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5/09/18

나를 아는 남자 - 도진기 : 별점 1.5점

나를 아는 남자 - 4점 도진기 지음/시공사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구는 혜미의 부탁으로 박민서의 뒷조사를 시작했다. 별거 중인 그의 아내 문성희가 남편의 불륜을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물증을 잡지 못한채 조사 기간이 길어지자, 문성희는 남편 집에 침입하여 조사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마침 박민서가 인천으로 향한 것을 알게 된 진구는 몰래 집에 침입했다가 박민서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추리소설가이자 판사이신 도진기 작가의 진구 시리즈 2작. 일단, 판사라는 업에 종사하면서 작품을 계속 발표하시는 노력과 정열에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작품은 기대 이하였습니다. 진구가 살인 혐의를 뒤집어 쓰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핵심인데, 전개와 묘사 양쪽 모두에서 극적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구 본인이야 엄청 스트레스 받고 힘들었을지는 모르지만 독자는 그걸 알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수사를 빙자해서 좋은 것만 먹으러 다니던가 하는 식이라 작중에서의 긴장감이 전무하니까요.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언제까지 무죄를 증명하지 못하면 잡혀간다! 와 같은 한계점이 명확히 존재했어야 합니다. 국내 사법제도 특성상 그러한 설정이 힘들었다면, 진구는 구치소에 갇혀 재판이 시작되면 유죄는 확실한 상황이라는 전제를 깔고 면회오는 혜미를 통해 진범을 밝혀나간다는 전개로 가져가던가요. 물론 이런 설정과 전개는 "환상의 여인"이나 "처형 6일전"과 같다는 약점은 있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흥미진진했을겁니다.

그리고 추리소설로서의 재미도 부족합니다. 진범이 누구일까?에 촛점이 맞추어지지 않고 우왕좌왕하는 과정이 너무 긴 탓입니다. 또 중반 이후부터는 박민서가 남긴 증거물을 찾기 위한 노력이 전부인데, 이 증거물(노트)이 임재엽이라는 제 3의 인물과 엮이게 만드는 등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기는 합니다만 솔직히 핵심 증거로는 여러모로 부족했습니다.
아울러 이런 노트를 프로 플레이보이(?)가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놓아두었다는 것 도 말이 안됩니다. "사냥꾼의 일기"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 시점에 노트라고요? 인터넷 노트, 뭐 예를 들면 구글 드라이브같은 것을 활용하는게 당연하잖아요. DB화 하기도 쉽고,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으니까요. 폰도 아이폰을 쓴다면서 노트라니... (참고로 이 리뷰도 삼성 갤럭시S4 + 에버노트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박민서의 핸드폰을 바꿔 가져간 방수연이 우연히 박민서의 핸드폰에 깔린 앱을 보게 되고, 거기서 문제의 글을 보게 되어 극렬한 살의를 품게되었다는게 트릭과도 연계성이 생길 뿐더러 훨씬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왠만한 핸드폰은 자동 로그인이 될테니. 그리고 문제의 노트를 삭제하면 모든게 완벽하게 끝났겠죠. 그리고 진구는 오프라인으로 작성된 이 노트를 발견하다는 결말! 아... 제가 다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노트가 방수연이 범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의문입니다. 핸드폰이 바뀌었다는 것은 진구의 추리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경찰은 진구, 아니면 노트 때문에 또다른 살인을 저지른 문기동을 범인으로 기소할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마지막으로 진구의 천재적인 추리력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은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커플링을 발견한 상황에서 박민서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눈치챘다는 설정이 훨씬 나았을텐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어요. 박민서가 정신병원을 다녔다는 것, 커플링을 맞췄다는 것, 한서원과 모종의 썸씽이 있었다는 것 정도로 박민서가 플레이보이였다고 짐작하는 것도 무리고요. 좀 더 장치가 필요한 부분이죠. 이 부분의 정보가 부족한 것은 박민서 캐릭터를 거의 마지막까지 순진무구한, 마음에 상처입은 어린왕자로 몰고간 탓인데 여러모로 실패 같네요.
그 외에도 문기동이 퍽치기를 살인에 사용한다는 트릭, 최초 구속 기소된 진구가 빠져나갈 수 있었던 닦인 지문 트릭 등 작위적이고 별로인 트릭도 감점 요소입니다.

물론 아주 건질게 없는건 아니에요. 일단 그동안 국내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진구 캐릭터는 여전히 재미있기는 합니다. 또 진구 수준의 일반인이 조사할 수 있는 극한까지 정보를 조사하는 과정도 굉장히 설득력이 높습니다. 특히나 작가의 전문분야 지식을 활용한 일종의 편법들이 아주 재미있는데 예를 들자면 경찰 신분증 위조와 같은 것이죠. 일부만 위조하면 신분증 위조죄에 해당하지 않고, 벌금 몇만원 수준의 사칭죄에만 해당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도 꽤 유용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또 국내 작가 중 가장 본격 추리물 스타일 작품을 발표해오신 도진기 판사님 작품답게 괜찮은 트릭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인천으로 향하며 곧 집에 도착한다는 메시지를 남긴 박민서의 전화 관련된 트릭이나 M.S.H라는 이니셜이 사용된 커플링 관련 트릭이 그러합니다. 전화 트릭은 핵심 중의 핵심 트릭이고 커플링은 박민서의 여성 편력을 증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등 작품에 잘 녹아든 것도 마음에 들고요.

그러나 단점이 너무 명확해서 장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괜히 노트 가지고 왔다갔다하는 등의 잔가지는 다 쳐내고 핸드폰 트릭에 다른 증거 한가지만 더 덧붙여 깔끔하게 중단편 분량으로 마무리하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2015/09/16

데인 가의 저주 - 대실 해밋 / 구세희 : 별점 1.5점

데인 가의 저주 - 4점 대실 해밋 지음, 구세희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에 소속된 '나'는 도난당한 다이아몬드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레게트 가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에드거 레게트의 딸 가브리엘을 만났고, 그녀가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다는걸 들었다. 뒤이어 다이아몬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던 남자들이 살해당했고 레게트 본인마저 자살하면서 레게트 가에 감춰져 있던 충격적인 내막이 드러나는데… 과연 악몽같은 사건들의 연속은 '데인 가의 저주'에서 비롯된 것인가? (출판사 책 소개 인용)

대실 해밋 전집 두 번째로 출간된 작품. 콘티넨털 탐정사의 이름 없는 탐정이 주인공인 시리즈입니다. 첫 번째 작품은 유명한 "붉은 수확"입니다만, 아주 오래전 (대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때인 20여 년 전, 당시 거주하던 인천 동네 문방구 서점에서 구입!) 일신 추리문고 시리즈로 읽어보았기에 이 작품부터 읽게 되었네요. "붉은 수확"의 두께를 보니 제가 예전에 읽었던 버전은 일어 중역일뿐만이 아니라 내용 자체가 좀 축약되고 줄어들었으리라는 확신이 들지만, 뭐 읽긴 읽은 거니까요. 하여튼, "붉은 수확"도 좋은 작품이지만 "몰타의 매"가 워낙에 걸작인 덕에 꽤 큰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단편 "쿠비날 섬의 약탈" 역시 재미있게 읽었었고요.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솔직히 기대에 전혀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단 제목만 보면 막장 가문이 등장하는 일본 고전 추리물 느낌인데, 정작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데인 가"의 딸 가브리엘의 주변에서 수많은 살인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애초에 근거도 없고 애매한, 게다가 가브리엘의 의도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거든요. 이걸 "데인 가의 저주"라고 묶는 것 자체가 억지죠. 가브리엘도 뭔가 있어 보이게끔 외모까지 제대로 묘사하지만 정체는 불쌍한 어린양에 불과한 탓에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지 못합니다.

전개도 김성모 화백의 만화를 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막나가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래도 1부라 할 수 있는 레게트(메이엔) 부부의 죽음까지는 읽을 만합니다. 앨리스가 가브리엘이 어렸을 때부터 벌인, 광기 어린 복수극이 꽤 그럴싸하게 펼쳐지니까요. 물론 미쳐도 너무 미쳤다 싶은 광기는 과했으며, 레게트가 아내 살해의 누명을 쓰고 투옥된 후 겪은 - 프랑스에서 베네수엘라와 멕시코, 미국에 이르는 -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너무 황당해서 그닥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는 않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냥저냥 무난하고 읽을 만한 하드보일드 장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허나 가브리엘이 치료를 위해 사이비 종교단체라 할 수 있는 성배의 사원에 머무르게 되는 2부부터는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사이비 종교단체의 비밀이 가스와 최면 효과를 이용한 과학적인 사기였다는 진상만큼은 나쁘지 않았습니다만 "데인 가의 저주"와 엮어서 이야기를 전개한 게 문제랄까요. 또한 아무리 최면술이 강하다 하더라도 미니가 리스를 죽이게 만든 것처럼 누군가를 조종한다던가, 조셉이 스스로 신이 된 착각에 빠진다는 류의 설정은 영 와닿지 않았습니다. 조셉이 아내 에레니아를 죽이려는 이유도 미쳤다는 것으로 끝내기에는 설명이 부족했고요. 사실 1부도 그랬지만, 그냥 "미쳤다"로 이야기를 만드려는 작가의 고민 없는 전개는 볼썽사나웠어요. 범행들도 하나같이 허술해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뭘 이렇게 거하고 어렵게 사건을 일으키는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제가 조셉 할던이었으면 차라리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죽이고 신도들을 자신의 최면술과 카리스마로 입막음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부, 가브리엘의 남편 에릭이 죽은 후의 이야기는 막 나가는 전개의 화룡정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에릭의 시체가 발견된 후 가브리엘이 사라지고, 그녀가 용의자로 의심을 받는 와중에 갑자기 경찰서장 코튼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으며, 불륜 상대인 하비가 용의자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다다르는 과정도 급작스러운데, 불륜 상대 하비의 알리바이를 코튼 부인이 증명하는 황당한 상황에 더해 코튼이 그를 범인으로 만드려고 현장을 조작하는 등의 개막장 스토리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의 일일연속극을 보고 있는 건지, 하드보일드 3대 거장 중 한 명의 하드보일드 장편을 읽고 있는 건지 아주 혼란스러웠어요. 마지막에 시체가 따뜻했다는 이유로 코튼을 진범으로 체포하는 결말 정도만이 이 작품이 그래도 하드보일드 추리물이구나 싶은 요소였습니다만... 추리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즉흥적인 전개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마지막 4부는 결말이 밝혀지는 대단원인데 앞의 개막장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나로 엮으려는 시도가 펼쳐집니다. 이를 위해 그동안 상상도 못했던 인물인 작가 오웬 피츠스테판이 진정한 흑막으로 등장하죠. 허나 설득력을 갖추었다 보기에는 어려운 뜬금없는 결말일 뿐더러 작가가 피츠스테판을 흑막으로 만들기 위해 1부, 2부, 3부의 사건을 하나로 엮는 억지스러움에는 눈물이 날 정도였어요. 방법은 아래와 같습니다.

  • 1부 - 피츠스테판도 데인 가의 후손이다! 이렇게 해서 앨리스와 엮죠 (불륜 관계였다는 설정도 살짝 포함)
  • 2부 - 에레니아 할던과 불륜 관계였다!
  • 3부 - 범인 하비는 사실 조셉 할던 밑에서 일하던 핑크의 양아들이었다! 그래서 에레니아를 통해 조종이 가능했다!

... 이게 당췌 뭔지 싶습니다.
아울러 피츠스테판을 괴물처럼 묘사하려는 시도 역시도 실패작이에요. 무엇보다도 피츠스테판의 모든 범행은 운에 의지한 즉흥적인 범죄들이 대부분이라 한번 걸리니 증인들이 속출해서 모든 사건에서 범인으로 밝혀지게 되니까요. 애초에 피츠스테판이 사건에 개입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으로 '나'가 과거의 인연으로 본격적인 사건 조사 전에 방문한 것이 시작이니 피츠스테판이 뭔가 작전을 짜는 등의 시도를 할 이유나 여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리고 주인공 탐정이 가브리엘을 보살피는 과정은 왜 들어갔는지 그 이유도 좀 궁금합니다. 여주인공의 마약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주인공이라... 뭔가 차도남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주려 한 것 같은데 여러모로 어색하고 안 어울렸어요. 하드보일드 주인공이라면 따뜻한 보살핌이 아니라 구타와 감금으로 마약을 끊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콘티넨털 탐정 사무소에 소속된 주인공 탐정이 나름 묵직하게 묘사된 점과, 그나마 가브리엘이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결말 정도는 괜찮지만 그 외에는 딱히 읽을 가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하드보일드 장편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점인 복잡한 인간관계를 극단적으로 활용해서 작위적인 이야기를 만든 아이디어는 그럴듯합니다만 전개가 너무 막장이었어요. 이야기 하나하나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괜찮은 것도 있는 만큼, 차라리 하나하나를 단편으로 발표하는 게 더 나았을 것 같습니다.

이번 독서의 유일한 가치는 작가의 대표작으로 "몰타의 매"와 "붉은 수확"만 거론되는 이유를 알려준다는 점뿐이군요. 전집은 3, 4권으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더 읽어볼 필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차라리 "붉은 수확"이나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2015/09/12

대프니 듀 모리에 - 대프니 듀 모리에 / 이상원 : 별점 4점

대프니 듀 모리에 - 8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레베카"로 유명한 데프니 뒤 모리에의 단편집입니다. "레베카"의 후속작이라는 "미세스 드윈터"는 아주 오래전 군대 있을 때 읽었었는데, 정작 "레베카"는 아직까지도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구해보기 힘들었으며, 정식 출간 이후에는 유명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재미없고 지루한 고전들에 많이 치였던 탓입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읽어야 하는 작품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마침 단편집이 눈에 뜨이기에 워밍업 차원에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왠걸, 완전 대박이네요. 최근 읽어본 단편집 중에서는 최고였어요. 수준 높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한가득 수록되어 있거든요. 대체로 일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마주치는 기이한 사건과 위기를 다루고 있는데, 깔끔하고 깊이 있는 묘사와 독자에게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구성력이 아주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들의 설정 및 결말도 발표 시기를 짐작하면 놀랍다고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선하고 새로웠고요. 아울러 결말들도 무척 좋았습니다. 반전이 좋은 작품도 있고, 조금은 뻔하고 식상한 결말의 작품이라도 짤막한 묘사나 대사만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는 솜씨가 인상적이더군요. 역시나 거장은 뭔가 다르구나 싶네요.

물론 시대를 초월하지 못한 식상한 작품이 없는 것은 아니고, 몇몇 작품은 조금은 억지스럽고 뜬금없기는 합니다. 그래도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소수의 단점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그리고 저의 선입견을 무색케 하는 좋은 단편집이에요. 장르문학, 그리고 단편집을 좋아하신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레베카"도 바로 읽어봐야겠네요.

수록 작품별 짤막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일부 스포일러가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쳐다보지 마"

아이를 병으로 잃은 영국인 부부가 베네치아 관광 중, 부부의 죽은 아이 크리스틴이 보인다는 기이한 영매 할머니를 만나는데...

아내 로라가 사기꾼에게 걸렸다고 생각하는 남편 존의 심리묘사가 핵심이자 대부분인데, 묘사력이 대단해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먼저 런던으로 떠난 로라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장면도 제법 박진감이 넘치고요. 영국인 관광객이 베네치아에서 무슨 모험을 즐길 수 있겠는가에 대한 답이랄까요?

하지만 쫓기는 여자아이와 베네치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연결시키는 결말은 좀 뜬금없더군요. 존도 사실은 영매다!라는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고 말이죠. 이국적인 풍광, 영매와 유령, 연쇄살인마라는 소재를 조합시키려는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잘 마무리된 것 같지는 않아요.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도널드 서덜랜드 주연의 영화가 유명한데(특히나 베드신) 과연 어떤 식으로 만들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새"

히치콕 영화로 유명한 단편. 읽어보니 과연 명불허전이네요. 한마디로 걸작입니다.

새들이 인간을 습격한다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이렇게까지 재미있게 그려내었다는 점, 그리고 크리쳐물에 흔하디 흔한 고어스러운 묘사가 없다는 점에서 경의를 표합니다.

주인공 냇이 너무나 평범한 소시민이라는 설정도 돋보입니다. 덕분에 새들이 사람을 습격하는 사태의 이유는 모르지만, 그게 뭐건 간에 가족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모습에 강한 설득력이 생기거든요. 그 외에도 새들의 습격이 간조와 관련이 있다던가, 냇이 공습을 경험했기에 어느 정도 대비가 가능했다는 설정들도 적절하게 배치되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어찌되었건 우리 가족은 살아남을 것이다... 라고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장면까지, 정말 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딱 하나 궁금한 거, 버틸 식량에 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식량이 떨어지면 새들을 먹어도 되지 않았을까요?

"호위선"

2차대전 당시 흑해를 운항하던 화물선이 유보트에 쫓기다가 안개와 함께 나타난 영국 해군 범선의 호위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

"파이널 카운트다운"과 같은 시공간 이동물입니다. 안개에 휩싸이고 이동한다는 설정도 판박이네요. 때문에 지금 시점에 읽기에는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긴박감이 넘쳐야 할 항해 묘사 역시도 이 분야 대표 작가인 알리스테어 맥클린에 비하면 별게 없고요. 전시 상황의 긴박함을 단지 1등 항해사의 심리로만 묘사하는 건 확실히 무리였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

자동차 사고로 20년을 타임 슬립한 엘리스 부인의 이야기.

1932년에서 1952년으로 워프한 뒤 여러 가지 낯선 상황에 난처해하는 엘리스 부인의 모습이 가장 큰 볼거리입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는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아줌마가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가 너무나 설득력 넘치게 묘사되고 있거든요.

그러나 잘 짜여진 타임슬립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그녀가 누구인지 딸조차 증명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해요. 일반적이라면 같은 시공간에서 이동했을 테니 타임 슬립을 하였더라도 동일 인물이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 그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로 옮겨온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도 발표 시점을 고려해보면 아이디어는 높이 평가할 만하며, 잘된 SF는 아니지만 볼만한 드라마임에는 분명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이미 죽어버린 것으로 이 당황스러운 하루를 영원히 반복한다는 내용으로 볼 수도 있으며, 그러한 오싹 일상계 호러물이라면 충분히 좋은 점수를 줄 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낯선 당신"

우연히 만난 극장 매표원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자동차 정비공 이야기.

한 청년이 그야말로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만큼은 대단한 수준이지만 그 외에는 딱히 특기할 만한 점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녀가 공습 때문에 죽은 가족의 복수를 위해 공군을 죽이고 다니는 살인마라는 진상도 굉장히 뜬금없고요. 뭐라 평하기 어려울 정도로 짤막하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푸른 렌즈"

눈 수술 후 마다는 모든 사람들이 동물로 보이게 된다.

멋진 단편입니다. 발상부터가 놀라워요. 모든 사람들이 개, 뱀, 소, 양 등으로 보인다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냈을까요? 나 자신에게만 그렇게 보인다는 게 공포스럽기도 하고 말이죠. 또 살짝 설정에서 드러나듯 동물 형태가 사람일 때의 습성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도 좋았습니다.

결말과 반전도 제대로예요. 다시 사람들을 보게 된 마다 부인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까라는 것인데 예상 가능하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몰아서 터뜨리는 작가의 솜씨가 참 인상적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남편과 앤설 간호사가 불륜 관계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은 마다의 재산을 노리는 남편이 벌인 수작질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전개라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성모상"

남편 장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리는 그가 바다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모상 앞에서 필사적인 기도를 하는데....

다섯 장짜리 짧은 이야기. 꽁트라고 해도 좋겠죠. 마지막 단 두 줄을 제외하고는 마리가 얼마나 장을 사랑하고 걱정하는지, 그리고는 절박하고 필사적인 기도를 올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두 줄의 반전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성모상이 그녀 기도에 화답했다고 생각했던 환영은 마리를 배신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장이라는 것인데 정말 충격적이었거든요. 이 반전이 단 두 줄이라니!
데프니 뒤 모리에가 단편의 대가라는 것을 다시금 깨우쳐주는 작품으로 별점은 5점입니다.

"경솔한 말"

주인공이 과거에 겪었던 꽃뱀 도둑 이야기.

결말은 예상 그대로라 의외성은 없었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뻔한 이야기도 이렇게 재미있게 쓴다는 것이야말로 재능이자 실력이 아닐까 싶네요. 마지막 단 한마디, "아는 얼굴이군요. 워더가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도 깔끔하니 좋았고, 작품의 주제인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도 굉장히 공감 갔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몬테베리타"

등산이 취미인 사나이가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몬테베리타라는 산 정상에 있는 원시종교 집단으로 향한다.

종교적 이상향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잃어버린 지평선"이 떠오르는 작품. 차이라면 몬테베리타 산 정상의 종교 공동체는 가는 길이 숨겨져 있지도 않고, 그 존재에 대해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좀 애매하고, 빅터의 순애보를 그렸다고 보기에는 빅터의 비중이 많이 작은 것이 단점입니다. 아울러 미심쩍고 모호한 결말 역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려워요. 애나가 애초에 나병에 걸려서 몬테베리타에 오게 된 것인지, 이 종교집단의 영생의 비밀은 무엇인지, 그들은 결국 어디로 갔는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끝나거든요. 이들의 삶을 갈구하지만 속세와 거리를 두지 않는 주인공의 심정만이 이해가 될 뿐입니다.

그래도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등산에 대한 묘사는 탁월해서 놀랐습니다. 등산은 남자의 영역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직접 등산을 해본 게 분명하다 생각될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