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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3

COCKTAILS WITH PHILIP MARLOWE, SAM SPADE, AND BOGART

예전에 제가 썼던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이라는 에세이에서 추리 소설 속 칵테일에 대해 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셜록 홈즈가 연재된 잡지로 영원히 기억할 "The Strand Magazine"에서 비슷하게 하드보일드 탐정들과 칵테일에 대한 칼럼이 있길래 번역해보았습니다. 수준은 엉망이고 의역도 많으니 내용 참고 정도로만 보아 주세요.
"I like liquor and women and chess and a few other things."- 필립 말로우 <<기나긴 이별>>

누아르 속 탐정의 이미지는 샘 스페이드 역의 보가트, 하루 일당을 받고 갱스터와 팜므파탈과 싸우는 하드보일드 탐정 필립 말로우 역의 로버트 미첨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상징적인 영화와 배우들을 통해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가상의 탐정들 캐릭터는 그들이 선택한 술에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고요. 분홍색 빨대와 함께 제공되는 프로즌 다이키리는 없습니다.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진하면서 요란하지 않은 클래식 음료를 마셨지요. 지저분하고 어두운 술집이나 구식 호텔 바, 스테이크 하우스 옆 칵테일 라운지, 현지 펍에서요.
"어둡고 연기가 자욱한 바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음모를 꾸미고, 비밀을 밝히고, 속삭이는 고백에는 낭만적인 느와르가 있습니다."라고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 리사 웅거(Lisa Unger)는 말합니다.
레이몬드 챈들러의 탐정 필립 말로우는 열렬한 애주가였습니다. 그는 항상 사무실에 올드 포레스터 버번 한 병을 보관했습니다. "나는 손을 뻗어 올드 포레스터 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병은 3분의 1 정도 차 있었다."라고 소설 <<리틀 시스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 토비 위디컴이 쓴 <<레이몬드 챈들러를 위한 독자 가이드>>에는 챈들러 작품 속 등장 음료에 대한 목록이 실려 있습니다. <<핑거맨>>에는 바카디가, <<빅 시티 클루스>>에는 바카디와 그레나딘이 등장합니다. <<더 하이 윈도우>>에는 포 로즈 위스키가 등장하고요. <<라온트 피전>>에는 더블 깁슨이 있습니다. 이 목록에는 올드 그랜드대드 위스키와 브루클린 스카치도 포함됩니다.
칵테일 문화에 대해 말로는 영구히 기여한 바가 있습니다. 바로 김릿에 대해서였습니다. 소설 <<기나긴 이별>>에서 영국 출신이자 열렬한 애주가인 테리 레녹스는 필립 말로우에게 "진짜 김렛은 진 반, 로즈 사(社)의 라임 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섞지 않는 거죠. 마티니는 비교도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뒤 말로우가 혼자 바에 갔을 때, "바텐더가 내 앞에 음료를 갖다 놓았다. 라임 주스 때문에 엷은 녹색 기미가 있는 신비한 노란 빛깔이었다. 입을 대 보니 부드러운 단맛과 날카롭게 혀를 찌르는 강한 자극이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 나를 보았다. 그리고 자기 잔을 들어 내 앞에 올려 보였다. 우리는 함께 마셨다. 그제서야 그녀의 음료도 똑같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라고 했지요.

김릿
진 2온스 
로즈 라임 주스 ¾온스 
얼음과 함께 쉐이커에 넣은 뒤 30초간 세게 흔든다. 칵테일 잔에 따른다.

대쉴 해밋의 사립 탐정 샘 스페이드는 위스키를 즐겨 마셨고, 해밋의 코믹한 부부 범죄 해결사 닉과 노라 찰스는 칵테일 잔을 손에 들고 있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닉 찰스가 1934년 소설 <<씬 맨>>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들은 완벽한 칵테일을 만드는 전문가였습니다. 닉은 "중요한 것은 리듬입니다. 항상 쉐이킹에 리듬이 있어야 합니다. 맨해튼에서는 폭스트롯 음악에 맞춰, 브롱크스에서는 투스텝 음악에 맞춰 흔들지만 드라이 마티니는 항상 왈츠 음악에 맞춰 흔들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작가 제임스 크럼리의 미스터리 소설은 술집과 맥주, 초라한 인물들로 가득합니다. 1975년에 발표한 소설 <<잘못된 사건>>에서 사립 탐정 밀로 드라고비치는 음주에 대해 긴 독백을 합니다. "아들아,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독선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으니 절대 믿지 마라. 그는 항상 옳고 그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테니까. 그들 중 일부는 선한 사람이지만 선의 이름으로 세상의 대부분의 고통을 야기한다. 그들은 심판자이자 간섭자야. 그리고 아들아, 술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는 남자는 절대 믿지 마라. 그들은 보통 겁쟁이나 바보, 그렇지 않으면 비열하고 폭력적인 무언가를 내면 깊숙이 두려워하고 있는 놈이기 때문이야. 자신을 두려워하는 남자는 믿을 수 없단다. 하지만 가끔 변기 앞에 무릎을 꿇는 남자는 믿을 수 있다. 그는 겸손과 인간 본연의 어리석음,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무언가를 배우고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야. 남자가 더러운 변기에 내장을 내밀 때 자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

사람들이 미스터리를 쓰는 한, 술을 좋아하는 탐정은 계속 존재할겁니다. 사립 탐정은 힘든 직업입니까요. 긴 근무 시간과 낮은 급여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은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가끔은 미키 스필레인의 소설 속 주인공 마이크 해머처럼 술집에 가서 주문을 해 봅시다. "더블 버번 한 잔, 병은 놔두게."

2021/02/13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레너드 카수토 / 김재성 : 별점 4.5점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10점
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뮤진트리

부제는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사"입니다. 말 그대로 20세기 미국 범죄 소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장르의 흐름을 미국의 역사적 변곡점, 흐름과 비교하여 분석하고 있는 문학사 서적이지요.

간단하게 정리해본다면, 하드보일드의 통로 역할을 한 작품으로 소개된건 드라이저의 "미국의 비극"입니다. 가족과 신앙이 도덕적 삶의 기초이고 중심이었던 19세기 모델에서 산업화, 도시화로 급변한 20세기 초 지극히 미국적인 범죄 행위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 뒤, 전통적 가족 모델이 서서히 해체되는 시기에 등장한 작품이 대쉴 해밋"몰타의 매"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신뢰의 결핍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기업화와 함께 찾아온 사회 경제적 변화 때문이지요. 당시 석유 회사에서 시작된 '트러스트' 체제 등장으로 가족 메타포가 기업 세계로 편입되었고, 기업 관행이 모든걸 지배했던 세계입니다. 그 결과, 전통적 가족 관계는 붕괴하고 이기적 개인들이 가족 유대 관계와 의무에서 벗어나 공감따위는 저버리고 돈만 쫓아 날뛰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하지만 돈과 신뢰가 위험한 세상에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걸 보여주고, 샘 스페이드가 매로 상징되는 '투기'를 거부하는 모습은 1929년 주식 시장 폭락을 반영하며, 매 조각상이 가짜라는건 투기 역시 환상이라는걸 의미합니다. 광란의 투기 경제에 대한 해밋의 비판적 시각을 잘 알 수 있지요. 또 주목할만한건 '진짜 남자'에 대한 해석입니다. 대쉴 해밋은 남자를 남자로 만드는건 정당한 보수를 받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스페이드는 직업을 잃을 어떤 모험도 하지 않고요. 반대로 부자들은 무르고 기괴하게 여성적입니다. 돈 많은 악당들을 여성화하여 폄하한 겁니다.

그리고 대공황 시대를 잘 드러내는 작품은 제임스 M 케인의 "밀드레드 피어스"입니다. 하드보일드와 감상주의가 결합된 작품이지요. 밀드레드는 감상주의에 빠져 완벽한 가족을 꿈꾸지만 현실은 시궁창, 딸과의 관계가 파괴된 후 술에서 위안을 찾는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결말로 가정사는 더 이상 여성 공동체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는걸 알려줍니다. 대공황 이후 뉴딜 정책으로 급작스럽게 모든게 변한 탓입니다. 뉴딜은 현대 복지 국가라는 개념으로 가족이 수행했던 보호 관리 역할을 정부가 맡아 수행했기 때문에 공감과 감성은 공적 영역으로 확대되었고, 여성은 뒤로 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남성 중심 하드보일드 소설은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여성은 배제되고, 남성 관료주의가 가정과 사회의 도덕적 중심이라는 자리를 차지했고요.

대공황 이후 가족은 위협받고, 남성은 남성상의 기본 토대인 가족 부양자로서의 정체성이 몰락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탄생한게 완벽한 남자 필립 말로입니다. 위협받던 남성상과 파편화된 가족을 구하는 영웅으로, 배트맨과 슈퍼맨 탄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요. 말로는 무너진 의뢰인이나 관계자들 가족 복원에 최선을 다하는, 감상적이고 선한 영웅이거든요. 이는 구시대 하드보일드 태동기의 냉혹한 회의주의와는 정 반대 모습이에요. 가정이 중심이 되며,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그리고 1950년대에 접어들면, 말로는 더 깊숙이 사건에 개입하고, 더 정서적으로 엮이게 됩니다. 대표적인게 "기나긴 이별"로 말로는 일이 아니라 일의 수혜자에게도 충성합니다. 이거야말로 감성적인 부분이지요. 이렇게 1950년대에 과도한 남성상을 지닌 폭력적인 마초가 부드럽고 감상적인 영웅으로 변한건 냉전 시기, 강한 미국과 안정된 가정이라는걸 유지하려는 분위기 탓으로 설명됩니다. 가장 끔찍했던건 사회 질서의 붕괴를 뜻하는 여성의 일탈이었고요. 그 덕분에 이 때 진정한 의미의 '요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순위를 매기자면, 일하고 능력있는 여성도 나쁘지만, 동성애자는 전통적 가족의 대립항이라 훨씬 더 나빴고, 무엇보다도 잠재적 어머니 역할을 고의로 방기하는 여성 동성애자는 최악 중 최악으로 인식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짐 톰슨은 풍요 속 공포와 우려를 표현했고,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고향에서 뿌리를 잃은 도덕적 불안을 작품에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두 작가 작품 속 주인공들 모두 피해자들에 대한 감상주의적 공감이 최대의 능력으로 묘사되며, 감상주의를 중산층에서 분리해서 상류층에 국한된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주의가 위험하다는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점을 특기할 만 합니다.

1960년대 들어서 하드보일드 탐정들은 더욱 친절해지고, 범인들은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탐정들은 가정을 중시하는 감상주의자에 심지어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페미니스트이기도 할 정도로요. 이 시기, 로스 맥도널드는 무너지는 가족 관계를 그렸는데, 모자간 결합의 단절을 통해 부모들의 책임 회피와 피해자는 아이들이라는걸 나타내었습니다. 이는 반항하는 자녀와 무력한 부모라는 1960년대 세대간 갈등을 극명하게 투영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젊은이들의 신뢰를 받고 파괴된 가족을 복원해주는건, 연민, 공동체적 결속과 공감을 중요시하게 여기고 폭력을 가능한 사용하지 않는 사립 탐정이고요. 이렇게 친절하고 가정적인 사립 탐정 속성의 변화는 여성 탐정들을 등장시킵니다. 반면 더욱 사악하고 반사회적이 된 범인들은 결국 연쇄 살인범으로 진화하였습니다. "레드 드래곤"이 연쇄 살인범 소설의 교과서적 캐릭터와 기본 플롯을 제공한 뒤, 포화상태를 넘어서 공급 과잉상태에 이를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이유 중 하나로 20세기 후반 미국 정부의 정신질환 정책과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정신질환자가 공감을 일으키는 대상에서 괴물로 변한 뒤 혐오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으며, 연쇄 살인범은 이 대상화 작업에 적합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요.

이렇게 현대 연쇄 살인범 소설까지 큰 흐름을 일람하고 있으며, 흑인 범죄 소설과 같은 특이점에 대한 소개도 충실합니다. 미국 근대사와 범죄 소설의 흐름이 절묘하게 일치하는게 신기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대표작에 대한 소개도 상세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문제라면 저는 도저히 좋은 평가를 할 수 없었던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이나 탐정 스펜서 시리즈에 대한 호평이었습니다. 이래서야 책에서 소개하는, 제가 읽지 못한 다른 작품들에 대한 신뢰도 하락할 수 밖에 없지요. 60년대 이후 범죄 소설의 흐름에 대한 소개는 별로 자세하지 않다는 점도 조금은 아쉬웠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4.5점입니다 이쪽 장르에 대한 문학사이자 비평서로서 재미와 가치 모두를 충족시키는 좋은 책인건 분명합니다. 추리와 범죄 소설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리뷰를 쓰기 어려웠어요. 처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재미삼아 읽기 시작했던게 문제였습니다. 약간은 공부하듯 분석하고 정리해야 내용 요약이 가능한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리뷰로 이 책을 잘 소개하지 못한건 다 제 공부가 부족한 탓입니다....

2020/10/04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 신예용 : 별점 2점

세계 미스터리 걸작선 1 : 살인자 외 - 4점
어니스트 헤밍웨이 외 지음, 신예용 옮김, 박광규 기획.해설/코너스톤

1890년대 후반에서부터 1940년대 까지, 추리소설의 여명기와 황금기까지의 시기에 발표된 여러가지 단편들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이런 류의 앤솔러지는 "셜록 홈스의 라이벌들"을 비롯하여 그동안 많이 접해보았지만, 국내에 비교적 소개되지 않았던 유명 시리즈 작품들 위주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절반 정도는 '퀸의 정원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을 통해 선정된 작품들이기도 하고요. 최소한 역사적 가치는 확실히 있다는 의미지요.

그러나 역사적 가치 외의 다른 가치를 느끼기는 함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전 작품인 탓입니다. 여러모로 설득력도 떨어졌고요.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하지만 저와 같은 고전 본격 추리 애호가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라는건 분명합니다. 초창기 추리 소설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저같은 사람이 많이 없는지 재정가로 가격이 3000원 수준으로 떨어져서 가격도 착하거든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스터들리 농장의 공포" 

의사인 나에게 스터들리 부인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병을 치료해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스터들리 농장으로 찾아가 준남작과 만났는데, 준남작은 자신이 밤마다 유령을 보는 탓에 공포로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준남작과 방을 바꾸어 유령의 정체를 밝혀내려 하는데...

코난 도일이 "마지막 문제"를 발표하며 '스트랜드 매거진'에 셜록 홈즈 단편 연재를 중단했을 때, '스트랜드 매거진'이 구멍을 메꾸고자 투입한게 바로 이 작품이 포함된 '어느 의사의 일기 시리즈' 였다고 합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의사'인 핼리팩스 박사가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시리즈로 '퀸의 정원' 에서는 최초의 '의학 미스터리'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아쉽게도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작품 발표 계기, 그리고 연재 시점을 보면 정통 본격물의 시조 중 하나로 보아도 무방하겠지만, 추리 소설의 여명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완성도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스터들리 준남작과 부인의 방은 옷장의 비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부인이 저승길 동행을 위해 준남작에게 밤마다 유령쇼를 펼쳤다는게 진상인데, '나' (핼리팩스 박사)가 침실을 바꾸고 유령을 목격한 뒤, 유령이 나타난 옷장을 수색한 것 외에는 별다른 추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가 변장만 하고 추리를 펼치지 않는다면, 이를 정통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잖아요?

스터들리 부인이 '나'를 부르지 않았다면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에서 이야기 전개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부인은 '나'가 준남작에게 두뇌 질환으로 환영을 보는 걸로 이야기해줄걸 기대했다는데,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가 유령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을거라 생각한건 영 납득이 가지 않네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아울러 '의학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전무해서 아쉬웠습니다.

본격 추리 소설 초창기 단편 중 한 편을 만나 보았다는 기쁨, 그리고 오스틴 프리먼손다이크 박사 이전에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 탐정이 있었다는 사료적 가치, 마지막으로 스터들리 부인이 유령을 만들어낸 장치가 배터리에 연결된 전등이라는 상당한 하이테크 제품이라는 점 등 눈길을 끄는 요소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1점입니다.

"금고실의 다이아몬드" 

헤드와 친구 두프라이어는 둘의 세계적인 악녀 마담 콜루치가 다이아몬드 상인 칼튼의 파티에 초대된 걸 알고 파티 초대를 받아들였다. 마담 콜루치는 칼튼 부인의 전남편이 살아있다며 그녀를 협박하는 것과 동시에, 칼튼 부인을 시켜 빼돌린 로체빌 다이아몬드를 칼튼의 철벽 그곳에서 훔쳐낼 계획이었다....

L.T. 미드와 로버트 유스터스가 합작하여 1890년대 후반 발표되었던 연작 단편집 "일곱왕 연맹" 수록작이라고 합니다. 희대의 악녀로 비밀 범죄 조직 '일곱 왕 연맹'의 총수인 마담 콜루치와 과학자이자 탐정 노먼 헤드의 대결을 그리고 있는 시리즈라고 하네요. '퀸의 정원'에서 매긴 가치는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 가치'고요.

역시 '퀄리티' 점수는 받지 못했는데, 이해가 갑니다. 특히 이 단편은 그 수준이 아주 미흡해요. 내용부터 딱히 건질게 없거든요. 헤드와 마담 콜루치와의 대결이 등장하지 않는 탓이 가장 큽니다. 헤드의 활약이라고는 고작해야 칼튼 부인을 설득해서 전 남편에 대한 사실을 고백하라고 이야기하는게 전부거든요. 그나마도 실패하고요. 게다가 다이아몬드도 놓쳐버리기 때문에 이래서야 명탐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

못하는게 없는 희대의 악녀인 마담 콜루치 캐릭터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다고 생각됩니다. 또 열쇠를 돌리면 비상벨이 울리는데, 울리지 않은 이유에 대한 트릭도 괜찮았습니다. 칼튼의 열쇠를 조작해서 열쇠의 머리 부분만 헛돌게 만든 거지요. 즉, 열쇠를 돌려도 잠기지 않은거고, 당연히 다시 열어도 벨이 울리지 않은 것입니다. 열쇠를 돌릴 때의 저항감, 소리, 마지막으로 금고가 정말 잠겼는지 확인을 왜 안했는지 등 딴지를 걸자면 끝도 없지만, 열쇠 하나의 조작으로 모든걸 일이루어 낸, 대담한 발상의 트릭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연작 단편을 이어서 다 읽는다면 모를까, 이 작품 하나만 읽고 점수를 주기에는 부족한 점이 더욱 많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탐정 스페이드" 

맥스 블리스가 협박 받고 있다는 전화를 스페이드에게 남긴 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샘 스페이드는 아는 형사 던디 등이 수사하는 와중에 끼어들어 범인이 누구인지 밝혀낸다.

대실 해밋이 쓴 샘 스페이드 단편입니다. 묵직하고 거친 사나이 매력을 담뿍 풍기는 이야기이며, 피해자의 딸이 몰래 만나던 불륜남, 광신도이면서 못생긴 가정부 에피 부인이 묘하게 엮여서 사건이 복잡해 지는 전개는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과 다를게 없는데 정통 추리물이기도 하다는게 놀랍습니다. 유력한 용의자인 피해자의 동생 시어도어가 알리바이를 조작하고, 증거를 인멸하여 살인을 저지른 것이며, 시체에 놓여져 있던 '새 넥타이' 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 등은 본격 추리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거든요. 피해자는 옷을 벗던 중 살해된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럴 경우 매고 있던 넥타이가 아니라 새 넥타이가 놓여져 있는건 이상하다는 이유입니다. 이를 발견한 스페이드의 눈썰미도 대단하지요. 

샘 스페이드는 피해자로부터 전화를 4시 5분전 쯤 받았는데, 시어도어는 4시에 법정에서 결혼을 했다는 철벽의 알리바이에 대한 트릭도 간단하고 깔끔합니다. 시어도어는 3시 30분 쯤 피해자를 죽이고 법원으로 가서, 그 곳에 있는 전화로 자신이 피해자인 척 하고 전화를 걸은 겁니다.

물론 스페이드가 한 추리의 증거가 범인 시어도어 손에 난 상처 뿐이라는건 빈약합니다. 상처가 났다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으니까요. 가정부 에피 부인도 손에 상처가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특이한 상처도 아니고요. 손의 상처보다는, 법원에서 전화를 건 기록을 찾아서 시간을 대입해 보는 식으로 풀어갔더라면 더 깔끔했을 겁니다. 아울러 피해자가 시어도어에게 협박?의 댓가로 지불한 돈은 2만 5천불일텐데 2'억'으로 기입된 오타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하드보일드와 본격 추리와의 결합에 성공한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퀸의 정원'에 소개된 "샘 스페이드의 모험" 수록작으로 이 책은 역사적 중요성, 희소성은 물론 퀄리티까지 인정받고 있네요. 당연합니다.

"의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시계"

8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로 "Mystr 럭키팩 8 - 탐정 소설 : Mystr 컬렉션" 수록작과 동일합니다. 

당시에는 혹평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꽤 괜찮은 점도 많았습니다. 자브라스키 박사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살인을 저지른 과정이 훨씬 설득력있게 다가온 덕분입니다. 흥분한 자브라스키 박사가 '층을 착각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우연도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고요. 번역의 차이 때문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우연에 의한 작위적인 범죄라는 한계를 벗어나진 못했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이라는 티는 물씬 납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별점 1.5점을 줄 작품은 아니에요. 다시 매긴 별점은 2.5점입니다.

"두 번째 총알" 

여성 탐정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사장'에게 고용되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일하는 사립 탐정 바이올렛과, 부유하고 젊은 사교계의 꽃 바이올렛이라는 설정이 재미나게 묘사된 작품입니다.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해먼드 씨가 자신의 아기와 함께 죽은 시체로 발견됩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고 가슴에 총을 맞았으며, 아기는 죽은 해먼드 씨의 손에 눌려 질식사했지요. 해먼드 씨 가슴의 총알은 그의 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러나 근접 거리에서 손 총격은 아니었고, 해먼드 부인인 열린 창문을 통해 누군가 해먼드 씨를 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라면, 해먼드 씨 몸 속 총알과 함께 해먼드 씨가 쏜 총알도 발견되었어야 했습니다. 바이올렛이 이 두 번째 총알이 어디있는지 추리해내는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러나 추리적으로는 문제가 많습니다. 해먼드 씨 몸속 총알은 해먼드 씨의 총에서 발사된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법과학의 수준은 많이 부족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앞서 거의 단언하다시피한 정황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는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본격 추리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총알을 아기가 삼켰고, 그것 때문에 질식한 것이었다는 진상은 괜찮았습니다. 해먼드 씨가 아니라 총알이 후두를 막은게 질식사의 원인이 된 거지요. 어디론가 사라진 총알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손 꼽을만한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이 진상 덕분에 별점은 1.5점입니다.

참고로, '퀸의 정원'에서는 A.K 그린 (애나 캐서린 그린)의 "미스터리의 걸작들" 이라는 단편집을 '역사적 중요성'과 '희소성'에만 가치를 부여하고 소개하고 있는데, 바이올렛 스트레인지 시리즈는 아닌 듯 하네요. 가치가 크게 다를거라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급행열차 안의 수수께끼" 

급행열차 안 객실에서 르웰린 부부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권총이 사라진 탓에 자살은 아니었는데, 객실 문은 1인치 정도 열린 채 쐐기로 고정되어 도저히 열 수 없었다. 남아 있던 승무원과 승객의 신분도 모두 확실했으며, 그들이 범인일리 없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살인을 저지르고 열차를 떠났을 텐데, 객차의 앞 쪽 침대칸은 승객과 승무원 모두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고 증언했으며, 뒷 쪽 3등칸에는 아이가 울어 달래러 나온 부부가 있었다. 객실 문 옆 승객이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은 열차를 어떻게 떠났을까?

고전 본격물의 걸작 "통"과 '프렌치 경감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 F.W. 크로포츠의 단편입니다. 

굉장히 복잡한 장치 트릭이 사용되고 있는데,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절반 가까운 내용을 F.W. 크로포츠 본인이 오랜 철도업 종사자라 쓸 수 있었을 상세한 기차 구조 설명에 할애하고 있지만, 열차의 구조와 얼마나 불가능한 범행이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탓입니다. 이런 기차 여행이 흔했던 발표 당시라면 모를까, 기차를 별로 타지도 않는 지금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더욱이 역부족이었어요. 차라리 만화라던가, 최소한 삽화 등으로 트릭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범행이 밝혀지는건 추리의 결과가 아니라 범인의 고백이라는 점에서도 추리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범인이 친구 르웰린에게 연인을 빼앗기자 복수심에 저지른 치정 범죄라 트릭은 알 수 없어도 동기만 확인되면 범인은 충분히 체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경찰은 도대체 뭘 한 건지 잘 모르겠네요.

한마디로 추리물로 보기도 어렵고, 지금 시점에서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던 작품이기에 별점은 1점입니다. '퀸의 정원'에도 소개되지 않았을 정도니 지금 와서 읽을 가치는 별로 없겠지요. "통"이나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살인자" 

서밋 이라는 도시에 찾아온 맥스와 알은 식당에서 식사를 시킨 뒤, 사장 조지와 요리사, 그리고 손님 닉을 협박하며 그들의 목적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올레 앤더슨을 죽이기 위해 온 것이었다. 올레 앤더슨은 식당 단골로, 킬러들은 그를 기다리는데...

미국 현대 문학 거장인 헤밍웨이의 작품인데 추리 소설은 아닙니다. 하드보일드 느낌이 나는 드라마거든요. 킬러가 등장해서 식당 관계자들을 협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추리 애호가에게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불운과 죽음을 의인화하여 드라마로 풀어낸 짤막한 꽁트라 생각됩니다. 2인조 킬러는 식당 관계자에게는 급작스러운 소나기와 다를게 없는 불운, 올레 앤더슨에게는 필연적으로 찾아올 죽음과 같은 존재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닉은 불운과 죽음 모두를 맛 본 뒤, 서밋이라는 도시를 떠날 생각을 하는걸 보면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이단자인 셈이지요.

짤막하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바닥없는 우물" 

전쟁 영웅인 노장 헤이스팅스 경이 고대 아랍 전설이 얽혀있는 오래된 바닥없는 우물 옆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함께 있었던 보일 대위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는 헤이스팅스 부인과 불륜 관계였었다.

브라운 신부 시리즈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어서 놀랐던 체스터튼의 단편입니다.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연작 단편 중 한 편으로, 시리즈 제목 그대로인 '너무 많이 아는 남자' 혼 피셔가 주인공입니다. 중동 어딘가에 있는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지요.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던 작품인데, 그 중에서도 영국 제국 주의를 비판하는 시각, 영국 정부가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는게 인상적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아니라 식민지 공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쓴 이유가 명확해 보였어요. 신부님이야 아무래도 용서와 화해를 권했을테니, 이런 류의 독설에는 적합하지 않았을테지요.

추리적으로도 작가의 명성에 값합니다. 누가 보아도 보일 대위가 범인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게 진상인데, 그 이유와 방법이 설득력있게 설명되기 때문이에요. 특히 헤이스팅스 경이 먼저 보일 대위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가로 산책을 제의했다는게 결정적 단서가 된다는게 좋았어요. 보일이 죽으면 시체를 우물로 던져넣을 생각이었던 거지요. 보일은 범인이 아니기에 시체 앞에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요.
범인이 독을 마신건 순전히 회전식 책꽂이 때문에 찻잔이 뒤바뀌어 일어난 사고라는 점도 재미있었습니다 . 물론 충동적인 범행에 우연에 의해 벌어진 사고라는건 합리적인 본격 추리물로 보기에는 단점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한 솜씨는 과연 거장의 그것이었어요.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시리즈를 더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시카고의 여성 상속인" 

롬니 프링글은 대영 박물관 열람실에서 이상한 남자가 공들여 편지를 쓰는 광경을 본 뒤, 그의 편지 압지를 빼돌렸다. 암호와 같은 압지 문구 해독을 통해 '실링하머'라 자칭하는 남자가 런디 후작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데...

'손다이크 박사'로 잘 알려진, R.A. 오스틴 프리먼의 롬니 프링글 시리즈 단편입니다. '퀸의 정원' 분류에 따르면 엄청난 희귀본이라고 하네요. 롬니 프링글은 도둑이자 사기꾼인 안티 히어로인데, 이 작품에서는 협박자 실링하머의 돈을 빼돌리는 과정이 차분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링하머가 후작을 협박하는게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신문 기사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게 무슨 범죄가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당연히 런디 후작이 형들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작위를 물려받았을 줄 알았는데, 단지 그들이 '자살'했다는 진상도 협박거리가 될 걸로 보이지 않았고요.

롬니 프링글의 작전 역시 별다른게 없어서 실망스럽습니다. 그가 실링하머에게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건 순전히 우연이었고, 마지막에 경찰을 자칭하여 그를 잡아서 돈 지갑을 빼앗는 것도 여러모로 어설퍼보였거든요. 압지의 글귀 해독도 논리가 뒷받침 되어있는 암호 해독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요.
경찰을 자칭하고 후작을 찾아가, 협박자에게는 현금을 주는게 낫겠다는 조언을 하는 장면만 조금 그럴듯 했을 뿐입니다. 

'퀸의 정원'에서 '역서적 가치', '희소성'에 '퀄리티' 가치까지 부여받은 3관왕인데, 동의하기 어렵네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6/07/13

사냥개 탐정 - 이나미 이쓰라 / 신정원 : 별점 3점

사냥개 탐정 - 6점
이나미 이쓰라 지음, 신정원 옮김/손안의책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 이어 읽은 사냥개 탐정 류몬 다쿠 단편집으로 총 4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크게 보면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서의 감상과 동일합니다. 추리적으로는 약하지만 진짜 사나이의 이야기가 엄청나게 멋드러지게 펼쳐진다는 점에서요. 허나 시리즈로 묶여 나온 덕분에, 이 작품만의 매력이 보다 강하게 느껴지는게 좋았습니다.

우선 작품의 핵심인 류몬 다쿠가 정말 멋지게 등장합니다. 하드보일드를 표방했다고는 하지만 전형적인 마초는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 등은 남보다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그런 인물들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겠지만요. 이를 잘 이어받은게 "불야성"의 류젠이일 테고요.
그러나 류몬 다쿠는 다릅니다. 거친 터프가이로 목적을 가로막는 악당들을 파괴하는 강한 겉모습은 고전 하드보일드와 유사하나, 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는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가 떠올랐어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주인공 캐릭터인 셈입니다. 정의와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는, 그러면서도 여성과 아이들에게 한없이 따뜻한 진짜 남자들이요. "셰인"이나 "하이 눈"에서 처럼요. 현 시점에서는 너무 낡아빠진 설정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런 캐릭터들이 너무나 좋습니다!
작가도 이를 인지했는지는 몰라도 서부 영화의 악당들과 비슷한 악역이 눈에 띄기도 합니다. "수르랑, 따라랑", "사이드킥" 두 편이 그러한데, 자비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마초 목장주 악당은 작중 언급된 대로 OK 목장의 악당이 떠오를 정도예요.

추리적으로도 내세울 부분은 많지 않지만 전작보다는 사건성 높은 이야기들이 등장하며, 현실적인 탐정의 활약도 그럴싸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그런대로 만족할 만 합니다. "악역과 비둘기"에서 도시를 관통하는 하천의 존재에서는 나름 추리의 묘미가 느껴지기도 했고요.

작품을 뒷받침하는 섬세한 묘사도 대단한 수준입니다. 류몬 다쿠의 생활 하나하나를 드러내는 디테일한 묘사들 — 사냥, 식사, 대화, 독서 등등등 —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합니다. 사냥 이야기에서 새의 내장을 빼는 묘사는 "산적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것인데 정말 생생하게 묘사해서 만화보다도 더 뇌리에 박히는 느낌이에요. 덕분에 가공의 인물이 실존하는게 아닌가 착각이 들게 만드네요.

하지만 단점도 없지는 않아서, 낭만적인 분위기와 고전 서부극 분위기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기타와 사냥개"에서 의뢰인의 개를 잠깐 돌봐주는 길거리 가수 다마미즈의 가족 이야기, "악역과 비둘기"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덴도의 시노부를 향한 애틋한 연심과 안타까운 결말도 감정 과잉으로 보이고요.

쓸데없는 액션이 많은 것도 조금 아쉽습니다. "기타와 사냥개"에서 취객들을 제압하는 것 처럼요. "사이드킥" 앞부분에서 쓸데없이 야쿠자와 엮이는 전개도 불필요했으며, 중간에 다바타와 실버 고스트가 폭주족에게 쫓기는데 우연히 동승했던 학생이 신호총으로 오토바이를 날려버린다는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소소한 액션의 연속으로 마지막에 류몬이 스가이의 사주를 받은 야쿠자를 날려버리는 멋진 액션이 빛이 바래 버립니다. 딱 한 번만 임팩트 있게 보여주는 것이 좋았을 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재미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한 편, 한 편만 놓고 볼 때는 최고라 하기 어렵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도 마음에 들고 진짜 사나이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게 좋았습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진짜 사나이의 묵직하면서도 서정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덧 1: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운동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1970년대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시대가 중요한 작품은 아니지만 발표 시기는 1990년대인데 의외네요.

덧 2: 류몬 다쿠는 3만 5천 평의 대지주이지만 현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허나 개 한 마리 찾아주는 대가가 50만 엔이라는 거액이라 잘 와닿지는 않더군요. 지금도 거액인데 1970년대에는 더 큰 돈이었겠죠. 게다가 모든 작품에서 보수를 받는 데 성공하는데 이게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면, 먹고사는 데 정말 문제없는 수준일 테고 말이죠. 있는 놈이 더한 느낌이랄까...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수르랑, 따라랑"

영화 기획자이자 예비 감독인 가네마키가 류몬 다쿠를 찾아왔다. 가네마키는 "성야 이야기"라는 영화 연출을 위해 유명 동물 사육자 기타 조켄의 '기타 동물 랜드'를 방문한 후, 기타 조켄의 후처 에미와 사랑받지 못하는 아들 고유키, 살처분을 앞둔 순록 수르랑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고유키가 수르랑과 사라졌다는걸 에미에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냥개는 아니지만 가네마키가 김계화의 시동생이라는 점, 그리고 딱한 사정을 이해한 류몬은 순록을 찾아 나서는데...

살처분을 앞둔 순록과 아버지에게 버림받다시피한 아들이 함께 탈출한다는 설정이 너무 뻔했던 작품. 마지막 엔딩도 작위적입니다.

고유키가 연약한 외모와는 다르게 진짜 사나이였다는 마무리는 작품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며, 세세한 묘사는 빛을 발하나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기타와 사냥개"

류몬은 우메즈의 의뢰를 받아들여 사냥개 그레이를 찾아 나섰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포스터를 활용한 뒤, 택시 운전사에게서 그 개가 길거리 가수 다마미즈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사냥개를 찾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며, 수사 방법도 포스터를 통한 목격자 확보라는 현실적인 것이라 마음에 들었던 소품입니다. 일상계로 볼 수도 있을 정도에요.

하지만 개를 찾는 과정에서의 드라마가 약한 탓에 몇 개의 무리수가 조금 눈에 거슬립니다. 독특한 괴한인 의뢰인 우메즈, 다마미즈에게 시비를 건 취객들에 대한 폭행, 마지막으로 다마미즈의 가족 이야기가 그러했습니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냥 소품 느낌으로 깔끔하게 가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이드킥"

일본 굴지의 서러브레드 경주마 조련소 서일본농장 사장 스가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라진 저먼 셰퍼드를 찾아달라는 의뢰 전화였다. 일단 의뢰를 받아들였지만, 알고보니 진짜 의뢰 내용은 셰퍼드와 함께 사라진 마필 관리사 다바타와 그가 끌고 간 과거의 명마 실버 고스트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3인조이기에 트럭을 이용했으리라 짐작한 류몬은, "세인트 메리의 리본"에서 알게 된 트럭 운전 기사 가와타니에게 수소문을 부탁하는데...

"수르랑, 따라랑"과 유사한 동기, 즉 살처분을 앞둔 가족과도 같은 경주마와 탈주한다는 동기가 등장하합니다. 동기는 뻔하지만 마필 관리사 다바타의 우직함은 매력적으로 묘사됩니다. 갈 데도 마땅치 않고, 연약한 소년보다야 나이는 들었지만 마필 관리사 쪽이 보다 현실적인 건 당연하니까요. 명확한 목적 — 수의사에게 보여주어 말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음을 밝힌다! — 도 분명 존재하고요.

한마디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타인에게 폐를 끼치려고 하지 않는 진정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스가이와 담판을 짓는 류몬 다쿠의 마지막 장면까지 멋집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단 딱 한 가지, 앞서 말씀드렸듯 초·중반에 쓸데없는 액션 장면에 대한 묘사는 불필요했습니다.

"악역과 비둘기"

스트리트 파이터 덴도가 조깅할 때 데리고 다니던 이웃집 사냥개가 도둑맞았다. 의뢰를 받은 류몬 다쿠는 연이어 걸려오는 전화를 통해 사냥개 도난 사건이 잇달아 벌어지고 있으며, 사냥개를 암거래하는 조직적인 범죄가 있다는걸 눈치챘다. 지형적으로 사건 현장 중심을 흐르는 하천을 통해 배로 개를 옮기는 것을 알게 된 류몬은 덴도와 함께 밀거래선을 덮치는데...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비교적 스케일이 큰 작품. 혈통 있는 사냥개를 노리는 거대 조직과의 승부가 그려집니다. 대단치는 않지만 나름의 추리가 펼쳐지는 작품이기도 하죠.

하지만 시리즈의 매력을 잘 살리지는 못했습니다. 이전 시리즈가 자연과 함께하는 산사나이의 이야기라면 이 에피소드는 그냥 전형적인 액션물 느낌이 더 강한 탓입니다. 시노부가 자살한다는 비극적인 엔딩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그냥 덴도와 함께 류몬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생각되네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액션물로서의 재미는 충분하지만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기에는 아쉬웠습니다.

2016/04/05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노버트 데이비스 / 임재서 : 별점 3점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6점 노버트 데이비스 지음, 임재서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개 카스테어스와 함께 하는 탐정 도앤은 다른 관광객들과 멕시코의 관광지 로스알토스로 버스 여행을 떠났다. 미국인 앨드리지를 찾아 모종의 행동을 하기 위해서였다(처음에는 부패 정치인들에게 고용되어 앨드리지가 미국에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후에 앨드리지를 미국에 데려가기 위해 온 것으로 밝혀짐).

그러나 도앤이 앨드리지를 만나는 순간 로스알토스에 대지진이 덮쳐 앨드리지를 포함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중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재벌 상속녀 패트리셔가 살해되었다는게 밝혀진 뒤, 범죄자 보티스트 보노파일을 체포하기 위해 마을을 감시하던 군인 페로나 대위가 마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다른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마포 김사장으로 유명한 북스피어 김홍민씨의 홍보글을 통해 알게 된 책입니다. 김사장의 홍보력이야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에 대한 소개가 유독 다른 책들보다도 호기심을 자극했던 덕분입니다. "하드보일드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도 노버트 데이비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노버트 데이비스의 열렬한 팬이었다."라고 소개했는데, 하드보일드의 큰 형님이자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는 무게 있는 작품같이 느껴져서 도저히 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나 실상은 정 반대입니다. 기대와 예상을 이렇게까지 뒤집은 작품은 기억에도 몇 개 없지 싶을 정도로 말이죠. 예상했던 묵직함과는 몇만 광년 떨어져 있는 작품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유쾌하고 시끌벅적합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극단적이기 짝이 없고요. "스쿠비 두"가 연상되는, 거대한 그레이트 데인 카스테어스를 끌고 다니는 탐정 도앤부터가 그러합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고문서를 통해 과거 개척시대 영웅 페로나 부관에게 푹 빠진 재닛은 한류 스타에 빠진 일본 아줌마와 다를 게 없고요. 여기에 파리 끈끈이를 발명한 부자의 상속녀 패트리셔 밴 오스델 일행,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덩어리 아들 모티머를 중심으로 한 배관 업자 헨쇼 가족, 근거 없는 엘리트 의식과 자신감에 절어있는 멕시코 군인 페로나 대위(개척시대 영웅의 직계 후손!) 등 모든 캐릭터가 좋게 말하면 한 개성하고, 나쁘게 말하면 만화적이라고 할 정도로 화려합니다.

이러한 과장된 캐릭터들이 멕시코 휴양지 로스알토스에서 대지진, 반군과 엮인 범죄자와 은닉 무기 등의 스케일 큰 사건에 휩쓸려 좌충우돌 소동을 벌인다는 내용은 옛날 코미디 영화 시리즈 "무슨무슨 대소동", 아니면 주성치 영화를 떠오르게도 합니다. J.M. 메르의 "개를 돌봐줘"와도 좀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사건이 얽혀 있는 블랙 코미디라는 점에서는요.

그러나 단순한 블랙 코미디에 그치지도 않습니다. 일어나는 사건들 모두 이치에 합당할 뿐더러 앞뒤도 잘 맞고, 복선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재닛이 탐독한 페로나 부관의 일기와 마을의 은닉처가 연결된다는 설정이 좋은 예입니다. 김사장의 소갯글이 아주 허언은 아닌 셈입니다.
그러고보니 무언가에 푹 빠져 있는 오타쿠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사건 해결에 기여하게 된다!는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다른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추리적으로 상당한 수준이며, 탐정 도앤 역시 만만치 않는 명탐정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대지진의 와중에 상속녀 패트리샤가 사망한 사건이 사실은 살인 사건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밝혀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을 적절히 이용한 것도 좋지만, 순식간에 확인한 현장의 유류물을 나중에 진상을 밝힐 때 적절히 써먹기도 하니까요. (그녀의 가방은 어디로 간 걸까요?) 
유력한 용의자 그렉의 시체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단순한 부자의 변덕으로 보인 패트리샤의 방문 목적을 셜록 홈즈 식으로 해석해 내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관광객들 모두 화가 프레딜립 때문에 로스알토스를 찾지만 패트리샤만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게 이유인데, 꽤나 그럴듯 했습니다.
복잡한 사건을 한방에 해결하는 능력 역시 탁월합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지만 결국 보티스트 보노파일을 죽이고, 그를 돌봐주던 흑막이 카야오 대령이라는 것도 밝히고, 패트리샤 살인사건의 진범과 실종된 그렉의 행방까지 한방에 해결해 버리니까요. 명탐정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추리쇼도 한껏 펼쳐 보이면서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작품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확실한 하드보일드이기도 합니다. 하드보일드의 핵심이 탐정이라면 이 작품 역시 경쟁작들에 뒤질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요. 제목처럼 진실은 말한 적도 없고 – "탐정은 그럴 수만 있다면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노상 거짓말만 늘어놓습니다. 비즈니스죠." – 모든 것을 돈으로 바라보는 나쁜 놈인데다가 명탐정이라는 점에서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 죽이는 것 역시 서슴치 않기까지 합니다. 작중 어맨다 트레이시의 말을 빌자면 "이자는 교활하거든. 아가리 침 뱉는 것보다 쉽게 죽일 사람이야."인 거죠. 아, 당연히 말발도 아주 좋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에 에이스 벤츄라를 섞은 느낌이랄까요... (아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오버스러운 설정, 작위적인 요소 때문에 조금 감점하기는 하지만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유쾌하며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덕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비트겐슈타인이 좋아한 이유는 킬링 타임용으로 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은 넓고, 모르는 작가도 많고, 재미있는 작품도 아직 이렇게나 많다니 너무나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신선한 작품이 많이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묵직한 고전 하드보일드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실망할 수 있다는 점 꼭 참고하세요.

2014/01/20

몰타의 매 - 대실 해밋 / 김우열 : 별점 4점

몰타의 매 - 8점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열린책들

샘 스페이드의 탐정 사무소로 원덜리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 서스비라는 남자와 도주했기 때문에, 서스비를 찾아내 여동생을 되찾고 싶다는 의뢰였다. 동료 탐정인 아처가 의뢰를 맡고 서스비를 미행하지만, 밤사이 변사체로 발견된다. 더군다나 그가 미행하던 서스비까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상황. 경찰은 용의자로 스페이드를 지목하고, 그는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책소개에서 인용) 

대실 해밋의 샘 스페이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전 하드보일드 추리 장편. 1930년 발표되어, 하드보일드의 전형을 구축한 작품입니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읽어도 충분한 가치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는게 놀랍습니다. 지니고 있는 명성이 쉽게 이해가 될 정도에요.

이 작품의 가장 큰 가치는 뭐니뭐니해도 시대를 앞서간 주인공 샘 스페이드입니다. 마초이자 상남자에다가 나쁜 남자이기까지 하거든요. 파트너의 아내를 유혹해서 불륜을 저지르고, 쿨함이라고는 전혀없는 돈귀신으로 도움을 얻으려고 찾아온 여자에게서도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500달러를 악착같이 받아냅니다. 거기에 더해 총으로 위협하는 악당들도 맨손으로 제압하는 완력, 경찰에게도 굴하지 않고 농담과 비야냥으로 받아치는 반골정신도 겸한, 그야말로 안티 히어로의 표본같은 인물이에요. 샘 스페이드를 설명하는 묘사도 탁월합니다. 얼굴에 여러개의 V가 표시된다는 첫 등장 시의 묘사부터 독자를 사로잡지요.
등장 이후 단 한번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팜므파탈 오쇼네시 역시 추리 소설사에 길이 남을 악녀로, 스페이드와 함께 완벽한 컴비플레이를 보여줍니다. 

역사적 유물인 "몰타의 매"을 소재로 녹여낸 참신함, 그리고 "몰타의 매"를 찾는 보물찾기라는 내용은 이후의 하드보일드 작품에서 보기 드물었기에 오히려 돋보입니다. 몰타의 매의 유래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나름 그럴듯 하기도 했고요. 

다른 하드보일드 작품들 같이 명대사가 난무하는, 그런 문학적 향취는 별로 없지만 깔끔하고 간결한 문장도 인상적입니다. 이야기 중간에 스페이드가 이야기한 일화 - 한 사내가 우연히 죽을뻔한 뒤 아예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종적을 감춘다 - 는 뭔가 울림을 전해주기까지 합니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될만한 내공은 확실히 느껴졌어요. 

하지만 추리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좀 애매하다는건 단점입니다. 하드보일드 추리물이 별다른 트릭이 없는 장르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트릭이고 뭐고 정말 전혀 없는 탓입니다. 유일한 수수께끼는 서스비가 매 조각상을 어디에 감추었는지? 뿐인데, 이건 오쇼네시의 뒤를 쫓는다면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고 설명되기 때문에 스페이드가 활약할 여지가 없어요. 실제로 거트먼과 카이로는 스페이드의 도움 없이 매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했지요. 

전개도 속도감있고 빨라 독자를 몰입시키지만, 세세한 부분에서의 설득력은 부족합니다. 카이로가 스페이드를 찾아온 이유, 거트먼이 스페이드를 고용하려는 이유 등 스페이드가 사건에 엮이는 과정 모두가 그러합니다. 오쇼네시가 스페이드를 고용했더라도, 생판 관계없는 사람을 끌어들이느니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그녀를 미행만 해도 충분했을테니까요. 하긴 오쇼네시가 서스비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스페이드를 끌어들인것 부터 설득력이 없으니... 아처를 쏴버린 것처럼 그녀 스스로 서스비를 쏴버리는게 제일 깔끔했을텐데 왜 이렇게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었을까요? 어차피 경찰도 그녀의 존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서스비가 과거 도박조직에 연루된 원한으로 살해된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는데 말이죠.
마지막에 스페이드가 경찰에 오쇼네시를 넘기는 것도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스페이드가 그녀를 넘기지 않으면 바로 체포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희생양은 거트먼 일당으로 충분했을것 같은데, 한명 죽이나 두명 죽이나....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추천작. 단점은 조금 있으나 사소할 뿐 이 바닥의 영원한 고전, 원전으로서의 가치와 재미를 유지하고 있는 보기드문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아직 읽지 못하신 모든 분들께 권해드립니다.

덧 1 : 오쇼네시에게 교수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전기의자를 쓰지 않았었나요? 이 당시 하드보일드에서 흔히 이야기되는건 "싱싱 (형무소)"과 "전기의자" 인데 이 작품은 예외적이라 의아했습니다.

덧 2 : 샘 스페이드의 파트너가 마일스 "아처"라는 것이 좀 특이했습니다. 하드보일드 3대 탐정 중 한명인 "루 아처"가 바로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묘한 인연인데 로스 맥도널드가 루 아처 창작 시 이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 좀 궁금하네요.

2011/09/10

브릭 (Brick) - 리안 존슨 : 별점 3.5점

브랜든에게 전 여자친구 에밀리가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브랜든은 그녀를 돕는데 실패했고, 그녀의 시체만 발견하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로 결심한 브랜든은 에밀리의 최근 동향을 확인했다. 그리고 에밀리가 친해지려고 노력했던 학교 최상류층 브래디쉬와 로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는데...

고등학교를 무대로 한 정통 미국식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스릴러물입니다. 예상보다도 너무나 완벽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일단 주인공 브랜든부터가 그러합니다.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가 현대 고등학교에 환생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여주거든요.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는 사교성, 몸으로 부딪혀 성과를 내는 행동력, 힘의 균형을 잘 이용하여 줄타기하는 솜씨 등이 딱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탐정 그 자체입니다. "500일의 썸머"에서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조셉 고든 레빗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독특한 이미지의 마약 조직 보스, 힘만 잘 쓰는 어깨 캐릭터, 전형적인 팜므파탈 등의 친숙한 캐릭터들도 하드보일드스럽게 적절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야기 역시 전형적인 하드보일드입니다.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되어 주인공이 여러 세력 간의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지만, 복잡한 관계를 하나로 정리하며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전개를 보여주니까요.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의 앞뒤가 딱 들어맞고 복선과 단서들이 적절히 제공된다는 점, 그리고 하드보일드의 단점인 '운에 의지하는 과정이 많다'는 점도 똑같습니다.

때문에 "요새 누구랑 점심 먹는 줄 알아?" "점심은 어려워..." 같은 고등학생다운 대사 외에는, 딱히 고등학교가 무대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어른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세계관은 좋았지만, 그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했어요. 이왕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면, 살인과 마약 밀매 대신 조금 더 일상적인 범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게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사물함을 터는 도둑으로 몰린 여자친구를 구하기 위해 주인공이 학교 내 조직 간 암투에 뛰어든다거나, 조직적인 컨닝으로 내신 등급에 영향을 받게 된 여자친구를 위해 사건 해결에 나선다거나... 이게 더 괜찮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하드보일드 영화로 보기 드문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고도 하는데,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스토리라는 점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네요.