구의 마지막 날 - 필립 와일리 : 별점 3점

지구를 향해 두 개의 별이 다가오는게 발견되었다. 발견자의 이름을 따 "브론슨 알파"와 "브론슨 베타"라고 불리게 된 두 별의 접근으로 지구는 파괴될 위기에 놓였다. 헨드론 박사의 지휘로 과학자들이 모여 지구 파괴 후 지구 궤도에 안착하여 또 다른 지구가 될 "브론슨 베타"로 이주하기 위한 "노아의 방주" 계획이 시작되는데...

필립 와일리의 고전 SF. 바로 직전에 읽은 "하늘의 공포"와 같이 "직지 프로젝트" 결과물입니다. 구글북스를 통해 무료로 읽은 점, 아동용에 가까운 결과물이라는 점도 동일합니다. 때문에 상당 부분 축약이 있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문어체 형식이 많은 등, 번역의 질도 낮고요.

허나 축약과 번역 문제를 무시한다면, 작품 자체는 지구 멸망을 다룬 고전 SF의 걸작으로 널리 읽힐 만한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1930년대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시대를 앞서간 측면도 분명 있고요. 특히나 외계 운석이 격돌하여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두 개의 별"이 다가오고, 그중 한 개가 지구 궤도에 안착할거라는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실제로 "브론슨 베타"가 지구 궤도에 안착하였다고 해서 과연 사람, 아니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일까?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지만, 이 정도는 수천억 분의 일의 우연이라도 있을 수 있으니 수긍할 만합니다. 첫 번째 접근 이후 지구가 황폐해진 묘사는 "매드맥스"나 "북두의 권"과 같은 세기말, 문명 멸망 이후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의 설정과 유사한 점이 많아서 흥미롭기도 하고요. 아울러 냉전 이전이라 소련이나 핵의 위험과 같은 요소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작품 내에 몇 가지 의문점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첫 번째는 헨드론 박사가 우주선을 제조하기 위해 거대한 공장 및 집단 거주 단지를 건설하는데, 이러한 계획의 비용과 장비를 누가 후원했는지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화 버전의 줄거리를 보면 시드니 스탠턴이라는 부호가 원조를 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책에서는 전혀 그런 이야기가 없거든요.
그리고 처음에 거의 2년에 걸쳐 100명 정도만 탑승할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다가, 고작 몇 개월 사이에 남은 인원이 모두 탈 수 있는 두 번째 우주선을 만든다고 하는 설정 파괴도 이해할 수 없는 전개였습니다.

아울러 헨드론 박사를 중심으로 1,000여 명이나 되는 인력이 똘똘 뭉쳐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단결력을 보여주는 과정은 일종의 종교적 광기가 느껴지기도 했는데, 이런 부분들 때문에라도 정식 번역본, 아니면 평가가 좋은 영화 버전을 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그래도 아동용 번역본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 80여 년이 흘렀지만 읽을 가치는 충분한 좋은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리고 함께 수록된 베리야에프의 단편 "열려라 참깨"가 의외의 재미를 선사해 준 것도 아주 좋았어요. 괴팍한 노인과 충직한 하인 앞에 기술자가 나타나서 로봇을 판다는 이야기에서 갑자기 잘 짜인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의외성이 돋보였거든요. 자동문을 음성인식으로 열 때 목소리 톤에 따라 문이 열리지 않고, 개를 짖게 하면 안 된다는 복선도 잘 녹아들어 있는 등 짜임새도 괜찮았고요. 특히 음성인식 자동문은 제가 음성인식을 이용한 제품 개발에 참여해 보았기 때문에 더 와 닿았습니다.
SF보다는 코믹 범죄물로 봐야겠지만 분명한 수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이 작품만큼은 추리-범죄물 애호가시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인 "합성 인간"은 기이한 SF였던 기억이 나는데, 이런 작품을 발표했다니 상당히 놀랍습니다.

2015/03/16

SF 명예의 전당 1 - 아이작 아시모프 외 / 박병곤 : 별점 3점

SF 명예의 전당 1 - 6점
아이작 아시모프 외 지음, 로버트 실버버그 엮음, 박병곤 외 옮김/오멜라스(웅진)

SFWA (미국과학소설작가협회)가 생긴 후인 1964년 12월 31일 이전에 발표된 작품을 대상으로 회원들이 투표를 진행하여 가려 뽑은 작품들을 모은 앤솔러지입니다. 1965년 이전 작품 15편과 30위까지의 작품 일부를 더한 구성이며, 1권과 2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4권 세트 e-book을 종이책 대비 엄청 저렴한 29,700원에 팔고 있어서 구입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SF라는 장르에는 e-book이 가장 적합한 콘텐츠 형태가 아닐까 싶네요.

1권을 먼저 읽었는데, 수록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 어스름 Twilight - 존 캠벨
  • 전설의 밤 Nightfall - 아이작 아시모프
  • 무기 상점 The Weapon Shop - A.E. 밴 보그트
  • 투기장 Arena - 프레드릭 브라운
  • 허들링 플레이스 Huddling Place - 클리포드 D. 시맥
  • 최초의 접촉 Firt Contact - 머레이 라인스터
  • 남자와 여자의 소산 Born of Man and Woman - 리처드 매디슨
  • 커밍 어트랙션 Coming Attraction - 프리츠 라이버
  • 작고 검은 가방 The Little Black Bag - 시릴 콘블루스
  • 성 아퀸을 찾아서 The Quest for Saint Aquin - 앤소니 바우처
  • 표면장력 Surface Tension - 제임스 블리시
  • 90억 가지 신의 이름 The Nine Billion Names of God - 아서 클라크
  • 차가운 방정식 The Cold Equations - 톰 고드윈

대충 봐도 SF계의 대가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작품의 수준도 당연히 높습니다. SF 작가들이 직접 선정한 고전 명작이니만큼, 작품의 수준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SF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 작품집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는건 아쉬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불필요하게 어렵게 쓴, 혹은 번역된 내용이 많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을 두고 굳이 어려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역장", "정신인자", "윤충류" 등이 대표적입니다. 교황을 '로마 주교이자 사도 전승 카톨릭 성교회의 수장,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는 — 그러니까 교황은 —'이라고 장황하게 소개하는 묘사도 마찬가지고요. 배경이 되는 기본 설정 소개도 인색한 편입니다. "Coming Attraction" 같은 경우, 핵전쟁 이후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가상 역사 SF인데, 단편적인 정보만 설명되는 탓에 전체적인 그림은 미루어 짐작만 가능할 뿐입니다.
SF가 장르적 특수성이 강해서 작가가 '독자가 이 정도는 알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작가의 잘난 척인지 모르겠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대중성은 떨어지고 읽기만 어려워지는 듯 한데 말이지요.

아울러 냉전 시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나 기계 문명과 신성을 빗대어 설명하는, 지금 읽기에는 낡은 소재가 많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먼 미래의 지구는 어떤 이유로든 멸망했고, 영원히 동작하는 기계가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다는 "Twilight", 앞서 말씀드린 "Coming Attraction", 가상 역사 SF이자 기계 문명과 신성을 이야기하는 "The Quest for Saint Aquin" 등이 그러합니다. "Nightfall", "The Cold Equations" 같이 다른 앤솔러지에서 익히 접했던 작품들이 제법 된다는 것도 아쉽고요. 물론 이 책의 취지가 시대를 초월한 걸작들을 모아놓은 것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그러나 당연히, 그리고 다행히도 시대를 뛰어넘는 멋진 작품도 많습니다. 그중 제 개인적인 베스트 작품을 소개해 드리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The Weapon Shop"

"우주선 비글호" 시리즈로도 유명한 밴 보그트의 작품입니다. 독재 정권에 이용해왔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맹목적으로 충성만 하던 서민이 우연한 계기로 자유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 빗대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와 가진 자들에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맹목적인 지지를 보낸다는게 정말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SF 뿐 아니라 정치 풍자극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습니다. 일종의 먼치킨 같은 역할을 하는 "무기상점"이라는 아이디어도 참신하게 느껴졌고요. 시대를 초월한 걸작입니다.

"Arena"

외계의 두 종족 간 전면전이 벌어질 찰나, 지구인 주인공이 기묘한 장소로 소환됩니다. 그 이유는 전면전이 벌어지면 두 종족 모두 멸망하게 되므로, 신이 한 종족만이라도 남기기 위해 두 종족의 대표 전사를 소환해 생명을 건 전투를 벌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롤러 형태의 외계인과 1:1로 생명과 인류의 존망을 걸고 벌이는 전투라는 설정 자체가 매력적인데, 거장 프레더릭 브라운의 명성에 어울리는 전개도 압권입니다. 소환된 장소의 다양한 환경을 이용하는 과정과 마지막 승부에 활용되는 복선까지 잘 짜여져 있는 덕분입니다.

SF가 꼭 심오하게 인류의 미래, 신의 존재와 같은 주제를 다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재미를 위해 쓰더라도 이만큼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존재 이유는 충분하지요. 별점을 준다면 5점입니다.

"First Contact"

게 성운에서 우연히 조우한 지구인과 외계인 비행선. 서로 마음을 열어가면서도 결국 생명을 걸고 양쪽이 전투를 벌여야 할 것이라는 묘한 상황에 빠집니다. 그러나 다행히 놀라운 아이디어로 싸우지 않고, 서로의 정보를 공평하게 가지고 귀환하게 되지요.

외계인을 만났을 때의 딜레마가 잘 표현된 작품으로 완벽한 해피엔딩에 이르는 반전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밝고 유쾌하게 쓰여졌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약간은 냉전 시대의 소산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시대를 뛰어넘는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The Little Black Bag"

미래에서 온 마법의 의사 가방을 놓고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을 그린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설정과 이야기가 한데 뒤섞여 있는데, 한 작품에 쓰이는 게 아깝다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게 많습니다. 다만 미래의 사람들은 대부분 "바보"가 된다는 설정은 불필요해 보였어요. 그냥 미래에서 의사 가방이 보내지고, 그것이 사용되다가 살인 사건이 벌어져 동작이 취소된다는 정도만 등장해도 충분했을텐데 말이지요. 작가의 욕심, 의욕이 지나쳤습니다. 

그래도 읽는 재미는 뛰어나고 마지막 마무리까지 완벽합니다.

"Surface Tension"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밤 이야기"가 연상되는 식민화 우주선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호시노 유키노부 작품보다는 압도적으로 뛰어난 상상력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식민화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기는 한데, 그 별에 가장 적합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고, 작품의 무대가 된 행성에서는 미생물 — 윤충류! — 로 인류가 탄생하게 되거든요. 이후 이러한 미생물 인류가 이른바 "외계"로 나가기 위해 나름의 "우주선"을 만들고,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여정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는 내용은 인류의 우주 진출과 비교되며,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모로 잘 짜여진 SF 모험물입니다.


다른 작품에는 불만과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은 충분합니다. SF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라도 최소한 "Arena"만큼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책 서두에 소개되어 있는, SFWA에서 가장 표를 많이 받은 15위까지의 작품은 알려드리며 리뷰를 마칩니다. 그런데 영문으로만 소개되어 있는건 이해가 안 되네요. 책에는 한글 제목으로 실어놓았는데 말이죠. 또 3위인 "Flowers for Algernon"은 영문 제목이 잘못되어 있기까지 합니다. 거기에 더해 이 작품들을 어떻게 1, 2권으로 나누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았는데, 여러모로 세심한 배려가 아쉽습니다.

  • 1. "Nightfall" - 아이작 아시모프
  • 2. "A Martian Odyssey" - 스탠리 와인봄
  • 3. "Flowers for Algernon" - 대니얼 키스
  • 4. "Microcosmic God" - 테오도어 스터전
  • (동률) "First Contact" - 머레이 라인스터
  • 6. "A Rose for Ecclesiastes" - 로저 젤라즈니
  • 7. "The Roads Must Roll" - 로버트 하인라인
  • (동률) "Mimsy Were the Borogoves" - 루이스 패짓
  • (동률) "Coming Attraction" - 프리츠 라이버
  • (동률) "The Cold Equations" - 롬 고드윈
  • 11. "The Nine Billion Names of God" - 아서 클라크
  • 12. "Surface Tension" - 제임스 블리시
  • 13. "The Weapon Shop" - A.E. 밴 보그트
  • (동률) "Twilight" - 존 캠벨 
  • 15. "Arena" - 프레드릭 브라운

2014/02/20

11인이 있다! - 하기오 모토 / 서현아 : 별점 2.5점

11인이 있다! - 6점
하기오 모토 지음, 서현아 옮김/세미콜론

애니메이션으로 미리 접했었던 작품. 생각해보니 하기오 모토 작품을 책으로 읽는 것도 처음이네요. 유명세에 비하면 읽는 것이 너무 늦은 것 같기도 한데, 뭐 국내 소개가 늦은 탓이 크겠죠? 여튼 표제작 "11인이 있다!"와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이라는 두 편의 중편과 함께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의 "스페이스 스트리트"라는 짤막한 개그 꽁트가 실려있더군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오래된 걸작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시간이 흐른 탓에 명성만큼의 재미나 가치를 느끼기는 어려운건 모든 고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일이겠지요. 가끔, 정말이지 아주 가끔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 있기는 한데, 이 작품은 그럴 정도의 명작은 아닙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좋은 번역과 디자인으로 국내에 소개하여 주신 출판사 세미콜론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나 가격이 너무 쎄요. 정가가 거의 만 원이라니! 할인된 금액으로 구입하긴 했지만 이른바 "가성비" 측면에서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한 번쯤 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한 만큼 아직 읽지 못하신 장르문학(만화) 팬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지 나름 시대를 앞서간 반짝이는 부분은 확실히 있으니까요. 가격 부담만 없으시다면...

간단한 수록작별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11인이 있다!"

동명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우주대학 입학 시험을 그린 작품입니다.

10명의 수험생이 시험을 치루는 우주선에 11명의 수험생이 타고 있다는 기발한 설정 하나만큼은 최고입니다. 고립된 단체 속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설정은 흔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한 명이 수상하다!"라고 알려주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품은 보기 드무니까요. "우주해적 코브라"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소위인지 중위인지가 두 명이라 둘 중의 한 명이 가짜다! 라는 이야기였는데...
어쨌거나 이 설정 하나 덕분에 우주선에 닥치는 갖가지 위기에서 서로 단합하기 어렵고 누가 11번째인지를 찾기 위한 노력이 수반되기에 단순할 수 있는 입학시험이 흥미롭게 흘러가게 됩니다.

또 천편일률적이기는 해도 몇몇 캐릭터는 아주 괜찮았어요. 특히 여성이 될지 남성이 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의 히로인 프롤의 독특함이 기억에 남네요. 여러 가지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히로인입니다. "남자"가 될 것을 주장하는 히로인이라니!

허나 시대를 거스르기는 힘들었던 것일까요? 솔직히 이야기의 완성도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일 큰 문제점은 초반 테스트에서 꽤나 강력해 보였던 타다의 초능력이 왜 먹히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되지 않는 점입니다. 여기서 11번째는 충분히 밝혀졌어야 하지 않나요?
또 흥미로운 전개에 비해 11번째가 결국 자백(?)에 의해 밝혀진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어요. 설득력은 있지만 시시했거든요. 뭔가 단서라도 던져줘서 독자에게 함께 추리하게 만들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텐데 말이죠.

결론적으로 흥미로운 설정에 비하면 전개는 부족하고 결말은 시시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나는데 다시 한 번 찾아봐야겠습니다. 이러한 단점이 과연 시대가 흐른 탓인지, 아니면 애니메이션은 각색을 잘 했었던 것인지 궁금하네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

"11인이 있다!"의 후일담으로, 우주대학에 합격하여 훈련받는 타다 - 프롤 커플이 마야왕 바세스카의 초대에 응해 마야에 방문하나 급진파 - 전통파의 충돌로 전쟁 목전의 상황에 처한다는 이야기로 전형적인 SF 판타지 군웅물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일 캐릭터를 등장시켜 약간 하드한 SF에서 판타지로 이어지는 구조는 초인 로크의 "신세계전대" - "빛의 검" 구성과 유사하네요.

그러나 이 작품은 "11인이 있다!"보다도 더 문제가 많습니다. 행성 마야의 위기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악당들의 음모도 유치하기 그지없으며,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과 그 와중에 낀 타다와 프롤의 행동 역시 별다른 긴장감을 느끼기 어려웠던 탓입니다.
또 타다와 프롤이 대체 이 사건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는지도 애매하고, 입학 동기인 4세의 죽음이 그려지기는 하지만 다른 동기들의 활약은 거의 전무하다는 점에서 후일담치고는 부족한 점도 많아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니까요.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페이스 스트리트"는 정말이지 권말 보너스 만화 수준이라 별점을 주기는 애매합니다만, 후일담 성격으로는 "동쪽의 지평선 서쪽의 영원"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재미도 있고요.

2024/01/24

외계+인 2부 (2024) - 최동훈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속에 가둬진 외계인 죄수의 탈옥을 막으려다 과거에 갇혀버린 ‘이안’(김태리)은 우여곡절 끝에 시간의 문을 열 수 있는 ‘신검’을 되찾고, ‘썬더’(김우빈)를 찾아 자신이 떠나온 미래로 돌아가려고 한다.
한편 이안을 위기의 순간마다 도와주는 ‘무륵’(류준열)은 자신의 몸속에 느껴지는 이상한 존재에 혼란을 느낀다. 그런 ‘무륵’ 속에 요괴가 있다고 의심하는 삼각산 두 신선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 소문 속 신검을 빼앗아 눈을 뜨려는 맹인 검객 ‘능파’(진선규), 신검을 차지하려는 ‘자장’(김의성)까지 ‘이안’과 ‘무륵’을 쫓기 시작한다.

현재,
탈옥한 외계인 죄수 ‘설계자’가 폭발 시킨 외계물질 ‘하바’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우연히 외계인을 목격한 ‘민개인’(이하늬)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모든 하바가 폭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48분,
마침내 시간의 문을 열고 무륵, 썬더, 두 신선과 함께 현재로 돌아온 이안.
외계인에 맞서 하바의 폭발을 막고 사람들을 구해야만 한다!


지난 주말 감상한 영화. 2024년 첫 극장 감상 영화네요. 1부는 넷플릭스로 감상했었는데, 당시 여러모로 바빠서 리뷰를 적지 않았었습니다.

오락 영화로서는 괜찮습니다. 긴장감을 전해주는 전개와 함께 스케일 큰 폭발과 액션이 연이어 펼쳐져서 숨 돌릴 새 없이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었거든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기차가 탈선하면서 벌어지는 파괴 장면은 정말 입이 딱 벌어지는 수준이었습니다. 덕분에 2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중간중간 개그 요소들도 적절했고 - "이성계가 왕이 되었는가?" -, 무륵이 아니라 아인이 몸 속에 '설계자'가 들어갔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중요 내용은 요약하여 제공해주어서 1편을 기억하지 못해도 감상에 무리가 없다는 것도 좋았고요.

그러나 고려 시대 도사, 신선들이 펼치는 액션은 80~90년대 홍콩 영화 느낌이라 별로였습니다. 의상은 물론, 사용하는 무기와 기술들 모두 "천녀유혼" 등을 떠오르게 만들더군요. 과거로 가는게 중요했다면, 고려 시대보다는 70년대 쯤으로 넘어가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어요. 작중 이하늬가 분한 민개인처럼 평범한 현대인(도사의 후손이기는 하나)이 외계인과 맞서 싸울 정도의 무예를 갖추었다면, 다른 현대인들도 가능한 사람들이 등장하게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라한 장풍 대작전"처럼). 여러모로 설명도 부족하고 억지스러웠던 민개인 역할에 대한 설명도 되었을 테고요.
설명이 부족한건 그 외에도 많습니다. 우왕, 좌왕이 썬더에 의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라는걸 잊고 지낸 이유라던가, 무륵이 신검에 가슴이 찔리는 등의 큰 부상을 입고도 죽지 않은 이유, 진작에 외계인들이 우주선과 썬더를 확보하지 않았던 이유 (신검만 있다고 현재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오히려 이 둘 만 확보해 두었더라면 신검을 찾으려고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음) 등등등.... 5시간 가까운 시간을 할애해도 설명을 충분히 할 수 없었다면 불필요한 소재는 뺐어야 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1, 2편으로 나눌 필요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에요. 합치면 5시간 가까이 되는 작품인데, 과연 이렇게까지 길게 끌고갈 이야기였을까요? 길게 끌고간 결말이 신검을 우주선 심장부에 던져넣는 것이었다는 마무리도 시시했습니다. 흥행을 위해서라도 1편으로 만들 수 있게끔 시나리오 단계에서 정리가 필요했었습니다.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도 재미는 있었기에, 그리고 국내에서 이런 SF 판타지 대작을 과감하게 제작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에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작비를 건지는건 불가능해보이지만, 모쪼록 무운을 빕니다.

2025/09/14

대우주시대 - 네이선 로웰 / 이수현 : 별점 2점

행성 네리스에 거주하던 이슈마엘 왕은 어머니의 사고사 이후 쫓겨날 위기에 빠졌고, 어쩔 수 없이 '반의반' 몫 선원으로 우주 무역선 로이스 멕켄드릭 호에 탑승했다. 주방보조로 일하게 된 이슈마엘은 주방장 쿠키, 동료 핍을 비롯한 여러 선원들과 친해지며 자신을 발전시키며,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통해 한 몫 잡을 계획을 세워 진행시키는데...

네이선 로웰의 장편 SF 소설입니다. 특징이라면 우주선이 주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전투나 액션, 모험은 전무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단순한 모험담을 넘어 ‘무역’이라는 비즈니스적 요소를 도입한 덕분입니다. 특정 행성에서 싸게 구입한 물품을 다른 행성에서 비싸게 되파는 식의 간단한 구조이지만, 개인별 운송할 수 있는 무게 제한과 부족한 자금으로 단순 운송을 넘어서는 전략적 사고가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가죽 세공이 뛰어난 행성에서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벨트를 사고, 벨트를 팔아 얻은 이익금으로 보석 세공이 특화된 행성에서 버클을 구입한 뒤 일부 남은 벨트에 결합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식으로요. 물건을 팔기 위해 행성마다 있는 '벼룩 시장'에 출점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돋보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우주선 운영과 생활에 관한 세밀한 설정도 좋습니다. 일종의 인턴이라 할 수 있는 ‘반의반 몫’에서 시작해 한 사람 몫에 이르는 직급 체계, 4개의 직무군으로 구분되며 승급을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고 자격을 취득해야 하는 정책, 선원들이 선박 운영으로 발생한 추가 이익을 규칙에 따라 분배하는 보수 체계, 남녀 구분이 없는 침실과 넓게 보장된 운동 시설 및 사우나 같은 선내 생활 등 생활 전반이 디테일하게 설계되어 있어 현실감을 더해 줍니다. 앞서 말했듯, 직급에 따라 철저히 관리되는 화물 무게 할당이라는 설정은 무역이라는 소재에 재미를 더해주고요. 이런 점에서는 상세한 설정이 뒷받침된 해양 무역 모험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가 부실하다는 단점은 큽니다. 주인공의 여정이 지나치게 순탄한 탓입니다. 행성 네리스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로이스 멕켄드릭 호에 승선할 기회를 얻고, 첫 임무인 커피 맛 개선도 무난히 해내며, 친구 핍 덕분에 행성간 무역의 요령을 빠르게 익혀서 곧바로 큰 수익을 내는 식이거든요. 실패가 없어요. 주변 인물들 또한 무개성에 모두가 주인공을 돕는 선한 사람들로만 그려져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도 찾을 수 없고요. 우주 공간 항해에서의 위기 역시 전무합니다. 때문에 작 중에서 긴장감 있는 드라마는 찾기 어렵습니다. 전생 지식을 활용해 무쌍을 찍는 이세계 전생물조차 이 정도로 무탈하지는 않을 거에요.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국내 번역이 1권에서 멈췄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막 무역 협동조합을 만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끊겨 버리니 독자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의 디테일과 무역 묘사의 신선함은 분명 장점이지만, 완결되지 못했다는 치명적 문제 탓에 추천드리기는 어렵습니다.

2004/08/03

타이거! 타이거! - 알프레드 베스터 / 최용준 : 별점 2.5점

타이거! 타이거! - 6점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최용준 옮김/시공사

이 책은 SF 매니아인 형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그간 어려운 책들로 머리가 지친터라 쉽게 쉽게 한번에 읽을 수 있는 책을 고르고 있던 참에 꽤 재미있다고 해서 주저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존트라 불리는 텔레포트가 일반화되어 혼란한 25세기, 무기력한 삼류 인생인 걸리버 포일은 난파된 우주선에서 자신을 버리고 간 '보가호'에게 복수하기 위해 분노하며 복수에 모든 것을 바친다. 우여곡절끝에 얼굴에 "방랑자"라는 문신까지 새겨진 후 지구에 복귀한 포일은 자기가 난파되었던 우주선에 실려있는 금괴를 탈취하여 "포마일"이라는 거부로 변신하여 "보가호"의 승무원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원래 자신의 배에 실려있었던 엄청난 폭발물과 포일의 "우주 존트"의 비밀이 얽히며 사건은 점차 우주적인 범위까지 확대된다.....

우선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본이 된 주인공 걸리버 포일의 "복수" 이야기가 드라마 자체로서 굉장히 멋질 뿐더러, "존트"라는 순간이동의 개념을 구체화 시킨 것이나 인체개조, 우주 방랑자, 행성 연합간의 전쟁 등 수많은 매력적인 (그러나 다분히 만화적인!) 설정들은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특히 이 소설의 핵심인 "존트"라는 설정이 굉장히 재미있고 기발합니다. 일종의 순간이동으로 이 시대의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설정, 방법은 이동하려는 장소의 정확한 위치와 좌표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 뇌의 전두엽을 절개하면 사용할 수 없게 되고 아직 우주적 범위로의 존트는 성공된 적이 없다는 점 등 디테일과 설정면에서 가히 최고 수준입니다.

작가 알프레드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는 이전에 이미 읽어 보았었지만 이 책도 유사한 "광기"를 다루는 점에서는 비슷한데 그만큼 광기에 대한 독특한 묘사는 대단하며, 후반부의 포일의 초월의 경지를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묘사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번역한 번역도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선전하는 것 처럼 "몽테크리스토 백작"류의 복수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더군요. 뭐 중반부까지는 상당히 비슷한 수준으로 전개되지만 후반부에서부터 포일의 "우주 존트"가 구체화 되며 범 우주적인 초월적 경지까지 이야기가 확대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초월적 경지보다는 단순한 복수극으로 끝나는게 더 제 취향에 어울렸을것 같은데 아쉽더군요. 항상 SF는 너무 어렵게 끝나서 문제랄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 조금 어려운 후반부 덕에 약간 감점하지만 작가의 이력이 말해주듯 영화적, 만화적 상상력이 대단하여 읽는 재미는 충분히 전해주는 것은 분명한 만큼, 장르문학 애호가 분들께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PS : 예전에 만화가 고유성씨 께서 이 작품을 만화화 하다가 여러 사정에 의해 중간에 중단하셨다고 하더군요. 만화 쪽이 더 어울렸을 내용임에는 분명하지만 고유성씨도 후반부의 초월적(?) 부분 묘사에 부담을 느끼시고 그만 두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간혹 듭니다.

2018/05/27

거인들의 전설 - 호시노 유키노부 : 별점 2.5점

거인들의 전설 - 4점
호시노 유키노부 지음, 김완 옮김/애니북스

호시노 유키노부SF 중, 단편집입니다. 오래전 북오프에서 구입한 뒤 묵혀두다가, 좀 무게감 있는 작품을 읽고 싶어 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핵심 중편인 "거인들의 전설" 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이 큽니다. 단편 "이카루스 계획"은 호시노 유키노부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작품이지만, 지나치게 초기작이라 작화가 영 마음에 들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작품별 리뷰는 아래와 같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거인들의 전설"

6만년전, 빙하기 당시 정신력을 기반으로 한 고도 문명을 이루어 살던 거인족 타이탄이 목성을 태양으로 만들어 빙하기를 막으려다 실패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현재, 태양 에너지 감소로 인해 현대에 다시 닥친 빙하기 해결을 위해 거인족이 만든 피라미드를 이용하여 목성을 불태워 '제 2의 태양'을 만드려는 계획이 시작되는데...

호시노 유키노부의 SF 중편. 고대 타이탄 족의 이야기와 현대의 위기를 1, 2부로 나누어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특히 작가의 특기 중 하나인 과학적인 설정과 이야기의 결합 측면에서 많이 아쉬웠어요. 빙하기와 목성 태양화 계획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지구의 극점 이론이라던가, 타이탄 족이 만든 피라미드를 활용해야 한다는 점 등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은 설정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특유의 반전을 통한 재미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위기는 목성 태양화 멤버의 내분에서 찾아오며, 반란파를 진압하고 우주선을 떨구는 게 이야기의 전부거든요. 여기서 반란파와 주인공 일행의 싸움은 단순한 액션물에 불과할 뿐이고요.

딱 한 가지, 마지막 주인공이 우주 공간에서 총을 쏴서 악당을 해치우고 구조선까지의 이동도 성공하는 장면은 호시노 유키노부스러웠지만 그 외에는 딱히 건질게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카루스 계획"

지구의 에너지 고갈을 해결하기 위해, 태양 에너지를 끌어 당기려는 이카루스 계획이 시작되었다. 주인공 일행은 이를 막으려는 테러 집단인 지구 해방 전선의 우주선과 우주전을 벌이는데...

작가의 초기작으로 내용은 간단하지만 과학 지식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어 전작보다는 보는 재미가 큽니다. 지구 해방전선이 쏜 미사일이 태양의 인력 탓에 정상 궤도를 상실하고, 추락하던 이카루스호가 소혹성의 인력으로 기사회생한다는 내용들 처럼요. 이 장면에서 그리스 신화 속 이카루스 이야기와 결합한 전개를 보이는 점도 아주 좋았습니다.
또 이카루스 계획 설정은 물론 에너지를 독점하려고 하는 악역 설정도 상당히 신선했습니다. 지금 읽기에도 그리 낡아 보이지 않았거든요.

주인공 약혼자의 죽음, 목숨을 건 수리와 죽음과 같은 신파조의 연출에 더해 정교하지 못한 초기 극화 스타일의 작화는 아쉬웠지만 이 정도면 호시노 유키노부답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017/04/21

아마겟돈 - 프레드릭 브라운 / 조호근 : 별점 3점

아마겟돈 - 6점
프레드릭 브라운 지음, 조호근 옮김/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그동안 유명세만큼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던 거장 프레드릭 브라운의 단편선입니다. 정식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네요.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입하였습니다. 

작가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 유머, 반전이 살아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데, 유일한 단점이라면 국내 소개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 별점은 2.66.... 인데 반올림해서 3점주겠습니다. 늦었지만 번역 출간된 것만 해도 충분히 점수를 줄 만하니까요. 같이 소개된 "아레나"도 빨리 구해봐야겠습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마게돈" 

마술사를 꿈꾸는 꼬마가 성수를 담은 물총으로 악마를 퇴치한다는 내용으로, 이전에 국내에 소개되었던 단편집 ("마술 반지" 였던가요?) 에서 접했던 작품입니다.

악마가 소환되는 과정의 의외성은 돋보이지만, 딱히 대단한 반전은 없습니다. 그냥 저냥한 소품이에요. 솔직히 수록작 중 베스트로 꼽기는 어려운데 왜 표제작인지 잘 모르겠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스타 마우스"

과학자 헤르 오베르부르커는 직접 만든 로켓에 생쥐 밋키(미키인데 오베르부르커 발음이 이렇습니다)를 태워 달로 보냈다. 소행성 프록슬에 착륙한 밋키는 프록슬인에 의해 지성을 갖게 되었다.
밋키는 쥐들의 지능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지구로 복귀해 쥐들의 나라를 만들 꿈을 꾸었지만, 아내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 장치 탓에 원래의 생쥐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쥐가 놀라운 지능을 가지게 되지만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은 "앨저넌에게 꽃을"이 떠오릅니다. 앨저넌도 쥐였지요. 

작품은 오베르부르커 시점에서 로켓 계획이 펼쳐지는 전반부와 밋키 시점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 마지막에 말하는 쥐를 등장시킨 후, 그 이유를 후반부에서 설명하는 연재물같은 구성인데 덕분에 독자의 흥미가 끝까지 유지됩니다. 황당하지만 다소 허풍섞인 글도 매력적이고요. 복선인 미니 우리에 설치된 전기장치도 잘 안배되어 있습니다.

허나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합니다. 비슷한 류의 이야기는 이미 너무 많은 탓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발표 시기를 감안하면 선구자적인 작품일거에요. 시대가 너무 지난 뒤 읽은게 안타깝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모자마술" 

두 커플이 더블 데이트를 즐기던 중, 밥이 카드 마술을 선보였는데 월터가 트릭을 말해버렸다. 자존심이 상한 밥은 월터에게 마술을 보여달라고 종용했고, 등쌀에 못 이긴 월터는 모자에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기묘한 생물을 꺼내어 보여주는데...

10페이지에 불과한 초단편인데 밥과 월터의 신경전으로 긴장을 자아내다가, 월터가 기묘한 생물을 꺼내는 클라이막스로 끌고 가는 과정이 탁월합니다. 

그러나 월터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여운을 남기는 결말은 안이했어요. 좀 쉽게 간 느낌이랄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불합리 행성" 

행성을 다니며 공연을 하는 '나'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고 고용 선장인 조니, 아내 , 딸 엘렌과 착륙했다. 행성에 '불합리 행성'(시리우스 1번, 2번 행성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0'번이 되는 궤도의 행성을 발견한 것이므로)이라고 이름 붙인 후, 행성을 탐사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운 기묘한 생물과 현상을 목격하는데...

행성에 나타났던 기묘한 동물과 거리는 모두 바퀴벌레를 닮은 행성 거주민이 투사했다는 내용의 SF 단편입니다. 이전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물질 대신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설정은 꽤 자주 변주되었던 것인데, 이 작품처럼 1940년대부터 인용된 고전적인 소재라는건 몰랐네요. 그만큼 작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작품입니다.

지금 읽기에는 조금 뻔하지만 코믹한 내용에 의외의 반전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즐겁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예후디 장치"

'나는 미쳐가고 있다.'라는 충격적인 글로 시작되는 단편으로  예후디 장치라는 이름의 - 정식 명칭은 자율 자동암시 교열진동 초가속기' - 기계가 핵심입니다. 사람을 가속시켜 원하는 일을 해 주도록 만들지만, 본인은 자기가 직접 빠르게 움직여 무언가를 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계이지요. 그런데 예후디라는 "이름"을 부르는 탓에 무형의 존재가 실체를 갖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약간 동양적인 설정이죠? 이름을 불러야 의미를 갖는 꽃처럼 말이죠.
덕분에 '예후디'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명령인 "자살이나 하라고"에 따라 자살을 해 버려 동작이 멈춘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전개가 아주 깔끔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예후디 장치를 이용해 '나'가 썼다는 마지막 반전도 놀라웠고요.

진으로 만든 칵테일인 '진 벅'이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등장하는 것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칵테일로 먹지만 다음 잔은 진을 7/8 넣어서, 마지막은 진만 따르고 소다수는 건드리지도 않고 먹지요. 하긴 이런 기계를 보고 겪으면 제정신이기는 힘들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디테일한 설정에 녹아든 동양 철학적인 사고 방식과 반전까지 잘 갖추어진 좋은 작품입니다.

"웨이버리" 

사자자리 어딘가에서 전파를 쫓아 지구로 온 베이더 (inavader)가 모든 전기를 빼앗은 후를 그린 단편입니다. 

분명 지구가 정복당한 상황인데, 주인공 조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는 결말이 독특합니다. 전기는 없지만 증기기관, 말로 동력을 대체한 뒤 자전거 등으로 더욱 건강해지고, 텔레비젼과 라디오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취미 활동을 즐기게 된다는 내용이거든요.
이러한 점에서는 SF라기 보다 풍자극으로 보는게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시사하는 바도 크고요. 현재를 무대로 인터넷을 잡아먹는 침략자가 등장하는 내용으로 변주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하늘의 혼란" 

1945년 작품으로, 무대는 1987년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늘의 별을 조작하는 기계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함이겠지요. 

그러나 천문학은 건판 사진기에 의지하고 있고, 라디오가 주요 미디어로 등장하는 등 미래에 대한 상상력만 놓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천문대 연구원 로저 플러터에서 물리학자 밀턴 헤일 박사로 주인공이 이동하는 과정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로저 플러터 없이 헤일 박사로만 이야기를 끌고나갈 수도 있었을텐데 괜히 이야기를 벌인 느낌이에요. 헤일 박사가 택시와 함께 장거리 여행을 하는 묘사도 불필요했고요.

그러나 이 작품은 분명 걸작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는 별로지만 미래에 대해 진짜로 통찰력을 발휘한 부분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광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운동이 광고를 위한 것이었다는 반전, 결말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아이이디입니다. 천재 스니블리가 자신의 발명품으로 비누 광고를 하는데 성공하지만, 철자가 틀려 쓰러진다는 결말도 유쾌하고요.

조금만 더 압축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리고 서두에 언급한 단점이 없었더라면 완벽했겠지만 아이디어와 반전만으로도 최고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노크"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장 두 개로 이루어진 짧고 훌륭한 공포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단편입니다. 그러나 공포물은 아니고 기발한 SF에요. 주인공 월터는 잔이라 불리우는 외게인들에게 채집된 인간으로, 그 외 다른 인류는 모두 잔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월터는 백 종류에 달하는 무작위 채취된 동물 암수 한 쌍 중 하나로, 잔들의 동물원에 수용된 신세이고요.
거의 불멸에 가까운 수명을 가진 잔은 인간과 동물들의 생명이 유한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월터는 방울뱀을 이용하여 잔 두명을 죽게 만드는데 성공하여 그들이 떠나게끔 유도합니다. 첫 두 문장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여자, 이브가 될 그레이스가 월터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고요.

그런대로 재미있지만 허술한 것도 사실입니다. 서두만큼은 괜찮았는데 말이죠.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나저나 저 같으면 어떻게 썼을까요? 지구 최후의 남자가 방 안에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린다... 과연 문을 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딜레마를 다뤘을 것 같아요.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 너무나 알고 싶어서 혹시 죽을지라도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말이지요. 혹시 내가 지구에 혼자 남은 생명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함께. 과연 문을 두드린 것은 누굴까요? 아, 저도 궁금해지는군요.

"모든 선량한 벌레눈 괴물들이" 

SF 작가 엘모와 아내 도로시 앞에 안드로메다 2에서 온 외계인 5명이 동물들의 몸을 빌어 나타났다.

어딘가에서 봤음직한 내용입니다. 외계인들이 동물들의 모습으로 지구인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그러나 이 작품 속 외계인들이 엘모와 도로시 앞에 나타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딱히 우주선을 고치는데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감시 때문에 사람만 부족해졌을 뿐이에요. 엘모에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창작력을 준 게 아니라 머릿 속에 있는 일종의 장애물을 제거해 주었다는 설정이라 여러모로 애매해보였고요.

그다지 기발하지도 않고 내용도 설득력이 낮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광기에 빠져라" 

조지 바인은 3년전 교통사고로 이전 기억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는데, 어느 날 편집국장 캔들러가 그에게 병을 핑계로 정신병원 잠입 취재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기억 상실은 핑계일 뿐, 조지 바인은 27세의 나폴레옹이 시공을 초월하여 이식된 상태였다. 조지는 취재 지시의 목적이 자신의 정신병을 몰래 치료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취재에 응해 정신병원에 잠입하는데... 

인간은 실수이고, 기생충이고, 게임의 말일 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백만 개의 행성에는 그 행성의 유일한 지성인 곤충 종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지성이 한데 모여서 단 하나의 우주적 지성을 만든다. 바로 신을!

개미가 신과 같은 절대자라는 반전이 독특한 작품으로 수록작들 중에서는 가장 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70여 페이지에 이르니까요.

초반은 꽤 흥미롭습니다. 정신병원의 비밀도 궁금할 뿐 아니라 조지 바인은 사실 나폴레옹이라는 설정도 꽤 매력적이니까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개미들의 게임을 위해 시공을 초월한 것이라는 짤막한 해석 외의 초반 떡밥은 하나도 회수하지 못합니다. 정신병원의 비밀은 무엇인지, 조지 바인을 본인 몰래 정신병원에서 치료하기 위한 음모였는지 아닌지, 나폴레옹을 구태여 조지 바인에게 소환시키면서까지 하려고 한건 무엇인지 등등은 결국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아울러 인간은 별거 아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것이 진짜 절대자다라는 설정도 지금 읽기에는 식상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진실탐지기" 

2년 전 실종된 범죄 심리학자 채플 박사와 범죄자들이 거짓말 탐지기를 빠져나간 상황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유능한 탐정 벨라 조드가 사건 해결에 도전한다.

1999년을 무대로 한 SF 범죄물인데, 탐정과 범죄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범죄는 그다지 비중이 없습니다. 유능하다는 탐정 벨라 조드의 수사도 변장과 함정 수사가 전부고요.

하지만 최면을 통해 기억을 지워 거짓말 탐지기를 통과하게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획기적입니다. 사건 자체에 대해 기억을 하지 못하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는건데, 참신하고 대단했습니다.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어지는 반전도 그럴듯합니다. 거짓말 탐지기 통과를 요청한 범죄자는 모두 중범죄자들인데, 그들의 기억을 지워주면서 선량하게 살게끔 최면을 걸어 결국 범죄 자체가 없어지게 만든다는 것으로 역시나 탁월한 아이디어였어요.

한마디로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프레드릭 브라운의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불사조에게 보내는 편지" 

18만년 동안 살아온,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의 독백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 문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냉전시대의 공포를 희망적으로 설명하는 소품입니다. 불사에 가까운, 15만배 느리게 사는 남자에 대한 설정은 재미있으며, 인류는 역동적이기에 절대 멸망하지 않는다는 희망찬 메시지도 인상적입니다.

허나 배경이 되는 사상과 메시지 모두 지나치게 오래된 것이에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밋키 다시 우주로"

8년만에 다시 쓰여진, 똑똑해진 생쥐 밋키 이야기입니다. 어지간히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새로 투입된 흰색 생쥐 화잇티와의 사투를 그립니다. 일종의 모험물이랄까요? 화잇티가 X-19 장치를 조작하여 흰 쥐를 생태계 정점에 놓으려 한다는 악마적인 발상이 눈길을 끌며, 지성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결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앨저넌에게 꽃을"과 역시나 비슷하네요. 앨저넌 이름이 밋키였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녹색의 땅"

붉은 행성 크루거 4에 추락한 우주비행사 맥개리는 이 행성에 추락한 것으로 알려진 우주선 잔해를 찾아 정글을 헤멘다. 트랜지스터 부품을 구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그의 유일한 파트너는 5족 생물 '도로시'. 어깨 위에 올려놓은 도로시는 흡사 여성의 손길 같고, 그런 도로시에게 위안을 느끼며 말을 건넨다. 그러던 중 우주선 하나가 그를 발견한다!

붉은 행성에서 '초록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가는 광인의 이야기입니다.
구하러 온 아처 중위에 의해 도로시는 존재하지도 않고, 4~5년이라고 믿었던 표류 기간이 무려 30년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지구가 우주 전쟁으로 파괴되어 초록색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에 결국 정신이 붕괴해버리고 만다는 결말은 섬찟합니다. 붉은 행성 크루거와 그곳의 생태계에 대한 짤막한 묘사도 상상력을 많이 자극하는데, 이 부분은 영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 역시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반전이었어요. 예전에 다른 앤솔로지에서 읽었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격 교환기" 

편집장 맥기에게 괴롭힘당하는 기자 '나'는 발명가 타킹튼 퍼킨스의 신발명 취재를 나선 후, 그가 '연격 교환가'라는 것을 발명한 것을 알게 되는데...

도라에몽스러운 발명품이 등장합니다. 내용도 성인용으로 변주한 도라에몽같고요. 발명품으로 소동이 일어나고, 결국 주인공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결말은 도라에몽 그 자체이지요. 

하지만 소동 이후 모든게 제자리를 찾는 도라에몽 장치와는 다르게 타킹튼 퍼킨스와 맥기의 몸을 바꾸어서 최악의 파트너들끼리 함께 살게 만든다는 결말은 아주 통쾌했습니다.

평범한 아이디어를 전개와 결말로 보완한 작품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무기" 

그레이엄 박사는 궁극의 무기를 연구하고 있는 과학자로, 그의 유일한 고민은 정신지체아인 아들 해리였다. 그런 그에게 어느날 니만트라는 인물이 찾아와 무기 개발을 그만둘 것을 부탁하는데...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프레드릭 브라운의 답변. 

4페이지밖에 안되는 짤막한 분량이지만 흥미로운 도입부와 캐릭터, 진지한 주제에 놀라운 반전까지 모든 걸 갖춘 걸작입니다. 인류가 궁극의 무기를 갖는건, 백치가 장전된 리볼버를 갖는 것과 다를바 없다는 시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측면도 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카투니스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외계인 만화를 그린 후, 빌 개리건은 그가 그린 외계인과 똑같이 생긴 외계인의 초대를 받았다. 그들은 만화에 감명해서 개리건을 황실 만화가로 임명하려 했다...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 이야기를 변주한 SF입니다. 서로를 끔찍하고 흉물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하는 점이 그러하지요. 그러나 결말은 정 반대입니다. 개리건이 외계인 모습이 된 다음에 익숙해진 후 모든 행복을 거머쥐거든요.

그러나 좋은 결말, 반전이었다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반전의 매력은 부족하며, 여러모로 쉽게 간 느낌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돔" 

'죽음보다는 고독이 나은 법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죽음보다는 나은 법이다.'

카일 브레이든은 핵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듣고 구 형태로 완벽한 방어막을 이루는 "역장"을 작동시켰다. 카일은 죽음보다 고독이 낫다는 생각으로 30년을 버텼지만, 결국 홀로 죽기가 두려워 역장을 끌 결심을 하는데... 

착각으로 스스로 고립되어 이방인이 된 남자를 그린 작품으로 주제는 좋습니다. 냉전 시대를 극한까지 그려낸 설정도 볼만하고요. 하지만 홀로 돔 안에 갇히는 것을 선택한 카일 브레이든의 심정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독보다는 죽음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리고 밖의 세상은 유토피아가 되었다라는 반전도 평이합니다. 차라리 사랑을 고백한 '미라'가 그를 떠나지 않고 둘이서 같이 30년간 늙어가다가 유토피아를 만난다는 설정이 소설적으로는 더 나았을 것 같네요. 만약 그랬다면 미라에 의해서 지옥이 열렸을테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스폰서의 한마디" 

1954년 7월 9일 수요일 오후 8시 30분, 전 세계 라디오에서 기묘한 방송이 들려왔다.
아주 잠시 먹통이 된 후 차분하고 평범한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스폰서의 한 마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1초 후 다른 사람이 말했다. "싸워라."
미국 대통령은 이 방송이 현재 기술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는 분석 결과를 전달받는데... 

'인간은 명령을 받으면 반대로 행동한다'는, 신뢰할 수 없는 심리학 설정에 기반을 둔 작품입니다. '밀그램 실험'이 있기 전에 쓰여진 이야기겠지요. 

그래도 과학적, 정치적인 분야에서 시작하여 종교적인 분야까지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이 이어지면서, 이 명령은 들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만큼은 꽤 설득력있게 그려집니다. 사탄이 내린 명령이면 당연히 들으면 안되고, 신이 내린 명령이라면 지성과 선의가 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성한 반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럴듯했어요. 분석 덕분에 여론도 싸우지 않는 쪽으로 기울게 된다는 전개도 괜찮았고요.
또 이러한 평범한 냉전 시대를 무대로 한 우화임에도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도 장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폰서"라는 단어죠. 대체 우리, 지구, 인류의 스폰서는 누구란 말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스폰서가 누군지 모르므로 명령을 들을 수 없다는 결론과 함께 작품은 끝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약간 흥미로왔을 뿐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결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 큽니다. 별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냉전 시대 관련 설정의 작품은 여러모로 뻔하고 지금 읽기에는 좀 낡은 소재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나와 플랩잭과 화성인" 

광산을 찾아다니는 나와 당나귀 플랩잭은 어느날 화성인을 만났다. 화성인은 내가 아니라 플랩잭이 지성체라 여겨 대화를 시도하고, 그들의 지구 침공 계획을 털어놓는데... 

이른바 '오해와 착각' 개그물입니다. 나와 플랩잭의 티격태격 묘사가 유쾌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오해로 인한 난처한 상황도 볼거리고요. 무엇보다도 플랩잭이 화성인에게 무언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서 그들이 지구 침공을 포기하고 돌아가는데, 나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플랩잭이 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결말까지 유쾌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쓴 SF를 읽는 느낌이었달까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어린 양" 

수록작 중 가장 이질적이라 할 수 있는 싸이코 스릴러로 "진, 베르무트에 젖은 올리브 색깔"이라는 묘사나 여러 시, 음악, 밤이라는 배경에 대한 묘사는 '코넬 울리치'가 썼다 해도 믿을 정도로 디테일합니다. 아내 램이 살아 있는 것 처럼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그녀는 이미 죽은지 오래라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도 섬찟했고요. 유머러스한 블랙 코미디나 반전이 있는 장르 문학에 강한 작가인줄 알았는데 이런 순문학적인 스릴러에도 능하다니 과연 거장은 거장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날개짓 소리"

15달러에 영혼을 팔려던 무신론자가 급하게 멈추고 15달러를 날린 이유는? 에 대한 짤막한 소품입니다. 주인공이나 독자나 답을 찾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뭐가 껄끄러웠던 것인지 잘 모르겠네요. 특별히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이럴 바에야 영혼을 팔고 할아버지가 죽은 뒤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가는게 더 재미있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거울의 방" 

시간을 되돌리는 일종의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SF로 타임머신에 대한 아이디어와 함께 '50년'을 계속 되돌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돔"의 주인공은 역장을 끄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은 타임머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면 인류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위험 때문에 갖혀 지낸다는 점에서 좀 비슷한데, 냉전 시대의 뻔한 SF인 "돔"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설정도 보다 디테일하고요. 50년 동안 무얼 어떻게 먹고 사는지 등 깊이 들어가면 여러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이상의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다음은 모두 1~2페이지짜리 쇼트쇼트입니다.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고 단평만 적겠습니다.

"해답" 두말할 필요 없는 걸작. 별점은 5점.

"데이지" 짤막하지만 담겨야 할 모든 것이 담겨있는 교과서적인 쇼트쇼트. 별점은 4점.

"대동소이" 뻔했음. 별점 2점. 

"예절"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을 다룬 유쾌한 소품. 별점은 3점.

"허튼소리" SF 작가의 자조적인 농담으로 보이는 소품. 별점은 2.5점.

"화해" 뻔하고 뻔하도다. 별점 1점.

"탐색"신이 두려워한 사람이 누구인거죠? 주인공 피터의 정체는 신선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별점은 2점.

"형기" 과학적인 농담인데 꽤 써먹음직한 반전이 돋보임. 별점은 2.5점.

"유아론자" 이 정도면 신성모독이 아닐까... 여튼 신선한 창조 이야기. 별점은 2.5점.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진정한 소리를 찾는 음악가 둘리 행크스가 우연히 만난 노음악가를 살해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호우보이'라는 악기를 손에 넣은 뒤 맞는 최후에 대한 이야기.
음악에 대한 장황한 묘사가 펼쳐지는 순문학스러운 범죄 판타지로 '하메룬의 피리부는 사나이'로 끝나는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
2021년에 읽기에는 뻔하고, 많이 친숙한 이야기였어요.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그런데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다고 느껴집니다.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사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 하지만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이라 생각됩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거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왔던 작품.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 단편입니다.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이야기.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으로,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힘이 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으니까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